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이 결혼하기 1년 쯤 전 이었어요 유성이가 근처에 왔다가 저희 집에 들른다고 전화를 했어요. 그런데 그 날이 아마 금요일이었는데 애들은 여름 방학 때라 대덕에 있는 애 아빠가 다니는 연구소 견학을 갔어요. 그 곳에서 자고 다음 날 올라오기로 했죠. 저도 같이 가고 싶었는데 수업이 있어서..
그 날 이전에 유성이가 저희 집에 들른다고 2번쯤 전화를 한 적이 있는데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다음에 오라고 했었어요. 그게... 큰 애가 5학년 무렵에 유성이가 우리 집에서 얼마멀지 않은 구파발 근처 군부대에서 군 생활을 했었는데 가끔 저랑 큰 애가 면회를 간 적이 있었어요. 근데 그 때부터 큰 애가 유성이를 너무 따라서... 그 애가 또래 남자애한테는 관심이 전혀 없는 애였는데... 면회가자고 절 조르고... 면회가면 삼촌 외박나오면 우리집 꼭 오라고 하고.. 그래서 몇 번 유성이가 저희 집에 와서 자고 간 적이 있는데... 온다고 연락만 오면 새 옷을 입고 기다리질 않나... 또 사춘기 접어 든 여자애가 유성이한테 업어달라고 조르질 않나...학교 시험기간인데 위문편지 쓴다고 공부를 미루기도 하고... 하여간 제 입장에서 은근히 신경이 쓰이는 행동을 많이 하더라고요.
유성이에게 좀 미안하지만 당분간은 집에 안 왔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매번 담에 놀러오라고 하곤 했는데 전화가 왔을 때는 집에 아무도 없을 때 였거든요. 그래서... 집에서 저녁 차려줄테니 먹고 가라고 마음 편하게 이야기 했어요.
수업이 끝나자마자 오랜만에 오는 데 잘 좀 먹이려고 장을 좀 봐서 집으로 갔고 7시 반쯤 그 애가 와서 단 둘이 저녁을 먹었어요.”
“그 때 저녁에 유성이가 온다는 걸 식구들에게 이야기 했어?”
“그게... 실은 안했어요. 큰 애가 들으면 샘낼 것도 같고... 저녁 만 먹고 갈 거라고 생각해서 그냥...”
“그래? 음... 제대하고 얼마 안됐으면 그 때 유성이는 백수였어?”
“아니요. 그 때는 헬스클럽에서 트레이너로 일했을 거에요. 월급이 많은 지 우리 집에 올때도 빈 손으로 온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음.. 저녁을 먹었을 때부터 다시 이야기 시작해.”
“저녁에 소고기를 좀 구웠는데 자연스럽게 술을 마시게 되었어요. 저도 집이라 부담도 없고 해서 같이 마시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죠. 한 잔 두 잔 술을 마시다.... 그 날이 좀 더웠는데... 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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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미와 이유성 사이에서 있었던 일을 들은 난 심각해졌는데 그 때 갑자기 떠오른 건 민현규라는 10년 전에 만났던 녀석이었다. 중학생 미정이에게 첫 남자였으며 정재희라는 자신의 중학교 시절 학원 선생님과 환락의 밤을 보냈던...
내가 김유미의 이야기를 듣고 입을 다문 채 심각해질 수 밖에 없었던 건 이유성은 민현규 정도의 괴물과 사이즈 자체가 다른 녀석이었기 때문이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마왕 급이라고 해야 될 것 같은 데 제대로 걸리면 백약이 무효가 된다. 솔직히 살면서 내가 마왕을 만날 줄은 생각 못했는데... 황지연의 회복은 이제 보장할 수 없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김유미의 이야기가 희망이었는데 듣고 난 후에 난 솟아날 구멍조차 찾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걸 현실로 만드는 녀석과 엮이다니...
자신이 내가 묻는 질문에 나름 열심히 대답하고 여자로서는 말하기 만만치 않은 내용까지 다 털어 놓았음에도 탁자 위에 턱을 괸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는 날 보고 있던 김유미가 갑자기 물었다.
“왜요? 술이 너무 취한 거 아니에요?”
“응? 아니... 아까 먹은 술 다 깼다. 너무 놀라서...”
“석훈 씨 얼굴만 봐도 알 것 같네요. 그런 표정 처음 봐요. 그게 너무 인간적으로 보이는 거 알아요?”
“응? 무슨 말이야?”
“전 석훈 씨 같은 사람 처음 보거든요. 처음에 그렇게 무섭게 굴다가 지금은 너무 무심한 것 같기도 하고 모든 걸 초월한 것 같기도 하고... 이왕 말을 꺼냈으니 궁금한 게 있는 데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저 없이는 못 견딜 것 같다고 하던 사람이 어떻게 갑자기 소 닭 보듯 할 수 있는 지...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전 정말 석훈 씨에게서 벗어날 길을 찾을 수 없어서 고민하다 어쩔 수 없이 만났는데... 당신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것처럼 표정 변화도 없더군요. 아무리 거기에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김유미가 몇 년 동안 아무에게도 꺼내지 못했던 이야기를 내게 하더니 마음이 많이 편해졌는 지 이젠 내게 서운했던 마음까지 털어 놓고 있었다. 그런데도 난 그런 말들이 머릿속에 들어오기는커녕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막막해서 머리를 쥐어짜고 있었고 그런 그녀와 나 사이에는 내가 뿜어 대는 담배 연기만 허공을 날아 다녔다.
“잠깐만 기다려줄래. 나란 놈 무슨 생각에 빠지면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아. 공원 벤치 같은 곳에 앉아서 몇 시간 동안 꼼짝도 않고 있을 때가 한 두 번 아니고...”
화장실에 다녀온다고 자리에서 일어난 김유미가 언제 왔는지 다시 자리에 앉아 있었고 그걸 깨달은 지도 한참을 지나서야 내가 입을 열었다.
“올케의 직업이 뭐지? 뭐하는 여자야?”
“공직에 있어요.”
“공무원 말하는 거야?”
“예...”
“공무원이라고 말하면 되는 데 공직이란 표현을 쓰네. 손아래 사람인데 그런 표현을 쓰는 걸 보면 직급이 높거나 다른 조직보다 힘이 있는 곳에서 일하는 것 같은데... 맞아?”
“예? 아... 그게... 경찰이에요.”
“경찰이라... 여경...”
난 다시 입을 다물었고 소주 한 잔을 마신 후 담배 한 대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내가 담배 피우는 것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 김유미에게 물었다.
“줘?”
“...”
말이 없다. 이런 경우 침묵은 담배를 피운 다는 이야기 인데...
“칸막이 때문에 니가 담배를 피우는지 내가 피우는지 잘 몰라. 자... 그리고 내 이야기 잘 들어.”
내가 에쎄 한 개비와 라이터를 김유미 쪽으로 밀자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가 불을 붙여 입에 물었다. 김유미도 담배를 피웠구나. 왜 안 피울 거라 생각했지? 아이들 가르치는 선생님이라 그랬나?
