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정이 바라던 희망은 삼 개월도 안 되서 물거품이 되어 날아가 버린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 명의로 발부된 채무 독촉장들은 삶을 뿌리까지 옭아매는 족쇄였다. 목숨을 끊고 싶은 심정의 그녀는 웅크리고 앉은 그녀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늦은 밤에 진혁이 술에 취해 들어왔다. 그녀는 그를 저주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우리 헤어져요!”
“뭐라고......!?”
“이혼하자고요!”
“여자가 지조도 없이.......! 조금 힘들다고 그런 말을 해? 난 이혼 못해!”
“나를 속이고, 뻔뻔스럽게.......”
난정은 두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술에 취한 진혁은 희죽 웃더니 침실로 들어가 버렸다. 분통이 터진 그녀가 따라 들어가니 그는 옷을 걸친 채로 침대에 벌렁 누웠다. 그녀는 온 몸의 피가 굳어버리는 것 같았다. 그는 이내 코를 골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와 대화도 되지 않지만, 더 이상 같이 생활을 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
뜬눈으로 밤을 보낸 난정이 침실로 들어가니 진혁은 세상모르고 잠에 빠져 있었다. 그녀는 소지품만 들고 진혁의 집을 무작정 나왔다. 마트 매장이 굳게 잠겨 있는 것을 보고 그녀는 온 몸에 힘이 풀렸다. 거리를 배회하던 그녀는 서울로 올라왔다. 그녀는 자신 명의로 받았던 채무독촉장을 생각하며 현기증을 느꼈다.
어찌되었던 난정은 진혁과 당장 이혼을 서두르는 것이 시급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앞으로 생활비와 은주의 유학비가 막막하였다. 힘없는 발걸음을 옮기던 그녀는 낯익은 남자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형부가 운영하던 가구점 앞을 지나고 있었던 것이다. 언제나 변함없는 민기의 그윽한 눈빛이었다.
“안녕하세요! 요즘 잘 안보이시네요.”
“네.......! 지방에서 일하고 있어서요.......”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인 난정은 민기의 시선을 피했다. 그녀는 항상 자신과 다른 세상의 남자를 대하는 것 같아서 열등감에 젖은 것이다. 그의 시선을 의식하는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가구점 앞을 벗어났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민기는 그녀가 왠지 초라해 보였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는 변함없이 열심히 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깊이 새겨졌다.
민기는 문득 지쳐가는 자신과 난정의 변함없는 모습과 대조가 되었다. 그는 한동안 은밀하게 정을 통하던 장 미랑과 연락이 두절된 상태이기에 허전하였다. 그녀는 아침저녁으로 도시락을 싸들고 그를 찾아와 안겼다. 그는 그녀의 남편이 두려우면서도 그녀의 육체에 중독되어 헤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유부녀인 그녀와 그의 관계는 영원히 감춰 질수는 없었다.
평상시나 마찬가지로 민기는 미랑과 노래주점에서 술을 마셨던 날이었다. 그는 술에 취한 그녀를 집으로 바래다 주기위해 그녀의 집 근처의 어두운 골목에 차를 세웠다. 그러나 그녀는 집으로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고 그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는 습관적으로 그녀에게 키스를 하였다. 그리고 그녀의 젖가슴을 애무하는 그의 손이 그녀의 팬티 속으로 들어갔다.
흥분한 미랑도 민기의 팬티 속을 더듬더니 페니스를 움켜쥐었다. 무아지경에 빠진 그는 그녀를 무릎위에 앉히고 스커트와 팬티를 걷어 올렸다. 등을 돌리고 앉은 그녀는 그의 발기한 페니스를 움켜쥐고 스스로 자신의 둔부 사이로 집어넣었다. 그의 페니스가 그녀의 촉촉한 보지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들은 오직 끓어오르는 성욕에 휘말릴 뿐이었다. 차안에 습한 열기가 가득해지고 오르가즘을 느낀 그녀는 그때서야 그의 가슴에서 벗어났다. 열기를 갈아 앉힌 그는 다시 그녀의 남편이 근처에서 보고 있는 것 같아서 불안했다. 팬티를 치켜 입은 그녀가 곱게 눈을 흘기며 승용차에서 내리려는 순간이었다. 승용차 앞 유리창을 바라본 그녀가 다급하게 외쳤다.
“혀, 현주 아빠야!”
“..........!?”
골목 맞은편 도로에 주차되어 있는 승용차가 보였다. 그리고 운전석에 앉아 있는 그림자! 민기는 그 순간 온 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다급해진 그는 무조건 가속 페달을 밟아 골목을 빠져 나왔다. 그는 백미러를 힐끗 보았다. 주차되어 있던 승용차가 따라오고 있었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민기는 대로로 빠져나와 질주했다. 쫓아오던 승용차가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미랑도 긴장을 했는지 얼굴빛이 하얗게 변했다. 그는 어쨌든 그녀와 같이 있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고 판단했다. 동네를 크게 한 바퀴 운전한 그는 그녀의 집 근처에서 차를 세웠다. 그녀가 부리나케 차에서 내렸다. 동시에 사거리에 서있던 그림자가 다가왔다.
민기는 재빨리 승용차를 후진시켜 골목으로 들어갔다가 반대편 대로로 나와 가속페달을 끝까지 밟았다. 그 후로 그는 그녀를 만날 수 없었다. 라이온스 멤버에게 들은 소문으로는 그녀는 대학교수인 오빠의 주선으로 호주로 이민 갔다고 했다. 민기는 그 당시 그녀의 남편을 만났던 상황을 생각하면 지금도 손이 떨렸다.
가로수의 나무들이 푸른 잎으로 단장하는 계절이 다가왔다. 사람들의 옷차림도 산뜻해지고 발걸음도 가벼워졌다. 성급한 사람들은 짧은 반소매를 걸치고 활보를 했다. 숨 가쁘게 달려와서 멈춘 지하철은 퇴근하는 사람들을 쏟아냈다. 사람들 틈에 끼어 지하철에서 내린 난정은 지친 걸음을 옮겼다. 다음날이 비번이기에 그녀는 병원에서 퇴근하는 중이었다.
악몽 같은 시간을 보낸 난정은 어쩔 수 없이 간병인 일을 다시 시작했다. 그녀의 합의 이혼을 진혁은 받아 드리지 않았다. 할 수없이 그녀는 이혼소송을 하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보다도 이억 가까이 되는 채무 독촉에 그녀는 시달렸다. 할 수없이 그녀는 신용회복위원회에 구제금융 신청을 했다. 진혁과 새로운 인생에 희망을 걸었던 그녀의 삼 개월은 지옥이었다.
