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마음 속과는 전혀 다른 아주 무미건조한 말투로 대답했다.
“응? 아들 수업 끝나는 걸 기다리는 중이라 여기서 이야기 하기는 좀 그런데...”
“그건 나도 마찬가지예요. 여기선 좀 그렇고 수업이 끝나고 나서 다시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괜찮겠어요?”
“... 우선... 수업이 끝나면 4시 정도 인데 아들 집에 데려다 주고 나오면 4시 30분... 7시에 약속이 있어. 약속 장소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을 감안하면 뭐라고 이야기하기가 그러네. 니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대충은 알겠는데... 내 생각은 지난주에 이야기 했고 아직 별다르게 달라진 건 없어.”
“음... 그래요? 일단 궁금한 게 있어요.”
“응. 그럼 저기 공원에 가서 잠깐 이야기 할까? 아직 수업 끝나려면 30분 정도 남았어.”
“예. 그렇게 해요.”
황지연의 말투가 달라졌다. 100미터 떨어진 공원을 향해 앞장 서 걸으면서도 뚜렷한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지만 무언가 마음의 변화가 생긴 건 분명했다. 아니면 작전을 회유책으로 바꾸었던지...
내가 먼저 벤치에 앉자 황지연은 서로 어깨가 살짝 닿을 정도로 붙어서 자리를 잡았다.
“응. 약간 쌀쌀하긴 한데 아무도 없으니... 궁금한게 뭐지?”
“저번에 내게 말했죠. 이유성부터 시작해본다고... 이름을 어떻게 알았죠? 그리고 그 사람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죠?”
아뿔싸.. 그건 대비해두지 않았다. 차량 번호 조회를 했다고 하면 황지연은 자신의 이름과 주소까지 아는 게 아닌지 날 의심할 것이다. 김유미가 말해줬다고 하는 것도 위험하다. 세 사람의 관계를 확실히 모르지 않는가?
“응? 실은 잘 몰라. 이름과 전화번호만 알아. 저번에 김유미 선생을 만났을 때 화장실을 간 틈을 타서 핸드폰을 봤어. 며칠에 한 번 정도 통화를 하는 것 같은 데 남편 이름은 아닌 것 같아서... 그 때 네가 간다고 할 때 슬쩍 말해본거야. 니 반응을 보고 확신했어. 그 남자 이름이 맞다는 걸...”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해서 핸드폰을 봤다는 식으로 이야기 했지만 등줄기가 땀이 맺힐 정도로 뜨거워졌다.
“그랬군요. 아저씨는 참 예측불허네요. 그런 방법 이었다니...”
이 말을 하고 황지연은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면서 공원 중앙에 있는 조각 구조물로 시선을 고정시킨 후 움직이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듯 보였고 나 역시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담배를 꺼냈다.
“줘?”
난 아주 짧게 그녀에게 물었다. 황지연이 주위를 둘러보고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한 후에 고개를 끄덕인다. 난 담배 하나를 그녀에게 주고 라이터를 건넸다. 우리는 담배를 한 개비 다 피울 때까지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침묵을 깬 건 그녀였다.
“약속이 있다고 했죠? 몇 시에 끝나죠?”
“응? 몰라. 한 10시쯤. 더 길어질 수도 있고.”
“그럼 10시에 약속 장소 근처로 내가 갈게요. 그 때 다시 이야기해요. 나 생각을 좀 정리할 게 있어요. 장소가 어디에요?”
“응? 안양 평촌역 부근인데... 그 근처에서 만나서 회를 먹기로 했는데 상호는 정확히 몰라. 오늘 꼭 만나야 해? 나 술 마실 건데... 그냥 내일이나 다음 주에 만나면 되잖아.”
“아니. 오늘 만나요. 평촌역 부근 가서 전화할게요. 핸드폰 번호 좀 주세요.”
난 고개를 돌려 그녀의 얼굴 쪽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바닥을 보고 있었는데 내 시선을 의식해서 인지 눈을 몇 번 깜박 거리더니 내 얼굴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황지연의 얼굴을 보니 조금 붉어져 있었는데 그래도 내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으응... 010-9355-××××”
황지연과 헤어져 오피스텔로 돌아와서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려 김유미와 면담 시간에 들어갔다.
“동물을 만들고 있는데 비슷한 시기에 시작한 다른 애들보다 더 빨라요.”
“그래? 다행이네. 집에 가서 따로 뭘 도와줄건 없어?”
