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지연이 무슨 생각을 하는 듯 입을 다물었다.
그날 밤 우리는 호프집을 나와 근처 무인텔로 향했다. 주차장으로 걸어 들어가서 계단을 올라 객실 문 앞에 붙어 있는 자동 요금 정산기에 지폐를 넣자 문이 열렸다.
난 남색 유니폼의 단추를 풀려는 지연의 손을 잡고 그녀에게 말했다.
“그대로 있어. 벗겨 줄게.”
청바지처럼 몸에 꼭 달라붙는 하얀색 바지의 후크를 따고 바지를 밑으로 내리자 지연의 늘씬한 다리와 적당히 솟아오른 둔부를 감싸고 있는 하얀색 팬티가 드러났고 난 순식간에 팬티를 끌어 내린 후 그녀를 침대 위에 엎드리게 했다. 그리고 내 옷을 벗어버리고 야구 여신의 뒤태에 흥분해 이미 하늘을 향해 치솟은 내 물건으로 그녀의 하얀 엉덩이 사이 계곡을 자극하며 목 뒤를 핥아 갔다.
‘허억 하아 하아 하아아’
유니폼을 입은 상체를 숙인 채 하늘을 향해 둔부를 쳐들고 있는 지연의 뒤에서 난 거의 선 채로 삽입을 했고 허리를 튕기며 피스톤 운동을 시작했다.
‘앗 아아 앗 아 하아 하아 하항 아 아 아 아’
정사가 끝나자 난 숨을 몰아쉬며 멍하니 침대 위에 누워 있었고 욕실에 들어가 씻고 나온 지연이 내 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와 안겼다.
“나도 씻고 올게. 잠깐만...”
“조금만 이대로 있다가요. 호호... 오늘 간만에... 호호호.”
“간만에? 뭐? 맘에 좀 들었어?”
지연이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이 쪽 방면에 선수는 아니지만 평균 이상은 될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마왕과 밤을 지내던 여자이니...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슬며시 일어나 샤워를 하고 와서 그녀 곁에 다시 누웠다. 지연은 눈을 감은 채 잠이 든 것처럼 움직이지 않고 있었고 나도 부드럽고 은은한 그녀의 향기를 느끼며 잠깐이라도 잠을 청할 생각으로 눈을 감았다. 그런데 그 때 지연이 눈을 뜨며 말을 건넸다.
“거짓말 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응? 뭐가?”
“아까 호프집에서 아저씨가 한 이야기들이요.”
“무슨 이야기?”
“얼마나 됐다고 벌써 모른 척이에요? 아저씨가 홧병에 걸렸었다는 이야기... 그거요.”
“왜 그런 생각을 했지? 내가 나중에 기회가 되면 이야기 해준다고 했잖아.”
“몰라요. 전 아저씨가 제 맘을 편하게 해주기 위해서 이야기를 한 걸 수도 있다고... 갑자기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지는 이유를 모르면 도망치는 게 옳다. 그 거 저한테 해주고 싶은 이야기인데 그냥 이야기하면 좀 그래서 아저씨가 겪은 일인 것처럼...”
난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속으론 놀라고 있었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
“그 사람과의 결혼 생활을 승부라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전 분명히 그 사람의 아내인데... 제 곁에 있는 시간은 항상 너무 짧았고 제가 아무리 잘해도... 화를 내도.. 며칠 동안 연락을 안 해도... 그 사실은 변함이 없었어요. 우리의 결혼 생활은 늘 그랬어요. 아마 그 건... 그러니까 인정하기 싫지만 전 변수가 아니었던 것 같아요. 결과에 영향을 끼칠 수 없었으니까. 저 말고 달리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다고 이야기하기엔 만나는 여자가 한두 명이 아닌 듯 했고... 아저씨 이야기를 듣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지는 이유를 몰랐다는 표현이 맞는 것 같기도 해요.
그래서... 아저씨가 제 마음을 편하게 해주기 위해서... 이혼을 잘 한 것이다. 나도 내가 지는 이유를 모르는 승부에서 겁쟁이처럼 도망쳐 본 적이 있다고 이야기를 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응. 이제야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 하지만... 거짓말은 아니야. 니가 겪은 일과 내 경험이 비슷하게 여겨지는 건 우린 둘 다 가슴 속에 아픔을 간직한 사람이어서 그런 걸 거야. 난 그냥 내 이야기를 했어.”
“그럼 그 때 진동 같은 걸 생각했던 것도...”
“그 때 내 분노와 상실감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느낀 것 중 가장 컸어. 만약 그 전에 겪었던 아픔보다 강도가 약했다면 별 생각 없었겠지만... 그렇다면 그냥 예전처럼 일어설 수 있을 거라고 믿었을 테니...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난 끊임없이 내 자신에게 물었던 거야. 어떻게 다시 일어서야 하지? 그러다가 거의 매일을 술에 취한 채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멍해져 시간을 보내던 중에 갑자기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 뭐라도 해야 하는 데 그냥 작은 뭐라도 해야 하는데... 날 그런 식으로 세뇌했던 거겠지.
