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파티의 여왕
제법 무거운 나무문이 낮은 삐걱거림과 함께 열렸다.
“어서 오세요.”
아무런 쇼윈도우도 없이 그저 정사각형의 간판 하나만이 돌출된 이곳이 정말 지훈이란 사람이 말한 곳이 맞나 싶었다. 그렇지만 이내 그런 의심을 털어야 했다. 크지 않은 실내지만 그곳에 걸려있는 드레스들은 건물외관과 어울리지 않는 고급스러움을 나타내고 있었다.
“어떤 걸 찾으시나요?”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아가씨가 한복을 곱게 입고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저… 소개로 왔는데, 이곳에서 드레스를 좀 보려구요.”
“네에…… 실례지만 소개해주신 분이 누구신가요?”
“지훈… 이라는 분인데... 엘레나 정이란 분을 찾으라고……”
“아, 그러셨군요. 제가 안내해드릴게요. 이리 오세요.”
아가씨가 조금 앞서 안으로 향한 문을 열고 걸어갔다. 선경도 그녀를 따라 뒤를 쫓았다. 작은 복도를 지나 다시 툭 트여진 공간이 나타나고 앞에 있던 작은 공간과는 비교되지 않는 넓은 홀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곳엔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의 화려한 갖가지 드레스가 전시되어 있었다.
“아……”
탄성과 함께 걸음을 멈춘 그녀를 향해 아가씨가 웃으며 손짓을 했다.
넓은 홀을 지나 기역자로 꺾어져 다시 작은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곳은 바로 작업실이었다. 지금도 몇몇 사람들이 한쪽에서 본을 대고 천을 자르고, 마네킹에 옷을 입혀보고, 무언가를 스케치하며 바쁜 모습이었다. 그 중 한 켠에서 완성된 드레스를 꼼꼼히 살펴보는 한복을 입은 쪽진 여인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선경은 직감으로 그 여자가 바로 지훈이 말한 엘레나 정이란 여자란 걸 알았다. 역시나 아가씨는 그녀에게 다가가서 선경을 바라보며 무언가 이야기를 한 후 선경을 불렀다.
“이리 오세요, 손님. 여기 이분이 엘레나 정 선생님이세요.”
그 소리와 함께 돌아서 있던 여인이 몸을 돌렸다. 선경은 돌아선 여인을 보는 순간, 눈이 부신 화사함과 아름다움에 놀랐다. 3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여인은 가볍지 않은 미소를 얼굴에 띠고 있었다. 말이 없이도 사람을 압도하는 무게감에 선경은 저절로 주눅이 들었다.
“안녕하세요. 저를 찾아오셨다구요?”
“네. 지훈씨가 소개를 해서……”
“아, 선경씨?”
“네.”
“어서 오세요.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었어요.”
“저를요?”
“지훈씨가 전화했더군요. 선경씨가 오면 어울리는 드레스를 부탁한다고.”
“아, 네……”
“일단 이리 앉으시겠어요?”
그녀가 안내하는 대로 창가에 놓인 작은 원형의 테이블로 다가가 의자에 앉았다. 아마도 일하면서 간간이 차를 마시며 쉬는 용도인 듯 했다. 지금도 식어버린 차 한잔이 테이블에 놓여있었다.
“작업실이라 조금 어수선해요.”
그녀가 주위를 돌아보며 말했다. 선경도 주위를 다시 돌아봤다. 어수선하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았다. 조금 복잡해 보이기는 했지만 사람들의 움직임, 공간의 활용, 정리정돈의 상태 등은 무척이나 세심하고 깔끔하다는 느낌이었다.
“전혀 아닌 걸요. 너무나 잘 정리되어 있어서 꼭… 딱 맞는 톱니바퀴가 움직이는 것 같아요.”
“설마 기계적이란 뜻은 아니겠죠?”
“아뇨, 전혀. 그런 뜻이 아니고……”
“호호호… 알아요, 무슨 말인지. 커피 드릴까요? 아님 녹차?”
“커피요.”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한 켠에 있는 커피포트에 물을 확인하고 스위치를 올렸다. 물이 끓는 사이 머그잔 하나에 커피를 넣기 전 선경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어떻게 드시죠?”
“연한 블랙요. 크림이나 설탕 없이요.”
잠시 후 선경 앞에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내려 놓으며 그녀는 아까부터 놓여있던 이미 식은 커피를 자신 앞으로 당겨갔다.
“전혀 예상을 못했어요. 여기에 이런 드레스샵이 있을 것이라곤…”
“아는 분들만 오세요.”
“네…”
“처음엔 다른 곳처럼 복잡한 대로변에 있었어요. 그랬더니 장사는 되지만 제대로 된 창작에 몰두할 수가 없더군요. 드레스는 나름 영감이 중요하거든요. 또 저는 주로 손님의 취향과 드레스를 입는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작업해야 하는 맞춤형식이라서 조금 더 집중하기 쉬운 곳을 찾아 여기로 왔어요. 이 바닥에서 몇 년 지내다 보니 이젠 단골손님들도 제법 생겨서 나름 괜찮은 편이죠.”
“그러셨군요. 저는 이런 곳이 처음이라 좀 낯설었어요.”
“많이들 그렇게 말씀하세요. 후후……”
그녀가 선경의 몸을 아래 위로 훑어봤다. 그 눈빛의 날카롭기가 마치 바늘처럼 온 몸을 찌르는 듯 느껴졌다. 선경이 몸을 살짝 움츠리자 그녀가 웃었다.
“미안해요. 손님 체형을 살펴보는 것이 습관이 돼서요.”
“네…”
“드레스는 어디에서 입으실 건가요?”
“특별한 곳은 아니구요, 남편 회사내 동호회 사람들 모임인데 그냥 친목 모임이에요. 다만 대부분 좀 높은 분들이라서 남편이 드레스를 입었으면 좋겠다고 해서요.”
“그러시군요. 그럼 활동적이어야 할까요?”
“듣기로는 디너파티라고 하던걸요.”
“그렇다면 격식을 우선시해야겠군요.”
“그런가요? 전 도무지 그런 모임에 가본 적이 없어서……”
“일단 치수부터 먼저 재볼까요?”
