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황지연은 고개를 뒤로 젖힌 채로 까르르르 웃고 있었다.
그 말을 들은 난 속으로 적지 않게 놀라고 있었는데 그건 그녀가 날 곰이나 야수를 빗대서 이야기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나와 그녀와의 첫 만남은 부자연스러운 장소에서 시작됐고 어떻게 보면 날 남의 정사나 훔쳐보는 지저분한 인간으로 볼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후 내가 김유미와 섹스를 하는 것을 황지연은 분명히 보았으며 그걸 가지고 날 강간범으로 몰아세우다 내가 만든 함정 아닌 함정에 빠져 차안에서 나와 두 번째 관계를 가진 것이 불과 2주 정도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지금 그녀는 내 얼굴이 곰처럼 생겨서 마치 그 짓을 하는 동안 야수로 보이는 것 까지도 흥분이 된다는 표현을 쓰고 있었다.
그녀 주변의 상황으로 보아 선택의 폭이 좁다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지만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단점으로 여기는 것들마저도 좋은 쪽으로 생각하고 있을 정도로 황지연은 나와의 만남을 나름대로 합리화하려 애쓰고 있는 것이다.
내가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 멍한 얼굴로 있자 그녀가 내게 물었다.
“무슨 생각해?”
“응? 니 취향이 좀 독특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어. 긴장도 좀 풀리고...”
“긴장? 나 만나면 긴장 된다고? 그걸 나보다 믿으라는 거야?”
“얼굴에 잘 안 나타나는지는 모르지만 많이 긴장해. 실수하지 않을까 걱정도 하고 또...”
“또... 뭐?”
“내가 특별히 실수를 하지 않더라도 니 기분이 달라질 수 있으니까 그런 부분이 신경이 많이 쓰여.”
“내 기분? 누구나 기분이 항상 좋을 수는 없는 거잖아.”
“응. 그렇지... 그래서 혹시라도 니가 기분이 안 좋다거나 혹은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때 만나게 되면 내가 더 조심해야할 것 같아서 그래. 넝쿨째 굴러온 호박을 걷어차는 행동은 안하려고...”
“넝쿨째 굴러온 호박? 그걸 달리 말하면 자고 싶은 여자란 뜻인가?”
“음... 자고 싶은 여자라는 건 분명히 맞긴 하지만 니가 자고 싶은 여자로 다가오는 건 예쁜 얼굴과 몸매 때문만은 아니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낀 건데 넌 묘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어. 굳이 말로 표현하자면...”
“응. 이야기해봐.”
“남자를 끌어들이는 매력이 넘치면서도 가까이 다가서기 어렵게 만드는 무언가와 또 잘 허물어지지 않을 것 같은 균형 같은 게 있는 것 같아.”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좀 쉽게 말해봐.”
“나중에 적당한 표현이 생각나면 그때 말해줄게. 지금은 그 느낌을 어떻게 표현할 지 나도 잘 모르겠어.”
황지연을 안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 그녀의 적당한 크기의 가슴을 뒤에서 끌어안은 채 난 잠이 들었다. 가끔씩 잠이 깨었을 때 성숙한 여인의 머리카락에서 나는 부드러운 향기가 좋았고 내 살들과 맞닿아 있는 그녀의 매끈한 등, 탄력 있는 엉덩이의 감촉이 또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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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 도착해서 미정이의 친구 유진이 다닌다는 00대학교로 차를 몰았다. 중간에 몇 번 내려서 길을 물으며 그 곳에 도착한 후 학교 정문을 지나 농협 365코너가 있는 곳에 차를 세웠고 유진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가 전화를 받자 난 부산에 볼일이 있어 왔다가 00대학교 앞을 지나게 되었는데 유진씨 생각이 나서 들렸다고 혹시 잠깐 만나줄 수 있겠는지 물었다. 방학이지만 학교 도서관에서 자격증 관련 공부를 하고 있었던 유진이는 잠깐만 기다리라고 내게 이야기 한 후 10분쯤 후에 그 곳에 나타났다.
약간 마른 체형에 반바지와 면티를 입고 머리를 뒤로 묶은 여학생이었는데 공부를 하기 위해 도서관에 다니는 터라 그다지 꾸미지는 않았지만 귀여워 보였다.
“미안해요. 공부하느라 시간이 없을 텐데...”
“괜찮아요. 궁금하신 게 있으면 물어보세요.”
