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의 시간이 흘렀고 황지연이 그대로 일어나서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녀의 걸음걸이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는데 방안에 불이 꺼져 있던 터라 문을 살짝 열어둔 채 샤워를 했다. 그리고는 수건으로 몸을 닦으며 화장실에서 나와 알몸으로 내 옆에 다시 누웠다.
정말 내가 편안한 건지 의식적으로 편하게 행동하는 건지 모르지만 황지연의 움직임은 너무 자연스러웠다. 속옷 하나 들지 않고 샤워를 하러 가는 것도.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속도도. 내 시선이 불편했다면 어떤 식으로든 그게 드러났을 것 같은데...
내가 일어나서 샤워를 하고 와 그녀 곁에 눕자 황지연이 이야기를 건넨다.
“회사에서 하는 일이 뭐예요? 어떤 업무를 하죠?”
“생산라인을 관리하는 부서야. 라인마다 팀장이 있는 데 주로 팀장들과 미팅을 많이 하고 가끔은 전체적인 교육도 하면서 품질이나 생산성이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업무...”
“전자부품회사라고 했죠? 남자들이 많이 근무하나요?”
“남자들보다는 여자가 더 많아. 생산라인은 아줌마들이 대부분인데...”
“아줌마들?... 나이대가 어떻게 되는 데요?”
“20대 중반부터 50대 초반까지 다양한데... 주로 30~40대...”
“호호... 재미있겠네요. 여자들을 관리하는 업무를 하시다니... 썸씽 같은 건 없었어요?”
“응?.. 썸씽?.. 그런 거 없어. 라인에서 일하는 분들한테는 잘 웃지도 못해. 재미는 무슨...”
“왜요? 인기가 좋으시나보네.”
“인기가 좋은게 아니라 아무래도 여자들이 많다보니 누군가에게 관심을 보이거나 특별히 잘해주는 일들이 있으면 바로 구설수에 올라. 한 달에 한번 정도 부서별로 회식을 하는 데 관리팀이라 라인별 팀 회식에 초대받게 될 때가 있어. 그 때가 정말 죽을 맛이야. 회식하다 술을 과하게 드신 아줌마들이 노래방 같은 곳에서 안겨올 때가 있거든. 처음엔 뭣 모르고 그냥 같이 취해 얼싸덜싸 했는데...”
“얼싸덜싸? 그게 뭐예요?”
“별거 아냐. 그냥 블루스 같은 거 추고 그랬다는 거지. 근데 다음 날 출근해서 라인 돌다보면 분위기가 이상하더라고. 나중에 들어보면 누구랑 누가 그렇고 그런 관계라는 말까지 돌고... 그런 일 한 두 번 겪고 난 후 부터는 아예 회사에서조차 업무적인 이야기 외에는 아줌마들하고 말도 잘 안 섞어. 그냥 무표정에 무뚝뚝... 물론 우리 팀 직원들 하고 있을 때는 농담도 하고 그러지만...”
“그렇게까지 할 필요 있어요? 그냥 회식이나 사적인 자리에서만 조심하면 되지?”
“음...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는데 회사에서 직급이 오르게 되니까 저절로 거리를 유지하게 되더라고. 그게 꼭... 내가 높아져서 그런건 아니구... 라인 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내 말이 먹히게 하려는 차원에서... 그게 그렇잖아. 생산성 향상, 불량률, 품질 같은 거 당연한 이야기인데 너무 가까운 사람이 이야기하면 잔소리 같아서 효과가 없는 것 같고 할 수 없이 그 쪽 사람들과 좀 거리를 둘 수 밖에... 주로 아줌마들이니 여성들과 친화력 있는 관계를 유지해서 관리팀 쪽의 이야기를 듣게 하는 것도 방법인 것 같긴 한데 그 방법은 나랑 안 맞는 것 같아서...”
