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손에 커피를 든 지훈이 휴게소에서 나왔다. 은영은 승용차를 향해 걸어오고 있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새삼스럽게 그녀는 그의 아기를 임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남편과 그의 존재가치는 전혀 다른 양면성이면서도 그녀에게는 각기 소중한 남자들이었다. 운전석에 올라앉은 그가 그녀에게 커피 잔을 건네주었다.
“자! 한잔 마시면 훨씬 따뜻할 거야.”
“...........!”
커피 잔을 받아드는 그녀는 어른스럽게 말하는 그가 더욱 믿음직스러웠다. 그녀는 커피 잔을 들고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을 호호 불면서 한 모금 마셨다. 어제 저녁 식사를 하지 않아서인지 짜르르한 촉감이 목줄을 타고 넘어갔다. 그들은 말없이 이따금 떨어지는 눈송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커피 한 모금을 삼킨 지훈은 은영을 곁눈질해서 살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녀의 눈동자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커피를 다 마신 그는 그녀의 어깨를 다시 토닥거려다. 그리고 기어를 풀고 천천히 가속페달을 밟았다. 침묵 속에 그는 아버지를 생각하던 그는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 슬픔에 잠겨있던 그녀는 피곤한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잠들어 있었다.
깜박 깊은 잠에 빠졌던 은영은 승용차가 멈추는 것 같은 느낌에 눈을 떴다. 승용차 앞 유리창으로 종합병원 응급실 마크가 선혈처럼 붉게 들어나 보였다. 그녀는 빤히 쳐다보고 있는 지훈을 의식했다. 막상 병원 앞에 도착하니 그녀는 두려웠다. 그리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생명이 위독하다는 남편의 모습이 떠오른 그녀는 부리나케 차에서 내렸다. 지훈은 달음박질하는 은영과 함께 응급실을 향해 뛰어갔다. 응급실에 들어간 그는 눈에 보이는 간호사를 붙들고
다급하게 물었다.
“저......! 장 민기씨가 입원한 병실이 어디 입니까?”
“장 민기씨요!? 아! 콘서트 현장에서 사고를 당해 구급차로 실려 오신 분요?”
“네.”
“중환자실로 간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간호사가 한쪽 복도를 가르쳤다. 지훈은 중환자병동 푯말이 걸린 복도로 뛰어갔다. 뒤돌아보니 은영이 거친 숨을 헐떡이며 뒤따라오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중환자 병동이 있는 층에서 내린 그는 간호사가 보이는 코너로 다가갔다. 서류를 정리하는 간호사에게 대뜸 물었다.
“장 민기씨, 입원 벙실요?”
“네.......!?”
“응급실에서 중환자실로 옮겼다는데요.”
“보호자 되세요?”
“네. 아들입니다.”
간호사가 지훈과 그의 옆에 서 있는 은영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리고 바인더의 차트를 들추어 보더니 머뭇거렸다. 간호사가 바짝 다가서는 은영을 힐끔 보고는 지훈을 향해 말했다.
“좀 전에 퇴실하셨는데요.”
“퇴실이라고요?”
“운명하셨어요. 안치실로 옮겨지셨어요.”
“.........!?”
간호사의 말에 지훈은 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없었다. 그 말을 들은 은영이 무너지듯이 주저앉는 것을 보고 그가 얼른 부축했다. 그는 얼굴이 하얗게 변한 그녀의 겨드랑이를 끌어안고 복도의 의자로 가서 앉혔다. 경황이 없었던 그는 그녀의 모습에 더욱 정신이 혼란했다.
당황한 지훈은 은영 옆에 다가앉으며 안절부절못했다. 그는 눈동자가 풀린 그녀의 등을 껴안았다. 사무적이던 간호사가 놀라서 물이 담긴 컵을 들고 왔다. 그가 간호사에게 물 컵을 건네받아 그녀에게 물을 마시게 했다. 물을 한 모금 마신 그녀가 숨을 몰아쉬는 것을 보고 간호사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괜찮으시겠어요?! 놀라셨나봐요.”
“.........!”
한동안 은영의 표정을 살피던 간호사가 안타까운 눈빛을 하고 테이블로 돌아갔다. 혈색이 돌아온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비틀거리더니 그의 어깨를 붙잡고 섰다. 인간은 왜 태어났는지 모른 채 태어났다고 한다. 그리고 왜 죽는지, 어떻게 죽어야 의미 있게 죽는지도 알지 못한 채 죽어간다고 한다. 어쩌면 인생 자체가 언제 맞이할지 모르는 죽음을 향해 한걸음씩 걸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은영의 양 볼에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녀는 결혼생활을 되돌아보면 진정으로 행복하다고 느껴보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행복해지려고 했던 순간들이 행복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또한 남편을 진심으로 사랑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남편의 죽음은 그녀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하는 것만 같았다.