“음.. 제가 코끼리를 블록으로 만든 사진을 드릴 테니 혼자서 한번 해보라고 시켜 보세요.”
“응.. 알았어. 오늘 예쁜데.. 누구 만나러가?”
이 여자는 뭘 걸쳐도 폼이 난다. 하얀색 브라우스에 무릎 위에 걸리는 짧은 브라운색 계통의 치마.
“아니요.. 저녁에 식구들 모임이 있어요.”
“응. 다음 주 중에 연락할게.”
“...”
김유미는 안된다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 지난 주 금요일 만남 이후 달라진 눈치는 보이지 않는다. 오늘 황지연이 굳이 만나자는 이유는 뭘까? 나로서는 김유미와 관계만 유지할 수 있어도 좋겠는데...
저녁 때 김배영 경사를 만나기 위해 안양으로 갔다. 지하철을 타자니 한 시간은 걸릴 것 같고 밤에 혹시 황지연에게 연락이 올 가능성이 있어서 고민을 좀 하다 차를 몰고 안양판교로를 탔다. 예전에 초임으로 같이 근무하던 곳 면사무소 여직원과 결혼을 한 김경사는 안양에 신혼집을 얻었는데 그 이후로 계속 안양에 산다. 근무지도 안양 외곽 고속도로순찰대이지만 서로 바빠 가까운 곳에 살면서도 자주 만나지는 못했었는데...
지하철 역 부근에서 만나 내 차를 타고 근처 상가의 회센터로 들어가서 마주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소주를 마셨다. 배영씨는 얼굴도 미남형인데다 항상 웃는 인상이 주위 사람들에게 호감을 준다. 원래 101경비단 특채로 경찰에 입문 했으나 교육을 받은 후 일반 순경으로 배치된 케이스로 키가 조금 더 컸으면 청와대에서 근무했을 것이다.
그런 배영씨는 어찌 보면 경찰이 아니라 영업사원 같은 이미지를 풍길 때가 많다. 난 김경사보다 키가 더 크긴 하지만 얼굴에 별 표정이 없고 약간 무뚝뚝한 편에 검정색 계통의 옷을 많이 입어서 오히려 경찰 같고...
“며칠 전 그 차는 어떻게 됐어? 차주가 인정해?”
난 슬며시 웃으며 말했다.
“응. 젊은 여자가 몰랐다고 미안하다고 하던데.. 얼굴이 예뻐서 10장 받고 끝냈어. 그걸로 오늘 배영씨 회 사주려고.”
“차 많이 긁힌 거 아냐?”
“응 조금. 별로 태 안나.”
“다행이네... 그 여자 알고도 그냥 간 건 아니겠지?”
“모르지.. 사람 속을 누가 알겠어.”
술이 몇 잔 오갔고 예전에 같이 근무하던 때 이야기가 나왔다.
“그 때가 정말 좋았는데.. 크크”
“나야 배영씨 때문에 골초 다 됐지. 맨날 같이 담배 피우러 가자고 해서.. 하하하”
“그 때 우체국 아가씨가 석훈씨 한테 마음 있었던 거 알고 있었지?”
“몰라. 난 그렇게 순진한 아가씨는 부담이 돼서 피하게 되던데... 그 아가씨도 지금은 애 둘 쯤 낳고 잘 살고 있겠지.”
“아마 석훈씨가 아직 경찰이라면 경위는 벌써 달았을 거야. 동기들 중에 제일 머리가 좋았잖아. 아무리 그렇게 그만두는 사람이 어디 있어?”
“누가 머리가 좋아. 내가? 왜 또 이러셔. 내가 오늘 쏜다고 했잖아. 크크. 노래방도 가고 싶은가 보네.”
“아니. 그런 거 아니구. 여하튼 오랜 만에 얼굴 보니 좋다.”
“응 애들은 잘 커?”
“너무 빨리 커서 탈이야. 9살. 5살.”
“둘째가 딸이지 아마?”
“응... 그 놈 보는 맛에 살지 뭐.”
“예전에 배영씨 나한테 여자랑 잔 이야기 많이 해준 거 기억나? 왜 하다가 우는 여자. 살짝 까무러친 여자... 도서관에서 만난 여자.. 크크크. 난 아직도 다 기억하는데...”
“응? 내가 그런 이야기도 했었나? 다 옛날 총각 때 이야기지 뭐. 왜 또 해줘?”
“응. 난 우리 둘이 순찰차 몰고 나가서 배영씨가 그런 이야기 해줄 때가 제일 재미있더라고.”
