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가 자주 잠을 깨서 피곤한 밤을 보낸 난정은 다시 힘겨운 하루의 일과를 시작했다. 그런데 무심코 병실 입구를 향한 그녀의 시야에 진혁의 모습이 드러났다. 순간 그녀는 긴장했다. 그는 평소에도 단정한 모습이지만 정장을 차려입고 있었다. 병실로 들어와 다가오는 그를 보고 그녀는 외면하였다. 그녀의 귀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수고하십니다.”
“네.......? 네!”
“오늘도 수고하시네요.”
“수고는요! 제가 해야 할 일인데요.”
진혁이 병상으로 다가와 환자를 들여다보았다. 치매가 심한 환자는 아들을 보고도 멀뚱멀뚱 허공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어머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걱정스러워 했다.
“이젠...... 저도 몰라보시네요.”
“며칠 전부터 더 심해지셨나 봐요.”
침상에서 벗겨낸 시트를 들고 난정은 공연히 허둥거렸다. 그녀는 시트를 들고 병실을 나왔다. 세탁물 방으로 가서 시트를 집어넣은 그녀는 복도로 나와 주춤거렸다. 가슴이 두근거려 진혁을 마주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녀가 마음을 진정시키고 병실로 들어가니 창가에 있던 그가 돌아섰다.
“저기.......! 제 쪽지 보셨나요?”
“........네!”
진혁의 시선을 피해 환자의 소지품을 정리하던 난정이 간신히 대답했다. 그가 어떤 말을 할지 그녀는 긴장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움직임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마른침을 삼킨 그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내가 대리 간병인을 불렀는데, 오늘 하루 쉬셨으면 합니다.”
“네.......!?”
진혁이 어떤 말을 할지 여러 가지 예측을 하던 난정이지만 당황했다. 그녀는 굽혔던 허리를 펴고 그를 바라봤다. 그는 남자로서는 작은 키에 통통했다. 정중한 자세로 말하는 진혁도 긴장한 것이 역력했고 눈빛은 간절했다. 뒤늦게 그의 말을 이해한 그녀는 망설였다. 그가 다시 호흡을 가다듬고 말했다.
“오늘 저에게 시간을 내주시겠습니까?”
“오늘요........!?”
진혁의 말투는 마치 시나리오를 읽는 것처럼 어색했다. 어눌한 그의 물음에 그녀는 되묻고 있었다. 문득 그녀의 머릿속에는 언젠가 남자에게 이끌려 모텔에 갔던 일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정직하고 너무 순박해 보여 그녀의 불안감을 사라지게 했다. 그가 어색한 미소를 흘렸다.
“저, 이상한 사람 아닙니다. 제 어머님을 봐서 믿어 주십시오.”
“어디로........?”
“그냥 편하게 모시겠습니다. 불편하시면 돌아 오셔도 좋습니다.”
“그럼.......!”
긍정적인 난정의 말에 진혁이 병실을 나갔다가 가운을 걸친 여자를 데리고 들어왔다. 나이가 듬직하지만 밝은 표정의 가운을 걸친 여자였다. 그가 난정과 그녀를 번갈아 쳐다보며 소개했다.
“이분은 우리 어머니를 돌보시는 난정 씨! 그리고 이 분은 대리근무를 하실 고 여사입니다.”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난정과 고 여사는 미소를 띠며 인사를 했다. 난정은 막상 진혁의 말을 듣고 보니 뭘 해야 할지 허둥지둥했다. 주춤거리던 그녀는 고 여사에게 환자에 대한 주의사항을 전달했다. 그녀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진혁이 병실을 나갔다. 난정이 외출 준비를 마칠 즈음 그가 다시 병실로 들어왔다.
“이제 나가셔도 됩니까?”
“네........!”
여전히 진혁의 시선을 피하는 난정이 손가방을 집어 들었다. 그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그는 다시 병상으로 가서 어머니를 들여다보고는 고 여사에게 말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네!”
고 여사가 깍듯이 진혁에게 인사를 했다. 난정은 다소곳이 손가방을 들고 서 있었다. 난정에게 시선을 향한 그가 복도를 가리켰다.
“가시죠!”
“...........”
난정은 말없이 진혁을 따라나섰다. 병원을 나온 그는 택시 주차장으로 향했다. 택시 뒷문을 열고 선 그는 난정에게 먼저 타라고 정중한 자세를 보였다. 그는 운전가시에게 자신의 마트가 있는 동네를 말했다. 그녀는 옆자리에 앉은 그를 의식하여 몸을 사렸다. 그러나 그는 꼿꼿한 자세로 침묵을 지켰다.
진혁의 옆모습을 훔쳐보는 난정은 의문을 느꼈다. 마트 사장쯤 되면 자가용은 필수 일 것 같은데 택시를 이용하는 그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대리 간병인이 그와 같이 나오는 것을 보고 어떻게 생각할지도 궁금했다. 간병인 사이에는 별 것도 아인 일에 루머가 떠돌기도 했었다. 그녀가 결국 그에게 물었다.
“고 여사에게 뭐라고 하셨어요?”
“아! 난정 씨하고는 친척인데, 집안일이 있어 같이 간다고 했습니다.”
“아! 네.........”
“...........”
“교통수단으로 택시를 주로 이용하시나요?”
“아뇨! 마트 트럭이 아니면 버스를 주로 이용합니다. 기름 값이 너무 비싸서 승용차는 구입하지 않았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난정은 진혁이 무척 검소하다고 느껴 신뢰감이 들었다. 번화가로 들어간 택시가 대형 마트 앞에 정차하였다. 그가 안내하는 건물로 들어선 그녀는 놀랬다.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전자 마트는 규모가 컸다. 백여 평도 넘게 보이는 마트 안에는 전자제품들이 즐비하게 진열되어 있고 많은 종업원들이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종업원들이 진혁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 지나다녔다. 그는 비로소 의젓한 자세로 난정을 안내하였다. 이 층에는 똑같은 규모의 창고가 있었다. 난정은 마치 그의 아내가 된 심정으로 가슴이 벅차고 뿌듯하였다. 이층 창고를 돌아본 그는 그녀를 자신의 방으로 안내를 했다.
진혁은 젊은 여직원에게 차를 가져오라고 했다. 소파에 앉아 있는 난정은 그의 방과 유리창 밖에서 일하는 종업원들의 모습을 두리번거렸다. 그녀는 이제까지 살아온 세상과 다른 곳에 와 있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자상하던 그의 다른 면모를 느낄 수 있었다. 머리가 희끗희끗하게 나이 듬직한 직원이 그의 책상에 결재 판을 올려놓고 굽실거렸다.