횡단보도에 기다리는 사람들 틈에서 난정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신호등이 바뀐 것을 보고 횡단보도를 건너가 걸음을 옮기던 그녀는 멈칫하였다. 형부가 운영하던 가구점 앞이었다. 그녀는 가구점 앞에 보이는 송 민기를 보고 주춤했다. 그를 외면하고 싶은 생각에 그녀는 다른 길로 발길을 되돌리려 했다. 그러나 민기의 목소리가 그녀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오늘은 늦으셨네요!”
“아......! 네. 안녕하세요!”
당황한 난정은 멋쩍은 미소를 흘렸다. 그녀를 바라보는 민기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그는 언제나 그녀가 변하지 않고 꾸밈없는 모습으로 살아간다고 느꼈었다. 그래서 그녀와 같은 여자라면 나머지 인생을 의지하며 살고 싶다는 마음을 간직하고 있었다.
난정은 빨리 그의 시선에서 벗어나려고 빠른 걸음으로 가던 길로 향했다. 그런데 그의 목소리가 그녀의 발걸음을 다시 멈추게 했다.
“저기.........난정 씨!”
“네.......!?”
난정은 마치 도둑질을 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흠칫하며 돌아보았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그가 어눌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그들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가 그녀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저녁식사 하셨습니까?”
“아니.......! 아직.......”
“괜찮으시다면, 같이 식사 하시겠습니까?”
“.........!”
갑작스런 민기의 말에 난정은 대답대신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모든 것이 고통스러운 그녀에게 가족이라고는 독일에 가 있는 딸뿐이어서 항상 외로움에 쌓여 있었다. 그녀는 열등감을 느끼게 하는 그가 가족 같은 느낌도 들었다. 그녀의 표정을 살핀 그가 앞서서 걷기 시작했다.
말없이 민기의 뒤를 따라는 난정은 후회스러웠다. 그녀는 식사를 같이 하자는 그의 말을 거절 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한정식 전문의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탁자를 마주하고 앉은 그가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뭐를....... 좋아하시나요?”
“저는.......! 아무거나.”
난정은 그 말을 하면서 민기와 같이 식사를 했던 날의 형부의 썰렁한 유머를 떠 올렸다. 그녀가 아무거나 달라고 했더니 그녀의 형부가 아무거나 달라고 음식을 주문했었다. 추억을 떠 올린 그녀의 입가에 웃음이 피어났다. 삼겹살과 찌개, 그리고 술을 주문한 그가 그녀에게 물었다.
“왜, 웃어요? 내가 어디 이상한가!”
“아니요. 언젠가 형부가 했던 유머가 생각나서요.........가구점은 잘 되세요?”
“잘되기는요! 피시방까지 욕심내서 했더니 무리였나 봐요. 가구점을 넘기려고 생각 중입니다.”
“왜, 잘 되는 것 같던데요.”
“지금은 그럭저럭 되지만, 큰 기대를 못할 것 같습니다.”
주문한 음식들이 도착했다. 민기가 판위에 직접 삼겹살을 올려놓고 굽기 시작했다. 난정은 그의 익숙한 손놀림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웬만큼 고기가 익어가고 그가 그녀에게 식사를 권했다.
“자! 이제 드세요. 너무 익으면 질겨져요.”
“..........”
그들은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낮에도 식사를 하지 못한 난정은 밥부터 떠먹었다. 문득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을 보고 어색한 미소를 흘렸다. 고기 판을 뒤적거리던 그가 익은 고기를 그녀 옆에 있는 접시에 놓아 주었다.
“건강이 최고입니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고 말지요.”
“민기 씨도 드세요.”
“네. 혼자 식사하다가 난정 씨와 같이 하니 입맛이 도네요.”
“........”
난정은 새삼스럽게 혼자 생활하는 민기를 의식했다. 그녀는 안타까운 생각에 배시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식사를 하는 그들의 시선이 벽의 TV 화면을 주시하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TV 드라마에 대한 화제가 그들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혼자서 소주 한잔을 따라 마신 그가 빈 소주잔을 그녀 앞에 내밀었다.
“한 잔....... 하실 수 있어요?”
“저는........”
난정은 망설이면서도 민기가 내민 잔을 받고 있었다. 기분이 우울한 그녀는 왠지 취하고 싶었다. 스스로 술을 따라 마시는 그를 바라본 그녀는 고개를 돌려 술잔을 비웠다. 오래간만에 마시는 술이 내장 속으로 들어가는 감각이 그녀를 짜릿하게 했다. 그가 다시 그녀의 빈 잔을 채웠다.
“산다는 것이....... 고달프고 힘드네요.”
“..........”
난정은 넋두리처럼 흘리는 민기의 말을 담담하게 들었다. 단지 그녀는 그의 눈동자에 드리운 고독함이 엿보였다. 그의 눈빛은 여자의 모성애를 불러일으키는 애틋함이었다. 그녀의 침묵에도 그는 말을 이어갔다.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돈을 벌려고 하지만.......돈이라는 것은 행복하게 살기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 아닌가요?”
“그, 말은 맞아요........”
난정은 민기의 말에 동조하면서도 그녀 자신을 두고 말하는 것 같아서 뜨끔했다. 그녀는 단지 돈을 위해 목숨 같은 여자의 정조를 던졌던 결과에 고통스러워하는 것이다. 다시 술잔을 비운 그는 고개를 앞뒤로 끄덕였다.
“그런데, 사람들은 돈에 어두워 행복마저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요.......”
“.........!”
“저는 명예를 위해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돈도 명예도 필요 없더라고요. 이제는 작은 행복이어도 안정하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
난정은 자신에게 부담 없이 말하는 민기의 마음을 이해할 것도 같았다. 그의 마음은 가식을 벗어 버린 진실이 담겨있었다. 말을 하면서도 스스로 잔을 채워 마시는 그를 보고 그녀가 빈 잔을 채워 주었다. 말로 표현하지 않지만 그는 고맙다는 눈빛을 했다.
“난정 씨에게는 왠지 속마음을 털어 놓고 싶은데, 괜찮겠지요?”
“..........네.”
“난정 씨도 잘 아시다시피 저에게는 가족이 없습니다. 항상....... 외롭고 쓸쓸하지요. 밤이면 가슴을 억누르는 고독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도 있어요.”
“그래도 남자분이신데.........”
“어쩌면....... 여자가 더 강한지도 모릅니다.”
