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딘데요? 그러잖아도 뭘 할까 걱정했는데 잘 됐네요. 가요.”
원래 낮술을 한 잔 할까 해서 차를 가지고 오지 않았으나 다시 택시를 타고 지연의 아파트로 간 후 내 차에 그녀를 태우고 출발했다. 도착한 곳은 정릉 국민대학교 건너편 주택가. 길 가에 차를 세우고 언덕을 올라갔다.
“주택가네요? 여기 누가 살죠?”
“아무도 살지 않아. 중학교 3학년 무렵까지 우리 가족이 살았지.”
“그래요? 그런데 왜?”
난 아무 말 없이 5분 정도를 더 걸어 페인트가 벗겨진 녹색 대문이 있는 2층 집 앞에 섰다.
“여기야. 올림픽이 있던 해인 88년 까지 여긴 우리 집이었어. 25년 전이긴 한데 많이 변하진 않았고...”
“무슨 사연이 있는 거예요? 절 왜?...”
“그 때 아버지가 저기 서 계셨어. 집 안 모든 가재도구에 빨간 압류 딱지가 붙고 경매로 넘어갔지. 오전 무렵부터 집달리들이 판결문을 들고 들이 닥쳤는데 아마 점심 무렵이었을 거야. 여름이어서 가만히 있어도 땀이 날 정도로 더운 날씨에 아버지가 당신의 손때가 묻은 집이 넘어가는 걸 저기 서서 보고 계셨어.”
난 대문 반대편 하얀 담벼락 앞을 가리켰다.
“난 더워서 차고 앞 그늘에서 아버지만 쳐다보고 있었어. 내 기억에 어머니는 집 안에서 울고 있었던 것 같아. 그런데 그 때 아버지의 표정은... 아직도 잊어버리질 못하는 그 얼굴에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후회와 체념, 그리고 두려움이 있었어. 여동생은 삼촌 댁에 가 있어서 그 때를 잘 몰라.”
한동안 말이 없던 지연이 천천히 입을 떼었다.
“아저씨는 그다지 굴곡진 삶을 살지 않았다고 했잖아요? 이런 과거가 있었다면...”
“굴곡진 삶? 후후후... 물론 나한테 그런 건 없어. 모든 걸 잃어버린 건 아버지였지. 내가 아니잖아. 8년을 운영하신 공장도 넘어 갔어. 그리고 고향 선산도... 남은 건 아무 것도 없었어. 그 일이 있은 몇 달 후에 아버진 돌아가셨고 난 어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삼촌의 도움 속에 커야 했어.
공장이야 아버지 명의니까 넘어가는 게 당연한데... 선산은 엄밀히 이야기 하면 아버지 소유는 아니었어. 그 때까지 살아계신 할아버지 명의로 되어 있었지. 그런데 우리 아버지는 할아버지, 큰 아버지와 대판 싸우시고 선산의 당신 몫을 주장하셨어. 결국 그 걸 팔게 한 후에 당신께선 뭘 하신 줄 알아?“
“...”
“그 것마저 빛을 갚으셨어. 웃기지... 다른 사람 같으면 그 돈이라도 챙겨서 가족들 먹여 살리려고 했을 텐데... 아버진 그런 분이셨어. 왜 학교 다닐 때 배운 윤동주의 시에 이런 구절이 있잖아.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난 괴로워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아버진 당신을 믿고 돈을 빌려준 누군가가 피해보는 게 죽기보다 싫으셨던 것 같아.
난 이 곳에 가끔 와. 살아가는 게 만만치 않을 때... 여기 와서 저 집을 보는 게 아니라 그 날 아버지가 서 계시던 저 담 앞을 한참 쳐다 보다 가. 왜 그런 줄 알아?“
“...”
“아버지의 그 얼굴이 떠오르면, 그 날 아버지가 겪었던 아픔을 떠올리면 모든 게 작아져 버리거든. 다시 여길 떠날 땐 내 앞에 닥친 일은 그럭저럭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용기 같은 게 생기더라고. 웃기지?”
