미정이가 무언가 체념한 듯 말이 없자 기다리던 나는 겨울 바람이 차가워 차에 먼저 탔고 그 애가 차에 타기를 기다렸는데 미정이는 탈 생각이 없는 듯 먼 곳을 응시하며 서 있었다. 내 기억으론 밤 10시가 넘은 시간이었고 공설운동장에서 면소재지까지 걸어 가려면 15분은 넘게 걸리는 터라 추운 겨울날 외투도 걸치지 않은 그 애를 두고 올 수 없었던 나는 그 애의 손을 잡고 억지로 차에 태웠는데 미정이는 울고 있는 걸 보이기 싫었던지 내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나는 미정이를 태우고 5분 정도 운전해서 다방 근처로 간 후 차를 세우고 그애가 내리기를 기다렸다. 고개를 숙이고 울고 있다가 울음이 멈췄는지 창 밖을 바라보던 미정이는 내리지 않고 앉아 있다가 울먹이며 내게 물었다.
"처음부터 이런 거였지? 그냥 즐기다가 싫증나면 버릴려고..."
정답이다.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약간 차이가 있겠지만 가감하지 않는다면 그게 정답이다.
"..."
난 아무말 없이 잠시 있다가 그 애에게 이야기 했다.
"내릴래?.. 나 가야돼."
"대답해줘... 내가 묻는 말에 아직 대답 안했잖아.."
"뭐? 처음부터 이런 거 였냐고?... 뭐 그런 걸 물어? 티켓 끊어서 놀다가 마음 맞으면 잘 수도 있는 거 아니야?
티켓 끊는 남자랑 다 사귀고 애인 하고 그러다 결혼하고 그러는 거야? 진짜 어이 없는 건 나야.. 실없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내려.."
내가 냉정하고 차갑게 이야기하자 미정이는 곧 차에서 내렸다.
그 일이 있은 후 어느 정도 정리가 된 듯 시간이 흘렀는데 미정이가 며칠 후에 문자를 보냈다.
[오빠 할 말 있으니까 좀 만나]
그런 내용의 문자가 2~3번 왔지만 난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미정이가 죽기 전날 오후에 그 애는 파출소에 차 배달을 왔다가 문 밖에서 핸드폰으로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던 나와 마주쳤었다. 난 외면하고 통화를 계속 했지만 그 애는 들어가지 않고 통화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다가 내게 말했다.
"오빠 할 말이 있어.. 오늘 밤에 다방으로 좀 올 수 있어?"
보통 밤 10시 쯤 되면 다방에 미정이 외에 아무도 없을 때가 많다. 같이 있는 아가씨들이 모두 외박을 나가거나
숙소로 가서 다방이 비게 되면 내가 가서 같이 시간을 보내곤 했었는데...
"나 오늘 근무야.. 시간 없어."
"그럼 내일은? 내일도 밤에 나 혼자 있을 것 같은데..."
그 때 파출소 안에서 정선호 경장이 문을 열고 나오면서 그 모습을 보고 웃으면서 농담을 던진다.
"야! 너는 배달 왔으면 빨리 들어올 일이지 거기서 뭐하냐? 조순경이랑 사귀는 사이야?"
미정이는 정경장 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고 내게 다시 물었다.
"응? 오빠? 안돼? 시간좀 내줘.. 꼭 할말이 있어서 그래.."
난 그 소리를 정경장이 들어봐야 좋을 일이 없으니 아무일 아니라는 듯 정경장 쪽으로 걸어가면서 이야기 했다.
"형님은 사귀긴 누가.. 하하 김양이 차 가지고 왔으니 밖에서 있지 말고 들어가자고 해서..
김양아! 알았어.. 들어가자 들어가.. 나 챙기는 사람은 너 밖에 없다.. 크크"
대충 우야무야 그 순간을 모면한 후에 다음 날 비번인 나는 다방에 가지 않았다. 아니 갈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당시 동기 놈이랑 방을 얻어 간단한 가재도구만 가져다 놓고 자취를 하던 나는 그날 동네 비디오가게에서 비디오 몇 편을 빌려다 놓고 보면서 시간을 때우고 있었는데 밤 10시가 좀 지났을 무렵 미정이에게 문자가 왔다.