“글쎄요.......”
민기의 말에 난정은 스스로를 되돌아 봤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강하다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다만 그녀는 누구에게 말 못하는 고통을 안고 살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에는 술기운이 번져 보였다. 그가 빙긋이 웃음을 흘렸다.
“저는 외로움 때문에 요즘 한 여자와 교제를 했습니다. 그 여자는 전에 같이 근무했던 여직원이었지요. 그 여자는 남편과 자식이 있는 유부녀였습니다.......”
“아........!”
난정은 지식과 품위가 있어 고지삭하다고 느꼈던 민기의 다른 면모를 느꼈다. 그녀는 새삼스럽게 그도 감정이 있는 남자라는 것을 떠올렸다. 한편으로 그녀는 사생활에 대한 얘기를 부담 없이 말하는 그의 의도가 궁금하기도 했다. 어쨌든 그의 말은 그녀의 마음을 동요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마셨다. 그가 그녀의 솔 잔을 채워 주었다.
“인간은 짐승과 다른 것이 육체적인 욕망만으로 살 수 없는 것이더라고요. 평생 아내를 지키고 살지 못한 것도 고통스럽지만, 결국은 너무 심적인 부담으로 그 여자와 교재를 끊었습니다. 그렇지만........ 정신적으로는 더욱 허무하더군요.”
“그리고, 소식이 없나요?”
“네. 들리는 소문으로는........ 호주로 이민 갔다는 군요.”
“생각....... 나시겠네요!”
“아뇨.......! 상처받기 전에 잘 됐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문득 난정은 민기에게 관심을 갖고 꼬치꼬치 캐묻는 자신을 의식했다. 그녀는 이제 일어나야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의 말에 빠져 들고 있었다.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짓고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그의 눈동자는 술기운으로 붉어져 있었다. 그녀도 몇 잔 마신 술로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뜸을 드리다가 입을 열었다.
“저는 난정 씨가 부럽습니다.”
“호호.......! 무슨 말씀을.”
“아뇨! 정말 열심히 사시는 거 같아요.”
“그렇지도 않아요.”
난정은 민기의 말이 당치도 않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힘들게 살고 잇는 것을 모르고 그가 말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공연히 블라우스 앞가슴을 여미었다. 그가 심중한 태도로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기 때문이었다.
“이런 말씀 드려도 괜찮은지 모르겠네요.......”
“무슨.......!?”
“저는 난정 씨를 특별하게 기억합니다. 항상 꾸밈없이 열심히 사는 모습이 정말 여자다웠습니다.”
“그렇지도 않아요.........”
“외람된 말이지만.......”
“.........!?”
“난정 씨 같은 분이라면.......! 내가 의지하고 안정된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네!? 무슨 말씀을........!”
난정은 갑작스러운 민기의 말에 당황했다. 물론 그녀도 그에게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민기는 항상 간직했던 말을 용기를 내서 고백한 것이었다. 그는 전혀 예기치 않았다는 표정을 하는 그녀에게 다시 진심을 전하고 싶었다.
“농담으로 들어도 좋습니다. 나에게는 또 하나의 상처 일수도 있지만.......”
“..........!?”
“난정 씨를 아내로 맞이하고 싶습니다. 난정 씨를 볼 때마다 하고 싶었던 말입니다.”
“호호호.........!”
민기의 말을 듣고 난정은 웃었다. 짧은 순간에 그녀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가 떠올랐다. 진혁이라는 남자 때문에 고통 받는 그녀의 삶은 흙탕물에 뒹굴고 있었다. 물론 그녀가 선택한 길이었지만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는 남자의 말을 믿고 싶지 않은 심정이었다.
그리고 난정은 민기라는 남자가 자신이 살고 있는 인생과 다른 세상의 남자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가 술에 취한 순간적인 감정이거나 농담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그녀는 자신에게 솔직히 과거를 털어 놓는 그에게 친밀감을 느꼈다. 그녀는 누구엔가 하소연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농담이라도........ 저에게 과분해요. 저는 얼마 전에도 살아보려고 발버둥 치다가 신용불량자가 된 상태입니다.”
“무슨....... 일 때문에요?”
한숨을 내쉰 난정은 말을 해야 할지 망설였다.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민기가 의자를 당겨 앉았다. 그녀는 그의 진솔한 표정을 보고 거짓을 표현 할 수가 없었다. 또한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밝히면 그가 실망하고 더 이상 같은 인생을 가자고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의 심정을 밝힌다 해도 손해 볼 것이 없었다.
“저에게 딸이 있다는 것은 알고 계시잖아요?”
“네. 그렇지요.”
“사실 죽은 남편의 딸이 아니고, 결혼 전에 사귀던 남자의 딸예요.”
“아! 그러시군요. 첫사랑이었군요.”
민기는 마치 라디오 드라마를 듣듯이 난정의 말을 담담하게 듣고 있었다. 그녀는 전혀 놀라지 않는 그의 표정에 오히려 조심스러웠다. 그녀는 그를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도 숨김없이 자신의 사생활을 말했다는 것과 그녀는 이왕 숨겨야 할 말을 시작했기에 두려울 것이 없었다.
난정은 은주의 유학비와 생활비 때문에 힘들었다고 했다. 물론 그녀는 시아주버니와 종우와의 관계는 밝히지 않았다. 간병인을 하면서 그녀는 돈 때문에 최 진혁이라는 남자를 만나 살림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삼 개월 만에 남자에게 당하고 신용불량자가 되었다고 했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민기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난정은 민기가 순간의 감정에 자신의 사생활을 털어 놓으면서 같이 살자고 하는 것으로 알았다. 그래서 과거를 밝히면 더 이상 그가 헛된 희망을 갖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허심탄회하게 말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숨겨야 할 지난 과거를 밝힌 것이 후회스럽기도 했다.
술 한 잔을 다시 마신 민기는 고개를 젖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남은 인생을 의지하고 싶은 여자로 난정을 선택하려는 것이 올바른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는 정말 돈이나 육체적인 욕망을 떠나서 안정된 인생을 갖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착실해 보이는 그녀를 관심 깊게 살펴왔던 것이었다. 침묵을 깨고 그가 입을 열었다.
“채무가 얼마나 됩니까?”
“네.......!?”
난정은 또 한 번 당황했다. 그녀는 자신의 과거를 듣고 그가 실망해서 침묵한 것이라고 판단했었다. 그런데 그의 물음은 뜻밖이었다. 빤히 쳐다보는 그의 눈동자에는 소년 같은 순수함과 카리스마가 함께 들어나 보였다. 혼란스러운 그녀는 말을 더듬었다.
