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의 휴가
Written by 검은나비
*이 소설은 픽션이며, 현실의 인물과 절대로! 전혀! 네버! 연관이 없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연상된다면 그것은 눈의 착각.
[4일차 밤] 희라와의 내기 (1)
--------------------------
"...일어나."
"우웅..."
우씨, 깨우지 마아...
".....일어나!"
"좀 더 잘래에..."
깨우지 말래도오... 음냐음냐...
"일어나라니까!!!"
철썩!
"꺄악! 뭐, 뭐야!"
깨우는 손에 반항하며 따듯한 이불 속으로 파고드려는 순간 등에 짜릿하게 와닿는 갑작스런 통증은 나를 강제로 깨웠다. 에이씨, 누가 깨우... 어? 희라? 얘 표정이 어째 좀 무섭다?
"뭐, 뭐야? 잘 자는데 왜 깨워?"
"왜 깨우냐고? 그게 지금 할 소리야?!"
엥? 내가 뭘 어쨌게? 얘가 갑자기 웬 자다가 봉창을 두드려?
순간 희라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어리둥절해 하자, 희라는 분노로 가득한 얼굴을 하고선 두 손으로 내 얼굴을 탁 잡더니 고개를 홱 돌려 한쪽을 보게 만들었다.
"설! 명! 해! 왜 너랑 윤하가 알몸으로 같이 자고 있는지! 넌 왜 그런걸 차고 있는지!!!"
".....헉."
마, 맞다! 그러고 그냥 잤지!
순간 내 머릿속에서 잠들기, 아니 정신을 놓기 전의 기억이 스쳐지나갔다.
으으으, 절정에 달해서 정신 놓고 잠들어버리는 이 버릇 진짜 고쳐야 되는데...! 으, 이걸 뭐라고 해명하지?
차마 뭐라 해야할지 모를 상황에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자 희라는 두 눈에 불을 켜고 내 얼굴에 제 얼굴을 갖다댔다. 우, 우왁! 좀 떨어져! 왠지 눈에서 빛이난다 너?!
"죽좀 먹여주랬더니 네가 윤하를 먹고 앉아있냐! 누가 너보고 먹으래!!!"
"아, 그, 그게..."
아씨, 이걸 어떻... 아니지. 내가 해명할 필요가 없잖아? 이거 바람핀 거 아니잖아?
순간 떠오른 생각에 입가에 씨익 미소를 띄우며 허리를 쭉 펴고 희라를 마주보았다. 후후, 난 당당하다구!
"내가 왜?"
"뭐?"
"내가 왜 너한테 설명해야 되는데? 윤하가 네꺼야?"
"...그, 그건..."
희라의 눈이 거세게 흔들렸다. 후후. 역시 아직 고백은 안 했나봐? 그럼 아직 윤하는 솔로니까, 자유지! 쿡쿡.
회심의 미소를 씩 지으며 희라의 반응을 보자, 희라는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나를 노려보았다.
"윤하가 내 꺼는 아니라도! 어떻게 아픈 애를 꼬셔서 그 짓을 할 수가..."
"내가 안 꼬셨는데? 윤하가 날 꼬셨지."
".....!!!"
희라의 눈이 아까 이상으로 거세게 흔들렸다. 그렇게 잠시 침묵하던 희라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왔다.
"지... 진짜야?"
"응. 윤하가 나랑 하자고 그러던데? 양기보충이라면서."
"......"
털썩
희라는 멍하니 나를 쳐다보더니 바닥에 털썩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그리고...
"흑..."
울기 시작했다.
"흑흑... 아아앙....."
"자, 잠깐만?!"
갑작스레 터진 희라의 울음은 그야말로 당혹 그 자체였다. 헉. 왜 우는 거야? 윤하가 날 꼬셨다는 게 그렇게 충격적이었어? 아이씨, 너무 심했나? 설마 울 줄은 몰랐는데.
"야, 야! 왜 울어?!"
"흑흑흑... 나, 난 내가 윤하한테 특별한 사람인줄 알았는데... 그런데... 흑흑....."
".....???"
얘가 지금 뭔 소리하는 겨?
그러니까 윤하가 자기랑만 잘 줄 알았는데 아니라서 그런단 건가? 에에, 그렇게 생각했다면야 뭐 충격 받을 만도 하긴 한데... 혹시 얘도 윤하의 마음을 잘 모르나?
왠지 뭔가 꼬인 듯한 분위기에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희라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흑흑... 난, 그냥 윤하랑 가까이 있었던 거뿐이야? 응? 그런 거야? 흑흑흑....."
아하. 오케이, 이해했다.
그러니까 얘는 지금 윤하가 자길 좋아해서 같이 잔 건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그냥 옆에 있는 사람을 택한 거더라, 그래서 충격이다 이 소린가?
근데, 내가 윤하 속은 모르지만 일단 지금 윤하가 희라를 좋아하는 건 맞는데? 얘 진짜 모르나 보다? 나참, 옆에서 보니까 황당해 보이긴 하구만. 이렇게 대놓고 서로 좋아하는데 본인들만 모르다니.
주저앉은 채 울고있는 희라의 앞에 살짝 쪼그려 앉고는 슬쩍 손을 들어 희라의 볼을 콕콕 찌르자 그제야 눈물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우는데 왜 방해하느냐는 듯한 원망 반 슬픔 반인 희라의 표정에 살짝 볼을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에. 희라야? 너 윤하 좋아하지? 아니, 사랑하지?"
내 말에 희라는 순간 흠칫 놀라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놀라는 건 뭐야? 설마 모를 거라고 생각했나? 애들도 알껄, 아마? 나 참. 진짜 본인일은 본인이 제일 모르는 거네.
왠지 나와 제니를 보던 은영이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되는 것을 느끼며 희라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그런데 너, 윤하가 너 좋아하는 건 알아?"
".....??? 그... 게 무슨 소리야?"
어머나, 얘 진짜 모르네. 우와아, 이거 재밌으면서도 진짜 답답하네. 아, 이런 건 말 안 해주고 둘이 애태우는걸 봐야 재밌는데. 쩝. 이럴 줄 알았음 사고치는 게 아닌데... 아까비.
