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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1 23:55 1,116회 0건




41. 한수정과 서지혜


우리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데, 내 텔에 문이 열려있다. 그런데 그 문에서 아이린이 막 나오면서 우리를 본다.



아이린 : "어머머. 지금 부산에서 오시는 길인가요?"
한수정 : "예. 그런데 이 시간에 웬일이세요?"

아이린 : "아. 지혜가 여기서 혼자 공부를 하는데,
졸립다고 투정을 부리는 바람에 집에 가다가 들렀거든요.
잠시 환기시키느라고 문을 열어두었는데 이제 닫으려고 막 나오는 중입니다."

나 : "투정을 부리면 졸립다는 것은 핑계고, 어딘가에서 막혔다는 얘기인데..."
한수정 : "내가 가서 함 봐줄께."



우리가 소란을 피우자 안에서 지혜가 우리를 보며 손을 흔든다. 한수정은 지혜가 공부하는 것을 봐주겠다며, 지혜를 데리고 바로 식탁으로 갔다. 나는 한수정에게서 짐을 받아 내 짐과 함께 옷방에 두었다. 아이린은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같이 소파로 갔다.



"태현씨, 두 분 저녁은 어떻게 했어요?"
"부산에서 출발하기 전에 먹기는 했는데, 또 출출한데 .."

"뭐라도 배달 음식을 주문할까요?"
"그럴까요? 그런데 쟤네들한테도 물어보고 하죠?"



나는 야식 주문할껀데 무엇을 먹고 싶은가를 물었다. 지혜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한다.



"엄마. 우리 치킨에 와인 한잔 어때?"
"얘는? 주말도 아니고, 내일 학교에 갈 애가 밤늦게 웬 술타령이래?"

"우리 모두 무사히 다시 만난 것을 기념하는 .. 오빠, 응원 좀 해."
"싫어. 내가 왜 술꾼을 응원해?"

"어라? 이제 여친 왔다 이거야?"
"태현씨, 제가 그냥 주문할께요."

"엄마, 밤에 잘꺼니까, 후라이드는 말고, 순살로 하지? 오븐에 구운걸로. 헤헤."
"하여간에. .."



아이린은 지혜가 하자는 것을 거절할 만큼 마음이 모질지 못하다. 그런데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이다. 아이린은 지혜가 원하는 대로 3인분을 주문한다.



"우리 넷이 3인분을 어떻게 다 먹어요?"
"두고 보세요. 지혜 혼자 1인분은 거뜬히 해치워요."



아이린은 전화기를 들고 옷방쪽으로 간다. 나는 한수정이 지혜가 보는 앞에서 수학 문제를 풀면서 말하는 것을 듣는다.



"막혔다는 것이 여기니?"
"막혔다고는 말 안했어요. 그런데 거기는 맞아요."

"공부하다가 투정을 부린다면 막혀있다는 말이거든요."
"좋아요. 그럼 막혔네요."

"야아아. 서지혜,
사인 곡선은 90도 만큼 왼쪽으로 당기면 바로 코사인 곡선이랑 겹쳐지잖아!
그래프가 생각 안나니?"

"까먹어서 .."
"그럼 삼각함수는 어떻게 해? 그냥 배각공식이나, 반각공식들을 전부 외워서 하니?"
"예."

"그렇다면 지혜 너는 만사 제끼고 삼각함수 그래프를 복습해야 해.
단위원에서 동경을 회전시켜서 그래프 그리는 것도 까먹었겠지?
이 단원 전체는 그것을 확실하게 해두면 진짜 엄청 쉬워.
그것 안되면 진짜 힘들거든."

"배울 때 그렇다고 들은 것 같기는 한데 .."

"안그러면 너처럼 싸그리 다 외워야 해요.
그러면 개고생 하고도 헷갈려서 별로 도움도 안돼.
외운 것으로 풀리는 문제는 요새는 학교 내신 시험에도 인나와."