엘리베이터로 지하층으로 내려간 그들은 안치실로 향하고 있었다. 안치실 대기실에는 정복과 사복 차림의 경찰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대기실로 들어서는 지훈과 은영에게로 향했다. 그들 중에는 박승민 경감도 있었다. 박 경감이 지훈이 부축하고 들어오는 은영을 살펴보면서 다가왔다.
“장 교수님, 사모님 되십니까? 저, 박 경감입니다.”
“네. 고마워요.”
의자에 앉아 있던 경찰들이 모두 일어섰다. 안치실로 향하는 출입문 안으로 시신보관함들이 캐비닛처럼 정리되어 있고 습한 공기가 흘러나왔다. 박 경감이 하얀 가운을 걸친 직원에게 눈짓을 했다.
“김 계장!”
박 경감의 지시를 받은 직원은 부검담당 직원이었다. 지훈과 은영은 김 계장의 안내를 받고 박 경감과 함께 안치실로 들어갔다. 모두들 시신보관함이 놓인 탁자를 둘러싸고 섰다. 김 계장이 보관함을 열고 하얀 무명포를 벗겨냈다. 은영은 남편의 시신을 내려다봤다. 일그러진 표정의 머리가 붕대로 칭칭 감겨있고 선혈자국이 선명했다.
“음.......!”
휘청거리는 은영을 지훈이 부축했다. 눈물이 글썽거리는 그녀는 한동안 남편의 시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대기실로 와서 박 경감이 지훈과 은영을 번갈아 보면서 부검을 하겠느냐고 물었다. 은영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죽은 남편을 다시 한 번 죽이는 심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박 경감에게 부탁했다.
“당분간, 언론에 노출되지 않도록 해 주셨으면 합니다만.......?”
“.........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박 경감이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을 했다. 은영은 남편이 어린여자를 만나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감추고 싶었다. 그것이 남편의 마지막 자존심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명예도 지켜줄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박 경감도 그녀의 뜻을 헤아렸는지 부하 직원에게 귓속말로 무엇인가 지시를 했다.
병원을 나온 지훈과 은영은 박 경감의 아내를 받고 경찰서로 향했다. 피로가 겹친 은영은 눈을 뜨기 힘들었다. 그때서야 떠오르기 시작한 태양으로 눈이 부셨다. 경찰서 조사과에는 피의자로 취조를 받은 사복차림의 학생들 세 명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검은색 밍크코트를 걸친 중년여인이 조사과로 들어서는 은영을 유심히 살폈다.
박 경감이 지훈과 은영을 소파로 안내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학생들을 한동안 노려봤다. 지훈은 그녀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보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실내의 정사복 경찰들이 분주하게 업무를 보고 있었다. 중년여인이 취조 담당 형사에게 가서 은영을 가르치며 무슨 말인가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주위를 둘러보던 은영은 세 명의 남학생들과 달리 혼자 앉아있는 나이어린 여자를 발견했다. 착 달라붙는 기모팬츠에 야생점퍼를 걸친 여학생이었다. 그 여학생은 의자 등거리에 엎드려 졸고 있었다. 자리에서 슬며시 일어난 은영은 책상 앞에서 서류를 들추어 보고 있는 박경감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여학생을 가리키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저, 학생이 혹시........!?”
“네. 송 지나요.”
박 경감은 언론에 노출되지 않게 해달라는 은영의 부탁을 상기하고 의미 있는 표정을 지었다. 은영은 돌아서서 천천히 지나를 향해 걸어갔다. 인기척을 느낀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한숨을 들이마신 은영이 그녀를 내려다봤다. 까맣고 큰 눈동자, 그리고 예쁘장한 얼굴에 보조개가 깊게 패여 깜찍해 보였다. 그녀 옆에 살며시 앉은 은영은 남편의 휴대폰 메시지에서 봤던 이름을 떠 올렸다.
“학생이 진아야?”
“네!? 아뇨! 지나요. 누구세요?”
은영은 당돌한 목소리로 되묻는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남편이 좋아했던 어린 여자였다. 은영은 문득 남편과 그녀가 발가벗고 있는 모습을 떠올리고 역겨움을 느꼈다. 남편과 한 침대에서 잠을 잤던 여자였다. 한편으로 은영은 같은 여자 입장으로 어린 그녀가 측은해 보였다.
“나.......! 장 교수님 아내 되는 사람이야.”
“네........!?”