“니 올케가 자신의 남편과 니가 그런 사이라는 걸 안지 한참이 지났음에도 모르는 듯 말을 하고 있지 않다가 이혼을 하게 되었다는 전화를 하면서 형님이 신경쓸 일은 아니라고 말했어. 그건 니 동생과 헤어지려는 결심을 하고 나서야 그동안 꾹 참고 지냈던 것들이 너무 억울해 졌던 걸 거야.
그래서 전화를 했고 다른 평범한 여자들 같으면 욕을 하면서 악담을 퍼부었겠지. 그런데 직접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고 넌지시 암시만 하고 끊어. 이건 약간 복잡하지만 그래도 내 해석으론 두 가지 감정이 교차한 다고 보면 될 것 같아.
하나는 너에 대한 분노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 사실이 드러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너도 그게 누군가에게 알려지는 게 두렵지만 그 여자도 아마 너 만큼은 아니지만 그런 감정은 같이 가지고 있을 거야. 자존심이 센 여자일수록 자신의 남편이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웠다는 걸 숨기고 싶을 수 있어. 하물며 그게 남편의 누나라면 더욱 더...
그런데.... 여기서가 어려워... 그 여자가 그런 감정, 숨기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니 입장에서 괜히 이상한 행동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면 된다고 생각할 수 있고 그게... 정답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 왜냐하면... 그 여자의 분노가 풀리지 않고 외려 더 커진다면 어느 방향으로 움직일 지는 미지수 거든. 인간의 감정은 그대로 있지 않아. 상황에 따라 변하니까...
쉽게 말하자면 그 여자는 너에게 형님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된다고 이야기 하고 전화를 끊으면서 약간의 분노가 풀리기는 했을 거야. 하지만 니가 그 상황에서 아무 액션도 취하지 않았으니 예를 들면 전화를 다시 한다든지 찾아간다든지 뭐 이런 거... 니가 다시 전화를 하거나 찾아갔다고 하더라도 니 올케가 전화를 받았을지 만나줬을지는 의문이지만.. 아마 피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어쨌든 너의 그런 표현이나 액션들에 대한 거부도 그 여자의 분노를 가라앉게 했을 거야.
하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니 올케가 무시당한 기분이 생겼다면 이게 최악인데... 분노가 더 커졌을 가능성이 많고 그럴 때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있어. 화가 나서 앞 뒤 구분이 안 되면 어떤 행동이 나올지 모르거든. 자신의 사회적 지위나 주변의 눈까지 무시할 정도로 눈이 뒤집힐 확률을 그다지 많지 않아 보이지만...
넌 그 여자의 분노를 줄이는 방향으로 움직여야 해. 무슨 말인지 이해 돼?“
“알 것도 같아요. 그런데 어떻게요? 가서 용서를 빌란 말인가요?”
“음... 그 것도 하나의 방법이기는 한데... 이번 일에서는 적당하지 않을 수도 있어. 그 여자가 널 피하거나 찾아갔는데 화를 내며 만나서 할 이야기 없으니 돌아가라고 하는 것은 괜찮은데... 사람 마음을 알 길이 없으니 널 보는 순간 화가 치밀어서 무언가 너에게 악담을 하거나 욕을 하는 것까지도 좋아. 어떤 식으로든 마음이 풀린다면...
그런데... 만난다는 건 항상 그 외의 변수가 도사리고 있을 때가 많아. 니 올케의 화가 극도로 차올라 어떻게 누나와 동생 사이에 그럴 수 있냐고 이야기 하는 걸 누가 들을 수도 있고... 그게 아니라도...
또 하나 생각해야하는 건 그 여자의 감정. 숨기고 싶은 마음이 분명히 있을 것 같아 보이는데 괜히 찾아가서 자극할 필요 없잖아. 이것 저것을 고려해볼 때... 니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별로 많지 않은 것 같아.
내 생각엔... “
난 잠시 말을 끊고 담배를 다시 붙여 물었다. 그리고 한 대를 다 필 때까지 입을 다물고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김유미에게 물었다.
“그 전에... 너...”
그녀가 날 정면으로 응시했다. 무슨 말을 그렇게 뜸을 들이는 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이유성과 헤어질 수 있겠어?”
“...”
김유미가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난 다시 한 번 물었다.
“내 말 못 들었어? 그 녀석과 만나지 않을 수 있겠냐고?”
“... 잘... 모르겠어요. 아니... 그 동안 그런 마음을 먹은 게 수 백번인데... 이젠 절 믿을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넌 니 동생의 이혼을 바라고 있는 입장일 수도 있잖아? 결국 올케와의 일만 잘 정리되면... 니가 녀석을 독차지 하는 게 되나?”
“그게 아니라... 정말 아니에요. 전 어차피... 그 동안도... 그게... 결혼을 한 이후에는 유성이에게 먼저 연락한 적이 없어요. 그냥.. 아니.. 정말 그걸 바라는 건 아니에요.”
“녀석이 니 올케에게 이혼을 먼저 원했을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그게 싫었던 그 여자는 그날 밤 녀석이 오피스텔 밖으로 나오자 내 차에 탔고... 갑자기 그런 절대적인 존재였던 이유성과 이혼을 하겠다는 이야기를 했어.
그리고 너에게 녀석과 헤어질 수 있냐고 물었더니... 약간 돌려서 말했지만... 그 동안 수 백번 그런 생각을 했지만 이젠 자신을 믿을 수 없다는... 그 말은 못 헤어진다는 말로 봐야겠지.
그 여자가 너에게 형님 때문은 아니니 신경 쓰지 마세요라고 말한 것으로 발생한 가장 큰 문제는 그 여자 역시 너도 자기가 한 말로 자신이 너와 이유성의 관계를 알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는 걸 걱정하게 된다는 거야.
지금은 이혼으로 가기 위해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하나씩 만들고 있지만... 그러니까 이혼을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니가 수 백 번 벗어나려 해도 다시 제자리 인 것처럼... 정말 이혼을 하고 이유성 곁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면... 그 다음엔 그 여자는 어떻게 움직일까?
그게 어려워서 망설이고 있어. 니가 그 말로 인해 보이는 작은 움직임조차도 니 올케에게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다리가 될 수도 있거든.“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올케는 이혼을 하고 유성이를 떠나겠다는 거 아닌가요? 그런데 왜?”
“결혼을 했기 때문에 이혼이라는 마지막 카드를 써 보려는 걸 수도 있잖아. 이혼을 하고 나면 마음이 정리되겠지... 뭐 이런 식으로...
그러니까 이유성과 니 올케가 결혼이라는 제도에 얽매이지 않았다면 둘 사이가 계속 유지될 수 있을 지도 몰라. 그 여자는 자신이 아내라는 이유로 이유성에게 무언가를 주장했을 것이고 녀석은 잘 들어주지 않았겠지.
이혼은 녀석이 겁내는 것은 아니니 그 카드를 마음을 돌리기 위해 쓸 리는 없을 것이고 차라리 헤어지면 자신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여기는 걸 수도 있다는 거야. 그래서 널 돕는 게 니 올케를 사지에 몰아넣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좀 쉽게 설명해줄 수 없어요? 통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돼요..”
“모든 걸 종합해볼 때 니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은 이런 거야. 너와 이유성의 관계를 그 여자가 알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것 때문에 간접적으로 일종의 죄 값을 치루는 거. 게다가 모든 일은 너와 그 여자 사이엔 암묵적으로 벌어져야 해. 서로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그 정도로...
