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안아줘요!
그와 함께 나란히 앉아 선경은 분수대의 물빛에 시선을 고정했다.
“실망… 했어요?”
선경이 지훈을 바라봤다. 침착하게 가라앉아있는 부드러운 그의 눈빛을 보며 선경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전혀 아니에요.”
그가 미소를 지었다. 그 소리 없는 웃음이 선경을 아프게 했다.
“조금 놀라긴 했어요. 그런데 그 휠체어 빼고는 전부 다 내가 생각한 그 이상이에요.”
“후한 점수로군요.”
다시 또 서로 말이 없었다. 선경이 앉은 벤치 옆에 휠체어를 나란히 하고 지훈은 마치 햇빛을 즐기러 나온 사람처럼 가만히 있었다.
“전 어때요? 실망… 하셨죠?”
끝으로 갈수록 기어들어가는 선경의 목소리였다. 말을 해놓고 다시 슬쩍 지훈을 바라봤다. 그러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선경은 놀란 아이처럼 얼른 시선을 돌렸다.
“기대한 것은 아닌데……”
잠시 말을 끊은 지훈이 선경을 바라보던 시선을 저 먼 곳으로 돌렸다.
“깜짝 놀랄 만큼… 미인이시군요.”
“설마……”
“진심입니다.”
다시 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 어색함이 싫어 선경이 입을 열었다.
“드레스 소개해주셔서 감사했어요.”
“아, 참. 엘레나 정이 옷을 선물했다고 들었습니다.”
“네. 꽤 비쌌을 텐데……”
“그럴 겁니다. 엘레나 정이 선경씨가 자신의 옷과 잘 어울린다고 무척 좋아하더군요.”
“그렇다면 다행인데. 전 잘 모르겠더군요.”
“맞을 겁니다. 워낙 허튼 소리를 잘 안 하는 분이니까요.”
“네…… 그런데 그 분 말이 그 옷 값을 지훈씨가 계산하겠다고 했다면서요?”
“그러고 싶었지만 그렇겐 안됐죠. 하하……”
“암튼 감사 드려요.”
“별말씀을…… 파티에서도 선경씨를 빛내 주던가요?”
“네, 무척……”
약간 어두워지는 듯한 선경의 옆모습을 지훈이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뭔가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군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걱정스러운 듯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아이처럼 자신이 겪었던 황당함을 이야기하고 싶어지는 선경이었다.
“좀… 그랬어요.”
“흠…… 무슨 일인지 이야기 해주실 수 있으세요?”
선경이 선뜻 답을 하지 못하자 그의 눈이 더 깊이 선경을 바라봤다. 그러나 재촉하지는 않았다. 선경이 스스로 무언가를 말할 때까지 그는 기다려주고 있었다.
“그냥은… 말하기 힘들 것 같아요.”
“그렇군요. 그렇다면… 어때요? 술의 힘을 빌려보는 것이?”
“술…이요?”
“네.”
“저 술 잘 못하는 데…….”
“그럼 더욱 잘 됐군요. 술의 힘으로 다른 사람이 되어 내게 말해줘요. 그 다음엔 잊어버리고.”
“후훗…… 그런다고 잊혀질까요?”
“혹시 모르죠. 도움이 될지도. 아니면… 적어도 지금보다는 덜 답답하지 않겠어요?”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그럼 우리 아주 좋은 곳으로 가요. 기왕에 먹을 거면.”
“좋은… 곳이요?”
“네.”
“어떤 곳이면 좋으실지?”
“음…… 분위기 있고 조용하고 다른 사람 눈치 안보고 소리치거나 울거나 해도 부끄럽지 않을 수 있는 곳.”
지훈이 잠시 고개를 숙이고 생각하는 듯 하더니 다시 고개를 들고 선경을 바라봤다.
“그런 곳이 있긴 한데……”
“그런데요?”
“좀 멉니다.”
“얼마나? 설마 외국?”
“외국은 아닙니다.”
“그럼 됐네요. 가요, 우리!”
“오늘 중으로 못 돌아 올 수도 있는데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선경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상관없어요.”
차는 선경이 처음 타보는 상당히 큰 차였다. 검은 선글라스를 쓴 경호원 같은 사람이 차를 몰고 지훈과 선경은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차가 서울 시내를 벗어날 때까지 차 안은 고요함만이 가득했다.
