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회장과 회장의 딸 임영선
총무과 사무실 문 앞에 있는 내 자리에서 최수희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내가 들어서자 벌떡 일어서며 내게 속삭인다.
"회장님 비서야."
우리를 기다리는 사람은 부장 혼자가 아니었다. 회장의 비서라는 여자도 있다. 그런데 이상한 장면이 눈에 띈다. 강은영 과장의 자리에는 그 여비서가 앉아있고, 부장과 강과장은 그녀 옆에 마치 죄를 지은 사람처럼 서있는 것이다. 최수희는 나는 그리로 데리고 갔다. 내가 그리로 가자 부장이 나를 그 여자에게 소개했다.
"김태현군 들어왔습니다."
그녀는 나를 보자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녀의 예사롭지 않은 몸매와 얼굴이 첫 눈에 들어온다. 붉은 입술에 윤기가 흐른다. 나는 일단 그 여비서를 무시하고 부장과 과장에게 인사를 했다.
"다녀왔습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김태현씨. 회장님 비서실에서 오신 임비서님이셔."
"처음 뵙겠습니다. 총무과에 김태현입니다.
"안녕하세요. 임영선이예요."
그녀가 나에게 손을 내민다. 나도 그녀의 손을 잡고 악수를 했다. 내 손을 잡는 그녀의 손에 유난히 힘이 들어간다. 여자의 손 힘이 세봤자 얼마나 세겠는가? 나는 그녀의 손에 내 손을 그냥 맡겼다. 그녀의 손이 한동안 내 손을 쥐고 있다가 놓는다. 그런데 그것은 악수만은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한부장님, 강과장님. 앞으로 김태현씨가 우체국에 간다든지, 각 과를 돌아다니면서 우편물을 나눠준다든지, 여직원들의 심부름센터를 하는 일이 일어나면 절대 안됩니다."
임영선은 누구를 향한 것인지는 몰라도 경고를 하는 것 같다. 그런데 내 경험에 의하면 안하무인으로 저렇게 큰소리를 치는 여자들은 거의 대부분이 속 빈 강정이고 허당이다.
갑자기 내게 장난기가 치솟아 오른다. 어차피 빌미야 임영선이 준 것. 나에게 오전에 스트레스가 심했으므로, 나는 지금 이 정도는 즐겨도 될 것 같았다. 부장이 비서보다는 높을 것 같고, 부장은 내 편이라고 확신하므로, 나는 안심하고 칼을 뽑았다.
"임비서님!"
"예?"
나는 임영선에게 시간을 약간 준다. 그녀에게 마음에 준비를 시키기 위한 나의 배려이다. 그런데 그녀는 이런 내 마음을 모른다. 그녀는 지금 두 눈을 깜빡이며 나를 빤히 보고있다. 만일 그녀가 호기심이 많은 여자라면 내가 자기를 부른 것을 엄청 궁금해 할 것이다.
만일 그녀가 나에게서 비호감을 느끼고 있었다면, 나는 이미 실패했을 것이고, 나는 여기서 조용히 마무리를 해야 한다. 그런데 아직은 실패한 것 같지는 않는다. 나는 계속 공세를 유지하기로 했다.
"저는 이 방에서 일하는 누나들이랑 서로 돕는 것이 엄청 좋은데요."
"김태현씨! 당장 부서를 옮겨드릴까요?"
"임비서님!
이 방에 있는 누나들이 저에게 잔심부름을 시키고, 또 제가 그 심부름을 해주는 것은 제가 이 방에 들어와서 가장 먼저 배운 일입니다.
맨 처음에 그 일이 내 마음에 들었고, 그 일 때문에 이 사무실에서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거든요.
그것이 임비서님 눈에는 어떻게 보일 지 모르겠지만, 우리에게는 소소한 일상이고, 단조로운 사무실에 활력과 즐거움을 주는 일입니다.
업무에 아무런 지장을 주는 것도 아니고, 회사 내규나 정관에 저촉되는 것도 아닐텐데요.
