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위에 눌려 식은 땀을 흘리며 잠을 깼다. 다시 잠을 청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몇 시간이 흘러 동이 틀 때까지 내 머릿속에 계속 반복되는 한 가지 생각은 난 미정이를 어떤 방식으로든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미정이의 동네 단짝 친구도 모르는 첫 남자를 찾는 건 쉽지 않은 일이 될 것 같았다. 어쩌면 내가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사람일지도...
난 할머니께 양해를 구하고 사진첩을 들고 남해시 소재지의 제법 큰 현상소로 찾아 갔다. 그리고 미정이의 사진첩에 있는 사진들 중 그 애가 살던 집에서 찍은 사진은 제외하고 같은 장소에서 여러장을 찍은 사진은 한장만 택해서 모두 복사를 맡겼다. 복사를 맡긴 사진은 아무래도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 터라 그런지 몰라도 사진이 많지는 않아 모두 70장 정도가 됐는데 그 중 유년시절 미정이의 동네에서 찍은 것으로 보이는 사진이 20장 정도였다. 사진을 맡긴 후그 날은 남해시에서 자고 다음 날 아침 사진을 찾아 다시 미정이의 집으로 갔다.
할머니께 말씀을 드리고 그 애 방으로 들어가 중 3때까지 다이어리를 모두 꺼내 두고 사진에 찍혀 있는 날짜와 대조해서 소풍이나 운동회 등 행사의 경우 사진 뒤에 사연과 장소를 적었다. 그리고 그런 방식으로 파악이 안 돼는 것은 할머니께 들고 가 물어 보았다.
그렇게 50여장의 사진 속의 장소가 어딘지 알아둔 뒤에 다시 남은 사진을 들고 친구 선희네 집으로 갔다. 그리고 마침 집에 있던 선희에게 나머지 사진 속의 장소를 물어 보았다. 선희는 열 장 정도의 사진 속의 배경이 어딘지 알려 주었고 남는 건 열장 정도 였는데 그 중 4~5장은 날짜 상으로 볼 때 경기도에서 다방 일을 시작한 이후 사진인 듯 했고 나머지 사진 속의 장소는 같이 찍혀 있는 친구의 이름을 선희가 알고 있어서 알아보고 연락을 준다고 했다.
선희는 또 중학교 때 수영부였던 친구 유진이의 연락처를 알아내서 통화를 했는데 유진이에게 미정이가 중학교 3학년 시절 남자를 만나는 것을 본 기억이 있냐고 물었더니 그런 일 모른다고 대답하기에 내게 유진이의 전화번호를 알려줘야 하나 말아야하나 고민 중이었다는 말을 했다. 난 그 애에게 물었다.
“그 유진이라는 친구가 지금 남해에 있나요?”
“아니요. 부산에 있다고 했어요.”
“음. 그렇군요. 혹시 선희씨는 그 친구의 대학교와 학과는 알고 있어요?”
“정확히는 모르지만 그 건 금방 알아봐 드릴 수는 있어요. 그런데 왜 그러시죠?”
“다음 달에 부산에 갈 일이 있어서요. 혹시 그 때 시간이 되면 연락 한번 해보려구요. 만나기 싫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선희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다른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학교 등을 물어본 후에 서유진이라는 친구의 대학교와 학과, 핸드폰 번호를 적어 주었고 난 그 걸 받고 나서 다시 미정이의 할머니 집으로 갔다. 그리고 그 곳에 잠시 앉아 있다가 할머니가 잠시 부엌일을 하는 사이 미정이의 중학교 시절 다이어리를 가지고 갔던 가방에 담고 또 찾아오겠다는 인사를 드리고 그 집을 나왔다.
그리고 그 동네를 벗어나 미정이의 중학교 시절 친구 유진이를 만나기 위해 부산으로 차를 몰았다. 선희에게는 다음 달에 갈 일이 있어서라고 이야기 했지만 그건 바로 찾아간다고 하면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고 내가 직접 유진이에게 그 사진 속에 있는 코치에 대해서도 물어 봐야 했다.
남해에서 부산까지 운전하는 몇 시간 동안 이런 저런 생각이 들었고 가설이지만 누군가 미정이의 방으로 몰래 침입해서 강간을 했다면 미정이의 반응은 어땠을까하는 의문이 떠올랐다. 사춘기 시절 강간을 당했다면 부모도 없이 할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던 그 애는 어떻게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다시 학교를 다녔을까?
휴직하기 전에 내가 근무하던 곳 마을에서도 강간 사건이 벌어져 고소가 들어온 일이 있었다. 70대 노인이 16세의 정신지체 여자아이를 성폭행했다는 내용이었는데 노인은 혐의를 부인했고 여자아이를 보호하고 있던 여자 무속인(나이가 50대 초반 정도로 보였었다)과 그 여자아이는 계속해서 그 노인이 수차례에 걸쳐 성폭행을 했다고 주장했었다.
난 양쪽 관계자를 모두 만나봤는데 여자아이의 말은 계속 달라졌다. 두 번 했다고 하다 네 번 했다고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저녁이었다고 했다고 낮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무속인은 그 노인이 한 번 할 때마다 과자값으로 천원을 쥐어주고 수차례에 걸쳐 성폭행을 했다는 일관된 주장을 했지만 당사자가 아니었고 노인은 무슨 소리냐고 저 모자란 아이하고 그 짓을 한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냐고 살다보니 별 일을 다 당한다고 계속해서 발뺌을 했었다.
평상시 미신이라는 걸 잘 믿지 않는 나는 그 무속인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었고 경찰서로 사건을 넘겼다. 하지만 그 무속인이 파출소를 방문했을 때 당시 같이 근무중이던 송순경은 그 여자에게 나를 가리키며 이 사람은 앞으로 어떻게 될 거 같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나를 한 번 슬쩍 본 그 여자는 이렇게 애기했다.