난 빙그레 웃으며 지연을 바라봤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난 솔직히 니 아픔을 잘 몰라. 얼마나 아픈지... 얼마나 널 미치게 하는지... 하긴 그 때도 아버지의 아픔을 잘 몰랐어. 돌아가셨을 때 눈물도 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너한테 해주는 이야기들이 항상 다른 사람의 일 인 것처럼 말을 해서 그게 마음에 걸려... ”
“이럴 땐 뭐라고 말해야 되는 거죠? 아... 그래도 아저씨가 옆에 있어서 다행이에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전...”
금요일 오전 내내 이유성에게 접근할 수 있는 길을 고민하다 퇴근 무렵 김유미에게 전화를 했다.
“오랜만이에요. 어쩐 일이예요? 전화를 다하구...”
“응... 내일 수업 가긴 하는데... 어떻게 지내는 지 궁금해서... 어디야?”
“여기... 여수예요. 놀러 왔어요.”
여수? 이유성이 여수에서 올라오지 않고 김유미와 있단 말인가?
“응? 수업 없어? 주중에 웬 여수? 누구랑 갔는데?”
“갑자기 그렇게 됐어요. 모..모임에서 같이 온 거예요.”
“언제 오는데? 내일 수업은 있는 거야?”
“내일 아침 일찍 비행기로 올라가요. 수업은 할 거예요.”
“응... 내일 봐. 끊어.”
오정희는 여수에 비행기로 가고 이유성은 자신의 차로 내려간 것이 석연치 않았는데 대충 감이 잡혔다. 아무리 다른 사람을 조심한다고 따로 여수에 가서 만났다는 게 앞뒤가 안 맞는다. 이유성은 아마 무슨 일이 있어서 여수에 체류하게 됐을 것이다. 그리고 오정희를 부르고 오정희가 올라가자 김유미를 부른다.
내일 아침에 김유미가 올라가면,,, 또 다른 누군가를 부를 지도 모르는 일...
그렇다면 이유성을 치는 게 더 쉬워질 수 있다. 오정희, 김유미, 또 다른 여인... 그녀들 모두를 가지고 녀석을 압박한다면... 내일 여수 공항에서 김유미를 보내는 이유성의 뒤를 따라 붙어 주말을 같이 보내면서 녀석의 다른 여인이 누군지 알아 내고 기회를 잡아야 한다. 퇴근 후 잠깐 집에 들러 전남 고흥에 상가가 생겨 다녀온다고 하고 다시 여수로 출발했다.
새벽에 도착 후 찜질방에서 눈을 조금 붙이고 나서 김포로 가는 첫 비행기 시간에 맞춰 공항으로 갔다. 김유미와 이유성이 나타난 시간은 출발 15분 전인 8시 20분. 탑승구 안으로 사라지는 김유미를 배웅하고 돌아서는 이유성의 뒤를 쫓아 주차장으로 가서 녀석의 빨간색 벤츠를 따라 갔다.
오정희와 만났던 호텔로 다시 돌아간 이유성은 야외 주차장에 차를 주차시킨 후 호텔 안으로 사라졌고 난 녀석의 차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내 차를 세워두고 기다리다 배가 고파 별관에 있는 1층 카페로 들어갔다. 토스트와 모닝 커피를 시켜 먹으며 호텔 현관으로 다시 이유성이 나타나기를 기다렸지만 별 소식이 없었고 식사 후에 다시 차로 돌아가 좌석을 뒤로 눕힌 채 잠을 청했다.
이유성이 여수에 체류하는 건 맞는 듯 했지만 또 다른 여인을 부를지는 모르는 일이다. 봄볕이 따뜻하게 비추고 있었고 호텔 주차장은 관광객들로 붐볐지만 녀석은 늦은 오후까지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고 적어도 일요일인 내일 오후 까지는 어떤 소득이라도 거둬야하는 나로서는 그런 뻔한 스토리를 상상하며 6시간을 운전해서 이곳에 온 내가 미쳤다는 생각을 하다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일어났을 때 난 잠깐 동안 내가 있는 곳이 어딘지 몰라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잠시 후 상황 파악이 될 만큼 제 정신으로 돌아왔을 때 이유성의 차는 그 자리에 없었고 그 사실은 날 다시 멍하게 만들었다. 녀석이 여수에 머무르는 이유를 정확히 모르는 터라 어디로 가야할 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아 고민하던 나는 할 수 없이 다시 잠을 청했는데 그 때 지연의 전화가 걸려왔다.