“그래서 무표정에 무뚝뚝으로 일관하신다? 이제 아저씨를 좀 이해할 것도 같네요.”
황지연의 음성이 조금 차갑게 들려왔다.
“뭘?”
“좀 이상했어요. 내가 다른 남자를 많이 경험한 건 아니지만 남녀 사이에 몸을 섞었다면 무언가를 주장할 것 같은 데... 아저씨는 그런 게 없는 것 같아서...“
“그게 무슨 말이야?”
“왜 그런 거 있잖아요? 넌 이제 내 여자다. 그게 아니면 너하고 난 친한 사이다. 그러니 이 정도는 요구할 수 있다. 아니면... 너하고 난 이제 가까워졌으니 어느 정도는 함부로 할 수 있다. 그런데... 첨엔 아저씨가 유부남이라 그 점 때문에 약간 물러선다고 생각도 해보고 그러다가 내가 너무 괜찮은 여자니까 놓치기 싫어서 함부로 안할 거라고 생각도 해봤는데...”
알몸인 채로 내 쪽으로 살짝 몸을 돌리고 이야기 하던 황지연이 갑자기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말을 이어갔다.
“그 것도 아닌 것 같아요. 아저씬 항상 그 자리예요. 그게 좀 웃기지 않아요? 그건 어떻게 보면 짝사랑하는 이성을 애타게 그리워하면서 바라만 보다가 결국 이루어지지 않을 때, 그러니까 가까이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사이일 때 그런 표현이 적당한 것 아닌가요? 아저씬 왜 항상 그 자리에 있죠? 날 가졌잖아요?”
난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마땅한 말을 찾지 못해 고민했다. 지금 나한테 투정부리는 건가? 그게 니가 원하는 거 아니었어? 그럼 엘리트 경찰에 부잣집 딸내미한테 니가 나하고 잤으니 앞으로 계속 대주지 않으면 온 사방에 소문내고 다니겠어라고 말할 줄 알았어?
황지연은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 하더니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했나 보네요. 아저씬 아직도 사랑하는 사이는 원하지 않지만 여자를 안고 싶었던 10년 전과 달라진 게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들었어요. 처음엔 그게 마음에 들었는데... 갑자기 억울한 생각이 드는 거있죠. 지금 저와 결혼을 한 사람, 제 남편도 날 떠났어요. 그런데 아저씨도 그냥 제 육체만 원하는 거라면 전 사랑 받아선 안되는 사람... 아니 사랑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건가요?”
이런 게 우울증 증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쳐가는 감정들을 잡아 안 좋게 해석하고 그걸 자꾸 되뇌이면서 미로 속에 빠져드는... 아까는 안전한 날이예요 하더니 이제는 자신의 육체만 원하는 거 아니냐고 따진다. 뭐냐? 이걸 어떻게...넘어가지?
다시 생각해보면 그녀가 무리수를 둔 것이다. 이유성에 대한 몇 년간의 감정을 우지끈 끊는다고 생각하고 나니 감당이 안 되어 감정 컨트롤이 안되는 듯... 하긴 나하고 이유성이 비교가 되냐? 1회용은 가능할지 몰라도 영구적인 대체는 다른 남자를 만나야지.
“언젠가 나와 결혼을 원하던 스무 살의 다방 아가씨가 내가 냉정히 대하자 죽음을 선택했다고 이야기 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실은... 솔직히 말하면 그때나 지금이나 나라는 사람 그렇게 변하지 않았어. 다른 사람의 감정을 잘 이해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구. 하지만 나로 인해 누군가가 세상을 떠난 후에 변한 게 있다면... 아니 이런 말 하는 게 너한테 부담이 될까봐 말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
난 느리고 또박또박한 말투로 다음 말을 이어갔다.