“저 사람은 뭐든지 쉽게 할 사람이네요.”
난 그 말을 들은 이후 한동안 그게 무슨 의미인지 생각해 보았다. 그러면서 후회했다. 무속인 자체를 별로 믿지 않는 성격이 아니었다면 다시 물어보면 설명을 해 주었을 텐데 그 여자가 갈 때까지 별 생각 없이 일을 하느라고 바빴었고(무슨 일을 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가고 나서야 혼자서 무슨 말이지 생각을 해보려니 그 무속인이 무슨 뜻으로 그 말을 했는지 도대체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뭐든지 쉽게 한다.
좋은 의미로 보면 일의 원리 같은 걸 알아서 다른 사람에 비해서 쉽게 해낸다.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지만 일을 너무 생각 없이 한다는 의미로도 해석을 할 수 있다.
그 여자는 내가 자신과 그 정신지체 여자아이, 그리고 70대 노인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하고 대화하는 것만 보고 그렇게 이야기 했다. 내 얼굴을 보고 관상을 본 건지 아님 그 대화 속에서 내 말투를 보고 짐작을 한 건지도 궁금해졌다.
그게 아니면 그 여자 무속인은 누군가 그런 질문을 하면 의례적으로 그냥 그렇게 답하는 사람일 지도 모른다. 그 답은 대부분의 사람에게 적용할 경우 특별히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하기 어려운 약간은 모호한 의미를 담고 있으니까...
그 지체장애 여자애는 내가 몇 가지 질문을 할 때도 사탕을 물고 약간 웃음을 지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그 일에 대해 이야기 했다.
“아저씨가 그 짓을 했어요.”
그 여자애는 70대 노인을 아저씨라고 표현했다.
“그 짓이 뭔데?”
“내 옷을 벗기고... 만지고 그랬어요.”
그 아저씨가 좇을 니 보지 안에 넣었니? 라고 묻고 싶었지만 그렇게 묻자니 좀 이상해서 약간 다르게 질문했다.
“그 아저씨도 옷을 모두 벗고 니 옷을 모두 벗겼니?”
“예...”
“그리고 그 다음엔 아저씨가 어떻게 했니?”
“내 배위에 올라가서 그걸 집어넣었어요.”
“그게 뭐지?”
“고추.. 고추.. 흐흐흐”
그 이야기를 듣고 난 더 조사해 볼 필요가 분명히 있어 보여 동향보고를 하고 경찰서로 사건을 넘겼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사건은 종결됐다. 그 노인이 정신지체아를 보호하고 있던 무속인과 합의를 했다고 들었는데 어쩌면 그 여자 무속인은 그 돈을 노리고 그 사건을 신고 했을 것이다. 더 이상의 진실은 알 수가 없었지만...
미정이가 강간을 당했었다면 그 이후 어떻게 했을까? 아는 사람이었다면 돈을 받고 합의를 할 수도 있지만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하지만 내가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미정이는 강간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였다.
그 이유는... 물론 100% 확실한 것이 아니라 추측이지만 사춘기 시절 강간을 당한 후유증까지 극복하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다방으로 취업까지 했던 아이가 나와의 만남 정도로 자살을 한다는 것은 무언가가 맞지 않는다. 엄청난 충격에도 회복했던 사람이 그보다 작은 상처에 세상을 버리다니...
누군가와의 만남에서 실연을 당했다. 가까스로 추슬러 마음의 문을 닫고 살아가다 또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열었는데 그 남자는 자신을 여자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욕정의 대상으로만 보았을 뿐이다. 그 걸 확인하는 순간 멘탈이 붕괴됐고 살기가 싫어져 농약을 마시게 되었다. 이게 더 설득력이 있어 보였다.
결국 난 이전의 누군가를 찾아내야 한다. 상황이 그다지 희망적이지는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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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컨디션이 그렇게 좋지 않아 수요일까지 쉬고 목요일 출근을 해서 밀린 일을 처리하면서 오전을 보냈다. 오후에 생산라인을 둘러보고 있을 때 황지연에게 문자가 왔다.
[토요일 저녁 시간 어때?]
[응. 괜찮아]
[그럼 어디서 볼까?]
[장어구이 먹을래? 팔당호 근처에 있는데 맛있어]
[상호가 뭐야? 네비에 나올래나?]
[감나무집. 나올 거야. 인터넷 검색 해보든지]
[응. 거기서 7시]
[그래]
토요일이면 아들의 수업이 있는 날. 김유미와 만나게 되는 날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김유미에게 이번 주에 연락을 한다고 말했었는데 하지 않았다. 토요일에 가서 넌지시 당분간 만나기 힘들 것 같다고 그럴듯한 핑계를 대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냥 놔둬볼까? 그럼 김유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한데...
퇴근하기 조금 전 핸드폰으로 전화가 걸려 왔다. 낯선 번호.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저 선승철입니다.”
난 깜짝 놀랐지만 태연하게 말을 했다.
“아. 선승철씨. 무슨 일로?”
“몸 좀 괜찮아지셨으면 술 한 잔 같이 하고 싶은데 시간 좀 내 주세요.”
“응? 술? 그러지 뭐. 언제?”
난 의식적으로 약간 말을 내렸다. 우리나라는 동방예의지국이고 연장자는 조금이라도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다. 경찰서 간부야 직업일 뿐이고.
“토요일 저녁 어떠세요?”
토요일 저녁? 선약이 있는데... 라고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이 자식 혹시? 뭔가 이상하다.
“토요일? 아직 약속은 없는데... 내가 30분 내로 다시 전화해줄게. 주말이라 나가려면 와이프한테 미리 허락을 받아야 하거든.”