“그 때야 신임이라 별로 할 이야기도 없고 시간 죽이려고 그랬지. 지금 동기들 다 경위 달고 나만 네 개라 기 많이 죽어서 살아.”
“배영씨 답지 않게 왜 그래? 어차피 내일 모레면 달지 않나?”
“아니 아직도 한 3년 남았어. 시간 진짜 안 가네. 다니는 회사 일은 어때?”
“관리직이라 힘든 건 없어. 라인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경력이 있는 아줌마들이라 알아서 잘 하구.”
“그럼 재미있겠네. 아줌마들이랑 썸씽은 없고?”
“응? 뭔 썸씽. 난 인기 없어. 무뚝뚝한데다 인상만 쓰고 다녀서... 후후”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둘이 소주 3병을 비우고 시계를 보니 9시 30분. 난 배영씨에게 주말이라 일찍 들어가야 한다고 하며 회센터를 나왔다.
“맥주 한 잔 더 하자. 안돼?”
“오늘은 미안. 담에 내가 또 한 잔 살게. 가끔 보자. 별로 멀지도 않은 데 살면서...”
“그래. 그럼 이거 대리운전비 해.”
배영씨가 만 원짜리 두 장을 내민다. 이 친구는 경찰답지 않게 마음이 따뜻하다. 난 됐다고 손사래를 쳤지만 김경사는 지폐 두 장을 내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고 저 멀리 도망치듯 걸어가며 손을 흔들었다.
“가. 다음에 또 보게.”
“응. 잘 가!”
난 술도 조금 깰 겸 회센터 근처에 있는 근린공원 벤치에 앉아서 담배를 물었다. 곧 있으면 황지연의 전화가 걸려올지 모른다. 왜 날 만나려고 하는 걸까? 그녀가 갑자기 부드러워진 이유는 뭐지?
난 황지연의 직업을 안 이후 그 여자를 욕심내는 건 내가 다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별다른 무언가를 할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 역시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기를 원했고... 이유성이라는 이름만 듣고도 깜짝 놀라는 그녀를 보고 어느 정도 안심하고 있었는데...
황지연은 누가 보더라도 전형적인 그럴 것 같지 않은 여자다. 세상 살면서 만나는 그럴 것 같은 여자는 외려 어려울 때가 많고 그럴 것 같지 않은 여자는 의외로 쉬울 때가 많지만... 그래도 그 정도의 여자를 건드리려고 마음을 먹을 정도로 내 처지가 절박하지는 않다.
일단 김유미가 있고, 설사 김유미를 못 만나는 상황이 발생한다고 하더라도 그 것과 황지연을 탐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문제로 생각해야 한다. 그냥 살다가 우연찮게 일어난 두 번의 추억으로 간직하는 게 서로를 위하는 길일지도...
내가 몇 번씩이나 황지연이 만나자고 하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있을 때 핸드폰에 문자가 한 통 들어왔다.
[저예요. 지금 만날 수 있어요?]
난 답장을 누르고 글을 써 보냈다.
[응 여기가 국민은행 앞이야. 안양시청 건너편]
[10분 쯤 후에 거기서 만나요]
[응]
국민은행 앞에서 몇 분 서 있으려니 저쪽에서 황지연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그녀가 내 앞까지 걸어 왔을 때 난 근처 공원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가서 앉아서 이야기 할까?”
“지금 좀 춥지 않나요?”
황지연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이 말을 하고는 보도블럭이 깔려 있는 바닥을 쳐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난 영문을 몰라 그녀를 쳐다보다가 감각적으로 무언가가 어긋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난 변함이 없어야 한다. 그녀가 경찰 간부든 뭐든 간에 내가 그 걸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선 안되니까... 지난주에 내가 그녀를 만났다면 지금 이 상황에서 무어라고 이야기 했을까? 어떻게 보면 그녀의 정체를 알고 나서 난 약간 그녀에게서 물러서려 하고 있는 것이다.
‘김유미를 포기해야 한다면 너와의 만남을 이어 가겠어.’
얼마 전까지 이렇게 이야기 하던 나다. 그런데 너무 소극적으로 대응하고 있지 않은가? 황지연의 입에서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미리 겁먹을 필요는 없으니...
“아까 술을 마시긴 했는데 좀 부족해서 한잔 더 해야겠어. 같이 가지.”