난정이 나중에 알았지만 그 직원이 영업담당 박 부장이었다.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서류를 검토하는 진혁의 옆모습을 빤히 쳐다봤다. 때로는 호통을 치며 지시를 하는 그의 모습에 난정은 희열마저 느꼈다. 여자 종업원이 가져온 차를 마시는 그녀는 그를 만나게 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종업원이 나가고 몇 가지 서류를 검토한 그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지루하시죠?”
“아뇨!”
난정은 처음으로 진혁을 향해 배시시 미소를 띠었다. 그는 미소를 짓은 그녀의 모습에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소파에 앉은 그가 어디론가 전화를 하고 일어섰다.
“바람 쏘이러 나갈까요?”
“...........”
진혁을 올려다 본 난정은 대답대신 눈웃음을 짓고 일어섰다. 그는 뚜벅거리며 매장을 걸어 나갔다. 가끔 그는 종업원에게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지시를 하기도 했다. 그는 마트 앞에 주차된 고급승용차의 조수석 문을 열고 그녀에게 타라고 했다. 운전석에 올라 시동을 걸고 그가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오늘 난정 씨를 위해 렌탈했습니다.”
“...........”
승용차를 운전하면서 진혁은 이따금 난정의 옆모습을 훔쳐보았다. 그녀는 왠일인지 그의 시선을 의식하면서도 부담스럽지 않았다. 그가 운전해서 도착한 것은 부둣가였다. 그녀는 편한 마음으로 그를 따라 부둣가를 거닐었다. 그는 간병인을 하는데 힘들지 않느냐고 그녀에게 물었고, 자연스럽게 환자에 대한 담소를 나누었다.
부둣가를 거닐던 진혁이 이층에 있는 커피숍으로 난정을 데리고 들어갔다. 유리창 밖의 갈매기가 날아다니는 바닷가 풍경은 한결 여유로웠다. 그는 예전에 교제를 했던 여자에게 배반당하고 괴로웠던 심정을 그녀에게 고백했다. 그의 진솔함에 그녀는 과거가 있다는 것을 말했다.
“저에게는 죽은 남편에게서 낳은 딸이 있어요. 생활이 어려워서 간병 일을 하게 되었어요”
“그러시겠죠. 난정 씨 같이 아름다운 분이 간병 일을 할 리가 있겠습니까.”
난정은 진혁이 놀랄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녀는 은주가 남편과 결혼 전에 만났던 남자에게서 낳은 딸이라는 것만은 밝히지 않았다. 그는 도리어 그녀의 어떤 과거도 이해한다면서 현실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녀는 생각보다 너그러운 그의 마음이 믿어지지 않았다.
“진혁 씨는 결혼도 하지 않았는데, 제 말에 놀라지 않으시네요.”
“짐작은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난정 씨, 따님도 내 딸처럼 보살필 각오가 되 있습니다. 난정 씨가 제 마음을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
진혁의 진정성이 담긴 눈빛에 난정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는 그녀를 안심시키려고 사업을 하기 전에 가난했던 시절의 고통을 털어 놓았다. 그리고 그는 사업을 하면서 위기를 극복했던 일들을 조금은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녀의 가슴에 남았던 의혹은 봄 눈 녹듯이 사라지고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그가 간절한 눈빛을 했다.
“저도 그렇지만, 난정 씨의 힘들었던 지난날을 잊게 해드리고 싶습니다. 이제 경제력이 있으니 행복한 가정을 갖고 싶은 소망입니다.”
“그러나.........!”
대답을 기다리는 진혁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난정은 그의 요구를 받아 드리고 싶으면서도 노파심이 생겼다. 그가 결혼 후에 경제적인 도움을 주지 않는다면 그녀는 또 다른 고통을 겪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는 주저하는 그녀의 말을 재촉했다.
“무슨 말이든 하세요.”
“고정적으로....... 생활비를 받고 싶어요.”
“그거야. 당연하지요. 언제든 말하면 드리겠습니다.”
“............”
서슴지 않고 진혁이 흔쾌히 난정의 요구에 대답했다. 그녀는 지금 살고 있는 집을 그대로 놓아 둘 생각이었다. 그러기에 은주의 유학비와 집세만큼은 그에게 받고 싶었다. 조건 없이 대답하는 그에게 그녀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그가 다시 그녀를 재촉했다.
“난정 씨의 생활은 보장하겠습니다. 제 아내가........ 되어 주시겠습니까?”
“..........네. 진혁 씨를 믿겠습니다.”
잠시 생각하던 난정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의 대답을 들은 그는 싱글벙글하였다. 어느덧 바닷가에는 황혼이 짙어지고 있었다. 그가 일어서면서 말했다.
“얘기하다보니 점심식사도 안했군요. 식사하러 가시지요.”
“네........!”
일어서는 난정을 바라보는 진혁이 어정쩡한 자세로 주춤거렸다. 그녀는 그가 손이라도 잡아 이끌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카운터로 걸어가더니 계산을 치렀다. 커피숍을 나온 그녀는 그가 이끄는 경양식 집으로 들어갔다. 그는 대게와 생선회를 푸짐하게 주문했다. 어색함이 없어진 그들은 음식을 먹으며 TV 드라마에 나오는 탤런트와 유명인사 등에 관한 평범한 소재로 소담을 했다.
대화 도중에 진혁은 이틀 후에 그녀와 주말여행을 다녀오고 싶다고 했다. 그녀는 그의 제안에 거부할 의사가 없었다. 그는 승용차로 서울까지 그녀를 데려다 준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하고 싶어서 볼일이 있다고 변명을 했다. 지하철을 이용해 집으로 돌아오면서 그녀는 무언가 허전했다.
진혁은 난정에게 스킨십을 하기는커녕 손목도 잡지 않았다. 그녀는 그가 자신의 매력에 빠져 접근해주기를 바랬기에 조금은 실망했다. 하지만 그녀는 실망보다 더욱 그에 대한 신뢰감이 생겼고 믿음직스러웠다. 물론 그녀는 주말에 그와 홍도로 여행을 떠났다. 그녀로서는 모처럼의 여행이었다.
난정은 진혁과 모텔에서 하룻밤을 머물렀다. 그들은 늦은 밤까지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했다. 그날 밤도 그는 그녀의 손목도 잡지 않았다. 그녀는 부담이 없었지만 서운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이틀이 멀다하고 병원을 찾아와 돈 봉투를 주고 갔다.