“그럼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전화를 끊었다. 우리 와이프는 나름대로 바쁘고 아들이 내가 있으면 공부는 안하고 놀기만 한다는 불만 때문에 내가 어딜 가서 몇 시에 들어오든지 별 신경 안 쓰는 사람이다.
문제는 선승철이 왜 날 보자고 했으며 하필이면 토요일 저녁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그 녀석에게 황지연의 외로움에 대해 이야기를 했고 녀석은 내 뒷조사를 자신에게 부탁한 것에 대한 나름의 이유를 그녀가 자신을 다시 만나기 위해서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주중에, 혹은 오늘 선승철은 그녀에게 토요일에 만나자고 했을지 모른다. 강원도에 있는 여자와 가장 만나기 좋은 시간은 토요일 일테니... 황지연이 그 녀석과의 만남을 선약이 있다는 이유로 아니면 나와의 만남을 염두에 두고 있어 거절했다면...
선승철은 내 말을 전적으로 믿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특별히 실수를 한 것은 없는 것 같지만 황지연의 마음이 내 쪽으로 움직이지 말란 법은 없으니... 녀석이 그녀에게 전화를 했을 때 그녀가 선약이 있다고 했다면 가장 먼저 날 떠올렸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그렇다면 내게 먼저 확인을 해볼 생각으로 토요일 저녁에 술 한 잔 같이 하자고 떠 보았을 지도...
난 선승철과 만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한 후에 녀석의 반응을 봐야 한다. 그 녀석이 다시 취소할 수도 있고 녀석이 그런 낌새 없이 만나자고 약속을 잡으면 그땐 황지연 쪽 약속을 취소하던지 미루던지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결국 놈을 깨끗하게 몰아내지 못한 셈인가?
녀석에게 다시 전화를 했다.
“선승철씨! 나야. 조석훈. 어디서 만날까?”
“내가 그쪽으로 가지요.”
“그럴까? 좋아. 이쪽으로 오면 내가 살게.”
난 아주 자연스럽게 녀석과 다시 만나게 된 것이 반가운 말투로 분당 정자역 부근에 있는 양대창구이집으로 약속장소를 정한 후 전화를 끊었다. 황지연과의 약속은 취소해야 되나? 혹시 선승철에게 취소 연락이 올지 모르니 내일까지 기다려 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 점심시간이 끝난 뒤 난 개인 병원으로 가서 4주 진단서를 끊었다. 폭행과 상해는 질적으로 다르니 만약 녀석의 개입이 계속된다면 내 쪽에서도 무기를 더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오후에 녀석에게 별 연락이 없어 퇴근 무렵에 황지연에게 문자를 보냈다.
[나 몸이 너무 안 좋아. 약속을 좀 미루면 안될까?]
[어디가 아픈데?]
[주중에 계속 야근을 해서 몸살이 났어. 오늘 조퇴하고 집에 와서 누워있는 중]
[그럼 언제?]
[일요일은 힘들어? 하루 더 쉬면 괜찮아질거야]
[그렇게 해. 장소와 시간은 같고?]
[응. 미안]
[몸조리 잘해. 다음부터 이러면 국물도 없어]
[응. 장어구이 내가 살게]
[어이없네. 그럼 내가 살줄 알았어?]
[저스트 키딩. 조크]
[재미없거든]
토요일 오후 김유미의 오피스텔에서 난 그녀를 보고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상담 시간에도 짧은 대답으로 일관하고 소 닭 보듯이 하다가 집으로 왔다. 무언가 연락을 하지 않은 핑계를 대려다 그 것조차 않고 날 바라보는 김유미의 시선을 슬며시 피했다.
나도 이러긴 싫지만 양다리는 체질상 안 맞는다. 황지연과 어긋나면 그 때 또 다시...
7시 경 정자역 부근 3층 대창구이집에서 선승철을 만났다. 이 빌어먹을 자식이 날 보자고 한 이유가 뭘까? 이놈만 아니면 지금쯤 황지연과 장어구이 먹고 있을 텐데..
난 녀석에게 의식적으로 말을 내렸다.
“어서와. 이 집 그런 데로 맛있거든. 두, 세달에 한번은 오게 되더라고. 뭐 먹을까?”
“아무거나 잘 먹어요. 알아서 시키세요. 몸은 좀 괜찮습니까?”
“괜찮긴... 밤마다 옆구리가 쑤셔서 잠을 푹 못자. 며칠 지나면 나아지겠지.”
“저도 마음에 걸려서 다시 한 번 뵙고 술 한 잔 사드리면서 사과도 제대로 드릴 겸 왔습니다. 오늘은 제가 살게요.”
선승철이 낮은 포복으로 기고 있었다. 대충 올리던 관계에서 오늘은 조금 있으면 형님으로 모시겠다고 할 정도다. 이 자식이 저자세로 나온다고 해도 난 긴장의 끈을 늦출 순 없다. 일단 살짝 건드려 보았다.
“아이고 황송하게 왜 이러시나? 우리 집근처인데 당근 내가 사야지. 그런데... 왜 토요일로 약속을 잡았어? 총각이 주말엔 아가씨를 만나야지.. 후후”
“아.. 그게요.. 같이 술을 한 잔 하고 싶은데 오늘 밖에 시간이 없더라고요.”
대충 받아 넘기긴 하는 데 계속 물어보면 이상하니 술이 좀 취한 후에 다시...
“주량이 얼마나 돼? 나랑 마시려면 세 병은 먹어줘야 하는데..”
“아. 저랑 비슷하시네요. 그 정도는 기본이죠.”
우리는 빠른 속도로 소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난 의식적으로 황지연에 대한 이야기를 화제에 올리지 않았지만 녀석의 입에서 비슷한 이야기라도 나오면 그 쪽으로 유도해볼 생각이었다. 이유성에 관한 이야기도...
