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남해시에서 아침을 먹고 미정이네 집으로 갔다. 미정이 할머니께 4~5년 전에 아파서 수술한 적이 있으시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끄덕이신다.
“어디가 아프셨는데요?”
“면소재지 장에 갔다가 보따리를 들고 골목길을 걷고 있는데 뒤에서 무언가가 와서 엉덩이를 받았어. 앞으로 넘어지면서 코하고 얼굴을 바닥에 부딪치고 까무러친 후에 깨어나 보니 119에 실려서 병원에 있던 거라.”
“예? 그럼 교통사고 였었나요?”
“몰러. 기억도 안나구. 나 혼자 바닥에 쓰러져있는 걸 지나가던 사람이 119신고를 했대.”
“경찰에 신고도 안하셨어요?”
“안했을 꺼여. 미정이도 부산에 갔다가 돌아와서 나 간호 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차량이 받고 뺑소니를 쳤다면 목격자 없이 잡기가 만만치 않았겠지만 그래도 신고라도 하셨으면 경찰들이 탐문수사라도 했을 텐데...
“그래서 어디를 수술하셨어요?”
“광대뼈가 함몰되서 얼굴 쪽을 수술했지. 엉덩이 뼈도 부러졌는데 거기는 인공 관절 같은 걸 집어 넣었구...”
“수술비가 꽤 나왔겠네요?”
“나는 잘 몰라. 미정이가 학교에서 성금을 걷어 준걸로 계산했다고 했는데...”
“거기가 어느 병원이죠?”
“남해병원 이여. 거기서 한 달 넘게 입원해 있었어.”
“할머니 함자가 어떻게 되세요?”
“이름? 늙은이 이름은 뭐 할려구? 최순자여. 최 순 자”
할머니와 이야기를 마친 후 바로 선희네 집으로 가서 맡겨 놓은 사진들을 찾았다. 선희는 같이 찍은 친구 이름과 장소 등을 사진 뒤에 꼼꼼히 적어 주었고 난 그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기 전에 미정이 할머니 수술 때문에 학교에서 성금을 걷은 적이 있냐고 물어 보았다. 선희는 그런 기억이 없다고 했고 난 곧바로 00중학교로 갔다.
2학기가 시작되기 전 방학 중인 학교는 한산했다. 정문을 지나서 운동장 옆으로 난 길을 한참을 걸어 올라가서야 본관 건물이 있었는데 1층에 있는 행정실로 들어가니 2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얼굴이 동그란 젊은 여자가 혼자 있었다.
그녀는 무슨 일로 왔냐는 듯 눈을 치켜뜨며 내 얼굴 쪽으로 시선을 돌렸는데 난 아무말 없이 그녀에게 걸어가 신분증을 꺼내 코앞까지 들이 민 후에 이야기를 꺼냈다.
“경찰관입니다. 기소중지자 검거 기간이라 여기서 근무했던 사람을 조사하러 왔는데요. 4~5년 전에 여기 교생으로 있었다고 하던데 이름이 민현규...”
그녀의 눈이 커지더니 약간 소프라노 톤의 목소리로 말을 했다.
“교...교생이요? 자료가 별로 없는데요.. 잠깐 왔다 가시는 분들이라... 이름이 뭐라고 하셨죠?”
“민 현 규.. 직원 숙소부 나 신상 기록부 정도면 될 것 같은 데요. 고향집에 가보니 연락이 끊긴 지가 좀 됐다고 해서...”
난 이미 민현규에 대해 조사중이고 알 건 대충 안다는 듯이 이야기를 했다.
“예. 잠깐만요. 차 한 잔 드릴까요?”
그녀가 내 얼굴을 빤히 쳐다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 됐어요.. 물 한 컵 마시고 있을 게요.”
난 정수기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 컵에 물을 한 잔 받아 입을 축였다. 잠시 후에 여직원이 캐비넷에서 서류들을 꺼내 찾더니 내게 말했다.
