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작품은 쉬메일 혹은 트렌스젠더 혹은 양성에 대한 묘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성향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신 분은 주의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
높게 올라붙은 창문으로 옅은 푸른색의 새벽이 들어오고 있다.
3월의 새벽은 아직 싸늘하다.
인기척 하나 없는 시간, 오랜만에 거울 앞에서 자신을 비춰본다. 이런 몽환적인 어둠의 시간이 아니면 용기를 내어 자신을 바라볼 자신이 없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
티 하나 없는 하얗고 뽀얀 살결이 밝아오는 새벽빛을 받아 푸르스름하게 빛난다.
길고 촘촘한 속눈썹과 오뚝한 콧날을 따라 도톰하고 빨간 입술이 관능적으로 자리 잡고 있다. 보통 여자들보다 더 진한 색의 입술은 언제나 상대방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입술을 훔치고 목선을 따라 내려간다. 캔버스의 그려놓은 듯 완벽하니 매끈한 목선. 갓 샤워하고 나온 듯 뽀송뽀송한 목덜미는 그 자체로 뇌쇄적이다. 쇄골의 부드러운 흐름을 따라 가느다란 어깨와 가슴을 만난다. 적당한 모양과 C컵이 가득 차는 크기. 남자들의 시선은 그곳을 지나지 못 하고 머물게 된다. 누구의 눈이라도 끌어당기는 탐스러운 언덕. 그 언덕 한 가운데 위치한 두 개의 돌기는 새벽 공기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우쭐하니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봄날의 부드러운 능선을 닮은 오목한 허리라인을 지나, 탄력 있게 솟아오른 엉덩이에 이르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꼴깍-하는 군침 삼키는 소리를 내게 된다. 오리궁둥이라고 놀림받았던 어릴 때는 콤플렉스였었지만, 지금은 아무도 그렇게 놀리지 않는다. 그저 침만 삼킬 뿐이다.
그리고...
“드르륵-”
커터날이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새벽의 정적을 깬다. 푸른빛의 예기가 번쩍인다.
미세하게 떨리는 오른손이 칼을 쥐고 어둡고 깊은 곳을 향한다.
새벽이 만들어 낸 검은 장막보다도 더 어두운, 보통의 남자들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그것”이 성을 내고야 마는 바로 그 곳.
하지만, 탄력 넘치는 양쪽 허벅지 사이에 위치해 있어야 할, 어둡고 억센 덩굴로 가려져 있어야 하는 비밀스러운 동굴은 그곳에 없었다.
비밀의 동굴 대신 그곳에 있는 건 신이 만들어낸 최악의 실수뿐.
도톰한 가랑이 사이에는 어른 새끼손가락 두 마디나 될까 말까한 어떤 “돌기”가 튀어나와 있었다. 원래 있어야 할 위치보다도 더 아래, 원래 갖추어야 할 모양도 갖지 못한 체, 엉뚱한 곳에 솟아 있는 그것을 보며 단번에 남성의 성기를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기괴하게 비틀어져, 오직 용변의 기능만을 담당하게 된 말라붙은 그것.
푸른 새벽의 거울 속에서 자신의 그곳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있어야 할 것이 없고, 없어야 할 것이 있는 그곳.
떨림을 감추고 슬그머니 칼을 가져다 대어본다.
‘잘라내고 싶어.’
몇 번이나, 아니 몇 십번이나 떠올렸던 생각.
생각만으로도 어떤 날카로움이 가랑이 사이를 헤집는 기분이 든다. 마치 가랑이가 베어진 듯한 끔찍한 날카로움. 커터칼이 그녀의 손을 떠나 내동댕이쳐졌다.
“..흐흑..” 검지손가락을 입에 물고 흐느낌을 삼킨다.
“...야.야! 야, 뭐하냐고?”
“응?”
진우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요 며칠 계속 되는 꿈 탓에 멍 때리는 일이 잦아졌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넋 놓고 하냐? 표정은 어리바리해갖고.”
