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이라면 이유성이 미국에 갈 가능성은 없어 보이니 내 짐작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지연이 내 연락을 피한 이유가 무엇일까? 다시 머릿속이 복잡해지긴 했지만 떠난다는 여자를 붙잡을 수는 없는 일. 지연과의 추억이 스쳐갔고 앞으로 뭘 하며 시간을 보낼 지가 막막해졌다. 이젠 오정희의 매장에도 갈 일이 없고 이유성의 뒤를 캐고 다닐 필요도 없어진 듯...
다음 날 지연이 근무하는 곳에 전화를 걸었고 그녀를 바꿔달라고 하자 황계장님은 미국으로 해외연수를 갔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내가 대학교 때 선배이고 지금 경기도 00서에 근무하고 있는데 미국 어느 지역이고 어떤 프로그램인지 알고 싶다고 하자 팬실베니아주 피츠버그에 있는 범죄 심리학연구소에서 1년 동안 연수를 받을 예정이고 한국에 돌아오게 되면 경찰청에 들어가서 근무하게 될 것 같다고 내가 묻지 않은 것 까지 친절하게 알려준다.
지연은 의도적으로 해외연수를 자청해서 갔을 것이다. 모든 것을 잊고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 그녀가 나를 잊기 위해 그 길을 택하진 않았을 것이고 이혼 후 한동안 나와의 관계에서 아무 문제가 없었던 걸 감안하면...
이유성을 잊기 위해 이혼을 선택했다. 그리고 녀석을 잊을 수 있을 때 까지 내게 곁에 있어달라고 했다. 나와 마지막으로 만나고 헤어진 다음에 자신이 이유성을 잊을 수 없다는 것을 갑자기 깨달았다는 말인가? 아무 일 없이?
무슨 일이 있었다. 내가 모르는... 뭐지?
갑자기 고등학교 시절 보았던 ‘슬램덩크’라는 농구 만화의 한 장면이 생각났다. 경기가 끝나기 이십 여초 전에 88:90으로 2점을 지고 있는 상황에서 3점 슛을 던진 북산의 슈터 정대만은 감각적으로 들어갔다고 생각했지만 공은 링을 맞고 돌아 나온다. 그 공을 강백호가 리바운드 한 후 재빠르게 패스했지만 상대팀이 패스를 받고 결국 그 패스미스 후에 경기는 끝났다. 그 때 그 슛이 들어가지 않은 게 믿겨지지 않았던 정대만은 상대팀 해남의 수비수였던 전호장에게 묻는다.
“볼을 건드렸는가?”
전호장은 손톱이 부러져 피가 흘러나오고 있는 자신의 왼 손을 들어 보여준다.
난 이유성이라는 녀석에게 묻고 싶었다.
“지연을 건드렸는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녀석의 얼굴이 스쳐갔다. 만약 녀석이 다시 그녀를 건드렸다면... 지연이 미국에 간 것을 설명할 수 있다.
첫 번째 지진보다 그 뒤에 오는 여진이 사람을 못 견디게 한다. 암에 걸린 사람이 수술과 항암치료, 식이요법 등으로 거의 회복 단계에 있다거나 완치가 됐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에게 다시 암이 재발했다고 진단이 나오는 경우 첫 번째 보다 몇 배 더한 충격으로 다가가게 되는 것이다.
그 지긋지긋한 과정을 다시 밟아야 하다니... 그렇다고 완치가 가능할 지도 모르는데...
이유성이 그녀를 다시 건드렸다면 이유는 뭘까? 김유미와 오정희, 그리고 여수에서 만난 여인처럼 황지연도 데리고 가기 위해서 그럴 수도 있다. 녀석에게 지연은 버리기 아까웠을 것이고 자신의 부인이라는 굴레를 벗어버리고 나면 그녀만큼 매력적인 여자도 찾기 힘들다. 내가 지어낸 스토리지만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보였다.
그렇다면 지연은 그 동안 내게 왜 연락 한 번 안했을까? 그녀가 내게 무언가를 이야기했다면 지연의 미국행을 내가 막을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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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조용히 흘렀고 겨울이 왔다. 지연이 떠난 지 3개월이 지난 뒤에도 난 여전히 아이 수업 때문에 주말마다 김유미를 만났고 가끔 오정희의 커피 전문점을 찾아갔는데, 그녀들은 여전히 아름다웠고 남자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지만 지연이 내 곁을 떠난 뒤부터 내 안에 남성은 정체되어 있었다.
이유성의 여자들은 계속해서 사정거리 안에 있었고 어떤 식으로든 이득을 취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내 스스로 날 가두고 있었던 것인데, 즉 가끔 김유미와의 대화에서 그녀의 오피스텔이 아닌 다른 곳에서 만나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빌미를 만들 수도 있고 이젠 날 보면 미소까지 띄며 반기는 오정희에게도 이유성과의 관계를 들이대며 작업이 가능했지만 그 과정들로 인해 내가 가질 수 있는 것들이 두려워졌다.
