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지연과의 시간이 지나 갔고 긴장이 풀려서인지 피곤이 몰려왔다. 도심의 새벽 한적한 도로를 순식간에 빠져나가 차가 안양 판교로를 타기 직전 핸드폰이 울렸고 와이프 전화인줄 알고 주머니에서 꺼내 확인해보니 모르는 번호였다. 이 시간에 웬 전화냐?
“여보세요?”
“대리운전입니다.”
대리운전? 지금 앞에서 운전하고 있는 놈은 뭐지? 먼저 오는 놈이 장땡인가? 대리운전 시스템이 콜이 울리면 가까이 있는 사람이 움직여서 따먹는 구조던가? 상식부족...
“늦으셨네요. 벌써 출발했어요.”
“예? 그럴 리가... 어, 어쩔 수 없죠. 잘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이게 무슨 상황인지가 궁금했지만 집으로 가는 길이 맞으니 별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먼저 왔으니 우선권이 있겠지...
차는 계속 달렸고 중간에 있는 00고개를 넘어갈 때 쯤 졸음이 밀려와 잠깐 잠이 들었는데 누군가 흔들어 깨운다. 눈을 떴을 때 난 대리운전을 해서 집에 가고 있다는 사실도 잊고 있었다. 멍하니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거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 앞에 서 있던 그림자가 내 팔을 잡고 바깥으로 끌어냈다.
한겨울 새벽의 차가운 공기가 느껴졌고 난 바닥에 주저앉은 상태에서 고개를 들어 앞에 있는 그림자를 쳐다보았다. 이 녀석은 아까 대리운전 기사인데... 여긴 어디지? 그 때 그 놈이 말을 던졌다.
“너 뭐야? 왜 지연이와 모텔에서 있다 나오는 거지?”
“뭐? 여긴 어디야? 너 대리기사 아니었어?”
“대리? 정신차려. 내가 묻는 말에 바른 대로 말하지 않으면 다칠 수도 있어. 여긴 아무도 없는 곳이 거든. 다시 한 번 묻지. 너 뭐야? 니가 왜 지연이와 모텔에서 함께 나오는 거야?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거야?”
씨발놈. 아닌 밤중에 봉창을 두들겨도 유분수지. 사람이 여러 명만 아니라면 일대일로 붙어서는 나도 별로 질 자신은 없는데... 술에 취했다고 사람 무시하나? 난 바닥에 한 쪽 무릎을 대고 앉은 상태로 고개를 숙여 주위를 둘러보았다. 대충 보아하니 문을 닫은 식당이 눈에 들어왔고 별다르게 무기가 될 만한 것은 눈에 띄지 않았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니가 대리기사가 아니고 날 이런 곳으로 데려왔으면 큰 소리 칠 입장은 아닌 것 같은데... 술에 취해서 머리가 아파 죽겠구만... 너 뭐야? 강도야. 아님 깡패야?”
“이 자식이... 말로 해선 안되겠구만... 나 이런 사람이다.”
순간 얼굴, 턱쪽으로 무언가가 날아왔다. 난 통증을 느끼면서 뒤로 넘어졌고 그놈은 뒤이어 옆구리를 걷어찼다.
‘헉’
그 이후로 4~5번쯤 옆구리와 등 부분에 빠른 속도로 타격이 날아왔고 충격을 줄이기 위해 바닥에서 몸을 웅크렸다. 술은 어느 정도 깨어 있었지만 선빵이 날카로워서 반격을 가할 틈도 없었다.
내가 싸움꾼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오지는 않았지만 꽤 괜찮은 몸집과 운동 신경으로 학교 다닐 때 누군가에게 맞아 본 기억은 별로 없다. 몇 번 있기는 한데 그 건 운동부 애들이나 무도를 제대로 배운 녀석들과 붙었을 때 치고 받으면서 맞은 거지 그 외의 녀석들과의 싸움은 대부분 이겼었다.
내 주특기는 일단 선빵. 싸움이 될 것 같다 싶으면 먼저 주먹이나 손바닥으로 면상을 갈기는 것과 그리고 긴 다리를 들어 상대의 복부나 가슴을 차고 중심이 무너지면 달려들어 무차별 펀치를 날리는 것이었다. 일단 유리한 위치가 확보 되면 얼굴이 찢어질 정도로 때렸는데 옆에서 말리지 않으면 상대방이 전의를 상실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상대가 앞차기를 맞았음에도 중심을 잃지 않고 외려 앞으로 고개를 숙이면 뒷목을 잡아 앞으로 굽히면서 역시 긴 다리를 이용해 무릎을 올려 면상을 찍었는데 그 초식에 걸리면 대충 끝이 났었다.
하지만 그건 학창시절 이야기고...
난 풀이 듬성듬성 나있는 흙바닥에서 옆구리의 통증과 안면을 발로 얻어맞은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녀석의 발차기가 멈췄고 목소리가 들려 왔다.
“다시 묻는다. 어떻게 너 같은 놈이 지연이와 모텔에서 함께 나오게 된 거지? 빨리 이야기 하는 게 좋을 거야. 나 지금 엄청 열 받았거든...”
신음 소리를 내며 난 손에 잡히는 돌멩이 하나를 움켜쥐었다. 반격 없이 맞고만 있는 터라 기회가 있을 것 같은데... 여하튼 방심하면 넌 죽는다.
“아.. 아... 으... 씨발... 아... 누구? 아까 그 여자? 그 여자 이름이 지연이야? 난 이름도 몰랐어. 우연히 같이 술을 마시다가 그만... 원나잇스탠드야. 씨발. 전화번호도 모른다고... 그 여자 애인이면 미안하게 됐으니까 그만 하자고. 씨발... 갈비뼈 나간 거 같은데...”
“헛소리 하지마. 니 핸드폰에서 지연이 전화번호 나오면 너 죽는다. 원나잇? 지연이가 처음 보는 남자하고 잠이나 자는 애인줄 알아? 이게 누굴 속이려고...”
