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저녁 황지연과 만남을 위해 팔당호 근처 장어구이집으로 갔다. 10분전 쯤 도착해서 들어가지 않고 바깥에 있는 벤치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으려니 외제차 한 대가 주차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하얀색 BMW. 난 황지연의 소울을 기다리고 있었던 터라 별다른 관심없이 다시 시선을 주차장 입구 쪽으로 돌렸는데 잠시 후 그 차 운전석에서 썬그라스를 낀 날씬한 여자가 내렸다. 몸에 붙는 골프웨어 위로 스포츠 재킷이 무심코 지나가다가도 다시 돌아볼 만큼 잘 어울리고 있었다. 그 여자는 내가 있는 쪽으로 똑바로 걸어와서 썬글라스를 벗었다. 황지연이었다.
“몰라본 눈치네. 왜? 놀랐어?”
그럼 갑자기 외제차 끌고 나타나는데 안 놀라겠냐?
“응. 조금. 썬글라스가 잘 어울려서 쳐다보고 있기는 했지만 넌 줄은 몰랐어.”
“썬글라스 때문에 본 게 아니라 몸매가 잘 빠져서 본 거겠지. 나야 익숙한 일이지만... 호호호”
이 여자 다시 만나면 좀 어색할 줄 알았는데 순식간에 편안해졌다. 의외였다.
황지연과 식당 안에 들어가서 장어구이에 소주를 마셨다.
“어디 다녀오는 거야?”
“응. 아는 사람들하고 골프장에...”
“골프도 칠 줄 알아? 계속 사람 놀래키네.”
“그냥 저냥 배우는 중. 요즘은 이거 안하면 대화도 안 되고 회사에서도 따 당해.”
“응..”
별로 할 말도 없고 해서 술을 마시고 있으려니 황지연이 미소를 띠며 묻는다.
“아저씨. 기 죽었어? 조용하네. 호호호.”
“아니. 그냥...”
“아저씨 기 죽이려고 외제차 끌고 온 게 아니라 원래 오늘 오후에 가평쪽에서 라운딩 약속이 있었어. 그리고 난 직원들하고 골프 칠 때 아니면 회사 다닐 때 타는 차 안가지고 가. 집에 갔다 올 시간도 부족했었고...”
“응... 차가 두 대야?”
황지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 다시 술 한 잔을 입에 털어 넣고는 빈 잔에 술을 채웠다. 그냥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공부를 열심히 해서 경찰대학에 입학했던 건줄 알았는데 나만의 착각이었나?
어쨌든 난 조용히 술을 마시는 수 밖에 없었다. 난 그녀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아내서 그녀와 나 사이의 균형이 깨지는 게 싫었으니... 황지연이 스스로 이야기를 하는 것까지 막을 수야 없겠지만 그 것도 나중을 생각하면 별로 원하는 바는 아니다.
“갑자기 벙어리가 되셨네?”
“...벙어리는 무슨.. 술 마시는 것도 죄야? 하여간 시비는 잘 건다니까..”
“아저씨한테 묘한 친밀감이 들었었는데 그 이유를 몰랐거든. 그런데 갑자기 생각났어. 아저씨는 우리 아빠하고 닮은 것 같아.”
“어떤 점이?”
“우리 아빠는 무서운 사람이야. 협상에 강하지만 항상 약한 척을 해서 사람들이 속아 넘어갈 때가 많고... 아빠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엄마와 난 짐작도 못할 때가 많거든. 아빠는 무언가 예의에 어긋나거나 사람들을 무시하는 사람들에게 쌍스러운 욕을 내뱉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감정을 이해하는 걸 중요시하는 사람이야. 지금도 난 아빠를 이해 못할 때가 많지만...”
“아빠를 좋아해?”
“응. 그건 왜?”
“아빠를 좋아하면 칭찬일테고 싫어하면 욕인것 같아서.”
“칭찬에 가까워. 아빠를 싫어하는 딸보다 좋아하는 딸이 많잖아.”
“그건 그래.”
갑자기 오늘 황지연과 잠자리를 같이 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들었고 너무 멀어보였다. 하긴 난 그녀가 경찰 간부인 걸 알았을 때도 물러서야 겠다는 생각을 했었으니까.
