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조폭 아이린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전화기를 열어보니까 이제 11시가 넘었다. 오랜 시간을 잔 것은 아니다. 생각해보니까 잠을 이렇게 푸욱 잔 것이 정말 오래만이다.
그런데 거실에서 도란거리는 얘기 소리가 들린다. 침실에서 거실로 가는 문은 활짝 열려있다. 나는 조용히 있으면서 얘기 소리를 들으려고 신경을 곤두세웠다.
"나는 애가 둘이니까 한 달에 1000 낸단말이야.
그런데 너는 해수 하나인데 500 이 뭐냐? 적어도 700은 내야지."
"언니이. 어떻게 그렇게..."
"내가 삼성동에 김사장네는 얼마 내느냐고 물어보니까, 거기는 1200씩 낸대."
"엄마야.. 무슨 과외를 그렇게 .."
"그 집도 밖으로 하는 말이 1200 이면 실제로는 1500 이상이야.
넌 겨우 700 인데 뭘 그렇게 엄살이셔?
그럼 해수를 김사장네로 보내볼래?"
"어디를 보내도 애가 안 간대잖아.
여기 김태현 선생님이 아니면 아무데도 안 가겠대.
그러지 말고 언니가 한 번만 봐줘라. 응?
요새 애 아빠 건설쪽이 경기도 안 좋다는데."
"웃기시네. 요게 어디서 뻥을 치고있어?
이번에 한강 유통에서 나라마트 두개 새로 짓는 것도 너네가 한다던데?
내가 모를 줄 알아?"
"하아. .. 이 불여시 언니는 모르는 게 없네."
"웃기고 있네. 너 혹시 치매있니?
지난 주에 나랑 한강유통에 갔을 때 민회장이 우리 둘 다 있는 데에서 얘기했잖아?"
"그랬었나?"
"너는 잔 말 말고 700으로 해. 콜?"
"600."
“700 자꾸 말시키면 100 씩 뛴다.”
“650.”
"800! 아니면 해수 못 오게 할꺼야."
"야아아. 언니가 선생님이야?
왜 언니가 나서서 난리야?"
"이 멍충아. 너 진짜 몰라서 물어?
우리 애들이 먼저 몇달째 하고 있는데, 지금 해수가 껴들어 오는거잖아.
선생님이 이런 일로 나서니?
해수 안받겠다는 것을 간신히 꼬셔놨거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뭐 .. "
"그래? 좋았어.
너 그럼 요새 그 제비새X 이상한 짓거리 하고 다녔던 것 내가 확 불어버린다."
"언니! 우리 불륜 절대 아니었거든요?"
"미친 지랄을 하세요.
야아. 너네 둘이 팔당에 고기먹으러 갔다왔으면, 진짜로 고기만 먹고 왔다고?
생선 보고 고양이가 그냥 지나갔단 말이야?
아니면 방앗간을 보고 참새가 그냥 지나갔단 말이야?
저 앞에 사거리에 가서 길 막고 지나가는 사람한테 물어봐라. 그 말을 누가 믿나."
"그게.. 그 .. 그 날은 차가 고장 나는 바람에 .."
"하하하. 요게 정신 못 챙기고 끝까지 발뺌이네.
너 왼쪽 젖꼭지에 털이 딱 한 개 나있다고, 그 남자새X가 불었대잖아.
뽑으려고 해봤는데도 안 뽑혔다며?
사타구니에 점 두 개가 있다는 말은 또 왜 나왔어?
너는 그런 소문이 왜 떠도는지 모르겠니?
이 바보 멍충아. 그러면서 네까짓게 무슨 남자질을 한다는거야?"
"아이 참. 살살 조용히 말해. 선생님 깨시겠다."
"너 내가 쫌 봐주려고 했더니, 도저히 안되겠다.
너네 재작년에 빌라 30동 사서 리모델링해서 다시 다 팔았지?
거기서 네가 빼돌린 돈만 전부 얼마였어?
미친 짓거리만 골라서 하고 다니면서 펑펑 써대는 돈은 하나도 안 아깝지?
