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부-
어쩌다가 일이 여기까지 온 것인지 알 수없는 노릇이었다. 마치 무언가에 내몰리는 듯 멈출 수 없었던 그것들이 지금 지수를 불안에 빠지게 한다.
술에 약한 남편을 흔들어 깨워 가까스로 출근시키고, 아이의 도시락을 챙겨 등교를 시키는 것은 언제나처럼 분주한 지수의 아침 일과였다. 다른 날과 크게 다를 것도 없는 일상일 뿐인데 공연한 불안감이 지수를 짓누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지금 이 시간 함께 있어선 안 될 사람이 집에 남아있다는 것뿐이지만, 그것은 남편도 익히 알고 있는 일이고 딸 미림이 역시 알고 있는 일이니 달리 문제 삼을 만한 일은 아님에도 지수는 무언가 실타래가 엉켜 있는 듯 정리되지 않는 복잡한 심경이 되어 소파에 몸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모두 나갔어요?”
“아! 일어나셨어요? 네...... 조금 전에 모두...... 전, 오늘도 종로에 나가서 가게를 알아본다고 했어요.”
기찬이 이 층에서 내려와 욕실로 들어서고, 지수는 기찬을 위한 식탁을 꾸민다. 앞치마를 두른 모습은 정갈하기만 하고, 가정적인 그녀를 잘 드러내어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희한하단 말이야......”
“네?...... 뭐가요?”
“누님 말이야. 서구적인 마스크에...... 늘씬한 팔등신 미녀가 집에서 보면 또 그런대로 아줌마처럼 보이기도 해서 말이야. 하하하......”
“어머! 그럼 제가 아줌마지...... 뭐 아가씨라고 우긴 적 있었어요?”
“하하...... 그런 소리가 아니라, 누님은 어떤 분위기도 잘 소화해 내는 미인이라는 뜻이지. 오죽하면 내가 누님한테 홀 매니저를 맡기려고 했겠어......”
기찬은 수건으로 머리를 털어내며 식탁에 걸터앉고, 그런 기찬 앞에 지수가 마주앉으며 걱정스런 얼굴로 바라본다.
“괜한 비행기 태우지 마시고요. 저...... 걱정되는 일이 있어요.”
“뭔데?......”
“우리 미림이 말이에요.”
“으응, 미림이가 왜?...... 지난 번 그 일은 이제 모두 해결됐다니까...... 누님은 그냥 나한테 맡겨두고 모른 척해요.”
“아니...... 그 일이 아니라...... 미림이가 어제...... 우리 일을 알고 있는 것 같았어요.”
“으응?...... 에이, 그럴 리가...... 공연히 누님이 예민해져서 그래. 하하하...... 알았어. 다음부터는 식구들 있는데서 안 그럴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아니에요. 뭔가 석연치 않은 일이 하나 둘이 아니라니까요. 아침이면 항상 매달려서 어리광을 부리던 애가 오늘은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았는데...... 그러고 보니 어젯밤에 자는 모습도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던 게 그냥 자는 척 하는 것 같았어요...... 아유,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아요?”
기찬도 지수의 말을 들어보니 그녀가 공연한 걱정을 하는 것 같지만은 않은 느낌이 들어 다소의 신경이 쓰이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거니와 설혹 그렇다고 하더라도 미림이가 끝내 모른 척을 했다면 나름의 이유가 있을 테니 그저 기다려 보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모녀간에 그런 얘기를 할 수도 없는 일이잖아? 누님도 그저 모른 척 하고 있어요. 내가 눈치를 봐서 미림이가 알고 있는 것 같으면 적절하게 대처를 할 테니까......”
“어, 어떻게 하시게요? 설마 미림이한테 그 얘기를 하신다는......”
“허 참, 내가 무슨 바보예요? 하여튼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 말아요. 요즘 애들...... 보고 자라는 게 많아서 어지간한 일에는 충격도 받지 않아요. 다만 그게 남의 일이 아니라는 게 당황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미림이는 제법 조숙해서 그런 상황을 잘 이해해 줄지도 모르잖아요? 혹시라도 알고 있는 눈치라면 더 이상 모녀간에 불편하지 않도록 조치는 취해 둬야지......”
“그러니까 어떻게 하시려고...... 말 좀 해줘요......”
“누님도 참...... 할 수 없잖아. 누님을 잔 다르크로 만들어야지. 아빠가 저지른 실수에 엄마가 나서서 진화를 한 것으로...... 나도 처음엔 한 때 나쁜 마음을 먹었지만, 지금은 그렇게 착한 엄마를 정말 좋아하고 있다...... 그래서 미림이에겐 정말 좋은 외삼촌이 되어주고 싶다...... 뭐, 이렇게 말이야.”
“......”
“미림이가 똑똑한 아이니까 잘 적응해 올지도 몰라. 이미 알고 있는 눈치라면 그렇게라도 물꼬를 터주는 게 영영 모른 척 하는 것보다는 나은 결과를 가져올 거야. 누님은 끝내 모른 척 하고만 있어. 나하고 미림이하고 해결을 볼 테니까......”
“그, 그래도 제 느낌뿐일지도 모르니까 혹시 모르는 눈치 같으면 절대로 말을 해선 안돼요.”
“알았어요.”
소공동의 사무실은 아침부터 대만원이었다. 어느덧 한기주는 강당에 사람들을 앉혀두고 신용불량자들을 대거 솎아내느라 고생을 하고 있었다. 신용불량자들에게는 금융기관을 통한 어떤 형태의 대출도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니 그것은 직장인이든 무직자든 상관없는 일이었다.
“차 드세요. 사장님.”
한기주의 아내 은진은 기찬에게 커피를 끓여 내고, 미라의 올케 강희는 전날의 영업 자료를 테이블에 준비해 올리고 있었다.
“소영씨는 뭐 하고 있지?”
“아! 네...... 소영씨 남편하고 기주씨 도와서 강당에서 일하고 있어요.”
“공장 직원들은 내보냈는지 모르겠네......”
“제가 가서 불러 올까요?”
“아니, 내 버려 둬. 나중에...... 중요한 일도 아닌데...... 모두 그만두기로 한 모양이지.”
기찬은 메모지에 고영준 의원의 후원회 계좌번호를 적어주고 송금을 해 줄 것을 지시한다.
“자, 은진씨...... 여기에 내 이름으로 천만 원만 송금해 주고, 확인하라고 전화를 해 줘. 나는 저 쪽 사무실에 가서 분위기나 살피고 있을 테니까......”
“네, 알았습니다.”
사채업자 조상환의 사무실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한산하기만 하였고, 모처럼 기찬이 방문을 하자 그 환영이 대단했다. 어린놈이 횡재를 노리고 멋모르고 뛰어들었다는 생각은 온 데 간 데 없었고, 칙사를 모시듯 대접이 융숭하기만 하다.
조상환의 입장에서야 그도 그럴 것이 기찬이 올리는 대출은 그대로 자신의 수입과 직결이 되는 것이니 이것저것 잡다한 세금 따위가 빠져나간다고 해도 대출총액에서 약 팔 퍼센트의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아! 강사장님, 대단하십니다. 그 회사에 높은 분을 아신다더니......”
“하하...... 네, 건축회사가 돼서 그런지...... 마침 사원주택을 좋은 조건으로 풀어서 그 덕을 저도 좀 보고 있는 셈입니다. 그나저나 저에게도 에이전시를 맡아보라는 연락이 여러 곳에서 오던데...... 도와주신 조사장님 생각을 하면 선뜻 응할 수도 없는 일이고......”
조상환의 거래코드를 사용하지 않고 직접 금융기관과 모집인 계약을 맺어 거래코드를 딸 수도 있다는 선전포고를 흘린 셈이었다. 기찬의 대출 총액이 하루에 일억 원을 호가한다면 사채업자 조상환의 입장에서는 약 팔백만 원의 순 수입을 거저 올리는 것이었으니, 그것은 대단한 수입이었고, 그 금송아지가 지금 집을 나갈지도 모른다는 통보를 받은 셈인데,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 이런...... 어느 자식들이...... 강사장님, 그거 그렇게 만만한 거 아닙니다. 요즘 허위자료가 하도 많아서 혹시 대출서류 하나라도 잘못 처리되면 그거 전부 다 추적해야 하고, 감당해 내야 하는 일인데...... 조금 더 익숙해질 때까지는 두고 보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저...... 기관에서 나오는 수수료 때문에 그러시는 거라면 제가 제 몫을 조금 떼어 드릴 테니까...... 저는 그저 오 퍼센트 정도만 보겠습니다. 대출 올리시는 총액에서 삼 퍼센트는 바로 다음 날 다시 환입을 시켜 드리겠습니다. 나머지는 세금도 내야 되고...... 또 사고 부담도 있으니......”
위조서류로 인한 대출이야 지금 기찬이 전문으로 하고 있으니 그 폐해에 대해 모를 일도 아니었다.
“아! 하하...... 뭐, 그렇게까지...... 그러시면 좋습니다. 저도 언제까지 이렇게 실적을 올릴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저도 복잡한 것은 딱 질색이라서......”
사채업자 조상환의 판단은 빨랐다. 한두 개 회사를 통틀어서 대출을 따 낸다고 하더라도 결국 그 자원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것일 테고, 언젠가는 그 씨가 말라버릴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바닥이 어디까지인지를 논할 시점이 아니었다. 적은 돈에 연연하다가 큰 물고기를 놓칠 수 있는 일이니 버릴 때 버리더라도 아직까지는 황금을 낳는 거위인 기찬을 붙잡아야만 할 일이었다.
지금 같은 추세로만 대출을 일으키게 된다면 회사 규모에 따라 다르겠지만 길게 잡아 삼사 개월은 유지할 수 있을 테니 그 예상되는 수익은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이 사무실에서 인상을 구기고 앉아있는 떨거지들 한 차를 갖다 줘도 기찬의 가치에 견줄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기찬은 기찬대로 속셈이 따로 있었다. 지금 그에게서 대출을 받아가는 사람들은 전부 무직자로서 갚을 수 없는 빚을 내고 있는 입장이었고, 결국 금융사고로 이어질 것이 분명한 일이었다. 그 사고가 일어나는 시점이라고 할 것 같으면 최초 대출을 받아 간 사람이 첫 회 이자를 납입해야 하는 시점이 될 것이니 그 이후로는 줄줄이 사고가 발생하게 될 것이고, 이것이 의도적인 사고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릴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기찬이 이 일을 한 달 정도 벌여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만약 그 양에 있어 기대에 차질 않는다면 대출을 받아 간 사람들의 첫 회 납입금을 대신 내 주더라도 사무실을 운영하는 기간을 한 달 연장할 수도 있는 일이었고, 그것은 더 커다란 수익을 보장해 주는 일이 될 것이었다.