시간이 9시가 될 무렵 그녀와 나 사이에 빈 소주병이 4병 있었다. 그녀를 만나기 전 내 계획은 오늘 만남에서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끌어가고 싶었고 황지연이 내일 출근하다고 일찍 가야한다거나 아니면 몸이 피곤하다거나 핑계를 대면 한번 쯤 더 손을 잡아끌기는 하겠지만 강하게 잡을 생각은 없었다. 만날때마다 그녀의 몸만 탐한다는 인상을 주기는 싫었기 때문인데 갑자기 외제차를 끌고 나온 걸 보니 분위기를 끌고 가기는 커녕 도리어 머리 속이 복잡해져서 빠른 속도로 술을 마셨다. 술이라도 마셔야 들이대볼수 있을 것 같았다고 해야 되나...
“아빠도 너처럼 술을 잘 드셔?”
“아니. 우리 아빠는 한 잔만 드셔도 얼굴이 빨개지셔서 술을 잘 안 드셔. 가끔 드시긴 하는데 소주 반 병 정도. 엄마가 술을 잘 드시는 편인데 난 엄마를 닮은 것 같아.”
“그럼, 외동딸이야?”
“응. 아빠가 아이가 많은 걸 원치 않으셨대. 난 우리 아빠가 서른 다섯 살에 낳은 딸이야. 아빠는 이십대 후반에 엄마를 만나셔서 결혼을 했는데 결혼식을 올린 후 1년 만에 하시는 사업이 파산했어. 그리고 다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을 때까지 5년이 넘게 걸리셨고 그 때서야 아이를 가질 생각이 드셨다고 했어.
우리 아빠는 평범한 사람들과는 좀 다른 분이야.”
“어떤 면에서?”
황지연의 표정은 내내 밝았는데 아빠 이야기를 할 때는 더더욱 들뜬 표정이었다. 술도 적당히 취한 그녀는 기분 좋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똑같은 걸 보고도 다른 이야기를 하는 분이야. 신문기사를 읽어도 아빠는 기사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다른 걸 이야기 해. 이를 테면 그 사건이 일어나게 된 배경 같은 것들. 기자는 그런 걸 쓰지도 않았는데 우리 아빠는 기사 속의 실마리를 모아 추측해 내시거든. 나중에 확인 해보면 대부분 맞아.
언젠가 내가 아빠한테 ‘난 왜 아빠처럼 안 돼지’하고 물은 적이 있어. 그랬더니 아빠가 하시는 말씀이...”
“응..?”
“니가 그게 되려면 세상을 세 번 쯤 다시 살아야 된대. 그게 무슨 말이냐고 다시 물었는데 아빠는 이렇게 이야기 하셨어. 이십대 초반에 아빠는 두 번 죽으려고 하셨대. 난 이해가 되지 않아서 왜냐고 물었더니... 아빠 대답에 깜짝 놀랐어.”
“뭐라고 하셨는데?”
“이류 인생을 사느니 죽고 싶으셨대.”
“...”
난 입을 다물었다. 삼류도 아닌 이류 인생을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 그런 분의 외동딸이었단 말인가?
“더 놀라운 이야기를 해줄까? 내가 저번에 아저씨에게 인천에서 자랐다고 했지? 그게 아니라 실은 우리 집은 나 어렸을때부터 강남이었는데 아빠는 내가 중학생이 되자 강남에 있는 학군에서 학교를 다니지 못하게 하셨어. 부모가 부자인 애들 중에 썩어 빠진 애들이 너무 많다고... 그냥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 사이에서 학교를 다니게 하시려고 날 인천에 있는 아빠 소유의 다세대 주택으로 주소를 옮기게 하고 거기서 중, 고등학교를 다니게 했어.
덕분에 난 아침 6시에 일어나서 엄마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인천으로 가야 했고. 그것 뿐만 아니라 집에 외제차 놔두고 국산 승용차로 통학을 시켰는데 다른 애들에게 절대 집이 부자라는 걸 눈치 못 채게 하라고 하셨어. 웃기지?”
“썩어 빠졌다는 게 무슨 의미야? 어렵네..”
“응. 나도 어릴 때라 시키는 대로 했고 특별히 아빠에게 반대한 적은 없는 데 고등학교 2학년 때 아빠에게 왜 그래야하냐고 정색을 하면서 물어본 적이 있어. 그랬더니 아빠 말씀은 내가 인생의 다른 면, 여러 가지 모습을 보게 하고 싶으셨대. 부자집 애들 중에는 자기들이 태생부터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하다는 왜곡된 생각- 그걸 아빠는 썩어 빠졌다는 표현을 하셨는데 - 을 가진 애들이 많거든.