“미정이가 중학교 시절 남자친구나 애인을 만난 적이 없다고 선희씨한테 들었는데요. 유진씨도 그런 걸 본적이 없나요?”
“그거라면 없어요. 제가 같은 동네에 살지 않아서 집에 가 있는 시간은 잘 모르지만 적어도 학교에서는 늘상 붙어 있었거든요. 미정이는 자기 입으로 먼저 남자 애들 이야기를 한 번도 꺼낸 적이 없을뿐더러 선희가 모른다면 없다고 보는 게...”
“그게 좀 이상하지 않나요? 중,고등학교 시절에 남자 친구 한번 안 만나본다는 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되는 군요. 미정이 정도면 남자 애들이 많이 수작을 부렸을 것 같은 데요.”
“미정이는 할머니와 단 둘이 살아서 그런지 또래 아이들보다 좀 조숙했고 또... 현실적이라고 해야 되나? 아무튼 그랬어요. 남자애들이 보낸 편지나 쪽지는 잘 읽지도 않고 버리기도...”
난 수영부원들과 코치로 보이는 남자가 함께 찍은 사진을 꺼냈다. 그리고 유진에게 그걸 보여주면서 물었다.
“이 사진 기억나세요?”
“아... 이거 부산에서 찍은 건데... 기억나요. 아마 대회 때문에 여기로 전지훈련 왔을 때 찍었을 거예요.”
“사진 속에 젊은 남자는 누구죠?”
“이 분은 그 때 체육 교생 실습을 왔다가 수업 시간 외에는 수영부 코치를 해보고 싶다고 자청해서 두세 달 정도 우리를 가르쳐 주신 코치님이세요. 이 곳에도 같이 왔었구요.”
“그래요? 전지훈련 기간 동안 뭐 특별한 일은 없었나요?”
유진이는 무언가 기억을 더듬는 것처럼 뜸을 들이더니 말을 이어갔다.
“그 때 아마... 미정이의 할머니가 많이 아프셔서 그 애는 전지훈련 중에 집으로 돌아갔던 것 같아요. 맞아요. 돌아갈 때는 미정이는 없었어요. 이 곳에 올 때는 감독님과 코치님 차에 나누어 타고 왔는데 남해로 돌아갈 때는 코치님이 미정이를 데리고 먼저 가셔서 남자애들은 버스를 타고 갔었던 걸로...”
“미정이 할머니가 아파서 가면 혼자 가면 되는 거 아닌가요? 왜 코치님이 따라갔죠?”
“그 때 무슨 수술을 해야 한다고 보호자 동의 같은 걸 해야 되는 상황이라 급하게 가느라 그랬을 거예요. 어쨌든 코치님은 남해로 돌아가신 후에 다시 오지 않으셨어요.”
“혹시 그 때 코치님이 타고 나닌 차종이 뭔지 기억하나요?”
“음 그게... 새 차였어요. 쏘나타3 흰색...”
아직 대학생 신분에 새 차를 뽑아서 교생 실습을 왔다는 것 같은 데... 집에서 사준 거라면 형편은 꽤 괜찮은 놈이군.
“전지훈련이 끝난 후엔 미정이 할머니는 괜찮아 지셨나요?”
“미정이가 한 달 이상 그러니까 그 때 대회에도 출전 못하고 병간호를 했었어요. 2학기가 시작되고 나서야 얼굴을 볼 수 있었으니까요.”
“코치님은 언제까지 수영부에 있었죠?”
“교생실습은 방학이 시작될 때 끝났는데 대회가 8월에 있어서 그 때까지는 가끔 오셔서 봐주셨어요. 대회가 끝나자 다니던 학교로 돌아가셨고요.”
“혹시... 그 코치... 같이 있는 동안... 이상한 행동은 하지 않던가요?”
“무슨 말씀이신지?...”
“이를테면 필요 이상으로 여자부원들의 몸을 더듬는 다든지... 성적인 접촉 같은.. 뭐 그런 게 있었나 해서요.”
“자세를 봐줄 때 가끔 몸에 손이 닿기는 했지만 특별히... 좀 이상한 건 미정이는 다른 부원들에 비해 훨씬 더 개인 훈련을 많이 시켰어요. 여자애들 중에서는 그래도 기록이 입상권과 제일 근접했으니 그럴 거라고 생각했었죠. 그런데 그게 왜 궁금하시죠?”
