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병법을 비겁의 철학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이기지 못할 싸움을 시작해선 안 되는데...
아무 것도 말하지 않을 수는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도대체 내가 말해주길 원하는 건 뭐지?
“살다보면 자기 나름대로 무언가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시기가 오는 거지. 나이가 많든 적든 간에 많은 고민을 하고 이런 저런 경험을 겪게 되면... 니가 저번에 내게 물어온 사랑이라는 거... 그런 건 누구나 어떤 거라고 막연하게나마 생각하고 사는 거고..., 차라리 그런 걸 묻는다면... 그냥 내가 느꼈던 걸 이야기 해 볼 수도 있겠지만...
이건 좀 그래. 니가 힘든 시기를 보내고 우울했었던 이유를 너만큼, 아니 자기 자신만큼 잘 아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그걸 내게 묻고 대답을 하지 않는다고 마음을 닫겠다는 건 너무 억지 같은데...“
그 말을 하며 지연의 눈치를 보니 약간 화가 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다물고 있었다. 도대체 이 여자는 무슨 생각으로 나한테 그런 걸 묻는 거지?
“그래... 다 좋다... 구체적으로 듣고 싶은 게 뭔지 말해봐. 그런 이유라는 거 너무 막연한 거잖아.“
“잘 몰라요. 어쨌든 힘들었던 시기를 지나기 위해 명상이나 힐링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마음을 수양하는 거 말고... 다른 걸 말해줘요. 그런 시간들로 마음을 정화시켜보려고 해도 무언가가 가슴 속에서 치밀어 오르면 미칠 것 같단 말이에요.”
“마음의 상처라는 게 대부분 그렇잖아. 화상이나 무언가에 맞은 상처, 칼에 찔린 상처, 다리가 부러진 것처럼 보이는 거면 지금은 아프지만 병원에서 치료하는 거고 마음이 다친 거는 보이지 않으니까 치유가 쉽지 않은 거고.... 원래 그런 걸 내가 어떻게 말해 주냐고... 넌 몽둥이에 맞아서 기절했었던 거야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그럼 어떻게 해요? 그냥 아무 것도 하기 싫고 먹기도 싫고 무언가를 보기도 싫고 누군가와 만나기도 싫은 시간들이 계속 되는데... 그나마 아저씨라도 만나면 잠깐 제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은데... 남자에게 버림받은 여자들 다 이런 거 아니잖아요. 난 왜 이렇게 아픈 거죠? 죽고 싶은 기분도 든단 말이에요.
자식이라고는 나 하나밖에 없는 아빠, 엄마를 생각하기도 전에 당장 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걸 어떡해요?“
지연의 눈이 빨개지는 듯 하더니 이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흐느끼기 시작했다. 불과 몇 분 사이에 둘이서 오손 도손 소꿉장난을 하듯 밥을 먹었는데 갑자기 이게 뭔일인지... 다른 남자 때문에 가슴 아파 미치겠다는 여자를 달랜다고 안아주기도 뭐하고... 난감해졌다.
몰아내야 하나? 결국 칼을 빼야 하나? 마왕의 여자에게 새겨진 절대 마공을 치유하기엔 아직 내 힘이 역부족 인 것 같은데... 거기다 여자의 마음 속 변화를 모두 읽을 수는 없다. 어디를 어떻게 막고 어디로 밀어낸단 말인가? 씨발... 저절로 욕이 입 밖으로 흘러 나왔다. 이혼을 마무리하기도 전에 이정도 라면... 앞으로 다가올 일은 뭐냐?
“좋아. 니 문제가 뭔지 이야기 해줄게.”
떼쓰던 아이에게 갑자기 사탕을 준다고 하자 눈물을 그치고 엄마를 바라보는 것처럼 지연이 얼굴에서 손을 떼고 빨개진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날 바라봤다.
“너무 기대하지는 말고... 그냥... 이야기로 들어. 니 문제로 받아들이는 것보다 그냥 주변의 다른 사람들의 문제 정도로... 가볍게... 솔직히 난 이게 이런 상황에서 적당한 말인지 아직도 모르겠어. 잔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을 것 같고...”
난 소주 한 잔을 입에 털어 놓고 말을 이어갔다.
“정상적으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갑자기 중심을 잃는 건, 그러니까 가슴 속에 심마같은 거 때문에 방황을 하고 고민하다 우울증에 걸리고, 회사를 그만두고, 이혼을 하고, 괴로워하다 병까지 생기고 그러는 건... 한 마디로 표현하면... 내면의 힘이 약한 거야. 무협지 같은 데서 읽을 수 있는 말로는 내공... ”
“내공?... 그런 게 실제 있어요? 그냥 중국영화 같은 데나 있는 거 아니에요?”
“응... 중국무술을 닦는 데 기초가 된다는 내공... 그 것과는 좀 다르지만 있어. 쫌 딱딱한 이야기지만 들어볼래? 여자들에게는 재미 없어.”
“제가 가진 문제와 관련이 있다면 무슨 이야기든 해줘요. 괜찮아요.”
“내공을 가장 단순하게 이야기하자면... 그건 중심을 잡는 힘이야. 말로 표현하니 아주 단순하게 들릴지 모르고, 좀 이상하지만 실생활에선 아주 다양한 형태로 볼 수 있어. 하지만 어떤 사람의 내공 수위라는 걸 읽기 위해서는 그 사람과 비슷한 수준의 내공 이상을 가지고 있어야 읽을 수 있어. 그보다 낮으면 읽기 힘들고...
어떤 걸 예로 들면 이해하기 쉬울까? 어쨌든 내공 수위가 높은 사람은 어떤 일을 해도 다른 사람보다 더 빨리 무언가를 성취하고 더 멀리 간다고 보면 돼. 니가 여자라서 무언가를 예로 들어 설명하기가 좀 힘들기는 한데...
그런데 그 중심을 잡는 힘, 즉 내공의 가장 기초가 되는 건 다양한 시각이야. 가치를 변화시킬 수 있는... 어렵지?“
“무슨 말인지.. 통.. 모르겠어요.”
“우리가 아는 사람들 중에는 한 가지 분야에서 다른 사람보다 월등한 능력을 보이는 사람이 있어. 예를 들면 김연아, 박지성, 류현진, 강수진... 이런 사람들은 스포츠 분야에서 초일류이고... 이 정도 되면 타고난 재능 외에 엄청난 내공이 필요한데....
지금 언급한 사람들이 일류 들 중에서 초일류로 갈 수 있는 걸 설명하기는 쉽지 않지만...일류들과는 약간 다른 종류의 시각이 있기 때문이야.
첫 번째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의 가치를 스스로 변화시킬 수 있는 시각... 물론 아주 어렸을 적부터 스포츠를 해온 사람들이라 이건 대부분의 일류들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아.
예를 들자면 피겨나 축구의 가치를 주변의 모든 것들과 비교해 가장 크게 두는 거야. 어린시절부터 운동을 해온 김연아나 박지성은 저절로 그렇게 되는 기연을 얻는 경우겠지만 그들도 운동을 해오는 동안 자신을 유혹하는 것들이 많이 있었겠지. 하지만 타협을 하지 않은 건 그 선수들에게 최고의 가치는 언제나 피겨나 축구였던 거야. 그래서 그 힘든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있었고... 재능만으로 되는 일은 아니겠지.
