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졌고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젊은 여자 3명이 동시에 우리가 있는 곳을 쳐다본다. 그녀들에게는 우리가 연인이나 부부 사이로 보이긴 할까?
이런 방향은 내가 원했던 게 아닌 것 같은데... 잠시나마 나로 인해 위안을 받던 황지연은 다시 이유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하는 말들이 그놈과 자신의 사이에서 있었던 이야기로 들려서 민감해 진 것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더 이상 도망가기는 힘들어진 듯...
“음... 설명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는 그게 내가 결정짓거나 한정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라서 그래. 쉬운 부분부터 말하면 그냥 너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움직이는 것과 다를 바 없어. 그렇게 커진 마음을 상대가 받아주지 않는다면... 그걸 나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냥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로 바라보면 단순해지는데 잊든지 아니면 너무 커진 내 마음을 줄이든지... 둘 중의 하나겠지.“
“...”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약간 숙인 채 내 이야기를 듣고 있었고 나는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건 말이 둘 중의 하나지 같은 이야기나 다름없어. 사랑하는 감정이 기억상실증 같은 것에 걸리지 않는 한 쉽게 잊혀질리 없으니 나머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감정들을 줄이기 위해 움직이는데...
주위에서 흔히 볼수 있는 일들이지. 어차피 감정이라는 것도 생각을 하면서 따라 붙는 부산물 같은 거니까 그 사람에 대한 생각을 적게 하는 방향으로 가는 거야.
누군가를 잊기 위해 일에 미친다거나 새로운 취미를 배운다거나 아니면 다른 누군가를 만나다보면 결국 그런 마음들이 조금씩 줄어들 것이고 안보면 멀어지는 게 당연한데다 세월이 또 잊게 해주니까 중간과정에서 미치게 힘든 과정이 있을지 몰라도 결국 회복하게 될 거야.
그런데... 그런 과정이 있었음에도 상처가 회복되지 않는다면... 그러니까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면 아니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 감정이 전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커진다면...
내가 설명하기 힘들다고 이야기했던 부분이 이런 상황인데...“
난 소주 한 잔을 입에 털어 넣으면서 그녀를 살폈다. 그녀는 미동도 없이 아니 눈 한번 깜박거리지 않고 있다가 잠시 후에 고개를 들어 미간을 약간 찌푸리며 나를 바라봤는데 그 눈빛은 이야기를 재촉하는 듯 했다.
“더 해? 이런 이야기 잠 오지 않아? 다른 이야기 할까?”
“아니... 계속 해봐. 들어야 겠어.”
“음... 글쎄.... 내 생각으론 그건 크게 두 가지 경우가 있어. 첫째는 그 사람에 대한 감정을 스스로 조절하기 힘든 경우야. 이를 테면 같은 회사에 다니거나 어떤 인연 때문에 계속 만나야 한다거나 그게 아니면 그 사람을 내 의지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잊어야 하는... 사랑하는 사람이 뜻하지 않게 죽는 경우가 있을 거야.
하지만 이런 경우도 감정을 줄이는 게 훨씬 힘들고 가슴이 더 아프겠지만 사람에 따라 개인차가 있을 뿐 대부분 극복이 가능해. 하긴 항상 예외는 있는 법이지만...
둘째는 가장 이해하기 힘들고 내 스스로도 정의하기가 만만치 않지만 굳이 표현하자면 사랑에 빠진 사람 자신만이 알 수 있는데... 그건 스스로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못해본 경우야. 미련이 남게 돼서 그 사람에게 외면당한 현실을 인정할 수, 아니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황이 오게 되면...
내면의 문제라 정신적으로 아주 힘들어질 가능성이 있어. 누구에게나 생기는 일은 아냐. 다른 외부의 책임으로 돌려 버리면 간단할 수도 있는 일을 자신에게 돌리면서 가슴앓이를 하는 건데...
오히려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누가 보기에도 괜찮아 보이는, 그래서 어떤 이성에게도 거부당한 적이 별로 없는 사람이 그런 늪에 빠질 수가 있어. 혼자 힘으로는 헤쳐 나올 수가 없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걸 못해봐서 그런다고? 그게 무슨 말이야?”
“그건 나도 잘 몰라. 그 사람만이 알 수 있겠지... 그게 문제가 되는 경우는 뒤를 돌아보게 되기 때문이지만. 그 때 내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면... 그 날 그 사람과 함께 여행을 갔더라면... 뭐 이런 식으로...”