녀석이 옆구리를 또 걷어찼고 통증이 다시 느껴졌다. 씨발. 때린 데 또 때리는 좇 같은 넘 같으니라고...
“아... 아... 알았어... 잠깐만... 숨도 못 쉬게 패면서 뭘 이야기 하라는 거야? 기다려... 아 씨발 좇나 아프네...”
“말해. 지연이를 어떻게 옭아맸는지. 무언가 속이려 들면 당분간 회사 다닐 생각은 안하는 게 좋아!”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마음속으로 그린 시나리오는 왼손으로 녀석에게 번호가 있는지 확인해 보라고 말을 하며 핸드폰을 내밀고 받을 때 오른 손에 쥔 돌덩이로 머리를 찍는 것이었다. 제대로만 걸리면 게임은 역전이다. 죽을 준비만 해둬라.
난 계속해서 신음소리를 내며 핸드폰을 꺼내기 위해 왼손을 잠바주머니에 넣었다. 그 때 머릿속에 이상한 생각이 떠올랐다. 저 새끼가 내가 회사원인줄 어떻게 알지? 아... 그리고 저녀석 황지연과 상당히 깊은 관계까지 갔던 것 같은데...
상황을 역전시키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뒤쪽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저 녀석을 때려 눕히면 다음은 어떻게 되는 거야? 돌로 머리를 찍고 죽지 않을 정도로 팬다면... 내가 누군인 줄 안다면 그냥 물러날 놈 같지는 않은데... 죽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설령 내가 회사원인줄 짐작으로 이야기했다고 하더라도 앞으로 황지연과의 만남을 지속하는데 득보다 실이 많게 될지도...
그럼 어떻게 해야 되지? 난 신음소리를 내뱉으며 머리를 굴렸다. 이 새끼는 지금 나를 신나게 두들겨 패서 분노가 좀 가라앉았을 것이다. 그럼... 현실을 제대로 알려 주고 상황을 보자.
일단 응수타진.
“아.. 씨발... 뭐 이런 좇 같은 일이 다 생기지? 너.. 나보다 어려 뵈는데 지연이라는 그 여자와 어떤 사이야? 애인이야?
아.. 으... 씨발... 가만 있어봐. 이게 지금 무슨 경우야? 대리운전 기사도 아닌 놈이 술 취한 사람이 잠든 사이에 아무도 없는 곳으로 데려와 개 패듯이 패! 일단 상해죄. 그리고 협박죄.. 또 약취. 유인 죄? 그건 아닌가? 무허가 대리운전은 해당 되나?”
녀석의 얼굴색이 변했다. 똥 씹은 표정.
“너! 뭐하는 놈이야? 조직에 있는 놈이야? 아님... 설마 그 여자와 애인 사이라고 날 이렇게 팬 건 아니지? 그게 사람 팰 권리가 돼?”
음.. 갑자기 벙어리가 된 녀석을 보니 한 대도 못 때리고 맞기만 한 게 오히려 잘한 일인듯 싶군.
“그래 더 때려봐. 씨발. 그 여자애한테 니 인상착의 대면 대충 답 나오겠지. 나도 병원에 누워서 돈 좀 벌어보자. 너! 잘못 걸렸어. 요즘 거리마다 깔려 있는 게 CCTV야. 나 때리고 도망가면 못 찾을 줄 알아. 어떻게든 잡혀! 이 새끼야.”
“...”
대충 상황이 반전될 기미가 보이는데... 이 놈은 나와 황지연이 모텔에 함께 들어가는 걸 보고 밖에서 기다렸을 것이다. 눈이 뒤집힌 채로... 그래서 앞뒤를 못 재고 내게 주먹을 휘둘렀을 것이고. 나름대로 상황을 되돌리고 싶겠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차라리 날 죽이시던지... 그래서 아무도 모르는 곳에 파묻어. 너와 내가 연결고리가 밝혀지지 않는 다면 또 알아? 완전범죄가 될지. 안양평촌역 부근에서 대리운전으로 집에 간다고 마누라한테 이야기 한 게 좀 문제가 되긴 하겠지만...”
녀석이 고개를 떨군 채 입을 다물고 움직이지 않는 사이에 나는 천천히 일어나 담배를 물었다. 한 대를 다 피울 동안에도 녀석은 입을 열지 않았고 난 이곳에서의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옆구리를 잡고 천천히 차 뒤로 타며 말했다.
“나 아직 술 안 깼어. 일단 우리 집 앞으로 가서 이야기하지.”
잠시 기다리자 녀석이 탔고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킨다.
“00아파트. 판교동 주민센터 근처로 가. 아니 그 전에 병원 응급실에 좀 들려야 할 것 같은데... 갈비뼈가 나간 것 같아. 입 안쪽도 찢어 졌고... 분당 쪽으로 먼저 가.”
10여분 후 분당 00병원 응급실에 도착했다. 녀석은 주저주저하며 밖에 서 있으려 했으나 난 녀석에게 “설마 나한테 계산하라는 건 아니겠지?”라고 말하며 그 놈을 끌고 들어갔다. 물론 여기까지 온 이상 도망갈 걱정은 별로 없었으나 카드로 계산을 하거나 병원 CCTV에 그 녀석이 찍히면 아예 허튼 생각은 포기할 것이다.
밝은 데서 본 녀석의 얼굴은 굳어 있었지만 반 곱슬머리에 코가 오똑하고 눈썹이 짙은 상당한 미남이었으며 키는 얼핏 보아 나보다 약간 작았지만 입고 있는 옷에서 좀 있어 보이는 듯한 인상을 풍겼다. 난 녀석에게 겁을 주기 위해 갈비뼈가 부러졌다고 이야기 했으나 그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금이 갔을 가능성은 있어 X-레이와 MRI 검사를 했고 입 안쪽이 찢어진 것에 대해서도 진찰을 받았다.
와이프에게 전화를 걸어 접촉사고가 나서 분당에 있는 병원 응급실에 왔는데 곧 끝나고 간다고 이야기를 했다. 많이 다친 건 아니냐고 걱정을 하는 눈치였으나 그냥 형식적인 절차라고 말을 하니 빨리 오라고 하며 전화를 끊는다.