아빠는 그런 애들은 강한 게 아니라 부모가 가진 돈의 힘에 의해서 강해진 거라고 하셨어. 그게 없으면 제 입에 풀칠도 못할 녀석들이 부지기수라고...
솔직히 말하면 아빠는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인천에 있는 학교에 다니라고 하셨는데 엄마가 워낙 심하게 반대해서 한 발 물러서신 거야. 호호.”
“하지만 강남 8학군은 공부 잘하는 애들이 모인 곳이잖아? 그 만큼 모든 면에서 경쟁력도 있는 녀석들 아닌가?”
“그렇지... 하지만 아빠가 중요시 하는 건 그런 책 속에 있는 지식을 외고 문제를 잘 풀어서 성적을 올리는 능력이 아니라 삶에 대한 자세, 사람들의 마음을 읽는 능력, 인생의 이면을 보는 힘.. 이런 거야. 그래서 학창시절에 조금 다른 환경에서 사는 아이들과 어울려보라고 하신 것 같아. 그래서 난 지금도 중,고등학교 시절 친구를 만날 때면 절대 있는 척을 안해.”
“그런 대단하신 분하고 나하고 닮았다고? 너무 치켜세우는 거 아냐?”
“아저씨가 아빠와 닮은 건 내가 짐작하지 못하는 행동들과 말을 자주 한다는 거야. 아니 잘 못읽겠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또 하나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 잘 모르겠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말을 해도 대화가 자연스럽게 이어져.
정말 어울리지 않는 말들도 아저씨나 우리 아빠가 하면 묘하게 수긍이 간다고 해야 되나?”
황지연이 이야기 하는 걸 가만히 듣고 있자니 그녀의 아빠는 상당히 성공한 사업가인 듯하고 그녀나 그녀의 가족은 나와는 다른 부류의 사람들로 다가왔다. 하지만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그녀는 재미있을 줄 몰라도 내 입장에서 그리 달갑지 않았는데 그건 그녀가 약간의 칭찬을 했음에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멍하니 앉아 약간 고개를 숙이고 있자 그녀가 술잔을 비웠다. 난 다시 잔을 채워 주었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난 담배를 꺼내 물면서 여느 때처럼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줘?”
황지연이 주위를 둘러보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일요일 저녁이라 그런지 9시경임에도 그다지 사람들이 많지 않았는데 우리 외에 두,세 테이블이 더 있었고 거리가 좀 멀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에 담배를 끼우고 연기를 내뿜는 황지연의 모습은 섹시해 보였고 살짝 미소를 머금은 듯한 표정으로 그녀가 말을 이어갔다.
“여자가 담배를 피우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없나봐?”
“거부감? 전혀. 오히려 동지를 만난 것 같아서 좋아. 요즘은 거리에서 담배 피우는 것도 눈치 보여서 힘들잖아. 지나가는 아줌마들이 눈 홀기고 가면 담배 맛이 싹 달아나서 꺼버릴 때가 많아.”
“왜? 그냥 안면몰수하고 피우면 되지. 대부분 남자들은 그러잖아.”
“난 그런 거 잘못해. 일단 피해보는 사람들이 생기니까. 눈을 홀기고 갈 정도면 담배 연기 맡는 걸 엄청 싫어한다는 이야기고...”
“하여간 아저씨는 좀 엉뚱하다니까. 남자들하고 술 마시면 대부분 자기 잘난 이야기 하느라 바쁜데... 내가 옛날에 이랬다. 나하고 누구하고 친하다. 가진 건 돈, 남는 건 정력밖에 없다... 그런 이야기 한 번 해봐. 기회를 줄테니...”
“뭐? 어떤 이야기?”
“자기 자랑 한 번 해보라고. 잘하는 게 뭐야?”
“음... 물론 나도 잘하는 게 있을 거야. 하지만... 난 그런 거 잘못해. 자기 PR. 자기 과시...”
"또? 잘못하는 건 잘도 말하면서 잘하는 건 왜 말 못해... 웃긴다.”
“넌 잘하는 게 뭐야? 아니 니가 뭘 잘한다고 생각해?”
