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내일이 올 때까지 2
사람이 사람을 알아보는 것에는 시각적인 것만이 다는 아니다. 후각도 촉각도 그리고 느낌도 있다. 아저씨는 그 모든 것으로 알 수 있는 사람이다. 단단하게 보이지만 속은 너무나 여린. 그래서 지나간 시간에 사로잡혀 밝은 내일로는 도무지 나오려 하지 않는 사람. 지금처럼 어둠 속에 몸을 감추고 있을 때에야 비로소 편안해 하는 사람. 후후……
그래서였을 것이다. 저 앞 어둠 속에서 나를 올려다 보고 있는 남자. 그 남자가 바로 아저씨라는 것을. 이렇게 벗겨진 모습으로 다른 놈들에게 유린되는 나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어야 하는 상대가 아저씨라는 것이 나를 슬프게 한다. 비록 이 모든 것이 아저씨가 해야 하는 일을 돕기 위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나는 여자니까.
느낌이 서늘하다. 역시나 고개 돌려 바라본 저 아래에서 생각도 못한 일이 벌어지려 한다. 새로운 저 인물의 손에 들린 것, 뱀처럼 생긴 저것을 왜 들고 있을까?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야.
그 기대는 오래가지 않아 깨졌다. 잘생긴 아까의 그 놈이 내 그 곳에 차가운 무언가를 바를 때, 이미 나는 직감했다. 그리고 외면했다. 공포심이나 수치심보다 더한 것은 이런 모습을 아저씨에게 보여야 한다는 자괴감 섞인 창피함이었다.
나는 내가 여자인 것을 저주한다. 좋아하는 남자 앞에서 이렇게 벗겨져 수치를 당하는 것보다 더 상처가 되는 것은, 이런 피학적 상황에서도 육체는 쾌락을 음미하고 반응한다는 것과, 아무리 창피하고 죽을 것 같은 자학적 사고에도 더 큰 쾌락을 갈구하는 내 동물적 감정은 결코 죽지 않고 오히려 더 강하게 고개를 든다는 현실 때문이다.
“하아… 하아… 아아악! 그만! 제발… 제발 그만해……”
아무리 애원해도 소용없는 줄 알면서도 나는 애원해본다. 그렇게 내 몸은 원치 않는 절정에 마구 널뛰고 있다. 바보 같은 년! 걸레년! 창년!
눈을 감는다. 더 이상 아저씨를 볼 수가 없다. 정신이 아득해져 온다. 그런데도 몸은 자꾸만 쾌감에 몸부림친다. 배반의 육체!
“이제 모두를 위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준비들 되셨습니까?”
“네에에!!”
“그럼 곧 시작하겠습니다.”
그들이 하는 말들이 내겐 아주 멀리서 들리는 듯하다. 꿈을 꾸는 것만 같다. 누군가 내 몸을 옮긴다. 자세가 제법 편하다. 이렇게 편히 누워 긴 잠을 잤으면 좋겠다.
“13번 이하 번호는 본부장님을 선두로 위쪽으로, 나머지 번호는 회장님을 선두로 아래쪽으로 시작합니다. 자, 어서 줄을 서시오!!!”
줄을 선다고? 아래 위로? 그렇다면…… 올 것이 왔다는 생각 들었다. 그리고 그 생각대로 얼마 후 내 몸은 남자들의 몸에 마구 짓눌러지기 시작했다.
잠시 정신을 잃었던 모양이었다. 어렴풋한 감각 속에 아래에서도 위에서도 미친 듯이 나를 압박해온다. 쾌감은 쾌감대로, 고통은 고통대로, 수치심은 수치심대로 자꾸만 커져간다. 숨이 막힐 듯한 이 상황에서도 나는 아저씨가 신경 쓰인다. 내가 원한 것이지만 이런 장면을 언제까지 아저씨에게 보여야 하는 걸까? 과연 이 일 이후로도 아저씨와 내가 이전의 관계 그대로 편안할 수 있을까? 아닐 거야. 아닐 테지. 그럴 테지……
아저씨가 보고 싶다. 힘들게 주변을 살펴본다. 아저씨는 어디에 있을까? 보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던 아저씨의 존재가 느껴지지 않는다.
(아저씨……)
가버린 걸까? 나를 버리고? 이렇게 망가진 나는 더 이상 아저씨의 관심을 끌 수 없는 걸까? 하긴 어쩌면 그것은 처음부터 나만의 욕심이었는지 모른다. 정상적인 몸으로도 나를 탐하지 않을 수 있었던 남자. 그런 아저씨의 눈에 나는 얼마나 더러운 존재로 보였을까? 이제 다시는 따뜻한 아저씨의 눈길과 체온을 느낄 수 없겠지? 후후후……
“그럼 바로 가면을 벗고……”
뭐? 가면을 벗긴다고? 뜨겁던 몸의 열기가 차갑게 식어갔다. 오늘 나는 결코 정상적인 모습으로 여기를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다.