중간 과정에서 피겨나 축구 외에 다른 것들의 가치가 커진다면, 이를 테면 이성, 돈, 대중매체를 통한 인기 즉 예능이나 드라마, 영화 출연 같은 것들인데 그걸 조절 못하는 일류들은 거기서 끝나는 거야.
초일류가 가져야 하는 시각 중 두 번째가 진짜인데... 이걸 가지는 게 쉽지 않아. 어떻게 보면 내가 언급한 사람들의 공통점이기도 하고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초일류들이 모두 가지고 있긴 하지만...
풀어서 이야기하기가 쉽진 않은데... 첫 번째와 비교해서 설명하자면 아까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의 가치를 조절하는 시각이라면... 이번엔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변화시킬 수 있는 시각이야. 자신 스스로를 크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도 자연스럽고 자신이 아주 큰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도 가능해야 해...
내가 말하면서도 좀 말이 안 되는 말이긴 한데...
두 번째 시각이 부족하면 위기 상황에서 대처가 힘들어. 남들 앞에서 우뚝 섰던 지난날의 영광을 버리지 않으면 슬럼프 극복이 쉽지 않거든. 초일류들의 특징 중 하나가 잘난 체를 잘 못해. 그냥 그런 종류의 마음은 별로 없다고 보면 돼. 그냥 김연아는 떡볶이를 먹으면서 수다 떠는 걸 좋아하는 평범한 소녀였을 테고 박지성은 축구를 잘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앉아 있으면 있는 지도 잘 모를 정도로 조용할 거야.
사람들은 겸손하다고 말하지만 그냥 그 사람들은 자신을 평상시에는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링크에서, 그라운드에서, 무대에서는 스스로 최고의 전사로 변하는 거야.
그런 전사들도 자신이 속한 그 분야에서 힘들 때가 있지만... 그 걸 견딜 수 있는 건 작아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고... 원래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마음은 별로 없거든... 팬들의 무관심, 무시, 야유... 이런 것도 초일류들을 쓰러뜨리진 못한다고 보면 될 거야.
대충 이야기하기는 했는데 지금까지 한 말들이 이해가 안 되거나 별로 관심이 없거나... 아니면 내 생각과 다르다면... 더 이상은 말하기 힘들어. 이제 기초를 이야기 한 거니까...
이제 그만 할까?“
난 살짝 웃으며 지연을 바라봤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짓던 그녀가 미간을 약간 찌푸리더니 묻는다.
“그건 스포츠분야만 그런 건 아니죠? 다른 것도 다 포함된다는 거죠?”
“물론... 대부분... 거의 모든 분야라고 보면 돼.”
“잠깐만요. 나 노트하고 펜 좀 가져올게요. 적어도 돼요?”
“응? 뭘 적어? 내가 한 말을? 그냥 개똥철학이야. 니가 무슨 말이라도 해달라고 해서 하는 것 뿐이라고...”
“이런 이야기는 처음 들어서 그냥 몇 시간 지나면 잊어버릴 것 같아서 그래요. 적어 놓을래요.”
이런... 무슨 강의 듣냐? 적긴 뭘 적어. 난감하게 만드네... 대충 이야기하다 말라고 했었는데...
“앞으로도 더하란 말이야? 너 설마 내가 하는 말들이 재미있는 건 아니지?”
“약간 생소하긴 한데... 재미있어요. 호호... 발상 자체가 웃기는 걸요. 내공이라는 게 존재한다니...”
불과 몇 분전까지 눈이 빨개져서 울더니... 웃기는... 난 머리 아파 죽겠구만...
“조금만 더 이야기하자면 내공과 외공을 이야기 해야겠네... 내공은 사람들의 내면에 숨겨진 힘이라 더 무섭지만 잘 드러나질 않고 외공이 뛰어난 건 우리가 볼 수 있고 평가도 가능해. 아주 별개라고 볼 수는 없기 때문에 외공의 고수들은 어느 정도 내공도 가지고 있고...
하지만 어느 분야에서 한계에 부딪치게 될 때는 그 건 내공과 관련 있을 때가 많아. 실례를 들면 엄청난 외공으로 스타가 되긴 하지만 돈을 벌게 되고 유명해지게 된 후 한 순간에 사라지는 별들을 보면 돼. 그 사람들은 내공이 부족한 거라고 보면 대충 맞아.
어떤 난관에 부딪치는 순간 한 번 커져버린 자기 자신이 작아지는 걸 두려워하면서 무언가 한계를 드러내고 이상행동을 하거나 다른 길의 가치가 더 커보이는 순간 그 쪽으로 매진하게 되거든...
공무원으로 정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사업에 실패하는 것도 그런 이유인 경우가 꽤 있어. 현직에 있을 때 밑에 있는 사람들이 떠받들어 주기 때문에 너무 커져버린 자신이 간, 쓸개 다 내주고 덤벼야 하는 사업과 잘 안 맞는다는 걸 잘 모르거든...
내공 수위가 높은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실패를 받아들이는 속도가 빠르고 더 빨리 잊어. 그런 게 결국 어려운 상황에서 한 발씩 한 발씩 걸어 나올 수 있는 힘이 되는 거고...
너 스피치를 잘 한다고 했던가?“
“그럭저럭요. 제가 교육 같은 걸 하면 사람들이 많이 공감을 하고 좋아해요. 어느 정도 자신도 있고요.”
“그 걸 예로 들면 이해가 빠를지 모르겠는데...
보통 스피치 학원에서 가르치는 건 외공이라고 보면 돼. 말을 논리적으로 자신감 있고 설득력 있게 하는 걸 중요시 하고 처음이 중요해. 그리고 스펙도 중요하고... 또 뭐랄까 유머감각 같은 게 필요하고... 자리에 어울리는 의상 같은 것도...
내공의 고수들이 하는 스피치는 약간 달라. 처음엔 좀 모자라 보이기도 하고, 약간 더듬고, 떨리는 목소리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고... 뭔가 부자연스러워... 그리고 청중들에게 자신이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라는 말은 거의 하지 않아. 오히려 당신들과 비슷한 사람이라는 분위기를 자아내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사람들을 빨아들이는 힘과 열정이 드러나서 마지막에 감동을 주는 식이 되는데... 내공의 고수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경우가 많거든...“
“그건 왜 그런 거죠?”
“후후후... 잘 이해가 안 되나 보네. 다른 걸 예로 들걸 그랬나 보다.
외공은 그런 거야.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한 무언가를 드러내거나 보여줌으로써 누군가를 굴복시키는 것. 외공의 고수들은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 모두 나를 우러러 볼 거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거든. 그러니까 아무래도 아까 내가 이야기 한 것들이 중요해 지는 거야. 거기엔 외모도 큰 역할을 하고...
니가 스피치 하는 것을 들어본 적은 없지만 니가 교육을 할 때 그 걸 경청하지 않는 남자가 있을 까 싶다. 널 보고만 있어도 흐믓해져서 저절로 집중이 될 것 같아.
