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꽤 흘러갔지만 지연은 입을 열지 않았다. 여기서 내가 무슨 말을 해 줄 순 없다. 난 답을 말할 처지가 되지 않는다. 다른 인연들처럼 이혼으로 간단히 마음이 정리될 수 있었다면 이유성과 지연의 사이는 이미 남남이었을 것이다. 지연이 이혼을 결심한 이유는 녀석에 대한 감정이 정리되어 그런 것이 아니고 이유성 옆에 있는 시간들이 너무 비참해서 가능성이 크다.
난 이대로 흘러가기를 원했다. 아무 일 없는 듯이... 내가 그녀에게 그 말을 한다면 지연은 싫다고 할 것이다. 내가 지연에게 녀석과 이별하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까? 그렇게 말하면 그녀가 달리 생각할 여지가 있겠지만 명분이 없다. 그리고 이미 이혼을 하겠다는 결심을 굳힌 상태이며 그 때문에 감정 변화가 심한 상태라 섣불리 건드릴 수는 없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 지연이 입을 열었다.
“헤어지는 게 답이 아닌가..? 아저씨는 참 이상한 사람이네요. 제가 이혼을 하면 아저씨에게는 좋은 거 아닌가요?
결국 아직 내면의 힘이 약하지만 그 사람과의 관계를 정리하는 게 아니라 그 관계 속에서 중심을 잡으라는 이야기군요. 그 걸 이야기하기가 힘드니까 내공을 들먹이면서 돌려서 말한거구요.
그 사람 옆에서 한 없이 작아지더라도 그 옆에 있어라. 그게 아저씨가 제게 하고 싶은 말이군요.
결국 제 문제는 그 사람을 강제해서 제 곁에 두려했기 때문에 생긴 거네요. 그럼...
다른 여자들이 몇 명 있는지는 잘 몰라요. 결혼 생활을 시작하기 전에도, 그 이후에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한 명은 아닌 것 같더군요. 신혼 때도 절 안아준 시간은 일주일에 하루 정도였어요. 그리고 그게 나중엔 한 달에 한 두 번이 됐고요.
그 사람 아직도 절 누나라고 불러요. 같이 있을 때는 저를 위해 모든 걸 해주죠. 하지만 저와 싸울 때도 함부로 한 적은 한 번도 없는 사람이에요. 그냥 제가 소리치고 그 사람은 미안하다고 하는 게 우리가 싸우는 모습이에요.
저한테 이혼을 하자고 한 지 벌써 2년이 넘었어요. 그 사람 입에서 누나 우리 이혼해요라는 말을 들었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어요. 난 그냥 날 더 사랑해달라고... 한 건데...
그래서 지난 2년 동안은 제대로 화도 한 번 못 내보고 살았어요. 그냥 가끔 집에 와서 같이 밥 먹고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안아주는 걸로 만족하면서... 그런데 몇 달 전에 너무 오랫동안 집에 오지 않아서 그 사람이 운영하는 스포츠용품점 밖에서 기다리다 몰래 뒤를 따라 간 적이 있었죠.
그 날 아저씨를 만났어요. 그 여자는... 그... 김유미라는 여자는 그 사람의 누나예요. 비록 재혼을 한 부부가 각자 따로 낳은. 피한방울 섞이지 않은 사이지만...
아주 오랫동안 힘들었지만... 그나마 내가 모르는 여자들이고 내 눈앞에서 벌어진 일은 아니었으니까... 그냥 버티면서 살았는데... 너무 어이가 없어서... 아저씨에게 안겼고... 화가 좀 풀렸어요. 나도 이런 게 가능한 여자구나... 바람이라는 거 남들만의 이야기는 아니구나...
며칠이 흐른 후에 다시 그 곳에 갔어요. 혹시 그 시간에 그 사람과 형님이 같이 있다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들긴 했지만 남자가 그리웠어요. 아저씨를 다시 만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왜 들었는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형님과 아저씨가 같이 있는 걸 보고 나서는.. 너무 화가 났어요. 왜... 내 남편도 빼앗아 가더니... 아저씨마저 형님과 그런 사이 일 줄은 꿈에도 몰랐거든요.