전혀 웃기지 않지만 한번 웃자. 그럼 좋은 진동 같은 게 생길거야. 그리고 그 작은 진동이 내 몸 안에서 퍼지면... 좋은 것들을 끌어 들일거야. 왜 주파수가 바뀌면 다른 방송이 나오잖아. 그래... 그렇게 될 거야.“
“제가 예전에 그런 이야기 한 적 있죠? 우리 아빠나 아저씨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말이 되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데 묘한 재주가 있다고...”
“하지만 가까스로 힘을 내어 만든 좋은 진동은 무기력과 상실감을 이기지 못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곤 했어. 모든 게 무의미한 일이 돼버리고 나면 다시 한 발자국을 걷는 건 더 힘들어지고... 그래서...“
“그래서요? 어떻게 했죠?”
“한참을 고민하다 나 자신을 비우려고 노력했어. 빈 공간이 생겨야 작은 진동들이 커질 거라고 생각했거든. 꽤 오랜 시간동안 하지 않았던 운동을 시작했고 틈이 날 때마다 땀을 흘렸어. 밤이면 너무 지쳐서 아무 생각 없이 잠을 잘 수 있을 정도로....”
“운동이요?”
“직장 내 축구 동호회에 일주일에 한 번 나가서 축구를 했고 탁구 나 마라톤... 닥치는 대로... 땀을 흘릴 수 있는 거면 뭐든지 했어. 힘이 남는 날이면 밤에 근처 초등학교 운동장에 가서 뛰거나 줄넘기를 하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전 아저씨 만나면서 그런 기색을 전혀 느낀 적 없으니 지금은 모두 지나간 이야기인거죠?”
“음... 글쎄... 그건 아닌 것 같아. 넌 너의 아픔을 가끔은 이야기하지만 난 지금도 그 기억을 되살리기조차 싫어서 누구한테 언급도 해 본적 없어. 너한테 이야기하는 것도 그 일이 아닌 이후에 내가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에 관계된 내용이구....”
“그래요?”
지연이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조용히 있다가 잠시 후에 입을 열었다.
“그건... 아저씨가 생각하는 것보다 전 아저씨를 가깝게 생각하고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아저씨는 저와 항상 거리를 두고 있으니 그런 거라고요. 전에도 말했지만 그 게 좀 기분이 이상한 거 알아요? 갑자기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
“괜한 트집은... 내 생각엔 넌 어느 정도 아픔을 이겨내고 있지만 난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서 그런 것 같은데...”
“어떻게 아프다는 사람이 겉으론 전혀 태도 안날 수가 있냐고요? 억지에요.”
“억지? 그렇게 느꼈다면 아마 나이가 들어가면서 아프지만 그 걸 표현하지 않는 게 능숙해졌겠지. 그게 좋은 걸까? 솔직히 잘 모르겠어.
하지만 난 아직도 분노가 가슴 속에 차오를 때마다 운동을 하러 가고 싶어. 그럴 땐 마음을 조절하기 힘드니까 아예 힘을 빼버리면 잡념들이 사라지는 것 같아서... 운동을 하고 겨우 집에 까지 갈 수 있을 만큼 외에는 아무 힘도 없는 상태가 돼버리면 오히려 머리는 맑아지고 텅 비더라고. 그 때 아무리 작은 거라도 좋은 생각을 하는 거야. 그리고 그게 텅 빈 내 마음 속에서 증폭되기를 비는 거지.”
“가슴 속이 콱 막혀서 미칠 것 같을 때 운동할 생각이 나요? 난 꼼짝도 하기 싫을 때가 많던데...”
“그냥 움직이는 거야. 술을 마시고 폭식 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명상 같은 걸로 다스리는 건 잘 안되고 섹스가 하고 싶을 때도 있기는 하지만... 그 건 상대가 있어야 할 수 있는 거니까.”
“상대를 만들면 되잖아요?”
“그냥 섹스가 하고 싶은 거야. 누군가에게 작업을 하고 싶은 게 아니라... 후후후. 여자들에게 작업을 하는 것도 상태가 좋을 때나 가능해. 가슴 속이 분노로 채워진 상태로 무슨... 의미 없어. 난 그냥 내 의식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싶어서 운동이나 섹스를 생각하는 것 뿐이야.”
“죽는 걸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난 시선을 돌려 알몸으로 내 팔을 베고 누워 있는 그녀의 눈을 바라봤다. 지연이 내게 그 걸 궁금해 한다는 것은 그런 생각을 해 본적이 있다는 이야기 같은데...
“살면서 잠이 들 때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은 셀 수도 없이 많아. 차라리 잠에서 깨지 않았으면... 그리고 이십 대 중반 무렵이었던가? 그 때는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어. 하지만 지금은...”
“지금은?”
“그럴 권리가 없어. 내가 책임져야 하는 것들이 너무 많아 졌으니까... 죽음은 사치야.”
“사치? 죽을 권리도 없다는 건가요?”
“아마도... 누군가 나를 비겁한 겁쟁이라고 부르든, 실패자로 부르든 그 것과는 상관없이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해. 왜 그런 게 궁금해? 혹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어?”
