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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서지몽 - 악마 - 12부 ← 고화질 다운로드    토렌트로 검색하기
16-08-23 22:13 970회 0건
"자."

고개를 들어보니 흰색의 머그잔이 보인다. 코코아 특유의 따뜻한 달콤함이 물씬 풍겼다. 손을 들어 받으려는데 다시 눈물이 핑 돈다. 황급히 고개를 떨궜다.
건네려던 잔을 서랍 위에 두고 의자에 앉았다. 미소는 침대에, 진우는 의자에 앉아 서로를 마주보고 있는 모양새다. 아니, 미소의 시선은 바닥을 향하고 있다. 가을비를 닮은 물방울이 눈가를 스쳐 볼 아래로 사라진다.

제때 발견했다고 해야할까. 아무튼 최악의 상황은 모면했으니까. 처음엔 비명소리를 듣고 다가갔지만, 당하고 있는 여자가 미소인 걸 알자마자 돼지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평소같은 힘 조절 없이 있는 힘껏 후려찬 발차기였다. 돼지는 숨 넘어가는 소리를 지르며 쓰러졌고, 몇 번 더 위협적인 발차기를 해준 다음에야 미소를 골목에서 데리고 나왔다. 그야말로 엉망진창인 모습이었다. 다 젖은 마이를 벗어 미소에게 덮어줬다.
응급실로 데려가 간단한 처치를 받았다. 경찰에 신고하자는 진우의 말을 한사코 거부하는 태도가 이상하긴 했지만, 그냥 그러마, 하고 말았다.

"못 걷겠어....쿨쩍." 긴장이 풀려서일까. 병원을 나오자마자 미소가 그 자리에 주저 앉아버렸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게 눈에 보인다. 잠시 안쓰럽게 쳐다보던 진우가 미소에게 등을 돌리고 앉았다. "업혀."


벌써 12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병원에서 잠깐 시현이와 통화했었다.
"응...데려다 주고, 체육관에 가서 잘게. 응응...관장님 계시니까...알았어....내 걱정말고, 이불 따뜻하게 덮고 자. 감기 걸려...괜찮아..난..응....." 전화를 끊으려다가 다시 입을 가져다 댔다. "사랑해." 전화 반대편에서 잠시 멈칫하던 시현이가 같은 말을 해준다. 몸이 따스해지는 기분이 든다.

미소를 업고 집을 물었지만 고시원에 혼자 산다고 했다. 한 번도 대화다운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으니 어떤 사정인지 알 수가 없다. 고시원이 어디냐고 묻자 묵묵부답이다. 한참을 조용히 업혀있던 미소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연다.

"선배..."
"말해."
"...나랑 조금만 ...같이 있어주면 안돼? 혼자 있어야 되는데...너무 무서워..." 미소의 목소리는 계속 떨리고 있다.
"......알았어. 일단 고시원으로 가자."
"우리 고시원 여성 전용이야..."

평소 같으면 단박에 거절할 말이었겠지만, 지금은 사정이 조금 달랐다. 강간 위기에서 막 벗어난, 쫄딱 젖어 벌벌 떠는 여자를 업고 있는 상황에서는 쉽게 거절의 말이 나오지 않는 법이다. 등에 업혀있는 미소의 떨림이 온 몸으로 전해진다. 피곤하고 힘든 하루였다. 체육관으로 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 그만뒀다. 제대로 누울 장소도 없을 뿐더러, 자칫하면 시현이 귀에 들어갈 것이다. 절대로 안된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모텔로 들어왔다. 미성년자인데 괜찮을까 하는 걱정은 기우였다. "나갈 때 넥타이는 풀고, 마이는 안고 나가줘" 계단을 오르려던 진우에 주인 아주머니가 했던 말이다. 결국 교복 차림을 가리라는 말인 셈이다. 가출했던 여동생이 생각나면서 왠지 모르게 어이 없는 기분이 들었다.