(아저씨… 나 미워하지 마요. 내가 이런 여자애란 거 이미 알고 있었잖아. 그쵸? 이 자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어요. 무서워요. 그렇지만 아저씨만이라도 무사히 빠져 나갔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우리… 다시 볼 수 있을까요?)
잘생긴 놈이 내 얼굴 위에 보였다. 여전히 음흉하게 웃는 얼굴. 저 얼굴에 침이라도 뱉어주면 제법 통쾌할 텐데. 그 놈의 손이 얼굴로 다가와 양쪽을 잡는다. 이제 내가 저들이 기대했던 여자가 아니란 것을 곧 알게 될 테지. 그 때 저들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 이후에 나는 어떻게 될까?
막 눈을 감으려 할 때였다.
“엇!”
“뭐야?”
“정전인가?”
“불을 켜, 불!”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누군가 내 발과 손의 묶인 끈을 끊는 것이 느껴졌다. 몸을 움직이고 싶지만 몸은 천근만근 움직이지 않았다. 그 때 그 누군가가 내 몸에 무언가를 덮어 주고는 나를 들어 안았다. 몸이 축 늘어진다. 그런데 이 사람의 체온이 참 따듯하다. 아저씨인가? 그런데 이상하다. 이 냄새는 분명… 피냄새!
계단을 올라 문을 열고 막 나가는 순간 저 아래에서 손전등인지 핸드폰 플래쉬인지 모를 빛이 우리를 비췄다.
“저기다!”
“빠져 나가지 못하게 막아!”
몇 사람이 우르르 몰려온다. 나를 들춰 맨 사람이 문을 나가자 마자 나를 내려 놓았다. 이제야 주변이 보인다. 아저씨다!
“아저씨!”
내 말을 듣지 못한 듯 아저씨는 이제 막 올라온 문을 닫으려 애쓴다. 그러나 상대는 여럿, 결국 문이 왈칵 밀쳐지며 아저씨는 뒤로 튕겨나갔다.
문을 열고 올라선 자들은 아까 기구를 나르고 시중을 들던 건장한 체격의 사내들이었다. 아저씨가 두툼하고 약간 굽어진 검은 막대기 같은 것을 손에 잡고 그들을 겨눴다. 그들도 신중한 몸놀림으로 다가서는 것이 일견 봐도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
그들 중 한 명이 아저씨를 향해 몸을 던지듯 뛰어 올랐다. 아저씨가 옆으로 한걸음 비켜서는 듯 하더니 손에 쥔 막대기로 그 자의 몸을 허공에서 살짝 건드리자 그 자가 몸의 균형을 잃고 옆으로 떨어졌다. 그대로 떨어지나 싶었는데 의외로 그 자는 큰 체구에도 손을 짚고 몸을 굴리더니 한 바퀴 돌아 가볍게 일어섰다. 소름이 돋았다. 무술을 배운 자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3대1의 싸움. 그들도 아저씨도 신중했다. 어느새 몰려 올라온 자들이 지하에서 올라온 문 주변에 서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그 문 쪽과 반대편의 현관을 향해 기어갔다. 내가 걸친 것은 아저씨가 걸쳐준 남자 양복 윗도리 하나. 무릎이 무언가에 긁혀 쓰라려 왔다. 다행인 것은 그런 내 동작을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현관문 앞에 이르렀을 때 거기에는 또 다른 세 명의 사내들이 쓰러져 묶여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의 몸에서 피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왜 피 냄새가 났지?)
아저씨를 돌아봤다. 피냄새는 아저씨에게서 난 것이 틀림없었다. 혹시 아저씨가 다친 걸까? 그 이유를 나는 금새 알 수 있었다. 아저씨 왼쪽 다리에서 검게 배어 나온 그것. 그것은 분명 피였다.
(아저씨……)
날카로운 신경전의 그 상황에서 소리를 낼 수는 없었다. 그만큼 네 사람의 상황은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으얏!”
“엽!”
“으챠!”
누구의 소리인지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린 이후 팽팽했던 긴장감과 날카로운 바람소리가 지나간 이후 아주 짧은 순간에 승패가 가려졌다. 나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구분도 할 수 없었다. 그만큼 그 순간의 움직임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아저씨는 여전히 단단한 자세로 막대기를 사람들에게 겨누고 있었고, 발치에는 아까의 세 남자들이 쓰러져 꿈틀거렸다. 그 모습에 기가 눌렸는지 다수임에도 나머지 사람들은 감히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아저씨가 천천히 한걸음씩 뒤로 움직여 내게로 다가왔다. 나도 죽을 힘을 다해 벽에 기대어 몸을 일으켰다.
“누군가 했더니 자네였군.”
무리가 옆으로 갈라서며 한 사람이 나섰다. 내 몸에 흉측한 그것을 집어 넣었던 그 자!
“아버님께서는 여전하신가?”
“궁금하기는 하오?”
“하하…… 자네의 도련님은, 아니 내 조카는 아직 휠체어 없으면 거동을 못한다 하던데.”
