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로의 좌측 3번방에 들어온 명진과 수영은 침대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벽에 걸린 시간은 9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지켜보는 사람들에게는 짧겠지만, 정작 게임의 당사자들에게는 매우 긴 하루였다.
“긴... 하루 같아.”
수영이 말을 했다. 그리고 수영의 말을 알아들은 명진이 그녀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차마 내색은 하지 않고 있었지만 명진은 수영이 두 번째 게임의 피해자로서 상상할 수도 없는 유린을 당했음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마음속으로는 분노가 끓어올랐지만, 수영이 죄책감 가지게 될까봐 명진은 입을 아꼈다.
“... 괜찮아. 이겨냈으니까... 그리고 걱정하지 마.”
명진이 굳이 말을 하지 않았지만, 수영은 명진의 고통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먼저 입을 열었다. 불편한 진실이었지만, 남편인 명진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수영의 말을 들은 명진이 수화를 통해서 그녀에게 자신의 의견을 전했다. 그리고 수영은 자신을 걱정하는 명진에게 애써 밝은 미소를 보여 주었다.
“그리고... 반지를 잠시 맡겼어... 그 남자에게...”
명진은 그때서야 수영의 왼손 약지에 반지가 없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명진도 당황하며 빠른 손놀림으로 수영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 우리가 배신할까 봐... 못 믿겠대. 그래서 반지를 주래. 3라운드 게임이 종료가 되면... 돌려준다고 하니까... 걱정 마. 그건 나에게 가장 소중한 반지니까.”
명진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다시 두 손을 움직였다. 그리고 수영이 그 모습을 보고 대답했다.
“나도 그 사람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아... 아니... 싫다고 하는 게 맞을 거야. 아까 수영 언니 부부에게는 그 사람이 도와줬으니... 우리도 도와야 한다고 말하긴 했지만... 그보다는 반지 문제가 더 커... 돌려받아야 하니까... 어쩔 수 없지만 6번 부부와 함께 가야 해...”
명진은 수영의 왼손 약지에 반지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매우 불안해하고 있었다. 세 번째 게임만 잘 진행되면 반지를 돌려받을 수 있다지만, 명진에게 있어서는 반지를 돌려받고 못 받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함이 명진의 몸을 감싸왔다.
“불안하다고? 걱정 마. 다 잘 될 거야.”
수영이 명진을 안심시키려 했다. 그러나 명진의 가슴은 여전히 무언가에 쫓기고 있었다. 명진이 쉴 새 없이 두 손을 교차시키며 수화를 하고 있었다.
“... 아니야...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우리는 서영 언니 부부와 함께 4라운드에 진출할 거야. 세 번째 게임은 별거 아닌 거 다 알잖아. 이미 서로 이야기를 끝내놨으니까... 그리고 나도 강해질 거야. 내일 우리 지혜 얼굴 봐야 하잖아. 나쁜 생각 하지 말자. 응... 다 잘 될 거야.”
명진은 딸인 지혜의 얼굴이 떠올랐다. 목숨과도 못 바꾸는 사랑하는 딸이었지만, 그만큼 불쌍한 딸이기도 했다. 나이라는 말도 우스울 정도의 어린 아기가 백혈병이라니...
“그래... 그러니까 자기도 자신감을 가져. 우리는 이겨낼 수 있어.”
마을 마친 수영이 명진을 두 팔 벌려 안아주었다. 그러자 명진은 조금씩 가슴이 진정되어 가는 것을 느꼈다.
“내일 우리 반지를 되찾고... 오후에는 우리 예쁜 아기 보는 거야. 알았지?”
수영이 명진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리고 명진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
“뭔가 느낌이 안 좋아.”
“왜 그래?”
통로의 좌측 1번방에는 민혁과 서영이 침대에 누워 쉬고 있었다. 비교적 서영은 차분한 느낌이었지만, 민혁은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었다.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거든. 영호라는 놈이 왜 우리를 도왔는지...”
“그건 나도 이해가 되지 않지만... 누구의 생각이 어떻든 현재는 우리가 유리한 상황이야.”
“그건 맞긴 한데... 난 그 의문이 풀리지 않으니까... 뭔가 자꾸 걱정이 돼.”