“....”
지연은 입을 열지 않았고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던 나는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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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일로 정신없이 일주일이 흘러갔고 다시 토요일이 왔지만 주중에 지연의 연락이 한 번도 없었다. 무인텔에서 나와 그녀와 헤어질 때 별다른 느낌은 없었는데... 궁금해진 나는 토요일 저녁 지연에게 문자를 보냈다.
[내일 날씨 좋다는데 뭐할 거야?]
답장이 없다.
지연을 만나는 몇 달동안 주로 연락은 그녀가 했었지만 가끔 내가 전화나 문자를 했을 때 그녀가 받지 않거나 답장을 하지 않은 적은 없었다. 난 핸드폰의 통화 버튼을 눌렀고 재즈풍의 컬러링 음악을 한참 듣고 있었지만 받지 않았다.
아내에게 탁구장에 간다고 말하고 집을 나와 오정희의 카페로 향했다. 8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도착했는데 매장에는 오정희가 없었고 커피를 마시며 지연의 문자나 전화를 기다렸지만 핸드폰은 조용했다.
지연과 관계를 맺어오는 동안 섹스를 하지 않은 주말은 있었지만 얼굴을 보지 않고 넘어간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은데... 무슨 일이지? 만일 오정희가 온다면 움직여야 하나? 이혼 후 지연이 흔들리거나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면 망설일 필요가 없었겠지만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함부로 오정희를 압박할 수는 없다. 배가 고프지 않은 데 사냥에 나섰다가 절실함이 없어서 실패할 지도 모르는 일.
밤 10시가 넘어서고 있을 때 오정희가 모습을 보였다. 난 그녀와 잠시 시선을 교환한 후 그 곳을 나섰고 그 때까지도 지연에게 연락은 없었다.
그리고 다시 일주일이 지나는 동안 주중에 2~3번의 전화를 하고 문자를 보냈지만 지연의 응답은 없었다. 전화를 일부러 받지 않는 다면 난 별로 할 게 없다. 이유를 모른다면 더더욱... 어디서 어긋난 것인지 짐작이 가지 않아 난 계속 마지막 만남을 복기하고 있었다. 내가 했던 말들, 그녀의 눈빛, 몸짓, 우리가 같이 있던 곳들의 주변 상황...
다시 돌아온 토요일 저녁에 오정희의 매장에 가서 커피를 마셨고 늦은 밤 오정희가 왔을 때 잠시 눈을 마주친 후 그냥 집으로 왔다. 지연의 연락이 2주 동안 끊긴 셈.
월요일 낮에 지연이 근무하는 경찰서에 전화를 해서 그녀의 출근 여부를 확인했다. 지연은 출근 중이었고 난 그녀와 통화를 하며 무슨 일이 있는 지 묻고 싶었지만 전화를 끊었다. 지연은 내 전화를 피하고 있다. 이유가 뭐지?
그 이유가 나라면... 그래서 그녀가 나 때문에 화가 났거나 감정이 상했다면... 일단 난 기다릴 수밖에 없다. 가끔 지연에게 전화나 문자를 보내다 언젠가 그녀의 기분이 풀리고 전화를 받으면 그 때 이야기를 해보면 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아니라면... 나와의 만남을 이어가는 건 그녀가 원하는 것이었는데 그걸 돌려놓을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지연이 업무상 스트레스를 받거나 일이 바쁘다는 건 이유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냥 나에게 이야기했을 것이다. 이런 경우 다른 남자가 생겼다면 지연의 행동이 설명이 되긴 하지만... 그 것 역시 부족하다.
다른 남자를 내가 못 만나게 한 일도 없고 오히려 누군가에게 마음을 열었다면 지연의 상태는 호전된 것이긴 한데 그런 이유 때문에 굳이 날 피할까?
다시 한 주가 흘러갔고... 또 한 주가 지났다. 지연에게는 계속 연락이 없다. 그래도 주말마다 만나던 사이였고 몸을 섞던 사이였는데 한 마디 말도 없이 그녀와의 사이가 끝날 것 같지는 않았지만 가끔 했던 전화와 문자에 대답이 없으니 불안해졌다.
토요일 저녁이면 난 오정희의 카페로 가서 지연이 날 만나려하지 않는 이유를 생각했다. 같은 생각을 계속 되풀이하다 보니 꽤 그럴듯한 가설이 세워 졌는데 그 중심엔 이유성이 있었다. 난 마왕의 재등장이 마음에 걸렸다. 다른 어떤 이유보다도 그 쪽이 의심스러운 건 첫 째 마지막 만남에서 내가 별다른 실수를 한 건 없었고 그렇다면 둘 째 지연이 죽거나 기억상실증 같은 것에 걸리지 않은 이상 그녀와 나와의 관계를 그렇게 갑자기 끊을 수 있는 힘을 가진 건 녀석이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있어서 지연이 날 피하게 만들고 우리의 관계를 한 번에 끊어낼 수 있는 강력한 힘을 행사할 수 있단 말인가? 수 백 번 같은 생각을 해도 마지막에 남는 건 녀석뿐이다.
