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츠버그로 떠나기 전 다음 계획은 마왕과의 조우였는데 오정희가 이유성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면 무언가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계약서에 녀석과의 만남은 터치하지 않겠다는 내용을 넣었고...
오정희에게 벗으라고 한 건 그녀의 알몸을 감상하고 싶어서나 섹스가 목적은 아니었다. 그녀에게 말했던 이유인 나와의 계약을 얼마만큼 이행하는 지 시험해 보기 위해서라는 건 부분적으로 맞지만 진짜 이유는... 다음에 내게 들려줘야할 이야기들을 좀 더 자세히 할 수 있게 만들고 싶어서였다.
내가 그녀의 모든 것을 본다면 그녀의 묘사들이 좀 더 쉬워질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처음 보는 남자에게 약점이 잡혀 주종계약을 맺었다고 하더라도 이유성과의 사이에 있었던 일을 세부적인 것까지 말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만약 내가 그 곳에서 오정희와 섹스를 시도했다면 어땠을까?
몸은 허락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음에 이어지는 이야기들을 편하게 할 수 있었을지는 모를 일이다. 더 수월할 지도 모르지만 어떤 변수가 생길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어쨌든 강제로 몸을 빼앗긴 데 대한 저항감은 분명히 존재할 테니...
이유성이라는 놈은 그 저항감이 없어질 때까지 오정희와 김유미 앞에서 사라지는 법을 택했다. 그녀들 마음속에‘내가 그렇게 쉽게 보였을까’라는 분노와 ‘다른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면 어떻게 하지’라는 두려움은 녀석이 종적을 감추자 점점 그리움으로 변해갔던 것 같다.
집에 도착해서 잠을 자는 둥 마는 둥하다 새벽부터 신반포역 근처 아파트 단지로 갔고 여수에서 이유성이 만난 제 3의 여자 집인 113동 지하 주차장에서 그녀가 출근하기를 기다렸다. 그 아파트 지하주차장은 두 개 층이었는데 지하 1층 엘리베이터 입구 근처에 차를 주차시킨 후 11층에서 엘리베이터가 섰다가 내려올 때마다 계단을 뛰어 다녔고 8시가 돼서야 40대 초반의 양복을 입은 한 남자와 함께 검정색 코트와 스커트를 입고 지하 1층으로 나오는 그녀를 볼 수 있었다.
그녀가 올라 탄 차량은 신형 은색 벤츠였는데 승용차 뒤에 HYBRID라는 글자가 찍혀 있었다. 주차장을 나간 벤츠는 20여 분 후에 대치동 학원가에 있는 6층 어학원 건물 앞에서 그녀를 내려주고 잠실 방향으로 사라졌다.
급하게 벤츠 차 번호를 적고 근처 골목길에 차를 주차시킨 후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간 나는 잠시 후 새벽반 수업을 받고 나오는 학생들이 꽤 많이 있는 2층 복도를 서성이다 원장실 문이 열린 틈으로 그녀가 앉아 있는 걸 확인하고 프론트에 앉아 있는 여직원에게 물었다.
“저 분이 이언주 원장님 이신가요?”
“예..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죠?”
2 ~ 6층까지 층마다 네 개의 강의실을 갖춘 이언주 어학원의 원장. 이유성의 또 다른 여인 이언주. 여수에서 통화할 때 들은 바론 그녀는 아이들이 있는 유부녀였고 벤츠를 탄 그 남자가 남편일 것이다.
그날 오후 회사에는 출장 처리를 해두고 예전에 선승철이 준 명함을 들고 인쇄소로 갔다. 그리고 그 명함과 같은 디자인에 직책과 이름만 바꾸어서 이유성에게 건넬 명함을 만들었다.
서울지방경찰청 수사 1계 계장 경정 서남원. 회사를 나오기 전 수사 1계에 전화에서 알아낸 이름이다. 나중에 이유성이 혹시 확인해보더라도 홈페이지에 사진은 없다.
인쇄소를 나와 지하철을 타고 압구정 로데오역에서 내렸고 김유미가 알려준 대로 갤러리아 백화점 앞에서 길을 건너 살펴보니 MLB 로고가 걸려 있는 매장이 눈에 들어왔다.
매장 안에는 직원으로 보이는 남녀 2명이 있었고 야구모자, 티셔츠, 자켓 등을 둘러보고 있는 손님들이 몇 명 있었지만 이유성은 보이지 않았다. 난 안으로 걸어 들어가 남자 직원에게 물었다.
“이유성 사장님 계신가요?”
“예. 지금은 안 계십니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죠?”
“만나 뵙고 말씀 드릴 일인데... 언제 쯤 나오시죠?”
“오늘은 저녁에 나오신다고 했습니다. 메모를 남겨 드릴까요?”
“아니요. 그 때 다시 오죠.”
난 매장을 나와 한 블록을 걸어 1층에 있는 카페로 들어갔다. 주문을 한 후 화장실에 들어가 옷 매무새를 한 번 살펴보고 나와서 커피를 마시며 녀석과의 만남을 다시 정리했다.
먼저 녀석에게 오정희, 김유미의 관계를 알고 있다는 식으로 압박할 수는 없다. 그렇게 되면 이유성은 그녀들에게 혹시 날 만난 적이 있냐고 물어볼 가능성도 생기고 무엇보다 그녀들과 이유성의 만남이 그녀들에게 피해가 된다고 이야기 할 수 없기 때문에 나로 인해 어긋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난 어학원 원장인 이언주, 황지연에 대해서만 녀석에게 언급할 수 있다. 어차피 이언주는 나와 만난 적이 없어 녀석이 이언주에게 나에 대해 알아보려 해도 캘게 없으며, 지연은 법원에서 함께 있는 걸 봤기 때문에 적당한 관계를 둘러대면 된다.
지연이 혹시 녀석에게 나에 대해 언급을 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자세히는 안했을 것이고 명함을 주며 경찰대 선배라고 하면 될 것 같은데 그 부분은 내 소개를 하면서 녀석의 표정을 살펴야 할 것 같다.