“처음 타보는 차네요.”
선경이 어색한 미소로 지훈을 향했다.
“링컨 컨티넨탈이에요. 제가 몸이 불편해서 일부러 공간이 넓은 차를 선택하게 됐습니다.”
“의자가 무척이나 편안한데요!”
“다행이군요.”
항공기 일등석에 타본 적은 없지만 아마도 이렇지 않을까 생각해보는 선경이었다. 넓고 편안하고 몸의 형태에 맞춰 자세를 잡아주는 시트의 고급스러움이 놀라웠다.
“혹시 옷이 잘못되기라도 했던가요?”
“아뇨. 옷은 너무나 잘 맞았어요.”
“네… 엘레나 정이 화보로 남겨두고 싶다고까지 해서 저도 무척 그 모습이 궁금했었습니다만.”
“보실 수 있게 해드릴게요.”
“어떡해요?”
“가보시면 알아요.”
지훈을 만나면서 선경은 그 드레스를 갖고 나왔다. 그러느라 평소 잘 갖고 다니지 않는 제법 큰 핸드백을 손에 들어야 했다.
(내겐 너무 과분한 옷이고 또 이 옷을 입고 그 더러운 자리에 또 가고 싶지는 않아.)
그랬다. 그래서 돌려주어야겠다 생각했던 선경이었다. 그런데 엘레나 정에게 바로 돌려주면 그것은 너무 미안한 일 같았다. 아무래도 중재자가 필요하고 잘 설명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런데 우리 점심을 못 먹었네요. 어디 들러서 식사하고 가도록 하죠.”
선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지훈을 만나고 얼마 안돼서부터 이미 생체시계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다만 첫만남의 긴장감이 그것을 조금 덮고 있었을 뿐이었다.
“아저씨, 이천 휴게소에서 잠시 쉬어가죠.”
지훈이 앞을 보며 말했다.
“네, 도련님.”
도련님? 왜 지훈을 도련님이라고 부르는 걸까? 궁금증이 선경의 머리 속에서 한 동안 자꾸만 맴돌았다.
너무나 편안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느 순간 차 안에서 잠이 든 선경이 다시 눈을 떴을 때, 차도 어느 건물 앞엔가 주차하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에요?”
지훈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나가서 한 번 둘러보세요.”
차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고개를 돌린 순간 저 앞에 너무나 익숙한 바위 능선이 보였다. 휠체어에 올라탄 지훈도 옆으로 다가왔다.
“어딘지 아시겠습니까?”
“여기…… 설악이군요!”
“네, 맞아요.”
대명콘도였다. 선경은 이전에 와본 적이 없는 곳이지만 이보다 더 아래쪽 한화리조트에는 와본 적이 있었다. 바라보는 풍광은 그곳보다 이곳이 더 좋은 것 같았다.
“이리 오세요. 예약해두었습니다.”
“언제요?”
“오는 길에요. 주무실 때.”
“아…… 혹시 저 코는 안 골던가요?”
“아뇨. 아기처럼 조용히 잘 주무시던걸요.”
“흠흠. 그럼 다행이군요.”
베시시 웃는 선경을 보며 그도 밝게 웃었다.
안내된 방은 설악의 공룡능선이 선명히 잘 보이는 곳이었다. 침대가 있는 작은 방과 거실, 화장실이 전부인 단출한 곳.
“일찍 예약했으면 더 좋은 곳으로 준비했을 텐데, 죄송하군요.”
“아니에요. 이 정도면 정말 좋은 걸요. 전망도 좋구.”
거실 창을 활짝 열며 선경은 시원한 공기를 가슴 깊이 들이 마셨다. 복잡하고 헝클어졌던 머리 속까지 말끔하게 정리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여기 정말……”
고개를 돌리던 선경이 말을 멈췄다. 자신을 바라보는 지훈의 깊은 시선과 마주친 선경은 얼음처럼 굳어져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시선이 너무나 깊숙이 자신을 관통하는 느낌이어서 한 올의 옷도 걸치지 않은 채 그 앞에 서있는 느낌이었다. 얼굴이 붉어져왔다.
“가까이 오시겠어요?”
지훈의 말에 자석에 끌리듯 조금씩 다가가 그의 앞에 섰다. 휠체어에 앉은 그를 내려다 보다 그와 눈높이를 맞추고 싶어 무릎을 바닥에 대고 허리를 세워 앉았다. 이제 그와 비슷한 눈높이가 된 것 같았다.