질문이 좀 지나쳤다. 난 미정이와 같이 회사를 다녔던 사람인데 경찰처럼 물어보면 안 되는데...
“아... 미안해요... 그냥 미정이가 중학교 시절에 그런 일로 아픔을 겪지 않았을까 해서요. 제가 실수한 것 같네요. 혹시 코치 이름이 기억나세요?”
“민... 현... 규... 맞을 거예요.”
몇 마디 말을 더 나눈 후에 유진을 보내고 차에 타서 다시 남해로 출발했다. 할머니의 수술. 민현규. 미정이에 대한 특별한 관심. 실마리가 잡힐 지도....
꼬박 2시간 30분 정도를 달려서 다시 남해에 도착한 시간은 저녁 7시 정도 였다. 식당에서 밥을 먹은 후 남해에 있는 모텔에서 잠을 청했다. 머리 속으로 다음 날 해야 할 일을 정리해보니 먼저 미정이의 할머니를 만나서 그 때 어디가 아프셨고 무슨 수술을 했는지 알아봐야 하고 또 선희를 만나 장소를 파악해달라고 맡겨 놓은 사진을 찾아야 했다.
그리고 미정이가 다닌 00중학교에 가서 민현규라는 녀석에 대해 알 수 있는 정보는 모두 얻어내야 했다. 녀석이 내가 찾는 인물일지도 모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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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지연의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고 잠이 들었던 나는 새벽녘에 다시 일어나 그녀와 한 차례 정사를 더 가졌다. 너무 자연스럽게 내 품으로 파고든 그녀는 잠이 들기 전에 보여준 몸짓 보다 한층 더 격렬히 나를 안아 왔고 20여분 간의 섹스가 끝났을 때 난 내 몸속에 남아 있던 마지막 한 방울의 정액마저 모두 비워낸 기분이었다.
그녀가 먼저 샤워를 했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으로 욕실에서 나올 때까지 난 침대 위에 그대로 누워 있었다.
“안 씻어? 이제 가야될 것 같은데... 출근해야 되잖아?”
“응. 잠깐만. 다리가 풀려서 씻으러 욕실까지 걸어갈 수 있을 지 모르겠어. 5분만 더 쉬었다가...”
황지연이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그대로 화장대 앞에 앉았다. 난 뒤에서 담배를 하나 물고 불을 붙인 후에 알몸으로 머리 매무새를 만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감상하고 있다가 그녀에게 말했다.
“다리가 풀린 건 맞지만 걸을 수 없을 정도는 아니고 실은... 난 지금 이대로가 너무 좋아서 움직이기가 싫은 거야. 후후후.”
“무슨 말이야?”
“난 이런 공황상태가 좋아. 너와 잠을 잘때마다 이런 기분이 들곤 하는데... 무언가에 빠져서 모든 걸 다 쏟아낸 다음에 오는 머리가 텅 비어버리는 기분... 그래서 아무 생각이 없어 질 때가 너무 좋아. 이럴 때 난 움직이기 싫어. 이 기분이 욕실로 걸어가는 동안 깨지는 게 싫거든.”
그녀가 살짝 뒤를 돌아보더니 다시 거울 쪽으로 시선을 돌린 후에 말을 이어갔다.
“하여간 미스테리한 아저씨라니까... 오늘은 뭐라고 핑계를 댔기에 지금 이 시간까지 안들어 가고 버틸 수 있는 거야?”
“응 친구 녀석 부친상에 간다고 했어.”
“애꿎은 친구 아버지 한명만 죽였네. 호호호.”
“이미 돌아가신 분이야. 우리 와이프는 잘 몰라.”
잠시 후에 모텔을 나와 황지연의 차를 타고 장어구이 집으로 다시 갔다. 그리고 거기서 그녀와 헤어진 후에 집으로 출발했다. 헤어질 때 난 내 차에 타기 전에 운전대를 잡고 차 안에 있는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는데 황지연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로 살짝 오른 손을 들어 손가락으로 왼 손에 있는 핸드폰을 가리키더니 차 유리창으로 손을 뻗어 글자를 적었다.
[문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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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잠깐 들렸다가 피곤한 몸으로 출근. 퇴근. 다시 출근. 퇴근. 수요일이 되었다. 난 황지연에게 문자나 전화를 하지 않았는데 그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싶어서였다.