녀석과의 대화에서 내가 얻고자 하는 건 이유성이 이언주를 자신의 여자로 만들 때 쓴 방법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오정희와, 제대 후 김유미와 사이에서 있었던 일은 자신의 작업이 통할 수 있는 상황이 조성되었지만 그렇지 않은 여자는 어떤 방법이었을까?
친구가 술에 취해 자고 있는 집에서 친구 엄마 방에 들어갈 수 있는 대담함은 고등학교 때부터 가지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경찰 간부인 황지연, 어학원 원장인 이언주는 조각 같은 외모와 대담함만 가지고 가능한 상대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 중 이언주 쪽이 더 어려웠을 것 같은데 지연이야 처녀이니 2살 연하이고 미혼이었던 이유성의 작업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입장이었겠지만 사회적인 명성과 부, 남편, 아이들까지 있는 이언주가 이유성의 여자가 된 것은 그녀의 바람기보다 녀석의 능력으로 보는 것이 정확한 접근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녀석은 과연 어떤 설계를 하고 이언주에게 다가갔을까?
겨울 해가 일찍 저물었고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던 나는 저녁 6시 반 쯤 MLB 매장으로 다시 갔다. 낮에 보았던 남자 직원은 없고 그 자리에 깔끔한 셔츠에 넥타이를 맨 이유성이 서 있었는데 난 다른 곳에 눈을 돌리지 않고 천천히 녀석에게 걸어갔다.
“이유성씨?”
“예.. 그런데... 아...”
녀석은 날 알아보는 눈치였다. 녀석이 알아보기 쉽도록 동부지방법원에서 만날 때 입은 정장에 코트를 입고 갔지만...
“법원에서 한 번 뵌 적 있죠?.”
이 말을 하며 준비해둔 명함을 건넸다.
“예...”
명함을 살펴보던 이유성이 연신 고개를 숙인다. 난 악수를 청하며 은근 슬쩍 말을 놓았다.
“젊은 사람이 수완도 좋네. 이렇게 큰 매장을 운영하기 쉽지 않을 텐데...”
“아.. 아닙니다. 크긴요.”
“겸손까지... 어때 바쁘신가? 긴히 할 말이 좀 있는데...”
“예? 예... 잠시만 기다리시면 시간 낼 수 있습니다. 저기 앉아서 잠시만...”
이유성이 어디론가 전화를 했고 녀석이 주는 차를 마시며 기다리기 시작한지 10여분 후에 낮에 보았던 남직원이 매장으로 들어왔다. 그 직원이 오자마자 매장 구석 쪽으로 데리고 간 이유성은 무언가 조용히 이야기를 했고 곧 내게 와서 말했다.
“됐습니다. 가시죠. 식사는 하셨습니까?”
“아니... 아직... 사장님은 식사 하셨고?”
“아닙니다. 근처에 일식집 괜찮은 곳이 있는데 어떠십니까?”
“일식 괜찮지. 그럴까? 그럼...”
“잠시만 기다리시면 예약이 가능한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이유성과 5분 정도 걸어서 간판이 한자로 쓰여진 일식집으로 들어서자 종업원이 바로 방으로 안내했다. 방안에 들어서자 얼굴이 하얀 일본 여인이 담배를 피우는 그림이 걸려 있었고 2명이 식사할 수 있도록 테이블이 세팅되어 있었다. 우린 와인을 잔에 채워 입을 축였다.
“단골인가? 분위기는 괜찮네..”
“예. 가끔 옵니다. 마음에 드셔야 할 텐데... 걱정입니다.”
녀석은 내가 무슨 VIP나 되는 것처럼 깍듯이 예의를 갖추고 있었다. 지연과 법원에서 함께 있는 걸 봤고 명함을 보여주긴 했지만 선승철이 말한 대로 죽으라면 죽는 시늉도 할 분위기다.
“걱정은 무슨... 음식 나오기 전에 간단히 내 소개를 다시 하지. 난 지연이의 대학교 선배네. 내가 졸업하고 나서야 그 애가 입학했지만... 선승철이라고 후배 녀석이 지연이와 애인 사이 였지.
동문들 모임에 갔다가 우연히 그 사실을 알았을 땐 이미 난 결혼을 한 후여서... 부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네. 그러다 지연이가 승철이가 아닌 다른 사람과 결혼을 했다는 이야길 들었어. 깜짝 놀랐지...
세월이 몇 년 흐르는 사이 난 이혼을 했고 가끔씩 안부를 주고받던 지연이에게 연락이 와서 만나게 됐어. 그 이후로 몇 번 만났는데 어느 날 며칠 후에 이혼 절차를 밟으려 법원에 가는 데 같이 좀 가주실 수 있냐고 전화가 왔더군.
난 그 의미를 나름대로 크게 해석했고 지연이가 전 남편인 자네에 대해 뭘 자세히 이야기 해 준적은 없지만 그 것과 상관없이 시간이 좀 흐르고 나면 프로포즈를 하려고 했어. 지연일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두고 있었는데 오랜 꿈이 이뤄지는 줄 알았지.
그런데...
아.. 술 한 잔 하지!“
“아.. 예...”
난 이유성의 주량을 테스트 해 볼 작정으로 와인을 놔둔 채 소주를 시켰고 녀석의 빈 잔을 채워준 후에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런데 법원에서 스포츠카를 타고 온 자네를 보고 갑자기 다른 생각이 들더군. 웬만한 영화배우 뺨 칠 정도의 얼굴에 탄탄한 체격.. 한참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눈에 거슬린 만한 행동도 아예 안하더군. 요즘 젊은 사람들 안 그런데... 이를테면 침을 뱉고 담배를 아무데서나 핀다거나... 잠시도 쉬지 않고 핸드폰을 들여다보거나...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 행동 같은 거 말이야.