"알았어요. 내일 학교에서 쓸데없는 시간에 복습 꼭 해올께요."



한수정은 나를 보고 윙크를 하더니 욕실로 간다며 일어섰다. 지혜는 짐을 주섬주섬 챙기며 나에게 한마디 한다.



"오빠는 기왕 간 김에, 맛있는 것 많이 먹고, 푹 쉬고 오지, 왜 벌써 와?"
"우리 여신이 보고 싶은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이 뻥쟁이 구라쟁이야. 여친이 있는데 왜 내가 보고 싶은데?"
"진짜거든요. 언니도 네가 엄청 보고싶다더라."

"참나. .. 이상한 외계인 같은 사람들이 어이없게 굴고 있네."
"얘가. 우리가 왜 외계인이냐? 너 보고 싶으면 다 외계인이냐?"

"난 지구인이니까, 지구인을 보고 싶어하면 외계인이지."
"언니한테 다 말한다!"

"와아아. 오빠 완전 치사해졌다.
그런데 저 언니도 진짜 완전 끝내준다.
내가 왜 모르나를 단번에 가차없이 콕 찝어내네."

"지혜가 언니 말을 알아들으니 다행이다."

"나 이제 바보 아니거든요.
학교에서 애들이 문제 풀다가 나한테도 물어보러 온다니까.
오빠, 이 말이 믿어져?"

"난 그 말 믿어.
우리 지혜가 마음 먹고 하면 잘하거든."

"누구나 마음먹는 것은 잘해.
마음 먹는다고 다 잘하면 전부 다 일등급 받겠다."

"아냐. 넌 달라.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아이린은 나와 지혜가 주고받는 말을 들으면서 엄청 흐뭇한 표정을 짓는다. 한수정도 욕실에서 나왔다. 나는 와인과 잔을 꺼내오고, 아이린은 안주거리를 접시에 담아온다. 한수정도 식탁에 있는 의자를 당겨왔다. 나는 와인 병을 열고 잔에 따랐다. 소파에는 한수정과 지혜가 앉고, 나와 아이린은 식탁에서 가져온 의자에 앉았다.

모두 잔을 들었는데 한수정이 말했다.



"우리 지혜가 열공하기 위하여 건배해요."
"어머, 언니 그런 건배도 있어요?"

"없으면 만들어서 하면 되지. 우리 지혜가 열공하기"
"위하여!"
"위하여!"



지혜는 기분이 엄청 좋은 것 같다. 우리는 와인을 마신다. 아이린은 작은 쵸콜렛의 껍질을 벗겨서 우리에게 안주로 먹으라고 돌린다.

한수정은 전에 자기가 공부하던 얘기를 했다. 한수정 자기는 아무리 공부해도 2등이었지만, 공부라는 것은 절대로 하지 않고 1등만 했다는 전설을 이야기했다. 그래서 자기는 나를 따라서 대학에 왔는데 대학에서도 역시 1등과 2등이 바뀌지 않았었다는 이야기를 한다.

아이린은 나에게 요새 PC방 알바생들이 속썩이는 얘기를 했다. 교대 시간도 안 지키고, 툭하면 지각에 조퇴를 하고, 여학생은 남자친구를 불러들여서 하라는 일은 안하고 같이 붙어 앉아서 게임이나 하고.. 이런 얘기들이다.

치킨이 도착하자 와인을 한잔씩 더 마시게 된다. 한수정도 지혜도 맛있게 먹는다. 나와 아이린은 그녀들 둘이 먹는 것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먹는다. 네 사람이 먹을 치킨 2인분은 금방 동이 났다. 한수정이 지혜를 놀리는 놀리는 말을 한다.



"지혜는 이 다음에 죽어서 어쩔래?"
"왜?"

"저승에 가면 엄청 많은 닭들이 모두 모여서 너를 기다리며 벼르고 있을껄."
"그 닭들이 왜 나를 기다리지?"

"왜긴 왜야? 네가 워낙 치킨을 많이 먹으니까 그렇지. 하하."
"하아. .. 그럼 또 고민되네."