일단 움직일 수 있으니 집으로 갔다가 진찰 결과는 내일 와서 듣기로 한 후 병원비를 내기 위해 수납을 하는 곳을 찾는 중에 대기실에서 난 녀석에게 말했다.
“이제 다시 이야기를 해볼까? 저기 앉아서 커피 한 잔 하지.”
“...”
난 커피를 뽑아 녀석과 대기실에 놓여 있는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하지만 나 역시 그냥 보낼 수 없어서 일단 잡아 놓기는 했지만 뚜렷한 무언가, 이 상황을 어떻게 몰고 가야 하는지에 대해 감이 잡히지 않아서 커피를 마시며 생각을 정리했다.
하나씩 생각해보자. 하나씩 천천히.
우선 난 황지연과의 관계에 녀석이 끼여 드는 게 싫다. 하지만 이 녀석과 황지연과의 확실한 관계를 아직 모른다. 먼저 그 걸 알아내야 하지만... 그 걸 알아내면서 녀석이 황지연이 뭐하는 여자인지 나에게 털어 놓게 하는 건 조금 위험할 수 있다. 나와 나눈 이야기 역시 그녀에게 들어갈 수 있으니... 그렇다면 이 대화를 끌고 가는 게 만만치는 않을 듯 하고..
그 전에 이놈이 나와 황지연이 모텔에서 나오는 걸 어떻게 보게 됐는지도 알아내야 한다. 세상이 아무리 좁다고 모텔 앞을 지나가다 보지는 않았을 테니... 역시 이쪽도 너무 깊이 들어가면 내가 알아서는 안 될 일들이 녀석의 입에서 튀어나올 수 있어 위험하긴 마찬가지.
상해죄나 협박죄 운운하자 갑자기 약해진 녀석의 직업은 무얼까? 그것부터 알아볼까? 그런 전과들이 치명적으로 발목을 잡을 정도면 이놈 역시 공직에 있을 지도... 게다가 이 놈은 과거 황지연의 남자일 것이고 그럼 그녀가 대학교 2학년 때 만났다던 첫사랑일 가능성도 분명히 있는데 그 짐작이 맞다면 경찰대학에 다니는 여자를 사귈 정도의 간판이 있는 놈이다.
아! 씨발놈이 어디서 갑자기 나타나가지고 다된 밥에 재를 뿌리는 건지. 머리 아프네.
그래도 내가 먼저 바운더리를 치고 가야 한다.
“보아하니 나보다 좀 어려 보이는데 말끝마다 반말 하는 게 좀 기분 나쁘거든. 나 73년생인데 나보다 더 나이 많으면 말 내려도 참아 주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올려. 니가 어떻게 나오는가에 따라서 약간 생각이 바뀔 수도 있으니까.”
“...”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 고분고분히 대답하는 게 좋을 거야. 만약에 앞뒤가 안 맞는 말을 하거나 억지를 부린다면 여기서 나가는 대로 경찰서에 가서 신고 할 거야. 그럼 대리운전업 종사자가 아닌 사람이 허위로 대리운전을 하고 내게 상해를 입힐 뚜렷한 이유가 없으니 니가 말한 지연이라는 여자에 관한 것도 그 곳에서 이야기해야 하겠지. 넌 전과자가 될 것이고. 무슨 말인지 알겠어?”
“...”
대답이 없다. 하긴 자존심이 엄청 강해 보이는 놈이라 그 정도 가지고 바로 무릎을 꿇지는 않을 줄 짐작 했지만...
“알아들은 걸로 간주하고 묻는다. 너 나에 대해 무얼 알고 있지? 아는 걸 모두 이야기해봐.”
“... 아까 지연이와 모텔에서 나오는 걸 봤소. 그걸 보고 따라가서 대리운전을 하긴 했지만 형씨에 대해선 잘 몰라.”
이 새끼. 처음부터 거짓말이다. 그걸 캐는 건 어렵지 않은 데 녀석이 쓸데없는 이야기를 늘어 놓을까봐 함부로 묻지도 못하겠고... 참... 지랄이다.
“그럼 치정 때문에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는 거군. 그 여자와 모텔에서 나오는 것도 우연히 봤을 테고. 맞아?”
“맞소. 보아하니 형씨도 유부남으로 보이는데 간통 아닌가?”
오호라. 이 놈 봐라. 넌 간통이니 함부로 들쑤시지 말라 이건가?
“간통? 나 겁주는 거야? 후후후.. 좋아. 가지. 분당경찰서가 제일 가깝나? 그 여자하고 하룻밤 잤을 뿐이니 마누라한테 용서를 빌어 봐야지. 하지만 너 역시 대가를 치룰 마음의 준비를 해둬. 만의 하나 우리 마누라가 용서를 안 받아줘서 날 간통죄로 고소한다면 아마 니 애인인 것 같은데 그 지연이라는 여자도 경찰서 좀 드나들어야 할 거야.”
난 자리에서 왼쪽 옆구리를 잡으며 일어났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가 병원 현관 문을 밀고 나가려 할 때 녀석이 쫓아와 팔을 잡으며 말한다.
“잠깐만요. 원하는 걸 말해 보시오. 돈이요? 액수를 이야기 해 보시오.”
“돈? 너 돈 많은가 보다. 그런데 어차피 경찰서 가서 사건 처리해도 넌 나하고 합의 봐야 돼. 그 때 다시 이야기 하자고.”
“만약 사건 처리를 하지 않는 다면 합의금을 더 생각해 드리겠소.”
이 새끼가 이제 노골적으로 나오네. 합의금 받고 황지연을 포기하고 김유미 쪽으로 갈까? 어차피 황지연의 조건을 들어주자면 김유미와는 만나기 힘들 것 같은데...