그녀가 고개를 들고 날 정면으로 바라본다. 난 그녀 옆을 스쳐 걸었다. 따라오라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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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아들 수업 끝나는 걸 기다리는 중이라 여기서 이야기 하기는 좀 그런데...”
“그건 나도 마찬가지예요. 여기선 좀 그렇고 수업이 끝나고 나서 다시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괜찮겠어요?”
“... 우선... 수업이 끝나면 4시 정도 인데 아들 집에 데려다 주고 나오면 4시 30분... 7시에 약속이 있어. 약속 장소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을 감안하면 뭐라고 이야기하기가 그러네. 니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대충은 알겠는데... 내 생각은 지난주에 이야기 했고 아직 별다르게 달라진 건 없어.”
“음... 그래요? 일단 궁금한 게 있어요.”
“응. 그럼 저기 공원에 가서 잠깐 이야기 할까? 아직 수업 끝나려면 30분 정도 남았어.”
“예. 그렇게 해요.”
황지연의 말투가 달라졌다. 100미터 떨어진 공원을 향해 앞장 서 걸으면서도 뚜렷한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지만 무언가 마음의 변화가 생긴 건 분명했다. 아니면 작전을 회유책으로 바꾸었던지...
내가 먼저 벤치에 앉자 황지연은 서로 어깨가 살짝 닿을 정도로 붙어서 자리를 잡았다.
“응. 약간 쌀쌀하긴 한데 아무도 없으니... 궁금한게 뭐지?”
“저번에 내게 말했죠. 이유성부터 시작해본다고... 이름을 어떻게 알았죠? 그리고 그 사람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죠?”
아뿔싸.. 그건 대비해두지 않았다. 차량 번호 조회를 했다고 하면 황지연은 자신의 이름과 주소까지 아는 게 아닌지 날 의심할 것이다. 김유미가 말해줬다고 하는 것도 위험하다. 세 사람의 관계를 확실히 모르지 않는가?
“응? 실은 잘 몰라. 이름과 전화번호만 알아. 저번에 김유미 선생을 만났을 때 화장실을 간 틈을 타서 핸드폰을 봤어. 며칠에 한 번 정도 통화를 하는 것 같은 데 남편 이름은 아닌 것 같아서... 그 때 네가 간다고 할 때 슬쩍 말해본거야. 니 반응을 보고 확신했어. 그 남자 이름이 맞다는 걸...”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해서 핸드폰을 봤다는 식으로 이야기 했지만 등줄기가 땀이 맺힐 정도로 뜨거워졌다.
“그랬군요. 아저씨는 참 예측불허네요. 그런 방법 이었다니...”
이 말을 하고 황지연은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면서 공원 중앙에 있는 조각 구조물로 시선을 고정시킨 후 움직이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듯 보였고 나 역시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담배를 꺼냈다.
“줘?”
난 아주 짧게 그녀에게 물었다. 황지연이 주위를 둘러보고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한 후에 고개를 끄덕인다. 난 담배 하나를 그녀에게 주고 라이터를 건넸다. 우리는 담배를 한 개비 다 피울 때까지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침묵을 깬 건 그녀였다.
“약속이 있다고 했죠? 몇 시에 끝나죠?”
“응? 몰라. 한 10시쯤. 더 길어질 수도 있고.”
“그럼 10시에 약속 장소 근처로 내가 갈게요. 그 때 다시 이야기해요. 나 생각을 좀 정리할 게 있어요. 장소가 어디에요?”
“응? 안양 평촌역 부근인데... 그 근처에서 만나서 회를 먹기로 했는데 상호는 정확히 몰라. 오늘 꼭 만나야 해? 나 술 마실 건데... 그냥 내일이나 다음 주에 만나면 되잖아.”
“아니. 오늘 만나요. 평촌역 부근 가서 전화할게요. 핸드폰 번호 좀 주세요.”
난 고개를 돌려 그녀의 얼굴 쪽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바닥을 보고 있었는데 내 시선을 의식해서 인지 눈을 몇 번 깜박 거리더니 내 얼굴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황지연의 얼굴을 보니 조금 붉어져 있었는데 그래도 내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으응... 010-9355-××××”
황지연과 헤어져 오피스텔로 돌아와서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려 김유미와 면담 시간에 들어갔다.
“동물을 만들고 있는데 비슷한 시기에 시작한 다른 애들보다 더 빨라요.”
“그래? 다행이네. 집에 가서 따로 뭘 도와줄건 없어?”
“음.. 제가 코끼리를 블록으로 만든 사진을 드릴 테니 혼자서 한번 해보라고 시켜 보세요.”