“넌 내가 가까이 갈 수 있는 사람은 아니야. 그건 뭐랄까 너와 자고 널 만지고 안아주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이고 그냥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그리고 10년 전과 내가 달라진 건 누군가에게 다가가서 내가 그 사람의 연인인 듯, 또 그런 사이인 것처럼 굴지 않아...그때 내가 가장 후회했던 건 그런 거였어. 왜 그 아이에게 필요 이상으로 다가갔을까?
또 어느 정도 거리를 둔 후에는 갑작스럽게 떠나거나 멀어지는 걸 원하지도 않아. 니가 이해하긴 힘들지 몰라도 그건 내 선택이고 언젠가 니가 날 거부하고 싶을 때 스토커처럼 가까이서 널 괴롭히는 일도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냥 이렇게 생각해줬으면 좋겠어. 너라는 별이 살아가다보면 위성 하나쯤 거느리는 거라고...”
“위성?”
“응. 니 매력 때문에 주위를 맴돌게 되는... ”
“근데 위성은 멀어지지 않을지는 몰라도 가까이 올수도 없는 거 아니에요? 지금 나랑 이렇게 같이 있는 건 뭐래요?”
“그게... 널 안고 있고 말도 편하게 하지만 내 마음은 널 처음 만났을 때와 별로 달라진 건 없어. 그냥 실오라기처럼 이어진 끈을 조심스럽게 잡고 있을 뿐이야. 그걸 니가 끊어버리지 않길 바라면서...”
황지연이 시선을 내 얼굴에서 거두고 침실 유리창 너머 밤하늘을 바라봤다. 화장실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에 비친 적당히 솟아오른 가슴과 날씬한 다리 사이의 계곡이 시선에 들어왔고 그녀의 나신을 바라보고 있기가 좀 멋쩍어서 난 누운 채로 눈을 감았다. 황지연의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고 그녀의 갑작스러운 질문들 속에서 긴장했던 마음이 풀어지자 갑자기 잠이 쏟아졌다.
그때 내 옆으로 그녀가 미끄러져 들어와 팔을 베고 몸을 옆으로 돌렸고 봉긋한 젖가슴과 허벅지 주변 맨살들의 감촉이 몸으로 전해졌다.
“오늘 집에 안 들어가도 되는 거예요? 되게 여유 있네요?”
“일단 핑계는 대놨어. 회사 작업 때문에 야근을 한다고. 요새 수주가 많아서 공휴일에도 회사가 24시간 라인을 풀가동하고 있다고 해서 별 일은 없을 거야. 그렇지 않더라도 널 혼자 놔두고 가기는 좀 그래.”
“왜요? 갑자기 아이 취급 하는 거예요?”
“아니 그게 아니라 오늘 감정 기복이 좀 심하고... 평상시 같지 않아 보여서.”
“하여간 곰처럼 생겨 먹은 사람이 눈치는 엄청 빠르다니까... 아저씨하고 무슨 말 하다 시간이 지나고 되돌아보면 어떤 기분 드는지 알아요?”
“엉? 무슨 기분이 드는데...”
“멍해져요. 맴돌던 게 다 사라지는 느낌.”
“니 말이 더 재밌는 거 알아? 내가 뭘 어쨌다구...”
“그런데 그게 싫지는 않아요. 그냥 먼지 같은 것들이 가라앉아서 맑아진 기분도 들고... 호호.”
“동이 틀 때쯤 일어나서 가야할 것 같아. 혹시 자고 있으면 그냥 조용히 나갈게.”
“뭐예요? 새벽에 일어나서 그냥 간단 말이에요? 내가 옆에서 다 벗고 자고 있는데... 그랬다가는 다시는 못 볼 줄 알아요!”
“아...안...돼... 그런 말 하지마. 나 다시 흥분해서 바로 설지도 몰라.”
“그럼. 잘 됐네... 그러잖아도 몸이 덜 풀려서 잠이 안올 것 같은데...”
