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저기 겨울이 오네
지혜의 얼굴이 어둡다. 이 아이를 처음 만나고 난 이래로 이렇게 어두운 얼굴은 처음이다. 조금은 놀랄 줄 알았지만 그래도 어린 나이에 온갖 경험을 한 제법 단단한 마음인줄 알았는데. 내색하지 않고 무심한 듯 손질을 하면서도 등 뒤에 내리 꽂히는 지혜의 무거운 눈빛이 자꾸만 마음을 누른다.
“장난감치곤 너무 큰 거 아니에요?”
“……”
“나도 좀 갖고 놀면 안될까?”
“안돼.”
“왜요?”
“장난감 아냐.”
“진짜에요?”
“……”
“그거 이름이 뭐에요?”
지혜를 돌아본다. 호기심이라곤 없는 무거운 얼굴.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걸까? 이런 무거운 분위기가 싫어서일까? 하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이 아이가 언제 이런 것을 본 적이나 있었을까!
“M24 SWS”
“왜 그렇게 길어요?”
“저격용이니까.”
“정말 총알 들은 거에요?”
고개를 끄덕인다. 지혜가 앉아 있던 침대에서 내려 옆으로 다가와 쪼그리고 앉았다.
“어디에요?”
탄창을 분리해 보여줬다.
“이렇게 작아요? 넣어져 있는 줄도 몰랐네. 귀엽다! 이거 총알이 몇 개나 들어가요?”
“5발”
“쏴 본 적…… 있어요?”
다시 또 고개를 끄덕였다.
“물건 말고 사람… 도?”
끄덕끄덕
“몇 명이나?”
“아주 많이”
“전부 다 명중?”
끄덕끄덕
“정말?”
지혜의 눈을 바라본다. 두려움보다 더 진한 절망에 가까운 어두움.
“무섭니?”
“……”
“무서워?”
고개를 젖는다.
“그럼?”
“그냥… 슬퍼.”
“왜?”
“아저씬… 착한 사람이니까.”
내가 착하다고? 내가?
“착한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건… 힘든 일이니까…”
가슴이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더 이상 지혜의 눈을 볼 수 없어 다시 총기수입에 몰두했다.
“아저씨.”
“……”
지혜가 더 큰 소리로 나를 불렀다.
“아저씨!”
“……”
아무 할 말이 없다. 이 아이에게 무엇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런데 등이 따뜻하다. 놀라 손을 멈춘다. 지혜의 봉긋한 가슴이 등 뒤에 느껴진다. 하얗고 부드러운 손이 내 가슴을 감싼다. 이어 등에 기댄 얼굴이 느껴졌다.
“바빠.”
“……”
“떨어져.”
“……”
“내가 말했지? 떨어……”
등이 축축하다. 지혜가 울고 있다.
“자니?”
“……”
돌아누운 지혜의 등을 본다. 이 아이의 목선에서 어깨에 이르는 선이 이렇게도 섬세하고 연약했던가? 그 연약함으로 어떻게 그 험한 세상을 헤쳐왔던 걸까?
“할 말 있어.”
“말해요.”
“나 좀 봐.”
“그냥 해.”
어깨에 손을 얹는다. 부드럽고 따뜻한 지혜.
“집에 가. 내일.”
“나 집 없어.”
“시골집.”
“싫어.”
“가.”
“싫다구.”
“그래도 가.”
지혜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리곤 홱 하니 고개를 돌려 나를 본다.
“왜 집에 가라는데?”
“이제 돌아가.”
“돌아가봤자 찌들게 가난한 것 말곤 없어. 그나마 내가 일을 해야 우리 식구들 먹구 산단말야!”
“돈… 줄게.”
“아저씨가 돈이 있으면 얼마나 있다고 그래?”
“나 돈 많아.”
“봐! 보여줘 봐! 보여달라구!”
일어나 가방 속을 뒤적여 비닐에 싼 뭉치를 꺼내 그녀 앞에 내려놨다. 도장과 통장들.
“각각 4천만원 정도씩 들었어. 모두 12개야.”
“뭐에요?”
지혜가 눈을 크게 뜬다. 그리곤 통장과 나를 번갈아 본다.
“확인해 봐. 그리고 비밀 번호는 전부 4646이야.”
“그래서? 이거 나 준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이거 다 주고 나면 아저씬?”
“난 또 벌면 되지.”
지혜의 눈이 금새 붉어졌다.
“거짓말!”
