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타도 많고, 글도 매끄럽지 않고, ...
요새처럼 더운 날씨에 이런 글 읽으시려면 짜증스러우실텐데도,
지금까지 올린 다섯편의 허접한 졸작에 보내주신 성원에
진심으로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제 얕은 생각으로 이 정도 글을 만들어내려면
진짜 죽을 지경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죄송한 것은 사과드려야죠.
정말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그런데, 기왕이면 실수까지도 아껴주십시오.
-Jadore-
=*=*=*=
지금까지 이 글에 나타난 중요한 사람들은 ..
1. 남주 김태현. 24세, 대한대학 건축과, 2학년 마치고 군복무, 9월에 복학할때까지 알바하기로 결심. 학교 앞에 오피스텔을 얻어서 집을 나옴. 오피스텔 근처에 아이린PC방에 열심히 다님
2. 정혜영, 45세, 아이린PC방 사장, 태현은 자기 혼자 아이린이라고 부름. 이혼 한 후에 서지혜와 서경식을 키움. 김태현에게 애들 둘의 과외를 부탁함.
3. 서지혜, 정혜영의 딸, 18세. 고2, 엄마가 태현에게 빠지는 것 같아서 고민중
4. 서경식, 정혜영의 아들, 17세, 고1, 태현을 형이라고 부름.
5. 강은영, 36, 나라마트 본부 총무과 과장
6. 최수희, 27, 나라마트 본부 총무과 직원, 태현에게 일을 가르침
7. 한수정, 24, 대한대 건축과, 태현과 1학년때부터 CC, 태현이 입대하자 캐나다로 유학. 태현과 끝났는지 안끝났는지 태현이 헷갈림. 태현에게 내년에 귀국하겠다고 밝힘.
=*=*=*=
6. 지혜가 아이린에게 고백하고 ..
나를 깨운 사람은 바로 우리 엄마였다. 알바 자리를 구했다는데, 집에 와서 밥도 먹고, 일하는 얘기도 하라고 나에게 전화를 여러 번 했지만 내가 받지 않아서 직접 오신 것이다.
"웬일이세요?"
"웬일? 도대체 전화를 하면 받지를 않으니까 걱정 돼서 왔지."
"일하러 다닌다고 쫌 바쁘다 보니까 .."
"반찬을 갖다 놓아도, 네가 집에서 밥을 해먹는 일이 없어서 다시 집으로 가져갔다."
"잘 했어요. 안 그래도 말씀 드리려고 했거든요."
나는 엄마에게 사과를 한 후에 시간을 내서 가겠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아이린과 지혜가 들어왔다. 그녀들은 스스로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이다. 엄마는 놀란 얼굴을 하고 나를 본다. 나는 엄마에게 두 사람을 소개했다.
"길 건너에 있는 아이린 PC방의 사장님, 또 그 사장님의 딸이야. 여기서 과외 하거든요. 이쪽은 우리 엄마셔요."
"어머머. .. 선생님 어머님이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아, 예.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이린은 엄마에게 인사를 했고, 지혜는 아이린의 등 뒤로 숨어버렸다. 엄마는 아이린과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않고, 재빨리 도망치다시피 해서 방을 나가셨다. 나는 엄마의 등에 대고 나중에 전화하겠다고 소리쳤다.
지혜는 식탁에 앉고, 아이린은 내 냉장고에서 음료수를 꺼내왔다. 그런데 아이린은 내가 못 보던 이온음료를 꺼내는 것이다. 내가 이상한 눈으로 보자 아이린은 말했다.
"아무래도 지혜가 마실 음료수가 필요할 것 같아서, 내가 낮에 사다 넣었어요. 선생님도 드셔요."
냉장고를 열어보니까 텅 비다시피 했던 냉장고가 가득 채워져 있다. 싱크대에는 와인 한박스와 와인 잔도 있다. 아침에 마신 커피잔도 깨끗이 씻어두었다. 방바닥도 깨끗하게 청소가 되어있다. 아마도 아이린이 청소와 설거지를 하고 장을 본 것 같다. 싱크대 위에 있는 장에는 과자도 들어있다. 나는 고맙다고 인사를 했지만, 아이린은 고개를 약간 숙이며 내 눈길을 피하는 것 같다.
"수고 많이 하셨네요."
"미리 말씀 드리려고 전화를 드렸는데 받지 않으셔서, 제가 그냥 했어요."
"지혜야. 저녁은 먹었니?"
"끝나자마자 바로 왔거든요."
"공부하고 계세요. 제가 나가서 사올께요."
"엄마, 기왕이면 피자로 부탁해. 헤헤."
지혜는 가방에서 수학책과 연습장 한 권을 꺼냈다.
"이제 뭐라고 불러야 해? 쌤? 오빠? 아니면 태현씨? 하하."
"마음대로 해. 세상 모든 사람이 부를 수 있는 내 이름은 김태현이야."
"에이. 그래도 이름을 부를 수는 없고, 지금처럼 앞으로도 오빠라고 할께."
지혜가 펼친 수학은 이과 수학인 수학2였다. 지혜는 공대에 가고 싶다면서 이과라고 했다. 그런데 이번 수학2 시험은 반타작도 못했다고 한다.
"이과에서 수학을 이렇게 많이 하는 줄 알았으면 문과를 택하는 건데 .."
"나중에 고3이 되면 교차지원이 가능할껄?"
"교차지원이 뭐야?"
"이과 수학을 도저히 못해내는 애들은 할 수 없이 그냥 문과수학을 하는 거지."
"그럼 이과수학하는 애들이 불리하네?"
"걔네들에게는 가산점이 붙어요."
"하아. .. 이런 오묘한 진리가 .."
"아무리 그래도 그건 내년에 가서 얘기고, 아직은 포기하면 안돼."
"난 이 수학을 어째야 해?"
"바보. 어쩌긴 뭘 어째? 공부해야죠."
"그니까 어떻게 공부하냐고."
"열심히!"
"돌겠네."
"하하하. 어찌 해놨는지 함 보자."
나는 책을 넘기면서 몇 가지를 물어보았다. 그런데 내가 물어본 것은 어려운 내용이 아니라 아주 기본적인 개념들이었다. 그렇지만 내가 무엇을 묻더라도 지혜의 입에서 나오는 대답은 항상 단 한가지였다.
"몰라."
나는 앞이 까마득해지면서 걱정스러웠다. 내가 해서는 안될 것을 시작해버렸다는 기분이 들었다.
"오빠, 그런 것 몰라도 문제만 잘 풀면 되지 않나?"