여행을 다녀오고 열흘가량 지난 후에 병원에 찾아온 진혁이 난정을 커피숍으로 나오라고 했다. 늦은 저녁이라서 그녀는 환자가 잠든 모습을 확인하고 커피숍으로 나갔다. 그녀는 그를 만나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그는 몹시 긴장한 모습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제가 너무 성급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는데........”
“무슨........!?”
말을 잇지 못하는 진혁을 보는 난정이 미소를 띠었다. 그러나 그가 한동안 망설이기에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그가 마른입술을 적시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 같이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네.......!?”
난정은 어차피 진혁과 가정을 이룬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 드리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그의 말이 생소하게 들렸다. 그녀는 스스로 마음의 준비가 안 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놀라는 그녀를 바라본 그가 다시 말했다.
“서로 힘들게 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머니는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고, 결혼식은 나중에 하더라도 혼인신고부터 하고 같이 사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
“난정 씨, 의견은 어떨지 몰라도, 신혼여행 대신 제주도에 다녀와서 저희 집으로 들어오시는 게 어떨지..........?”
“...........”
“물론 강요는 아니고. 단지 내 의견인데.........”
“.............”
갑자기 혼돈스러운 난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는 그의 표정이 초조해 보였다. 그녀는 이틀 전에 신경질을 내며 유학비를 독촉하는 딸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이따금 서로를 쳐다보는 그들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겨있는 그녀는 그의 헛기침에 이어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들었다.
“난정 씨 고생하는 모습으로 보기도 힘들더군요.........”
“..........”
“제 의견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인데요.......”
“그렇게........하지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난정의입에서 모기소리처럼 작은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녀는 결코 후회하는 삶을 만들지 않으리라고 스스로 다짐했다. 그녀는 주말까지만 그의 어머니를 간병하기로 그와 계획을 세웠다. 그를 보내고 그녀는 처음 결혼을 하는 것처럼 마음이 살레였다.
주말이 지나고 난정은 집으로 돌아와 새 출발을 하기 위해 준비를 했다. 그녀가 준비할 것은 없었다. 살고 있던 집은 은주가 귀국하면 사용하도록 그대로 놔두기로 했다. 그녀는 의복과 화장품등만 간단히 짐을 꾸려 화물로 진혁의 집주소로 보냈다. 그녀는 예정대로 진혁과 함께 제주도를 향한 비행기에 올랐다.
제주도에 도착해서 호텔에 여장을 푼 그들은 편한 마음으로 여행을 시작했다. 점심식사를 하고 민속자연사박물관을 거친 그들은 저녁에는 별빛누리공원으로 갔다. 별빛이 쏟아지는 공원에서 진혁은 처음으로 난정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처음으로 남자에게 손을 잡힌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저녁식사를 마친 그들은 바닷가를 산책하다가 호텔로 들어왔다. 짐을 정리한 난정은 처음 결혼한 신부처럼 침대에 누워 진혁을 기다렸다. 세면장에서 나온 그가 침대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모포를 뒤집어쓰고 있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한동안 남자의 손길을 느끼지 못한 그녀는 기대감에 뜨거워지고 있었다.
진혁의 손길에 난정의 가운과 그리고 브래지어, 팬티가 벗겨졌다. 그녀의 뜨거워지는 살갗을 그의 손길이 더듬었다. 그녀는 그의 거칠어지는 숨결만큼 짜릿한 흥분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습한 열기로 달아오른 그녀의 보지 속으로 페니스를 밀어 넣었다. 그의 허리가 흔들릴 때마다 그녀의 발가벗겨진 몸이 위로 솟구쳤다.
“...........”
하지만 난정은 진혁에게 쾌감을 느끼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흘러나오려는 신음을 목구멍으로 삼켰다. 침대가 흔들렸다. 엑스터시를 향해 질주하는 그녀는 정숙한 여자로 보이려고 침대 시트를 움켜쥐었다. 그러나 그녀는 실망하고 말았다. 헐떡거리던 그의 페니스에서 뿜어져 나온 배설물이 보지 속을 흥건하게 적시는 것이었다. 그녀는 급하게 들이마시는 그의 숨소리가 야속했다.
“헉~!”
“읍......”
안타까움에 난정은 진혁의 허리를 움켜쥐었다. 그녀는 이제 쾌감의 능선을 오르려는데 그는 사정을 하고 만 것이었다. 그녀는 그가 결혼도 하지 않은 남자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혼자 사정을 하고 그녀의 몸에서 미끄러져 내리는 그는 몹시 힘들었는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벌렁 들어 누운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 사실은.......고혈압과 당뇨병 약을 복용하고 있어.........”
“.............!?”
진혁의 뇌까림을 듣는 난정은 눈앞이 노랗게 보였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종우에게 안겼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그러나 그녀가 그의 아내가 되려는 것은 성적인 욕구 때문이 아니었다. 단지 그의 경제력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그녀가 낙관적인 생각을 하는데 그의 손이 젖가슴을 더듬었다.
“미안해........! 미리 말 안 해서.”
“괜찮아요........ 건강하시면 돼요.”
육체적인 만족을 하지 못했지만 난정은 이미 진혁의 페니스를 받아드린 여자였다. 그녀는 도리어 그를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부터 육체의 행복을 잊어버린 그녀는 홀가분하게 2박 3일의 제주도 여행을 다녔다.
제주도 여행을 다녀와 진혁의 집으로 들어간 난정은 육체적인 욕구는 씻은 듯이 잊어버렸다. 카운터를 봐달라는 그의 말에 매장을 나갔던 그녀는 가슴이 벅찼다. 그녀와 마주친 종업원들마다 ‘사모님!’이라는 호칭으로 인사를 했다. 그녀는 마치 자신이 전자마트를 운영한다는 착각에 빠졌다. 그녀는 정식으로 그의 아내가 되고 싶었다. 그녀의 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이 그가 자진해서 결혼신고를 해주었다.
집과 마트를 오고가는 난정의 하루, 하루는 희망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그녀는 열정적으로 오직 마트 운영에 동분서주하는 진혁을 뿌듯하게 바라봤다. 도로 맞은편에 대기업의 진흥 전자마트가 생기고 그는 더욱 물품을 확보하느라고 혈안이 되었다. 그러나 매상이 줄고 시간이 지날수록 매장을 찾는 손님이 줄어들었다. 경험이 없는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난정이 진혁과 살림을 차리고 보름이 지난날이었다. 다른 날과 다르게 술이 몹시 취해 귀가한 그가 침울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그의 건강에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 걱정스러웠다.