그 끝이 한 달 뒤가 될지 두 달 뒤가 될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기찬은 정한 기간 안에 최대의 효과를 누려야 했고, 그 사이라도 더 뽑아낼 수 있는 것은 사채업자 조상환에게 떨어질 수수료였으니, 간단한 아침 나들이 한 번으로 수억 원, 혹은 십 수억 원이 오고 갈 수도 있는 약속을 커피 한 잔 마시는 시간에 따내 버린다.
“자, 그럼...... 그 돈은 이 계좌번호로 좀 송금을 해 주십시오.”
“네, 그렇게 하지요. 매일 송금을 해 드릴 테니까 강사장님은 그저 대출에만 신경 쓰십시오. 하하하......”
“그럼...... 이미 지나간 것도 소급처리를 해 주시겠지요?”
“아! 네, 네...... 그렇게 해 드리겠습니다. 어제 것 까지는 지금 당장 입금해 드리겠습니다.
기찬의 집요한 공격에 조상환은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장부를 뒤적이고, 기찬은 담배를 꺼내 물어 승자의 여유를 만끽한다.
계약서 따위는 피차간에 필요 없는 일이었다. 조상환이야 버릴 때가 되면 기찬을 버릴 것이니 계약서 따위가 짐스러웠을 것이고, 기찬 역시 약속에 있어 필적이나 도장 따위는 부담스러운 일이니 그저 갈겨 쓴 계좌번호만 넘길 뿐, 계약서 얘기는 꺼내지도 않는다.
서로가 계약서 따위는 잊어버린 것처럼 신사협정이 이루어지고, 시커먼 속을 감춘 채 겉으로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하기만 하였다.
“여보세요?”
“으응?...... 금주 누님?......”
마침 금주로부터 전화가 걸려와 자연스레 조상환의 사채 사무실을 빠져 나온다. 기찬의 지시를 받은 은진이 빠르게 송금 처리를 했는지 인사치레를 하기 위한 모양이었다.
“어머?...... 무조건 누님으로 몰아가시는 거예요?”
“아! 하하하...... 우리 지수 누님 친구니까 금주씨도 누님 맞잖아요?”
“치...... 그리고 금방 전화 왔던데, 천만 원이나 보냈다면서요?”
“음...... 나름대로 무리했거든요. 가구공장 목수 노릇 해서 버는 돈 치고는 적은 거 아니에요.”
“어머! 누가 뭐래요? 호호호...... 고마워요. 나중에 잊지 않고 인사할게요.”
“아! 기대가 몹시 됩니다. 하하하...... 정치헌금은 정치헌금이고, 언제 누님에게도 따로 선물 하나 해야 할 텐데......”
“어머! 저한테요? 그랬다가 지수한테 혼나면 어쩌시려고......”
“후훗...... 그래야 누님하고 나, 우리 두 사람 비밀이 만들어질 거 아닙니까?”
“어머나? 호호호...... 알았어요. 나중에 한 번 만나요.”
전화를 접어 넣는 기찬의 뒤로 미라의 오빠 송만호가 따라 나와 너스레를 떨어 댄다.
“아! 참...... 대단하십니다. 하하......”
“아, 네...... 형님, 요즘 지내시기는 어떻습니까?”
“뭐, 여전하지요. 그나저나 천하의 조상환이 같은 놈도 벗겨 먹을 생각을 하셨으니 정말 기가 막히는 일입니다. 하하하......”
“다 자기 욕심에 눈이 어두워서 볼 걸 못 보는 겁니다. 하하...... 그나저나 형님도 조만간에 이사를 하실 생각을 하십시오.”
“이, 이사요?”
“네, 제가 이 일을 시작했던 것도 결국 미라 때문인데...... 형님 형편이 자꾸 나아져야 미라도 좋아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독산동에 조그만 가구회사도 하나 운영하고 있습니다. 어디 적당한 아파트라도 하나 형님 명의로 구해 드릴 테니까...... 나중에 그리 이사하시고, 제 회사로 출근을 하시면 지금보다는 안정되게 지낼 수 있을 겁니다.”
“아! 그, 그렇게 씩이나......”
“하하...... 아니, 그럼 제가 사기 쳐서 벌은 돈을 혼자 닦아 먹을 줄 아셨습니까? 공범들끼리 나누어야지요. 하하하......”
“아, 정말 고맙습니다. 제가 뭐든지 열심히 돕겠습니다.”
“네, 그러시죠. 그리고 지금 형수님이 제 사무실에 있지만, 따로 월급을 책정해 드리는 것도 우스운 일이니까 나중에 아파트로 전부 해결 보는 겁니다. 하하......”
“아, 아...... 그야 물론 저야 감지덕지한 말씀입니다. 하하......”
이렇게 영진 사장에게서 받은 위자료는 강희를 통하지 않고도 적절한 방법으로 미라의 오빠 송만호에게 전할 방법을 찾게 된다. 추후 이 사업이 끝난 뒤 송만호를 가구공장에 취직시키고, 그의 아내 최강희를 방배동의 주택에 파출부로 기거시킬 계획을 갖고 있었으니, 이제 지수와 김비서의 가족을 이사시키면서 그 빈집에 또 하나, 자신의 아방궁을 만들어 낼 계획인 모양이었다.
과거 조선조 태종임금인 이방원이 갖은 이유를 들어 정적 정도전을 제거하고 나서는 그렇게 정도전을 비난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가 생전에 추진하던 사업을 모두 이어받아 국가의 제일사업으로 삼았다는 것은 지금도 유명한 역사의 아이러니인데, 마치 지금의 기찬이 그런 셈이었다. 결국 역사는 이긴 자의 손에 의해 쓰이는 것, 기찬의 앞에 거칠 것은 없었다.
다시 발길을 돌려 천천히 자신의 사무실로 향하던 중 한 가게 앞에 멈추어 선다.
“음......”
한참동안 진열장을 바라보더니 이내 걸음을 옮겨 가게로 들어서고, 한참 후에야 꾸러미를 하나 들고 나온다. 자그마한 물건은 액자처럼 보여 그림이라도 한 장 구입한 모양이었다.
“여보세요?”
“으응?...... 마담?...... 아차! 세미씨. 하하......”
“흥!...... 금방 정정했으니까 봐 드리는 거예요.”
“아, 이것 참...... 철이 들자 곧 노망이라더니...... 세미씨하고 정분나자마자 이렇게 무섭게 굴어서야 어디 접근이나 하겠어요?”
“그래서 요즘 며칠 동안 가게에는 얼굴 한 번 안 비추시는 거예요?”
“에이...... 그럴 리가...... 바쁜 일이 있어서 그러지. 하하......”
“그러면 낮에 잠깐 집으로 와도 되잖아요? 열쇠까지 줬더니...... 보고 싶단 말이에요.”
“그래, 알았어. 곧 한 번 갈 테니까 좀 봐 줘.”
“반지 아직 그대로 끼고 있는 거죠? 불시에 확인할 거예요. 자국 보면 다 알 수 있어요.”
“으응?...... 아! 무, 물론이지. 하하하......아...... 당황스럽네......”
“호호호...... 알았어요. 끊어요.”
모처럼 카이로 마담 세미의 강짜에 행복하게 웃어볼 수 있었다. 그 감춘 속내가 모두 드러나고 나면 서로가 그늘진 모습에 위로를 주고받는 사이로 바뀌어 버린다. 서로에게 달리 원하는 것도 없지만, 그저 위로를 전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는 이렇게 그저 웃게 할 수 있는 힘이 서려 있는 모양이었다.
미림이의 학교 앞, 기찬은 점심시간에 맞추어 미림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수의 말을 듣고 나서 그냥 미루고 있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일이니 내심 답답하기로 보자면 결코 지수 못지않은 기찬이었다.
손에는 아까 구입한 액자가 들려있었고, 예쁜 수첩도 한 권 구입했는지 수첩의 페이지를 넘겨보고 이것저것 살펴보고 있었다.
“외삼촌......”
“으응, 미림이 나왔구나. 같이 밥 먹으러 갈까?”
“아니요. 별로......”
“그래?...... 뭐,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었어? 밥을 안 먹으면 어떻게 해? 우리 미림이는 날씬해서 다이어트 같은 건 안 해도 될 텐데...... 하하하......”
“......”
역시 미림이는 뭔가 어색했는지 기찬을 다시 낯설게 대하고, 기찬은 미림이의 모습에서 지수의 느낌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예감할 수 있었다.
“그럼...... 미림이 여기 좀 앉아 볼래? 외삼촌이 미림이 주려고 뭐를 하나 사왔는데......”
“뭔데요?......”
미림이가 기찬의 옆에 앉고, 기찬은 꾸러미를 풀어 미림이에게 전해준다.
“어, 어머!......”
그림을 본 미림이는 얼굴이 붉게 물들어 기찬을 바라보고는 고개를 숙이며 그림을 덮어 버린다. 액자 속의 그림은 늙은 남자가 젊은 여자의 풍만한 젖가슴을 빨고 있는 모습이었다. 마치 나이어린 미림이에게 성적 접근이라도 하겠다는 의지표현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포르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간밤에 엄마와 기찬의 성애장면을 직접 목격한 것은 아니었지만, 흔들리는 지프의 움직임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미림이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이제 이런 그림을 들고 와 자신에게 내미는 기찬의 의도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몰라 미림이는 기찬의 앞에 쩔쩔매고 있었다.
“외, 외삼촌......”
“미림아, 나는 네 외삼촌이야...... 이제부터 내 말을 잘 들어 봐. 미림이가 깜짝 놀라는 것도 이해할 수 있어. 그 그림은 보통 알고 있는 포르노 그림이 아니야. 나는 미림이가 이해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오늘 일부러 미림이를 만나러 왔고......”
“네, 네?......”
“그 그림은 중세...... 유럽에서 유명한 화가가 그린 그림이야. 젊은 여자가 늙은 남자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모습이고, 그런 비슷한 종류의 그림도 무척 많은 편이지. 그런 류의 그림을 ‘카리타스 로마나’ 라고 해서 따로 분류하는 이름이 생겼을 정도지.”
“......”
아직도 미림이는 기찬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가 없었고, 그저 귓가에는 바람 소리만이 들려와 치맛단만 매만지고 있었다. 이미 자신은 원조교제를 통해서 순결을 돈과 바꾸려는 마음도 먹었었지만, 상대는 엄마와 밀월을 즐기고 있는 남자였으니 어떻게 처신을 해야 좋은 일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미림아, 그 그림에 나오는 남자는 아버지라고 하고...... 그 여자는 딸이라고 하더라.”
점점 기찬의 이야기는 근친상간을 주제로 삼아가고 있는 듯해 미림이는 모종의 결심을 해야만 할 것 같은 압박감을 느끼기에 이른다.