“당신 덕이지.”
“아니지, 아냐. 내가 실수한 거지. 그렇게 불편하게 살게 해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동생네처럼 조카도 아주 편하게 쉬게 해줬어야 하는 건데 말야. 영 마음에 걸려.”
“짐승만도 못한 놈!”
“하하하…… 그런 자네는? 아마 내가 죽인 것보다 자네가 죽인 사람이 더 많지 않던가? 내가 알기론 그런데.”
“나는 적어도 명분 없는 살인을 하지는 않았소. 당신처럼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사람을 죽인 적은 없으니까!”
“그래? 그것 참 훌륭한 말이군. 그런데 세상은 말야, 그렇게 대의명분 찾다가 대의는 커녕 소의도 이루지 못하고 뜻을 접게 되는 일이 허다 하단 말이지. 자네가 눈을 잃은 것도 엉뚱한 자비심 때문이었다고 알고 있는데, 시키는 명령대로만 했더라면 지금쯤 그 선글라스 없이도 돌아다닐 수 있지 않았겠나? 그런 면에서 나는 현실적인 사람인 거지. 요즘 같은 무한경쟁 사회에서 회사를 위해선 나 같은 강한 리더쉽의 인물이 적격이라고 나는 생각하거든. 그렇지 않소들?”
“네!”
“맞습니다!”
“미친 놈들!”
“내 계획이 완성 단계에 있는데 자네 때문에 신경 쓰고 싶지 않군.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자네도 보내줘야 할 것 같은데. 어찌 됐건 미안하군.”
“그것도 나쁘지 않지. 그렇지만 혼자 가지는 않을 거요.”
놈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그리고 외쳤다.
“모두들 저 놈을 잡아!”
그 말에 주춤거리던 자들이 각자 잡히는 대로 무언가를 들고 한 무더기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때 아저씨가 허리 춤에서 무언가를 꺼내 뒤로 내밀며 조그맣게 내게 말했다.
“어서 밖으로 나가. 정문에서 조금 더 내려가면 차가 있어. 시동 걸고 기다리다가 10분이 지나도 내가 나타나지 않거든 그냥 출발해. 어서 가!”
“아저씨……”
“가는 게 도와주는 거야. 어서!”
그 말이 맞았다. 나는 지금 아저씨에게 거추장스러운 존재일 뿐이었다. 열쇠를 받아 들었다. 이상하게도 손과 손이 스쳐 지나가는 그 순간이 무척이나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나는 서둘러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아저씨를 한 번 쳐다봤지만 아저씨는 앞에 다가오는 자들을 향해 등을 돌린 채였다.
뛰고 싶었지만 마음대로 뛰어지지 않았다. 몸이 제어되지 않아 얼마 가지 못해 넘어졌다. 몸을 일으켜 세우다 말고 나는 놀라 소리를 지를 뻔 했다. 그것은 머리가 없는 개의 시신이었다. 떨리는 몸으로 일어서 나는 다시 걸어갔다. 몸에 걸쳐져 있던 옷도 떨어뜨려 원초적인 모습 그대로였다. 그러나 너무도 큰 두려움에 옷을 주울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 시신을 지나칠 때까지 나는 눈을 뜨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정도 걸어서 그 생명의 조각들을 지나쳤다 싶은 때 눈을 뜨고 안간힘을 다해 닫혀진 철문을 향해 달려갔다.
철문은 쉽게 열 수 있었다. 걸려진 고리는 다행히 자물쇠 따위로 잠겨있지 않았다. 삐걱거리는 그 문을 조금 열고 나는 가슴이 터질 만큼 헐떡이며 길을 따라 달려갔다. 그리고 저기 앞에 아저씨가 말한 듯한 차를 발견하고 떨리는 손으로 키를 넣고 돌렸다. 이내 문이 열렸고 운전석에 올라 시동을 켰다. 내가 온 곳을 향해 서 있던 차를 돌려 언제고 달려갈 수 있게 바꾸어 놓고 룸미러와 사이드 미러로 뒤쪽의 상황을 신경을 곤두세우며 주시했다. 그 때쯤에야 나는 내가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벌거숭이라는 것을 알았다. 얼핏 조수석에 쇼핑백 하나가 보였다. 혹시나 해서 열어보니 거기엔 놀랍게도 오피스텔에 벗어 두었던 내 옷들이 들어있었다. 심지어 운동화까지.
(아저씨!)
눈물을 흘리며 옷을 입었다. 신발을 신고 다시 운전석에 앉기까지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내가 느끼는 시간은 너무도 더디게 천천히, 아주 천천히 흘렀다.
“탕!”
심장이 멎을 것처럼 놀랐다. 그건 분명히 총소리였다. 마음이 급해졌다. 시계를 보니 벌써 시간은 아저씨가 말한 10분을 훨씬 넘어서고 있었다.
(아저씨, 제발!)