너무 자주 만나면 그녀가 나를 달리 볼지 모른다. 난 그녀에게 이유성 아니 그녀의 남편만큼 큰 쾌락을 줄 수는 없다. 체조선수 출신의 젊은 헬스클럽 트레이너라는 그 놈이 김유미와 정사를 하던 모습을 생각해보면 역부족이 분명...
난 그냥 그녀가 허기가 질 만큼 기다렸다가 대충 아무 거라도 한 끼 때워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쯤 연락을 해서 만나는 것이 현명할 것 같았다. 괜히 그녀의 애인이나 된 거 마냥 깝죽되다가 황지연이 갑자기 ‘아무리 내가 시장해도 밥을 먹어야지 라면으로 때울 순 없잖아!’
이런 생각이라도 하게 되면, 즉 지금 나와의 만남을 이어가는 자신을 냉정히 뒤돌아보기라도 하는 날에는, 40이 다된 곰같이 생긴 아저씨를 계속 봐줄 리가 만무할 지도...
목요일 늦은 오후 황지연에게 문자가 날아 왔다.
[뭐해? 바빠?]
[응 이번 주는 좀 바빴어]
[아무리 바쁘다고 문자 한 통 안해? 간댕이가 부었네]
[무슨 소리야? 난 니가 귀찮아할까봐 그런 거야]
[내가 저번에 헤어질 때 문자하라고 했을 텐데.]
[응 하루에도 몇 번씩 망설였어. 보내도 될까? 이번 주에도 만나자고 하면 너무 귀찮아 하지 않을까?]
[하라면 하면 되지. 무슨 잔말이 그렇게 많아? 앞으로도 이런 식이면 다른 놈 만난다]
[응? 왜 그래? 앞으론 말 잘 들을게. 시키는 건 다 할게.]
[그럼 토요일에 어디서 만날 건지 정해서 오늘 밤 안으로 문자해. 알았어?]
[응. 누구 분부라고 거역하겠어. 한 시간 내에 장소하고 시간 정해서 보낼게. 혹시 시간이 안맞으면 다시 이야기 해]
[진작 그럴 일이지. 까불고 있어^^]
흩어진 조각들이 모아지고 있었다.
처음 만났던 날 황지연은 이유성을 보고 돌아서서 내차에 탔다. 그녀의 남편이었음에도...
선승철은 내게 자신과 사귀는 동안 황지연은 그에게 문자나 전화를 자주 하는 성격은 아니었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 내게 브레이크 없이 다가오는 그녀...
그녀는 아마 이유성과 결혼을 하면 그 녀석 주변의 여자들을 정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5년의 결혼 생활동안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았고 어느 순간부터는 황지연의 타박이나 잔소리 때문에 잦은 부부싸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 때 이유성이라는 놈은 아마 - 선승철의 이야기를 듣고 짐작해보면 - 그녀에게 이혼을 이야기 했을 가능성이 크다. 황지연은 그런 수모 속에서도 이혼을 결심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공무원 신분에 함부로 이혼해서 구설수에 오르기도 싫었을 것이고 또 다른 이유가 있었겠지만... 그래서 그날 밤 이유성에게 오히려 들킬까봐 내 차를 탔을 것이고...
남편 이유성이 주는 밤의 환락조차 상당히 오랫동안 그녀에게 주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황지연의 미모, 재력조차도 이유성이라는 놈에게는 별다른 집착이 되지 않았고 3처 4첩을 거느리던 왕의 간택을 받지 못한 후궁신세가 된 그녀는 우울증 증세까지 왔던 것이다. 더군다나 그녀는 후궁이 아니라 본처 였으니...
우울증에 시달리고 삭막한 밤을 보내던 황지연 앞에 우연히 나타난 게 바로 나였다.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르는 남편의 외면에 대항하기 위해서 그녀는 날 거느리기로 마음을 먹었다고 봐야할 것 같다. 김유미 선생과 만나지 말라고 이야기 했던 건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녀에게 나까지 넘겨줄 수는 없었던 것이다. 남편을 나눠 가지는 것만으로도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을 테지만...
게임의 주도권은 누가 가지고 있을까?
이유성은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나라는 놈의 존재는 모른다.
난 절대 권력 뒤에서 이득을 취하며 이 게임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었다.
김유미는 가끔 이유성과 잠을 잘 수는 있지만 앞으로 나와의 관계는 힘들 지도 모르고
황지연은 남편의 마음이 돌아올 때까지, 아니면 남편과의 관계가 정리될 때까지 만지작 거릴 장난감을 얻었다.
