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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1 23:56 1,115회 0건








38. 지혜가 나를 롤모델로?





지혜일 리가 없다. 지금 시간이 아침 9시가 넘었으므로 지혜는 이미 학교에 갔을 것이다. 경식이도 마찬가지이다. 그럼 단 한 사람 아이린밖에 없다.

나는 아이린에게 한수정이 왔다는 말을 일부러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이 사실을 내가 아이린에게 숨기려는 것이 아니라, 지혜가 말할 것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지혜가 말하지 않아서 아이린이 아직 모른다면 아이린은 침대에 들어와서 나와 섹스를 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나를 깨우기 위해서 모닝키스라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방에는 얼씬도 하지 않은 것 같다.

더구나 현관에는 지금 내 신발과 한수정의 신발이 나란히 놓여 있을 것이므로 그 여자 신발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모른다 해도 지금 내가 여자와 같이 있다는 것은 금방 알아챌 수 있고, 아이린이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만일 아이린이 알고 있다면, 어떻게 그런데도 들어올 수가 있을까? 그녀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나는 여기서 더 이상의 생각을 하기가 불가능했다. 한수정은 도둑일지도 모른다며 내게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는다. 한수정을 안고 머리를 쓰다듬고 등을 몇 번 토닥이면서 나는 거실로 나가서 아이린인지를 직접 확인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침대에서 내려가서 침실 문을 열었다. 그런데 거실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에 커피 향이 거실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 사이에 아이린이 다시 나갔을 리는 없고, 아마도 모퉁이를 돌아서 주방 쪽에 있나보다.

나는 침실 문을 닫고, 주방 쪽으로 갔다. 그런데 주방에 있는 커피메이커가 커피를 열심히 내리고 있다. 주방에도 없다. 나는 옷방으로 달렸다. 방문이 열려있다. 아이린이 막 나오고 있다.



"누나, 꼭두 새벽에 어인 일로 왕림을?"

"세탁소에 들러서 오느라고 오늘은 늘 오던 시간보다 늦게 왔는걸요?
여친이랑 같이 나오세요. 아침 먹어요."



그런데 아이린에게서 이상한 점이 발견된다. 아이린은 일부러 유난히 낮은 소리로 얘기한다. 또 꼬박꼬박 존칭을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나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고개를 옆으로 약간 돌려서 외면하고 있다.

아이린은 주방으로 갔다. 나는 한수정을 데리러 침실 쪽으로 갔다. 그런데 침실 문이 열리고 한수정은 이미 거실로 나오고 있다. 나는 한수정과 함께 주방으로 갔다. 아이린은 우리에게 등을 보이고 돌아서서 후라이판에서 계란을 막 뒤집는 중이다.




"어? 왔어요?
금방 되니까 어서 앉으세요."



식탁에는 벌써 한상 차려져 있다. 나와 한수정은 의자를 빼서 앉았다. 우리는 자리에 앉아서 바쁘게 몸을 놀리고 있는 아이린을 바라보고 있다. 한수정이 내 가슴팍에서 한수정의 머리카락을 한개 뜯어냈다.

아이린의 뒷모습도 한수정만큼이나 매끈하다. 갈색 바탕에 굵고 가는 줄무늬가 있는 남방, 그리고 물이 빠진 청바지를 입고 있는데, 잘록한 허리와 풍만한 엉덩이는 정말 완전 예술이다.

아이린은 밥 두 공기와 계란 후라이를 쟁반에 담아서 식탁으로 들고 왔다. 아이린도 자리에 앉았다. 이제 아이린은 우리의 얼굴을 똑바로 본다. 나는 아이린에게 한수정을 인사시키려고 했는데, 아이린이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어제 공항에서 서지혜 봤죠? 내가 그 지혜 엄마예요."
"안녕하세요? 한수정입니다."



한수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아니, 이렇게 까지 할 필요가 .. 어서 앉아서 식사하세요. 깜짝 놀랐어요. 하하."
"저도 아침부터 태현이 집에 웬 도둑이 든 줄 알고 깜짝 놀랐어요. .. 하하"

"어머, 그래요?
아침에 지혜가 학교에 가면서 나한테 엄청 졸라대는데요.
두 분 아침에 엄청 배고플꺼라며, 빨리 가서 아침밥을 차려드리래요.
절대로 빈속으로 외출하게 하지 말라고 당부를 했거든요."

"하아. .. 서지혜 완전 깜찍하네.."