“왔어요.”
그의 손이 선경의 손을 잡아 자신의 품으로 가져갔다. 그녀의 손을 자신에 뺨에 갖다 대며 눈을 감는 그를 보며 선경은 속에서부터 무엇인가가 울컥하며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선경은 알 것 같았다. 자신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자신을 따뜻하게 감싸줄 사랑이라는 것을.
천천히 몸을 기울여 지훈의 무릎에 상체를 내려놨다. 지훈이 선경의 손을 자신의 무릎으로 가져갔지만 손은 여전히 잡은 채였다. 지훈의 무릎에 엎드린 선경은 눈을 감고 편하게 있었다. 그의 무릎이 따뜻하고 편안했다.
“힘든 일이 있었던 모양이군요.”
선경은 아무런 움직임도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에서 한 방울 떨어져 내린 눈물이 모든 것을 다 말해주는 듯 했다.
“많이 힘들 때는 잠시 쉬는 것이 좋습니다. 몸도 마음도. 그러면 다시 도전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기죠.”
선경은 마음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가 없는걸요. 나는 맞서 싸울 힘이 없어요. 나는… 너무나 약해요.)
“내가 처음 내 힘으로 일어설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선경의 몸이 경직되어졌다.
“그 땐 너무나 절망스러워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 의지가 없었죠. 자포자기였다고나 할까요?”
그는 왜 휠체어를 의지해야 하는 걸까? 느낌으로 그의 다리는 의족이 아닌 정상의 다리임이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따뜻하고 부드러운 느낌은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처음 얼마간은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을 것 같더니 점차 시간이 지나가면서 다시 일상의 생활로 돌아가는 나를 발견하고 놀라기도 했죠. 그럴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으니까요.”
다시 걷지 못한다는 사실에 그는 얼마나 놀랐을까? 아니 얼마나 절망했을까? 그의 그 슬픈 마음이 전해져 오는 듯 해서 선경은 가슴이 아파왔다.
“물론 많은 것을 포기하는 법도 배워야 했습니다. 그 덕분인지 시간이 갈수록 마음도 점점 편해지더군요.”
지훈이 한 손으로 그의 무릎을 베고 있는 선경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길. 그것은 마치 어려서 엄마가 쓰다듬어주던 그 손길과도 닮아있었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시간이 가면 점차 적응하게 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니 너무 힘들어하지 마세요.”
그가 하는 위로의 말이 실제적인 위로가 되지는 않았다. 다만 자신을 걱정하는 그의 따뜻한 마음을 느끼는 것으로 선경은 위로를 받았다.
“옷… 보고 싶다고 했죠?”
선경이 고개를 들고 그와 시선을 마주하며 말했다.
“네. 무척.”
“그럼 좀 기다려줘요. 씻고 나서 보여줄게요.”
그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경도 미소를 지으며 일어나 핸드백을 갖고 화장실을 지나쳐 작은 방으로 들어가서 문들 닫았다.
(남편이 원하는 성공을 막을 힘이 내겐 없어요. 나는 그에게 빚이 있거든요. 그래서 그에게 멈추라고 할 수가 없어요. 그 길이 내겐 어쩌면 죽음 같은 고통이겠지만 말이에요. 그럴 바엔 아직 더 더럽혀지기 전에 당신에게 나를 주고 싶어요.)
옷을 벗으며 선경은 마음으로 자신을 다독였다. 자신의 이 결정이 결코 충동적인 선택은 아니라고. 그래서 결코 후회하지 말자고.
벗은 채로 화장실에 들어가며 얼핏 바라본 지훈은 아까의 자세 그대로 휠체어에 앉아 저기 보이는 설악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선경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잠그지도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다 여겼다. 샤워기를 틀어 온도를 맞추고 자신의 몸을 하나씩 씻어 나갔다. 두려운 첫날밤을 준비하는 신부처럼.
시간이 꽤 흘렀던 것 같았다. 몸을 씻고 다시 나왔을 때 이미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불은 켜있지 않았다. 아마도 그녀를 위한 그의 배려였는지도 몰랐다. 지훈은 아직도 아까의 자세 그대로였다. 선경이 다시 방으로 들어가 그를 위해 드레스를 입고 나왔을 때 어둠은 완전히 내려와 있었다.