“조금 쉬어가면서 일하세요. 건강이 먼저예요.”
“.........”
난정의 말에 소파에 앉았던 진혁은 턱을 고이고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아무래도 그의 건강이 악화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일 병원에 같이 가보세요.”
“그, 그게 아니고.........”
“네.....!? 그럼, 왜........”
“자금 회전이 안 돼서.”
난정은 매장 카운터를 도와주고 있지만 경리부분은 전혀 알 수 없었다. 진혁 옆에 다가 앉은 그녀는 어떻게든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는데요?”
“금진마트 때문이야. 대기업이라서 자금이 많아서 신상품을 많이 확보 했거든........”
“그럼, 우리도 확보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카드회사에서 돌아올 돈은 한정 되 있고, 난 신용불량이라서 더 이상은.........”
난정은 진혁이 신용불량이라는 말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놀란 표정을 보고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업하는 사람들 신용은 반복되는 거야. 자금회전이 문제지.”
“............”
사업을 해보지 않은 난정은 진혁의 말을 금방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가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잠시 그녀의 눈치를 살피면서 생각하던 그가 말했다.
“자기, 도와주면 쉽게 풀릴 텐데.......”
“내가 도움이 된다면, 뭔지 말하세요.”
난정은 진혁의 말이 고마웠다. 그렇지 않아도 그녀는 그의 사업에 도움 되는 일을 적극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를 도와 같이 사업을 운영한다는 것은 그녀에게 꿈같은 일이었다. 그녀의 말을 듣고 그의 눈빛이 반짝였다.
“자기 신용카드로 물품을 구입할 수 있으면 좋겠어.”
“아! 그러면 되겠군요. 그렇게 하세요.”
“그리고, 자기 주민등록증과 인감이 필요해.”
“그건 왜요?”
“자기 명의로 대출을 해서 자금을 확보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어.”
진혁이 자신감 넘치는 모습에 난정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매장에 손님은 줄어드는데 물건만 확보하려는 그의 의도를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매장과 창고에는 값어치 나가는 물건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했다.
“그거야. 당신 사업이 잘된다면 얼마든지 도와야지요.”
“고마워!”
진혁이 난정을 끌어안고 키스를 했다. 그는 그날 밤 침대에서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러나 결국 그는 여전히 혼자만 사정을 하여 그녀는 끓어오르는 욕구를 참아야 했다. 어쩌다가 부부관계를 해도 그의 조루증 증세를 습관적으로 받아 드린 그녀였다. 그녀는 오직 그의 사업이 번창하기만 바랬다.
난정은 진혁에게 신용카드와 인감도장, 그리고 주민등록증을 주었다. 다음날부터 매장은 활기를 띠었다. 많은 전자제품들이 창고로 드나들었다. 그런데 입고된 물건들이 손님에게 배달되는 것도 아닌데 바로 출고되는 것을 그녀는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녀가 그 이유를 그에게 물으니 자금 회전하려고 소매점에 넘긴다는 것이었다.
하여튼 난정은 식사도 거르고 사업에 몰두하는 진혁의 모습이 대견했다. 한 달가량 지나고 난정은 여러 금융기관에서 발급된 자신의 신용카드사용 내역통지서를 받았다. 그녀는 그를 신뢰했기에 그만큼 물품 거래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또 한 달이 지나고 그녀는 불안하기 시작했다. 은행과 신용카드 회사, 그리고 제품회사에서 독촉장이 그녀에게 배달된 것이었다. 안심이 되지 않은 그녀가 그에게 물었다.
“독촉장이 왔어요........금액도 만만치 않던데요. 거의 이억 가까이 되는 것 같아요.”
“염려 말라잖아! 알지 못하면 가만히 있어!”
이맛살을 찡그린 진혁이 짜증 섞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난정은 점점 날카롭게 돌변하는 그의 모습에 더욱 불안해졌다. 사무실 문을 박차고 나간 그가 직원들을 불러 모았다. 그녀가 바라보는 사무실 유리창 밖에는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직원들과 침통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걱정스러운 난정이 사무실 문을 열고 살펴보았다. 진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쩔 수가 없게 됐어.......! 다들 알고 있겠지만 진흥마트 때문에 자금압박을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서 인원을 감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해 줘..........”
“..............”
“어쨌든 미안할 뿐이고, 밀린 월급은 다음 달까지 통장에 입금 시킬 테니.......
“.............”
진혁은 할 말을 다했다는 듯이 매장을 나갔다. 침울하게 서있던 직원들의 반응은 각기 달랐다. 물품을 발로 걷어차는 사람도 있고, 털썩 주저앉거나 담배를 피워 물기도 했다.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난정은 눈앞이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녀는 차마 이런 지경까지 난관에 봉착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 했던 것이었다.
난정은 걱정 말라고 하던 진혁이 악마처럼 느껴졌다. 땅이 꺼지도록 한 숨을 내쉰 그녀는 매장 밖으로 나갔다. 출입구 옆에 영업담당 박 부장이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그는 담배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녀를 힐끔 바라 본 그가 힘없는 목소리를 흘렸다.
“사모님도....... 당하신 겁니다. 먼저 두 여자도 얼마 못살고 나갔으니까.......”
“네........!?”
박 부장의 말에 난정은 눈앞이 캄캄했다. 여자에게 배반을 당한 아픔 이후로 여자는 그녀가 처음이라는 진혁의 말은 거짓이라는 것이었다.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져 넋을 잃은 그녀의 귀에 박 부장의 힘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박 부장은 초창기부터 진혁과 마트 사업을 같이 했다고 했다. 처음에는 힘든 역경을 이겨내고 사업이 번성했다고 했다. 그러나 무리한 투자로 이미 전자마트 사업은 자금 압박을 받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 와중에 진혁은 다방 종업원, 그리고 술집여자와 살림을 두 번씩이나 차렸으나 여자들이 가버렸다고 했다.
“최 사장! 나쁜 놈입니다. 나까지 신용불량 만들고, 여자들 등쳐먹은 놈이니까..........”
“..........”
“나도, 더 이상 남아 있을 필요가 없지.......”
“..........”