“응.. 알았어. 오늘 예쁜데.. 누구 만나러가?”
이 여자는 뭘 걸쳐도 폼이 난다. 하얀색 브라우스에 무릎 위에 걸리는 짧은 브라운색 계통의 치마.
“아니요.. 저녁에 식구들 모임이 있어요.”
“응. 다음 주 중에 연락할게.”
“...”
김유미는 안된다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 지난 주 금요일 만남 이후 달라진 눈치는 보이지 않는다. 오늘 황지연이 굳이 만나자는 이유는 뭘까? 나로서는 김유미와 관계만 유지할 수 있어도 좋겠는데...
저녁 때 김배영 경사를 만나기 위해 안양으로 갔다. 지하철을 타자니 한 시간은 걸릴 것 같고 밤에 혹시 황지연에게 연락이 올 가능성이 있어서 고민을 좀 하다 차를 몰고 안양판교로를 탔다. 예전에 초임으로 같이 근무하던 곳 면사무소 여직원과 결혼을 한 김경사는 안양에 신혼집을 얻었는데 그 이후로 계속 안양에 산다. 근무지도 안양 외곽 고속도로순찰대이지만 서로 바빠 가까운 곳에 살면서도 자주 만나지는 못했었는데...
지하철 역 부근에서 만나 내 차를 타고 근처 상가의 회센터로 들어가서 마주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소주를 마셨다. 배영씨는 얼굴도 미남형인데다 항상 웃는 인상이 주위 사람들에게 호감을 준다. 원래 101경비단 특채로 경찰에 입문 했으나 교육을 받은 후 일반 순경으로 배치된 케이스로 키가 조금 더 컸으면 청와대에서 근무했을 것이다.
그런 배영씨는 어찌 보면 경찰이 아니라 영업사원 같은 이미지를 풍길 때가 많다. 난 김경사보다 키가 더 크긴 하지만 얼굴에 별 표정이 없고 약간 무뚝뚝한 편에 검정색 계통의 옷을 많이 입어서 오히려 경찰 같고...
“며칠 전 그 차는 어떻게 됐어? 차주가 인정해?”
난 슬며시 웃으며 말했다.
“응. 젊은 여자가 몰랐다고 미안하다고 하던데.. 얼굴이 예뻐서 10장 받고 끝냈어. 그걸로 오늘 배영씨 회 사주려고.”
“차 많이 긁힌 거 아냐?”
“응 조금. 별로 태 안나.”
“다행이네... 그 여자 알고도 그냥 간 건 아니겠지?”
“모르지.. 사람 속을 누가 알겠어.”
술이 몇 잔 오갔고 예전에 같이 근무하던 때 이야기가 나왔다.
“그 때가 정말 좋았는데.. 크크”
“나야 배영씨 때문에 골초 다 됐지. 맨날 같이 담배 피우러 가자고 해서.. 하하하”
“그 때 우체국 아가씨가 석훈씨 한테 마음 있었던 거 알고 있었지?”
“몰라. 난 그렇게 순진한 아가씨는 부담이 돼서 피하게 되던데... 그 아가씨도 지금은 애 둘 쯤 낳고 잘 살고 있겠지.”
“아마 석훈씨가 아직 경찰이라면 경위는 벌써 달았을 거야. 동기들 중에 제일 머리가 좋았잖아. 아무리 그렇게 그만두는 사람이 어디 있어?”
“누가 머리가 좋아. 내가? 왜 또 이러셔. 내가 오늘 쏜다고 했잖아. 크크. 노래방도 가고 싶은가 보네.”
“아니. 그런 거 아니구. 여하튼 오랜 만에 얼굴 보니 좋다.”
“응 애들은 잘 커?”
“너무 빨리 커서 탈이야. 9살. 5살.”
“둘째가 딸이지 아마?”
“응... 그 놈 보는 맛에 살지 뭐.”
“예전에 배영씨 나한테 여자랑 잔 이야기 많이 해준 거 기억나? 왜 하다가 우는 여자. 살짝 까무러친 여자... 도서관에서 만난 여자.. 크크크. 난 아직도 다 기억하는데...”
“응? 내가 그런 이야기도 했었나? 다 옛날 총각 때 이야기지 뭐. 왜 또 해줘?”
“응. 난 우리 둘이 순찰차 몰고 나가서 배영씨가 그런 이야기 해줄 때가 제일 재미있더라고.”