“어디에요? 오늘 바쁜가보네요. 연락도 없고.”
“응. 독감에 걸렸나봐. 몸이 좀 안 좋아서 누워있어. 집이야.”
지연과 통화를 끊고 핸드폰을 보다 최근 통화 내역에서 김유미의 이름을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오늘 수업에 못 갔어. 바쁜 일이 생겨서... 별 일 없었지?”
“어머님이 오셨던데요... 예...”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다 이유성에 관한 질문을 던졌다.
“하나 궁금한 게 있는 데 요즘 동생은 뭐하지? 아직도 헬스클럽에 다녀?”
지연의 말로는 스포츠용품점을 운영한다고 했지만 그거라면 여수에 체류할 이유가 없다.
“예?... 유성인... 메이저리그 관련 상품을 판매하는 매장을 운영해요. 그런데...”
“응... 왜? 요즘은 안 해?”
“그게 아니고 얼마 전에 개인투자조합 같은 곳에 들어가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한 것 같아요.”
“어떤 사업? 기존 매장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예... 그게 잘은 모르지만 케이블카 사업 이라고 했어요.”
“그래? 젊은 친구가 능력이 대단하네...”
난 대충 얼버무린 후 통화를 끝냈다. 그리고 시내 쪽으로 차를 몰고 가다 제일 먼저 눈에 띈 PC방으로 들어가서 검색창에 여수 케이블카를 입력했다. 여수 해상 케이블카. 2년 뒤 완공을 목표로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데 동양에서 네 번째.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바다 위를 가로지르게 된다. 민자사업 형태로 개인 사업가들이 자금을 모아 건설되며 이유성도 그 일원인 듯 했다.
김유미에게 자세히 물어보지 않은 이유는 그녀가 내게 여수에 온 이유를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난 이유성만큼 소중한 존재는 아니다. 결국 결정적인 상황에서는 녀석의 편을 들 것이고...
난 돌산대교를 건너 케이블카 사업이 진행 중인 현장으로 갔다. 2층으로 된 사무소가 있었고 물고기 모양의 케이블카 구조물이 위용을 뽐내며 치솟아 있었다. 토요일 저녁이어서 그런지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산위에서 내려다보는 여수밤바다가 아름답게 펼쳐져 완공되고 나면 관광명소로 자리 잡는 건 시간문제인 듯 싶었다.
투자규모가 얼마나 될지는 모르지만 공사비가 몇 백억 이상은 들 것인데 이유성이 투자를 결정했다면 그 자금은 대체 어디서 온 걸까? 이런 저런 생각에 빠져있다 여수까지 온 본연의 업무에 충실하기 위해 다시 호텔로 갔다. 주차장을 둘러 봐도 녀석의 차는 보이지 않았고 난 오늘 아침 이유성이 차를 주차시킨 근처에 차를 대고 막연히 녀석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막혀 있던 실마리가 조금씩 풀리고 있기는 하지만 녀석에게 접근하기 위해서 오정희와 김유미를 들이대는 건 왠지 마음이 좀 불편했는데 그 둘은 히든카드 정도로 남겨두고 또 다른 여인을 찾고 싶었다. 오정희는 친구 엄마이고 김유미는 배다른 누이... 약간 비정상적인 관계라 협상 테이블에 올리고 싶지 않다. 이유성에게 충격이 강하면 강할수록 저항이 더 세질 염려가 있고 다른 부분도 신경 써야 할지도 모른다. 선승철에게 들은 이미지와 내가 본 바로는 순한 양 같은 외모를 가졌지만 이 마왕을 내가 직접 겪어 본 바 없으니...
저녁을 먹지 않고 기다리다보니 배가 너무 고파서 빵이라도 사와야겠다는 생각에 시동을 키려 했을 때 도로에서 주차장으로 차가 들어오는 불빛이 보였다. 시간이 10시를 넘어가고 있는 터라 그 차가 이유성의 빨간 스포츠카이기를 내심 바랬는데 내 차 바로 옆에 주차시킨 차량에서 녀석과 하얀 원피스를 입은 여인이 내렸다. 오정희도 김유미도 아닌 그 여자는 언뜻 봐도 상당한 미인이었는데 호텔 프론트로 걸어가는 뒤태만 봐도 뭇 남성들은 시선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섹시했다.