[오빠. 어디야? 오기로 했잖아..]
그 문자를 보고 그냥 별 생각없이 핸드폰을 밀어 두고 영화를 보고 있었는데 잠시 후에 미정이에게 전화가 왔다.
핸드폰 진동 소리를 듣고 전화를 받을까 말까 고민하다 받지 않았다. 그 후 몇 번이나 전화가 왔을까? 한 다섯 번쯤진동이 울렸을 때 난 핸드폰 전원을 꺼버렸다.
그리고 아침에 출근했는데 미정이가 자살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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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미와 정사를 나눈 지 일주일 째 되는 날 다시 아들을 데리고 오피스텔로 갔다. 그녀는 늘 듣던 상냥한 목소리로 인사를 했지만 나와 눈이 마주치는 건 어색한 지 시선을 피하는 눈치였는데 난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인사를 나눈 후 수업이 시작되자 거실에서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자연스럽게 지난 주에 있었던 일이 기억이 났고 김유미의 벗은 몸과 숱이 많은 그 곳이 떠오르자
내 물건이 저절로 커지기 시작했다. 오늘 그녀는 검정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지만 볼륨감 있는 몸매를 감추기에는 부족해 보이고...
문득 오늘 어떻게 기회를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가자 난 바깥으로 나왔다.
주머니에서 담배를 찾았으나 차에 두고 와서 차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골목길에 서서 담배를 피고 있으려니 빨간 스포츠카를 탄 그 녀석... 그 녀석과 김유미가 오피스텔로 들어가는 모습이 기억났다.
나와 김유미 사이에는 그 젊은 놈이 있다. 그걸 잊고 있었구나... 물론 가끔씩이라도 그녀를 안을 수 있다면 내가 굳이 상관할 일은 아니지만 단발머리와도 관계가 있는 그 놈의 정체가 궁금했다. 단발머리는 원 나잇 상대인 나와
인연을 이어가고 싶지야 않겠지만 난 너무나 맛있는 음식을 먹을 기회를 또 가지고 싶은데 그 것 역시 그 놈이 누군지 알고 나서야 가능한 일이니까..
김유미에게 그 놈이 누군지 물어봐야 하나?
그건 무리일지 모른다. 김유미와 그 놈의 관계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면, 김유미 에게 그걸 캐내려다가 역효과가 생길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그 날 밤 차량 번호를 적어놨다면 그 놈이 누군지 정도는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었는데 아까운 기회를 놓친 셈...
수업이 끝날 무렵 들어와 앉아 있다가 개인 면담 시간에 김유미와 마주 앉았다.
"성현이가 다른 애들에 비해 블록을 만드는 시간이 약간 더 걸리는데 좀 산만한 것 같아요. 수업 시간에 집중을 하는 시간보다 장난치는 시간이 더 많아요. 처음엔 안 그랬는데..."
"응? 장난을 친다고? 아이들하고 친해졌나보네."
"너무 심해서 다른 아이들까지 방해가 될 때도 있어요."
"알았어. 이야기 해 볼게."
".. 예.. 그럼.."
"저기... 수요일 저녁에 문자할게. 좀 볼 수 있을까?"
"아직 몰라요. 그 때 가봐야 알 수 있어요."
"알았어. 일단 그날 연락할게."
가장 힘든 건 물론 처음이지만 두번째 만남 역시 그다지 쉽지는 않다. 그녀는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하지만 그녀 입장에서 내가 접근하는 것이 싫다고 하더라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뚜렷하지 않은데... 나를 만나는 것이 그녀의 삶을 흔드는 것인지 아니면 흔들릴지 모르는 삶을 원위치 시키는 것인지는 김유미 자신이 판단할 문제니까.
수요일 오후 김유미에게 문자를 했다.
[저녁 때 시간 낼 수 있어?]
[오늘은 안돼요.. 모임이 있어요]
[나랑 만나기 싫다는 거야. 아님 어쩔 수 없이 오늘만 안된다는 거야?]