“저, 바로 맞추려고 하는 건 아니구요, 그런 곳에 가서 입을 수 있는 드레스가 어떤 건지 먼저 좀 알아보려고……”
“괜찮아요. 치수를 재보면 맞는 스타일의 옷을 추천드릴 수 있어서 그런 거에요. 부담 가지실 필요 없어요. 잠깐만 일어나 보실래요?”
여인이 근처에 있던 한 아가씨에게 눈짓을 했고, 이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 그녀가 어느새 손에 쥔 자로 선경의 몸을 이리저리 재기 시작했다. 선경은 그저 로보트처럼 뻣뻣하게 아가씨의 손길에 몸을 맞길 뿐이었다.
“겉보기완 다르게 볼륨감 있으시네요?”
치수재기를 마치고 나서 엘레나 정이란 여인이 의외라는 듯 말했다.
“네? 네……”
“재보지 않고 눈대중으로 하면 실수하기 좋겠어요. 후후……”
여인이 묘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곤 다시 한 번 선경의 몸을 아까와는 다른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다 봤다. 그 눈길이 선경을 더욱 어색하게 했다.
“제가 보기엔 무난한 듯하면서도 약간의 포인트가 있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색상은 생각해두신 것이 있나요?”
“아뇨.”
“그럼… 검은색과 흰색이 가장 무난한데……”
그녀가 다시 한 번 선경을 살펴보며 말했다.
“피부가 유난히 흰 편이시라 검은 색이 좋을 것 같아요. 원피스 형태가 좋을 것 같고. 하단은 너무 길지 않게 활동성도 보장하면서 포인트로 섹시함을 강조할 수 있는 중국식 옆트임이 어떨까 해요.”
“네… 그런데 모임이 이번 주말인데…..”
“걱정 마세요. 마침 거의 맞는 옷이 하나 있어요. 내가 보기에…”
선경의 가슴과 허리, 엉덩이를 다시 살펴보곤
“조금만 손을 보면 될 거에요. 일단 한 번 입어보세요.”
잠시 후 엘레나 정이 들고 온 옷을 탈의실에서 갈아 입은 선경이 어색한 몸짓으로 나오자 작업실의 모든 사람들이 커진 눈으로 선경을 돌아봤다. 몸에 붙어 굴곡진 몸을 환히 보여주는 드레스의 모습은 조금 전 조금 마른 듯한 평범한 모습의 아줌마가 정말 맞나 싶을 정도였다. 보기 좋을 정도로 처지지 않고 봉긋 솟은 가슴과 뱃살 없이 매끈하게 오목한 허리, 그리고 청자처럼 부드럽게 하트를 그리며 내려오는 골반의 모습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반전이었고, 잠깐씩 옆트임으로 보이는 왼쪽 허벅지와 곧게 뻗어 내린 다리의 모습은 놀랍도록 치명적인 유혹이었다. 엘레나 정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린 채 동작을 멈췄다. 그런 그녀가 잠시 후 혼잣말처럼 뱉은 말은 거기 있던 모든 사람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었다.
“세상에! 이제 보니… 감춰진 보석이었군!”
그런 모두의 시선이 너무나 부담스러워 선경은 자꾸만 쭈뼛거렸다.
“저… 어색… 하죠?”
“아뇨. 전혀. 손볼 필요 없이 바로 입어도 되겠어요. 그리고……”
선경을 가운데 두고 한 바퀴 돌아본 엘레나 정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지금도 좋지만 헤어스타일과 화장만 조금 잘 하면 대부분 남자들의 정신을 잃게 할 것 같네요.”
“네?”
“아, 그냥 아주 좋다는 뜻이에요. 암튼 선경씨하고 아주 잘 어울려요. 딱 선경씨를 위한 옷이네요.”
“정말… 이세요?”
“네. 그래서…… 선경씨에게 내가 그 옷을 선물하고 싶군요.”
“선물요?”
“네. 안 그래도 옷값은 지훈씨가 내겠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임자 만나 가는 옷이니 내가 기쁘게 그냥 드려야 할 것 같아요.”
“그래도 어떻게… 옷이 무척 비싼 것 같은데…”
“아니에요. 내 옷이 선경씨로 인해서 더 빛나는 것 같아 아주 만족해요. 사실 그 옷이 배우 한효주씨를 위해서 만든 거였는데 생각보다 잘 어울리지 않더라구요. 아무래도 아직 나이가 그 옷의 농염함을 소화하기는 어려웠던 것 같아요. 그런데 선경씨와는 정말 잘 어울리네요. 깜짝 놀랄 만큼.”
“그래도…”
“정말 괜찮아요. 대신 나중에 내 옷 모델 한 번 해주겠어요?”
“저 그런 거 경험 없는데요……”
“괜찮아요. 사진모델하면 아주 잘 어울리겠어요. 단아한 이미지의 외모와 촉촉하게 빛나는 흰 피부가 정말 매력적이라서 사진도 아주 잘 받을 것 같아요. 그래 줄래요?”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거라면 당연히 해드려야죠. 이렇게 좋은 옷도 주시는데… 근데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걱정 말아요. 그건 그쪽 전문가들이 알아서 할 거에요.”
“네……”
“오늘 정말 기분 좋군요. 난 이런 날이 좋아요. 내 옷에 딱 맞는, 아니 내 옷을 살려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났을 때의 기분은 큰 희열과 성취감을 주죠.”
“……”
“기분 너무 좋은데 우리 같이 기념 셀카나 하나 찍을까요?”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선경은 오늘의 일이 마치 꿈에서 일어난 것처럼 느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그렇게 조금은 들뜬 모습으로 넋을 잃고 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번호를 내려다 보던 선경은 깜짝 놀랐다. 지훈이었다.
“여, 여보세요?”
“전화 받기 괜찮으세요?”
“네. ‘부용’에 들렸다가 지금 택시 타고 집에 가는 길이에요.”
“그러셨군요. 어떻게 옷은 마음에 드는 것이 있던가요?”
“네.”
“다행이군요. 그럼 옷은 받으셨어요?”
“네. 좀 부담스럽게 옷이 저와 잘 어울린다고 그냥 선물로 주셨어요.”