아저씨는 잘 모르는 것 같은데 겉으론 무뚝뚝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아주 착하고 어린아이 같은 눈빛이 모성 본능을 자극하는 지 자꾸 생각이 나게 만들어요. 본인은 평범한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자주 하는데 여자들은 나만 바라봐 줄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아저씨 같은 타입 좋아해요.
아마 아저씨를 만나지 못했다면 그 사람과 헤어져야겠다는 생각까지는 안했을 것 같아요. 하지만... 꽤 오랜 시간 동안 그 사람 옆에서 아팠어요. 제가 그 사람을 잊고 마음을 추스릴때 까지만 제 옆에 있어줄래요?
지금처럼 가끔 만나서 이야기하고 안아주고 그러면 되요. 아저씨보다 더 저를 봐주지 않는 남편과도 5년을 살았는걸요.“
하나를 가르치면 둘을 안다더니... 지연은 내가 그녀에게 던진 답은 니가 알고 있다고 한 말의 뜻이 뭐였는지 대부분 이해하고 있었다. 그 말을 직접 할 수 없어서 빙빙 돌려서 이야기한 것까지...
“소주 한 잔 더 해야겠어. 술이 다 깨버렸어.”
지연이 김치찌개를 데웠고 우린 같이 술을 마셨다.
“나이가 이십 대 후반에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어. 난 왜 이렇게 감정 기복이 없을까 하고.. 너무 슬픈 상황인 것 같은 데 그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거야. 그래서 한동안 감동적인 영화만 보러 다니기도 했는데 그 땐 결정적인 순간에 눈물이 나오더라고.
내가 주인공인 인생에서 만나는 슬픈 순간에는 감정이 북받치지 않더니 다른 사람의 인생이야기인 영화를 보면서 눈물이 난다니... 어이가 없는 거야. 그래서... 한참 동안 이유를 생각한 적이 있어.
이유를 짐작하겠어?“
“글쎄요. 왜 그런 것도 있잖아요. 너무 슬프면 눈물도 나오지 않는 거... 그 비슷한 거 아닐까요?”
“몰라. 그럴 수도 있나? 그런 장면을 본 적 있는 것 같긴 한데 난 아냐... 하긴 나두 이렇게 생각해 본적도 있어. 혹시 내가 너무 힘든 인생을 살아오다 보니 감정이 메말라 버린 게 아닌지...”
“ 저두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있거든요. 왜 6.25 전쟁 때 일가족이 모두 죽고 자신만 살아남은 할머니였는데 나중에 재혼한 남편이 암투병 하는 걸 병간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남들은 모두 고생하신다고 이야기하는 데... 자기는 별로 그런 걸 못 느끼시는 것 같더라구요. 살아있는 것만 해도... 고맙대요.”
“응... 나도 가끔 그런 분들을 보긴 했는데... 난 그 것도 아니었어. 굴곡 있는 인생이라고 할 만한 대단한 사건도 없었고... 그 고민이 몇 년을 가더군. 그래도 꽤 만족할 만한 답을 찾았는데...”
“그게 뭔데요? 재미있을 것 같은데...”
“재미는... 무슨... 아주 재미없어. 가장 근접한 답이라고 찾은 게 뭐냐면... 내 인생에 대한 자신감이 없어서... 그거였어. 그래서... 내가 주인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거야. 주인공이 되어야 눈물도 나고 호탕하게 웃고... 그러면서 세상을 살텐데... 난 그러질 못한 거지. 후후... 어때... 슬프지?”
“음... 그건 처음 들어요. 그런데... 그 것도 저하고 상관 있는 말인가요?”
“응? 별 의도 없이 한 말이야. 하긴... 갖다 붙이면 그것도 연관은 있겠다. 우울한 감정도... 슬픈 감정과 완전히 동떨어진 건 아니니까.”
