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깊어만 가고 있었다. 벌써 알몸이 된지도 한 시간은 족히 넘은 것 같았다. 그러나 나
와 그녀는 서로의 몸을 끌어안은 채 서로의 감정을 충분히 공유해 나가고 있을 뿐이었다.
드디어 나의 짝사랑이 끝을 맺는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를 알고, 그녀를 마음에 넣고,
새기고, 아파하면서 결코 이런 보상을 받을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녀
는 모든 것을 내던진 채 내 품안에서 고운 숨을 쉬고 있었고 나의 마음을 받아주었다. 사랑
엔 국경도 초월을 한다했지만 난 국경보다 더한 산을 넘어가는 중이었다. 15살의 나이차이,
그리고 유부녀와 고등학생, 비록 그런 장애물이 사랑의 전부가 아닐지라도 분명한 건 결코
흔하거나 쉬운 사랑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한 발짝만 더 움직이면 그 험난한 산
의 정상에 오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마지막 한 발자욱을 쉽게 떼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채영아~ 후회 할 것 같애?”
“조금......”
바로 그녀의 대답 때문이었다. 이미 욕정은 극에 달해 이성은 집을 나가버렸고 주체 못 할
고교생의 첫경험에 대한 호기심은 참지 못 할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하지만 내가 마지막
발자욱을 떼지 못하는 건 바로 그녀의 슬펐던 눈망울 때문이다.
“나는 솔직히 지금 채영이를 너무 갖고 싶은데... 니 마음이 그렇다면 못 할 것 같애”
“바보... 그래서 내가 널 바보라고 하는 거야...”
솔직한 속마음에 그녀는 다시 나를 바보라 비웃었다. 하지만 나의 몸에 더욱 비비적거리며
붙어오는 그녀였기에 그녀의 비웃음이 기분 나쁘지 않았다.
“맞아... 바보야... 이렇게 아름다운 여자를 두고 고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어쩜 그리 착하니? 바보야... 그냥 해! 그냥 하면 되잖아!”
“어떻게 그래... 슬픈 눈이 자꾸 떠올라...”
“멍청이... 이렇게 해 봐!”
나의 팔을 풀고 내 몸을 빠져나간 그녀는 나의 몸을 바로 눕혔다. 아담하게 올라붙은 그녀
의 가슴이 참으로 예뻤다. 붉은색채가 진한 큰 유두가 눈 앞에서 아른거리는데도 나는 그것
을 따먹을 용기도 못 내고 있었다. 그 이유는 그녀의 얼굴이 다시 슬퍼졌기 때문이었다.
“뭐... 뭐하려고~”
“바보! 멍청이! 꼭 처음인 거 티 낼래?”
그녀가 내 몸 위로 올라탔다. 아랫배에 간질간질한 솜털이 닿으며 동시에 그녀의 두툼한 대
음순의 느낌이 확실히 느껴졌다. 그리고 점점 내 몸통 위로 포개지는 간지러운 솜털과 촉촉
한 피부결이 느껴지더니 곧 그녀의 가슴이 나의 가슴에 맞닿았다.
황홀했다.
어떻게 표현을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냥 황홀하다는 표현이 가장 옳을 것이었다. 목석처
럼 얼어붙은 내게 올라탄 그녀는 그렇게 슬픈 눈을 하고 나와 잠시 동안 눈을 맞췄다. 미안
하다는 생각이 들 때 쯤 그녀의 입술이 살랑살랑 내리는 하얀 눈처럼 나풀대며 포근히 내려
앉았다.
“쭙~ 쭈웁!”
그녀의 강한 흡입력에 전율이 느껴질 정도였다. 아랫입술이 그녀의 입으로 빨려 들어갔다가
빠져나왔고 다시 나의 입술을 오물거리며 빨던 그녀는 서서히 귓불과 목줄기를 핥아 나가기
시작했다.
“끄으으..... 흡”
숨이 막혀왔다. 간질거림을 넘어서 발가락이 오그라들 만큼 오묘한 느낌에 나도 모르게 신
음을 뱉어냈다. 그러나 귓불과 목줄기에서 이미 벗어난 그녀는 나의 가슴팍을 유연하게 핥
아내고 있었다. 명치부위에서 시작된 그녀의 혀는 적당량의 침과 함께 부드럽게 나의 몸을
애무했다. 그제서야 긴장이 좀 풀린 나는 그녀의 풍만한 엉덩이를 주무르며 그녀의 애무를
천천히 음미하기 시작했다.
“허! 허윽!”
자지 끝에서 사정과 맞먹을 정도의 쾌감이 스쳐지나갔다. 정액이 나온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의 입안으로 나의 젖꼭지가 빨려 들어갔을 땐 온몸이 감전된 것처럼 뻣뻣하게 굳어버리
고 말았다. 빠른 혀놀림으로 나의 젖꼭지를 빨고 핥을 때는 세상의 모든 기가 자지로 몰려
드는 기분이었다.
"끄으... 끄읏!“
그녀의 입이 떨어지는 순간 온몸에 힘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좋아?”
그녀가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죽을 거 같애... 이런 기분 처음이야...”
“좋다니 다행이다...”
그녀가 슬픈 얼굴로 잠시 웃음을 건네주었다. 그리고는 다시 고개를 수그려 다시 천천히 나
의 몸을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의 다리를 벌려 가랑이 사이로 파고 든 그녀를 바라보
고 싶었지만 차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이제 무얼 해줄지도 눈치는 채고 있
었다. 바짝 올라선 자지가 끊어질 것처럼 이끌렸다. 그녀의 따뜻한 손아귀에 들어간 자지에
는 심한 맥박이 뛰고 있는 것이 느껴졌고 그녀의 손가락이 귀두 이곳저곳에 묻은 무언가를
떼어내듯 조심히 움직이고 있었다.
긴장과 기대만으로도 나는 정액을 발사해 버릴 것 만 같았다. 언제 그녀의 입에 들어갈지
모르지만 자지는 이미 부러질 것처럼 단단해져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흥분이 고조되자
자지의 구멍으로 울컥하며 무언가 한차례 밀려올라 왔고 그것을 그녀의 손가락이 와서 닦아
내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나의 몸은 그대로 녹아버렸다.
“허! 허엇!”
헛바람이 폐부 깊숙이 쳐들어오며 귀두엔 따뜻하고 미끈한 느낌과 함께 그녀의 촉촉한 혀가
닿는 느낌에 몸이 녹아내렸다. 힘을 주고 싶어도 힘이 들어가지 않을 만큼 강렬하면서도 주
체 못 할 미끈함에 이대로 죽어도 좋겠다는 쾌감에 몸을 떨었다.
“쭙! 쭈웁!”
눈이 번쩍 뜨였다. 나의 가장 소중한 부위를 물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보지 못하면 평생에
후회가 될 것만 같았다. 그녀를 바라봤다. 검은 생머리가 흘러내려 가려지기는 했지만 그녀
의 작은 입이 터질 듯이 부풀어 있었고 그 부푼 입속으론 자지가 들락거리고 있었다.