“여기 있네요. 민 현 규...”
그녀가 보여준 신상 기록부에는 민현규의 생년월일, 주소, 출신학교, 연락처, 숙소의 약도 등이 있었는데 난 복사를 부탁하며 물었다.
“혹시 이 사람이 여기 교생으로 왔을 때 이 학교에 계셨나요?”
“예? 아니요. 여기 근무한 지 1년밖에 안돼서... 무슨 큰 죄를 지었나요?”
“교통사고특례법 위반으로 벌금이 좀 나왔는데 안 내고 있어서요. 큰 죄라고 이야기 하기는 좀 ...”
“남해 경찰서에 계세요? 우리 사촌 오빠도 경찰관인데...”
그녀는 습관적인지 아니면 나에 대한 관심인지 몰라도 대화를 이어가려 하고 있었다. 난 아까 본 민현규의 주소지 전남 광양을 떠올려 광양경찰서에서 근무한다고 둘러댄 후 복사본을 받아 행정실을 나왔다.
그리고 민현규가 교생으로 있는 두어달 동안 숙소로 기재해 놓은 곳으로 가려다 차를 몰고 남해병원으로 갔다. 원무과에 들러 신분증을 보여주고 당시 최순자 할머니의 병원비가 어느 정도 였고 계산이 어떻게 됐었는지 물어 보았다.
원무과 여직원이 자료를 찾더니 병원비가 의료보험 급여를 제외하고 326만원 정도였는데 카드로 계산되었고 카드 명의자 이름은 민준식이라고 알려 주었다. 민준식... 당시 학생이었던 민현규의 아버지 이름일까? 의혹은 커지고 있었다.
미정이는 할머니에게 성금으로 계산했다고 이야기 했지만 병원비 계산은 민현규가 아버지 카드로 계산했던 것 같다. 결국 민현규가 미정이에게 300만원이 넘는 거금을 빌려준 셈이다. 댓가는 무엇이었을까?
난 병원을 나오자마자 차에 타서 당시 민현규의 숙소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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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오후 난 토요일 저녁에 황지연과 강남역 근처 레스토랑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그리고 약속한 토요일오후에 아들을 데리고 김유미의 오피스텔에 수업을 받기 위해 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며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성현이 왔구나. 어서오세요!”
그녀는 가슴이 브이자로 파진 데다가 무릎 위에 걸리는 회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옷차림은 여성미가 흘러 넘치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평상시와 다르게 무미건조 했으며 내 쪽은 건성으로 보고 아들을 바라보며 인사를 건넸다. 성현이를 수업 받는 방으로 들여보낸 후 거실에서 다른 엄마들과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렸고 1시간 쯤 후에 김유미와 마주 앉았다.
난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기가 좀 뭐해서 아이들이 교구로 만들어 놓은 헬리콥터를 바라보며 아무 말 없이 김유미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녀가 수업과는 상관없는 말을 한다.
“얼굴이 좀 상한 것 같아요. 무슨 일 있어요?”
“응? 그래 보여? 별일 없는데...”
“그래요? 그럼 요즘은 집안이 평온해 졌나 봐요. 석훈씨도 안정을 되찾았고...”
말투가 어째 가시가 있다. 약간 빈정거리는 듯한... 김유미가 나에게 자신의 공간을 내주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게 현실로 다가 오고 있었다. 황지연이 갑자기 돌변하지만 않았다면 원래 난 나와 김유미 사이에서 황지연을 몰아내고 싶었지만 전혀 예상치 못했던 황지연의 변신에 김유미를 어쩔 수 없이 배제해야 했었는데... 더군다나 오늘 저녁에 황지연과 약속까지 잡혀있지 않은가? 난감했다. 하지만...
난 김유미를 멀리 보내고 싶지 않았고 잠시나마 시간을 벌어야 했다.
“니가 이해 못할 거 같아서 이야기 못했지만 실은 나...”
“...”