[오늘은 어쨌든 안돼요. 그럼 금요일 저녁에 시간 내볼게요]
시간을 내본다는 이야기에 내 마음속에 있던 불안감이 날아가 버렸다. 금요일이든 일주일 후든 그녀가 시간을 낸다면 내 입장에서 급할 게 없다.
[금요일? 몇시?]
[6시에 수업이 끝나요. 여기로 올 수 있어요?]
[퇴근하고 바로 출발하면 거기에 6시 20분쯤 도착할거야]
[그럼 그때 봐요]
[응]
모임? 모임이 있었다면 토요일에 내가 물어봤을 때 왜 이야기 안했지? 갑자기 생긴 모임인가? 혹시 그 놈과 만날 지도 모르겠는데...
빨간 스포츠카를 탄 놈을 찾기 위해 김유미를 계속 미행해볼까 하는 생각까지 하고 있던 나는 퇴근하자마자 오피스텔로 차를 몰았다. 도착했을 때 오피스텔에 불이 켜져 있었는데 난 창가에 붙어 서서 누가 있는 지를 살폈다. 김유미 외엔 아무도 보이지 않았고 그녀는 잠시 후에 화장실에 들어가서 한참 후에 나오더니 곧 불을 끄고 밖으로 나왔다. 난 그녀가 빠르게 큰 길쪽으로 걸어가는 것을 보고 차를 타고 쫓아야 하는 지 걸어서 따라가야 하는 지 고민하다 그냥 걸어서 그녀의 뒤를 밟기 시작했다.
김유미는 검은 색 가죽 반코트와 같은 색 부츠를 신고 무릎 위까지 오는 짧은 치마 밑으로 레깅스를 입고 있었는데 긴 생머리와 함께 잘 어울려서 실제 나이보다 열살은 젊어 보였다. 5분쯤 걸어서 우체국이 있는 사거리 신한은행 앞에 멈춘 그녀가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듯 하더니 차도쪽으로 붙어 선다. 택시를 잡으려는 듯 보였다.
그녀가 택시를 잡으면 나 역시 택시를 잡고 쫓아갈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 주시하고 있었는데 빨간색 스포츠카가
그녀 앞으로 섰다. 그놈이다. 난 그녀가 타자마자 재빠르게 차가 있는 쪽으로 걸어 나와서 차 번호를 받아 적었다.
차 뒤쪽에 선명한 벤츠 마크.. 젊은 녀석이 능력도 좋네..
정확하게 약속을 했던 건 아니지만 김유미는 그 놈과 만나기 위해 나와의 만남을 금요일로 미룬 셈이다. 저 녀석에게 나와의 정사에 대해 이야기 할까? 그럼 그 이야기를 들은 그 놈이 의외의 해결 방식을 들고 나올 수도 있고 내가 귀찮아 질 가능성이 생긴다. 남편에게는 절대 하지 못할 이야기지만 애인에게는 할 수도 있으니...
어쩌면 금요일 저녁 김유미의 오피스텔에서 달갑지 않은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조심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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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오후 무렵 경찰을 그만두기 전에 같이 근무했던 김배영씨 한테 연락을 했다.
"잘 지내?"
"어! 나야 잘 지내지.. 통 연락 없더니 반갑네.. 애들은 잘 커?"
"응.. 배영씨는 진급안해?"
"위 달려면 아직 멀었어. 책은 보기 싫고.. 크크.. 그런데 뭔일이야?"
"우리 처남이 이사를 해야하는 데 아파트 밑에 사다리차 댈 자리에 어떤 차가 주차를 해놔서 댈 수가 없대. 핸드폰 번호는 적혀 있는데 전화도 안받고... 관리실에 가서 물어봐도 등록이 안되있는 차량이라는데.. 아파트 주민 중에 관리실에 등록안해둔 차량도 있을 수가 있으니.. 차번호 불러 줄께. 몇동 몇호 사는 놈인지 좀 알아봐줘."
"잠깐만.. 오늘 내가 근무인 줄 어떻게 알고 전화했을까? 불러봐. 내가 5분 있다 전화해줄께."
"응.. 26머 0000.. 내가 술 한잔 살께.. 다음 주 어때?"
"그래 잠깐만 기다려봐."
잠시 후 배영씨에게 전화가 왔다.