“돈 먹고 떨어져라 이거야? 야! 얼굴이 이 모양이 되고 갈비가 왔다갔다 하는 데 전후 사정도 모르고 돈 받고 떨어져! 돈 있는 놈은 기분 나쁘면 주먹 휘둘러도 된대? 내가 분명히 이야기 했을 텐데. 묻는 말에 제대로 답하지 않으면 전과자 될 각오 하라고... 니 눈엔 내가 돈에 환장한 놈으로 보여?”
“...”
“마지막 기회를 주지! 내가 묻는 말에 대답 하는 걸 들어보고 앞뒤가 안 맞으면 더 이상 잡을 생각하지마. 아예 112로 신고해서 순찰차를 병원으로 불러 버릴 테니까...”
“...”
나도 진퇴양난이다. 이 상황을 내가 원하는 쪽으로 끌고 갈수는 있을까? 내가 원하는 게 뭔지도 애매한 상황이 돼버렸다.
일단 황지연과의 만남이 보장된다면 난 김유미를 포기하든 아니면 당분간 만남을 보류하려 했다. 두 여자 모두 확실치 않을 때는 어떤 쪽이 튼튼한 줄인지 몰라 엮어 보려 했지만 오늘 만남으로 황지연과의 만남이 어느 정도 보장이 된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갑자기 끼어든 이 말쑥하게 생긴 녀석 때문에 다시 복잡해졌다. 이놈을 깨끗하게 몰아내는 게 힘들어 진다면 황지연 역시 썩은 밧줄이 될지도...
앞뒤 정황을 파악해서 선택에 도움을 받으려 했으나 이 새끼는 헛소리만 하고 있으니 참...
난 다시 대기실에 있는 의자로 걸어가 앉았고 녀석이 따라오자 어쩔 수 없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나에 대해 알고 있는 걸 다 말해! 사실대로 말하는 게 좋아! 하나를 숨기려 하면 뒤에 있는 것도 다 걸리게 되는 법이야. 한 번만 더 감추고 이야기하는 게 걸리면 그 땐 나도 법적으로 나가는 수 밖에 없지 않겠어?”
휴우. 녀석이 한숨을 한 번 쉬더니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름, 직업, 나이, 주소... 신상에 관한 건 대부분 알고 있소.”
“내가 전직이 뭐라는 것도 알고 있나?”
“알고 있소. 예전에 경찰을 2년 정도 하셨더군.”
음.. 황지연이 내 뒷조사를 부탁한 줄이 이 녀석인가? 그럴 수도 있겠는데... 그럼 이 놈도 검찰이나 경찰 쪽 인물이겠군.
“그럼 이야기 하는 게 좀 쉽겠는데... 넌 뭐하는 사람인데 나에 대해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지?”
“경기도 △△경찰서 지능수사팀장입니다. 지연이와는 학교 선후배 사이였소.”
우라질. 이 자식 황지연의 첫 남자인 것 같은데... 이러다 그 여자가 경찰인 것도 다 부는 거 아닌 가 모르겠다. 난 질문의 방향을 틀어야 했다.
“그 여자와 내가 모텔에 들어가는 걸 보고 있었나?”
“그렇소. 술을 마시러 들어가는 걸 보고 근처 카페에서 나오기를 기다렸소.”
“어느 쪽을 따라 온 거지? 나야, 아님 그 여자야?”
“그건... 지연이요. 실은 지연이가 형씨에 대해 조사를 부탁해서 당신 회사 인사과와 전에 근무했던 00경찰서를 찾아 가서 알아 보았는데 밤 9시 경에 우리 집 근처로 찾아왔기에 만나서 자료를 주었소. 무슨 일 때문이냐고 물어도 대답이 없고 차 한잔 하고 가라고 해도 선약이 있다고 가기에 누굴 만나러 가는 지 궁금해서 뒤를 쫓게 되었소.”
그게 다야? 후배가 간다고 미행을 해?
“그 여자와 어떤 관계인지 말해봐. 자세히.”
“음... 난 지연이와 6년을 넘게 만나던 사이였소. 물론 사랑한다고 믿었었고 곧 결혼을 하려고 했지. 그러던 중에 어느날부터 그녀가 날 피하기 시작하더니 몇 달 뒤에 어떤 남자와 결혼을 합디다.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소. 그게 5년 전 일이요.”
그러니까 황지연과 몇 년 동안 같이 잠을 자는 사이였는데 이유성에게 빼앗겼다 이거 같은데...
“아직도 그 여자에게 미련이 남았다 이건가? 5년 전에 결혼한 여자에게...”
“... 지연이를 한동안 못 잊었지만 그래도 마음 속에서 지우기 위해 애썼습니다. 그런데 몇 달 전에 지연이가 강원도로 갔다는 소식이 들렸고 두 달쯤 전에는 갑자기 전화가 와서 만났는데 술을 마시며 나 오빠랑 헤어진 벌을 받는 것 같다는 이야기만 되풀이 하더군요. 난 미칠 것 같았소. 나와 결혼해서 내 아이를 낳아야 했던 여자가 힘들어 하는 걸 보고 있자니...
그리고 며칠 전 당신에 대해 좀 알아봐달라는 부탁 전화를 받았고 오늘 만났는데 지연이가 급하게 어디론가 가는 걸 보니 따라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소. 그녀에게 여자로서 감당하지 못할 일이 생긴 게 아닐까 걱정이 돼서...”
그래도 지능수사팀장이라더니 말솜씨는 괜찮네. 이놈은 황지연이 경찰이라는 사실은 쏙 빼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거기다 오늘 나와 있었던 일을 그녀에게 알리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야 약간 풀릴 기미가 보이는데...
“내가 그녀와 모텔에서 왜 나오게 됐는지 궁금하다고 했지? 지금도 그 걸 알고 싶어?”
“솔직히 이야기 하면 난 당신이 지연이의 약점을 잡고 협박하는 게 아닌가 의심이 됐소. 그런 일이 없다면 그녀가 왜 당신 같은 사람과 ...”