“저...... 외삼촌......”
“더 들어 봐. 미림아...... 그 아버지는 이민족의 압제 하에서 감옥살이를 하다가 숨을 거둘 처지에 놓여있었고, 이제 죽음을 앞둔 아버지를 만나러 온 딸이 굶주린 채 마지막을 맞고 있는 아버지에게 자신의 젖을 물려주어 갈증을 면하게 하는 아름다운 그림이란 말이지.”
“네, 네?......”
“내가 왜 미림이에게 이런 말을 하는지...... 우리 미림이는 똑똑한 아이니까 알 수 있을 거야. 이미 미림이도 알고 있는 모양이지만, 상황이란 그렇게 보기에 따라서 포르노처럼 보일 수도 있고, 아름다운 성화로 평가 받을 수도 있는 거야.”
“......”
“엄마는 그 중 나중의 경우야. 처음에는 외삼촌도 나쁜 의도로 접근했지만, 지금은 정말 엄마를 사랑하고 있거든. 그렇다고 미림이의 행복을 깨 가면서 내가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야. 미림이의 엄마, 아빠는 항상 그 자리에 계실 거야. 미림이의 인생에 외삼촌이 추가로 나타난 것뿐이고...... 이젠 미림이에게 나도 가족이고 싶으니까 우리 가족이 모두 잘 살고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것이고......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알겠니?”
“네......”
미림이는 섣불리 대답을 하지 않은 것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자칫 잘못했으면 엄마의 남자에게 속내를 보이는 추한 모습을 보일 뻔 했으니 다시 얼굴이 달아오르고, 어느 순간,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 만큼 자란 자신이 대견해지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그럼...... 미림이도 엄마가 더 이상 불편해 하지 않도록...... 해 줄 수 있겠지? 그저 미림이는 옛날처럼 밝고 명랑한 딸이 되면 되는 건데...... 그런 일이 없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이미 일어나 버린 일이고, 엄마의 그런 결정이 없었다면 지금쯤 미림이 아빠는 교도소에 있거나, 미림이는 가족들과 헤어져서 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잖아?”
“네...... 그럴게요.”
“자, 그럼 이젠 툭툭 털고 밥 먹으러 갈까? 외삼촌도 배가 고픈데......”
“네...... 그 대신......”
“으응?...... 그래, 그 대신 뭐?......”
“외삼촌도 엄마한테 잘 해 주셔야 돼요. 비밀 잘 지키시고...... 아빠한테도 상처 주시면 안 되니까......”
“그래, 그것은 내가 약속할 게...... 우리 미림이도 크도록 외삼촌이 다 돌봐 줄 것이고...... 아니, 이젠 어느새 다 커 버린 모양이구나. 하하......”
“참, 엄마가 내가 눈치 차린 걸 알고 있어요?”
“으응, 그런 모양이던데...... 아! 그럼 미림이가 모르고 있더라고 말을 해 줄까? 그러면 되겠다. 그렇지?”
“네, 그래 주세요. 저는 그냥 모른 척 하고 있을 거니까......”
그렇게 미림이와의 밀약이라면 밀약이 이루어졌다. 원조교제 건으로 시작한 세 사람의 은밀한 비밀은 그렇게 또 하나의 사연을 더한 채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었다. 기찬은 지수와의 전화로 미림이가 모른 척 해 주길 원한다는 말을 함으로써 오히려 비밀로 해 달라는 말을 발설해 버린다. 서로가 알고 있음에도 모르는 척 내밀한 사연을 만들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기찬에게는 양보할 수 없는 즐거움인 모양이었다.
저녁 무렵 기찬은 한 아파트 앞에서 건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세요?”
“네, 이윤호씨 댁인가요?”
기찬은 미림이와 헤어져 사무실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저녁 무렵 미림이에게 원조교제를 사주했던 녀석의 집을 찾아온 것이었다. 기찬의 행보를 보아 이곳에서도 적잖은 돈을 뜯어 낼 수 있는 일일 테니 그것을 그냥 지나칠 리 없는 일이었다.
“지금 없는데...... 어머!”
“으응? 누나......”
“어머! 너...... 윤호하고 친구였니?”
“아니?...... 여기가 누나 집이었어? 그럼...... 이윤호는......”
“그래, 내 동생이야. 어머나...... 세상에...... 신기하다. 야...... 어서 들어와.”
기찬은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있었다. 학창시절 선배였고, 미림이가 다니는 학교의 선생님이기도 한 은숙이 이윤호의 누나였다니, 그 일이 어떻게 연결이 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비릿한 시선으로 은숙의 아래 위를 흩어본다.
“뭐야?...... 그럼 은숙이 누나도 그 일에 연계되어 있다는 거야?”
친누나가 교사로 재직하는 학교의 학생들을 동원하여 원조교제를 시켜왔다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 은숙도 연관이 있을 테니 속으로 무수한 생각들을 교차시키고 있는 기찬에게 은숙이 차를 권한다.
“내 동생하고는 어떻게 아니? 둘이 친구였어?”
오히려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물어오는 은숙이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집안이라 그런지 마치 산모들이 입는 옷처럼 펑퍼짐한 통 원피스를 입고 있는 모습이 더욱 그러하였다.
“아니? 누나는 아무리 집안이라고 그 옷이 그게 뭐야? 참......”
“아니?...... 얘가 정말...... 묻는 말에는 대답을 안 하고...... 내 동생은 어떻게 알고 있냐니까......”
할 수 없이 기찬은 신분증을 꺼내고, 온 이유를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은숙이 개입되어 있는 일이라면 그 단초를 바로잡아 가급적 이쯤에서 발을 빼도록 해 주고 싶은 마음이었던 모양이지만, 은숙은 들고 있던 잔을 떨어뜨릴 정도로 놀라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 기찬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어, 어......”
기찬은 황급히 주방에서 행주를 가져다가 쏟아진 커피를 훔쳐내고 있었다.
“어, 어떻게...... 그게 말이 되니? 윤호가...... 우리 애들을 어떻게...... 어머! 호, 혹시......”
은숙은 서둘러 방으로 들어가더니 커다란 수첩을 가지고 나와 펼쳐보기 시작한다.
“서, 설마......”
그것은 교사수첩이라고 적혀있었고, 펼쳐진 페이지에는 상담을 했던 기록이나 문제 학생들의 인적사항 따위가 기록되어 있었다. 어쩌면 윤호는 누나의 수첩을 열어 보다가 그 기록들을 봤을 수도 있는 일이니, 악용하려 했다면 충분히 가능했을 일이었다.
“음...... 어디...... 이리 줘 봐요.”
기찬은 은숙의 수첩을 뺏듯이 가져와 천천히 내용을 살피고는 옆으로 내려 둔다.
“누나, 이 수첩은 일단 내가 가지고 가야 되겠어.”
“어머! 아, 안 돼. 기찬아...... 제발...... 우리 윤호 잘못되면 어떻게 하니?”
“그래, 하여튼 좀 생각을 해 봅시다. 이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상황이 훨씬 심각한 지경까지 온 모양인데...... 가급적 누나 동생에게는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해 줄 테니까 너무 걱정은 하지 말고...... 일단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모르게 비밀리에 처리해 줄 테니까 우선 진정해.”
“......”
이미 은숙은 훌쩍이며 눈물을 찍어내고 있었고, 기찬은 그런 은숙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웃음을 짓고 있었다.
“후훗...... 역시 안경을 벗으니까 옛날 모습이 나오긴 나오네...... 확실히 뜯어고친 건 아닌 모양이야?”
“어머! 얘, 너는 지금 농담이 나오니? 나는 걱정이 돼서 죽겠는데...... 흐윽......”
“걱정도 팔자요? 아! 안 잡아간다는데..... 울긴 왜 울어?”
“저, 정말이지? 너...... 나하고 약속해.”
기찬은 어이없는 일이지만 웃으면서 은숙과 새끼손가락을 걸어준다.
“결혼 했다면서...... 남편은 어디 갔어? 아직 학교에서 안 온 거야?”
“으응...... 사립학교는 늘 그런 일이 잦아. 진급하려면 재단 눈치도 봐야 하니까 이것저것 신경 써야 하는 일도 많고......”
“아! 그도 그렇겠군. 그나저나 이 친구는 왜 안 들어 와? 누나가 전화를 한 번 해 보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현관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은숙은 득달같이 달려가 다짜고짜 윤호의 어깨며 등을 두들겨 패기 시작한다.
“아야, 아! 왜 그래? 짜증나게......”
은숙에게 거칠게 대들며 거실로 들어서던 윤호는 기찬을 발견하고는 그대로 굳어져 버린다.
“이리 와서 앉아.”
“......”
은숙은 기찬의 눈치를 살피며 윤호의 곁에 따라 앉는다.
“음...... 일단 누나는 자리를 좀...... 아니, 우리가 방으로 가는 게 낫겠군. 자...... 네 방이 어디냐?”
윤호는 기찬의 눈치를 살피며 앞장을 서고, 은숙은 기찬의 팔을 붙잡고 매달린다.
“기찬아, 때리진 않을 거지?”
“참 나...... 누나는 걱정 말고 기다려.”
“그, 그래......”
방으로 들어선 윤호는 기찬과 누나가 잘 아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이 의아했지만, 차마 말을 붙여 물어 볼 수도 없었다.
윤호는 이미 어쩔 수 없는 일이니 기찬의 심문에 순순히 대답을 이어가고, 짐작한 대로 아이들의 명단 따위는 누나 은숙의 수첩에 적혀있는 상담내용을 훔쳐보았던 모양이었다.
“미림이는 어떻게 끌어들인 거야?”
“그 중에 수혜라는 애가 있어요. 안수혜라고...... 그 애가 가장 적극적으로 하는 애라서......”
“너...... 이젠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고?......”
윤호는 기찬의 이 말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눈빛을 빛낸다.
“저, 절대로 이런 일 없을 겁니다. 네, 정말입니다. 믿어 주세요.”
“좋아, 믿어주지. 그간 네가 확보한 아이들 명단 전부 다 추려 봐. 네가 과연 마음을 고쳐먹었는지는 그걸 보고 판단해 주지.”
“네, 네......”
윤호는 냉큼 컴퓨터에 매달려 입력시켜 둔 화면을 인쇄해서 기찬에게 내민다. 이름과 전화번호, 집 주소, 이메일 주소며 자주 가는 곳까지 상세하게 메모를 해 관리를 하고 있었다.
“너...... 이 자식, 나한테 걸려놓고도 아직까지 이 명단을 컴퓨터 안에 넣어두고 있었다는 거야? 다시는 이 녀석들에게 연락하지 않을 자신 있어?”
“네...... 그러겠습니다.”