예를 들자면 니가 충격 때문에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 가고 신경쇠약 같은 걸로 입원을 하는 거야. 그리고 그 사실이 흘러 그 여자 귀에 들어가게 되는 거지. 그렇게 되면 너도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로 올케는 분노가 좀 풀릴 거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니 이혼 과정을 밟아가는 동안 그 사실을 드러낼 가능성이 줄어들어.
그리고 이혼 과정을 밟다가 녀석과 영원히 헤어지는 것이 도저히 견딜 수 없고 두려운 마음이 들더라도 다시 취소할 수도 있어. 니가 쓰러진 것이 자신이 그 사실을 넌지시 암시해서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는 거니까.“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 가라고요? 가짜 환자가 되란 말이에요?”
“응. 그리고 그 사실이 니 올케 귀에 어떤 식으로든 들어가는 게 좋아.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어. 집에 가서 그냥 비틀거리면서 쓰러지고 119에 전화해 달라고 해. 병원에 가면 어지럽다고 계속 그러고... 입원하면서 이런 저런 검사를 받고 경과를 지켜보자고 하겠지. 그런 과정들이 올케에게 들어가게 하는 건 니가 알아서 생각해 보고..
니 올케는 너와 이유성의 관계를 알아. 그건 100% 사실이고 또 이혼을 하려는 마음을 먹고 있으면서 그 과정에서 무언가 풀리지 않는 마음 때문에 너에게 전화를 한 것도 100% 사실이야. 어떻게든 마음을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리는 방향으로 움직이되 그 여자가 돌아올 것도 염두에 둬야 해. 그건 나보다 니가 더 잘 알거야. 이유성을 벗어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혼을 한다면...“
김유미는 무언가를 알아듣겠다는 듯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 이후에 일어나는 일까지는 니가 책임지지 않아도 돼.”
“이제 조금 알 것 같아요. 왜 올케에게 내가 그 말로 무언가를 알았다는 표현을 하면 안되는지... 얼마나 병원에 있으면 될까요?”
“모르겠어. 너도 수업을 해야 하니 많이는 힘들겠지만 올케가 그 사실을 알게 될 때까지 있다가 퇴원하면 되지 않을까? 갑자기 쓰러져서 입원을 하게 되었다는 식으로 누군가 알려주면 되겠지.”
“알았어요. 저 그만 일어나고 집에 가면 석훈씨가 시키는 대로 할게요.”
“잠깐만... 궁금한 게 있어. 몇 가지만 물어볼게.”
“뭐죠?”
“자랄 때 아빠나 엄마 중에 혹시 누가 엄했어? 아니면 잔소리가 심하던지...”
“그게 왜 궁금하죠. 석훈씨는 참 엉뚱하네요. 아빠가 에어콘 대리점을 하기 전까지... 하긴 그 것도 엄마는 못 누렸지만.. 엄마 돌아가시고 너무 형편이 어려워서 전남 신안에 있는 할아버지 댁에서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중학교 때까지 학교를 다녔어요. 근데 할아버지가 너무 엄하셔서... 동생하고 둘이서 할아버지 앞에서는 제대로 숨도 못 쉬고 살았어요. 아마 여자애들이라 그러셨던 것 같기도 해요. 옛날 분들은 아들을 좋아 했으니까.
고등학교 들어갈 무렵 아빠가 자리를 잡고 나서는 같이 살았는데 아빤 몇 년 동안 떨어뜨려 놓고 자라게 한 게 미안해서 인지 잔소리도 거의 안하시는 분이구요.“
“그래?... 음.... 한가지 만 더... 대학교 졸업하자마자 결혼을 한 이유가 뭐야? 혹시 아빠의 재혼과 상관이 있는 거야?”
“알 수 없는 질문만 하네요. 새 엄마하고 관계 때문에 궁금한건가요? 그게... 당시엔 그리 좋지 않았어요. 그런데 좋지 않은 게 다른 가정들처럼 재혼에 대한 불만, 돌아가신 엄마에 대한 그리움 이런 건 아니었고...”
“그럼 뭐 때문에?”
“전 대학교 때 교육학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 전공은 아니지만 관련 도서를 꽤 읽었어요. 그런데 새 엄마는 저와 제 동생에게는 아주 부드럽고 상냥한 분이었는데... 유성이에게 너무 심하게 했어요. 그 때 제 눈에 비친 10살 유성이는 모든 걸 자신이 알아서 하는 아이였어요. 공부부터 간단한 빨래. 식사준비. 설거지. 청소. 우리가 사는 집에 마당이 있었고 개를 세 마리 정도 키웠는데 그 개들의 식사와 개집 청소까지 유성이가 하게 했고... 가끔 조금이라도 유성이가 실수를 하거나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욕은 기본이고 무지막지하게 때리거나 밥을 굶겼어요.
그건 정말... 학대 수준에 가까웠고 보다 못한 제가 아빠에게도 이야기하고 새 엄마에게 따지기도 했어요. 그런데 새 엄마는 아빠나 제가 이야기 할 때만 잠깐 말을 듣는 척하지만 유성이에 대한 태도는 항상 그대로였죠. 전 화가 났지만 어쩔 수 없었고 유성이를 돕고 싶어서 굶고 있을 때 몰래 빵을 사다 주곤 했는데... 유성이는 받지 않았어요. 엄마가 알면 한 끼 굶을 걸 온 종일 굶게 되고 더 맞게 된다는 핑계로...
결혼을 일찍 하게 된 건 그 당시 사귀던 지금 애 아빠가 유학을 떠나게 돼서 같이 가고 싶다고 했기 때문이에요. 5년 정도 미국에서 살았어요. 큰 애도 거기에서 낳았고요.”
“미국에서 돌아온 뒤에 친정에 갔을 때도 새엄마는 유성이를 종 다루듯이 대했어?”
“아... 아니요. 그 땐 유성이가 한참 중학교 체조 꿈나무로 운동을 열심히 할 때였는데 새 엄마가 유성이에게 뭐라고 하는 걸 본 적이 없어요. 아 그러고 보니 미국에서 돌아온 뒤엔 새 엄마의 예전 그 무서운 표정조차 못 봤어요.”
“그 새 엄마가 재혼을 하기 전엔 뭐 하던 분이셨어? 이를테면 직업 같은 거...”
“20대 후반까지 여자 실업배구 선수셨는데 같은 운동을 하는 남자와 결혼했다가 유성이가 어렸을 때 헤어졌다더군요.”
“이혼을 한 이유도 알아?”
“잘은 몰라요. 얼핏 듣기론 남자가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스타였는데 다른 여자와 바람이 났다고 했어요.”
이씨 성을 가진 70년대 남자배구 스타? 누구지?
김유미와 헤어져 집에 와 마누라와 아이들이 자는 것을 확인한 후에 베란다에 나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이런 식으로 이유성에 대해 알게 될지는 몰랐지만 김유미의 이야기를 들은 후에 난 엄청난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마왕과 만나게 될 줄이야... 이제 황지연의 내상치료는 둘째 문제였고 오히려 난 그녀를 되돌려 보내야 할지도...