“호호.. 그럼 전 주인공 의식이 강해서... 그런 건가요?”
그 말을 하는 지연의 표정이 편해 보였다. 아까 자신의 과거를 내게 이야기 한 후 마음이 안정된 듯...
“그런 의미가 되나? 니 앞에선 숭늉도 못 마시겠다. 너무 빨라... 갑자기 그 이야기가 떠오른 건... 아까 니가 난 다른 사람을 볼 것 같지 않다고 여자들은 그런 남자를 좋아한다고 했지?
그 말 듣고 나니... 살아오면서 내 주위에 있었던 여자들이 전부 그래서 내게 호감을 가졌나 싶은 거야. 그런데 정작 난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럼 어떻게 생각했는데요?”
“글세... 다른 생각을 했던 건 분명한데... 그게 뭐였을까? 어쨌든.. 그건 아닌데...”
“엉터리... 너무 많아서... 기억도 제대로 못하는 군요.”
“응? 그게 그렇게 되나?”
“호호호... 야수 취급하다 칭찬 한 번 해줬더니... 아주... 본색을 드러내시네.”
난 조용히 미소를 지었고... 우린 냉장고에 있는 소주를 다 비운 후에 침실로 들어가 서로를 탐했다. 지연은 끊임없이 날 흥분시키며 자신의 깊숙한 곳까지 받아들이기 위해 하얗고 긴 다리를 한껏 벌렸다.
우리가 사랑을 나누는 동안 그녀의 눈빛 속에서 언뜻 비치곤 했던 이유성을 이 밤엔 찾을 수 없었다. 지연은 날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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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남해로 돌아오는 차안에서 앞으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고민했다. 민현규가 이야기를 하며 무언가를 약간 숨겼을 가능성은 충분히 남아 있지만 5년이 지난 일을 말하는 사람의 기억만으로 풀어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미정이가 혹시 누군가에 의해 살해를 당한 건 아닐까하는 의혹까지 생기고 있었다. 열 여섯 어린 나이에 어떻게 보면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을 첫 남자 사이에 생긴 아픔도 극복한 아이인데... 그 것과 비교하면 나와의 사이에 일어나는 일은 비일비재한 일 아닌가?
휴게소에 차를 세운 나는 형사계에 근무하는 선배인 전준현 경장에게 전화를 했다.
“형님... 저 석훈입니다. 잘 계시죠?”
“응... 휴직중인 놈이 웬 안부전화냐? 별일 없지?”
“예... 뭐 물어볼게 있어서요. 저희 관내 00다방 아가씨 자살했던 사건 있죠? 김미정이라는... 기억나세요?”
“응.. 나.. 그 때 현장 나갔잖아. 기억나고 말고... 왜?”
“그 아가씨 농약먹고 자살한 거 맞아요? 혹시 누가 억지로 먹인 건 아니죠? 왜... 그 농약이 음료수 색깔이라 착각하고 먹을 수도 있고..”
“야... 그게 지금 몇 개월 전 사건인데 이제야 그걸 물어보냐? 빨리도 묻는다. 그 거 자살맞아. 우리 도착했을 때 그때까지 살아 있었거든... 내가 물어봤어. 김미정씨. 농약 죽으려고 먹었어요? 맞아요? 고개를 끄덕이더라고... 약을 먹고 쓴 건지 몰라도 간단히 유서도 적어놨고... 근데... 2시간 있다 사망했고... 본인이 자살했다는 데... 더 이상 알아보고 말 것도 없어서 사건 종결됐어.
아마 우리가 도착했을 때 죽어 있었다면 이런 저런 조사를 더 했겠지만... 성폭행 검사라든지... 주변 탐문도... 목이 타들어가서 말을 하긴 힘들었었고 그래서 종이하고 펜을 손에 쥐어 줬거든. 혹시 무슨 할 말 있으면 쓰라고... 억울한 일을 당했거나... 그랬더니 눈물을 흘리며 울기는 하는 데 아무 것도 안 썼어.
