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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 정(慾 情) - 46부 ← 고화질 다운로드    토렌트로 검색하기
16-08-22 00:05 947회 0건
곧 커피가 나왔음을 알리는 진동벨이 울렸고 난 일어나 주문한 아메리카노를 받아온 후 다시 같은 자리에 앉았다. 그러던 사이 오정희와 눈이 한 번 더 마주쳤는데 그 때 이상한 느낌이 갑자기 스쳐간다. 저 여자가 날 알아보는구나. 조금 전에 그녀가 인사를 건넬 때는 형식적인 인사인 듯 했는데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되면 내 행동에 많은 제약을 받는다. 오정희가 다른 곳에 있을 때 가까이 접근하기가 힘들어지는 것이다.

난 커피를 들고 2층으로 올라갔다. 1층에 있어야 오정희의 움직임을 알 수 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녀의 눈에 내가 익숙해졌다면 당분간은 조심해야 한다.

버스커버스커의 "여수 밤바다"가 흘러 나왔고 무심코 들었는데 노래가 끝나자 곧 다른 여성 그룹의 노래로 바뀌었다. 음악 소리에 별 신경 쓰지 않았는데 오정희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들려오는 건지 30분 쯤 후에 다시 "여수 밤바다"가 매장에 울려 퍼졌다.

그런데 그 건 이상한 일이고 자연스럽지 않았다. 버스커버스커 음반에 3번째 노래가 "여수 밤바다"인데 30분 간격을 두고 다른 노래는 나오지 않고 그 노래만 두 번 들리다니... 누군가 그 노래가 듣고 싶어 음원을 재생시킨 거겠지만 지금은 사장인 오정희가 매장에 있는 시간인데...

그로부터 10여분 흐른 뒤에 오정희가 카운터에 있을 때는 입고 있지 않던 얇은 봄 코트와 작은 손가방을 들고 매장 밖으로 걸어 나왔고 난 2층에서 부리나케 거리로 나와 그녀의 뒤를 따랐다. 2~3분을 걸어 그녀가 도착한 곳은 공항버스 정류장이었는데 오정희가 내 얼굴을 알아볼 거라는 생각에 난 그녀와 함께 버스를 탈 수는 없었고 할 수 없이 지하주차장으로 다시 돌아가 차를 몰고 다시 정류장으로 갔다.

다행히 오정희는 그때까지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듯 그대로 있었고 난 정류장을 20m정도 지나쳐 비상등을 켜고 정차를 한 후 그녀를 백미러로 지켜봤다. 그리고 몇 분 후 도착한 공항버스에 그녀가 올라타는 걸 확인한 후 그 버스를 따라 갔다.

50분 정도 달려 오정희가 내린 곳은 김포공항 국내선 청사 앞. 그녀와 이유성이 그 곳에서 만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주차장에 차를 두고 재빨리 청사 안으로 들어갔다. 오정희가 다시 눈에 띈 곳은 3층 12번 게이트 탑승구 앞이었고 그 시간대 12번과 11번에서 출발하는 항공기는 12:50분 여수행 항공기 밖에 없었다.

라운지에 있는 커다란 전자시계는 12:30이 새겨져 있었고 난 이유성과 함께 있는 오정희를 볼 수 없음에 약간 실망한 채로 9번 게이트 앞 대기석에서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는데 20분이 남았으니 그 사이 녀석이 나타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수? 여수밤바다? 오정희는 다른 날 매장에 보이지 않던 시간에 나와 있었고 이유성은 지연과 법원에서 완전한 남남이 되었다. 그 노래를 오정희가 듣고 싶어 매장에서 틀었다면 녀석과 오늘 여수에 가기로 했다는 게 꽤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데...이제 십 여분 남은 시간에 이유성만 나타나면 두 연인의 결정적인 장면을 포착한 것은 아니지만 거의 한 달 가까운 기다림 끝에 둘 사이에 매듭이 있다는 것은 알게 되니 그 것 만으로도 큰 수확이다.

하지만 오정희가 탑승구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이유성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오정희가 비행기를 기다리는 20여분의 시간동안 난 그녀가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주위를 돌아보는 것도 보지 못했다. 결국 헛다리를 짚은 셈...