“많지. 바이올린이나 피아노 같은 악기도 좀 다루고 노래도 수준급. 춤추는 것도 남만큼 추고 스피치도 좀 되고... 미모가 받쳐주니까 명품으로 치장해서 다른 여자들 기죽이는 것도 잘하고... 못하는 게 뭐냐고 묻는 게 빨라. 호호호.”
“응... 알았어.”
난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그런데 황지연이 술을 한 잔 더 비우더니 약간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채 잠시 동안 조용히 있었다. 난 갑자기 돌변한 모습에 영문을 몰라 그녀를 바라보다가 내 술잔을 비우고 다시 담배에 불을 붙여 물었다. 담배를 피우면서 문득 그녀의 주량이 이제 다 찼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 때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나 솔직히 말하면, 아저씨 만나기 전에 우울증 증세가 있어서 병원에 다니고 있었어. 모든 게 귀찮고 싫어져서 회사에 휴직을 신청할까 심각한 고민도 했었고...
오늘 내가 좀 오버해도 이해해줘. 오랜만에 기분이 좋아져서 그런 거니까. 나 얼굴도 다른 애들만큼 예쁘고 집에 돈도 많고 직장도 있는데, 정말 괜찮은 여잔데... 근데...”
“그런데...”
“아니야... ”
“...”
다시 그녀가 입을 다물었다. 난 그녀에게 술을 한 잔 더 따라주고 화장실에 다녀온다고 하고 일어나 카운터로 갔다. 계산을 하면서 대리운전을 부를 수 있는 지 확인한 후에 자리로 돌아와보니 황지연이 술에 취한 듯 고개를 숙인 채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그녀 앞에 앉아 있다가 카운터로 다시 가서 대리운전 기사를 한 명 불러달라고 한 후 자리로 돌아왔지만 황지연은 그 자세 그대로 였고 그런 그녀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그녀가 느끼는 외로움들이 전해져왔다. 어쩌면 그녀는 맨정신으로 내게 안기는 자신을 용납할 수 없어서 술에 취한 것일지도 모른다.
갑자기 어제 선승철이 잔뜩 술에 취한 채 늘어 놓은 이유성과 선승철, 황지연 사이에 있었던 일들이 머리 속으로 스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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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저래 자꾸 바쁜 일들이 생겨서 분량은 많지 않지만
어렵게 어렵게 써서 올립니다. 이해해주시길... ^^
하얀색 BMW. 난 황지연의 소울을 기다리고 있었던 터라 별다른 관심없이 다시 시선을 주차장 입구 쪽으로 돌렸는데 잠시 후 그 차 운전석에서 썬그라스를 낀 날씬한 여자가 내렸다. 몸에 붙는 골프웨어 위로 스포츠 재킷이 무심코 지나가다가도 다시 돌아볼 만큼 잘 어울리고 있었다. 그 여자는 내가 있는 쪽으로 똑바로 걸어와서 썬글라스를 벗었다. 황지연이었다.
“몰라본 눈치네. 왜? 놀랐어?”
그럼 갑자기 외제차 끌고 나타나는데 안 놀라겠냐?
“응. 조금. 썬글라스가 잘 어울려서 쳐다보고 있기는 했지만 넌 줄은 몰랐어.”
“썬글라스 때문에 본 게 아니라 몸매가 잘 빠져서 본 거겠지. 나야 익숙한 일이지만... 호호호”
이 여자 다시 만나면 좀 어색할 줄 알았는데 순식간에 편안해졌다. 의외였다.
황지연과 식당 안에 들어가서 장어구이에 소주를 마셨다.
“어디 다녀오는 거야?”
“응. 아는 사람들하고 골프장에...”
“골프도 칠 줄 알아? 계속 사람 놀래키네.”
“그냥 저냥 배우는 중. 요즘은 이거 안하면 대화도 안 되고 회사에서도 따 당해.”
“응..”
별로 할 말도 없고 해서 술을 마시고 있으려니 황지연이 미소를 띠며 묻는다.
“아저씨. 기 죽었어? 조용하네. 호호호.”
“아니. 그냥...”
“아저씨 기 죽이려고 외제차 끌고 온 게 아니라 원래 오늘 오후에 가평쪽에서 라운딩 약속이 있었어. 그리고 난 직원들하고 골프 칠 때 아니면 회사 다닐 때 타는 차 안가지고 가. 집에 갔다 올 시간도 부족했었고...”
“응... 차가 두 대야?”