그래서 다짜고짜 날 두들겨 팼군. 우씨. 정말 기분 엿 같네. 이놈의 이야기는 황지연은 자기 같은 사람과 만나고 애 낳고 그럴 여자이긴 하지만 나 같은 놈과는 절대 침대에서 짝짜궁을 할 리 없는 여자라는 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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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세요?”
“대리운전입니다.”
대리운전? 지금 앞에서 운전하고 있는 놈은 뭐지? 먼저 오는 놈이 장땡인가? 대리운전 시스템이 콜이 울리면 가까이 있는 사람이 움직여서 따먹는 구조던가? 상식부족...
“늦으셨네요. 벌써 출발했어요.”
“예? 그럴 리가... 어, 어쩔 수 없죠. 잘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이게 무슨 상황인지가 궁금했지만 집으로 가는 길이 맞으니 별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먼저 왔으니 우선권이 있겠지...
차는 계속 달렸고 중간에 있는 00고개를 넘어갈 때 쯤 졸음이 밀려와 잠깐 잠이 들었는데 누군가 흔들어 깨운다. 눈을 떴을 때 난 대리운전을 해서 집에 가고 있다는 사실도 잊고 있었다. 멍하니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거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 앞에 서 있던 그림자가 내 팔을 잡고 바깥으로 끌어냈다.
한겨울 새벽의 차가운 공기가 느껴졌고 난 바닥에 주저앉은 상태에서 고개를 들어 앞에 있는 그림자를 쳐다보았다. 이 녀석은 아까 대리운전 기사인데... 여긴 어디지? 그 때 그 놈이 말을 던졌다.
“너 뭐야? 왜 지연이와 모텔에서 있다 나오는 거지?”
“뭐? 여긴 어디야? 너 대리기사 아니었어?”
“대리? 정신차려. 내가 묻는 말에 바른 대로 말하지 않으면 다칠 수도 있어. 여긴 아무도 없는 곳이 거든. 다시 한 번 묻지. 너 뭐야? 니가 왜 지연이와 모텔에서 함께 나오는 거야?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거야?”
씨발놈. 아닌 밤중에 봉창을 두들겨도 유분수지. 사람이 여러 명만 아니라면 일대일로 붙어서는 나도 별로 질 자신은 없는데... 술에 취했다고 사람 무시하나? 난 바닥에 한 쪽 무릎을 대고 앉은 상태로 고개를 숙여 주위를 둘러보았다. 대충 보아하니 문을 닫은 식당이 눈에 들어왔고 별다르게 무기가 될 만한 것은 눈에 띄지 않았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니가 대리기사가 아니고 날 이런 곳으로 데려왔으면 큰 소리 칠 입장은 아닌 것 같은데... 술에 취해서 머리가 아파 죽겠구만... 너 뭐야? 강도야. 아님 깡패야?”
“이 자식이... 말로 해선 안되겠구만... 나 이런 사람이다.”
순간 얼굴, 턱쪽으로 무언가가 날아왔다. 난 통증을 느끼면서 뒤로 넘어졌고 그놈은 뒤이어 옆구리를 걷어찼다.
‘헉’
그 이후로 4~5번쯤 옆구리와 등 부분에 빠른 속도로 타격이 날아왔고 충격을 줄이기 위해 바닥에서 몸을 웅크렸다. 술은 어느 정도 깨어 있었지만 선빵이 날카로워서 반격을 가할 틈도 없었다.
내가 싸움꾼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오지는 않았지만 꽤 괜찮은 몸집과 운동 신경으로 학교 다닐 때 누군가에게 맞아 본 기억은 별로 없다. 몇 번 있기는 한데 그 건 운동부 애들이나 무도를 제대로 배운 녀석들과 붙었을 때 치고 받으면서 맞은 거지 그 외의 녀석들과의 싸움은 대부분 이겼었다.
내 주특기는 일단 선빵. 싸움이 될 것 같다 싶으면 먼저 주먹이나 손바닥으로 면상을 갈기는 것과 그리고 긴 다리를 들어 상대의 복부나 가슴을 차고 중심이 무너지면 달려들어 무차별 펀치를 날리는 것이었다. 일단 유리한 위치가 확보 되면 얼굴이 찢어질 정도로 때렸는데 옆에서 말리지 않으면 상대방이 전의를 상실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상대가 앞차기를 맞았음에도 중심을 잃지 않고 외려 앞으로 고개를 숙이면 뒷목을 잡아 앞으로 굽히면서 역시 긴 다리를 이용해 무릎을 올려 면상을 찍었는데 그 초식에 걸리면 대충 끝이 났었다.
하지만 그건 학창시절 이야기고...
난 풀이 듬성듬성 나있는 흙바닥에서 옆구리의 통증과 안면을 발로 얻어맞은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녀석의 발차기가 멈췄고 목소리가 들려 왔다.
“다시 묻는다. 어떻게 너 같은 놈이 지연이와 모텔에서 함께 나오게 된 거지? 빨리 이야기 하는 게 좋을 거야. 나 지금 엄청 열 받았거든...”
신음 소리를 내며 난 손에 잡히는 돌멩이 하나를 움켜쥐었다. 반격 없이 맞고만 있는 터라 기회가 있을 것 같은데... 여하튼 방심하면 넌 죽는다.
“아.. 아... 으... 씨발... 아... 누구? 아까 그 여자? 그 여자 이름이 지연이야? 난 이름도 몰랐어. 우연히 같이 술을 마시다가 그만... 원나잇스탠드야. 씨발. 전화번호도 모른다고... 그 여자 애인이면 미안하게 됐으니까 그만 하자고. 씨발... 갈비뼈 나간 거 같은데...”
“헛소리 하지마. 니 핸드폰에서 지연이 전화번호 나오면 너 죽는다. 원나잇? 지연이가 처음 보는 남자하고 잠이나 자는 애인줄 알아? 이게 누굴 속이려고...”
녀석이 옆구리를 또 걷어찼고 통증이 다시 느껴졌다. 씨발. 때린 데 또 때리는 좇 같은 넘 같으니라고...