"석훈씨.. 그거 서울차고 돈 많은 놈이야. 벤츠네. 거기 아닌데.."
"응. 빨간색 스포츠카야. 나이가 몇살인데 이런 차를 모는 건지 참."
"82년생이야. 30살인가?"
"차주 이름은?"
"이유성. 서울 광진구 자양동이 차적지로 되 있는데..."
"어떻게 하지? 기다려야 되나? 그 많은 짐을 엘리베이터로 나를 수도 없고.. 참 난감하네.. 자양동 어디야?"
"현대 2차 아파트 204동... 왜? 찾아가보려고?"
"여기서 1시간 거리니까 가볼까? 그런데 어떻게 찾아 왔냐고 하면 뭐라고 하지?"
"찾아가는 건 좀 그래.. 개인정보 알려주다 걸리면 징계야 징계..."
"차가 여기 있으니 집에 가도 없을꺼야.. 여기 누굴 만나러 왔겠지.. 할 수 없네.. 핸드폰 계속 해보는 수 밖에."
"그래.. 그러다 받을거야.."
"응 다음 주에 전화할게.. 한 번 보게.. 수고.."
"그래.. "
자양동 현대 2차 아파트 204동이라.. 그 정도만 알아도 된다. 찾아가서 고지서 뒤져보면 이유성의 집 주소 정도는 알 수 있을테니까... 하지만 아직은 그 곳에 가야할 뚜렷한 이유는 없었다. 이유성과 단발머리가 내연의 관계라고 하더라도 그 놈 집에 온다는 보장이 없고 아무런 보장이 없는 일에 거기 가서 잠복하고 시간을 투자할 수는 없는 일이다. 만약 단발머리를 만난다고 하더라도 그 여자가 그 날밤 처럼 내 연인이 되줄 가능성은 많지 않고... 한가지 방법이 있다면 김유미 쪽에서 시작하는 것인데...
난 김유미를 품는 것만 해도 불만이 없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었고 그 걸 알고 싶었다. 김유미와 이유성, 단발머리 사이의 관계를 아는 것은 나와 김유미의 관계를 지속하는 데도, 그리고 막연하나마 내가 단발머리에게 다가가는 것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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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퇴근 후 김유미의 오피스텔로 갔다. 난 혹시 이유성과 만나게 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어서 긴장하고 있었다. 김유미와 내연의 관계이고 수요일 그녀와 만났다면... 그래서 그 녀석에게 나와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 했다면 이유성 입장에서 김유미와 나와의 만남을 그냥 넘기지는 않을 터이고 남자들의 해결방식이라는 게 단순할 때가 많으니까 무슨 일이 생길 지도 모른다.
오피스텔에 불이 켜져 있는 걸 확인하고 슬며시 안을 살폈다. 며칠 전에 입었던 검은색 원피스를 입은 김유미가 있었고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행동을 잠깐 보고 있었는데 책을 읽고 있었고 별다르게 특이한 점은 발견할 수 없었던 나는 현관으로 가서 벨을 눌렀다.
김유미가 문을 열었고 날 슬며시 쳐다보더니 뒤로 물러났는데 난 문을 밀고 들어가 그녀에게 말했다.
"저녁 안 먹었지? 시간 되면 나가서 저녁 같이 먹자."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아요. 애아빠 오는 시간에 가서 저녁을 차려야 되요."
"몇 시에 오지?"
"7시 반에서 8시 쯤이요."
"그럼 한 시간 정도 밖에 시간이 없네."
"..."
난 거실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커피 한 잔 줄래?"
김유미가 말 없이 주방으로 가서 종이컵에 커피를 탄 후 내밀었고 난 조용히 5분 정도 커피를 마시며 나와 조금 떨어진 쇼파에 팔짱을 낀채 앉아 있는 그녀의 옆 모습을 응시했다. 내 시선을 의식한 탓인지 그녀는 잡지 책을 펴고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고 난 그 모습을 계속해서 보고 있었다.
다시 5분 정도 시간이 흐른 후에 그녀가 거실에 있는 시계를 보기 위해 고개를 들었을 때 난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과 수업을 받는 방에 있는 불을 껐다. 그리고 그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던 그녀의 앞으로 가서 옷을 벗기 시작했다.