내 힘은 마왕에 비하면 미약했고 그의 여자들을 다시 건드려서 얻을 수 있는 쾌락은 녀석의 손가락 하나로 인해 사라진다. 그러고 보면 게임의 주도권은 언제나 마왕에게 있었는데 나는 그걸 내가 가지고 있다고 착각한 것이다. 녀석은 언제든 내게 잠시 맛보여준 막대사탕을 다시 빼앗아갈 수 있으니...
제가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요? 지연에게 그 말을 들었을 때의 난 그녀 삶의 관조자였지만 지금은 내가 그 늪 속에 빠져있었고 이십대 후반 잠시 내 곁에 있었던 미정이보다 더 큰 후유증을 앓고 있었다. 미정이는 하늘나라로 떠났지만 지연은 살아 있었고 미정이에게는 뒤늦게나마 내가 할 수 있는 걸 했지만 지연에게는 다하지 못했다. 오히려 지연이 상처를 회복하고 다른 남자를 만나 떠났다면 내가 미련을 버리기 쉬웠을 것인데...
해가 바뀌고 눈이 아주 많이 내린 2월의 어느 날 아침 회사에 출근해보니 지연이 보낸 편지 한 통이 도착해 있었다. 주소가 영어로 씌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미국에서 보낸 것 같았는데 난 조용히 편지를 들고 아무도 없는 옥상으로 올라갔다.
수북이 쌓여 있는 눈 위에서 뜯어본 편지 내용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저예요. 잘 지내고 있죠?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이곳으로 오면 자연스럽게 모든 게 기억 속에서 사라질 줄 알았어요. 그런데 쉽지 않네요. 어떻게든 그 곳에서 버티고 있었다면 아저씨가 힘이 되어 주었을 텐데 하면서 오히려 지금은 후회하고 있어요.
내가 외롭다는 걸 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눈치 못 채도록 감추는 게 너무 힘들고 요즘은 전생에 아주 큰 죄를 지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자주 들어요.
여자는 아빠를 닮은 사람에게 끌린대요. 아저씨 같은 남자와 사랑하고 결혼했다면 어땠을까요? 그럼 아이도 낳고 평범한 인생을 살 수 있었겠죠?
마지막으로 아저씨께 물어 보고 싶은 게 하나 더 있어요. 그 때 공항에서 문자 보냈을 때 아저씨 곁을 떠나는 이유를 왜 묻지 않았어요? 그게 궁금하지 않을 만큼 아저씨에게 제가 아무 것도 아니었나요?
대답은 이 편지를 읽은 즉시 하늘을 보고 또박또박 말해줘요. 제게 들릴 수 있도록...
아저씨와 함께 했던 시간들이 많이 그리워요. 그리고 절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안녕!]
편지를 덮고 난 아직도 조금씩 눈이 내리고 있어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 거렸다.
“그 땐 차마 그 이유를 물어 볼 수 없었어. 그냥 떠나면 혹시 다시 돌아올지도 모르지만 이유를 말해버리면... 좀 그렇잖아. 그래서 그런 건 없기를 바랬던 거야.
그리고 난 아직도 널 떠나보내지 못하고 있어. 언젠가 내가 사랑이란 감정의 증폭일 뿐이라고 말했었지? 시간이 꽤 흘렀는데 더 보고 싶고 더 그립기만 해. 같이 보낸 시간들이 꿈을 꾼 것 같아서 추억으로 간직하는 게 너무 어색한 거 알아? 한번만 더 널 볼 수 있다면... 그럼 모든 게 선명해질 것 같은데... 한 번만이라도...“
조퇴를 하고 회사를 나와 집 근처 국밥집에서 낮술을 마셨다. 낮술에 취해 눈으로 뒤덮인 거리를 나와 보니 종종걸음을 치며 오가는 사람들과 속도를 높이지 못한 채 천천히 도로 위를 달리고 있는 자동차들을 볼 수 있었다.
지연의 미국 연수가 1년으로 끝난다면 혹시나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왠지 편지 내용은 이별을 이야기 하는 듯 했다. 정말 이별인가? 한동안 상처가 아물 때까지 인고의 세월을 살아야 하겠지만 그런 건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
어렸을 때부터 난 인내나 극기 이런 것들하고는 거리가 먼 놈이었다. 무언가를 참아야 하는 것이 싫어서 근력을 키우는 헬스 나 무술도 해본 적이 없고 운동을 해도 공을 가지고 노는 재미가 있는 것만 했다. 담배를 배운 후론 끊으려고 시도해 본 적도 없고 술도 마찬가지. 여자를 만날 때도 그 여자가 나와 잠을 자는 것을 겁낸다거나 자꾸 꺼리는 눈치면 더 이상 만나지 않았다. 그녀 곁에서 꾹 참으며 결정적인 순간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매너 있는 플레이보이는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이다.
지연과의 관계에서 내게 남은 상처가 있다면 그녀가 나를 버리고 떠났기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다. 그녀를 더 이상 안지 못하고 만날 수 없기 때문에 생기는 상실감이 없지는 않지만 그것보다도 자책감이 컸다.
그렇게 갑자기 떠날 줄 알았다면 오정희 혹은 이유성을 치고 진실을 알아낸 후 지연이 중심을 잡을 수 있도록 도와야 했었는데 호전되는 것 같았던 그녀의 모습을 보고 방심을 했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 기회를 잡을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난 지연이 지는 이유에 근접해 있었고 그걸 알아낼 수 있었지만 그녀가 스스로 회복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라 여겼다. 김유미가 수 백 번 끊으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던 마왕과의 연을 지연은 정리할 수 있을 거라 믿다니...