아침에 김유미를 보내고 저녁에 다른 여인과 만나다니... 지연이 독수공방으로 보낸 밤들의 이유가 내 눈 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난 급한 일이 있는 척 호텔 프런트 앞으로 두사람 보다 먼저 뛰어 들어가서 모자를 푹 눌러 쓴 채 회전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습과 엘리베이트를 타기 위해 기다리는 두 사람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리고 호텔을 나와 시장 근처의 24시간 해장국 집에 가서 밥을 먹었다.
하얀 원피스의 여자와 이유성은 같이 밤을 보낼 것이다. 그녀가 아침 일찍 비행기를 탄다면 여기가 여수인 걸 감안하면 난 그녀를 따라 붙을 수 없다. 일요일이므로 좀 늦은 비행기로 간다고 하더라도 비행기가 출발할 때까지 내가 여수에 있으면 답이 없고 미리 출발시간과 행선지를 알아서 먼저 도착 공항에 가서 기다리는 수 밖에 없는데...
이유성은 법원 앞에서 정장을 입고 기다리던 날 잠깐 보긴 했지만 지금은 그 때와 옷차림이 다르고 지금처럼 모자를 눌러 쓴다면 알아보기는 힘들 것이다. 난 최대한 이 커플 가까이에서 둘의 대화를 엿들으며 정보를 파악해야 한다. 이유성이 여수에서 계속 체류한다면 여자는 비행기로 움직일 가능성이 많고 최악의 경우 난 차를 두고 공항에서 티켓팅을 한 후 같은 비행기를 타야하는데 그 건 표가 없을 가능성과 나중에 차를 가지러 여기 다시 와야 하는 부담까지 떠안게 되는 것이다.
어제 밤에 잠을 잔 그 찜질방에서 눈을 좀 붙인 후 이른 아침부터 호텔 프런트 근처 테이블에서 대기했다. 두 커플이 모습을 보인 건 오전 8시 경... 이유성의 벤츠는 돌산대교를 건너 향일암 방향으로 이동했고 향일암 주차장에서 사찰로 올라가는 커플의 뒤를 쫓아 올라갔다. 올라갈 때는 몰랐는데 1km가 넘는 제법 먼 길이어서 뒤를 따라가는 동안 내용은 잘 들리지 않지만 둘이 이야기를 나누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때 핸드폰 벨소리가 들리더니 여자가 전화를 받았다.
“여기... 여수... 놀러 왔어.”
“응... 주말이고 해서... 오늘 저녁?”
“음... 2시 반 비행기라 갈 수 있긴 한데... 피곤해서...”
“애들? 요즘은 말도 잘 안 해. 지들 친구들하고만 놀려고 하고...”
“아니.. 애들 때문이 아니라.. 낼 일하려면 좀 쉬어야지...”
“응.. 주중에 한 번 보자. 미안... 숙희한테도 미안하다고 그래.”
2시 반에 여수를 떠나는 비행기. 여자는 그 걸 탄다. 인천이나 김포까지 1시간도 안 걸리는 비행시간을 감안하면 난 이 커플을 쫓아갈 시간이 없다. 난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뒤로 돌아서 다시 길을 내려간 후 여수공항으로 갔다. 그 시간에 수도권으로 가는 비행기는 2시 25분 김포행 밖에 없었고 김포 도착시간은 3시 20분. 공항 시계가 9시 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난 총알같이 여수 공항을 빠져나와 김포로 차를 몰았다.
휴게소 한 번 들리지 않고 김포까지 계속 운전해서 도착한 시간은 3시 25분. 화장실 갈 시간도 없이 국내선 청사 앞에서 하얀 원피스를 입은 그녀를 기다렸다. 5분이 채 지나지 않아 작은 손가방 하나만 들고 정문으로 나온 그녀는 택시 승강장을 향해 걸어갔고 주차장에 가서 내 차를 가져오는 사이에 그녀가 사라져 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에 난 바로 그녀의 뒤에 서서 그녀가 탄 택시 바로 뒤 택시를 타고 기사에게 외쳤다.