녀석의 개입... 어떤 식 이었을까?
지연의 연락이 끊긴 지 두 달이 됐을 때 난 주중에 휴가를 내고 그녀가 근무하는 강원도 00경찰서로 갔다. 정문을 지나 본관 건물 건너편에 있는 민원인 주차장에 차를 대고 건물로 걸어 들어갔는데 점심시간이 가까운 시간이어서 지나가는 직원에게 식당이 어디 있는 지 물어 보니 식당은 본관에 있지 않고 본관과 통로로 연결된 2층 별관이라고 했다.
그녀를 만나서 무언가를 해봐야겠다는 뚜렷한 목적이 있어 그 곳에 갔다기보다는 잘 지내고 있는 지 확인하고 싶어서 찾아간 거라 난 식당으로 연결된 통로가 보이는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기다렸다. 12시가 되기 조금 전에 제복을 입은 경찰관들이 삼삼오오 식당으로 가고 있었고 그 사이에 지연의 모습이 보였다.
내가 앉아 있는 벤치는 식당으로 연결되는 통로와 10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는데 그녀는 이쪽을 보지 않고 식당 안으로 사라졌고 20 여분 후에 식사를 끝냈는지 식당을 나와 다시 본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지연은 자신이 경찰이라는 걸 내가 모르는 줄 알 것이다. 난 주차장에서 지연의 소울을 확인하고 경찰서를 나섰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사우나에서 시간을 보내다 6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다시 경찰서로 가 퇴근을 하기 위해 정문으로 나오는 그녀의 차를 따라 갔다.
시내에서 조금 벗어나 외곽에 있는 아파트에 도착한 후 차에서 내린 그녀는 잠깐 사이에 내 시야에서 사라져 아파트 현관 안으로 들어갔다.
경찰서 안에서 제복을 입은 모습과 거주하는 아파트 앞에서 정장 스타일의 사복을 입은 지연을 약간 멀리서 봤을 때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었는데 걸으면서 주변을 살핀다거나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도 전혀 없었고 시야는 앞쪽으로 고정되어 있었으며 걸음걸이도 예전과는 달리 힘이 빠져 있었다.
난 지연이 아파트 안으로 들어간 지 10여 분후에 그녀에게 문자를 보냈다.
[요즘 뭐하고 지내? 바쁜가 보네]
답장은 없었고 그녀가 바로 지척에 있었지만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지연이 사라진 아파트 현관을 바라보다 한 시간 쯤 지나 그 곳을 떠났다.
그리고 한 달의 시간이 또 흘러갔다. 난 금요일이면 어김없이 지연에게 문자를 보냈고 토요일엔 오정희의 카페에 갔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서울에서라면 우연히 만난 것처럼 지연의 앞에 나서볼 수 있을 것이다. 금요일 저녁 퇴근하는 지연을 쫓다보면 서울로 올라올 가능성이 있고 그러면 그녀 주변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 지 알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 외에도 수많은 그림들이 뇌리를 스쳐갔지만 그건 그냥 상상으로 남겨 두고 있었다. 내가 움직인다면 그건 지연을 내 곁에 잡아두고 싶어서 일 것이고 욕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저씨가 생각하는 것보다 전 아저씨를 가깝게 생각하고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아저씨는 저와 항상 거리를 두고 있다’는 지연의 말이 생각날 때마다 무언가를 하고 싶었지만 어떤 수를 두어야 하는 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매주 토요일이면 낮엔 아들을 데리고 수업을 가서 김유미를 만났고 밤이면 잠깐이나마 오정희를 볼 수 있었지만 지연은 내 곁에 없었다. 석 달 동안 연락을 피한다는 건 그녀가 날 정리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다시 한 달이 흘러갔고 마지막 만남이 있은 지 4개월이 지난 어느 날 지연에게 문자가 왔다.
[저 미국 가요. 지금 공항이에요. 그 동안 연락 못해서 미안해요. 아저씨 곁에 있는 동안 행복했어요. 다시 한국에 돌아온다면 연락할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그냥 떠나고 싶은 제 마음을 이해해 주세요.]
[응. 연락이 없어서 많이 걱정했는데 다행이네. 미국엔 얼마나 있게 되는 건지 모르지만 잘 지내고. 그래도 한 번은 보고 싶었는데 서운하긴 하지만 잘 살았으면 좋겠다. 같이 보낸 시간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거야.]
지연이 미국에 가는 건 진실일까?
진실이라면 이유성이 미국에 갈 가능성은 없어 보이니 내 짐작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지연이 내 연락을 피한 이유가 무엇일까? 다시 머릿속이 복잡해지긴 했지만 떠난다는 여자를 붙잡을 수는 없는 일. 지연과의 추억이 스쳐갔고 앞으로 뭘 하며 시간을 보낼 지가 막막해졌다. 이젠 오정희의 매장에도 갈 일이 없고 이유성의 뒤를 캐고 다닐 필요도 없어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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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끝을 향해 달려 가네요. 이 작품 끝나면 정말 인간 승리입니다. 몇 년 째 쓰는 건지 모르겠네요.