만약 그날 밤 내 이야기들로 그동안 주저주저하면서 결행을 못했던 이유성과의 이혼을 결심하게 된 거라면 천추의 한을 남길 수도 있다. 혈연관계는 아니지만 남매로 맺어진 김유미도 그 놈과 헤어지는 것에 대해서는 자신을 믿지 못하겠다는 말을 할 정도라면 부부관계였던 황지연이 우지끈 끊고 나서 생각해보겠다는 발상을 한 것은 위험하다.
그녀가 돌아오지 못할 다리를 건너게 된 후에 그래도 이유성을 정리할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되면, 부모, 나, 경찰간부라는 직업, 재력.... 이 모든 것이 다 곁에 있어도 그 놈 하나만 바라보고 있는 자신을 깨닫게 되면 그 땐 어떤 선택을 할지 모르는 것이다.
머리가 감정을 지배하기는 힘들지만 만일 황지연이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여기고 이유성을 정리한 후에 예전의 모습을 조금씩 찾아간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김유미를 옭아맨 녀석의 능력을 감안해보면... 지연의 몸부림은 거미줄에 걸린 잠자리의 날개 짓처럼 느껴졌다.
이유성은 황지연도 비슷한 수법으로 곁에 두었을 것이다. 고졸출신 헬스클럽 트레이너가 그런 수를 구사하다니... 씨발... 그걸 설계하기는 힘들었을 것인데 자연스럽게 체득하게 되었다면 언제 그런 기연을 얻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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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9시 경 정재희의 집 앞에서 그녀를 차에 태우며 물었다.
“전화를 했나요? 어디까지 이야기 했죠?”
“일단 서울 원자력병원으로 가고 있다고 도착해서 전화 한다고 했어요.”
정재희의 눈빛을 보아서는 거짓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는 않았고 난 차를 몰고 근처에 있는 유명한 사찰인 선암사를 향해 갔는데 절에 가면 아무래도 그녀가 그 동안 민현규와 있었던 일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기회를 가질 수도 있고 광양이나 순천 시 근교에서 있는 건 마음이 내키지 않았었던 것 같다.
그녀와 선암사 경내와 숲길을 걷고 근처 낙안읍성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정재희는 의외로 침착했고 이런 저런 안내판을 볼 때마다 한참동안 들여다보며 관심을 보였다.
“아니.. 선암사 처음 와 봐요?”
“몇 번 왔어요. 근데 너무 어려서 왔을 때는 잘 몰랐는데 지금은 딸을 키우다보니 이런저런 관심이 많은 것 같아요. 왜요?”
“생전 절 구경 못한 사람처럼 너무 열심이어서 그래요. 원래는 고흥에 있는 해수욕장으로 갈까하다 여기로 왔는데 잘한 것 같네요.”
“해수욕장이요? 호호호... 낼 가요. 그러잖아도 이번 여름 별로 간데도 없었는데 잘 됐다.”
“정재희씨 신났네요. 지금 소풍 온 줄 아나봐요?”
“아니... 몰라요.. 그래도 오랜만에 남자랑 바깥에 나오니 데이트하는 기분인걸요!”
정재희와 나의 데이트는 며칠 동안 계속됐다. 그러는 사이 난 그녀가 이혼을 한 이유는 성격차이와 사업 실패 후 시댁에 지원도 끊어진 터에 다른 직업을 알아볼 생각도 하지 않고 집에서 지내던 남편의 무능력 때문이라는 것, 아버지는 공무원이었는데 그녀가 대학교 다닐 무렵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으며 어머니는 영락없는 시골분인데 그나마 조금 있던 전답마저 큰 오빠 뒷바라지에 다 파시고 그녀와 같이 지내고 있다는 것, 그 외에도 대학교 시절 첫사랑이 있었는데 군대에 가면서 헤어진 것 등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도 그녀는 전화와 문자 메시지로 민사장이 아르바이트 여직원을 구할 수 있도록 만드는 시나리오를 연기하는 데 열심이었고 덕분에 아침에 만나 여수에 가서 바닷바람을 쐬며 회를 먹고 여수시내에 있는 극장에 가서 함께 영화를 보고 나오던 중에 민현규의 전화를 받았다.
녀석의 전화 내용은 내일부터 대학교 휴학 중인 여학생이 아르바이트 하기로 했으니 아무 걱정 말고 병간호 잘하고 혹시 내려오게 되면 미리 연락을 달라는 내용이었는데 정재희가 내게 그 걸 전하며 물었다.
“그럼 내일 부터는 같이 안 다녀도 되겠네요.”
“아직 무언가를 하긴 이른 것 같기는 하지만 어쨌든 내일이나 모레 부터는 매장 근처에서 지켜봐야겠죠. 아르바이트생 혼자 있을 때는 더 유심히...”
“한 가지 물어봐도 되요?”
“예..”
“아무리 생각해도 영이 부탁으로 이렇게 까지 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경찰인 사람이 휴가를 너무 오래 쓰는 것 같기도 하고... 혹시 다른 이유가 있나요?”
“예?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했죠?”
“모르겠어요. 첨엔 잘 몰랐는데 저하고 같이 다니는 동안 쓴 돈이 일주일 동안 50만원은 넘는 것 같고 경찰이라는 사람이 회사에 전화 한 통하는 것도 못 봤고 그리고 당신이 맘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처음에 내게 겁을 줘서 날 가지려 했을 것도 같은데... 그런 것도 아닌 것 같고... 당신의 의도를 모르겠어요. 혹시 현규에게 무슨 원한 같은 게 있나요?”
“하하하... 전 지금 연가를 쓴 게 아니라 중앙경찰학교 파견을 위한 1개월 휴직 중이에요. 대부분 이 기간에 3년 정도 되는 파견기간 동안 있을 집도 알아보고 이런 저런 준비를 하는 데 다행히 빨리 지낼 곳을 구할 수가 있었어요. 남는 시간에 일본으로 여행을 갈까 하다 친한 동생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어서... 저도 이렇게 시간을 잡아먹을 줄은 몰랐지만... 그리고 정재희씨 같은 미인과 같이 다니니 혼자 일본 여행 간 것 보다 재밌는데요.“
아뿔싸! 여자의 육감은 무섭다더니 정재희가 내 패를 조금 읽고 있었다. 같이 지내는 열흘 가까운 시간동안 혹시 돈 때문에 그녀의 심경에 변화가 생길 까 경비는 모두 내가 내고 있었고 저녁 때 그녀를 집에 데려다 주고 캠코더를 빌리기 위해 친구 놈과 통화를 한 것 외에는 그녀와 있는 낮 동안엔 아무와도 통화한 적이 없었고 거기다 그녀가 마음을 열고 학창시절 이야기 같은 것을 해서 분위기가 좋아졌을 때도 난 남녀 사이의 진도를 나가지 않고 그대로 넘기곤 했었다.
그 때 내가 정재희에게 숨기고 있던 패를 쓰게 된건 그 날로부터 일주일 쯤 지났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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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이 쉽지 않다고 넋두리를 좀 했더니 무슨 댓글과 추천이.... 쏟아지네요. ㅎㅎ 3배 늘었네요. ㅋㅋ.
진작 엄살을 떨걸 그랬나 봅니다.