그런 상황이라면 누군가와 성관계를 했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농약을 먹은 거라 별 의미 없잖아. 그래서... 야! 누가 그러던데 너랑 가까운 사이였다고... 넌 그 것도 몰라서 이제야 전화해서 묻고 있냐?“
“아... 예... 몰랐어요. 아무도 이야기를 안 해 줘서요... 이제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나저러나 너 진짜 그 애랑 무슨 사이였냐? 듣기론 동거했다고 하던데... 맞아? 너한테 채이고 그 것 때문에 자살했다고도 하고...”
“아.. 예... 다음에 만나면 말씀드릴게요. 그럼 수고하십시오.”
“알았다. 빨리 복직해라. 휴직기간이 너무 길면 승진에도 지장이 많아.”
“예...”
미정이는 마지막 순간에 살아 있었고 형사들이 내민 종이에 울면서 아무 것도 쓰지 않았다. 자살이다. 그런데 뭔가 석연치 않았다. 그 애가 남긴 마지막 종이엔 세상이 싫고 남자가 싫다라고 쓰여 있었고 그 남자가 나라면... 그렇다면 무언가가 약했다. 자살로 가게 만든 결정적인 동기가 없는 것이다.
난 당시 그 애를 피하고 있었고 그 날 내가 미정이에게 가지 않은 것 때문에 농약을 스스로 먹는다는 설정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미정이는 내가 자신이 기다리는 다방으로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예상을 어느 정도는 했을 텐데...
갑자기 미정이는 내가 아닌 다른 남자와 무슨 일이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만난 남자가 있다면 녀석을 찾아야 한다. 다시 차에 올라타서 남해로 출발했다.
미정이의 집에 도착한 후 할머니께 부탁을 드리고 미정이의 핸드폰을 받아 남해시 소재지로 나왔다. 난 죽기 전 마지막에 누가 그 애와 통화를 했는지 궁금했다. 그 날 미정이가 통화를 시도한 남자가 나밖에 없다면 믿기는 싫지만 그 애의 자살은 내가 약속을 어긴 것 때문이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누군가 다른 남자가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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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모니터가 깨져서 한동안 멘붕이었습니다. 다음편 절반 이상 적어놓았었거든요.
어쨌든 하드만 빼서 복원하고 다시 올립니다.
끝은 봐야하니...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난 이대로 흘러가기를 원했다. 아무 일 없는 듯이... 내가 그녀에게 그 말을 한다면 지연은 싫다고 할 것이다. 내가 지연에게 녀석과 이별하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까? 그렇게 말하면 그녀가 달리 생각할 여지가 있겠지만 명분이 없다. 그리고 이미 이혼을 하겠다는 결심을 굳힌 상태이며 그 때문에 감정 변화가 심한 상태라 섣불리 건드릴 수는 없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 지연이 입을 열었다.
“헤어지는 게 답이 아닌가..? 아저씨는 참 이상한 사람이네요. 제가 이혼을 하면 아저씨에게는 좋은 거 아닌가요?
결국 아직 내면의 힘이 약하지만 그 사람과의 관계를 정리하는 게 아니라 그 관계 속에서 중심을 잡으라는 이야기군요. 그 걸 이야기하기가 힘드니까 내공을 들먹이면서 돌려서 말한거구요.
그 사람 옆에서 한 없이 작아지더라도 그 옆에 있어라. 그게 아저씨가 제게 하고 싶은 말이군요.
결국 제 문제는 그 사람을 강제해서 제 곁에 두려했기 때문에 생긴 거네요. 그럼...
다른 여자들이 몇 명 있는지는 잘 몰라요. 결혼 생활을 시작하기 전에도, 그 이후에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한 명은 아닌 것 같더군요. 신혼 때도 절 안아준 시간은 일주일에 하루 정도였어요. 그리고 그게 나중엔 한 달에 한 두 번이 됐고요.
그 사람 아직도 절 누나라고 불러요. 같이 있을 때는 저를 위해 모든 걸 해주죠. 하지만 저와 싸울 때도 함부로 한 적은 한 번도 없는 사람이에요. 그냥 제가 소리치고 그 사람은 미안하다고 하는 게 우리가 싸우는 모습이에요.