“그, 그걸.......! 왜......!? 육, 육천 가량 되지만.........”
“그걸, 내가 값아 줄게요.”
“네.......!?”
“그렇다고, 같이 살자고 강요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
얼떨결에 일억을 제외한 금액을 말했던 난정은 더욱 놀라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에겐 꿈만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어 믿을 수가 없었다. 경제력이나 인물과 풍기는 이미지, 그리고 건장한 체격의 그에게 어떤 여자라도 깊은 호감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여전히 그의 말을 믿을 수가 없는 그녀는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호호호........! 취하셨나 봐요.”
“그럴지도 모르지요. 어떤 때는 취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는 날이 있으니까요.”
“.........”
난정은 갑자기 웃음을 멈추었다. 한 숨을 내쉬는 민기의 진지하고도 고독한 그림자가 드리워진 눈빛에 그녀는 더 이상 웃을 수가 없었다. 굳은 표정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던 그가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휴대폰 번호를 불러 달라고 했다. 멈칫거리던 그녀가 불러주는 번호를 휴대폰에 입력한 그는 솔 잔에 남아있는 술을 벌컥 들이마셨다. 의자에서 일어선 그가 잔잔한 미소를 흘렸다.
“너무 늦었나보군요. 가시죠.”
“네.......!”
늦은 밤인데도 음식점 안에는 아직도 손님들의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가득했다. 카운터에서 계산을 치른 민기는 앞장서서 음식점을 나왔다. 그는 화장실에 갔다가 뒤따라 나오는 난정을 기다렸다가 말했다.
“집까지 바래다 드릴께!”
“괜찮은데요.......”
“저도 술을 깰 겸........”
“...........”
난정은 굳이 거부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술기운을 느끼는 난정은 더운 밤공기이지만 불어오는 바람에 한결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연립주택으로 향하는 골목에서 민기가 슬며시 그녀의 손을 잡았다. 흠칫한 그녀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싶지 않았다. 다른 남자와 달리 그녀는 그의 체온이 포근하게 느껴졌다.
다음날 난정은 민기와 같이 했던 시간을 잊고 평상시나 다름없이 병원으로 출근했다. 아니 그녀는 가슴속에 남아있는 그의 여운을 잊어버리고 싶었다. 그녀의 현실과 어울리지 않는 꿈이었기 때문이었다.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하던 그녀는 벨소리를 듣고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그녀에게 낯선 전화번호였다.
“네! 누구세요?”
“저, 송 민기입니다. 바쁘십니까?”
“아. 아니요. 잠시 만요.”
당황한 난정은 하마터면 수저를 떨어트릴 뻔했다. 그녀는 휴대폰을 들고 복도로 나왔다. 그가 전화하리라고 생각지 못했던 그녀는 갈팡질팡했다. 공연히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킨 그녀가 헛기침을 했다.
“네, 말씀하세요.”
“바쁘신데, 용건만 말할게요. 통장번호를 알려 주십시오.”
“네......!? 통장번호를요?”
“나도 시간이 없어서........”
난정은 의아스러워 할 여유도 없었다. 시간이 없다는 그의 말에 그녀는 허둥지둥 대답을 했다.
“아! XX은행. XXX-XXXX-XXX 안데요. 왜........?”
“언제 비번이십니까?”
“주, 주말에.......”
“그럼, 그때 뵙겠습니다.”
민기가 먼저 통화를 끝냈다. 정신이 멍한 난정은 통화가 끝난 휴대폰을 들고 서 있었다. 그녀는 끝까지 그의 말을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가 식당으로 들어가 먹다 남은 음식을 쏟아버리는데 문자가 도착했다는 휴대폰 벨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통장 입출금 SNS 통보였다.
[0x/ xx 12: 20. 입금 6천만 원. 송 민기. XX은행 XXX-XXXX-XXX ]
난정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러나 다시 봐도 틀림이 없었다. 휴대폰을 들고 있는 그녀의 손이 떨렸다. 그녀도 예전부터 은연중에 그에게 깊은 관심을 가졌었다. 그러나 진심을 보였던 그의 눈빛을 그녀는 피하려고 했었다. 그녀는 조건 없이 통장에 입금시킨 그에게 부끄럽기도 하고 미안한 마음을 어떻게 전할지 혼란스러웠다.
난정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가 채무를 대신 변제해 준다는 말을 전혀 불가능하다고 그녀는 생각했었다. 만약 그가 도와준다고 해도 그녀가 같은 인생을 가자고 약속한 후에 실현 가능한 일이었다. 민기를 떠올리던 그녀는 환자에게 식사를 주입하던 호스를 놓치기도 했다.
모두가 잠든 고요한 밤에도 잠을 못 이루던 난정은 휴대폰 진동 소리에 놀랐다. 그녀는 민기의 전화번호라는 것을 기억할 수 있었다. 그녀는 부리나케 나와 휴게실로 갔다. 밤늦게까지 TV를 보는 사람들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다시 복도로 나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아직 안 주무셨어요!? 너무 고마워요.”
“고맙기는......! 내가 해준다고 했잖아요. 잠이 안와서 전화 했는데 괜찮아요?”
“길게는 통화 못해요.”
“그럼......!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네! 하세요.”
민기는 조금 긴장했는지 잠시 뜸을 들였다. 난정의 지금 심정이라면 그의 어떤 말도 들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환자가 언제 깨어나서 찾을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의 목소리가 잔잔하게 들렸다.
“고생하는 난정 씨를 생각하면 잠이 안 오네.”
“어쩔 수 없지요.”
“그러지 말고 간병인 그만 두면 안 돼요?”
“그건 좀.........”
갑작스러운 민기의 물음은 난정이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었다. 말을 잇지 못하는 그녀는 그의 반려자가 되려는 결심을 하지 않은 상태이고, 당장 간병 일을 그만두면 은주의 유학비와 생활비가 문제였다. 그녀의 마음을 빤히 들여다보는 것처럼 그가 말했다.
“은주 유학비와 생활비를 줄 테니 집에서 쉬도록 해요!”
“그럴 수는.......!”
“아직 내 마음을 모르나 봐요. 어쨌든 생각해보고 내일 연락 줄래요?”
“.........그럴게요.”