그 때였다. 내가 나온 철문 사이로 아저씨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뒤로 여러 사람이 아저씨를 뒤쫓아 오고 있었다. 창문을 열고 고개를 돌려 아저씨를 향해 외쳤다.
“아저씨!”
아저씨는 다리를 심하게 절뚝거리고 있었다. 나는 급하게 차를 뒤로 후진했다. 조금이라도 아저씨 가까이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차를 후진해서 세우자 아저씨가 조수석문을 열고 타려 할 때 누군가 아저씨를 잡아챘다. 아저씨가 몸을 돌리며 손에 든 것을 휘둘렀다. 아까와는 다른 날카로운 바람소리가 들렸다.
“으흑!”
다시 아저씨가 조수석에 올라탔고 나는 있는 힘껏 액셀을 밟고 달려나갔다. 룸미러로 아저씨를 쫓아왔던 자들이 손에 든 것을 차를 향해 집어 던지는 것이 보였다. 그러더니 누군가를 부축하고 다시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제서야 나는 마음에 안심이 됐다. 그리고 아저씨를 돌아봤다.
“앞이나 잘 보고 운전해!”
아저씨의 음성이 무거웠다. 나는 다시 앞을 보며 운전했다. 잠시 후 좁은 길을 벗어나 교차로에서 큰길에 올라서서야 나는 다시 아저씨를 돌아봤다. 아저씨는 거친 숨을 고르지 못하는 듯 여전히 힘들게 숨을 쉬었다.
“아저씨, 괜찮아요?”
“괜찮아.”
아닌 것 같았다. 음성이 너무 무거웠다.
“뭐에요? 혹시 아까 그 총소리! 총에 맞은 거에요?”
“괜찮아. 어서 가. 계속 직진하면 돼.”
“아저씨 병원부터 가요. 여기 근처에 큰 병원 있잖아요.”
“아냐. 너무 가까워. 그 자들이 금방 따라올 거야. 그냥 내가 시키는 대로 가. 거기 가면 치료도 받을 수 있어.”
아저씨가 손에 들고 있던 것을 자신의 옷으로 닦았다. 비로소 나는 아저씨가 들고 있는 것이 칼이란 것을 알았다. 그것도 가운데가 부러져 반 토막 남은 칼. 아저씨는 손잡이 부분을 세밀하게 닦고는 인적이 드문 곳에서 길가 풀섶에 그것을 던졌다.
“10분 지났는데 왜 안 갔어?”
“아저씨를 두고 어떻게 가요?”
“그러다 내가 안 오면?”
“안 오긴 왜 안 와요? 봐요, 이렇게 왔잖아요.”
“후후……”
“그리고 아저씨가 나라면 그냥 가겠어요?”
“그거야 모르지.”
“그럴 리 없어요.”
“어떻게 그걸 확신해?”
“그걸 왜 몰라요?”
“무슨 근거로?”
“그건 당연한 거에요. 아저씬 날 사랑… 하니까!”
앞을 보면서도 아저씨가 나를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지혜 사랑하는 거… 알고 있었어?”
“내가 뭐 바본 줄 알아요? 척하면… 척이지……”
“그랬구나…… 난 모르는 줄 알았지.”
“바보!”
“그럼 지혜는?”
“나… 뭐요?”
“지혜는 나 사랑… 안 해?”
“내가 왜 아저씨를…… 사랑…”
“위험해!”
아저씨가 와락 핸들을 잡아 끌었다. 차가 휘청이며 옆차선으로 쏠렸다가 다시 중심을 잡았다. 그러고 보니 하마터면 트럭에 받힐 뻔했다.
“똑바로 운전하라고! 이 자식아!”
창문을 열고 소리치는 나에게 아저씨가 말했다.
“아냐. 따라온 거야.”
사이드 미러에 커다란 트럭 하나가 라이트도 켜지 않고 바짝 붙어오고 있었다.
“그 놈들이에요?”
“음.”
“어떡해요?”
“저기 오르막 보이지? 거기까지 액셀 최대한 밟아.”
나는 액셀을 끝까지 밟으며 오르막을 올라갔다. 점차 트럭과 거리가 벌어졌다. 엔진이 거친 소음을 내며 헐떡였다.
“좀 전에 하려던 말이 뭐야?”
“네?”
“좀 전에 말야. 트럭에게 받힐 뻔 하기 전.”
“지금 이 상황에 그게 중요해요?”
“말해봐.”
“싫어요!”
“어서 말해봐!”
“싫다니까요!”
“……”
아저씨의 옆 얼굴을 쳐다봤다. 인상을 찡그리며 감은 눈. 창백한 얼굴. 가슴을 움켜쥔 손.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피.
“괜찮아요?”
“……”
“아저씨?”
“……”
“사랑한다구요!”
“……”
아저씨의 얼굴이 옆으로 스르륵 기울었다.
“사랑한다구! 그러니까 제발… 죽지 말라구!!”
낙엽이 바람을 타고 비처럼 차창을 스쳐 지났다.