“그리고...... 너, 경찰서에 같이 왔던 조유정이하고는 무슨 사이냐?”
“그냥 여자 친구였습니다. 하지만...... 유정이는 이런 거 모르고 있습니다. 이 일하고는 상관없어요.”
“꼴에...... 기가 막혀서...... 좋다. 네 누나가 내 학교 선배라서 너, 세상 두 번 사는 줄만 알아라. 이미 한 번 말했지만, 앞으로는 유정이든...... 여기 명단에 적혀있는 녀석들이든 단 한 번만이라도 연락을 하면 너는 그 날로 흙냄새 맡게 되는 거야. 알았어?”
“네, 네......”
“보아하니 너하고 내가 보통 인연은 아닌 모양이다. 어떻게 여자 세 사람을 너하고 내가 공통으로 알 수가 있냐? 네 누나도, 유정이도, 그리고 미림이까지......”
“저...... 미림이라는 애는 사실 잘 몰라요. 수혜라는 애가 알려줘서 그냥 ...... 우욱......”
결국 미림이 얘기가 나올 때, 발길질을 당하고 만다. 우당탕 소리에 은숙이 뛰어 들어와 기찬을 잡고 매달리고, 윤호는 구석에서 웅크린 채 신음을 흘리며 기찬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자, 한 잔 마셔...... 누나, 예전에는 제법 마셨잖아?”
“그러니까...... 그 날도 결국 그런 일로 학교에 왔던 거구나? 정말 미안해. 기찬아. 내가 대신 사과할게.”
은숙이와 둘만의 술자리를 갖게 되니 옛날의 추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난다. 지금의 기찬으로 보자면 십 년이 넘는 나이차의 여자들도 두루 섭렵하고 있는 입장이지만, 그 무렵 은숙은 따르던 선배들에게 치어 정말 노랫말처럼 가까이 할 수 없는 당신이었다. 은근한 추억에 사로잡힌 기찬은 은숙을 건드려 보기로 작정한다. 지금의 이런 분위기라면 기찬에겐 아주 익숙한 것이었으니 그냥 넘어갈 리가 없는 일이다. 돈이나 대강 뜯어내려 했던 것이 은숙을 만남으로 해서 급물살을 타는 셈이다.
“그리고, 누나도 누나 학생들이지만, 일단 수사과정이 끝날 때까지는 수사에 방해가 되는 어떤 접촉도 해서는 안 돼. 뭐...... 애들이 눈치 차리도록 힌트를 준다든지......”
“아유, 그럼..... 물론이지.”
“그 중에 윤호로 인해서 어떤 피해를 입은 애들이 있다면, 그건 윤호도 피해 갈 수 없을 거야. 그 땐 누나가 아니라...... 누나 할아버지가 오셔도 안 돼.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어머! 기찬아...... 너, 아까는 봐준다고 했잖니? 으응?”
“그거야 단지 내 조카 문제니까 그랬지. 윤호가 내 조카한테 한 걸 보면, 다른 피해자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거 아냐? 조사를 하다 보면 피해자 집에서도 알게 되고, 결국 다 드러나는 걸 그때 가서도 모른 척 해줄 수는 없는 일이지.”
“어머! 그러면 어떻게 해? 으응? 너, 아까는 비밀로 수사를 할 수도 있다고 그랬잖아? 으응?”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 나만의 장소가 따로 있긴 하지만...... 그렇게 되면 누나가 일일이 학생들을 비밀리에 데리고 와야 할지도 모르는데......”
“거기가 어딘데...... 그러면 내가 데려다 줄게? 응? 나를 봐서 좀 그렇게 해 줘. 기찬아.”
“누나, 그러지 말고 아주 이 기회에 동생 버르장머리를 고치는 게 낫지 않겠어?
“아유, 기찬아...... 왜 그러니? 제발......”
기찬은 자리를 털고 일어서고, 은숙은 기찬의 행동에 당황해 얼굴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물 흐르듯 너무 쉽게 받아들이는 기찬의 모습이 이상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뭐해? 그럼 가야지. 일어서.”
“으응, 그래, 고마워. 가자.”
몹시 당황한 은숙은 기찬과 함께 차로 이동해 삼각지에 도착해서 자신이 들어가는 건물이 여관이라는 것도 깊이 의식하지 못한 채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는다. 신분증을 꺼내 비추자 자동으로 안내하는 엘리베이터라는 것이 순진한 은숙이에겐 말 그대로 첩보영화에서나 봤을 법한 일이었을 것이니 아무런 의심도 없이 기찬을 따라 몸을 움직인다.
“자, 들어와.”
“으응...... 여기 혹시 여관 아니야?”
“으응, 맞아. 나는 여기를 사용해. 방 두 개를 사용하고 있지.”
“아...... 그렇구나.”
기찬은 침대에 앉아 담배를 피워 물곤 은숙이를 바라본다. 이제 이 순간은 학창시절의 선배가 아니라 요리사가 우리 안에 가둬 둔 식재료일 뿐이었다.
“후훗...... 참...... 누나는 정말 변한 게 없는 것 같단 말이야.”
“그게 무슨 소리야?”
“허허...... 여기가 여관인 줄도 모르고 그렇게 순순히 따라오니까 말이야.”
“어, 어머! 얘, 농담도 그런 소리 하지 마. 무섭게......”
기찬은 걸터앉은 침대에서 일어서 셔츠의 단추를 풀기 시작한다.
“나, 농담 아니야. 기왕 누나를 만났으니까 이런 흥정도 하는 거야. 누나가 알아서 해. 나가는 길은 방문 열고 나가서 엘리베이터만 타면 자동으로 내려가니까......”
기찬은 셔츠를 벗어 버리고 바지도 벗기 시작한다. 은숙은 화들짝 놀라 등을 돌리지만 차마 문밖으로 나가지는 않고 있었다. 기찬의 말은 힘이 실려 있어, 농담이 아니라는 느낌을 전하기에 충분했고, 그 결정여부에 따라 동생 윤호의 운명이 결정지어진다는 최후통첩이기 때문이었다.
동생이 저지른 일은 은숙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 그 처벌이라는 것도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의 그늘에 데리고 있는 동생을 그렇게 만들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 따라서 기찬의 요구를 거절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여느 때처럼 기찬은 잔뜩 거품을 일으켜 마사지로 단련시킨 물건을 흔들어 대며 욕실을 빠져 나오고, 침대에 대자로 드러누워 은숙을 바라본다. 은숙은 여전히 등을 돌린 채 벽을 바라보고 앉아있었다.
“누나도 얼른 씻어. 아니면 그냥 오든지...... 어서 돌아가 봐야 하잖아. 매형이 벌써 와 있을지도 모르는데......”
짓궂은 기찬은 굳이 은숙의 남편을 매형이라고 불러 은숙을 자극한다. 기찬의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은숙의 어깨가 움찔거린 것으로 짐작이 가능한 일이었다.
은숙은 하는 수 없이 몸을 일으키고, 욕실로 향하는 그녀의 옆모습은 처량하였다. 얼굴이 불빛에 퍼지는 것을 보아 눈물이 번진 듯 소리 죽여 울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한편으론 미안한 감정이 생기면서도 알 수 없는 쾌감이 기찬을 자극해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홀린 듯 중얼거린다.
“뭐야?...... 울고 있었던 거야?...... 나 이런...... 정말 천연기념물이로구먼.”
은숙은 욕실을 나와서도 한동안 침대로 오질 못하고 문 앞에 서서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기찬은 일어서서 은숙을 데리고 침대로 돌아온다. 몸을 감고 있던 타올을 풀어 눈물을 닦아주니 비로소 고개를 들어 기찬의 눈을 바라본다.
“그러면 이제 내 동생은 아무 일도 없는 거지? 약속해 줘.”
“그럼...... 물론이지. 이렇게 누나가 협조를 하는데......”
부드러운 가슴을 움켜쥐고 은숙의 얼굴을 바라본다. 학창시절의 선배라는 생각에, 역시 이 또한 금지된 영역일 테니 차츰 차츰 접근해 무너뜨려가는 그 감흥이 새롭기만 하다. 기찬은 여느 때와는 다르게 오랜 애무 끝에 손을 뻗어 사타구니를 공략한다. 쾌감을 끌어 올려 주기 보다는 아픔을 느낄 정도의 과격한 손놀림으로, 꽃잎을 헤치고 드나드는 그 손길에 은숙의 눈은 찢어질 듯 치켜떠져 고통을 호소할 뿐, 벌린 입으로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있었다.
“하윽......”
마치 빠른 손놀림만으로 절정을 보여주겠다는 각오라도 한 것인지, 은숙의 벌어진 두 무릎 사이를 점령해 한 손으로는 아랫배를 누른 채 돌기를 자극하고, 다른 한 손은 여전히 빠른 속도로 은숙의 몸을 관통하고 있었다.
“으흑...... 기...... 찬...... 흐윽...... 꾸르륵......”
은숙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힐 무렵 그녀의 샘물이 함께 터져 버리고 만다. 몹시 부끄러운 일을 당하고 있는 은숙은 낯 설은 그 자극을 견디지 못해 그만 방광을 열어 버리고, 그 뜨거운 오줌줄기는 드나드는 기찬의 팔을 따라 어깨까지 튀어 오르고 있었다.
“으흑...... 난 몰라...... 미, 미안해......”
이제는 통증도 사라지고 방광이 비어버려 요의도 모두 사라졌을 즈음 자신을 달뜨게 하는 남자 앞에서 흥분에 겨워 오줌을 싸 버렸다는 것을 체감하는 은숙은 그 수치스러움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상대에게 복종하는 것뿐임을 체득하게 된다.
“내가 누구야?”
“으응?...... 하악...... 기찬......”
뜬금없이 손동작을 멈춘 채 기찬은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고, 흥분에 겨워 대답하는 은숙에게 고개를 가로저어 틀린 답임을 시사한다.
“여보라고 해 봐...... 누나......”
“흐윽...... 싫어...... 안돼.”
다시 빠른 속도로 드나드는 손길은 무자비하였던 만큼, 이 순간 남편을 잊게 하기에 충분했으며, 은숙의 고개는 뒤로 꺾여 오래지 않아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자신이 기찬의 여자임을 고백하게 만들어 버린다.
“으으으으윽...... 여, 여...... 보...... 제발......”
“후욱, 후욱......”
기찬도 힘이 들었는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손길을 멈추고 비로소 은숙의 입술을 찾아 목을 축인다.
“흐으읍...... 으흥...... 쭈우웁......”
사이사이 숨을 몰아쉬며 기찬에게 살을 내주는 은숙은 어느새 요녀와도 같은 몸짓으로 기찬을 휘감아 매달리게 된다.
“으으흑...... 여보......”