황지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 다시 술 한 잔을 입에 털어 넣고는 빈 잔에 술을 채웠다. 그냥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공부를 열심히 해서 경찰대학에 입학했던 건줄 알았는데 나만의 착각이었나?
어쨌든 난 조용히 술을 마시는 수 밖에 없었다. 난 그녀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아내서 그녀와 나 사이의 균형이 깨지는 게 싫었으니... 황지연이 스스로 이야기를 하는 것까지 막을 수야 없겠지만 그 것도 나중을 생각하면 별로 원하는 바는 아니다.
“갑자기 벙어리가 되셨네?”
“...벙어리는 무슨.. 술 마시는 것도 죄야? 하여간 시비는 잘 건다니까..”
“아저씨한테 묘한 친밀감이 들었었는데 그 이유를 몰랐거든. 그런데 갑자기 생각났어. 아저씨는 우리 아빠하고 닮은 것 같아.”
“어떤 점이?”
“우리 아빠는 무서운 사람이야. 협상에 강하지만 항상 약한 척을 해서 사람들이 속아 넘어갈 때가 많고... 아빠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엄마와 난 짐작도 못할 때가 많거든. 아빠는 무언가 예의에 어긋나거나 사람들을 무시하는 사람들에게 쌍스러운 욕을 내뱉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감정을 이해하는 걸 중요시하는 사람이야. 지금도 난 아빠를 이해 못할 때가 많지만...”
“아빠를 좋아해?”
“응. 그건 왜?”
“아빠를 좋아하면 칭찬일테고 싫어하면 욕인것 같아서.”
“칭찬에 가까워. 아빠를 싫어하는 딸보다 좋아하는 딸이 많잖아.”
“그건 그래.”
갑자기 오늘 황지연과 잠자리를 같이 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들었고 너무 멀어보였다. 하긴 난 그녀가 경찰 간부인 걸 알았을 때도 물러서야 겠다는 생각을 했었으니까.
시간이 9시가 될 무렵 그녀와 나 사이에 빈 소주병이 4병 있었다. 그녀를 만나기 전 내 계획은 오늘 만남에서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끌어가고 싶었고 황지연이 내일 출근하다고 일찍 가야한다거나 아니면 몸이 피곤하다거나 핑계를 대면 한번 쯤 더 손을 잡아끌기는 하겠지만 강하게 잡을 생각은 없었다. 만날때마다 그녀의 몸만 탐한다는 인상을 주기는 싫었기 때문인데 갑자기 외제차를 끌고 나온 걸 보니 분위기를 끌고 가기는 커녕 도리어 머리 속이 복잡해져서 빠른 속도로 술을 마셨다. 술이라도 마셔야 들이대볼수 있을 것 같았다고 해야 되나...
“아빠도 너처럼 술을 잘 드셔?”
“아니. 우리 아빠는 한 잔만 드셔도 얼굴이 빨개지셔서 술을 잘 안 드셔. 가끔 드시긴 하는데 소주 반 병 정도. 엄마가 술을 잘 드시는 편인데 난 엄마를 닮은 것 같아.”
“그럼, 외동딸이야?”
“응. 아빠가 아이가 많은 걸 원치 않으셨대. 난 우리 아빠가 서른 다섯 살에 낳은 딸이야. 아빠는 이십대 후반에 엄마를 만나셔서 결혼을 했는데 결혼식을 올린 후 1년 만에 하시는 사업이 파산했어. 그리고 다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을 때까지 5년이 넘게 걸리셨고 그 때서야 아이를 가질 생각이 드셨다고 했어.
우리 아빠는 평범한 사람들과는 좀 다른 분이야.”
“어떤 면에서?”
황지연의 표정은 내내 밝았는데 아빠 이야기를 할 때는 더더욱 들뜬 표정이었다. 술도 적당히 취한 그녀는 기분 좋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똑같은 걸 보고도 다른 이야기를 하는 분이야. 신문기사를 읽어도 아빠는 기사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다른 걸 이야기 해. 이를 테면 그 사건이 일어나게 된 배경 같은 것들. 기자는 그런 걸 쓰지도 않았는데 우리 아빠는 기사 속의 실마리를 모아 추측해 내시거든. 나중에 확인 해보면 대부분 맞아.
언젠가 내가 아빠한테 ‘난 왜 아빠처럼 안 돼지’하고 물은 적이 있어. 그랬더니 아빠가 하시는 말씀이...”