“그 때야 신임이라 별로 할 이야기도 없고 시간 죽이려고 그랬지. 지금 동기들 다 경위 달고 나만 네 개라 기 많이 죽어서 살아.”
“배영씨 답지 않게 왜 그래? 어차피 내일 모레면 달지 않나?”
“아니 아직도 한 3년 남았어. 시간 진짜 안 가네. 다니는 회사 일은 어때?”
“관리직이라 힘든 건 없어. 라인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경력이 있는 아줌마들이라 알아서 잘 하구.”
“그럼 재미있겠네. 아줌마들이랑 썸씽은 없고?”
“응? 뭔 썸씽. 난 인기 없어. 무뚝뚝한데다 인상만 쓰고 다녀서... 후후”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둘이 소주 3병을 비우고 시계를 보니 9시 30분. 난 배영씨에게 주말이라 일찍 들어가야 한다고 하며 회센터를 나왔다.
“맥주 한 잔 더 하자. 안돼?”
“오늘은 미안. 담에 내가 또 한 잔 살게. 가끔 보자. 별로 멀지도 않은 데 살면서...”
“그래. 그럼 이거 대리운전비 해.”
배영씨가 만 원짜리 두 장을 내민다. 이 친구는 경찰답지 않게 마음이 따뜻하다. 난 됐다고 손사래를 쳤지만 김경사는 지폐 두 장을 내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고 저 멀리 도망치듯 걸어가며 손을 흔들었다.
“가. 다음에 또 보게.”
“응. 잘 가!”
난 술도 조금 깰 겸 회센터 근처에 있는 근린공원 벤치에 앉아서 담배를 물었다. 곧 있으면 황지연의 전화가 걸려올지 모른다. 왜 날 만나려고 하는 걸까? 그녀가 갑자기 부드러워진 이유는 뭐지?
난 황지연의 직업을 안 이후 그 여자를 욕심내는 건 내가 다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별다른 무언가를 할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 역시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기를 원했고... 이유성이라는 이름만 듣고도 깜짝 놀라는 그녀를 보고 어느 정도 안심하고 있었는데...
황지연은 누가 보더라도 전형적인 그럴 것 같지 않은 여자다. 세상 살면서 만나는 그럴 것 같은 여자는 외려 어려울 때가 많고 그럴 것 같지 않은 여자는 의외로 쉬울 때가 많지만... 그래도 그 정도의 여자를 건드리려고 마음을 먹을 정도로 내 처지가 절박하지는 않다.
일단 김유미가 있고, 설사 김유미를 못 만나는 상황이 발생한다고 하더라도 그 것과 황지연을 탐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문제로 생각해야 한다. 그냥 살다가 우연찮게 일어난 두 번의 추억으로 간직하는 게 서로를 위하는 길일지도...
내가 몇 번씩이나 황지연이 만나자고 하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있을 때 핸드폰에 문자가 한 통 들어왔다.
[저예요. 지금 만날 수 있어요?]
난 답장을 누르고 글을 써 보냈다.
[응 여기가 국민은행 앞이야. 안양시청 건너편]
[10분 쯤 후에 거기서 만나요]
[응]
국민은행 앞에서 몇 분 서 있으려니 저쪽에서 황지연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그녀가 내 앞까지 걸어 왔을 때 난 근처 공원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가서 앉아서 이야기 할까?”
“지금 좀 춥지 않나요?”
황지연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이 말을 하고는 보도블럭이 깔려 있는 바닥을 쳐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난 영문을 몰라 그녀를 쳐다보다가 감각적으로 무언가가 어긋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난 변함이 없어야 한다. 그녀가 경찰 간부든 뭐든 간에 내가 그 걸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선 안되니까... 지난주에 내가 그녀를 만났다면 지금 이 상황에서 무어라고 이야기 했을까? 어떻게 보면 그녀의 정체를 알고 나서 난 약간 그녀에게서 물러서려 하고 있는 것이다.
‘김유미를 포기해야 한다면 너와의 만남을 이어 가겠어.’
얼마 전까지 이렇게 이야기 하던 나다. 그런데 너무 소극적으로 대응하고 있지 않은가? 황지연의 입에서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미리 겁먹을 필요는 없으니...
“아까 술을 마시긴 했는데 좀 부족해서 한잔 더 해야겠어. 같이 가지.”
그녀가 고개를 들고 날 정면으로 바라본다. 난 그녀 옆을 스쳐 걸었다. 따라오라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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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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