오정희를 보내고 공항을 떠나 회사로 돌아오며 난 여수 밤바다를 떠올렸다. 그 곳이라면... 몇 개월 전 직장 동료의 부친상으로 방문해서 하루를 꼬박 그 곳에서 보내며 본의 아닌 관광을 즐긴 적이 있다. 이유성은 자신의 스포츠카를 타고 여수로 가고 오정희는 비행기로 그 곳에 가서 만나기로 했다면... 다른 곳이라면 몰라도 여수라면 찾을 수 있을 지도...

돌산대교 부근에서 밤바다를 즐길 생각이라면 여수는 좁은 곳이다. 아니 여수가 그리 좁지는 않겠지만 녀석의 스포츠카는 그 곳에서 찾기 어려울 것 같지 않다. 지금 바로 여수로 출발한다면 저녁 7시 근처면 그 곳에 도착할 수 있는데...

여수 밤바다... 왜 그 노래를 두 번이나... 오정희는 그 곳에서 남자를 만난다. 그리고 그 남자는 이유성일 가능성이 크다. 내게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지금 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회가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일이다.

난 회사에 전화를 걸어 적당히 핑계를 댄 후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기 위해 차를 돌렸다. 그리고 미친 듯이 여수를 향해 엑셀레이터를 밟았다. 3시간이 지났을 때 난 호남고속도로로 옮겨 타기 위해 고창담양간 고속도로 위에 있었고 그 때 전화가 울렸다. 지연이었다.

“저예요. 어디세요?”

“응... 나 전라도 광주 근처야.”

“예? 거긴 왜요?”

“갑자기 회사 일로 출장을 왔어. 어딘데? 당장 가기는 힘들 것 같은데...”

“집이에요. 자다가 일어나서 전화했어요. 아까 아저씨한테 미안해서요.”

“응? 미안할 일도 많다. 기분은 좀 어때?”

“그냥 그래요. 배가 고파서 나가려던 참이에요. 언제쯤 다시 올라와요?”

“새벽에나 가능할 거야. 늦으면 내일 아침..”

“알았어요. 나 오늘 여기서 잘 건데 바로 이리로는 못 오죠?”

“아니.. 올라가게 되면 그리로 먼저 갈게. 혹시 새벽에 도착하면 전화 할 테니 받아.”

“아.. 내가 아직 비밀번호 안 알려줬구나. 문자로 번호 찍어 드릴게요. 그냥 들어 와요.”

“응...”

광주를 지나자마자 곡성 휴게소에 들러 커피 한 잔을 마시며 기름을 넣었고 여수 오동도 부근에 도착했을 때는 7시를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난 차를 정차시켜 두고 잠시 내려 굳어진 몸을 풀었다.

여수는 도시 전체가 한 달도 남지 않은 세계박람회 준비에 한창인 듯 보였지만 난 전혀 관심이 없었고 어디를 돌아야 오정희와 이유성을 찾을 수 있을 지에만 온 신경이 집중되어 있었다. 유람선 운항이 끝난 시간이었지만 오동도 입구 주차장과 바로 인근에 있는 엑스포 전시장 야외 주차장을 돌면서 녀석의 빨간색 스포츠카가 있는 지 보았지만 없었다.

하멜 등대 부근과 거북선 광장에도 녀석의 차는 없었고 혹시나 해서 저녁 무렵 산책을 나온 사람들을 살펴보았지만 오정희도 이유성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돌산대교를 건너 공원 아래 쪽 횟집 앞에 이르렀을 때 빨간색 스포츠카 한 대가 차들 사이에 주차되어 있었고 가까이 가 살펴보니 벤츠마크가 보였다. 그리고 4층 건물의 1층 횟집 투명한 유리벽 안쪽에 놓인 테이블에서 회를 먹기 위해 앉아 있는 사람들 사이에 오정희와 이유성이 있었다. 여수에 내려온 지 한 시간 만에 찾은 셈...

결국 녀석은 고 2때부터 지금까지 오정희와 십 이년 동안이나 인연을 이어오고 있었다. 그건 그렇다 쳐도 자신은 지연과 법원에서 이혼 합의를 끝내고 바로 여수로 출발하고 오정희에게는 비행기를 타고 오게 했다는 이야기인데 얼떨결에 따라붙기야 했지만 누가 그런 만남을 상상이나 한단 말인가?