김유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나야. 조석훈.”
“오랜만이에요. 웬일이에요? 요즘 봐도 통 말도 없더니...”
“눈도 많이 오고 괜히 울적한데 오늘 저녁에 술 한 잔 할까? 시간 어때?”
“오늘이요? 잠깐은 가능해요. 늦게까지는 힘들지만...”
“몇 시에 끝나? 오피스텔 근처로 갈게.”
저녁 7시경 오피스텔에서 걸어갈 수 있는 근처 상가 횟집에서 김유미를 만났다. 난 술이 마시고 싶었고 김유미가 생각났을 뿐 별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녀에게 전화한 건 아니었다. 김유미는 그다지 말을 많이 하는 편도 아니고 지연을 추억하며 술을 마시기엔 가장 좋은 상대였다.
“벌써 한 잔 한 거예요? 그런 것 같은데...”
“응? 낮 2시부터 마시고 있는데... 꽤 마셨을걸.”
“회사에 안 갔어요? 웬 낮술?”
“조퇴했어. 술이 땡겨서... 크크크. 뭐 마실 거야? 맥주? 소주? 아님 소맥? 너무 걱정하지 말아. 난 술 마셔도 별 실수해본 기억은 없어.”
“소주 마실게요.”
난 김유미에게 소주 한 잔을 따라 주고 내 잔을 채운 후 건배를 외쳤다.
“그런데 무슨 일이에요? 갑자기 연락을 하고...”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해서 술을 한 잔 하고 싶은데 니가 생각이 났어. 그냥... 그러면 안 돼?”
“아니요. 그냥 무슨 일이 있나 싶어서요. 안하던 짓을 하니까.”
이유성 이야기를 꺼낼까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김유미는 그 이야기를 불편하게 생각할 지도 모른다.
“널 보면 친구 같아. 아주 친한...”
“왜 그런 생각을 했어요? 우린 그다지 자주 만난 사이는 아니 잖아요?”
“글세...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너한텐 무언가를 이야기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그럴까? 아무 이야기를 해도 잘 받아줄 것 같아서...”
“무슨 할 이야기 있어요? 해봐요. 들어줄게요.”
“왜 그런 거 있잖아. 이 사람한테는 여기까지. 저 사람한테는 그 것보다 조금 더. 사회 생활하면서 만나는 사람들한테 이야기 할 수 있는 한계 같은 거... 근데 너한테는 그런 한계 같은 게 모호해지는 느낌이야. 뭐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해야 되나?”
“무슨 이야길 하시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시나? 호호호. 해봐요. 준비됐으면...”
“혹시 첨밀밀이라는 영화 봤어? 장만옥과 여명이 주연으로 나오는...”
“예. 봤어요. 주제가가 참 좋던데...”
“기억하는지 모르겠는데 중국 본토에서 돈을 벌기 위해 홍콩으로 와서 우연히 만나게 된 두 사람이 홍콩에서 맞이한 새해가 오기 전날 외로움을 느끼고 섹스를 하게 되잖아. 그리고 어색해질 수도 있었는데 서로 친구라는 걸 강조하며 계속해서 밤을 같이 보내는 거야. 우린 좋은 친구라면서...
난 그 영화를 보면서 그 시나리오를 쓴 작가에게 공감이 가더라고. 한국의 정서로는 남녀 사이에 친구가 되려면 같이 잠을 자면 안 되고 섹스를 하는 사이를 애인이라고 이야기를 하지만...
넌 나한테 영화 속 장만옥 같은 여자야. 그냥 편해. 지금은 널 가지고 싶은 마음보다는 편해서 좋아.“
“장만옥과 여명은 서로 사랑을 하지만 잘 이루어지지 않다가 마지막에 미국인가 어디서 우연히 만나게 되잖아요.”
“응. 길거리에서 우연히 등려군이라는 가수가 죽었다는 뉴스를 보다가... 그 장면에서 영화는 끝났어. 여운이 있는 영화지.”
테이블 위에 소주 2병이 비워질 무렵 김유미가 불쑥 말을 꺼냈다.
“요즘 부부관계는 어때요? 원만해요?”
“어떤 거? 섹스?”
고개를 끄덕인다. 김유미가 먼저 그걸 물어볼 줄은 몰랐다. 뭐라고 대답해야 되지?
“그게 쉽지가 않네. 그냥 그래...”
대층 둘러대고 넘어 가려는 데 김유미가 소주 한 잔을 마시고 나서 다시 물었다.
“그럼 아직도 거기에 문제가 있는 거예요?”
그렇다고 하기도 그렇고 아니라고 하기도 애매한 상황이 됐다. 지연을 잃은 상실감에 여자를 안고 싶긴 하지만...
“일정치 않아. 심리적인 문제라는 게 내 뜻대로 되지는 않는 것 같아.”
난 다시 한 번 비켜갔고 만약 김유미와 다시 관계를 이어간다고 하더라도 오늘은 좀 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낮부터 마신 술에 취한 듯 고개를 테이블에 떨군 채 움직이지 않았다.