어쩌다가 일이 여기까지 온 것인지 알 수없는 노릇이었다. 마치 무언가에 내몰리는 듯 멈출 수 없었던 그것들이 지금 지수를 불안에 빠지게 한다.
술에 약한 남편을 흔들어 깨워 가까스로 출근시키고, 아이의 도시락을 챙겨 등교를 시키는 것은 언제나처럼 분주한 지수의 아침 일과였다. 다른 날과 크게 다를 것도 없는 일상일 뿐인데 공연한 불안감이 지수를 짓누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지금 이 시간 함께 있어선 안 될 사람이 집에 남아있다는 것뿐이지만, 그것은 남편도 익히 알고 있는 일이고 딸 미림이 역시 알고 있는 일이니 달리 문제 삼을 만한 일은 아님에도 지수는 무언가 실타래가 엉켜 있는 듯 정리되지 않는 복잡한 심경이 되어 소파에 몸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모두 나갔어요?”
“아! 일어나셨어요? 네...... 조금 전에 모두...... 전, 오늘도 종로에 나가서 가게를 알아본다고 했어요.”
기찬이 이 층에서 내려와 욕실로 들어서고, 지수는 기찬을 위한 식탁을 꾸민다. 앞치마를 두른 모습은 정갈하기만 하고, 가정적인 그녀를 잘 드러내어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희한하단 말이야......”
“네?...... 뭐가요?”
“누님 말이야. 서구적인 마스크에...... 늘씬한 팔등신 미녀가 집에서 보면 또 그런대로 아줌마처럼 보이기도 해서 말이야. 하하하......”
“어머! 그럼 제가 아줌마지...... 뭐 아가씨라고 우긴 적 있었어요?”
“하하...... 그런 소리가 아니라, 누님은 어떤 분위기도 잘 소화해 내는 미인이라는 뜻이지. 오죽하면 내가 누님한테 홀 매니저를 맡기려고 했겠어......”
기찬은 수건으로 머리를 털어내며 식탁에 걸터앉고, 그런 기찬 앞에 지수가 마주앉으며 걱정스런 얼굴로 바라본다.
“괜한 비행기 태우지 마시고요. 저...... 걱정되는 일이 있어요.”
“뭔데?......”
“우리 미림이 말이에요.”
“으응, 미림이가 왜?...... 지난 번 그 일은 이제 모두 해결됐다니까...... 누님은 그냥 나한테 맡겨두고 모른 척해요.”
“아니...... 그 일이 아니라...... 미림이가 어제...... 우리 일을 알고 있는 것 같았어요.”
“으응?...... 에이, 그럴 리가...... 공연히 누님이 예민해져서 그래. 하하하...... 알았어. 다음부터는 식구들 있는데서 안 그럴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아니에요. 뭔가 석연치 않은 일이 하나 둘이 아니라니까요. 아침이면 항상 매달려서 어리광을 부리던 애가 오늘은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았는데...... 그러고 보니 어젯밤에 자는 모습도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던 게 그냥 자는 척 하는 것 같았어요...... 아유,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아요?”
기찬도 지수의 말을 들어보니 그녀가 공연한 걱정을 하는 것 같지만은 않은 느낌이 들어 다소의 신경이 쓰이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거니와 설혹 그렇다고 하더라도 미림이가 끝내 모른 척을 했다면 나름의 이유가 있을 테니 그저 기다려 보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모녀간에 그런 얘기를 할 수도 없는 일이잖아? 누님도 그저 모른 척 하고 있어요. 내가 눈치를 봐서 미림이가 알고 있는 것 같으면 적절하게 대처를 할 테니까......”
“어, 어떻게 하시게요? 설마 미림이한테 그 얘기를 하신다는......”
“허 참, 내가 무슨 바보예요? 하여튼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 말아요. 요즘 애들...... 보고 자라는 게 많아서 어지간한 일에는 충격도 받지 않아요. 다만 그게 남의 일이 아니라는 게 당황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미림이는 제법 조숙해서 그런 상황을 잘 이해해 줄지도 모르잖아요? 혹시라도 알고 있는 눈치라면 더 이상 모녀간에 불편하지 않도록 조치는 취해 둬야지......”
“그러니까 어떻게 하시려고...... 말 좀 해줘요......”
“누님도 참...... 할 수 없잖아. 누님을 잔 다르크로 만들어야지. 아빠가 저지른 실수에 엄마가 나서서 진화를 한 것으로...... 나도 처음엔 한 때 나쁜 마음을 먹었지만, 지금은 그렇게 착한 엄마를 정말 좋아하고 있다...... 그래서 미림이에겐 정말 좋은 외삼촌이 되어주고 싶다...... 뭐, 이렇게 말이야.”
“......”
“미림이가 똑똑한 아이니까 잘 적응해 올지도 몰라. 이미 알고 있는 눈치라면 그렇게라도 물꼬를 터주는 게 영영 모른 척 하는 것보다는 나은 결과를 가져올 거야. 누님은 끝내 모른 척 하고만 있어. 나하고 미림이하고 해결을 볼 테니까......”
“그, 그래도 제 느낌뿐일지도 모르니까 혹시 모르는 눈치 같으면 절대로 말을 해선 안돼요.”
“알았어요.”
소공동의 사무실은 아침부터 대만원이었다. 어느덧 한기주는 강당에 사람들을 앉혀두고 신용불량자들을 대거 솎아내느라 고생을 하고 있었다. 신용불량자들에게는 금융기관을 통한 어떤 형태의 대출도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니 그것은 직장인이든 무직자든 상관없는 일이었다.
“차 드세요. 사장님.”
한기주의 아내 은진은 기찬에게 커피를 끓여 내고, 미라의 올케 강희는 전날의 영업 자료를 테이블에 준비해 올리고 있었다.
“소영씨는 뭐 하고 있지?”
“아! 네...... 소영씨 남편하고 기주씨 도와서 강당에서 일하고 있어요.”
“공장 직원들은 내보냈는지 모르겠네......”
“제가 가서 불러 올까요?”
“아니, 내 버려 둬. 나중에...... 중요한 일도 아닌데...... 모두 그만두기로 한 모양이지.”
기찬은 메모지에 고영준 의원의 후원회 계좌번호를 적어주고 송금을 해 줄 것을 지시한다.
“자, 은진씨...... 여기에 내 이름으로 천만 원만 송금해 주고, 확인하라고 전화를 해 줘. 나는 저 쪽 사무실에 가서 분위기나 살피고 있을 테니까......”
“네, 알았습니다.”
사채업자 조상환의 사무실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한산하기만 하였고, 모처럼 기찬이 방문을 하자 그 환영이 대단했다. 어린놈이 횡재를 노리고 멋모르고 뛰어들었다는 생각은 온 데 간 데 없었고, 칙사를 모시듯 대접이 융숭하기만 하다.
조상환의 입장에서야 그도 그럴 것이 기찬이 올리는 대출은 그대로 자신의 수입과 직결이 되는 것이니 이것저것 잡다한 세금 따위가 빠져나간다고 해도 대출총액에서 약 팔 퍼센트의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아! 강사장님, 대단하십니다. 그 회사에 높은 분을 아신다더니......”
“하하...... 네, 건축회사가 돼서 그런지...... 마침 사원주택을 좋은 조건으로 풀어서 그 덕을 저도 좀 보고 있는 셈입니다. 그나저나 저에게도 에이전시를 맡아보라는 연락이 여러 곳에서 오던데...... 도와주신 조사장님 생각을 하면 선뜻 응할 수도 없는 일이고......”
조상환의 거래코드를 사용하지 않고 직접 금융기관과 모집인 계약을 맺어 거래코드를 딸 수도 있다는 선전포고를 흘린 셈이었다. 기찬의 대출 총액이 하루에 일억 원을 호가한다면 사채업자 조상환의 입장에서는 약 팔백만 원의 순 수입을 거저 올리는 것이었으니, 그것은 대단한 수입이었고, 그 금송아지가 지금 집을 나갈지도 모른다는 통보를 받은 셈인데,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 이런...... 어느 자식들이...... 강사장님, 그거 그렇게 만만한 거 아닙니다. 요즘 허위자료가 하도 많아서 혹시 대출서류 하나라도 잘못 처리되면 그거 전부 다 추적해야 하고, 감당해 내야 하는 일인데...... 조금 더 익숙해질 때까지는 두고 보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저...... 기관에서 나오는 수수료 때문에 그러시는 거라면 제가 제 몫을 조금 떼어 드릴 테니까...... 저는 그저 오 퍼센트 정도만 보겠습니다. 대출 올리시는 총액에서 삼 퍼센트는 바로 다음 날 다시 환입을 시켜 드리겠습니다. 나머지는 세금도 내야 되고...... 또 사고 부담도 있으니......”
위조서류로 인한 대출이야 지금 기찬이 전문으로 하고 있으니 그 폐해에 대해 모를 일도 아니었다.
“아! 하하...... 뭐, 그렇게까지...... 그러시면 좋습니다. 저도 언제까지 이렇게 실적을 올릴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저도 복잡한 것은 딱 질색이라서......”
사채업자 조상환의 판단은 빨랐다. 한두 개 회사를 통틀어서 대출을 따 낸다고 하더라도 결국 그 자원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것일 테고, 언젠가는 그 씨가 말라버릴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바닥이 어디까지인지를 논할 시점이 아니었다. 적은 돈에 연연하다가 큰 물고기를 놓칠 수 있는 일이니 버릴 때 버리더라도 아직까지는 황금을 낳는 거위인 기찬을 붙잡아야만 할 일이었다.
지금 같은 추세로만 대출을 일으키게 된다면 회사 규모에 따라 다르겠지만 길게 잡아 삼사 개월은 유지할 수 있을 테니 그 예상되는 수익은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이 사무실에서 인상을 구기고 앉아있는 떨거지들 한 차를 갖다 줘도 기찬의 가치에 견줄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기찬은 기찬대로 속셈이 따로 있었다. 지금 그에게서 대출을 받아가는 사람들은 전부 무직자로서 갚을 수 없는 빚을 내고 있는 입장이었고, 결국 금융사고로 이어질 것이 분명한 일이었다. 그 사고가 일어나는 시점이라고 할 것 같으면 최초 대출을 받아 간 사람이 첫 회 이자를 납입해야 하는 시점이 될 것이니 그 이후로는 줄줄이 사고가 발생하게 될 것이고, 이것이 의도적인 사고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릴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기찬이 이 일을 한 달 정도 벌여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만약 그 양에 있어 기대에 차질 않는다면 대출을 받아 간 사람들의 첫 회 납입금을 대신 내 주더라도 사무실을 운영하는 기간을 한 달 연장할 수도 있는 일이었고, 그것은 더 커다란 수익을 보장해 주는 일이 될 것이었다.