“불을 켤게요.”
그렇게 말하고 선경이 스위치를 켰다. 불은 거실이 아닌 화장실과 방과 들어오는 출입구 사이의 등이었다. 노랗게 빛나는 그리 환하지 않은 불빛이 오히려 부담스럽지 않아 좋았다.
선경이 조심스럽게 걸어서 지훈의 앞으로 가서 섰다.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인 그녀를 향해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잠시 둘 사이를 감싸고 돌았다.
“별로…죠?”
고개를 들고 지훈을 봤을 때 지훈은 담담한 표정으로 선경을 보고 있었다. 큰 기대를 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그 담담함에 선경은 조금 섭섭함을 느꼈다. 지나가는 빈말이라도 좋다 이야기해주면 좋았을 것을, 그렇게 생각하면서.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지훈이 휠체어를 조금 움직여 선경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선경의 팔을 잡아 당겼다. 선경은 그의 담김에 아까처럼 다시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으려 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지훈이 휠체어를 옆으로 살짝 돌리며 선경을 당기고 두 팔로 선경의 허리를 잡아 안았다.
“세상에 없는… 그림… 같군요. 아름답습니다.”
선경의 몸이 떨려왔다. 그가 자신을 아름답게 봐주는 그것이 이렇게 가슴 떨리는 일일 줄 미쳐 예상하지 못했다. 더불어 자신의 허리를 안고 머리를 그녀의 배에 대고 있는 그의 얼굴의 체온이 선경의 체온을 자꾸 끌어 올려 점차 몸이 뜨거워져갔다.
“정말인가요?”
그가 머리를 기댄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 부탁 하나만 들어줘요.”
“내가 들어드릴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선경이 다시 무릎을 바닥에 대고 그와 눈을 맞췄다. 선경을 보는 지훈의 눈이 보석처럼 빛났다.
“사랑해줘요. 날… 안아줘요!”
놀란 듯 커진 지훈의 눈이 지진에 흔들리는 것처럼 마구 떨렸다.
선경은 오래도록 잊을 수가 없었다. 그날, 중심을 잃고 흔들리던 지훈의 그 슬픈 눈을.
*** 7부는 27일 20시경에 올려집니다.
그와 함께 나란히 앉아 선경은 분수대의 물빛에 시선을 고정했다.
“실망… 했어요?”
선경이 지훈을 바라봤다. 침착하게 가라앉아있는 부드러운 그의 눈빛을 보며 선경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전혀 아니에요.”
그가 미소를 지었다. 그 소리 없는 웃음이 선경을 아프게 했다.
“조금 놀라긴 했어요. 그런데 그 휠체어 빼고는 전부 다 내가 생각한 그 이상이에요.”
“후한 점수로군요.”
다시 또 서로 말이 없었다. 선경이 앉은 벤치 옆에 휠체어를 나란히 하고 지훈은 마치 햇빛을 즐기러 나온 사람처럼 가만히 있었다.
“전 어때요? 실망… 하셨죠?”
끝으로 갈수록 기어들어가는 선경의 목소리였다. 말을 해놓고 다시 슬쩍 지훈을 바라봤다. 그러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선경은 놀란 아이처럼 얼른 시선을 돌렸다.
“기대한 것은 아닌데……”
잠시 말을 끊은 지훈이 선경을 바라보던 시선을 저 먼 곳으로 돌렸다.
“깜짝 놀랄 만큼… 미인이시군요.”
“설마……”
“진심입니다.”
다시 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 어색함이 싫어 선경이 입을 열었다.
“드레스 소개해주셔서 감사했어요.”
“아, 참. 엘레나 정이 옷을 선물했다고 들었습니다.”
“네. 꽤 비쌌을 텐데……”
“그럴 겁니다. 엘레나 정이 선경씨가 자신의 옷과 잘 어울린다고 무척 좋아하더군요.”
“그렇다면 다행인데. 전 잘 모르겠더군요.”
“맞을 겁니다. 워낙 허튼 소리를 잘 안 하는 분이니까요.”
“네…… 그런데 그 분 말이 그 옷 값을 지훈씨가 계산하겠다고 했다면서요?”
“그러고 싶었지만 그렇겐 안됐죠. 하하……”
“암튼 감사 드려요.”
“별말씀을…… 파티에서도 선경씨를 빛내 주던가요?”