“아냐, 거짓말.”
“세상이 돈이면 다 되는 거야?”
“그렇지 않긴 하지만 필요하긴 하잖아.”
“나 돈 필요한 거 맞아. 그렇지만 그렇다고…… 아저씨 목숨하고 바꿀 수는 없다구!”
우린 서로 눈싸움을 하듯 그렇게 서로를 노려봤다.
“무슨… 소리야?”
“사람 죽이면… 아저씨도 죽을 거 아냐.”
“안 죽어.”
“예전엔 그랬을지 모르지. 하지만 이젠 아니잖아. 나도 그런 눈치는 있어. 지금은 안 되는 일이잖아. 그랬다간 아저씬… 아니 난 아저씨… 잃고 싶지 않아. 다시… 혼자가 되고 싶지 않다구! 흑……”
지혜가 아이처럼 내 품에 파고들었다.
“돈은 많지 않아도 돼. 가난해도 괜찮아. 아저씨한테 많은 걸 원하지도 않을게. 그냥… 지금처럼 가끔씩 볼 수 있으면 돼. 우리 그러면… 안될까?”
“그냥 있을 수는 없어. 우리를 노리는 자들이 있으니까.”
“그건 경찰에 맡기면 되잖아.”
“그럴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우리 나가자, 외국으로. 그럼 되지 않을까?”
“식구들은?”
“식구들은……”
지혜의 등을 쓰다듬었다. 가슴에 젖어 드는 지혜의 눈물처럼 내 마음에도 지울 수 없는 아픔의 흔적이 점점이 새겨져 갔다.
목적지가 멀어서 다행이다 싶은 적이 몇 번이나 될까? 서해안 고속도로를 따라 빠르게 달려가면서도 나는 안도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마음의 준비조차 다 하지 못한 이별을 하게 될 테니까.
“아저씨 이 영화 봤어요?”
“응?”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노래를 흥얼거리던 지혜가 나를 돌아보며 묻는다.
“이 노래 나온 영화요.”
“아니.”
“쳇! 야만인!”
“푸……”
“무식!”
“맞아. 나 좀 무식해.”
“흥!”
“무슨 영환데?”
“안 가르쳐 줄래요.”
“가르쳐 줘.”
“싫어요!”
“어서!”
“싫어!”
“더 빨리 간다!”
“……”
지혜의 표정이 굳어진다. 아차 싶다.
“미안.”
“봄날은 간다에요.”
“봄날은 간다……”
들어본 것도 같다.
“이영애랑 유지태가 나왔어요.”
“그랬구나.”
“유명한 대사가 있는데, 당근 모르겠죠?”
“음? 음.”
“라면 먹을래요?”
“배고파?”
“우씨…… 대사!”
“아!”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뭐?”
“대사!”
“아……”
“기억해 둬요.”
“대사?”
“아니! 기억해 두라구요!”
“뭘?”
“버스하고 여자는 떠나면 잡는 게 아니란다.”
“안 잡아.”
“헐! 대사!!”
“아, 미안!”
“정말 안 잡아요?”
“음? 음.”
“그게 나라도?”
지혜의 긴 머리가 열린 창의 바람을 따라 흩어졌다. 그리고 날카롭게 귓가에 꽂히던 노래 소리도 바람소리와 함께 차 안의 구석 구석으로 쫓기듯 흩어졌다.
눈을 감으면 문득 그리운 날의 기억
아직까지도 마음이 저려 오는 건
그건 아마 사람도 피고 지는 꽃처럼
아름다워서 슬프기 때문일 거야 아마도
봄날은 가네 무심히도 꽃잎은 지네 바람에
머물 수 없던 아름다운 사람들
가만히 눈감으면 잡힐 것 같은
아련히 마음 아픈 추억 같은 것들
봄은 또 오고 꽃은 피고 또 지고 피고
아름다워서 너무나 슬픈 이야기
……
지혜의 식구들이 주는 환대는 무척이나 살가웠다. 지혜를 키워준 할머니, 아직도 누워지내는 아버지, 남동생 둘에, 여동생 하나. 그들 모두 마치 사위감이라도 온 듯 나를 살피며 오랜 만의 손님이라며 반갑게 맞아줬다. 그들에겐 무척이나 아껴두었을 법한 음식이 제법 많게 상을 차지했다. 물론 선글라스를 벗지 않는 내 모습을 이상하게 여기긴 했지만. 그런 환대에 나는 무척이나 어색하기만 했다.
