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왜 정치를 하세요?”
“아이고 우리 딸 그게 궁금해?
“예. 우리 반에 아빠가 정치한다는 아이는 저 밖에 없거든요. 대부분 친구들은 아빠가 돈을 벌고, 엄마는 집안일을 하시거나 엄마도 회사를 나가시는데 우리 집은 엄마가 돈을 벌고 아빠는 돈 안 벌어 오시잖아요.”
“그렇지. 나도 우리 딸이나 엄마에게는 그게 참 미안하다.”
“그런 말이 아니고요. 엄마도 아빠를 이해해드려야 한다고 말씀하시는데 그냥 궁금해요.”
“딸, 지금 대통령이 착한 사람이야?”
“아뇨. 아닌 것 같아요. 나빠요”
“왜?”
“광우병 소 수입해서 국민들 걱정하게 만들었잖아요. 그리고 4대강 사업으로 지금 강을 엉망으로 만들었잖아요.”
“응. 딸 많이 알고 있네.”
“그럼 대통령은 뭘 하는 사람이야?”
“국민을 위해 봉사하고, 국민의 안전을 지켜주는 사람이요.”
“그렇지? 그런데 지금 대통령이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잖아. 아빠도 그래서 화가 난다. 그렇지만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뭔데요? 사람 목숨보다 중요한 것이 있어요?”
“응. 바로 우리 역사이지.”
“역사요?”
“너희들 배우는 국사 교과서. 그게 문제지.”
“예?”
“예전에 이명박이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되기 전에 친일문제로 말이 많았었던 것 기억하니?”
“예. 일본에서 태어났고 일본 이름도 있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다음 대통령으로 당선될 것이 유력한 사람 아버지도 옛날 일본에서는 천황이라고 하는 일본 왕에게 충성맹세를 했었던 사람이야.”
“대한민국 사람이 왜 일본 왕에게 충성맹세를 해요?”
“그때는 일본이 우리나라를 점령했었던 시기였으니까.”
“그때 애국자들은 독립운동을 했었잖아요. 유관순 할머니, 안중근의사, 윤봉길의사처럼 자기 목숨을 내놓고 나라를 찾기 위해 독립운동을 했는데 그 사람은 왜요?”
“자기가, 자기 집안이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그렇게 한 거지.”
“그렇다면 매국노잖아요.”
“응, 맞아.”
“그런 매국노가 어떻게 우리나라 대통령이 될 수가 있었어요?”
“그러게 말이다. 국민들이 속고 있는 것이라고 밖에 아빠가 할 말이 없구나.”
“그래서 아빠가 정치를 하시는 거예요?”
“그렇다고 할 수가 있지. 우리나라는 해방 후부터 이승만이란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서부터 잘못된 길을 걸어왔으니까 그것을 바꿔야 하기 때문에 아빠 같은 사람이 정치를 할 수밖에 없는 거야.”
“아빠가 그걸 바꾸실 수가 있어요?”
“아니. 당장은 불가능하겠지. 노무현대통령 기억하지?”
“예. 봉하마을에도 몇 번이나 갔었잖아요.”
“그분도 그걸 바꿔보려다가 결국 힘에 부쳐서 욕만 먹는 대통령이 되었던 거야. 그리고 또 그렇게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었던 거고.”
“대통령이 되어도 바꾸지 못해요?”
“대통령이라고 세상일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는 없으니까. 거기에다 우리나라 거의 대부분의 분야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친일에 가까운 사람들이고, 그 사람들은 그렇게 해야 자신들이 가진 돈과 지위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노무현대통령 대통령이 되었을 때 그렇게 반대했던 거였어. 그 내용을 잘 모르는 국민들은 신문이나 방송에서 끊임없이 노무현대통령이 잘못한다고, 나쁜 대통령이라고 욕을 해대니까 노무현을 모르는 사람들은 덩달아 욕을 하고.”
“그런데 노무현 할아버지 돌아가셨을 때는 사람들이 엄청 와서 슬퍼했잖아요?”
“그때는 이미 늦은 거지. 그리고 자신들이 잘못 알고 있었다고 생각한 것 보다는 그냥 전직 대통령이 죽었다는 사실 때문에 찾아온 것일 수도 있고.”
“그럼 아빠는 앞으로도 계속 정치를 하실 거예요?”
“딸은 아빠가 정치하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네.”
“저도 솔직히 아빠가 다른 아빠들처럼 집에 일찍 들어오시고, 아침에 일어났을 때 아빠가 집에 계셨으면 좋겠어요.”
“그렇지. 아빠도 그렇게 할 수가 있다면 좋겠다. 딸. 아빠가 꼭 약속을 할께.”
“어떤 약속을요?”
“아빠가 모시는 분을 대통령으로 만들고 나면, 당선이 확정되는 그날부터 어디 조용한 시골에 가서 엄마랑, 아빠, 딸 이렇게 셋이서 살께. 다른 일은 절대하지 않고.”
“정말요?”
“응. 그때가 되면 아빠가 더 이상 할 일이 없을 거니까.”
“그럼 그때가 되면 아빠는 뭐하시려고요?”
“딸하고 놀면서 책이나 읽고 지내면 되지.”
“피~ 그때는 제가 바쁜데.”
“임마. 아빠가 데이트 신청하면 딸은 무조건 데이트 신청을 받아야지.”
진평왕의 능 주변을 딸과 손을 잡고 걸으면서 참 많은 얘기를 나눴다. 아직은 중학생이지만 어릴 적부터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많이 나눠왔기에 별 무리가 없는 내용이었다. 집사람은 질투에서인지 아니면 이 진평왕 능 주변의 고즈넉한 분위기에 취해서인지 말없이 따라 걷기만 하고.
“딸하고 데이트 잘했어요?”
“다 들어놓고선 묻기는 뭘 물어?”
“샘나잖아요. 오랜만에 나와서는 마누라는 안중에도 없고 딸하고만 놀고 있으니까.”
“당신 나이가 얼마인데 딸한테 질투를 하고 그러냐. 도대체가 얼라도 아니고.”
“아무튼 오늘 당신 기분은 좋은가 보네요.”
“이렇게 가족끼리 있는데 당연히 기분이 좋을 밖에. 어디 다른데 가볼까?”
“피곤하잖아요. 이제 가서 쉬세요.”
“이정도로 피곤하긴 뭐가 피곤해. 밤샘이라도 하겠는데.”
“괜히 그러지 말고 들어가서 쉬세요. 진영이도 자야하고.”
“딸 그럴래?”
“예. 내일 또 놀러 다니면 되죠.”
“아빠. 안녕히 주무셨어요?”
“응. 딸 잘 잤어? 아빠가 완전 늦잠을 잤네.”
“예. 빨리 씻으시고 준비하세요. 체크아웃 할 시간 다 되었다고 해요.”
“응.”
서둘러 씻고 우리는 호텔을 나섰다. 늦잠 때문에 난 아침도 거른 채. 다시 경주시내로 돌아와서 대능원 주차장에서 자전거를 빌려서 박물관 쪽으로 가서 황룡사지 터를 지나 분황사로 그렇게 경주를 구경하고 다녔다. 그리고 점심을 경주에서 해결하고선 부산으로 출발.
부산에 도착해서 휴대폰을 켜보니 난리도 아니었다. 헤아리기가 힘들 정도의 수많은 문자에 연신 들려오는 톡 알림소리들. 암담한 생각이 들었다. 분명 가족과 함께 경주에 와 있다고 통화가 곤란하다고 했으면 알아서 참아야 할 것인데……. 내가 그녀의 성격을 알지 못하고 휴대폰을 켜둔 상태로 두었더라면 분명 집사람과 대판 싸움이 나도 났었을 상황이었다.