내공의 고수들은 스피치를 할 때 난 당신들을 교육할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그래서 내 이야기를 듣는 게 좋을 거라는, 그런 식의 분위기는 절대 풍기지 않아. 그냥 이 자리에 선 것만 해도 영광이라는 분위기를 만들고, 또 그런 식의 멘트를 하며 강의나 교육을 진행하다 사람들의 공감을 끌어 낸 후에 조금씩 조금씩 마음을 움직이지... 그건 각본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니까 자연스럽고...
아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니가 오해를 할지도 몰라서 덧붙인다면... 내가 원래 혼자 생각이 많고 다른 사람들을 많이 만나본 건 아니지만... 여자들 중에 너처럼 내공이 뛰어난 사람을 본 적은 별로 없어. 그 것도 비교적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예?... 무슨 말이에요?”
“혹시 책을 좋아해? 한 달 독서량이 어느 정도지?”
“지금은 많은 책을 못 보지만 중, 고등학교 때 대학 시절에도 책 보는 걸 좋아하긴 했어요. 그렇다고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할 정도로 많이 본 건 아니지만...”
“누구나 사람들은 내공을 가지고 있어. 수준이 다를 뿐이지만... 성인이 되고 누군가를 만나고 책을 읽고 취업을 하거나 사업을 하고 아이를 키우다보면 자기 나름대로의 내공이라는 것이 생기고 나이 사십 무렵이 되면 굳어져서 잘 변하지 않고...
문제는 자신이 내공을 키우고 싶다고 하더라도 가지고 있는 내공의 기초가 약간이라도 편협한 시각이라면 더 이상 키우기가 힘들다는 거지. 중심을 잃은 시각은 결국 벽에 부딪치는 경우가 많거든...
이제 너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꽤 괜찮은 직장에서 근무할테고... 외제차를 하나 더 가지고 있을 정도로 여유 있는 부자집의 무남독녀. 학창시절에 공부도 꽤 잘했을테고... 전국에서 몇 백 등 안에 들 정도로 수재였을거야. 전국 석차 상위 1% 이내...
맞아?“
“음.. 그렇긴 한데 제가 공부를 잘했었다고도 이야기 한 적이 있나요?”
“ 아니 중, 고등학교 학창시절 6년을 엄마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등,하교를 한 공부 외에는 아무 것도 모르는 맹꽁이였다고 이야기 한 적이 있어. 니 엄마는 공부만 잘하면 모든 게 쉬워진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던 분이었고... 내가 했던 이야기를 대부분 기억할 정도로 기억력도 좋다면... 아마도... 그리고 내 인적사항을 금방 알아내고 뒷조사를 할 수 있는 배경이 있는 직장일 가능성이 많은데... 니가 풍기는 이미지는 검찰이나 경찰, 혹은 법원 같은 곳에서 일하는 상당히 높은 직급의 엘리트 냄새가 나거든... 그래서 상위 1% 안에 들었을 거라고 생각했어.”
지연의 눈동자가 커졌다.
“어떻게 그걸...?”
“맞았다는 이야긴가? 처음 만나서 술을 마시러 갔을 때 경범죄라는 말을 사용하는 걸 보고 그냥 짐작했어. 보통 그런 말은 잘 쓰는 용어는 아니니까...
그런데 그런 건, 응... 그러니까 난 그런 스펙을 보고 내공이 뛰어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내가 너한테 놀란 건 나와의 관계에서 보여준 니 변화들 때문이었어. 누구 못지않은 스펙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나 같은 평범한 녀석에게 보여준 다른 대응들... 그건 자신의 마음을 움직이는 능력이 다른 사람들보다 월등해야 보여줄 수 있는 거니까.
처음 만났을 때는 한 차원 높은 사람인양 나를 무시하다가, 언젠가는 갑자기 존대를 하면서 시간을 내달라고 하다가, 그래서 그날 안양에서 모텔에 갔을 때는 화대를 달라는 농담을 할 정도로 아주 오래된 애인처럼 서슴없이 굴다가도, 얼마 후엔 보통 여자들이 자신의 집이 부자라는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 데 그런 이야기를 거리낌 없이 하더니 나와 잠을 잘 때 미녀와 야수의 미녀가 된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질 않나...
결정적으로 놀랐던 건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던 레스토랑에서였는데 만났을 때는 반말을 하다가 중간에 갑자기 존대하는 걸 봤을 때였어. 내공이 약한 사람은 그렇게 절대 못해. 그건 옆에서 볼 때는 쉬워 보일지 몰라도 어떤 식으로든 상대와의 싸움에서 주도권을 쥐기 위해서 움직이는 외공의 사고방식에서 보면 있을 수 없는 일에 가까워.
내공이 뛰어난 사람이 어떤 팀에 소속된다면 실력 외에 것들로 시너지효과를 가져오게 되는데 외공만 뛰어난 사람들이 팀을 구성한다면 상대팀도 이기고 싶지만 동료들 사이에서도 자신이 가장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 강하기 때문에 주변에 에너지가 넘치게 되면서 팀이 방향을 잃는 경우가 생기게 돼. 그럴 때는 구성원들 사이에 그런 에너지를 자연스럽게 받아 줄 수 있는, 즉 내공이 뛰어난 사람이 필요하고 또 감독의 경우 그런 흘러넘치는 에너지들을 다룰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내공을 가진 사람이 배치되야 하는 데 그런 건 잘 보이지 않는 거라 원인을 찾기가 힘들기 때문에 다른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경우가 많아.
더 실력이 뛰어나고 떠오르는 스타들을 영입해서 해결을 하는 게 쉬워 보이거든.
지금까지 내가 설명한 것들을 대충 알아들었으면 이제 니 문제를 이야기 해줄게. 알아듣겠어?“
“잠깐만요. 내가 내공이 뛰어나다고요? 전 내공이라는 말이 뭔지도 몰랐다구요.”
“내면의 힘이 강하다는 이야기야. 중심을 잡는 능력... 그냥 쉽게 내공이라고 불렀던 거라고.”
“알.. 알았어요. 계속 해보세요.”
“약간 부연 설명을 더하자면 외공이 뛰어난 사람은 이기는 걸 중요시한다고 보면 돼. 1등을 하고 상대를 눌러 버리는 걸... 내공이 뛰어난 사람은 지지 않는 걸 중요시해. 승부는 물론, 인생에서도... 실패를 기회로 바꿔 버릴 수 있는 건... 실패를 보는 시각을 바꾸기 때문이야. 자신의 아킬레스건을 찾았다는 식으로...
원균이 몇 백 척의 배를 잃어버린 후에 다시 삼도 수군통제사가 된 이순신이 신에게는 열 두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건 잃어버린 것 보다는 가지고 있는 것에 집중하면서 난세에 대처해 보겠다는 생각을 드러낸 건데...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뛰어난 내공을 가지고 계신 위인들 중 한 분이라고 보면 될 거야.
자신이 타인보다 강한 내면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어. 내공이 강하다고 생각하는 거지. 하지만 그 사람의 내공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건 위기 상황이야. 엄청난 압박을 받는 그 때 어떤 식으로 말하고 움직이는 가를 보면서 짐작을 하는 거지.
이제 니 문제를 말해 볼까?