당황한 지나가 벌어진 야생 점퍼 앞섶을 여미며 조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은영은 잠시 남편과 지나의 입장에서 생각을 했다. 무슨 말인가 하고 싶었는데, 입이 열리지 않았다. 지나는 신고 있는 부츠 뒤꿈치를 의자 다리에 툭툭 쳤다. 힐끔거리며 시선을 주고받던 지나가 종알거리듯이 작은 목소리를 흘렸다.
“아름다우셔요.......! 죄송...... 해요.”
“괜찮아........!”
“좋으신 분......! 이셨어요.”
“...........”
은영은 어눌한 목소리를 흘리는 지나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의 눈동자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은영은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 보면 현실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피해자 같았다. 부스스 일어난 은영은 지훈이 앉아 있는 소파로 돌아가서 앉았다. 그때 밍크코트를 걸친 중년부인이 은영을 따라왔다.
중년부인을 의아하게 바라보는 은영은 차림새로 보아 경제력이 꽤 있는 집안의 여자라는 느낌을 받았다. 중년부인이 정중한 자세로 은영 앞에 서서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책상위에서 서류를 정리하던 박 경감이 당황하는 표정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중년부인을 제지했다.
“준철 어머니! 이러시면 안 됩니다. 조사가 아직 안 끝났습니다.”
“그냥 놔두세요.”
은영이 박 경감에게 말했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중년부인이 조사를 받고 있는 학생의 어머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되도록 남편의 명예에 흠집이 나지 않도록 정리하고 싶었다. 은영을 쳐다보며 머뭇거리던 박 경감이 책상으로 돌아가고, 중년부인이 은영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 무릎을 꿇다시피 쭈그려 앉았다.
“준철이는 딸만 키우다가 나이 오십에 가진 아들입니다. 제 남편이 공무원인데. 망신이고, 남편이 알면 야단이 나요. 선처를 부탁할게요.”
“..........!?”
“자식가진 애미로서 부탁해요.제발......”
“저한테 이러지 마시고, 경찰에 선처를 바라세요.”
“어쨌든, 돌아가신 분의 안사람 되시는 모양인데. 어떻게 좀.......!”
준철 어머니는 아들이 독자라면서 간절한 표정으로 두서없는 말을 했다. 은영은 자식을 가진 어머니 입장에서 박 경감을 만류했으나 결국은 그녀가 판단을 내릴 문제가 아니어서 듣고만 있었다. 준철 어머니의 계속되는 말이 이어지고, 책상위의 서류를 들여다보던 박 경감이 힐끔 쳐다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서류를 챙겨든 박 경감이 소피로 다가왔다. 그리고 직원을 불러 준철의 어머니를 모시고 나가라고 지시했다. 은영과 마주앉은 그는 탁자위에 서류를 내려놓고 뒤적거렸다. 조사 서류를 훑어보던 박 경감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은영에게 위로의 말을 했다.
“저도 장 교수님에게 무척 사랑을 받던 제자입니다. 이런 일로 뵙게 되어 정말 송구스럽습니다.”
“아니요. 제가 고마워요.”
“음.......! 어떡하지요. 일단 학생들을 송치해야 되겠는데요.”
“그러지 마세요.”
“네.......!?”
“그냥 가볍게 처리하시고, 어린 학생들 상처받지 않게 해주세요. 그게 남편의 뜻인지도 몰라요.”
“하지만, 저 학생들은 습관적으로 몇 번 들어왔었습니다.”
“하여튼........! 남편 일로 학생들을 처리하기는 싫어요.”
“그러나.......!?”
“아네요. 부탁에요. 그리고 지나라는 여학생도 학교생활에 지장 받지 않게 돌려보내주세요.”
“사모님께서 그렇게까지 하시는데......! 음........!”
은영은 시선을 마주한 박 경감에게 고개를 가로저어 보였다. 그녀는 모든 것을 남편이 사고당하기 전으로 돌려놓고 싶었다. 그것이 죽은 남편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했다. 물론 남편의 사망 원인이 학생들의 직접적인 가해라고 볼 수만은 없었다. 그녀는 몇 가지 서류에 획인 사인을 하고 경찰서를 나왔다. 묵묵히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던 지훈은 자신이 너무 무능력하다는 것을 의식했다.
국내 환경에 완전히 적응되지 않은 지훈으로서는 사실 어떤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단지 그는 아버지를 잃은 서글픔 속에서 그녀를 의지하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녀를 승용차에 태우고 대로를 나와 음식점 간판들을 살폈다. 그는 큰 빌딩 주차장에 차를 주차시켰다. 아무래도 속이 불편할 그녀를 생각하고 죽을 파는 체인점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시선을 떨어트리고 그의 뒤를 따랐다.