속으로 앞으로의 즐거움 하나를 사고 수습에 써먹어야 하는 현실에 안타까워 시간을 되돌리고싶은 욕망에 혀를 차는데, 희라가 갑자기 내 멱살을 잡았다. 아니 목을 잡았다. 윽, 그러고보니 나 아직 알몸이네. 으휴 추워.
"말해! 그게 무슨 소리냐고!"
"컥컥... 야 이년아. 일단 이건 놓고, 켁켁."
목을 잡고 뭔 말을 해?! 놓으라니까! 날 죽일 셈이n!
내가 숨막혀하자 희라는 흠칫 놀라더니 나를 놓았다. 하지만 그 젖은 눈은 아직도 나를 매섭게 쏘아보고 있었다. 어휴, 눈빛으로 사람 잡겠다 야.
"일단 나 옷부터 좀 입고..."
"그냥 해!"
".....나 지금 홀딱 벗었거든? 알몸이거든? 너 내 몸에 관심있냐?"
아무리 가족이고 여자라지만, 은근 창피하다고 이거?
그럼 너도 벗고 말하시던가. 못하지?
...설마 진짜 내 몸에 관심있나? 진짜 레즈는 이게 불편해. 우정과 애정의 구분이 어렵다니까.
만약 진짜 희라가 그렇다면, 나랑 윤하랑 희라, 아니 제니까지 사각관계가, 아니 서연이에 은영이까지 하면 무려 나인걸즈 과반수가 넘는 엄청난 관계가...!
내 망상이 이래저래 상상의 날개를 펼쳐 막 하늘 높이 날아가려는 찰나, 희라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더니 제 침대의 이불을 끌어당기더니 내 몸에 덮었다. 그리곤 당장 말하라는 듯 눈을 부라렸기에 별수 없이 일단 이불로 몸을 둘러싸 몸을 가렸다.
아, 거 옷 좀 입게 좀 해주지... 쯧.
"네가 무슨 생각하는지는 알거 같긴 한데, 윤하가 너 특별하게 생각하는 거 맞어."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그냥 딱 보니 알겠던데?"
".....죽을래?"
어머나, 이것이 감히 협박을... 네년이 겁을 상실했구나? 내가 너보다 힘세다? 저걸 그냥 콱!
.....해버리긴 상황이 좀 그렇지? 에휴.
힘 서열을 무시하고 하극상(?)을 벌이는 희라의 모습에 순간 욱했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넘어가기로 했다. 으음, 솔직히 나 지금 힘없으니까 싸우면 질거같기도 하고. 얘 지금 아주그냥 눈이 돌아가서... 쩝.
"아까 윤하랑 얘기할 때 보니까 윤하가 네 얘기만 나오면 웃고, 너 일에만 관심 많던데?"
"...그, 그래도 그게 날 좋아하는 거라곤..."
희라는 조금 얼굴이 환해지는가 싶더니 다시 먹구름을 드리웠다. 여전히 확신이 가지 않는 모양이네? 어유, 답답해. 이걸 못 알아듣나?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도 자기를 좋아한다는 걸 믿는 게 그렇게 어려운 건가? 난 고백을 받기만 해봐서 잘 모르겠는데 말이지. 으휴-
몸 속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한숨을 푹 내쉬곤 다시 설명을 시작했다.
"윤하 너 좋아하는 거 맞아. 내가 연애를 하니까 아는 건데, 뭐랄까... 그냥 좋아하는 사람과 특별하게 좋아하는, 그러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할 때의 여자는 일단 분위기부터가 다르다구. 표정이나 말투 같은 게 말야."
엄청 단순한 거지만, 이걸 깨닫기가 어려운 거지 뭐.
가장 단순한 것이 진리이다 라는 말도 있잖아?
.....이건 아닌가?
내가 생각하고서도 어색한 문장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다시 희라를 보자, 희라의 얼굴은 일출과 일몰을 반복하고 있었다. ...요거 웃기네. 사진 아니 동영상 찍어둘까?
은근슬쩍 침대를 뒤져 핸드폰을 찾긴 했는데, 촬영을 키고 희라를 보자 어느새 다시 날 보고있었다. 쳇, 아까비.
"그, 그게 맞다면 대체 윤하는 왜 너랑..."
"그게 그렇게 마음에 걸려?"
거참 정조관념 투철한 아가씨네. 희라 너 원래 이랬었냐? 쩝, 뭐 일단 이것도 해명은 해 줘야겠지? 아 어쩌다 내가 이 두 커플 사이에 끼어서 사랑의 정령노릇을 해야하는 거야?
윤하가 하잘때 공에 눈 돌아가서 하는 게 아니었는데... 쳇쳇.
"뭐 내가 윤하의 정조관념 같은 건 잘 모르겠다만은, 너도 그렇게 말할 처지는 아닐 텐데? 너희둘이 서로 좋아하긴 해도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닐거고, 결국 연인관계도 아닌데 같이 잔거 아냐? 그리고 나나 윤하나 레즈니까 그냥 스킨쉽의 연장선, 보통 여자끼리 하는 거보다 좀 찐한 정도라고 생각해. 너랑 나도 목욕탕에서 서로 가슴 만지고 장난치기도 하잖아?"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물론 싫어하는 사람과는 택도 없는 소리지만, 가족이나 마찬가지인 우리 멤버들끼리야 뭐 그럴수도 있는 거지! 여자끼리의 섹스는 스킨쉽의 연장선일 뿐이야!
.....솔직히 말해서 나도 기구까지 써놓고선 뭔 헛소리냐 싶긴 한데, 그걸 곧이곧대로 말하면 상황이 난감해질 거 아냐? 흐흐, 자 넘어와라! 넘어오는 거다!
내가 생각해도 완벽한 반박에 희라가 내 궤변에 넘어오길 기대하며 속으로 음흉한 웃음을 지어댔지만, 얼굴을 살풋 붉힌 희라가 태클을 건 곳은 조금 다른 쪽이었다.
"나, 난 처음부터 윤하가 좋아서... 그래서 허락한 건데..."
"......."
미안. 그렇게 말할 처지였구나. 너 의외로 조신하구나? 역시 사람은 함부로 판단할 수 없는 건가? 내가 너 10년 가까이 봤는데도 진짜 그건 몰랐다야. 난 다 루나랑 태은이, 나랑 제니같은 경우만 있는 줄 알았어. 이런 경우는 진짜 생각 못 했다.