그런데 임비서님께서는 왜 그런 일을 막으십니까?
또 한 가지는 이 방에서 일어나는 일은 강은영 과장님께서 통제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김태현씨. 그럼 윗사람들이 시키니까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었나요?
내가 오해를 했나?
이 많은 여자들이 심부름을 한가지씩만 시킨다고 하면, 김태현씨한테는 혼자 해야하는 일이 엄청 많을 것 같아서 그랬는데?"
"전혀요. 만일 누가 나에게 그 일을 못하게 막는다면, 제 가방 안에 들어있는 사표서를 지금 제출할 수도 있습니다."
"김태현씨, 원래 이렇게 거칠어요?"
"전혀 아닐 것 같은데요?
이 방에서 일하는 누나들에게 물어보세요."
"그런데 지금 나한테는 왜 협박까지 해요?"
"이 사무실에서 일하는 것은 나한테는 즐거움입니다.
나에게는 이것이 내가 매일 아침에 출근하는 이유입니다.
이 즐거움이 사라지면 나는 억지로 일해야 하고, 또 그 일이 내게는 엄청난 스트레스입니다.
그런 일을 내가 왜 해야 하죠?
누구든 나를 공격하면 그에게 나는 반격합니다.
회장님 비서가 아니라 회장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와아아. 무서워지려고 하네. 하하하.
미안해요. 앞으로 조심할께요."
여비서 임영선은 다시 나에게 손을 내밀고, 우리는 다시 악수를 했다. 나는 곁눈질로 강과장을 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약간 돌려서 우리를 외면하고 있다. 아마도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는 중일 것 같다.
"저도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신입사원인 주제에 회장님 비서에게 대들어서 죄송합니다."
"됐어요. 이제 가요."
이것이 지금 우리가 지금 화해하는 것일까? 내가 즐기는 일은 여기서 끝난 것 같다.
우리는 사무실을 나선다. 나는 제일 나중에 가면서 다른 여직원들을 보았다. 그녀들은 소리 없이, 활짝 웃는 얼굴로 두 손가락으로 브이(V)자를 흔든다. 내가 사무실을 나가면서 문을 닫는데 나혜지가 내 팔을 잡아 끌어서 멈추게 하고 내 귀에 소근거렸다.
"막내야. 쟤 회장님 딸이야."
"이러언. 답답하네. 그걸 왜 이제 말해요? 그럼 내가 방금 사고친 거야?"
"사고는 무슨 사고? 괜한 걱정 말고 빨리 가."
나혜지가 나를 밀어내고 내 뒤에서 사무실 문을 닫는다. 그녀들이 킥킥거리는 소리가 아주 잠시 들렸다.
이러다가 내가 역풍을 맞는 것은 아닐까? 나는 아무래도 괜찮지만, 강과장이나 다른 여자들은 이 직장에서 일을 오래 해야 할 사람들 같은데, 혹시라도 내가 한 이 일 때문에 불이익을 받게 되는 일은 없을까? 내가 약간 경솔했던 것 같다.
우리는 회장실로 간다. 여비서 임영선과 우리 부장은 앞장서고, 나와 최수희는 뒤를 따른다. 나는 임영선의 뒤를 따르면서 그녀의 뒤태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최수희가 내 팔을 살짝 꼬집는다.
여비서 임영선의 안내로 우리는 회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회장이 눈에 보이자 나도 모르게 은근히 긴장된다. 회장은 우리와 악수를 한다. 우리는 소파에 앉고, 여비서는 차를 들여온다. 그런데 여비서는 회장실을 나가지 않고 우리와 같이 앉는다. 그런데 그녀의 자리는 내 앞, 그러니까 부장의 옆자리이다.
"김태현씨가 말한 업무지원팀에 대해서 한부장님 생각은 어떠세요?
이게 이번 한두번으로 끝날까, 아니면 계속 치고 올라갈 수 있을까 .."