며칠 후 민기의 시신이 서울로 운송되고 은영은 장례식을 치렀다. 호주의 시댁식구와 그녀의 친정 식구들도 참여했다. 예식장은 많은 조문객들로 붐볐고, 교수와 학계인사, 그리고 민기의 제자들, 학생들이 다녀갔다. 그녀의 시어머니는 불편한 몸을 끌고 와서 식사도 거르고 통곡을 했다. 은영은 시댁 식구들과 지인, 그리고 조문객들에게 남편이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했다. 물론 지훈에게도 그렇게 말하라고 당부했다.
은영은 남편을 화장하여 경기도 광주에 있는 야산에 안치했다. 남편이 소유하고 있던 땅이었다. 수진이 검은 소복으로 차려입고 무덤까지 동행했다. 그런데 눈치를 살피던 수진이 지훈 옆으로 다가섰다. 그녀는 초췌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그의 손에 무엇인가 쥐어주고 멀찌감치 떨어져 섰다. 그것은 그가 항상 착용하고 있던 목걸이에서 빠져나갔던 팬던트였다.
부산에서 올라온 준섭의 모습도 보였다. 매장이 끝나갈 무렵 은영은 먼발치에 다소곳이 서 있는 여학생을 발견했다. 그녀는 남편의 여자였던 지나였다. 은영과 시선이 마주친 지나가 눈동자를 반짝이더니 고개를 숙였다. 눈물을 글썽거리는 지나의 모습에 은영은 묘한 감정을 느꼈다.
모두들 무덤에서 떠나가고 지훈과 은영만이 남아 있었다. 은영과 둘만이 남은 지훈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미사리에 들렸다. 그는 그녀와 함께 흐르는 강물을 따라 걸었다. 아직도 찬바람이 불지만 제법 햇살이 따뜻했다. 그는 호주로 돌아가는 할머니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이냐는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하지 않았다. 단지 그는 그녀를 혼자 두고 떠날 수가 없었다.
지훈은 곁에서 걷고 있는 은영의 표정을 이따금 살폈다. 외투 깃을 올리고 걸음을 옮기는 그녀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렸다. 먼 산을 쳐다보는 그녀는 햇살에 눈이 부신지 긴 속눈썹을 깜박였다. 그녀는 어깨를 가볍게 팔로 감싸는 그를 올려다봤다. 그리고 그녀의 수척해진 얼굴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아기를 가졌다는 말을 그에게 해야 하는지 고민 중이었다. 아니면 영영 그녀 혼자의 비밀로 간직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들새 한 마리가 숲에서 푸드덕 날아올랐다. 그리고 원을 그리며 그들의 주위를 맴돌았다. 걸음을 옮기던 은영이 멈추어 서서 날갯짓하는 들새를 올려다봤다. 지훈도 걸음을 멈추고 날갯짓을 하는 들새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는 시선이 마주친 그녀에게 바짝 다가섰다. 은영은 햇살을 등지고 다가오는 지훈의 모습에 눈이 부셨다.
은영은 갈기 머리의 야생마처럼 열정 가득한 그의 눈빛에 소녀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녀는 슬며시 어깨를 당기는 그의 가슴에 안겼다. 그가 양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 내려다봤다. 그리고 그가 그녀의 입술을 찾았다. 가벼운 키스를 하고 그는 자신의 목걸이를 벗어 그녀의 목에 걸어주었다. 그의 생모가 세상과 이별하기 전에 그에게 남긴 유물이었다.
지훈을 올려다보던 은영이 목걸이의 팬던트를 들고 내려다봤다. 정열적인 붉은색의 루비로 조각된 장미가 아로새겨져 있었다. 다시 그를 빤히 올려다보는 그녀의 짙은 속눈썹이 흔들렸다. 그녀는 둥지를 찾는 들새처럼 날갯짓을 하며 하늘 높이 날아오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의 가슴속에서 질주하는 심장소리에 그녀는 아늑한 행복감에 젖었다.
“나, 있잖아.......!”
“.........!?”
지훈은 속이듯이 읊조리는 은영을 빤히 내려다봤다. 이슬을 머금은 듯이 반짝이는 그녀의 눈동자에 소녀처럼 수줍음이 묻어났다. 망설이던 그녀는 기어코 그의 아기를 가졌다는 것을 고백하려는 것이었다. 남성은 남성 나름의 의지가 있고, 여성은 여성 나름의 삶의 방식이 있다고 했다. 남자는 언제나 여자의 모든 것을 소유하려고 한다. 이것은 어리석은 허영심이라고 했다. 여자는 빈틈없는 본능을 지니고 있다.
여자의 본능은 사랑을 받는 것이다. 여자에게 사랑은 행복의 조건이다. 사랑은 우리들 삶에서 최초의 것이 아니라, 최후의 것이다. 사랑은 원인은 아니다. 그리고 사랑의 원인이 되는 것은 자기 마음속에 피어나는 감정의 불꽃을 들어내 보이는 것이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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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에는 마지막 달력이 걸려 있습니다. 소망하시던 일들 마무리 하시고 항상 햅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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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한잔 마시면 훨씬 따뜻할 거야.”