*** 16부는 19일(목) 20시경에 올려집니다.
사람이 사람을 알아보는 것에는 시각적인 것만이 다는 아니다. 후각도 촉각도 그리고 느낌도 있다. 아저씨는 그 모든 것으로 알 수 있는 사람이다. 단단하게 보이지만 속은 너무나 여린. 그래서 지나간 시간에 사로잡혀 밝은 내일로는 도무지 나오려 하지 않는 사람. 지금처럼 어둠 속에 몸을 감추고 있을 때에야 비로소 편안해 하는 사람. 후후……
그래서였을 것이다. 저 앞 어둠 속에서 나를 올려다 보고 있는 남자. 그 남자가 바로 아저씨라는 것을. 이렇게 벗겨진 모습으로 다른 놈들에게 유린되는 나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어야 하는 상대가 아저씨라는 것이 나를 슬프게 한다. 비록 이 모든 것이 아저씨가 해야 하는 일을 돕기 위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나는 여자니까.
느낌이 서늘하다. 역시나 고개 돌려 바라본 저 아래에서 생각도 못한 일이 벌어지려 한다. 새로운 저 인물의 손에 들린 것, 뱀처럼 생긴 저것을 왜 들고 있을까?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야.
그 기대는 오래가지 않아 깨졌다. 잘생긴 아까의 그 놈이 내 그 곳에 차가운 무언가를 바를 때, 이미 나는 직감했다. 그리고 외면했다. 공포심이나 수치심보다 더한 것은 이런 모습을 아저씨에게 보여야 한다는 자괴감 섞인 창피함이었다.
나는 내가 여자인 것을 저주한다. 좋아하는 남자 앞에서 이렇게 벗겨져 수치를 당하는 것보다 더 상처가 되는 것은, 이런 피학적 상황에서도 육체는 쾌락을 음미하고 반응한다는 것과, 아무리 창피하고 죽을 것 같은 자학적 사고에도 더 큰 쾌락을 갈구하는 내 동물적 감정은 결코 죽지 않고 오히려 더 강하게 고개를 든다는 현실 때문이다.
“하아… 하아… 아아악! 그만! 제발… 제발 그만해……”
아무리 애원해도 소용없는 줄 알면서도 나는 애원해본다. 그렇게 내 몸은 원치 않는 절정에 마구 널뛰고 있다. 바보 같은 년! 걸레년! 창년!
눈을 감는다. 더 이상 아저씨를 볼 수가 없다. 정신이 아득해져 온다. 그런데도 몸은 자꾸만 쾌감에 몸부림친다. 배반의 육체!
“이제 모두를 위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준비들 되셨습니까?”
“네에에!!”
“그럼 곧 시작하겠습니다.”
그들이 하는 말들이 내겐 아주 멀리서 들리는 듯하다. 꿈을 꾸는 것만 같다. 누군가 내 몸을 옮긴다. 자세가 제법 편하다. 이렇게 편히 누워 긴 잠을 잤으면 좋겠다.
“13번 이하 번호는 본부장님을 선두로 위쪽으로, 나머지 번호는 회장님을 선두로 아래쪽으로 시작합니다. 자, 어서 줄을 서시오!!!”
줄을 선다고? 아래 위로? 그렇다면…… 올 것이 왔다는 생각 들었다. 그리고 그 생각대로 얼마 후 내 몸은 남자들의 몸에 마구 짓눌러지기 시작했다.
잠시 정신을 잃었던 모양이었다. 어렴풋한 감각 속에 아래에서도 위에서도 미친 듯이 나를 압박해온다. 쾌감은 쾌감대로, 고통은 고통대로, 수치심은 수치심대로 자꾸만 커져간다. 숨이 막힐 듯한 이 상황에서도 나는 아저씨가 신경 쓰인다. 내가 원한 것이지만 이런 장면을 언제까지 아저씨에게 보여야 하는 걸까? 과연 이 일 이후로도 아저씨와 내가 이전의 관계 그대로 편안할 수 있을까? 아닐 거야. 아닐 테지. 그럴 테지……
아저씨가 보고 싶다. 힘들게 주변을 살펴본다. 아저씨는 어디에 있을까? 보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던 아저씨의 존재가 느껴지지 않는다.
(아저씨……)
가버린 걸까? 나를 버리고? 이렇게 망가진 나는 더 이상 아저씨의 관심을 끌 수 없는 걸까? 하긴 어쩌면 그것은 처음부터 나만의 욕심이었는지 모른다. 정상적인 몸으로도 나를 탐하지 않을 수 있었던 남자. 그런 아저씨의 눈에 나는 얼마나 더러운 존재로 보였을까? 이제 다시는 따뜻한 아저씨의 눈길과 체온을 느낄 수 없겠지? 후후후……
“그럼 바로 가면을 벗고……”
뭐? 가면을 벗긴다고? 뜨겁던 몸의 열기가 차갑게 식어갔다. 오늘 나는 결코 정상적인 모습으로 여기를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다.