아무도 없는 그녀의 집에서 단둘이 침실에 누워 서로 껴안은채로 잠이 들었고 목이 말라 잠이 깼을 때는 새벽녘이었다. 살며시 자리에서 일어나 황지연에게 얇은 이불을 덮어준 후에 주방으로 나가 정수기 물로 갈증을 채우고 거실 쇼파에 앉아 재떨이 옆에 놓아둔 담배를 꺼내 물었다.
저녁을 먹으며 사랑에 대해 이야기 나누던 그녀, 신사복 매장을 거쳐 자신의 집으로 날 데려가기로 마음 먹은 그녀, 섹스할 때 내게 안전한 날이라고 말하던 그녀, 그리고 씻고 나서 이야기를 나누다 갑작스럽게 나에게 자신의 몸만 탐하는 거 아니냐고 따지던 그녀... 어느 장단에 맞출 수도 없을 만큼 변화가 심하다.
아빠와 통화한 후 그동안 그렇게 자신을 초라하게 만들었던 이유성을 보내기로 마음을 먹었고 그러기 위해 나에게 정장을 사주고 이유성과 자신의 신혼집으로 데려와서 그와 사랑을 나누던 침대로 날 끌어들였다. 명목상으로 부부관계로 남아 있는 것조차 정리를 결심한 듯 한데...
그 결심은 어떻게보면 황지연에게 이유성에 대한 모든 희망을 버리게 만드는 것이고 더할나위 없는 상실감을 줄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실망감이 섹스가 끝난 후 불현 듯 내게 쏟아져 나왔다. 겨우 넘기긴 했는데...
그 결심이 나로 인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고 황지연이 이혼을 실행에 옮길 수 있을 지 역시 미지수... 결심만 한 것으로도 마음이 왔다갔다 하는데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을 때까지, 그리고 이혼한 이후 한동안... 아니면 상당히 오랜 시간동안 그녀가 내게 의지하려 한다면 그걸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그녀는 자신의 삶을 내게 묻고 있었다. 그걸 지켜봐주고 내 시각을 이야기 해주기를... 게임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지만 이제 나도 외길 수순이 아닌가 싶었다. 이유성의 마공에 당한 황지연의 내상이 회복될 때까지 곁에 있어주는...
정말 내가 편안한 건지 의식적으로 편하게 행동하는 건지 모르지만 황지연의 움직임은 너무 자연스러웠다. 속옷 하나 들지 않고 샤워를 하러 가는 것도.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속도도. 내 시선이 불편했다면 어떤 식으로든 그게 드러났을 것 같은데...
내가 일어나서 샤워를 하고 와 그녀 곁에 눕자 황지연이 이야기를 건넨다.
“회사에서 하는 일이 뭐예요? 어떤 업무를 하죠?”
“생산라인을 관리하는 부서야. 라인마다 팀장이 있는 데 주로 팀장들과 미팅을 많이 하고 가끔은 전체적인 교육도 하면서 품질이나 생산성이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업무...”
“전자부품회사라고 했죠? 남자들이 많이 근무하나요?”
“남자들보다는 여자가 더 많아. 생산라인은 아줌마들이 대부분인데...”
“아줌마들?... 나이대가 어떻게 되는 데요?”
“20대 중반부터 50대 초반까지 다양한데... 주로 30~40대...”
“호호... 재미있겠네요. 여자들을 관리하는 업무를 하시다니... 썸씽 같은 건 없었어요?”
“응?.. 썸씽?.. 그런 거 없어. 라인에서 일하는 분들한테는 잘 웃지도 못해. 재미는 무슨...”
“왜요? 인기가 좋으시나보네.”
“인기가 좋은게 아니라 아무래도 여자들이 많다보니 누군가에게 관심을 보이거나 특별히 잘해주는 일들이 있으면 바로 구설수에 올라. 한 달에 한번 정도 부서별로 회식을 하는 데 관리팀이라 라인별 팀 회식에 초대받게 될 때가 있어. 그 때가 정말 죽을 맛이야. 회식하다 술을 과하게 드신 아줌마들이 노래방 같은 곳에서 안겨올 때가 있거든. 처음엔 뭣 모르고 그냥 같이 취해 얼싸덜싸 했는데...”