“요즘 무슨 일이 있는 거죠? 벌써 취했어요?”
무슨 일? 지연의 편지... 난 잠바 안주머니 속에 있는 편지가 갑자기 생각났다. 내용도...
난 왜 김유미를 만나자고 했을까? 지연의 편지가 왔고 괜히 기분이 울적해져서 술을 마시고 싶었는데 마시다보니 김유미가 생각났다.
지연은 왜 갑자기 내게 편지를 보낸 걸까? 미국으로 간지 반 년 정도 됐고 외롭기는 그 동안도 계속 그랬을 텐데... 지연에게 무언가 심경의 변화가 있다. 편지 내용은 나와 다시 시작해보자는 내용은 아니었는데...
처음에 읽을 때는 별 느낌이 없었던 표현들이 갑자기 이상하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물어보고 싶은 게 하나 더 있어요.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하늘을 보고 또박또박 말해줘요.
난 아침에 지연의 편지를 읽고 이제 두 번 다시 그녀를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막연하게 그녀를 다시 볼 수 있을 거라는 작은 희망까지 사라지는...
고개를 들어 김유미를 보고 말했다.
“음.. 좀 많이 마신 것 같아. 미안... 잠깐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난 화장실을 가는 척하며 그 자리를 나와 지연의 편지를 다시 꺼내 들었다. 겉봉의 주소를 보니 302 Unis Studio, 4505 Butler Street, Pittsburgh라고 적혀 있었고 우리 팀 후배 중에 미국 유학을 다녀온 석진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나다. 부탁이 있는데 내가 주소를 불러줄테니 그곳에 거주하는 황지연이라는 여자의 근황을 좀 파악해봐라. 적당히 지인이라고 둘러대고... 전화번호는 잘 모르니까 니가 어떻게 알아보고....”
“예? 갑자기 무슨 말씀인지... 잘 알아듣게 이야기 해보세요.”
“불러주는 주소는 미국이야. 펜실베니아 피츠버그. 나머지 주소는 문자로 찍어줄게. 거기 전화번호는 니가 알아보라는 이야기야. 넌 영어가 되잖아. 미국에도 114 같은 게 있을 거 아냐? 거기 관리소 같은 데 전화가 되면 황지연이라는 여자가 잘 있는 지만 물어봐줘. 그냥 잘 있으면 돼.”
“114 비슷한 게 있긴 있는 데 등록이 되어 있는지 모르잖아요? 피츠버그시에 황지연이라는 이름으로 등록된 전화번호가 있으면 다행이겠지만 통화가 된다고 하더라도 형님이 찾는 사람이 맞는지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아니 그렇게 말고... 여기 Unis Studio라고 적혀 있는 데 거기 전화번호는 알 수 없는 거야?”
“미국에서는 우리나라 원룸 같은 걸 Studio라고 하는 경우가 많아요. 거기 관리인이나 집주인하고 연락이 될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뭐? 뭐 또 걸리는 게 있어?”
“보통 집주인들이 각 룸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근황을 다 파악하고 있지는 않을 거예요. 그렇다고 방에 가서 잘 있는 지 확인해달라고 하기도 그렇고...”
“동양인 여자니까 특이해서 기억할 지도 모르지. 그렇게 한 번 알아보고... 그게 안되면... 피츠버그 범죄심리학 연구소라는 데 전화 한 번 걸어봐라. 거기에 1년 연수한다고 갔거든. 거기 연수 프로그램 담당자에게 한국에서 온 황지연씨와 통화하고 싶다고 어떻게 하면 되냐고 물어봐. 그 정도는 영어로 할 수 있지?”
“그건 어렵지 않아요. 집주소에서 알아보는 것보다 그게 편할 것 같네요. 그런데 형님하고는 어떤 사이인데요?”
“응? 아는 후배 놈하고 만나던 여자인데 갑자기 헤어지자고 하고는 며칠 뒤 미국으로 떠났대. 잘 있는지만 알아봐달라던데... 그 놈 영어 잘 못하거든. 지금 술 먹고 내 앞에서 엉엉 울고 난리가 났다. 그냥 그 것만 알면 된대. 요즘 거의 폐인 모드로 살았나봐. 빨리 알아봐줘야 할 것 같아.”
“요즘도 그런 남자가 있어요? 엄청난 순정남이네요. 지금 피츠버그가 몇 시쯤 될지... 그 여자분 근황 알아보고 나서 어떻게 해요? 바로 전화 드려요?”
“응. 나 오늘 그 녀석하고 꽤 오래 있어야 할 것 같거든. 바로 전화 줘.”
난 다시 김유미가 기다리고 있는 횟집 안으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자마자 그녀가 내게 물었다.
“아까는 친구 같아서 뭐든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다더니 요즘 무슨 일이 있냐고 말해보라니까 슬쩍 피하는 거예요? 술 한 잔 마시고 말해 봐요. 괜히 궁금해지잖아요.”
난 지연에게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까 하는 생각에 약간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김유미는 내 기분을 풀어 주려는 듯 살짝 미소를 띠며 내게 술을 따라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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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회 분량은 써 놓은 지 일주일 정도 됐는 데 다듬지를 못하고 있다가 저녁 때 맥주 한 잔 하고
들어와서 두 시간 정도 작업했더니 끝나네요.