서영은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민혁이 불안해하는 모습이 이해가 되었다. 사람은 행동을 하면서 분명 인과관계라는 게 존재했다. 그런데 영호는 결과적으로 스스로 피해를 보면서 자신들을 두 번이나 도와줬다. 그래서 그 이유를 물었더니 ‘재밌으니까’라는 짧은 답변만 들을 수 있었다.
“그 자식 또라이인가?”
“또라이?”
“그게 아니면 위기를 만들면서 우리를 도와 줄 이유가 없잖아. 더구나 뭐 재밌으니까?”
“나도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이 상황에 재밌지는 않은데...”
민혁은 자신의 머릿속에 몇 가지 단서들이 있다고 판단했다. 진실을 알고 싶어서 단서들을 조합하면,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마치 사이즈가 다른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했다. 그 어색함이 불편했고 너무나 걱정이 되었다. 도대체 뭘까.
“그 애 말이 사실일까?”
“수영이?”
“응.”
“아휴... 아직까지 의심하는 거야?”
“의심이라기보다는... 상황이 그렇잖아. 그 애가 피해자였고, 영호라는 놈이 추행범이었는데... 우리에게 숨기는 게 있을 수도 있잖아.”
“그런 애가 아니야. 그리고 우리는 수영이에게 고마워해야 해. 내가 말은 안했지만... 얼마나 힘들었을까.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잖아?”
수영이를 의심하는 민혁에게 화가 난 서영이 톡 쏘며 말을 했다. 괜히 머쓱해진 민혁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을 했다.
“아... 아니... 내 말은... 조금... 아주 조금 이상하다 이거지. 그렇게 고통을 당했으면... 오히려 추행범이었던 영호를 세 번째 게임에서 탈락시켜야 하는데... 오히려 5번 부부를 탈락시켜야 한다고 말했잖아.”
민혁의 말은 충분히 일리가 있었다. 예를 들어, 강간당한 여자가 강간범을 옹호해주면 그것을 이상하게 쳐다볼 수 밖 에 없듯이, 피해자였던 수영이 추행범이었던 영호를 옹호한 것은 민혁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겠어. 이해가 안 될 거야. 그러니까 우리는 수영이에게 더 고마워해야 해. 자신의 고통을 감수하면서... 우리를 살려준 애야. 그리고 함께 4라운드에 진출하기 위해서 복수의 감정보다는 철저히 실리를 선택해준 아이야. 아까도 말했지만 5번 부부를 탈락자로 삼아야... 우리가 함께 4라운드에 진출할 수 있으니까. 영호에게 적대감을 보이면... 괜히 1표씩 받아서 우리들 중 누군가는 탈락할 수도 있다는 거... 당신도 알잖아!”
서영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그렇기에 민혁도 강하게 나갈 수는 없었다. 그러나 민혁이 말을 접지는 않았다.
“그... 그러니까... 다 알겠는데... 자기는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수영이가 이런 표현을 했어. ‘도움을 받았잖아요’라는 말... 굳이 해야 했을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민혁의 말에 서영이 잠시 뜸을 들였다. 기억을 되살려 보면, 수영이 그런 말을 한 것 같기도 했다.
“내 생각은 당신 말대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6번 부부와 함께 가야 한다라고 했다면... 이해가 되는데... 도움을 받았으니 도움을 줘야 한다라는 뉘앙스는... 뭔가 이상하다고...”
“그러니까 당신 말은 영호와 수영이가 손을 잡았다는 거야?”
“아니...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럴 수도 있다는...”
“휴우... 자기는 지금 너무 민감해. 사실 처음부터 수영이를 믿을 생각도 안했지. 불쌍한 애야. 그리고 누구보다 착한 애야. 왜 같은 눈을 갖고 있으면서 그 아이의 착한 모습은 보지 못하는 거야.”
민혁의 의심이 계속되자 서영은 너무나 서운했다. 화도 나긴 했지만, 그보다 수영이를 믿는 자신의 믿음을 전혀 이해하지 않는 남편인 민혁이 야속했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난 수영이를 믿어.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함께 4라운드에 진출하는 거야. 그렇게 알아!”
서영이 침대에 누운 채 몸을 돌렸다. 민혁은 서영이 화가 난 것을 알기에 굳이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침대에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며 자신의 생각을 다시 정리할 뿐이었다.