보통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 뭐하는 사람인지 궁금하더군. 자네한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래서 한 달 쯤 뒤에 지연이와 자네가 이혼 확인을 받기 위해 법원에서 만난 날 부하 직원 1명을 자네에게 붙였어. 다른 뜻은 없고 호기심 반... 그리고... 지연이가 자네에 대해 말을 하지 않으니 자네가 뭐하는 사람인지 무엇 때문에 이혼을 했는지도 알아보고 싶었거든...
어쨌든 그 일은 미안하게 됐네. 자 한 잔 하지.“
녀석의 표정은 미행을 했다는 말을 듣고도 별다르게 변화가 없었다. 서론을 끝낸 나는 술과 안주로 사시미를 먹으며 약간 뜸을 들였고 이유성에게도 소주를 권했다.
“주량이 어떻게 되지?”
“예... 소주 2병 정도 마십니다. 한 잔 받으십시오.”
우린 주거니 받거니 하며 순식간에 소주 1병을 비우고 두 번째 병을 땄다. 광어와 도미, 전복 등 싱싱한 해산물이 줄을 이어 들어왔고 이유성은 내가 술병을 들면 기다렸다는 듯이 원 샷을, 물론 나도 그 속도에 맞춰 잔을 비워갔다.
“올해 나이가 몇이지?”
“서른 하나입니다.”
“그래? 그럼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인데 형님이라고 부르지. 어때? 난 올해 마흔이야.”
“예. 앞으로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이유성은 전 처와 결혼을 하려는 남자를 형님으로 모시는 것을 전혀 주저하지 않았지만 난 마음속으로 녀석을 압박할 시나리오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렇게 꼬박 하루 반 동안 자네를 따라 다닌 형사가 핸드폰으로 자네와 2명의 여자 사진을 찍어서 나한테 전송을 했어. 한 여인은 여수 공항에서 또 다른 여인은 그 날 저녁 M 호텔 로비에서 찍은 사진이었는데 두 번째 여인이 김포 행 오후 두시 반 비행기를 탄다는 이야기도 하더군. 그래서 내가 김포에서 기다리다 하얀 원피스를 입은 두 번째 여인이 국내선 청사를 나오는 것을 따라 붙었지. 우여곡절 끝에 알아낸 그 여인은 대치동에 있는 어학원 원장인 이언주씨더군.”
난 미리 준비해둔 호텔 로비에서 이유성과 이언주가 같이 있는 사진을 녀석 앞으로 내밀었다. 사진을 들고 확인한 이유성이 놀란 듯이 나를 쳐다보았고 난 무심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첫 번째 여인도 상당한 미인처럼 보였는데 누구인지 알아보기 힘들었어. 그나저나 이틀 동안 두 명의 여인을 만나다니 대단하더군. 그래서 생각했지. 이혼의 이유는 아마 자네의 그 여성 편력 때문이 아닌가 하고...
이쯤 되면 궁금해 졌겠지? 내가 왜 자네를 만나러 왔을까? 어차피 지연이와는 이혼을 한 이후에 벌어진 일이니 내가 굳이 상관할 바는 아닐텐데... 이언주가 유부녀인게 문제일까? 그게 아니면 뭐지?
어때. 내 말이 맞나?“
“예... 어떻게 제 마음을... 절 왜 만나자고 하신 겁니까?”
“급할 건 없어. 술 한 잔 받지.”
난 다시 이유성에게 술을 따랐고 그 때 문이 열리더니 장어와 성게 알이 접시에 담겨 나왔다. 아직까지는 순조롭게 가고 있었지만 난 녀석이 무언가를 눈치 채지 않도록 본론을 꺼내기 전에 한 잔이라도 술을 더 먹이고 싶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 날 이후 난 자네에 대해 잊고 있었네. 남자가 바람을 피운 건 여자 입장에서는 충분히 이혼 사유가 될 테니 지연이가 말 하지 않은 이유를 알았다고 생각했거든. 그리고 지연이에게 집중했어. 당장은 아니지만 몇 달 흐르고 난 후에 청혼을 하려고 했지.
그런데 한 달이나 지났을까? 지연이가 갑자기 미국으로 연수를 떠난다고 하더군. 난 말려보려고 했지만 내가 알았을 때는 이미 연수 대상자로 인사발령까지 난 상황이었어. 어이가 없었지. 비록 1년짜리 코스긴 하지만... 강원도에서 그 애를 서울로 데려오려고 나름 손을 쓰고 있는 중이었는데... 그리고 연수야 그렇다 치더라고 정작 문제는 지연이가 갑자기 날 피하는 거였어.
갑자기 왜? 이유가 뭐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난 그 이유를 도저히 알 수 없었고 그러는 사이 시간이 지나 지연인 미국으로 가 버렸지. 지금도 거기 있지만...“
그 때 난 이 녀석이 지연일 다시 건드린 게 아닌가 의심했었다. 이유성의 얼굴로 시선을 돌리자 녀석이 외면한다. 내 짐작이 맞았을 지도...
“두어 달 방황했었지. 어떤 조직이든 어느 정도 위치에 오르면 정작 할 일은 별로 없네. 회사에 나가선 아침에 일을 좀 하다 오후부터는 멍하니 창 밖만 바라보기도 하고 출장을 내놓고 사우나에 가서 잠을 자다 오곤 했지.
그러다 선승철이라는 후배 생각이 나더군. 녀석과 지연도 결혼하기 직전까지 갔었다 헤어졌었거든... 그거야 그 땐 지연이가 자네를 만났기 때문이겠지만...“
말을 멈추고 이유성과 술을 몇 잔 주고 받으니 테이블 위엔 소주 3병이 비워져 있었다. 다시 새 병을 딴후 녀석의 잔에 술을 채워 주고 주머니 속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재떨이가 없네.”
“예 가져오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말씀 중에 죄송한데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잠시 후에 이유성이 화장실에서 돌아온 후에도 난 담배를 피우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시선을 아래로 내린 채 한참 동안 한 숨을 계속 쉬었다.
“지연이가 떠날 때 내게 보인 태도로 봐서는 돌아온다고 해도 잘 될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이 없는 거겠지. 그때 난 좀 회의적인 생각이 들었네.