메르스 조심하시고 좋은 하루 되세요! ^^
다음 날 지연이 근무하는 곳에 전화를 걸었고 그녀를 바꿔달라고 하자 황계장님은 미국으로 해외연수를 갔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내가 대학교 때 선배이고 지금 경기도 00서에 근무하고 있는데 미국 어느 지역이고 어떤 프로그램인지 알고 싶다고 하자 팬실베니아주 피츠버그에 있는 범죄 심리학연구소에서 1년 동안 연수를 받을 예정이고 한국에 돌아오게 되면 경찰청에 들어가서 근무하게 될 것 같다고 내가 묻지 않은 것 까지 친절하게 알려준다.
지연은 의도적으로 해외연수를 자청해서 갔을 것이다. 모든 것을 잊고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 그녀가 나를 잊기 위해 그 길을 택하진 않았을 것이고 이혼 후 한동안 나와의 관계에서 아무 문제가 없었던 걸 감안하면...
이유성을 잊기 위해 이혼을 선택했다. 그리고 녀석을 잊을 수 있을 때 까지 내게 곁에 있어달라고 했다. 나와 마지막으로 만나고 헤어진 다음에 자신이 이유성을 잊을 수 없다는 것을 갑자기 깨달았다는 말인가? 아무 일 없이?
무슨 일이 있었다. 내가 모르는... 뭐지?
갑자기 고등학교 시절 보았던 ‘슬램덩크’라는 농구 만화의 한 장면이 생각났다. 경기가 끝나기 이십 여초 전에 88:90으로 2점을 지고 있는 상황에서 3점 슛을 던진 북산의 슈터 정대만은 감각적으로 들어갔다고 생각했지만 공은 링을 맞고 돌아 나온다. 그 공을 강백호가 리바운드 한 후 재빠르게 패스했지만 상대팀이 패스를 받고 결국 그 패스미스 후에 경기는 끝났다. 그 때 그 슛이 들어가지 않은 게 믿겨지지 않았던 정대만은 상대팀 해남의 수비수였던 전호장에게 묻는다.
“볼을 건드렸는가?”
전호장은 손톱이 부러져 피가 흘러나오고 있는 자신의 왼 손을 들어 보여준다.
난 이유성이라는 녀석에게 묻고 싶었다.
“지연을 건드렸는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녀석의 얼굴이 스쳐갔다. 만약 녀석이 다시 그녀를 건드렸다면... 지연이 미국에 간 것을 설명할 수 있다.
첫 번째 지진보다 그 뒤에 오는 여진이 사람을 못 견디게 한다. 암에 걸린 사람이 수술과 항암치료, 식이요법 등으로 거의 회복 단계에 있다거나 완치가 됐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에게 다시 암이 재발했다고 진단이 나오는 경우 첫 번째 보다 몇 배 더한 충격으로 다가가게 되는 것이다.
그 지긋지긋한 과정을 다시 밟아야 하다니... 그렇다고 완치가 가능할 지도 모르는데...
이유성이 그녀를 다시 건드렸다면 이유는 뭘까? 김유미와 오정희, 그리고 여수에서 만난 여인처럼 황지연도 데리고 가기 위해서 그럴 수도 있다. 녀석에게 지연은 버리기 아까웠을 것이고 자신의 부인이라는 굴레를 벗어버리고 나면 그녀만큼 매력적인 여자도 찾기 힘들다. 내가 지어낸 스토리지만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보였다.
그렇다면 지연은 그 동안 내게 왜 연락 한 번 안했을까? 그녀가 내게 무언가를 이야기했다면 지연의 미국행을 내가 막을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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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조용히 흘렀고 겨울이 왔다. 지연이 떠난 지 3개월이 지난 뒤에도 난 여전히 아이 수업 때문에 주말마다 김유미를 만났고 가끔 오정희의 커피 전문점을 찾아갔는데, 그녀들은 여전히 아름다웠고 남자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지만 지연이 내 곁을 떠난 뒤부터 내 안에 남성은 정체되어 있었다.
이유성의 여자들은 계속해서 사정거리 안에 있었고 어떤 식으로든 이득을 취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내 스스로 날 가두고 있었던 것인데, 즉 가끔 김유미와의 대화에서 그녀의 오피스텔이 아닌 다른 곳에서 만나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빌미를 만들 수도 있고 이젠 날 보면 미소까지 띄며 반기는 오정희에게도 이유성과의 관계를 들이대며 작업이 가능했지만 그 과정들로 인해 내가 가질 수 있는 것들이 두려워졌다.
내 힘은 마왕에 비하면 미약했고 그의 여자들을 다시 건드려서 얻을 수 있는 쾌락은 녀석의 손가락 하나로 인해 사라진다. 그러고 보면 게임의 주도권은 언제나 마왕에게 있었는데 나는 그걸 내가 가지고 있다고 착각한 것이다. 녀석은 언제든 내게 잠시 맛보여준 막대사탕을 다시 빼앗아갈 수 있으니...