“얼싸덜싸? 그게 뭐예요?”
“별거 아냐. 그냥 블루스 같은 거 추고 그랬다는 거지. 근데 다음 날 출근해서 라인 돌다보면 분위기가 이상하더라고. 나중에 들어보면 누구랑 누가 그렇고 그런 관계라는 말까지 돌고... 그런 일 한 두 번 겪고 난 후 부터는 아예 회사에서조차 업무적인 이야기 외에는 아줌마들하고 말도 잘 안 섞어. 그냥 무표정에 무뚝뚝... 물론 우리 팀 직원들 하고 있을 때는 농담도 하고 그러지만...”
“그렇게까지 할 필요 있어요? 그냥 회식이나 사적인 자리에서만 조심하면 되지?”
“음...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는데 회사에서 직급이 오르게 되니까 저절로 거리를 유지하게 되더라고. 그게 꼭... 내가 높아져서 그런건 아니구... 라인 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내 말이 먹히게 하려는 차원에서... 그게 그렇잖아. 생산성 향상, 불량률, 품질 같은 거 당연한 이야기인데 너무 가까운 사람이 이야기하면 잔소리 같아서 효과가 없는 것 같고 할 수 없이 그 쪽 사람들과 좀 거리를 둘 수 밖에... 주로 아줌마들이니 여성들과 친화력 있는 관계를 유지해서 관리팀 쪽의 이야기를 듣게 하는 것도 방법인 것 같긴 한데 그 방법은 나랑 안 맞는 것 같아서...”
“그래서 무표정에 무뚝뚝으로 일관하신다? 이제 아저씨를 좀 이해할 것도 같네요.”
황지연의 음성이 조금 차갑게 들려왔다.
“뭘?”
“좀 이상했어요. 내가 다른 남자를 많이 경험한 건 아니지만 남녀 사이에 몸을 섞었다면 무언가를 주장할 것 같은 데... 아저씨는 그런 게 없는 것 같아서...“
“그게 무슨 말이야?”
“왜 그런 거 있잖아요? 넌 이제 내 여자다. 그게 아니면 너하고 난 친한 사이다. 그러니 이 정도는 요구할 수 있다. 아니면... 너하고 난 이제 가까워졌으니 어느 정도는 함부로 할 수 있다. 그런데... 첨엔 아저씨가 유부남이라 그 점 때문에 약간 물러선다고 생각도 해보고 그러다가 내가 너무 괜찮은 여자니까 놓치기 싫어서 함부로 안할 거라고 생각도 해봤는데...”
알몸인 채로 내 쪽으로 살짝 몸을 돌리고 이야기 하던 황지연이 갑자기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말을 이어갔다.
“그 것도 아닌 것 같아요. 아저씬 항상 그 자리예요. 그게 좀 웃기지 않아요? 그건 어떻게 보면 짝사랑하는 이성을 애타게 그리워하면서 바라만 보다가 결국 이루어지지 않을 때, 그러니까 가까이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사이일 때 그런 표현이 적당한 것 아닌가요? 아저씬 왜 항상 그 자리에 있죠? 날 가졌잖아요?”
난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마땅한 말을 찾지 못해 고민했다. 지금 나한테 투정부리는 건가? 그게 니가 원하는 거 아니었어? 그럼 엘리트 경찰에 부잣집 딸내미한테 니가 나하고 잤으니 앞으로 계속 대주지 않으면 온 사방에 소문내고 다니겠어라고 말할 줄 알았어?