김유미는 옷을 벗는 나를 보고 있기가 그랬던지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난 양말까지 모두 벗어 버린 후 그녀가 앉아 있는 쇼파로 가서 쇼파 위에 그녀를 눕혔다. 그녀의 숨소리가 거칠어 졌다.
나는 미정이를 태우고 5분 정도 운전해서 다방 근처로 간 후 차를 세우고 그애가 내리기를 기다렸다. 고개를 숙이고 울고 있다가 울음이 멈췄는지 창 밖을 바라보던 미정이는 내리지 않고 앉아 있다가 울먹이며 내게 물었다.
"처음부터 이런 거였지? 그냥 즐기다가 싫증나면 버릴려고..."
정답이다.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약간 차이가 있겠지만 가감하지 않는다면 그게 정답이다.
"..."
난 아무말 없이 잠시 있다가 그 애에게 이야기 했다.
"내릴래?.. 나 가야돼."
"대답해줘... 내가 묻는 말에 아직 대답 안했잖아.."
"뭐? 처음부터 이런 거 였냐고?... 뭐 그런 걸 물어? 티켓 끊어서 놀다가 마음 맞으면 잘 수도 있는 거 아니야?
티켓 끊는 남자랑 다 사귀고 애인 하고 그러다 결혼하고 그러는 거야? 진짜 어이 없는 건 나야.. 실없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내려.."
내가 냉정하고 차갑게 이야기하자 미정이는 곧 차에서 내렸다.
그 일이 있은 후 어느 정도 정리가 된 듯 시간이 흘렀는데 미정이가 며칠 후에 문자를 보냈다.
[오빠 할 말 있으니까 좀 만나]
그런 내용의 문자가 2~3번 왔지만 난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미정이가 죽기 전날 오후에 그 애는 파출소에 차 배달을 왔다가 문 밖에서 핸드폰으로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던 나와 마주쳤었다. 난 외면하고 통화를 계속 했지만 그 애는 들어가지 않고 통화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다가 내게 말했다.
"오빠 할 말이 있어.. 오늘 밤에 다방으로 좀 올 수 있어?"
보통 밤 10시 쯤 되면 다방에 미정이 외에 아무도 없을 때가 많다. 같이 있는 아가씨들이 모두 외박을 나가거나
숙소로 가서 다방이 비게 되면 내가 가서 같이 시간을 보내곤 했었는데...
"나 오늘 근무야.. 시간 없어."
"그럼 내일은? 내일도 밤에 나 혼자 있을 것 같은데..."
그 때 파출소 안에서 정선호 경장이 문을 열고 나오면서 그 모습을 보고 웃으면서 농담을 던진다.
"야! 너는 배달 왔으면 빨리 들어올 일이지 거기서 뭐하냐? 조순경이랑 사귀는 사이야?"
미정이는 정경장 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고 내게 다시 물었다.
"응? 오빠? 안돼? 시간좀 내줘.. 꼭 할말이 있어서 그래.."
난 그 소리를 정경장이 들어봐야 좋을 일이 없으니 아무일 아니라는 듯 정경장 쪽으로 걸어가면서 이야기 했다.
"형님은 사귀긴 누가.. 하하 김양이 차 가지고 왔으니 밖에서 있지 말고 들어가자고 해서..
김양아! 알았어.. 들어가자 들어가.. 나 챙기는 사람은 너 밖에 없다.. 크크"
대충 우야무야 그 순간을 모면한 후에 다음 날 비번인 나는 다방에 가지 않았다. 아니 갈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당시 동기 놈이랑 방을 얻어 간단한 가재도구만 가져다 놓고 자취를 하던 나는 그날 동네 비디오가게에서 비디오 몇 편을 빌려다 놓고 보면서 시간을 때우고 있었는데 밤 10시가 좀 지났을 무렵 미정이에게 문자가 왔다.
[오빠. 어디야? 오기로 했잖아..]
그 문자를 보고 그냥 별 생각없이 핸드폰을 밀어 두고 영화를 보고 있었는데 잠시 후에 미정이에게 전화가 왔다.