“지혜야, 이거 좀 부담스럽다.”
겨우 둘만의 시간이 되었을 때 귓속말을 건네자 지혜가 내 다리를 꼬집어왔다.
“아야!”
“가만히 있으세요. 약속한 거 잊었어요?”
“그래도 내가 무슨 사윗감도 아니고……”
“실은 집에 오기 전에 사윗감 데리고 간다고 했어요.”
“뭐어?”
“그럼 뭐라고 해요? 회사 사장님이라도 된다고 할까요?”
하긴, 그것도 이상한 일이겠지. 이 전라도 깡시골 작은 섬에 직원을 따라온 사장이라. 그래도 느닷없는 사윗감 행세라니!
“아무리 그래도 내 나이에……”
“아저씨 나이가 어때서요? 암튼 들키지 않게 연기 잘해요. 안 그러면 아저씨 허벅지를 다 뜯어버릴 테니까. 내 첫 번째 소원이에요.”
소원 세 개만 들어달라는 말에 타협한 지혜의 귀향이었다. 단 하루 만에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집에 들르기 전에 광주에 적당한 빈 집을 얻어 놓고 필요한 가재도구를 들이고 숨돌릴 틈도 없이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섬으로의 강행군. 그렇게 해서라도 지혜를 안전하게 집으로 돌려보낼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입고 있는 옷만을 두고 떠나는 황당한 이주에 마을 사람들이 자꾸만 기웃거렸다. 그들에겐 지혜네가 목포로 간다고 속였다. 지혜네 식구들조차도 섬을 떠나기 전까지는 목포로 이사 간다고 알고 있게 했다. 다행히 지혜의 연기가 훌륭했다. 그렇게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지혜네를 광주로 이주시키고 서둘러 떠나려는 나를 지혜가 잡았다.
“조금만 더 있다가요.”
“안돼. 그럴수록 더 위험해져.”
“소원 쓸 거에요.”
“이제 두 개 남았으니 아껴 써야 할걸?”
“하나 쓸 거에요. 그래도 하나 남으니까.”
입맛을 다셨다. 어쨌거나 남이일언 중천금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그래서 두 번째 소원은?”
“안아줘요.”
“싱겁긴. 자!”
두 팔을 벌리자 지혜가 내 무릎에 발길질을 했다.
“아야! 왜?”
“그렇게 안는 것 말구!”
“그럼?”
“아직두?”
지혜가 다시 발길질을 하려 들었다. 서둘러 지혜를 끌어 안았다.
“후회… 안 하겠니?”
“뭘 후회해요?”
“나랑 하는 거.”
“그렇게 잘해요?”
“아니.”
“그럼?”
“해본 지 너무… 오래 돼서. 실망할 거 같은데.”
“뭐에요?”
“정말!”
“큭…. 우흐흐… 우하하하!!!”
(아, 쪽 팔려!)
“그런 거라면 걱정 말아요. 가만히 있으면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크크크…….”
(맙소사!)
그 날 밤, 나와 지혜는 처음으로 남자와 여자로 만났다. 서로가 서로를 만지고 느끼고 비벼대면서 우린 오랜만에 살아있는 인간이 되었다. 하얗고 맑은 지혜의 몸을 탐하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은밀한 도둑 같기도 했고, 능숙하게 나를 이끄는 지혜의 몸짓에 사춘기 소년이 된 것 같기도 했다. 한 줄기 여린 봄바람에 가득히 따뜻해지기도 하고, 여름 한 낮의 미칠 듯 헐떡이게 만드는 열기와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폭우가 되기도 하고, 허무하다 싶게 갑자기 힘을 떨구는 가을이 되기도 하고. 그렇게 육체를 섞고 숨겨왔던 애틋한 정을 나누는 사이, 내 귓가에선 지혜가 흥얼거리던 노래의 한 소절이 자꾸만 귓가에 맴돌았다.
그건 아마 사람도
피고 지는 꽃처럼
아름다워서 슬프기 때문일 거야
아마도……
지쳐 누운 내 품으로 지혜가 아이처럼 파고들었다. 금새 잠이 든 지혜의 머리 결을 어루만지다 이불을 당겨 지혜의 눈부시게 하얀 몸을 덮어 주었다. 아직도 땀이 배어있는 따뜻한 지혜를 안고도 어느새 날카로운 머리 끝을 보이며 저기 달려오는 겨울의 한기로 나는 자꾸만 몸이 떨렸다.