“아... 아... 알았어... 잠깐만... 숨도 못 쉬게 패면서 뭘 이야기 하라는 거야? 기다려... 아 씨발 좇나 아프네...”
“말해. 지연이를 어떻게 옭아맸는지. 무언가 속이려 들면 당분간 회사 다닐 생각은 안하는 게 좋아!”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마음속으로 그린 시나리오는 왼손으로 녀석에게 번호가 있는지 확인해 보라고 말을 하며 핸드폰을 내밀고 받을 때 오른 손에 쥔 돌덩이로 머리를 찍는 것이었다. 제대로만 걸리면 게임은 역전이다. 죽을 준비만 해둬라.
난 계속해서 신음소리를 내며 핸드폰을 꺼내기 위해 왼손을 잠바주머니에 넣었다. 그 때 머릿속에 이상한 생각이 떠올랐다. 저 새끼가 내가 회사원인줄 어떻게 알지? 아... 그리고 저녀석 황지연과 상당히 깊은 관계까지 갔던 것 같은데...
상황을 역전시키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뒤쪽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저 녀석을 때려 눕히면 다음은 어떻게 되는 거야? 돌로 머리를 찍고 죽지 않을 정도로 팬다면... 내가 누군인 줄 안다면 그냥 물러날 놈 같지는 않은데... 죽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설령 내가 회사원인줄 짐작으로 이야기했다고 하더라도 앞으로 황지연과의 만남을 지속하는데 득보다 실이 많게 될지도...
그럼 어떻게 해야 되지? 난 신음소리를 내뱉으며 머리를 굴렸다. 이 새끼는 지금 나를 신나게 두들겨 패서 분노가 좀 가라앉았을 것이다. 그럼... 현실을 제대로 알려 주고 상황을 보자.
일단 응수타진.
“아.. 씨발... 뭐 이런 좇 같은 일이 다 생기지? 너.. 나보다 어려 뵈는데 지연이라는 그 여자와 어떤 사이야? 애인이야?
아.. 으... 씨발... 가만 있어봐. 이게 지금 무슨 경우야? 대리운전 기사도 아닌 놈이 술 취한 사람이 잠든 사이에 아무도 없는 곳으로 데려와 개 패듯이 패! 일단 상해죄. 그리고 협박죄.. 또 약취. 유인 죄? 그건 아닌가? 무허가 대리운전은 해당 되나?”
녀석의 얼굴색이 변했다. 똥 씹은 표정.
“너! 뭐하는 놈이야? 조직에 있는 놈이야? 아님... 설마 그 여자와 애인 사이라고 날 이렇게 팬 건 아니지? 그게 사람 팰 권리가 돼?”
음.. 갑자기 벙어리가 된 녀석을 보니 한 대도 못 때리고 맞기만 한 게 오히려 잘한 일인듯 싶군.
“그래 더 때려봐. 씨발. 그 여자애한테 니 인상착의 대면 대충 답 나오겠지. 나도 병원에 누워서 돈 좀 벌어보자. 너! 잘못 걸렸어. 요즘 거리마다 깔려 있는 게 CCTV야. 나 때리고 도망가면 못 찾을 줄 알아. 어떻게든 잡혀! 이 새끼야.”
“...”
대충 상황이 반전될 기미가 보이는데... 이 놈은 나와 황지연이 모텔에 함께 들어가는 걸 보고 밖에서 기다렸을 것이다. 눈이 뒤집힌 채로... 그래서 앞뒤를 못 재고 내게 주먹을 휘둘렀을 것이고. 나름대로 상황을 되돌리고 싶겠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차라리 날 죽이시던지... 그래서 아무도 모르는 곳에 파묻어. 너와 내가 연결고리가 밝혀지지 않는 다면 또 알아? 완전범죄가 될지. 안양평촌역 부근에서 대리운전으로 집에 간다고 마누라한테 이야기 한 게 좀 문제가 되긴 하겠지만...”
녀석이 고개를 떨군 채 입을 다물고 움직이지 않는 사이에 나는 천천히 일어나 담배를 물었다. 한 대를 다 피울 동안에도 녀석은 입을 열지 않았고 난 이곳에서의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옆구리를 잡고 천천히 차 뒤로 타며 말했다.
“나 아직 술 안 깼어. 일단 우리 집 앞으로 가서 이야기하지.”
잠시 기다리자 녀석이 탔고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킨다.
“00아파트. 판교동 주민센터 근처로 가. 아니 그 전에 병원 응급실에 좀 들려야 할 것 같은데... 갈비뼈가 나간 것 같아. 입 안쪽도 찢어 졌고... 분당 쪽으로 먼저 가.”
10여분 후 분당 00병원 응급실에 도착했다. 녀석은 주저주저하며 밖에 서 있으려 했으나 난 녀석에게 “설마 나한테 계산하라는 건 아니겠지?”라고 말하며 그 놈을 끌고 들어갔다. 물론 여기까지 온 이상 도망갈 걱정은 별로 없었으나 카드로 계산을 하거나 병원 CCTV에 그 녀석이 찍히면 아예 허튼 생각은 포기할 것이다.
밝은 데서 본 녀석의 얼굴은 굳어 있었지만 반 곱슬머리에 코가 오똑하고 눈썹이 짙은 상당한 미남이었으며 키는 얼핏 보아 나보다 약간 작았지만 입고 있는 옷에서 좀 있어 보이는 듯한 인상을 풍겼다. 난 녀석에게 겁을 주기 위해 갈비뼈가 부러졌다고 이야기 했으나 그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금이 갔을 가능성은 있어 X-레이와 MRI 검사를 했고 입 안쪽이 찢어진 것에 대해서도 진찰을 받았다.
와이프에게 전화를 걸어 접촉사고가 나서 분당에 있는 병원 응급실에 왔는데 곧 끝나고 간다고 이야기를 했다. 많이 다친 건 아니냐고 걱정을 하는 눈치였으나 그냥 형식적인 절차라고 말을 하니 빨리 오라고 하며 전화를 끊는다.