“요즘 심리치료 받으러 다녀. 2주 전쯤에 와이프와 잠자리를 같이 하려고 했는데 그게 안 서서. 병원에서는 발기부전 증상이 있다던데. 마누라가 바람이 난 책임이 나한테 있는 것 같아서 자신감이 많이 떨어져 그런 건가봐.”
“그게 무슨... 일전에는 아무 문제 없었잖아요?”
“나.. 솔직히 말하면 와이프 앞에서 그러는 건 참을 수 있는 데 니 앞에서는 훨씬 더 비참하고 충격이 심할 것 같아서 치료가 어느 정도 되면 연락하려고 했어. 그런 상황에서 니가 날 이해해 줄지는 모르는 일이라...”
“...”
“정말 염치없지만 부탁이 있어. 치료가 끝날 때까지만 우리 만남을 미뤄주면 안될까? 나 이대로 널 보내면 정말 후회할 것 같아서...”
“... 차라리... ”
“응? 차라리 뭐?”
“아니예요.”
상담 시간이 끝난 후 아들을 데리고 오피스텔을 나왔다. 아마 김유미가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은 "자신과 관계를 맺어 보면 어떨까 그럼 발기가 되지 않을까" 이런 말 이었을 것이다.
당연히 서지. 아까 니 앞에 앉아 있는 동안에도 그 숱많은 보지가 떠올라 꼴려서 죽을 뻔 했는데...
어쩌면 이유성이라는 놈이 주는 환락의 크기만큼이나 그의 여자들이 그를 기다리는 시간이 영원처럼 지루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을 할 때도 밥을 먹을 때도 화장실에 갔을 때도 그 놈만 생각난다면 잠시라도 그걸 잊게 해줄 내가 그녀들에게는 마약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보다 약한 환각을 불러일으키는 향정신성의약품을 쓰는 것처럼 하나의 방법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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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지연과 저녁 7시경에 여성들이 좋아하는 약간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나는 레스토랑에서 만났다. 가격이 그리 비싸지는 않지만 밝은 분위기와 이색적인 아이템 - 주문 시 영화를 찍을 때 사용하는 큐카드에 적어서 내는 것과 메뉴판이 아이패드로 되어 있는 것 등 - 으로 연인들에게 인기가 많은 곳이다.
그녀에게 물었다.
“와인 마실래?”
“아저씨는 뭐 마실건데?”
“소주. 넌 와인 마셔도 돼. 분위기도 괜찮고 안주도 파스타나 바베큐 같은 거 시키면...”
“나도 소주. 소주가 다른 나라에서는 엄청 비싼 술이래. 인기도 많고...”
“안주는?”
황지연이 해산물 크림 파스타와 통삼겹 플레이트 등을 주문했고 우리는 여느 때처럼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둘 다 별 이야기 없이 소주를 마시다 두 병째가 거의 비워질 무렵 그녀가 묻는다.
“오늘도 김유미 선생을 만났겠네?”
“응? 아들 데리고 수업 받으러 가니까 어쩔 수 없이 보게 돼.”
“그거 와이프가 가도 돼는 거 아냐? 왜 꼭 아저씨가 가는데?”
“우리 마누라 운전 못해. 내가 토요일에 바쁘면 마누라가 버스타고 데리고 가긴 하는데 둘째도 같이 데리고 가야하니까 번거로워서...”
“아이가 둘이야?”
“응.”
그녀가 안주를 집어 입에 넣더니 창가 쪽 다른 테이블로 시선을 돌렸다. 그 곳엔 아이 둘과 부부로 보이는 남녀가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한참동안 그 곳을 응시하고 있는 그녀를 보고 있으려니 이유성과의 결혼 생활에서 그녀에겐 아이가 없다는 것이 떠올랐다.
그렇게 조용히 몇 잔의 소주를 더 마시던 그녀가 불쑥 말을 꺼냈다.
“아저씨!”
“응? 뭐?”