핸드폰 진동 소리를 듣고 전화를 받을까 말까 고민하다 받지 않았다. 그 후 몇 번이나 전화가 왔을까? 한 다섯 번쯤진동이 울렸을 때 난 핸드폰 전원을 꺼버렸다.
그리고 아침에 출근했는데 미정이가 자살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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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미와 정사를 나눈 지 일주일 째 되는 날 다시 아들을 데리고 오피스텔로 갔다. 그녀는 늘 듣던 상냥한 목소리로 인사를 했지만 나와 눈이 마주치는 건 어색한 지 시선을 피하는 눈치였는데 난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인사를 나눈 후 수업이 시작되자 거실에서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자연스럽게 지난 주에 있었던 일이 기억이 났고 김유미의 벗은 몸과 숱이 많은 그 곳이 떠오르자
내 물건이 저절로 커지기 시작했다. 오늘 그녀는 검정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지만 볼륨감 있는 몸매를 감추기에는 부족해 보이고...
문득 오늘 어떻게 기회를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가자 난 바깥으로 나왔다.
주머니에서 담배를 찾았으나 차에 두고 와서 차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골목길에 서서 담배를 피고 있으려니 빨간 스포츠카를 탄 그 녀석... 그 녀석과 김유미가 오피스텔로 들어가는 모습이 기억났다.
나와 김유미 사이에는 그 젊은 놈이 있다. 그걸 잊고 있었구나... 물론 가끔씩이라도 그녀를 안을 수 있다면 내가 굳이 상관할 일은 아니지만 단발머리와도 관계가 있는 그 놈의 정체가 궁금했다. 단발머리는 원 나잇 상대인 나와
인연을 이어가고 싶지야 않겠지만 난 너무나 맛있는 음식을 먹을 기회를 또 가지고 싶은데 그 것 역시 그 놈이 누군지 알고 나서야 가능한 일이니까..
김유미에게 그 놈이 누군지 물어봐야 하나?
그건 무리일지 모른다. 김유미와 그 놈의 관계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면, 김유미 에게 그걸 캐내려다가 역효과가 생길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그 날 밤 차량 번호를 적어놨다면 그 놈이 누군지 정도는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었는데 아까운 기회를 놓친 셈...
수업이 끝날 무렵 들어와 앉아 있다가 개인 면담 시간에 김유미와 마주 앉았다.
"성현이가 다른 애들에 비해 블록을 만드는 시간이 약간 더 걸리는데 좀 산만한 것 같아요. 수업 시간에 집중을 하는 시간보다 장난치는 시간이 더 많아요. 처음엔 안 그랬는데..."
"응? 장난을 친다고? 아이들하고 친해졌나보네."
"너무 심해서 다른 아이들까지 방해가 될 때도 있어요."
"알았어. 이야기 해 볼게."
".. 예.. 그럼.."
"저기... 수요일 저녁에 문자할게. 좀 볼 수 있을까?"
"아직 몰라요. 그 때 가봐야 알 수 있어요."
"알았어. 일단 그날 연락할게."
가장 힘든 건 물론 처음이지만 두번째 만남 역시 그다지 쉽지는 않다. 그녀는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하지만 그녀 입장에서 내가 접근하는 것이 싫다고 하더라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뚜렷하지 않은데... 나를 만나는 것이 그녀의 삶을 흔드는 것인지 아니면 흔들릴지 모르는 삶을 원위치 시키는 것인지는 김유미 자신이 판단할 문제니까.
수요일 오후 김유미에게 문자를 했다.
[저녁 때 시간 낼 수 있어?]
[오늘은 안돼요.. 모임이 있어요]
[나랑 만나기 싫다는 거야. 아님 어쩔 수 없이 오늘만 안된다는 거야?]
[오늘은 어쨌든 안돼요. 그럼 금요일 저녁에 시간 내볼게요]
시간을 내본다는 이야기에 내 마음속에 있던 불안감이 날아가 버렸다. 금요일이든 일주일 후든 그녀가 시간을 낸다면 내 입장에서 급할 게 없다.
[금요일? 몇시?]
[6시에 수업이 끝나요. 여기로 올 수 있어요?]
