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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1 23:54 1,200회 0건




47. 아이린의 도둑질 & 윤기숙과 커피 한 잔






나는 욕실 안으로 들어서자 거울 앞에 서서 양치를 시작했다. 아이린은 욕실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내 등 뒤에서 한마디 한다.



"나쁜 남자."
"내가 왜?"

"여친 보내고 나서 바로 나를 건드려?"
"여친이 가고 나니까 바로 누나가 나를 건드렸잖아!"



그녀는 나에게 지혜 텔로 내려가서 씻고 오겠다고 말하고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갔다. 나도 샤워를 하고 옷을 입고 주방으로 갔다. 커피메이커에 커피와 물을 넣고 스위치를 넣었다. 침실과 거실을 대충 정리했다.

식탁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면서 전화기를 열고 들여다 보았다. 벌써 아침 10시가 넘었다. 윤기숙에게서 카톡이 와있다.



"오늘 퇴근은 몇 시?"
"쉬는 날."



나는 간단하게 답장을 보냈다. 휴대폰의 자판에서 키를 누르는데 손끝이 달달 떨린다. 온몸이 나른해온다. 엄마에게서도 와있다.



"아들, 살아있어?"
"죽었어요. ㅎㅎ"



답장을 보내자 엄마는 바로 전화를 한다.



"내 아들이 죽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엄마도. 참. .. 그건 농담이죠."

"어디 아프기라도 한 줄 알고 깜짝 놀랐잖아."
"나도 아프고 싶은데, 안 아파서 걱정이야."

"말도 참 방정맞게 한다.
그러다가 정말로 아프면 어쩌려고 그래?
밥은 제때 먹고 다녀?"

"그럼요. 너무 잘 먹으니까 아프지 않은가 봐요."
"집에는 언제 올래?"

"이번 주에는 바쁘고, 다음 주 쯤에 갈께요."
"그 때까지 너무 불안해서 못살겠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 모르세요?"
"말이나 못하면 밉지는 않은데 .."

"알았어요. 그 전에라도 시간을 내볼께요."
"과외나 회사 둘 중에 하나만 해."

"알았으니까 엄마도 아프지 말고 건강하세요."
"난 벌써 아파."

"예에?"
"너 때문에 내 마음이 아프다고."

"미안해요. 걱정하지 마세요."



엄마와 통화를 하는 중에 윤기숙에게서 또 카톡이 온다.



"오늘 저녁은 오빠한테 예약할께요."

"저녁에는 시간이 안 되는데.
오후에 만나서 커피 한 잔으로 때우자."

"지혜 때문이면 그렇게 해요.
나는 오늘 4시 전에 끝나요."

"알았어. 이따가 나가면서 전화 할께."



아마도 누군가가 윤기숙을 자꾸 건드려서 귀찮게 하는 것 같다. 한수정이 나에게 부탁한 말도 있어서 나는 거절할 수도 없었다. 엄마가 나 때문에 걱정을 하신다. 집에 가서 생존신고를 제대로 하지 않은 탓이다.




아이린이 비닐팩 두 개를 들고 들어온다. 그녀는 옷도 갈아입었다. 청바지에 줄무늬 남방. 주로 PC방에서 일할 때 입는 옷이다.



"자기 배고프지?"
"아니야. 아까 토스트랑 계란 먹었잖아."

"하아. .. 겨우 그거 먹고 힘을 그렇게 썼는데. .."
"괜찮다니까."

"괜찮긴 뭐가 괜찮아?"



그녀가 팩에서 식탁 위로 도시락 두 개를 꺼내놓는다.



"요기 상가에 있는 도시락 가게에서 사왔어.
지금은 이것 먹고, 나중에 고기 먹으러 나가요."



우리는 마주 앉아서 따끈따끈한 도시락을 먹었다. 반찬은 불고기와 계란, 어묵 그리고 배추김치이다. 아이린은 얼마 먹지도 않았는데, 나는 벌써 다 먹고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아이린이 깜짝 놀란다.



"배 안고프다더니, 벌써 다 먹었어요?"
"내 도시락에는 밥이 절반 밖에 들어있지 않았어요."

"어머. 그랬어?"



나는 엄청 진지한 표정으로 아이린에게 대답했다. 아이린은 전화기를 가져오더니 내가 보는 앞에서 전화를 건다. 나는 그녀의 손에서 재빨리 전화기를 뺏어서 종료버튼을 눌러버렸다. 아이린은 어이없다는 듯이 나를 보고있다.



"농담으로 한 말인데 전화를 걸면 어떻해요?"
"아이. 참. .. 난 정말로 그러는 줄 알고 .."

"누나 나이가 몇인데, 농담인지 아닌지 구분 못해요?"
"자기가 너무 진지하게 말하는데, 농담일 것이라는 생각을 어떻게 해?"

"정말로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운 여인이야.
어른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아."

"하하하. 그럼?"
"지혜의 큰 언니 정도?"