“아저씨는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
“응? 사랑?”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 얼굴쪽을 바라 보았는데, 빤히 쳐다보는 그녀의 눈빛이 너무 순수해보여서 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하기가 좀 머쓱했다.
“꼭 답을 해야 하는 질문이야? 아니면... 아니 넌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먼저 물었잖아... 난 잘 모르겠어서 그래. 아저씨라면 무언가 다른 이야기를 해줄 것 같아서...”
난 소주 한 잔을 입에 털어 넣고 다시 잔을 채웠다. 그리고 다시 원 샷... 잠시 후 다시 원 샷...갑자기 내가 빠른 속도로 술을 마시자 그녀가 다시 물었다.
“왜 그래? 그게 그렇게 말하기 힘든 거야?”
“아니... 내 나름대로의 생각은 이야기 해줄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그 게...”
“그 게 뭐?”
“그 게 너와 나 사이에 도움이 될 지 안 될지가 판단이 안되서...”
“우리 사이? 괜찮아. 말해봐. 전에도 말한것 같은데 김유미 선생만 만나지 않는 다면 당분간 우리 만남은 계속될 거야. 약속할게.”
“솔직하게 애기하면, 예전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적도 있었지만 지금의 난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 아주 단순하게 이야기 할 수 있어. 그 건 좋아하는 감정의 증폭일 뿐이야.”
“감정의 증폭?”
“돈이 별로 없어서 어렵게 자란 여자에게는 돈이 많은 남자가 호감을 증폭시켜 주겠지. 거기다 잘 생기고 여자에 대한 배려가 세심하다면 더 도움이 되겠지만 주가 되는 건 역시 돈이야. 가난하고 잘 생긴 남자가 자신을 잘 챙겨준다고 하더라도 커지지 않던 감정이 돈 많은 유부남에게 쉽게 커져서 사랑을 느낄 수도 있는 거니까.
첫 사랑은 학창 시절이나 사춘기 때 많은 것이 통제되는 시기에 시작되고 첫 키스를 하거나 섹스를 하게 되면 서로에 대한 감정이 엄청나게 증폭 되어서 세월이 지나도 가슴 속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경우가 많아. 그런데...“
“그런데 뭐?”
그녀가 흥미로운 듯이 턱에 팔을 괴고 앞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커진 감정은 서로에게 부담이 되거나 한 쪽의 집착으로 이어지게 될 가능성 역시 많으니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아. 만약 니가 어떤 사람에게 사랑의 감정을 크게 느꼈다면...“
“응...”
“그래서 한 발짝 멀리서 바라볼 여유조차 없이 끌려들어 갔다면 그건 그 사람이 니가 경험해 보지 못했던 것을 주었고 그로 인해 좋아하는 감정이 증폭된 거야.
얼마 전 출판된 발레리나 강수진의 자서전에서 그녀가 사춘기 때 누군가를 좋아하는 열정 때문에 그 남자를 만나기 위해 프랑스에서 이탈리아로 50시간을 먹지도 자지도 않고 기차여행을 한 경험에 대해 읽은 적도 있지만, 무언가를 할 때는 그런 열정이 꼭 필요하긴 하지만...“
“응.. ”
“그런 열정을 받아줄 누군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다면 그 건 고스란히 자신에게 인고의 시간으로 다가오게 되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겠지. 풀어내지 못하면 가슴 속에 쌓일 테니까...”
“그 말은 그럼...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거야? 인고의 시간이 되지 않는 다면 그건 어떤 경우야?”
“뭐? 그건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데... 듣고 싶어? 내가 하는 말이 정답도 아닌데.. 그렇게 눈에 보이지도 않는 걸 자꾸 물어 보면 어떻게 하냐? 내가 무슨 철학자도 아니고...”
“그냥 끝까지 말해줘. 지금까지는 어느 정도 알아듣겠으니까 쉽게 설명하든 어렵게 이야기하든 해보란 말이야!”
그녀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졌고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젊은 여자 3명이 동시에 우리가 있는 곳을 쳐다 본다. 그녀들에게는 우리가 연인이나 부부 사이로 보이긴 할까?