일단 움직일 수 있으니 집으로 갔다가 진찰 결과는 내일 와서 듣기로 한 후 병원비를 내기 위해 수납을 하는 곳을 찾는 중에 대기실에서 난 녀석에게 말했다.
“이제 다시 이야기를 해볼까? 저기 앉아서 커피 한 잔 하지.”
“...”
난 커피를 뽑아 녀석과 대기실에 놓여 있는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하지만 나 역시 그냥 보낼 수 없어서 일단 잡아 놓기는 했지만 뚜렷한 무언가, 이 상황을 어떻게 몰고 가야 하는지에 대해 감이 잡히지 않아서 커피를 마시며 생각을 정리했다.
하나씩 생각해보자. 하나씩 천천히.
우선 난 황지연과의 관계에 녀석이 끼여 드는 게 싫다. 하지만 이 녀석과 황지연과의 확실한 관계를 아직 모른다. 먼저 그 걸 알아내야 하지만... 그 걸 알아내면서 녀석이 황지연이 뭐하는 여자인지 나에게 털어 놓게 하는 건 조금 위험할 수 있다. 나와 나눈 이야기 역시 그녀에게 들어갈 수 있으니... 그렇다면 이 대화를 끌고 가는 게 만만치는 않을 듯 하고..
그 전에 이놈이 나와 황지연이 모텔에서 나오는 걸 어떻게 보게 됐는지도 알아내야 한다. 세상이 아무리 좁다고 모텔 앞을 지나가다 보지는 않았을 테니... 역시 이쪽도 너무 깊이 들어가면 내가 알아서는 안 될 일들이 녀석의 입에서 튀어나올 수 있어 위험하긴 마찬가지.
상해죄나 협박죄 운운하자 갑자기 약해진 녀석의 직업은 무얼까? 그것부터 알아볼까? 그런 전과들이 치명적으로 발목을 잡을 정도면 이놈 역시 공직에 있을 지도... 게다가 이 놈은 과거 황지연의 남자일 것이고 그럼 그녀가 대학교 2학년 때 만났다던 첫사랑일 가능성도 분명히 있는데 그 짐작이 맞다면 경찰대학에 다니는 여자를 사귈 정도의 간판이 있는 놈이다.
아! 씨발놈이 어디서 갑자기 나타나가지고 다된 밥에 재를 뿌리는 건지. 머리 아프네.
그래도 내가 먼저 바운더리를 치고 가야 한다.
“보아하니 나보다 좀 어려 보이는데 말끝마다 반말 하는 게 좀 기분 나쁘거든. 나 73년생인데 나보다 더 나이 많으면 말 내려도 참아 주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올려. 니가 어떻게 나오는가에 따라서 약간 생각이 바뀔 수도 있으니까.”
“...”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 고분고분히 대답하는 게 좋을 거야. 만약에 앞뒤가 안 맞는 말을 하거나 억지를 부린다면 여기서 나가는 대로 경찰서에 가서 신고 할 거야. 그럼 대리운전업 종사자가 아닌 사람이 허위로 대리운전을 하고 내게 상해를 입힐 뚜렷한 이유가 없으니 니가 말한 지연이라는 여자에 관한 것도 그 곳에서 이야기해야 하겠지. 넌 전과자가 될 것이고. 무슨 말인지 알겠어?”
“...”
대답이 없다. 하긴 자존심이 엄청 강해 보이는 놈이라 그 정도 가지고 바로 무릎을 꿇지는 않을 줄 짐작 했지만...
“알아들은 걸로 간주하고 묻는다. 너 나에 대해 무얼 알고 있지? 아는 걸 모두 이야기해봐.”
“... 아까 지연이와 모텔에서 나오는 걸 봤소. 그걸 보고 따라가서 대리운전을 하긴 했지만 형씨에 대해선 잘 몰라.”
이 새끼. 처음부터 거짓말이다. 그걸 캐는 건 어렵지 않은 데 녀석이 쓸데없는 이야기를 늘어 놓을까봐 함부로 묻지도 못하겠고... 참... 지랄이다.
“그럼 치정 때문에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는 거군. 그 여자와 모텔에서 나오는 것도 우연히 봤을 테고. 맞아?”
“맞소. 보아하니 형씨도 유부남으로 보이는데 간통 아닌가?”
오호라. 이 놈 봐라. 넌 간통이니 함부로 들쑤시지 말라 이건가?
“간통? 나 겁주는 거야? 후후후.. 좋아. 가지. 분당경찰서가 제일 가깝나? 그 여자하고 하룻밤 잤을 뿐이니 마누라한테 용서를 빌어 봐야지. 하지만 너 역시 대가를 치룰 마음의 준비를 해둬. 만의 하나 우리 마누라가 용서를 안 받아줘서 날 간통죄로 고소한다면 아마 니 애인인 것 같은데 그 지연이라는 여자도 경찰서 좀 드나들어야 할 거야.”
난 자리에서 왼쪽 옆구리를 잡으며 일어났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가 병원 현관 문을 밀고 나가려 할 때 녀석이 쫓아와 팔을 잡으며 말한다.
“잠깐만요. 원하는 걸 말해 보시오. 돈이요? 액수를 이야기 해 보시오.”
“돈? 너 돈 많은가 보다. 그런데 어차피 경찰서 가서 사건 처리해도 넌 나하고 합의 봐야 돼. 그 때 다시 이야기 하자고.”
“만약 사건 처리를 하지 않는 다면 합의금을 더 생각해 드리겠소.”
이 새끼가 이제 노골적으로 나오네. 합의금 받고 황지연을 포기하고 김유미 쪽으로 갈까? 어차피 황지연의 조건을 들어주자면 김유미와는 만나기 힘들 것 같은데...
“돈 먹고 떨어져라 이거야? 야! 얼굴이 이 모양이 되고 갈비가 왔다갔다 하는 데 전후 사정도 모르고 돈 받고 떨어져! 돈 있는 놈은 기분 나쁘면 주먹 휘둘러도 된대? 내가 분명히 이야기 했을 텐데. 묻는 말에 제대로 답하지 않으면 전과자 될 각오 하라고... 니 눈엔 내가 돈에 환장한 놈으로 보여?”