.....아씨, 이건 또 어떻게 수습해?!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는 희라의 말에 이번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내가 하는 얘기는 일단 애정 없이 관계가 가능하단 전제가 깔린 건데, 희라는 그게 아니라고 하고 있으니 말이다.
결국 내 선택은.....
"...아 모르겠다. 희라 너 거기서 입 꼭 닫고있어. 알겠지?"
"어? 그게 무슨....."
내게 의문을 표하는 희라를 무시하며 침대로 다가가, 역시 알몸인 채 자고있는 윤하를 흔들기 시작했다.
"윤하야, 윤하야~ 좀 일어나 봐."
"뭐, 뭐하는거야? 아픈 애한, 웁!"
"아오, 조용히 하라니깐. 뭐 하나만 물어보고 다시 재울게. 상황 알기 싫어?
"으, 그래도 윤하는 아픈데..."
이러다가 윤하 깨서도 뭐라 할 판이네? 안되겠다. 아예 조치를 취해놔야지.
혹시 모를 불상사를 대비하기 위해 아예 희라의 입에 재갈을 물려버렸다. 물론 약간의 반항이 없진 않았지만 충고와 쓰다듬(이라고 쓰고 협박과 폭력이라고 읽는다) 을 통해 설득(제압)했다.
"거기서 가만히 듣기만 해. 알았지?"
"웁! 웁웁!"
".....맞는다?"
움찔!
"....."
"그래그래. 그냥 조용히 듣기만 하면 돼. 내가 알아서 다 해결해 줄게."
이제 방해는 안 하겠지? 후훗.
재갈을 물리며 덤으로 팔다리까지 묶어놓은 희라를 보며 살짝 미소를 지어주자 희라도 고개를 끄덕였다. 뭐 눈빛이 조금 거슬리긴 했지만, 그 정도는 관대한 내가 넘어가 주자.
대강 희라의 처리가 된 것을 확인하자 희라를 윤하의 시선이 닿지 않도록 침대 밑에 놓아두고 다시 윤하를 깨웠다.
"윤하야, 윤하야? 좀 일어나 봐."
"으으응... 언니...?"
"자는데 깨워서 미안해. 뭐좀 물어볼 게 있어서."
아픈데 깨워서 진짜 미안! 그래도 지금 널 안 깨우면 수습하기가 좀 난감해서 말야. 다 네 연애사업에 도움되는 거니 좀 봐주라.
나는 창백한 얼굴의 윤하를 보며 속으로 빌고는 말을 꺼냈다.
"윤하 너, 나 좋아하니?"
"에? 그거야 좋아하는데요."
잠이 덜 깼는지 윤하는 살짝 멍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에고, 단어선택을 잘못했네. 그럼...
"아니아니, 나 사랑하니?"
"그럼 당연하죠. 언니는 나 안 사랑해요?"
".....응?"
어라? 이거 상황이 좀 이상하게 돌아가는데? 이, 이게 아닌데?
내가 생각한 것과 전혀 다른 전혀 예상 밖의 대답에 당황하기 무섭게 침대 밑에서 희라가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웁! 우움!"
"어? 어디서 이상한 소리가..."
퍽!
"아하하, 밖에서 나는 소리겠지."
희라 너 가만히 안 있을래! 일단 가만히 들엇!
침대 밖으로 꿈틀거리며 머리를 내민 희라를 슬쩍 발로 밀어 침대 아래로 밀어 넣었다. 조용하라는 모션도 윤하 몰래 보내면서. 조금 반항하긴 했지만 살짝 입을 밟아 막자 조용해졌다.
"음, 윤하야. 너 태은이도 사랑하지? 루나도?"
제발 네 해라, 네 해! 아니면 난 망한다고! 대형사고야!!
이게 안 되면 희라의 머리를 갈겨 기억을 지울 각오를 하고서 빈 효과가 있는지, 윤하는 가볍고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서연이부터 태은언니까지 우린 가족이잖아요."
"살았다!"
어우우, 진짜 심장 떨려 죽는 줄 알았네! 까딱하단 희라랑 사생결단 낼 판이었어! 어휴. 거기다 제니까지 끼면... 으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리자 윤하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말이에요? 살다니?"
"아냐아냐. 넘어가. 으음, 그러니까 윤하 네가 날 사랑하는 건 가족으로서지?"
".....? 아하. 에헤헤, 언니 말 이제야 알아들었네요."
윤하는 자신과 나의 대화가 헛돌았다는 걸 그제야 눈치 챘는지 머쓱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살짝 혀를 빼물었다.
아유- 귀여워라. 희라가 갑자기 부러워지네. 제니는 애교가 없단 말야... 오히려 내가 부리지. 힝, 나도 귀여운 거 좋아하는데! 제나한테 바라긴 좀 무린가.
"으응, 언니 말대로 언니를 여자로, 아니지 이성으로? 에, 이걸 뭐라고..."
"연인으로?"
"아. 연인으로 좋아하는 건 아니에요. 히히, 사실 저 좋아하는 사람 있거든요."
윤하는 부끄럽다는 듯 몸을 배배 꼬았다.
오케이, 잘 가고 있어! 그대로 쭉 가면 돼! 듣고있나, 희라?
슬쩍 고개를 내려보자 희라가 분노어린 눈초리로 날 노려보고 있었다. 잘 가는데 얘가 왜 이러... 아차, 발.
얼른 발을 떼 주자 희라는 바닥에 떨어진 옷가지로 엄청나게 입을 비볐다. 흠흠, 미안하다. 에잇! 중요한 데로 넘어가자!
"네가 좋아하는 사람, 희라지?"
제발 오케이 해라! 아니면 진짜 파국이라구!
그리고 다행히, 윤하는 내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어? 어떻게 아셨어요?"
윤하는 내가 알고 있다는 게 의외였는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우, 진짜 귀엽네! 확 한번 더 잡아먹고 싶다. 쩝. 근데 그랬다간 희라랑은 사생결단일 테지? 에휴.
아무튼, 일단 살았다.
"아까 네가 희라 얘기만 나오면 웃던데? 아주 사랑스러운 미소로. 아마 애들도 알껄?"