난정은 사실 돌보고 있는 환자가 까다로워서 다른 곳으로 옮기고 싶었다. 민기의 관심과 배려는 그녀가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었다. 또한 그녀는 표현하지 못했지만 그의 모습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그녀의 가슴속에는 그의 그림자가 스며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의 그윽한 눈빛은 그녀의 마음에 불씨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까지 정신적으로 남자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기억이 없었다.--------------------------------
“우리 헤어져요!”
“뭐라고......!?”
“이혼하자고요!”
“여자가 지조도 없이.......! 조금 힘들다고 그런 말을 해? 난 이혼 못해!”
“나를 속이고, 뻔뻔스럽게.......”
난정은 두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술에 취한 진혁은 희죽 웃더니 침실로 들어가 버렸다. 분통이 터진 그녀가 따라 들어가니 그는 옷을 걸친 채로 침대에 벌렁 누웠다. 그녀는 온 몸의 피가 굳어버리는 것 같았다. 그는 이내 코를 골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와 대화도 되지 않지만, 더 이상 같이 생활을 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
뜬눈으로 밤을 보낸 난정이 침실로 들어가니 진혁은 세상모르고 잠에 빠져 있었다. 그녀는 소지품만 들고 진혁의 집을 무작정 나왔다. 마트 매장이 굳게 잠겨 있는 것을 보고 그녀는 온 몸에 힘이 풀렸다. 거리를 배회하던 그녀는 서울로 올라왔다. 그녀는 자신 명의로 받았던 채무독촉장을 생각하며 현기증을 느꼈다.
어찌되었던 난정은 진혁과 당장 이혼을 서두르는 것이 시급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앞으로 생활비와 은주의 유학비가 막막하였다. 힘없는 발걸음을 옮기던 그녀는 낯익은 남자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형부가 운영하던 가구점 앞을 지나고 있었던 것이다. 언제나 변함없는 민기의 그윽한 눈빛이었다.
“안녕하세요! 요즘 잘 안보이시네요.”
“네.......! 지방에서 일하고 있어서요.......”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인 난정은 민기의 시선을 피했다. 그녀는 항상 자신과 다른 세상의 남자를 대하는 것 같아서 열등감에 젖은 것이다. 그의 시선을 의식하는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가구점 앞을 벗어났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민기는 그녀가 왠지 초라해 보였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는 변함없이 열심히 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깊이 새겨졌다.
민기는 문득 지쳐가는 자신과 난정의 변함없는 모습과 대조가 되었다. 그는 한동안 은밀하게 정을 통하던 장 미랑과 연락이 두절된 상태이기에 허전하였다. 그녀는 아침저녁으로 도시락을 싸들고 그를 찾아와 안겼다. 그는 그녀의 남편이 두려우면서도 그녀의 육체에 중독되어 헤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유부녀인 그녀와 그의 관계는 영원히 감춰 질수는 없었다.
평상시나 마찬가지로 민기는 미랑과 노래주점에서 술을 마셨던 날이었다. 그는 술에 취한 그녀를 집으로 바래다 주기위해 그녀의 집 근처의 어두운 골목에 차를 세웠다. 그러나 그녀는 집으로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고 그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는 습관적으로 그녀에게 키스를 하였다. 그리고 그녀의 젖가슴을 애무하는 그의 손이 그녀의 팬티 속으로 들어갔다.
흥분한 미랑도 민기의 팬티 속을 더듬더니 페니스를 움켜쥐었다. 무아지경에 빠진 그는 그녀를 무릎위에 앉히고 스커트와 팬티를 걷어 올렸다. 등을 돌리고 앉은 그녀는 그의 발기한 페니스를 움켜쥐고 스스로 자신의 둔부 사이로 집어넣었다. 그의 페니스가 그녀의 촉촉한 보지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들은 오직 끓어오르는 성욕에 휘말릴 뿐이었다. 차안에 습한 열기가 가득해지고 오르가즘을 느낀 그녀는 그때서야 그의 가슴에서 벗어났다. 열기를 갈아 앉힌 그는 다시 그녀의 남편이 근처에서 보고 있는 것 같아서 불안했다. 팬티를 치켜 입은 그녀가 곱게 눈을 흘기며 승용차에서 내리려는 순간이었다. 승용차 앞 유리창을 바라본 그녀가 다급하게 외쳤다.
“혀, 현주 아빠야!”
“..........!?”
골목 맞은편 도로에 주차되어 있는 승용차가 보였다. 그리고 운전석에 앉아 있는 그림자! 민기는 그 순간 온 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다급해진 그는 무조건 가속 페달을 밟아 골목을 빠져 나왔다. 그는 백미러를 힐끗 보았다. 주차되어 있던 승용차가 따라오고 있었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민기는 대로로 빠져나와 질주했다. 쫓아오던 승용차가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미랑도 긴장을 했는지 얼굴빛이 하얗게 변했다. 그는 어쨌든 그녀와 같이 있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고 판단했다. 동네를 크게 한 바퀴 운전한 그는 그녀의 집 근처에서 차를 세웠다. 그녀가 부리나케 차에서 내렸다. 동시에 사거리에 서있던 그림자가 다가왔다.
민기는 재빨리 승용차를 후진시켜 골목으로 들어갔다가 반대편 대로로 나와 가속페달을 끝까지 밟았다. 그 후로 그는 그녀를 만날 수 없었다. 라이온스 멤버에게 들은 소문으로는 그녀는 대학교수인 오빠의 주선으로 호주로 이민 갔다고 했다. 민기는 그 당시 그녀의 남편을 만났던 상황을 생각하면 지금도 손이 떨렸다.
가로수의 나무들이 푸른 잎으로 단장하는 계절이 다가왔다. 사람들의 옷차림도 산뜻해지고 발걸음도 가벼워졌다. 성급한 사람들은 짧은 반소매를 걸치고 활보를 했다. 숨 가쁘게 달려와서 멈춘 지하철은 퇴근하는 사람들을 쏟아냈다. 사람들 틈에 끼어 지하철에서 내린 난정은 지친 걸음을 옮겼다. 다음날이 비번이기에 그녀는 병원에서 퇴근하는 중이었다.
악몽 같은 시간을 보낸 난정은 어쩔 수 없이 간병인 일을 다시 시작했다. 그녀의 합의 이혼을 진혁은 받아 드리지 않았다. 할 수없이 그녀는 이혼소송을 하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보다도 이억 가까이 되는 채무 독촉에 그녀는 시달렸다. 할 수없이 그녀는 신용회복위원회에 구제금융 신청을 했다. 진혁과 새로운 인생에 희망을 걸었던 그녀의 삼 개월은 지옥이었다.