“...”
“마지막 기회를 주지! 내가 묻는 말에 대답 하는 걸 들어보고 앞뒤가 안 맞으면 더 이상 잡을 생각하지마. 아예 112로 신고해서 순찰차를 병원으로 불러 버릴 테니까...”
“...”
나도 진퇴양난이다. 이 상황을 내가 원하는 쪽으로 끌고 갈수는 있을까? 내가 원하는 게 뭔지도 애매한 상황이 돼버렸다.
일단 황지연과의 만남이 보장된다면 난 김유미를 포기하든 아니면 당분간 만남을 보류하려 했다. 두 여자 모두 확실치 않을 때는 어떤 쪽이 튼튼한 줄인지 몰라 엮어 보려 했지만 오늘 만남으로 황지연과의 만남이 어느 정도 보장이 된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갑자기 끼어든 이 말쑥하게 생긴 녀석 때문에 다시 복잡해졌다. 이놈을 깨끗하게 몰아내는 게 힘들어 진다면 황지연 역시 썩은 밧줄이 될지도...
앞뒤 정황을 파악해서 선택에 도움을 받으려 했으나 이 새끼는 헛소리만 하고 있으니 참...
난 다시 대기실에 있는 의자로 걸어가 앉았고 녀석이 따라오자 어쩔 수 없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나에 대해 알고 있는 걸 다 말해! 사실대로 말하는 게 좋아! 하나를 숨기려 하면 뒤에 있는 것도 다 걸리게 되는 법이야. 한 번만 더 감추고 이야기하는 게 걸리면 그 땐 나도 법적으로 나가는 수 밖에 없지 않겠어?”
휴우. 녀석이 한숨을 한 번 쉬더니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름, 직업, 나이, 주소... 신상에 관한 건 대부분 알고 있소.”
“내가 전직이 뭐라는 것도 알고 있나?”
“알고 있소. 예전에 경찰을 2년 정도 하셨더군.”
음.. 황지연이 내 뒷조사를 부탁한 줄이 이 녀석인가? 그럴 수도 있겠는데... 그럼 이 놈도 검찰이나 경찰 쪽 인물이겠군.
“그럼 이야기 하는 게 좀 쉽겠는데... 넌 뭐하는 사람인데 나에 대해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지?”
“경기도 △△경찰서 지능수사팀장입니다. 지연이와는 학교 선후배 사이였소.”
우라질. 이 자식 황지연의 첫 남자인 것 같은데... 이러다 그 여자가 경찰인 것도 다 부는 거 아닌 가 모르겠다. 난 질문의 방향을 틀어야 했다.
“그 여자와 내가 모텔에 들어가는 걸 보고 있었나?”
“그렇소. 술을 마시러 들어가는 걸 보고 근처 카페에서 나오기를 기다렸소.”
“어느 쪽을 따라 온 거지? 나야, 아님 그 여자야?”
“그건... 지연이요. 실은 지연이가 형씨에 대해 조사를 부탁해서 당신 회사 인사과와 전에 근무했던 00경찰서를 찾아 가서 알아 보았는데 밤 9시 경에 우리 집 근처로 찾아왔기에 만나서 자료를 주었소. 무슨 일 때문이냐고 물어도 대답이 없고 차 한잔 하고 가라고 해도 선약이 있다고 가기에 누굴 만나러 가는 지 궁금해서 뒤를 쫓게 되었소.”
그게 다야? 후배가 간다고 미행을 해?
“그 여자와 어떤 관계인지 말해봐. 자세히.”
“음... 난 지연이와 6년을 넘게 만나던 사이였소. 물론 사랑한다고 믿었었고 곧 결혼을 하려고 했지. 그러던 중에 어느날부터 그녀가 날 피하기 시작하더니 몇 달 뒤에 어떤 남자와 결혼을 합디다.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소. 그게 5년 전 일이요.”
그러니까 황지연과 몇 년 동안 같이 잠을 자는 사이였는데 이유성에게 빼앗겼다 이거 같은데...
“아직도 그 여자에게 미련이 남았다 이건가? 5년 전에 결혼한 여자에게...”
“... 지연이를 한동안 못 잊었지만 그래도 마음 속에서 지우기 위해 애썼습니다. 그런데 몇 달 전에 지연이가 강원도로 갔다는 소식이 들렸고 두 달쯤 전에는 갑자기 전화가 와서 만났는데 술을 마시며 나 오빠랑 헤어진 벌을 받는 것 같다는 이야기만 되풀이 하더군요. 난 미칠 것 같았소. 나와 결혼해서 내 아이를 낳아야 했던 여자가 힘들어 하는 걸 보고 있자니...
그리고 며칠 전 당신에 대해 좀 알아봐달라는 부탁 전화를 받았고 오늘 만났는데 지연이가 급하게 어디론가 가는 걸 보니 따라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소. 그녀에게 여자로서 감당하지 못할 일이 생긴 게 아닐까 걱정이 돼서...”
그래도 지능수사팀장이라더니 말솜씨는 괜찮네. 이놈은 황지연이 경찰이라는 사실은 쏙 빼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거기다 오늘 나와 있었던 일을 그녀에게 알리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야 약간 풀릴 기미가 보이는데...
“내가 그녀와 모텔에서 왜 나오게 됐는지 궁금하다고 했지? 지금도 그 걸 알고 싶어?”
“솔직히 이야기 하면 난 당신이 지연이의 약점을 잡고 협박하는 게 아닌가 의심이 됐소. 그런 일이 없다면 그녀가 왜 당신 같은 사람과 ...”
그래서 다짜고짜 날 두들겨 팼군. 우씨. 정말 기분 엿 같네. 이놈의 이야기는 황지연은 자기 같은 사람과 만나고 애 낳고 그럴 여자이긴 하지만 나 같은 놈과는 절대 침대에서 짝짜궁을 할 리 없는 여자라는 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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