‘아무래도... 이상하단 말이야... 이 불안함이... 아무것도 아니어야 할 텐데...’
***
밤 10시가 조금 못 된 시간에 수영은 3번방을 나왔다. 화장실에 가기 위해서였다. 화장실은 로비의 좌측 아래에 위치해 있었다. 각 방에는 화장실이 없어서 생리현상을 해결하려면, 반드시 로비로 나와야만 했다.
“아이... 불편해.”
확실히 화장실이 외부에 있는 건 불편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생리현상을 참을 수가 없기에 수영은 화장실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화장실 입구에서 한 남자와 마주쳤다. 영호였다.
“왔네?”
마치 수영과 약속이나 한 것처럼 영호가 말을 했다. 수영은 뜻밖의 장소에서 영호와 마주치자 매우 당황을 했다.
“당황하지 마. 하하.”
영호가 수영을 보며 웃었다. 그런 모습이 오히려 더욱 수영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당황... 하지 않아요.”
“뭐... 간단히 말할게. 내 두 번째 조건 들어야지?”
영호의 말에 수영이 그때서야 조건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아직 영호의 조건을 하나 더 들어줘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 그게 무엇이죠.”
“2시간 후면 12시... 즉, 자정이지. 이곳으로 와. 몰래... 혼자만... 알겠어?”
수영은 영호가 왜 자신을 그 늦은 시간에 불러내는지 알 수 없었다.
“왜... 왜요?”
“이유가 알고 싶어? 이유는 이미 알고 있잖아. 넌 내 조건을 들어줘야 하니까.”
반지를 되찾기 위해서는 영호의 제안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수영은 살며시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았어. 그리고 하나 더 말해주지. 내가 왜 이곳... 화장실 앞에서 수영이를 기다렸을까?”
수영은 영호의 질문 의도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대답을 하지 않았다.
“훗. 간단하잖아. 너만 빼고 다른 사람들은 화장실에 다 한 번씩 다녀갔는데... 넌 본적이 없었거든... 그것도 하루 종일... 그래서 자기 전에 올 것 같았지. 하하하. 급할 텐데... 들어가 봐. 그리고 조금 후에 보자고...”
말을 마친 영호가 수영에게서 점점 멀어졌다. 그리고 수영은 영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수영은 영호가 아주 치밀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참여자들이 화장실까지 가는 것을 지켜보는 남자가 있다니... 이런 영호가 수영은 무섭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인지 수영은 볼일을 보는 것도 잊은 채, 꽤 오랜 시간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어야 했다.
***
영호는 자신의 뒤통수에서 따가움을 느껴야 했다.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수영이 지켜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훗... 까라면 까야지. 지가 별 수 있겠어?’
영호는 2시간 후에 수영과 섹스를 할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아랫도리가 묵직해짐을 느껴야 했다. 섹스도 섹스였지만 무엇보다 어린 여자와 섹스를 하는 것은 영호의 자신감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사회에서도 게임 전에 어린 여자와 신체 접촉이 있으면, 반드시 일이 잘 풀렸으니...
‘그건 그렇고... 1번 부부나 한 번 가지고 놀아볼까... 민혁이라는 놈이 나오겠지? 후후. 그 놈은 조금 생각이 다른 것 같던데...’
영호는 치밀하게 참여자들을 관찰한 결과 몇 가지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중 하나가 1번 부부인 민혁과 서영의 관계가 생각보다 좋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몇 시간 전에는 다투는 소리까지 들었으니, 영호의 생각으로는 한 번쯤 장난을 쳐 볼 필요가 있었다.
‘서영이라는 여자는 수영을 믿는 건 같지만... 남편인 민혁이라는 남자는 꼭 그런 거 같지 않으니...’
통로 입구에 들어선 영호는 좌측 1번방으로 다가갔다. 문에 귀를 대고 있으니, 안에 사람이 있는 것이 느껴졌다. 사람이 있음이 느껴진 영호는 오른손으로 문을 두들이며 노크를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민혁이 문을 열고 나타났다.
‘그렇지... 보통 이런 경우는 남자가 먼저 나오지.’
영호의 예상은 적중했다. 갑자기 나타난 영호의 모습에 민혁이 살짝 당황했지만, 이내 곧 차분히 영호의 눈을 바라보며 말을 했다.