“채... 채영아....”
그녀를 부르자 머리를 정리하며 나를 쳐다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무언가 알 수 없는 서글픔
이 담겨있는 것 같았다.
안쓰러웠고 사랑스러웠다.
나의 자지를 정성스레 붙잡고 천천히 왕복하는 그녀의 얼굴을 만져주자 그녀의 눈에선 뜨거
운 눈물이 흘렀다. 다시 그녀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보며 아련해지는 마음을 어쩌지 못했
다.
“채영아...”
그녀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힘겹게 다시 자지를 빨기 시작했다. 눈물이 터져서 인지 자지엔
더욱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고 밀려 올라오는 울분이 힘든지 잠시 호흡을 고르며 다시 빨아
주기를 반복하는 그녀였다.
눈물을 흘리며 자지를 빨아주는 여자를 본 적 있는가? 어떤 의미인가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그녀처럼 슬픈 눈을 하고, 서글픈 눈물을 흘리는 상황에 이기적으로 자신만의 욕정을 탐할
만 한 남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만해...”
나는 그녀를 끌어 올리려 했지만 그녀는 자지를 계속해서 빨아대고 있었다. 가슴이 찢어지
는 느낌이었다. 마냥 기분이 좋을 것만 같았던 나였지만 쾌락과 쾌감 말고도 슬픔과 함께
불안함마저 느끼고 있었다. 오히려 슬픔과 불안함이 쾌감보다 큰 느낌이었다.
“그만하라고!”
나는 억지로 일어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리고 그녀를 강하게 안아주며 말했다.
“미안해... 채영아 미안해...”
그녀의 눈물이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나 때문인 것만 같았다. 나는
사랑스런 그녀를 울렸다는 자괴감에 서글퍼지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그녀의 눈물을 가슴
에 담았다. 나의 눈에서도 뜨거운 눈물이 흐르는 느낌이었다. 코가 막혀오고 목젖이 꽉 막
히는 느낌도 동시에 찾아왔다.
“미안해.. 내가 너무 욕심을 부렸나 봐... 미안... 미안..”
“흑... 흐흑.... 아니... 아니야... 미... 미안해...”
“그래, 울어... 우리 같이 울자....”
“성현아.... 흐흑”
이미 첫경험이라는 기대는 무너져 버린 지 오래였다. 그녀의 침이 가득 묻은 자지도 줄어들
었고 나의 어깨엔 그녀의 눈물샘에서 터져 나온 뜨거운 이슬로 질척해져 있었다.
여리디 여린 여자라고 느껴졌다. 어떻게 이런 여자가 그런 험한 꼴을 당하면서도 버텨냈는
지 의문이 갔다. 나와 섹스를 하기 싫어서 인가? 라는 질문도 스스로에게 던져보았지만 내
게 먼저 요구를 한 것도, 나의 몸을 애무한 것도 그녀부터였다. 왜 그녀가 울음을 토해내는
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이제 좀 진정이 돼?”
내 품에 안겨 한참을 울던 그녀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왜 그렇게 울었는지 물어도 될까?”
“.................”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
아직 여운이 남았는지 그녀는 목을 가다듬으면서도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그저 따듯하게 그녀를 안아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를 눕히
고 나는 답답함에 거실로 나와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이젠 자연스럽게 답답하거나 짜증이 나
면 담배를 찾아 피는 게 습관이 된 나였다.
‘이유가 뭘까?’
요즘 들어 부쩍 우울해진 표정을 자주 보여준 그녀이기도 했지만 내게 기대 울음을 터뜨릴
정도면 그녀 안에 커다란 울화가 쌓여있다고 생각했다. 그녀 성격상 누군가에게 고민이나
걱정거리를 토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신 스스로 삭히고 해결하려다 폭발을 해버렸다고
짐작할 뿐이었다.
담배를 끄고 거실을 비롯해 모든 조명기구를 끈 나는 다시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를 포근하게 안으며 이불을 덮었다.
“어디 갔다 왔어~”
“담배 좀 피고 왔어~”
“웃지 마... 알았지?”
“뭘?”
“나... 너 없는 잠깐 동안 엄청 불안했던 거 알아?”
“그랬어? 미안... 미안... 이제부터 옆에 달라붙어 있을게...”
“신기하다.. 너하고 이렇게 같이 있으니까 나도 꼭 고등학생이 된 것 같아”
“칫! 웃기지 마... 너 아줌마야... 남편 셋 있는 아줌마!”
“뭐? 남편 셋?”
“그래... 남편 셋 있는 아줌마!”
우스갯소리로 한 말이지만 그녀는 적잖은 충격을 받은 듯 했다. 잠시 동안 말이 없던 그녀
는 다시 말문을 열었다.
“맞아... 남편 셋... 그래서, 이제 둘은 정리하려고~”
“둘? 그 둘이 누구야?”
질문하는 꼬라지하고는... 내가 바라던 대답이 무엇이었을까? 그녀의 남편이 되고 싶었던 것
일까?
“몰라도 돼!”
“칫! 한 번 물으면 아무튼 속 시원히 대답해 주는 법이 없어요~”
“고민 중이야...”
“무슨 고민씩이나... 당연히 저 사진에 걸린 남편을 택하는 게 맞는 거지!”
진정 나의 진심일까? 나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튀어나온 말에 나조차 놀라고 말았다. 그녀를
사랑한다면서 나는 그녀의 남편이 되고 싶은 맘이 없는 걸까?
“그 말 진심이야?”
“몰라~”
“미안... 부족하지만 성현이가 원한다면 아주 뜨겁게 첫경험을 시켜주고 싶었는데...”
“지금도 늦지 않았어~”
그녀를 위로한답시고 던진 농담이었다. 오늘만 날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미 내 판단
에서 나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그녀와 첫경험을 할 수 있는 위치까지 와 있다는 생각도
굳어지고 있었다.
“괜찮다면... 지금이라도 할까?”
“됐어! 이 아줌마는 무슨 농담도 못해... 우선! 우리 채영이 마음 좀 추스르고 그 다음에...”
“그때 돼서 내 마음 변하면? 나 이제 남편 둘은 쳐낼거라니까?”
“웃기지 마! 예약이라는 게 있잖아...”
“너 진짜 웃긴다? 너 오늘 아니면 영영 기회가 없을 수도 있어~”
“됐네요! 무조건 예약이야! 예약 받아! 얼른!”
“아.. 알았어...”
“진작에 그럴 것이지~”
마음은 애가 타도록 그녀를 원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 남자와는 다르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
다. 그녀를 탐하고 싶었지만 나는 뜨겁게 그녀를 안아주는 걸로 마음을 바꿨다.
‘진심은 통한다! 아자!!’
보드러운 그녀를 느끼며 깊어가는 밤을 맞이하고 있었다.