그냥 단순히 이야기 하자면 그런 거야.
넌 니가 가진 상당한 내면의 힘으로도 극복이 거의 불가능한 만만치 않은 상황에 부딪쳤어. 그냥 그렇게 됐어. 아까 나한테 너에 대해 물어 보면 대답해 준다고 했던가? 너에 대해 관심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니라 난 아직도 내가 너에 대해 자세히 아는 게 두려워. 그런 게 부담이 되면 니가 날 떠나지 않을 까 싶어서...
근데 그런 질문들을 하지 않아도 그냥 이런 문제는 단순하게 정리할 수 있어. 그리고 해결방법도 의외로 단순해. 단순하다는 건 말로 하기 쉽다는 이야기고 실제로는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어려워. 그건 화살이 박힌 살을 찢어서 화살촉을 빼는 것과 비유하면 돼. 그것보다 더 어려워...
그래서 사람들이 더 쉬운 길을 택해. 정신 줄을 놓아버리고... 알코올이나 마약에 취하고... 우울증에 걸리거나 은둔 생활을 하고... 자살을 하지. 현실적으로 그 길이 더 쉽거든.“
여기까지 이야기하고 지연의 얼굴을 보자 눈에 초점이 잘 잡히지 않는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아마 다시 이유성과의 결혼 생활을 떠올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해결방법이 뭐죠?”
얼마 전에 사랑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럼 그 늪을 빠져나오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던 게 갑자기 생각났고 난 쓴 웃음이 나왔다.
“해결방법... 음...후유... 한숨 나온다. 말해주는 건 간단하지만... 너한테는 죽기보다 더 어려운 일일지도 모르는데...
다음에 말해주면 안 될까? 원래 내 나름대로 정리하고 사는 거긴 하지만 오랜 만에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엄청 피곤한데...“
“지금 그 걸 말이라고 해요? 여기까지 이야기 해놓고 다음에 이야기 한다는 게... 기다릴게요. 담배 한 대 피우고 와서 해요.”
난 식탁에서 일어나 베란다로 나갔다. 거실에서 피워도 상관은 없겠지만 머릿속이 복잡해졌기 때문이었다. 해결방법을 이야기 하는 건 간단하지만 그걸 지연은 듣지 않을 것이고 그럼 외려 지금 그녀가 선택한 방향으로 더 빨리 움직이려 할지 모른다. 그렇게 되면 지금도 다음 수가 보이지 않아 고민인데 더 빨리 움직인다면 대응 자체가 어렵다.
자신이 김유미에게 전화로 이야기 했듯이 이혼을 하려고 하는 그녀를 말 몇 마디로 돌려 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몇 잔 먹은 술은 이미 깬지 오래고 담배 맛도 느끼지 못한 채 난 고민에 빠져 있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를 꺼낸 게 실수인가? 엎질러진 물이고 시위를 떠난 화살이었다. 도망이라도 가야하는 상황인데 무슨 핑계를 대고 이 집을 나갈 것이며 지연 입장에서 보면 여기서 무언가를 말하지 않고 내가 가버리면 분노할 것이고 아까 이야기한대로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리려 할지도 모른다.
그걸 다시 열려면 어차피 말을 해야 하고, 말을 하면 그 말로 인해 다른 종류의 화가 날 수도 있고 역시 나를 달리 볼 것이다. 진퇴양난... 이젠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 게 유일한 수인가?
난 마음의 결정을 했다. 어차피 그녀와의 관계를 유지하고 싶기 때문에 망설이는 것뿐...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는다면 말을 해주는 게 당연한 상황이니...
다시 거실로 들어가 그녀에게 차 한 잔을 달라고 한 후 거실에 마주 앉았다.
“내공 수위가 높으면 높을수록 살면서 만나는 일들을 단순하게 해결하는 것도 가능하고 주변을 흐르는 것들을 좀 더 명확하게 바라보면서 대응하는 게 가능해져. 외공의 고수들이 강적들을 만나 쓰러지는 경우에도 내공의 고수들은 그런 적들에게 전혀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생존하게 되는 경우도 많고...
그렇다면 내면의 힘을 기르면 좋을 것 같지만 그 힘을, 즉 내공을 키우는 건 쉽지 않아. 그리고 자신의 마음 속에 기초가 약한 내공이 자리를 잡으면 더 높은 수준의 내공을 닦을 만한 시각이 없기 때문에 아예 불가능 하게 되고...
그래... 내공을 키우는 상식적인 방법은 인문 고전이나 철학 서적을 읽는 거라고 보면 돼. 요즘 그 걸 권장하는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고 이해할 수만 있다면 가장 빠른 방법일 수도 있겠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위대한 사상가들의 내공을 배울 수 있을 테니... 하지만 그 것 역시 아까 이야기 했듯이 내공 수위가 낮거나 기초부터 약한 내공을 가진 사람이 위인들의 내공을 이해하고 가져오려고 하는 것이 되고, 뱁새가 봉황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노력이 필요해.
그럼... 비상식적인 방법을 말한다면... 바로 이걸 말하기 위해 지금까지 많은 이야기들을 떠든 셈이고 무협지에서는 기연을 얻기 위한 길이 되는데 그건 바로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거야. 벼랑 끝으로...
쉽게 말하면 지금 너와 같은 상황에 맞닥뜨리는 거지. 도저히 해결이 안 되는... 그런 상황... 천길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져 숨만 붙어 있는 상황에서 그걸 기어올라 세상 바깥으로 나가려면 최소한 지금 가지고 있는 내공보다 훨씬 더 높은, 어떤 경우에는 몇 갑자의 내공이 필요하게 될 수도 있고, 어쨌든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서게 돼.“
“몇 갑자의 내공이요?”
“1갑자는 60년. 60년 정도 인생을 살아오면서 희로애락을 모두 경험해 본 노인이 가질 수 있는 내면의 힘. 그것의 몇 배되는 내공을 말해.
어쨌든 간에 넌 뜻하지 않게 절벽 아래로 떨어졌어. 그걸 다시 올라갈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니 삶이 많이 달라지겠지.
니 문제는 대충 이런 식으로 설명 가능해. 해결 방법은 지금까지 내가 한 말 중에 있는데 너무 단순하고... “
“그게 뭔데요?”
“중심을 잡을 수 있는 새로운 시각... 그게 필요해. 결국 그게 내면의 힘이거든. 생각을 바꾸는 게 죽기보다도 힘들 때가 많은 게 인생이고 보면 새로운 시각을 확보하는 건 뼈를 깎는 고통이 따를 수도 있어. 지금까지 니가 우울증에 걸리거나 마음을 다 잡지 못해 힘들었다는 게 그 반증이겠지.”
“새로운 시각? 구체적으로 설명해주면 안돼요? 대체 어떤 시각이 필요하다는 거죠?”
“음... 자꾸 묻기만 하면 어떻게 해? 이미 알고 있을 텐데...”
지연이 입을 다물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셈인가? 그녀는 이미 답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 답이 싫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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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글이 명절 이전에 가능할 지 모르겠습니다. 39부 내용이 너무 딱딱해서 애독자 수가 상당히 줄 것이 예상되긴 하지만 방향을 이렇게 잡아 가는 건 제 욕심입니다. 이해해주시길... ^^
아무 것도 말하지 않을 수는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도대체 내가 말해주길 원하는 건 뭐지?