박 부장의 푸념을 듣는 난정의 머릿속은 공백 상태였다. 그녀는 단지 현실에서 벗어나 달아나고 심정이었다. 무작정 걸음을 옮긴 그녀는 집으로 향해 갔다. 집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쓰레기 창고에 버려진 물건 같았다. 소파에 웅크리고 앉은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수고하십니다.”
“네.......? 네!”
“오늘도 수고하시네요.”
“수고는요! 제가 해야 할 일인데요.”
진혁이 병상으로 다가와 환자를 들여다보았다. 치매가 심한 환자는 아들을 보고도 멀뚱멀뚱 허공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어머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걱정스러워 했다.
“이젠...... 저도 몰라보시네요.”
“며칠 전부터 더 심해지셨나 봐요.”
침상에서 벗겨낸 시트를 들고 난정은 공연히 허둥거렸다. 그녀는 시트를 들고 병실을 나왔다. 세탁물 방으로 가서 시트를 집어넣은 그녀는 복도로 나와 주춤거렸다. 가슴이 두근거려 진혁을 마주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녀가 마음을 진정시키고 병실로 들어가니 창가에 있던 그가 돌아섰다.
“저기.......! 제 쪽지 보셨나요?”
“........네!”
진혁의 시선을 피해 환자의 소지품을 정리하던 난정이 간신히 대답했다. 그가 어떤 말을 할지 그녀는 긴장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움직임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마른침을 삼킨 그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내가 대리 간병인을 불렀는데, 오늘 하루 쉬셨으면 합니다.”
“네.......!?”
진혁이 어떤 말을 할지 여러 가지 예측을 하던 난정이지만 당황했다. 그녀는 굽혔던 허리를 펴고 그를 바라봤다. 그는 남자로서는 작은 키에 통통했다. 정중한 자세로 말하는 진혁도 긴장한 것이 역력했고 눈빛은 간절했다. 뒤늦게 그의 말을 이해한 그녀는 망설였다. 그가 다시 호흡을 가다듬고 말했다.
“오늘 저에게 시간을 내주시겠습니까?”
“오늘요........!?”
진혁의 말투는 마치 시나리오를 읽는 것처럼 어색했다. 어눌한 그의 물음에 그녀는 되묻고 있었다. 문득 그녀의 머릿속에는 언젠가 남자에게 이끌려 모텔에 갔던 일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정직하고 너무 순박해 보여 그녀의 불안감을 사라지게 했다. 그가 어색한 미소를 흘렸다.
“저, 이상한 사람 아닙니다. 제 어머님을 봐서 믿어 주십시오.”
“어디로........?”
“그냥 편하게 모시겠습니다. 불편하시면 돌아 오셔도 좋습니다.”
“그럼.......!”
긍정적인 난정의 말에 진혁이 병실을 나갔다가 가운을 걸친 여자를 데리고 들어왔다. 나이가 듬직하지만 밝은 표정의 가운을 걸친 여자였다. 그가 난정과 그녀를 번갈아 쳐다보며 소개했다.
“이분은 우리 어머니를 돌보시는 난정 씨! 그리고 이 분은 대리근무를 하실 고 여사입니다.”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난정과 고 여사는 미소를 띠며 인사를 했다. 난정은 막상 진혁의 말을 듣고 보니 뭘 해야 할지 허둥지둥했다. 주춤거리던 그녀는 고 여사에게 환자에 대한 주의사항을 전달했다. 그녀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진혁이 병실을 나갔다. 난정이 외출 준비를 마칠 즈음 그가 다시 병실로 들어왔다.
“이제 나가셔도 됩니까?”
“네........!”
여전히 진혁의 시선을 피하는 난정이 손가방을 집어 들었다. 그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그는 다시 병상으로 가서 어머니를 들여다보고는 고 여사에게 말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네!”
고 여사가 깍듯이 진혁에게 인사를 했다. 난정은 다소곳이 손가방을 들고 서 있었다. 난정에게 시선을 향한 그가 복도를 가리켰다.
“가시죠!”
“...........”
난정은 말없이 진혁을 따라나섰다. 병원을 나온 그는 택시 주차장으로 향했다. 택시 뒷문을 열고 선 그는 난정에게 먼저 타라고 정중한 자세를 보였다. 그는 운전가시에게 자신의 마트가 있는 동네를 말했다. 그녀는 옆자리에 앉은 그를 의식하여 몸을 사렸다. 그러나 그는 꼿꼿한 자세로 침묵을 지켰다.
진혁의 옆모습을 훔쳐보는 난정은 의문을 느꼈다. 마트 사장쯤 되면 자가용은 필수 일 것 같은데 택시를 이용하는 그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대리 간병인이 그와 같이 나오는 것을 보고 어떻게 생각할지도 궁금했다. 간병인 사이에는 별 것도 아인 일에 루머가 떠돌기도 했었다. 그녀가 결국 그에게 물었다.
“고 여사에게 뭐라고 하셨어요?”
“아! 난정 씨하고는 친척인데, 집안일이 있어 같이 간다고 했습니다.”
“아! 네.........”
“...........”
“교통수단으로 택시를 주로 이용하시나요?”
“아뇨! 마트 트럭이 아니면 버스를 주로 이용합니다. 기름 값이 너무 비싸서 승용차는 구입하지 않았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난정은 진혁이 무척 검소하다고 느껴 신뢰감이 들었다. 번화가로 들어간 택시가 대형 마트 앞에 정차하였다. 그가 안내하는 건물로 들어선 그녀는 놀랬다.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전자 마트는 규모가 컸다. 백여 평도 넘게 보이는 마트 안에는 전자제품들이 즐비하게 진열되어 있고 많은 종업원들이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종업원들이 진혁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 지나다녔다. 그는 비로소 의젓한 자세로 난정을 안내하였다. 이 층에는 똑같은 규모의 창고가 있었다. 난정은 마치 그의 아내가 된 심정으로 가슴이 벅차고 뿌듯하였다. 이층 창고를 돌아본 그는 그녀를 자신의 방으로 안내를 했다.
진혁은 젊은 여직원에게 차를 가져오라고 했다. 소파에 앉아 있는 난정은 그의 방과 유리창 밖에서 일하는 종업원들의 모습을 두리번거렸다. 그녀는 이제까지 살아온 세상과 다른 곳에 와 있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자상하던 그의 다른 면모를 느낄 수 있었다. 머리가 희끗희끗하게 나이 듬직한 직원이 그의 책상에 결재 판을 올려놓고 굽실거렸다.