“그럼... 그 늪에서 빠져 나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그 이야기를 듣고 난 쓴 웃음을 지으며 황지연을 바라봤다.
“왜 웃어? 난 지금 진지한데... 내 얼굴 보면 웃음이 나와?”
“아니.. 내가 웃는 건 사랑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던 때부터 우려했던 게 현실이 되니 당황스러워서 그래. 니가 그 답을 나한테 물어 보면 어쩌나 하고 걱정을 하고 있었거든.
솔직히 말하면 그 방법은 나도 몰라. 하지만...
그냥 그런 경우에 대한 내 생각을 이야기 하자면 그것 역시 두 가지 정도로 이야기할 수 있는데
하나는 그 사람 스스로 그 늪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거부하는 경우. 그게 어찌됐든 그 아픔이 너무 크든 어쩌든 간에 그걸 선택하는 거지. 사랑이 언제나 내게 즐거움과 행복만을 주지는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이런 시간들 역시 사랑을 하면서 겪게 되는 과정일 거라고 믿는 거야.
이런 사람들은 그 힘들고 아픈 시간마저도 사랑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승화시키기 때문에 누가 아무리 뭐라고 하더라도 옆을 보지 않아. 이런 경우는 누가 옳고 그르다고 이야기 할 수 없는 성질이라 나 역시 함부로 평가할 수 없어.
또 하나는...“
그 말을 마치고 황지연을 바라보니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 자고 있나? 난 잠시 주변을 둘러보는 척하면서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그녀가 자고 있다면 혼자서 떠들어댈 필요는 없을 테니...
하지만 30초도 지나기 전에 그녀가 눈을 번쩍뜨며 말을 했다.
“또 하나는? 왜 이야길 자꾸 끊는 거야. 한번만 더 끊으면 나 집에 가버린다!”
“엉? 난 니가 자고 있는 줄 알았다구,..
음.. 그... 또 하나는 그 늪이란 것에서 빠져 나오는 것도 지금 그 사람의 입장에서 길이 보이지 않는다 뿐이지 결국, 그러니까 언젠가는 그 늪에서 나오게 되긴 하는데 그 방법이 혼자 힘으로 안될 수도 있고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는 경우.
앞에서 말한 여러 가지 이유가 겹치면서 혼자 힘으로 감정을 조절하기 힘들 정도의 상황인 경우가 많아. 그 늪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자살을 할 수도 있고 아니면 우울증 등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심해 의사나 전문가의 도움을 필요로 할 수도... 왜냐하면 이런 경우는 나름대로 열심히 그 곳을 벗어나기 위해 움직이지만 다시 제자리로 와 있는 상황이 계속되거든...
산에서 안개를 만나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한참을 같은 방향으로 전진하지만 나중에 보면 원위치로 되돌아오는 것과 같아. 조난 용어로 랑반데룽, 환상방황이라고 할거야.“
“그럼 결국 해결책은 병원에 간다거나 시간이 흘러가기를 기다릴 수 밖에 없단 말이야?”
“그렇게 쉽게 빠져나올 수 있다면 그 걸 늪이라고 불렀겠어? 하지만 니 아버지는 네가 어렸을 때부터 이런 상황을 대비하신 것 같은데...”
“뭐? 아빠가... 그게 무슨.. 아저씨는 우리 아빠 잘 모르잖아.”
“물론 모르지... 하지만 부자집 딸네미를 국산 승용차에 태워 인천에 있는 평범한 중,고등학교에 보내시면서 인생의 이면에 있는 걸 보기를 원하셨다면서? 그런 아버지라면...
살다보면 니가 뜻하지 않는 문제에 부딪칠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셨을 거야. 인생을 살다 보면 좋은 면만 보고 살수도 없고 언제나 누군가의 사랑을 받을 수도 없거든. 실패할 수도 있다는 것을 뜻하지 않은 곳으로 흘러갈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으셨겠지.
얼굴이 예쁘고 몸매도 좋아. 머리까지 좋아서 성적도 우수.... 집에 돈도 많아서 보는 남자들마다 그 여자의 사랑을 얻고 싶어서 안달할 정도로 재원으로 큰다면 한 순간 함정에 빠질 수도 있다는 것을 경계하고 계셨을 거야. 그런 딸은 인생의 어두운 면, 반대쪽 면으로 가볼 수 있는 가능성이 별로 없으니...