선승철은 LG트윈스의 골수 팬이었다. 마지막 한국시리즈인 2002년도 김성근 감독과 김응룡 감독의 대결. 6차전 이승엽의 동점 홈런과 마해영의 역전 홈런을 이야기 할 때는 아쉬운 마음에 녀석의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 할 정도였다.
녀석이 이야기하는 LG트윈스의 문제는 잦은 감독 교체, 스타플레이어 위주의 팀컬러. 프런트의 입김. 10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로 인한 선수들의 패배의식 등이었는데 나름 공감이 가는 이야기라 조용히 듣고 있었다.
야구 이야기 후에 선승철은 영화 이야기를 했다. 녀석이 좋아하는 배우는 차승원. ‘선생 김봉두’를 보고 반했다는... 자신이 생각할 때는 카리스마와 부드러움. 익살스러운 이미지를 동시에 지닌 우리나라 최고의 배우라고 열변을 토했다.
그리고 "포레스트 검프"라는 영화 이야기를 한참 하더니 선승철은 화장실에 다녀온다며 일어섰다. 대창구이를 먹으며 두시간 동안 둘이서 비운 소주가 다섯 병. 난 이야기를 계속 하며 녀석의 잔을 계속 채워주기만 하고 그다지 술을 많이 마시지는 않았다.
녀석이 화장실에서 나왔고 난 술에 취한 척 이야기를 꺼냈다.
“결혼을 아직 안한 진짜 이유가 뭐야? 혹시 아직도 첫사랑을 못잊는 거야?”
“그게 잘 안돼요. 저란 놈이.. 원래 한 번 마음을 주면 죽을 때 까지거든요.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처음 사랑 끝까지...”
황지연은 첫사랑을 집착이 심한 남자라고 표현했다. 남녀 사이에서는 누군가의 그런 마음이 부담이 될 수도 있다.
“그럴거면 결혼을 한다고 할 때 죽기 살기로 말렸어야지. 5년이 지난 지금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승철씨 정도면 여기서부터 정자역까지 여자가 줄을 설텐데...”
“저도 그러려고 했지요. 그런데...”
“그런데... 뭐?”
“지연이가 절 피할 때 남자가 생겼을 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어요. 그래서 하루는 지연이의 뒤를 밟아봤지요. 그 이유가 남자만 아니길 빌면서...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카페에서 어떤 놈과 만나더군요. 바깥에서 안이 들여다보이는 통유리여서 몸을 숨기고 보고 있었는데 지연이는 나와 만날 때의 지연이가 아니었어요. 그 놈 옆에 팔짱을 끼고 앉아서 떨어질 생각도 안하더군요.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여자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시종일관 다소곳이 상기된 표정, 웃는 얼굴, 그놈에게 시선을 떼지를 않더군요. 난 아예 카페 안으로 들어가 그 커플이 보이지 않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보고 있었는데 그 놈은...”
“응.”
“한 시간이 넘을 동안 입을 연 게 2~3번 정도 밖에 안 되고 시종일관 지연이만 조잘조잘 떠들고 있었어요. 보고 있자니 어이가 없더군요.”
“그래서?...”
“그래도 가까이서 본 녀석의 얼굴은 정말 착해 보였어요. 누가 무슨 말을 해도 들어줄 것 같은... 그래서 전 나름대로 작전을 세웠어요. 그 놈이 누군지 알아낸 뒤에 내 사정을 이야기 하자. 6년을 만났고 지연이를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니 그 여자를 포기해 주면 안 되겠냐고...
그렇지 않고 혹시 뒤가 구리거나 탈법 같은 것을 하면 협박을 하자. 요즘 세상에 털어서 먼지 하나 안 나오는 사람이 누가 있겠냐?”
“...”
“처음에는 그냥 틈나는 대로 조사를 하다 나중에는 연가를 내고 그놈의 뒤를 따라 다녔지요. 그놈은 원래 고등학교 때까지 체조선수로 꽤 유망주였는데 갑자기 키가 너무 커버려서 밸런스가 맞지를 않자 그만 두게 되었더군요. 스무 살 때부터 스물 두 살 때까지는 어디서 무얼 했는지 알 수가 없고 그 이후에는 헬스클럽의 트레이너로 취직을 했어요 .”
“그런데?...”
“워낙 괜찮은 용모와 체격, 그리고 성실해서 강남의 큰 헬스클럽에서 러브콜을 받게 되었는데거기서 지연이를 만나게 됐던거죠.”
“그럼 고졸 학력의 헬스클럽 트레이너란 말인가?”
“예. 일곱 살 때 부모가 이혼을 해서 엄마와 같이 살다 열 세살 무렵에 엄마가 재혼을 하자 지금의 양부 밑에서 자랐어요. 그거 외에는 별 특이한 건 없었는데 일주일 정도 계속 뒤를 밟으니 지연이 외에 만나는 여자가 또 있더군요.”
“응?”
난 김유미를 떠올렸다.
“당시 삼십대 중반의 강남에서 잘나가는 유명한 영어 학원 원장이었어요. 유부녀였지요. 됐다 싶더군요. 그 여자와 만남을 지연이에게 직접 이야기하려다 제가 녀석의 뒤를 밟은 걸 들킬 것 같아서 그 놈에게 가서 말을 했지요. 내가 지연이의 애인이다 잠깐 이야기할 것이 있으니 조용한 곳으로 가자.”
“그런데?..”
난 정말 선승철의 이야기에 푹 빠져 눈이 동그래져 있었다. 이 자식 술 한잔 먹으니 정말 말 잘하는 놈이구나. 하긴 그 동안 그런 이야기를 누구한테 할 수 있었겠냐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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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이네요. 당분간 휴업해야 할 듯...
글 쓰다보면 지금 올리는 이런 장면들... 별다른 사건도 없고 무언가 끄는 것도 없는... 쓰는 게
힘든 것 같습니다. 지루하기도 하고..