“어디가 아프셨는데요?”
“면소재지 장에 갔다가 보따리를 들고 골목길을 걷고 있는데 뒤에서 무언가가 와서 엉덩이를 받았어. 앞으로 넘어지면서 코하고 얼굴을 바닥에 부딪치고 까무러친 후에 깨어나 보니 119에 실려서 병원에 있던 거라.”
“예? 그럼 교통사고 였었나요?”
“몰러. 기억도 안나구. 나 혼자 바닥에 쓰러져있는 걸 지나가던 사람이 119신고를 했대.”
“경찰에 신고도 안하셨어요?”
“안했을 꺼여. 미정이도 부산에 갔다가 돌아와서 나 간호 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차량이 받고 뺑소니를 쳤다면 목격자 없이 잡기가 만만치 않았겠지만 그래도 신고라도 하셨으면 경찰들이 탐문수사라도 했을 텐데...
“그래서 어디를 수술하셨어요?”
“광대뼈가 함몰되서 얼굴 쪽을 수술했지. 엉덩이 뼈도 부러졌는데 거기는 인공 관절 같은 걸 집어 넣었구...”
“수술비가 꽤 나왔겠네요?”
“나는 잘 몰라. 미정이가 학교에서 성금을 걷어 준걸로 계산했다고 했는데...”
“거기가 어느 병원이죠?”
“남해병원 이여. 거기서 한 달 넘게 입원해 있었어.”
“할머니 함자가 어떻게 되세요?”
“이름? 늙은이 이름은 뭐 할려구? 최순자여. 최 순 자”
할머니와 이야기를 마친 후 바로 선희네 집으로 가서 맡겨 놓은 사진들을 찾았다. 선희는 같이 찍은 친구 이름과 장소 등을 사진 뒤에 꼼꼼히 적어 주었고 난 그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기 전에 미정이 할머니 수술 때문에 학교에서 성금을 걷은 적이 있냐고 물어 보았다. 선희는 그런 기억이 없다고 했고 난 곧바로 00중학교로 갔다.
2학기가 시작되기 전 방학 중인 학교는 한산했다. 정문을 지나서 운동장 옆으로 난 길을 한참을 걸어 올라가서야 본관 건물이 있었는데 1층에 있는 행정실로 들어가니 2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얼굴이 동그란 젊은 여자가 혼자 있었다.
그녀는 무슨 일로 왔냐는 듯 눈을 치켜뜨며 내 얼굴 쪽으로 시선을 돌렸는데 난 아무말 없이 그녀에게 걸어가 신분증을 꺼내 코앞까지 들이 민 후에 이야기를 꺼냈다.
“경찰관입니다. 기소중지자 검거 기간이라 여기서 근무했던 사람을 조사하러 왔는데요. 4~5년 전에 여기 교생으로 있었다고 하던데 이름이 민현규...”
그녀의 눈이 커지더니 약간 소프라노 톤의 목소리로 말을 했다.
“교...교생이요? 자료가 별로 없는데요.. 잠깐 왔다 가시는 분들이라... 이름이 뭐라고 하셨죠?”
“민 현 규.. 직원 숙소부 나 신상 기록부 정도면 될 것 같은 데요. 고향집에 가보니 연락이 끊긴 지가 좀 됐다고 해서...”
난 이미 민현규에 대해 조사중이고 알 건 대충 안다는 듯이 이야기를 했다.
“예. 잠깐만요. 차 한 잔 드릴까요?”
그녀가 내 얼굴을 빤히 쳐다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 됐어요.. 물 한 컵 마시고 있을 게요.”
난 정수기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 컵에 물을 한 잔 받아 입을 축였다. 잠시 후에 여직원이 캐비넷에서 서류들을 꺼내 찾더니 내게 말했다.
“여기 있네요. 민 현 규...”