어쨌든 그렇게 시간을 보내던 중에 한 달 전쯤에 지인의 소개로 여자 한 명을 소개 받았어. 나이는 나보다 5살 어리지만 전 남편과의 사이에 아이가 한 명 있어서 키우고 있다고 하더군.
처음엔 나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는데... 지인이 막무가내로 한 번 보고 나서 이야기 하자고 해서 나갔다가... 그만 첫 눈에 반해 버렸네.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여교사인데 지적이고 청순해 보이는 외모에 음 뭐라고 할까? 조신해 보인다고 할까?
같이 차를 마시며 한 시간 정도 이야기를 했는데 다음 날 생각해보니 하나도 기억이 안나는 거야. 이 나이에 그 여자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가슴이 설레서 정신이 없었던 거지.
주말마다 3~4번 정도 만났어. 영화도 보고... 드라이브도 하고... 내가 이야기 할 때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들어주곤 하더군. 그래서... “
이야기를 하며 이유성을 살폈는데 별다르게 술에 취해 보이지 않았다. 소주 2병은 가까이 먹인 것 같은데... 난 다시 술을 권하며 나도 한 잔을 비웠다.
“초혼도 아니고 재혼이고... 게다가 어느 정도 나에 대해 관심도 있어 보여서... 지난 주말에 밤을 같이 보내려고 마음을 먹었어. 장흥 유원지 카페에서 커피도 마시고 호수 공원도 산책 했지. 분위기가 좋아졌고 저녁을 먹으며 술도 몇 잔 같이 마셨어. 정말 예쁘더군.
술집을 나오며 자연스럽게 좀 피곤한데 어디 가서 쉬었다가 가자고 했지. 그런데... 그녀가 하는 말이... 충격이었어. 그 동안 몇 번이나 망설였는데 이혼한 지 얼마 오래되지도 않았고 누군가를 만난다는 게 부담된다는 거야. 아이가 5살인데 뭐라고 설명하기도 힘들고...
적당한 기회에 말하려고 했는데 그만 그 시기를 놓친 것 같다고. 그만 만나고 싶다고 하더군... 참... 지연이가 미국으로 가버렸을 때보다 몇 배 더 아팠어. 내 평생 그런 여자 다시 못 만날 것 같은데...
며칠을 술독에 빠져 살다가 갑자기 자네 생각이 나더군. 그게 오늘 자네를 만나러 온 이유야. 이제 알겠나?“
“아니요. 무슨 말씀이신지...”
“난 이 여자를 놓치고 싶지 않네. 나 싫다는 여자 어쩔 수 없다는 거 알지만 그렇게 싫은 눈치도 아니었거든. 자네라면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날 도와줘.”
“제가 어떻게 형님을 도와드리면 되죠? 잘 모르겠습니다. 좀 구체적으로...”
“이언주. 그 여자 세련되고 정숙해 보이는 커리어 우먼이야.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지. 아이들도 있고... 물론 남편도... 아무리 자네가 능력 있는 꽃미남에 탄탄한 근육으로 여자들 가슴을 설레게 한다고 해도 그렇게 쉽게 넘어갈 사람은 아닐 거야. 뭔가 있어. 무슨 방법이 있겠지. 그걸 알려주게.
내가 경찰이라는 거 잊어도 좋아. 어떤 방법이라도 난 그 여자만 내 걸로 만들면 돼. 도와준다면 평생 그 은혜는 잊지 않겠네.“
이유성은 얼굴이 굳어졌고 입을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녀석의 얼굴을 보며 애걸복걸 이야기 하던 나는 갑자기 표정을 바꿨다.
“이야기 해줄 수 없다는 건가? 자네가 그렇게 나올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지만...
실은 오늘 아침에 미국에서 온 지연이 소식을 듣고 왔네. 무슨 산에 가서 조난을 당했는데 겨우 구조가 됐다더군. 그런데 등산을 간 게 아니라 자살을 시도했다는 이야기도 있던데...
지금은 지연이를 내 여자로 염두에 두고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자살이라... 그 이유가 결혼 실패라면... 자네 책임도 꽤 있는 거 아닐까?
만일 자네가 지연이와 헤어지면서 얻은 게 이언주라면... 내가 다시 잃게 만들 수도 있어. 그 여자 남편한테 귀띔만 하면 간단하겠지. 그렇게 되면 이언주를 잃든지, 아니면 이언주가 괴로워하는 걸 보든지.. 둘 중에 하나일 것 같은데...
그게 아니라 이언주가 남편을 버리고 자네에게 오면 오히려 자네를 도운 게 되려나?“
잠시 내 얼굴을 응시하던 이유성이 무겁게 입을 떼며 말했다.
“누나가 자살을 하려 했다구요? 그게 정말입니까?”
누나? 녀석은 헤어진 전처를 아직도 누나라고 부르고 있었다.
“응. 별다른 장비도 없이 눈이 쌓인 산... 등반 코스도 아닌 곳에서 발견 됐다니.. 아마도...”
이유성은 미간을 약간 찌푸리더니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몇 분의 시간이 흘렀을까? 녀석의 핸드폰이 울리더니 무언가를 확인하고 나서 고개를 약간 숙인 채 한참을 입을 열지 않다가 내게 물었다.
“그럼 제게 원하시는 게 그 분이 형님 여자가 될 수 있는 방법입니까?”
“응. 그런 셈이지. 그런데... 그게 너무 억지인 것 같으면... 그럼 이렇게 하세. 이언주를 자네의 여자로 어떻게 만들었는지 말해주게. 이를테면 자네만의 노하우 같은 거...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생각하지 말고... 혹시 불법적인 방법도 상관없네. 그 여자 앞에서 난 수컷이지 경찰이 아니니까...”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이 동그란 눈을 깜박거리던 이유성이 이내 결정한 듯이 날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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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를 좀 빨리 하려고 나름 노력은 하는 데 잘 안됩니다. ^^
그래도 계속 쓰고는 있고 다음 편도 빠른 시간 내에 올리겠습니다.