횡단보도에 기다리는 사람들 틈에서 난정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신호등이 바뀐 것을 보고 횡단보도를 건너가 걸음을 옮기던 그녀는 멈칫하였다. 형부가 운영하던 가구점 앞이었다. 그녀는 가구점 앞에 보이는 송 민기를 보고 주춤했다. 그를 외면하고 싶은 생각에 그녀는 다른 길로 발길을 되돌리려 했다. 그러나 민기의 목소리가 그녀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오늘은 늦으셨네요!”
“아......! 네. 안녕하세요!”
당황한 난정은 멋쩍은 미소를 흘렸다. 그녀를 바라보는 민기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그는 언제나 그녀가 변하지 않고 꾸밈없는 모습으로 살아간다고 느꼈었다. 그래서 그녀와 같은 여자라면 나머지 인생을 의지하며 살고 싶다는 마음을 간직하고 있었다.
난정은 빨리 그의 시선에서 벗어나려고 빠른 걸음으로 가던 길로 향했다. 그런데 그의 목소리가 그녀의 발걸음을 다시 멈추게 했다.
“저기.........난정 씨!”
“네.......!?”
난정은 마치 도둑질을 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흠칫하며 돌아보았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그가 어눌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그들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가 그녀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저녁식사 하셨습니까?”
“아니.......! 아직.......”
“괜찮으시다면, 같이 식사 하시겠습니까?”
“.........!”
갑작스런 민기의 말에 난정은 대답대신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모든 것이 고통스러운 그녀에게 가족이라고는 독일에 가 있는 딸뿐이어서 항상 외로움에 쌓여 있었다. 그녀는 열등감을 느끼게 하는 그가 가족 같은 느낌도 들었다. 그녀의 표정을 살핀 그가 앞서서 걷기 시작했다.
말없이 민기의 뒤를 따라는 난정은 후회스러웠다. 그녀는 식사를 같이 하자는 그의 말을 거절 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한정식 전문의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탁자를 마주하고 앉은 그가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뭐를....... 좋아하시나요?”
“저는.......! 아무거나.”
난정은 그 말을 하면서 민기와 같이 식사를 했던 날의 형부의 썰렁한 유머를 떠 올렸다. 그녀가 아무거나 달라고 했더니 그녀의 형부가 아무거나 달라고 음식을 주문했었다. 추억을 떠 올린 그녀의 입가에 웃음이 피어났다. 삼겹살과 찌개, 그리고 술을 주문한 그가 그녀에게 물었다.
“왜, 웃어요? 내가 어디 이상한가!”
“아니요. 언젠가 형부가 했던 유머가 생각나서요.........가구점은 잘 되세요?”
“잘되기는요! 피시방까지 욕심내서 했더니 무리였나 봐요. 가구점을 넘기려고 생각 중입니다.”
“왜, 잘 되는 것 같던데요.”
“지금은 그럭저럭 되지만, 큰 기대를 못할 것 같습니다.”
주문한 음식들이 도착했다. 민기가 판위에 직접 삼겹살을 올려놓고 굽기 시작했다. 난정은 그의 익숙한 손놀림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웬만큼 고기가 익어가고 그가 그녀에게 식사를 권했다.
“자! 이제 드세요. 너무 익으면 질겨져요.”
“..........”
그들은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낮에도 식사를 하지 못한 난정은 밥부터 떠먹었다. 문득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을 보고 어색한 미소를 흘렸다. 고기 판을 뒤적거리던 그가 익은 고기를 그녀 옆에 있는 접시에 놓아 주었다.
“건강이 최고입니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고 말지요.”
“민기 씨도 드세요.”
“네. 혼자 식사하다가 난정 씨와 같이 하니 입맛이 도네요.”
“........”
난정은 새삼스럽게 혼자 생활하는 민기를 의식했다. 그녀는 안타까운 생각에 배시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식사를 하는 그들의 시선이 벽의 TV 화면을 주시하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TV 드라마에 대한 화제가 그들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혼자서 소주 한잔을 따라 마신 그가 빈 소주잔을 그녀 앞에 내밀었다.
“한 잔....... 하실 수 있어요?”
“저는........”
난정은 망설이면서도 민기가 내민 잔을 받고 있었다. 기분이 우울한 그녀는 왠지 취하고 싶었다. 스스로 술을 따라 마시는 그를 바라본 그녀는 고개를 돌려 술잔을 비웠다. 오래간만에 마시는 술이 내장 속으로 들어가는 감각이 그녀를 짜릿하게 했다. 그가 다시 그녀의 빈 잔을 채웠다.
“산다는 것이....... 고달프고 힘드네요.”
“..........”
난정은 넋두리처럼 흘리는 민기의 말을 담담하게 들었다. 단지 그녀는 그의 눈동자에 드리운 고독함이 엿보였다. 그의 눈빛은 여자의 모성애를 불러일으키는 애틋함이었다. 그녀의 침묵에도 그는 말을 이어갔다.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돈을 벌려고 하지만.......돈이라는 것은 행복하게 살기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 아닌가요?”
“그, 말은 맞아요........”
난정은 민기의 말에 동조하면서도 그녀 자신을 두고 말하는 것 같아서 뜨끔했다. 그녀는 단지 돈을 위해 목숨 같은 여자의 정조를 던졌던 결과에 고통스러워하는 것이다. 다시 술잔을 비운 그는 고개를 앞뒤로 끄덕였다.
“그런데, 사람들은 돈에 어두워 행복마저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요.......”
“.........!”
“저는 명예를 위해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돈도 명예도 필요 없더라고요. 이제는 작은 행복이어도 안정하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
난정은 자신에게 부담 없이 말하는 민기의 마음을 이해할 것도 같았다. 그의 마음은 가식을 벗어 버린 진실이 담겨있었다. 말을 하면서도 스스로 잔을 채워 마시는 그를 보고 그녀가 빈 잔을 채워 주었다. 말로 표현하지 않지만 그는 고맙다는 눈빛을 했다.
“난정 씨에게는 왠지 속마음을 털어 놓고 싶은데, 괜찮겠지요?”
“..........네.”
“난정 씨도 잘 아시다시피 저에게는 가족이 없습니다. 항상....... 외롭고 쓸쓸하지요. 밤이면 가슴을 억누르는 고독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도 있어요.”
“그래도 남자분이신데.........”
“어쩌면....... 여자가 더 강한지도 모릅니다.”
“글쎄요.......”
민기의 말에 난정은 스스로를 되돌아 봤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강하다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다만 그녀는 누구에게 말 못하는 고통을 안고 살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에는 술기운이 번져 보였다. 그가 빙긋이 웃음을 흘렸다.