그날 밤 우리는 호프집을 나와 근처 무인텔로 향했다. 주차장으로 걸어 들어가서 계단을 올라 객실 문 앞에 붙어 있는 자동 요금 정산기에 지폐를 넣자 문이 열렸다.
난 남색 유니폼의 단추를 풀려는 지연의 손을 잡고 그녀에게 말했다.
“그대로 있어. 벗겨 줄게.”
청바지처럼 몸에 꼭 달라붙는 하얀색 바지의 후크를 따고 바지를 밑으로 내리자 지연의 늘씬한 다리와 적당히 솟아오른 둔부를 감싸고 있는 하얀색 팬티가 드러났고 난 순식간에 팬티를 끌어 내린 후 그녀를 침대 위에 엎드리게 했다. 그리고 내 옷을 벗어버리고 야구 여신의 뒤태에 흥분해 이미 하늘을 향해 치솟은 내 물건으로 그녀의 하얀 엉덩이 사이 계곡을 자극하며 목 뒤를 핥아 갔다.
‘허억 하아 하아 하아아’
유니폼을 입은 상체를 숙인 채 하늘을 향해 둔부를 쳐들고 있는 지연의 뒤에서 난 거의 선 채로 삽입을 했고 허리를 튕기며 피스톤 운동을 시작했다.
‘앗 아아 앗 아 하아 하아 하항 아 아 아 아’
정사가 끝나자 난 숨을 몰아쉬며 멍하니 침대 위에 누워 있었고 욕실에 들어가 씻고 나온 지연이 내 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와 안겼다.
“나도 씻고 올게. 잠깐만...”
“조금만 이대로 있다가요. 호호... 오늘 간만에... 호호호.”
“간만에? 뭐? 맘에 좀 들었어?”
지연이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이 쪽 방면에 선수는 아니지만 평균 이상은 될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마왕과 밤을 지내던 여자이니...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슬며시 일어나 샤워를 하고 와서 그녀 곁에 다시 누웠다. 지연은 눈을 감은 채 잠이 든 것처럼 움직이지 않고 있었고 나도 부드럽고 은은한 그녀의 향기를 느끼며 잠깐이라도 잠을 청할 생각으로 눈을 감았다. 그런데 그 때 지연이 눈을 뜨며 말을 건넸다.
“거짓말 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응? 뭐가?”
“아까 호프집에서 아저씨가 한 이야기들이요.”
“무슨 이야기?”
“얼마나 됐다고 벌써 모른 척이에요? 아저씨가 홧병에 걸렸었다는 이야기... 그거요.”
“왜 그런 생각을 했지? 내가 나중에 기회가 되면 이야기 해준다고 했잖아.”
“몰라요. 전 아저씨가 제 맘을 편하게 해주기 위해서 이야기를 한 걸 수도 있다고... 갑자기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지는 이유를 모르면 도망치는 게 옳다. 그 거 저한테 해주고 싶은 이야기인데 그냥 이야기하면 좀 그래서 아저씨가 겪은 일인 것처럼...”
난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속으론 놀라고 있었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
“그 사람과의 결혼 생활을 승부라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전 분명히 그 사람의 아내인데... 제 곁에 있는 시간은 항상 너무 짧았고 제가 아무리 잘해도... 화를 내도.. 며칠 동안 연락을 안 해도... 그 사실은 변함이 없었어요. 우리의 결혼 생활은 늘 그랬어요. 아마 그 건... 그러니까 인정하기 싫지만 전 변수가 아니었던 것 같아요. 결과에 영향을 끼칠 수 없었으니까. 저 말고 달리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다고 이야기하기엔 만나는 여자가 한두 명이 아닌 듯 했고... 아저씨 이야기를 듣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지는 이유를 몰랐다는 표현이 맞는 것 같기도 해요.
그래서... 아저씨가 제 마음을 편하게 해주기 위해서... 이혼을 잘 한 것이다. 나도 내가 지는 이유를 모르는 승부에서 겁쟁이처럼 도망쳐 본 적이 있다고 이야기를 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응. 이제야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 하지만... 거짓말은 아니야. 니가 겪은 일과 내 경험이 비슷하게 여겨지는 건 우린 둘 다 가슴 속에 아픔을 간직한 사람이어서 그런 걸 거야. 난 그냥 내 이야기를 했어.”
“그럼 그 때 진동 같은 걸 생각했던 것도...”
“그 때 내 분노와 상실감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느낀 것 중 가장 컸어. 만약 그 전에 겪었던 아픔보다 강도가 약했다면 별 생각 없었겠지만... 그렇다면 그냥 예전처럼 일어설 수 있을 거라고 믿었을 테니...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난 끊임없이 내 자신에게 물었던 거야. 어떻게 다시 일어서야 하지? 그러다가 거의 매일을 술에 취한 채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멍해져 시간을 보내던 중에 갑자기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 뭐라도 해야 하는 데 그냥 작은 뭐라도 해야 하는데... 날 그런 식으로 세뇌했던 거겠지.
