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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1 23:54 1,201회 0건




51. 그럼 내가 그런 애들한테 개무시 당해야 해?





나에게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지혜가 아니라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강은영 과장이다. 아마도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난 그 결과 때문이 아닐까? 나는 아이린에게 지혜가 아라는 손짓을 하고 전화를 받았다.



"예, 과장님. 태현이입니다."
"얘는? 누나라니까."

"예, 과장님 누나님."
"그냥 누나!."

"예, 누나."
"내가 도대체 너를 어떻게 해야 할 지를 모르겠다."

"그럴 때는 무조건 그냥 예뻐해주시기만 하면 되는데요? .. 하하."
"당연히 예뻐하지."

"무슨 일이세요?"
"그건 내일 얘기하고, 너 시간 되는 날이 언제야?"

"무슨 시간요?"
"우리가 회식을 해야 하거든."

"금요일저녁, 아니면 토요일 저녁이면 돼요."
"일단 알았으니까 내일 아침에 보자."

"안녕히 계세요."



나는 전화기를 탁자에 두었다. 아이린은 내 입에 쵸콜렛 한 조각을 밀어 넣어준다. 나는 쵸콜렛과 아이린의 손가락을 한꺼번에 입 안으로 빨아들였다. 아이린도 손가락을 은근 슬쩍 밀어넣는다. 나는 앞이빨로는 아이린의 손가락을 물듯이 하면서 아이린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이린은 아프기라도 한 것처럼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나를 본다. 나는 일부러 손가락을 씹는 시늉을 한다. 입술로 손가락을 단단히 감싸고 몇 번 쪽쪽 소리를 내고 빨면서, 혀로 휘감다가 놓아주었다.


아이린이 내게 묻는다.



"자기 너무 야해."
"누나가 나를 야하게 만들어."

"자기가 나를 야하게 만들면서."
"내가 왜?"

"모올라아. 자기 옆에만 있으면 난 .."
"누나. 많이 응큼하구나. 하하하."

"시끄러워!"



아이린은 내 팔을 꼬집는 시늉을 한다. 아이린의 두 뺨은 어느 새 발그래해졌다. 아이린은 고개를 바닥으로 떨구고, 아이린의 눈길은 바닥을 향해있다. 한동안 아이린의 어깨가 들썩이며 숨을 약간 거칠게 쉬는 것 같다.

우리 둘 사이에 참으로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우리 두 사람은 조용히 있다. 그렇지만 주위가 조용하니까 내 귀에는 아이린이 숨쉬는 소리가 너무도 또렷하게 들린다.

이렇게 앉아 있어야 하는 것 만으로도 숨이 막힐 듯 답답하다. 그런데 우리는 서지혜를 기다려야 한다. 지혜는 나와 아이린에게 기다릴 것을 명령한 것이다. 지혜가 지금 아이린과 나를 고문하고 있다. 이 가다림은 설레임이 아니라 영혼을 옥죄어오는 가혹한 고문이다. 지혜가 우리에게 행하는 너무도 끔찍한 테러이다. 이 고문과 테러의 시간이 얼마나 지속될 것이며 어떻게 끝이 날까?

아이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다. 자기 가슴을 콩콩 치면서 한숨을 깊이 내쉰다.



"자기, 와인 한 잔 할까?"

"지혜가 밖에 있는데 어떻게 와인을 마셔?
얘가 어디서 어떻게 됐다는 연락이 오면 당장 차를 몰고 나가야 할 수도 생기잖아요."

"하아. .. 그러네.
자기가 엄마보다 훨씬 낫다."



그때 내 전화기로 알림음이 들어온다.
지혜의 카톡이다.



"오빠가 서지혜 데리러 오세요.
행운동 우성아파트 902동 1204호"



나는 이 내용을 재빨리 아이린에게 보여주었다.



"아니. .. 얘는 또 무슨 짓을 벌인 거야?"

"누나. 지혜가 어떤 일을 저질렀든지, 지혜는 누나 딸이야.
이렇게 소식을 알려오니까 얼마나 예뻐?
빨리 가서 데려 올께요."

"그럼 나 혼자 어떻게 집에 있으면서 기다려?
나도 자기랑 같이 가면 안될까?"

"아니야. 누나는 침착하게 여기서 기다려야 해요."

"지혜가 왜 이렇게 무섭지?
나나 자기가 오냐오냐 하면서 다 받아주니까 얘가 이러는 거야."

"이러는 것이 어때서?
귀여워 죽겠구만. 하하."



나는 오피스텔을 나섰다.
지혜가 귀엽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지혜는 엄청 얄밉고 괘씸하다.

내가 아이린에게 말은 그럴 듯하게 했지만, 속이 타들어 간 것을 말하자면 아이린보다는 내 속이 훨씬 더 많이 탔을 것이다.

나는 카톡의 대화문에 적혀있는 주소로 찾아갔다. 그 아파트 주차장에서 지혜의 전화기에 전화를 걸었다. 벨 소리가 몇 번 울리고 드디어 연결이 된다.