메리 추석입니다. ^^
하지만 미정이의 동네 단짝 친구도 모르는 첫 남자를 찾는 건 쉽지 않은 일이 될 것 같았다. 어쩌면 내가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사람일지도...
난 할머니께 양해를 구하고 사진첩을 들고 남해시 소재지의 제법 큰 현상소로 찾아 갔다. 그리고 미정이의 사진첩에 있는 사진들 중 그 애가 살던 집에서 찍은 사진은 제외하고 같은 장소에서 여러장을 찍은 사진은 한장만 택해서 모두 복사를 맡겼다. 복사를 맡긴 사진은 아무래도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 터라 그런지 몰라도 사진이 많지는 않아 모두 70장 정도가 됐는데 그 중 유년시절 미정이의 동네에서 찍은 것으로 보이는 사진이 20장 정도였다. 사진을 맡긴 후그 날은 남해시에서 자고 다음 날 아침 사진을 찾아 다시 미정이의 집으로 갔다.
할머니께 말씀을 드리고 그 애 방으로 들어가 중 3때까지 다이어리를 모두 꺼내 두고 사진에 찍혀 있는 날짜와 대조해서 소풍이나 운동회 등 행사의 경우 사진 뒤에 사연과 장소를 적었다. 그리고 그런 방식으로 파악이 안 돼는 것은 할머니께 들고 가 물어 보았다.
그렇게 50여장의 사진 속의 장소가 어딘지 알아둔 뒤에 다시 남은 사진을 들고 친구 선희네 집으로 갔다. 그리고 마침 집에 있던 선희에게 나머지 사진 속의 장소를 물어 보았다. 선희는 열 장 정도의 사진 속의 배경이 어딘지 알려 주었고 남는 건 열장 정도 였는데 그 중 4~5장은 날짜 상으로 볼 때 경기도에서 다방 일을 시작한 이후 사진인 듯 했고 나머지 사진 속의 장소는 같이 찍혀 있는 친구의 이름을 선희가 알고 있어서 알아보고 연락을 준다고 했다.
선희는 또 중학교 때 수영부였던 친구 유진이의 연락처를 알아내서 통화를 했는데 유진이에게 미정이가 중학교 3학년 시절 남자를 만나는 것을 본 기억이 있냐고 물었더니 그런 일 모른다고 대답하기에 내게 유진이의 전화번호를 알려줘야 하나 말아야하나 고민 중이었다는 말을 했다. 난 그 애에게 물었다.
“그 유진이라는 친구가 지금 남해에 있나요?”
“아니요. 부산에 있다고 했어요.”
“음. 그렇군요. 혹시 선희씨는 그 친구의 대학교와 학과는 알고 있어요?”
“정확히는 모르지만 그 건 금방 알아봐 드릴 수는 있어요. 그런데 왜 그러시죠?”
“다음 달에 부산에 갈 일이 있어서요. 혹시 그 때 시간이 되면 연락 한번 해보려구요. 만나기 싫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선희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다른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학교 등을 물어본 후에 서유진이라는 친구의 대학교와 학과, 핸드폰 번호를 적어 주었고 난 그 걸 받고 나서 다시 미정이의 할머니 집으로 갔다. 그리고 그 곳에 잠시 앉아 있다가 할머니가 잠시 부엌일을 하는 사이 미정이의 중학교 시절 다이어리를 가지고 갔던 가방에 담고 또 찾아오겠다는 인사를 드리고 그 집을 나왔다.
그리고 그 동네를 벗어나 미정이의 중학교 시절 친구 유진이를 만나기 위해 부산으로 차를 몰았다. 선희에게는 다음 달에 갈 일이 있어서라고 이야기 했지만 그건 바로 찾아간다고 하면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고 내가 직접 유진이에게 그 사진 속에 있는 코치에 대해서도 물어 봐야 했다.
남해에서 부산까지 운전하는 몇 시간 동안 이런 저런 생각이 들었고 가설이지만 누군가 미정이의 방으로 몰래 침입해서 강간을 했다면 미정이의 반응은 어땠을까하는 의문이 떠올랐다. 사춘기 시절 강간을 당했다면 부모도 없이 할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던 그 애는 어떻게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다시 학교를 다녔을까?
휴직하기 전에 내가 근무하던 곳 마을에서도 강간 사건이 벌어져 고소가 들어온 일이 있었다. 70대 노인이 16세의 정신지체 여자아이를 성폭행했다는 내용이었는데 노인은 혐의를 부인했고 여자아이를 보호하고 있던 여자 무속인(나이가 50대 초반 정도로 보였었다)과 그 여자아이는 계속해서 그 노인이 수차례에 걸쳐 성폭행을 했다고 주장했었다.
난 양쪽 관계자를 모두 만나봤는데 여자아이의 말은 계속 달라졌다. 두 번 했다고 하다 네 번 했다고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저녁이었다고 했다고 낮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무속인은 그 노인이 한 번 할 때마다 과자값으로 천원을 쥐어주고 수차례에 걸쳐 성폭행을 했다는 일관된 주장을 했지만 당사자가 아니었고 노인은 무슨 소리냐고 저 모자란 아이하고 그 짓을 한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냐고 살다보니 별 일을 다 당한다고 계속해서 발뺌을 했었다.
평상시 미신이라는 걸 잘 믿지 않는 나는 그 무속인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었고 경찰서로 사건을 넘겼다. 하지만 그 무속인이 파출소를 방문했을 때 당시 같이 근무중이던 송순경은 그 여자에게 나를 가리키며 이 사람은 앞으로 어떻게 될 거 같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나를 한 번 슬쩍 본 그 여자는 이렇게 애기했다.
“저 사람은 뭐든지 쉽게 할 사람이네요.”