“앞 차 좀 따라가 주세요. 2만원 더 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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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못 올리는 점 항상 죄송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원래 낮술을 한 잔 할까 해서 차를 가지고 오지 않았으나 다시 택시를 타고 지연의 아파트로 간 후 내 차에 그녀를 태우고 출발했다. 도착한 곳은 정릉 국민대학교 건너편 주택가. 길 가에 차를 세우고 언덕을 올라갔다.
“주택가네요? 여기 누가 살죠?”
“아무도 살지 않아. 중학교 3학년 무렵까지 우리 가족이 살았지.”
“그래요? 그런데 왜?”
난 아무 말 없이 5분 정도를 더 걸어 페인트가 벗겨진 녹색 대문이 있는 2층 집 앞에 섰다.
“여기야. 올림픽이 있던 해인 88년 까지 여긴 우리 집이었어. 25년 전이긴 한데 많이 변하진 않았고...”
“무슨 사연이 있는 거예요? 절 왜?...”
“그 때 아버지가 저기 서 계셨어. 집 안 모든 가재도구에 빨간 압류 딱지가 붙고 경매로 넘어갔지. 오전 무렵부터 집달리들이 판결문을 들고 들이 닥쳤는데 아마 점심 무렵이었을 거야. 여름이어서 가만히 있어도 땀이 날 정도로 더운 날씨에 아버지가 당신의 손때가 묻은 집이 넘어가는 걸 저기 서서 보고 계셨어.”
난 대문 반대편 하얀 담벼락 앞을 가리켰다.
“난 더워서 차고 앞 그늘에서 아버지만 쳐다보고 있었어. 내 기억에 어머니는 집 안에서 울고 있었던 것 같아. 그런데 그 때 아버지의 표정은... 아직도 잊어버리질 못하는 그 얼굴에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후회와 체념, 그리고 두려움이 있었어. 여동생은 삼촌 댁에 가 있어서 그 때를 잘 몰라.”
한동안 말이 없던 지연이 천천히 입을 떼었다.
“아저씨는 그다지 굴곡진 삶을 살지 않았다고 했잖아요? 이런 과거가 있었다면...”
“굴곡진 삶? 후후후... 물론 나한테 그런 건 없어. 모든 걸 잃어버린 건 아버지였지. 내가 아니잖아. 8년을 운영하신 공장도 넘어 갔어. 그리고 고향 선산도... 남은 건 아무 것도 없었어. 그 일이 있은 몇 달 후에 아버진 돌아가셨고 난 어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삼촌의 도움 속에 커야 했어.
공장이야 아버지 명의니까 넘어가는 게 당연한데... 선산은 엄밀히 이야기 하면 아버지 소유는 아니었어. 그 때까지 살아계신 할아버지 명의로 되어 있었지. 그런데 우리 아버지는 할아버지, 큰 아버지와 대판 싸우시고 선산의 당신 몫을 주장하셨어. 결국 그 걸 팔게 한 후에 당신께선 뭘 하신 줄 알아?“
“...”
“그 것마저 빛을 갚으셨어. 웃기지... 다른 사람 같으면 그 돈이라도 챙겨서 가족들 먹여 살리려고 했을 텐데... 아버진 그런 분이셨어. 왜 학교 다닐 때 배운 윤동주의 시에 이런 구절이 있잖아.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난 괴로워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아버진 당신을 믿고 돈을 빌려준 누군가가 피해보는 게 죽기보다 싫으셨던 것 같아.
난 이 곳에 가끔 와. 살아가는 게 만만치 않을 때... 여기 와서 저 집을 보는 게 아니라 그 날 아버지가 서 계시던 저 담 앞을 한참 쳐다 보다 가. 왜 그런 줄 알아?“
“...”
“아버지의 그 얼굴이 떠오르면, 그 날 아버지가 겪었던 아픔을 떠올리면 모든 게 작아져 버리거든. 다시 여길 떠날 땐 내 앞에 닥친 일은 그럭저럭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용기 같은 게 생기더라고. 웃기지?”