그 끝이 한 달 뒤가 될지 두 달 뒤가 될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기찬은 정한 기간 안에 최대의 효과를 누려야 했고, 그 사이라도 더 뽑아낼 수 있는 것은 사채업자 조상환에게 떨어질 수수료였으니, 간단한 아침 나들이 한 번으로 수억 원, 혹은 십 수억 원이 오고 갈 수도 있는 약속을 커피 한 잔 마시는 시간에 따내 버린다.
“자, 그럼...... 그 돈은 이 계좌번호로 좀 송금을 해 주십시오.”
“네, 그렇게 하지요. 매일 송금을 해 드릴 테니까 강사장님은 그저 대출에만 신경 쓰십시오. 하하하......”
“그럼...... 이미 지나간 것도 소급처리를 해 주시겠지요?”
“아! 네, 네...... 그렇게 해 드리겠습니다. 어제 것 까지는 지금 당장 입금해 드리겠습니다.
기찬의 집요한 공격에 조상환은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장부를 뒤적이고, 기찬은 담배를 꺼내 물어 승자의 여유를 만끽한다.
계약서 따위는 피차간에 필요 없는 일이었다. 조상환이야 버릴 때가 되면 기찬을 버릴 것이니 계약서 따위가 짐스러웠을 것이고, 기찬 역시 약속에 있어 필적이나 도장 따위는 부담스러운 일이니 그저 갈겨 쓴 계좌번호만 넘길 뿐, 계약서 얘기는 꺼내지도 않는다.
서로가 계약서 따위는 잊어버린 것처럼 신사협정이 이루어지고, 시커먼 속을 감춘 채 겉으로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하기만 하였다.
“여보세요?”
“으응?...... 금주 누님?......”
마침 금주로부터 전화가 걸려와 자연스레 조상환의 사채 사무실을 빠져 나온다. 기찬의 지시를 받은 은진이 빠르게 송금 처리를 했는지 인사치레를 하기 위한 모양이었다.
“어머?...... 무조건 누님으로 몰아가시는 거예요?”
“아! 하하하...... 우리 지수 누님 친구니까 금주씨도 누님 맞잖아요?”
“치...... 그리고 금방 전화 왔던데, 천만 원이나 보냈다면서요?”
“음...... 나름대로 무리했거든요. 가구공장 목수 노릇 해서 버는 돈 치고는 적은 거 아니에요.”
“어머! 누가 뭐래요? 호호호...... 고마워요. 나중에 잊지 않고 인사할게요.”
“아! 기대가 몹시 됩니다. 하하하...... 정치헌금은 정치헌금이고, 언제 누님에게도 따로 선물 하나 해야 할 텐데......”
“어머! 저한테요? 그랬다가 지수한테 혼나면 어쩌시려고......”
“후훗...... 그래야 누님하고 나, 우리 두 사람 비밀이 만들어질 거 아닙니까?”
“어머나? 호호호...... 알았어요. 나중에 한 번 만나요.”
전화를 접어 넣는 기찬의 뒤로 미라의 오빠 송만호가 따라 나와 너스레를 떨어 댄다.
“아! 참...... 대단하십니다. 하하......”
“아, 네...... 형님, 요즘 지내시기는 어떻습니까?”
“뭐, 여전하지요. 그나저나 천하의 조상환이 같은 놈도 벗겨 먹을 생각을 하셨으니 정말 기가 막히는 일입니다. 하하하......”
“다 자기 욕심에 눈이 어두워서 볼 걸 못 보는 겁니다. 하하...... 그나저나 형님도 조만간에 이사를 하실 생각을 하십시오.”
“이, 이사요?”
“네, 제가 이 일을 시작했던 것도 결국 미라 때문인데...... 형님 형편이 자꾸 나아져야 미라도 좋아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독산동에 조그만 가구회사도 하나 운영하고 있습니다. 어디 적당한 아파트라도 하나 형님 명의로 구해 드릴 테니까...... 나중에 그리 이사하시고, 제 회사로 출근을 하시면 지금보다는 안정되게 지낼 수 있을 겁니다.”
“아! 그, 그렇게 씩이나......”
“하하...... 아니, 그럼 제가 사기 쳐서 벌은 돈을 혼자 닦아 먹을 줄 아셨습니까? 공범들끼리 나누어야지요. 하하하......”
“아, 정말 고맙습니다. 제가 뭐든지 열심히 돕겠습니다.”
“네, 그러시죠. 그리고 지금 형수님이 제 사무실에 있지만, 따로 월급을 책정해 드리는 것도 우스운 일이니까 나중에 아파트로 전부 해결 보는 겁니다. 하하......”
“아, 아...... 그야 물론 저야 감지덕지한 말씀입니다. 하하......”
이렇게 영진 사장에게서 받은 위자료는 강희를 통하지 않고도 적절한 방법으로 미라의 오빠 송만호에게 전할 방법을 찾게 된다. 추후 이 사업이 끝난 뒤 송만호를 가구공장에 취직시키고, 그의 아내 최강희를 방배동의 주택에 파출부로 기거시킬 계획을 갖고 있었으니, 이제 지수와 김비서의 가족을 이사시키면서 그 빈집에 또 하나, 자신의 아방궁을 만들어 낼 계획인 모양이었다.
과거 조선조 태종임금인 이방원이 갖은 이유를 들어 정적 정도전을 제거하고 나서는 그렇게 정도전을 비난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가 생전에 추진하던 사업을 모두 이어받아 국가의 제일사업으로 삼았다는 것은 지금도 유명한 역사의 아이러니인데, 마치 지금의 기찬이 그런 셈이었다. 결국 역사는 이긴 자의 손에 의해 쓰이는 것, 기찬의 앞에 거칠 것은 없었다.
다시 발길을 돌려 천천히 자신의 사무실로 향하던 중 한 가게 앞에 멈추어 선다.
“음......”
한참동안 진열장을 바라보더니 이내 걸음을 옮겨 가게로 들어서고, 한참 후에야 꾸러미를 하나 들고 나온다. 자그마한 물건은 액자처럼 보여 그림이라도 한 장 구입한 모양이었다.
“여보세요?”
“으응?...... 마담?...... 아차! 세미씨. 하하......”
“흥!...... 금방 정정했으니까 봐 드리는 거예요.”
“아, 이것 참...... 철이 들자 곧 노망이라더니...... 세미씨하고 정분나자마자 이렇게 무섭게 굴어서야 어디 접근이나 하겠어요?”
“그래서 요즘 며칠 동안 가게에는 얼굴 한 번 안 비추시는 거예요?”
“에이...... 그럴 리가...... 바쁜 일이 있어서 그러지. 하하......”
“그러면 낮에 잠깐 집으로 와도 되잖아요? 열쇠까지 줬더니...... 보고 싶단 말이에요.”
“그래, 알았어. 곧 한 번 갈 테니까 좀 봐 줘.”
“반지 아직 그대로 끼고 있는 거죠? 불시에 확인할 거예요. 자국 보면 다 알 수 있어요.”
“으응?...... 아! 무, 물론이지. 하하하......아...... 당황스럽네......”
“호호호...... 알았어요. 끊어요.”
모처럼 카이로 마담 세미의 강짜에 행복하게 웃어볼 수 있었다. 그 감춘 속내가 모두 드러나고 나면 서로가 그늘진 모습에 위로를 주고받는 사이로 바뀌어 버린다. 서로에게 달리 원하는 것도 없지만, 그저 위로를 전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는 이렇게 그저 웃게 할 수 있는 힘이 서려 있는 모양이었다.
미림이의 학교 앞, 기찬은 점심시간에 맞추어 미림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수의 말을 듣고 나서 그냥 미루고 있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일이니 내심 답답하기로 보자면 결코 지수 못지않은 기찬이었다.
손에는 아까 구입한 액자가 들려있었고, 예쁜 수첩도 한 권 구입했는지 수첩의 페이지를 넘겨보고 이것저것 살펴보고 있었다.
“외삼촌......”
“으응, 미림이 나왔구나. 같이 밥 먹으러 갈까?”
“아니요. 별로......”
“그래?...... 뭐,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었어? 밥을 안 먹으면 어떻게 해? 우리 미림이는 날씬해서 다이어트 같은 건 안 해도 될 텐데...... 하하하......”
“......”
역시 미림이는 뭔가 어색했는지 기찬을 다시 낯설게 대하고, 기찬은 미림이의 모습에서 지수의 느낌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예감할 수 있었다.
“그럼...... 미림이 여기 좀 앉아 볼래? 외삼촌이 미림이 주려고 뭐를 하나 사왔는데......”
“뭔데요?......”
미림이가 기찬의 옆에 앉고, 기찬은 꾸러미를 풀어 미림이에게 전해준다.
“어, 어머!......”
그림을 본 미림이는 얼굴이 붉게 물들어 기찬을 바라보고는 고개를 숙이며 그림을 덮어 버린다. 액자 속의 그림은 늙은 남자가 젊은 여자의 풍만한 젖가슴을 빨고 있는 모습이었다. 마치 나이어린 미림이에게 성적 접근이라도 하겠다는 의지표현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포르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간밤에 엄마와 기찬의 성애장면을 직접 목격한 것은 아니었지만, 흔들리는 지프의 움직임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미림이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이제 이런 그림을 들고 와 자신에게 내미는 기찬의 의도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몰라 미림이는 기찬의 앞에 쩔쩔매고 있었다.
“외, 외삼촌......”
“미림아, 나는 네 외삼촌이야...... 이제부터 내 말을 잘 들어 봐. 미림이가 깜짝 놀라는 것도 이해할 수 있어. 그 그림은 보통 알고 있는 포르노 그림이 아니야. 나는 미림이가 이해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오늘 일부러 미림이를 만나러 왔고......”
“네, 네?......”
“그 그림은 중세...... 유럽에서 유명한 화가가 그린 그림이야. 젊은 여자가 늙은 남자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모습이고, 그런 비슷한 종류의 그림도 무척 많은 편이지. 그런 류의 그림을 ‘카리타스 로마나’ 라고 해서 따로 분류하는 이름이 생겼을 정도지.”
“......”
아직도 미림이는 기찬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가 없었고, 그저 귓가에는 바람 소리만이 들려와 치맛단만 매만지고 있었다. 이미 자신은 원조교제를 통해서 순결을 돈과 바꾸려는 마음도 먹었었지만, 상대는 엄마와 밀월을 즐기고 있는 남자였으니 어떻게 처신을 해야 좋은 일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미림아, 그 그림에 나오는 남자는 아버지라고 하고...... 그 여자는 딸이라고 하더라.”
점점 기찬의 이야기는 근친상간을 주제로 삼아가고 있는 듯해 미림이는 모종의 결심을 해야만 할 것 같은 압박감을 느끼기에 이른다.