김유미의 과거 이야기를 중간에 끊은 건 정재희와 민현규 사이의 이야기도 정재희의 입을 빌려 듣는 형식이었는데 비슷하게 흘러가는 것 같아서 약간 구성을 바꿀 생각에 끊었습니다. 이유성 스토리를 궁금해하는 독자님들에게는 지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름 철 건강 조심하세요!
그 날 이전에 유성이가 저희 집에 들른다고 2번쯤 전화를 한 적이 있는데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다음에 오라고 했었어요. 그게... 큰 애가 5학년 무렵에 유성이가 우리 집에서 얼마멀지 않은 구파발 근처 군부대에서 군 생활을 했었는데 가끔 저랑 큰 애가 면회를 간 적이 있었어요. 근데 그 때부터 큰 애가 유성이를 너무 따라서... 그 애가 또래 남자애한테는 관심이 전혀 없는 애였는데... 면회가자고 절 조르고... 면회가면 삼촌 외박나오면 우리집 꼭 오라고 하고.. 그래서 몇 번 유성이가 저희 집에 와서 자고 간 적이 있는데... 온다고 연락만 오면 새 옷을 입고 기다리질 않나... 또 사춘기 접어 든 여자애가 유성이한테 업어달라고 조르질 않나...학교 시험기간인데 위문편지 쓴다고 공부를 미루기도 하고... 하여간 제 입장에서 은근히 신경이 쓰이는 행동을 많이 하더라고요.
유성이에게 좀 미안하지만 당분간은 집에 안 왔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매번 담에 놀러오라고 하곤 했는데 전화가 왔을 때는 집에 아무도 없을 때 였거든요. 그래서... 집에서 저녁 차려줄테니 먹고 가라고 마음 편하게 이야기 했어요.
수업이 끝나자마자 오랜만에 오는 데 잘 좀 먹이려고 장을 좀 봐서 집으로 갔고 7시 반쯤 그 애가 와서 단 둘이 저녁을 먹었어요.”
“그 때 저녁에 유성이가 온다는 걸 식구들에게 이야기 했어?”
“그게... 실은 안했어요. 큰 애가 들으면 샘낼 것도 같고... 저녁 만 먹고 갈 거라고 생각해서 그냥...”
“그래? 음... 제대하고 얼마 안됐으면 그 때 유성이는 백수였어?”
“아니요. 그 때는 헬스클럽에서 트레이너로 일했을 거에요. 월급이 많은 지 우리 집에 올때도 빈 손으로 온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음.. 저녁을 먹었을 때부터 다시 이야기 시작해.”
“저녁에 소고기를 좀 구웠는데 자연스럽게 술을 마시게 되었어요. 저도 집이라 부담도 없고 해서 같이 마시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죠. 한 잔 두 잔 술을 마시다.... 그 날이 좀 더웠는데... 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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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미와 이유성 사이에서 있었던 일을 들은 난 심각해졌는데 그 때 갑자기 떠오른 건 민현규라는 10년 전에 만났던 녀석이었다. 중학생 미정이에게 첫 남자였으며 정재희라는 자신의 중학교 시절 학원 선생님과 환락의 밤을 보냈던...
내가 김유미의 이야기를 듣고 입을 다문 채 심각해질 수 밖에 없었던 건 이유성은 민현규 정도의 괴물과 사이즈 자체가 다른 녀석이었기 때문이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마왕 급이라고 해야 될 것 같은 데 제대로 걸리면 백약이 무효가 된다. 솔직히 살면서 내가 마왕을 만날 줄은 생각 못했는데... 황지연의 회복은 이제 보장할 수 없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김유미의 이야기가 희망이었는데 듣고 난 후에 난 솟아날 구멍조차 찾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걸 현실로 만드는 녀석과 엮이다니...
자신이 내가 묻는 질문에 나름 열심히 대답하고 여자로서는 말하기 만만치 않은 내용까지 다 털어 놓았음에도 탁자 위에 턱을 괸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는 날 보고 있던 김유미가 갑자기 물었다.
“왜요? 술이 너무 취한 거 아니에요?”
“응? 아니... 아까 먹은 술 다 깼다. 너무 놀라서...”
“석훈 씨 얼굴만 봐도 알 것 같네요. 그런 표정 처음 봐요. 그게 너무 인간적으로 보이는 거 알아요?”
“응? 무슨 말이야?”
“전 석훈 씨 같은 사람 처음 보거든요. 처음에 그렇게 무섭게 굴다가 지금은 너무 무심한 것 같기도 하고 모든 걸 초월한 것 같기도 하고... 이왕 말을 꺼냈으니 궁금한 게 있는 데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저 없이는 못 견딜 것 같다고 하던 사람이 어떻게 갑자기 소 닭 보듯 할 수 있는 지...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전 정말 석훈 씨에게서 벗어날 길을 찾을 수 없어서 고민하다 어쩔 수 없이 만났는데... 당신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것처럼 표정 변화도 없더군요. 아무리 거기에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김유미가 몇 년 동안 아무에게도 꺼내지 못했던 이야기를 내게 하더니 마음이 많이 편해졌는 지 이젠 내게 서운했던 마음까지 털어 놓고 있었다. 그런데도 난 그런 말들이 머릿속에 들어오기는커녕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막막해서 머리를 쥐어짜고 있었고 그런 그녀와 나 사이에는 내가 뿜어 대는 담배 연기만 허공을 날아 다녔다.
“잠깐만 기다려줄래. 나란 놈 무슨 생각에 빠지면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아. 공원 벤치 같은 곳에 앉아서 몇 시간 동안 꼼짝도 않고 있을 때가 한 두 번 아니고...”
화장실에 다녀온다고 자리에서 일어난 김유미가 언제 왔는지 다시 자리에 앉아 있었고 그걸 깨달은 지도 한참을 지나서야 내가 입을 열었다.
“올케의 직업이 뭐지? 뭐하는 여자야?”
“공직에 있어요.”
“공무원 말하는 거야?”
“예...”
“공무원이라고 말하면 되는 데 공직이란 표현을 쓰네. 손아래 사람인데 그런 표현을 쓰는 걸 보면 직급이 높거나 다른 조직보다 힘이 있는 곳에서 일하는 것 같은데... 맞아?”
“예? 아... 그게... 경찰이에요.”
“경찰이라... 여경...”
난 다시 입을 다물었고 소주 한 잔을 마신 후 담배 한 대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내가 담배 피우는 것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 김유미에게 물었다.
“줘?”
“...”
말이 없다. 이런 경우 침묵은 담배를 피운 다는 이야기 인데...
“칸막이 때문에 니가 담배를 피우는지 내가 피우는지 잘 몰라. 자... 그리고 내 이야기 잘 들어.”
내가 에쎄 한 개비와 라이터를 김유미 쪽으로 밀자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가 불을 붙여 입에 물었다. 김유미도 담배를 피웠구나. 왜 안 피울 거라 생각했지? 아이들 가르치는 선생님이라 그랬나?
“니 올케가 자신의 남편과 니가 그런 사이라는 걸 안지 한참이 지났음에도 모르는 듯 말을 하고 있지 않다가 이혼을 하게 되었다는 전화를 하면서 형님이 신경쓸 일은 아니라고 말했어. 그건 니 동생과 헤어지려는 결심을 하고 나서야 그동안 꾹 참고 지냈던 것들이 너무 억울해 졌던 걸 거야.