난 빙그레 웃으며 지연을 바라봤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난 솔직히 니 아픔을 잘 몰라. 얼마나 아픈지... 얼마나 널 미치게 하는지... 하긴 그 때도 아버지의 아픔을 잘 몰랐어. 돌아가셨을 때 눈물도 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너한테 해주는 이야기들이 항상 다른 사람의 일 인 것처럼 말을 해서 그게 마음에 걸려... ”
“이럴 땐 뭐라고 말해야 되는 거죠? 아... 그래도 아저씨가 옆에 있어서 다행이에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전...”
금요일 오전 내내 이유성에게 접근할 수 있는 길을 고민하다 퇴근 무렵 김유미에게 전화를 했다.
“오랜만이에요. 어쩐 일이예요? 전화를 다하구...”
“응... 내일 수업 가긴 하는데... 어떻게 지내는 지 궁금해서... 어디야?”
“여기... 여수예요. 놀러 왔어요.”
여수? 이유성이 여수에서 올라오지 않고 김유미와 있단 말인가?
“응? 수업 없어? 주중에 웬 여수? 누구랑 갔는데?”
“갑자기 그렇게 됐어요. 모..모임에서 같이 온 거예요.”
“언제 오는데? 내일 수업은 있는 거야?”
“내일 아침 일찍 비행기로 올라가요. 수업은 할 거예요.”
“응... 내일 봐. 끊어.”
오정희는 여수에 비행기로 가고 이유성은 자신의 차로 내려간 것이 석연치 않았는데 대충 감이 잡혔다. 아무리 다른 사람을 조심한다고 따로 여수에 가서 만났다는 게 앞뒤가 안 맞는다. 이유성은 아마 무슨 일이 있어서 여수에 체류하게 됐을 것이다. 그리고 오정희를 부르고 오정희가 올라가자 김유미를 부른다.
내일 아침에 김유미가 올라가면,,, 또 다른 누군가를 부를 지도 모르는 일...
그렇다면 이유성을 치는 게 더 쉬워질 수 있다. 오정희, 김유미, 또 다른 여인... 그녀들 모두를 가지고 녀석을 압박한다면... 내일 여수 공항에서 김유미를 보내는 이유성의 뒤를 따라 붙어 주말을 같이 보내면서 녀석의 다른 여인이 누군지 알아 내고 기회를 잡아야 한다. 퇴근 후 잠깐 집에 들러 전남 고흥에 상가가 생겨 다녀온다고 하고 다시 여수로 출발했다.
새벽에 도착 후 찜질방에서 눈을 조금 붙이고 나서 김포로 가는 첫 비행기 시간에 맞춰 공항으로 갔다. 김유미와 이유성이 나타난 시간은 출발 15분 전인 8시 20분. 탑승구 안으로 사라지는 김유미를 배웅하고 돌아서는 이유성의 뒤를 쫓아 주차장으로 가서 녀석의 빨간색 벤츠를 따라 갔다.
오정희와 만났던 호텔로 다시 돌아간 이유성은 야외 주차장에 차를 주차시킨 후 호텔 안으로 사라졌고 난 녀석의 차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내 차를 세워두고 기다리다 배가 고파 별관에 있는 1층 카페로 들어갔다. 토스트와 모닝 커피를 시켜 먹으며 호텔 현관으로 다시 이유성이 나타나기를 기다렸지만 별 소식이 없었고 식사 후에 다시 차로 돌아가 좌석을 뒤로 눕힌 채 잠을 청했다.
이유성이 여수에 체류하는 건 맞는 듯 했지만 또 다른 여인을 부를지는 모르는 일이다. 봄볕이 따뜻하게 비추고 있었고 호텔 주차장은 관광객들로 붐볐지만 녀석은 늦은 오후까지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고 적어도 일요일인 내일 오후 까지는 어떤 소득이라도 거둬야하는 나로서는 그런 뻔한 스토리를 상상하며 6시간을 운전해서 이곳에 온 내가 미쳤다는 생각을 하다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일어났을 때 난 잠깐 동안 내가 있는 곳이 어딘지 몰라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잠시 후 상황 파악이 될 만큼 제 정신으로 돌아왔을 때 이유성의 차는 그 자리에 없었고 그 사실은 날 다시 멍하게 만들었다. 녀석이 여수에 머무르는 이유를 정확히 모르는 터라 어디로 가야할 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아 고민하던 나는 할 수 없이 다시 잠을 청했는데 그 때 지연의 전화가 걸려왔다.