“저는 외로움 때문에 요즘 한 여자와 교제를 했습니다. 그 여자는 전에 같이 근무했던 여직원이었지요. 그 여자는 남편과 자식이 있는 유부녀였습니다.......”
“아........!”
난정은 지식과 품위가 있어 고지삭하다고 느꼈던 민기의 다른 면모를 느꼈다. 그녀는 새삼스럽게 그도 감정이 있는 남자라는 것을 떠올렸다. 한편으로 그녀는 사생활에 대한 얘기를 부담 없이 말하는 그의 의도가 궁금하기도 했다. 어쨌든 그의 말은 그녀의 마음을 동요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마셨다. 그가 그녀의 솔 잔을 채워 주었다.
“인간은 짐승과 다른 것이 육체적인 욕망만으로 살 수 없는 것이더라고요. 평생 아내를 지키고 살지 못한 것도 고통스럽지만, 결국은 너무 심적인 부담으로 그 여자와 교재를 끊었습니다. 그렇지만........ 정신적으로는 더욱 허무하더군요.”
“그리고, 소식이 없나요?”
“네. 들리는 소문으로는........ 호주로 이민 갔다는 군요.”
“생각....... 나시겠네요!”
“아뇨.......! 상처받기 전에 잘 됐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문득 난정은 민기에게 관심을 갖고 꼬치꼬치 캐묻는 자신을 의식했다. 그녀는 이제 일어나야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의 말에 빠져 들고 있었다.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짓고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그의 눈동자는 술기운으로 붉어져 있었다. 그녀도 몇 잔 마신 술로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뜸을 드리다가 입을 열었다.
“저는 난정 씨가 부럽습니다.”
“호호.......! 무슨 말씀을.”
“아뇨! 정말 열심히 사시는 거 같아요.”
“그렇지도 않아요.”
난정은 민기의 말이 당치도 않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힘들게 살고 잇는 것을 모르고 그가 말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공연히 블라우스 앞가슴을 여미었다. 그가 심중한 태도로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기 때문이었다.
“이런 말씀 드려도 괜찮은지 모르겠네요.......”
“무슨.......!?”
“저는 난정 씨를 특별하게 기억합니다. 항상 꾸밈없이 열심히 사는 모습이 정말 여자다웠습니다.”
“그렇지도 않아요.........”
“외람된 말이지만.......”
“.........!?”
“난정 씨 같은 분이라면.......! 내가 의지하고 안정된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네!? 무슨 말씀을........!”
난정은 갑작스러운 민기의 말에 당황했다. 물론 그녀도 그에게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민기는 항상 간직했던 말을 용기를 내서 고백한 것이었다. 그는 전혀 예기치 않았다는 표정을 하는 그녀에게 다시 진심을 전하고 싶었다.
“농담으로 들어도 좋습니다. 나에게는 또 하나의 상처 일수도 있지만.......”
“..........!?”
“난정 씨를 아내로 맞이하고 싶습니다. 난정 씨를 볼 때마다 하고 싶었던 말입니다.”
“호호호.........!”
민기의 말을 듣고 난정은 웃었다. 짧은 순간에 그녀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가 떠올랐다. 진혁이라는 남자 때문에 고통 받는 그녀의 삶은 흙탕물에 뒹굴고 있었다. 물론 그녀가 선택한 길이었지만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는 남자의 말을 믿고 싶지 않은 심정이었다.
그리고 난정은 민기라는 남자가 자신이 살고 있는 인생과 다른 세상의 남자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가 술에 취한 순간적인 감정이거나 농담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그녀는 자신에게 솔직히 과거를 털어 놓는 그에게 친밀감을 느꼈다. 그녀는 누구엔가 하소연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농담이라도........ 저에게 과분해요. 저는 얼마 전에도 살아보려고 발버둥 치다가 신용불량자가 된 상태입니다.”
“무슨....... 일 때문에요?”
한숨을 내쉰 난정은 말을 해야 할지 망설였다.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민기가 의자를 당겨 앉았다. 그녀는 그의 진솔한 표정을 보고 거짓을 표현 할 수가 없었다. 또한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밝히면 그가 실망하고 더 이상 같은 인생을 가자고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의 심정을 밝힌다 해도 손해 볼 것이 없었다.
“저에게 딸이 있다는 것은 알고 계시잖아요?”
“네. 그렇지요.”
“사실 죽은 남편의 딸이 아니고, 결혼 전에 사귀던 남자의 딸예요.”
“아! 그러시군요. 첫사랑이었군요.”
민기는 마치 라디오 드라마를 듣듯이 난정의 말을 담담하게 듣고 있었다. 그녀는 전혀 놀라지 않는 그의 표정에 오히려 조심스러웠다. 그녀는 그를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도 숨김없이 자신의 사생활을 말했다는 것과 그녀는 이왕 숨겨야 할 말을 시작했기에 두려울 것이 없었다.
난정은 은주의 유학비와 생활비 때문에 힘들었다고 했다. 물론 그녀는 시아주버니와 종우와의 관계는 밝히지 않았다. 간병인을 하면서 그녀는 돈 때문에 최 진혁이라는 남자를 만나 살림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삼 개월 만에 남자에게 당하고 신용불량자가 되었다고 했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민기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난정은 민기가 순간의 감정에 자신의 사생활을 털어 놓으면서 같이 살자고 하는 것으로 알았다. 그래서 과거를 밝히면 더 이상 그가 헛된 희망을 갖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허심탄회하게 말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숨겨야 할 지난 과거를 밝힌 것이 후회스럽기도 했다.
술 한 잔을 다시 마신 민기는 고개를 젖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남은 인생을 의지하고 싶은 여자로 난정을 선택하려는 것이 올바른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는 정말 돈이나 육체적인 욕망을 떠나서 안정된 인생을 갖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착실해 보이는 그녀를 관심 깊게 살펴왔던 것이었다. 침묵을 깨고 그가 입을 열었다.
“채무가 얼마나 됩니까?”
“네.......!?”
난정은 또 한 번 당황했다. 그녀는 자신의 과거를 듣고 그가 실망해서 침묵한 것이라고 판단했었다. 그런데 그의 물음은 뜻밖이었다. 빤히 쳐다보는 그의 눈동자에는 소년 같은 순수함과 카리스마가 함께 들어나 보였다. 혼란스러운 그녀는 말을 더듬었다.
“그, 그걸.......! 왜......!? 육, 육천 가량 되지만.........”