제가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요? 지연에게 그 말을 들었을 때의 난 그녀 삶의 관조자였지만 지금은 내가 그 늪 속에 빠져있었고 이십대 후반 잠시 내 곁에 있었던 미정이보다 더 큰 후유증을 앓고 있었다. 미정이는 하늘나라로 떠났지만 지연은 살아 있었고 미정이에게는 뒤늦게나마 내가 할 수 있는 걸 했지만 지연에게는 다하지 못했다. 오히려 지연이 상처를 회복하고 다른 남자를 만나 떠났다면 내가 미련을 버리기 쉬웠을 것인데...
해가 바뀌고 눈이 아주 많이 내린 2월의 어느 날 아침 회사에 출근해보니 지연이 보낸 편지 한 통이 도착해 있었다. 주소가 영어로 씌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미국에서 보낸 것 같았는데 난 조용히 편지를 들고 아무도 없는 옥상으로 올라갔다.
수북이 쌓여 있는 눈 위에서 뜯어본 편지 내용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저예요. 잘 지내고 있죠?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이곳으로 오면 자연스럽게 모든 게 기억 속에서 사라질 줄 알았어요. 그런데 쉽지 않네요. 어떻게든 그 곳에서 버티고 있었다면 아저씨가 힘이 되어 주었을 텐데 하면서 오히려 지금은 후회하고 있어요.
내가 외롭다는 걸 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눈치 못 채도록 감추는 게 너무 힘들고 요즘은 전생에 아주 큰 죄를 지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자주 들어요.
여자는 아빠를 닮은 사람에게 끌린대요. 아저씨 같은 남자와 사랑하고 결혼했다면 어땠을까요? 그럼 아이도 낳고 평범한 인생을 살 수 있었겠죠?
마지막으로 아저씨께 물어 보고 싶은 게 하나 더 있어요. 그 때 공항에서 문자 보냈을 때 아저씨 곁을 떠나는 이유를 왜 묻지 않았어요? 그게 궁금하지 않을 만큼 아저씨에게 제가 아무 것도 아니었나요?
대답은 이 편지를 읽은 즉시 하늘을 보고 또박또박 말해줘요. 제게 들릴 수 있도록...
아저씨와 함께 했던 시간들이 많이 그리워요. 그리고 절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안녕!]
편지를 덮고 난 아직도 조금씩 눈이 내리고 있어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 거렸다.
“그 땐 차마 그 이유를 물어 볼 수 없었어. 그냥 떠나면 혹시 다시 돌아올지도 모르지만 이유를 말해버리면... 좀 그렇잖아. 그래서 그런 건 없기를 바랬던 거야.
그리고 난 아직도 널 떠나보내지 못하고 있어. 언젠가 내가 사랑이란 감정의 증폭일 뿐이라고 말했었지? 시간이 꽤 흘렀는데 더 보고 싶고 더 그립기만 해. 같이 보낸 시간들이 꿈을 꾼 것 같아서 추억으로 간직하는 게 너무 어색한 거 알아? 한번만 더 널 볼 수 있다면... 그럼 모든 게 선명해질 것 같은데... 한 번만이라도...“
조퇴를 하고 회사를 나와 집 근처 국밥집에서 낮술을 마셨다. 낮술에 취해 눈으로 뒤덮인 거리를 나와 보니 종종걸음을 치며 오가는 사람들과 속도를 높이지 못한 채 천천히 도로 위를 달리고 있는 자동차들을 볼 수 있었다.
지연의 미국 연수가 1년으로 끝난다면 혹시나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왠지 편지 내용은 이별을 이야기 하는 듯 했다. 정말 이별인가? 한동안 상처가 아물 때까지 인고의 세월을 살아야 하겠지만 그런 건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
어렸을 때부터 난 인내나 극기 이런 것들하고는 거리가 먼 놈이었다. 무언가를 참아야 하는 것이 싫어서 근력을 키우는 헬스 나 무술도 해본 적이 없고 운동을 해도 공을 가지고 노는 재미가 있는 것만 했다. 담배를 배운 후론 끊으려고 시도해 본 적도 없고 술도 마찬가지. 여자를 만날 때도 그 여자가 나와 잠을 자는 것을 겁낸다거나 자꾸 꺼리는 눈치면 더 이상 만나지 않았다. 그녀 곁에서 꾹 참으며 결정적인 순간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매너 있는 플레이보이는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이다.
지연과의 관계에서 내게 남은 상처가 있다면 그녀가 나를 버리고 떠났기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다. 그녀를 더 이상 안지 못하고 만날 수 없기 때문에 생기는 상실감이 없지는 않지만 그것보다도 자책감이 컸다.
그렇게 갑자기 떠날 줄 알았다면 오정희 혹은 이유성을 치고 진실을 알아낸 후 지연이 중심을 잡을 수 있도록 도와야 했었는데 호전되는 것 같았던 그녀의 모습을 보고 방심을 했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 기회를 잡을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난 지연이 지는 이유에 근접해 있었고 그걸 알아낼 수 있었지만 그녀가 스스로 회복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라 여겼다. 김유미가 수 백 번 끊으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던 마왕과의 연을 지연은 정리할 수 있을 거라 믿다니...
김유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나야. 조석훈.”
“오랜만이에요. 웬일이에요? 요즘 봐도 통 말도 없더니...”