"총무과에서는 지속적으로 운영할 만 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김태현씨는 건축과에 다니는 학생으로 되어있어.
그런데도 아까 PT 하는 것을 본 사람은 누구도 알 수 있어요.
김태현, 잘해도 진짜 너무 잘했어.
이건 말주변이 좋다는 것으로 오해하면 멍청한 거야.
내가 보기에는 업무를 똑부러지게 파악하고 있다는 거지.
일을 하더라도 이렇게 해야지.
무엇을 왜 하는가를 알고 했더라면, 우리가 오늘 왜 이 모양 이 꼴이겠어?"
"그렇습니다."
"그 분야에서 업무 파악은 기획실장이나 영업부장, 마케팅 부장보다도 훨씬 더 낫단 말이야.
김태현씨는 혹시 전에 마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해본 경험이라도 있나?"
"아닙니다. 저는 여기 한강유통 총무과에서 시작했습니다.
처음부터 이 최수희 선배에게서 일을 배웠습니다."
"앞으로 회사의 조직이 어떻게든 개편이 될 것입니다.
최수희씨와 김태현씨 두 사람은 지금처럼 하던 일을 계속하면 됩니다.
앞으로도 좋은 성과를 내서 한부장님께 큰 힘이 되어드릴 것을 부탁합니다."
"명심하겠습니다."
"한가지 궁금한 것은, 김태현씨는 절대적으로 칼퇴근주의라면서?
야근은 하늘이 무너져도 절대로 못한다는데. 맞는가?"
"예. 그렇습니다."
"그 이유를 알면 안될까?
혹시 시간제 아르바이트 할 때 습관 때문인가?"
"아닙니다. 실은 제가 고등학생에게 과외수업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기 전에 이미 하고 있던 일이었습니다."
물론 이 말은 거짓말이다. 두 가지 일은 거의 같이 시작했었으니까. 회사가 투잡을 금지시킬까봐 내가 머리를 굴린 것이다.
나는 야근은 안하지만 어쩌다 주말에 하는 회식에는 나간다. 설마 회장이라는 사람이 나서서 할일 없이 이런 것을 막을 리가 있을까? 혹시라도 부장이나 과장의 마음이 변할 수도 있지 않은가? 이런 자리를 기회로 해서 혹시 회장을 내 편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이것은 말도 되지 않는 허황된 내 꿈이다.
"그러면 그 일은 혹시 용돈이라도 벌어보겠다고 하는 것 아닌가?"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사람들 사이에 한 약속은 지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남매와 그리고 그들의 부모님과 이미 약속을 했습니다.
그 남매가 대학에 진학할 때까지 제가 힘을 보태기로 했어요.
제가 월급이 많아진다고 해서 이 약속을 어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상황이 바뀌면 약속을 지키지 못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럴 약속이면 애당초에 하지 말았어야죠.
이미 한 약속은 사람의 생명이 위험해지지 않는 한 지키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더구나 이 약속은 고등학생들과 한 약속입니다.
바로 이 약속을 지키는 것을 우리 어른이라는 사람들이 얘네들에게 가르치고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저에게 불이익이 오더라도 이 약속을 지킬 것입니다."
"음. .. 약속이라."
"약속을 지키는 것이 바로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처음에 총무과에서 일을 시작하면서, 저는 최수희 선배에게서도 이점을 배웠습니다.
* 비록 지금 당장은 어느 정도 손실이 따르더라도 고객들과 한 약속은 꼭 지켜라.
* 이것이 바로 고객들에게 믿음을 심어주는 것이다.
* 그런데 신뢰가 한번 깨진다면 그로 인한 손실은 상당히 크다.
* 한번 깨진 믿음을 다시 회복시키는 데에 들어가는 비용과 시간은 엄청나게 크다
이런 것을 배웠습니다."
"최수희씨가.. 그걸 .. 그렇게 .. 가르쳤어요?"
"예."