그 반대쪽 면에는 실패에 대한 경험,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이 있다는 것에 대한 아픔, 가난, 하루를 살기 위해 자신의 성을 팔아야 하는 창녀, 실연, 돈이 없어서 타국의 농부에게 시집을 가야하는 베트남의 미녀 대학생. 인기의 정점에서 자신의 성행위가 담긴 동영상이 유출되면서 나락에 떨어진 여가수 등이 있겠지.
니 아버지가 바랬던 건 이런 타인의 삶에 대한 이해와 어쩌면 그런 삶들이 자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유연함 같은 것 이었을거야.“
황지연이 눈이 빨개지더니 이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윽...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아저씨... 나 결혼하고 나서 아빠에게 항상 미안했어. 그래서 집에도 잘 안가고 전화하셔도 안 받고 그랬는데 그리고 내가 전화드린 것도 몇 달 됐는데... 나 정말 나쁜 년이지? 그렇지?”
“...”
니가 나쁜 년이면 이 땅위에 나쁜 딸 아닌 여자가 얼마나 되겠냐? 그렇게 곱게 자라 공부 까지 잘하고 좋은 직장까지 들어가서 스스로 열심히 살고 있는데... 이 말을 해주려다 말았다.
외려 내가 미친 놈이다. 되지도 않는 개똥철학 늘어놓은 것 때문에 황지연이 제 정신으로 돌아가면 난 김유미한테 가야 하나? 하여간 입이 방정이라니까...
“나 우울증 치료를 받는 몇 달동안 의사들이 해준 말은 무슨 뜬구름 잡는 이야기 같았거든. 적당한 운동을 하고 마음을 편안히 가지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게 좋다. 무거운 짐이 있다면 집착하지 말고 내려놓아라. 귀가 닳도록 들었어. 지겹기만 하더라고...
그런데 아저씨 이야기를 듣고 나니까 뭐랄까... 너무 현실적인 부분이 귀에 거슬리기도 하지만 마음에 와 닿아. 내가 뭘 해야 할지 감이 좀 잡혀.“
헉! 무슨 감? 나 별 이야기 안했는데...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안다더니... 이런 말도 안되는... 말해준 난 니가 뭘 해야 되는지 잘 모르겠는데...
“엉? 그게 무슨 뜻이야?”
“그러니까 아저씨 말은 이런 거잖아. 내가 지금 늪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건 다른 누군가의 삶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을 나에게는 일어날 리가 없다는 편견같은 것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라는...
그리고 그런 편견에 빠지는 건 나라는 여자가 세상의 객관적인 기준을 충족해서 다른 이성에게 거부당한 적이 없고 그래서 이성을 만나다보면, 결혼을 하고 보면 일어날 수 있는 반대쪽 면은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고... 맞아?“
난 입이 딱 벌어졌다. 애는 뭐냐? 지금 내가 말해준 게 중학교 역사 수업에 나오는 고구려 시대 장수왕의 업적처럼 딱 답이 나오는 게 아닌데... 뭐가 이렇게 이해가 빨라?
“놀란 눈치네? 왜? 너무 쉽게 이야기해서 그래? 나도 정리는 못하고 있었지만 나름 고민을 많이 하고 있었거든. 그런 점에서 아저씨 만난 게 너무 다행인 것 같아.“
“내가 다른 사람보다 감정 조절을 잘해서, 아니면 여자를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해서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건 아냐. 나 역시 지금 이 나이에도 좋아하는 감정이 너무 커져서 그 사람 생각만 할 때도 있고 때론 세상의 기준으로 해서는 안될 무언가를 할 때도 있으니까...
그냥 그건 이야기일 뿐이야. 가끔 내가 사랑에 빠졌다가 어쩔 수 없이 그 감정을 줄여야 할 때나 또 내가 가장 약한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는 부분에 있어서 도움이 될 때가 있는 그런 이야기...
혹시 내가 어줍찮게 이런 이야기 했다고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건 아니지?... 불안한데...“
“아 술 깬다. 잠깐 나 한 잔 더 하고...”
그녀가 말을 돌리더니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황지연의 표정이 밝아진데다 하얀색 블라우스와 밑에 받쳐 입은 정장 형식의 치마가 너무 잘 어울리고 있어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서른을 갓 넘긴 이 청순해보이는 미녀와 내가 과연 얼마전에 모텔에서 발가벗고 몸을 섞던 사이라는 게 사실일까?