“달그락, 달그락... 쑤아~~~~~ 탁! 탁!”
귓가에 울리는 잡다한 소음에 나는 아예 이불을 뒤집어쓰며 잔뜩 짜증을 부렸다. 이 놈의
아침은 언제 맞이해도 일어나기 싫고 피곤함을 전해주는 시간이었다. 이제 조금 더 있으면
엄마는 날 깨우러 올 것이고, 나는 지긋지긋한 등교를 다시 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는 것이
너무나 싫었다. 역시, 이런 나의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성현아~ 어서 일어나... 학교 가야지!”
“아웅... 엄마... 5분만... 응... 5분만...”
“안 돼~ 그러다 지각 해... 빨리 일어나...”
“진짜... 진짜 5분만... 응?”
“으그..... 귀여워! 어젠 그렇게 어른인척 하더니... 역시 넌 어린이구나?”
“어? 어린.... 응?”
나는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그제서야 어제의 일이 떠오르며 엄마가 아닌 그녀란 걸 알아
챘다. 잠에 너무도 취해 그녀의 집에서 잠든지도 모르고 어리광을 부리고 있던 내가 싫어진
다.
“어린이 아니거든! 쳇!”
그녀는 이미 어제 입었던 흰 티셔츠와 빨간 반바지 차림에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밥상을
다 차렸는지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와 계란부침 냄새가 식욕을 자극하고 있었다.
“녀석... 자! 다리!!”
“아~ 뭐야~ 이리 줘! 내가 입을게!”
발가벗은 채로 나란히 누워 잠들었던 어제의 기억을 곱씹어보기도 전에 그녀는 나의 팬티를
주워들어 벌리며 어린아이 옷을 입히듯 했다. 그런 그녀가 귀엽게 느껴졌지만 어린아이처럼
보이는 건 싫었다. 가뜩이나 아침부터 어리광을 부린 것 같아 그녀를 볼 낯이 없는데 이미
그녀는 나를 어린아이 구슬르듯 하고 있었다.
“빨리 끼워! 입혀 주고 싶어서 그래...”
“아~ 창피해...”
“뭐가 창피해? 우린 어제 볼 거 안 볼 거 다 본 사인데?”
“아~ 그래도...”
사실 그녀의 말이 맞기는 했지만 아침부터 튼튼하게 올라선 자지를 그녀에게 보이기가 민망
했다.
“어서...”
못이기는 척 다리 한 짝을 내밀자 그녀는 팬티를 입혀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머지 다리까
지 끼우고 이불을 걷으며 엉덩이까지 팬티를 끌어올려 주었다. 물론 협조적으로 엉덩이를
들어 올려준 나의 도움도 있었다.
“어머~ 우리 성현이 고추도 크네~”
“됐어!”
그녀가 놀리듯 말했다.
“헤헷! 어서 밥부터 먹자...”
“응”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아니, 기분이 엄청나게 좋았다. 매일 이렇다면 나는 학교를 가기
싫어 매일같이 결석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 누나는? 안 먹어?”
“응... 난 싫어~”
“왜~ 그래도 먹어야지~ 같이 먹자...”
“안 돼... 오늘은... 나중에 같이 먹자”
자신은 먹지도 않을 거면서 아침 일찍 일어나 밥을 지어준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
다. 마주앉아 반찬을 집어주며 물을 챙겨주는 그녀를 보고만 있어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기
도 했다.
“오늘 어디 간다 그랬지? 같이 갈까? 학교 땡땡이 치고?”
“어머? 요 녀석 말하는 거 봐? 안 돼!”
“농담이야... 농담... 몇 시에 가?”
“응... 세시까지...”
“멀리 가?”
“아니~ 시청근처~”
시청근처라... 시청근처는 시내와는 조금 떨어져 유흥가는 아니었다. 대신 은행이나, 사무실,
병원, 주택공사와 같은 기업들이 밀집되어 있는 곳이기도 했다.
“왜 가는 거야? 혼자 안 무섭겠어? 크큭!”
“시청 앞이 무서울 게 뭐 있냐? 얼른 먹고 학교나 가~”
아마 그녀가 같이 가자고 제안을 했다면 학교를 빠지면서까지 가겠다고 했을 것이다. 물론
그녀 성격상 그럴 리 없었겠지만 말이다. 나는 등교준비를 마치고 그녀가 싸 준 도시락을
챙겨들고 몰래 집을 빠져나왔다. 자전거를 타고 갈까 하다 그냥 버스를 타고 가기로 했고
평소보다 30분이나 일찍 학교에 도착을 했다.
‘하아... 어제 그냥 할 걸 그랬나?’
그녀를 위하는 척, 예약시스템으로 첫경험을 미뤄놓기는 했지만 막상 그녀와 헤어지자 괜스
레 아쉬운 감이 들었다. 솔직히 지난 밤 그녀의 슬픈 얼굴을 모르는 척 넘어갔다면 벌써 나
는 진정한 남자가 되어 있을 텐데 하며 수업을 하나하나 마쳐가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속엔
그녀 생각이 간절했다. 모르긴 해도 오늘 그녀의 외출은 누군가와 함께 가기를 희망하고 있
었다. 아니, 그 누군가가 분명 그 배불뚝이 아저씨와 함께 가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전화 통
화에서도, 그리고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풍기는 말투에서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보고 싶다... 방금 전에 보고 왔는데.... 그래도 보고 싶다.’
보고 싶은 것도 보고 싶은 것이었지만 그녀 홀로 그 어딘가를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이미 교무실을 향하고 있었다. 중학교 3년 개근에 고등학교도 아직까지 지각 한 번 없
었지만 개근상보다 그녀를 조금이라도 더 보는 게 내겐 더 큰 낙이자 가치가 높은 일이었
다.
“선생님... 제가 오늘 몸이 너무 안 좋아서 조퇴 좀 하려는데요~”
평소에 말썽 한 번 없던 내게 조퇴 한번쯤은 어쩌면 누워서 떡 먹기보다 쉽게 할 수 있는
것 중 하나였다. 개근상 따윈 생각에도 없었다. 밤새 그녀를 마음에 품고, 몸에 품고 있다
온지라 더욱 그녀가 간절했던 것이었다.
‘누나가 보면 어떨까? 놀랄까? 완전 좋아 죽겠지?’
그녀의 반응을 생각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집을 향했다. 집으로 향하는 내내 그녀를 떠올렸
다. 오색빛, 오색미, 오색감처럼 알면 알수록 신비한 매력의 그녀에게 완전히 빠져 들어가고
있는 나였다. 어쩌면, 아주 어쩌면 어제 못한 첫경험을 오늘 할 수도 있을 것 같은 기분이
었다. 집에 도착한 나는 엄마의 눈을 피해 아주 조심스럽게 그녀의 집 현관으로 다가갔다.
‘아! 맞다... 아저씨 퇴근해 있을텐데...’