쌍소리를 입에 달고 다니던 날라리가 온 몸을 벌벌 떨며 눈물만 떨구고 있는 모습은 깊은 동정심을 불러일으켰다.들어오자마자 씻고 나온 덕분에 몰골은 한층 나아졌지만 얼굴에 생긴 상처가 뚜렷하다. 씻으러 들어간 다음에도 한참을 나오지 않았더랬다. 간간히 시끄러운 샤워기 소리를 뚫고 꺽꺽 거리는 울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안 마실꺼야?"
진우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훨씬 부드럽다. 발랑 까진 날라리라며 거리를 두고 틱틱 쏘아대긴 했지만, 지금 그런건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겁에 질려 오들오들 떠는 여자아이를 안심시켜줘야 한다는 의식적인 생각도 조금 들었지만, 기본적으로 몸에 밴 행동이었다. 늘상 동생들을 챙기고 돌보는 큰 오빠 역할을 해오던 진우다.

"으..응...이따가..마실게.." 미소가 고개를 힘 없이 젓는다. 진우는 저도 모르게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티슈를 뽑아 미소에게 건넸다.
"그만 울고."

진우는 몸을 일으켜 의자를 치웠다. 작은 탁자와 의자를 한 쪽으로 밀어놓고 , 벽 옆에 기대어진 쇼파를 당겼다. 구색맞추기용 쇼파였다.

"이제 자자. 난 여기서 잘테니까. 아, 되게 피곤하다. 으으!!" 진우가 과장되게 기지개를 편다. "불 꺼줄까?"



불을 끄고 눕자 다시 눈물이 베개를 적신다. 저도 모르게 자꾸 나오는 눈물이 쪽팔리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참기가 힘들었다. 진우의 말처럼 힘든 하루였다. 혼자서 잠들지 못할만큼이나 힘든 하루. 두터운 이불을 코까지 끌어올렸는데도 떨림이 가시질 않았다. 저도 모르게 진우의 등이 생각났다. 양아치 새끼들의 등은 몇 번이나 경험해봤다. 한껏 올려진 오토바이 쇼바 위에서 매달려보기도 하고, 가끔 심심할때 업혀보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누구의 등도 진우와 같은 느낌을 주진 않았다. 믿음직스럽고, 단단한, 그야말로 벌벌 떨리는 몸을 기댈 수 있는 듬직한 등이었다. 어쩌면 당연한 얘기였다. 운동으로 다져진 진우의 몸은 또래 아이들의 느낌과는 전혀 달랐으니까. 하지만 미소의 느낌은 단순히 육체적인 부분에 대한 것은 아니었다.

"...선배...자요?"
"..어."

불 꺼진 모텔방은 어둡다. 가리개로 가려진 창문 덕에 빛 하나 새어들어오지 않는다. 창문 밖으로 약한 빗방울 소리가 들린다.

"선배...불편하지 않아?"
"괜찮아."

처음부터 그랬지만 진우라는 놈은 참 독특했다. 동갑인 주제에 항상 어딘가 다른 느낌을 준다. 양아치 새끼들이랑 비교할 바는 아니였지만, 그동안 봐왔던 누구와도 닮지 않은 색다른 분위기를 뿜었다. 한번 따먹어보겠다고 꼬리를 살랑 거리던 양아치 오빠들과도, 미소만 보면 눈살을 찌푸리는 어른들과도 달랐다.
따지고보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진우의 배경을 모르는 미소에겐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진우의 이력은 누구와도 달랐다. 보육원 출신에, 이른 나이부터 남자도 여자도 아닌 사람을 깊게 사랑하게 된 사람이 진우말고 또 있을까. 물론, 진우 자신은 남자도 여자도 아닌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선배...일루 와. 침대에서 자."
"됐어. 여기 딱 좋아."
"침대 넓어...둘이 누워도 자리 널널해."
"됐다니까. 빨리 자."

진우의 말에는 묘한 뉘앙스도, 망설임도 없었다. 미소는 그런 반응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조건만남 하는 변태들은 제쳐두더라도, 어떤 남자들도 그런 반응을 보여준 적은 없었으니까. 이래뵈도 양아치, 범생이 할 것 없이 다양한 연애경력을 자랑하는 미소였다. 순진해보이는 범생이들조차 이런 곳에서는 짐승처럼 덤벼들었다. 순간, 어떤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선배."
"엉."
"내가 더러워?" 미소의 목소리에 떨림이 조금 가라앉았다.
"야....그런 말 하지마. 그런거 아니야."
"그럼 왜? ..내가 잡아 먹는다고 했어? 그냥 여기... 와서 자라고. 여기 넓은데 왜 거기서 궁상맞게 그러고 있는데..."