혹시 기억의 왜곡이나 얼마전 어떤 드라마에서 보았던 나도 모르는 어떤 집단의 세뇌일지도...
이런 방향은 내가 원했던 게 아닌 것 같은데... 잠시나마 나로 인해 위안을 받던 황지연은 다시 이유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하는 말들이 그놈과 자신의 사이에서 있었던 이야기로 들려서 민감해 진 것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더 이상 도망가기는 힘들어진 듯...
“음... 설명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는 그게 내가 결정짓거나 한정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라서 그래. 쉬운 부분부터 말하면 그냥 너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움직이는 것과 다를 바 없어. 그렇게 커진 마음을 상대가 받아주지 않는다면... 그걸 나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냥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로 바라보면 단순해지는데 잊든지 아니면 너무 커진 내 마음을 줄이든지... 둘 중의 하나겠지.“
“...”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약간 숙인 채 내 이야기를 듣고 있었고 나는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건 말이 둘 중의 하나지 같은 이야기나 다름없어. 사랑하는 감정이 기억상실증 같은 것에 걸리지 않는 한 쉽게 잊혀질리 없으니 나머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감정들을 줄이기 위해 움직이는데...
주위에서 흔히 볼수 있는 일들이지. 어차피 감정이라는 것도 생각을 하면서 따라 붙는 부산물 같은 거니까 그 사람에 대한 생각을 적게 하는 방향으로 가는 거야.
누군가를 잊기 위해 일에 미친다거나 새로운 취미를 배운다거나 아니면 다른 누군가를 만나다보면 결국 그런 마음들이 조금씩 줄어들 것이고 안보면 멀어지는 게 당연한데다 세월이 또 잊게 해주니까 중간과정에서 미치게 힘든 과정이 있을지 몰라도 결국 회복하게 될 거야.
그런데... 그런 과정이 있었음에도 상처가 회복되지 않는다면... 그러니까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면 아니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 감정이 전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커진다면...
내가 설명하기 힘들다고 이야기했던 부분이 이런 상황인데...“
난 소주 한 잔을 입에 털어 넣으면서 그녀를 살폈다. 그녀는 미동도 없이 아니 눈 한번 깜박거리지 않고 있다가 잠시 후에 고개를 들어 미간을 약간 찌푸리며 나를 바라봤는데 그 눈빛은 이야기를 재촉하는 듯 했다.
“더 해? 이런 이야기 잠 오지 않아? 다른 이야기 할까?”
“아니... 계속 해봐. 들어야 겠어.”
“음... 글쎄.... 내 생각으론 그건 크게 두 가지 경우가 있어. 첫째는 그 사람에 대한 감정을 스스로 조절하기 힘든 경우야. 이를 테면 같은 회사에 다니거나 어떤 인연 때문에 계속 만나야 한다거나 그게 아니면 그 사람을 내 의지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잊어야 하는... 사랑하는 사람이 뜻하지 않게 죽는 경우가 있을 거야.
하지만 이런 경우도 감정을 줄이는 게 훨씬 힘들고 가슴이 더 아프겠지만 사람에 따라 개인차가 있을 뿐 대부분 극복이 가능해. 하긴 항상 예외는 있는 법이지만...
둘째는 가장 이해하기 힘들고 내 스스로도 정의하기가 만만치 않지만 굳이 표현하자면 사랑에 빠진 사람 자신만이 알 수 있는데... 그건 스스로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못해본 경우야. 미련이 남게 돼서 그 사람에게 외면당한 현실을 인정할 수, 아니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황이 오게 되면...
내면의 문제라 정신적으로 아주 힘들어질 가능성이 있어. 누구에게나 생기는 일은 아냐. 다른 외부의 책임으로 돌려 버리면 간단할 수도 있는 일을 자신에게 돌리면서 가슴앓이를 하는 건데...
오히려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누가 보기에도 괜찮아 보이는, 그래서 어떤 이성에게도 거부당한 적이 별로 없는 사람이 그런 늪에 빠질 수가 있어. 혼자 힘으로는 헤쳐 나올 수가 없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걸 못해봐서 그런다고? 그게 무슨 말이야?”
“그건 나도 잘 몰라. 그 사람만이 알 수 있겠지... 그게 문제가 되는 경우는 뒤를 돌아보게 되기 때문이지만. 그 때 내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면... 그 날 그 사람과 함께 여행을 갔더라면... 뭐 이런 식으로...”