집에 오는 내내 그녀의 남편이 퇴근할 시간이란 걸 생각지도 못했다. 바보같이 그녀를 볼
생각에 마음이 들떠 그녀가 유부녀였다는 사실을 잠시 동안 잊은 것이었다. 게다가 아직 점
심시간도 되지 않은 시간인지라 그녀가 나가려면 못해도 세 시간은 족히 기다려야 할 것이
었다.
‘아~ 마이 미스테이크’
나는 괜히 엄마에게 걸리면 안 된다는 생각에 집 주변을 서성일 수도 없었다. 당연히 집에
도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순간적으로 든 생각이 바로 이모의 집이었다. 이미 몇 년
째 방치되어 있는 곳이기도 했지만 침대며, 살림살이까지 아직까지 건재한 그곳은 조용히만
있는다면 누구의 구애도 받지 않을 수 있는 적소였다.
발걸음을 옮겨 이모의 집 현관 옆 화분받침대 아래로 손을 넣었다. 모르는 척 하고 있었지
만 열쇠가 그곳에 있다는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건 이미 말라비틀어져
죽은 화분이었고 아마도 열쇠를 숨기기 위해 그 화분을 치우지 않았을 거라는 확신을 안고
손을 더듬거리자 금속느낌의 작은 막대가 손에 잡혔다.
‘예쓰!’
죽으라는 법은 없나보다. 이모의 집에 들어서자 역시 사람이 살지 않는 탓인지 매캐한 지하
실 냄새가 코를 찔렀다. 자주는 아니지만 간간이 엄마가 내려와 청소를 하는 덕에 집이 그
리 지저분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인적이 끊긴 집안은 황폐하고 휑한 느낌이었다.
‘후우~~~~~’
이모의 침대에 누워 그녀를 떠올렸다. 여전히 지난밤의 후회가 남아있기는 했지만 그녀와
완전히 가까워졌다는 것을 위로 삼아 담배에 불을 붙일 찰라 옆집인 그녀의 집에서 은은하
게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누... 누나....’
그녀는 울고 있었다. 그것도 무척이나 서럽게 울고 있었다. 어제 내 품에 안겨 울던 것보다
훨씬 슬프고 서럽게 울고 있었다.
‘왜 또....’
속이 상했다. 원래 저렇게 울보였었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녀는 눈물을 많이 보이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녀가 그렇게 우니 내 마음도 차분히 가라앉는다는 것이었다.
‘아저씨는.... 없나?’
나는 더욱 귀를 기울였다. 혹시 그녀 외에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감지하기 위해서였다. 그
러나 그녀의 목소리도 희미하게 들리는데 다른 목소리를 찾아내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
다.
‘에잇 모르겠다!’
무작정 이모의 집을 나와 다시 그녀의 집 앞으로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울고 있는 내
사랑 앞에 다시는 바보처럼 도망치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면서 그녀의 집 현관에 귀를
기울였다. 역시 그녀는 울고 있었다. 노크 대신 닫혀진 현관문을 슬쩍 밀었다. 문은 열려 있
었고 거실엔 아무도 없는 듯 다가오는 인기척이나 문의 열림을 알아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울음소리가 더욱 크게 들리자 못 견딜 정도로 나의 마음이 일렁였다. 모르겠다는 심
정으로 그녀의 현관문을 활짝 열었고 신발을 벗어두는 공간에는 아침에 내가 나설 때의 모
습 그대로 그녀의 슬리퍼 하나만이 남아 있었다.
‘없지? 없어... 있으면 좀 어때? 쳇!’
닫힌 안방 문을 노크도 없이 열어 제치자 눈물범벅이 된 그녀가 놀란 눈으로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누나! 채영아!”
그녀는 나라는 걸 알아채곤 더욱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어찌나 서럽게 우는지 보는 내가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왜 그래... 울지 마! 울지 마... 내가 왔잖아~”
다가서자 아예 등을 돌리며 울어대는 그녀를 가슴 가득 안아주었다. 그제서야 확실히 그녀
에게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인지 알아야 위로를 해 주지!”
“가! 가란 말이야... 혼자 있고 싶어”
나를 떠미는 그녀의 팔을 잡아 움직이지 못하도록 강하게 끌어 안아주었다.
“어떻게... 어떻게... 나 어떻게.........”
거의 통곡 수준이었다. 언제부터 울었던 건지 그녀의 눈은 퉁퉁 부어 있었고 목소리도 쇳소
리가 날 듯 쉬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그녀는 한참을 울고 또 울었다.
“이제 좀 괜찮아?”
“응... 괜찮아~”
“뭐야... 뭐 때문에 그렇게 우는 거야...”
“...............”
그녀는 나와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있었다.
“말해 봐...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있다면 다 해 줄게...”
“................... 성현아......”
“응?”
“........나 부탁하나만 해도 될까?”
그녀의 눈망울이 겁에 질려 있었다. 그리고 너무나 애절하게 애원을 해왔다.
“뭐... 뭔데....”
“염치없는 건 알지만... 오늘 나랑 같이 가 줄 수 있겠니?”
“어딜?”
“너무.... 무서워서... 그냥 같이만 가줘....”
나의 느낌이 맞았다. 그녀가 도대체 어딜 가야하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겁에 질
려 있었다. 나는 가여운 그녀의 마음이 풀어지도록 매만지고 어루만졌다. 나름 따뜻하게 안
아주었고 여린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그렇게 한참을 달래주었다.
‘혹시, 그 남자한테?’
온갖 상상과 생각이 들 무렵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외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닦고 편안한 옷을 입었다. 간단한 화장도 하지 않았고, 수수하기 그지 없는
모습으로 낮은 단화를 신었다.
“혹시 그 새끼한테 가는 거야?”
“....................”
나의 물음에 그녀는 대꾸도 없이 집을 나섰다. 그녀가 대문을 나서고 나는 주변을 살피며
뒤늦게 그녀 곁으로 따라붙었다. 그리고 택시를 잡았고 시청 앞에 내릴 때 까지 그녀와 나
는 아무런 대화도 없었다.
“도대체 어디 가는 거야!”
역시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결연하게 입술을 앙다물고 천천히 길을 건너는 그녀의 뒤를 졸
졸 따라가기만 했다. 횡단보도를 3개를 건넜고 건물 숲을 몇 개나 지났다. 그리고 그녀가
어느 건물 앞에 서서 간판만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산...부인과... 뭐지? 뭐야? 그녀가 그토록 울은 이유가...’
“누나! 뭐야... 뭐냐고!”
“이런 꼴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됐어 이제 넌 그냥 가!”
내 머릿속에 상상되는 그것만이 아니길 빌며 그녀를 추궁했다. 따뜻하게 감싸주지는 못 할
망정 나는 그녀를 더욱 몰아세운 꼴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그녀는 그 어떤 감정의 변화 없
이 나보고 그냥 돌아가기를 부탁했다.
“제발... 제발 그냥 가... 응? 성현아...”