"그, 그래요? 에헤헤헤."
윤하는 자기의 비밀스런 속마음이 멤버들에게 알려져 있다는 게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아, 자꾸 침이... 후릅. 이 기회에 확실하게 물어봐야겠네. 오해도 풀 겸, 나도 좀 궁금하고.
"근데 윤하야. 왜 아까 나랑 한 거야?"
"아, 그게... 싫으셨어요?"
싫긴? 나야 감사하지. 윤하 네가 얼마나 맛있었(?)는데. 오히려 마음 같아선 앵콜! 원모어 타임!! 을 외치고 싶은걸? 근데 그랬다간 희라가 날 죽이려 들거같아서 참는다 내가.
차마 속마음까지는 말하지 못하고, 그저 고개를 저으며 최대한 순화해서 말했다.
"아냐. 나야 좋았지. 근데 네가 희라 좋아한다니까 묻는거야. 희라 올 때까지 기다려도 되잖아?"
"에, 그게... 왠지 아까는 너무 하고 싶어서요. 희라언니 올 때까지 도저히 기다릴 수가 없겠더라구요."
엥? 너무 하고싶었다고? 뭐 가끔 그럴 수도 있긴 하지만... 조금 공교로운걸.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윤하는 내가 이해를 못 했다고 생각했는지, 다시금 풀어서 말했다. 자기가 색녀라고 오해받을까 걱정하나 보다.
"그, 왠지 그때는 가슴이랑 다리사이가 막 근질근질하고, 몸이 뜨겁고... 그래서요. 평소엔 절대 안 이래요!"
"...뭐 그런 날도 있지."
감기 때문인가? 아니지, 감기에 최음성분이 있을 리가.
뭐, 그냥 우연인가? 아님 윤하 배란기였나?
그건 그렇고, 이것도 좀 물어봐야겠다. 히히히, 사실 이게 제일 중요한 질문일지도?
"근데 윤하야. 나랑 한거... 어땠어?"
"네? 그, 그게......"
일부러 능글맞게 웃으며 던진 질문에 발그스름하던 윤하의 얼굴이 완전히 홍시로 변해버렸다. 상당히 부끄러운 질문이었는지 고개를 푹 숙인 윤하의 입에서 대답이 흘러나온 것은 조금 뒤였다.
"조... 좋았어요."
"희라보다 더?"
".....네."
윤하의 눈에는 안 보이겠지만, 내 눈에는 어느새 침대 밑에서 반쯤 빠져나와 기대에 찬 눈으로 윤하 쪽을 바라보던 희라의 얼굴이 툭 떨궈지는 게 보였다.
쿠쿠쿠, 이겼다! 희라 넌 나한테 안 돼!
내가 승리의 미소를 씨익 짓는 가운데 윤하의 비교평(?)은 계속되었다.
"아무래도 희라언니는 조금 천천히, 약하게 하는 편이라서... 물론 그것도 나쁜 건 아니지만, 조금 약하달까, 부족하달까..... 도구 같은 것도 전혀 안 쓰시구요."
"그래? 후훗."
캬캬캬! 나의 완승이구나! 희라 넌 네가 좋아하는 여자가 불만족스러워하는 것도 모르고 있었단 말이냐! 크크.
기쁨의 눈물에서 다시 슬픔의 눈물을 글썽이고 있는 희라를 득의에 찬 눈으로 내려 보는데. 윤하의 이어진 말은 그런 희라의 고개를 번쩍 들게 만들었다.
"근데... 리카언니랑 하는 건 진짜 좋았는데, 왠지 미안하더라구요."
"응?"
"희라언니한테도 왠지 엄청 미안하구, 제니언니한테도... 왠지 바람피우는 거 같아서요."
살짝 고개를 숙인 윤하의 말에 나는 살짝 아쉬운 입맛을 다셨다.
쩝, 졌네. 뭐 여기선 져 주는 게 끼어든 사람의 도리려나? 그래도 쪼끔 아쉽네, 으휴.
결국 희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훨씬 컸다는 윤하의 말에 희라의 표정은 행복감으로 물들었다. 뭐 눈물콧물 묻고 재갈까지 물린 얼굴로 행복해 해봐야 별로 안 예쁘다만.
그리고 윤하의 다음 말은 더 이상 희라가 침묵할 수 없게 만들었다.
"에헤헤, 희라언니는 나 같은 거에 관심도 없을텐데 나 혼자 바람이니 뭐니하고. 나 참 우습죠? 헤헤."
"윤하야....."
윤하의 더없이 처연한, 금방이라도 굵은 빗방울을 얼굴 위에 뿌릴듯한 얼굴에, 나는 가슴이 찡해지며 순간 은영이의 얼굴이 겹쳐보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윤하의 말에 반응한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우우우웁!! 우우웁!!!"
"응? 이게 무슨 소리... 언니?!"
희라가 격하게 반응하는 소리에 무심코 고개를 내밀어 침대 밑을 바라본 윤하는 깜짝 놀랐다. 역시 희라가 자기 속마음을 몰래 들었다는 게 조금 놀라운...
"대, 대체 그게 무슨 꼴이에요?!"
"......"
그, 그 쪽인가? 하긴 좀 철저하게 묶었나?
으음, 좀 살살 묶을 걸 그랬나...
다시금 희라를 내려보자, 내가 무심코 하긴 했지만 솔직히 좀 심하다 싶게 묶여있긴 했다. 두 팔과 다리가 모두 수갑으로 연결된 채 쪼그려앉은 듯한 모양에 천으로 돌돌 말려 있었다. 덤으로 입에 재갈까지. 이, 이거 생각해보니 장난이 아닌데? 제니랑 지내다 보니 옮았구나! 으윽.
일단 여기선 자리를 피하자. 윤하가 당황한 사이에 튀는 거다!
"뭐, 나머지 얘기는 둘이서 하도록 해. 너희 둘 모두 서로의 마음은 잘 알았겠지? 그럼 난 이만~"
후다닥!
"어, 언니! 잠깐...!"
뒤에서 윤하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무시하고 재빨리 내 방으로 내뺐다.
옷? 그런 거 챙길 시간이 어딨어! 일단 튀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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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편은 아직 H신은 없지만, 이번 에피소드에도 없는 건 아닙니다! 나와요!