“살다보면 자기 나름대로 무언가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시기가 오는 거지. 나이가 많든 적든 간에 많은 고민을 하고 이런 저런 경험을 겪게 되면... 니가 저번에 내게 물어온 사랑이라는 거... 그런 건 누구나 어떤 거라고 막연하게나마 생각하고 사는 거고..., 차라리 그런 걸 묻는다면... 그냥 내가 느꼈던 걸 이야기 해 볼 수도 있겠지만...
이건 좀 그래. 니가 힘든 시기를 보내고 우울했었던 이유를 너만큼, 아니 자기 자신만큼 잘 아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그걸 내게 묻고 대답을 하지 않는다고 마음을 닫겠다는 건 너무 억지 같은데...“
그 말을 하며 지연의 눈치를 보니 약간 화가 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다물고 있었다. 도대체 이 여자는 무슨 생각으로 나한테 그런 걸 묻는 거지?
“그래... 다 좋다... 구체적으로 듣고 싶은 게 뭔지 말해봐. 그런 이유라는 거 너무 막연한 거잖아.“
“잘 몰라요. 어쨌든 힘들었던 시기를 지나기 위해 명상이나 힐링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마음을 수양하는 거 말고... 다른 걸 말해줘요. 그런 시간들로 마음을 정화시켜보려고 해도 무언가가 가슴 속에서 치밀어 오르면 미칠 것 같단 말이에요.”
“마음의 상처라는 게 대부분 그렇잖아. 화상이나 무언가에 맞은 상처, 칼에 찔린 상처, 다리가 부러진 것처럼 보이는 거면 지금은 아프지만 병원에서 치료하는 거고 마음이 다친 거는 보이지 않으니까 치유가 쉽지 않은 거고.... 원래 그런 걸 내가 어떻게 말해 주냐고... 넌 몽둥이에 맞아서 기절했었던 거야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그럼 어떻게 해요? 그냥 아무 것도 하기 싫고 먹기도 싫고 무언가를 보기도 싫고 누군가와 만나기도 싫은 시간들이 계속 되는데... 그나마 아저씨라도 만나면 잠깐 제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은데... 남자에게 버림받은 여자들 다 이런 거 아니잖아요. 난 왜 이렇게 아픈 거죠? 죽고 싶은 기분도 든단 말이에요.
자식이라고는 나 하나밖에 없는 아빠, 엄마를 생각하기도 전에 당장 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걸 어떡해요?“
지연의 눈이 빨개지는 듯 하더니 이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흐느끼기 시작했다. 불과 몇 분 사이에 둘이서 오손 도손 소꿉장난을 하듯 밥을 먹었는데 갑자기 이게 뭔일인지... 다른 남자 때문에 가슴 아파 미치겠다는 여자를 달랜다고 안아주기도 뭐하고... 난감해졌다.
몰아내야 하나? 결국 칼을 빼야 하나? 마왕의 여자에게 새겨진 절대 마공을 치유하기엔 아직 내 힘이 역부족 인 것 같은데... 거기다 여자의 마음 속 변화를 모두 읽을 수는 없다. 어디를 어떻게 막고 어디로 밀어낸단 말인가? 씨발... 저절로 욕이 입 밖으로 흘러 나왔다. 이혼을 마무리하기도 전에 이정도 라면... 앞으로 다가올 일은 뭐냐?
“좋아. 니 문제가 뭔지 이야기 해줄게.”
떼쓰던 아이에게 갑자기 사탕을 준다고 하자 눈물을 그치고 엄마를 바라보는 것처럼 지연이 얼굴에서 손을 떼고 빨개진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날 바라봤다.
“너무 기대하지는 말고... 그냥... 이야기로 들어. 니 문제로 받아들이는 것보다 그냥 주변의 다른 사람들의 문제 정도로... 가볍게... 솔직히 난 이게 이런 상황에서 적당한 말인지 아직도 모르겠어. 잔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을 것 같고...”
난 소주 한 잔을 입에 털어 놓고 말을 이어갔다.
“정상적으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갑자기 중심을 잃는 건, 그러니까 가슴 속에 심마같은 거 때문에 방황을 하고 고민하다 우울증에 걸리고, 회사를 그만두고, 이혼을 하고, 괴로워하다 병까지 생기고 그러는 건... 한 마디로 표현하면... 내면의 힘이 약한 거야. 무협지 같은 데서 읽을 수 있는 말로는 내공... ”
“내공?... 그런 게 실제 있어요? 그냥 중국영화 같은 데나 있는 거 아니에요?”
“응... 중국무술을 닦는 데 기초가 된다는 내공... 그 것과는 좀 다르지만 있어. 쫌 딱딱한 이야기지만 들어볼래? 여자들에게는 재미 없어.”
“제가 가진 문제와 관련이 있다면 무슨 이야기든 해줘요. 괜찮아요.”
“내공을 가장 단순하게 이야기하자면... 그건 중심을 잡는 힘이야. 말로 표현하니 아주 단순하게 들릴지 모르고, 좀 이상하지만 실생활에선 아주 다양한 형태로 볼 수 있어. 하지만 어떤 사람의 내공 수위라는 걸 읽기 위해서는 그 사람과 비슷한 수준의 내공 이상을 가지고 있어야 읽을 수 있어. 그보다 낮으면 읽기 힘들고...
어떤 걸 예로 들면 이해하기 쉬울까? 어쨌든 내공 수위가 높은 사람은 어떤 일을 해도 다른 사람보다 더 빨리 무언가를 성취하고 더 멀리 간다고 보면 돼. 니가 여자라서 무언가를 예로 들어 설명하기가 좀 힘들기는 한데...
그런데 그 중심을 잡는 힘, 즉 내공의 가장 기초가 되는 건 다양한 시각이야. 가치를 변화시킬 수 있는... 어렵지?“
“무슨 말인지.. 통.. 모르겠어요.”
“우리가 아는 사람들 중에는 한 가지 분야에서 다른 사람보다 월등한 능력을 보이는 사람이 있어. 예를 들면 김연아, 박지성, 류현진, 강수진... 이런 사람들은 스포츠 분야에서 초일류이고... 이 정도 되면 타고난 재능 외에 엄청난 내공이 필요한데....
지금 언급한 사람들이 일류 들 중에서 초일류로 갈 수 있는 걸 설명하기는 쉽지 않지만...일류들과는 약간 다른 종류의 시각이 있기 때문이야.
첫 번째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의 가치를 스스로 변화시킬 수 있는 시각... 물론 아주 어렸을 적부터 스포츠를 해온 사람들이라 이건 대부분의 일류들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아.
예를 들자면 피겨나 축구의 가치를 주변의 모든 것들과 비교해 가장 크게 두는 거야. 어린시절부터 운동을 해온 김연아나 박지성은 저절로 그렇게 되는 기연을 얻는 경우겠지만 그들도 운동을 해오는 동안 자신을 유혹하는 것들이 많이 있었겠지. 하지만 타협을 하지 않은 건 그 선수들에게 최고의 가치는 언제나 피겨나 축구였던 거야. 그래서 그 힘든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있었고... 재능만으로 되는 일은 아니겠지.