황지연은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 하더니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했나 보네요. 아저씬 아직도 사랑하는 사이는 원하지 않지만 여자를 안고 싶었던 10년 전과 달라진 게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들었어요. 처음엔 그게 마음에 들었는데... 갑자기 억울한 생각이 드는 거있죠. 지금 저와 결혼을 한 사람, 제 남편도 날 떠났어요. 그런데 아저씨도 그냥 제 육체만 원하는 거라면 전 사랑 받아선 안되는 사람... 아니 사랑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건가요?”
이런 게 우울증 증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쳐가는 감정들을 잡아 안 좋게 해석하고 그걸 자꾸 되뇌이면서 미로 속에 빠져드는... 아까는 안전한 날이예요 하더니 이제는 자신의 육체만 원하는 거 아니냐고 따진다. 뭐냐? 이걸 어떻게...넘어가지?
다시 생각해보면 그녀가 무리수를 둔 것이다. 이유성에 대한 몇 년간의 감정을 우지끈 끊는다고 생각하고 나니 감당이 안 되어 감정 컨트롤이 안되는 듯... 하긴 나하고 이유성이 비교가 되냐? 1회용은 가능할지 몰라도 영구적인 대체는 다른 남자를 만나야지.
“언젠가 나와 결혼을 원하던 스무 살의 다방 아가씨가 내가 냉정히 대하자 죽음을 선택했다고 이야기 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실은... 솔직히 말하면 그때나 지금이나 나라는 사람 그렇게 변하지 않았어. 다른 사람의 감정을 잘 이해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구. 하지만 나로 인해 누군가가 세상을 떠난 후에 변한 게 있다면... 아니 이런 말 하는 게 너한테 부담이 될까봐 말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
난 느리고 또박또박한 말투로 다음 말을 이어갔다.
“넌 내가 가까이 갈 수 있는 사람은 아니야. 그건 뭐랄까 너와 자고 널 만지고 안아주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이고 그냥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그리고 10년 전과 내가 달라진 건 누군가에게 다가가서 내가 그 사람의 연인인 듯, 또 그런 사이인 것처럼 굴지 않아...그때 내가 가장 후회했던 건 그런 거였어. 왜 그 아이에게 필요 이상으로 다가갔을까?
또 어느 정도 거리를 둔 후에는 갑작스럽게 떠나거나 멀어지는 걸 원하지도 않아. 니가 이해하긴 힘들지 몰라도 그건 내 선택이고 언젠가 니가 날 거부하고 싶을 때 스토커처럼 가까이서 널 괴롭히는 일도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냥 이렇게 생각해줬으면 좋겠어. 너라는 별이 살아가다보면 위성 하나쯤 거느리는 거라고...”
“위성?”
“응. 니 매력 때문에 주위를 맴돌게 되는... ”
“근데 위성은 멀어지지 않을지는 몰라도 가까이 올수도 없는 거 아니에요? 지금 나랑 이렇게 같이 있는 건 뭐래요?”
“그게... 널 안고 있고 말도 편하게 하지만 내 마음은 널 처음 만났을 때와 별로 달라진 건 없어. 그냥 실오라기처럼 이어진 끈을 조심스럽게 잡고 있을 뿐이야. 그걸 니가 끊어버리지 않길 바라면서...”
황지연이 시선을 내 얼굴에서 거두고 침실 유리창 너머 밤하늘을 바라봤다. 화장실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에 비친 적당히 솟아오른 가슴과 날씬한 다리 사이의 계곡이 시선에 들어왔고 그녀의 나신을 바라보고 있기가 좀 멋쩍어서 난 누운 채로 눈을 감았다. 황지연의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고 그녀의 갑작스러운 질문들 속에서 긴장했던 마음이 풀어지자 갑자기 잠이 쏟아졌다.
그때 내 옆으로 그녀가 미끄러져 들어와 팔을 베고 몸을 옆으로 돌렸고 봉긋한 젖가슴과 허벅지 주변 맨살들의 감촉이 몸으로 전해졌다.
“오늘 집에 안 들어가도 되는 거예요? 되게 여유 있네요?”