Written by 검은나비
*이 소설은 픽션이며, 현실의 인물과 절대로! 전혀! 네버! 연관이 없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연상된다면 그것은 눈의 착각.
[4일차 밤] 희라와의 내기 (1)
--------------------------
"...일어나."
"우웅..."
우씨, 깨우지 마아...
".....일어나!"
"좀 더 잘래에..."
깨우지 말래도오... 음냐음냐...
"일어나라니까!!!"
철썩!
"꺄악! 뭐, 뭐야!"
깨우는 손에 반항하며 따듯한 이불 속으로 파고드려는 순간 등에 짜릿하게 와닿는 갑작스런 통증은 나를 강제로 깨웠다. 에이씨, 누가 깨우... 어? 희라? 얘 표정이 어째 좀 무섭다?
"뭐, 뭐야? 잘 자는데 왜 깨워?"
"왜 깨우냐고? 그게 지금 할 소리야?!"
엥? 내가 뭘 어쨌게? 얘가 갑자기 웬 자다가 봉창을 두드려?
순간 희라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어리둥절해 하자, 희라는 분노로 가득한 얼굴을 하고선 두 손으로 내 얼굴을 탁 잡더니 고개를 홱 돌려 한쪽을 보게 만들었다.
"설! 명! 해! 왜 너랑 윤하가 알몸으로 같이 자고 있는지! 넌 왜 그런걸 차고 있는지!!!"
".....헉."
마, 맞다! 그러고 그냥 잤지!
순간 내 머릿속에서 잠들기, 아니 정신을 놓기 전의 기억이 스쳐지나갔다.
으으으, 절정에 달해서 정신 놓고 잠들어버리는 이 버릇 진짜 고쳐야 되는데...! 으, 이걸 뭐라고 해명하지?
차마 뭐라 해야할지 모를 상황에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자 희라는 두 눈에 불을 켜고 내 얼굴에 제 얼굴을 갖다댔다. 우, 우왁! 좀 떨어져! 왠지 눈에서 빛이난다 너?!
"죽좀 먹여주랬더니 네가 윤하를 먹고 앉아있냐! 누가 너보고 먹으래!!!"
"아, 그, 그게..."
아씨, 이걸 어떻... 아니지. 내가 해명할 필요가 없잖아? 이거 바람핀 거 아니잖아?
순간 떠오른 생각에 입가에 씨익 미소를 띄우며 허리를 쭉 펴고 희라를 마주보았다. 후후, 난 당당하다구!
"내가 왜?"
"뭐?"
"내가 왜 너한테 설명해야 되는데? 윤하가 네꺼야?"
"...그, 그건..."
희라의 눈이 거세게 흔들렸다. 후후. 역시 아직 고백은 안 했나봐? 그럼 아직 윤하는 솔로니까, 자유지! 쿡쿡.
회심의 미소를 씩 지으며 희라의 반응을 보자, 희라는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나를 노려보았다.
"윤하가 내 꺼는 아니라도! 어떻게 아픈 애를 꼬셔서 그 짓을 할 수가..."
"내가 안 꼬셨는데? 윤하가 날 꼬셨지."
".....!!!"
희라의 눈이 아까 이상으로 거세게 흔들렸다. 그렇게 잠시 침묵하던 희라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왔다.
"지... 진짜야?"
"응. 윤하가 나랑 하자고 그러던데? 양기보충이라면서."
"......"
털썩
희라는 멍하니 나를 쳐다보더니 바닥에 털썩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그리고...
"흑..."
울기 시작했다.
"흑흑... 아아앙....."
"자, 잠깐만?!"
갑작스레 터진 희라의 울음은 그야말로 당혹 그 자체였다. 헉. 왜 우는 거야? 윤하가 날 꼬셨다는 게 그렇게 충격적이었어? 아이씨, 너무 심했나? 설마 울 줄은 몰랐는데.
"야, 야! 왜 울어?!"
"흑흑흑... 나, 난 내가 윤하한테 특별한 사람인줄 알았는데... 그런데... 흑흑....."
".....???"
얘가 지금 뭔 소리하는 겨?
그러니까 윤하가 자기랑만 잘 줄 알았는데 아니라서 그런단 건가? 에에, 그렇게 생각했다면야 뭐 충격 받을 만도 하긴 한데... 혹시 얘도 윤하의 마음을 잘 모르나?
왠지 뭔가 꼬인 듯한 분위기에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희라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흑흑... 난, 그냥 윤하랑 가까이 있었던 거뿐이야? 응? 그런 거야? 흑흑흑....."
아하. 오케이, 이해했다.
그러니까 얘는 지금 윤하가 자길 좋아해서 같이 잔 건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그냥 옆에 있는 사람을 택한 거더라, 그래서 충격이다 이 소린가?
근데, 내가 윤하 속은 모르지만 일단 지금 윤하가 희라를 좋아하는 건 맞는데? 얘 진짜 모르나 보다? 나참, 옆에서 보니까 황당해 보이긴 하구만. 이렇게 대놓고 서로 좋아하는데 본인들만 모르다니.
주저앉은 채 울고있는 희라의 앞에 살짝 쪼그려 앉고는 슬쩍 손을 들어 희라의 볼을 콕콕 찌르자 그제야 눈물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우는데 왜 방해하느냐는 듯한 원망 반 슬픔 반인 희라의 표정에 살짝 볼을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에. 희라야? 너 윤하 좋아하지? 아니, 사랑하지?"
내 말에 희라는 순간 흠칫 놀라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놀라는 건 뭐야? 설마 모를 거라고 생각했나? 애들도 알껄, 아마? 나 참. 진짜 본인일은 본인이 제일 모르는 거네.
왠지 나와 제니를 보던 은영이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되는 것을 느끼며 희라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그런데 너, 윤하가 너 좋아하는 건 알아?"
".....??? 그... 게 무슨 소리야?"
어머나, 얘 진짜 모르네. 우와아, 이거 재밌으면서도 진짜 답답하네. 아, 이런 건 말 안 해주고 둘이 애태우는걸 봐야 재밌는데. 쩝. 이럴 줄 알았음 사고치는 게 아닌데... 아까비.