[퇴근하고 바로 출발하면 거기에 6시 20분쯤 도착할거야]
[그럼 그때 봐요]
[응]
모임? 모임이 있었다면 토요일에 내가 물어봤을 때 왜 이야기 안했지? 갑자기 생긴 모임인가? 혹시 그 놈과 만날 지도 모르겠는데...
빨간 스포츠카를 탄 놈을 찾기 위해 김유미를 계속 미행해볼까 하는 생각까지 하고 있던 나는 퇴근하자마자 오피스텔로 차를 몰았다. 도착했을 때 오피스텔에 불이 켜져 있었는데 난 창가에 붙어 서서 누가 있는 지를 살폈다. 김유미 외엔 아무도 보이지 않았고 그녀는 잠시 후에 화장실에 들어가서 한참 후에 나오더니 곧 불을 끄고 밖으로 나왔다. 난 그녀가 빠르게 큰 길쪽으로 걸어가는 것을 보고 차를 타고 쫓아야 하는 지 걸어서 따라가야 하는 지 고민하다 그냥 걸어서 그녀의 뒤를 밟기 시작했다.
김유미는 검은 색 가죽 반코트와 같은 색 부츠를 신고 무릎 위까지 오는 짧은 치마 밑으로 레깅스를 입고 있었는데 긴 생머리와 함께 잘 어울려서 실제 나이보다 열살은 젊어 보였다. 5분쯤 걸어서 우체국이 있는 사거리 신한은행 앞에 멈춘 그녀가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듯 하더니 차도쪽으로 붙어 선다. 택시를 잡으려는 듯 보였다.
그녀가 택시를 잡으면 나 역시 택시를 잡고 쫓아갈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 주시하고 있었는데 빨간색 스포츠카가
그녀 앞으로 섰다. 그놈이다. 난 그녀가 타자마자 재빠르게 차가 있는 쪽으로 걸어 나와서 차 번호를 받아 적었다.
차 뒤쪽에 선명한 벤츠 마크.. 젊은 녀석이 능력도 좋네..
정확하게 약속을 했던 건 아니지만 김유미는 그 놈과 만나기 위해 나와의 만남을 금요일로 미룬 셈이다. 저 녀석에게 나와의 정사에 대해 이야기 할까? 그럼 그 이야기를 들은 그 놈이 의외의 해결 방식을 들고 나올 수도 있고 내가 귀찮아 질 가능성이 생긴다. 남편에게는 절대 하지 못할 이야기지만 애인에게는 할 수도 있으니...
어쩌면 금요일 저녁 김유미의 오피스텔에서 달갑지 않은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조심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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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오후 무렵 경찰을 그만두기 전에 같이 근무했던 김배영씨 한테 연락을 했다.
"잘 지내?"
"어! 나야 잘 지내지.. 통 연락 없더니 반갑네.. 애들은 잘 커?"
"응.. 배영씨는 진급안해?"
"위 달려면 아직 멀었어. 책은 보기 싫고.. 크크.. 그런데 뭔일이야?"
"우리 처남이 이사를 해야하는 데 아파트 밑에 사다리차 댈 자리에 어떤 차가 주차를 해놔서 댈 수가 없대. 핸드폰 번호는 적혀 있는데 전화도 안받고... 관리실에 가서 물어봐도 등록이 안되있는 차량이라는데.. 아파트 주민 중에 관리실에 등록안해둔 차량도 있을 수가 있으니.. 차번호 불러 줄께. 몇동 몇호 사는 놈인지 좀 알아봐줘."
"잠깐만.. 오늘 내가 근무인 줄 어떻게 알고 전화했을까? 불러봐. 내가 5분 있다 전화해줄께."
"응.. 26머 0000.. 내가 술 한잔 살께.. 다음 주 어때?"
"그래 잠깐만 기다려봐."
잠시 후 배영씨에게 전화가 왔다.
"석훈씨.. 그거 서울차고 돈 많은 놈이야. 벤츠네. 거기 아닌데.."
"응. 빨간색 스포츠카야. 나이가 몇살인데 이런 차를 모는 건지 참."
"82년생이야. 30살인가?"
"차주 이름은?"
"이유성. 서울 광진구 자양동이 차적지로 되 있는데..."