그녀가 보여준 신상 기록부에는 민현규의 생년월일, 주소, 출신학교, 연락처, 숙소의 약도 등이 있었는데 난 복사를 부탁하며 물었다.
“혹시 이 사람이 여기 교생으로 왔을 때 이 학교에 계셨나요?”
“예? 아니요. 여기 근무한 지 1년밖에 안돼서... 무슨 큰 죄를 지었나요?”
“교통사고특례법 위반으로 벌금이 좀 나왔는데 안 내고 있어서요. 큰 죄라고 이야기 하기는 좀 ...”
“남해 경찰서에 계세요? 우리 사촌 오빠도 경찰관인데...”
그녀는 습관적인지 아니면 나에 대한 관심인지 몰라도 대화를 이어가려 하고 있었다. 난 아까 본 민현규의 주소지 전남 광양을 떠올려 광양경찰서에서 근무한다고 둘러댄 후 복사본을 받아 행정실을 나왔다.
그리고 민현규가 교생으로 있는 두어달 동안 숙소로 기재해 놓은 곳으로 가려다 차를 몰고 남해병원으로 갔다. 원무과에 들러 신분증을 보여주고 당시 최순자 할머니의 병원비가 어느 정도 였고 계산이 어떻게 됐었는지 물어 보았다.
원무과 여직원이 자료를 찾더니 병원비가 의료보험 급여를 제외하고 326만원 정도였는데 카드로 계산되었고 카드 명의자 이름은 민준식이라고 알려 주었다. 민준식... 당시 학생이었던 민현규의 아버지 이름일까? 의혹은 커지고 있었다.
미정이는 할머니에게 성금으로 계산했다고 이야기 했지만 병원비 계산은 민현규가 아버지 카드로 계산했던 것 같다. 결국 민현규가 미정이에게 300만원이 넘는 거금을 빌려준 셈이다. 댓가는 무엇이었을까?
난 병원을 나오자마자 차에 타서 당시 민현규의 숙소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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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오후 난 토요일 저녁에 황지연과 강남역 근처 레스토랑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그리고 약속한 토요일오후에 아들을 데리고 김유미의 오피스텔에 수업을 받기 위해 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며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성현이 왔구나. 어서오세요!”
그녀는 가슴이 브이자로 파진 데다가 무릎 위에 걸리는 회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옷차림은 여성미가 흘러 넘치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평상시와 다르게 무미건조 했으며 내 쪽은 건성으로 보고 아들을 바라보며 인사를 건넸다. 성현이를 수업 받는 방으로 들여보낸 후 거실에서 다른 엄마들과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렸고 1시간 쯤 후에 김유미와 마주 앉았다.
난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기가 좀 뭐해서 아이들이 교구로 만들어 놓은 헬리콥터를 바라보며 아무 말 없이 김유미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녀가 수업과는 상관없는 말을 한다.
“얼굴이 좀 상한 것 같아요. 무슨 일 있어요?”
“응? 그래 보여? 별일 없는데...”
“그래요? 그럼 요즘은 집안이 평온해 졌나 봐요. 석훈씨도 안정을 되찾았고...”
말투가 어째 가시가 있다. 약간 빈정거리는 듯한... 김유미가 나에게 자신의 공간을 내주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게 현실로 다가 오고 있었다. 황지연이 갑자기 돌변하지만 않았다면 원래 난 나와 김유미 사이에서 황지연을 몰아내고 싶었지만 전혀 예상치 못했던 황지연의 변신에 김유미를 어쩔 수 없이 배제해야 했었는데... 더군다나 오늘 저녁에 황지연과 약속까지 잡혀있지 않은가? 난감했다. 하지만...
난 김유미를 멀리 보내고 싶지 않았고 잠시나마 시간을 벌어야 했다.
“니가 이해 못할 거 같아서 이야기 못했지만 실은 나...”
“...”