중간 과정에서 피겨나 축구 외에 다른 것들의 가치가 커진다면, 이를 테면 이성, 돈, 대중매체를 통한 인기 즉 예능이나 드라마, 영화 출연 같은 것들인데 그걸 조절 못하는 일류들은 거기서 끝나는 거야.
초일류가 가져야 하는 시각 중 두 번째가 진짜인데... 이걸 가지는 게 쉽지 않아. 어떻게 보면 내가 언급한 사람들의 공통점이기도 하고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초일류들이 모두 가지고 있긴 하지만...
풀어서 이야기하기가 쉽진 않은데... 첫 번째와 비교해서 설명하자면 아까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의 가치를 조절하는 시각이라면... 이번엔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변화시킬 수 있는 시각이야. 자신 스스로를 크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도 자연스럽고 자신이 아주 큰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도 가능해야 해...
내가 말하면서도 좀 말이 안 되는 말이긴 한데...
두 번째 시각이 부족하면 위기 상황에서 대처가 힘들어. 남들 앞에서 우뚝 섰던 지난날의 영광을 버리지 않으면 슬럼프 극복이 쉽지 않거든. 초일류들의 특징 중 하나가 잘난 체를 잘 못해. 그냥 그런 종류의 마음은 별로 없다고 보면 돼. 그냥 김연아는 떡볶이를 먹으면서 수다 떠는 걸 좋아하는 평범한 소녀였을 테고 박지성은 축구를 잘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앉아 있으면 있는 지도 잘 모를 정도로 조용할 거야.
사람들은 겸손하다고 말하지만 그냥 그 사람들은 자신을 평상시에는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링크에서, 그라운드에서, 무대에서는 스스로 최고의 전사로 변하는 거야.
그런 전사들도 자신이 속한 그 분야에서 힘들 때가 있지만... 그 걸 견딜 수 있는 건 작아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고... 원래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마음은 별로 없거든... 팬들의 무관심, 무시, 야유... 이런 것도 초일류들을 쓰러뜨리진 못한다고 보면 될 거야.
대충 이야기하기는 했는데 지금까지 한 말들이 이해가 안 되거나 별로 관심이 없거나... 아니면 내 생각과 다르다면... 더 이상은 말하기 힘들어. 이제 기초를 이야기 한 거니까...
이제 그만 할까?“
난 살짝 웃으며 지연을 바라봤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짓던 그녀가 미간을 약간 찌푸리더니 묻는다.
“그건 스포츠분야만 그런 건 아니죠? 다른 것도 다 포함된다는 거죠?”
“물론... 대부분... 거의 모든 분야라고 보면 돼.”
“잠깐만요. 나 노트하고 펜 좀 가져올게요. 적어도 돼요?”
“응? 뭘 적어? 내가 한 말을? 그냥 개똥철학이야. 니가 무슨 말이라도 해달라고 해서 하는 것 뿐이라고...”
“이런 이야기는 처음 들어서 그냥 몇 시간 지나면 잊어버릴 것 같아서 그래요. 적어 놓을래요.”
이런... 무슨 강의 듣냐? 적긴 뭘 적어. 난감하게 만드네... 대충 이야기하다 말라고 했었는데...
“앞으로도 더하란 말이야? 너 설마 내가 하는 말들이 재미있는 건 아니지?”
“약간 생소하긴 한데... 재미있어요. 호호... 발상 자체가 웃기는 걸요. 내공이라는 게 존재한다니...”
불과 몇 분전까지 눈이 빨개져서 울더니... 웃기는... 난 머리 아파 죽겠구만...
“조금만 더 이야기하자면 내공과 외공을 이야기 해야겠네... 내공은 사람들의 내면에 숨겨진 힘이라 더 무섭지만 잘 드러나질 않고 외공이 뛰어난 건 우리가 볼 수 있고 평가도 가능해. 아주 별개라고 볼 수는 없기 때문에 외공의 고수들은 어느 정도 내공도 가지고 있고...
하지만 어느 분야에서 한계에 부딪치게 될 때는 그 건 내공과 관련 있을 때가 많아. 실례를 들면 엄청난 외공으로 스타가 되긴 하지만 돈을 벌게 되고 유명해지게 된 후 한 순간에 사라지는 별들을 보면 돼. 그 사람들은 내공이 부족한 거라고 보면 대충 맞아.
어떤 난관에 부딪치는 순간 한 번 커져버린 자기 자신이 작아지는 걸 두려워하면서 무언가 한계를 드러내고 이상행동을 하거나 다른 길의 가치가 더 커보이는 순간 그 쪽으로 매진하게 되거든...
공무원으로 정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사업에 실패하는 것도 그런 이유인 경우가 꽤 있어. 현직에 있을 때 밑에 있는 사람들이 떠받들어 주기 때문에 너무 커져버린 자신이 간, 쓸개 다 내주고 덤벼야 하는 사업과 잘 안 맞는다는 걸 잘 모르거든...
내공 수위가 높은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실패를 받아들이는 속도가 빠르고 더 빨리 잊어. 그런 게 결국 어려운 상황에서 한 발씩 한 발씩 걸어 나올 수 있는 힘이 되는 거고...
너 스피치를 잘 한다고 했던가?“
“그럭저럭요. 제가 교육 같은 걸 하면 사람들이 많이 공감을 하고 좋아해요. 어느 정도 자신도 있고요.”
“그 걸 예로 들면 이해가 빠를지 모르겠는데...
보통 스피치 학원에서 가르치는 건 외공이라고 보면 돼. 말을 논리적으로 자신감 있고 설득력 있게 하는 걸 중요시 하고 처음이 중요해. 그리고 스펙도 중요하고... 또 뭐랄까 유머감각 같은 게 필요하고... 자리에 어울리는 의상 같은 것도...
내공의 고수들이 하는 스피치는 약간 달라. 처음엔 좀 모자라 보이기도 하고, 약간 더듬고, 떨리는 목소리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고... 뭔가 부자연스러워... 그리고 청중들에게 자신이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라는 말은 거의 하지 않아. 오히려 당신들과 비슷한 사람이라는 분위기를 자아내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사람들을 빨아들이는 힘과 열정이 드러나서 마지막에 감동을 주는 식이 되는데... 내공의 고수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경우가 많거든...“
“그건 왜 그런 거죠?”
“후후후... 잘 이해가 안 되나 보네. 다른 걸 예로 들걸 그랬나 보다.
외공은 그런 거야.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한 무언가를 드러내거나 보여줌으로써 누군가를 굴복시키는 것. 외공의 고수들은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 모두 나를 우러러 볼 거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거든. 그러니까 아무래도 아까 내가 이야기 한 것들이 중요해 지는 거야. 거기엔 외모도 큰 역할을 하고...
니가 스피치 하는 것을 들어본 적은 없지만 니가 교육을 할 때 그 걸 경청하지 않는 남자가 있을 까 싶다. 널 보고만 있어도 흐믓해져서 저절로 집중이 될 것 같아.