난 그 말을 들은 이후 한동안 그게 무슨 의미인지 생각해 보았다. 그러면서 후회했다. 무속인 자체를 별로 믿지 않는 성격이 아니었다면 다시 물어보면 설명을 해 주었을 텐데 그 여자가 갈 때까지 별 생각 없이 일을 하느라고 바빴었고(무슨 일을 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가고 나서야 혼자서 무슨 말이지 생각을 해보려니 그 무속인이 무슨 뜻으로 그 말을 했는지 도대체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뭐든지 쉽게 한다.
좋은 의미로 보면 일의 원리 같은 걸 알아서 다른 사람에 비해서 쉽게 해낸다.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지만 일을 너무 생각 없이 한다는 의미로도 해석을 할 수 있다.
그 여자는 내가 자신과 그 정신지체 여자아이, 그리고 70대 노인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하고 대화하는 것만 보고 그렇게 이야기 했다. 내 얼굴을 보고 관상을 본 건지 아님 그 대화 속에서 내 말투를 보고 짐작을 한 건지도 궁금해졌다.
그게 아니면 그 여자 무속인은 누군가 그런 질문을 하면 의례적으로 그냥 그렇게 답하는 사람일 지도 모른다. 그 답은 대부분의 사람에게 적용할 경우 특별히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하기 어려운 약간은 모호한 의미를 담고 있으니까...
그 지체장애 여자애는 내가 몇 가지 질문을 할 때도 사탕을 물고 약간 웃음을 지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그 일에 대해 이야기 했다.
“아저씨가 그 짓을 했어요.”
그 여자애는 70대 노인을 아저씨라고 표현했다.
“그 짓이 뭔데?”
“내 옷을 벗기고... 만지고 그랬어요.”
그 아저씨가 좇을 니 보지 안에 넣었니? 라고 묻고 싶었지만 그렇게 묻자니 좀 이상해서 약간 다르게 질문했다.
“그 아저씨도 옷을 모두 벗고 니 옷을 모두 벗겼니?”
“예...”
“그리고 그 다음엔 아저씨가 어떻게 했니?”
“내 배위에 올라가서 그걸 집어넣었어요.”
“그게 뭐지?”
“고추.. 고추.. 흐흐흐”
그 이야기를 듣고 난 더 조사해 볼 필요가 분명히 있어 보여 동향보고를 하고 경찰서로 사건을 넘겼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사건은 종결됐다. 그 노인이 정신지체아를 보호하고 있던 무속인과 합의를 했다고 들었는데 어쩌면 그 여자 무속인은 그 돈을 노리고 그 사건을 신고 했을 것이다. 더 이상의 진실은 알 수가 없었지만...
미정이가 강간을 당했었다면 그 이후 어떻게 했을까? 아는 사람이었다면 돈을 받고 합의를 할 수도 있지만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하지만 내가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미정이는 강간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였다.
그 이유는... 물론 100% 확실한 것이 아니라 추측이지만 사춘기 시절 강간을 당한 후유증까지 극복하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다방으로 취업까지 했던 아이가 나와의 만남 정도로 자살을 한다는 것은 무언가가 맞지 않는다. 엄청난 충격에도 회복했던 사람이 그보다 작은 상처에 세상을 버리다니...
누군가와의 만남에서 실연을 당했다. 가까스로 추슬러 마음의 문을 닫고 살아가다 또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열었는데 그 남자는 자신을 여자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욕정의 대상으로만 보았을 뿐이다. 그 걸 확인하는 순간 멘탈이 붕괴됐고 살기가 싫어져 농약을 마시게 되었다. 이게 더 설득력이 있어 보였다.
결국 난 이전의 누군가를 찾아내야 한다. 상황이 그다지 희망적이지는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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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컨디션이 그렇게 좋지 않아 수요일까지 쉬고 목요일 출근을 해서 밀린 일을 처리하면서 오전을 보냈다. 오후에 생산라인을 둘러보고 있을 때 황지연에게 문자가 왔다.
[토요일 저녁 시간 어때?]
[응. 괜찮아]
[그럼 어디서 볼까?]
[장어구이 먹을래? 팔당호 근처에 있는데 맛있어]
[상호가 뭐야? 네비에 나올래나?]
[감나무집. 나올 거야. 인터넷 검색 해보든지]
[응. 거기서 7시]
[그래]
토요일이면 아들의 수업이 있는 날. 김유미와 만나게 되는 날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김유미에게 이번 주에 연락을 한다고 말했었는데 하지 않았다. 토요일에 가서 넌지시 당분간 만나기 힘들 것 같다고 그럴듯한 핑계를 대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냥 놔둬볼까? 그럼 김유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한데...
퇴근하기 조금 전 핸드폰으로 전화가 걸려 왔다. 낯선 번호.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저 선승철입니다.”
난 깜짝 놀랐지만 태연하게 말을 했다.
“아. 선승철씨. 무슨 일로?”
“몸 좀 괜찮아지셨으면 술 한 잔 같이 하고 싶은데 시간 좀 내 주세요.”
“응? 술? 그러지 뭐. 언제?”
난 의식적으로 약간 말을 내렸다. 우리나라는 동방예의지국이고 연장자는 조금이라도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다. 경찰서 간부야 직업일 뿐이고.
“토요일 저녁 어떠세요?”
토요일 저녁? 선약이 있는데... 라고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이 자식 혹시? 뭔가 이상하다.
“토요일? 아직 약속은 없는데... 내가 30분 내로 다시 전화해줄게. 주말이라 나가려면 와이프한테 미리 허락을 받아야 하거든.”
“그럼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전화를 끊었다. 우리 와이프는 나름대로 바쁘고 아들이 내가 있으면 공부는 안하고 놀기만 한다는 불만 때문에 내가 어딜 가서 몇 시에 들어오든지 별 신경 안 쓰는 사람이다.