“요즘 심리치료 받으러 다녀. 2주 전쯤에 와이프와 잠자리를 같이 하려고 했는데 그게 안 서서. 병원에서는 발기부전 증상이 있다던데. 마누라가 바람이 난 책임이 나한테 있는 것 같아서 자신감이 많이 떨어져 그런 건가봐.”
“그게 무슨... 일전에는 아무 문제 없었잖아요?”
“나.. 솔직히 말하면 와이프 앞에서 그러는 건 참을 수 있는 데 니 앞에서는 훨씬 더 비참하고 충격이 심할 것 같아서 치료가 어느 정도 되면 연락하려고 했어. 그런 상황에서 니가 날 이해해 줄지는 모르는 일이라...”
“...”
“정말 염치없지만 부탁이 있어. 치료가 끝날 때까지만 우리 만남을 미뤄주면 안될까? 나 이대로 널 보내면 정말 후회할 것 같아서...”
“... 차라리... ”
“응? 차라리 뭐?”
“아니예요.”
상담 시간이 끝난 후 아들을 데리고 오피스텔을 나왔다. 아마 김유미가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은 "자신과 관계를 맺어 보면 어떨까 그럼 발기가 되지 않을까" 이런 말 이었을 것이다.
당연히 서지. 아까 니 앞에 앉아 있는 동안에도 그 숱많은 보지가 떠올라 꼴려서 죽을 뻔 했는데...
어쩌면 이유성이라는 놈이 주는 환락의 크기만큼이나 그의 여자들이 그를 기다리는 시간이 영원처럼 지루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을 할 때도 밥을 먹을 때도 화장실에 갔을 때도 그 놈만 생각난다면 잠시라도 그걸 잊게 해줄 내가 그녀들에게는 마약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보다 약한 환각을 불러일으키는 향정신성의약품을 쓰는 것처럼 하나의 방법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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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지연과 저녁 7시경에 여성들이 좋아하는 약간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나는 레스토랑에서 만났다. 가격이 그리 비싸지는 않지만 밝은 분위기와 이색적인 아이템 - 주문 시 영화를 찍을 때 사용하는 큐카드에 적어서 내는 것과 메뉴판이 아이패드로 되어 있는 것 등 - 으로 연인들에게 인기가 많은 곳이다.
그녀에게 물었다.
“와인 마실래?”
“아저씨는 뭐 마실건데?”
“소주. 넌 와인 마셔도 돼. 분위기도 괜찮고 안주도 파스타나 바베큐 같은 거 시키면...”
“나도 소주. 소주가 다른 나라에서는 엄청 비싼 술이래. 인기도 많고...”
“안주는?”
황지연이 해산물 크림 파스타와 통삼겹 플레이트 등을 주문했고 우리는 여느 때처럼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둘 다 별 이야기 없이 소주를 마시다 두 병째가 거의 비워질 무렵 그녀가 묻는다.
“오늘도 김유미 선생을 만났겠네?”
“응? 아들 데리고 수업 받으러 가니까 어쩔 수 없이 보게 돼.”
“그거 와이프가 가도 돼는 거 아냐? 왜 꼭 아저씨가 가는데?”
“우리 마누라 운전 못해. 내가 토요일에 바쁘면 마누라가 버스타고 데리고 가긴 하는데 둘째도 같이 데리고 가야하니까 번거로워서...”
“아이가 둘이야?”
“응.”
그녀가 안주를 집어 입에 넣더니 창가 쪽 다른 테이블로 시선을 돌렸다. 그 곳엔 아이 둘과 부부로 보이는 남녀가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한참동안 그 곳을 응시하고 있는 그녀를 보고 있으려니 이유성과의 결혼 생활에서 그녀에겐 아이가 없다는 것이 떠올랐다.
그렇게 조용히 몇 잔의 소주를 더 마시던 그녀가 불쑥 말을 꺼냈다.
“아저씨!”
“응? 뭐?”
“아저씨는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
“응? 사랑?”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 얼굴쪽을 바라 보았는데, 빤히 쳐다보는 그녀의 눈빛이 너무 순수해보여서 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하기가 좀 머쓱했다.