그녀가 내게 남긴 표정은 평생 잊지 못할 정도로 참혹했다. 그 어여쁘던 얼굴이 심하게 초
췌해져 있었고 올망돌망하던 눈빛 또한 초점을 잃고 있었다. 그녀의 부탁대로 나는 떨어지
지 않는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녀의 반대편으로... 그러자 그녀는 내가 멀어지는 모습을 하
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젠장! 씨발!’
억지로 코너를 돌아 그녀의 시야에서 몸을 숨겨야만 했다. 그녀가 미웠다. 그런 몸을 해서
는 나의 첫경험을 가져가겠다던 그녀가 미워졌다. 하지만 난 그녀를 홀로 보낼 수는 없었
다. 분명 그녀가 그렇게 슬픔을 안고 병원을 찾았다면 그 배불뚝이의 아이일 것이다. 남들
에겐 축복이어야 할 임신이 그녀에겐 형용조차 할 수 없는 슬픔이 되어있을 것이다. 그런
그녀가 아무리 밉다 한 들 나로서는 비겁한 행동을 할 순 없었다. 다시 코너를 빠져나오자
역시 그녀는 자리에 없었다.
사람은 그다지 많지는 않았다. 그리고 예약을 해서 인지 유리문 밖에서 그녀가 진찰실로 들
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갈등을 했다. 그녀를 지켜주고 싶은데... 그녀를 덜 아프게 해주고 싶
은데... 난 해줄게 아무 것도 없었다.
‘에잇 모르겠다!’
사실 그때의 난 산부인과는 아이를 낳는 곳인 줄로만 알았지 수많은 부인과의 질병과 여러
진찰을 하는 곳이란 걸 몰랐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어쩌면 나의 무지가 나의 용
기를 부추겼을지도 모른다. 유리문을 열고 병원 안으로 들어서자 간호사로 보이는 수납창구
의 여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오셨.....”
그런 그녀를 무시한 채 그녀가 들어간 진찰실의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서자 뒤이어 간호사 한
명도 내 뒤를 따라 들어왔다. 진찰실 안에서는 그녀와 여의사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
다.
“무슨 일이죠?”
“정채영 보호자입니다.”
그녀가 그랬듯, 나는 그녀의 보호자를 자청했다. 불안하고 떨려왔던 술집에서의 기억처럼
그녀도 나라는 보호자로 인해 불안함과 떨림을 떨쳐버렸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병원이란 곳
은 괜히 불안하고 무서운 곳이니까...
그녀는 물론이고 여의사와 간호사까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서른 둘의 여자를 두고
교복을 입은 남학생 하나가 보호자라고 나타나니 놀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정채영씨? 보호자.... 맞...나요?”
그녀는 말없이 나를 돌아봤다. 여전히 아무런 표정이 없는 담담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여의
사에게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그녀 곁으로 다가섰다.
“낳으실거죠?”
의사가 물어왔다. 역시 예상한대로 그녀는 임신을 하고 있었다.
“아니요! 못 낳아요....”
그녀가 단호하게 말하자 의사는 나를 한심스런 표정으로 바라보더니 이내 그녀가 이해된다
는 표정으로 차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망설이다가는
곧 다시 말을 이었다.
“중절 수술 이력이 좀...”
“네... 8번째 예요”
여덟 번... 커다란 바윗덩이 하나가 머리 위로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내가 알고 있었던 그녀
가 맞나 싶을 정도로 다르게 보였다. 도대체 뭘 어쨌기에 중절수술을 7번이나 받을 만큼 행
동을 하고 다녔다는 말인가? 나의 어린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채영씨... 왠만하면 이번엔 그냥 낳으시는 게...”
“아뇨, 죽어도 못 낳아요~ 수술해주세요”
“채영씨 상황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지금 생긴 이 아이도 어쩌면 굉장히 운
이 좋게 생겨난 아이일 수 있습니다. 채영씨 건강도......”
“이 아이 아빠, 이 학생 아니예요...”
나도 그리고 의사도 그녀에게 집중됐다.
“그... 그럼....”
“친오빠요... 그래서 낳고 싶어도 못 낳아요...”
이럴 수가,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는가? 그녀의 옥문을 그렇게 지나다니고 그녀가
그토록 불쌍히 여기던 그 남자가... 바로 친오빠였단 말인가? 나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
다.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봐도, 아무리 이해심을 넓혀 봐도 말도 되지 않는 일이 벌어진 것
이다.
“저... 정말이야?”
난 그녀가 아이를 지우기 위해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꾸민거라고 믿고 싶었다. 그 남자의
아이여도 상관없고 지나가는 거지의 아이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남자가 그녀
의 친오빠가 아니기만을 바랐다.
“미안해... 성현아... 속일 마음은 없었어... 그러니까 이제 내 인생에서 나가 줘~”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더 이상 그녀의 인생에서 놀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리고
똑같이 내 인생에서 그녀를 담아두고 싶지도 않았다. 이유가 어찌되었건 자신의 피붙이인
오빠와 밤마다 그렇게 진한 신음을 내뱉고 눈알을 뒤집어까며 벌벌 떨던 여자라는 사실에
치가 떨려왔다.
‘아~ 하늘도 무심하다...’
그제서야 그녀와 그 남자의 행동과 말들이 퍼즐처럼 맞아 들어가기 시작했다. 2일에 한 번
꼴로 들려오던 신음은 단 한 번도 남편과의 섹스에서 터진 것이 아니었고, 격일 근무를 하
던 그녀의 남편 대신 남편 노릇을 했던 건 그녀의 오빠였다. 그녀가 섹스를 싫어하는 이유
는 그녀 역시 근친이란 죄책감에서 오는 당연한 생각이었고, 남편과의 관계에서 아이가 생
기지 않는 이유는 노력도 없었지만 잦은 중절수술로 쉽게 들어서지 않는 것이라는 그림이
그려지고 있었다.
‘참나, 뭐... 뭐... 이런 좆같은 경우가...’
그녀가 수술실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나는 병원을 나섰다. 정말 기나 긴 악몽을 꾸고 깨어
난 것처럼 머릿속이 멍해져 있었다. 얼마 걷지도 못하고 나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
다. 나의 첫사랑이, 그토록 예쁘고 착하던 그녀가 악마의 모습처럼 보인 게 믿기지 않았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지?’
멀리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아마 그녀의 물음은 첫경험 한 가지가 아닌
자신을 사랑한 걸 두고 후회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물었던 것 같기도 했다. 눈물도 흐르지
않았다. 그녀가 너무도 밉고 지금까지 해 온 나의 행동과 말, 그리고 마음이 너무나 후회스
러웠다.
‘평생에 남는다는 그 첫사랑이...’
이미 나의 첫사랑은 시작이 됐고 끝이 났다. 너무도 가혹한 첫사랑을 안겨 준 그녀가 너무
미웠다. 차라리... 차라리 처음 시작할 때 말을 했더라면 나는 이런 첫사랑을 하지 않았을
것이고 이런 후회도 하지 않을 것이다.