저한테 이혼을 하자고 한 지 벌써 2년이 넘었어요. 그 사람 입에서 누나 우리 이혼해요라는 말을 들었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어요. 난 그냥 날 더 사랑해달라고... 한 건데...
그래서 지난 2년 동안은 제대로 화도 한 번 못 내보고 살았어요. 그냥 가끔 집에 와서 같이 밥 먹고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안아주는 걸로 만족하면서... 그런데 몇 달 전에 너무 오랫동안 집에 오지 않아서 그 사람이 운영하는 스포츠용품점 밖에서 기다리다 몰래 뒤를 따라 간 적이 있었죠.
그 날 아저씨를 만났어요. 그 여자는... 그... 김유미라는 여자는 그 사람의 누나예요. 비록 재혼을 한 부부가 각자 따로 낳은. 피한방울 섞이지 않은 사이지만...
아주 오랫동안 힘들었지만... 그나마 내가 모르는 여자들이고 내 눈앞에서 벌어진 일은 아니었으니까... 그냥 버티면서 살았는데... 너무 어이가 없어서... 아저씨에게 안겼고... 화가 좀 풀렸어요. 나도 이런 게 가능한 여자구나... 바람이라는 거 남들만의 이야기는 아니구나...
며칠이 흐른 후에 다시 그 곳에 갔어요. 혹시 그 시간에 그 사람과 형님이 같이 있다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들긴 했지만 남자가 그리웠어요. 아저씨를 다시 만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왜 들었는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형님과 아저씨가 같이 있는 걸 보고 나서는.. 너무 화가 났어요. 왜... 내 남편도 빼앗아 가더니... 아저씨마저 형님과 그런 사이 일 줄은 꿈에도 몰랐거든요.
아저씨는 잘 모르는 것 같은데 겉으론 무뚝뚝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아주 착하고 어린아이 같은 눈빛이 모성 본능을 자극하는 지 자꾸 생각이 나게 만들어요. 본인은 평범한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자주 하는데 여자들은 나만 바라봐 줄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아저씨 같은 타입 좋아해요.
아마 아저씨를 만나지 못했다면 그 사람과 헤어져야겠다는 생각까지는 안했을 것 같아요. 하지만... 꽤 오랜 시간 동안 그 사람 옆에서 아팠어요. 제가 그 사람을 잊고 마음을 추스릴때 까지만 제 옆에 있어줄래요?
지금처럼 가끔 만나서 이야기하고 안아주고 그러면 되요. 아저씨보다 더 저를 봐주지 않는 남편과도 5년을 살았는걸요.“
하나를 가르치면 둘을 안다더니... 지연은 내가 그녀에게 던진 답은 니가 알고 있다고 한 말의 뜻이 뭐였는지 대부분 이해하고 있었다. 그 말을 직접 할 수 없어서 빙빙 돌려서 이야기한 것까지...
“소주 한 잔 더 해야겠어. 술이 다 깨버렸어.”
지연이 김치찌개를 데웠고 우린 같이 술을 마셨다.
“나이가 이십 대 후반에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어. 난 왜 이렇게 감정 기복이 없을까 하고.. 너무 슬픈 상황인 것 같은 데 그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거야. 그래서 한동안 감동적인 영화만 보러 다니기도 했는데 그 땐 결정적인 순간에 눈물이 나오더라고.
내가 주인공인 인생에서 만나는 슬픈 순간에는 감정이 북받치지 않더니 다른 사람의 인생이야기인 영화를 보면서 눈물이 난다니... 어이가 없는 거야. 그래서... 한참 동안 이유를 생각한 적이 있어.
이유를 짐작하겠어?“
“글쎄요. 왜 그런 것도 있잖아요. 너무 슬프면 눈물도 나오지 않는 거... 그 비슷한 거 아닐까요?”