시현이가 막내에 입에 붙은 밥풀을 떼어내며 말했다. 떼어낸 밥풀을 과장되게 오물오물 씹어 먹자 막내가 까르르- 웃는다.
“언제. 내가 무슨 넋을 놨다고 그러냐? 왜 아침부터 시비야.”
“아~ 그러셔. 넋 안 놨구나. 언니, 난 진우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젓가락질 땐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봐. 다 내가 잘못 가르친 탓이네. 에휴.”
시현이가 한껏 과장된 동작으로 한숨을 쉰다. 그제야보니 식탁 앞에 밥풀이 수두룩하다. 얼굴이 빨개진다.
“진우야? 요새 무슨 일 있어?”
선미누나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야, 김진우! 야야!”
“어?! 어?”
저도 모르게 또 멍을 때렸나보다. 앞에서는 빠삭이가 이상스럽다는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다.
“내 얘기 들었냐?”
“아, 미안. 잠깐 딴 생각 좀 했다. 쏘리, 쏘리. 뭐라고 했냐?”
“하아~ 이 새끼. 이 형님이 지난 밤 체험한 판타스틱 드림월드에 대해 썰을 푸는데 한 눈을 팔아?”
“지랄하네. 빠삭이 이 새끼, 야동보고 자다가 몽정했단다.” 김본좌가 코웃음을 친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잠깐 진지해졌던 자신이 한심스럽다. 한껏 비웃는 표정으로 빠삭이한테 면박을 준다.
“뭐야, 븅신아. 그게 판타스틱한 드림월드냐. 조루새끼야.”
“야, 진짜 존나 생생했다니까. 그년이 내 위에 올라타서 자리를 딱 잡는데, 와 씨발 엉덩이가 그냥...”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고등학교의 아침시간 풍경이다.
남녀공학이지만, 남자반과 여자반이 나뉘어져 있는 진우네 반은 그냥 남고와 다름없다. 음담패설과 게임 이야기, 여자 이야기. 당연히 그 중에 90%는 여자이야기와 음담패설이 합쳐진 이야기다. 별 것도 없는 이야기를 어찌나 그렇게 맨날 할 수 있는지 신기하기도 한데, 듣고 또 들어도 재미있는 이야기는 그 것만 한 게 없다.
“아, 씨발 졸라 시끄럽네. 여자 한번 못 따먹어 본 동정 새끼들이 소설 쓰고 자빠졌냐.”
오른쪽 분단에 엎드려 있던 교복마이가 일어난다. 스물스물. 머리까지 덮고 있던 교복마이를 벗어내고 나온 면상엔 여드름이 가득하다. 속칭 우리 반 "짱"인 찌질이다. 중고등학교때 일진이라는 놈들이 다 그렇듯이 성격이 난폭해서 다른 학생들이 그냥 피하는 그런 종류의 인간이다.
“야야, 빠삭이 십새야. 여자 젖통은 빨아봤냐? 느그 엄마꺼 말고.”
찌질이 덕구 주변에 있던 말라깽이들이 킥킥거린다. 덕구 뒤에 졸졸 붙어 따라다니는 병풍들. 듣기로는 1학년 때부터 따라다니던 애들이라고 했다. 한심하다.
“아, 다..당연히 못 빨아봤지. 어..흠.”
“젖비린내 나는 새끼. 그러니 아침부터 야동 얘기나 하고 자빠졌지. 조용히 해라. 한번만 더 깨우면 진짜 확 죽여버린다.”
덕구는 전혀 무섭지 않은 엄포를 놓으며 다시 엎드렸다.
하지만 그 무섭지 않은 엄포가 빠삭이에게는 먹혀들었는지 조용해졌다. 아침부터 교실 분위기가 가라앉는다. 산통이 깨져 재미가 없어지자,진우도 책상에 엎드렸다.
곧바로 며칠 째 밤마다 진우를 괴롭히고 있는 문제가 떠오른다.