사실 진우는 별 생각없이 쇼파를 택했다.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했달까. 여자와 남자가 둘이 방에 들어왔는데, 침대는 하나. 둘은 사랑하는 사이도 뭣도 아니다. 그럼 당연히 따로 자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이었다. 시현이와 살을 섞기는 하지만 진우는 순진한 소년이었다. 야동은 많이 봤지만 이 상황을 기회라는 생각으로 연결시킬만큼 약삭빠르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오랜 시간 시현이만 바라본 탓에 다른 여자에게는 흥미 이상의 관심을 느끼지 않았다.

"...걸레라서 더러워?"
"야!!!"

진우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며 일어났다.

"그딴 말 하지 말랬지. 왜 자꾸 자기를 비하하는데?"
"그럼 일루와. 떨어져서 자면 되잖아....."

푹- 한숨을 내쉬고 침대로 다가갔다. 하지만 이불 속으로 들어가는 대신 의자를 당겨 미소의 머리 맡에 앉는다. 잠깐 망살이던 진우는, 손을 뻗어 이불 위로 미소의 어깨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야, 내가 무슨 고자도 아니고.....여자랑 같이 이불에 들어가면...."
"그럼 하면 되잖아?"

미소가 떨림이 가신 목소리로 당돌하게 대꾸한다.

"무슨 여자 애가......됐고. 나, 임자 있다."
"그때 그 언니?"
"어."
"비밀로 하면 되잖아...." 진우가 손을 들어 멈추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그만."
"말 안 할게. 응?"

사실 정말 섹스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봉변을 당할뻔한지 4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만약 진우가 자연스럽게 이불로 들어왔다면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했다. 지갑털이를 할 때 빼고 이런 식으로 모텔에 들어와서 섹스없이 나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어떤 새끼들은 생리가 터졌다는 말도 무시하고 달려들었다. 솔직히 "선배라면" 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말은 조금 우습지만, 감수성 예민한 18세여자 아이를 두 번이나 위기에서 구해준 남자였다. 반하지 않는게 이상한 것 아닐까.
하지만 이불로 들어오기는 커녕 자연스레 쇼파로 가는 진우를 보자 알 수 없는 마음이 들었다. 자존심이 상하는 기분도 들었고, 딱 한번 봤을 뿐인 여자에 대한 질투, 넘어오지 않는 대상에 대한 도전심 등등. 그런 마음들이 속속 솟아나자 저도 모르게 자꾸 진우를 도발하게 됐다.

진우가 물끄러미 미소를 쳐다본다.

"야, 커터."
"미소거든."
"그래, 미소. 니가 어떤 남자를 봐왔고, 어떤 경험을 해왔는지, 솔직히 난 잘 모르겠는데..." 진우가 잠깐 말을 삼켰다. 약간 얼굴이 뜨겁다는 느낌이 들었다. "남자한테도 순정이란게 있거든?"

전혀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지만, 남자의 순정이라는 말을 듣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빵 터지고 말았다. 이게 무슨 80년대 신파극도 아니고 요새도 이런 놈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진우의 표정은 진지하다.
얼굴이 조금 빨개지고 쑥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긴 했지만, 그 태도에 망설임이 없었다. 미소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부럽네...그 언니." 왠지 눈이 뜨거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니가 몰라서 그래. 나 부러워하는 놈들이 더 많을걸." 진우는 왠지 모르게 으쓱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 자라. 불안하면 잠들 때까지 이렇게 있어줄테니까." 진우가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토닥토닥- 일정한 리듬으로 몸이 울렸다. 워낙에 피곤한 하루였다. 따뜻하게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과 부드러운 이불 그리고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경계심까지 사라지자 금세 잠이 쏟아졌다. 토닥토닥-

진우는 잠든 커터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가려진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미약한 빛이 커터의 얼굴을 비췄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성으로서의 관심은 없었다. 반반한 얼굴에 괜찮은 몸매였지만 진우 옆에는 더욱 예쁘고 사랑스런 사람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설명하기 힘든 긴장감이 진우를 감쌌던 점도 인정해야만 했다. 가을비 내려는 새벽, 가운 하나만 걸친 채 모텔방에 앉아, 적극적으로 대시하는 여자의 말을 들으면서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면 부처거나 고자가 아닐까.
커터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잦아든 후에야 손을 떼고 일어났다. 불편한 쇼파였지만 앉자마자 졸음이 쏟아진다. 워낙 피곤한 하루였다.