"내가 지혜를 어떻게 당할 수가 없어서 알았다고 하기는 했는데. ..
이 시간이면 너무 이르죠?."

"아냐. 우리 잠은 깼었어.
안그래도 누나가 언제 부르나 하고 기다리는 중이었거든. 하하."

"나는 불러야 하나, 전화를 해야 하나 하고 고민을 엄청 했는데, ...
그래도 마침 선생님께서 나오시는 바람에 .."


"누나, 괜찮으니까 아무 걱정 말고 그냥 태현이라고 해요."
"맞아요. 태현이에게 선생님 하시니까 엄청 어색이거든요."


"한수정 언니 바빠서 일찍 나가야 할꺼라면서 9시 전에 하라고 했는데,
세탁소 지나오다가 그냥 올 수 없어서 들렀더니, 조금 늦었어요."

"지혜 덕에 아침도 먹고 .. 하하."
"태현이 너는 엄청 좋겠다. .. 진심 부럽다."

"지혜는 한수정 언니가 자기 롤모델이라면서 엄청 부러워하는데요?"
"예에에? 저를요?"

"어제 공항에도 말로만 듣던 한수정 언니 보고 싶다고 선생님을 엄청 졸라대서 간신히 따라나갔어요. 하하하."

"깜찍이 서지혜. .. 완전 귀요미네.
그런데 이 일을 어째?
야아아. .. 너는 미리 말을 해줬어야 선물이라도 하나 챙겨오지."


"선물은 괜찮아요.
그런데 지혜 말대로 정말 엄청 미인이시네.
공대 퀸도 하셨다면서요?
어제 밤에 지혜가 아빠랑 전화했어요.
한수정 언니가 과학고 출신에, 엄청 똑똑하고, 엄청 미인이라고 자랑을 한참 했거든요.
그랬더니 지혜 아빠가 꼭 보고 싶다고 이번 주에 회사로 두 분 같이 꼭 들르시래요."

"야아. 한수정. 너 팬 관리 본격적으로 해야겠다."
"아이. 참 ..."


"수정씨, 캐나다에 혹시 몬트리얼이라는 도시 알아요?"
"예. 알죠. 거기도 자주 가요. .. 왜요?"

"수정씨가 불어 잘한다고 들었는데, 아닌가?"

"네. 제 졸업논문 영어랑 불어로 쓰고 있어요.
불어라면 태현이가 나보다 훨씬 더 잘하는데요?"


"이번에 제일그룹이 몬트리얼에 캐나다 법인을 세운대요.
한수정씨에게 시간이 되면 뭔가 도와달라고 할 모양이던데.
돌아가기 전에 지혜 아빠한테 가서 꼭 만나보세요."

"제가.. 뭘.. 아는 것이 있어야 .."




우리는 식사를 끝내고 소파로 옮겨 앉아서 커피를 마신다. 한수정이 나에게 말했다.



"지혜가 지금 고 2라며? 한참 중요할 때인데, ..
부산에 나 혼자 갔다 올께.
태현이 너는 지혜 수업 빼먹지 말고, 같이 공부나 열심히 해."

"아니어요. 지금은 학기 초라 별 일이 없대요. 걱정하지 말고 두 분 같이 내려가요."




아이린과 한수정 사이에 어색함은 어느새 사라져버렸다. 둘 사이에 수다가 시작된다. 나는 욕실로 갔다. 내가 샤워를 끝내고 나왔을 때 두 사람은 이미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다.

나는 한수정을 욕실로 들여보내고 한수정이 하던 식탁 정리를 내가 맡았다. 그런데 아이린은 나에게 커피잔을 쥐어주며 소파로 보내고 자기가 한다. 정리를 마친 아이린도 커피잔을 들고 소파로 왔다.




"태현씨, 보면 볼수록 참 신기해."
"나? 왜?"

"여친이 예뻐도 너무 예쁘잖아.
도대체 무슨 재주를 가졌는데 저렇게 예쁜 여자를 홀리게 하는데?"

"누나도 참. .. 내가 정신줄 놓고 구미호한테 당했다면 어쩔래요?"
"뻥치시네. .. 나야 당연히 안 속지."




그런데 아이린은 여전히 내 눈길을 피한다.
아이린은 한수정과 이야기를 할 때에는 밝고 환하게 웃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나와 이야기하는 지금은 어두운 빛이 간간이 스며오는 것을 감춘다.