지혜의 얼굴이 어둡다. 이 아이를 처음 만나고 난 이래로 이렇게 어두운 얼굴은 처음이다. 조금은 놀랄 줄 알았지만 그래도 어린 나이에 온갖 경험을 한 제법 단단한 마음인줄 알았는데. 내색하지 않고 무심한 듯 손질을 하면서도 등 뒤에 내리 꽂히는 지혜의 무거운 눈빛이 자꾸만 마음을 누른다.
“장난감치곤 너무 큰 거 아니에요?”
“……”
“나도 좀 갖고 놀면 안될까?”
“안돼.”
“왜요?”
“장난감 아냐.”
“진짜에요?”
“……”
“그거 이름이 뭐에요?”
지혜를 돌아본다. 호기심이라곤 없는 무거운 얼굴.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걸까? 이런 무거운 분위기가 싫어서일까? 하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이 아이가 언제 이런 것을 본 적이나 있었을까!
“M24 SWS”
“왜 그렇게 길어요?”
“저격용이니까.”
“정말 총알 들은 거에요?”
고개를 끄덕인다. 지혜가 앉아 있던 침대에서 내려 옆으로 다가와 쪼그리고 앉았다.
“어디에요?”
탄창을 분리해 보여줬다.
“이렇게 작아요? 넣어져 있는 줄도 몰랐네. 귀엽다! 이거 총알이 몇 개나 들어가요?”
“5발”
“쏴 본 적…… 있어요?”
다시 또 고개를 끄덕였다.
“물건 말고 사람… 도?”
끄덕끄덕
“몇 명이나?”
“아주 많이”
“전부 다 명중?”
끄덕끄덕
“정말?”
지혜의 눈을 바라본다. 두려움보다 더 진한 절망에 가까운 어두움.
“무섭니?”
“……”
“무서워?”
고개를 젖는다.
“그럼?”
“그냥… 슬퍼.”
“왜?”
“아저씬… 착한 사람이니까.”
내가 착하다고? 내가?
“착한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건… 힘든 일이니까…”
가슴이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더 이상 지혜의 눈을 볼 수 없어 다시 총기수입에 몰두했다.
“아저씨.”
“……”
지혜가 더 큰 소리로 나를 불렀다.
“아저씨!”
“……”
아무 할 말이 없다. 이 아이에게 무엇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런데 등이 따뜻하다. 놀라 손을 멈춘다. 지혜의 봉긋한 가슴이 등 뒤에 느껴진다. 하얗고 부드러운 손이 내 가슴을 감싼다. 이어 등에 기댄 얼굴이 느껴졌다.
“바빠.”
“……”
“떨어져.”
“……”
“내가 말했지? 떨어……”
등이 축축하다. 지혜가 울고 있다.
“자니?”
“……”
돌아누운 지혜의 등을 본다. 이 아이의 목선에서 어깨에 이르는 선이 이렇게도 섬세하고 연약했던가? 그 연약함으로 어떻게 그 험한 세상을 헤쳐왔던 걸까?
“할 말 있어.”
“말해요.”
“나 좀 봐.”
“그냥 해.”
어깨에 손을 얹는다. 부드럽고 따뜻한 지혜.
“집에 가. 내일.”
“나 집 없어.”
“시골집.”
“싫어.”
“가.”
“싫다구.”
“그래도 가.”
지혜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리곤 홱 하니 고개를 돌려 나를 본다.
“왜 집에 가라는데?”
“이제 돌아가.”
“돌아가봤자 찌들게 가난한 것 말곤 없어. 그나마 내가 일을 해야 우리 식구들 먹구 산단말야!”
“돈… 줄게.”
“아저씨가 돈이 있으면 얼마나 있다고 그래?”
“나 돈 많아.”
“봐! 보여줘 봐! 보여달라구!”
일어나 가방 속을 뒤적여 비닐에 싼 뭉치를 꺼내 그녀 앞에 내려놨다. 도장과 통장들.
“각각 4천만원 정도씩 들었어. 모두 12개야.”
“뭐에요?”
지혜가 눈을 크게 뜬다. 그리곤 통장과 나를 번갈아 본다.
“확인해 봐. 그리고 비밀 번호는 전부 4646이야.”
“그래서? 이거 나 준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이거 다 주고 나면 아저씬?”
“난 또 벌면 되지.”
지혜의 눈이 금새 붉어졌다.
“거짓말!”