(아저씨… 나 미워하지 마요. 내가 이런 여자애란 거 이미 알고 있었잖아. 그쵸? 이 자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어요. 무서워요. 그렇지만 아저씨만이라도 무사히 빠져 나갔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우리… 다시 볼 수 있을까요?)
잘생긴 놈이 내 얼굴 위에 보였다. 여전히 음흉하게 웃는 얼굴. 저 얼굴에 침이라도 뱉어주면 제법 통쾌할 텐데. 그 놈의 손이 얼굴로 다가와 양쪽을 잡는다. 이제 내가 저들이 기대했던 여자가 아니란 것을 곧 알게 될 테지. 그 때 저들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 이후에 나는 어떻게 될까?
막 눈을 감으려 할 때였다.
“엇!”
“뭐야?”
“정전인가?”
“불을 켜, 불!”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누군가 내 발과 손의 묶인 끈을 끊는 것이 느껴졌다. 몸을 움직이고 싶지만 몸은 천근만근 움직이지 않았다. 그 때 그 누군가가 내 몸에 무언가를 덮어 주고는 나를 들어 안았다. 몸이 축 늘어진다. 그런데 이 사람의 체온이 참 따듯하다. 아저씨인가? 그런데 이상하다. 이 냄새는 분명… 피냄새!
계단을 올라 문을 열고 막 나가는 순간 저 아래에서 손전등인지 핸드폰 플래쉬인지 모를 빛이 우리를 비췄다.
“저기다!”
“빠져 나가지 못하게 막아!”
몇 사람이 우르르 몰려온다. 나를 들춰 맨 사람이 문을 나가자 마자 나를 내려 놓았다. 이제야 주변이 보인다. 아저씨다!
“아저씨!”
내 말을 듣지 못한 듯 아저씨는 이제 막 올라온 문을 닫으려 애쓴다. 그러나 상대는 여럿, 결국 문이 왈칵 밀쳐지며 아저씨는 뒤로 튕겨나갔다.
문을 열고 올라선 자들은 아까 기구를 나르고 시중을 들던 건장한 체격의 사내들이었다. 아저씨가 두툼하고 약간 굽어진 검은 막대기 같은 것을 손에 잡고 그들을 겨눴다. 그들도 신중한 몸놀림으로 다가서는 것이 일견 봐도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
그들 중 한 명이 아저씨를 향해 몸을 던지듯 뛰어 올랐다. 아저씨가 옆으로 한걸음 비켜서는 듯 하더니 손에 쥔 막대기로 그 자의 몸을 허공에서 살짝 건드리자 그 자가 몸의 균형을 잃고 옆으로 떨어졌다. 그대로 떨어지나 싶었는데 의외로 그 자는 큰 체구에도 손을 짚고 몸을 굴리더니 한 바퀴 돌아 가볍게 일어섰다. 소름이 돋았다. 무술을 배운 자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3대1의 싸움. 그들도 아저씨도 신중했다. 어느새 몰려 올라온 자들이 지하에서 올라온 문 주변에 서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그 문 쪽과 반대편의 현관을 향해 기어갔다. 내가 걸친 것은 아저씨가 걸쳐준 남자 양복 윗도리 하나. 무릎이 무언가에 긁혀 쓰라려 왔다. 다행인 것은 그런 내 동작을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현관문 앞에 이르렀을 때 거기에는 또 다른 세 명의 사내들이 쓰러져 묶여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의 몸에서 피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왜 피 냄새가 났지?)
아저씨를 돌아봤다. 피냄새는 아저씨에게서 난 것이 틀림없었다. 혹시 아저씨가 다친 걸까? 그 이유를 나는 금새 알 수 있었다. 아저씨 왼쪽 다리에서 검게 배어 나온 그것. 그것은 분명 피였다.
(아저씨……)
날카로운 신경전의 그 상황에서 소리를 낼 수는 없었다. 그만큼 네 사람의 상황은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으얏!”
“엽!”
“으챠!”
누구의 소리인지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린 이후 팽팽했던 긴장감과 날카로운 바람소리가 지나간 이후 아주 짧은 순간에 승패가 가려졌다. 나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구분도 할 수 없었다. 그만큼 그 순간의 움직임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아저씨는 여전히 단단한 자세로 막대기를 사람들에게 겨누고 있었고, 발치에는 아까의 세 남자들이 쓰러져 꿈틀거렸다. 그 모습에 기가 눌렸는지 다수임에도 나머지 사람들은 감히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아저씨가 천천히 한걸음씩 뒤로 움직여 내게로 다가왔다. 나도 죽을 힘을 다해 벽에 기대어 몸을 일으켰다.
“누군가 했더니 자네였군.”
무리가 옆으로 갈라서며 한 사람이 나섰다. 내 몸에 흉측한 그것을 집어 넣었던 그 자!
“아버님께서는 여전하신가?”
“궁금하기는 하오?”
“하하…… 자네의 도련님은, 아니 내 조카는 아직 휠체어 없으면 거동을 못한다 하던데.”