문제는 선승철이 왜 날 보자고 했으며 하필이면 토요일 저녁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그 녀석에게 황지연의 외로움에 대해 이야기를 했고 녀석은 내 뒷조사를 자신에게 부탁한 것에 대한 나름의 이유를 그녀가 자신을 다시 만나기 위해서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주중에, 혹은 오늘 선승철은 그녀에게 토요일에 만나자고 했을지 모른다. 강원도에 있는 여자와 가장 만나기 좋은 시간은 토요일 일테니... 황지연이 그 녀석과의 만남을 선약이 있다는 이유로 아니면 나와의 만남을 염두에 두고 있어 거절했다면...
선승철은 내 말을 전적으로 믿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특별히 실수를 한 것은 없는 것 같지만 황지연의 마음이 내 쪽으로 움직이지 말란 법은 없으니... 녀석이 그녀에게 전화를 했을 때 그녀가 선약이 있다고 했다면 가장 먼저 날 떠올렸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그렇다면 내게 먼저 확인을 해볼 생각으로 토요일 저녁에 술 한 잔 같이 하자고 떠 보았을 지도...
난 선승철과 만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한 후에 녀석의 반응을 봐야 한다. 그 녀석이 다시 취소할 수도 있고 녀석이 그런 낌새 없이 만나자고 약속을 잡으면 그땐 황지연 쪽 약속을 취소하던지 미루던지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결국 놈을 깨끗하게 몰아내지 못한 셈인가?
녀석에게 다시 전화를 했다.
“선승철씨! 나야. 조석훈. 어디서 만날까?”
“내가 그쪽으로 가지요.”
“그럴까? 좋아. 이쪽으로 오면 내가 살게.”
난 아주 자연스럽게 녀석과 다시 만나게 된 것이 반가운 말투로 분당 정자역 부근에 있는 양대창구이집으로 약속장소를 정한 후 전화를 끊었다. 황지연과의 약속은 취소해야 되나? 혹시 선승철에게 취소 연락이 올지 모르니 내일까지 기다려 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 점심시간이 끝난 뒤 난 개인 병원으로 가서 4주 진단서를 끊었다. 폭행과 상해는 질적으로 다르니 만약 녀석의 개입이 계속된다면 내 쪽에서도 무기를 더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오후에 녀석에게 별 연락이 없어 퇴근 무렵에 황지연에게 문자를 보냈다.
[나 몸이 너무 안 좋아. 약속을 좀 미루면 안될까?]
[어디가 아픈데?]
[주중에 계속 야근을 해서 몸살이 났어. 오늘 조퇴하고 집에 와서 누워있는 중]
[그럼 언제?]
[일요일은 힘들어? 하루 더 쉬면 괜찮아질거야]
[그렇게 해. 장소와 시간은 같고?]
[응. 미안]
[몸조리 잘해. 다음부터 이러면 국물도 없어]
[응. 장어구이 내가 살게]
[어이없네. 그럼 내가 살줄 알았어?]
[저스트 키딩. 조크]
[재미없거든]
토요일 오후 김유미의 오피스텔에서 난 그녀를 보고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상담 시간에도 짧은 대답으로 일관하고 소 닭 보듯이 하다가 집으로 왔다. 무언가 연락을 하지 않은 핑계를 대려다 그 것조차 않고 날 바라보는 김유미의 시선을 슬며시 피했다.
나도 이러긴 싫지만 양다리는 체질상 안 맞는다. 황지연과 어긋나면 그 때 또 다시...
7시 경 정자역 부근 3층 대창구이집에서 선승철을 만났다. 이 빌어먹을 자식이 날 보자고 한 이유가 뭘까? 이놈만 아니면 지금쯤 황지연과 장어구이 먹고 있을 텐데..
난 녀석에게 의식적으로 말을 내렸다.
“어서와. 이 집 그런 데로 맛있거든. 두, 세달에 한번은 오게 되더라고. 뭐 먹을까?”
“아무거나 잘 먹어요. 알아서 시키세요. 몸은 좀 괜찮습니까?”
“괜찮긴... 밤마다 옆구리가 쑤셔서 잠을 푹 못자. 며칠 지나면 나아지겠지.”
“저도 마음에 걸려서 다시 한 번 뵙고 술 한 잔 사드리면서 사과도 제대로 드릴 겸 왔습니다. 오늘은 제가 살게요.”
선승철이 낮은 포복으로 기고 있었다. 대충 올리던 관계에서 오늘은 조금 있으면 형님으로 모시겠다고 할 정도다. 이 자식이 저자세로 나온다고 해도 난 긴장의 끈을 늦출 순 없다. 일단 살짝 건드려 보았다.
“아이고 황송하게 왜 이러시나? 우리 집근처인데 당근 내가 사야지. 그런데... 왜 토요일로 약속을 잡았어? 총각이 주말엔 아가씨를 만나야지.. 후후”
“아.. 그게요.. 같이 술을 한 잔 하고 싶은데 오늘 밖에 시간이 없더라고요.”
대충 받아 넘기긴 하는 데 계속 물어보면 이상하니 술이 좀 취한 후에 다시...
“주량이 얼마나 돼? 나랑 마시려면 세 병은 먹어줘야 하는데..”
“아. 저랑 비슷하시네요. 그 정도는 기본이죠.”
우리는 빠른 속도로 소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난 의식적으로 황지연에 대한 이야기를 화제에 올리지 않았지만 녀석의 입에서 비슷한 이야기라도 나오면 그 쪽으로 유도해볼 생각이었다. 이유성에 관한 이야기도...