전혀 웃기지 않지만 한번 웃자. 그럼 좋은 진동 같은 게 생길거야. 그리고 그 작은 진동이 내 몸 안에서 퍼지면... 좋은 것들을 끌어 들일거야. 왜 주파수가 바뀌면 다른 방송이 나오잖아. 그래... 그렇게 될 거야.“
“제가 예전에 그런 이야기 한 적 있죠? 우리 아빠나 아저씨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말이 되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데 묘한 재주가 있다고...”
“하지만 가까스로 힘을 내어 만든 좋은 진동은 무기력과 상실감을 이기지 못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곤 했어. 모든 게 무의미한 일이 돼버리고 나면 다시 한 발자국을 걷는 건 더 힘들어지고... 그래서...“
“그래서요? 어떻게 했죠?”
“한참을 고민하다 나 자신을 비우려고 노력했어. 빈 공간이 생겨야 작은 진동들이 커질 거라고 생각했거든. 꽤 오랜 시간동안 하지 않았던 운동을 시작했고 틈이 날 때마다 땀을 흘렸어. 밤이면 너무 지쳐서 아무 생각 없이 잠을 잘 수 있을 정도로....”
“운동이요?”
“직장 내 축구 동호회에 일주일에 한 번 나가서 축구를 했고 탁구 나 마라톤... 닥치는 대로... 땀을 흘릴 수 있는 거면 뭐든지 했어. 힘이 남는 날이면 밤에 근처 초등학교 운동장에 가서 뛰거나 줄넘기를 하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전 아저씨 만나면서 그런 기색을 전혀 느낀 적 없으니 지금은 모두 지나간 이야기인거죠?”
“음... 글쎄... 그건 아닌 것 같아. 넌 너의 아픔을 가끔은 이야기하지만 난 지금도 그 기억을 되살리기조차 싫어서 누구한테 언급도 해 본적 없어. 너한테 이야기하는 것도 그 일이 아닌 이후에 내가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에 관계된 내용이구....”
“그래요?”
지연이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조용히 있다가 잠시 후에 입을 열었다.
“그건... 아저씨가 생각하는 것보다 전 아저씨를 가깝게 생각하고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아저씨는 저와 항상 거리를 두고 있으니 그런 거라고요. 전에도 말했지만 그 게 좀 기분이 이상한 거 알아요? 갑자기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
“괜한 트집은... 내 생각엔 넌 어느 정도 아픔을 이겨내고 있지만 난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서 그런 것 같은데...”
“어떻게 아프다는 사람이 겉으론 전혀 태도 안날 수가 있냐고요? 억지에요.”
“억지? 그렇게 느꼈다면 아마 나이가 들어가면서 아프지만 그 걸 표현하지 않는 게 능숙해졌겠지. 그게 좋은 걸까? 솔직히 잘 모르겠어.
하지만 난 아직도 분노가 가슴 속에 차오를 때마다 운동을 하러 가고 싶어. 그럴 땐 마음을 조절하기 힘드니까 아예 힘을 빼버리면 잡념들이 사라지는 것 같아서... 운동을 하고 겨우 집에 까지 갈 수 있을 만큼 외에는 아무 힘도 없는 상태가 돼버리면 오히려 머리는 맑아지고 텅 비더라고. 그 때 아무리 작은 거라도 좋은 생각을 하는 거야. 그리고 그게 텅 빈 내 마음 속에서 증폭되기를 비는 거지.”
“가슴 속이 콱 막혀서 미칠 것 같을 때 운동할 생각이 나요? 난 꼼짝도 하기 싫을 때가 많던데...”
“그냥 움직이는 거야. 술을 마시고 폭식 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명상 같은 걸로 다스리는 건 잘 안되고 섹스가 하고 싶을 때도 있기는 하지만... 그 건 상대가 있어야 할 수 있는 거니까.”
“상대를 만들면 되잖아요?”
“그냥 섹스가 하고 싶은 거야. 누군가에게 작업을 하고 싶은 게 아니라... 후후후. 여자들에게 작업을 하는 것도 상태가 좋을 때나 가능해. 가슴 속이 분노로 채워진 상태로 무슨... 의미 없어. 난 그냥 내 의식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싶어서 운동이나 섹스를 생각하는 것 뿐이야.”
“죽는 걸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난 시선을 돌려 알몸으로 내 팔을 베고 누워 있는 그녀의 눈을 바라봤다. 지연이 내게 그 걸 궁금해 한다는 것은 그런 생각을 해 본적이 있다는 이야기 같은데...
“살면서 잠이 들 때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은 셀 수도 없이 많아. 차라리 잠에서 깨지 않았으면... 그리고 이십 대 중반 무렵이었던가? 그 때는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어. 하지만 지금은...”
“지금은?”
“그럴 권리가 없어. 내가 책임져야 하는 것들이 너무 많아 졌으니까... 죽음은 사치야.”
“사치? 죽을 권리도 없다는 건가요?”
“아마도... 누군가 나를 비겁한 겁쟁이라고 부르든, 실패자로 부르든 그 것과는 상관없이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해. 왜 그런 게 궁금해? 혹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어?”
“....”