그런데 공부하겠다고 저렇게 매달리는 쟤는 네 친딸 아냐?
걔한테 쓰는 돈은 그렇게 아까워서 한푼이라도 더 깎으려고 나한테 악착같이 덤비냐?
너 하는 짓이 두 눈뜨고 못 봐줄 정도로 존나 괘씸하거든?
나 더 이상 양보 못해.
800 이야 알았지?"
"알았어. 700 할께. 계좌번호나 줘봐."
"지금 당장 나 보는 앞에서 텔레뱅킹 해."
"아이 참. 왜 이리 급해?"
"시험에서 대박 났으면 항상 인센티브 300%, 휴가비 200%.
또 명절때마다 인사 꼬박꼬박 챙겨.
이 계좌는 내가 관리하니까, 네가 할 일 만큼은 네가 알아서 똑소리 나게 잘 해라.
한가지라도 내 마음에 안 들었다 하면, 당장 내가 가서 네 남편을 만날꺼야.
우리 만난 지도 한참 돼서, 부부가 같이 한번 모이자고 하면 금방일껄?
너 까불면 단 한방에 보내는 수가 있어.
안 그러니?"
"알았어. 언니가 시키는 대로 인센티브, 명절인사, 휴가비 꼬박꼬박 다 챙길께.
그런데, 혹시 .. 언니, 선생님이랑 둘이 사귀나?"
"뭐라고? 내가? 선생님이랑 사귄다고?
뭐 눈에는 뭐 밖에 안보인다더니, 이게 진짜 완전 미친 것 아니야?
너 진짜 완전 어이없다."
"그게 아니면, 다른 것도 아니고, 선생님 계좌를 왜 언니가 관리하는데?
남들이 들으면 이상하게 생각 안 하겠어?"
"선생님, 오늘도 아침 6시에 들어와서 지금까지 자고 있는 거야.
어제 밤 자정까지 애들 공부시키고, 새벽 한시에 일하러 나갔었거든.
저 분, 언제 자기 계좌 열어볼 시간이나 있는 줄 아니?
저렇게 일하면서도 쓰러지지 않고 버티는 것 보면 진짜 다행이야.
아, 그리고 기왕에 말 나온 김에, 이번에 선생님 드릴 보약은 네가 지어와."
"언니, 보약은 남이 사다 주는 것은 효과가 없대.
그냥 돈으로 드릴테니까, 직접 가셔서 꼼꼼하게 진찰도 받고 사다 드시면 안될까?"
"그러든가. 그럼 이번 달에 1200 넘겨."
"야아. 왜 또 금방 말이 달라지는데?
방금 전에는 700 으로 낙찰 봤잖아?"
"이제 보니까 이게 산수도 안되네.
너 그 돌대가리로 뭘 하고 다니는지 진짜 엄청 걱정된다.
수업료 700 더하기 보약 500 하면 얼마니?"
"알았어. 1500."
"야아. 이거 완전 등신 아냐?
1200 이라니까, 왜 1500 이래?
좋아. 뭐. .. 네가 원한다면 1500 해. 난 불만 없어."
"아니야. 내가 말을 잘못 꺼냈으니까 그냥 1500 으로 할께."
"처음부터 이렇게 나올 것이지."
"이제 나한테 말 시키지 마요. 텔레뱅킹 하는 중이야."
"내가 선생님 계좌 관리만 하는 줄 아니?
선생님댁 가사도우미도 해드리거든.
장보고, 빨래, 청소 다하고, 식사도 챙겨드리고 ..
해수 공부하러 오면, 우리가 밥을 어디서 어떻게 먹는가 얘기 안 하니?
너 그것도 할래?"
"하아. .. 언니도 참. .. 내가 어떻게 그런 것을 .."
"내가 널더러 그런 것까지 하라고는 안 하잖아?
너는 가진 것이 돈밖에 더 있어?
그 돈으로 다른 데 다니면서 미친 돈지랄 떨지 말라고.