“그래요? 음……”
예상치 못한 그의 침음성에 선경이 놀랐다.
“저기, 제가 무슨 실수라도……?”
“아뇨, 아니에요. 저도 예상 못한 일이라서요. 그 분이 프라이드가 강하신 분이라 연예인에게도 마음에 안들면 판매 안하시는 분이거든요.”
“아, 그래요?”
“네. 아무리 유명인사라도 공짜로 자신의 작품을 주는 경우는 없다고 알고 있는데… 그런데 선물로 그냥 주셨다는 걸 보니 선경씨와 옷이 정말 잘 어울렸던 모양이네요.”
“그렇게 말씀하시긴 했는데… 전 잘 모르겠어요. 그냥 받은 것이 부담스럽기도 하고… 그런데 엘레나 정이란 분이 대신 나중에 사진모델 좀 부탁한다고 하셔서 그러기로 했어요.”
“그랬군요. 여하튼 잘 어울리는 옷을 구하셨으니 다행입니다. 소개는 해놓고 마음에 안 드시면 어쩌나 내심 걱정을 했거든요.”
“그분 무척 실력 있으신 분인가 봐요. 거기 있는 옷들이 모두 다 멋있더라구요. 도무지 마음에 안 드는 옷이 없던걸요!”
“하하…… 저는 잘 모르지만 그 분야에선 꽤 알아준다고 하더군요.”
“그러실 것 같아요. 그런데 그런 분은 어떻게 아시는 거에요?”
그 질문을 하면서 내심 선경은 지훈의 반응이 궁금했다.
“아… 전에 우연치 않게 제가 그 분을 도와드린 적이 있어요. 그래서 좀 알죠.”
“네에……”
“선택하신 옷이 어떤 옷인지 무척 궁금하군요. 하하하……”
“쑥스럽네요. 후훗……”
“저 죄송한데……”
“네?”
“댁에 가시면 그 옷 입고 사진 하나 찍어서 보내주시면 안될까요? 얼굴은 가리셔도 되니까요.”
“저 컴퓨터로 사진 보내고 하는 거 할 줄 모르는데……”
“핸드폰으로 찍으셔서 그냥 메모로 전송하시면 돼요. 전신거울이 있으시면 그 앞에서 거울보고 찍으시면 되고, 사진 찍을 때 핸드폰으로 얼굴 가리시면 되구요.”
“아… 네.”
“해주시겠어요?”
“좀 부끄럽긴 한데…… 한 번 해볼게요.”
“감사합니다. 그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조심해서 댁에 들어가시구요.”
“네.”
통화를 끊고 선경은 종이백 속에 담긴 옷을 새삼스럽게 내려다 봤다. 심장의 고동도 조금 빨라져 있었다.
핸드폰을 손에 들고 거실 한 켠에 걸려있는 전면 거울 앞에서 선경은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 봤다. 거울 속 검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는 자신도 놀랄 만큼 아름답게 보였다. 가슴라인이 약간의 라운드로 파여있어 쇄골이 드러나 보이고 가슴 둔덕의 시작점과 그 사이의 골이 아주 살짝 드러나 있어 오히려 더 느낌이 있었다. 바디라인을 따라 물결치듯 내려와 무릎 바로 아래까지 내려온 하단은 다리를 살짝 들면 트여진 옆으로 그녀의 길고 매끈한 다리를 감질나게 보여주었다. 평소 바지를 즐겨 입고 때로 치마를 입는다 해도 발목에까지 오는 긴 치마를 입던 그녀로서는 무척이나 낯선 모습의 자신이었다.
(조금 야하지 않나? 어깨와 가슴도 좀 드러나고 옆에 다리는 허벅지까지 보이는데…… 근데 옷은 참 멋있다. 내가 이렇게 예쁘게 보일 줄은 정말 몰랐어.)
선경이 ‘부용’을 나올 때 엘레나 정이란 여자가 입구에서 인사를 문득 이런 말을 했었다.
“선경씨, 스스로의 몸에 대해서 잘 모르죠?”
그게 무슨 말인지 선경은 지금도 오리무중이었다. 나름 짐작을 해본다면 아마도 자신이 결혼한 여자 치고는 아직도 좋은 몸매를 유지하고 있다는 뜻이 아니었을까?
잡생각을 털듯 잠깐 머리를 흔들고 머리카락을 가다듬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을 돌아보며 이리 저리 포즈를 취해보던 선경은 오른손을 허리에 대고 왼발을 비스듬히 조금 앞으로 내밀어 트여진 옆으로 다리가 보이게 하고는 왼손으로 핸드폰을 들어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사진을 찍었다. 타이머를 이용해 제법 흔들리지 않고 찍은 사진을 들여다 보며 선경은 만족스럽지 못한 표정을 짓다가 거실등을 직접등이 아닌 간접등으로 바꾸고 다시 찍어봤다. 너무 날카롭지 않고 은은한 모습이 훨씬 마음에 드는 선경이었다.
(이제 이걸 보내도 될까? 이 사진을 보면 지훈씨는 뭐라고 할까? 마음에… 들어 할까?)
다시 또 쑥스러움이 몰려왔다. 마음 같아서는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지훈 때문에 모임에 갈 수 있는 좋은 옷을 갖게 되었으니 보내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결국 잠시의 망설임 끝에 사진을 보낸 선경은 그의 답장이 오기까지 자꾸만 심장이 쿵쾅거리고 불안하기만 했다. 그렇게 거실을 서성이던 몇 분 뒤
[Amazing! 그야말로 여신 강림이군요!]
그의 칭찬이 선경을 안심시키고 얼굴을 붉게 물들이게 했다. 입가에 배시시 웃음마저 맴돌았다.
“치명적인 아름다움이군요!”
남편 회사의 사장이라는 사람이 선경을 보고 한 첫 말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그녀의 아름다움을 하나같이 칭찬했다. 선경은 몹시 당황스럽고 부담스러웠으며 흥분되기도 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미모를 좋게 봐줄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반면 여자들은 때로 시기와 질투의 빛을 띠기도 하고 때로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짓기도 했으며, 몇몇은 선경에게 다가와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며 자신을 소개하기도 했다. 그렇게 서로를 소개하고 인사하는 시간이 지나고 공식적인 디너파티가 시작됐다. 진행 요원들이 소개하는 대로 커플들은 자리를 이동했고 선경과 현석도 안내를 받아 이동할 때, 누군가 진행 요원에게 다가와 귓속말을 나눴다. 그리고 진행 요원이 두 사람에게 다가와 말했다.