난정이 나중에 알았지만 그 직원이 영업담당 박 부장이었다.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서류를 검토하는 진혁의 옆모습을 빤히 쳐다봤다. 때로는 호통을 치며 지시를 하는 그의 모습에 난정은 희열마저 느꼈다. 여자 종업원이 가져온 차를 마시는 그녀는 그를 만나게 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종업원이 나가고 몇 가지 서류를 검토한 그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지루하시죠?”
“아뇨!”
난정은 처음으로 진혁을 향해 배시시 미소를 띠었다. 그는 미소를 짓은 그녀의 모습에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소파에 앉은 그가 어디론가 전화를 하고 일어섰다.
“바람 쏘이러 나갈까요?”
“...........”
진혁을 올려다 본 난정은 대답대신 눈웃음을 짓고 일어섰다. 그는 뚜벅거리며 매장을 걸어 나갔다. 가끔 그는 종업원에게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지시를 하기도 했다. 그는 마트 앞에 주차된 고급승용차의 조수석 문을 열고 그녀에게 타라고 했다. 운전석에 올라 시동을 걸고 그가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오늘 난정 씨를 위해 렌탈했습니다.”
“...........”
승용차를 운전하면서 진혁은 이따금 난정의 옆모습을 훔쳐보았다. 그녀는 왠일인지 그의 시선을 의식하면서도 부담스럽지 않았다. 그가 운전해서 도착한 것은 부둣가였다. 그녀는 편한 마음으로 그를 따라 부둣가를 거닐었다. 그는 간병인을 하는데 힘들지 않느냐고 그녀에게 물었고, 자연스럽게 환자에 대한 담소를 나누었다.
부둣가를 거닐던 진혁이 이층에 있는 커피숍으로 난정을 데리고 들어갔다. 유리창 밖의 갈매기가 날아다니는 바닷가 풍경은 한결 여유로웠다. 그는 예전에 교제를 했던 여자에게 배반당하고 괴로웠던 심정을 그녀에게 고백했다. 그의 진솔함에 그녀는 과거가 있다는 것을 말했다.
“저에게는 죽은 남편에게서 낳은 딸이 있어요. 생활이 어려워서 간병 일을 하게 되었어요”
“그러시겠죠. 난정 씨 같이 아름다운 분이 간병 일을 할 리가 있겠습니까.”
난정은 진혁이 놀랄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녀는 은주가 남편과 결혼 전에 만났던 남자에게서 낳은 딸이라는 것만은 밝히지 않았다. 그는 도리어 그녀의 어떤 과거도 이해한다면서 현실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녀는 생각보다 너그러운 그의 마음이 믿어지지 않았다.
“진혁 씨는 결혼도 하지 않았는데, 제 말에 놀라지 않으시네요.”
“짐작은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난정 씨, 따님도 내 딸처럼 보살필 각오가 되 있습니다. 난정 씨가 제 마음을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
진혁의 진정성이 담긴 눈빛에 난정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는 그녀를 안심시키려고 사업을 하기 전에 가난했던 시절의 고통을 털어 놓았다. 그리고 그는 사업을 하면서 위기를 극복했던 일들을 조금은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녀의 가슴에 남았던 의혹은 봄 눈 녹듯이 사라지고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그가 간절한 눈빛을 했다.
“저도 그렇지만, 난정 씨의 힘들었던 지난날을 잊게 해드리고 싶습니다. 이제 경제력이 있으니 행복한 가정을 갖고 싶은 소망입니다.”
“그러나.........!”
대답을 기다리는 진혁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난정은 그의 요구를 받아 드리고 싶으면서도 노파심이 생겼다. 그가 결혼 후에 경제적인 도움을 주지 않는다면 그녀는 또 다른 고통을 겪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는 주저하는 그녀의 말을 재촉했다.
“무슨 말이든 하세요.”
“고정적으로....... 생활비를 받고 싶어요.”
“그거야. 당연하지요. 언제든 말하면 드리겠습니다.”
“............”
서슴지 않고 진혁이 흔쾌히 난정의 요구에 대답했다. 그녀는 지금 살고 있는 집을 그대로 놓아 둘 생각이었다. 그러기에 은주의 유학비와 집세만큼은 그에게 받고 싶었다. 조건 없이 대답하는 그에게 그녀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그가 다시 그녀를 재촉했다.
“난정 씨의 생활은 보장하겠습니다. 제 아내가........ 되어 주시겠습니까?”
“..........네. 진혁 씨를 믿겠습니다.”
잠시 생각하던 난정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의 대답을 들은 그는 싱글벙글하였다. 어느덧 바닷가에는 황혼이 짙어지고 있었다. 그가 일어서면서 말했다.
“얘기하다보니 점심식사도 안했군요. 식사하러 가시지요.”
“네........!”
일어서는 난정을 바라보는 진혁이 어정쩡한 자세로 주춤거렸다. 그녀는 그가 손이라도 잡아 이끌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카운터로 걸어가더니 계산을 치렀다. 커피숍을 나온 그녀는 그가 이끄는 경양식 집으로 들어갔다. 그는 대게와 생선회를 푸짐하게 주문했다. 어색함이 없어진 그들은 음식을 먹으며 TV 드라마에 나오는 탤런트와 유명인사 등에 관한 평범한 소재로 소담을 했다.
대화 도중에 진혁은 이틀 후에 그녀와 주말여행을 다녀오고 싶다고 했다. 그녀는 그의 제안에 거부할 의사가 없었다. 그는 승용차로 서울까지 그녀를 데려다 준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하고 싶어서 볼일이 있다고 변명을 했다. 지하철을 이용해 집으로 돌아오면서 그녀는 무언가 허전했다.
진혁은 난정에게 스킨십을 하기는커녕 손목도 잡지 않았다. 그녀는 그가 자신의 매력에 빠져 접근해주기를 바랬기에 조금은 실망했다. 하지만 그녀는 실망보다 더욱 그에 대한 신뢰감이 생겼고 믿음직스러웠다. 물론 그녀는 주말에 그와 홍도로 여행을 떠났다. 그녀로서는 모처럼의 여행이었다.
난정은 진혁과 모텔에서 하룻밤을 머물렀다. 그들은 늦은 밤까지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했다. 그날 밤도 그는 그녀의 손목도 잡지 않았다. 그녀는 부담이 없었지만 서운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이틀이 멀다하고 병원을 찾아와 돈 봉투를 주고 갔다.