"모르고 문제 푸는 것이 말이 되냐?"
"나는 주욱 그렇게 해왔거든."
"그러니까 오늘날 이 모양, 이 꼴이시군."
지혜는 자신의 앞날에 대하여 잘 모른다. 그렇지만 모르면서도 막연하게 걱정을 한다. 그러나 나는 이과생인 지혜의 앞날을 알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알면서 걱정한다.
지혜의 앞날에 대해서 지혜가 갖는 걱정보다는 내가 갖는 걱정이 훨씬 더 클 것이다. 이런 속마음을 비치면 지혜가 실망할 것 같아서 나는 내가 하는 걱정을 숨겨야 했다.
"도저히 안되겠다. 작전을 세우자."
"어떤 작전?"
"처음부터 다 하려면 다음 시험까지 시간이 많지 않거든."
"이제 두 달도 안남았어."
"그 시간 동안에 수학만 할 수도 없고."
"맞아. 영어랑 과학도 있어. 이과 과학이 한두개도 아니잖아?"
"그러니까 다음 시험 범위만 골라내서 공부하고, 그것을 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벌써 앞에 나왔으면 그런 것만 골라서 보충하자."
"그럼 안 한 것은 어쩌고?"
"이번 방학 때 하셔야죠."
"흐으음 .."
지혜는 내 말에 찬성했다. 지혜의 말에 따라서 지난 번 시험 범위를 과감하게 잘라내고 다음 시험 범위를 예측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만 공부해서 이번 기말 시험에 도전해보기로 합의를 했다.
아이린이 들어왔다. 우리에게 저녁 먹으라면서 피자를 주문했는데, 올 때가 됐다는 것이다. 아무리 위기감이 어쩌고 해도, 엄마가 와서 피자 먹을 때가 됐다고 하니까, 지혜는 너무 좋아한다. 지혜가 좋아하니까 엄마인 아이린도 따라서 좋아한다.
"둘이 앉아서 공부하는 것을 보니까 불안하던 내 마음이 착 가라앉으면서 안심이 되네. 나는 보는 것 만으로도 너무 좋아."
"하긴. 엄마는 지금까지 내가 공부하는 것을 본 적이 없지."
"중학생이었을 때는 봤거든요."
"아냐. 그 때도 공부하는 척만 했지, 사실 오늘 오빠랑 한 것처럼 공부해본 적은 오늘이 처음이야."
"그럼 우리 딸이 오늘은 공부다운 공부를 했다는 말이네?"
"내가 공부 안 한 것이 너무 적나라하게 보이네. 나 이제 진심 공부할거야. 헤헤."
지혜가 저녁으로 피자를 먹은 후에는 영어책을 꺼냈다. 아이린은 가게로 갔다.
"오빠, 오늘 너무 피곤한데. 영어는 내일 하면 안될까?"
"그래도 되기는 한데, 시간이 별로 없다며?"
"갑자기 잠이 쏟아진다."
"그럼 아예 안 하는 것은 쫌 아닌 것 같고, 조금만 하고 집에 가서 푹 자요."
"해도 될까 모르겠네."
"혹시 영어도 울렁증 아냐?"
"당연하신 말씀."
지혜는 영어 교과서를 꺼내서 펼쳤다. 역시 영어도 수학처럼 시험범위만 공부하기로 했다. 그런데 영어는 지혜가 너무 모른다. 단어도 모르고, 문법도 모르고, 듣기도 안되고 ... 지혜는 문장을 읽으면서 부분으로 나누어서 이해한 후 전체로 묶어내는 과정을 전혀 손을 대지 못한다.
"오빠, 나 이래도 구제가 가능할까?"
"너네 학교 애들 실력이 다 너랑 비슷할껄요. 잘하는 애들 몇 명만 빼고."
"그런 것 같기도 해."
"무엇을 모르는 줄 알았으면, 공부하면 돼."
"으음.. 해서 될까?"
"수학이 되는데, 영어가 안되면 완전 비정상이지."
"그런가?"
우리는 영어에 매달렸다. 연습장에 문장을 적고, 문장의 성분으로 묶어내는 작업을 시작했다. 역시 영어는 거부반응이 너무 컸다. 이유는 너무 오래 동안 영어를 들여다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는 지혜를 구슬러서 밤 10시까지 공부를 계속했다.
"오늘은 용량초과야. 제발 고만하자."
"알았어. 내일 계속하자."
"오빠도 피곤하지?"
"그냥 앉아있으면 피곤할텐데, 지혜랑 공부하니까 하나도 안 피곤해. 하하."
"그거야 .. 내가 원래 쫌 예쁘니까. .. 헤헤."
"그건 맞는 말이야."
"와아.. 나 오늘 태어나서 처음으로 공부라는 것을 해봤다. 하하하."
"기분 좋지?"
"좋기만 하겠어? 그런데 처음에 수학할 때 오빠가 모르는 것 막 물어볼 때는 엄청 쪽팔리고 짜증나더라."
"아는 것을 물어보고 싶은데, 아는 것이 없는 것 같던데?"
"맞아. 확 까발리고 나니까 속이 후련하기는 했어."
"반성해라."
"알았어. 이제부터 열심히 할께."
지혜는 아이린에게 전화를 하더니, 아래로 내려오라고 했다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현관으로 따라나갔다. 지혜는 앉아서 신을 신고 나서 일어서더니 내게로 돌아서서 나를 본다.
"오빠."
"응?"
지혜는 갑자기 내 뺨에 입술을 대고 뽀뽀를 했다.
"고마워! 헤헤."
그리고 지혜는 재빨리 문을 열고 밖으로 사라졌다. 나는 닫힌 문을 보면서 서있었다. 내 뺨에 지혜의 입술이 남긴 여리고 부드러운 촉감을 잊고 싶지 않아서 두 눈을 감고 그 자리에 한참을 서있었다.
"지혜는 아직 어린애야."
나는 머리를 흔들며 소파로 돌아왔다. 아직도 내 휴대전화기가 가방 속에 들어있다는 것이 생각났다. 나는 전화기를 꺼내서 우선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는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걱정을 시작했다.
"낮에는 회사, 밤에는 과외. 너 지금 돈 독이 올랐니?"
"글쎄."
"네 공부는 언제 할껀데?"
"내가 공부 안 하는 것 본 적 있어요?"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걱정되니까."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그 사람들은 무슨 여자들이 총각 방에 그냥 문을 열고 막 들어온대?"