"치킨은 정말 먹을 것이 못돼.
대형 축사에 엄청 많은 닭들을 가둬놓고 기른다는데,
전염병이 돌면 예방주사랑 항생제로 키우다시피 한대."

"어머머. 그래요?"

"닭이든 계란이든 싼 것들은 전부 그렇대.
엄청 비싼 것은 안그렇지."

"그럼 그렇게 비싼 것을 어떻게 먹죠?"

"자주 먹지 말고, 어쩌다 한번씩 먹으면 되지.
고기 많이 먹어서 건강할 일 하나도 없거든."

"엄마. 언니가 하는 말 들었죠?
이제 우리도 닭 먹는 습관을 바꿀까? 헤헤."



나는 한수정이 닭에 대한 이야기만큼은 잘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지혜가 한수정이 하는 말에는 거의 토를 달지 않고 수긍을 하는 편 같다. 지혜와 아이린은 자리에서 일어설 준비를 한다. 아이린은 자리를 정리한다.


"언니, 진짜 부럽다. 언니 카리스마 완전 쩔거든요."
"얘는?"

"아냐. 언니는 사람 잡는 포스가 진짜 장난 아냐.
저 오빠가 임자를 확실하게 만난 것 같아. 하하."

"어머. 네 눈에도 그렇게 보이니?"
"당연하지. 그거 못 보면 장님이게?"

"야, 김태현. 들었지?
세상 사람이 다 알고, 우리 지혜도 아는데, 왜 너만 모르냐?
너 장님이야. 장님. 알아?"

"내가 뭘 몰라? 갑자기 웬 장님?"
"봐라. 얘는 자신이 뭘 모르는지를 모른다니까.
글쎄, 그게 딱 한 사람, 김태현 한테만 아예 작동을 안해요"

"언니, 저 오빠는 자뻑이 쫌 .. 헤헤."
"음. .. 그건 자뻑만은 아냐. 너도 나중에 알게 될꺼야. 두고 봐."

"언니, 알았어요. 그,것은 나도 인정해요.
그런데 아까 저녁때 아빠랑 전화하는데, 오빠랑 언니 얘기를 했거든요.
엄청 기다리신대요.
빨리 꼭 가봐요.
우리 아빠도 마음만 먹으면 좋은 남자야. 헤헤."

"내일은 학교에 가봐야 하니까 불확실하고,
모레는 꼭 아빠 뵈러 갈께."



한수정과 서지혜 사이에 서서히 밀당질이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두 모녀가 가고, 천하는 조용해졌다. 나와 한수정은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로 갔다. 나는 한수정에게 말했다.



"또 할꺼지?"
"하아.. 김태현씨, 우리 아까 아침에 했거든요?"

"야아. 아침에 했다고 저녁에 안해?
너는 아침 먹었으면 저녁은 안먹니? 하하."

"아니, 얘가 지금 뭐라는 거야?"

"아침에 한 것은 어제 밤에 안한 것을 한거고, 오늘꺼는 아직 안했잖아."
"어머. 그럼 그것도 매일 하는 거니?"

"혹시 또 알아? 안하면 어디가 아플지?"
"후훗. 역시 뻥이었네. 너 제법 웃긴다."

"왜? 뭐가 웃겨?"
"아프긴 어디가 아프다고 그래? 완전 뻥이잖아?"

"너는 더 심한 뻥도 쳤거든."
"뻥이 아니고 나는 그냥 들은 얘기를 한건데?"

"과고 출신이면 그런 말을 들을 때 잘 생각해보고 새겨들어야지."

"알았어. 다음부터는 그렇게 할께.
오늘은 피곤하니까 그냥 자자.
정 하고 싶으면, 내일 아침에 자고 일어나서 하자. 알았지?"