내공의 고수들은 스피치를 할 때 난 당신들을 교육할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그래서 내 이야기를 듣는 게 좋을 거라는, 그런 식의 분위기는 절대 풍기지 않아. 그냥 이 자리에 선 것만 해도 영광이라는 분위기를 만들고, 또 그런 식의 멘트를 하며 강의나 교육을 진행하다 사람들의 공감을 끌어 낸 후에 조금씩 조금씩 마음을 움직이지... 그건 각본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니까 자연스럽고...
아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니가 오해를 할지도 몰라서 덧붙인다면... 내가 원래 혼자 생각이 많고 다른 사람들을 많이 만나본 건 아니지만... 여자들 중에 너처럼 내공이 뛰어난 사람을 본 적은 별로 없어. 그 것도 비교적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예?... 무슨 말이에요?”
“혹시 책을 좋아해? 한 달 독서량이 어느 정도지?”
“지금은 많은 책을 못 보지만 중, 고등학교 때 대학 시절에도 책 보는 걸 좋아하긴 했어요. 그렇다고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할 정도로 많이 본 건 아니지만...”
“누구나 사람들은 내공을 가지고 있어. 수준이 다를 뿐이지만... 성인이 되고 누군가를 만나고 책을 읽고 취업을 하거나 사업을 하고 아이를 키우다보면 자기 나름대로의 내공이라는 것이 생기고 나이 사십 무렵이 되면 굳어져서 잘 변하지 않고...
문제는 자신이 내공을 키우고 싶다고 하더라도 가지고 있는 내공의 기초가 약간이라도 편협한 시각이라면 더 이상 키우기가 힘들다는 거지. 중심을 잃은 시각은 결국 벽에 부딪치는 경우가 많거든...
이제 너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꽤 괜찮은 직장에서 근무할테고... 외제차를 하나 더 가지고 있을 정도로 여유 있는 부자집의 무남독녀. 학창시절에 공부도 꽤 잘했을테고... 전국에서 몇 백 등 안에 들 정도로 수재였을거야. 전국 석차 상위 1% 이내...
맞아?“
“음.. 그렇긴 한데 제가 공부를 잘했었다고도 이야기 한 적이 있나요?”
“ 아니 중, 고등학교 학창시절 6년을 엄마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등,하교를 한 공부 외에는 아무 것도 모르는 맹꽁이였다고 이야기 한 적이 있어. 니 엄마는 공부만 잘하면 모든 게 쉬워진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던 분이었고... 내가 했던 이야기를 대부분 기억할 정도로 기억력도 좋다면... 아마도... 그리고 내 인적사항을 금방 알아내고 뒷조사를 할 수 있는 배경이 있는 직장일 가능성이 많은데... 니가 풍기는 이미지는 검찰이나 경찰, 혹은 법원 같은 곳에서 일하는 상당히 높은 직급의 엘리트 냄새가 나거든... 그래서 상위 1% 안에 들었을 거라고 생각했어.”
지연의 눈동자가 커졌다.
“어떻게 그걸...?”
“맞았다는 이야긴가? 처음 만나서 술을 마시러 갔을 때 경범죄라는 말을 사용하는 걸 보고 그냥 짐작했어. 보통 그런 말은 잘 쓰는 용어는 아니니까...
그런데 그런 건, 응... 그러니까 난 그런 스펙을 보고 내공이 뛰어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내가 너한테 놀란 건 나와의 관계에서 보여준 니 변화들 때문이었어. 누구 못지않은 스펙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나 같은 평범한 녀석에게 보여준 다른 대응들... 그건 자신의 마음을 움직이는 능력이 다른 사람들보다 월등해야 보여줄 수 있는 거니까.
처음 만났을 때는 한 차원 높은 사람인양 나를 무시하다가, 언젠가는 갑자기 존대를 하면서 시간을 내달라고 하다가, 그래서 그날 안양에서 모텔에 갔을 때는 화대를 달라는 농담을 할 정도로 아주 오래된 애인처럼 서슴없이 굴다가도, 얼마 후엔 보통 여자들이 자신의 집이 부자라는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 데 그런 이야기를 거리낌 없이 하더니 나와 잠을 잘 때 미녀와 야수의 미녀가 된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질 않나...
결정적으로 놀랐던 건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던 레스토랑에서였는데 만났을 때는 반말을 하다가 중간에 갑자기 존대하는 걸 봤을 때였어. 내공이 약한 사람은 그렇게 절대 못해. 그건 옆에서 볼 때는 쉬워 보일지 몰라도 어떤 식으로든 상대와의 싸움에서 주도권을 쥐기 위해서 움직이는 외공의 사고방식에서 보면 있을 수 없는 일에 가까워.
내공이 뛰어난 사람이 어떤 팀에 소속된다면 실력 외에 것들로 시너지효과를 가져오게 되는데 외공만 뛰어난 사람들이 팀을 구성한다면 상대팀도 이기고 싶지만 동료들 사이에서도 자신이 가장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 강하기 때문에 주변에 에너지가 넘치게 되면서 팀이 방향을 잃는 경우가 생기게 돼. 그럴 때는 구성원들 사이에 그런 에너지를 자연스럽게 받아 줄 수 있는, 즉 내공이 뛰어난 사람이 필요하고 또 감독의 경우 그런 흘러넘치는 에너지들을 다룰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내공을 가진 사람이 배치되야 하는 데 그런 건 잘 보이지 않는 거라 원인을 찾기가 힘들기 때문에 다른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경우가 많아.
더 실력이 뛰어나고 떠오르는 스타들을 영입해서 해결을 하는 게 쉬워 보이거든.
지금까지 내가 설명한 것들을 대충 알아들었으면 이제 니 문제를 이야기 해줄게. 알아듣겠어?“
“잠깐만요. 내가 내공이 뛰어나다고요? 전 내공이라는 말이 뭔지도 몰랐다구요.”
“내면의 힘이 강하다는 이야기야. 중심을 잡는 능력... 그냥 쉽게 내공이라고 불렀던 거라고.”
“알.. 알았어요. 계속 해보세요.”
“약간 부연 설명을 더하자면 외공이 뛰어난 사람은 이기는 걸 중요시한다고 보면 돼. 1등을 하고 상대를 눌러 버리는 걸... 내공이 뛰어난 사람은 지지 않는 걸 중요시해. 승부는 물론, 인생에서도... 실패를 기회로 바꿔 버릴 수 있는 건... 실패를 보는 시각을 바꾸기 때문이야. 자신의 아킬레스건을 찾았다는 식으로...
원균이 몇 백 척의 배를 잃어버린 후에 다시 삼도 수군통제사가 된 이순신이 신에게는 열 두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건 잃어버린 것 보다는 가지고 있는 것에 집중하면서 난세에 대처해 보겠다는 생각을 드러낸 건데...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뛰어난 내공을 가지고 계신 위인들 중 한 분이라고 보면 될 거야.
자신이 타인보다 강한 내면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어. 내공이 강하다고 생각하는 거지. 하지만 그 사람의 내공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건 위기 상황이야. 엄청난 압박을 받는 그 때 어떤 식으로 말하고 움직이는 가를 보면서 짐작을 하는 거지.
이제 니 문제를 말해 볼까?
그냥 단순히 이야기 하자면 그런 거야.