“응..?”
“니가 그게 되려면 세상을 세 번 쯤 다시 살아야 된대. 그게 무슨 말이냐고 다시 물었는데 아빠는 이렇게 이야기 하셨어. 이십대 초반에 아빠는 두 번 죽으려고 하셨대. 난 이해가 되지 않아서 왜냐고 물었더니... 아빠 대답에 깜짝 놀랐어.”
“뭐라고 하셨는데?”
“이류 인생을 사느니 죽고 싶으셨대.”
“...”
난 입을 다물었다. 삼류도 아닌 이류 인생을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 그런 분의 외동딸이었단 말인가?
“더 놀라운 이야기를 해줄까? 내가 저번에 아저씨에게 인천에서 자랐다고 했지? 그게 아니라 실은 우리 집은 나 어렸을때부터 강남이었는데 아빠는 내가 중학생이 되자 강남에 있는 학군에서 학교를 다니지 못하게 하셨어. 부모가 부자인 애들 중에 썩어 빠진 애들이 너무 많다고... 그냥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 사이에서 학교를 다니게 하시려고 날 인천에 있는 아빠 소유의 다세대 주택으로 주소를 옮기게 하고 거기서 중, 고등학교를 다니게 했어.
덕분에 난 아침 6시에 일어나서 엄마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인천으로 가야 했고. 그것 뿐만 아니라 집에 외제차 놔두고 국산 승용차로 통학을 시켰는데 다른 애들에게 절대 집이 부자라는 걸 눈치 못 채게 하라고 하셨어. 웃기지?”
“썩어 빠졌다는 게 무슨 의미야? 어렵네..”
“응. 나도 어릴 때라 시키는 대로 했고 특별히 아빠에게 반대한 적은 없는 데 고등학교 2학년 때 아빠에게 왜 그래야하냐고 정색을 하면서 물어본 적이 있어. 그랬더니 아빠 말씀은 내가 인생의 다른 면, 여러 가지 모습을 보게 하고 싶으셨대. 부자집 애들 중에는 자기들이 태생부터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하다는 왜곡된 생각- 그걸 아빠는 썩어 빠졌다는 표현을 하셨는데 - 을 가진 애들이 많거든.
아빠는 그런 애들은 강한 게 아니라 부모가 가진 돈의 힘에 의해서 강해진 거라고 하셨어. 그게 없으면 제 입에 풀칠도 못할 녀석들이 부지기수라고...
솔직히 말하면 아빠는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인천에 있는 학교에 다니라고 하셨는데 엄마가 워낙 심하게 반대해서 한 발 물러서신 거야. 호호.”
“하지만 강남 8학군은 공부 잘하는 애들이 모인 곳이잖아? 그 만큼 모든 면에서 경쟁력도 있는 녀석들 아닌가?”
“그렇지... 하지만 아빠가 중요시 하는 건 그런 책 속에 있는 지식을 외고 문제를 잘 풀어서 성적을 올리는 능력이 아니라 삶에 대한 자세, 사람들의 마음을 읽는 능력, 인생의 이면을 보는 힘.. 이런 거야. 그래서 학창시절에 조금 다른 환경에서 사는 아이들과 어울려보라고 하신 것 같아. 그래서 난 지금도 중,고등학교 시절 친구를 만날 때면 절대 있는 척을 안해.”
“그런 대단하신 분하고 나하고 닮았다고? 너무 치켜세우는 거 아냐?”
“아저씨가 아빠와 닮은 건 내가 짐작하지 못하는 행동들과 말을 자주 한다는 거야. 아니 잘 못읽겠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또 하나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 잘 모르겠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말을 해도 대화가 자연스럽게 이어져.
정말 어울리지 않는 말들도 아저씨나 우리 아빠가 하면 묘하게 수긍이 간다고 해야 되나?”
황지연이 이야기 하는 걸 가만히 듣고 있자니 그녀의 아빠는 상당히 성공한 사업가인 듯하고 그녀나 그녀의 가족은 나와는 다른 부류의 사람들로 다가왔다. 하지만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그녀는 재미있을 줄 몰라도 내 입장에서 그리 달갑지 않았는데 그건 그녀가 약간의 칭찬을 했음에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멍하니 앉아 약간 고개를 숙이고 있자 그녀가 술잔을 비웠다. 난 다시 잔을 채워 주었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난 담배를 꺼내 물면서 여느 때처럼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줘?”