오정희에게 벗으라고 한 건 그녀의 알몸을 감상하고 싶어서나 섹스가 목적은 아니었다. 그녀에게 말했던 이유인 나와의 계약을 얼마만큼 이행하는 지 시험해 보기 위해서라는 건 부분적으로 맞지만 진짜 이유는... 다음에 내게 들려줘야할 이야기들을 좀 더 자세히 할 수 있게 만들고 싶어서였다.
내가 그녀의 모든 것을 본다면 그녀의 묘사들이 좀 더 쉬워질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처음 보는 남자에게 약점이 잡혀 주종계약을 맺었다고 하더라도 이유성과의 사이에 있었던 일을 세부적인 것까지 말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만약 내가 그 곳에서 오정희와 섹스를 시도했다면 어땠을까?
몸은 허락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음에 이어지는 이야기들을 편하게 할 수 있었을지는 모를 일이다. 더 수월할 지도 모르지만 어떤 변수가 생길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어쨌든 강제로 몸을 빼앗긴 데 대한 저항감은 분명히 존재할 테니...
이유성이라는 놈은 그 저항감이 없어질 때까지 오정희와 김유미 앞에서 사라지는 법을 택했다. 그녀들 마음속에‘내가 그렇게 쉽게 보였을까’라는 분노와 ‘다른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면 어떻게 하지’라는 두려움은 녀석이 종적을 감추자 점점 그리움으로 변해갔던 것 같다.
집에 도착해서 잠을 자는 둥 마는 둥하다 새벽부터 신반포역 근처 아파트 단지로 갔고 여수에서 이유성이 만난 제 3의 여자 집인 113동 지하 주차장에서 그녀가 출근하기를 기다렸다. 그 아파트 지하주차장은 두 개 층이었는데 지하 1층 엘리베이터 입구 근처에 차를 주차시킨 후 11층에서 엘리베이터가 섰다가 내려올 때마다 계단을 뛰어 다녔고 8시가 돼서야 40대 초반의 양복을 입은 한 남자와 함께 검정색 코트와 스커트를 입고 지하 1층으로 나오는 그녀를 볼 수 있었다.
그녀가 올라 탄 차량은 신형 은색 벤츠였는데 승용차 뒤에 HYBRID라는 글자가 찍혀 있었다. 주차장을 나간 벤츠는 20여 분 후에 대치동 학원가에 있는 6층 어학원 건물 앞에서 그녀를 내려주고 잠실 방향으로 사라졌다.
급하게 벤츠 차 번호를 적고 근처 골목길에 차를 주차시킨 후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간 나는 잠시 후 새벽반 수업을 받고 나오는 학생들이 꽤 많이 있는 2층 복도를 서성이다 원장실 문이 열린 틈으로 그녀가 앉아 있는 걸 확인하고 프론트에 앉아 있는 여직원에게 물었다.
“저 분이 이언주 원장님 이신가요?”
“예..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죠?”
2 ~ 6층까지 층마다 네 개의 강의실을 갖춘 이언주 어학원의 원장. 이유성의 또 다른 여인 이언주. 여수에서 통화할 때 들은 바론 그녀는 아이들이 있는 유부녀였고 벤츠를 탄 그 남자가 남편일 것이다.
그날 오후 회사에는 출장 처리를 해두고 예전에 선승철이 준 명함을 들고 인쇄소로 갔다. 그리고 그 명함과 같은 디자인에 직책과 이름만 바꾸어서 이유성에게 건넬 명함을 만들었다.
서울지방경찰청 수사 1계 계장 경정 서남원. 회사를 나오기 전 수사 1계에 전화에서 알아낸 이름이다. 나중에 이유성이 혹시 확인해보더라도 홈페이지에 사진은 없다.
인쇄소를 나와 지하철을 타고 압구정 로데오역에서 내렸고 김유미가 알려준 대로 갤러리아 백화점 앞에서 길을 건너 살펴보니 MLB 로고가 걸려 있는 매장이 눈에 들어왔다.
매장 안에는 직원으로 보이는 남녀 2명이 있었고 야구모자, 티셔츠, 자켓 등을 둘러보고 있는 손님들이 몇 명 있었지만 이유성은 보이지 않았다. 난 안으로 걸어 들어가 남자 직원에게 물었다.
“이유성 사장님 계신가요?”
“예. 지금은 안 계십니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죠?”
“만나 뵙고 말씀 드릴 일인데... 언제 쯤 나오시죠?”
“오늘은 저녁에 나오신다고 했습니다. 메모를 남겨 드릴까요?”
“아니요. 그 때 다시 오죠.”
난 매장을 나와 한 블록을 걸어 1층에 있는 카페로 들어갔다. 주문을 한 후 화장실에 들어가 옷 매무새를 한 번 살펴보고 나와서 커피를 마시며 녀석과의 만남을 다시 정리했다.
먼저 녀석에게 오정희, 김유미의 관계를 알고 있다는 식으로 압박할 수는 없다. 그렇게 되면 이유성은 그녀들에게 혹시 날 만난 적이 있냐고 물어볼 가능성도 생기고 무엇보다 그녀들과 이유성의 만남이 그녀들에게 피해가 된다고 이야기 할 수 없기 때문에 나로 인해 어긋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난 어학원 원장인 이언주, 황지연에 대해서만 녀석에게 언급할 수 있다. 어차피 이언주는 나와 만난 적이 없어 녀석이 이언주에게 나에 대해 알아보려 해도 캘게 없으며, 지연은 법원에서 함께 있는 걸 봤기 때문에 적당한 관계를 둘러대면 된다.
지연이 혹시 녀석에게 나에 대해 언급을 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자세히는 안했을 것이고 명함을 주며 경찰대 선배라고 하면 될 것 같은데 그 부분은 내 소개를 하면서 녀석의 표정을 살펴야 할 것 같다.