“두 분 자리가 바뀌셨습니다. 이리 오십시오.”
안내된 자리는 처음 뒤쪽이던 곳과 다르게 앞쪽 중앙 사장이 있는 테이블 바로 옆이었다. 그곳은 회사 중역진이 모여있는 자리로 선경이 있는 왼쪽 좌석은 전무라는 사람부부, 맞은 편은 영업이사 부부, 오른편은 남편이 소속된 팀의 팀장 자리였다.
자리에 앉아 다시 서로 인사를 나눴다. 남편 현석은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태도로 굳어 있었지만 나머지 세 남자는 가득한 여유로 그들 부부를 바라보고 있었다. 선경은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더 신경 쓰였다. 가장 신경이 쓰이는 상대는 맞은 편에 있는 영업이사의 아내라는 여자였다. 아무리 봐도 화류계 출신일 것만 같은 진한 화장, 미인이긴 하지만 눈빛에는 지나친 섹시함이 가득 내비쳐 지고 있었다. 전무라는 사람의 부인은 나름 품위를 지키려 노력한 흔적이 보였다. 표정도 조금은 도도해 보였다. 반면 팀장의 부인이라는 사람을 보는 순간 선경은 문득 어디선가 본듯한 느낌에 고개를 갸웃했다. 사교모임에 아주 익숙한 사람인 것이 틀림없는 여유와 매너, 옷차림마저 천하지 않게 화사한 조화를 이루는 것에 자꾸만 눈길이 갔다.
서로간의 인사가 마쳐질 때쯤 식사 서빙이 시작됐다. 그리고 누군가 일어나 오늘의 모임을 위한 사장님의 대표 건배를 알렸다. 그 때쯤 웨이터들이 바삐 돌아다니며 각자의 잔에 샴페인을 채워나갔다. 자리에서 일어나 모두의 잔이 채워진 것을 살펴 본 후 사장이 잔을 들고 말했다.
“자, 우리의 영원한 발전을 위하여!”
“위하여!”
그렇게 디너 파티가 시작되고 조금은 어수선하게 여기 저기서 이야기 꽃을 피울 때쯤, 석현은 팀장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그 쪽으로 신경을 쓰고 있었고 전무는 영업이사와 또 무슨 이야긴가를 나누고 있었다. 선경은 그저 말없이 식사만을 하고 있었다. 딱히 자신이 나서서 할 이야기도 없었거니와 남자들 사이 사이에 끼여있는 여자들 입장에서는 서로에게 말을 건네기도 조금은 불편한 상황이었다. 그 때 누군가 팀장에게 다가와 귓속말을 했고 팀장은 잠시 실례한다는 말과 함께 자리를 떴다. 그러자 팀장의 아내가 자리를 옮겨 팀장의 자리로 옮겨와 선경 옆에 앉았다. 그리고
“반가워요.”
“네. 반갑습니다, 사모님.”
“사모님은 무슨... 그 소리는 옆에 계신 분들에게 어울리고 나는 그냥 언니라고 불러줘요. 가희 언니.”
“저, 그래도……”
“괜찮아요. 내가 올해 36이니까 그쪽보다 언니 맞을 것 같은데, 아니에요?”
“아, 네. 저 올해 32인 걸요, 가희… 언니.”
“후훗…… 좋아요. 그런데 처음이라 자리가 좀 불편하죠?”
“네. 제가 이런 모임에는 경험이 없어서요.”
“괜찮아요. 나도 처음엔 그랬어요. 그렇지만 곧 익숙해지질 테니 걱정할 것 없어요.”
“네……”
“근데 혹시 나 어디서 보지 않았어요?”
“글쎄요. 실은 저도 아까부터 그 생각 했는데, 얼굴이 어디서 뵌 분 같아요.”
“쿡…… 아닐 거에요. 초면 맞을 걸요?”
“그, 그런가요?”
“예전에 연예계에 잠시 있었어요. 그래서 아마 본 적이 있을 거에요.”
“아, 어쩐지! 자꾸 뵌 분 같은데 기억이 안 나서 고민했어요. 후훗……”
“그랬어요? 아침에 하는 방송 리포터로 몇 년 활동했죠. 그러다 그 방면에선 더 이상 성공하기 어려울 것 같아 그냥 결혼하고 집안 살림이나 하며 지내고 있어요.”
“그러셨구나……”
“이름이…?”
“아, 참. 저 선경이에요. 이선경.”
“선경씨…… 좋은 이름이네요. 미모만큼 예쁜데요?”
“별말씀을. 언니만 해도 저보다 예쁘신데. 오늘 와서 보니 미인 아니신 분들이 없어서 주눅마저 드는걸요.”
가희가 몸을 수그려 선경에게 다가와 조그맣게 이야기했다.
“아니에요. 오늘 참석한 사람 중에 선경씨처럼 순수하고 단아한 미인은 단연코 없다고 말할 수 있어요. 퇴폐적인 미인은 좀 있지만.”
그러며 슬쩍 앞에 앉아있는 영업이사 부인을 한 번 쳐다봤다. 선경은 그녀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고는 혹시라도 상대가 그 소리를 들었을까 조심스러워졌다. 가희도 선경의 조심스러움을 느꼈는지 짐짓 소리를 높여 말했다.
“어쩐 일인지 오늘 파티의 여왕께서 좀 늦으시는군.”
“파티의 여왕이요?”
“으흠!”
순간 여태 아무 말 없이 바라만 보던 영업이사의 부인이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흥! 여왕은 무슨!”
그 때였다. 입구에서부터 약간의 어수선함이 일어나며 누군가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긴 생머리를 늘어뜨리고 순백의 드레스를 살짝 바닥에 끌며 나타난 여인. 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그녀를 향해 눈길을 돌렸고, 선경도 그녀를 바라보며 눈을 크게 떴다.
“여왕은 여왕이죠?”
가희의 말에 하마터면 선경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 했다.