“아냐, 거짓말.”
“세상이 돈이면 다 되는 거야?”
“그렇지 않긴 하지만 필요하긴 하잖아.”
“나 돈 필요한 거 맞아. 그렇지만 그렇다고…… 아저씨 목숨하고 바꿀 수는 없다구!”
우린 서로 눈싸움을 하듯 그렇게 서로를 노려봤다.
“무슨… 소리야?”
“사람 죽이면… 아저씨도 죽을 거 아냐.”
“안 죽어.”
“예전엔 그랬을지 모르지. 하지만 이젠 아니잖아. 나도 그런 눈치는 있어. 지금은 안 되는 일이잖아. 그랬다간 아저씬… 아니 난 아저씨… 잃고 싶지 않아. 다시… 혼자가 되고 싶지 않다구! 흑……”
지혜가 아이처럼 내 품에 파고들었다.
“돈은 많지 않아도 돼. 가난해도 괜찮아. 아저씨한테 많은 걸 원하지도 않을게. 그냥… 지금처럼 가끔씩 볼 수 있으면 돼. 우리 그러면… 안될까?”
“그냥 있을 수는 없어. 우리를 노리는 자들이 있으니까.”
“그건 경찰에 맡기면 되잖아.”
“그럴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우리 나가자, 외국으로. 그럼 되지 않을까?”
“식구들은?”
“식구들은……”
지혜의 등을 쓰다듬었다. 가슴에 젖어 드는 지혜의 눈물처럼 내 마음에도 지울 수 없는 아픔의 흔적이 점점이 새겨져 갔다.
목적지가 멀어서 다행이다 싶은 적이 몇 번이나 될까? 서해안 고속도로를 따라 빠르게 달려가면서도 나는 안도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마음의 준비조차 다 하지 못한 이별을 하게 될 테니까.
“아저씨 이 영화 봤어요?”
“응?”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노래를 흥얼거리던 지혜가 나를 돌아보며 묻는다.
“이 노래 나온 영화요.”
“아니.”
“쳇! 야만인!”
“푸……”
“무식!”
“맞아. 나 좀 무식해.”
“흥!”
“무슨 영환데?”
“안 가르쳐 줄래요.”
“가르쳐 줘.”
“싫어요!”
“어서!”
“싫어!”
“더 빨리 간다!”
“……”
지혜의 표정이 굳어진다. 아차 싶다.
“미안.”
“봄날은 간다에요.”
“봄날은 간다……”
들어본 것도 같다.
“이영애랑 유지태가 나왔어요.”
“그랬구나.”
“유명한 대사가 있는데, 당근 모르겠죠?”
“음? 음.”
“라면 먹을래요?”
“배고파?”
“우씨…… 대사!”
“아!”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뭐?”
“대사!”
“아……”
“기억해 둬요.”
“대사?”
“아니! 기억해 두라구요!”
“뭘?”
“버스하고 여자는 떠나면 잡는 게 아니란다.”
“안 잡아.”
“헐! 대사!!”
“아, 미안!”
“정말 안 잡아요?”
“음? 음.”
“그게 나라도?”
지혜의 긴 머리가 열린 창의 바람을 따라 흩어졌다. 그리고 날카롭게 귓가에 꽂히던 노래 소리도 바람소리와 함께 차 안의 구석 구석으로 쫓기듯 흩어졌다.
눈을 감으면 문득 그리운 날의 기억
아직까지도 마음이 저려 오는 건
그건 아마 사람도 피고 지는 꽃처럼
아름다워서 슬프기 때문일 거야 아마도
봄날은 가네 무심히도 꽃잎은 지네 바람에
머물 수 없던 아름다운 사람들
가만히 눈감으면 잡힐 것 같은
아련히 마음 아픈 추억 같은 것들
봄은 또 오고 꽃은 피고 또 지고 피고
아름다워서 너무나 슬픈 이야기
……
지혜의 식구들이 주는 환대는 무척이나 살가웠다. 지혜를 키워준 할머니, 아직도 누워지내는 아버지, 남동생 둘에, 여동생 하나. 그들 모두 마치 사위감이라도 온 듯 나를 살피며 오랜 만의 손님이라며 반갑게 맞아줬다. 그들에겐 무척이나 아껴두었을 법한 음식이 제법 많게 상을 차지했다. 물론 선글라스를 벗지 않는 내 모습을 이상하게 여기긴 했지만. 그런 환대에 나는 무척이나 어색하기만 했다.