넌 니가 가진 상당한 내면의 힘으로도 극복이 거의 불가능한 만만치 않은 상황에 부딪쳤어. 그냥 그렇게 됐어. 아까 나한테 너에 대해 물어 보면 대답해 준다고 했던가? 너에 대해 관심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니라 난 아직도 내가 너에 대해 자세히 아는 게 두려워. 그런 게 부담이 되면 니가 날 떠나지 않을 까 싶어서...
근데 그런 질문들을 하지 않아도 그냥 이런 문제는 단순하게 정리할 수 있어. 그리고 해결방법도 의외로 단순해. 단순하다는 건 말로 하기 쉽다는 이야기고 실제로는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어려워. 그건 화살이 박힌 살을 찢어서 화살촉을 빼는 것과 비유하면 돼. 그것보다 더 어려워...
그래서 사람들이 더 쉬운 길을 택해. 정신 줄을 놓아버리고... 알코올이나 마약에 취하고... 우울증에 걸리거나 은둔 생활을 하고... 자살을 하지. 현실적으로 그 길이 더 쉽거든.“
여기까지 이야기하고 지연의 얼굴을 보자 눈에 초점이 잘 잡히지 않는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아마 다시 이유성과의 결혼 생활을 떠올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해결방법이 뭐죠?”
얼마 전에 사랑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럼 그 늪을 빠져나오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던 게 갑자기 생각났고 난 쓴 웃음이 나왔다.
“해결방법... 음...후유... 한숨 나온다. 말해주는 건 간단하지만... 너한테는 죽기보다 더 어려운 일일지도 모르는데...
다음에 말해주면 안 될까? 원래 내 나름대로 정리하고 사는 거긴 하지만 오랜 만에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엄청 피곤한데...“
“지금 그 걸 말이라고 해요? 여기까지 이야기 해놓고 다음에 이야기 한다는 게... 기다릴게요. 담배 한 대 피우고 와서 해요.”
난 식탁에서 일어나 베란다로 나갔다. 거실에서 피워도 상관은 없겠지만 머릿속이 복잡해졌기 때문이었다. 해결방법을 이야기 하는 건 간단하지만 그걸 지연은 듣지 않을 것이고 그럼 외려 지금 그녀가 선택한 방향으로 더 빨리 움직이려 할지 모른다. 그렇게 되면 지금도 다음 수가 보이지 않아 고민인데 더 빨리 움직인다면 대응 자체가 어렵다.
자신이 김유미에게 전화로 이야기 했듯이 이혼을 하려고 하는 그녀를 말 몇 마디로 돌려 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몇 잔 먹은 술은 이미 깬지 오래고 담배 맛도 느끼지 못한 채 난 고민에 빠져 있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를 꺼낸 게 실수인가? 엎질러진 물이고 시위를 떠난 화살이었다. 도망이라도 가야하는 상황인데 무슨 핑계를 대고 이 집을 나갈 것이며 지연 입장에서 보면 여기서 무언가를 말하지 않고 내가 가버리면 분노할 것이고 아까 이야기한대로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리려 할지도 모른다.
그걸 다시 열려면 어차피 말을 해야 하고, 말을 하면 그 말로 인해 다른 종류의 화가 날 수도 있고 역시 나를 달리 볼 것이다. 진퇴양난... 이젠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 게 유일한 수인가?
난 마음의 결정을 했다. 어차피 그녀와의 관계를 유지하고 싶기 때문에 망설이는 것뿐...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는다면 말을 해주는 게 당연한 상황이니...
다시 거실로 들어가 그녀에게 차 한 잔을 달라고 한 후 거실에 마주 앉았다.
“내공 수위가 높으면 높을수록 살면서 만나는 일들을 단순하게 해결하는 것도 가능하고 주변을 흐르는 것들을 좀 더 명확하게 바라보면서 대응하는 게 가능해져. 외공의 고수들이 강적들을 만나 쓰러지는 경우에도 내공의 고수들은 그런 적들에게 전혀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생존하게 되는 경우도 많고...
그렇다면 내면의 힘을 기르면 좋을 것 같지만 그 힘을, 즉 내공을 키우는 건 쉽지 않아. 그리고 자신의 마음 속에 기초가 약한 내공이 자리를 잡으면 더 높은 수준의 내공을 닦을 만한 시각이 없기 때문에 아예 불가능 하게 되고...
그래... 내공을 키우는 상식적인 방법은 인문 고전이나 철학 서적을 읽는 거라고 보면 돼. 요즘 그 걸 권장하는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고 이해할 수만 있다면 가장 빠른 방법일 수도 있겠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위대한 사상가들의 내공을 배울 수 있을 테니... 하지만 그 것 역시 아까 이야기 했듯이 내공 수위가 낮거나 기초부터 약한 내공을 가진 사람이 위인들의 내공을 이해하고 가져오려고 하는 것이 되고, 뱁새가 봉황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노력이 필요해.
그럼... 비상식적인 방법을 말한다면... 바로 이걸 말하기 위해 지금까지 많은 이야기들을 떠든 셈이고 무협지에서는 기연을 얻기 위한 길이 되는데 그건 바로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거야. 벼랑 끝으로...
쉽게 말하면 지금 너와 같은 상황에 맞닥뜨리는 거지. 도저히 해결이 안 되는... 그런 상황... 천길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져 숨만 붙어 있는 상황에서 그걸 기어올라 세상 바깥으로 나가려면 최소한 지금 가지고 있는 내공보다 훨씬 더 높은, 어떤 경우에는 몇 갑자의 내공이 필요하게 될 수도 있고, 어쨌든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서게 돼.“
“몇 갑자의 내공이요?”
“1갑자는 60년. 60년 정도 인생을 살아오면서 희로애락을 모두 경험해 본 노인이 가질 수 있는 내면의 힘. 그것의 몇 배되는 내공을 말해.
어쨌든 간에 넌 뜻하지 않게 절벽 아래로 떨어졌어. 그걸 다시 올라갈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니 삶이 많이 달라지겠지.
니 문제는 대충 이런 식으로 설명 가능해. 해결 방법은 지금까지 내가 한 말 중에 있는데 너무 단순하고... “
“그게 뭔데요?”
“중심을 잡을 수 있는 새로운 시각... 그게 필요해. 결국 그게 내면의 힘이거든. 생각을 바꾸는 게 죽기보다도 힘들 때가 많은 게 인생이고 보면 새로운 시각을 확보하는 건 뼈를 깎는 고통이 따를 수도 있어. 지금까지 니가 우울증에 걸리거나 마음을 다 잡지 못해 힘들었다는 게 그 반증이겠지.”
“새로운 시각? 구체적으로 설명해주면 안돼요? 대체 어떤 시각이 필요하다는 거죠?”
“음... 자꾸 묻기만 하면 어떻게 해? 이미 알고 있을 텐데...”
지연이 입을 다물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셈인가? 그녀는 이미 답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 답이 싫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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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글이 명절 이전에 가능할 지 모르겠습니다. 39부 내용이 너무 딱딱해서 애독자 수가 상당히 줄 것이 예상되긴 하지만 방향을 이렇게 잡아 가는 건 제 욕심입니다. 이해해주시길... ^^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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