몇 시나 됐을까. 익숙한 자극이 진우를 깨웠다. 입술에 부딪혀오는 보드라운 느낌. 눈도 뜨지 않은 채 들어오는 혀를 받았다. 두 개의 혀가 부드럽게 엉켰다. 시현이와의 모닝키스는 언제나 달콤했다. 부드럽게 엉키던 혀가 입술을 핥는다.
불편한 잠자리 때문이었을까, 자극적 사건 때문이었을까. 밤새도록 악몽에 시달렸다. 새까만 안개가 시현이를 쫓고 있었다. 울며 반항하는 시현이를 강제로 옭아맨 채 옷을 뜯어낸다. 새하얀 알몸이 드러났다. 진우 앞에서만 드러내는 새하얀 알몸. 알몸을 보여줄 때의 시현이는 항상 부끄런 표정을 짓는다. 몇 번을 봐도 질리지 않는 사랑스런 표정. 꿈 속에서 시현이는 다른 표정을 지었다. 절망감 섞인 괴로운 표정. 마치 눈 앞에서 보듯 생생했다. 돕고 싶었지만,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시현이의 비명소리가 밤새도록 귀를 울렸다.

희미한 담배 냄새가 코를 스치는 순간, 흠칫해서 눈을 떳다. 저도 모르게 커터를 세게 밀치며 일어났다.

"뭐하는거야?!"
"일어났네."

미소가 장난스런 표정으로 진우를 쳐다봤다. 하지만 진우의 표정은 잔뜩 굳어있다. 별 다른 반응을 기대한건 아니지만, 이런 반응은 예상치 못했다.

"아, 표정 풀어...장난이야 장난. 생명의 은인한테 키스도 못해?"
"................"
"감사의 키스야, 감사의 키스."
"다신 이런 장난 치지마."

진우가 테이블에 걸린 옷을 챙긴다. 밤새도록 후끈하게 돌려진 보일러 탓에 이미 바짝 말랐다. 시간을 보니 6시가 좀 넘었다.

"나가자. 더 늦으면 지각하겠다."
"난 오늘 학교 안가."
"그래, 그럼. 좀 더 쉬다가 나와."

진우는 지체없이 화장실로 들어갔다. 옷을 갈아입고 나왔는데도 미소는 그 자리에 서있었다.

"진짜 지금 안 나갈꺼야?"

모텔방에 혼자 남겨두고 간다는게 어쩐지 걱정되서 재차 물었다.

"신경 꺼. 무슨 상관이야?" 미소의 목소리가 날카롭다.
"..............."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몸을 돌려 모텔방을 빠져 나왔다.





정신없이 바쁜 점심시간이 지나자 손님이 뜸해진다.
창 밖으로 보이는 거리는 오늘도 회색빛이다. 시현이는 이런 날을 좋아했다. 햇빛 쏟아지는 밝은 날도 싫어하진 않았지만, 구름이 잔뜩 낀 우중충한 회색빛 하늘이 더욱 좋았다. 조금 더 마음이 놓이는 기분이랄까.
이런 날 풍기는 커피 냄새는 더욱 고소하다.

등교시간즈음에 진우에게 전화가 걸려왔었다. 여느 때와 같이 차분하고 애정 가득한 목소리였다. 별 다를 것 없는 대화였다. 평소엔 얼굴을 마주보고 나눴지만, 오늘은 핸드폰 너머로 나눴다는 점만 달랐다. 한가지, 평소와 조금 다른 점은 있었다. 진우답지 않게 한사코 고집을 피웠다. 한참을 망설였지만 진우의 성화를 이기긴 어려웠다.

"사랑해, 서..방" 기어코 서방이라는 말을 듣고서야 전화를 끊었다. 겨우 하룻밤 떨어졌을 뿐인데 아기처럼 고집피우는 진우가 귀여웠다.