제법 무거운 나무문이 낮은 삐걱거림과 함께 열렸다.
“어서 오세요.”
아무런 쇼윈도우도 없이 그저 정사각형의 간판 하나만이 돌출된 이곳이 정말 지훈이란 사람이 말한 곳이 맞나 싶었다. 그렇지만 이내 그런 의심을 털어야 했다. 크지 않은 실내지만 그곳에 걸려있는 드레스들은 건물외관과 어울리지 않는 고급스러움을 나타내고 있었다.
“어떤 걸 찾으시나요?”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아가씨가 한복을 곱게 입고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저… 소개로 왔는데, 이곳에서 드레스를 좀 보려구요.”
“네에…… 실례지만 소개해주신 분이 누구신가요?”
“지훈… 이라는 분인데... 엘레나 정이란 분을 찾으라고……”
“아, 그러셨군요. 제가 안내해드릴게요. 이리 오세요.”
아가씨가 조금 앞서 안으로 향한 문을 열고 걸어갔다. 선경도 그녀를 따라 뒤를 쫓았다. 작은 복도를 지나 다시 툭 트여진 공간이 나타나고 앞에 있던 작은 공간과는 비교되지 않는 넓은 홀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곳엔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의 화려한 갖가지 드레스가 전시되어 있었다.
“아……”
탄성과 함께 걸음을 멈춘 그녀를 향해 아가씨가 웃으며 손짓을 했다.
넓은 홀을 지나 기역자로 꺾어져 다시 작은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곳은 바로 작업실이었다. 지금도 몇몇 사람들이 한쪽에서 본을 대고 천을 자르고, 마네킹에 옷을 입혀보고, 무언가를 스케치하며 바쁜 모습이었다. 그 중 한 켠에서 완성된 드레스를 꼼꼼히 살펴보는 한복을 입은 쪽진 여인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선경은 직감으로 그 여자가 바로 지훈이 말한 엘레나 정이란 여자란 걸 알았다. 역시나 아가씨는 그녀에게 다가가서 선경을 바라보며 무언가 이야기를 한 후 선경을 불렀다.
“이리 오세요, 손님. 여기 이분이 엘레나 정 선생님이세요.”
그 소리와 함께 돌아서 있던 여인이 몸을 돌렸다. 선경은 돌아선 여인을 보는 순간, 눈이 부신 화사함과 아름다움에 놀랐다. 3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여인은 가볍지 않은 미소를 얼굴에 띠고 있었다. 말이 없이도 사람을 압도하는 무게감에 선경은 저절로 주눅이 들었다.
“안녕하세요. 저를 찾아오셨다구요?”
“네. 지훈씨가 소개를 해서……”
“아, 선경씨?”
“네.”
“어서 오세요.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었어요.”
“저를요?”
“지훈씨가 전화했더군요. 선경씨가 오면 어울리는 드레스를 부탁한다고.”
“아, 네……”
“일단 이리 앉으시겠어요?”
그녀가 안내하는 대로 창가에 놓인 작은 원형의 테이블로 다가가 의자에 앉았다. 아마도 일하면서 간간이 차를 마시며 쉬는 용도인 듯 했다. 지금도 식어버린 차 한잔이 테이블에 놓여있었다.
“작업실이라 조금 어수선해요.”
그녀가 주위를 돌아보며 말했다. 선경도 주위를 다시 돌아봤다. 어수선하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았다. 조금 복잡해 보이기는 했지만 사람들의 움직임, 공간의 활용, 정리정돈의 상태 등은 무척이나 세심하고 깔끔하다는 느낌이었다.
“전혀 아닌 걸요. 너무나 잘 정리되어 있어서 꼭… 딱 맞는 톱니바퀴가 움직이는 것 같아요.”
“설마 기계적이란 뜻은 아니겠죠?”
“아뇨, 전혀. 그런 뜻이 아니고……”
“호호호… 알아요, 무슨 말인지. 커피 드릴까요? 아님 녹차?”
“커피요.”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한 켠에 있는 커피포트에 물을 확인하고 스위치를 올렸다. 물이 끓는 사이 머그잔 하나에 커피를 넣기 전 선경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어떻게 드시죠?”
“연한 블랙요. 크림이나 설탕 없이요.”
잠시 후 선경 앞에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내려 놓으며 그녀는 아까부터 놓여있던 이미 식은 커피를 자신 앞으로 당겨갔다.
“전혀 예상을 못했어요. 여기에 이런 드레스샵이 있을 것이라곤…”
“아는 분들만 오세요.”
“네…”
“처음엔 다른 곳처럼 복잡한 대로변에 있었어요. 그랬더니 장사는 되지만 제대로 된 창작에 몰두할 수가 없더군요. 드레스는 나름 영감이 중요하거든요. 또 저는 주로 손님의 취향과 드레스를 입는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작업해야 하는 맞춤형식이라서 조금 더 집중하기 쉬운 곳을 찾아 여기로 왔어요. 이 바닥에서 몇 년 지내다 보니 이젠 단골손님들도 제법 생겨서 나름 괜찮은 편이죠.”
“그러셨군요. 저는 이런 곳이 처음이라 좀 낯설었어요.”
“많이들 그렇게 말씀하세요. 후후……”
그녀가 선경의 몸을 아래 위로 훑어봤다. 그 눈빛의 날카롭기가 마치 바늘처럼 온 몸을 찌르는 듯 느껴졌다. 선경이 몸을 살짝 움츠리자 그녀가 웃었다.
“미안해요. 손님 체형을 살펴보는 것이 습관이 돼서요.”
“네…”
“드레스는 어디에서 입으실 건가요?”
“특별한 곳은 아니구요, 남편 회사내 동호회 사람들 모임인데 그냥 친목 모임이에요. 다만 대부분 좀 높은 분들이라서 남편이 드레스를 입었으면 좋겠다고 해서요.”
“그러시군요. 그럼 활동적이어야 할까요?”
“듣기로는 디너파티라고 하던걸요.”
“그렇다면 격식을 우선시해야겠군요.”
“그런가요? 전 도무지 그런 모임에 가본 적이 없어서……”
“일단 치수부터 먼저 재볼까요?”