그래서 전화를 했고 다른 평범한 여자들 같으면 욕을 하면서 악담을 퍼부었겠지. 그런데 직접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고 넌지시 암시만 하고 끊어. 이건 약간 복잡하지만 그래도 내 해석으론 두 가지 감정이 교차한 다고 보면 될 것 같아.
하나는 너에 대한 분노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 사실이 드러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너도 그게 누군가에게 알려지는 게 두렵지만 그 여자도 아마 너 만큼은 아니지만 그런 감정은 같이 가지고 있을 거야. 자존심이 센 여자일수록 자신의 남편이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웠다는 걸 숨기고 싶을 수 있어. 하물며 그게 남편의 누나라면 더욱 더...
그런데.... 여기서가 어려워... 그 여자가 그런 감정, 숨기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니 입장에서 괜히 이상한 행동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면 된다고 생각할 수 있고 그게... 정답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 왜냐하면... 그 여자의 분노가 풀리지 않고 외려 더 커진다면 어느 방향으로 움직일 지는 미지수 거든. 인간의 감정은 그대로 있지 않아. 상황에 따라 변하니까...
쉽게 말하자면 그 여자는 너에게 형님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된다고 이야기 하고 전화를 끊으면서 약간의 분노가 풀리기는 했을 거야. 하지만 니가 그 상황에서 아무 액션도 취하지 않았으니 예를 들면 전화를 다시 한다든지 찾아간다든지 뭐 이런 거... 니가 다시 전화를 하거나 찾아갔다고 하더라도 니 올케가 전화를 받았을지 만나줬을지는 의문이지만.. 아마 피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어쨌든 너의 그런 표현이나 액션들에 대한 거부도 그 여자의 분노를 가라앉게 했을 거야.
하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니 올케가 무시당한 기분이 생겼다면 이게 최악인데... 분노가 더 커졌을 가능성이 많고 그럴 때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있어. 화가 나서 앞 뒤 구분이 안 되면 어떤 행동이 나올지 모르거든. 자신의 사회적 지위나 주변의 눈까지 무시할 정도로 눈이 뒤집힐 확률을 그다지 많지 않아 보이지만...
넌 그 여자의 분노를 줄이는 방향으로 움직여야 해. 무슨 말인지 이해 돼?“
“알 것도 같아요. 그런데 어떻게요? 가서 용서를 빌란 말인가요?”
“음... 그 것도 하나의 방법이기는 한데... 이번 일에서는 적당하지 않을 수도 있어. 그 여자가 널 피하거나 찾아갔는데 화를 내며 만나서 할 이야기 없으니 돌아가라고 하는 것은 괜찮은데... 사람 마음을 알 길이 없으니 널 보는 순간 화가 치밀어서 무언가 너에게 악담을 하거나 욕을 하는 것까지도 좋아. 어떤 식으로든 마음이 풀린다면...
그런데... 만난다는 건 항상 그 외의 변수가 도사리고 있을 때가 많아. 니 올케의 화가 극도로 차올라 어떻게 누나와 동생 사이에 그럴 수 있냐고 이야기 하는 걸 누가 들을 수도 있고... 그게 아니라도...
또 하나 생각해야하는 건 그 여자의 감정. 숨기고 싶은 마음이 분명히 있을 것 같아 보이는데 괜히 찾아가서 자극할 필요 없잖아. 이것 저것을 고려해볼 때... 니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별로 많지 않은 것 같아.
내 생각엔... “
난 잠시 말을 끊고 담배를 다시 붙여 물었다. 그리고 한 대를 다 필 때까지 입을 다물고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김유미에게 물었다.
“그 전에... 너...”
그녀가 날 정면으로 응시했다. 무슨 말을 그렇게 뜸을 들이는 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이유성과 헤어질 수 있겠어?”
“...”
김유미가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난 다시 한 번 물었다.
“내 말 못 들었어? 그 녀석과 만나지 않을 수 있겠냐고?”
“... 잘... 모르겠어요. 아니... 그 동안 그런 마음을 먹은 게 수 백번인데... 이젠 절 믿을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넌 니 동생의 이혼을 바라고 있는 입장일 수도 있잖아? 결국 올케와의 일만 잘 정리되면... 니가 녀석을 독차지 하는 게 되나?”
“그게 아니라... 정말 아니에요. 전 어차피... 그 동안도... 그게... 결혼을 한 이후에는 유성이에게 먼저 연락한 적이 없어요. 그냥.. 아니.. 정말 그걸 바라는 건 아니에요.”
“녀석이 니 올케에게 이혼을 먼저 원했을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그게 싫었던 그 여자는 그날 밤 녀석이 오피스텔 밖으로 나오자 내 차에 탔고... 갑자기 그런 절대적인 존재였던 이유성과 이혼을 하겠다는 이야기를 했어.
그리고 너에게 녀석과 헤어질 수 있냐고 물었더니... 약간 돌려서 말했지만... 그 동안 수 백번 그런 생각을 했지만 이젠 자신을 믿을 수 없다는... 그 말은 못 헤어진다는 말로 봐야겠지.
그 여자가 너에게 형님 때문은 아니니 신경 쓰지 마세요라고 말한 것으로 발생한 가장 큰 문제는 그 여자 역시 너도 자기가 한 말로 자신이 너와 이유성의 관계를 알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는 걸 걱정하게 된다는 거야.
지금은 이혼으로 가기 위해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하나씩 만들고 있지만... 그러니까 이혼을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니가 수 백 번 벗어나려 해도 다시 제자리 인 것처럼... 정말 이혼을 하고 이유성 곁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면... 그 다음엔 그 여자는 어떻게 움직일까?
그게 어려워서 망설이고 있어. 니가 그 말로 인해 보이는 작은 움직임조차도 니 올케에게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다리가 될 수도 있거든.“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올케는 이혼을 하고 유성이를 떠나겠다는 거 아닌가요? 그런데 왜?”
“결혼을 했기 때문에 이혼이라는 마지막 카드를 써 보려는 걸 수도 있잖아. 이혼을 하고 나면 마음이 정리되겠지... 뭐 이런 식으로...
그러니까 이유성과 니 올케가 결혼이라는 제도에 얽매이지 않았다면 둘 사이가 계속 유지될 수 있을 지도 몰라. 그 여자는 자신이 아내라는 이유로 이유성에게 무언가를 주장했을 것이고 녀석은 잘 들어주지 않았겠지.
이혼은 녀석이 겁내는 것은 아니니 그 카드를 마음을 돌리기 위해 쓸 리는 없을 것이고 차라리 헤어지면 자신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여기는 걸 수도 있다는 거야. 그래서 널 돕는 게 니 올케를 사지에 몰아넣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좀 쉽게 설명해줄 수 없어요? 통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돼요..”
“모든 걸 종합해볼 때 니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은 이런 거야. 너와 이유성의 관계를 그 여자가 알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것 때문에 간접적으로 일종의 죄 값을 치루는 거. 게다가 모든 일은 너와 그 여자 사이엔 암묵적으로 벌어져야 해. 서로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그 정도로...