“당신 덕이지.”
“아니지, 아냐. 내가 실수한 거지. 그렇게 불편하게 살게 해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동생네처럼 조카도 아주 편하게 쉬게 해줬어야 하는 건데 말야. 영 마음에 걸려.”
“짐승만도 못한 놈!”
“하하하…… 그런 자네는? 아마 내가 죽인 것보다 자네가 죽인 사람이 더 많지 않던가? 내가 알기론 그런데.”
“나는 적어도 명분 없는 살인을 하지는 않았소. 당신처럼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사람을 죽인 적은 없으니까!”
“그래? 그것 참 훌륭한 말이군. 그런데 세상은 말야, 그렇게 대의명분 찾다가 대의는 커녕 소의도 이루지 못하고 뜻을 접게 되는 일이 허다 하단 말이지. 자네가 눈을 잃은 것도 엉뚱한 자비심 때문이었다고 알고 있는데, 시키는 명령대로만 했더라면 지금쯤 그 선글라스 없이도 돌아다닐 수 있지 않았겠나? 그런 면에서 나는 현실적인 사람인 거지. 요즘 같은 무한경쟁 사회에서 회사를 위해선 나 같은 강한 리더쉽의 인물이 적격이라고 나는 생각하거든. 그렇지 않소들?”
“네!”
“맞습니다!”
“미친 놈들!”
“내 계획이 완성 단계에 있는데 자네 때문에 신경 쓰고 싶지 않군.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자네도 보내줘야 할 것 같은데. 어찌 됐건 미안하군.”
“그것도 나쁘지 않지. 그렇지만 혼자 가지는 않을 거요.”
놈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그리고 외쳤다.
“모두들 저 놈을 잡아!”
그 말에 주춤거리던 자들이 각자 잡히는 대로 무언가를 들고 한 무더기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때 아저씨가 허리 춤에서 무언가를 꺼내 뒤로 내밀며 조그맣게 내게 말했다.
“어서 밖으로 나가. 정문에서 조금 더 내려가면 차가 있어. 시동 걸고 기다리다가 10분이 지나도 내가 나타나지 않거든 그냥 출발해. 어서 가!”
“아저씨……”
“가는 게 도와주는 거야. 어서!”
그 말이 맞았다. 나는 지금 아저씨에게 거추장스러운 존재일 뿐이었다. 열쇠를 받아 들었다. 이상하게도 손과 손이 스쳐 지나가는 그 순간이 무척이나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나는 서둘러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아저씨를 한 번 쳐다봤지만 아저씨는 앞에 다가오는 자들을 향해 등을 돌린 채였다.
뛰고 싶었지만 마음대로 뛰어지지 않았다. 몸이 제어되지 않아 얼마 가지 못해 넘어졌다. 몸을 일으켜 세우다 말고 나는 놀라 소리를 지를 뻔 했다. 그것은 머리가 없는 개의 시신이었다. 떨리는 몸으로 일어서 나는 다시 걸어갔다. 몸에 걸쳐져 있던 옷도 떨어뜨려 원초적인 모습 그대로였다. 그러나 너무도 큰 두려움에 옷을 주울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 시신을 지나칠 때까지 나는 눈을 뜨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정도 걸어서 그 생명의 조각들을 지나쳤다 싶은 때 눈을 뜨고 안간힘을 다해 닫혀진 철문을 향해 달려갔다.
철문은 쉽게 열 수 있었다. 걸려진 고리는 다행히 자물쇠 따위로 잠겨있지 않았다. 삐걱거리는 그 문을 조금 열고 나는 가슴이 터질 만큼 헐떡이며 길을 따라 달려갔다. 그리고 저기 앞에 아저씨가 말한 듯한 차를 발견하고 떨리는 손으로 키를 넣고 돌렸다. 이내 문이 열렸고 운전석에 올라 시동을 켰다. 내가 온 곳을 향해 서 있던 차를 돌려 언제고 달려갈 수 있게 바꾸어 놓고 룸미러와 사이드 미러로 뒤쪽의 상황을 신경을 곤두세우며 주시했다. 그 때쯤에야 나는 내가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벌거숭이라는 것을 알았다. 얼핏 조수석에 쇼핑백 하나가 보였다. 혹시나 해서 열어보니 거기엔 놀랍게도 오피스텔에 벗어 두었던 내 옷들이 들어있었다. 심지어 운동화까지.
(아저씨!)
눈물을 흘리며 옷을 입었다. 신발을 신고 다시 운전석에 앉기까지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내가 느끼는 시간은 너무도 더디게 천천히, 아주 천천히 흘렀다.
“탕!”
심장이 멎을 것처럼 놀랐다. 그건 분명히 총소리였다. 마음이 급해졌다. 시계를 보니 벌써 시간은 아저씨가 말한 10분을 훨씬 넘어서고 있었다.
(아저씨, 제발!)