아이린은 도시락을 들고 내 옆으로 옮겨 앉는다.



"같이 먹어요."
"싫어요."



아이린의 얼굴은 금방 울 것 같은 표정을 한다.



"싫다는 말을 너무 분명하게 하네.
자기가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내가 그 말 했다고 울려고 해?
지금 많이 먹으면 안 좋아서 그런 거야.
누나가 나중에 고기 먹을꺼라고 했죠?"

"하아. .. 그런가?"



나는 커피를 따라서 소파로 내려왔다. 소파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TV를 보고 있었다. 아이린이 나를 보고 한마디 한다.



"자기 침대 매너는 원더풀인데, 식탁 매너는 영 꽝이네."
"어? 왜?"

"나는 아직 안 끝났거든요."
"아. .. 미안요."



나는 얼른 식탁으로 가서 아이린의 옆자리로 앉았다.



"나 .. 자기랑 얘기하면서 먹고 싶단 말이야.
그런데 자기가 그러면, 날더러 밥을 고만 먹으라는 말이야. 몰랐어?"

"몰랐어요. 정말 미안해요.
나는 그런 생각 하지 않고 늘 그래왔는데?"

"오늘처럼 자기랑 같이 앉아서 완전 느긋하게 아침을 먹을 수 있는 날이 또 언제 오겠어?



나는 할 말을 잃고 아이린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수정씨는 잘 도착했겠지?"

"뉴스에서 비행기 사고 났다는 말이 없으니까 비행기는 무사히 도착했을 것이고,
그럼 수정이도 잘 도착했겠죠."

"누가 그걸 모르나? 하하하. 그럼 토론토로 바로 갔어? 지혜 말로는 아니라던데."
"아뇨. LA에서 이틀 있다가 간대요."

"우리 지혜가 수정이 언니한테 완전 뻑 갔는데 .."
"지혜가 외로움을 많이 타는 것 아니겠어요?"

"내가 철없이 애들 아빠랑 헤어지는 바람에 .."
"후회하세요?"

"......"



아이린은 도시락을 다 먹은 후에 PC방을 둘러보고 오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두시쯤 돼서 아이린이 전화로 나를 불러내렸다.



"삼겹살 먹을래요?"
"어제 먹었는데."

"그럼 ..."
"스테이크 먹으러 가자."

"스테이크가 상가에서는 쫌 그런데 ...
그럼 후문에 가서 그 때 그 보쌈 어때?"



결국 우리는 아파트 후문 밖으로 가서 보쌈으로 점심을 해결하기로 했다. 우리는 걸어서 아파트 단지를 가로질러 후문을 갔다. 우리는 보쌈 집으로 들어갔고, 보쌈집 여사장은 우리를 룸으로 안내했다. 아이린은 중산크기의 보쌈을 주문했다. 여사장이 룸 밖으로 나가자 아이린은 나에게 눈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자기야, 고민된다."
"무슨 고민?"

"이 보쌈에는 소주 한잔을 해야 하는데, 낮술을 할 수도 없고 .."
"낮술? 하면 어때?"



나는 소주를 주문했다. 그런데 아이린이 낮에 술을 마신다는 것은 처음 겪는 일이어서 약간 긴장된다. 우리가 두 잔째 마시고 나자 아이린이 말했다.



"수정씨나 최박사가 너무 부럽다."
"뭐가?"

"다들 젊고, 예쁘고, 공부도 많이 하고 ..."
"사람들이 전부 다 공부를 잘 해야 하는 것은 아니거든?"

"수정씨는 태현씨 같은 남자랑 사귀고 .."
"누나, 이런 소리나 하려고 나랑 술 마시자고 했어?"

"나랑 너무 비교되잖아."

"누나도 엄청 예쁘고, 가게도 잘 하잖아?
경식이나 지혜가 예쁘게 잘 크고 있고.
도대체 뭐가 문제야?"

"하긴. .. 애들 크는 것을 보고 사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는데
언젠가부터는 자식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고 .."

"이젠 내가 도와주잖아요."

"그래. ...
요새는 내가 자기를 쳐다보는 것이 내 유일한 낙이야."

"누나도 참..
누나 혹시 가을 타요?"

"가을을 타? 내가?
나는 그런 것이 뭔지 모르는 사람이야.
일주일 동안 태현씨 근처에 얼씬도 못했는데,
오늘 이러고 나니까 꼭 도둑질한 느낌이 들고 .."




우리는 식당을 나왔다. 우리는 PC방 앞에까지 같이 걸어왔다. 나는 아이린에게 학교에 가봐야 한다고 말하고 아파트에서 내려오는 택시에 탔다. 택시가 골목을 빠져나올 때까지 아이린은 그 자리에서 나를 바라보고 서있었다.



나는 택시 안에서 윤기숙에게 전화를 했다.



"지금 택시 타고 나가는 길이거든. 내가 어디로 가면 되겠니?"
"내가 지금 정문 앞으로 나갈께요."