“눈도 많이 오고 괜히 울적한데 오늘 저녁에 술 한 잔 할까? 시간 어때?”
“오늘이요? 잠깐은 가능해요. 늦게까지는 힘들지만...”
“몇 시에 끝나? 오피스텔 근처로 갈게.”
저녁 7시경 오피스텔에서 걸어갈 수 있는 근처 상가 횟집에서 김유미를 만났다. 난 술이 마시고 싶었고 김유미가 생각났을 뿐 별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녀에게 전화한 건 아니었다. 김유미는 그다지 말을 많이 하는 편도 아니고 지연을 추억하며 술을 마시기엔 가장 좋은 상대였다.
“벌써 한 잔 한 거예요? 그런 것 같은데...”
“응? 낮 2시부터 마시고 있는데... 꽤 마셨을걸.”
“회사에 안 갔어요? 웬 낮술?”
“조퇴했어. 술이 땡겨서... 크크크. 뭐 마실 거야? 맥주? 소주? 아님 소맥? 너무 걱정하지 말아. 난 술 마셔도 별 실수해본 기억은 없어.”
“소주 마실게요.”
난 김유미에게 소주 한 잔을 따라 주고 내 잔을 채운 후 건배를 외쳤다.
“그런데 무슨 일이에요? 갑자기 연락을 하고...”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해서 술을 한 잔 하고 싶은데 니가 생각이 났어. 그냥... 그러면 안 돼?”
“아니요. 그냥 무슨 일이 있나 싶어서요. 안하던 짓을 하니까.”
이유성 이야기를 꺼낼까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김유미는 그 이야기를 불편하게 생각할 지도 모른다.
“널 보면 친구 같아. 아주 친한...”
“왜 그런 생각을 했어요? 우린 그다지 자주 만난 사이는 아니 잖아요?”
“글세...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너한텐 무언가를 이야기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그럴까? 아무 이야기를 해도 잘 받아줄 것 같아서...”
“무슨 할 이야기 있어요? 해봐요. 들어줄게요.”
“왜 그런 거 있잖아. 이 사람한테는 여기까지. 저 사람한테는 그 것보다 조금 더. 사회 생활하면서 만나는 사람들한테 이야기 할 수 있는 한계 같은 거... 근데 너한테는 그런 한계 같은 게 모호해지는 느낌이야. 뭐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해야 되나?”
“무슨 이야길 하시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시나? 호호호. 해봐요. 준비됐으면...”
“혹시 첨밀밀이라는 영화 봤어? 장만옥과 여명이 주연으로 나오는...”
“예. 봤어요. 주제가가 참 좋던데...”
“기억하는지 모르겠는데 중국 본토에서 돈을 벌기 위해 홍콩으로 와서 우연히 만나게 된 두 사람이 홍콩에서 맞이한 새해가 오기 전날 외로움을 느끼고 섹스를 하게 되잖아. 그리고 어색해질 수도 있었는데 서로 친구라는 걸 강조하며 계속해서 밤을 같이 보내는 거야. 우린 좋은 친구라면서...
난 그 영화를 보면서 그 시나리오를 쓴 작가에게 공감이 가더라고. 한국의 정서로는 남녀 사이에 친구가 되려면 같이 잠을 자면 안 되고 섹스를 하는 사이를 애인이라고 이야기를 하지만...
넌 나한테 영화 속 장만옥 같은 여자야. 그냥 편해. 지금은 널 가지고 싶은 마음보다는 편해서 좋아.“
“장만옥과 여명은 서로 사랑을 하지만 잘 이루어지지 않다가 마지막에 미국인가 어디서 우연히 만나게 되잖아요.”
“응. 길거리에서 우연히 등려군이라는 가수가 죽었다는 뉴스를 보다가... 그 장면에서 영화는 끝났어. 여운이 있는 영화지.”
테이블 위에 소주 2병이 비워질 무렵 김유미가 불쑥 말을 꺼냈다.
“요즘 부부관계는 어때요? 원만해요?”
“어떤 거? 섹스?”
고개를 끄덕인다. 김유미가 먼저 그걸 물어볼 줄은 몰랐다. 뭐라고 대답해야 되지?
“그게 쉽지가 않네. 그냥 그래...”
대층 둘러대고 넘어 가려는 데 김유미가 소주 한 잔을 마시고 나서 다시 물었다.
“그럼 아직도 거기에 문제가 있는 거예요?”
그렇다고 하기도 그렇고 아니라고 하기도 애매한 상황이 됐다. 지연을 잃은 상실감에 여자를 안고 싶긴 하지만...
“일정치 않아. 심리적인 문제라는 게 내 뜻대로 되지는 않는 것 같아.”
난 다시 한 번 비켜갔고 만약 김유미와 다시 관계를 이어간다고 하더라도 오늘은 좀 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낮부터 마신 술에 취한 듯 고개를 테이블에 떨군 채 움직이지 않았다.
“요즘 무슨 일이 있는 거죠? 벌써 취했어요?”
무슨 일? 지연의 편지... 난 잠바 안주머니 속에 있는 편지가 갑자기 생각났다. 내용도...