처음에 우리는 그냥 안고 키스만 하려고 했다. 그런데 내가 한수정의 가슴을 만졌는데, 너무 자극이 강하다고 했다. 우리는 잠옷을 벗고 건너 뛰려던 부분을 해치운다. 끝나고 나서 한수정이 내게 물었다.



"야. 너 혹시 야동 가진 것 있어?"
"아니. 없는데. 왜?"

"그거 봐가면서 하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거는 연기잖아? 그거 따라 하다가 어쩌게?"

"내가 너무 모르니까, 내가 이렇게 답답한데,
너는 어떨까 생각하니까 .."

"난 괜찮으니까 내 핑계를 댈 생각은 하지마.
보고 싶으면 그냥 보고 싶다고 말 해. 어디서 하나 구해볼께. 하하."

"뭐야? 그럼 내가 그것을 호기심 때문에 보고 싶어 한다고?"

"너, 딱 보니까 그렇거든. 하하"
"절대 아니거든."



우리는 말도 되지 않는 얘기를 하다가, 한수정이 먼저 잠에 빠져들었다. 나도 뒤따라 잠이 든다.


* * *



다음날 한수정은 오후에 주영심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학교로 가야한다고 했다. 나는 한수정을 차에 태워서 정문 앞에 내려주었다. 나는 회사에 들러서 전산실에 가보기로 했다.



"저녁은 같이 먹을 수 있겠지?"
"그래야지."



나는 전산실에 있는 여직원과 함께 우리가 일하는 시스템을 점검했다. 그녀는 누구나 쉽게 따라서 할 수 있는 매뉴얼을 만들기로 했고, 끝나는 대로 총무과의 최수희에게 설명해서 이해를 시키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나서 총무과에 갔다. 강은영 과장과 박은희 대리가 나를 휴게실로 데리고 가서 같이 커피를 마셨다. 나는 전산실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 해주고, 앞으로는 그런 사고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박은희 대리 : "우리 착한 막내가 쉬는 날인데도 이렇게 나와서 신경써주네."
나 : "마음에 걸려서 제대로 쉬지도 못하겠더라구요."

강은영 과장 : "다음 주 월요일부터는 다시 나올꺼지?"
나 : "그럼요. 이번 주에 쉬는 것만도 너무 고마운데."

강은영 과장 : "여친이랑 오래 만에 만나니까 좋지?"
박은희 대리 : "좋기만 하겠어?"

강은영 과장 : "매일 같이 붙어서 사는 것보다, 너처럼 떨어져 있다가 어쩌다 한번씩 만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나 : "에이. 결혼 하신 분께서 왜 이러세요?"

박은희 : "과장님은 결혼을 하셨으니까 그럼 맣씀을 하시죠. 지지고 볶아도 좋으니까 난 결혼이라는 것 좀 해보고 싶은데. 태현이는 언제 결혼해?"

나 : "대리님. 나는 아직 학교 졸업도 안했는데 무슨 결혼 생각을 벌써 해요?"

강은영 과장 : "막내 생각이 옳아. 졸업하고, 취직하고, 결혼은 훨씬 나중에 해도 돼. 절대 서둘러서 일찍 결혼할 필요가 없어."



강은영 과장이 이 말을 하고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내다본다.

그녀들과 헤어져서 회사를 나오는데 주영심에게서 전화가 온다. 오늘 저녁에 한수정은 입학 동기들과 만나기로 되어있으니까 날더러도 그 자리에 같이 끼라는 것이다.



"태현이 너도 우리 입학 동기니까."
"나는 일 해야 하는데?"

"늦더라도 꼭 와. 얘들이 너를 진짜 엄청 보고 싶어 하거든."
"알았어. 나중에 연락할께."



나는 지혜가 오기 전에 청소나 할 생각에서 집으로 갔다. 그런데 아이린이 벌써 청소를 해놓았다. 그런데 아이린은 없다. 나는 아이린을 찾으러 PC방으로 갔는데, 아이린은 PC방에도 없었다. 지혜가 올 시간이 거의 돼서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생각해보니까 아이린은 지혜를 데리러 지혜네 학교에 갔을 것 같다.