“무슨 일입니까?”
민혁은 영호가 왜 자신의 부부를 찾아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말을 안 하시죠?”
영호는 민혁이 이해하기 힘들 행동을 했다. 찾아와서 노크를 하고서는 민혁을 바라보며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두 손을 민혁의 눈앞에 펼치며 이해못할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무... 무슨 짓입니까?”
민혁이 물었지만, 영호는 대답대신 자신의 손을 이용해서 처음에는 세 손가락을 보여주었다. 그리도 다섯 손가락을 보여주고, 마지막에는 여섯 손가락을 펼쳐보였다. 그리고 민혁을 향해 씨익 웃더니, 그대로 몸을 돌려 걸어가기 시작했다. 황당한 민혁이 말을 잊은 채로, 멀어지는 영호를 쳐다봤다.
“무슨 일이야? 자기야?”
뒤늦게 서영이 민혁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서영도 영호가 왔다갔음을 알 수 있었다.
“저 남자 왜 왔어?”
“나도 몰라. 그냥 아무 말 없이 있다가... 갔어.”
“아무 말 없이?”
민혁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서영은 민혁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실제로 영호의 목소리도 들을 수가 없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진짜 또라이 아냐?”
“정말 아무 말도 안 했어?”
“응... 그냥 웃고 가던데...”
민혁은 서영에게 영호가 한 행동을 말해주지 않았다.
‘3번... 5번.... 6번인데.... 그것을 뜻한 것 같았는데... 우리를 탈락시킨다는 뜻인가?’
영호의 행동에 대한 민혁의 추측은 계속 되었지만, 완벽한 대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알 수 있는 건, 자신들 모르게 무언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만 자자...”
서영이 다시 방안으로 들어갔고, 민혁은 저 멀리서 6번방의 문을 열고 있는 영호를 쳐다보았다. 그때 영호가 고개를 돌려 민혁을 쳐다 본 후, 자신의 오른손으로 자신의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6번방으로 영호가 들어갔다.
“저... 새끼가... 씨발.”
영호의 도발을 본 민혁은 자신도 모르게 욕설을 중얼거렸다. 그러나 서영은 듣지 못했다.
@ 43부에서 이어집니다.
“긴... 하루 같아.”
수영이 말을 했다. 그리고 수영의 말을 알아들은 명진이 그녀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차마 내색은 하지 않고 있었지만 명진은 수영이 두 번째 게임의 피해자로서 상상할 수도 없는 유린을 당했음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마음속으로는 분노가 끓어올랐지만, 수영이 죄책감 가지게 될까봐 명진은 입을 아꼈다.
“... 괜찮아. 이겨냈으니까... 그리고 걱정하지 마.”
명진이 굳이 말을 하지 않았지만, 수영은 명진의 고통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먼저 입을 열었다. 불편한 진실이었지만, 남편인 명진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수영의 말을 들은 명진이 수화를 통해서 그녀에게 자신의 의견을 전했다. 그리고 수영은 자신을 걱정하는 명진에게 애써 밝은 미소를 보여 주었다.
“그리고... 반지를 잠시 맡겼어... 그 남자에게...”
명진은 그때서야 수영의 왼손 약지에 반지가 없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명진도 당황하며 빠른 손놀림으로 수영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 우리가 배신할까 봐... 못 믿겠대. 그래서 반지를 주래. 3라운드 게임이 종료가 되면... 돌려준다고 하니까... 걱정 마. 그건 나에게 가장 소중한 반지니까.”
명진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다시 두 손을 움직였다. 그리고 수영이 그 모습을 보고 대답했다.
“나도 그 사람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아... 아니... 싫다고 하는 게 맞을 거야. 아까 수영 언니 부부에게는 그 사람이 도와줬으니... 우리도 도와야 한다고 말하긴 했지만... 그보다는 반지 문제가 더 커... 돌려받아야 하니까... 어쩔 수 없지만 6번 부부와 함께 가야 해...”
명진은 수영의 왼손 약지에 반지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매우 불안해하고 있었다. 세 번째 게임만 잘 진행되면 반지를 돌려받을 수 있다지만, 명진에게 있어서는 반지를 돌려받고 못 받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함이 명진의 몸을 감싸왔다.