남은 인생 서방님 모시고 조신하게 살면서, 이 계좌로 입금이나 착실하게 하라 이 말이야.
그것도 못하겠는 주제에 어딜 날더러 연애질 하냐고 뒤집어씌워?
너 인생 진짜 그 따위로 살지 마라.
내가 보장하는데, 나중에 천벌 받는다."
"야아아. 울언니한테 누가 뭐라고 했어?
언니가 시키는 대로 다 하고, 그 돈도 낼테니까, 제발 조용히 쫌 하라고."
"그 새X 말인데, 또 만날래 안 만날래?"
"그 때 그 인간이 싸이코짓 한 뒤로는 정 떨어져서 더 이상 안 만나잖아."
"아까도 말했지만 네가 하는 말을 아무도 안 믿거든.
요게 입만 벙긋하면 나오는게 거짓말이잖아.
그런데 네 거짓말을 왜 하필이면 내가 믿어야겠니?
너 진짜 이번에 또 정신 안 차리면 내가 해수 아빠한테 확!"
"알았다고!
나 지금 텔레뱅킹 해? 아님 말어?"
"해."
"그럼 제발 조용히 좀 해."
아마도 아이린이 조해수 엄마를 불러다 놓고 과외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아이린의 뻥이 엄청 세다. 완전 초강수로 약간 얼빵한 조해수 엄마의 기선을 틀어쥐고 있다. 조해수 엄마는 어떻게 해서 피하려고 해보지만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한다. 아이린은 해수 엄마의 약점을 단단히 잡고있어서, 조해수 엄마는 완전 고양이 앞에 쥐인 꼴이다. 그녀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고 있다. 이것은 완전 개콘감이다.
그런데 나도 더 이상은 누워 있을 수가 없게 되었다. 급하게 화장실에 가야 하는 상황이 왔기 때문이다.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다. 아이린이 침대에 가지런히 놓아둔 내 옷을 입었다. 그런데 아침에 아이린과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또 앞에 텐트를 친다. 나는 위로 당겨 올렸지만, 그래도 불룩하다. 이것이 젊음의 상징이라는 것일까?
나는 침실을 나서서 거실로 갔다. 두 여자가 동시에 나를 쳐다본다. 아이린은 여유만만이지만, 조해수 엄마는 약간 놀라는 표정이다. 나는 인사만 간단히 하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샤워까지 하고, 옆에 있는 옷방에서 옷을 챙겨 입은 후에 그녀들이 있는 소파로 갔다. 아이린이 얼른 일어나더니 나에게 커피를 갖다 준다. 조해수의 엄마가 아이린이 하는 것을 쳐다본다.
조해수 엄마는 이 건물에 드디어 오피스텔이 났다면서, 오늘 오후에 계약을 할 것이라는 말을 했다. 그런데, 나는 그녀가 사겠다는 것인지, 세를 얻는다는 것인지 묻지도 않았다. 내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린이 내게 눈짓을 하며 말했다.
"선생님, 식사를 하셔야 하는데, 출근 시간이 얼마 안 남았죠?
야. 너 지금 시간도 펑펑 남는데, 오늘은 네가 쏴라."
"어? 그래? 그럼 그러죠. 뭐.
지난 번에 회사로 찾아갔을 때 제가 선생님을 모시려고 했었는데 ..
선생님, 오늘 점심은 저희랑 같이 드세요.
한우 갈비 어떠세요?"
오늘 나는 아이린으로부터 확실하게 배웠다.
상대방의 치명적인 약점을 확실하게 잡을 것.
그 약점을 틀어쥐고, 숨돌릴 틈을 주지 말고, 인정 사정 봐주지 말고 마구 마구 몰아붙일 것.
그러니까 이 말은 나의 치명적인 약점을 상대방이 절대 모르도록 하라는 말도 된다. 약점이 될 만한 짓을 아예 하지 않으면 좋겠지만, 내가 이 젊은 나이에 감히 어찌 그럴 수가 ..