“지혜야, 이거 좀 부담스럽다.”
겨우 둘만의 시간이 되었을 때 귓속말을 건네자 지혜가 내 다리를 꼬집어왔다.
“아야!”
“가만히 있으세요. 약속한 거 잊었어요?”
“그래도 내가 무슨 사윗감도 아니고……”
“실은 집에 오기 전에 사윗감 데리고 간다고 했어요.”
“뭐어?”
“그럼 뭐라고 해요? 회사 사장님이라도 된다고 할까요?”
하긴, 그것도 이상한 일이겠지. 이 전라도 깡시골 작은 섬에 직원을 따라온 사장이라. 그래도 느닷없는 사윗감 행세라니!
“아무리 그래도 내 나이에……”
“아저씨 나이가 어때서요? 암튼 들키지 않게 연기 잘해요. 안 그러면 아저씨 허벅지를 다 뜯어버릴 테니까. 내 첫 번째 소원이에요.”
소원 세 개만 들어달라는 말에 타협한 지혜의 귀향이었다. 단 하루 만에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집에 들르기 전에 광주에 적당한 빈 집을 얻어 놓고 필요한 가재도구를 들이고 숨돌릴 틈도 없이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섬으로의 강행군. 그렇게 해서라도 지혜를 안전하게 집으로 돌려보낼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입고 있는 옷만을 두고 떠나는 황당한 이주에 마을 사람들이 자꾸만 기웃거렸다. 그들에겐 지혜네가 목포로 간다고 속였다. 지혜네 식구들조차도 섬을 떠나기 전까지는 목포로 이사 간다고 알고 있게 했다. 다행히 지혜의 연기가 훌륭했다. 그렇게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지혜네를 광주로 이주시키고 서둘러 떠나려는 나를 지혜가 잡았다.
“조금만 더 있다가요.”
“안돼. 그럴수록 더 위험해져.”
“소원 쓸 거에요.”
“이제 두 개 남았으니 아껴 써야 할걸?”
“하나 쓸 거에요. 그래도 하나 남으니까.”
입맛을 다셨다. 어쨌거나 남이일언 중천금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그래서 두 번째 소원은?”
“안아줘요.”
“싱겁긴. 자!”
두 팔을 벌리자 지혜가 내 무릎에 발길질을 했다.
“아야! 왜?”
“그렇게 안는 것 말구!”
“그럼?”
“아직두?”
지혜가 다시 발길질을 하려 들었다. 서둘러 지혜를 끌어 안았다.
“후회… 안 하겠니?”
“뭘 후회해요?”
“나랑 하는 거.”
“그렇게 잘해요?”
“아니.”
“그럼?”
“해본 지 너무… 오래 돼서. 실망할 거 같은데.”
“뭐에요?”
“정말!”
“큭…. 우흐흐… 우하하하!!!”
(아, 쪽 팔려!)
“그런 거라면 걱정 말아요. 가만히 있으면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크크크…….”
(맙소사!)
그 날 밤, 나와 지혜는 처음으로 남자와 여자로 만났다. 서로가 서로를 만지고 느끼고 비벼대면서 우린 오랜만에 살아있는 인간이 되었다. 하얗고 맑은 지혜의 몸을 탐하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은밀한 도둑 같기도 했고, 능숙하게 나를 이끄는 지혜의 몸짓에 사춘기 소년이 된 것 같기도 했다. 한 줄기 여린 봄바람에 가득히 따뜻해지기도 하고, 여름 한 낮의 미칠 듯 헐떡이게 만드는 열기와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폭우가 되기도 하고, 허무하다 싶게 갑자기 힘을 떨구는 가을이 되기도 하고. 그렇게 육체를 섞고 숨겨왔던 애틋한 정을 나누는 사이, 내 귓가에선 지혜가 흥얼거리던 노래의 한 소절이 자꾸만 귓가에 맴돌았다.
그건 아마 사람도
피고 지는 꽃처럼
아름다워서 슬프기 때문일 거야
아마도……
지쳐 누운 내 품으로 지혜가 아이처럼 파고들었다. 금새 잠이 든 지혜의 머리 결을 어루만지다 이불을 당겨 지혜의 눈부시게 하얀 몸을 덮어 주었다. 아직도 땀이 배어있는 따뜻한 지혜를 안고도 어느새 날카로운 머리 끝을 보이며 저기 달려오는 겨울의 한기로 나는 자꾸만 몸이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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