손님이 없는 틈을 타 포털사이트 뉴스를 살피던 눈에 색다른 제목이 들어온다. "XXXX, 동성결혼 합법화" 라는 제목이었다. 저도 모르게 뉴스를 클릭한다. 아무리 개방적인 나라라지만, 동성결혼 합법화라니. 부럽다는 생각과 이상하다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진우에 대한 사랑이 동성애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확고한 여자로서의 정체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사회적 조건이나 주변 시선을 무시할만큼 대범하거나 어리석지는 않았다. 자연스레 동성애나 양성애 등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짧게 이어진 기사 아래로 달린 댓글들은 가관이었다.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다. 대한민국 사회는 이런 것에 관대하지 않다. 자신과 조금만 달라도 찍어내는 사회다. 하물며 동성애라니. 조금 다른 정도가 아닌 것이다. 몇 페이지 정도 읽다가 컴퓨터를 껐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인터넷에 표현은 조금의 여과도 없다. 괴물이니, 더럽다느니 하는 글을 읽어내려가다보니 저도 모르게 어깨가 움츠러 들었다.





체크아웃 시간이 다 되어서야 모텔을 나섰다. 평일 정오 모텔 골목은 한산했다. 혼자 모텔 골목을 걷다보니 어제 일이 떠올라 발걸음을 재촉했다. 고시원에 도착하자 총무가 토끼눈을 뜨고 쳐다본다. 목이 늘어나고, 피가 묻은 티셔츠, 퉁퉁 부운 얼굴과 상처. 무슨 일이 있냐는 물음에 대충 얼버무리고 방으로 돌아왔다. 침대에 눕자 아침에 일이 떠올랐다. 왠지 얼굴이 빨개진다. "나쁜 새끼..."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했다.

평소보다 일찍 잠에서 깼다. 여기저기 쑤시긴 했지만, 개운한 기분이었다. 얻어맞은 부분이 욱씬대는 것만 빼고.
한층 밝아진 새벽공기 사이로 쇼파에 기대 잠든 진우의 얼굴이 보였다. 무슨 꿈을 꾸는지 잔뜩 찌푸린 채였다. 간간히 낮은 신음 소리가 입에서 샌다. 덩치에 비해 너무 작은 쇼파에 기대 잠든 모습이 처량하다.
조용히 일어나 다가서자, 어제 밤 일이 떠오른다. 이런 남자가 있을꺼라는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로맨스 소설도 읽지 않고, 드라마도 보지 않는다. 신데렐라를 꿈꾸며 눈물만 흘리는 병신같은 여자애들은 짜증만 유발했다. 욕정에 허덕이는 현실의 남자들과 드라마 속 남자들의 괴리감도 너무 컸다. 그래서 그런 것들이 병신같다고 생각했다. 미소의 현실은 "15만원 조건만남" 이었다.
그래서 진우가 보여준 태도는 더욱 새롭고 신기했다.
가만히 얼굴을 들여다보니 의외로 귀엽게 생긴 구석이 많았다. 덩치도 크고, 까무잡잡한 피부에, 남자다운 윤곽이 뚜렷한 골격이었지만, 잠든 얼굴은 마치 아기 같았다. 슬쩍 입술에 손가락을 갖다댔지만 아무 반응도 없었다. 고개를 숙여 진우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후끈한 실내공기 탓에 잔뜩 일어난 입술이 거칠다. 입을 떼고 다시 진우의 얼굴을 바라봤다. 여전히 조금 찡그린 미간. 다시 입을 맞췄다. 조금 더 과감하게 혀를 돌렸다. 입술을 살짝 핥다가 혀를 밀어넣었다. 진우의 혀 끝을 조금 간질이자, 혀가 꿈틀꿈틀하더니 감겨왔다. 한창 그렇게 혀를 부비다가 갑작스레 밀쳐졌다.

거기까지 떠올리자 얼굴이 화끈거린다. 몰래 키스하다가 내팽겨쳐지다니. 쪽팔리기 그지 없다. 몇 번이나 문자를 할까 말까 고민했다. 뭐라고 보내야 되나. 고맙다고 할까. 미안하다고 해야 되나. 아씨, 쪽팔리게 왜 그런 짓은 해서. 자꾸 후회가 된다.





김본좌와 빠삭이가 옆에서 재잘거리지만 무슨 말인지 귀에 들어오질 않는다. 하루종일 멍한 눈으로 하늘만 바라봤다. 5교시가 끝날 때쯤 커터에게 카톡이 왔다.

- 야, 너 키스 잘하더라. -

"미친..."