“...........!”
커피 잔을 받아드는 그녀는 어른스럽게 말하는 그가 더욱 믿음직스러웠다. 그녀는 커피 잔을 들고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을 호호 불면서 한 모금 마셨다. 어제 저녁 식사를 하지 않아서인지 짜르르한 촉감이 목줄을 타고 넘어갔다. 그들은 말없이 이따금 떨어지는 눈송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커피 한 모금을 삼킨 지훈은 은영을 곁눈질해서 살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녀의 눈동자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커피를 다 마신 그는 그녀의 어깨를 다시 토닥거려다. 그리고 기어를 풀고 천천히 가속페달을 밟았다. 침묵 속에 그는 아버지를 생각하던 그는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 슬픔에 잠겨있던 그녀는 피곤한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잠들어 있었다.
깜박 깊은 잠에 빠졌던 은영은 승용차가 멈추는 것 같은 느낌에 눈을 떴다. 승용차 앞 유리창으로 종합병원 응급실 마크가 선혈처럼 붉게 들어나 보였다. 그녀는 빤히 쳐다보고 있는 지훈을 의식했다. 막상 병원 앞에 도착하니 그녀는 두려웠다. 그리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생명이 위독하다는 남편의 모습이 떠오른 그녀는 부리나케 차에서 내렸다. 지훈은 달음박질하는 은영과 함께 응급실을 향해 뛰어갔다. 응급실에 들어간 그는 눈에 보이는 간호사를 붙들고
다급하게 물었다.
“저......! 장 민기씨가 입원한 병실이 어디 입니까?”
“장 민기씨요!? 아! 콘서트 현장에서 사고를 당해 구급차로 실려 오신 분요?”
“네.”
“중환자실로 간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간호사가 한쪽 복도를 가르쳤다. 지훈은 중환자병동 푯말이 걸린 복도로 뛰어갔다. 뒤돌아보니 은영이 거친 숨을 헐떡이며 뒤따라오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중환자 병동이 있는 층에서 내린 그는 간호사가 보이는 코너로 다가갔다. 서류를 정리하는 간호사에게 대뜸 물었다.
“장 민기씨, 입원 벙실요?”
“네.......!?”
“응급실에서 중환자실로 옮겼다는데요.”
“보호자 되세요?”
“네. 아들입니다.”
간호사가 지훈과 그의 옆에 서 있는 은영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리고 바인더의 차트를 들추어 보더니 머뭇거렸다. 간호사가 바짝 다가서는 은영을 힐끔 보고는 지훈을 향해 말했다.
“좀 전에 퇴실하셨는데요.”
“퇴실이라고요?”
“운명하셨어요. 안치실로 옮겨지셨어요.”
“.........!?”
간호사의 말에 지훈은 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없었다. 그 말을 들은 은영이 무너지듯이 주저앉는 것을 보고 그가 얼른 부축했다. 그는 얼굴이 하얗게 변한 그녀의 겨드랑이를 끌어안고 복도의 의자로 가서 앉혔다. 경황이 없었던 그는 그녀의 모습에 더욱 정신이 혼란했다.
당황한 지훈은 은영 옆에 다가앉으며 안절부절못했다. 그는 눈동자가 풀린 그녀의 등을 껴안았다. 사무적이던 간호사가 놀라서 물이 담긴 컵을 들고 왔다. 그가 간호사에게 물 컵을 건네받아 그녀에게 물을 마시게 했다. 물을 한 모금 마신 그녀가 숨을 몰아쉬는 것을 보고 간호사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괜찮으시겠어요?! 놀라셨나봐요.”
“.........!”
한동안 은영의 표정을 살피던 간호사가 안타까운 눈빛을 하고 테이블로 돌아갔다. 혈색이 돌아온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비틀거리더니 그의 어깨를 붙잡고 섰다. 인간은 왜 태어났는지 모른 채 태어났다고 한다. 그리고 왜 죽는지, 어떻게 죽어야 의미 있게 죽는지도 알지 못한 채 죽어간다고 한다. 어쩌면 인생 자체가 언제 맞이할지 모르는 죽음을 향해 한걸음씩 걸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은영의 양 볼에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녀는 결혼생활을 되돌아보면 진정으로 행복하다고 느껴보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행복해지려고 했던 순간들이 행복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또한 남편을 진심으로 사랑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남편의 죽음은 그녀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하는 것만 같았다.