“일단 핑계는 대놨어. 회사 작업 때문에 야근을 한다고. 요새 수주가 많아서 공휴일에도 회사가 24시간 라인을 풀가동하고 있다고 해서 별 일은 없을 거야. 그렇지 않더라도 널 혼자 놔두고 가기는 좀 그래.”
“왜요? 갑자기 아이 취급 하는 거예요?”
“아니 그게 아니라 오늘 감정 기복이 좀 심하고... 평상시 같지 않아 보여서.”
“하여간 곰처럼 생겨 먹은 사람이 눈치는 엄청 빠르다니까... 아저씨하고 무슨 말 하다 시간이 지나고 되돌아보면 어떤 기분 드는지 알아요?”
“엉? 무슨 기분이 드는데...”
“멍해져요. 맴돌던 게 다 사라지는 느낌.”
“니 말이 더 재밌는 거 알아? 내가 뭘 어쨌다구...”
“그런데 그게 싫지는 않아요. 그냥 먼지 같은 것들이 가라앉아서 맑아진 기분도 들고... 호호.”
“동이 틀 때쯤 일어나서 가야할 것 같아. 혹시 자고 있으면 그냥 조용히 나갈게.”
“뭐예요? 새벽에 일어나서 그냥 간단 말이에요? 내가 옆에서 다 벗고 자고 있는데... 그랬다가는 다시는 못 볼 줄 알아요!”
“아...안...돼... 그런 말 하지마. 나 다시 흥분해서 바로 설지도 몰라.”
“그럼. 잘 됐네... 그러잖아도 몸이 덜 풀려서 잠이 안올 것 같은데...”
아무도 없는 그녀의 집에서 단둘이 침실에 누워 서로 껴안은채로 잠이 들었고 목이 말라 잠이 깼을 때는 새벽녘이었다. 살며시 자리에서 일어나 황지연에게 얇은 이불을 덮어준 후에 주방으로 나가 정수기 물로 갈증을 채우고 거실 쇼파에 앉아 재떨이 옆에 놓아둔 담배를 꺼내 물었다.
저녁을 먹으며 사랑에 대해 이야기 나누던 그녀, 신사복 매장을 거쳐 자신의 집으로 날 데려가기로 마음 먹은 그녀, 섹스할 때 내게 안전한 날이라고 말하던 그녀, 그리고 씻고 나서 이야기를 나누다 갑작스럽게 나에게 자신의 몸만 탐하는 거 아니냐고 따지던 그녀... 어느 장단에 맞출 수도 없을 만큼 변화가 심하다.
아빠와 통화한 후 그동안 그렇게 자신을 초라하게 만들었던 이유성을 보내기로 마음을 먹었고 그러기 위해 나에게 정장을 사주고 이유성과 자신의 신혼집으로 데려와서 그와 사랑을 나누던 침대로 날 끌어들였다. 명목상으로 부부관계로 남아 있는 것조차 정리를 결심한 듯 한데...
그 결심은 어떻게보면 황지연에게 이유성에 대한 모든 희망을 버리게 만드는 것이고 더할나위 없는 상실감을 줄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실망감이 섹스가 끝난 후 불현 듯 내게 쏟아져 나왔다. 겨우 넘기긴 했는데...
그 결심이 나로 인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고 황지연이 이혼을 실행에 옮길 수 있을 지 역시 미지수... 결심만 한 것으로도 마음이 왔다갔다 하는데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을 때까지, 그리고 이혼한 이후 한동안... 아니면 상당히 오랜 시간동안 그녀가 내게 의지하려 한다면 그걸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그녀는 자신의 삶을 내게 묻고 있었다. 그걸 지켜봐주고 내 시각을 이야기 해주기를... 게임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지만 이제 나도 외길 수순이 아닌가 싶었다. 이유성의 마공에 당한 황지연의 내상이 회복될 때까지 곁에 있어주는...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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