저도 모르게 욕이 나왔다. 몸이 으슬으슬해서 일찍 집에 돌아왔다. 시끄러운 동생들을 피해 시현이 방에 자리를 깔고 누웠다. 어제 맞은 비 때문인가, 자꾸 머리가 무겁다. 이불에서 시현이의 향기가 난다. 달콤하고, 아늑하다.





"벌써 자?"
"응, 일찍 들어와서 저녁도 안 먹고 잠들었네. 많이 피곤했나봐."

시현이를 통해 어제 일을 전해들은 선미가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 강간이라니, 무서운 세상이다. 가출했던 동생에게 그런 일이 벌어졌으면 어쩔 뻔 했을까. 저도 모르게 인상을 쓴다. 시현이가 가만히 선미의 팔을 쓰다듬는다. 말하지 않아도 어떤 기분인지 느낄 수 있다.
죽은듯이 잠든 진우를 깨우지 않기 위해 조용히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동생들과 놀아주며 마루에서 TV를 봤다. 자꾸 낮에 기사가 떠오른다.

"동성결혼......진우는 어떻게 느낄까."

깊게 사랑하고, 자기 자신보다 귀중하게 여기는 진우였지만, 결혼을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아니, 마음 같아선 꼭 하고 싶었다.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다는 생각도 했고, 매일 마음 졸이는 생활을 끝내고 있는 힘껏 사랑도 나누고 싶었다. 언젠가 수술을 마치고 여자의 몸을 갖게 되면 사랑하는 진우의 분신도 있는 대로 받아들이고 싶었다. 뜨겁고 단단한 그것. 호적을 정정하고 나면 혼인신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하지만 진우를 보면 항상 마음이 흔들렸다. 이상한 기분이다. 진우를 보며 사랑을 느끼고,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만, 또한 진우를 보며 그러면 안된다는 생각도 떠올렸다. 아직은 젊고 탱탱한 육체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육체의 젊음도 사그라들 것이다. 그때가 되면 진우의 마음이 후회로 가득 차지 않을까. 새로운 사람, 정상적인 여자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
생채기 가득한 저질 과일보다는 싱싱하고 반질반질한 상(上)품이 좋은게 당연한 이치다.
수술을 받아도 나는 출고 불가능 저질 과일이니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잠들고 나서야 조용히 방으로 들어갔다. 아기처럼 잠들어 있던 진우의 입에서 자그마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이마를 짚어보니 열이 느껴진다. 미지근한 물에 수건을 적셔 이마를 닦아줬다. 혹시 깨지 않을까 조심조심 닦고, 이마에 수건을 올린다.

"까톡-!"

조용한 방안에 갑작스레 메시지 도착음이 울렸다. 진우가 깰까 얼른 핸드폰을 집는다. 진우의 비밀번호는 시현이의 생일이다. 무음으로 돌리기 위해 비밀번호를 풀고 보니 카톡 메시지가 와있다. 잠시 망설이다 메시지를 눌렀다.

- XX팡!! 김본좌님이 XX팡의 세계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유쾌함과 즐거움이 넘치는 XX팡의 세계로 출발~! -

게임 초대 메시지였다. 왠지 애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버튼을 눌러 채팅방을 나오자 대화목록이 주르륵 늘어져 있다. 태반이 게임초대 메시지다. 무뚝뚝한 남자아이답게 전혀 관리하지 않는 것 같다. 문득, 대화방이 많이 켜져있으면 핸드폰이 느려진다는 말을 들었던게 기억 났다. 하나하나 눌러 대화목록을 삭제했다. 몇 개의 대화창을 삭제 했을까.

밑에 쳐져 있던 메시지가 눈에 띄었다.

- 야, 너 키스 잘하더라. -

확인을 하고도 답장을 하지 않은 메시지였다. 오늘 날짜가 적혀 있었다.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얼굴이었다. "커터"라고 적혀있는 프로필엔 언젠가 편의점에서 봤던 여자 아이의 얼굴이 떠있다.




꽉 물린 아랫입술이 새하얗게 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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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시는 독자분들께 항상 감사드립니다.

추천,댓글,쪽지 주시는 적극적인 분들에게 더욱 감사합니다.

조회수와 반응을 보며 여러모로 고민해봤지만,

처음 구상했던 방향으로 가는게 맞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자극적인 장면이 없어 송구스럽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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