황지연이 주위를 둘러보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일요일 저녁이라 그런지 9시경임에도 그다지 사람들이 많지 않았는데 우리 외에 두,세 테이블이 더 있었고 거리가 좀 멀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에 담배를 끼우고 연기를 내뿜는 황지연의 모습은 섹시해 보였고 살짝 미소를 머금은 듯한 표정으로 그녀가 말을 이어갔다.
“여자가 담배를 피우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없나봐?”
“거부감? 전혀. 오히려 동지를 만난 것 같아서 좋아. 요즘은 거리에서 담배 피우는 것도 눈치 보여서 힘들잖아. 지나가는 아줌마들이 눈 홀기고 가면 담배 맛이 싹 달아나서 꺼버릴 때가 많아.”
“왜? 그냥 안면몰수하고 피우면 되지. 대부분 남자들은 그러잖아.”
“난 그런 거 잘못해. 일단 피해보는 사람들이 생기니까. 눈을 홀기고 갈 정도면 담배 연기 맡는 걸 엄청 싫어한다는 이야기고...”
“하여간 아저씨는 좀 엉뚱하다니까. 남자들하고 술 마시면 대부분 자기 잘난 이야기 하느라 바쁜데... 내가 옛날에 이랬다. 나하고 누구하고 친하다. 가진 건 돈, 남는 건 정력밖에 없다... 그런 이야기 한 번 해봐. 기회를 줄테니...”
“뭐? 어떤 이야기?”
“자기 자랑 한 번 해보라고. 잘하는 게 뭐야?”
“음... 물론 나도 잘하는 게 있을 거야. 하지만... 난 그런 거 잘못해. 자기 PR. 자기 과시...”
"또? 잘못하는 건 잘도 말하면서 잘하는 건 왜 말 못해... 웃긴다.”
“넌 잘하는 게 뭐야? 아니 니가 뭘 잘한다고 생각해?”
“많지. 바이올린이나 피아노 같은 악기도 좀 다루고 노래도 수준급. 춤추는 것도 남만큼 추고 스피치도 좀 되고... 미모가 받쳐주니까 명품으로 치장해서 다른 여자들 기죽이는 것도 잘하고... 못하는 게 뭐냐고 묻는 게 빨라. 호호호.”
“응... 알았어.”
난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그런데 황지연이 술을 한 잔 더 비우더니 약간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채 잠시 동안 조용히 있었다. 난 갑자기 돌변한 모습에 영문을 몰라 그녀를 바라보다가 내 술잔을 비우고 다시 담배에 불을 붙여 물었다. 담배를 피우면서 문득 그녀의 주량이 이제 다 찼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 때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나 솔직히 말하면, 아저씨 만나기 전에 우울증 증세가 있어서 병원에 다니고 있었어. 모든 게 귀찮고 싫어져서 회사에 휴직을 신청할까 심각한 고민도 했었고...
오늘 내가 좀 오버해도 이해해줘. 오랜만에 기분이 좋아져서 그런 거니까. 나 얼굴도 다른 애들만큼 예쁘고 집에 돈도 많고 직장도 있는데, 정말 괜찮은 여잔데... 근데...”
“그런데...”
“아니야... ”
“...”
다시 그녀가 입을 다물었다. 난 그녀에게 술을 한 잔 더 따라주고 화장실에 다녀온다고 하고 일어나 카운터로 갔다. 계산을 하면서 대리운전을 부를 수 있는 지 확인한 후에 자리로 돌아와보니 황지연이 술에 취한 듯 고개를 숙인 채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그녀 앞에 앉아 있다가 카운터로 다시 가서 대리운전 기사를 한 명 불러달라고 한 후 자리로 돌아왔지만 황지연은 그 자세 그대로 였고 그런 그녀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그녀가 느끼는 외로움들이 전해져왔다. 어쩌면 그녀는 맨정신으로 내게 안기는 자신을 용납할 수 없어서 술에 취한 것일지도 모른다.
갑자기 어제 선승철이 잔뜩 술에 취한 채 늘어 놓은 이유성과 선승철, 황지연 사이에 있었던 일들이 머리 속으로 스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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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저래 자꾸 바쁜 일들이 생겨서 분량은 많지 않지만
어렵게 어렵게 써서 올립니다. 이해해주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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