그 말을 들은 난 속으로 적지 않게 놀라고 있었는데 그건 그녀가 날 곰이나 야수를 빗대서 이야기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나와 그녀와의 첫 만남은 부자연스러운 장소에서 시작됐고 어떻게 보면 날 남의 정사나 훔쳐보는 지저분한 인간으로 볼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후 내가 김유미와 섹스를 하는 것을 황지연은 분명히 보았으며 그걸 가지고 날 강간범으로 몰아세우다 내가 만든 함정 아닌 함정에 빠져 차안에서 나와 두 번째 관계를 가진 것이 불과 2주 정도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지금 그녀는 내 얼굴이 곰처럼 생겨서 마치 그 짓을 하는 동안 야수로 보이는 것 까지도 흥분이 된다는 표현을 쓰고 있었다.
그녀 주변의 상황으로 보아 선택의 폭이 좁다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지만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단점으로 여기는 것들마저도 좋은 쪽으로 생각하고 있을 정도로 황지연은 나와의 만남을 나름대로 합리화하려 애쓰고 있는 것이다.
내가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 멍한 얼굴로 있자 그녀가 내게 물었다.
“무슨 생각해?”
“응? 니 취향이 좀 독특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어. 긴장도 좀 풀리고...”
“긴장? 나 만나면 긴장 된다고? 그걸 나보다 믿으라는 거야?”
“얼굴에 잘 안 나타나는지는 모르지만 많이 긴장해. 실수하지 않을까 걱정도 하고 또...”
“또... 뭐?”
“내가 특별히 실수를 하지 않더라도 니 기분이 달라질 수 있으니까 그런 부분이 신경이 많이 쓰여.”
“내 기분? 누구나 기분이 항상 좋을 수는 없는 거잖아.”
“응. 그렇지... 그래서 혹시라도 니가 기분이 안 좋다거나 혹은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때 만나게 되면 내가 더 조심해야할 것 같아서 그래. 넝쿨째 굴러온 호박을 걷어차는 행동은 안하려고...”
“넝쿨째 굴러온 호박? 그걸 달리 말하면 자고 싶은 여자란 뜻인가?”
“음... 자고 싶은 여자라는 건 분명히 맞긴 하지만 니가 자고 싶은 여자로 다가오는 건 예쁜 얼굴과 몸매 때문만은 아니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낀 건데 넌 묘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어. 굳이 말로 표현하자면...”
“응. 이야기해봐.”
“남자를 끌어들이는 매력이 넘치면서도 가까이 다가서기 어렵게 만드는 무언가와 또 잘 허물어지지 않을 것 같은 균형 같은 게 있는 것 같아.”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좀 쉽게 말해봐.”
“나중에 적당한 표현이 생각나면 그때 말해줄게. 지금은 그 느낌을 어떻게 표현할 지 나도 잘 모르겠어.”
황지연을 안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 그녀의 적당한 크기의 가슴을 뒤에서 끌어안은 채 난 잠이 들었다. 가끔씩 잠이 깨었을 때 성숙한 여인의 머리카락에서 나는 부드러운 향기가 좋았고 내 살들과 맞닿아 있는 그녀의 매끈한 등, 탄력 있는 엉덩이의 감촉이 또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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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 도착해서 미정이의 친구 유진이 다닌다는 00대학교로 차를 몰았다. 중간에 몇 번 내려서 길을 물으며 그 곳에 도착한 후 학교 정문을 지나 농협 365코너가 있는 곳에 차를 세웠고 유진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가 전화를 받자 난 부산에 볼일이 있어 왔다가 00대학교 앞을 지나게 되었는데 유진씨 생각이 나서 들렸다고 혹시 잠깐 만나줄 수 있겠는지 물었다. 방학이지만 학교 도서관에서 자격증 관련 공부를 하고 있었던 유진이는 잠깐만 기다리라고 내게 이야기 한 후 10분쯤 후에 그 곳에 나타났다.
약간 마른 체형에 반바지와 면티를 입고 머리를 뒤로 묶은 여학생이었는데 공부를 하기 위해 도서관에 다니는 터라 그다지 꾸미지는 않았지만 귀여워 보였다.
“미안해요. 공부하느라 시간이 없을 텐데...”
“괜찮아요. 궁금하신 게 있으면 물어보세요.”