예를 들자면 니가 충격 때문에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 가고 신경쇠약 같은 걸로 입원을 하는 거야. 그리고 그 사실이 흘러 그 여자 귀에 들어가게 되는 거지. 그렇게 되면 너도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로 올케는 분노가 좀 풀릴 거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니 이혼 과정을 밟아가는 동안 그 사실을 드러낼 가능성이 줄어들어.
그리고 이혼 과정을 밟다가 녀석과 영원히 헤어지는 것이 도저히 견딜 수 없고 두려운 마음이 들더라도 다시 취소할 수도 있어. 니가 쓰러진 것이 자신이 그 사실을 넌지시 암시해서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는 거니까.“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 가라고요? 가짜 환자가 되란 말이에요?”
“응. 그리고 그 사실이 니 올케 귀에 어떤 식으로든 들어가는 게 좋아.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어. 집에 가서 그냥 비틀거리면서 쓰러지고 119에 전화해 달라고 해. 병원에 가면 어지럽다고 계속 그러고... 입원하면서 이런 저런 검사를 받고 경과를 지켜보자고 하겠지. 그런 과정들이 올케에게 들어가게 하는 건 니가 알아서 생각해 보고..
니 올케는 너와 이유성의 관계를 알아. 그건 100% 사실이고 또 이혼을 하려는 마음을 먹고 있으면서 그 과정에서 무언가 풀리지 않는 마음 때문에 너에게 전화를 한 것도 100% 사실이야. 어떻게든 마음을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리는 방향으로 움직이되 그 여자가 돌아올 것도 염두에 둬야 해. 그건 나보다 니가 더 잘 알거야. 이유성을 벗어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혼을 한다면...“
김유미는 무언가를 알아듣겠다는 듯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 이후에 일어나는 일까지는 니가 책임지지 않아도 돼.”
“이제 조금 알 것 같아요. 왜 올케에게 내가 그 말로 무언가를 알았다는 표현을 하면 안되는지... 얼마나 병원에 있으면 될까요?”
“모르겠어. 너도 수업을 해야 하니 많이는 힘들겠지만 올케가 그 사실을 알게 될 때까지 있다가 퇴원하면 되지 않을까? 갑자기 쓰러져서 입원을 하게 되었다는 식으로 누군가 알려주면 되겠지.”
“알았어요. 저 그만 일어나고 집에 가면 석훈씨가 시키는 대로 할게요.”
“잠깐만... 궁금한 게 있어. 몇 가지만 물어볼게.”
“뭐죠?”
“자랄 때 아빠나 엄마 중에 혹시 누가 엄했어? 아니면 잔소리가 심하던지...”
“그게 왜 궁금하죠. 석훈씨는 참 엉뚱하네요. 아빠가 에어콘 대리점을 하기 전까지... 하긴 그 것도 엄마는 못 누렸지만.. 엄마 돌아가시고 너무 형편이 어려워서 전남 신안에 있는 할아버지 댁에서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중학교 때까지 학교를 다녔어요. 근데 할아버지가 너무 엄하셔서... 동생하고 둘이서 할아버지 앞에서는 제대로 숨도 못 쉬고 살았어요. 아마 여자애들이라 그러셨던 것 같기도 해요. 옛날 분들은 아들을 좋아 했으니까.
고등학교 들어갈 무렵 아빠가 자리를 잡고 나서는 같이 살았는데 아빤 몇 년 동안 떨어뜨려 놓고 자라게 한 게 미안해서 인지 잔소리도 거의 안하시는 분이구요.“
“그래?... 음.... 한가지 만 더... 대학교 졸업하자마자 결혼을 한 이유가 뭐야? 혹시 아빠의 재혼과 상관이 있는 거야?”
“알 수 없는 질문만 하네요. 새 엄마하고 관계 때문에 궁금한건가요? 그게... 당시엔 그리 좋지 않았어요. 그런데 좋지 않은 게 다른 가정들처럼 재혼에 대한 불만, 돌아가신 엄마에 대한 그리움 이런 건 아니었고...”
“그럼 뭐 때문에?”
“전 대학교 때 교육학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 전공은 아니지만 관련 도서를 꽤 읽었어요. 그런데 새 엄마는 저와 제 동생에게는 아주 부드럽고 상냥한 분이었는데... 유성이에게 너무 심하게 했어요. 그 때 제 눈에 비친 10살 유성이는 모든 걸 자신이 알아서 하는 아이였어요. 공부부터 간단한 빨래. 식사준비. 설거지. 청소. 우리가 사는 집에 마당이 있었고 개를 세 마리 정도 키웠는데 그 개들의 식사와 개집 청소까지 유성이가 하게 했고... 가끔 조금이라도 유성이가 실수를 하거나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욕은 기본이고 무지막지하게 때리거나 밥을 굶겼어요.
그건 정말... 학대 수준에 가까웠고 보다 못한 제가 아빠에게도 이야기하고 새 엄마에게 따지기도 했어요. 그런데 새 엄마는 아빠나 제가 이야기 할 때만 잠깐 말을 듣는 척하지만 유성이에 대한 태도는 항상 그대로였죠. 전 화가 났지만 어쩔 수 없었고 유성이를 돕고 싶어서 굶고 있을 때 몰래 빵을 사다 주곤 했는데... 유성이는 받지 않았어요. 엄마가 알면 한 끼 굶을 걸 온 종일 굶게 되고 더 맞게 된다는 핑계로...
결혼을 일찍 하게 된 건 그 당시 사귀던 지금 애 아빠가 유학을 떠나게 돼서 같이 가고 싶다고 했기 때문이에요. 5년 정도 미국에서 살았어요. 큰 애도 거기에서 낳았고요.”
“미국에서 돌아온 뒤에 친정에 갔을 때도 새엄마는 유성이를 종 다루듯이 대했어?”
“아... 아니요. 그 땐 유성이가 한참 중학교 체조 꿈나무로 운동을 열심히 할 때였는데 새 엄마가 유성이에게 뭐라고 하는 걸 본 적이 없어요. 아 그러고 보니 미국에서 돌아온 뒤엔 새 엄마의 예전 그 무서운 표정조차 못 봤어요.”
“그 새 엄마가 재혼을 하기 전엔 뭐 하던 분이셨어? 이를테면 직업 같은 거...”
“20대 후반까지 여자 실업배구 선수셨는데 같은 운동을 하는 남자와 결혼했다가 유성이가 어렸을 때 헤어졌다더군요.”
“이혼을 한 이유도 알아?”
“잘은 몰라요. 얼핏 듣기론 남자가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스타였는데 다른 여자와 바람이 났다고 했어요.”
이씨 성을 가진 70년대 남자배구 스타? 누구지?
김유미와 헤어져 집에 와 마누라와 아이들이 자는 것을 확인한 후에 베란다에 나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이런 식으로 이유성에 대해 알게 될지는 몰랐지만 김유미의 이야기를 들은 후에 난 엄청난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마왕과 만나게 될 줄이야... 이제 황지연의 내상치료는 둘째 문제였고 오히려 난 그녀를 되돌려 보내야 할지도...
만약 그날 밤 내 이야기들로 그동안 주저주저하면서 결행을 못했던 이유성과의 이혼을 결심하게 된 거라면 천추의 한을 남길 수도 있다. 혈연관계는 아니지만 남매로 맺어진 김유미도 그 놈과 헤어지는 것에 대해서는 자신을 믿지 못하겠다는 말을 할 정도라면 부부관계였던 황지연이 우지끈 끊고 나서 생각해보겠다는 발상을 한 것은 위험하다.