속으로 앞으로의 즐거움 하나를 사고 수습에 써먹어야 하는 현실에 안타까워 시간을 되돌리고싶은 욕망에 혀를 차는데, 희라가 갑자기 내 멱살을 잡았다. 아니 목을 잡았다. 윽, 그러고보니 나 아직 알몸이네. 으휴 추워.
"말해! 그게 무슨 소리냐고!"
"컥컥... 야 이년아. 일단 이건 놓고, 켁켁."
목을 잡고 뭔 말을 해?! 놓으라니까! 날 죽일 셈이n!
내가 숨막혀하자 희라는 흠칫 놀라더니 나를 놓았다. 하지만 그 젖은 눈은 아직도 나를 매섭게 쏘아보고 있었다. 어휴, 눈빛으로 사람 잡겠다 야.
"일단 나 옷부터 좀 입고..."
"그냥 해!"
".....나 지금 홀딱 벗었거든? 알몸이거든? 너 내 몸에 관심있냐?"
아무리 가족이고 여자라지만, 은근 창피하다고 이거?
그럼 너도 벗고 말하시던가. 못하지?
...설마 진짜 내 몸에 관심있나? 진짜 레즈는 이게 불편해. 우정과 애정의 구분이 어렵다니까.
만약 진짜 희라가 그렇다면, 나랑 윤하랑 희라, 아니 제니까지 사각관계가, 아니 서연이에 은영이까지 하면 무려 나인걸즈 과반수가 넘는 엄청난 관계가...!
내 망상이 이래저래 상상의 날개를 펼쳐 막 하늘 높이 날아가려는 찰나, 희라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더니 제 침대의 이불을 끌어당기더니 내 몸에 덮었다. 그리곤 당장 말하라는 듯 눈을 부라렸기에 별수 없이 일단 이불로 몸을 둘러싸 몸을 가렸다.
아, 거 옷 좀 입게 좀 해주지... 쯧.
"네가 무슨 생각하는지는 알거 같긴 한데, 윤하가 너 특별하게 생각하는 거 맞어."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그냥 딱 보니 알겠던데?"
".....죽을래?"
어머나, 이것이 감히 협박을... 네년이 겁을 상실했구나? 내가 너보다 힘세다? 저걸 그냥 콱!
.....해버리긴 상황이 좀 그렇지? 에휴.
힘 서열을 무시하고 하극상(?)을 벌이는 희라의 모습에 순간 욱했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넘어가기로 했다. 으음, 솔직히 나 지금 힘없으니까 싸우면 질거같기도 하고. 얘 지금 아주그냥 눈이 돌아가서... 쩝.
"아까 윤하랑 얘기할 때 보니까 윤하가 네 얘기만 나오면 웃고, 너 일에만 관심 많던데?"
"...그, 그래도 그게 날 좋아하는 거라곤..."
희라는 조금 얼굴이 환해지는가 싶더니 다시 먹구름을 드리웠다. 여전히 확신이 가지 않는 모양이네? 어유, 답답해. 이걸 못 알아듣나?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도 자기를 좋아한다는 걸 믿는 게 그렇게 어려운 건가? 난 고백을 받기만 해봐서 잘 모르겠는데 말이지. 으휴-
몸 속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한숨을 푹 내쉬곤 다시 설명을 시작했다.
"윤하 너 좋아하는 거 맞아. 내가 연애를 하니까 아는 건데, 뭐랄까... 그냥 좋아하는 사람과 특별하게 좋아하는, 그러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할 때의 여자는 일단 분위기부터가 다르다구. 표정이나 말투 같은 게 말야."
엄청 단순한 거지만, 이걸 깨닫기가 어려운 거지 뭐.
가장 단순한 것이 진리이다 라는 말도 있잖아?
.....이건 아닌가?
내가 생각하고서도 어색한 문장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다시 희라를 보자, 희라의 얼굴은 일출과 일몰을 반복하고 있었다. ...요거 웃기네. 사진 아니 동영상 찍어둘까?
은근슬쩍 침대를 뒤져 핸드폰을 찾긴 했는데, 촬영을 키고 희라를 보자 어느새 다시 날 보고있었다. 쳇, 아까비.
"그, 그게 맞다면 대체 윤하는 왜 너랑..."
"그게 그렇게 마음에 걸려?"
거참 정조관념 투철한 아가씨네. 희라 너 원래 이랬었냐? 쩝, 뭐 일단 이것도 해명은 해 줘야겠지? 아 어쩌다 내가 이 두 커플 사이에 끼어서 사랑의 정령노릇을 해야하는 거야?
윤하가 하잘때 공에 눈 돌아가서 하는 게 아니었는데... 쳇쳇.
"뭐 내가 윤하의 정조관념 같은 건 잘 모르겠다만은, 너도 그렇게 말할 처지는 아닐 텐데? 너희둘이 서로 좋아하긴 해도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닐거고, 결국 연인관계도 아닌데 같이 잔거 아냐? 그리고 나나 윤하나 레즈니까 그냥 스킨쉽의 연장선, 보통 여자끼리 하는 거보다 좀 찐한 정도라고 생각해. 너랑 나도 목욕탕에서 서로 가슴 만지고 장난치기도 하잖아?"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물론 싫어하는 사람과는 택도 없는 소리지만, 가족이나 마찬가지인 우리 멤버들끼리야 뭐 그럴수도 있는 거지! 여자끼리의 섹스는 스킨쉽의 연장선일 뿐이야!
.....솔직히 말해서 나도 기구까지 써놓고선 뭔 헛소리냐 싶긴 한데, 그걸 곧이곧대로 말하면 상황이 난감해질 거 아냐? 흐흐, 자 넘어와라! 넘어오는 거다!
내가 생각해도 완벽한 반박에 희라가 내 궤변에 넘어오길 기대하며 속으로 음흉한 웃음을 지어댔지만, 얼굴을 살풋 붉힌 희라가 태클을 건 곳은 조금 다른 쪽이었다.
"나, 난 처음부터 윤하가 좋아서... 그래서 허락한 건데..."
"......."
미안. 그렇게 말할 처지였구나. 너 의외로 조신하구나? 역시 사람은 함부로 판단할 수 없는 건가? 내가 너 10년 가까이 봤는데도 진짜 그건 몰랐다야. 난 다 루나랑 태은이, 나랑 제니같은 경우만 있는 줄 알았어. 이런 경우는 진짜 생각 못 했다.