“불안하다고? 걱정 마. 다 잘 될 거야.”
수영이 명진을 안심시키려 했다. 그러나 명진의 가슴은 여전히 무언가에 쫓기고 있었다. 명진이 쉴 새 없이 두 손을 교차시키며 수화를 하고 있었다.
“... 아니야...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우리는 서영 언니 부부와 함께 4라운드에 진출할 거야. 세 번째 게임은 별거 아닌 거 다 알잖아. 이미 서로 이야기를 끝내놨으니까... 그리고 나도 강해질 거야. 내일 우리 지혜 얼굴 봐야 하잖아. 나쁜 생각 하지 말자. 응... 다 잘 될 거야.”
명진은 딸인 지혜의 얼굴이 떠올랐다. 목숨과도 못 바꾸는 사랑하는 딸이었지만, 그만큼 불쌍한 딸이기도 했다. 나이라는 말도 우스울 정도의 어린 아기가 백혈병이라니...
“그래... 그러니까 자기도 자신감을 가져. 우리는 이겨낼 수 있어.”
마을 마친 수영이 명진을 두 팔 벌려 안아주었다. 그러자 명진은 조금씩 가슴이 진정되어 가는 것을 느꼈다.
“내일 우리 반지를 되찾고... 오후에는 우리 예쁜 아기 보는 거야. 알았지?”
수영이 명진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리고 명진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
“뭔가 느낌이 안 좋아.”
“왜 그래?”
통로의 좌측 1번방에는 민혁과 서영이 침대에 누워 쉬고 있었다. 비교적 서영은 차분한 느낌이었지만, 민혁은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었다.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거든. 영호라는 놈이 왜 우리를 도왔는지...”
“그건 나도 이해가 되지 않지만... 누구의 생각이 어떻든 현재는 우리가 유리한 상황이야.”
“그건 맞긴 한데... 난 그 의문이 풀리지 않으니까... 뭔가 자꾸 걱정이 돼.”
서영은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민혁이 불안해하는 모습이 이해가 되었다. 사람은 행동을 하면서 분명 인과관계라는 게 존재했다. 그런데 영호는 결과적으로 스스로 피해를 보면서 자신들을 두 번이나 도와줬다. 그래서 그 이유를 물었더니 ‘재밌으니까’라는 짧은 답변만 들을 수 있었다.
“그 자식 또라이인가?”
“또라이?”
“그게 아니면 위기를 만들면서 우리를 도와 줄 이유가 없잖아. 더구나 뭐 재밌으니까?”
“나도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이 상황에 재밌지는 않은데...”
민혁은 자신의 머릿속에 몇 가지 단서들이 있다고 판단했다. 진실을 알고 싶어서 단서들을 조합하면,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마치 사이즈가 다른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했다. 그 어색함이 불편했고 너무나 걱정이 되었다. 도대체 뭘까.
“그 애 말이 사실일까?”
“수영이?”
“응.”
“아휴... 아직까지 의심하는 거야?”
“의심이라기보다는... 상황이 그렇잖아. 그 애가 피해자였고, 영호라는 놈이 추행범이었는데... 우리에게 숨기는 게 있을 수도 있잖아.”
“그런 애가 아니야. 그리고 우리는 수영이에게 고마워해야 해. 내가 말은 안했지만... 얼마나 힘들었을까.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잖아?”
수영이를 의심하는 민혁에게 화가 난 서영이 톡 쏘며 말을 했다. 괜히 머쓱해진 민혁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을 했다.
“아... 아니... 내 말은... 조금... 아주 조금 이상하다 이거지. 그렇게 고통을 당했으면... 오히려 추행범이었던 영호를 세 번째 게임에서 탈락시켜야 하는데... 오히려 5번 부부를 탈락시켜야 한다고 말했잖아.”
민혁의 말은 충분히 일리가 있었다. 예를 들어, 강간당한 여자가 강간범을 옹호해주면 그것을 이상하게 쳐다볼 수 밖 에 없듯이, 피해자였던 수영이 추행범이었던 영호를 옹호한 것은 민혁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겠어. 이해가 안 될 거야. 그러니까 우리는 수영이에게 더 고마워해야 해. 자신의 고통을 감수하면서... 우리를 살려준 애야. 그리고 함께 4라운드에 진출하기 위해서 복수의 감정보다는 철저히 실리를 선택해준 아이야. 아까도 말했지만 5번 부부를 탈락자로 삼아야... 우리가 함께 4라운드에 진출할 수 있으니까. 영호에게 적대감을 보이면... 괜히 1표씩 받아서 우리들 중 누군가는 탈락할 수도 있다는 거... 당신도 알잖아!”