여행을 다녀오고 열흘가량 지난 후에 병원에 찾아온 진혁이 난정을 커피숍으로 나오라고 했다. 늦은 저녁이라서 그녀는 환자가 잠든 모습을 확인하고 커피숍으로 나갔다. 그녀는 그를 만나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그는 몹시 긴장한 모습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제가 너무 성급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는데........”
“무슨........!?”
말을 잇지 못하는 진혁을 보는 난정이 미소를 띠었다. 그러나 그가 한동안 망설이기에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그가 마른입술을 적시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 같이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네.......!?”
난정은 어차피 진혁과 가정을 이룬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 드리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그의 말이 생소하게 들렸다. 그녀는 스스로 마음의 준비가 안 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놀라는 그녀를 바라본 그가 다시 말했다.
“서로 힘들게 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머니는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고, 결혼식은 나중에 하더라도 혼인신고부터 하고 같이 사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
“난정 씨, 의견은 어떨지 몰라도, 신혼여행 대신 제주도에 다녀와서 저희 집으로 들어오시는 게 어떨지..........?”
“...........”
“물론 강요는 아니고. 단지 내 의견인데.........”
“.............”
갑자기 혼돈스러운 난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는 그의 표정이 초조해 보였다. 그녀는 이틀 전에 신경질을 내며 유학비를 독촉하는 딸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이따금 서로를 쳐다보는 그들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겨있는 그녀는 그의 헛기침에 이어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들었다.
“난정 씨 고생하는 모습으로 보기도 힘들더군요.........”
“..........”
“제 의견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인데요.......”
“그렇게........하지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난정의입에서 모기소리처럼 작은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녀는 결코 후회하는 삶을 만들지 않으리라고 스스로 다짐했다. 그녀는 주말까지만 그의 어머니를 간병하기로 그와 계획을 세웠다. 그를 보내고 그녀는 처음 결혼을 하는 것처럼 마음이 살레였다.
주말이 지나고 난정은 집으로 돌아와 새 출발을 하기 위해 준비를 했다. 그녀가 준비할 것은 없었다. 살고 있던 집은 은주가 귀국하면 사용하도록 그대로 놔두기로 했다. 그녀는 의복과 화장품등만 간단히 짐을 꾸려 화물로 진혁의 집주소로 보냈다. 그녀는 예정대로 진혁과 함께 제주도를 향한 비행기에 올랐다.
제주도에 도착해서 호텔에 여장을 푼 그들은 편한 마음으로 여행을 시작했다. 점심식사를 하고 민속자연사박물관을 거친 그들은 저녁에는 별빛누리공원으로 갔다. 별빛이 쏟아지는 공원에서 진혁은 처음으로 난정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처음으로 남자에게 손을 잡힌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저녁식사를 마친 그들은 바닷가를 산책하다가 호텔로 들어왔다. 짐을 정리한 난정은 처음 결혼한 신부처럼 침대에 누워 진혁을 기다렸다. 세면장에서 나온 그가 침대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모포를 뒤집어쓰고 있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한동안 남자의 손길을 느끼지 못한 그녀는 기대감에 뜨거워지고 있었다.
진혁의 손길에 난정의 가운과 그리고 브래지어, 팬티가 벗겨졌다. 그녀의 뜨거워지는 살갗을 그의 손길이 더듬었다. 그녀는 그의 거칠어지는 숨결만큼 짜릿한 흥분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습한 열기로 달아오른 그녀의 보지 속으로 페니스를 밀어 넣었다. 그의 허리가 흔들릴 때마다 그녀의 발가벗겨진 몸이 위로 솟구쳤다.
“...........”
하지만 난정은 진혁에게 쾌감을 느끼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흘러나오려는 신음을 목구멍으로 삼켰다. 침대가 흔들렸다. 엑스터시를 향해 질주하는 그녀는 정숙한 여자로 보이려고 침대 시트를 움켜쥐었다. 그러나 그녀는 실망하고 말았다. 헐떡거리던 그의 페니스에서 뿜어져 나온 배설물이 보지 속을 흥건하게 적시는 것이었다. 그녀는 급하게 들이마시는 그의 숨소리가 야속했다.
“헉~!”
“읍......”
안타까움에 난정은 진혁의 허리를 움켜쥐었다. 그녀는 이제 쾌감의 능선을 오르려는데 그는 사정을 하고 만 것이었다. 그녀는 그가 결혼도 하지 않은 남자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혼자 사정을 하고 그녀의 몸에서 미끄러져 내리는 그는 몹시 힘들었는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벌렁 들어 누운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 사실은.......고혈압과 당뇨병 약을 복용하고 있어.........”
“.............!?”
진혁의 뇌까림을 듣는 난정은 눈앞이 노랗게 보였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종우에게 안겼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그러나 그녀가 그의 아내가 되려는 것은 성적인 욕구 때문이 아니었다. 단지 그의 경제력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그녀가 낙관적인 생각을 하는데 그의 손이 젖가슴을 더듬었다.
“미안해........! 미리 말 안 해서.”
“괜찮아요........ 건강하시면 돼요.”
육체적인 만족을 하지 못했지만 난정은 이미 진혁의 페니스를 받아드린 여자였다. 그녀는 도리어 그를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부터 육체의 행복을 잊어버린 그녀는 홀가분하게 2박 3일의 제주도 여행을 다녔다.
제주도 여행을 다녀와 진혁의 집으로 들어간 난정은 육체적인 욕구는 씻은 듯이 잊어버렸다. 카운터를 봐달라는 그의 말에 매장을 나갔던 그녀는 가슴이 벅찼다. 그녀와 마주친 종업원들마다 ‘사모님!’이라는 호칭으로 인사를 했다. 그녀는 마치 자신이 전자마트를 운영한다는 착각에 빠졌다. 그녀는 정식으로 그의 아내가 되고 싶었다. 그녀의 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이 그가 자진해서 결혼신고를 해주었다.
집과 마트를 오고가는 난정의 하루, 하루는 희망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그녀는 열정적으로 오직 마트 운영에 동분서주하는 진혁을 뿌듯하게 바라봤다. 도로 맞은편에 대기업의 진흥 전자마트가 생기고 그는 더욱 물품을 확보하느라고 혈안이 되었다. 그러나 매상이 줄고 시간이 지날수록 매장을 찾는 손님이 줄어들었다. 경험이 없는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난정이 진혁과 살림을 차리고 보름이 지난날이었다. 다른 날과 다르게 술이 몹시 취해 귀가한 그가 침울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그의 건강에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 걱정스러웠다.