선승철은 LG트윈스의 골수 팬이었다. 마지막 한국시리즈인 2002년도 김성근 감독과 김응룡 감독의 대결. 6차전 이승엽의 동점 홈런과 마해영의 역전 홈런을 이야기 할 때는 아쉬운 마음에 녀석의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 할 정도였다.
녀석이 이야기하는 LG트윈스의 문제는 잦은 감독 교체, 스타플레이어 위주의 팀컬러. 프런트의 입김. 10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로 인한 선수들의 패배의식 등이었는데 나름 공감이 가는 이야기라 조용히 듣고 있었다.
야구 이야기 후에 선승철은 영화 이야기를 했다. 녀석이 좋아하는 배우는 차승원. ‘선생 김봉두’를 보고 반했다는... 자신이 생각할 때는 카리스마와 부드러움. 익살스러운 이미지를 동시에 지닌 우리나라 최고의 배우라고 열변을 토했다.
그리고 "포레스트 검프"라는 영화 이야기를 한참 하더니 선승철은 화장실에 다녀온다며 일어섰다. 대창구이를 먹으며 두시간 동안 둘이서 비운 소주가 다섯 병. 난 이야기를 계속 하며 녀석의 잔을 계속 채워주기만 하고 그다지 술을 많이 마시지는 않았다.
녀석이 화장실에서 나왔고 난 술에 취한 척 이야기를 꺼냈다.
“결혼을 아직 안한 진짜 이유가 뭐야? 혹시 아직도 첫사랑을 못잊는 거야?”
“그게 잘 안돼요. 저란 놈이.. 원래 한 번 마음을 주면 죽을 때 까지거든요.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처음 사랑 끝까지...”
황지연은 첫사랑을 집착이 심한 남자라고 표현했다. 남녀 사이에서는 누군가의 그런 마음이 부담이 될 수도 있다.
“그럴거면 결혼을 한다고 할 때 죽기 살기로 말렸어야지. 5년이 지난 지금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승철씨 정도면 여기서부터 정자역까지 여자가 줄을 설텐데...”
“저도 그러려고 했지요. 그런데...”
“그런데... 뭐?”
“지연이가 절 피할 때 남자가 생겼을 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어요. 그래서 하루는 지연이의 뒤를 밟아봤지요. 그 이유가 남자만 아니길 빌면서...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카페에서 어떤 놈과 만나더군요. 바깥에서 안이 들여다보이는 통유리여서 몸을 숨기고 보고 있었는데 지연이는 나와 만날 때의 지연이가 아니었어요. 그 놈 옆에 팔짱을 끼고 앉아서 떨어질 생각도 안하더군요.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여자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시종일관 다소곳이 상기된 표정, 웃는 얼굴, 그놈에게 시선을 떼지를 않더군요. 난 아예 카페 안으로 들어가 그 커플이 보이지 않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보고 있었는데 그 놈은...”
“응.”
“한 시간이 넘을 동안 입을 연 게 2~3번 정도 밖에 안 되고 시종일관 지연이만 조잘조잘 떠들고 있었어요. 보고 있자니 어이가 없더군요.”
“그래서?...”
“그래도 가까이서 본 녀석의 얼굴은 정말 착해 보였어요. 누가 무슨 말을 해도 들어줄 것 같은... 그래서 전 나름대로 작전을 세웠어요. 그 놈이 누군지 알아낸 뒤에 내 사정을 이야기 하자. 6년을 만났고 지연이를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니 그 여자를 포기해 주면 안 되겠냐고...
그렇지 않고 혹시 뒤가 구리거나 탈법 같은 것을 하면 협박을 하자. 요즘 세상에 털어서 먼지 하나 안 나오는 사람이 누가 있겠냐?”
“...”
“처음에는 그냥 틈나는 대로 조사를 하다 나중에는 연가를 내고 그놈의 뒤를 따라 다녔지요. 그놈은 원래 고등학교 때까지 체조선수로 꽤 유망주였는데 갑자기 키가 너무 커버려서 밸런스가 맞지를 않자 그만 두게 되었더군요. 스무 살 때부터 스물 두 살 때까지는 어디서 무얼 했는지 알 수가 없고 그 이후에는 헬스클럽의 트레이너로 취직을 했어요 .”
“그런데?...”
“워낙 괜찮은 용모와 체격, 그리고 성실해서 강남의 큰 헬스클럽에서 러브콜을 받게 되었는데거기서 지연이를 만나게 됐던거죠.”
“그럼 고졸 학력의 헬스클럽 트레이너란 말인가?”
“예. 일곱 살 때 부모가 이혼을 해서 엄마와 같이 살다 열 세살 무렵에 엄마가 재혼을 하자 지금의 양부 밑에서 자랐어요. 그거 외에는 별 특이한 건 없었는데 일주일 정도 계속 뒤를 밟으니 지연이 외에 만나는 여자가 또 있더군요.”
“응?”
난 김유미를 떠올렸다.
“당시 삼십대 중반의 강남에서 잘나가는 유명한 영어 학원 원장이었어요. 유부녀였지요. 됐다 싶더군요. 그 여자와 만남을 지연이에게 직접 이야기하려다 제가 녀석의 뒤를 밟은 걸 들킬 것 같아서 그 놈에게 가서 말을 했지요. 내가 지연이의 애인이다 잠깐 이야기할 것이 있으니 조용한 곳으로 가자.”
“그런데?..”
난 정말 선승철의 이야기에 푹 빠져 눈이 동그래져 있었다. 이 자식 술 한잔 먹으니 정말 말 잘하는 놈이구나. 하긴 그 동안 그런 이야기를 누구한테 할 수 있었겠냐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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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이네요. 당분간 휴업해야 할 듯...
글 쓰다보면 지금 올리는 이런 장면들... 별다른 사건도 없고 무언가 끄는 것도 없는... 쓰는 게
힘든 것 같습니다. 지루하기도 하고..
메리 추석입니다. ^^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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