"그러라고 했어요. 오늘은 내가 일찍 퇴근했지만, 보통은 학생이 빨리 오거든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뭐가 쫌 수상쩍어."
"엄마! 그럼 올 때마다 전화를 해요? 나랑 통화하기가 쉽지도 않거든요."
"그렇긴 하더라."
엄마의 걱정이 전혀 근거 없는 걱정만은 아닌 것 같다. 아직 통화가 끝나지 않았는데, 갑자기 아이린이 혼자 쑥 들어오는 것이다. 그녀는 조용히 와인잔, 와인, 치즈조각, 작은 쵸콜렛, 긴 막대모양의 쵸콜렛들을 주섬주섬 식탁 위로 올려놓는다. 나는 아이린에게 손짓을 해서 식탁에 하지 말고 소파로 가져오라고 했다. 아이린은 식탁에 있는 것들을 전부 다 내 앞에 있는 작은 테이블로 옮겨왔다. 그리고 내 옆에 앉아서 통화가 끝나기를 기다린다.
"오셨어요? 엄마가 할 말이 많네요."
"자식 걱정이겠죠. 태현씨 계좌번호 ..."
"아..."
나는 내 계좌번호를 외우지 못하므로 통장을 꺼내다가 펼쳐주었다. 아이린은 문자메시지로 내 계좌번호를 지혜 아빠에게 보낸다고 했다.
"확인해보세요. 지혜 아빠가 인터넷 뱅킹으로 지금 곧 보낸다고 했어요."
"알았어요. 그것 때문에 일부러 오셨어요?"
"그것도 그렇고, 오피스텔 때문에요. 여기 3층이랑, 5층에 빈 것이 있다는데, 어디가 좋을지 몰라서요. 5층은 끝에 있어서 더 넓다던데."
"나 있는 여기가 7층이니까 5층이 가깝고 좋지 않을까요? 엘리베이터 탈 필요 없이 계단으로 다녀도 되고. 안 그래도 애들 운동부족일텐데."
"알았어요. 내일 아침에 바로 계약 할께요. 주말까지는 시간이 걸려요."
나는 와인을 열어서 잔에 따랐다. 우리는 가볍게 건배하고 한 모금씩 마셨다. 와인은 내가 마시는 레드 드라이였다. 아이린은 얼굴을 찡그리면서 쵸콜렛을 입에 넣는다.
"사실 내가 왜 왔냐 하면 .."
"또 긴장시키시네."
"아까 지혜가 내려와서 나를 보더니 한참을 울었어요."
"예에?"
"지혜가 울면서 나한테 미안하대요. 지금까지 공부를 안 했다고 너무 미안하대. 오늘 태현씨랑 공부해보니까, 공부를 어떻게 하는 것인 줄 알겠대. 지금까지는 공부를 하고 싶었는데, 자기가 할 줄을 몰랐던 거래. 날더러 태현씨랑 공부하게 해줘서 고맙다고, 은혜를 잊지 않겠다나?"
그런데 이 말을 하면서 아이린의 눈망울이 또 젖는다. 아이린의 젖은 눈을 보는 내 마음이 울컥할 정도이다. 나는 자리에 앉아있을 수 없었다. 벌떡 일어서서 CD 플레이어로 가서 음악을 틀었다. 아이린은 내게 사과했다.
"미안해요. 내가 너무 감정이 격해졌나 봐."
"사장님."
"사장님 소리 고만 하죠? 우리가 사업 때문에 만난 것도 아니고 .."
"그럼 어머님 .."
"나 태현씨 엄마 아니거든요."
"그럼 혜영씨."
"응?"
"지금 지혜가 처음 해보니까 그러는 것 같아요. 조금 계속하면 곧 실증을 낼 수도 있고, 또 공부를 해도 효과가 나타나지 않으면 실망하고 짜증을 부리지 않겠어요?"
"그때 가서 그런 일이 일어나더라도 .. 지금 지혜가 저렇게 좋아하니까 내가 너무 고마워요."
"별 말씀을 .."
"사실은 아파트에 과외 광고가 붙었었어요. 나는 거기에 전화를 해봤지. 그 선생님 말하는데, 가격도 싸고, 잘 가르칠 것 같더라고. 그래서 지혜랑 경식이한테 물어봤더니 그런 거는 초딩이나 중딩이 하는 거고, 고딩들한테는 아니라는 거야."
"얘들이 어떻게 알고? 왜 그랬지?"
"거기에 <성적 안오르면 환불해준다> 뭐 이런 말도 있고, <성적 오르는 것을 보장한다>고도 써있었거든요. 우리 애들 말이 고등학생들은 과외나 학원 다녀서 성적이 오르고, 안 다녀서 떨어지고 하지를 않는대. 그러면서 태현씨 얘기를 하잖아. 대한대학이 괜히 대한대학이 아니라면서, 태현씨는 공부를 어떻게 하는지 그 방법을 완전 분명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래."
"하하하."
"신기하지 않아요? 태현씨가 경식이한테 뭘 어떻게 가르쳐줬는지는 몰라도, 애들이 나한테 그러니까.."
"글쎄요."
"그래서 지혜 아빠한테 전화를 해서, 이 얘기를 주욱 했죠. 그런데 아빠 말도 똑같아. 그래서 태현씨에게 맡기기로 결정을 하기는 했는데, 나는 모르니까 오늘 공부하는 동안에 계속 엄청 조마조마 했죠. 그런데 지혜가 아까 울면서 그러는데, 태현씨가 고맙기도 하고, ..."
아이린은 또 운다.
자기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어하는 엄마의 마음이고, 또 그 마음이 눈물로 흐르고 있다고 나는 생각하기로 했다.
"혜영씨가 그렇게 생각해주시니까 나야 고맙죠. 그런데 이제 그 얘기는 고만 하세요. 자꾸 울기만 하고 ..."
"미안해요. <이제 나도 내 자식에게 뭔가 도움이 되는 엄마구나> 라는 생각이 들면서 자꾸 눈물이 .."
"난 여자 우는 것 진짜 싫은데 .."
"아냐. 이렇게 시작 했으니까 할 말은 해야겠어. 그 동안 내가 우리 애들을 보면서 얼마나 가슴 졸이고 안타까워 했는줄 모르죠? 뭔가를 해주고는 싶은데, 그게 뭔지를 모르니까 너무 답답했거든요. 오늘 진짜 속이 후련하고, 막힌 것이 뻥 뚫린 기분이야."
"고마워요."
"정말?"
"네. 진심입니다."
"그럼 내 부탁 한가지만 들어줄래요?"
"무슨 ..?"