“그럼... 그 늪에서 빠져 나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그 이야기를 듣고 난 쓴 웃음을 지으며 황지연을 바라봤다.
“왜 웃어? 난 지금 진지한데... 내 얼굴 보면 웃음이 나와?”
“아니.. 내가 웃는 건 사랑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던 때부터 우려했던 게 현실이 되니 당황스러워서 그래. 니가 그 답을 나한테 물어 보면 어쩌나 하고 걱정을 하고 있었거든.
솔직히 말하면 그 방법은 나도 몰라. 하지만...
그냥 그런 경우에 대한 내 생각을 이야기 하자면 그것 역시 두 가지 정도로 이야기할 수 있는데
하나는 그 사람 스스로 그 늪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거부하는 경우. 그게 어찌됐든 그 아픔이 너무 크든 어쩌든 간에 그걸 선택하는 거지. 사랑이 언제나 내게 즐거움과 행복만을 주지는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이런 시간들 역시 사랑을 하면서 겪게 되는 과정일 거라고 믿는 거야.
이런 사람들은 그 힘들고 아픈 시간마저도 사랑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승화시키기 때문에 누가 아무리 뭐라고 하더라도 옆을 보지 않아. 이런 경우는 누가 옳고 그르다고 이야기 할 수 없는 성질이라 나 역시 함부로 평가할 수 없어.
또 하나는...“
그 말을 마치고 황지연을 바라보니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 자고 있나? 난 잠시 주변을 둘러보는 척하면서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그녀가 자고 있다면 혼자서 떠들어댈 필요는 없을 테니...
하지만 30초도 지나기 전에 그녀가 눈을 번쩍뜨며 말을 했다.
“또 하나는? 왜 이야길 자꾸 끊는 거야. 한번만 더 끊으면 나 집에 가버린다!”
“엉? 난 니가 자고 있는 줄 알았다구,..
음.. 그... 또 하나는 그 늪이란 것에서 빠져 나오는 것도 지금 그 사람의 입장에서 길이 보이지 않는다 뿐이지 결국, 그러니까 언젠가는 그 늪에서 나오게 되긴 하는데 그 방법이 혼자 힘으로 안될 수도 있고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는 경우.
앞에서 말한 여러 가지 이유가 겹치면서 혼자 힘으로 감정을 조절하기 힘들 정도의 상황인 경우가 많아. 그 늪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자살을 할 수도 있고 아니면 우울증 등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심해 의사나 전문가의 도움을 필요로 할 수도... 왜냐하면 이런 경우는 나름대로 열심히 그 곳을 벗어나기 위해 움직이지만 다시 제자리로 와 있는 상황이 계속되거든...
산에서 안개를 만나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한참을 같은 방향으로 전진하지만 나중에 보면 원위치로 되돌아오는 것과 같아. 조난 용어로 랑반데룽, 환상방황이라고 할거야.“
“그럼 결국 해결책은 병원에 간다거나 시간이 흘러가기를 기다릴 수 밖에 없단 말이야?”
“그렇게 쉽게 빠져나올 수 있다면 그 걸 늪이라고 불렀겠어? 하지만 니 아버지는 네가 어렸을 때부터 이런 상황을 대비하신 것 같은데...”
“뭐? 아빠가... 그게 무슨.. 아저씨는 우리 아빠 잘 모르잖아.”
“물론 모르지... 하지만 부자집 딸네미를 국산 승용차에 태워 인천에 있는 평범한 중,고등학교에 보내시면서 인생의 이면에 있는 걸 보기를 원하셨다면서? 그런 아버지라면...
살다보면 니가 뜻하지 않는 문제에 부딪칠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셨을 거야. 인생을 살다 보면 좋은 면만 보고 살수도 없고 언제나 누군가의 사랑을 받을 수도 없거든. 실패할 수도 있다는 것을 뜻하지 않은 곳으로 흘러갈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으셨겠지.
얼굴이 예쁘고 몸매도 좋아. 머리까지 좋아서 성적도 우수.... 집에 돈도 많아서 보는 남자들마다 그 여자의 사랑을 얻고 싶어서 안달할 정도로 재원으로 큰다면 한 순간 함정에 빠질 수도 있다는 것을 경계하고 계셨을 거야. 그런 딸은 인생의 어두운 면, 반대쪽 면으로 가볼 수 있는 가능성이 별로 없으니...