한수정이 욕실에서 나와서 옆에 있는 옷방으로 갔다.
아이린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한수정에게 갔다.


나는 TV를 켜고 뉴스채널을 찾았다.
그런데 별 특별한 뉴스거리도 없는 것 같다.
뉴스 대신 아이린과 한수정이 같이 있는 옷방으로 내가 가진 모든 촉이 쏠린다.


한참 후에 두 여인이 옷방에서 나온다. 아이린은 거울을, 한수정은 비닐 팩을 들고 온다. 나는 거울을 창문에 기대서 세워주었다. 두 사람은 식탁에 앉아서 화장을 시작한다. 아이린은 한수정의 화장품을 유심히 보더니 혀를 끌끌 찬다.



"어쩌면 화장품이 이 정도 밖에 안돼요?
이건 말이 안돼요."

"언니, 우리는 거기서 화장을 별로 안 해서 괜찮아요."

"수정씨, 안 그래요.
여자는 화장으로 자신을 표현한대.
이 정도로 화장품으로 수정씨를 표현한다는 것은 말이 안돼요."

"아이. 참. 그렇다고 그 동네 화장품을 함부로 사용할 수가 없어요.
제가 좀 민감한 편이라 얼굴 다 뒤집어지거든요."




한수정은 어느 새 아이린을 언니라고 부른다.
아이린이 한수정과 함께 나에게 온다.



"그럼, 난 가게로 갈테니까, 두 분 잘 다녀오세요."
"네. .. 언니, 고마워요."

"누나, 이따가 나갈 때 들를께요."
"바쁜데 들르긴 뭘 들러? 그냥 일이나 봐요."



아이린은 우리를 남겨두고 밖으로 나갔다.


한수정은 2박3일 정도로 준비한다면서 나를 옷방으로 데리고 갔다.
내 속옷, 양말, 남방과 겉옷을 달라고 해서 종이 팩에 나누어 담는다.
나는 옷을 갈아입고, 한수정은 내 백팩에 내 물건을 넣었다.



"진에 남방으로?"
"응. .. 이거면 안될까?"

"이번에 아빠가 보자고 하실텐데 .."
"그럼 슈트를 넣어가든가."

"짐이 많아지는데."




나는 한수정이 내주는 옷으로 갈아입었다. 우리는 오피스텔을 나서서 아이린의 PC 방으로 갔다.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가게는 한산하다. 아침 알바생은 정숙이인데 계단을 청소하고있었다.

우리가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아이린은 한수정을 맞아서 안으로 가며 가게 구경을 시켜준다. 나는 카운터 앞에 있는 PC에 앉아서 로그인을 했다.



"어머머. .. 그럼 언니는 지금 사장님이시네요? 하하."
"사장님은 무슨? 가게 주인이지. 겉만 번지르르해요."

"그래도 너무 부러워요."

"아이 참. .. 부러워 할 게 따로있거든요.
수정씨야 말로 진짜 엄청난 미모에, 굉장한 공부에, 빵빵한 남친에 .."

"언니. .. 남친은 정말인 것 같아요. 하하."
"내 말이. .. 지혜도 지금 완전 뻑 가있다니까? 하하."

"내가 보기에는 태현이 앞에서는 언니도 쫌 흔들흔들 아닌가요? 하하하."
"수정씨! .. 나는 할머니라서 내꺼는 콜라텍에 가서 찾아야 해요. 하하"




나는 게임을 시작하고, 두 사람은 내게서 멀어져간다.


어느새 두 게임에서 나는 졌다.
알바생 정숙이가 냉커피 세 잔을 빈 테이블로 갖다 놓고 나를 부른다.



"오빠, 이거 사장님이 드시래요."
"고마워. 내꺼는 이리로 줄래?"

"여기요."
"고마워. 너는 이번에 복학 안 하니?"

"하기는 해야 하는데, .. 고민이야."



정숙이는 카운터로 가버린다.
나는 냉커피를 마시면서 코레일을 찾아서 KTX 승차권을 예매하려고 했다.
그런데 한수정이 내 옆으로 오더니 아이린이 나를 흡연실로 부른다는 말을 전한다.
아이린은 흡연실의 유리벽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나는 내 전화기와 신용카드를 한수정에게 건네주었다.



"코레일 웹사이트니까 부산 KTX 표를 예매해."
"예매까지 할 필요 없어. 이 시간에는 그냥 가면 돼."



나는 그냥 흡연실로 갔다.