"여보세요?"
"너, 지혜니? 아닌 것 같은데."

"지혜 여기 뻗어있어요. 올라오세요."
"뻗어? 지혜가 왜 뻗어? 그럼 119는 불렀어?"



백그라운드에서 들리는 다른 여자들이 말하는 소리가 제법 요란하다.



"어머 어머. 어쩜 좋아?"
"진짜로 왔다. 왔어."
"아오. 이 얄미운 계집애."
"얘를 어디다 숨겨?"
"숨기긴 뭘 숨겨? 깨끗이 패배를 인정해야 명장이지."
"지롤을 하세요."



나는 전화를 끊고 입구로 들어섰다. 엘리베이터에 타고 12층을 눌러야 하는데 패닉이 온다. 12층이라는 버튼이 눈에 띄지 않았다. 찾는데 제법 시간이 걸렸다. 누군가가 위에서 엘리베이터를 불렀는지, 그러는 사이에 저절로 문이 닫히고 위를 향하여 올라간다. 나는 10층을 지나갈 때 12층을 찾아서 눌렀고, 다행히도 금방 12층에서 내릴 수 있었다. 1204호의 벨을 눌렀다. 아무런 반응이 없다. 기다려야 한다. 입에 침이 마르고, 피가 마르고 뼈가 타들어간다.


문이 조금 열린다.
내 심장이 열리는 기분이다.

문 틈으로 여자의 얼굴만 빼꼼이 나타난다.
지혜의 얼굴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문이 더 넓게 열리고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트레이닝복 차림에 헝클어진 머리의 여자이다.

지혜 만큼은 아니지만 볼륨이 전체적으로 꽉 차는 듯한 느낌이다.

여체란 안에 다소곳이 갇혀있으면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다.
깨고, 망가뜨리고, 무너뜨리고 밖을 향해 나오면 그 곳에 바로 여체의 아름다움이 있다.



"서지혜 찾으러 오라고 해서 왔는데요. 지혜는요?"
"들어오세요. 지혜는 소파에서 맥주 마셔요."



집 안으로 들어서는 나를 향하여 지혜는 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브이 (V) 자를 흔든다.
그렇지만 지혜의 모습이 내 눈에 들어온다.
갑자기 내 가슴에서 울컥하면서 두 눈이 뜨거워진다.
지혜가 맥주를 마시고 있다고 얘네들이 한 말은 거짓말 같다.



"오빠!"



그러나 그것은 아주 잠시 뿐이다.
지혜의 옆에 앉아있던 애가 팔을 지혜의 어깨에서 들어낸다.
지혜는 곧 소파의 팔걸이로 고꾸라진다.

나는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갔다.
방안은 말 그대로 엉망진창이다.
캔맥주 한 박스 정도를 풀은 것 같다.
방바닥 곳곳에 빈 캔들이 찌그러진 채 뒹굴고 있다.
탁자에는 맥주캔과 땅콩, 오징어, 과일들이 담긴 접시가 두 개 있다.

여자애들은 모두 5명이다.
그 중 한 명은 방바닥에 베란다 쪽을 향하여 누워있다.
지혜는 소파에서 널부러진 상태.
두 명은 멀뚱멀뚱 소파에 앉아있다.



나는 아까 문을 열어준 여자애에게로 갔다.
이 여자애는 팔짱을 낀 채로 벽에 등을 기대고 서있다.
이 아이는 흥미있는 눈길을 나에게 던지고 있다.



"내가 지혜를 업고 내려갈거거든.
지혜 짐을 찾아야 하는데."



그녀는 지혜를 쳐다보고 말했다.



"아니, 이년은 왜 또 이러는 거야?
완전 개노답이네.
야! 너네 오빠님 가신단다."


"가긴 누가 가?
나 아직 여기 이렇게 뻗어있거든요."



지혜는 소리를 치며 나를 쳐다본다.
그녀는 지혜의 물건을 챙겨서 지혜의 가방에 담는다.


나는 지혜를 등받이에 기대게 하고 바로 앉게 했다.
남방 앞에 풀어헤친 단추를 모두 채웠다.
남방 위로 라운드 티도 입혔다.
말려 올라간 스커트도 바르게 내렸다.

그런데 여자애들이 모두 말짱한 모습이다.
뻗어있던 애들이 모두 바로 일어나 앉아있다.
무슨 구경거리이기라도 한 듯이 내가 지혜에게 하는 일을 쳐다본다.


그런데 느낌이 조금 이상하다.
정상은 아닌 것 같다.
뭐. .. 술 마셨으니까 그렇겠지.


그녀는 지혜의 가방을 들고, 나는 지혜를 등에 업었다.
묵직한 지혜의 몸은 내 등에 얹혀져 있고, 지혜의 팔은 내 목을 감는다.
지혜의 가슴은 내 등을 폭신하게 누른다.
내 팔은 지혜의 허벅지를 감고, 손바닥은 엉덩이를 받쳐든다.
지혜의 그 부분은 기다렸다는 듯이 내 허리를 누른다.
나는 현관으로 나가고, 그 여자애는 나를 앞서서 걷는다.