막내의 낮잠을 재우고 나자 이제야 집안이 조용하다.
시현이는 선미언니 곁으로 쪼르르 가서 앉았다. 산더미처럼 쌓인 빨래를 하나하나 갠다.
“시현아, 진우 무슨 일 있는 거 아니니? 요새 자꾸 그러더라.”
“몰라. 자꾸 멍 때리더라고. 학교에서 무슨 일 있나?”
선미언니가 고개를 젓는다. 빨래를 접는 솜씨가 능숙하다. 접은 빨래가 금세 수북하다.
“설마. 2학년 된 지 한 달도 안 됐는데? 아, 맞다. 시현아, 너 금요일 날 아르바이트 쉴 수 있어?”
“응? 아마..사장님한테 미리 말하면 괜찮을거야. 왜?”
시현이가 잔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물었다. 하늘하늘한 머리카락들이 자꾸 신경을 건드린다.
“아니, 학년 바뀌었잖아. 학부모 상담? 진우네 담임선생님께서 그런 거 한다고 하시더라. 우리 애들이야 늘 일등이잖아. 그런 건. 근데 그 날 언니랑 원장 선생님 서울 세미나 참석해야 될 것 같거든.”
“흠, 그래? 근데 그런 거 내가 가도 되나?”
“당연히 가도 되지. 진우누나잖아. 너도 이제 스무 살이고. 아르바이트 뺄 수 있으면 갖다 와줄래?”
“우웅...학..교라..조금 불편한데..”
시현이가 말끝을 흐리며 세탁물을 뒤적거린다. 학교...
“응, 그래서 물어 보는 거야. 많이 불편하면 나중에 뵙자고 말씀드리면 되니까 부담 갖지 말고.”
선미언니는 푸근한 목소리로 시현이를 다독인다. 15살이나 차이가 나는 언니는 늘 엄마같다.
“아니야. 내가 갈게. 부담 가질 게 뭐 있나. 진우 이눔시키, 뻘 짓 한다는 얘기만 나와 봐. 1년 놀림감이다.”
시현이가 오른 주먹을 불끈 내세우며 장난스럽게 이야기했다. 조심스럽게 얘기 꺼낸 선미언니를 안심시키려는 제스처다.
“그래, 우리 시현이도 이제 든든한 둘째 누나구나.” 선미가 등을 토닥여줬다.
보육원 아이들은 학부모 상담에서 언제나 1순위다. 물론, 학부모 상담에 학부모가 가지는 않는다. 애초에 부모가 없거나,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들뿐 이니까.
학생 생지부(생활지도기록부)를 볼 때 가장 눈에 띌 수밖에 없는 아이들이기에 언제나 학기 초반에 담임선생님을 면담하게 된다. 워낙 초반이라 어떤 아이인지, 뭐가 잘못됐는지 그런 이야기는 들을 수 없다. 그저, 사고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가장 먼저 부르게 되는 것이다.
그런 조금은 아니꼬운 생각이 들자 시현이의 표정이 찌푸려진다.
화장실 거울 앞에서 인상쓰고 있는 자신이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푸른 새벽빛에 비치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당연히 속옷도 입고 있다. 서둘러 세수를 마치고 나와 옷을 챙겨 입었다.
늘 입던대로, 검정색 스키니 진에 짙은 색의 청남방을 입는다. 안에는 하얀색 면티.
얼굴에 대충 로션을 펴 바르고, 선크림 기능이 있는 BB크림을 바른다. 마지막으로 립 틴트를 가볍게 발라주면 화장 끝.
절대로 눈에 띄는 화장을 하지도 않고, 치마를 입지도 않는다. 언제나 중성적인 느낌의 옷들만 입고 다닌다.
하지만 누구도 시현이를 중성적으로 보지 않는다. 본인조차도 한 번도 보지 못 한 친부모지만, 보는 사람마다 누구나 출신성분을 궁금해 하게 만드는 외모를 가지고 있다.