"내가 꼭 거기까지 가야겠니?"
"오죽하면 내가 이럴까? 부탁해요."



나는 정문 앞에서 택시에서 내렸다. 윤기숙이 나를 기다리던 벤치는 아직 비어있다. 이제는 내가 그 벤치에 앉아서 윤기숙을 기다렸다. 하늘은 정말 푸르다. 완전 가을 하늘이다. 한낮의 햇살은 아직 따갑다. 그렇지만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은 제법 서늘하다.

윤기숙이 와서 내 옆에 앉는다.



"쉬는 날 불러내서 죄송해요."
"잠시 바람 좀 쏘이는 것도 좋은데. 무슨 일 있어?"

"일이야 매일 있죠. 그치만 오늘은 그냥 오빠가 보고 싶어서. .. 헤헤."
"장난하지 말고, 무슨 일인지 말을 해요."

"수정이 언니가 나한테 그러던데.
오늘은 자기가 가고 난 다음날 이니까, 오빠 혼자 엄청 심심하게 있을 거래.
오빠 불러서 같이 저녁 먹으래."

"내가 심심할꺼라고?"

"내가 생각해도 그럴것 같아.
저녁에는 지혜랑 공부한다며?"

"수정이가 모르는 일도 아니거든요.
걔는 왜 바쁜 기숙이한테 이런 쓸데없는 말을 했지?"

"나? 안 바쁜데?
오빠, 우리 전산실에 갈래?"

"전산실?"
"나 CAD 해야 하잖아. 헤헤."

"설마 날더러 CAD 가르쳐달라는 말은 아니겠지?"
"하아. .. 나도 그것 할 실력은 되거든요."



우리는 일어서서 공대 PC풀로 아주 천천히 걸어갔다. 그런데 윤기숙은 내 팔짱을 끼고 내 어깨에 머리를 살짝 기대온다. 지혜가 숨쉬는 소리가 너무 또렷하게 들린다. 내 팔에도 윤기숙으로부터 묵직한 덩어리가 느껴진다. 내 가슴에 잔잔하게 파문이 일기 시작한다.

윤기숙은 누군가가 지나갈 때마다 걸음을 더 천천히 걷거나, 아예 멈추어 서기도 한다. 아는 사람이 지나가면 손을 흔들기도 한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수근거리는 소리도 들린다.

내 생각이 틀린 것이 아닌 것 같다. 윤기숙에게 덤벼드는 남자들이 있으니까 나를 불러내야겠는데, 내 휴가나 한수정 때문에 그러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기숙아. 우리 커피는 어디서 마셔?"
"오빠, 전산실 앞에 자판기 커피 어때?"

"야아아. 그건 쫌 아니지."
"농담이야. 도서관 매점에서 아메리카노 팔아."

"왜 하필 도서..."



나는 그 말을 끝까지 하지 않았다. 기숙이는 나를 일단 공대 도서관에 데리고 가서 커피를 산 다음에 공대 PC풀로 데려가려는 것 같다. 걸어야 하는 길이 제법 멀다.

우리는 공대 도서관에 도착했다. 평상시 같으면 걸어서 20분이면 충분한 거리인데, 오늘은 거의 한 시간 가까이 걸렸다. 나는 도서관 입구에 있는 원탁에 앉아서 기다리고, 기숙이는 커피를 사오겠다면서 매점으로 갔다.

잠시 후에 윤기숙은 커피를 큰 종이컵으로 가져왔다.



"오빠. 우리 여기서 다 마시고 가자."
"어?"

"컴퓨터실에는 음료수 반입이 금지잖아?"
"그렇네."



우리는 원탁에 나란히 앉아서 커피를 마시면서 30분이 넘는 시간을 보냈다. 윤기숙은 아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여학생들이 지나갈 때에는 간단하게 인사만 했지만, 남학생들이 지나갈 때에는 몸을 내게 기대오기도 했다.



그런데 지혜가 올 시간이 다 됐다. 나는 집으로 가야 했다.



"전산실에는 다음에 가자."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어?"

"중간고사 때문에 지혜가 긴장하는 것 같아."
"그래. 고2면 정신 바짝 차려야지."



우리는 정문까지 걸어서 내려왔다. 이번에는 아까처럼 시간이 그렇게 많이 걸리지는 않았다.



"오빠, 고마워."
"이번에는 누가 들이대냐?"

"말해줘도 오빠 모르는 사람이야."
"으음 .."

"오빠 쉬는 날 또 연락할께."
"그래."



나는 택시를 타고 오피스텔로 돌아왔다. 그런데 아이린의 차는 이미 도로변에 주차되어있다. 그렇다면 지혜가 벌써 와있다는 말이다. 나는 내 텔로 들어갔다. 아직 지혜가 올라오지 않았다. 나는 욕실에서 양치를 하고 커피를 끓였다.


문이 열리고 지혜가 아이린과 함께 들어온다.



"오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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