.....아씨, 이건 또 어떻게 수습해?!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는 희라의 말에 이번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내가 하는 얘기는 일단 애정 없이 관계가 가능하단 전제가 깔린 건데, 희라는 그게 아니라고 하고 있으니 말이다.
결국 내 선택은.....
"...아 모르겠다. 희라 너 거기서 입 꼭 닫고있어. 알겠지?"
"어? 그게 무슨....."
내게 의문을 표하는 희라를 무시하며 침대로 다가가, 역시 알몸인 채 자고있는 윤하를 흔들기 시작했다.
"윤하야, 윤하야~ 좀 일어나 봐."
"뭐, 뭐하는거야? 아픈 애한, 웁!"
"아오, 조용히 하라니깐. 뭐 하나만 물어보고 다시 재울게. 상황 알기 싫어?
"으, 그래도 윤하는 아픈데..."
이러다가 윤하 깨서도 뭐라 할 판이네? 안되겠다. 아예 조치를 취해놔야지.
혹시 모를 불상사를 대비하기 위해 아예 희라의 입에 재갈을 물려버렸다. 물론 약간의 반항이 없진 않았지만 충고와 쓰다듬(이라고 쓰고 협박과 폭력이라고 읽는다) 을 통해 설득(제압)했다.
"거기서 가만히 듣기만 해. 알았지?"
"웁! 웁웁!"
".....맞는다?"
움찔!
"....."
"그래그래. 그냥 조용히 듣기만 하면 돼. 내가 알아서 다 해결해 줄게."
이제 방해는 안 하겠지? 후훗.
재갈을 물리며 덤으로 팔다리까지 묶어놓은 희라를 보며 살짝 미소를 지어주자 희라도 고개를 끄덕였다. 뭐 눈빛이 조금 거슬리긴 했지만, 그 정도는 관대한 내가 넘어가 주자.
대강 희라의 처리가 된 것을 확인하자 희라를 윤하의 시선이 닿지 않도록 침대 밑에 놓아두고 다시 윤하를 깨웠다.
"윤하야, 윤하야? 좀 일어나 봐."
"으으응... 언니...?"
"자는데 깨워서 미안해. 뭐좀 물어볼 게 있어서."
아픈데 깨워서 진짜 미안! 그래도 지금 널 안 깨우면 수습하기가 좀 난감해서 말야. 다 네 연애사업에 도움되는 거니 좀 봐주라.
나는 창백한 얼굴의 윤하를 보며 속으로 빌고는 말을 꺼냈다.
"윤하 너, 나 좋아하니?"
"에? 그거야 좋아하는데요."
잠이 덜 깼는지 윤하는 살짝 멍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에고, 단어선택을 잘못했네. 그럼...
"아니아니, 나 사랑하니?"
"그럼 당연하죠. 언니는 나 안 사랑해요?"
".....응?"
어라? 이거 상황이 좀 이상하게 돌아가는데? 이, 이게 아닌데?
내가 생각한 것과 전혀 다른 전혀 예상 밖의 대답에 당황하기 무섭게 침대 밑에서 희라가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웁! 우움!"
"어? 어디서 이상한 소리가..."
퍽!
"아하하, 밖에서 나는 소리겠지."
희라 너 가만히 안 있을래! 일단 가만히 들엇!
침대 밖으로 꿈틀거리며 머리를 내민 희라를 슬쩍 발로 밀어 침대 아래로 밀어 넣었다. 조용하라는 모션도 윤하 몰래 보내면서. 조금 반항하긴 했지만 살짝 입을 밟아 막자 조용해졌다.
"음, 윤하야. 너 태은이도 사랑하지? 루나도?"
제발 네 해라, 네 해! 아니면 난 망한다고! 대형사고야!!
이게 안 되면 희라의 머리를 갈겨 기억을 지울 각오를 하고서 빈 효과가 있는지, 윤하는 가볍고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서연이부터 태은언니까지 우린 가족이잖아요."
"살았다!"
어우우, 진짜 심장 떨려 죽는 줄 알았네! 까딱하단 희라랑 사생결단 낼 판이었어! 어휴. 거기다 제니까지 끼면... 으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리자 윤하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말이에요? 살다니?"
"아냐아냐. 넘어가. 으음, 그러니까 윤하 네가 날 사랑하는 건 가족으로서지?"
".....? 아하. 에헤헤, 언니 말 이제야 알아들었네요."
윤하는 자신과 나의 대화가 헛돌았다는 걸 그제야 눈치 챘는지 머쓱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살짝 혀를 빼물었다.
아유- 귀여워라. 희라가 갑자기 부러워지네. 제니는 애교가 없단 말야... 오히려 내가 부리지. 힝, 나도 귀여운 거 좋아하는데! 제나한테 바라긴 좀 무린가.
"으응, 언니 말대로 언니를 여자로, 아니지 이성으로? 에, 이걸 뭐라고..."
"연인으로?"
"아. 연인으로 좋아하는 건 아니에요. 히히, 사실 저 좋아하는 사람 있거든요."
윤하는 부끄럽다는 듯 몸을 배배 꼬았다.
오케이, 잘 가고 있어! 그대로 쭉 가면 돼! 듣고있나, 희라?
슬쩍 고개를 내려보자 희라가 분노어린 눈초리로 날 노려보고 있었다. 잘 가는데 얘가 왜 이러... 아차, 발.
얼른 발을 떼 주자 희라는 바닥에 떨어진 옷가지로 엄청나게 입을 비볐다. 흠흠, 미안하다. 에잇! 중요한 데로 넘어가자!
"네가 좋아하는 사람, 희라지?"
제발 오케이 해라! 아니면 진짜 파국이라구!
그리고 다행히, 윤하는 내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어? 어떻게 아셨어요?"
윤하는 내가 알고 있다는 게 의외였는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우, 진짜 귀엽네! 확 한번 더 잡아먹고 싶다. 쩝. 근데 그랬다간 희라랑은 사생결단일 테지? 에휴.
아무튼, 일단 살았다.
"아까 네가 희라 얘기만 나오면 웃던데? 아주 사랑스러운 미소로. 아마 애들도 알껄?"
"그, 그래요? 에헤헤헤."