“저...... 외삼촌......”
“더 들어 봐. 미림아...... 그 아버지는 이민족의 압제 하에서 감옥살이를 하다가 숨을 거둘 처지에 놓여있었고, 이제 죽음을 앞둔 아버지를 만나러 온 딸이 굶주린 채 마지막을 맞고 있는 아버지에게 자신의 젖을 물려주어 갈증을 면하게 하는 아름다운 그림이란 말이지.”
“네, 네?......”
“내가 왜 미림이에게 이런 말을 하는지...... 우리 미림이는 똑똑한 아이니까 알 수 있을 거야. 이미 미림이도 알고 있는 모양이지만, 상황이란 그렇게 보기에 따라서 포르노처럼 보일 수도 있고, 아름다운 성화로 평가 받을 수도 있는 거야.”
“......”
“엄마는 그 중 나중의 경우야. 처음에는 외삼촌도 나쁜 의도로 접근했지만, 지금은 정말 엄마를 사랑하고 있거든. 그렇다고 미림이의 행복을 깨 가면서 내가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야. 미림이의 엄마, 아빠는 항상 그 자리에 계실 거야. 미림이의 인생에 외삼촌이 추가로 나타난 것뿐이고...... 이젠 미림이에게 나도 가족이고 싶으니까 우리 가족이 모두 잘 살고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것이고......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알겠니?”
“네......”
미림이는 섣불리 대답을 하지 않은 것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자칫 잘못했으면 엄마의 남자에게 속내를 보이는 추한 모습을 보일 뻔 했으니 다시 얼굴이 달아오르고, 어느 순간,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 만큼 자란 자신이 대견해지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그럼...... 미림이도 엄마가 더 이상 불편해 하지 않도록...... 해 줄 수 있겠지? 그저 미림이는 옛날처럼 밝고 명랑한 딸이 되면 되는 건데...... 그런 일이 없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이미 일어나 버린 일이고, 엄마의 그런 결정이 없었다면 지금쯤 미림이 아빠는 교도소에 있거나, 미림이는 가족들과 헤어져서 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잖아?”
“네...... 그럴게요.”
“자, 그럼 이젠 툭툭 털고 밥 먹으러 갈까? 외삼촌도 배가 고픈데......”
“네...... 그 대신......”
“으응?...... 그래, 그 대신 뭐?......”
“외삼촌도 엄마한테 잘 해 주셔야 돼요. 비밀 잘 지키시고...... 아빠한테도 상처 주시면 안 되니까......”
“그래, 그것은 내가 약속할 게...... 우리 미림이도 크도록 외삼촌이 다 돌봐 줄 것이고...... 아니, 이젠 어느새 다 커 버린 모양이구나. 하하......”
“참, 엄마가 내가 눈치 차린 걸 알고 있어요?”
“으응, 그런 모양이던데...... 아! 그럼 미림이가 모르고 있더라고 말을 해 줄까? 그러면 되겠다. 그렇지?”
“네, 그래 주세요. 저는 그냥 모른 척 하고 있을 거니까......”
그렇게 미림이와의 밀약이라면 밀약이 이루어졌다. 원조교제 건으로 시작한 세 사람의 은밀한 비밀은 그렇게 또 하나의 사연을 더한 채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었다. 기찬은 지수와의 전화로 미림이가 모른 척 해 주길 원한다는 말을 함으로써 오히려 비밀로 해 달라는 말을 발설해 버린다. 서로가 알고 있음에도 모르는 척 내밀한 사연을 만들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기찬에게는 양보할 수 없는 즐거움인 모양이었다.
저녁 무렵 기찬은 한 아파트 앞에서 건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세요?”
“네, 이윤호씨 댁인가요?”
기찬은 미림이와 헤어져 사무실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저녁 무렵 미림이에게 원조교제를 사주했던 녀석의 집을 찾아온 것이었다. 기찬의 행보를 보아 이곳에서도 적잖은 돈을 뜯어 낼 수 있는 일일 테니 그것을 그냥 지나칠 리 없는 일이었다.
“지금 없는데...... 어머!”
“으응? 누나......”
“어머! 너...... 윤호하고 친구였니?”
“아니?...... 여기가 누나 집이었어? 그럼...... 이윤호는......”
“그래, 내 동생이야. 어머나...... 세상에...... 신기하다. 야...... 어서 들어와.”
기찬은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있었다. 학창시절 선배였고, 미림이가 다니는 학교의 선생님이기도 한 은숙이 이윤호의 누나였다니, 그 일이 어떻게 연결이 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비릿한 시선으로 은숙의 아래 위를 흩어본다.
“뭐야?...... 그럼 은숙이 누나도 그 일에 연계되어 있다는 거야?”
친누나가 교사로 재직하는 학교의 학생들을 동원하여 원조교제를 시켜왔다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 은숙도 연관이 있을 테니 속으로 무수한 생각들을 교차시키고 있는 기찬에게 은숙이 차를 권한다.
“내 동생하고는 어떻게 아니? 둘이 친구였어?”
오히려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물어오는 은숙이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집안이라 그런지 마치 산모들이 입는 옷처럼 펑퍼짐한 통 원피스를 입고 있는 모습이 더욱 그러하였다.
“아니? 누나는 아무리 집안이라고 그 옷이 그게 뭐야? 참......”
“아니?...... 얘가 정말...... 묻는 말에는 대답을 안 하고...... 내 동생은 어떻게 알고 있냐니까......”
할 수 없이 기찬은 신분증을 꺼내고, 온 이유를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은숙이 개입되어 있는 일이라면 그 단초를 바로잡아 가급적 이쯤에서 발을 빼도록 해 주고 싶은 마음이었던 모양이지만, 은숙은 들고 있던 잔을 떨어뜨릴 정도로 놀라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 기찬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어, 어......”
기찬은 황급히 주방에서 행주를 가져다가 쏟아진 커피를 훔쳐내고 있었다.
“어, 어떻게...... 그게 말이 되니? 윤호가...... 우리 애들을 어떻게...... 어머! 호, 혹시......”
은숙은 서둘러 방으로 들어가더니 커다란 수첩을 가지고 나와 펼쳐보기 시작한다.
“서, 설마......”
그것은 교사수첩이라고 적혀있었고, 펼쳐진 페이지에는 상담을 했던 기록이나 문제 학생들의 인적사항 따위가 기록되어 있었다. 어쩌면 윤호는 누나의 수첩을 열어 보다가 그 기록들을 봤을 수도 있는 일이니, 악용하려 했다면 충분히 가능했을 일이었다.
“음...... 어디...... 이리 줘 봐요.”
기찬은 은숙의 수첩을 뺏듯이 가져와 천천히 내용을 살피고는 옆으로 내려 둔다.
“누나, 이 수첩은 일단 내가 가지고 가야 되겠어.”
“어머! 아, 안 돼. 기찬아...... 제발...... 우리 윤호 잘못되면 어떻게 하니?”
“그래, 하여튼 좀 생각을 해 봅시다. 이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상황이 훨씬 심각한 지경까지 온 모양인데...... 가급적 누나 동생에게는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해 줄 테니까 너무 걱정은 하지 말고...... 일단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모르게 비밀리에 처리해 줄 테니까 우선 진정해.”
“......”
이미 은숙은 훌쩍이며 눈물을 찍어내고 있었고, 기찬은 그런 은숙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웃음을 짓고 있었다.
“후훗...... 역시 안경을 벗으니까 옛날 모습이 나오긴 나오네...... 확실히 뜯어고친 건 아닌 모양이야?”
“어머! 얘, 너는 지금 농담이 나오니? 나는 걱정이 돼서 죽겠는데...... 흐윽......”
“걱정도 팔자요? 아! 안 잡아간다는데..... 울긴 왜 울어?”
“저, 정말이지? 너...... 나하고 약속해.”
기찬은 어이없는 일이지만 웃으면서 은숙과 새끼손가락을 걸어준다.
“결혼 했다면서...... 남편은 어디 갔어? 아직 학교에서 안 온 거야?”
“으응...... 사립학교는 늘 그런 일이 잦아. 진급하려면 재단 눈치도 봐야 하니까 이것저것 신경 써야 하는 일도 많고......”
“아! 그도 그렇겠군. 그나저나 이 친구는 왜 안 들어 와? 누나가 전화를 한 번 해 보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현관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은숙은 득달같이 달려가 다짜고짜 윤호의 어깨며 등을 두들겨 패기 시작한다.
“아야, 아! 왜 그래? 짜증나게......”
은숙에게 거칠게 대들며 거실로 들어서던 윤호는 기찬을 발견하고는 그대로 굳어져 버린다.
“이리 와서 앉아.”
“......”
은숙은 기찬의 눈치를 살피며 윤호의 곁에 따라 앉는다.
“음...... 일단 누나는 자리를 좀...... 아니, 우리가 방으로 가는 게 낫겠군. 자...... 네 방이 어디냐?”
윤호는 기찬의 눈치를 살피며 앞장을 서고, 은숙은 기찬의 팔을 붙잡고 매달린다.
“기찬아, 때리진 않을 거지?”
“참 나...... 누나는 걱정 말고 기다려.”
“그, 그래......”
방으로 들어선 윤호는 기찬과 누나가 잘 아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이 의아했지만, 차마 말을 붙여 물어 볼 수도 없었다.
윤호는 이미 어쩔 수 없는 일이니 기찬의 심문에 순순히 대답을 이어가고, 짐작한 대로 아이들의 명단 따위는 누나 은숙의 수첩에 적혀있는 상담내용을 훔쳐보았던 모양이었다.
“미림이는 어떻게 끌어들인 거야?”
“그 중에 수혜라는 애가 있어요. 안수혜라고...... 그 애가 가장 적극적으로 하는 애라서......”
“너...... 이젠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고?......”
윤호는 기찬의 이 말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눈빛을 빛낸다.
“저, 절대로 이런 일 없을 겁니다. 네, 정말입니다. 믿어 주세요.”
“좋아, 믿어주지. 그간 네가 확보한 아이들 명단 전부 다 추려 봐. 네가 과연 마음을 고쳐먹었는지는 그걸 보고 판단해 주지.”
“네, 네......”
윤호는 냉큼 컴퓨터에 매달려 입력시켜 둔 화면을 인쇄해서 기찬에게 내민다. 이름과 전화번호, 집 주소, 이메일 주소며 자주 가는 곳까지 상세하게 메모를 해 관리를 하고 있었다.
“너...... 이 자식, 나한테 걸려놓고도 아직까지 이 명단을 컴퓨터 안에 넣어두고 있었다는 거야? 다시는 이 녀석들에게 연락하지 않을 자신 있어?”
“네...... 그러겠습니다.”