엘리베이터로 지하층으로 내려간 그들은 안치실로 향하고 있었다. 안치실 대기실에는 정복과 사복 차림의 경찰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대기실로 들어서는 지훈과 은영에게로 향했다. 그들 중에는 박승민 경감도 있었다. 박 경감이 지훈이 부축하고 들어오는 은영을 살펴보면서 다가왔다.
“장 교수님, 사모님 되십니까? 저, 박 경감입니다.”
“네. 고마워요.”
의자에 앉아 있던 경찰들이 모두 일어섰다. 안치실로 향하는 출입문 안으로 시신보관함들이 캐비닛처럼 정리되어 있고 습한 공기가 흘러나왔다. 박 경감이 하얀 가운을 걸친 직원에게 눈짓을 했다.
“김 계장!”
박 경감의 지시를 받은 직원은 부검담당 직원이었다. 지훈과 은영은 김 계장의 안내를 받고 박 경감과 함께 안치실로 들어갔다. 모두들 시신보관함이 놓인 탁자를 둘러싸고 섰다. 김 계장이 보관함을 열고 하얀 무명포를 벗겨냈다. 은영은 남편의 시신을 내려다봤다. 일그러진 표정의 머리가 붕대로 칭칭 감겨있고 선혈자국이 선명했다.
“음.......!”
휘청거리는 은영을 지훈이 부축했다. 눈물이 글썽거리는 그녀는 한동안 남편의 시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대기실로 와서 박 경감이 지훈과 은영을 번갈아 보면서 부검을 하겠느냐고 물었다. 은영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죽은 남편을 다시 한 번 죽이는 심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박 경감에게 부탁했다.
“당분간, 언론에 노출되지 않도록 해 주셨으면 합니다만.......?”
“.........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박 경감이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을 했다. 은영은 남편이 어린여자를 만나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감추고 싶었다. 그것이 남편의 마지막 자존심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명예도 지켜줄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박 경감도 그녀의 뜻을 헤아렸는지 부하 직원에게 귓속말로 무엇인가 지시를 했다.
병원을 나온 지훈과 은영은 박 경감의 아내를 받고 경찰서로 향했다. 피로가 겹친 은영은 눈을 뜨기 힘들었다. 그때서야 떠오르기 시작한 태양으로 눈이 부셨다. 경찰서 조사과에는 피의자로 취조를 받은 사복차림의 학생들 세 명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검은색 밍크코트를 걸친 중년여인이 조사과로 들어서는 은영을 유심히 살폈다.
박 경감이 지훈과 은영을 소파로 안내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학생들을 한동안 노려봤다. 지훈은 그녀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보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실내의 정사복 경찰들이 분주하게 업무를 보고 있었다. 중년여인이 취조 담당 형사에게 가서 은영을 가르치며 무슨 말인가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주위를 둘러보던 은영은 세 명의 남학생들과 달리 혼자 앉아있는 나이어린 여자를 발견했다. 착 달라붙는 기모팬츠에 야생점퍼를 걸친 여학생이었다. 그 여학생은 의자 등거리에 엎드려 졸고 있었다. 자리에서 슬며시 일어난 은영은 책상 앞에서 서류를 들추어 보고 있는 박경감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여학생을 가리키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저, 학생이 혹시........!?”
“네. 송 지나요.”
박 경감은 언론에 노출되지 않게 해달라는 은영의 부탁을 상기하고 의미 있는 표정을 지었다. 은영은 돌아서서 천천히 지나를 향해 걸어갔다. 인기척을 느낀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한숨을 들이마신 은영이 그녀를 내려다봤다. 까맣고 큰 눈동자, 그리고 예쁘장한 얼굴에 보조개가 깊게 패여 깜찍해 보였다. 그녀 옆에 살며시 앉은 은영은 남편의 휴대폰 메시지에서 봤던 이름을 떠 올렸다.
“학생이 진아야?”
“네!? 아뇨! 지나요. 누구세요?”
은영은 당돌한 목소리로 되묻는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남편이 좋아했던 어린 여자였다. 은영은 문득 남편과 그녀가 발가벗고 있는 모습을 떠올리고 역겨움을 느꼈다. 남편과 한 침대에서 잠을 잤던 여자였다. 한편으로 은영은 같은 여자 입장으로 어린 그녀가 측은해 보였다.
“나.......! 장 교수님 아내 되는 사람이야.”
“네........!?”
당황한 지나가 벌어진 야생 점퍼 앞섶을 여미며 조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은영은 잠시 남편과 지나의 입장에서 생각을 했다. 무슨 말인가 하고 싶었는데, 입이 열리지 않았다. 지나는 신고 있는 부츠 뒤꿈치를 의자 다리에 툭툭 쳤다. 힐끔거리며 시선을 주고받던 지나가 종알거리듯이 작은 목소리를 흘렸다.