“미정이가 중학교 시절 남자친구나 애인을 만난 적이 없다고 선희씨한테 들었는데요. 유진씨도 그런 걸 본적이 없나요?”
“그거라면 없어요. 제가 같은 동네에 살지 않아서 집에 가 있는 시간은 잘 모르지만 적어도 학교에서는 늘상 붙어 있었거든요. 미정이는 자기 입으로 먼저 남자 애들 이야기를 한 번도 꺼낸 적이 없을뿐더러 선희가 모른다면 없다고 보는 게...”
“그게 좀 이상하지 않나요? 중,고등학교 시절에 남자 친구 한번 안 만나본다는 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되는 군요. 미정이 정도면 남자 애들이 많이 수작을 부렸을 것 같은 데요.”
“미정이는 할머니와 단 둘이 살아서 그런지 또래 아이들보다 좀 조숙했고 또... 현실적이라고 해야 되나? 아무튼 그랬어요. 남자애들이 보낸 편지나 쪽지는 잘 읽지도 않고 버리기도...”
난 수영부원들과 코치로 보이는 남자가 함께 찍은 사진을 꺼냈다. 그리고 유진에게 그걸 보여주면서 물었다.
“이 사진 기억나세요?”
“아... 이거 부산에서 찍은 건데... 기억나요. 아마 대회 때문에 여기로 전지훈련 왔을 때 찍었을 거예요.”
“사진 속에 젊은 남자는 누구죠?”
“이 분은 그 때 체육 교생 실습을 왔다가 수업 시간 외에는 수영부 코치를 해보고 싶다고 자청해서 두세 달 정도 우리를 가르쳐 주신 코치님이세요. 이 곳에도 같이 왔었구요.”
“그래요? 전지훈련 기간 동안 뭐 특별한 일은 없었나요?”
유진이는 무언가 기억을 더듬는 것처럼 뜸을 들이더니 말을 이어갔다.
“그 때 아마... 미정이의 할머니가 많이 아프셔서 그 애는 전지훈련 중에 집으로 돌아갔던 것 같아요. 맞아요. 돌아갈 때는 미정이는 없었어요. 이 곳에 올 때는 감독님과 코치님 차에 나누어 타고 왔는데 남해로 돌아갈 때는 코치님이 미정이를 데리고 먼저 가셔서 남자애들은 버스를 타고 갔었던 걸로...”
“미정이 할머니가 아파서 가면 혼자 가면 되는 거 아닌가요? 왜 코치님이 따라갔죠?”
“그 때 무슨 수술을 해야 한다고 보호자 동의 같은 걸 해야 되는 상황이라 급하게 가느라 그랬을 거예요. 어쨌든 코치님은 남해로 돌아가신 후에 다시 오지 않으셨어요.”
“혹시 그 때 코치님이 타고 나닌 차종이 뭔지 기억하나요?”
“음 그게... 새 차였어요. 쏘나타3 흰색...”
아직 대학생 신분에 새 차를 뽑아서 교생 실습을 왔다는 것 같은 데... 집에서 사준 거라면 형편은 꽤 괜찮은 놈이군.
“전지훈련이 끝난 후엔 미정이 할머니는 괜찮아 지셨나요?”
“미정이가 한 달 이상 그러니까 그 때 대회에도 출전 못하고 병간호를 했었어요. 2학기가 시작되고 나서야 얼굴을 볼 수 있었으니까요.”
“코치님은 언제까지 수영부에 있었죠?”
“교생실습은 방학이 시작될 때 끝났는데 대회가 8월에 있어서 그 때까지는 가끔 오셔서 봐주셨어요. 대회가 끝나자 다니던 학교로 돌아가셨고요.”
“혹시... 그 코치... 같이 있는 동안... 이상한 행동은 하지 않던가요?”
“무슨 말씀이신지?...”
“이를테면 필요 이상으로 여자부원들의 몸을 더듬는 다든지... 성적인 접촉 같은.. 뭐 그런 게 있었나 해서요.”
“자세를 봐줄 때 가끔 몸에 손이 닿기는 했지만 특별히... 좀 이상한 건 미정이는 다른 부원들에 비해 훨씬 더 개인 훈련을 많이 시켰어요. 여자애들 중에서는 그래도 기록이 입상권과 제일 근접했으니 그럴 거라고 생각했었죠. 그런데 그게 왜 궁금하시죠?”
질문이 좀 지나쳤다. 난 미정이와 같이 회사를 다녔던 사람인데 경찰처럼 물어보면 안 되는데...