나중에 아이린은 지혜와 같이 도시락을 들고 와서 셋이 저녁을 먹었다.



"언니는 어쩌고? 왜 오빠 혼자야?"
"학교에 갔어."

"솔까말로 언니랑 공부하니까 더 좋던데."
"오늘은 안돼. 입학 동기들이 만나자고 해서 나갔거든."

"그럼 오빠 입학동기도 되잖아?
오빠는 왜 안갔어? 오빠 왕따야? 하하."

"날더러도 꼭 오라고 했거든.
그런데 나는 거기 가는 것보다 여신이랑 공부하는 것이 더 좋아."

"하아. .. 이번 주에는 별 일 없다니까.
어제 그거는 복습한다고 나 혼자 하던거였으니까, 오빠가 신경 안써도 돼."

"이러언. 지혜가 나를 거부하네."

"거부 아니거든요. 오빠는 언니한테 가보시라고.
언니 혼자 갔다가 술에 뻗기라도 하면 어쩔래?"

"그 언니는 너처럼 술을 많이 마시지 않아.
가더라도 갈 때 까지는 공부하고, 나중에 늦게 갈꺼야."

"참나. .. 내가 완전 술꾼 취급을 받네."
"반성해라."



그렇지만 지혜는 내일 단어테스트 때문에 단어를 외워야 하는데 내가 있으면 오히려 방해된다면서 기어코 나를 쫓아낸다. 지혜를 혼자 내 방에 두고, 나는 아이린과 함께 방을 나섰다.

나와 아이린은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서 도로로 나오는데, 아이린은 고개를 돌려서 나를 외면한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이 무거운 분위기를 깨기 위해서 내가 입을 열었다.



"누나, 지금 어디로 가요?"
"지혜 공부 다 할 때까지 가게에 있으려고. .."

"나도 일찍 오게 되면 가게로 갈께요."
"그럼 ..."



아이린은 길을 건너갔다. 나는 택시를 세워서 타고 학교 앞으로 갔다. 주영심이 보내온 문자 메시지에는 그들이 조금 전에 치맥집으로 자리를 옮겼다고 한다. 나는 치맥집 앞에서 택시를 세웠다.



치맥집 안으로 들어서는데 주영심이 나를 알아보고 손짓을 한다. 열두명 되는 애들이 여섯명씩 두줄로 앉아있는데, 남자는 두명 밖에 없다. 그런데 윤기숙도 나와있다. 한수정이 나를 자기 옆자리로 앉히며 내게 묻는다.



"지혜는 어쩌고?"
"너 술에 뻗어있을 거라고 가서 데려오래. 지혜가 보냈어."

"계집애. 하는 짓이 제법 귀엽단 말이야."




나는 윤기숙과 인사하고 무슨 일인가 물었다.




"기숙이는 웬일이야?"
"선배 퀸을 모셔야죠."

"퀸들에게는 그런 것이 따로 있어?"
"아뇨. 실은 오빠 손가락에 커플링 어찌 됐나 궁금해서 헤헤."

"우리 사귀기로 했으면 사귀는거지."



드디어 여자애들의 입방아가 시작되었다.



"그럼 수정이는?"

"너 혹시 3년 전에 수정이한테 채이지 않았니?"

"저 괴물 내년에 복학하면 누구랑 사귈라나?"

"쟤랑 사귀면 무조건 퀸에 당선 된다니까."

"그러니까 분명하게 말해봐. 김태현이 지금 사귀는 애가 누구야? 한수정? 아니면 윤기숙?"

"쟤 커플링 보니까 윤기숙이랑이잖아."

"그럼 한수정은 뭔데?"

"설마 두 여자랑?"




그동안 여자들 틈바구니에 껴있던 윤태영이랑 송태식이 나를 보고 엄청 반가워한다. 윤태영은 방위로 해결했고, 우리는 복학생들 모임에서 만났었다.