"걱정하지 말아요. 고맙다는 그 말이 진심이라면 충분히 들어줄 수 있는 거야."
"알았어요. 들어드릴테니까 말씀하세요."
"자기 .. 나한테 .."
"아휴. 지인짜 답답하네."
"나.. 자기가 나를 누나라고 부르는 소리가 듣고 싶어. 딱 한번만이라도."
"돌겠네."
"안되나? 대한대학생한테 누나 소리 듣고 싶은데 .."
"누나, 누나, 누나, 누나, 누나. 다섯 번 했어요 됐어요?"
"다섯 번 맞기는 맞는데. .. 자기의 진심이 빠져있어."
"어떻게 해야 진심이 담겨있는 건데요?"
"한번을 부르더라도 나를 누나라고 생각하면서 .."
나는 아이린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내가 누나랑 알게 된 것이나, 또 누나가 사랑하는 딸 지혜랑 같이 공부했는데, 지혜가 누나한테 좋았다고 하는 것이나... 나 엄청 기분 좋아. 누나 때문에 또 지혜 때문에."
"어머머..."
아이린은 또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열린다. 나는 티슈통을 가져왔다. 두세장을 뽑아서 아이린의 두 눈을 살짝 터치했다.
"거보세요. 누나라고 하니까 금방 울꺼면서 뭐하러 그러라고 시켜요?"
"자기야. 울더라도 듣고 싶은 걸 어떻해?"
"누나."
"응?"
"어제도 누나 소리가 듣고 싶었어?"
"응."
"그런데 어제는 왜 말 안 했어?"
"말하고 싶어 죽을 지경인데 표현을 못하겠더라."
"오늘은?"
"우리 딸 지혜를 울리고 나를 울게 한 남자인데 뭘 망설여?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말했어. 말하고 나서 내가 미쳤나 하고 생각했지. 그치만 말이 이미 나간걸 어쩌겠어? 그래서 뻔뻔해지기로 했어."
우리는 다시 건배를 했다. 아이린은 한모금 마시고 나는 긴 막대 모양의 쵸콜렛을 들고 껍질을 까서 반토막으로 잘랐다. 반조각을 아이린의 입으로 가져갔다.
아이린은 쵸콜렛을 든 내 손목을 잡았다. 아이린의 붉은 입술이 열리고, 쵸콜렛이 입술 사이로 들어가자, 아이린의 두 입술이 닫히면서 쵸콜렛을 물었다. 나는 쵸콜렛을 아이린의 입 안으로 조금씩 천천히 밀어넣었다. 아이린은 쵸콜렛을 씹으면서 입 안으로 빨아들인다.
반쪽짜리 쵸콜렛은 모두 아이린의 입안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아이린은 그래도 내 손목을 놓아주지 않는다. 내 손가락과 손바닥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면서 입을 오물거린다. 몇 번에 걸쳐서 쵸콜렛을 모두 삼켰다. 아이린은 내 손으로 자신의 한쪽 얼굴을 감싼다. 아이린의 두 눈이 사르르 감긴다. 아이린의 눈망을이 파르르 떨린다.
"어제 마시던 것처럼 화이트 와인 단맛으로 사오지 그랬어요?"
"자기가 어제 날더러 습관이라고 했잖아? 나도 자기가 마시는 와인에 습관되고 싶거든."
아이린은 눈을 뜨지 않고 내 말에 대답했다.
잠시 후에 아이린은 내 손을 볼에서 떠어 내서, 어제 택시를 타고 올 때처럼 자기 허벅지로 가져갔다. 한 손으로 내 손목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내 손등과 손바닥을 쓰다듬는다. 하얗고 긴 아이린의 손가락이 내 손을 쓰다듬는 것을 보는 나는 <저 예쁜 손으로 사랑하는 남편과 자식들을 쓰다듬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애절할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내 가슴이 아팠다. 나도 아이린의 손을 잡았다.
"하아.."
아이린은 고개를 내 반대쪽으로 돌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내 손을 잡은 아이린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나는 내 손을 아이린에게 맡겼다. 아이린의 가슴이 숨쉬는 것에 따라서 오르내리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비록 아이린은 얼굴을 내 반대쪽으로 돌리고 있지만, 아이린의 숨소리는 내 귀 가까이에서처럼 들렸다. 점점 규칙성을 잃어가는 것 같다.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아이린의 머리에서 나는 향긋한 냄새를 맡으며 한 손을 아이린에게 맡기고 있는 지금, 나라고 마음이 편할 리는 없다. 내 가슴도 두근거리고, 얼굴도 화끈거린다.
이것은 우리 둘 사이에 일어나면 안 되는 상황이다. 브레이크를 걸어야 할 사람은 나라고 생각했다.
"누나."
"......"
"와인 안 마실꺼야? 누나 기분 나빠?"
"아니야."
그제서야 아이린은 내 손을 놓고 와인 잔을 든다. 나는 치즈 조각을 나이프로 잘게 잘랐다. 아이린의 붉은 입술 사이로 와인 잔이 물리고, 붉은 액체가 조금씩 아이린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아이린의 입에서 잔이 떨어지고 나는 치즈 조각을 손에 들고 아이린의 입으로 가져갔다. 아이린은 또 내 손목을 단단히 잡았다. 굳게 닫혀있던 아이린의 입술이 열렸다. 나는 치즈 조각을 아이린의 입술 사이로 조심해서 넣었다.
아이린의 두 눈이 감기고, 열렸던 두 입술이 닫히면서 작은 치즈조각은 아이린의 입 안으로 재빨리 사라졌다. 그런데 치즈 조각을 잡고 있던 나는 집게손가락을 미처 떼어내지 못했다.
아이린은 내 집게손가락까지 같이 입술 사이로 가두었다. 아이린의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입술이 내 손가락을 물었다. 점점 힘이 들어간다. 아이린의 촉촉하고 따뜻한 혀가 입 안에 들어있는 내 손가락을 이리 저리 휘감는다. 아이린은 내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빨기 시작했다. 조금씩, 천천히, 살살.
내 손가락을 물고있는 입술에는 힘이 점점 강하게 들어가고, 빨아들이는 힘도 점점 강해진다. 나는 내 손가락에 힘을 주어 단번에 재빨리 뽑아냈다. 아이린의 열렸던 입술이 갑자기 닫히면서 짧고 강한 소리가 났다. 그것은 키스할 때 나는 소리와 비슷했다. 그래도 아이린은 내 손목을 잡은 손을 놓지 않는다.