지연은 입을 열지 않았고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던 나는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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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일로 정신없이 일주일이 흘러갔고 다시 토요일이 왔지만 주중에 지연의 연락이 한 번도 없었다. 무인텔에서 나와 그녀와 헤어질 때 별다른 느낌은 없었는데... 궁금해진 나는 토요일 저녁 지연에게 문자를 보냈다.
[내일 날씨 좋다는데 뭐할 거야?]
답장이 없다.
지연을 만나는 몇 달동안 주로 연락은 그녀가 했었지만 가끔 내가 전화나 문자를 했을 때 그녀가 받지 않거나 답장을 하지 않은 적은 없었다. 난 핸드폰의 통화 버튼을 눌렀고 재즈풍의 컬러링 음악을 한참 듣고 있었지만 받지 않았다.
아내에게 탁구장에 간다고 말하고 집을 나와 오정희의 카페로 향했다. 8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도착했는데 매장에는 오정희가 없었고 커피를 마시며 지연의 문자나 전화를 기다렸지만 핸드폰은 조용했다.
지연과 관계를 맺어오는 동안 섹스를 하지 않은 주말은 있었지만 얼굴을 보지 않고 넘어간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은데... 무슨 일이지? 만일 오정희가 온다면 움직여야 하나? 이혼 후 지연이 흔들리거나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면 망설일 필요가 없었겠지만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함부로 오정희를 압박할 수는 없다. 배가 고프지 않은 데 사냥에 나섰다가 절실함이 없어서 실패할 지도 모르는 일.
밤 10시가 넘어서고 있을 때 오정희가 모습을 보였다. 난 그녀와 잠시 시선을 교환한 후 그 곳을 나섰고 그 때까지도 지연에게 연락은 없었다.
그리고 다시 일주일이 지나는 동안 주중에 2~3번의 전화를 하고 문자를 보냈지만 지연의 응답은 없었다. 전화를 일부러 받지 않는 다면 난 별로 할 게 없다. 이유를 모른다면 더더욱... 어디서 어긋난 것인지 짐작이 가지 않아 난 계속 마지막 만남을 복기하고 있었다. 내가 했던 말들, 그녀의 눈빛, 몸짓, 우리가 같이 있던 곳들의 주변 상황...
다시 돌아온 토요일 저녁에 오정희의 매장에 가서 커피를 마셨고 늦은 밤 오정희가 왔을 때 잠시 눈을 마주친 후 그냥 집으로 왔다. 지연의 연락이 2주 동안 끊긴 셈.
월요일 낮에 지연이 근무하는 경찰서에 전화를 해서 그녀의 출근 여부를 확인했다. 지연은 출근 중이었고 난 그녀와 통화를 하며 무슨 일이 있는 지 묻고 싶었지만 전화를 끊었다. 지연은 내 전화를 피하고 있다. 이유가 뭐지?
그 이유가 나라면... 그래서 그녀가 나 때문에 화가 났거나 감정이 상했다면... 일단 난 기다릴 수밖에 없다. 가끔 지연에게 전화나 문자를 보내다 언젠가 그녀의 기분이 풀리고 전화를 받으면 그 때 이야기를 해보면 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아니라면... 나와의 만남을 이어가는 건 그녀가 원하는 것이었는데 그걸 돌려놓을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지연이 업무상 스트레스를 받거나 일이 바쁘다는 건 이유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냥 나에게 이야기했을 것이다. 이런 경우 다른 남자가 생겼다면 지연의 행동이 설명이 되긴 하지만... 그 것 역시 부족하다.
다른 남자를 내가 못 만나게 한 일도 없고 오히려 누군가에게 마음을 열었다면 지연의 상태는 호전된 것이긴 한데 그런 이유 때문에 굳이 날 피할까?
다시 한 주가 흘러갔고... 또 한 주가 지났다. 지연에게는 계속 연락이 없다. 그래도 주말마다 만나던 사이였고 몸을 섞던 사이였는데 한 마디 말도 없이 그녀와의 사이가 끝날 것 같지는 않았지만 가끔 했던 전화와 문자에 대답이 없으니 불안해졌다.
토요일 저녁이면 난 오정희의 카페로 가서 지연이 날 만나려하지 않는 이유를 생각했다. 같은 생각을 계속 되풀이하다 보니 꽤 그럴듯한 가설이 세워 졌는데 그 중심엔 이유성이 있었다. 난 마왕의 재등장이 마음에 걸렸다. 다른 어떤 이유보다도 그 쪽이 의심스러운 건 첫 째 마지막 만남에서 내가 별다른 실수를 한 건 없었고 그렇다면 둘 째 지연이 죽거나 기억상실증 같은 것에 걸리지 않은 이상 그녀와 나와의 관계를 그렇게 갑자기 끊을 수 있는 힘을 가진 건 녀석이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있어서 지연이 날 피하게 만들고 우리의 관계를 한 번에 끊어낼 수 있는 강력한 힘을 행사할 수 있단 말인가? 수 백 번 같은 생각을 해도 마지막에 남는 건 녀석뿐이다.
녀석의 개입... 어떤 식 이었을까?