우리는 다 같이 내 오피스텔을 나왔다. 나는 두 여인을 내 차에 타게 했다. 조해수 엄마는 뒷좌석에, 아이린은 내 옆자리에 탔다. 나는 바빠서 멀리 갈 수는 없다고 말하고, 서초동에 있는 갈비집으로 달렸다. 가는 동안에도 아이린은 다른 일로 조해수 엄마를 몰아세운다. 그런데도 조해수 엄마는 무슨 일인지 아이린이 하는 말을 다 받아준다. 둘 사이의 대화는 내가 옆에서 듣기가 민망할 정도이다. 나는 웃음을 참느라고 제법 고생을 했다.
식사를 하면서 아이린이 조해수 엄마에게 말했다.
"너 오늘 보니까 선생님 차가 국산이지?
그거 외제차로 어떻게 안될까?
네가 형편이 정 어려워서 안되면 해수 아빠를 내가 따로 만나든가.
너네가 못하겠으면 차라리 내가 그냥 할까?"
"언니. 그래도 그 차 이번에 나온 신형이던데요?
그러지 말고 앞으로 일년 반 정도만 기다려봐요.
우리 해수 대학에 들어가기만 하면, 내가 어떻게 해볼께."
"해수가 대학에 가기는 가겠대?"
"지금으로 봐서 4년제는 힘들 것 같다는데, 안되면 3년제라도 보내야지."
"너 부처님께 하는 식으로 선생님께 지극 정성으로 잘 해라.
그럼 해수 아무 문제없이 4년제 간다."
"어머, 그게 진짜야? 언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
"벌써 몇번째 말하는 건데, 선생님은 원래 해수를 안받겠다고 하셨거든.
그런데 나랑 지혜랑 빌고 빌어서 같이 하게 된거잖아.
지난 번에 공부하는데, 해수가 이런 식으로 열심히 잘하면 4년제에도 전망 있다고 하시더라.
그러니까 내 말은 해수가 잘해서가 아니고, 해수한테 가능성이 보인다면서 받으셨다고.
네 딸 공부 얘기를 내가 더 잘 알고 있으면 네가 진짜 친엄마 맞기는 맞니?"
"어머머. 나는 토옹 모르고 있었네.
선생님 우리 해수 잘 부탁드려요."
"너보고 선생님께 잘 하라니까, 네가 선생님께 부탁을 하고 있니?
얘 뻔뻔한 염치가 어째 저 모양일까?
엄마라는게 정신머리가 다른 세상에 가있으니 하나밖에 없는 딸이 어떤지도 모르고 말이야.
네가 얼마나 한심한 위인인지 알겠냐?"
"알았어요. 언니가 나한테 뭐든 시켜만 주세요.
이제부터는 진짜로 잘 할께요. 하하."
"그렇지. 진작부터 그렇게 나왔어야지.
꼭 한바탕 잔소리를 듣고 나서야 꼬랑지를 내린단 말이야."
"그런데, 언니 옛날 기질이 다시 나오는 것 아니야?"
"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언니가 오늘 나한테 완전 조폭 처럼.. 나 엄청 무서웠거든."
"내가 너한테 한 것만 생각하지 말고,
너도 인간이면, 네가 한 짓을 돌이켜 생각해봐라."
"알았어. 누가 안 하겠대? 돌이킨다고. 하하."
내가 보기에도 나의 천사, 나의 여신 아이린은 조해수 엄마에게 약간은 난폭하게 했다. 아이린에게 이런 면이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서 그 정도 한 것을 갖고 조폭 같다는 표현을 쓰는 것은 너무 지나치다. 아이린과 조폭은 물과 기름처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데 아이린의 옛날 기질이라는 말이 무슨 말일까? 아이린이 과거에 조폭이었을 리는 없을것 같다. 조해수 엄마의 잘못된 점을 갖고 이야기를 하면서 약간의 협박이야 있었지만, 그것은 애교 정도일 뿐이다.
나는 식사 후에 두 여인들을 다시 오피스텔로 태워다 주었다.
그녀들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나는 윤기숙에게 전화를 했다.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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