“아름다우셔요.......! 죄송...... 해요.”
“괜찮아........!”
“좋으신 분......! 이셨어요.”
“...........”
은영은 어눌한 목소리를 흘리는 지나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의 눈동자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은영은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 보면 현실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피해자 같았다. 부스스 일어난 은영은 지훈이 앉아 있는 소파로 돌아가서 앉았다. 그때 밍크코트를 걸친 중년부인이 은영을 따라왔다.
중년부인을 의아하게 바라보는 은영은 차림새로 보아 경제력이 꽤 있는 집안의 여자라는 느낌을 받았다. 중년부인이 정중한 자세로 은영 앞에 서서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책상위에서 서류를 정리하던 박 경감이 당황하는 표정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중년부인을 제지했다.
“준철 어머니! 이러시면 안 됩니다. 조사가 아직 안 끝났습니다.”
“그냥 놔두세요.”
은영이 박 경감에게 말했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중년부인이 조사를 받고 있는 학생의 어머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되도록 남편의 명예에 흠집이 나지 않도록 정리하고 싶었다. 은영을 쳐다보며 머뭇거리던 박 경감이 책상으로 돌아가고, 중년부인이 은영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 무릎을 꿇다시피 쭈그려 앉았다.
“준철이는 딸만 키우다가 나이 오십에 가진 아들입니다. 제 남편이 공무원인데. 망신이고, 남편이 알면 야단이 나요. 선처를 부탁할게요.”
“..........!?”
“자식가진 애미로서 부탁해요.제발......”
“저한테 이러지 마시고, 경찰에 선처를 바라세요.”
“어쨌든, 돌아가신 분의 안사람 되시는 모양인데. 어떻게 좀.......!”
준철 어머니는 아들이 독자라면서 간절한 표정으로 두서없는 말을 했다. 은영은 자식을 가진 어머니 입장에서 박 경감을 만류했으나 결국은 그녀가 판단을 내릴 문제가 아니어서 듣고만 있었다. 준철 어머니의 계속되는 말이 이어지고, 책상위의 서류를 들여다보던 박 경감이 힐끔 쳐다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서류를 챙겨든 박 경감이 소피로 다가왔다. 그리고 직원을 불러 준철의 어머니를 모시고 나가라고 지시했다. 은영과 마주앉은 그는 탁자위에 서류를 내려놓고 뒤적거렸다. 조사 서류를 훑어보던 박 경감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은영에게 위로의 말을 했다.
“저도 장 교수님에게 무척 사랑을 받던 제자입니다. 이런 일로 뵙게 되어 정말 송구스럽습니다.”
“아니요. 제가 고마워요.”
“음.......! 어떡하지요. 일단 학생들을 송치해야 되겠는데요.”
“그러지 마세요.”
“네.......!?”
“그냥 가볍게 처리하시고, 어린 학생들 상처받지 않게 해주세요. 그게 남편의 뜻인지도 몰라요.”
“하지만, 저 학생들은 습관적으로 몇 번 들어왔었습니다.”
“하여튼........! 남편 일로 학생들을 처리하기는 싫어요.”
“그러나.......!?”
“아네요. 부탁에요. 그리고 지나라는 여학생도 학교생활에 지장 받지 않게 돌려보내주세요.”
“사모님께서 그렇게까지 하시는데......! 음........!”
은영은 시선을 마주한 박 경감에게 고개를 가로저어 보였다. 그녀는 모든 것을 남편이 사고당하기 전으로 돌려놓고 싶었다. 그것이 죽은 남편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했다. 물론 남편의 사망 원인이 학생들의 직접적인 가해라고 볼 수만은 없었다. 그녀는 몇 가지 서류에 획인 사인을 하고 경찰서를 나왔다. 묵묵히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던 지훈은 자신이 너무 무능력하다는 것을 의식했다.
국내 환경에 완전히 적응되지 않은 지훈으로서는 사실 어떤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단지 그는 아버지를 잃은 서글픔 속에서 그녀를 의지하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녀를 승용차에 태우고 대로를 나와 음식점 간판들을 살폈다. 그는 큰 빌딩 주차장에 차를 주차시켰다. 아무래도 속이 불편할 그녀를 생각하고 죽을 파는 체인점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시선을 떨어트리고 그의 뒤를 따랐다.
며칠 후 민기의 시신이 서울로 운송되고 은영은 장례식을 치렀다. 호주의 시댁식구와 그녀의 친정 식구들도 참여했다. 예식장은 많은 조문객들로 붐볐고, 교수와 학계인사, 그리고 민기의 제자들, 학생들이 다녀갔다. 그녀의 시어머니는 불편한 몸을 끌고 와서 식사도 거르고 통곡을 했다. 은영은 시댁 식구들과 지인, 그리고 조문객들에게 남편이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했다. 물론 지훈에게도 그렇게 말하라고 당부했다.