녀석과의 대화에서 내가 얻고자 하는 건 이유성이 이언주를 자신의 여자로 만들 때 쓴 방법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오정희와, 제대 후 김유미와 사이에서 있었던 일은 자신의 작업이 통할 수 있는 상황이 조성되었지만 그렇지 않은 여자는 어떤 방법이었을까?
친구가 술에 취해 자고 있는 집에서 친구 엄마 방에 들어갈 수 있는 대담함은 고등학교 때부터 가지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경찰 간부인 황지연, 어학원 원장인 이언주는 조각 같은 외모와 대담함만 가지고 가능한 상대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 중 이언주 쪽이 더 어려웠을 것 같은데 지연이야 처녀이니 2살 연하이고 미혼이었던 이유성의 작업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입장이었겠지만 사회적인 명성과 부, 남편, 아이들까지 있는 이언주가 이유성의 여자가 된 것은 그녀의 바람기보다 녀석의 능력으로 보는 것이 정확한 접근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녀석은 과연 어떤 설계를 하고 이언주에게 다가갔을까?
겨울 해가 일찍 저물었고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던 나는 저녁 6시 반 쯤 MLB 매장으로 다시 갔다. 낮에 보았던 남자 직원은 없고 그 자리에 깔끔한 셔츠에 넥타이를 맨 이유성이 서 있었는데 난 다른 곳에 눈을 돌리지 않고 천천히 녀석에게 걸어갔다.
“이유성씨?”
“예.. 그런데... 아...”
녀석은 날 알아보는 눈치였다. 녀석이 알아보기 쉽도록 동부지방법원에서 만날 때 입은 정장에 코트를 입고 갔지만...
“법원에서 한 번 뵌 적 있죠?.”
이 말을 하며 준비해둔 명함을 건넸다.
“예...”
명함을 살펴보던 이유성이 연신 고개를 숙인다. 난 악수를 청하며 은근 슬쩍 말을 놓았다.
“젊은 사람이 수완도 좋네. 이렇게 큰 매장을 운영하기 쉽지 않을 텐데...”
“아.. 아닙니다. 크긴요.”
“겸손까지... 어때 바쁘신가? 긴히 할 말이 좀 있는데...”
“예? 예... 잠시만 기다리시면 시간 낼 수 있습니다. 저기 앉아서 잠시만...”
이유성이 어디론가 전화를 했고 녀석이 주는 차를 마시며 기다리기 시작한지 10여분 후에 낮에 보았던 남직원이 매장으로 들어왔다. 그 직원이 오자마자 매장 구석 쪽으로 데리고 간 이유성은 무언가 조용히 이야기를 했고 곧 내게 와서 말했다.
“됐습니다. 가시죠. 식사는 하셨습니까?”
“아니... 아직... 사장님은 식사 하셨고?”
“아닙니다. 근처에 일식집 괜찮은 곳이 있는데 어떠십니까?”
“일식 괜찮지. 그럴까? 그럼...”
“잠시만 기다리시면 예약이 가능한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이유성과 5분 정도 걸어서 간판이 한자로 쓰여진 일식집으로 들어서자 종업원이 바로 방으로 안내했다. 방안에 들어서자 얼굴이 하얀 일본 여인이 담배를 피우는 그림이 걸려 있었고 2명이 식사할 수 있도록 테이블이 세팅되어 있었다. 우린 와인을 잔에 채워 입을 축였다.
“단골인가? 분위기는 괜찮네..”
“예. 가끔 옵니다. 마음에 드셔야 할 텐데... 걱정입니다.”
녀석은 내가 무슨 VIP나 되는 것처럼 깍듯이 예의를 갖추고 있었다. 지연과 법원에서 함께 있는 걸 봤고 명함을 보여주긴 했지만 선승철이 말한 대로 죽으라면 죽는 시늉도 할 분위기다.
“걱정은 무슨... 음식 나오기 전에 간단히 내 소개를 다시 하지. 난 지연이의 대학교 선배네. 내가 졸업하고 나서야 그 애가 입학했지만... 선승철이라고 후배 녀석이 지연이와 애인 사이 였지.
동문들 모임에 갔다가 우연히 그 사실을 알았을 땐 이미 난 결혼을 한 후여서... 부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네. 그러다 지연이가 승철이가 아닌 다른 사람과 결혼을 했다는 이야길 들었어. 깜짝 놀랐지...
세월이 몇 년 흐르는 사이 난 이혼을 했고 가끔씩 안부를 주고받던 지연이에게 연락이 와서 만나게 됐어. 그 이후로 몇 번 만났는데 어느 날 며칠 후에 이혼 절차를 밟으려 법원에 가는 데 같이 좀 가주실 수 있냐고 전화가 왔더군.
난 그 의미를 나름대로 크게 해석했고 지연이가 전 남편인 자네에 대해 뭘 자세히 이야기 해 준적은 없지만 그 것과 상관없이 시간이 좀 흐르고 나면 프로포즈를 하려고 했어. 지연일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두고 있었는데 오랜 꿈이 이뤄지는 줄 알았지.
그런데...
아.. 술 한 잔 하지!“
“아.. 예...”
난 이유성의 주량을 테스트 해 볼 작정으로 와인을 놔둔 채 소주를 시켰고 녀석의 빈 잔을 채워준 후에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런데 법원에서 스포츠카를 타고 온 자네를 보고 갑자기 다른 생각이 들더군. 웬만한 영화배우 뺨 칠 정도의 얼굴에 탄탄한 체격.. 한참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눈에 거슬린 만한 행동도 아예 안하더군. 요즘 젊은 사람들 안 그런데... 이를테면 침을 뱉고 담배를 아무데서나 핀다거나... 잠시도 쉬지 않고 핸드폰을 들여다보거나...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 행동 같은 거 말이야.
보통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 뭐하는 사람인지 궁금하더군. 자네한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래서 한 달 쯤 뒤에 지연이와 자네가 이혼 확인을 받기 위해 법원에서 만난 날 부하 직원 1명을 자네에게 붙였어. 다른 뜻은 없고 호기심 반... 그리고... 지연이가 자네에 대해 말을 하지 않으니 자네가 뭐하는 사람인지 무엇 때문에 이혼을 했는지도 알아보고 싶었거든...