송태식 : "김태현, 와 줘서 진짜 고맙다."
윤태영 : "이 엄청난 여자애들 틈에 앉아있기가 진짜 고역이었는데."

송태식 : "너 입대하고 처음 보는 거지?"
나 : "그러네. 너는 언제 제대해?

송태식 : "내년 여름. 아직 한참 남았지?"
나 : "이제 부대훈련, 동계훈련이 지나면 봄이야. 용기를 내."

송태식 : "너무 까마득 해."
윤태영 : "여자애들 있는데 군대 얘기 고만하자."

송태식 : "윤태영은 방위 출신이라 이런 말은 해도 못 알아듣는다. 하하."



남자들끼리 따로 이야기하는 것이 주영심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주영심 : "이 머시마들이 복학생들이라고 지금 따로 독립하냐?"
윤태영 : "그럴 리가?"
송태식 : "그러고는 싶은데, 오늘은 참을꺼거든."

나 : "그러니까 다른 마음 먹지 않게 여자애들이 잘 좀 챙겨주지 그랬어?"
김경옥 : "저 군발이는 챙겨주려고 하니까 전기 통한다고 싫다던데?"

주영심 : "삼년 전에 그때처럼 모였으니까, 위하여 하자."
나 : "나는 삼년 전에 그 때 없었는데?"

윤태영 : "태현이는 아직 술도 없다."
한수정 : "내 잔으로 해. 어차피 난 고만 마실꺼니까."

주영심 : "안돼. 누구 맘대로? 여기요! 500 한 개만요!"



건축학과는 5년을 다녀야 한다. 처음에 우리가 입학했을 때에는 남자가 여자보다 적었다. 그런데 중간에 휴학하는 애들도 생기고, 남자들은 군으로 빠진다. 또 복학생이 들어오기도 한다. 또 건축학과가 너무 힘들어서 4년제인 건축공학과나 토목 공학과로 빠져나가는 애들도 생긴다.

지금 5학년들이 우리가 입학했을 때부터 계속 다닌 애들이다. 주영심이나 여자애들은 5학년이어서 이번 학기만 하면 졸업이다. 남자들은 군대 때문에 아직 5학년이 아니다. 송태식은 아직 군복무 중이고, 지금 휴가나온 것이다.

그래서 다른 학년 애들이 껴들지 않고 5학년 입학동기들만 모이면 몇 명 되지 않는다. 이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이기가 쉽지 않다.

오늘 나온 여자애들은 전부 5학년 입학동기들이다. 한수정이 1학년과 2학년을 다니면서 공부도 제법 하고, 퀸으로 인기가 제법 있었다. 그래서 급하게 불렀는데도 오늘 이 정도가 모인 것이다.



오늘도 윤기숙은 나에게 500 짜리 두번째 잔을 들이밀면서 입을 내 귀에 가까이 대고 낮은 소리로 말한다.



"가짜지만 나도 여친은 여친이니까 드세요. 하하."
"너 나한테 이러려고 온거니?"

"야. 김태현. 기숙이 곤란하게 하지 말고 마셔."
"왜? 무슨 일 있었어?"

"오빠가 학교에 잘 안나타나니까 ..."
"태현이는 저녁때 퇴근하고 기숙이 만나서 같이 밥 한끼 먹어주는 것이 어렵나?"

"알았어. 그럴께."



그런데 최수희에게서 카톡이 왔다.



"방효은 전화 연락 되는데. 어떡하지?"
"우리 알바생 아직 안뽑았죠?"

"응."
"내일부터 출근하라고 하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는 것이 좋겠는데요."

"알았어. 이따가 늦게라도 결과 연락해줄께. "




밤 11시가 되자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쉽게 작별하고 헤어지면서, 한수정은 윤기숙을 데리고 택시 뒷자리로 타고, 날보고는 앞자리로 타라고 했다. 그리고 차창을 열고 밖에 있는 애들에게 말했다.