은영은 남편을 화장하여 경기도 광주에 있는 야산에 안치했다. 남편이 소유하고 있던 땅이었다. 수진이 검은 소복으로 차려입고 무덤까지 동행했다. 그런데 눈치를 살피던 수진이 지훈 옆으로 다가섰다. 그녀는 초췌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그의 손에 무엇인가 쥐어주고 멀찌감치 떨어져 섰다. 그것은 그가 항상 착용하고 있던 목걸이에서 빠져나갔던 팬던트였다.
부산에서 올라온 준섭의 모습도 보였다. 매장이 끝나갈 무렵 은영은 먼발치에 다소곳이 서 있는 여학생을 발견했다. 그녀는 남편의 여자였던 지나였다. 은영과 시선이 마주친 지나가 눈동자를 반짝이더니 고개를 숙였다. 눈물을 글썽거리는 지나의 모습에 은영은 묘한 감정을 느꼈다.
모두들 무덤에서 떠나가고 지훈과 은영만이 남아 있었다. 은영과 둘만이 남은 지훈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미사리에 들렸다. 그는 그녀와 함께 흐르는 강물을 따라 걸었다. 아직도 찬바람이 불지만 제법 햇살이 따뜻했다. 그는 호주로 돌아가는 할머니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이냐는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하지 않았다. 단지 그는 그녀를 혼자 두고 떠날 수가 없었다.
지훈은 곁에서 걷고 있는 은영의 표정을 이따금 살폈다. 외투 깃을 올리고 걸음을 옮기는 그녀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렸다. 먼 산을 쳐다보는 그녀는 햇살에 눈이 부신지 긴 속눈썹을 깜박였다. 그녀는 어깨를 가볍게 팔로 감싸는 그를 올려다봤다. 그리고 그녀의 수척해진 얼굴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아기를 가졌다는 말을 그에게 해야 하는지 고민 중이었다. 아니면 영영 그녀 혼자의 비밀로 간직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들새 한 마리가 숲에서 푸드덕 날아올랐다. 그리고 원을 그리며 그들의 주위를 맴돌았다. 걸음을 옮기던 은영이 멈추어 서서 날갯짓하는 들새를 올려다봤다. 지훈도 걸음을 멈추고 날갯짓을 하는 들새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는 시선이 마주친 그녀에게 바짝 다가섰다. 은영은 햇살을 등지고 다가오는 지훈의 모습에 눈이 부셨다.
은영은 갈기 머리의 야생마처럼 열정 가득한 그의 눈빛에 소녀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녀는 슬며시 어깨를 당기는 그의 가슴에 안겼다. 그가 양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 내려다봤다. 그리고 그가 그녀의 입술을 찾았다. 가벼운 키스를 하고 그는 자신의 목걸이를 벗어 그녀의 목에 걸어주었다. 그의 생모가 세상과 이별하기 전에 그에게 남긴 유물이었다.
지훈을 올려다보던 은영이 목걸이의 팬던트를 들고 내려다봤다. 정열적인 붉은색의 루비로 조각된 장미가 아로새겨져 있었다. 다시 그를 빤히 올려다보는 그녀의 짙은 속눈썹이 흔들렸다. 그녀는 둥지를 찾는 들새처럼 날갯짓을 하며 하늘 높이 날아오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의 가슴속에서 질주하는 심장소리에 그녀는 아늑한 행복감에 젖었다.
“나, 있잖아.......!”
“.........!?”
지훈은 속이듯이 읊조리는 은영을 빤히 내려다봤다. 이슬을 머금은 듯이 반짝이는 그녀의 눈동자에 소녀처럼 수줍음이 묻어났다. 망설이던 그녀는 기어코 그의 아기를 가졌다는 것을 고백하려는 것이었다. 남성은 남성 나름의 의지가 있고, 여성은 여성 나름의 삶의 방식이 있다고 했다. 남자는 언제나 여자의 모든 것을 소유하려고 한다. 이것은 어리석은 허영심이라고 했다. 여자는 빈틈없는 본능을 지니고 있다.
여자의 본능은 사랑을 받는 것이다. 여자에게 사랑은 행복의 조건이다. 사랑은 우리들 삶에서 최초의 것이 아니라, 최후의 것이다. 사랑은 원인은 아니다. 그리고 사랑의 원인이 되는 것은 자기 마음속에 피어나는 감정의 불꽃을 들어내 보이는 것이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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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에는 마지막 달력이 걸려 있습니다. 소망하시던 일들 마무리 하시고 항상 햅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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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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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 2016-08-1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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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 황진이-19금 성인놀이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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