“조금 쉬어가면서 일하세요. 건강이 먼저예요.”
“.........”
난정의 말에 소파에 앉았던 진혁은 턱을 고이고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아무래도 그의 건강이 악화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일 병원에 같이 가보세요.”
“그, 그게 아니고.........”
“네.....!? 그럼, 왜........”
“자금 회전이 안 돼서.”
난정은 매장 카운터를 도와주고 있지만 경리부분은 전혀 알 수 없었다. 진혁 옆에 다가 앉은 그녀는 어떻게든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는데요?”
“금진마트 때문이야. 대기업이라서 자금이 많아서 신상품을 많이 확보 했거든........”
“그럼, 우리도 확보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카드회사에서 돌아올 돈은 한정 되 있고, 난 신용불량이라서 더 이상은.........”
난정은 진혁이 신용불량이라는 말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놀란 표정을 보고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업하는 사람들 신용은 반복되는 거야. 자금회전이 문제지.”
“............”
사업을 해보지 않은 난정은 진혁의 말을 금방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가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잠시 그녀의 눈치를 살피면서 생각하던 그가 말했다.
“자기, 도와주면 쉽게 풀릴 텐데.......”
“내가 도움이 된다면, 뭔지 말하세요.”
난정은 진혁의 말이 고마웠다. 그렇지 않아도 그녀는 그의 사업에 도움 되는 일을 적극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를 도와 같이 사업을 운영한다는 것은 그녀에게 꿈같은 일이었다. 그녀의 말을 듣고 그의 눈빛이 반짝였다.
“자기 신용카드로 물품을 구입할 수 있으면 좋겠어.”
“아! 그러면 되겠군요. 그렇게 하세요.”
“그리고, 자기 주민등록증과 인감이 필요해.”
“그건 왜요?”
“자기 명의로 대출을 해서 자금을 확보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어.”
진혁이 자신감 넘치는 모습에 난정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매장에 손님은 줄어드는데 물건만 확보하려는 그의 의도를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매장과 창고에는 값어치 나가는 물건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했다.
“그거야. 당신 사업이 잘된다면 얼마든지 도와야지요.”
“고마워!”
진혁이 난정을 끌어안고 키스를 했다. 그는 그날 밤 침대에서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러나 결국 그는 여전히 혼자만 사정을 하여 그녀는 끓어오르는 욕구를 참아야 했다. 어쩌다가 부부관계를 해도 그의 조루증 증세를 습관적으로 받아 드린 그녀였다. 그녀는 오직 그의 사업이 번창하기만 바랬다.
난정은 진혁에게 신용카드와 인감도장, 그리고 주민등록증을 주었다. 다음날부터 매장은 활기를 띠었다. 많은 전자제품들이 창고로 드나들었다. 그런데 입고된 물건들이 손님에게 배달되는 것도 아닌데 바로 출고되는 것을 그녀는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녀가 그 이유를 그에게 물으니 자금 회전하려고 소매점에 넘긴다는 것이었다.
하여튼 난정은 식사도 거르고 사업에 몰두하는 진혁의 모습이 대견했다. 한 달가량 지나고 난정은 여러 금융기관에서 발급된 자신의 신용카드사용 내역통지서를 받았다. 그녀는 그를 신뢰했기에 그만큼 물품 거래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또 한 달이 지나고 그녀는 불안하기 시작했다. 은행과 신용카드 회사, 그리고 제품회사에서 독촉장이 그녀에게 배달된 것이었다. 안심이 되지 않은 그녀가 그에게 물었다.
“독촉장이 왔어요........금액도 만만치 않던데요. 거의 이억 가까이 되는 것 같아요.”
“염려 말라잖아! 알지 못하면 가만히 있어!”
이맛살을 찡그린 진혁이 짜증 섞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난정은 점점 날카롭게 돌변하는 그의 모습에 더욱 불안해졌다. 사무실 문을 박차고 나간 그가 직원들을 불러 모았다. 그녀가 바라보는 사무실 유리창 밖에는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직원들과 침통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걱정스러운 난정이 사무실 문을 열고 살펴보았다. 진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쩔 수가 없게 됐어.......! 다들 알고 있겠지만 진흥마트 때문에 자금압박을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서 인원을 감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해 줘..........”
“..............”
“어쨌든 미안할 뿐이고, 밀린 월급은 다음 달까지 통장에 입금 시킬 테니.......
“.............”
진혁은 할 말을 다했다는 듯이 매장을 나갔다. 침울하게 서있던 직원들의 반응은 각기 달랐다. 물품을 발로 걷어차는 사람도 있고, 털썩 주저앉거나 담배를 피워 물기도 했다.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난정은 눈앞이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녀는 차마 이런 지경까지 난관에 봉착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 했던 것이었다.
난정은 걱정 말라고 하던 진혁이 악마처럼 느껴졌다. 땅이 꺼지도록 한 숨을 내쉰 그녀는 매장 밖으로 나갔다. 출입구 옆에 영업담당 박 부장이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그는 담배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녀를 힐끔 바라 본 그가 힘없는 목소리를 흘렸다.
“사모님도....... 당하신 겁니다. 먼저 두 여자도 얼마 못살고 나갔으니까.......”
“네........!?”
박 부장의 말에 난정은 눈앞이 캄캄했다. 여자에게 배반을 당한 아픔 이후로 여자는 그녀가 처음이라는 진혁의 말은 거짓이라는 것이었다.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져 넋을 잃은 그녀의 귀에 박 부장의 힘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박 부장은 초창기부터 진혁과 마트 사업을 같이 했다고 했다. 처음에는 힘든 역경을 이겨내고 사업이 번성했다고 했다. 그러나 무리한 투자로 이미 전자마트 사업은 자금 압박을 받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 와중에 진혁은 다방 종업원, 그리고 술집여자와 살림을 두 번씩이나 차렸으나 여자들이 가버렸다고 했다.
“최 사장! 나쁜 놈입니다. 나까지 신용불량 만들고, 여자들 등쳐먹은 놈이니까..........”
“..........”
“나도, 더 이상 남아 있을 필요가 없지.......”
“..........”
박 부장의 푸념을 듣는 난정의 머릿속은 공백 상태였다. 그녀는 단지 현실에서 벗어나 달아나고 심정이었다. 무작정 걸음을 옮긴 그녀는 집으로 향해 갔다. 집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쓰레기 창고에 버려진 물건 같았다. 소파에 웅크리고 앉은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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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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