"자기가 부산하고 인연이 참 많네?"
"글쎄 .."


"지난번에 지혜랑 내가 태현씨한테 해주려다가 못해준 것이 있거든?"
"아이.. 누나! .. 뭘 또?"

"시끄럽게 하지 말고 이번에 내려갈 때 이 카드 가져가서 쓰고 와.
이건 지혜 아빠가 그렇게 하래.
할 말 있으면 지혜 아빠한테 하든가. 난 심부름만 하는 거니까."


"누나가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내가 잠시 겪어봤는데, 수정씨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마음이 참 순수하고 맑다.
몸과 마음이 아름다운 .. 정말 여자다운 여자야.
제발 수정씨 마음 아프게 하지 말아요."

"누나도 참. .. 내가 왜 수정이 마음을 아프게 해?"

"자기 지금 나이에 두 남녀가 사랑하기는 참 쉬워.
그런데 같이 살기는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거든.
수정씨가 겨우 몇 일 있는 동안 마음 편하고 행복하게 있다가 떠나도록 자기가 알아서 잘 해.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지?
자기네도 바쁠테니까, 이제 나가자."



아이린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서 한수정에게로 갔다. 나는 마치 무슨 죄라도 지은 사람 처럼 아이린의 뒤를 따라간다. 아이린은 우리를 서울역에까지 내 차로 태워다 주겠다며 내 차의 키를 달라고 했다.

아이린의 옆에는 한수정이 타고, 나는 혼자 뒤에 탔다. 둘은 어느새 엄청 친해진 것 같다. 간간이 나에게 안 그러냐고 묻는데, 나는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맞다고 말대꾸를 해주었다. 아이린은 우리를 서울역 앞에 내려주고 돌아갔다.

우리는 창구에서 KTX 승차권을 구입했다. 차 시간은 20분 정도 남아있다. 한수정은 엄마에게 우리가 지금 출발한다고 전화를 했다.

시간이 되어 우리는 승강장으로 내려가서 열차에 탔다. 가는 동안에 나는 한수정이게 지혜네 집안 사정을 내가 아는 대로 이야기해주었다.



"지혜가 크면서 정말 힘든 시간을 많이 보냈겠다.
그러다가 너를 만났고. ..
너, 정말 지혜한테 잘해라."

"나도 그러려고 마음을 비우고 노력하는 중이야."

"지혜가 나를 롤모델로 하겠다고?
그럼 혹시 내가 태현이 너를 차지한 것처럼 너를?
얘가 지금 혹시 나한테서 너를 뺏겠다는 말 아냐?"

"야아. 한수정. .. 지혜는 이제 겨우 고2야."
"아하. 그러셔? 우리 고2때 어땠지?"

"아마도 손만 잡았을껄?"
"그럼 지혜는? 지혜가 안 그럴꺼라고 네가 어떻게 장담할 수 있어?"


"아까 누나가 널보고 마음이 맑은 애라고 하더라.
맑은 마음으로 이 세상을 보세요."

"그 언니도 그래.
아니 우리 둘이 있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어떻게 그렇게 불쑥 들어와?
너네집 비밀번호는 동네 사람이 다 알고 들낙거리면 그게 무슨 비밀번호니?"

"그건 수업을 내 방에서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어.
지혜 엄마는 내 방 청소도 하고, 주방이랑 놋장 관리도 해주시거든.
또 오늘은 지혜가 엄마한테 미션을 줬대잖아?"

"미션이 아니라 미션이네 고조할아버지를 줬어도 그렇지.
나같으면 차라리 두 사람을 밖으로 불러낸다."

"그 시간에 밖에는 아직 문을 안 열었는데?"
"야아아. 24시간 식당 제법 많거든?"

"과외쌤한테 그렇게 해주는 학부형이 대한민국에 누가 또 있을까?"




한수정 생각이 전혀 틀렸다고는 말을 못하겠다.
그러고 보니까 한수정이 약간 무섭다.
열차는 부산역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




이번 이야기에서는 진도를 쫘아악 뽑아버렸습니다.

한수정은 서지혜와 아이린을 모두 만나보고 자기 나름대로 추측(?)을 합니다.
지혜는 물론 아이린도 한수정을 만나보고 마음에 들어합니다.

한수정은 김태현을 자기 부모님께 인사시키려는 야심찬 프로젝트를 실행에 옮깁니다.


다음 얘기를 기대해주세요.


- Ja"dor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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