“몰라. 그럴 수도 있나? 그런 장면을 본 적 있는 것 같긴 한데 난 아냐... 하긴 나두 이렇게 생각해 본적도 있어. 혹시 내가 너무 힘든 인생을 살아오다 보니 감정이 메말라 버린 게 아닌지...”
“ 저두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있거든요. 왜 6.25 전쟁 때 일가족이 모두 죽고 자신만 살아남은 할머니였는데 나중에 재혼한 남편이 암투병 하는 걸 병간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남들은 모두 고생하신다고 이야기하는 데... 자기는 별로 그런 걸 못 느끼시는 것 같더라구요. 살아있는 것만 해도... 고맙대요.”
“응... 나도 가끔 그런 분들을 보긴 했는데... 난 그 것도 아니었어. 굴곡 있는 인생이라고 할 만한 대단한 사건도 없었고... 그 고민이 몇 년을 가더군. 그래도 꽤 만족할 만한 답을 찾았는데...”
“그게 뭔데요? 재미있을 것 같은데...”
“재미는... 무슨... 아주 재미없어. 가장 근접한 답이라고 찾은 게 뭐냐면... 내 인생에 대한 자신감이 없어서... 그거였어. 그래서... 내가 주인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거야. 주인공이 되어야 눈물도 나고 호탕하게 웃고... 그러면서 세상을 살텐데... 난 그러질 못한 거지. 후후... 어때... 슬프지?”
“음... 그건 처음 들어요. 그런데... 그 것도 저하고 상관 있는 말인가요?”
“응? 별 의도 없이 한 말이야. 하긴... 갖다 붙이면 그것도 연관은 있겠다. 우울한 감정도... 슬픈 감정과 완전히 동떨어진 건 아니니까.”
“호호.. 그럼 전 주인공 의식이 강해서... 그런 건가요?”
그 말을 하는 지연의 표정이 편해 보였다. 아까 자신의 과거를 내게 이야기 한 후 마음이 안정된 듯...
“그런 의미가 되나? 니 앞에선 숭늉도 못 마시겠다. 너무 빨라... 갑자기 그 이야기가 떠오른 건... 아까 니가 난 다른 사람을 볼 것 같지 않다고 여자들은 그런 남자를 좋아한다고 했지?
그 말 듣고 나니... 살아오면서 내 주위에 있었던 여자들이 전부 그래서 내게 호감을 가졌나 싶은 거야. 그런데 정작 난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럼 어떻게 생각했는데요?”
“글세... 다른 생각을 했던 건 분명한데... 그게 뭐였을까? 어쨌든.. 그건 아닌데...”
“엉터리... 너무 많아서... 기억도 제대로 못하는 군요.”
“응? 그게 그렇게 되나?”
“호호호... 야수 취급하다 칭찬 한 번 해줬더니... 아주... 본색을 드러내시네.”
난 조용히 미소를 지었고... 우린 냉장고에 있는 소주를 다 비운 후에 침실로 들어가 서로를 탐했다. 지연은 끊임없이 날 흥분시키며 자신의 깊숙한 곳까지 받아들이기 위해 하얗고 긴 다리를 한껏 벌렸다.
우리가 사랑을 나누는 동안 그녀의 눈빛 속에서 언뜻 비치곤 했던 이유성을 이 밤엔 찾을 수 없었다. 지연은 날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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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남해로 돌아오는 차안에서 앞으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고민했다. 민현규가 이야기를 하며 무언가를 약간 숨겼을 가능성은 충분히 남아 있지만 5년이 지난 일을 말하는 사람의 기억만으로 풀어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미정이가 혹시 누군가에 의해 살해를 당한 건 아닐까하는 의혹까지 생기고 있었다. 열 여섯 어린 나이에 어떻게 보면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을 첫 남자 사이에 생긴 아픔도 극복한 아이인데... 그 것과 비교하면 나와의 사이에 일어나는 일은 비일비재한 일 아닌가?
휴게소에 차를 세운 나는 형사계에 근무하는 선배인 전준현 경장에게 전화를 했다.