아이린은 질끈 감고있던 두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본다.
요새처럼 더운 날씨에 이런 글 읽으시려면 짜증스러우실텐데도,
지금까지 올린 다섯편의 허접한 졸작에 보내주신 성원에
진심으로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제 얕은 생각으로 이 정도 글을 만들어내려면
진짜 죽을 지경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죄송한 것은 사과드려야죠.
정말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그런데, 기왕이면 실수까지도 아껴주십시오.
-Jadore-
=*=*=*=
지금까지 이 글에 나타난 중요한 사람들은 ..
1. 남주 김태현. 24세, 대한대학 건축과, 2학년 마치고 군복무, 9월에 복학할때까지 알바하기로 결심. 학교 앞에 오피스텔을 얻어서 집을 나옴. 오피스텔 근처에 아이린PC방에 열심히 다님
2. 정혜영, 45세, 아이린PC방 사장, 태현은 자기 혼자 아이린이라고 부름. 이혼 한 후에 서지혜와 서경식을 키움. 김태현에게 애들 둘의 과외를 부탁함.
3. 서지혜, 정혜영의 딸, 18세. 고2, 엄마가 태현에게 빠지는 것 같아서 고민중
4. 서경식, 정혜영의 아들, 17세, 고1, 태현을 형이라고 부름.
5. 강은영, 36, 나라마트 본부 총무과 과장
6. 최수희, 27, 나라마트 본부 총무과 직원, 태현에게 일을 가르침
7. 한수정, 24, 대한대 건축과, 태현과 1학년때부터 CC, 태현이 입대하자 캐나다로 유학. 태현과 끝났는지 안끝났는지 태현이 헷갈림. 태현에게 내년에 귀국하겠다고 밝힘.
=*=*=*=
6. 지혜가 아이린에게 고백하고 ..
나를 깨운 사람은 바로 우리 엄마였다. 알바 자리를 구했다는데, 집에 와서 밥도 먹고, 일하는 얘기도 하라고 나에게 전화를 여러 번 했지만 내가 받지 않아서 직접 오신 것이다.
"웬일이세요?"
"웬일? 도대체 전화를 하면 받지를 않으니까 걱정 돼서 왔지."
"일하러 다닌다고 쫌 바쁘다 보니까 .."
"반찬을 갖다 놓아도, 네가 집에서 밥을 해먹는 일이 없어서 다시 집으로 가져갔다."
"잘 했어요. 안 그래도 말씀 드리려고 했거든요."
나는 엄마에게 사과를 한 후에 시간을 내서 가겠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아이린과 지혜가 들어왔다. 그녀들은 스스로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이다. 엄마는 놀란 얼굴을 하고 나를 본다. 나는 엄마에게 두 사람을 소개했다.
"길 건너에 있는 아이린 PC방의 사장님, 또 그 사장님의 딸이야. 여기서 과외 하거든요. 이쪽은 우리 엄마셔요."
"어머머. .. 선생님 어머님이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아, 예.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이린은 엄마에게 인사를 했고, 지혜는 아이린의 등 뒤로 숨어버렸다. 엄마는 아이린과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않고, 재빨리 도망치다시피 해서 방을 나가셨다. 나는 엄마의 등에 대고 나중에 전화하겠다고 소리쳤다.
지혜는 식탁에 앉고, 아이린은 내 냉장고에서 음료수를 꺼내왔다. 그런데 아이린은 내가 못 보던 이온음료를 꺼내는 것이다. 내가 이상한 눈으로 보자 아이린은 말했다.
"아무래도 지혜가 마실 음료수가 필요할 것 같아서, 내가 낮에 사다 넣었어요. 선생님도 드셔요."
냉장고를 열어보니까 텅 비다시피 했던 냉장고가 가득 채워져 있다. 싱크대에는 와인 한박스와 와인 잔도 있다. 아침에 마신 커피잔도 깨끗이 씻어두었다. 방바닥도 깨끗하게 청소가 되어있다. 아마도 아이린이 청소와 설거지를 하고 장을 본 것 같다. 싱크대 위에 있는 장에는 과자도 들어있다. 나는 고맙다고 인사를 했지만, 아이린은 고개를 약간 숙이며 내 눈길을 피하는 것 같다.
"수고 많이 하셨네요."
"미리 말씀 드리려고 전화를 드렸는데 받지 않으셔서, 제가 그냥 했어요."
"지혜야. 저녁은 먹었니?"
"끝나자마자 바로 왔거든요."
"공부하고 계세요. 제가 나가서 사올께요."
"엄마, 기왕이면 피자로 부탁해. 헤헤."
지혜는 가방에서 수학책과 연습장 한 권을 꺼냈다.
"이제 뭐라고 불러야 해? 쌤? 오빠? 아니면 태현씨? 하하."
"마음대로 해. 세상 모든 사람이 부를 수 있는 내 이름은 김태현이야."
"에이. 그래도 이름을 부를 수는 없고, 지금처럼 앞으로도 오빠라고 할께."
지혜가 펼친 수학은 이과 수학인 수학2였다. 지혜는 공대에 가고 싶다면서 이과라고 했다. 그런데 이번 수학2 시험은 반타작도 못했다고 한다.
"이과에서 수학을 이렇게 많이 하는 줄 알았으면 문과를 택하는 건데 .."
"나중에 고3이 되면 교차지원이 가능할껄?"
"교차지원이 뭐야?"
"이과 수학을 도저히 못해내는 애들은 할 수 없이 그냥 문과수학을 하는 거지."
"그럼 이과수학하는 애들이 불리하네?"
"걔네들에게는 가산점이 붙어요."
"하아. .. 이런 오묘한 진리가 .."
"아무리 그래도 그건 내년에 가서 얘기고, 아직은 포기하면 안돼."
"난 이 수학을 어째야 해?"
"바보. 어쩌긴 뭘 어째? 공부해야죠."
"그니까 어떻게 공부하냐고."
"열심히!"
"돌겠네."
"하하하. 어찌 해놨는지 함 보자."
나는 책을 넘기면서 몇 가지를 물어보았다. 그런데 내가 물어본 것은 어려운 내용이 아니라 아주 기본적인 개념들이었다. 그렇지만 내가 무엇을 묻더라도 지혜의 입에서 나오는 대답은 항상 단 한가지였다.
"몰라."
나는 앞이 까마득해지면서 걱정스러웠다. 내가 해서는 안될 것을 시작해버렸다는 기분이 들었다.
"오빠, 그런 것 몰라도 문제만 잘 풀면 되지 않나?"