난 왜 김유미를 만나자고 했을까? 지연의 편지가 왔고 괜히 기분이 울적해져서 술을 마시고 싶었는데 마시다보니 김유미가 생각났다.
지연은 왜 갑자기 내게 편지를 보낸 걸까? 미국으로 간지 반 년 정도 됐고 외롭기는 그 동안도 계속 그랬을 텐데... 지연에게 무언가 심경의 변화가 있다. 편지 내용은 나와 다시 시작해보자는 내용은 아니었는데...
처음에 읽을 때는 별 느낌이 없었던 표현들이 갑자기 이상하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물어보고 싶은 게 하나 더 있어요.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하늘을 보고 또박또박 말해줘요.
난 아침에 지연의 편지를 읽고 이제 두 번 다시 그녀를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막연하게 그녀를 다시 볼 수 있을 거라는 작은 희망까지 사라지는...
고개를 들어 김유미를 보고 말했다.
“음.. 좀 많이 마신 것 같아. 미안... 잠깐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난 화장실을 가는 척하며 그 자리를 나와 지연의 편지를 다시 꺼내 들었다. 겉봉의 주소를 보니 302 Unis Studio, 4505 Butler Street, Pittsburgh라고 적혀 있었고 우리 팀 후배 중에 미국 유학을 다녀온 석진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나다. 부탁이 있는데 내가 주소를 불러줄테니 그곳에 거주하는 황지연이라는 여자의 근황을 좀 파악해봐라. 적당히 지인이라고 둘러대고... 전화번호는 잘 모르니까 니가 어떻게 알아보고....”
“예? 갑자기 무슨 말씀인지... 잘 알아듣게 이야기 해보세요.”
“불러주는 주소는 미국이야. 펜실베니아 피츠버그. 나머지 주소는 문자로 찍어줄게. 거기 전화번호는 니가 알아보라는 이야기야. 넌 영어가 되잖아. 미국에도 114 같은 게 있을 거 아냐? 거기 관리소 같은 데 전화가 되면 황지연이라는 여자가 잘 있는 지만 물어봐줘. 그냥 잘 있으면 돼.”
“114 비슷한 게 있긴 있는 데 등록이 되어 있는지 모르잖아요? 피츠버그시에 황지연이라는 이름으로 등록된 전화번호가 있으면 다행이겠지만 통화가 된다고 하더라도 형님이 찾는 사람이 맞는지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아니 그렇게 말고... 여기 Unis Studio라고 적혀 있는 데 거기 전화번호는 알 수 없는 거야?”
“미국에서는 우리나라 원룸 같은 걸 Studio라고 하는 경우가 많아요. 거기 관리인이나 집주인하고 연락이 될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뭐? 뭐 또 걸리는 게 있어?”
“보통 집주인들이 각 룸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근황을 다 파악하고 있지는 않을 거예요. 그렇다고 방에 가서 잘 있는 지 확인해달라고 하기도 그렇고...”
“동양인 여자니까 특이해서 기억할 지도 모르지. 그렇게 한 번 알아보고... 그게 안되면... 피츠버그 범죄심리학 연구소라는 데 전화 한 번 걸어봐라. 거기에 1년 연수한다고 갔거든. 거기 연수 프로그램 담당자에게 한국에서 온 황지연씨와 통화하고 싶다고 어떻게 하면 되냐고 물어봐. 그 정도는 영어로 할 수 있지?”
“그건 어렵지 않아요. 집주소에서 알아보는 것보다 그게 편할 것 같네요. 그런데 형님하고는 어떤 사이인데요?”
“응? 아는 후배 놈하고 만나던 여자인데 갑자기 헤어지자고 하고는 며칠 뒤 미국으로 떠났대. 잘 있는지만 알아봐달라던데... 그 놈 영어 잘 못하거든. 지금 술 먹고 내 앞에서 엉엉 울고 난리가 났다. 그냥 그 것만 알면 된대. 요즘 거의 폐인 모드로 살았나봐. 빨리 알아봐줘야 할 것 같아.”
“요즘도 그런 남자가 있어요? 엄청난 순정남이네요. 지금 피츠버그가 몇 시쯤 될지... 그 여자분 근황 알아보고 나서 어떻게 해요? 바로 전화 드려요?”
“응. 나 오늘 그 녀석하고 꽤 오래 있어야 할 것 같거든. 바로 전화 줘.”
난 다시 김유미가 기다리고 있는 횟집 안으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자마자 그녀가 내게 물었다.
“아까는 친구 같아서 뭐든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다더니 요즘 무슨 일이 있냐고 말해보라니까 슬쩍 피하는 거예요? 술 한 잔 마시고 말해 봐요. 괜히 궁금해지잖아요.”
난 지연에게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까 하는 생각에 약간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김유미는 내 기분을 풀어 주려는 듯 살짝 미소를 띠며 내게 술을 따라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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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회 분량은 써 놓은 지 일주일 정도 됐는 데 다듬지를 못하고 있다가 저녁 때 맥주 한 잔 하고
들어와서 두 시간 정도 작업했더니 끝나네요.
메르스 조심하시고 좋은 하루 되세요! ^^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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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 2016-08-11 | ||
접속일 | 2024-11-20 | ||
서명 | 황진이-19금 성인놀이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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