“저, 바로 맞추려고 하는 건 아니구요, 그런 곳에 가서 입을 수 있는 드레스가 어떤 건지 먼저 좀 알아보려고……”
“괜찮아요. 치수를 재보면 맞는 스타일의 옷을 추천드릴 수 있어서 그런 거에요. 부담 가지실 필요 없어요. 잠깐만 일어나 보실래요?”
여인이 근처에 있던 한 아가씨에게 눈짓을 했고, 이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 그녀가 어느새 손에 쥔 자로 선경의 몸을 이리저리 재기 시작했다. 선경은 그저 로보트처럼 뻣뻣하게 아가씨의 손길에 몸을 맞길 뿐이었다.
“겉보기완 다르게 볼륨감 있으시네요?”
치수재기를 마치고 나서 엘레나 정이란 여인이 의외라는 듯 말했다.
“네? 네……”
“재보지 않고 눈대중으로 하면 실수하기 좋겠어요. 후후……”
여인이 묘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곤 다시 한 번 선경의 몸을 아까와는 다른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다 봤다. 그 눈길이 선경을 더욱 어색하게 했다.
“제가 보기엔 무난한 듯하면서도 약간의 포인트가 있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색상은 생각해두신 것이 있나요?”
“아뇨.”
“그럼… 검은색과 흰색이 가장 무난한데……”
그녀가 다시 한 번 선경을 살펴보며 말했다.
“피부가 유난히 흰 편이시라 검은 색이 좋을 것 같아요. 원피스 형태가 좋을 것 같고. 하단은 너무 길지 않게 활동성도 보장하면서 포인트로 섹시함을 강조할 수 있는 중국식 옆트임이 어떨까 해요.”
“네… 그런데 모임이 이번 주말인데…..”
“걱정 마세요. 마침 거의 맞는 옷이 하나 있어요. 내가 보기에…”
선경의 가슴과 허리, 엉덩이를 다시 살펴보곤
“조금만 손을 보면 될 거에요. 일단 한 번 입어보세요.”
잠시 후 엘레나 정이 들고 온 옷을 탈의실에서 갈아 입은 선경이 어색한 몸짓으로 나오자 작업실의 모든 사람들이 커진 눈으로 선경을 돌아봤다. 몸에 붙어 굴곡진 몸을 환히 보여주는 드레스의 모습은 조금 전 조금 마른 듯한 평범한 모습의 아줌마가 정말 맞나 싶을 정도였다. 보기 좋을 정도로 처지지 않고 봉긋 솟은 가슴과 뱃살 없이 매끈하게 오목한 허리, 그리고 청자처럼 부드럽게 하트를 그리며 내려오는 골반의 모습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반전이었고, 잠깐씩 옆트임으로 보이는 왼쪽 허벅지와 곧게 뻗어 내린 다리의 모습은 놀랍도록 치명적인 유혹이었다. 엘레나 정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린 채 동작을 멈췄다. 그런 그녀가 잠시 후 혼잣말처럼 뱉은 말은 거기 있던 모든 사람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었다.
“세상에! 이제 보니… 감춰진 보석이었군!”
그런 모두의 시선이 너무나 부담스러워 선경은 자꾸만 쭈뼛거렸다.
“저… 어색… 하죠?”
“아뇨. 전혀. 손볼 필요 없이 바로 입어도 되겠어요. 그리고……”
선경을 가운데 두고 한 바퀴 돌아본 엘레나 정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지금도 좋지만 헤어스타일과 화장만 조금 잘 하면 대부분 남자들의 정신을 잃게 할 것 같네요.”
“네?”
“아, 그냥 아주 좋다는 뜻이에요. 암튼 선경씨하고 아주 잘 어울려요. 딱 선경씨를 위한 옷이네요.”
“정말… 이세요?”
“네. 그래서…… 선경씨에게 내가 그 옷을 선물하고 싶군요.”
“선물요?”
“네. 안 그래도 옷값은 지훈씨가 내겠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임자 만나 가는 옷이니 내가 기쁘게 그냥 드려야 할 것 같아요.”
“그래도 어떻게… 옷이 무척 비싼 것 같은데…”
“아니에요. 내 옷이 선경씨로 인해서 더 빛나는 것 같아 아주 만족해요. 사실 그 옷이 배우 한효주씨를 위해서 만든 거였는데 생각보다 잘 어울리지 않더라구요. 아무래도 아직 나이가 그 옷의 농염함을 소화하기는 어려웠던 것 같아요. 그런데 선경씨와는 정말 잘 어울리네요. 깜짝 놀랄 만큼.”
“그래도…”
“정말 괜찮아요. 대신 나중에 내 옷 모델 한 번 해주겠어요?”
“저 그런 거 경험 없는데요……”
“괜찮아요. 사진모델하면 아주 잘 어울리겠어요. 단아한 이미지의 외모와 촉촉하게 빛나는 흰 피부가 정말 매력적이라서 사진도 아주 잘 받을 것 같아요. 그래 줄래요?”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거라면 당연히 해드려야죠. 이렇게 좋은 옷도 주시는데… 근데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걱정 말아요. 그건 그쪽 전문가들이 알아서 할 거에요.”
“네……”
“오늘 정말 기분 좋군요. 난 이런 날이 좋아요. 내 옷에 딱 맞는, 아니 내 옷을 살려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났을 때의 기분은 큰 희열과 성취감을 주죠.”
“……”
“기분 너무 좋은데 우리 같이 기념 셀카나 하나 찍을까요?”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선경은 오늘의 일이 마치 꿈에서 일어난 것처럼 느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그렇게 조금은 들뜬 모습으로 넋을 잃고 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번호를 내려다 보던 선경은 깜짝 놀랐다. 지훈이었다.
“여, 여보세요?”
“전화 받기 괜찮으세요?”
“네. ‘부용’에 들렸다가 지금 택시 타고 집에 가는 길이에요.”
“그러셨군요. 어떻게 옷은 마음에 드는 것이 있던가요?”
“네.”
“다행이군요. 그럼 옷은 받으셨어요?”
“네. 좀 부담스럽게 옷이 저와 잘 어울린다고 그냥 선물로 주셨어요.”