“그리고...... 너, 경찰서에 같이 왔던 조유정이하고는 무슨 사이냐?”
“그냥 여자 친구였습니다. 하지만...... 유정이는 이런 거 모르고 있습니다. 이 일하고는 상관없어요.”
“꼴에...... 기가 막혀서...... 좋다. 네 누나가 내 학교 선배라서 너, 세상 두 번 사는 줄만 알아라. 이미 한 번 말했지만, 앞으로는 유정이든...... 여기 명단에 적혀있는 녀석들이든 단 한 번만이라도 연락을 하면 너는 그 날로 흙냄새 맡게 되는 거야. 알았어?”
“네, 네......”
“보아하니 너하고 내가 보통 인연은 아닌 모양이다. 어떻게 여자 세 사람을 너하고 내가 공통으로 알 수가 있냐? 네 누나도, 유정이도, 그리고 미림이까지......”
“저...... 미림이라는 애는 사실 잘 몰라요. 수혜라는 애가 알려줘서 그냥 ...... 우욱......”
결국 미림이 얘기가 나올 때, 발길질을 당하고 만다. 우당탕 소리에 은숙이 뛰어 들어와 기찬을 잡고 매달리고, 윤호는 구석에서 웅크린 채 신음을 흘리며 기찬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자, 한 잔 마셔...... 누나, 예전에는 제법 마셨잖아?”
“그러니까...... 그 날도 결국 그런 일로 학교에 왔던 거구나? 정말 미안해. 기찬아. 내가 대신 사과할게.”
은숙이와 둘만의 술자리를 갖게 되니 옛날의 추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난다. 지금의 기찬으로 보자면 십 년이 넘는 나이차의 여자들도 두루 섭렵하고 있는 입장이지만, 그 무렵 은숙은 따르던 선배들에게 치어 정말 노랫말처럼 가까이 할 수 없는 당신이었다. 은근한 추억에 사로잡힌 기찬은 은숙을 건드려 보기로 작정한다. 지금의 이런 분위기라면 기찬에겐 아주 익숙한 것이었으니 그냥 넘어갈 리가 없는 일이다. 돈이나 대강 뜯어내려 했던 것이 은숙을 만남으로 해서 급물살을 타는 셈이다.
“그리고, 누나도 누나 학생들이지만, 일단 수사과정이 끝날 때까지는 수사에 방해가 되는 어떤 접촉도 해서는 안 돼. 뭐...... 애들이 눈치 차리도록 힌트를 준다든지......”
“아유, 그럼..... 물론이지.”
“그 중에 윤호로 인해서 어떤 피해를 입은 애들이 있다면, 그건 윤호도 피해 갈 수 없을 거야. 그 땐 누나가 아니라...... 누나 할아버지가 오셔도 안 돼.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어머! 기찬아...... 너, 아까는 봐준다고 했잖니? 으응?”
“그거야 단지 내 조카 문제니까 그랬지. 윤호가 내 조카한테 한 걸 보면, 다른 피해자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거 아냐? 조사를 하다 보면 피해자 집에서도 알게 되고, 결국 다 드러나는 걸 그때 가서도 모른 척 해줄 수는 없는 일이지.”
“어머! 그러면 어떻게 해? 으응? 너, 아까는 비밀로 수사를 할 수도 있다고 그랬잖아? 으응?”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 나만의 장소가 따로 있긴 하지만...... 그렇게 되면 누나가 일일이 학생들을 비밀리에 데리고 와야 할지도 모르는데......”
“거기가 어딘데...... 그러면 내가 데려다 줄게? 응? 나를 봐서 좀 그렇게 해 줘. 기찬아.”
“누나, 그러지 말고 아주 이 기회에 동생 버르장머리를 고치는 게 낫지 않겠어?
“아유, 기찬아...... 왜 그러니? 제발......”
기찬은 자리를 털고 일어서고, 은숙은 기찬의 행동에 당황해 얼굴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물 흐르듯 너무 쉽게 받아들이는 기찬의 모습이 이상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뭐해? 그럼 가야지. 일어서.”
“으응, 그래, 고마워. 가자.”
몹시 당황한 은숙은 기찬과 함께 차로 이동해 삼각지에 도착해서 자신이 들어가는 건물이 여관이라는 것도 깊이 의식하지 못한 채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는다. 신분증을 꺼내 비추자 자동으로 안내하는 엘리베이터라는 것이 순진한 은숙이에겐 말 그대로 첩보영화에서나 봤을 법한 일이었을 것이니 아무런 의심도 없이 기찬을 따라 몸을 움직인다.
“자, 들어와.”
“으응...... 여기 혹시 여관 아니야?”
“으응, 맞아. 나는 여기를 사용해. 방 두 개를 사용하고 있지.”
“아...... 그렇구나.”
기찬은 침대에 앉아 담배를 피워 물곤 은숙이를 바라본다. 이제 이 순간은 학창시절의 선배가 아니라 요리사가 우리 안에 가둬 둔 식재료일 뿐이었다.
“후훗...... 참...... 누나는 정말 변한 게 없는 것 같단 말이야.”
“그게 무슨 소리야?”
“허허...... 여기가 여관인 줄도 모르고 그렇게 순순히 따라오니까 말이야.”
“어, 어머! 얘, 농담도 그런 소리 하지 마. 무섭게......”
기찬은 걸터앉은 침대에서 일어서 셔츠의 단추를 풀기 시작한다.
“나, 농담 아니야. 기왕 누나를 만났으니까 이런 흥정도 하는 거야. 누나가 알아서 해. 나가는 길은 방문 열고 나가서 엘리베이터만 타면 자동으로 내려가니까......”
기찬은 셔츠를 벗어 버리고 바지도 벗기 시작한다. 은숙은 화들짝 놀라 등을 돌리지만 차마 문밖으로 나가지는 않고 있었다. 기찬의 말은 힘이 실려 있어, 농담이 아니라는 느낌을 전하기에 충분했고, 그 결정여부에 따라 동생 윤호의 운명이 결정지어진다는 최후통첩이기 때문이었다.
동생이 저지른 일은 은숙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 그 처벌이라는 것도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의 그늘에 데리고 있는 동생을 그렇게 만들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 따라서 기찬의 요구를 거절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여느 때처럼 기찬은 잔뜩 거품을 일으켜 마사지로 단련시킨 물건을 흔들어 대며 욕실을 빠져 나오고, 침대에 대자로 드러누워 은숙을 바라본다. 은숙은 여전히 등을 돌린 채 벽을 바라보고 앉아있었다.
“누나도 얼른 씻어. 아니면 그냥 오든지...... 어서 돌아가 봐야 하잖아. 매형이 벌써 와 있을지도 모르는데......”
짓궂은 기찬은 굳이 은숙의 남편을 매형이라고 불러 은숙을 자극한다. 기찬의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은숙의 어깨가 움찔거린 것으로 짐작이 가능한 일이었다.
은숙은 하는 수 없이 몸을 일으키고, 욕실로 향하는 그녀의 옆모습은 처량하였다. 얼굴이 불빛에 퍼지는 것을 보아 눈물이 번진 듯 소리 죽여 울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한편으론 미안한 감정이 생기면서도 알 수 없는 쾌감이 기찬을 자극해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홀린 듯 중얼거린다.
“뭐야?...... 울고 있었던 거야?...... 나 이런...... 정말 천연기념물이로구먼.”
은숙은 욕실을 나와서도 한동안 침대로 오질 못하고 문 앞에 서서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기찬은 일어서서 은숙을 데리고 침대로 돌아온다. 몸을 감고 있던 타올을 풀어 눈물을 닦아주니 비로소 고개를 들어 기찬의 눈을 바라본다.
“그러면 이제 내 동생은 아무 일도 없는 거지? 약속해 줘.”
“그럼...... 물론이지. 이렇게 누나가 협조를 하는데......”
부드러운 가슴을 움켜쥐고 은숙의 얼굴을 바라본다. 학창시절의 선배라는 생각에, 역시 이 또한 금지된 영역일 테니 차츰 차츰 접근해 무너뜨려가는 그 감흥이 새롭기만 하다. 기찬은 여느 때와는 다르게 오랜 애무 끝에 손을 뻗어 사타구니를 공략한다. 쾌감을 끌어 올려 주기 보다는 아픔을 느낄 정도의 과격한 손놀림으로, 꽃잎을 헤치고 드나드는 그 손길에 은숙의 눈은 찢어질 듯 치켜떠져 고통을 호소할 뿐, 벌린 입으로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있었다.
“하윽......”
마치 빠른 손놀림만으로 절정을 보여주겠다는 각오라도 한 것인지, 은숙의 벌어진 두 무릎 사이를 점령해 한 손으로는 아랫배를 누른 채 돌기를 자극하고, 다른 한 손은 여전히 빠른 속도로 은숙의 몸을 관통하고 있었다.
“으흑...... 기...... 찬...... 흐윽...... 꾸르륵......”
은숙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힐 무렵 그녀의 샘물이 함께 터져 버리고 만다. 몹시 부끄러운 일을 당하고 있는 은숙은 낯 설은 그 자극을 견디지 못해 그만 방광을 열어 버리고, 그 뜨거운 오줌줄기는 드나드는 기찬의 팔을 따라 어깨까지 튀어 오르고 있었다.
“으흑...... 난 몰라...... 미, 미안해......”
이제는 통증도 사라지고 방광이 비어버려 요의도 모두 사라졌을 즈음 자신을 달뜨게 하는 남자 앞에서 흥분에 겨워 오줌을 싸 버렸다는 것을 체감하는 은숙은 그 수치스러움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상대에게 복종하는 것뿐임을 체득하게 된다.
“내가 누구야?”
“으응?...... 하악...... 기찬......”
뜬금없이 손동작을 멈춘 채 기찬은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고, 흥분에 겨워 대답하는 은숙에게 고개를 가로저어 틀린 답임을 시사한다.
“여보라고 해 봐...... 누나......”
“흐윽...... 싫어...... 안돼.”
다시 빠른 속도로 드나드는 손길은 무자비하였던 만큼, 이 순간 남편을 잊게 하기에 충분했으며, 은숙의 고개는 뒤로 꺾여 오래지 않아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자신이 기찬의 여자임을 고백하게 만들어 버린다.
“으으으으윽...... 여, 여...... 보...... 제발......”
“후욱, 후욱......”
기찬도 힘이 들었는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손길을 멈추고 비로소 은숙의 입술을 찾아 목을 축인다.
“흐으읍...... 으흥...... 쭈우웁......”
사이사이 숨을 몰아쉬며 기찬에게 살을 내주는 은숙은 어느새 요녀와도 같은 몸짓으로 기찬을 휘감아 매달리게 된다.
“으으흑...... 여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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