"모르고 문제 푸는 것이 말이 되냐?"
"나는 주욱 그렇게 해왔거든."
"그러니까 오늘날 이 모양, 이 꼴이시군."
지혜는 자신의 앞날에 대하여 잘 모른다. 그렇지만 모르면서도 막연하게 걱정을 한다. 그러나 나는 이과생인 지혜의 앞날을 알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알면서 걱정한다.
지혜의 앞날에 대해서 지혜가 갖는 걱정보다는 내가 갖는 걱정이 훨씬 더 클 것이다. 이런 속마음을 비치면 지혜가 실망할 것 같아서 나는 내가 하는 걱정을 숨겨야 했다.
"도저히 안되겠다. 작전을 세우자."
"어떤 작전?"
"처음부터 다 하려면 다음 시험까지 시간이 많지 않거든."
"이제 두 달도 안남았어."
"그 시간 동안에 수학만 할 수도 없고."
"맞아. 영어랑 과학도 있어. 이과 과학이 한두개도 아니잖아?"
"그러니까 다음 시험 범위만 골라내서 공부하고, 그것을 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벌써 앞에 나왔으면 그런 것만 골라서 보충하자."
"그럼 안 한 것은 어쩌고?"
"이번 방학 때 하셔야죠."
"흐으음 .."
지혜는 내 말에 찬성했다. 지혜의 말에 따라서 지난 번 시험 범위를 과감하게 잘라내고 다음 시험 범위를 예측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만 공부해서 이번 기말 시험에 도전해보기로 합의를 했다.
아이린이 들어왔다. 우리에게 저녁 먹으라면서 피자를 주문했는데, 올 때가 됐다는 것이다. 아무리 위기감이 어쩌고 해도, 엄마가 와서 피자 먹을 때가 됐다고 하니까, 지혜는 너무 좋아한다. 지혜가 좋아하니까 엄마인 아이린도 따라서 좋아한다.
"둘이 앉아서 공부하는 것을 보니까 불안하던 내 마음이 착 가라앉으면서 안심이 되네. 나는 보는 것 만으로도 너무 좋아."
"하긴. 엄마는 지금까지 내가 공부하는 것을 본 적이 없지."
"중학생이었을 때는 봤거든요."
"아냐. 그 때도 공부하는 척만 했지, 사실 오늘 오빠랑 한 것처럼 공부해본 적은 오늘이 처음이야."
"그럼 우리 딸이 오늘은 공부다운 공부를 했다는 말이네?"
"내가 공부 안 한 것이 너무 적나라하게 보이네. 나 이제 진심 공부할거야. 헤헤."
지혜가 저녁으로 피자를 먹은 후에는 영어책을 꺼냈다. 아이린은 가게로 갔다.
"오빠, 오늘 너무 피곤한데. 영어는 내일 하면 안될까?"
"그래도 되기는 한데, 시간이 별로 없다며?"
"갑자기 잠이 쏟아진다."
"그럼 아예 안 하는 것은 쫌 아닌 것 같고, 조금만 하고 집에 가서 푹 자요."
"해도 될까 모르겠네."
"혹시 영어도 울렁증 아냐?"
"당연하신 말씀."
지혜는 영어 교과서를 꺼내서 펼쳤다. 역시 영어도 수학처럼 시험범위만 공부하기로 했다. 그런데 영어는 지혜가 너무 모른다. 단어도 모르고, 문법도 모르고, 듣기도 안되고 ... 지혜는 문장을 읽으면서 부분으로 나누어서 이해한 후 전체로 묶어내는 과정을 전혀 손을 대지 못한다.
"오빠, 나 이래도 구제가 가능할까?"
"너네 학교 애들 실력이 다 너랑 비슷할껄요. 잘하는 애들 몇 명만 빼고."
"그런 것 같기도 해."
"무엇을 모르는 줄 알았으면, 공부하면 돼."
"으음.. 해서 될까?"
"수학이 되는데, 영어가 안되면 완전 비정상이지."
"그런가?"
우리는 영어에 매달렸다. 연습장에 문장을 적고, 문장의 성분으로 묶어내는 작업을 시작했다. 역시 영어는 거부반응이 너무 컸다. 이유는 너무 오래 동안 영어를 들여다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는 지혜를 구슬러서 밤 10시까지 공부를 계속했다.
"오늘은 용량초과야. 제발 고만하자."
"알았어. 내일 계속하자."
"오빠도 피곤하지?"
"그냥 앉아있으면 피곤할텐데, 지혜랑 공부하니까 하나도 안 피곤해. 하하."
"그거야 .. 내가 원래 쫌 예쁘니까. .. 헤헤."
"그건 맞는 말이야."
"와아.. 나 오늘 태어나서 처음으로 공부라는 것을 해봤다. 하하하."
"기분 좋지?"
"좋기만 하겠어? 그런데 처음에 수학할 때 오빠가 모르는 것 막 물어볼 때는 엄청 쪽팔리고 짜증나더라."
"아는 것을 물어보고 싶은데, 아는 것이 없는 것 같던데?"
"맞아. 확 까발리고 나니까 속이 후련하기는 했어."
"반성해라."
"알았어. 이제부터 열심히 할께."
지혜는 아이린에게 전화를 하더니, 아래로 내려오라고 했다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현관으로 따라나갔다. 지혜는 앉아서 신을 신고 나서 일어서더니 내게로 돌아서서 나를 본다.
"오빠."
"응?"
지혜는 갑자기 내 뺨에 입술을 대고 뽀뽀를 했다.
"고마워! 헤헤."
그리고 지혜는 재빨리 문을 열고 밖으로 사라졌다. 나는 닫힌 문을 보면서 서있었다. 내 뺨에 지혜의 입술이 남긴 여리고 부드러운 촉감을 잊고 싶지 않아서 두 눈을 감고 그 자리에 한참을 서있었다.
"지혜는 아직 어린애야."
나는 머리를 흔들며 소파로 돌아왔다. 아직도 내 휴대전화기가 가방 속에 들어있다는 것이 생각났다. 나는 전화기를 꺼내서 우선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는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걱정을 시작했다.
"낮에는 회사, 밤에는 과외. 너 지금 돈 독이 올랐니?"
"글쎄."
"네 공부는 언제 할껀데?"
"내가 공부 안 하는 것 본 적 있어요?"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걱정되니까."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그 사람들은 무슨 여자들이 총각 방에 그냥 문을 열고 막 들어온대?"
"그러라고 했어요. 오늘은 내가 일찍 퇴근했지만, 보통은 학생이 빨리 오거든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뭐가 쫌 수상쩍어."