“네, 무척……”
약간 어두워지는 듯한 선경의 옆모습을 지훈이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뭔가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군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걱정스러운 듯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아이처럼 자신이 겪었던 황당함을 이야기하고 싶어지는 선경이었다.
“좀… 그랬어요.”
“흠…… 무슨 일인지 이야기 해주실 수 있으세요?”
선경이 선뜻 답을 하지 못하자 그의 눈이 더 깊이 선경을 바라봤다. 그러나 재촉하지는 않았다. 선경이 스스로 무언가를 말할 때까지 그는 기다려주고 있었다.
“그냥은… 말하기 힘들 것 같아요.”
“그렇군요. 그렇다면… 어때요? 술의 힘을 빌려보는 것이?”
“술…이요?”
“네.”
“저 술 잘 못하는 데…….”
“그럼 더욱 잘 됐군요. 술의 힘으로 다른 사람이 되어 내게 말해줘요. 그 다음엔 잊어버리고.”
“후훗…… 그런다고 잊혀질까요?”
“혹시 모르죠. 도움이 될지도. 아니면… 적어도 지금보다는 덜 답답하지 않겠어요?”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그럼 우리 아주 좋은 곳으로 가요. 기왕에 먹을 거면.”
“좋은… 곳이요?”
“네.”
“어떤 곳이면 좋으실지?”
“음…… 분위기 있고 조용하고 다른 사람 눈치 안보고 소리치거나 울거나 해도 부끄럽지 않을 수 있는 곳.”
지훈이 잠시 고개를 숙이고 생각하는 듯 하더니 다시 고개를 들고 선경을 바라봤다.
“그런 곳이 있긴 한데……”
“그런데요?”
“좀 멉니다.”
“얼마나? 설마 외국?”
“외국은 아닙니다.”
“그럼 됐네요. 가요, 우리!”
“오늘 중으로 못 돌아 올 수도 있는데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선경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상관없어요.”
차는 선경이 처음 타보는 상당히 큰 차였다. 검은 선글라스를 쓴 경호원 같은 사람이 차를 몰고 지훈과 선경은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차가 서울 시내를 벗어날 때까지 차 안은 고요함만이 가득했다.
“처음 타보는 차네요.”
선경이 어색한 미소로 지훈을 향했다.
“링컨 컨티넨탈이에요. 제가 몸이 불편해서 일부러 공간이 넓은 차를 선택하게 됐습니다.”
“의자가 무척이나 편안한데요!”
“다행이군요.”
항공기 일등석에 타본 적은 없지만 아마도 이렇지 않을까 생각해보는 선경이었다. 넓고 편안하고 몸의 형태에 맞춰 자세를 잡아주는 시트의 고급스러움이 놀라웠다.
“혹시 옷이 잘못되기라도 했던가요?”
“아뇨. 옷은 너무나 잘 맞았어요.”
“네… 엘레나 정이 화보로 남겨두고 싶다고까지 해서 저도 무척 그 모습이 궁금했었습니다만.”
“보실 수 있게 해드릴게요.”
“어떡해요?”
“가보시면 알아요.”
지훈을 만나면서 선경은 그 드레스를 갖고 나왔다. 그러느라 평소 잘 갖고 다니지 않는 제법 큰 핸드백을 손에 들어야 했다.
(내겐 너무 과분한 옷이고 또 이 옷을 입고 그 더러운 자리에 또 가고 싶지는 않아.)
그랬다. 그래서 돌려주어야겠다 생각했던 선경이었다. 그런데 엘레나 정에게 바로 돌려주면 그것은 너무 미안한 일 같았다. 아무래도 중재자가 필요하고 잘 설명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런데 우리 점심을 못 먹었네요. 어디 들러서 식사하고 가도록 하죠.”
선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지훈을 만나고 얼마 안돼서부터 이미 생체시계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다만 첫만남의 긴장감이 그것을 조금 덮고 있었을 뿐이었다.
“아저씨, 이천 휴게소에서 잠시 쉬어가죠.”
지훈이 앞을 보며 말했다.
“네, 도련님.”
도련님? 왜 지훈을 도련님이라고 부르는 걸까? 궁금증이 선경의 머리 속에서 한 동안 자꾸만 맴돌았다.
너무나 편안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느 순간 차 안에서 잠이 든 선경이 다시 눈을 떴을 때, 차도 어느 건물 앞엔가 주차하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에요?”