그 때였다. 내가 나온 철문 사이로 아저씨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뒤로 여러 사람이 아저씨를 뒤쫓아 오고 있었다. 창문을 열고 고개를 돌려 아저씨를 향해 외쳤다.
“아저씨!”
아저씨는 다리를 심하게 절뚝거리고 있었다. 나는 급하게 차를 뒤로 후진했다. 조금이라도 아저씨 가까이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차를 후진해서 세우자 아저씨가 조수석문을 열고 타려 할 때 누군가 아저씨를 잡아챘다. 아저씨가 몸을 돌리며 손에 든 것을 휘둘렀다. 아까와는 다른 날카로운 바람소리가 들렸다.
“으흑!”
다시 아저씨가 조수석에 올라탔고 나는 있는 힘껏 액셀을 밟고 달려나갔다. 룸미러로 아저씨를 쫓아왔던 자들이 손에 든 것을 차를 향해 집어 던지는 것이 보였다. 그러더니 누군가를 부축하고 다시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제서야 나는 마음에 안심이 됐다. 그리고 아저씨를 돌아봤다.
“앞이나 잘 보고 운전해!”
아저씨의 음성이 무거웠다. 나는 다시 앞을 보며 운전했다. 잠시 후 좁은 길을 벗어나 교차로에서 큰길에 올라서서야 나는 다시 아저씨를 돌아봤다. 아저씨는 거친 숨을 고르지 못하는 듯 여전히 힘들게 숨을 쉬었다.
“아저씨, 괜찮아요?”
“괜찮아.”
아닌 것 같았다. 음성이 너무 무거웠다.
“뭐에요? 혹시 아까 그 총소리! 총에 맞은 거에요?”
“괜찮아. 어서 가. 계속 직진하면 돼.”
“아저씨 병원부터 가요. 여기 근처에 큰 병원 있잖아요.”
“아냐. 너무 가까워. 그 자들이 금방 따라올 거야. 그냥 내가 시키는 대로 가. 거기 가면 치료도 받을 수 있어.”
아저씨가 손에 들고 있던 것을 자신의 옷으로 닦았다. 비로소 나는 아저씨가 들고 있는 것이 칼이란 것을 알았다. 그것도 가운데가 부러져 반 토막 남은 칼. 아저씨는 손잡이 부분을 세밀하게 닦고는 인적이 드문 곳에서 길가 풀섶에 그것을 던졌다.
“10분 지났는데 왜 안 갔어?”
“아저씨를 두고 어떻게 가요?”
“그러다 내가 안 오면?”
“안 오긴 왜 안 와요? 봐요, 이렇게 왔잖아요.”
“후후……”
“그리고 아저씨가 나라면 그냥 가겠어요?”
“그거야 모르지.”
“그럴 리 없어요.”
“어떻게 그걸 확신해?”
“그걸 왜 몰라요?”
“무슨 근거로?”
“그건 당연한 거에요. 아저씬 날 사랑… 하니까!”
앞을 보면서도 아저씨가 나를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지혜 사랑하는 거… 알고 있었어?”
“내가 뭐 바본 줄 알아요? 척하면… 척이지……”
“그랬구나…… 난 모르는 줄 알았지.”
“바보!”
“그럼 지혜는?”
“나… 뭐요?”
“지혜는 나 사랑… 안 해?”
“내가 왜 아저씨를…… 사랑…”
“위험해!”
아저씨가 와락 핸들을 잡아 끌었다. 차가 휘청이며 옆차선으로 쏠렸다가 다시 중심을 잡았다. 그러고 보니 하마터면 트럭에 받힐 뻔했다.
“똑바로 운전하라고! 이 자식아!”
창문을 열고 소리치는 나에게 아저씨가 말했다.
“아냐. 따라온 거야.”
사이드 미러에 커다란 트럭 하나가 라이트도 켜지 않고 바짝 붙어오고 있었다.
“그 놈들이에요?”
“음.”
“어떡해요?”
“저기 오르막 보이지? 거기까지 액셀 최대한 밟아.”
나는 액셀을 끝까지 밟으며 오르막을 올라갔다. 점차 트럭과 거리가 벌어졌다. 엔진이 거친 소음을 내며 헐떡였다.
“좀 전에 하려던 말이 뭐야?”
“네?”
“좀 전에 말야. 트럭에게 받힐 뻔 하기 전.”
“지금 이 상황에 그게 중요해요?”
“말해봐.”
“싫어요!”
“어서 말해봐!”
“싫다니까요!”
“……”
아저씨의 옆 얼굴을 쳐다봤다. 인상을 찡그리며 감은 눈. 창백한 얼굴. 가슴을 움켜쥔 손.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피.
“괜찮아요?”
“……”
“아저씨?”
“……”
“사랑한다구요!”
“……”
아저씨의 얼굴이 옆으로 스르륵 기울었다.
“사랑한다구! 그러니까 제발… 죽지 말라구!!”
낙엽이 바람을 타고 비처럼 차창을 스쳐 지났다.
*** 16부는 19일(목) 20시경에 올려집니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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