"엄마! 그럼 올 때마다 전화를 해요? 나랑 통화하기가 쉽지도 않거든요."
"그렇긴 하더라."
엄마의 걱정이 전혀 근거 없는 걱정만은 아닌 것 같다. 아직 통화가 끝나지 않았는데, 갑자기 아이린이 혼자 쑥 들어오는 것이다. 그녀는 조용히 와인잔, 와인, 치즈조각, 작은 쵸콜렛, 긴 막대모양의 쵸콜렛들을 주섬주섬 식탁 위로 올려놓는다. 나는 아이린에게 손짓을 해서 식탁에 하지 말고 소파로 가져오라고 했다. 아이린은 식탁에 있는 것들을 전부 다 내 앞에 있는 작은 테이블로 옮겨왔다. 그리고 내 옆에 앉아서 통화가 끝나기를 기다린다.
"오셨어요? 엄마가 할 말이 많네요."
"자식 걱정이겠죠. 태현씨 계좌번호 ..."
"아..."
나는 내 계좌번호를 외우지 못하므로 통장을 꺼내다가 펼쳐주었다. 아이린은 문자메시지로 내 계좌번호를 지혜 아빠에게 보낸다고 했다.
"확인해보세요. 지혜 아빠가 인터넷 뱅킹으로 지금 곧 보낸다고 했어요."
"알았어요. 그것 때문에 일부러 오셨어요?"
"그것도 그렇고, 오피스텔 때문에요. 여기 3층이랑, 5층에 빈 것이 있다는데, 어디가 좋을지 몰라서요. 5층은 끝에 있어서 더 넓다던데."
"나 있는 여기가 7층이니까 5층이 가깝고 좋지 않을까요? 엘리베이터 탈 필요 없이 계단으로 다녀도 되고. 안 그래도 애들 운동부족일텐데."
"알았어요. 내일 아침에 바로 계약 할께요. 주말까지는 시간이 걸려요."
나는 와인을 열어서 잔에 따랐다. 우리는 가볍게 건배하고 한 모금씩 마셨다. 와인은 내가 마시는 레드 드라이였다. 아이린은 얼굴을 찡그리면서 쵸콜렛을 입에 넣는다.
"사실 내가 왜 왔냐 하면 .."
"또 긴장시키시네."
"아까 지혜가 내려와서 나를 보더니 한참을 울었어요."
"예에?"
"지혜가 울면서 나한테 미안하대요. 지금까지 공부를 안 했다고 너무 미안하대. 오늘 태현씨랑 공부해보니까, 공부를 어떻게 하는 것인 줄 알겠대. 지금까지는 공부를 하고 싶었는데, 자기가 할 줄을 몰랐던 거래. 날더러 태현씨랑 공부하게 해줘서 고맙다고, 은혜를 잊지 않겠다나?"
그런데 이 말을 하면서 아이린의 눈망울이 또 젖는다. 아이린의 젖은 눈을 보는 내 마음이 울컥할 정도이다. 나는 자리에 앉아있을 수 없었다. 벌떡 일어서서 CD 플레이어로 가서 음악을 틀었다. 아이린은 내게 사과했다.
"미안해요. 내가 너무 감정이 격해졌나 봐."
"사장님."
"사장님 소리 고만 하죠? 우리가 사업 때문에 만난 것도 아니고 .."
"그럼 어머님 .."
"나 태현씨 엄마 아니거든요."
"그럼 혜영씨."
"응?"
"지금 지혜가 처음 해보니까 그러는 것 같아요. 조금 계속하면 곧 실증을 낼 수도 있고, 또 공부를 해도 효과가 나타나지 않으면 실망하고 짜증을 부리지 않겠어요?"
"그때 가서 그런 일이 일어나더라도 .. 지금 지혜가 저렇게 좋아하니까 내가 너무 고마워요."
"별 말씀을 .."
"사실은 아파트에 과외 광고가 붙었었어요. 나는 거기에 전화를 해봤지. 그 선생님 말하는데, 가격도 싸고, 잘 가르칠 것 같더라고. 그래서 지혜랑 경식이한테 물어봤더니 그런 거는 초딩이나 중딩이 하는 거고, 고딩들한테는 아니라는 거야."
"얘들이 어떻게 알고? 왜 그랬지?"
"거기에 <성적 안오르면 환불해준다> 뭐 이런 말도 있고, <성적 오르는 것을 보장한다>고도 써있었거든요. 우리 애들 말이 고등학생들은 과외나 학원 다녀서 성적이 오르고, 안 다녀서 떨어지고 하지를 않는대. 그러면서 태현씨 얘기를 하잖아. 대한대학이 괜히 대한대학이 아니라면서, 태현씨는 공부를 어떻게 하는지 그 방법을 완전 분명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래."
"하하하."
"신기하지 않아요? 태현씨가 경식이한테 뭘 어떻게 가르쳐줬는지는 몰라도, 애들이 나한테 그러니까.."
"글쎄요."
"그래서 지혜 아빠한테 전화를 해서, 이 얘기를 주욱 했죠. 그런데 아빠 말도 똑같아. 그래서 태현씨에게 맡기기로 결정을 하기는 했는데, 나는 모르니까 오늘 공부하는 동안에 계속 엄청 조마조마 했죠. 그런데 지혜가 아까 울면서 그러는데, 태현씨가 고맙기도 하고, ..."
아이린은 또 운다.
자기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어하는 엄마의 마음이고, 또 그 마음이 눈물로 흐르고 있다고 나는 생각하기로 했다.
"혜영씨가 그렇게 생각해주시니까 나야 고맙죠. 그런데 이제 그 얘기는 고만 하세요. 자꾸 울기만 하고 ..."
"미안해요. <이제 나도 내 자식에게 뭔가 도움이 되는 엄마구나> 라는 생각이 들면서 자꾸 눈물이 .."
"난 여자 우는 것 진짜 싫은데 .."
"아냐. 이렇게 시작 했으니까 할 말은 해야겠어. 그 동안 내가 우리 애들을 보면서 얼마나 가슴 졸이고 안타까워 했는줄 모르죠? 뭔가를 해주고는 싶은데, 그게 뭔지를 모르니까 너무 답답했거든요. 오늘 진짜 속이 후련하고, 막힌 것이 뻥 뚫린 기분이야."
"고마워요."
"정말?"
"네. 진심입니다."
"그럼 내 부탁 한가지만 들어줄래요?"
"무슨 ..?"