“아... 미안해요... 그냥 미정이가 중학교 시절에 그런 일로 아픔을 겪지 않았을까 해서요. 제가 실수한 것 같네요. 혹시 코치 이름이 기억나세요?”
“민... 현... 규... 맞을 거예요.”
몇 마디 말을 더 나눈 후에 유진을 보내고 차에 타서 다시 남해로 출발했다. 할머니의 수술. 민현규. 미정이에 대한 특별한 관심. 실마리가 잡힐 지도....
꼬박 2시간 30분 정도를 달려서 다시 남해에 도착한 시간은 저녁 7시 정도 였다. 식당에서 밥을 먹은 후 남해에 있는 모텔에서 잠을 청했다. 머리 속으로 다음 날 해야 할 일을 정리해보니 먼저 미정이의 할머니를 만나서 그 때 어디가 아프셨고 무슨 수술을 했는지 알아봐야 하고 또 선희를 만나 장소를 파악해달라고 맡겨 놓은 사진을 찾아야 했다.
그리고 미정이가 다닌 00중학교에 가서 민현규라는 녀석에 대해 알 수 있는 정보는 모두 얻어내야 했다. 녀석이 내가 찾는 인물일지도 모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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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지연의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고 잠이 들었던 나는 새벽녘에 다시 일어나 그녀와 한 차례 정사를 더 가졌다. 너무 자연스럽게 내 품으로 파고든 그녀는 잠이 들기 전에 보여준 몸짓 보다 한층 더 격렬히 나를 안아 왔고 20여분 간의 섹스가 끝났을 때 난 내 몸속에 남아 있던 마지막 한 방울의 정액마저 모두 비워낸 기분이었다.
그녀가 먼저 샤워를 했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으로 욕실에서 나올 때까지 난 침대 위에 그대로 누워 있었다.
“안 씻어? 이제 가야될 것 같은데... 출근해야 되잖아?”
“응. 잠깐만. 다리가 풀려서 씻으러 욕실까지 걸어갈 수 있을 지 모르겠어. 5분만 더 쉬었다가...”
황지연이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그대로 화장대 앞에 앉았다. 난 뒤에서 담배를 하나 물고 불을 붙인 후에 알몸으로 머리 매무새를 만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감상하고 있다가 그녀에게 말했다.
“다리가 풀린 건 맞지만 걸을 수 없을 정도는 아니고 실은... 난 지금 이대로가 너무 좋아서 움직이기가 싫은 거야. 후후후.”
“무슨 말이야?”
“난 이런 공황상태가 좋아. 너와 잠을 잘때마다 이런 기분이 들곤 하는데... 무언가에 빠져서 모든 걸 다 쏟아낸 다음에 오는 머리가 텅 비어버리는 기분... 그래서 아무 생각이 없어 질 때가 너무 좋아. 이럴 때 난 움직이기 싫어. 이 기분이 욕실로 걸어가는 동안 깨지는 게 싫거든.”
그녀가 살짝 뒤를 돌아보더니 다시 거울 쪽으로 시선을 돌린 후에 말을 이어갔다.
“하여간 미스테리한 아저씨라니까... 오늘은 뭐라고 핑계를 댔기에 지금 이 시간까지 안들어 가고 버틸 수 있는 거야?”
“응 친구 녀석 부친상에 간다고 했어.”
“애꿎은 친구 아버지 한명만 죽였네. 호호호.”
“이미 돌아가신 분이야. 우리 와이프는 잘 몰라.”
잠시 후에 모텔을 나와 황지연의 차를 타고 장어구이 집으로 다시 갔다. 그리고 거기서 그녀와 헤어진 후에 집으로 출발했다. 헤어질 때 난 내 차에 타기 전에 운전대를 잡고 차 안에 있는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는데 황지연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로 살짝 오른 손을 들어 손가락으로 왼 손에 있는 핸드폰을 가리키더니 차 유리창으로 손을 뻗어 글자를 적었다.
[문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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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잠깐 들렸다가 피곤한 몸으로 출근. 퇴근. 다시 출근. 퇴근. 수요일이 되었다. 난 황지연에게 문자나 전화를 하지 않았는데 그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싶어서였다.