"어떻게 하지? 기다려야 되나? 그 많은 짐을 엘리베이터로 나를 수도 없고.. 참 난감하네.. 자양동 어디야?"
"현대 2차 아파트 204동... 왜? 찾아가보려고?"
"여기서 1시간 거리니까 가볼까? 그런데 어떻게 찾아 왔냐고 하면 뭐라고 하지?"
"찾아가는 건 좀 그래.. 개인정보 알려주다 걸리면 징계야 징계..."
"차가 여기 있으니 집에 가도 없을꺼야.. 여기 누굴 만나러 왔겠지.. 할 수 없네.. 핸드폰 계속 해보는 수 밖에."
"그래.. 그러다 받을거야.."
"응 다음 주에 전화할게.. 한 번 보게.. 수고.."
"그래.. "
자양동 현대 2차 아파트 204동이라.. 그 정도만 알아도 된다. 찾아가서 고지서 뒤져보면 이유성의 집 주소 정도는 알 수 있을테니까... 하지만 아직은 그 곳에 가야할 뚜렷한 이유는 없었다. 이유성과 단발머리가 내연의 관계라고 하더라도 그 놈 집에 온다는 보장이 없고 아무런 보장이 없는 일에 거기 가서 잠복하고 시간을 투자할 수는 없는 일이다. 만약 단발머리를 만난다고 하더라도 그 여자가 그 날밤 처럼 내 연인이 되줄 가능성은 많지 않고... 한가지 방법이 있다면 김유미 쪽에서 시작하는 것인데...
난 김유미를 품는 것만 해도 불만이 없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었고 그 걸 알고 싶었다. 김유미와 이유성, 단발머리 사이의 관계를 아는 것은 나와 김유미의 관계를 지속하는 데도, 그리고 막연하나마 내가 단발머리에게 다가가는 것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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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퇴근 후 김유미의 오피스텔로 갔다. 난 혹시 이유성과 만나게 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어서 긴장하고 있었다. 김유미와 내연의 관계이고 수요일 그녀와 만났다면... 그래서 그 녀석에게 나와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 했다면 이유성 입장에서 김유미와 나와의 만남을 그냥 넘기지는 않을 터이고 남자들의 해결방식이라는 게 단순할 때가 많으니까 무슨 일이 생길 지도 모른다.
오피스텔에 불이 켜져 있는 걸 확인하고 슬며시 안을 살폈다. 며칠 전에 입었던 검은색 원피스를 입은 김유미가 있었고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행동을 잠깐 보고 있었는데 책을 읽고 있었고 별다르게 특이한 점은 발견할 수 없었던 나는 현관으로 가서 벨을 눌렀다.
김유미가 문을 열었고 날 슬며시 쳐다보더니 뒤로 물러났는데 난 문을 밀고 들어가 그녀에게 말했다.
"저녁 안 먹었지? 시간 되면 나가서 저녁 같이 먹자."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아요. 애아빠 오는 시간에 가서 저녁을 차려야 되요."
"몇 시에 오지?"
"7시 반에서 8시 쯤이요."
"그럼 한 시간 정도 밖에 시간이 없네."
"..."
난 거실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커피 한 잔 줄래?"
김유미가 말 없이 주방으로 가서 종이컵에 커피를 탄 후 내밀었고 난 조용히 5분 정도 커피를 마시며 나와 조금 떨어진 쇼파에 팔짱을 낀채 앉아 있는 그녀의 옆 모습을 응시했다. 내 시선을 의식한 탓인지 그녀는 잡지 책을 펴고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고 난 그 모습을 계속해서 보고 있었다.
다시 5분 정도 시간이 흐른 후에 그녀가 거실에 있는 시계를 보기 위해 고개를 들었을 때 난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과 수업을 받는 방에 있는 불을 껐다. 그리고 그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던 그녀의 앞으로 가서 옷을 벗기 시작했다.
김유미는 옷을 벗는 나를 보고 있기가 그랬던지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난 양말까지 모두 벗어 버린 후 그녀가 앉아 있는 쇼파로 가서 쇼파 위에 그녀를 눕혔다. 그녀의 숨소리가 거칠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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