불현 듯 그녀의 얼굴이 스쳐지나가는 것 같았다.
그녀의 눈빛이, 그녀의 표정이, 그녀의 앙다문 입술이 파르르 떨려왔다. 그녀를 알고, 그녀
를 화나게도 했던 나였지만, 친오빠의 아이이기 때문에 못 낳는다는 말을 하며 보였던 표정
은 악마보다도 더 싸늘하고 무서웠다.
‘나쁜 년! 씨발... 진작에 말 좀 해 주지...’
다리가 풀려 도저히 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찢어지는 가슴을 무어로도 붙일 수 없을 것
같았다. 겨우 택시를 잡아 집에 도착한 나는 다시 이모의 집으로 숨어들어가 침대에 벌렁
누워버렸다.
‘오빠... 이제 그만하자.......... 그 사람? 굉장히 불쌍한 사람이야....’
주마등처럼 그녀가 했던 말들이 스쳐지나갔다. 그녀 역시 수많은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 살
았을 거라는 생각이 불현 듯 들어왔다. 전부 알지는 못하지만 분명히 그녀도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나를 수도 없이 밀어냈다. 밀어내기도 하고
충분히 자신을 떠날 수 있게 기회도 주었다.
‘그럼, 내가 훔쳐보는 줄 알고도 그렇게 창문을 열고 한 건가? 정 떨어지라고?’
그녀와 눈이 마주쳤던 날이 생각났다. 그 때 그녀는 나와 눈을 맞춘 채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나, 이런 여자니까 떠나’라는 눈빛이었을까? 아니면 ‘제발 나 좀 이 수렁에서 구
해줘’라는 무언의 호소였을까? 내가 받은 충격은 결코 적잖은 충격이었지만 그녀가 감내 하
고 받아왔던 고통도 엄청나게 컸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미어졌다.
하지만 그녀가 미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머지 7번의 아이도 그 오빠라는 남자의 아이였을까?’
그녀의 성격상 친오빠의 아이가 아니었더라면 혼자라도 낳아서 키워냈을 것이다. 최소한 작
게 나마 내가 아는 범위내의 있는 그녀는 그랬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친오빠와의 섹스는 말도 되지 않는 것이었다. 이유가 어찌되었건 입에
담기도 민망한 ‘근친상간’이란 단어는 어렸던 내게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무시무시한 단어
였다.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충격적인 것은 말로 다 하지 못할 정도였고 무너지는 마음은 바닥없이 떨어져 내리는 흙더
미처럼 만신창이가 되어버렸다.
‘왜 내게 말을 하지 않았을까?’라는 스스로의 질문에 ‘너 같으면 말을 했겠냐?’라는 대답이
돌아오고 있었다. 어쩌면 내 가슴은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미치도록 미웠다. 꼴도 보기 싫었다. 그녀의 말처럼 소름이 끼칠 정도로 다시는 보
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 황량하고 차가운 병원 침대에 그녀를 혼자 두는 건 첫사
랑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 심장이 그렇게 말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가슴은
머리를 조종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그녀가 너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래도 내가 죽도록 사랑했던 여자이자
첫사랑의 주인공인 그녀를 그렇게 쓰레기처럼 버려버릴 수는 없었다. 나를 위해서도 그녀는
반드시 좋은 기억으로 남아주기를 바랐다.
‘그래서, 이제 둘은 정리하려고....’
정리하려는 그 둘은 누굴까? 나는 그 대답을 꼭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무작정 다시 택시
를 잡아타고 다시 시청 부근의 산부인과로 향했다. 일렁이는 가슴속 슬픔의 파도를 애써 움
켜 잡고 다시 병원의 유리문을 열고 들어섰다.
‘후회할 걸? 손가락질 하면서 미친년 취급 할 걸?’
‘후회 안 해... 나 누나한테 약속했잖아... 손가락질도 안하고 후회도 하지 않을 거야... 대신
누나도 고통 속에서 벗어나고 싶었다고 말해줘, 그 한 마디면 돼....‘
“저기... 정채영....”
그들이 날 잊을 수 있었을까? 탁한 호흡을 몰아쉬며 ‘정채영’이라는 그녀의 이름 석 자를
대지 않았어도 그녀들은 나를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비록 그녀들은 나의 그녀가 자신의
오빠 아이를 지우러 왔다는 사실을 모르더라도 교복을 입고 산부인과에 중절수술을 받으러
온 여자의 보호자로 왔다고 했으니, 그녀들의 입장에서도 나는 충격을 준 사람일 것이다.
간호사 한 명이 가리킨 곳은 회복실이라는 명패가 붙은 문이었다.
“저 여기 들어가도 되나요?”
“네... 대신 조용히 하셔야 해요~”
회복실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양 옆으로 철제로 만들어진 침대가 주르륵 놓여 있었다. 그녀
말고도 두어명이 더 회복을 하고 있는지 총 세 군데에는 칸막이로 되어진 문이 닫혀 있었
다. 나는 호흡을 정리하고 문에 붙은 환자명을 살폈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 석 자가 새겨진
격실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겨우 침대 하나, 그리고 동그란 의자 하나만이 놓여진 황량한
곳에 평안히 잠든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흑... 누, 누나....’
나도 모르게 그녀의 맑은 얼굴을 보자 눈물이 주륵 흘러 내렸다. 불과 몇 시간 전엔 그녀의
환한 얼굴이 가득했고 그보다 조금 후엔 눈물을 펑펑 쏟아내며 통곡을 했고, 두 시간 전엔
잔인하리만치 뻔뻔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지금의 그녀는 철모르는 아기처럼 뽀얀 얼굴을
하고는 편안하게 눈을 감고 있었다.
‘아... 누나... 왜... 왜 이러고 있어....’
여자의 몸으로 8번의 중절 수술을 결심하는 것도 힘들었을 테지만 그 때마다 그녀가 겪었
을 공포와 걱정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려왔다.
‘지금 누나는 무슨 꿈을 꾸고 있어? 만약 내가 누나라면 나랑 신혼여행을 가는 꿈을 꾸고
있을 것 같애....’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너무나 약하고, 너무나 여린 손가락이었다.
어젯밤, 그녀의 매니큐어를 지워 줄 때 눈물을 흘렸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오늘 아침 나 혼자 식사를 해야 했던 이유도 알 것 같았다. 그녀가 어젯 밤, 나를 불러 진
심으로 하고팠던 말은 이곳을 같이 와주었으면 하는 부탁의 말이 아니었을까?
어젯 밤, 그녀는 나를 불러 자신의 약한 마음을 다 잡기 위해 나를 이용했다는 생각이 들었
다. 마취를 위해 매니큐어를 지워냈고, 수술을 위해 아침밥을 걸렀다. 이용당했다고 느껴졌
지만 그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만약 나였더라도 내 안에 생겨난 또 다른
생명체에 칼을 드리운다는 게 얼마나 겁이 나고 무서웠을까? 여자로서 얼마나 치욕적이고
슬픈 일이었을까?