“형님... 저 석훈입니다. 잘 계시죠?”
“응... 휴직중인 놈이 웬 안부전화냐? 별일 없지?”
“예... 뭐 물어볼게 있어서요. 저희 관내 00다방 아가씨 자살했던 사건 있죠? 김미정이라는... 기억나세요?”
“응.. 나.. 그 때 현장 나갔잖아. 기억나고 말고... 왜?”
“그 아가씨 농약먹고 자살한 거 맞아요? 혹시 누가 억지로 먹인 건 아니죠? 왜... 그 농약이 음료수 색깔이라 착각하고 먹을 수도 있고..”
“야... 그게 지금 몇 개월 전 사건인데 이제야 그걸 물어보냐? 빨리도 묻는다. 그 거 자살맞아. 우리 도착했을 때 그때까지 살아 있었거든... 내가 물어봤어. 김미정씨. 농약 죽으려고 먹었어요? 맞아요? 고개를 끄덕이더라고... 약을 먹고 쓴 건지 몰라도 간단히 유서도 적어놨고... 근데... 2시간 있다 사망했고... 본인이 자살했다는 데... 더 이상 알아보고 말 것도 없어서 사건 종결됐어.
아마 우리가 도착했을 때 죽어 있었다면 이런 저런 조사를 더 했겠지만... 성폭행 검사라든지... 주변 탐문도... 목이 타들어가서 말을 하긴 힘들었었고 그래서 종이하고 펜을 손에 쥐어 줬거든. 혹시 무슨 할 말 있으면 쓰라고... 억울한 일을 당했거나... 그랬더니 눈물을 흘리며 울기는 하는 데 아무 것도 안 썼어.
그런 상황이라면 누군가와 성관계를 했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농약을 먹은 거라 별 의미 없잖아. 그래서... 야! 누가 그러던데 너랑 가까운 사이였다고... 넌 그 것도 몰라서 이제야 전화해서 묻고 있냐?“
“아... 예... 몰랐어요. 아무도 이야기를 안 해 줘서요... 이제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나저러나 너 진짜 그 애랑 무슨 사이였냐? 듣기론 동거했다고 하던데... 맞아? 너한테 채이고 그 것 때문에 자살했다고도 하고...”
“아.. 예... 다음에 만나면 말씀드릴게요. 그럼 수고하십시오.”
“알았다. 빨리 복직해라. 휴직기간이 너무 길면 승진에도 지장이 많아.”
“예...”
미정이는 마지막 순간에 살아 있었고 형사들이 내민 종이에 울면서 아무 것도 쓰지 않았다. 자살이다. 그런데 뭔가 석연치 않았다. 그 애가 남긴 마지막 종이엔 세상이 싫고 남자가 싫다라고 쓰여 있었고 그 남자가 나라면... 그렇다면 무언가가 약했다. 자살로 가게 만든 결정적인 동기가 없는 것이다.
난 당시 그 애를 피하고 있었고 그 날 내가 미정이에게 가지 않은 것 때문에 농약을 스스로 먹는다는 설정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미정이는 내가 자신이 기다리는 다방으로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예상을 어느 정도는 했을 텐데...
갑자기 미정이는 내가 아닌 다른 남자와 무슨 일이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만난 남자가 있다면 녀석을 찾아야 한다. 다시 차에 올라타서 남해로 출발했다.
미정이의 집에 도착한 후 할머니께 부탁을 드리고 미정이의 핸드폰을 받아 남해시 소재지로 나왔다. 난 죽기 전 마지막에 누가 그 애와 통화를 했는지 궁금했다. 그 날 미정이가 통화를 시도한 남자가 나밖에 없다면 믿기는 싫지만 그 애의 자살은 내가 약속을 어긴 것 때문이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누군가 다른 남자가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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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모니터가 깨져서 한동안 멘붕이었습니다. 다음편 절반 이상 적어놓았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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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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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 2016-08-11 | ||
접속일 | 2024-11-20 | ||
서명 | 황진이-19금 성인놀이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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