담배를 사러 간다는 핑계를 대고 집을 나왔다.
‘어디야?’
‘집’
‘도대체 왜 그러는데? 김 차장 집에 없어?’
‘시골 갔어.’
‘내가 어제 통화 힘들다고 얘기 했잖아. 그런데 왜 문자와 톡으로 그렇게 난리를 쳐?’
‘보고 싶은데 어떻게 해?’
‘만약 김 차장이 시골에 가지 않았더라도 그렇게 할 수 있어?’
“......‘
“봐. 당신은 당신 가정 지키는 것 중요하잖아. 나도 그건 마찬가지야. 당신이 그렇게 난리치는 것 집사람이 알아봐. 그럼 내 가정이 온전할 거 같아? ‘
‘.....’
‘이런 식이면 정말 곤란해. 그리고 내 가정이 깨지면 당신 가정도 깨질 수밖에 없어. 그거 몰라? 그런 상황이 되면 나도 집사람 말릴 방법이 없다는 것 뻔히 짐작하잖아.’
‘그럼 어떻게 해. 난 자기가 그 여자하고 다정하게 이야기 하고, 안고 있을 거라는 생각만 해도 미치겠는데.’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잖아. 당신도 김 차장하고 자주 놀러가고, 안고 자고 그러잖아. 이런 말까지 할 필요는 없지만 난 내 가족하고 놀러 나온 것도 거의 1년 만이야. 그런데 당신은 거의 매달 놀러 다니잖아.’
‘.....’
‘아무튼 그만하자. 자꾸 이렇게 하면 나 당신 얼굴 못 봐.’
“개새끼야 뭐라고 그랬어?”
“내가 톡으로 한 이야기 그대로야.”
“실컷 재미보고 이제 그만 만나자고?”
“자세히 생각해봐. 내가 당신보고 먼저 자자고 했었어? 그리고 그 이후에도 당신이 싫다는데 자러 가자고 우긴 적이 있었어?”
“.....”
“그리고 분명히 이야기 했었잖아. 서로 가정은 지켜야 하니까 서로의 집안일에는 관여하지 않기로 한 그 약속 잊었어?”
“그럼 어떻게 할 건데?”
“당신이 계속 이렇게 나오면 난 어쩔 수 없어. 차라리 내가 집사람에게 솔직히 고백하고 용서를 구할 밖에. 당신이 무슨 이유로 나에게 접근했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식으로 내 가정까지 깨 가면서 당신하고 관계를 유지할 마음은 전혀 없어.”
톡으로 이야기를 하다가 참지 못하고, 결국 그녀는 내게 전화를 하였고, 난 그녀의 입장은 아예 고려조차 하지 않은 채 내가 속에 품고 있었던 말을 그대로 내 뱉었다. 그냥 이대로 시간을 보낸다면 결국 그녀와 내 가정 둘 모두가 파탄날 것이 뻔 했기에. 내 말을 들은 그녀는 전화기에 대고 입에 담지 못할 쌍욕과 저주의 말들을 내 뱉으면서 광분하더니 스스로 지쳤는지 결국 전화를 끊고 말았다.
“휴~”하는 한숨 그것 이외에 내가 할 무엇이 없었다. 다시 담배를 꺼내서 한 개비를 입에 물고 깊게 담배연기를 빨아들였다. 막힌 속이 뚫리는 듯 그런 느낌. 이래서 내가 담배를 끊지 못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참 더럽게도 엮인 인연이다 싶었다. 아예 처음에 끝을 냈었어야 하는 인연이었는데.
아침에 사무실에 출근해서 책상을 정리하고 있으려니 그녀가 나타난다.
“선 여사님 어서 오세요.”
“선 여사님이라니 웬 일이셔?”
“오늘 당직자들 출근 하시는 날”
“예. 갑자기 왜?”
“월요일이고 오랜만에 얼굴이라도 보려고요.”
“그럼 나 집에 도로갈까요?”
“괜찮아요. 어차피 다들 아는 얼굴인데 뭐 어때요?”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낸다.
“오랜만입니다.”
“예. 그 동안 별 일 없었죠?”
“별일 있으려면 죽는 일 밖에 없는데 안 죽고 살아있으니 별일 없었던 거겠죠.”
“아이고 무슨 말씀을 그리 살벌하게.”
“아무튼 선 여사께서는 어떤 일로 아침부터.”
“예. 집에 있으니 별 할 일도 없고 해서 나와 봤더니 오늘 회의 하신다고 해서 얼굴이나 뵙고 가려고요.”
“시간 날 때 자주 오세요. 자주 오셔야 서로 친해지죠.”
“예. 그렇게 하려고요.”
“언니가 아침부터 웬일이세요?”
“응. 출근했어. 그냥 놀러온 거야.”
“아. 그런데 오늘 우리 회의하는 날인데.”
“응 그러지 않아도 들었어. 불편하면 갈까?”
“아뇨. 무슨 말씀을 요. 그냥 잠시 기다리시다가 점심 드시고 가세요.”
엉뚱하게 여성위원장님이 까칠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자 사무국장님은 그 분위기를 수습하느라 그녀에게 점심을 먹고 가라고 하면서 손까지 휘저어 대고. 여성위원장님의 웃는 얼굴 뒤에 무언가가 숨겨져 있는 느낌이 들었다. 저 양반이 저런 사람은 아니었었는데.
아무튼 당직자들이 모두 모이고 우리는 한자리에 앉아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말이 회의였지 특별한 의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당장 해야 할 일들도 없었기에 그냥 편안하게 얼굴 한번 보는 그런 모임이었으니.
이사람 저사람 중구난방 식으로 떠들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흘러 점심시간이다.
“우리 오랜만에 모였으니 같이 점심이나 먹으러 갑시다. 오늘은 내가 사지.”
“와 국장님께서 웬 일로요?”
“마 됐습니다. 그냥 사무실 경비로 하면 되니 형님은 담에 사소.”
“아뇨. 오늘은 제가 점심 모실게요.”
“선 여사께서요?”
“예. 옆에 있는 횟집 예약 해두었으니 그리로 가세요.”
“와. 오늘 목구멍에 때 벗기겠습니다. 선거 때도 아닌데 횟집이라니.”
아무튼 우리 모두는 사무실 옆의 횟집으로 가서 즐거운 마음으로 점심을 먹었다.
“어. 고 팀장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오늘 저녁 퇴근하고 얼굴이나 좀 볼까?”
“그러지. 어디서 볼까?”
“서면에서 봐. 저녁이나 같이 하지.”
“그러지. 그럼 영광도서에서 기다릴게.”
점심을 먹고 있는데 고 팀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무척이나 오랜만에 받는 전화이다. 점심을 끝내고 모두는 사무실로 돌아와서 같이 커피를 앞에 두고 한동안 보지 못했던 시간들 동안 일어났던 이야기들을 나누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이어갔다.
“박 비서 잠깐 잠시 이야기 좀 합시다.”
“예. 형님 흡연실로 가시죠.”
“문디. 그 담배 좀 안 끊을래?”
“무슨 특별히 하실 말씀이라도?”
“슬슬 당원모집도 해야 안 되겠나?”
“저는 솔직히 회의적입니다. 그 사람들 명단 모아봤자 실질적으로 활동할 사람들도 아니고 선거 때 꼭 우리 편이 될 것도 아닌 거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도 내년 선거 준비하려면 지금부터 조금씩이라도 모아놓아야 할건데.”