회징은 말을 더듬고, 최수희는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그것은 내가 거짓말을 한 것이다. 최수희가 나에게 가르친 것이 아니라, 내가 최수희에게 한 말이었다.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장은 최수희와 나와 작별의 악수를 했다.
"조만간에 다시 만나서 얘기해보자."
이 말이 무슨 말이지?
임영선과 부장은 회장실에 남아있고, 나와 최수희는 회장실을 나왔다.
우리 사무실로 가면서 최수희는 내게 말했다.
"기껏 부장님께 충성하라고 우리를 회장실로 부른거네?"
"그러게요. 나는 지금 피곤해서 쓰러지기 직전인데."
"피곤해? 왜? 자기 어제 밤에도 또 늦게까지 알바 뛴거니?"
"응. PT준비도 했고."
"그럼 일찍 들어가."
"어떻게? 조퇴하라고?"
"바보. 외근 내보내 줄테니까, 끝나고 거기서 바로 퇴근한다고 하면 되거든요."
"내가 해봤어야 알지."
"과장님은 오늘 자기를 충분히 봐줄꺼니까 내가 말해줄께."
"누나, 저 여자가 회장 딸이라는 말 왜 안했어?"
"그거 뭐 별건가?
자기 아까 잘했잖아?
부장 과장 앞에서 잘난척하다가 자기한테 한방 먹던데?"
"나 아까 그거 진짜로 잘 한거야?
혹시라도 나중에 무슨 일 생기지 않을까?"
"글쎄. 과장님이 너한테 그 유명한 성추행 정도는 하실껄? 하하하."
나는 화장실로, 최수희는 사무실로 갔다. 나중에 내가 사무실로 갔을 때 강과장과 여직원들은 문 앞에 있는 내 자리로 모여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안으로 들어서자 갑자기 누가 내 엉덩이를 꽈악 움켜쥔다.
나는 역시 강은영 과장이려니 했다.
그런데 그 손은 박은희 대리의 팔에 붙어있었다.
나는 그 손을 잡고 떼어냈다.
"과장님 말씀이, 네 엉덩이가 너무 탱글탱글이라던데. .. 하하하."
"아니. 내 엉덩이가 동네 엉덩이야?
오다가다 한번씩 다 만져요?"
"그래서, 너 그게 불만이야?"
"아뇨. 불만 제로인데요. 하하하."
"과장님 말씀대로 PT 를 잘한 것도 그렇도, 아까 여기서 그 일도 그렇고.
우리 막내가 오늘 너무 귀엽잖아.
그래서 그만 내 손이 쬐끔 .. 하하하."
"아얏! 이번에는 또 누구야?"
이번에는 최수희다.
그런데 나는 최수희의 손은 떠어 내지 않았다.
그 대신에 최수희의 손등을 더 꼬옥 눌렀다.
그러나 세상은 우리를 조용히 두지 않는다.
"이거 뭐야? 너네 둘은 역시였어? 하하."
“야아. .. 너는 손도 차별해? 누구 손은 밀어내고, 누구 손은 당겨?”
"그게 아니라. 이 손이 가면 또 다른 손이 올 것 같아서요. 하하."
최수희가 강과장에게 무슨 말을 벌써 해두었나보다.
강과장은 나와 최수희를 불렀다.
"다른 마트에 가서 한 바퀴 둘러보고, 거기서 바로 퇴근하세요."
"과장님. 고맙습니다."
"누나라니까."
"누나 고마워요. 헤헤."
"막내 너 아프지 말고 일찍 가서 푹 쉬어."
우리 둘은 사무실을 나서는데, 최수희가 내게 말했다.
"자기야. 일찍 들어가서 잠이나 자.
이런 날은 전화는 정신차리고 항상 잘 받아야 해.
마트 둘러보는 것은 내가 알아서 할께."
나는 집에 와서 씻고 침대에 들어가서 잤다.
잠이 보약이라는 말이 딱 맞는 것 같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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