어쨌든 그 일은 미안하게 됐네. 자 한 잔 하지.“
녀석의 표정은 미행을 했다는 말을 듣고도 별다르게 변화가 없었다. 서론을 끝낸 나는 술과 안주로 사시미를 먹으며 약간 뜸을 들였고 이유성에게도 소주를 권했다.
“주량이 어떻게 되지?”
“예... 소주 2병 정도 마십니다. 한 잔 받으십시오.”
우린 주거니 받거니 하며 순식간에 소주 1병을 비우고 두 번째 병을 땄다. 광어와 도미, 전복 등 싱싱한 해산물이 줄을 이어 들어왔고 이유성은 내가 술병을 들면 기다렸다는 듯이 원 샷을, 물론 나도 그 속도에 맞춰 잔을 비워갔다.
“올해 나이가 몇이지?”
“서른 하나입니다.”
“그래? 그럼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인데 형님이라고 부르지. 어때? 난 올해 마흔이야.”
“예. 앞으로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이유성은 전 처와 결혼을 하려는 남자를 형님으로 모시는 것을 전혀 주저하지 않았지만 난 마음속으로 녀석을 압박할 시나리오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렇게 꼬박 하루 반 동안 자네를 따라 다닌 형사가 핸드폰으로 자네와 2명의 여자 사진을 찍어서 나한테 전송을 했어. 한 여인은 여수 공항에서 또 다른 여인은 그 날 저녁 M 호텔 로비에서 찍은 사진이었는데 두 번째 여인이 김포 행 오후 두시 반 비행기를 탄다는 이야기도 하더군. 그래서 내가 김포에서 기다리다 하얀 원피스를 입은 두 번째 여인이 국내선 청사를 나오는 것을 따라 붙었지. 우여곡절 끝에 알아낸 그 여인은 대치동에 있는 어학원 원장인 이언주씨더군.”
난 미리 준비해둔 호텔 로비에서 이유성과 이언주가 같이 있는 사진을 녀석 앞으로 내밀었다. 사진을 들고 확인한 이유성이 놀란 듯이 나를 쳐다보았고 난 무심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첫 번째 여인도 상당한 미인처럼 보였는데 누구인지 알아보기 힘들었어. 그나저나 이틀 동안 두 명의 여인을 만나다니 대단하더군. 그래서 생각했지. 이혼의 이유는 아마 자네의 그 여성 편력 때문이 아닌가 하고...
이쯤 되면 궁금해 졌겠지? 내가 왜 자네를 만나러 왔을까? 어차피 지연이와는 이혼을 한 이후에 벌어진 일이니 내가 굳이 상관할 바는 아닐텐데... 이언주가 유부녀인게 문제일까? 그게 아니면 뭐지?
어때. 내 말이 맞나?“
“예... 어떻게 제 마음을... 절 왜 만나자고 하신 겁니까?”
“급할 건 없어. 술 한 잔 받지.”
난 다시 이유성에게 술을 따랐고 그 때 문이 열리더니 장어와 성게 알이 접시에 담겨 나왔다. 아직까지는 순조롭게 가고 있었지만 난 녀석이 무언가를 눈치 채지 않도록 본론을 꺼내기 전에 한 잔이라도 술을 더 먹이고 싶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 날 이후 난 자네에 대해 잊고 있었네. 남자가 바람을 피운 건 여자 입장에서는 충분히 이혼 사유가 될 테니 지연이가 말 하지 않은 이유를 알았다고 생각했거든. 그리고 지연이에게 집중했어. 당장은 아니지만 몇 달 흐르고 난 후에 청혼을 하려고 했지.
그런데 한 달이나 지났을까? 지연이가 갑자기 미국으로 연수를 떠난다고 하더군. 난 말려보려고 했지만 내가 알았을 때는 이미 연수 대상자로 인사발령까지 난 상황이었어. 어이가 없었지. 비록 1년짜리 코스긴 하지만... 강원도에서 그 애를 서울로 데려오려고 나름 손을 쓰고 있는 중이었는데... 그리고 연수야 그렇다 치더라고 정작 문제는 지연이가 갑자기 날 피하는 거였어.
갑자기 왜? 이유가 뭐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난 그 이유를 도저히 알 수 없었고 그러는 사이 시간이 지나 지연인 미국으로 가 버렸지. 지금도 거기 있지만...“
그 때 난 이 녀석이 지연일 다시 건드린 게 아닌가 의심했었다. 이유성의 얼굴로 시선을 돌리자 녀석이 외면한다. 내 짐작이 맞았을 지도...
“두어 달 방황했었지. 어떤 조직이든 어느 정도 위치에 오르면 정작 할 일은 별로 없네. 회사에 나가선 아침에 일을 좀 하다 오후부터는 멍하니 창 밖만 바라보기도 하고 출장을 내놓고 사우나에 가서 잠을 자다 오곤 했지.
그러다 선승철이라는 후배 생각이 나더군. 녀석과 지연도 결혼하기 직전까지 갔었다 헤어졌었거든... 그거야 그 땐 지연이가 자네를 만났기 때문이겠지만...“
말을 멈추고 이유성과 술을 몇 잔 주고 받으니 테이블 위엔 소주 3병이 비워져 있었다. 다시 새 병을 딴후 녀석의 잔에 술을 채워 주고 주머니 속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재떨이가 없네.”
“예 가져오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말씀 중에 죄송한데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잠시 후에 이유성이 화장실에서 돌아온 후에도 난 담배를 피우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시선을 아래로 내린 채 한참 동안 한 숨을 계속 쉬었다.
“지연이가 떠날 때 내게 보인 태도로 봐서는 돌아온다고 해도 잘 될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이 없는 거겠지. 그때 난 좀 회의적인 생각이 들었네.