“꼭 답을 해야 하는 질문이야? 아니면... 아니 넌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먼저 물었잖아... 난 잘 모르겠어서 그래. 아저씨라면 무언가 다른 이야기를 해줄 것 같아서...”
난 소주 한 잔을 입에 털어 넣고 다시 잔을 채웠다. 그리고 다시 원 샷... 잠시 후 다시 원 샷...갑자기 내가 빠른 속도로 술을 마시자 그녀가 다시 물었다.
“왜 그래? 그게 그렇게 말하기 힘든 거야?”
“아니... 내 나름대로의 생각은 이야기 해줄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그 게...”
“그 게 뭐?”
“그 게 너와 나 사이에 도움이 될 지 안 될지가 판단이 안되서...”
“우리 사이? 괜찮아. 말해봐. 전에도 말한것 같은데 김유미 선생만 만나지 않는 다면 당분간 우리 만남은 계속될 거야. 약속할게.”
“솔직하게 애기하면, 예전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적도 있었지만 지금의 난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 아주 단순하게 이야기 할 수 있어. 그 건 좋아하는 감정의 증폭일 뿐이야.”
“감정의 증폭?”
“돈이 별로 없어서 어렵게 자란 여자에게는 돈이 많은 남자가 호감을 증폭시켜 주겠지. 거기다 잘 생기고 여자에 대한 배려가 세심하다면 더 도움이 되겠지만 주가 되는 건 역시 돈이야. 가난하고 잘 생긴 남자가 자신을 잘 챙겨준다고 하더라도 커지지 않던 감정이 돈 많은 유부남에게 쉽게 커져서 사랑을 느낄 수도 있는 거니까.
첫 사랑은 학창 시절이나 사춘기 때 많은 것이 통제되는 시기에 시작되고 첫 키스를 하거나 섹스를 하게 되면 서로에 대한 감정이 엄청나게 증폭 되어서 세월이 지나도 가슴 속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경우가 많아. 그런데...“
“그런데 뭐?”
그녀가 흥미로운 듯이 턱에 팔을 괴고 앞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커진 감정은 서로에게 부담이 되거나 한 쪽의 집착으로 이어지게 될 가능성 역시 많으니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아. 만약 니가 어떤 사람에게 사랑의 감정을 크게 느꼈다면...“
“응...”
“그래서 한 발짝 멀리서 바라볼 여유조차 없이 끌려들어 갔다면 그건 그 사람이 니가 경험해 보지 못했던 것을 주었고 그로 인해 좋아하는 감정이 증폭된 거야.
얼마 전 출판된 발레리나 강수진의 자서전에서 그녀가 사춘기 때 누군가를 좋아하는 열정 때문에 그 남자를 만나기 위해 프랑스에서 이탈리아로 50시간을 먹지도 자지도 않고 기차여행을 한 경험에 대해 읽은 적도 있지만, 무언가를 할 때는 그런 열정이 꼭 필요하긴 하지만...“
“응.. ”
“그런 열정을 받아줄 누군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다면 그 건 고스란히 자신에게 인고의 시간으로 다가오게 되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겠지. 풀어내지 못하면 가슴 속에 쌓일 테니까...”
“그 말은 그럼...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거야? 인고의 시간이 되지 않는 다면 그건 어떤 경우야?”
“뭐? 그건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데... 듣고 싶어? 내가 하는 말이 정답도 아닌데.. 그렇게 눈에 보이지도 않는 걸 자꾸 물어 보면 어떻게 하냐? 내가 무슨 철학자도 아니고...”
“그냥 끝까지 말해줘. 지금까지는 어느 정도 알아듣겠으니까 쉽게 설명하든 어렵게 이야기하든 해보란 말이야!”
그녀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졌고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젊은 여자 3명이 동시에 우리가 있는 곳을 쳐다 본다. 그녀들에게는 우리가 연인이나 부부 사이로 보이긴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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