“하긴 그렇긴 하지만, 그것보다는 후보가 걱정입니다. 구의원 후보들이야 어찌되었던 확보가 가능하겠지만 구청장이나 시의원 후보로 나서려고 할 사람이 있을지?”
“나설 놈이야 많겠지. 함량미달이어서 그렇지.”
“그게 문제지요. 필요한 사람은 당선 가능성이 아예 안보이니 포기하고 나오겠다는 인간은 우리가 봐도 함량미달이니 내세울 수가 없으니 말입니다. 어디 좀 괜찮은 분 주위에 없습니까?”
“계속 찾아봐야지. 김 사장 그 양반이라도 나서준다면 좋겠는데 매번 말조차 꺼내지 못하게 하니.”
“아무튼 형님이나 나나 구청장 후보를 찾는데 신경을 좀 써야 하겠습니다.”
“이제 겨울도 끝나 가는데 다시 예전처럼 출근하는 것은 어떻노?”
“형님이야 연세가 있으시니 몰라도 다른 분은 뭐라도 하시게 놔두죠. 사무실에 출근해봐야 월급을 드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알았네. 그 문제는 내가 당직자들하고 이야기를 해보지.”
“아무튼 구청장과 시의원 문제는 형님도 잘 찾아보소. 당 정체성에도 맞고 적당히 꾸밀 수 있는 커리어도 있는 분이 있다면 가서 빌어서라도 모시고 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 한번 찾아보자. 그리고 비례대표는 어떻게 할래?”
“비례대표야 당규에 정해진 대로 당원들이 선출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여성위원장이 일은 부지런하게 잘 하지만 좀 싹싹하게 어울리고 그러질 못해서 걱정이다.”
“그건 자기가 알아서 해야 할 일이니 여성위원장이 알아듣게 이야기를 좀 해주세요.”
사무국장님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이 제법 흘렀다. 사무실로 나오니 여성위원장과 선 여사와의 분위기가 좀 ‘싸~’하다. 청년위원장은 중간에서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난 모른 척 내 자리에 앉아 서류를 검토하는 척하면서 그들을 외면했다. 무슨 일인지도 몰랐고, 점심을 먹기 전 둘의 분위기도 그리 좋지 않았기에 괜히 중간에 끼어들었다가 날벼락을 맞을 이유는 없지 않은가.
선 여사와 여성위원장 사이의 냉랭한 분위기는 계속 되었고 난 괜히 불똥이 내게 튈까봐 고 팀장과의 저년약속을 핑계로 일찌감치 사무실을 나와 버렸다. 영광도서로 바로 가기엔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 난 송정으로 향했다. 아직 해가 남아있는 이 시간에 송정을 가기는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항상 가던 자리인 46번 자리가 아닌 구덕포로 방향을 틀어 맨 구석까지 차를 몰았다. 그곳에 차를 세우고 난 계단을 내려가 바위 위에서서 멀리서 몰려드는 파도를 지켜보면서 지난 시간들의 기억들을 되새기면서 잊혀져가고 있는 한 여인을 추억했다. 지은이. 만약 그녀가 있었더라면 오늘 내 행동을 뭐라고 얘기했을까? 아니 만약 지은이가 있었더라면 청아 그녀와 엮일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지은이가 청라 그녀가 아예 나에게 접근할 틈을 주지 않았을 것이었으니까.
민지를 보러가지 않은 것도 제법 오래 되었다. 언제 시간을 만들어서라도 민지와 윤희를 보러가긴 해야겠는데 지은이가 없는 지금은 그게 편하질 않았다. 민지의 앞에서 윤희와 다정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편하지 않은 일이었고, 또 다른 훼방꾼인 혜진이의 존재 또한 내게 부담으로 다가왔으니.
“고 팀장 일찍 도착했네?”
“응. 나도 방금 도착했어. 어디로 가서 밥 먹을까?”
“당신이 산다면 XX헌으로 가고, 내가 사야할 입장이면 그냥 순두부나 먹으러 가지.”
“문디. 가자. 내가 산다.”
고 팀장은 입으로는 투덜거리면서도 웃는 얼굴을 하고 XX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다.
“그런데 웬 일이야?”
“당신 요즘 아예 집사람에게 관심을 딱 끊었다면서?”
“문디.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넘 마누라에게 신경을 왜 써.”
“사람이 그러는 거 아니다. 당신 끊고 맺는 거, 독할 정도로 잘 하는 건 알지만 너무 그렇게 하는 것도 좋은 것은 아니야.”
“그냥 당신들 잘 살면 되는 일이다.”
“박 형. 내 하나만 부탁할게.”
“무슨?”
“그냥 집사람하고 친구처럼 지내줘. 어차피 그 정도는 예전에도 했었잖아.”
“당신 선영씨 성격 알잖아. 자칫하면 감정 컨트롤이 안 돼. 그 양반 너무 격정적인 성향이 많아서.”
“별 걱정을 다하고 있네. 어차피 예전에는 당신 마누라이기도 했잖아.”
“그렇게 이야기 하지 마. 변명 같이 들리겠지만 그때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고 지금은 다르잖아.”
“진짜 박 형 소심하네. 내 탁 깨놓고 얘기 할게. 당신 덕분에 내 가정 지켰어. 그 점은 앞으로도 계속 당신에게 고마워 할 거야. 그런데 갑자기 당신이 딱 그렇게 정을 끊다 시피 하니까 집사람이 중심을 못 잡아. 그래서 내가 도움을 요청하는 거야. 만약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내가 그 일에 갈등을 느낀다면 내가 어떻게 웃으며 당신을 볼 수 있겠어? 제발 마음 좀 편하게 먹고 살자.”
“솔직히 난 당신이 이해가 안 된다. 나도 평범한 인간이라 할 수 없겠지만 당신은 그 범주를 벗어난 인간 같아.”
“그냥 현실적인 거지. 다 잃느냐? 아니면 그나마 남은 것이라도 제대로 지키느냐? 그 문제일 뿐이야. 다 잃게 되면 복구할 방법조차 생기지 않겠지만. 내게 남은 것이라도 지킬 힘이 있다면 언젠가 잃었던 것을 다시 찾을 방법도 생기는 법이잖아.”
“아무튼 모르겠다. 일단 내가 선영씨 한번 만나기는 해볼게.”
“그래. 그러면 간단한 일을 뭐 그렇게 골 아프게 고민하기는.”
어쩌면 고 팀장의 말이 맞을 수도 있었다. 그냥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그녀와의 관계도 정리하면 되었을 일을 너무 딱 끊어 버린 감이 없지 않았다. 그냥 이전 농담을 하면서 편안하게 지냈던 친구처럼의 관계. 고 팀장과 저녁시간이 조금은 편안해 졌다. 하긴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언제는 편하지 않았었던가? 그녀와 육체적인 인연을 맺고 난 이후 고 팀장을 속인다고 생각했던 그 며칠간을 제외하고는 이 친구는 항상 내게 편안한 친구였었으니…….
‘자기 어디야?’
‘서면에서 손님과 저녁 먹고 있는데.’
‘저녁 먹고 시간 좀 내.’
‘오늘 많이 늦을 거야.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라서.’
‘자기 정말 그럴 거야? 나 미치는 거 보고 싶어? “
‘내가 뭘 어쨌는데 그러냐. 적당히 좀 해.’
‘주말에는 식구들하고 놀러간다고 가고, 오늘은 친구 만나고.’
‘그만해라. 나 지금 화난다.’
‘그럼 난 언제 만날 건데?’
‘내일 사무실서 보자.’
‘오늘 만나.’
‘시간 안 된다고 했잖아.’