난 반대편 차선에 내 차를 주차시켜두고 횟집 유리 너머로 오정희와 이유성이 같이 있는 모습을 카메라로 촬영한 후 근처 커피 전문점에 가서 샌드위치와 커피를 사가지고 왔다. 배를 채우면서 두 연인을 지켜본지 1시간 정도 흐른 뒤에 횟집을 나온 두 사람은 다정히 걸어서 산 위 공원으로 올라갔다.

공원으로 오르는 계단을 상당한 거리를 두고 따라 붙었는데 두 사람은 여수 밤바다가 보이는 벤치에서 제법 오랜 시간을 앉아 있다가 기타를 치는 길거리 가수의 공연을 잠깐 구경하더니 다시 돌산을 내려가 차에 올라탔고 두 사람의 모습을 조금 멀리서 계속 카메라에 담던 나 역시 재빨리 차에 타서 스포츠카의 뒤를 따라갔다.

돌산대교를 건넌 차량은 바닷가를 따라 천천히 30분 정도 드라이브를 즐긴 후에 오동도 인근 호텔로 이동했다. 마침 그 호텔 주차장이 야외에 있어 차를 세운 후 두 연인이 호텔로 들어가는 모습도 촬영할 수 있었지만 오정희가 내 얼굴을 알고 있고 이유성과도 안면이 있어서 가까이 갈 수는 없었다.

횟집에서, 돌산 벤치에서, 그리고 같이 걷는 모습과 호텔로 들어가는 모습들을 사진으로 확보할 수는 있었지만 그 이상의 추적은 무리였고 난 휴게소에서 잠시 눈을 붙일 요량으로 일단 여수를 떠나 새벽 4시를 넘어설 무렵 지연의 아파트에 도착했다.

너무 피곤해서 꼼짝도 하기 싫었지만 샤워를 한 후 지연이 자고 있는 침대로 올라가자 잠에서 깬 그녀가 말을 건넨다.

“잠이 안 와서 방금 겨우 잠들었는데... 빨리도 왔네요.”

“응. 미안... 일이 너무 늦게 끝났어.”

“관리직이 웬 출장? 그것도 전라도까지...”

“아니 우리 부서 일이 아닌데 사람이 비어서 지원 나간거야. 내일 몇 시에 나가지?”

“6시 반쯤..”

“응 같이 나가자.”

“내일 출근하기 싫어서 휴가 내려고요.”

“응? 왜? 마음이 많이 심란해?”

“모르겠어요. 잠이 잘 안 오니 더 미치겠구요.”

난 머리가 베개에 닿으면 잠이 들 정도로 피곤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되죠? 그냥 견디는 수 밖에 없는 거죠?”

“응?.. 어렵다. 너무...”

“나 재워줘요. 아까 저녁 먹으면서 소주 2병을 혼자 마셨는데도 잠이 잘 안와요.”

“내가 괜히 와서 깨운 것 같네... 그런데 어떻게 재워줘? 안아줘? 아니면 이야기 해줘?”

“이야기 해줘요. 전에 했던 이야기 같은 거.,.”

“우울증에 걸리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뭔 줄 알아?”

“그런 것도 있어요? 뭔데요?”

“어떻게 보면 우울증이라는 건 과거에 아주 좋은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걸리는 마음의 병이야. 아주 예뻤다거나 인기가 좋았다거나 돈을 많이 벌었었다거나... 뭐 그런 거...”

“정말이요? 그럼 저도... 그런 건가요?”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거기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시각이 예전으로 고정되어서 그래. 예전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그럼 지금의 모습은 아주 초라해 보이거든. 그러면 마이너스 사고를 주로 하게 되는데... 이게 좋질 않아. 부정적인 생각들은 그 비슷한 현실과 영상을 끌어오거든.”

“왜 그렇죠? 마이너스 사고를 한다고 안 좋은 일들만 생기란 법은 없잖아요?”

“그걸 과학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려워. 내 생각엔 진동하고 관련 있는 것 같긴 한데...”

“진동? 주파수 같은 거요?”