“그래요? 음……”
예상치 못한 그의 침음성에 선경이 놀랐다.
“저기, 제가 무슨 실수라도……?”
“아뇨, 아니에요. 저도 예상 못한 일이라서요. 그 분이 프라이드가 강하신 분이라 연예인에게도 마음에 안들면 판매 안하시는 분이거든요.”
“아, 그래요?”
“네. 아무리 유명인사라도 공짜로 자신의 작품을 주는 경우는 없다고 알고 있는데… 그런데 선물로 그냥 주셨다는 걸 보니 선경씨와 옷이 정말 잘 어울렸던 모양이네요.”
“그렇게 말씀하시긴 했는데… 전 잘 모르겠어요. 그냥 받은 것이 부담스럽기도 하고… 그런데 엘레나 정이란 분이 대신 나중에 사진모델 좀 부탁한다고 하셔서 그러기로 했어요.”
“그랬군요. 여하튼 잘 어울리는 옷을 구하셨으니 다행입니다. 소개는 해놓고 마음에 안 드시면 어쩌나 내심 걱정을 했거든요.”
“그분 무척 실력 있으신 분인가 봐요. 거기 있는 옷들이 모두 다 멋있더라구요. 도무지 마음에 안 드는 옷이 없던걸요!”
“하하…… 저는 잘 모르지만 그 분야에선 꽤 알아준다고 하더군요.”
“그러실 것 같아요. 그런데 그런 분은 어떻게 아시는 거에요?”
그 질문을 하면서 내심 선경은 지훈의 반응이 궁금했다.
“아… 전에 우연치 않게 제가 그 분을 도와드린 적이 있어요. 그래서 좀 알죠.”
“네에……”
“선택하신 옷이 어떤 옷인지 무척 궁금하군요. 하하하……”
“쑥스럽네요. 후훗……”
“저 죄송한데……”
“네?”
“댁에 가시면 그 옷 입고 사진 하나 찍어서 보내주시면 안될까요? 얼굴은 가리셔도 되니까요.”
“저 컴퓨터로 사진 보내고 하는 거 할 줄 모르는데……”
“핸드폰으로 찍으셔서 그냥 메모로 전송하시면 돼요. 전신거울이 있으시면 그 앞에서 거울보고 찍으시면 되고, 사진 찍을 때 핸드폰으로 얼굴 가리시면 되구요.”
“아… 네.”
“해주시겠어요?”
“좀 부끄럽긴 한데…… 한 번 해볼게요.”
“감사합니다. 그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조심해서 댁에 들어가시구요.”
“네.”
통화를 끊고 선경은 종이백 속에 담긴 옷을 새삼스럽게 내려다 봤다. 심장의 고동도 조금 빨라져 있었다.
핸드폰을 손에 들고 거실 한 켠에 걸려있는 전면 거울 앞에서 선경은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 봤다. 거울 속 검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는 자신도 놀랄 만큼 아름답게 보였다. 가슴라인이 약간의 라운드로 파여있어 쇄골이 드러나 보이고 가슴 둔덕의 시작점과 그 사이의 골이 아주 살짝 드러나 있어 오히려 더 느낌이 있었다. 바디라인을 따라 물결치듯 내려와 무릎 바로 아래까지 내려온 하단은 다리를 살짝 들면 트여진 옆으로 그녀의 길고 매끈한 다리를 감질나게 보여주었다. 평소 바지를 즐겨 입고 때로 치마를 입는다 해도 발목에까지 오는 긴 치마를 입던 그녀로서는 무척이나 낯선 모습의 자신이었다.
(조금 야하지 않나? 어깨와 가슴도 좀 드러나고 옆에 다리는 허벅지까지 보이는데…… 근데 옷은 참 멋있다. 내가 이렇게 예쁘게 보일 줄은 정말 몰랐어.)
선경이 ‘부용’을 나올 때 엘레나 정이란 여자가 입구에서 인사를 문득 이런 말을 했었다.
“선경씨, 스스로의 몸에 대해서 잘 모르죠?”
그게 무슨 말인지 선경은 지금도 오리무중이었다. 나름 짐작을 해본다면 아마도 자신이 결혼한 여자 치고는 아직도 좋은 몸매를 유지하고 있다는 뜻이 아니었을까?
잡생각을 털듯 잠깐 머리를 흔들고 머리카락을 가다듬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을 돌아보며 이리 저리 포즈를 취해보던 선경은 오른손을 허리에 대고 왼발을 비스듬히 조금 앞으로 내밀어 트여진 옆으로 다리가 보이게 하고는 왼손으로 핸드폰을 들어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사진을 찍었다. 타이머를 이용해 제법 흔들리지 않고 찍은 사진을 들여다 보며 선경은 만족스럽지 못한 표정을 짓다가 거실등을 직접등이 아닌 간접등으로 바꾸고 다시 찍어봤다. 너무 날카롭지 않고 은은한 모습이 훨씬 마음에 드는 선경이었다.
(이제 이걸 보내도 될까? 이 사진을 보면 지훈씨는 뭐라고 할까? 마음에… 들어 할까?)
다시 또 쑥스러움이 몰려왔다. 마음 같아서는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지훈 때문에 모임에 갈 수 있는 좋은 옷을 갖게 되었으니 보내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결국 잠시의 망설임 끝에 사진을 보낸 선경은 그의 답장이 오기까지 자꾸만 심장이 쿵쾅거리고 불안하기만 했다. 그렇게 거실을 서성이던 몇 분 뒤
[Amazing! 그야말로 여신 강림이군요!]
그의 칭찬이 선경을 안심시키고 얼굴을 붉게 물들이게 했다. 입가에 배시시 웃음마저 맴돌았다.
“치명적인 아름다움이군요!”
남편 회사의 사장이라는 사람이 선경을 보고 한 첫 말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그녀의 아름다움을 하나같이 칭찬했다. 선경은 몹시 당황스럽고 부담스러웠으며 흥분되기도 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미모를 좋게 봐줄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반면 여자들은 때로 시기와 질투의 빛을 띠기도 하고 때로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짓기도 했으며, 몇몇은 선경에게 다가와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며 자신을 소개하기도 했다. 그렇게 서로를 소개하고 인사하는 시간이 지나고 공식적인 디너파티가 시작됐다. 진행 요원들이 소개하는 대로 커플들은 자리를 이동했고 선경과 현석도 안내를 받아 이동할 때, 누군가 진행 요원에게 다가와 귓속말을 나눴다. 그리고 진행 요원이 두 사람에게 다가와 말했다.