‘나쁜 놈.’
‘됐다. 나간다.’
갑자기 짜증이 확 밀려온다. 무슨 여자가 이렇게도 막무가내인지.
“왜 집사람이야?”
“아니. 좀 머리 아픈 인간이 있어서.”
“어떻게 당신은 항상 주위에 머리 아픈 인간들만 있냐?”
“그러게. 이것도 내 팔자인가 보지.”
“우리 시원하게 노래나 부르러 갈까?”
“아이고 나 노래 잘못 하는 거 뻔히 알면서 노래는 무신.”
“그냥 신나게 부르면 되지 뭘 그래? 당신과 나 사이에 부끄러울 게 뭐 있냐?”
결국 고 팀장에게 끌려가다시피 해서 노래방으로 향했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노래주점 아닌 노래주점. 하긴 요즘 노래방에서 술 팔지 않고, 도우미 아가씨가 없는 노래방이 오히려 찾기 힘든 세상이니 노래방이나 노래주점이나 그게 그거인 셈이다. 차라리 이럴 줄 알았더라면 남천동이나 가자고 했을 걸 하는 후회가 생긴다. 결국 맥주가 들어오고, 잠시 시간이 흐르자 스스로 미시라 자랑하는 아줌마 둘이 들어오고, 여하튼 말은 잘 만들어 내는 세상이다. 그냥 몸 팔기 위해 들어온 유부녀 아니면 이혼녀 일 뿐인 것을. 사실 여자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난 돈으로 거래하는 여자들에게는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그 덕분에 이런 자리에는 별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나에게 술을 먹이려 노력도 하고, 손장난을 하면서 나를 분위기에 끌어들이려 하던 내 파트너는 결국 단념을 하고 고 팀장의 옆으로 이사를 갔다. 덕분에 고 팀장은 양쪽에 매달린 여자들을 감당하느라 연신 웃음을 흘리면서 그네들이 주는 술잔을 넘기기에 바빴다.
술자리를 파하고 팀장을 양산에 태워다 주고 집으로 돌아왔다. 벌써 새벽 1시다. 혹시나 해서 휴대폰을 켜 보았더니 역시 톡과 문자가 홍수를 이루고 있었다. 그것도 쌍욕이 가득한 그것으로……. 참 더럽게도 물렸다.
사무실에 출근하니 그녀가 먼저 와 있었다. 난 사무실에 가방을 내려놓고 그녀를 태우고 송정으로 향했다.
“도대체 당신 왜 그러는데?”
“자기가 자꾸 화나게 하잖아.”
“내가 당신 남편이야? 당신도 당신 남편과 어디 가족여행을 갔을 때 내가 그렇게 하면 마음 편하겠어? 만약 당신 남편이 내가 보낸 문자를 보고, 아니면 내가 통화하면서 당신에게 화내는 소리를 듣게 되면 당신 남편이 가만히 있겠어?”
“......”
“나 당신 소유물 아니야. 내가 분명 책임질 행동은 했지만 이렇게 까지 한다면 난 당신 더 이상 만나지 못해. 당신이 스스로 당신 남편에게 고백해서 간통으로 피소가 된다고 해도 난 차라리 그것을 택할 거야.”
“......”
“당신 이혼할 자신 있어? 만약 자신이 있다고 해도, 난 이혼할 생각도 없고 당신하고 살 생각은 전혀 없어.”
“그럼 나를 왜 안았는데?”
“내가 하자고 했었어? 기억해봐. 내가 당신보고 모텔 가자고 한 것이었는지?”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당신이 적당하게만 하면 나도 이렇게 까지 말하질 않아. 도대체 당신 왜 그러는지 이해가 안 돼. 버젓이 남편이 있고 딸까지 있는 여자가, 그것도 가정을 깰 자신도 없으면서 왜 내 생활을 엉망으로 만들려고 해?”
“......”
“처음에 약속했었잖아. 서로 가정은 지키면서 만나자고. 그것도 내가 한 말이 아니라 당신 입으로 먼저 말했던 거야.”
“그럼 어떻게 할 건데?”
“지금처럼 이면 난 더 이상 당신 못 만나. 그냥 여기서 끝내자.”
“자기야. 내가 잘못했어. 앞으로는 그러지 않을게.”
“당신 분명히 약속할 수 있어?”
“응. 약속할게.”
“절대 내가 집에 있을 때 함부로 전화하거나 문자 그럴게 보내지 마. 그리고 내 집사람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지 말고. 내가 당신 남편에 대해서 그렇게 함부로 말하면 당신도 자존심 상할 것처럼 나도 내 집사람 함부로 대하는 것 싫어!”
“알았어.”
“그냥 우리가 같이 있을 때는 몰라도 떨어져 있을 때는 그냥 없는 사람 취급해. 내가 당신에게 나를 만나는 동안 다른 남자를 만나는 것만 하지 말라고 하고 다른 사생활에 대해서 관여하지 않듯이 당신도 그렇게 했으면 좋겠어.”
“그럼 자기가 바쁘다고 하면 우린 언제 만나?”
“꼭 만나야 하는 것이라면 차라리 약속을 정해. 며칠에 한번 이런 식으로. 당신 만날 때는 내가 당신에게 집중할 테니까.”
“그럼 일주일에 두 번씩은 만나줘.”
“무슨 요일?”
“월요일 하고 목요일.”
“알았어. 그렇게 하자.”
결국 그렇게 타협을 하고, 조금은 편해진 마음으로 커피를 마시고 송정에서 나와 그녀를 아파트에 내려주고 난 사무실로 돌아왔다.
“아빠.”
“응. 민영이구나. 잘 지내고 있어?”
“예. 아빠 한번 오시라니까 왜 안 오세요? 그이도 잔뜩 기다리고 있는데.”
“임마. 난 일본말 하나도 할 줄 몰라. 말도 모르면서 가봐야 뭐하냐. 그렇다고 내가 거기 가서 할 일도 없고.”
“그냥 아빠 오셔서 며칠 구경이나 하시다가 가면 되잖아요. 종규 얼굴도 못 보셨잖아요.”
“응. 그건 그러네. 종규 많이 컸지?”
“예. 그놈 사진으로 보니 또랑또랑하니 잘 생겼더라.”
“정말 언제 한번 오세요. 저도 아빠 보고 싶어요.”
“아니. 난 정말 외국 나가는 거 싫다. 너희들 조만간 나올 거잖아?”
“예. 2월에 나가긴 해야 해요.”
“그럼 그때 보면 되지. 차 서방 일은 잘 되고?”
“국내에 있을 때 보다 훨씬 좋은 것 같던데요. 아주 신나 해요.”
“그렇다면 잘된 일이지. 차 서방에게 안부나 전하고 2월에 보자고 해라.”
“피~ 난 아빠 빨리 보고 싶은데.”
“임마. 전화 요금 많이 나온다. 빨리 끊어.”
“아빠. 사랑해요.”
“임마.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전화 빨리 끊어.”
“아빠. 또 그러시는 거 보니 엄마 생각나시나 보다.”
“까분다. 나 싫다고 먼저 간 사람을 내가 왜 생각하냐”
“아무튼 아빠 밥 꼬박 꼬박 챙겨 드시고 건강하게 지내세요.”
“그래 알았다. 종규 잘 키워라.”
“예. 아빠 사랑해요.”
민영이 전화를 받고나니 예전의 기억 때문에 눈물이 흐른다. 살점이 떨어져 나간 상태에서도 웃는 모습의 지은이의 그 얼굴. 지은이와의 시간들이 하나하나 내 가슴을 후비면서 지나가고 있었다.