택시를 타고 올 때 까지만 해도 그녀를 용서하지 못할 것 같았다. 정말 그녀의 말처럼 손가
락질을 하며 미친 개걸레 같은 년이라고 욕을 하고 다닐 것 같았다. 그러나 내가 그녀를 다
시 찾는 건 내가 좋아하고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
런 마음은 그녀의 얼굴을 보는 것 만으로 싸그리 사라지고 말았다. 누가 뭐래도, 그녀는 나
의 첫사랑이고 가장 사랑하는 여자이니까...
그녀에 대한 미움과 용서, 그리고 또 다른 다짐까지 잇는 동안 그녀는 서서히 잠에 깨어나
는 것 같았다.
“채.. 채영아~ 저... 정신 좀 들어?”
“.......................”
그녀가 움직이더니 곧 눈을 떴다. 그리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정신을 차리려는 듯 했다.
하지만 나를 알아보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조금만 기다려... 간호사 불러올게”
나는 빠른 걸음으로 회복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간호사에게 증상을 말하자 간호사는 내게
기다리라는 말을 남겨두고 회복실로 사라졌다.
미간이 찌푸려지며 풀린 동공으로 정신을 다잡으려던 그녀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가슴이
아파왔다. 그리고 그녀가 흘리던 눈물과 슬픔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약 20여분 후, 그녀는 간호사의 부축을 받으며 회복실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눈물을 많이
흘린 탓인지 눈은 퉁퉁 부어 있었고, 아직 완벽하게 회복이 되지 않은 건지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정신이 없어보였다.
“누... ”
나는 그녀의 걸음걸이를 보며 흐르는 눈물을 주체 못했다. 한 눈에 보기에도 그녀의 걸음은
무척이나 불편해 보였고 간호사와 함께 다가간 접수처에서 현금 다발을 꺼내 수술비를 계산
하고 있었다.
여자의 몸으로 친오빠의 아이를 베어 수술을 하고, 게다가 비용 계산까지... 여자의 자존심
은 바닥으로 떨어져 버릴 만 한 일 일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혼자서도 당당히 그 일을 해
내고 있었다.
“누... 누나!”
잽싸게 달려가 그녀를 부축했다. 나를 뿌리치면 어쩌나 하는 일말의 걱정은 다행히 없었다.
자꾸만 눈물이 한없이 흘러나왔다. 미안했고 고마웠다. 잠시나마 그녀에게 실망해가지고는
도망치려 했던 내 자신이 너무도 미워졌다. 조심스레 그녀를 부축하고 병원을 빠져나오자
서서히 어둑해지는 초가을의 맑은 하늘이 우리를 반겨주고 있었다. 마치 세상을 새롭게 맞
는 것처럼 가슴이 벅차고 이상했다.
“왜 안 갔어... 성현이한테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는데...”
“많이 아프지?”
“아니... 괜찮아....”
“업어 줄까?”
“그래... 줄래?”
“업혀....”
나는 그녀 앞에 허리와 다리를 수그린 채 섰다. 그러자 그녀가 상체부터 천천히 나의 등으
로 기대어 왔다. 그녀를 업으며 다리와 엉덩이를 받히자 손에는 이물감이 잔뜩 느껴졌다.
마치 아기들이 차는 기저귀를 차고 있는 모양이었다. 다시 눈물이 흘렀다. 참으려 했지만
참아지지가 않았다.
“왜 울어~ 울지 마 성현아~”
“나 안 울어... 왜.... 이러셔!”
콧물을 들이마시며 나는 터져 나온 눈물을 부인했다.
“무겁지? 미안... 어지럽고 구역질이 자꾸 나...”
“조금만 참아... 집에 금방 가니까....”
“성현아~ 미안한데... 나 오늘 집에 못 가... 가면 안 돼... 가까운 여관에다 데려다 줄래?”
“이런 몸을 해가지고 무슨 여관이야~”
“오늘 남편 오늘 날이야... 그래도 이런 모습은 아니잖니~”
“조용히 해!”
나와 그녀를 지나는 사람들이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죽어가는
아줌마를 등에 업은 고등학생 한 명이 주체 못 할 눈물을 흘리며 지나가는 모습은 가히 볼
만 했을 것이다.
택시를 타고 집에 도착을 한 후 최대한 빠르게 이모의 집으로 그녀를 데리고 들어갔다. 아
무래도 여관보다는 이곳이 훨씬 나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리고 내일 남편이 출근을
하면 그녀가 움직이기도 훨씬 수월할 것이다.
“여긴 어디니?”
“조용히 해... 아무튼 미워... 너 미워죽겠어~”
“미안해... 성현이 너한테는 정말 면목이 없구나~”
“기다려! 밥 좀 가져올게~”
“됐어~”
“되긴 뭐가 돼!”
다행히 집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더 다행스러운 건 엄마가 끓여 놓은 국이 미역국이라는
것이었다. 어디선가 본 듯 하지만 중절 수술도 아기를 낳은 것과 다름없다는 소릴 들었다.
지금은 나보다 그녀가 훨씬 아플 거라는 생각에 여전히 찢어진 가슴을 주체 못하고 밥상을
차려 그녀가 있는 곳으로 갔다.
“내가 결혼만 안 했어도... 우리 성현이 정~말 사랑해 줄텐데...”
“어서 먹기나 해...”
“정말 미안해... 그리고 사랑해...”
“뭐야... 나 예약해 놓은 거 있거든!”
“피~”
“약속 꼭 지켜! 지키려면... 빨리 밥 많이 먹고 얼른 회복이나 해!”
그녀가 다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미역국에 밥을 말아 먹으며 그녀는 연신 내게 미안하
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그녀는 지친 몸과 마음을 회복하기 위해 바로 잠에 빠져 들었다.
다음날이 되었지만 나는 학교엘 가지 않았다. 아니, 갈 수가 없었다. 도저히 그녀가 걱정이
되어 갈수가 없었다. 역시 집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한 순간만이라도 그녀에게서 멀어지면
그녀가 많이 아플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성현아~ 학교 가야지...”
“싫어... 안 가”
“그러다 부모님께 혼나면 어쩌려고”
“한 번 혼나면 되지, 난 채영이가 더 중요해”
“성현아~ 나 좀 안아줄래?”
“그럴까? 우리 마누라 한 번 안아줄까?”
지금 그녀에게 나는 어떤 존재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녀를 가볍게 안아주었다. 이 착하디 착한 여자를 왜 이토록 아프게 한 건지 그녀의
오빠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이대로 나의 체온으로 그녀의 육체와 정신이 말끔히 치료되었
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였다.
“강성현!”