서영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그렇기에 민혁도 강하게 나갈 수는 없었다. 그러나 민혁이 말을 접지는 않았다.
“그... 그러니까... 다 알겠는데... 자기는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수영이가 이런 표현을 했어. ‘도움을 받았잖아요’라는 말... 굳이 해야 했을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민혁의 말에 서영이 잠시 뜸을 들였다. 기억을 되살려 보면, 수영이 그런 말을 한 것 같기도 했다.
“내 생각은 당신 말대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6번 부부와 함께 가야 한다라고 했다면... 이해가 되는데... 도움을 받았으니 도움을 줘야 한다라는 뉘앙스는... 뭔가 이상하다고...”
“그러니까 당신 말은 영호와 수영이가 손을 잡았다는 거야?”
“아니...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럴 수도 있다는...”
“휴우... 자기는 지금 너무 민감해. 사실 처음부터 수영이를 믿을 생각도 안했지. 불쌍한 애야. 그리고 누구보다 착한 애야. 왜 같은 눈을 갖고 있으면서 그 아이의 착한 모습은 보지 못하는 거야.”
민혁의 의심이 계속되자 서영은 너무나 서운했다. 화도 나긴 했지만, 그보다 수영이를 믿는 자신의 믿음을 전혀 이해하지 않는 남편인 민혁이 야속했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난 수영이를 믿어.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함께 4라운드에 진출하는 거야. 그렇게 알아!”
서영이 침대에 누운 채 몸을 돌렸다. 민혁은 서영이 화가 난 것을 알기에 굳이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침대에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며 자신의 생각을 다시 정리할 뿐이었다.
‘아무래도... 이상하단 말이야... 이 불안함이... 아무것도 아니어야 할 텐데...’
***
밤 10시가 조금 못 된 시간에 수영은 3번방을 나왔다. 화장실에 가기 위해서였다. 화장실은 로비의 좌측 아래에 위치해 있었다. 각 방에는 화장실이 없어서 생리현상을 해결하려면, 반드시 로비로 나와야만 했다.
“아이... 불편해.”
확실히 화장실이 외부에 있는 건 불편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생리현상을 참을 수가 없기에 수영은 화장실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화장실 입구에서 한 남자와 마주쳤다. 영호였다.
“왔네?”
마치 수영과 약속이나 한 것처럼 영호가 말을 했다. 수영은 뜻밖의 장소에서 영호와 마주치자 매우 당황을 했다.
“당황하지 마. 하하.”
영호가 수영을 보며 웃었다. 그런 모습이 오히려 더욱 수영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당황... 하지 않아요.”
“뭐... 간단히 말할게. 내 두 번째 조건 들어야지?”
영호의 말에 수영이 그때서야 조건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아직 영호의 조건을 하나 더 들어줘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 그게 무엇이죠.”
“2시간 후면 12시... 즉, 자정이지. 이곳으로 와. 몰래... 혼자만... 알겠어?”
수영은 영호가 왜 자신을 그 늦은 시간에 불러내는지 알 수 없었다.
“왜... 왜요?”
“이유가 알고 싶어? 이유는 이미 알고 있잖아. 넌 내 조건을 들어줘야 하니까.”
반지를 되찾기 위해서는 영호의 제안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수영은 살며시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았어. 그리고 하나 더 말해주지. 내가 왜 이곳... 화장실 앞에서 수영이를 기다렸을까?”
수영은 영호의 질문 의도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대답을 하지 않았다.
“훗. 간단하잖아. 너만 빼고 다른 사람들은 화장실에 다 한 번씩 다녀갔는데... 넌 본적이 없었거든... 그것도 하루 종일... 그래서 자기 전에 올 것 같았지. 하하하. 급할 텐데... 들어가 봐. 그리고 조금 후에 보자고...”