“아이고 우리 딸 그게 궁금해?
“예. 우리 반에 아빠가 정치한다는 아이는 저 밖에 없거든요. 대부분 친구들은 아빠가 돈을 벌고, 엄마는 집안일을 하시거나 엄마도 회사를 나가시는데 우리 집은 엄마가 돈을 벌고 아빠는 돈 안 벌어 오시잖아요.”
“그렇지. 나도 우리 딸이나 엄마에게는 그게 참 미안하다.”
“그런 말이 아니고요. 엄마도 아빠를 이해해드려야 한다고 말씀하시는데 그냥 궁금해요.”
“딸, 지금 대통령이 착한 사람이야?”
“아뇨. 아닌 것 같아요. 나빠요”
“왜?”
“광우병 소 수입해서 국민들 걱정하게 만들었잖아요. 그리고 4대강 사업으로 지금 강을 엉망으로 만들었잖아요.”
“응. 딸 많이 알고 있네.”
“그럼 대통령은 뭘 하는 사람이야?”
“국민을 위해 봉사하고, 국민의 안전을 지켜주는 사람이요.”
“그렇지? 그런데 지금 대통령이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잖아. 아빠도 그래서 화가 난다. 그렇지만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뭔데요? 사람 목숨보다 중요한 것이 있어요?”
“응. 바로 우리 역사이지.”
“역사요?”
“너희들 배우는 국사 교과서. 그게 문제지.”
“예?”
“예전에 이명박이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되기 전에 친일문제로 말이 많았었던 것 기억하니?”
“예. 일본에서 태어났고 일본 이름도 있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다음 대통령으로 당선될 것이 유력한 사람 아버지도 옛날 일본에서는 천황이라고 하는 일본 왕에게 충성맹세를 했었던 사람이야.”
“대한민국 사람이 왜 일본 왕에게 충성맹세를 해요?”
“그때는 일본이 우리나라를 점령했었던 시기였으니까.”
“그때 애국자들은 독립운동을 했었잖아요. 유관순 할머니, 안중근의사, 윤봉길의사처럼 자기 목숨을 내놓고 나라를 찾기 위해 독립운동을 했는데 그 사람은 왜요?”
“자기가, 자기 집안이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그렇게 한 거지.”
“그렇다면 매국노잖아요.”
“응, 맞아.”
“그런 매국노가 어떻게 우리나라 대통령이 될 수가 있었어요?”
“그러게 말이다. 국민들이 속고 있는 것이라고 밖에 아빠가 할 말이 없구나.”
“그래서 아빠가 정치를 하시는 거예요?”
“그렇다고 할 수가 있지. 우리나라는 해방 후부터 이승만이란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서부터 잘못된 길을 걸어왔으니까 그것을 바꿔야 하기 때문에 아빠 같은 사람이 정치를 할 수밖에 없는 거야.”
“아빠가 그걸 바꾸실 수가 있어요?”
“아니. 당장은 불가능하겠지. 노무현대통령 기억하지?”
“예. 봉하마을에도 몇 번이나 갔었잖아요.”
“그분도 그걸 바꿔보려다가 결국 힘에 부쳐서 욕만 먹는 대통령이 되었던 거야. 그리고 또 그렇게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었던 거고.”
“대통령이 되어도 바꾸지 못해요?”
“대통령이라고 세상일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는 없으니까. 거기에다 우리나라 거의 대부분의 분야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친일에 가까운 사람들이고, 그 사람들은 그렇게 해야 자신들이 가진 돈과 지위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노무현대통령 대통령이 되었을 때 그렇게 반대했던 거였어. 그 내용을 잘 모르는 국민들은 신문이나 방송에서 끊임없이 노무현대통령이 잘못한다고, 나쁜 대통령이라고 욕을 해대니까 노무현을 모르는 사람들은 덩달아 욕을 하고.”
“그런데 노무현 할아버지 돌아가셨을 때는 사람들이 엄청 와서 슬퍼했잖아요?”
“그때는 이미 늦은 거지. 그리고 자신들이 잘못 알고 있었다고 생각한 것 보다는 그냥 전직 대통령이 죽었다는 사실 때문에 찾아온 것일 수도 있고.”
“그럼 아빠는 앞으로도 계속 정치를 하실 거예요?”
“딸은 아빠가 정치하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네.”
“저도 솔직히 아빠가 다른 아빠들처럼 집에 일찍 들어오시고, 아침에 일어났을 때 아빠가 집에 계셨으면 좋겠어요.”
“그렇지. 아빠도 그렇게 할 수가 있다면 좋겠다. 딸. 아빠가 꼭 약속을 할께.”
“어떤 약속을요?”
“아빠가 모시는 분을 대통령으로 만들고 나면, 당선이 확정되는 그날부터 어디 조용한 시골에 가서 엄마랑, 아빠, 딸 이렇게 셋이서 살께. 다른 일은 절대하지 않고.”
“정말요?”
“응. 그때가 되면 아빠가 더 이상 할 일이 없을 거니까.”
“그럼 그때가 되면 아빠는 뭐하시려고요?”
“딸하고 놀면서 책이나 읽고 지내면 되지.”
“피~ 그때는 제가 바쁜데.”
“임마. 아빠가 데이트 신청하면 딸은 무조건 데이트 신청을 받아야지.”
진평왕의 능 주변을 딸과 손을 잡고 걸으면서 참 많은 얘기를 나눴다. 아직은 중학생이지만 어릴 적부터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많이 나눠왔기에 별 무리가 없는 내용이었다. 집사람은 질투에서인지 아니면 이 진평왕 능 주변의 고즈넉한 분위기에 취해서인지 말없이 따라 걷기만 하고.
“딸하고 데이트 잘했어요?”
“다 들어놓고선 묻기는 뭘 물어?”
“샘나잖아요. 오랜만에 나와서는 마누라는 안중에도 없고 딸하고만 놀고 있으니까.”
“당신 나이가 얼마인데 딸한테 질투를 하고 그러냐. 도대체가 얼라도 아니고.”
“아무튼 오늘 당신 기분은 좋은가 보네요.”
“이렇게 가족끼리 있는데 당연히 기분이 좋을 밖에. 어디 다른데 가볼까?”
“피곤하잖아요. 이제 가서 쉬세요.”
“이정도로 피곤하긴 뭐가 피곤해. 밤샘이라도 하겠는데.”
“괜히 그러지 말고 들어가서 쉬세요. 진영이도 자야하고.”
“딸 그럴래?”
“예. 내일 또 놀러 다니면 되죠.”
“아빠. 안녕히 주무셨어요?”
“응. 딸 잘 잤어? 아빠가 완전 늦잠을 잤네.”
“예. 빨리 씻으시고 준비하세요. 체크아웃 할 시간 다 되었다고 해요.”
“응.”
서둘러 씻고 우리는 호텔을 나섰다. 늦잠 때문에 난 아침도 거른 채. 다시 경주시내로 돌아와서 대능원 주차장에서 자전거를 빌려서 박물관 쪽으로 가서 황룡사지 터를 지나 분황사로 그렇게 경주를 구경하고 다녔다. 그리고 점심을 경주에서 해결하고선 부산으로 출발.
부산에 도착해서 휴대폰을 켜보니 난리도 아니었다. 헤아리기가 힘들 정도의 수많은 문자에 연신 들려오는 톡 알림소리들. 암담한 생각이 들었다. 분명 가족과 함께 경주에 와 있다고 통화가 곤란하다고 했으면 알아서 참아야 할 것인데……. 내가 그녀의 성격을 알지 못하고 휴대폰을 켜둔 상태로 두었더라면 분명 집사람과 대판 싸움이 나도 났었을 상황이었다.