지연의 연락이 끊긴 지 두 달이 됐을 때 난 주중에 휴가를 내고 그녀가 근무하는 강원도 00경찰서로 갔다. 정문을 지나 본관 건물 건너편에 있는 민원인 주차장에 차를 대고 건물로 걸어 들어갔는데 점심시간이 가까운 시간이어서 지나가는 직원에게 식당이 어디 있는 지 물어 보니 식당은 본관에 있지 않고 본관과 통로로 연결된 2층 별관이라고 했다.
그녀를 만나서 무언가를 해봐야겠다는 뚜렷한 목적이 있어 그 곳에 갔다기보다는 잘 지내고 있는 지 확인하고 싶어서 찾아간 거라 난 식당으로 연결된 통로가 보이는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기다렸다. 12시가 되기 조금 전에 제복을 입은 경찰관들이 삼삼오오 식당으로 가고 있었고 그 사이에 지연의 모습이 보였다.
내가 앉아 있는 벤치는 식당으로 연결되는 통로와 10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는데 그녀는 이쪽을 보지 않고 식당 안으로 사라졌고 20 여분 후에 식사를 끝냈는지 식당을 나와 다시 본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지연은 자신이 경찰이라는 걸 내가 모르는 줄 알 것이다. 난 주차장에서 지연의 소울을 확인하고 경찰서를 나섰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사우나에서 시간을 보내다 6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다시 경찰서로 가 퇴근을 하기 위해 정문으로 나오는 그녀의 차를 따라 갔다.
시내에서 조금 벗어나 외곽에 있는 아파트에 도착한 후 차에서 내린 그녀는 잠깐 사이에 내 시야에서 사라져 아파트 현관 안으로 들어갔다.
경찰서 안에서 제복을 입은 모습과 거주하는 아파트 앞에서 정장 스타일의 사복을 입은 지연을 약간 멀리서 봤을 때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었는데 걸으면서 주변을 살핀다거나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도 전혀 없었고 시야는 앞쪽으로 고정되어 있었으며 걸음걸이도 예전과는 달리 힘이 빠져 있었다.
난 지연이 아파트 안으로 들어간 지 10여 분후에 그녀에게 문자를 보냈다.
[요즘 뭐하고 지내? 바쁜가 보네]
답장은 없었고 그녀가 바로 지척에 있었지만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지연이 사라진 아파트 현관을 바라보다 한 시간 쯤 지나 그 곳을 떠났다.
그리고 한 달의 시간이 또 흘러갔다. 난 금요일이면 어김없이 지연에게 문자를 보냈고 토요일엔 오정희의 카페에 갔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서울에서라면 우연히 만난 것처럼 지연의 앞에 나서볼 수 있을 것이다. 금요일 저녁 퇴근하는 지연을 쫓다보면 서울로 올라올 가능성이 있고 그러면 그녀 주변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 지 알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 외에도 수많은 그림들이 뇌리를 스쳐갔지만 그건 그냥 상상으로 남겨 두고 있었다. 내가 움직인다면 그건 지연을 내 곁에 잡아두고 싶어서 일 것이고 욕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저씨가 생각하는 것보다 전 아저씨를 가깝게 생각하고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아저씨는 저와 항상 거리를 두고 있다’는 지연의 말이 생각날 때마다 무언가를 하고 싶었지만 어떤 수를 두어야 하는 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매주 토요일이면 낮엔 아들을 데리고 수업을 가서 김유미를 만났고 밤이면 잠깐이나마 오정희를 볼 수 있었지만 지연은 내 곁에 없었다. 석 달 동안 연락을 피한다는 건 그녀가 날 정리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다시 한 달이 흘러갔고 마지막 만남이 있은 지 4개월이 지난 어느 날 지연에게 문자가 왔다.
[저 미국 가요. 지금 공항이에요. 그 동안 연락 못해서 미안해요. 아저씨 곁에 있는 동안 행복했어요. 다시 한국에 돌아온다면 연락할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그냥 떠나고 싶은 제 마음을 이해해 주세요.]
[응. 연락이 없어서 많이 걱정했는데 다행이네. 미국엔 얼마나 있게 되는 건지 모르지만 잘 지내고. 그래도 한 번은 보고 싶었는데 서운하긴 하지만 잘 살았으면 좋겠다. 같이 보낸 시간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거야.]
지연이 미국에 가는 건 진실일까?
진실이라면 이유성이 미국에 갈 가능성은 없어 보이니 내 짐작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지연이 내 연락을 피한 이유가 무엇일까? 다시 머릿속이 복잡해지긴 했지만 떠난다는 여자를 붙잡을 수는 없는 일. 지연과의 추억이 스쳐갔고 앞으로 뭘 하며 시간을 보낼 지가 막막해졌다. 이젠 오정희의 매장에도 갈 일이 없고 이유성의 뒤를 캐고 다닐 필요도 없어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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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끝을 향해 달려 가네요. 이 작품 끝나면 정말 인간 승리입니다. 몇 년 째 쓰는 건지 모르겠네요.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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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 2016-08-11 | ||
접속일 | 2024-11-03 | ||
서명 | 황진이-19금 성인놀이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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