“어디에요? 오늘 바쁜가보네요. 연락도 없고.”
“응. 독감에 걸렸나봐. 몸이 좀 안 좋아서 누워있어. 집이야.”
지연과 통화를 끊고 핸드폰을 보다 최근 통화 내역에서 김유미의 이름을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오늘 수업에 못 갔어. 바쁜 일이 생겨서... 별 일 없었지?”
“어머님이 오셨던데요... 예...”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다 이유성에 관한 질문을 던졌다.
“하나 궁금한 게 있는 데 요즘 동생은 뭐하지? 아직도 헬스클럽에 다녀?”
지연의 말로는 스포츠용품점을 운영한다고 했지만 그거라면 여수에 체류할 이유가 없다.
“예?... 유성인... 메이저리그 관련 상품을 판매하는 매장을 운영해요. 그런데...”
“응... 왜? 요즘은 안 해?”
“그게 아니고 얼마 전에 개인투자조합 같은 곳에 들어가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한 것 같아요.”
“어떤 사업? 기존 매장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예... 그게 잘은 모르지만 케이블카 사업 이라고 했어요.”
“그래? 젊은 친구가 능력이 대단하네...”
난 대충 얼버무린 후 통화를 끝냈다. 그리고 시내 쪽으로 차를 몰고 가다 제일 먼저 눈에 띈 PC방으로 들어가서 검색창에 여수 케이블카를 입력했다. 여수 해상 케이블카. 2년 뒤 완공을 목표로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데 동양에서 네 번째.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바다 위를 가로지르게 된다. 민자사업 형태로 개인 사업가들이 자금을 모아 건설되며 이유성도 그 일원인 듯 했다.
김유미에게 자세히 물어보지 않은 이유는 그녀가 내게 여수에 온 이유를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난 이유성만큼 소중한 존재는 아니다. 결국 결정적인 상황에서는 녀석의 편을 들 것이고...
난 돌산대교를 건너 케이블카 사업이 진행 중인 현장으로 갔다. 2층으로 된 사무소가 있었고 물고기 모양의 케이블카 구조물이 위용을 뽐내며 치솟아 있었다. 토요일 저녁이어서 그런지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산위에서 내려다보는 여수밤바다가 아름답게 펼쳐져 완공되고 나면 관광명소로 자리 잡는 건 시간문제인 듯 싶었다.
투자규모가 얼마나 될지는 모르지만 공사비가 몇 백억 이상은 들 것인데 이유성이 투자를 결정했다면 그 자금은 대체 어디서 온 걸까? 이런 저런 생각에 빠져있다 여수까지 온 본연의 업무에 충실하기 위해 다시 호텔로 갔다. 주차장을 둘러 봐도 녀석의 차는 보이지 않았고 난 오늘 아침 이유성이 차를 주차시킨 근처에 차를 대고 막연히 녀석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막혀 있던 실마리가 조금씩 풀리고 있기는 하지만 녀석에게 접근하기 위해서 오정희와 김유미를 들이대는 건 왠지 마음이 좀 불편했는데 그 둘은 히든카드 정도로 남겨두고 또 다른 여인을 찾고 싶었다. 오정희는 친구 엄마이고 김유미는 배다른 누이... 약간 비정상적인 관계라 협상 테이블에 올리고 싶지 않다. 이유성에게 충격이 강하면 강할수록 저항이 더 세질 염려가 있고 다른 부분도 신경 써야 할지도 모른다. 선승철에게 들은 이미지와 내가 본 바로는 순한 양 같은 외모를 가졌지만 이 마왕을 내가 직접 겪어 본 바 없으니...
저녁을 먹지 않고 기다리다보니 배가 너무 고파서 빵이라도 사와야겠다는 생각에 시동을 키려 했을 때 도로에서 주차장으로 차가 들어오는 불빛이 보였다. 시간이 10시를 넘어가고 있는 터라 그 차가 이유성의 빨간 스포츠카이기를 내심 바랬는데 내 차 바로 옆에 주차시킨 차량에서 녀석과 하얀 원피스를 입은 여인이 내렸다. 오정희도 김유미도 아닌 그 여자는 언뜻 봐도 상당한 미인이었는데 호텔 프론트로 걸어가는 뒤태만 봐도 뭇 남성들은 시선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섹시했다.