지훈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나가서 한 번 둘러보세요.”
차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고개를 돌린 순간 저 앞에 너무나 익숙한 바위 능선이 보였다. 휠체어에 올라탄 지훈도 옆으로 다가왔다.
“어딘지 아시겠습니까?”
“여기…… 설악이군요!”
“네, 맞아요.”
대명콘도였다. 선경은 이전에 와본 적이 없는 곳이지만 이보다 더 아래쪽 한화리조트에는 와본 적이 있었다. 바라보는 풍광은 그곳보다 이곳이 더 좋은 것 같았다.
“이리 오세요. 예약해두었습니다.”
“언제요?”
“오는 길에요. 주무실 때.”
“아…… 혹시 저 코는 안 골던가요?”
“아뇨. 아기처럼 조용히 잘 주무시던걸요.”
“흠흠. 그럼 다행이군요.”
베시시 웃는 선경을 보며 그도 밝게 웃었다.
안내된 방은 설악의 공룡능선이 선명히 잘 보이는 곳이었다. 침대가 있는 작은 방과 거실, 화장실이 전부인 단출한 곳.
“일찍 예약했으면 더 좋은 곳으로 준비했을 텐데, 죄송하군요.”
“아니에요. 이 정도면 정말 좋은 걸요. 전망도 좋구.”
거실 창을 활짝 열며 선경은 시원한 공기를 가슴 깊이 들이 마셨다. 복잡하고 헝클어졌던 머리 속까지 말끔하게 정리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여기 정말……”
고개를 돌리던 선경이 말을 멈췄다. 자신을 바라보는 지훈의 깊은 시선과 마주친 선경은 얼음처럼 굳어져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시선이 너무나 깊숙이 자신을 관통하는 느낌이어서 한 올의 옷도 걸치지 않은 채 그 앞에 서있는 느낌이었다. 얼굴이 붉어져왔다.
“가까이 오시겠어요?”
지훈의 말에 자석에 끌리듯 조금씩 다가가 그의 앞에 섰다. 휠체어에 앉은 그를 내려다 보다 그와 눈높이를 맞추고 싶어 무릎을 바닥에 대고 허리를 세워 앉았다. 이제 그와 비슷한 눈높이가 된 것 같았다.
“왔어요.”
그의 손이 선경의 손을 잡아 자신의 품으로 가져갔다. 그녀의 손을 자신에 뺨에 갖다 대며 눈을 감는 그를 보며 선경은 속에서부터 무엇인가가 울컥하며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선경은 알 것 같았다. 자신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자신을 따뜻하게 감싸줄 사랑이라는 것을.
천천히 몸을 기울여 지훈의 무릎에 상체를 내려놨다. 지훈이 선경의 손을 자신의 무릎으로 가져갔지만 손은 여전히 잡은 채였다. 지훈의 무릎에 엎드린 선경은 눈을 감고 편하게 있었다. 그의 무릎이 따뜻하고 편안했다.
“힘든 일이 있었던 모양이군요.”
선경은 아무런 움직임도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에서 한 방울 떨어져 내린 눈물이 모든 것을 다 말해주는 듯 했다.
“많이 힘들 때는 잠시 쉬는 것이 좋습니다. 몸도 마음도. 그러면 다시 도전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기죠.”
선경은 마음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가 없는걸요. 나는 맞서 싸울 힘이 없어요. 나는… 너무나 약해요.)
“내가 처음 내 힘으로 일어설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선경의 몸이 경직되어졌다.
“그 땐 너무나 절망스러워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 의지가 없었죠. 자포자기였다고나 할까요?”
그는 왜 휠체어를 의지해야 하는 걸까? 느낌으로 그의 다리는 의족이 아닌 정상의 다리임이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따뜻하고 부드러운 느낌은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처음 얼마간은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을 것 같더니 점차 시간이 지나가면서 다시 일상의 생활로 돌아가는 나를 발견하고 놀라기도 했죠. 그럴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으니까요.”
다시 걷지 못한다는 사실에 그는 얼마나 놀랐을까? 아니 얼마나 절망했을까? 그의 그 슬픈 마음이 전해져 오는 듯 해서 선경은 가슴이 아파왔다.
“물론 많은 것을 포기하는 법도 배워야 했습니다. 그 덕분인지 시간이 갈수록 마음도 점점 편해지더군요.”