윤하는 자기의 비밀스런 속마음이 멤버들에게 알려져 있다는 게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아, 자꾸 침이... 후릅. 이 기회에 확실하게 물어봐야겠네. 오해도 풀 겸, 나도 좀 궁금하고.
"근데 윤하야. 왜 아까 나랑 한 거야?"
"아, 그게... 싫으셨어요?"
싫긴? 나야 감사하지. 윤하 네가 얼마나 맛있었(?)는데. 오히려 마음 같아선 앵콜! 원모어 타임!! 을 외치고 싶은걸? 근데 그랬다간 희라가 날 죽이려 들거같아서 참는다 내가.
차마 속마음까지는 말하지 못하고, 그저 고개를 저으며 최대한 순화해서 말했다.
"아냐. 나야 좋았지. 근데 네가 희라 좋아한다니까 묻는거야. 희라 올 때까지 기다려도 되잖아?"
"에, 그게... 왠지 아까는 너무 하고 싶어서요. 희라언니 올 때까지 도저히 기다릴 수가 없겠더라구요."
엥? 너무 하고싶었다고? 뭐 가끔 그럴 수도 있긴 하지만... 조금 공교로운걸.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윤하는 내가 이해를 못 했다고 생각했는지, 다시금 풀어서 말했다. 자기가 색녀라고 오해받을까 걱정하나 보다.
"그, 왠지 그때는 가슴이랑 다리사이가 막 근질근질하고, 몸이 뜨겁고... 그래서요. 평소엔 절대 안 이래요!"
"...뭐 그런 날도 있지."
감기 때문인가? 아니지, 감기에 최음성분이 있을 리가.
뭐, 그냥 우연인가? 아님 윤하 배란기였나?
그건 그렇고, 이것도 좀 물어봐야겠다. 히히히, 사실 이게 제일 중요한 질문일지도?
"근데 윤하야. 나랑 한거... 어땠어?"
"네? 그, 그게......"
일부러 능글맞게 웃으며 던진 질문에 발그스름하던 윤하의 얼굴이 완전히 홍시로 변해버렸다. 상당히 부끄러운 질문이었는지 고개를 푹 숙인 윤하의 입에서 대답이 흘러나온 것은 조금 뒤였다.
"조... 좋았어요."
"희라보다 더?"
".....네."
윤하의 눈에는 안 보이겠지만, 내 눈에는 어느새 침대 밑에서 반쯤 빠져나와 기대에 찬 눈으로 윤하 쪽을 바라보던 희라의 얼굴이 툭 떨궈지는 게 보였다.
쿠쿠쿠, 이겼다! 희라 넌 나한테 안 돼!
내가 승리의 미소를 씨익 짓는 가운데 윤하의 비교평(?)은 계속되었다.
"아무래도 희라언니는 조금 천천히, 약하게 하는 편이라서... 물론 그것도 나쁜 건 아니지만, 조금 약하달까, 부족하달까..... 도구 같은 것도 전혀 안 쓰시구요."
"그래? 후훗."
캬캬캬! 나의 완승이구나! 희라 넌 네가 좋아하는 여자가 불만족스러워하는 것도 모르고 있었단 말이냐! 크크.
기쁨의 눈물에서 다시 슬픔의 눈물을 글썽이고 있는 희라를 득의에 찬 눈으로 내려 보는데. 윤하의 이어진 말은 그런 희라의 고개를 번쩍 들게 만들었다.
"근데... 리카언니랑 하는 건 진짜 좋았는데, 왠지 미안하더라구요."
"응?"
"희라언니한테도 왠지 엄청 미안하구, 제니언니한테도... 왠지 바람피우는 거 같아서요."
살짝 고개를 숙인 윤하의 말에 나는 살짝 아쉬운 입맛을 다셨다.
쩝, 졌네. 뭐 여기선 져 주는 게 끼어든 사람의 도리려나? 그래도 쪼끔 아쉽네, 으휴.
결국 희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훨씬 컸다는 윤하의 말에 희라의 표정은 행복감으로 물들었다. 뭐 눈물콧물 묻고 재갈까지 물린 얼굴로 행복해 해봐야 별로 안 예쁘다만.
그리고 윤하의 다음 말은 더 이상 희라가 침묵할 수 없게 만들었다.
"에헤헤, 희라언니는 나 같은 거에 관심도 없을텐데 나 혼자 바람이니 뭐니하고. 나 참 우습죠? 헤헤."
"윤하야....."
윤하의 더없이 처연한, 금방이라도 굵은 빗방울을 얼굴 위에 뿌릴듯한 얼굴에, 나는 가슴이 찡해지며 순간 은영이의 얼굴이 겹쳐보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윤하의 말에 반응한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우우우웁!! 우우웁!!!"
"응? 이게 무슨 소리... 언니?!"
희라가 격하게 반응하는 소리에 무심코 고개를 내밀어 침대 밑을 바라본 윤하는 깜짝 놀랐다. 역시 희라가 자기 속마음을 몰래 들었다는 게 조금 놀라운...
"대, 대체 그게 무슨 꼴이에요?!"
"......"
그, 그 쪽인가? 하긴 좀 철저하게 묶었나?
으음, 좀 살살 묶을 걸 그랬나...
다시금 희라를 내려보자, 내가 무심코 하긴 했지만 솔직히 좀 심하다 싶게 묶여있긴 했다. 두 팔과 다리가 모두 수갑으로 연결된 채 쪼그려앉은 듯한 모양에 천으로 돌돌 말려 있었다. 덤으로 입에 재갈까지. 이, 이거 생각해보니 장난이 아닌데? 제니랑 지내다 보니 옮았구나! 으윽.
일단 여기선 자리를 피하자. 윤하가 당황한 사이에 튀는 거다!
"뭐, 나머지 얘기는 둘이서 하도록 해. 너희 둘 모두 서로의 마음은 잘 알았겠지? 그럼 난 이만~"
후다닥!
"어, 언니! 잠깐...!"
뒤에서 윤하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무시하고 재빨리 내 방으로 내뺐다.
옷? 그런 거 챙길 시간이 어딨어! 일단 튀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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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편은 아직 H신은 없지만, 이번 에피소드에도 없는 건 아닙니다! 나와요!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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