이모의 집 문이 순식간에 열리며 잔뜩 화가 난 엄마가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그리고 나
와 그녀를 번갈아가며 째려보더니 나의 등짝을 세차게 후려치며 나무라기 시작했다. 안전할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이모의 집이었지만 보기 좋게 들통이 나고 만 것이다.
“너이 이노무새끼! 학교도 안 가고, 집에도 안 들어오고 여기서 뭐하는 거야!”
호랑이의 포효만큼 강하고 우렁찬 목소리가 심장을 파고 들어왔다. 혼날 것은 예상했지만 그
보다 아픈 그녀가 더 걱정이었다.
“어.. 엄마... 그게 아니라...”
변명을 할 것도 없었지만 엄마는 변명을 할 틈조차 주지 않았다.
“그게 아니긴! 빨리 올라 가!”
“싫어! 나 못 가!”
“뭐? 싫어?”
“싫어... 안 가!”
엄마는 거의 이성을 잃은 모습이었다. 미안했지만 나로서는 그녀를 두고 가버릴 순 없었다.
그러자 엄마는 구석에 처박혀 있던 빗자루를 집어 들더니 사정없이 휘두르기 시작했지만 나
는 조금의 물러섬 없이 그녀를 지켰다.
단단한 나무빗자루의 고통이 팔이며, 다리, 가리지 않고 여기저기 와 닿는 느낌이었다. 그렇
지만 나는 조금도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엄마의 마음도 이해를 할 수 있었다. 한창 공부에, 아니 굳이 공부가 아니더라도 꿈을 향해
갈고 닦아야 할 시간에 밀실이라고 할 수 있는 곳에서 남편이 있는 유부녀와 함께 있는 모
양새만으로도 이성을 잃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엄마보다, 내 꿈보다 마음을 다친 그녀를 보듬고 보살피는 게 더욱 중요
하고 가치 있는 일이었다.
“아... 아주머니... 죄... 죄송해요... 그러니까 그만 하세요....”
“새댁도 그러는 거 아냐... 설마 설마 했는데... 이게 뭐하는 짓이야!”
예상치도 못한 그녀가 아픈 몸을 이끌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여전히 분통을 터뜨리
며 나를 막아선 그녀의 옷을 잡아 마구 흔드는 엄마였다. 그녀는 눈물을 흘렸고 나도 그런
그녀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결국 나는 흥분한 엄마를 말리기 위해서 집으로 올라갈 수 밖
에 없었다.
“강성현! 너, 엄마를 이렇게 실망시켜도 되니?”
“됐어! 몰라... 엄마 짜증나! 내가, 그리고 누나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
나는 방문을 닫고 문을 잠가버렸다. 그 순간만큼은 아무리 엄마라고 해도 세상누구보다 밉
고 보기 싫었다. 계속해서 방문을 두드리며 얘기를 하자는 엄마의 목소리조차 듣기 싫었다.
“싫어! 다 싫어~~~”
그리고 나는 세상 모든 것과 단절하고 싶었다. 들려오는 모든 소리에서 해방이 되고 싶었
다. 내가 만들고, 내가 의도한 소리가 아니면 전부 막아서고 싶었다.
라디오를 켰다. 볼륨을 최대한 올려 세상의 모든 소리와 단절됐다. 그리고 가슴속에 박히는
노래가사에 한없이 눈물이 흘렀다.
“투투가 부릅니다.. 그대 눈물까지도”
그녀가 걱정됐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온통 그녀의 생각과 걱정에 나는
다시 방문을 열고 나가려했다. 그러나 망연자실한 채 문 앞을 지키고 서 있는 엄마를 밀치
지는 못했다.
“엄마... 누나가... 누나가 많이 아파...”
“................”
“잠깐이면 돼... 응?”
“................”
부탁을 해도, 애원을 하며 빌어도 엄마는 조금도 자리를 비켜주지 않았다.
“엄마~ 제발.... 응?”
“정신차려! 강성현... 너 제 정신 아니야...”
“누나가 아프다고...”
“성현아... 엄마 가슴은 찢어져... 너! 너... 어휴....”
엄마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지어냈다. 게다가 한번도 볼 수 없었던
눈물을 흘려보였다. 결국 나는 엄마를 밀쳐내지 못했다. 대신 방문이 부셔져라 세차게 닫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다음날을 알리는 새벽녘의 햇빛이 어스푸레 찾아올 때였다. 그녀
를 보지 못하면 이대로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창문을 넘어 정원으로 뛰어내려 나는 이모의 집을 찾았다. 한바탕 난리법석이 났던 이모의
집은 말끔히 정리가 되어 있었다. 그녀가 누웠던 침대도, 그릇들도 깨끗하게 씻겨 씽크대
위에 올려져 있었다. 불길했다. 다시 나는 곧장 누나의 집으로 향했다. 불은 꺼져 있었고 문
은 굳게 잠겨져 있었다.
“누나! 누나! 문 좀 열어 봐!”
“누나! 야!! 정채영!!”
끝내 문은 열리지 않았고 밖으로 뛰쳐나온 걸 알아차린 엄마와 아빠의 손에 다시 집으로 붙
들려 들어갔다.
그 후로 나는 그녀를 볼 수 없었다. 전과 같이 학교가 끝나면 바로바로 집으로 돌아와 우연
이라도 마주치려 했지만 그런 우연은 없었다. 방의 불은 항상 꺼져 있었고, 문을 두드려도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불안해졌다. 그녀가 나 몰래 어디론가 떠날까 겁이 났다.
그럴수록 나는 더욱 그녀에게 집착을 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학교도 나가지 않았다. 낮이고
밤이고 나는 그녀의 현관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하지만 그녀도, 그녀의 친오빠의 모습도
보이질 않았다. 그녀의 남편만을 잠시잠깐 봤을 뿐이다.
그리고 다시 얼마 지나지 않아 텅 비어버린 그녀의 집을 볼 수 있었다. 그녀의 흔적 마저
싸그리 남기지 않은 채 전부 들고 나가버린 그 곳엔 아무 것도 없었다.
‘쳇! 잘 있으라는 말 한마디 하기가 그렇게 힘들었냐? 나쁜년아!’
텅빈 그녀의 집에 망연자실 주저앉아 버렸다. 내 가슴속도 텅 비어버린 것처럼 허탈함이 들
어왔다. 그녀에게 모든 걸 다 주었지만 그녀는 내게 먼지 한 톨 남겨두고 가지 않았다. 무
작정 다가섰던 나이기도 했지만 최소한 한 발자국 정도는 내게 양보를 해 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녀는 나의 사랑이었다.
가슴 벅차도록 못 견딜 정도로, 가슴 터지도록 그리운 사랑.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젊은 날의 패기로 맞부딪친 허황스럽고 무모한 사랑.
그녀를 볼 수 없다는 걸 알았을 땐 천천히 마음의 문을 닫아버렸다.
그녀를 사랑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땐 이미 나는 죽은 사람과 다름없었다.
그녀는 평생의 한번 뿐인 나의 첫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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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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