그 반대쪽 면에는 실패에 대한 경험,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이 있다는 것에 대한 아픔, 가난, 하루를 살기 위해 자신의 성을 팔아야 하는 창녀, 실연, 돈이 없어서 타국의 농부에게 시집을 가야하는 베트남의 미녀 대학생. 인기의 정점에서 자신의 성행위가 담긴 동영상이 유출되면서 나락에 떨어진 여가수 등이 있겠지.
니 아버지가 바랬던 건 이런 타인의 삶에 대한 이해와 어쩌면 그런 삶들이 자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유연함 같은 것 이었을거야.“
황지연이 눈이 빨개지더니 이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윽...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아저씨... 나 결혼하고 나서 아빠에게 항상 미안했어. 그래서 집에도 잘 안가고 전화하셔도 안 받고 그랬는데 그리고 내가 전화드린 것도 몇 달 됐는데... 나 정말 나쁜 년이지? 그렇지?”
“...”
니가 나쁜 년이면 이 땅위에 나쁜 딸 아닌 여자가 얼마나 되겠냐? 그렇게 곱게 자라 공부 까지 잘하고 좋은 직장까지 들어가서 스스로 열심히 살고 있는데... 이 말을 해주려다 말았다.
외려 내가 미친 놈이다. 되지도 않는 개똥철학 늘어놓은 것 때문에 황지연이 제 정신으로 돌아가면 난 김유미한테 가야 하나? 하여간 입이 방정이라니까...
“나 우울증 치료를 받는 몇 달동안 의사들이 해준 말은 무슨 뜬구름 잡는 이야기 같았거든. 적당한 운동을 하고 마음을 편안히 가지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게 좋다. 무거운 짐이 있다면 집착하지 말고 내려놓아라. 귀가 닳도록 들었어. 지겹기만 하더라고...
그런데 아저씨 이야기를 듣고 나니까 뭐랄까... 너무 현실적인 부분이 귀에 거슬리기도 하지만 마음에 와 닿아. 내가 뭘 해야 할지 감이 좀 잡혀.“
헉! 무슨 감? 나 별 이야기 안했는데...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안다더니... 이런 말도 안되는... 말해준 난 니가 뭘 해야 되는지 잘 모르겠는데...
“엉? 그게 무슨 뜻이야?”
“그러니까 아저씨 말은 이런 거잖아. 내가 지금 늪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건 다른 누군가의 삶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을 나에게는 일어날 리가 없다는 편견같은 것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라는...
그리고 그런 편견에 빠지는 건 나라는 여자가 세상의 객관적인 기준을 충족해서 다른 이성에게 거부당한 적이 없고 그래서 이성을 만나다보면, 결혼을 하고 보면 일어날 수 있는 반대쪽 면은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고... 맞아?“
난 입이 딱 벌어졌다. 애는 뭐냐? 지금 내가 말해준 게 중학교 역사 수업에 나오는 고구려 시대 장수왕의 업적처럼 딱 답이 나오는 게 아닌데... 뭐가 이렇게 이해가 빨라?
“놀란 눈치네? 왜? 너무 쉽게 이야기해서 그래? 나도 정리는 못하고 있었지만 나름 고민을 많이 하고 있었거든. 그런 점에서 아저씨 만난 게 너무 다행인 것 같아.“
“내가 다른 사람보다 감정 조절을 잘해서, 아니면 여자를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해서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건 아냐. 나 역시 지금 이 나이에도 좋아하는 감정이 너무 커져서 그 사람 생각만 할 때도 있고 때론 세상의 기준으로 해서는 안될 무언가를 할 때도 있으니까...
그냥 그건 이야기일 뿐이야. 가끔 내가 사랑에 빠졌다가 어쩔 수 없이 그 감정을 줄여야 할 때나 또 내가 가장 약한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는 부분에 있어서 도움이 될 때가 있는 그런 이야기...
혹시 내가 어줍찮게 이런 이야기 했다고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건 아니지?... 불안한데...“
“아 술 깬다. 잠깐 나 한 잔 더 하고...”
그녀가 말을 돌리더니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황지연의 표정이 밝아진데다 하얀색 블라우스와 밑에 받쳐 입은 정장 형식의 치마가 너무 잘 어울리고 있어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서른을 갓 넘긴 이 청순해보이는 미녀와 내가 과연 얼마전에 모텔에서 발가벗고 몸을 섞던 사이라는 게 사실일까?
혹시 기억의 왜곡이나 얼마전 어떤 드라마에서 보았던 나도 모르는 어떤 집단의 세뇌일지도...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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