담배를 사러 간다는 핑계를 대고 집을 나왔다.
‘어디야?’
‘집’
‘도대체 왜 그러는데? 김 차장 집에 없어?’
‘시골 갔어.’
‘내가 어제 통화 힘들다고 얘기 했잖아. 그런데 왜 문자와 톡으로 그렇게 난리를 쳐?’
‘보고 싶은데 어떻게 해?’
‘만약 김 차장이 시골에 가지 않았더라도 그렇게 할 수 있어?’
“......‘
“봐. 당신은 당신 가정 지키는 것 중요하잖아. 나도 그건 마찬가지야. 당신이 그렇게 난리치는 것 집사람이 알아봐. 그럼 내 가정이 온전할 거 같아? ‘
‘.....’
‘이런 식이면 정말 곤란해. 그리고 내 가정이 깨지면 당신 가정도 깨질 수밖에 없어. 그거 몰라? 그런 상황이 되면 나도 집사람 말릴 방법이 없다는 것 뻔히 짐작하잖아.’
‘그럼 어떻게 해. 난 자기가 그 여자하고 다정하게 이야기 하고, 안고 있을 거라는 생각만 해도 미치겠는데.’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잖아. 당신도 김 차장하고 자주 놀러가고, 안고 자고 그러잖아. 이런 말까지 할 필요는 없지만 난 내 가족하고 놀러 나온 것도 거의 1년 만이야. 그런데 당신은 거의 매달 놀러 다니잖아.’
‘.....’
‘아무튼 그만하자. 자꾸 이렇게 하면 나 당신 얼굴 못 봐.’
“개새끼야 뭐라고 그랬어?”
“내가 톡으로 한 이야기 그대로야.”
“실컷 재미보고 이제 그만 만나자고?”
“자세히 생각해봐. 내가 당신보고 먼저 자자고 했었어? 그리고 그 이후에도 당신이 싫다는데 자러 가자고 우긴 적이 있었어?”
“.....”
“그리고 분명히 이야기 했었잖아. 서로 가정은 지켜야 하니까 서로의 집안일에는 관여하지 않기로 한 그 약속 잊었어?”
“그럼 어떻게 할 건데?”
“당신이 계속 이렇게 나오면 난 어쩔 수 없어. 차라리 내가 집사람에게 솔직히 고백하고 용서를 구할 밖에. 당신이 무슨 이유로 나에게 접근했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식으로 내 가정까지 깨 가면서 당신하고 관계를 유지할 마음은 전혀 없어.”
톡으로 이야기를 하다가 참지 못하고, 결국 그녀는 내게 전화를 하였고, 난 그녀의 입장은 아예 고려조차 하지 않은 채 내가 속에 품고 있었던 말을 그대로 내 뱉었다. 그냥 이대로 시간을 보낸다면 결국 그녀와 내 가정 둘 모두가 파탄날 것이 뻔 했기에. 내 말을 들은 그녀는 전화기에 대고 입에 담지 못할 쌍욕과 저주의 말들을 내 뱉으면서 광분하더니 스스로 지쳤는지 결국 전화를 끊고 말았다.
“휴~”하는 한숨 그것 이외에 내가 할 무엇이 없었다. 다시 담배를 꺼내서 한 개비를 입에 물고 깊게 담배연기를 빨아들였다. 막힌 속이 뚫리는 듯 그런 느낌. 이래서 내가 담배를 끊지 못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참 더럽게도 엮인 인연이다 싶었다. 아예 처음에 끝을 냈었어야 하는 인연이었는데.
아침에 사무실에 출근해서 책상을 정리하고 있으려니 그녀가 나타난다.
“선 여사님 어서 오세요.”
“선 여사님이라니 웬 일이셔?”
“오늘 당직자들 출근 하시는 날”
“예. 갑자기 왜?”
“월요일이고 오랜만에 얼굴이라도 보려고요.”
“그럼 나 집에 도로갈까요?”
“괜찮아요. 어차피 다들 아는 얼굴인데 뭐 어때요?”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낸다.
“오랜만입니다.”
“예. 그 동안 별 일 없었죠?”
“별일 있으려면 죽는 일 밖에 없는데 안 죽고 살아있으니 별일 없었던 거겠죠.”
“아이고 무슨 말씀을 그리 살벌하게.”
“아무튼 선 여사께서는 어떤 일로 아침부터.”
“예. 집에 있으니 별 할 일도 없고 해서 나와 봤더니 오늘 회의 하신다고 해서 얼굴이나 뵙고 가려고요.”
“시간 날 때 자주 오세요. 자주 오셔야 서로 친해지죠.”
“예. 그렇게 하려고요.”
“언니가 아침부터 웬일이세요?”
“응. 출근했어. 그냥 놀러온 거야.”
“아. 그런데 오늘 우리 회의하는 날인데.”
“응 그러지 않아도 들었어. 불편하면 갈까?”
“아뇨. 무슨 말씀을 요. 그냥 잠시 기다리시다가 점심 드시고 가세요.”
엉뚱하게 여성위원장님이 까칠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자 사무국장님은 그 분위기를 수습하느라 그녀에게 점심을 먹고 가라고 하면서 손까지 휘저어 대고. 여성위원장님의 웃는 얼굴 뒤에 무언가가 숨겨져 있는 느낌이 들었다. 저 양반이 저런 사람은 아니었었는데.
아무튼 당직자들이 모두 모이고 우리는 한자리에 앉아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말이 회의였지 특별한 의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당장 해야 할 일들도 없었기에 그냥 편안하게 얼굴 한번 보는 그런 모임이었으니.
이사람 저사람 중구난방 식으로 떠들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흘러 점심시간이다.
“우리 오랜만에 모였으니 같이 점심이나 먹으러 갑시다. 오늘은 내가 사지.”
“와 국장님께서 웬 일로요?”
“마 됐습니다. 그냥 사무실 경비로 하면 되니 형님은 담에 사소.”
“아뇨. 오늘은 제가 점심 모실게요.”
“선 여사께서요?”
“예. 옆에 있는 횟집 예약 해두었으니 그리로 가세요.”
“와. 오늘 목구멍에 때 벗기겠습니다. 선거 때도 아닌데 횟집이라니.”
아무튼 우리 모두는 사무실 옆의 횟집으로 가서 즐거운 마음으로 점심을 먹었다.
“어. 고 팀장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오늘 저녁 퇴근하고 얼굴이나 좀 볼까?”
“그러지. 어디서 볼까?”
“서면에서 봐. 저녁이나 같이 하지.”
“그러지. 그럼 영광도서에서 기다릴게.”
점심을 먹고 있는데 고 팀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무척이나 오랜만에 받는 전화이다. 점심을 끝내고 모두는 사무실로 돌아와서 같이 커피를 앞에 두고 한동안 보지 못했던 시간들 동안 일어났던 이야기들을 나누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이어갔다.
“박 비서 잠깐 잠시 이야기 좀 합시다.”
“예. 형님 흡연실로 가시죠.”
“문디. 그 담배 좀 안 끊을래?”
“무슨 특별히 하실 말씀이라도?”
“슬슬 당원모집도 해야 안 되겠나?”
“저는 솔직히 회의적입니다. 그 사람들 명단 모아봤자 실질적으로 활동할 사람들도 아니고 선거 때 꼭 우리 편이 될 것도 아닌 거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도 내년 선거 준비하려면 지금부터 조금씩이라도 모아놓아야 할건데.”