아침에 김유미를 보내고 저녁에 다른 여인과 만나다니... 지연이 독수공방으로 보낸 밤들의 이유가 내 눈 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난 급한 일이 있는 척 호텔 프런트 앞으로 두사람 보다 먼저 뛰어 들어가서 모자를 푹 눌러 쓴 채 회전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습과 엘리베이트를 타기 위해 기다리는 두 사람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리고 호텔을 나와 시장 근처의 24시간 해장국 집에 가서 밥을 먹었다.
하얀 원피스의 여자와 이유성은 같이 밤을 보낼 것이다. 그녀가 아침 일찍 비행기를 탄다면 여기가 여수인 걸 감안하면 난 그녀를 따라 붙을 수 없다. 일요일이므로 좀 늦은 비행기로 간다고 하더라도 비행기가 출발할 때까지 내가 여수에 있으면 답이 없고 미리 출발시간과 행선지를 알아서 먼저 도착 공항에 가서 기다리는 수 밖에 없는데...
이유성은 법원 앞에서 정장을 입고 기다리던 날 잠깐 보긴 했지만 지금은 그 때와 옷차림이 다르고 지금처럼 모자를 눌러 쓴다면 알아보기는 힘들 것이다. 난 최대한 이 커플 가까이에서 둘의 대화를 엿들으며 정보를 파악해야 한다. 이유성이 여수에서 계속 체류한다면 여자는 비행기로 움직일 가능성이 많고 최악의 경우 난 차를 두고 공항에서 티켓팅을 한 후 같은 비행기를 타야하는데 그 건 표가 없을 가능성과 나중에 차를 가지러 여기 다시 와야 하는 부담까지 떠안게 되는 것이다.
어제 밤에 잠을 잔 그 찜질방에서 눈을 좀 붙인 후 이른 아침부터 호텔 프런트 근처 테이블에서 대기했다. 두 커플이 모습을 보인 건 오전 8시 경... 이유성의 벤츠는 돌산대교를 건너 향일암 방향으로 이동했고 향일암 주차장에서 사찰로 올라가는 커플의 뒤를 쫓아 올라갔다. 올라갈 때는 몰랐는데 1km가 넘는 제법 먼 길이어서 뒤를 따라가는 동안 내용은 잘 들리지 않지만 둘이 이야기를 나누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때 핸드폰 벨소리가 들리더니 여자가 전화를 받았다.
“여기... 여수... 놀러 왔어.”
“응... 주말이고 해서... 오늘 저녁?”
“음... 2시 반 비행기라 갈 수 있긴 한데... 피곤해서...”
“애들? 요즘은 말도 잘 안 해. 지들 친구들하고만 놀려고 하고...”
“아니.. 애들 때문이 아니라.. 낼 일하려면 좀 쉬어야지...”
“응.. 주중에 한 번 보자. 미안... 숙희한테도 미안하다고 그래.”
2시 반에 여수를 떠나는 비행기. 여자는 그 걸 탄다. 인천이나 김포까지 1시간도 안 걸리는 비행시간을 감안하면 난 이 커플을 쫓아갈 시간이 없다. 난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뒤로 돌아서 다시 길을 내려간 후 여수공항으로 갔다. 그 시간에 수도권으로 가는 비행기는 2시 25분 김포행 밖에 없었고 김포 도착시간은 3시 20분. 공항 시계가 9시 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난 총알같이 여수 공항을 빠져나와 김포로 차를 몰았다.
휴게소 한 번 들리지 않고 김포까지 계속 운전해서 도착한 시간은 3시 25분. 화장실 갈 시간도 없이 국내선 청사 앞에서 하얀 원피스를 입은 그녀를 기다렸다. 5분이 채 지나지 않아 작은 손가방 하나만 들고 정문으로 나온 그녀는 택시 승강장을 향해 걸어갔고 주차장에 가서 내 차를 가져오는 사이에 그녀가 사라져 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에 난 바로 그녀의 뒤에 서서 그녀가 탄 택시 바로 뒤 택시를 타고 기사에게 외쳤다.
“앞 차 좀 따라가 주세요. 2만원 더 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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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못 올리는 점 항상 죄송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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