우리는 복도로 나왔고 그 아이는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른다.
우리는 엘리베이터에 탔다.



"얼마나 마셨어?"
"처음에 치맥으로 피쳐 두 개랑, 나중에 캔 한 박스요."

"소주는?"
"세병."

"으음. .."
"왜요?"

"쫌 많은 것 같아서."
"그런 것 같아요."



우리는 내 차로 왔다.
차의 뒷문을 양쪽 다 열고 지혜를 뒷자리에 눕혔다.



"저기요..."
"왜?"

"지혜 집에 가면 혼나요? 혹시 쫒겨나요?"
"쫒겨나지는 않아도 혼줄은 날껄?"

"지혜는 많이 안마셨어요.
잘 마시고 있다가 갑자기 뻗었어요.
애가 술에 약하네요."

"폭탄주를 여러 잔 마시게 하니까 그렇지."
"지가 마셨어요. 우리는 말렸거든요."

"어쨌든 내가 데려가니까 걱정 말아요."
"이거 비닐봉지요. 혹시 가는 도중에 오바이트라도 하면 ..."

"고맙다."
"그럼 부탁해요. 안녕히 가세요."

"너는 이름이..?"
"해수. 조해수요."

"이름은 엄청 예쁘네."
"뭐야아. .. 이름만?"

"글쎄. 다른 곳은 좀 그려야 할 것 같다.
지금은 엄청 뒤죽박죽이잖아?
고맙다. 들어가라.
다음에 또 보자."



나는 해수로부터 지혜의 가방을 받아서 조수석에 놓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아이린에게 카톡을 보냈다.



"지혜랑 같이 집으로 출발하니까 늦어도 20분 후면 도착해."



해수라는 애는 안으로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해수도 예쁘장했던 것 같다. 차는 주차장을 천천히 빠져 나온다. 그 때 뒤에 누워있던 지혜가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오빠, 차 세워."
"그냥 꼼짝 말고 누워있어."

"차 세우라니까.
나 하나도 안 취했어."

"술 취한 사람, 술 취했다는 말 절대로 안 하거든요."

"안 취했다니까 안 믿네.
Bitterness imprisons life, love releases it.
고통은 인생을 가둔다. 그리고 사랑은 인생을 열어준다.
이제 됐어?"


술이 약간 취하면 한국말은 표시가 잘 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렇지만 영어로 말하면 속일 수 없다.
지금 상태로 보면 어디 한군데 흠잡을 데가 없다.
술을 마신 것은 맞지만 취해서 해롱거린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럼 지혜는 여지껏 연극을 했다는 말인가?


나는 차를 세웠다.
지혜는 문을 열고 내려서 내 옆자리로 탔다.
문을 닫자마자 다짜고짜로 내 목을 감고 내 입술을 빨면서 키스를 한다.
지혜가 내쉬는 숨이 내 얼굴로 쏟아지면서 술 냄새가 확 올라온다.
소주와 맥주가 섞인 엄청 역겨운 냄새이다.



"이제 가자. 엄마가 기다 읍. .. 으읍 .."



내 입술을 물고 늘어지는 지혜의 입에 힘이 들어간다.
내 목을 감은 지혜의 팔에도 힘이 들어간다.
나도 지혜의 입술을 빨고, 내 입 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지혜의 혀도 빨아주었다.
지혜의 등을 토닥이고, 머리를 쓸어주었다.
그리고 간신히 얼굴을 들어낼 수 있었다.



"이제 안 취했다는 말 믿을 수 있어?"
"믿고 말고 보다는 술냄새가 진짜 독한데요?"

"어? 그래? 우리가 술 마시고 키스를 한두번 했나?"
"야아. 소주랑 맥주 섞어 마시고 키스한 적은 없거든요."

"그래서 그 냄새가 싫었어?"
"당연하지. 토나오는 줄 알았어."

"그럼 왜 나를 밀어내지 않았어?"
"지혜니까."



우리는 내 오피스텔로 도착했다. 지혜는 전혀 흔들리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게 똑바로 걷는다. 우리는 소파에 앉았고, 아이린은 지혜에게 한마디 했다.



"지혜 너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미안해. 엄마.
내가 저년들한테 뻥을 좀 쳤거든."

"무슨 일로?"

"오빠랑 나랑 섹스는 벌써 옛날에 했고, 요새도 한다고."

"요게."


"오빠한테 내가 취해서 뻗어있다고 하면, 분명 오빠는 나를 데리러 올꺼라고 내가 말했거든요.
그런데 이년들이 어떤 과외샘이 그러느냐면서 전혀 안 믿잖아."

"야아아. 아무리 그런다고 그런 뻥을 쳐?"

"그럼 내가 그런 애들한테 개무시 당해야 해?





진짜 완전 어이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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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속일 2024-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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