“하긴 그렇긴 하지만, 그것보다는 후보가 걱정입니다. 구의원 후보들이야 어찌되었던 확보가 가능하겠지만 구청장이나 시의원 후보로 나서려고 할 사람이 있을지?”
“나설 놈이야 많겠지. 함량미달이어서 그렇지.”
“그게 문제지요. 필요한 사람은 당선 가능성이 아예 안보이니 포기하고 나오겠다는 인간은 우리가 봐도 함량미달이니 내세울 수가 없으니 말입니다. 어디 좀 괜찮은 분 주위에 없습니까?”
“계속 찾아봐야지. 김 사장 그 양반이라도 나서준다면 좋겠는데 매번 말조차 꺼내지 못하게 하니.”
“아무튼 형님이나 나나 구청장 후보를 찾는데 신경을 좀 써야 하겠습니다.”
“이제 겨울도 끝나 가는데 다시 예전처럼 출근하는 것은 어떻노?”
“형님이야 연세가 있으시니 몰라도 다른 분은 뭐라도 하시게 놔두죠. 사무실에 출근해봐야 월급을 드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알았네. 그 문제는 내가 당직자들하고 이야기를 해보지.”
“아무튼 구청장과 시의원 문제는 형님도 잘 찾아보소. 당 정체성에도 맞고 적당히 꾸밀 수 있는 커리어도 있는 분이 있다면 가서 빌어서라도 모시고 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 한번 찾아보자. 그리고 비례대표는 어떻게 할래?”
“비례대표야 당규에 정해진 대로 당원들이 선출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여성위원장이 일은 부지런하게 잘 하지만 좀 싹싹하게 어울리고 그러질 못해서 걱정이다.”
“그건 자기가 알아서 해야 할 일이니 여성위원장이 알아듣게 이야기를 좀 해주세요.”
사무국장님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이 제법 흘렀다. 사무실로 나오니 여성위원장과 선 여사와의 분위기가 좀 ‘싸~’하다. 청년위원장은 중간에서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난 모른 척 내 자리에 앉아 서류를 검토하는 척하면서 그들을 외면했다. 무슨 일인지도 몰랐고, 점심을 먹기 전 둘의 분위기도 그리 좋지 않았기에 괜히 중간에 끼어들었다가 날벼락을 맞을 이유는 없지 않은가.
선 여사와 여성위원장 사이의 냉랭한 분위기는 계속 되었고 난 괜히 불똥이 내게 튈까봐 고 팀장과의 저년약속을 핑계로 일찌감치 사무실을 나와 버렸다. 영광도서로 바로 가기엔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 난 송정으로 향했다. 아직 해가 남아있는 이 시간에 송정을 가기는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항상 가던 자리인 46번 자리가 아닌 구덕포로 방향을 틀어 맨 구석까지 차를 몰았다. 그곳에 차를 세우고 난 계단을 내려가 바위 위에서서 멀리서 몰려드는 파도를 지켜보면서 지난 시간들의 기억들을 되새기면서 잊혀져가고 있는 한 여인을 추억했다. 지은이. 만약 그녀가 있었더라면 오늘 내 행동을 뭐라고 얘기했을까? 아니 만약 지은이가 있었더라면 청아 그녀와 엮일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지은이가 청라 그녀가 아예 나에게 접근할 틈을 주지 않았을 것이었으니까.
민지를 보러가지 않은 것도 제법 오래 되었다. 언제 시간을 만들어서라도 민지와 윤희를 보러가긴 해야겠는데 지은이가 없는 지금은 그게 편하질 않았다. 민지의 앞에서 윤희와 다정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편하지 않은 일이었고, 또 다른 훼방꾼인 혜진이의 존재 또한 내게 부담으로 다가왔으니.
“고 팀장 일찍 도착했네?”
“응. 나도 방금 도착했어. 어디로 가서 밥 먹을까?”
“당신이 산다면 XX헌으로 가고, 내가 사야할 입장이면 그냥 순두부나 먹으러 가지.”
“문디. 가자. 내가 산다.”
고 팀장은 입으로는 투덜거리면서도 웃는 얼굴을 하고 XX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다.
“그런데 웬 일이야?”
“당신 요즘 아예 집사람에게 관심을 딱 끊었다면서?”
“문디.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넘 마누라에게 신경을 왜 써.”
“사람이 그러는 거 아니다. 당신 끊고 맺는 거, 독할 정도로 잘 하는 건 알지만 너무 그렇게 하는 것도 좋은 것은 아니야.”
“그냥 당신들 잘 살면 되는 일이다.”
“박 형. 내 하나만 부탁할게.”
“무슨?”
“그냥 집사람하고 친구처럼 지내줘. 어차피 그 정도는 예전에도 했었잖아.”
“당신 선영씨 성격 알잖아. 자칫하면 감정 컨트롤이 안 돼. 그 양반 너무 격정적인 성향이 많아서.”
“별 걱정을 다하고 있네. 어차피 예전에는 당신 마누라이기도 했잖아.”
“그렇게 이야기 하지 마. 변명 같이 들리겠지만 그때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고 지금은 다르잖아.”
“진짜 박 형 소심하네. 내 탁 깨놓고 얘기 할게. 당신 덕분에 내 가정 지켰어. 그 점은 앞으로도 계속 당신에게 고마워 할 거야. 그런데 갑자기 당신이 딱 그렇게 정을 끊다 시피 하니까 집사람이 중심을 못 잡아. 그래서 내가 도움을 요청하는 거야. 만약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내가 그 일에 갈등을 느낀다면 내가 어떻게 웃으며 당신을 볼 수 있겠어? 제발 마음 좀 편하게 먹고 살자.”
“솔직히 난 당신이 이해가 안 된다. 나도 평범한 인간이라 할 수 없겠지만 당신은 그 범주를 벗어난 인간 같아.”
“그냥 현실적인 거지. 다 잃느냐? 아니면 그나마 남은 것이라도 제대로 지키느냐? 그 문제일 뿐이야. 다 잃게 되면 복구할 방법조차 생기지 않겠지만. 내게 남은 것이라도 지킬 힘이 있다면 언젠가 잃었던 것을 다시 찾을 방법도 생기는 법이잖아.”
“아무튼 모르겠다. 일단 내가 선영씨 한번 만나기는 해볼게.”
“그래. 그러면 간단한 일을 뭐 그렇게 골 아프게 고민하기는.”
어쩌면 고 팀장의 말이 맞을 수도 있었다. 그냥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그녀와의 관계도 정리하면 되었을 일을 너무 딱 끊어 버린 감이 없지 않았다. 그냥 이전 농담을 하면서 편안하게 지냈던 친구처럼의 관계. 고 팀장과 저녁시간이 조금은 편안해 졌다. 하긴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언제는 편하지 않았었던가? 그녀와 육체적인 인연을 맺고 난 이후 고 팀장을 속인다고 생각했던 그 며칠간을 제외하고는 이 친구는 항상 내게 편안한 친구였었으니…….
‘자기 어디야?’
‘서면에서 손님과 저녁 먹고 있는데.’
‘저녁 먹고 시간 좀 내.’
‘오늘 많이 늦을 거야.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라서.’
‘자기 정말 그럴 거야? 나 미치는 거 보고 싶어? “
‘내가 뭘 어쨌는데 그러냐. 적당히 좀 해.’
‘주말에는 식구들하고 놀러간다고 가고, 오늘은 친구 만나고.’
‘그만해라. 나 지금 화난다.’
‘그럼 난 언제 만날 건데?’
‘내일 사무실서 보자.’
‘오늘 만나.’
‘시간 안 된다고 했잖아.’