너무 자주 만나면 그녀가 나를 달리 볼지 모른다. 난 그녀에게 이유성 아니 그녀의 남편만큼 큰 쾌락을 줄 수는 없다. 체조선수 출신의 젊은 헬스클럽 트레이너라는 그 놈이 김유미와 정사를 하던 모습을 생각해보면 역부족이 분명...
난 그냥 그녀가 허기가 질 만큼 기다렸다가 대충 아무 거라도 한 끼 때워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쯤 연락을 해서 만나는 것이 현명할 것 같았다. 괜히 그녀의 애인이나 된 거 마냥 깝죽되다가 황지연이 갑자기 ‘아무리 내가 시장해도 밥을 먹어야지 라면으로 때울 순 없잖아!’
이런 생각이라도 하게 되면, 즉 지금 나와의 만남을 이어가는 자신을 냉정히 뒤돌아보기라도 하는 날에는, 40이 다된 곰같이 생긴 아저씨를 계속 봐줄 리가 만무할 지도...
목요일 늦은 오후 황지연에게 문자가 날아 왔다.
[뭐해? 바빠?]
[응 이번 주는 좀 바빴어]
[아무리 바쁘다고 문자 한 통 안해? 간댕이가 부었네]
[무슨 소리야? 난 니가 귀찮아할까봐 그런 거야]
[내가 저번에 헤어질 때 문자하라고 했을 텐데.]
[응 하루에도 몇 번씩 망설였어. 보내도 될까? 이번 주에도 만나자고 하면 너무 귀찮아 하지 않을까?]
[하라면 하면 되지. 무슨 잔말이 그렇게 많아? 앞으로도 이런 식이면 다른 놈 만난다]
[응? 왜 그래? 앞으론 말 잘 들을게. 시키는 건 다 할게.]
[그럼 토요일에 어디서 만날 건지 정해서 오늘 밤 안으로 문자해. 알았어?]
[응. 누구 분부라고 거역하겠어. 한 시간 내에 장소하고 시간 정해서 보낼게. 혹시 시간이 안맞으면 다시 이야기 해]
[진작 그럴 일이지. 까불고 있어^^]
흩어진 조각들이 모아지고 있었다.
처음 만났던 날 황지연은 이유성을 보고 돌아서서 내차에 탔다. 그녀의 남편이었음에도...
선승철은 내게 자신과 사귀는 동안 황지연은 그에게 문자나 전화를 자주 하는 성격은 아니었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 내게 브레이크 없이 다가오는 그녀...
그녀는 아마 이유성과 결혼을 하면 그 녀석 주변의 여자들을 정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5년의 결혼 생활동안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았고 어느 순간부터는 황지연의 타박이나 잔소리 때문에 잦은 부부싸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 때 이유성이라는 놈은 아마 - 선승철의 이야기를 듣고 짐작해보면 - 그녀에게 이혼을 이야기 했을 가능성이 크다. 황지연은 그런 수모 속에서도 이혼을 결심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공무원 신분에 함부로 이혼해서 구설수에 오르기도 싫었을 것이고 또 다른 이유가 있었겠지만... 그래서 그날 밤 이유성에게 오히려 들킬까봐 내 차를 탔을 것이고...
남편 이유성이 주는 밤의 환락조차 상당히 오랫동안 그녀에게 주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황지연의 미모, 재력조차도 이유성이라는 놈에게는 별다른 집착이 되지 않았고 3처 4첩을 거느리던 왕의 간택을 받지 못한 후궁신세가 된 그녀는 우울증 증세까지 왔던 것이다. 더군다나 그녀는 후궁이 아니라 본처 였으니...
우울증에 시달리고 삭막한 밤을 보내던 황지연 앞에 우연히 나타난 게 바로 나였다.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르는 남편의 외면에 대항하기 위해서 그녀는 날 거느리기로 마음을 먹었다고 봐야할 것 같다. 김유미 선생과 만나지 말라고 이야기 했던 건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녀에게 나까지 넘겨줄 수는 없었던 것이다. 남편을 나눠 가지는 것만으로도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을 테지만...
게임의 주도권은 누가 가지고 있을까?
이유성은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나라는 놈의 존재는 모른다.
난 절대 권력 뒤에서 이득을 취하며 이 게임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었다.
김유미는 가끔 이유성과 잠을 잘 수는 있지만 앞으로 나와의 관계는 힘들 지도 모르고
황지연은 남편의 마음이 돌아올 때까지, 아니면 남편과의 관계가 정리될 때까지 만지작 거릴 장난감을 얻었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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