“그걸, 내가 값아 줄게요.”
“네.......!?”
“그렇다고, 같이 살자고 강요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
얼떨결에 일억을 제외한 금액을 말했던 난정은 더욱 놀라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에겐 꿈만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어 믿을 수가 없었다. 경제력이나 인물과 풍기는 이미지, 그리고 건장한 체격의 그에게 어떤 여자라도 깊은 호감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여전히 그의 말을 믿을 수가 없는 그녀는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호호호........! 취하셨나 봐요.”
“그럴지도 모르지요. 어떤 때는 취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는 날이 있으니까요.”
“.........”
난정은 갑자기 웃음을 멈추었다. 한 숨을 내쉬는 민기의 진지하고도 고독한 그림자가 드리워진 눈빛에 그녀는 더 이상 웃을 수가 없었다. 굳은 표정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던 그가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휴대폰 번호를 불러 달라고 했다. 멈칫거리던 그녀가 불러주는 번호를 휴대폰에 입력한 그는 솔 잔에 남아있는 술을 벌컥 들이마셨다. 의자에서 일어선 그가 잔잔한 미소를 흘렸다.
“너무 늦었나보군요. 가시죠.”
“네.......!”
늦은 밤인데도 음식점 안에는 아직도 손님들의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가득했다. 카운터에서 계산을 치른 민기는 앞장서서 음식점을 나왔다. 그는 화장실에 갔다가 뒤따라 나오는 난정을 기다렸다가 말했다.
“집까지 바래다 드릴께!”
“괜찮은데요.......”
“저도 술을 깰 겸........”
“...........”
난정은 굳이 거부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술기운을 느끼는 난정은 더운 밤공기이지만 불어오는 바람에 한결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연립주택으로 향하는 골목에서 민기가 슬며시 그녀의 손을 잡았다. 흠칫한 그녀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싶지 않았다. 다른 남자와 달리 그녀는 그의 체온이 포근하게 느껴졌다.
다음날 난정은 민기와 같이 했던 시간을 잊고 평상시나 다름없이 병원으로 출근했다. 아니 그녀는 가슴속에 남아있는 그의 여운을 잊어버리고 싶었다. 그녀의 현실과 어울리지 않는 꿈이었기 때문이었다.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하던 그녀는 벨소리를 듣고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그녀에게 낯선 전화번호였다.
“네! 누구세요?”
“저, 송 민기입니다. 바쁘십니까?”
“아. 아니요. 잠시 만요.”
당황한 난정은 하마터면 수저를 떨어트릴 뻔했다. 그녀는 휴대폰을 들고 복도로 나왔다. 그가 전화하리라고 생각지 못했던 그녀는 갈팡질팡했다. 공연히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킨 그녀가 헛기침을 했다.
“네, 말씀하세요.”
“바쁘신데, 용건만 말할게요. 통장번호를 알려 주십시오.”
“네......!? 통장번호를요?”
“나도 시간이 없어서........”
난정은 의아스러워 할 여유도 없었다. 시간이 없다는 그의 말에 그녀는 허둥지둥 대답을 했다.
“아! XX은행. XXX-XXXX-XXX 안데요. 왜........?”
“언제 비번이십니까?”
“주, 주말에.......”
“그럼, 그때 뵙겠습니다.”
민기가 먼저 통화를 끝냈다. 정신이 멍한 난정은 통화가 끝난 휴대폰을 들고 서 있었다. 그녀는 끝까지 그의 말을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가 식당으로 들어가 먹다 남은 음식을 쏟아버리는데 문자가 도착했다는 휴대폰 벨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통장 입출금 SNS 통보였다.
[0x/ xx 12: 20. 입금 6천만 원. 송 민기. XX은행 XXX-XXXX-XXX ]
난정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러나 다시 봐도 틀림이 없었다. 휴대폰을 들고 있는 그녀의 손이 떨렸다. 그녀도 예전부터 은연중에 그에게 깊은 관심을 가졌었다. 그러나 진심을 보였던 그의 눈빛을 그녀는 피하려고 했었다. 그녀는 조건 없이 통장에 입금시킨 그에게 부끄럽기도 하고 미안한 마음을 어떻게 전할지 혼란스러웠다.
난정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가 채무를 대신 변제해 준다는 말을 전혀 불가능하다고 그녀는 생각했었다. 만약 그가 도와준다고 해도 그녀가 같은 인생을 가자고 약속한 후에 실현 가능한 일이었다. 민기를 떠올리던 그녀는 환자에게 식사를 주입하던 호스를 놓치기도 했다.
모두가 잠든 고요한 밤에도 잠을 못 이루던 난정은 휴대폰 진동 소리에 놀랐다. 그녀는 민기의 전화번호라는 것을 기억할 수 있었다. 그녀는 부리나케 나와 휴게실로 갔다. 밤늦게까지 TV를 보는 사람들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다시 복도로 나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아직 안 주무셨어요!? 너무 고마워요.”
“고맙기는......! 내가 해준다고 했잖아요. 잠이 안와서 전화 했는데 괜찮아요?”
“길게는 통화 못해요.”
“그럼......!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네! 하세요.”
민기는 조금 긴장했는지 잠시 뜸을 들였다. 난정의 지금 심정이라면 그의 어떤 말도 들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환자가 언제 깨어나서 찾을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의 목소리가 잔잔하게 들렸다.
“고생하는 난정 씨를 생각하면 잠이 안 오네.”
“어쩔 수 없지요.”
“그러지 말고 간병인 그만 두면 안 돼요?”
“그건 좀.........”
갑작스러운 민기의 물음은 난정이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었다. 말을 잇지 못하는 그녀는 그의 반려자가 되려는 결심을 하지 않은 상태이고, 당장 간병 일을 그만두면 은주의 유학비와 생활비가 문제였다. 그녀의 마음을 빤히 들여다보는 것처럼 그가 말했다.
“은주 유학비와 생활비를 줄 테니 집에서 쉬도록 해요!”
“그럴 수는.......!”
“아직 내 마음을 모르나 봐요. 어쨌든 생각해보고 내일 연락 줄래요?”
“.........그럴게요.”
난정은 사실 돌보고 있는 환자가 까다로워서 다른 곳으로 옮기고 싶었다. 민기의 관심과 배려는 그녀가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었다. 또한 그녀는 표현하지 못했지만 그의 모습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그녀의 가슴속에는 그의 그림자가 스며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의 그윽한 눈빛은 그녀의 마음에 불씨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까지 정신적으로 남자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기억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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