‘나쁜 놈.’
‘됐다. 나간다.’
갑자기 짜증이 확 밀려온다. 무슨 여자가 이렇게도 막무가내인지.
“왜 집사람이야?”
“아니. 좀 머리 아픈 인간이 있어서.”
“어떻게 당신은 항상 주위에 머리 아픈 인간들만 있냐?”
“그러게. 이것도 내 팔자인가 보지.”
“우리 시원하게 노래나 부르러 갈까?”
“아이고 나 노래 잘못 하는 거 뻔히 알면서 노래는 무신.”
“그냥 신나게 부르면 되지 뭘 그래? 당신과 나 사이에 부끄러울 게 뭐 있냐?”
결국 고 팀장에게 끌려가다시피 해서 노래방으로 향했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노래주점 아닌 노래주점. 하긴 요즘 노래방에서 술 팔지 않고, 도우미 아가씨가 없는 노래방이 오히려 찾기 힘든 세상이니 노래방이나 노래주점이나 그게 그거인 셈이다. 차라리 이럴 줄 알았더라면 남천동이나 가자고 했을 걸 하는 후회가 생긴다. 결국 맥주가 들어오고, 잠시 시간이 흐르자 스스로 미시라 자랑하는 아줌마 둘이 들어오고, 여하튼 말은 잘 만들어 내는 세상이다. 그냥 몸 팔기 위해 들어온 유부녀 아니면 이혼녀 일 뿐인 것을. 사실 여자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난 돈으로 거래하는 여자들에게는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그 덕분에 이런 자리에는 별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나에게 술을 먹이려 노력도 하고, 손장난을 하면서 나를 분위기에 끌어들이려 하던 내 파트너는 결국 단념을 하고 고 팀장의 옆으로 이사를 갔다. 덕분에 고 팀장은 양쪽에 매달린 여자들을 감당하느라 연신 웃음을 흘리면서 그네들이 주는 술잔을 넘기기에 바빴다.
술자리를 파하고 팀장을 양산에 태워다 주고 집으로 돌아왔다. 벌써 새벽 1시다. 혹시나 해서 휴대폰을 켜 보았더니 역시 톡과 문자가 홍수를 이루고 있었다. 그것도 쌍욕이 가득한 그것으로……. 참 더럽게도 물렸다.
사무실에 출근하니 그녀가 먼저 와 있었다. 난 사무실에 가방을 내려놓고 그녀를 태우고 송정으로 향했다.
“도대체 당신 왜 그러는데?”
“자기가 자꾸 화나게 하잖아.”
“내가 당신 남편이야? 당신도 당신 남편과 어디 가족여행을 갔을 때 내가 그렇게 하면 마음 편하겠어? 만약 당신 남편이 내가 보낸 문자를 보고, 아니면 내가 통화하면서 당신에게 화내는 소리를 듣게 되면 당신 남편이 가만히 있겠어?”
“......”
“나 당신 소유물 아니야. 내가 분명 책임질 행동은 했지만 이렇게 까지 한다면 난 당신 더 이상 만나지 못해. 당신이 스스로 당신 남편에게 고백해서 간통으로 피소가 된다고 해도 난 차라리 그것을 택할 거야.”
“......”
“당신 이혼할 자신 있어? 만약 자신이 있다고 해도, 난 이혼할 생각도 없고 당신하고 살 생각은 전혀 없어.”
“그럼 나를 왜 안았는데?”
“내가 하자고 했었어? 기억해봐. 내가 당신보고 모텔 가자고 한 것이었는지?”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당신이 적당하게만 하면 나도 이렇게 까지 말하질 않아. 도대체 당신 왜 그러는지 이해가 안 돼. 버젓이 남편이 있고 딸까지 있는 여자가, 그것도 가정을 깰 자신도 없으면서 왜 내 생활을 엉망으로 만들려고 해?”
“......”
“처음에 약속했었잖아. 서로 가정은 지키면서 만나자고. 그것도 내가 한 말이 아니라 당신 입으로 먼저 말했던 거야.”
“그럼 어떻게 할 건데?”
“지금처럼 이면 난 더 이상 당신 못 만나. 그냥 여기서 끝내자.”
“자기야. 내가 잘못했어. 앞으로는 그러지 않을게.”
“당신 분명히 약속할 수 있어?”
“응. 약속할게.”
“절대 내가 집에 있을 때 함부로 전화하거나 문자 그럴게 보내지 마. 그리고 내 집사람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지 말고. 내가 당신 남편에 대해서 그렇게 함부로 말하면 당신도 자존심 상할 것처럼 나도 내 집사람 함부로 대하는 것 싫어!”
“알았어.”
“그냥 우리가 같이 있을 때는 몰라도 떨어져 있을 때는 그냥 없는 사람 취급해. 내가 당신에게 나를 만나는 동안 다른 남자를 만나는 것만 하지 말라고 하고 다른 사생활에 대해서 관여하지 않듯이 당신도 그렇게 했으면 좋겠어.”
“그럼 자기가 바쁘다고 하면 우린 언제 만나?”
“꼭 만나야 하는 것이라면 차라리 약속을 정해. 며칠에 한번 이런 식으로. 당신 만날 때는 내가 당신에게 집중할 테니까.”
“그럼 일주일에 두 번씩은 만나줘.”
“무슨 요일?”
“월요일 하고 목요일.”
“알았어. 그렇게 하자.”
결국 그렇게 타협을 하고, 조금은 편해진 마음으로 커피를 마시고 송정에서 나와 그녀를 아파트에 내려주고 난 사무실로 돌아왔다.
“아빠.”
“응. 민영이구나. 잘 지내고 있어?”
“예. 아빠 한번 오시라니까 왜 안 오세요? 그이도 잔뜩 기다리고 있는데.”
“임마. 난 일본말 하나도 할 줄 몰라. 말도 모르면서 가봐야 뭐하냐. 그렇다고 내가 거기 가서 할 일도 없고.”
“그냥 아빠 오셔서 며칠 구경이나 하시다가 가면 되잖아요. 종규 얼굴도 못 보셨잖아요.”
“응. 그건 그러네. 종규 많이 컸지?”
“예. 그놈 사진으로 보니 또랑또랑하니 잘 생겼더라.”
“정말 언제 한번 오세요. 저도 아빠 보고 싶어요.”
“아니. 난 정말 외국 나가는 거 싫다. 너희들 조만간 나올 거잖아?”
“예. 2월에 나가긴 해야 해요.”
“그럼 그때 보면 되지. 차 서방 일은 잘 되고?”
“국내에 있을 때 보다 훨씬 좋은 것 같던데요. 아주 신나 해요.”
“그렇다면 잘된 일이지. 차 서방에게 안부나 전하고 2월에 보자고 해라.”
“피~ 난 아빠 빨리 보고 싶은데.”
“임마. 전화 요금 많이 나온다. 빨리 끊어.”
“아빠. 사랑해요.”
“임마.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전화 빨리 끊어.”
“아빠. 또 그러시는 거 보니 엄마 생각나시나 보다.”
“까분다. 나 싫다고 먼저 간 사람을 내가 왜 생각하냐”
“아무튼 아빠 밥 꼬박 꼬박 챙겨 드시고 건강하게 지내세요.”
“그래 알았다. 종규 잘 키워라.”
“예. 아빠 사랑해요.”
민영이 전화를 받고나니 예전의 기억 때문에 눈물이 흐른다. 살점이 떨어져 나간 상태에서도 웃는 모습의 지은이의 그 얼굴. 지은이와의 시간들이 하나하나 내 가슴을 후비면서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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