“두 분 자리가 바뀌셨습니다. 이리 오십시오.”
안내된 자리는 처음 뒤쪽이던 곳과 다르게 앞쪽 중앙 사장이 있는 테이블 바로 옆이었다. 그곳은 회사 중역진이 모여있는 자리로 선경이 있는 왼쪽 좌석은 전무라는 사람부부, 맞은 편은 영업이사 부부, 오른편은 남편이 소속된 팀의 팀장 자리였다.
자리에 앉아 다시 서로 인사를 나눴다. 남편 현석은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태도로 굳어 있었지만 나머지 세 남자는 가득한 여유로 그들 부부를 바라보고 있었다. 선경은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더 신경 쓰였다. 가장 신경이 쓰이는 상대는 맞은 편에 있는 영업이사의 아내라는 여자였다. 아무리 봐도 화류계 출신일 것만 같은 진한 화장, 미인이긴 하지만 눈빛에는 지나친 섹시함이 가득 내비쳐 지고 있었다. 전무라는 사람의 부인은 나름 품위를 지키려 노력한 흔적이 보였다. 표정도 조금은 도도해 보였다. 반면 팀장의 부인이라는 사람을 보는 순간 선경은 문득 어디선가 본듯한 느낌에 고개를 갸웃했다. 사교모임에 아주 익숙한 사람인 것이 틀림없는 여유와 매너, 옷차림마저 천하지 않게 화사한 조화를 이루는 것에 자꾸만 눈길이 갔다.
서로간의 인사가 마쳐질 때쯤 식사 서빙이 시작됐다. 그리고 누군가 일어나 오늘의 모임을 위한 사장님의 대표 건배를 알렸다. 그 때쯤 웨이터들이 바삐 돌아다니며 각자의 잔에 샴페인을 채워나갔다. 자리에서 일어나 모두의 잔이 채워진 것을 살펴 본 후 사장이 잔을 들고 말했다.
“자, 우리의 영원한 발전을 위하여!”
“위하여!”
그렇게 디너 파티가 시작되고 조금은 어수선하게 여기 저기서 이야기 꽃을 피울 때쯤, 석현은 팀장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그 쪽으로 신경을 쓰고 있었고 전무는 영업이사와 또 무슨 이야긴가를 나누고 있었다. 선경은 그저 말없이 식사만을 하고 있었다. 딱히 자신이 나서서 할 이야기도 없었거니와 남자들 사이 사이에 끼여있는 여자들 입장에서는 서로에게 말을 건네기도 조금은 불편한 상황이었다. 그 때 누군가 팀장에게 다가와 귓속말을 했고 팀장은 잠시 실례한다는 말과 함께 자리를 떴다. 그러자 팀장의 아내가 자리를 옮겨 팀장의 자리로 옮겨와 선경 옆에 앉았다. 그리고
“반가워요.”
“네. 반갑습니다, 사모님.”
“사모님은 무슨... 그 소리는 옆에 계신 분들에게 어울리고 나는 그냥 언니라고 불러줘요. 가희 언니.”
“저, 그래도……”
“괜찮아요. 내가 올해 36이니까 그쪽보다 언니 맞을 것 같은데, 아니에요?”
“아, 네. 저 올해 32인 걸요, 가희… 언니.”
“후훗…… 좋아요. 그런데 처음이라 자리가 좀 불편하죠?”
“네. 제가 이런 모임에는 경험이 없어서요.”
“괜찮아요. 나도 처음엔 그랬어요. 그렇지만 곧 익숙해지질 테니 걱정할 것 없어요.”
“네……”
“근데 혹시 나 어디서 보지 않았어요?”
“글쎄요. 실은 저도 아까부터 그 생각 했는데, 얼굴이 어디서 뵌 분 같아요.”
“쿡…… 아닐 거에요. 초면 맞을 걸요?”
“그, 그런가요?”
“예전에 연예계에 잠시 있었어요. 그래서 아마 본 적이 있을 거에요.”
“아, 어쩐지! 자꾸 뵌 분 같은데 기억이 안 나서 고민했어요. 후훗……”
“그랬어요? 아침에 하는 방송 리포터로 몇 년 활동했죠. 그러다 그 방면에선 더 이상 성공하기 어려울 것 같아 그냥 결혼하고 집안 살림이나 하며 지내고 있어요.”
“그러셨구나……”
“이름이…?”
“아, 참. 저 선경이에요. 이선경.”
“선경씨…… 좋은 이름이네요. 미모만큼 예쁜데요?”
“별말씀을. 언니만 해도 저보다 예쁘신데. 오늘 와서 보니 미인 아니신 분들이 없어서 주눅마저 드는걸요.”
가희가 몸을 수그려 선경에게 다가와 조그맣게 이야기했다.
“아니에요. 오늘 참석한 사람 중에 선경씨처럼 순수하고 단아한 미인은 단연코 없다고 말할 수 있어요. 퇴폐적인 미인은 좀 있지만.”
그러며 슬쩍 앞에 앉아있는 영업이사 부인을 한 번 쳐다봤다. 선경은 그녀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고는 혹시라도 상대가 그 소리를 들었을까 조심스러워졌다. 가희도 선경의 조심스러움을 느꼈는지 짐짓 소리를 높여 말했다.
“어쩐 일인지 오늘 파티의 여왕께서 좀 늦으시는군.”
“파티의 여왕이요?”
“으흠!”
순간 여태 아무 말 없이 바라만 보던 영업이사의 부인이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흥! 여왕은 무슨!”
그 때였다. 입구에서부터 약간의 어수선함이 일어나며 누군가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긴 생머리를 늘어뜨리고 순백의 드레스를 살짝 바닥에 끌며 나타난 여인. 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그녀를 향해 눈길을 돌렸고, 선경도 그녀를 바라보며 눈을 크게 떴다.
“여왕은 여왕이죠?”
가희의 말에 하마터면 선경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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