어쨌든 그렇게 시간을 보내던 중에 한 달 전쯤에 지인의 소개로 여자 한 명을 소개 받았어. 나이는 나보다 5살 어리지만 전 남편과의 사이에 아이가 한 명 있어서 키우고 있다고 하더군.
처음엔 나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는데... 지인이 막무가내로 한 번 보고 나서 이야기 하자고 해서 나갔다가... 그만 첫 눈에 반해 버렸네.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여교사인데 지적이고 청순해 보이는 외모에 음 뭐라고 할까? 조신해 보인다고 할까?
같이 차를 마시며 한 시간 정도 이야기를 했는데 다음 날 생각해보니 하나도 기억이 안나는 거야. 이 나이에 그 여자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가슴이 설레서 정신이 없었던 거지.
주말마다 3~4번 정도 만났어. 영화도 보고... 드라이브도 하고... 내가 이야기 할 때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들어주곤 하더군. 그래서... “
이야기를 하며 이유성을 살폈는데 별다르게 술에 취해 보이지 않았다. 소주 2병은 가까이 먹인 것 같은데... 난 다시 술을 권하며 나도 한 잔을 비웠다.
“초혼도 아니고 재혼이고... 게다가 어느 정도 나에 대해 관심도 있어 보여서... 지난 주말에 밤을 같이 보내려고 마음을 먹었어. 장흥 유원지 카페에서 커피도 마시고 호수 공원도 산책 했지. 분위기가 좋아졌고 저녁을 먹으며 술도 몇 잔 같이 마셨어. 정말 예쁘더군.
술집을 나오며 자연스럽게 좀 피곤한데 어디 가서 쉬었다가 가자고 했지. 그런데... 그녀가 하는 말이... 충격이었어. 그 동안 몇 번이나 망설였는데 이혼한 지 얼마 오래되지도 않았고 누군가를 만난다는 게 부담된다는 거야. 아이가 5살인데 뭐라고 설명하기도 힘들고...
적당한 기회에 말하려고 했는데 그만 그 시기를 놓친 것 같다고. 그만 만나고 싶다고 하더군... 참... 지연이가 미국으로 가버렸을 때보다 몇 배 더 아팠어. 내 평생 그런 여자 다시 못 만날 것 같은데...
며칠을 술독에 빠져 살다가 갑자기 자네 생각이 나더군. 그게 오늘 자네를 만나러 온 이유야. 이제 알겠나?“
“아니요. 무슨 말씀이신지...”
“난 이 여자를 놓치고 싶지 않네. 나 싫다는 여자 어쩔 수 없다는 거 알지만 그렇게 싫은 눈치도 아니었거든. 자네라면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날 도와줘.”
“제가 어떻게 형님을 도와드리면 되죠? 잘 모르겠습니다. 좀 구체적으로...”
“이언주. 그 여자 세련되고 정숙해 보이는 커리어 우먼이야.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지. 아이들도 있고... 물론 남편도... 아무리 자네가 능력 있는 꽃미남에 탄탄한 근육으로 여자들 가슴을 설레게 한다고 해도 그렇게 쉽게 넘어갈 사람은 아닐 거야. 뭔가 있어. 무슨 방법이 있겠지. 그걸 알려주게.
내가 경찰이라는 거 잊어도 좋아. 어떤 방법이라도 난 그 여자만 내 걸로 만들면 돼. 도와준다면 평생 그 은혜는 잊지 않겠네.“
이유성은 얼굴이 굳어졌고 입을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녀석의 얼굴을 보며 애걸복걸 이야기 하던 나는 갑자기 표정을 바꿨다.
“이야기 해줄 수 없다는 건가? 자네가 그렇게 나올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지만...
실은 오늘 아침에 미국에서 온 지연이 소식을 듣고 왔네. 무슨 산에 가서 조난을 당했는데 겨우 구조가 됐다더군. 그런데 등산을 간 게 아니라 자살을 시도했다는 이야기도 있던데...
지금은 지연이를 내 여자로 염두에 두고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자살이라... 그 이유가 결혼 실패라면... 자네 책임도 꽤 있는 거 아닐까?
만일 자네가 지연이와 헤어지면서 얻은 게 이언주라면... 내가 다시 잃게 만들 수도 있어. 그 여자 남편한테 귀띔만 하면 간단하겠지. 그렇게 되면 이언주를 잃든지, 아니면 이언주가 괴로워하는 걸 보든지.. 둘 중에 하나일 것 같은데...
그게 아니라 이언주가 남편을 버리고 자네에게 오면 오히려 자네를 도운 게 되려나?“
잠시 내 얼굴을 응시하던 이유성이 무겁게 입을 떼며 말했다.
“누나가 자살을 하려 했다구요? 그게 정말입니까?”
누나? 녀석은 헤어진 전처를 아직도 누나라고 부르고 있었다.
“응. 별다른 장비도 없이 눈이 쌓인 산... 등반 코스도 아닌 곳에서 발견 됐다니.. 아마도...”
이유성은 미간을 약간 찌푸리더니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몇 분의 시간이 흘렀을까? 녀석의 핸드폰이 울리더니 무언가를 확인하고 나서 고개를 약간 숙인 채 한참을 입을 열지 않다가 내게 물었다.
“그럼 제게 원하시는 게 그 분이 형님 여자가 될 수 있는 방법입니까?”
“응. 그런 셈이지. 그런데... 그게 너무 억지인 것 같으면... 그럼 이렇게 하세. 이언주를 자네의 여자로 어떻게 만들었는지 말해주게. 이를테면 자네만의 노하우 같은 거...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생각하지 말고... 혹시 불법적인 방법도 상관없네. 그 여자 앞에서 난 수컷이지 경찰이 아니니까...”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이 동그란 눈을 깜박거리던 이유성이 이내 결정한 듯이 날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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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를 좀 빨리 하려고 나름 노력은 하는 데 잘 안됩니다. ^^
그래도 계속 쓰고는 있고 다음 편도 빠른 시간 내에 올리겠습니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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