그녀가 돌아오지 못할 다리를 건너게 된 후에 그래도 이유성을 정리할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되면, 부모, 나, 경찰간부라는 직업, 재력.... 이 모든 것이 다 곁에 있어도 그 놈 하나만 바라보고 있는 자신을 깨닫게 되면 그 땐 어떤 선택을 할지 모르는 것이다.
머리가 감정을 지배하기는 힘들지만 만일 황지연이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여기고 이유성을 정리한 후에 예전의 모습을 조금씩 찾아간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김유미를 옭아맨 녀석의 능력을 감안해보면... 지연의 몸부림은 거미줄에 걸린 잠자리의 날개 짓처럼 느껴졌다.
이유성은 황지연도 비슷한 수법으로 곁에 두었을 것이다. 고졸출신 헬스클럽 트레이너가 그런 수를 구사하다니... 씨발... 그걸 설계하기는 힘들었을 것인데 자연스럽게 체득하게 되었다면 언제 그런 기연을 얻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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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9시 경 정재희의 집 앞에서 그녀를 차에 태우며 물었다.
“전화를 했나요? 어디까지 이야기 했죠?”
“일단 서울 원자력병원으로 가고 있다고 도착해서 전화 한다고 했어요.”
정재희의 눈빛을 보아서는 거짓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는 않았고 난 차를 몰고 근처에 있는 유명한 사찰인 선암사를 향해 갔는데 절에 가면 아무래도 그녀가 그 동안 민현규와 있었던 일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기회를 가질 수도 있고 광양이나 순천 시 근교에서 있는 건 마음이 내키지 않았었던 것 같다.
그녀와 선암사 경내와 숲길을 걷고 근처 낙안읍성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정재희는 의외로 침착했고 이런 저런 안내판을 볼 때마다 한참동안 들여다보며 관심을 보였다.
“아니.. 선암사 처음 와 봐요?”
“몇 번 왔어요. 근데 너무 어려서 왔을 때는 잘 몰랐는데 지금은 딸을 키우다보니 이런저런 관심이 많은 것 같아요. 왜요?”
“생전 절 구경 못한 사람처럼 너무 열심이어서 그래요. 원래는 고흥에 있는 해수욕장으로 갈까하다 여기로 왔는데 잘한 것 같네요.”
“해수욕장이요? 호호호... 낼 가요. 그러잖아도 이번 여름 별로 간데도 없었는데 잘 됐다.”
“정재희씨 신났네요. 지금 소풍 온 줄 아나봐요?”
“아니... 몰라요.. 그래도 오랜만에 남자랑 바깥에 나오니 데이트하는 기분인걸요!”
정재희와 나의 데이트는 며칠 동안 계속됐다. 그러는 사이 난 그녀가 이혼을 한 이유는 성격차이와 사업 실패 후 시댁에 지원도 끊어진 터에 다른 직업을 알아볼 생각도 하지 않고 집에서 지내던 남편의 무능력 때문이라는 것, 아버지는 공무원이었는데 그녀가 대학교 다닐 무렵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으며 어머니는 영락없는 시골분인데 그나마 조금 있던 전답마저 큰 오빠 뒷바라지에 다 파시고 그녀와 같이 지내고 있다는 것, 그 외에도 대학교 시절 첫사랑이 있었는데 군대에 가면서 헤어진 것 등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도 그녀는 전화와 문자 메시지로 민사장이 아르바이트 여직원을 구할 수 있도록 만드는 시나리오를 연기하는 데 열심이었고 덕분에 아침에 만나 여수에 가서 바닷바람을 쐬며 회를 먹고 여수시내에 있는 극장에 가서 함께 영화를 보고 나오던 중에 민현규의 전화를 받았다.
녀석의 전화 내용은 내일부터 대학교 휴학 중인 여학생이 아르바이트 하기로 했으니 아무 걱정 말고 병간호 잘하고 혹시 내려오게 되면 미리 연락을 달라는 내용이었는데 정재희가 내게 그 걸 전하며 물었다.
“그럼 내일 부터는 같이 안 다녀도 되겠네요.”
“아직 무언가를 하긴 이른 것 같기는 하지만 어쨌든 내일이나 모레 부터는 매장 근처에서 지켜봐야겠죠. 아르바이트생 혼자 있을 때는 더 유심히...”
“한 가지 물어봐도 되요?”
“예..”
“아무리 생각해도 영이 부탁으로 이렇게 까지 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경찰인 사람이 휴가를 너무 오래 쓰는 것 같기도 하고... 혹시 다른 이유가 있나요?”
“예?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했죠?”
“모르겠어요. 첨엔 잘 몰랐는데 저하고 같이 다니는 동안 쓴 돈이 일주일 동안 50만원은 넘는 것 같고 경찰이라는 사람이 회사에 전화 한 통하는 것도 못 봤고 그리고 당신이 맘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처음에 내게 겁을 줘서 날 가지려 했을 것도 같은데... 그런 것도 아닌 것 같고... 당신의 의도를 모르겠어요. 혹시 현규에게 무슨 원한 같은 게 있나요?”
“하하하... 전 지금 연가를 쓴 게 아니라 중앙경찰학교 파견을 위한 1개월 휴직 중이에요. 대부분 이 기간에 3년 정도 되는 파견기간 동안 있을 집도 알아보고 이런 저런 준비를 하는 데 다행히 빨리 지낼 곳을 구할 수가 있었어요. 남는 시간에 일본으로 여행을 갈까 하다 친한 동생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어서... 저도 이렇게 시간을 잡아먹을 줄은 몰랐지만... 그리고 정재희씨 같은 미인과 같이 다니니 혼자 일본 여행 간 것 보다 재밌는데요.“
아뿔싸! 여자의 육감은 무섭다더니 정재희가 내 패를 조금 읽고 있었다. 같이 지내는 열흘 가까운 시간동안 혹시 돈 때문에 그녀의 심경에 변화가 생길 까 경비는 모두 내가 내고 있었고 저녁 때 그녀를 집에 데려다 주고 캠코더를 빌리기 위해 친구 놈과 통화를 한 것 외에는 그녀와 있는 낮 동안엔 아무와도 통화한 적이 없었고 거기다 그녀가 마음을 열고 학창시절 이야기 같은 것을 해서 분위기가 좋아졌을 때도 난 남녀 사이의 진도를 나가지 않고 그대로 넘기곤 했었다.
그 때 내가 정재희에게 숨기고 있던 패를 쓰게 된건 그 날로부터 일주일 쯤 지났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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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이 쉽지 않다고 넋두리를 좀 했더니 무슨 댓글과 추천이.... 쏟아지네요. ㅎㅎ 3배 늘었네요. ㅋㅋ.
진작 엄살을 떨걸 그랬나 봅니다.
김유미의 과거 이야기를 중간에 끊은 건 정재희와 민현규 사이의 이야기도 정재희의 입을 빌려 듣는 형식이었는데 비슷하게 흘러가는 것 같아서 약간 구성을 바꿀 생각에 끊었습니다. 이유성 스토리를 궁금해하는 독자님들에게는 지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름 철 건강 조심하세요!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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