"걱정하지 말아요. 고맙다는 그 말이 진심이라면 충분히 들어줄 수 있는 거야."
"알았어요. 들어드릴테니까 말씀하세요."
"자기 .. 나한테 .."
"아휴. 지인짜 답답하네."
"나.. 자기가 나를 누나라고 부르는 소리가 듣고 싶어. 딱 한번만이라도."
"돌겠네."
"안되나? 대한대학생한테 누나 소리 듣고 싶은데 .."
"누나, 누나, 누나, 누나, 누나. 다섯 번 했어요 됐어요?"
"다섯 번 맞기는 맞는데. .. 자기의 진심이 빠져있어."
"어떻게 해야 진심이 담겨있는 건데요?"
"한번을 부르더라도 나를 누나라고 생각하면서 .."
나는 아이린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내가 누나랑 알게 된 것이나, 또 누나가 사랑하는 딸 지혜랑 같이 공부했는데, 지혜가 누나한테 좋았다고 하는 것이나... 나 엄청 기분 좋아. 누나 때문에 또 지혜 때문에."
"어머머..."
아이린은 또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열린다. 나는 티슈통을 가져왔다. 두세장을 뽑아서 아이린의 두 눈을 살짝 터치했다.
"거보세요. 누나라고 하니까 금방 울꺼면서 뭐하러 그러라고 시켜요?"
"자기야. 울더라도 듣고 싶은 걸 어떻해?"
"누나."
"응?"
"어제도 누나 소리가 듣고 싶었어?"
"응."
"그런데 어제는 왜 말 안 했어?"
"말하고 싶어 죽을 지경인데 표현을 못하겠더라."
"오늘은?"
"우리 딸 지혜를 울리고 나를 울게 한 남자인데 뭘 망설여?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말했어. 말하고 나서 내가 미쳤나 하고 생각했지. 그치만 말이 이미 나간걸 어쩌겠어? 그래서 뻔뻔해지기로 했어."
우리는 다시 건배를 했다. 아이린은 한모금 마시고 나는 긴 막대 모양의 쵸콜렛을 들고 껍질을 까서 반토막으로 잘랐다. 반조각을 아이린의 입으로 가져갔다.
아이린은 쵸콜렛을 든 내 손목을 잡았다. 아이린의 붉은 입술이 열리고, 쵸콜렛이 입술 사이로 들어가자, 아이린의 두 입술이 닫히면서 쵸콜렛을 물었다. 나는 쵸콜렛을 아이린의 입 안으로 조금씩 천천히 밀어넣었다. 아이린은 쵸콜렛을 씹으면서 입 안으로 빨아들인다.
반쪽짜리 쵸콜렛은 모두 아이린의 입안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아이린은 그래도 내 손목을 놓아주지 않는다. 내 손가락과 손바닥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면서 입을 오물거린다. 몇 번에 걸쳐서 쵸콜렛을 모두 삼켰다. 아이린은 내 손으로 자신의 한쪽 얼굴을 감싼다. 아이린의 두 눈이 사르르 감긴다. 아이린의 눈망을이 파르르 떨린다.
"어제 마시던 것처럼 화이트 와인 단맛으로 사오지 그랬어요?"
"자기가 어제 날더러 습관이라고 했잖아? 나도 자기가 마시는 와인에 습관되고 싶거든."
아이린은 눈을 뜨지 않고 내 말에 대답했다.
잠시 후에 아이린은 내 손을 볼에서 떠어 내서, 어제 택시를 타고 올 때처럼 자기 허벅지로 가져갔다. 한 손으로 내 손목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내 손등과 손바닥을 쓰다듬는다. 하얗고 긴 아이린의 손가락이 내 손을 쓰다듬는 것을 보는 나는 <저 예쁜 손으로 사랑하는 남편과 자식들을 쓰다듬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애절할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내 가슴이 아팠다. 나도 아이린의 손을 잡았다.
"하아.."
아이린은 고개를 내 반대쪽으로 돌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내 손을 잡은 아이린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나는 내 손을 아이린에게 맡겼다. 아이린의 가슴이 숨쉬는 것에 따라서 오르내리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비록 아이린은 얼굴을 내 반대쪽으로 돌리고 있지만, 아이린의 숨소리는 내 귀 가까이에서처럼 들렸다. 점점 규칙성을 잃어가는 것 같다.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아이린의 머리에서 나는 향긋한 냄새를 맡으며 한 손을 아이린에게 맡기고 있는 지금, 나라고 마음이 편할 리는 없다. 내 가슴도 두근거리고, 얼굴도 화끈거린다.
이것은 우리 둘 사이에 일어나면 안 되는 상황이다. 브레이크를 걸어야 할 사람은 나라고 생각했다.
"누나."
"......"
"와인 안 마실꺼야? 누나 기분 나빠?"
"아니야."
그제서야 아이린은 내 손을 놓고 와인 잔을 든다. 나는 치즈 조각을 나이프로 잘게 잘랐다. 아이린의 붉은 입술 사이로 와인 잔이 물리고, 붉은 액체가 조금씩 아이린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아이린의 입에서 잔이 떨어지고 나는 치즈 조각을 손에 들고 아이린의 입으로 가져갔다. 아이린은 또 내 손목을 단단히 잡았다. 굳게 닫혀있던 아이린의 입술이 열렸다. 나는 치즈 조각을 아이린의 입술 사이로 조심해서 넣었다.
아이린의 두 눈이 감기고, 열렸던 두 입술이 닫히면서 작은 치즈조각은 아이린의 입 안으로 재빨리 사라졌다. 그런데 치즈 조각을 잡고 있던 나는 집게손가락을 미처 떼어내지 못했다.
아이린은 내 집게손가락까지 같이 입술 사이로 가두었다. 아이린의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입술이 내 손가락을 물었다. 점점 힘이 들어간다. 아이린의 촉촉하고 따뜻한 혀가 입 안에 들어있는 내 손가락을 이리 저리 휘감는다. 아이린은 내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빨기 시작했다. 조금씩, 천천히, 살살.
내 손가락을 물고있는 입술에는 힘이 점점 강하게 들어가고, 빨아들이는 힘도 점점 강해진다. 나는 내 손가락에 힘을 주어 단번에 재빨리 뽑아냈다. 아이린의 열렸던 입술이 갑자기 닫히면서 짧고 강한 소리가 났다. 그것은 키스할 때 나는 소리와 비슷했다. 그래도 아이린은 내 손목을 잡은 손을 놓지 않는다.
아이린은 질끈 감고있던 두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본다.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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