말을 마친 영호가 수영에게서 점점 멀어졌다. 그리고 수영은 영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수영은 영호가 아주 치밀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참여자들이 화장실까지 가는 것을 지켜보는 남자가 있다니... 이런 영호가 수영은 무섭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인지 수영은 볼일을 보는 것도 잊은 채, 꽤 오랜 시간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어야 했다.
***
영호는 자신의 뒤통수에서 따가움을 느껴야 했다.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수영이 지켜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훗... 까라면 까야지. 지가 별 수 있겠어?’
영호는 2시간 후에 수영과 섹스를 할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아랫도리가 묵직해짐을 느껴야 했다. 섹스도 섹스였지만 무엇보다 어린 여자와 섹스를 하는 것은 영호의 자신감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사회에서도 게임 전에 어린 여자와 신체 접촉이 있으면, 반드시 일이 잘 풀렸으니...
‘그건 그렇고... 1번 부부나 한 번 가지고 놀아볼까... 민혁이라는 놈이 나오겠지? 후후. 그 놈은 조금 생각이 다른 것 같던데...’
영호는 치밀하게 참여자들을 관찰한 결과 몇 가지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중 하나가 1번 부부인 민혁과 서영의 관계가 생각보다 좋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몇 시간 전에는 다투는 소리까지 들었으니, 영호의 생각으로는 한 번쯤 장난을 쳐 볼 필요가 있었다.
‘서영이라는 여자는 수영을 믿는 건 같지만... 남편인 민혁이라는 남자는 꼭 그런 거 같지 않으니...’
통로 입구에 들어선 영호는 좌측 1번방으로 다가갔다. 문에 귀를 대고 있으니, 안에 사람이 있는 것이 느껴졌다. 사람이 있음이 느껴진 영호는 오른손으로 문을 두들이며 노크를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민혁이 문을 열고 나타났다.
‘그렇지... 보통 이런 경우는 남자가 먼저 나오지.’
영호의 예상은 적중했다. 갑자기 나타난 영호의 모습에 민혁이 살짝 당황했지만, 이내 곧 차분히 영호의 눈을 바라보며 말을 했다.
“무슨 일입니까?”
민혁은 영호가 왜 자신의 부부를 찾아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말을 안 하시죠?”
영호는 민혁이 이해하기 힘들 행동을 했다. 찾아와서 노크를 하고서는 민혁을 바라보며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두 손을 민혁의 눈앞에 펼치며 이해못할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무... 무슨 짓입니까?”
민혁이 물었지만, 영호는 대답대신 자신의 손을 이용해서 처음에는 세 손가락을 보여주었다. 그리도 다섯 손가락을 보여주고, 마지막에는 여섯 손가락을 펼쳐보였다. 그리고 민혁을 향해 씨익 웃더니, 그대로 몸을 돌려 걸어가기 시작했다. 황당한 민혁이 말을 잊은 채로, 멀어지는 영호를 쳐다봤다.
“무슨 일이야? 자기야?”
뒤늦게 서영이 민혁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서영도 영호가 왔다갔음을 알 수 있었다.
“저 남자 왜 왔어?”
“나도 몰라. 그냥 아무 말 없이 있다가... 갔어.”
“아무 말 없이?”
민혁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서영은 민혁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실제로 영호의 목소리도 들을 수가 없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진짜 또라이 아냐?”
“정말 아무 말도 안 했어?”
“응... 그냥 웃고 가던데...”
민혁은 서영에게 영호가 한 행동을 말해주지 않았다.
‘3번... 5번.... 6번인데.... 그것을 뜻한 것 같았는데... 우리를 탈락시킨다는 뜻인가?’
영호의 행동에 대한 민혁의 추측은 계속 되었지만, 완벽한 대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알 수 있는 건, 자신들 모르게 무언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만 자자...”
서영이 다시 방안으로 들어갔고, 민혁은 저 멀리서 6번방의 문을 열고 있는 영호를 쳐다보았다. 그때 영호가 고개를 돌려 민혁을 쳐다 본 후, 자신의 오른손으로 자신의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6번방으로 영호가 들어갔다.
“저... 새끼가... 씨발.”
영호의 도발을 본 민혁은 자신도 모르게 욕설을 중얼거렸다. 그러나 서영은 듣지 못했다.
@ 43부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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