지훈이 한 손으로 그의 무릎을 베고 있는 선경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길. 그것은 마치 어려서 엄마가 쓰다듬어주던 그 손길과도 닮아있었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시간이 가면 점차 적응하게 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니 너무 힘들어하지 마세요.”
그가 하는 위로의 말이 실제적인 위로가 되지는 않았다. 다만 자신을 걱정하는 그의 따뜻한 마음을 느끼는 것으로 선경은 위로를 받았다.
“옷… 보고 싶다고 했죠?”
선경이 고개를 들고 그와 시선을 마주하며 말했다.
“네. 무척.”
“그럼 좀 기다려줘요. 씻고 나서 보여줄게요.”
그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경도 미소를 지으며 일어나 핸드백을 갖고 화장실을 지나쳐 작은 방으로 들어가서 문들 닫았다.
(남편이 원하는 성공을 막을 힘이 내겐 없어요. 나는 그에게 빚이 있거든요. 그래서 그에게 멈추라고 할 수가 없어요. 그 길이 내겐 어쩌면 죽음 같은 고통이겠지만 말이에요. 그럴 바엔 아직 더 더럽혀지기 전에 당신에게 나를 주고 싶어요.)
옷을 벗으며 선경은 마음으로 자신을 다독였다. 자신의 이 결정이 결코 충동적인 선택은 아니라고. 그래서 결코 후회하지 말자고.
벗은 채로 화장실에 들어가며 얼핏 바라본 지훈은 아까의 자세 그대로 휠체어에 앉아 저기 보이는 설악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선경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잠그지도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다 여겼다. 샤워기를 틀어 온도를 맞추고 자신의 몸을 하나씩 씻어 나갔다. 두려운 첫날밤을 준비하는 신부처럼.
시간이 꽤 흘렀던 것 같았다. 몸을 씻고 다시 나왔을 때 이미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불은 켜있지 않았다. 아마도 그녀를 위한 그의 배려였는지도 몰랐다. 지훈은 아직도 아까의 자세 그대로였다. 선경이 다시 방으로 들어가 그를 위해 드레스를 입고 나왔을 때 어둠은 완전히 내려와 있었다.
“불을 켤게요.”
그렇게 말하고 선경이 스위치를 켰다. 불은 거실이 아닌 화장실과 방과 들어오는 출입구 사이의 등이었다. 노랗게 빛나는 그리 환하지 않은 불빛이 오히려 부담스럽지 않아 좋았다.
선경이 조심스럽게 걸어서 지훈의 앞으로 가서 섰다.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인 그녀를 향해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잠시 둘 사이를 감싸고 돌았다.
“별로…죠?”
고개를 들고 지훈을 봤을 때 지훈은 담담한 표정으로 선경을 보고 있었다. 큰 기대를 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그 담담함에 선경은 조금 섭섭함을 느꼈다. 지나가는 빈말이라도 좋다 이야기해주면 좋았을 것을, 그렇게 생각하면서.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지훈이 휠체어를 조금 움직여 선경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선경의 팔을 잡아 당겼다. 선경은 그의 담김에 아까처럼 다시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으려 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지훈이 휠체어를 옆으로 살짝 돌리며 선경을 당기고 두 팔로 선경의 허리를 잡아 안았다.
“세상에 없는… 그림… 같군요. 아름답습니다.”
선경의 몸이 떨려왔다. 그가 자신을 아름답게 봐주는 그것이 이렇게 가슴 떨리는 일일 줄 미쳐 예상하지 못했다. 더불어 자신의 허리를 안고 머리를 그녀의 배에 대고 있는 그의 얼굴의 체온이 선경의 체온을 자꾸 끌어 올려 점차 몸이 뜨거워져갔다.
“정말인가요?”
그가 머리를 기댄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 부탁 하나만 들어줘요.”
“내가 들어드릴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선경이 다시 무릎을 바닥에 대고 그와 눈을 맞췄다. 선경을 보는 지훈의 눈이 보석처럼 빛났다.
“사랑해줘요. 날… 안아줘요!”
놀란 듯 커진 지훈의 눈이 지진에 흔들리는 것처럼 마구 떨렸다.
선경은 오래도록 잊을 수가 없었다. 그날, 중심을 잃고 흔들리던 지훈의 그 슬픈 눈을.
*** 7부는 27일 20시경에 올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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