“응... 마이너스 사고는 안 좋은 진동을 만들어내고 주변을 비슷한 것들로 채워가는 것 같아. 충분한 설명이 될 수는 없겠지만... 아주 안 좋은 상황이라고 해도 다르게 볼 수 있는 눈을 확보할 수 있다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 가능성이 많아져. 그 건...”

“뭐요? 무슨?”

“플러스 사고로 바뀔 가능성이 있거든. 아주 작은 성공 하나에 감사하면서 탄력을 받는 거지. 예전에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닌 작은 거 하나를 바라보는 시각이 바뀔 때 인생은 변하는 거니까... 어렵지?”

“결국 제 문제를 해결하는 건 예전의 날 버리는 수밖에 없는 건가요? 누가 제 기억들을 송두리째 지워버렸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잖아요...”

하나마나 한 소리를 했다. 지연에게는 인생을 살면서 겪은 가장 큰 아픔일 것이다. 그녀는 사고의 폭이 넓지만 내성이 약하다. 옆에서 보는 것과 직접 겪는 건 완전히 다른 일인 것인데...

“오늘 곁에 있어줘요. 그럴 수 있죠?”

“응... 휴가 내 볼게...”

어제 오후부터 안 들어가서 부장이 싫어할 텐데... 어쩔 수 없다.

아침에 잠깐 일어나서 회사에 몸이 아프다고 휴가를 신청한 후 다시 잠이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잠에서 깨면서부터 난 줄곧 오정희와 이유성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런대로 괜찮은 카드는 확보했다. 이 걸 오정희에게 들이 밀면 뭘 건질 수 있을까? 첫 번째 기연이 그녀였고 그 이후 관계를 계속 이어오고 있다면 그녀와 녀석 사이에 있었던 모든 것을 들어야 한다.

난 오정희의 입장에서 다시 생각해보기로 했다. 누군가 아들 친구와 자신이 회를 같이 먹고 데이트를 하고 호텔로 들어가는 사진을 보여주며 그 녀석과 자신의 사이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 털어 놓으라고 한다. 이유는?

그럴듯한 명분이 있어야 했다. 그걸 폭로하지 않는 대가를 달라는 게 아니라 왜 그런 사이가 되었는지 이유를 말해달라는 것이니... 그렇지 않으면 아들에게 그 사실을 털어 놓겠다고 협박하는 게 먹힐까? 여수에 다른 친구를 만나러 갔다가 우연히 만나서 밥을 같이 먹고 호텔이 어딘지 몰라 유성이가 태워 준거라고 하면...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사이라 충분히 넘어갈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호텔에서 같은 방에 들어가는 사진을 확보하지 못한 게 걸렸다. 어차피 정황 증거로 몰아 붙이는 거지만 그 정도면 꼼짝 못하고 실토할 수도 있는데... 거기다 이유성은 인제 법적으로 누구와 자도 자유로운 몸이다. 오정희도 마찬가지...

복잡하게 얽혔다. 오정희에게 돈을 요구하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아들 친구와 어쩌다 그렇게 됐는지 그걸 듣는 게 목적이라고 이야기 할 수는 없다. 10년 전 정재희에게 했던 것처럼 들어 보고 결정하겠다는 식이 통할 수도 있으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내 카드가 너무 약하다.

이유성 쪽을 쳐보면 어떨까?

내가 이유성에게 카드를 들이미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고 있을 때 지연의 음성이 들렸다.

“배고프지 않아요?”

“응... 그러잖아도 허기가 져서 일어나려던 참이야.”

“나가요. 해가 중천에 떴어요.”

우린 택시를 타고 해산물 뷔페를 먹으러 갔다. 그리고 서로 말 없이 음식만 가져다 배를 채웠고 어느 정도 허기를 달랜 후에 지연이 말을 꺼냈다.

“회사는 괜찮은 거예요? 괜히 저 때문에...”

“응... 걱정 마. 한 소리 듣는 거 정도야 이골이 났으니까... 그건 그렇고 밥 먹고 같이 갈데가 있는데... 괜찮겠어?”

“어딘데요? 그러잖아도 뭘 할까 걱정했는데 잘 됐네요.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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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이 지나가네요. 제 글을 아껴주시는 분들께 올 한 해 좋은 일만 있으시기를 기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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