"우리 저쪽에 가서 한잔 더 하려고. 같이 갈 사람 와."
"태현이 오피스텔 앞에 PC 방 쪽?"



그렇지만 윤기숙은 한수정을 기숙이네 집 앞에 내려주고 우리는 다시 PC방 앞에까지 왔다. 한수정이 내 창문을 올려다보고 말했다.



"지혜 없네?"
"왜?"

"불이 꺼져있어."
"지혜가 보고 싶으니?"

"내가 술에 뻗지 않고 이렇게 멀쩡하다는 것을 보여줘야지."



한수정은 날더러 기다리라고 하고 PC방으로 올라갔는데, 잠시 후에 날더러 올라오라고 전화를 했다. 지혜가 거기서 라면을 먹고 있다는 것이다. 아이린은 벌써 한수정과 나를 위해서 라면을 끓이고 있다.



"김태현, 우리도 먹고 가자."
"태현씨도 만두랑 떡살 넣어요?"
"언니, 제가 할께요."



우리는 라면을 먹고, 지혜와 같이 아이린을 아파트 입구에까지 데려다 주고 내려왔다. 오가는 길에 지혜는 깔깔거리면서 오늘 있었던 일을 한수정에게 이야기한다.



"언니, 내가 오늘 언니가 시킨 삼각함수를 복습하는데,
애들이 자꾸 물어보러 오거든요.
너무 신기하지 않아요?"

"신기하긴 뭐가 신기해? 당연한 얘기 아닌가?
태현이 말로는 지혜가 공부를 엄청 잘한다던데?"

"또 있어요.
내가 설명을 해주면 애들이 알아듣고 이해를 한다는거야.
이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기적처럼 일어나거든요.
나는 믿을 수가 없어요. 하하하."

"지혜는 수학 일등급을 꼭 해낼꺼야."

"하아.. 언니."



한수정이 하는 이 말을 듣고 지혜는 내 얼굴을 쳐다본다. 나와 지혜에게는 일등급에 얽혀있는 비밀이 있는데, 한수정이 그걸 모르고 하는 얘기이다. 지혜의 얼굴이 약간 빨개지는 것 같다.




지혜는 5층으로 들어가고, 우리는 7층으로 올라왔다. 한수정이 욕실로 갔는데, 최수희에게서 카톡이 왔다.



"자기 바빠요?"
"아뇨. 이제 자려고."

"방금 방효은이랑 통화가 됐어."
"뭐래요?"

"휴가 끝나고 일요일 밤에 일식집에서 참치 샐러드랑 생선 초밥을 먹었는데, 밤에 식중독으로 쓰러졌는데 새벽에 병원으로 실려갔대."

"그럼 연락을 왜 안했지?"
"혼수상태로 중환자실에 있다가 깨어나서 검사 받고 오늘 퇴원했대."

"출근하라고 했어요?"
"그것은 내가 아니고 과장님이 결정해야 해."

"일단 출근하라고 하고, 과장님한테 데리고 가서 말씀을 잘 드리세요."
"자기 생각에도 방효은 계속 나오는 것이 좋겠지?"

"당연하죠. 아무래도 새로 오면 일주일 정도 일을 배워야 하니까 번거롭죠."
"내 생각도 그래."

"오늘 전산실에서 누나한테 뭐라고 안했어요?"
"그 여자한테 설명 듣고, 배운 대로 하니까 되던데?"

"수고했어요. 잘 자요."
"자기도 잘자."



나는 방효은이 했다는 이 말이 거짓말이 아니기를 바란다. 내가 최수희와 카톡하는 것을 보고 한수정이 묻는다.



"이 야심한 밤에 폰질이야?"
"아까 회사에 갔었는데 일이 잘 해결되는 것 같아서 .."

"알았으니까 이제 고만 자자."
"오늘은 진짜 조용히 자기다?"

"일단 하고 나면 조용하거든요?"



한수정의 말이 옳았다.
끝나고 나서 우리는 바로 곯아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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