너무 튀는 것 같아 일부러 검정색으로 짙게 염색했지만, 시현이의 머리카락은 적갈색이다. 한 낮의 태양 아래에서는 타오르듯 붉다. 워낙에 하얀 피부는 보통 여성들의 그것과는 많이 다른 느낌이다. 뭐랄까. 더 많은 빛을 머금은 모습이랄까. 더 뽀얗게 빛난다. 날씨가 흐린 날에도 매끈한 우윳빛으로 보일 정도로 하얗다.
‘어쩌면 부모 중 누군가가 외국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들게 하는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다. 이질적인 느낌은 없지만, 깍아 놓은 듯 균형잡힌 아름다움이 그런 생각을 불러 일으킨다.
C컵이 가득 차는 가슴은 워낙 발육이 좋은 요즘 아이들 사이에서는 그리 튀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조막만한 얼굴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비율 좋은 몸매는, 한참 떨어진 곳에서도 쉽게 눈에 띈다. 164cm 그리 튀지 않는 키지만, 혹 모델이나 연예인이냐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 이유는 그런 탓이다.
그런 물음을 받을 때면 ‘남이사.’ 라는 생각과는 반대로 ‘아니에요. 고맙습니다.’ 하며 웃으며 대답해준다.
어쩐지 나쁜 애가 돼가는 것 같다. 선미언니가 알면 슬퍼하지 않을까.
머리를 살며시 흔들어 잡생각을 털어내자, 가슴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가 부드럽게 퍼져 나간다.
“어서 오세요.”
밝은 표정으로 첫 손님을 맞는다. 고참 알바생답게 자연스럽게 미소가 지어진다.
“어, 아..아메리카노. 더블샷으로.”
30대 초반 쯤에 안경뚱보는 늘 시키는 아메리카노를 시킨다. 아마도 시현이가 출근하기 전부터 골목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지 않을까 생각되는 이 뚱보. 카페 단골 중에 한 명이다.
금세 샷을 내리고 커피를 건네준다. 뚱보는 조용히 커피를 받아들고 카운터가 잘 보이는 구석자리로 가서 앉는다. 힐끔 힐끔. 알아차리기 쉬운 눈길을 보낸다.
올해로 5년째 이 카페에서 일하고 있는 시현이는 사장님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다. 워낙 부지런히 요령 피우지 않고 일도 열심히 하고, 싹싹하게 서비스도 잘한다. 한 번도 그녀 때문에 고객항의를 받은 적은 없었다.
게다가 시현이가 일하는 시간에는 언제나 가게가 가득 찬다. 3천원을 가지고 몇 시간이고 눌러앉아 있을 수 있는 이런 휴식처를 찾기도 힘들뿐더러, 알바생까지 미인이라면 더할 나위 없는 것이다.
“어이구..해 바뀌니까 더 예뻐진 것 같네그려.”
“고맙습니다.”
시현이가 배시시 웃으며 대답한다. 오랜만에 오신 할아버지뻘 손님에 인사는 그저 기분 좋은 칭찬으로 받아 넘기면 그만이다. 종일 진을 치고 앉아있는 오타쿠 같은 손님들은 골칫거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피는 잘 팔려 나간다. 대부분이 오피스에서 내려오는 남자 손님들인 탓에 회전률이 좋다.
일부러 등본을 내지 않아도 되는 개인 커피점을 찾아 알바를 시작한 게 벌써 5년째다. 16살의 중학교 중퇴 학력으로 용케도 자리를 얻었다. 시설 출신이라 등본을 내기 부끄럽다며, 대신 보증을 세우겠노라며 선미언니와 원장 선생님까지 동원 했던 게 엊그제 같다.
18살에 처음 주민등록증을 만들러 갔을 때 자신을 위 아래로 훑어보던 동사무소 직원에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선명하게 박혀있는 주민등록번호 뒷자리 1번과 그녀의 외모는 도저히 매치가 되지 않는 것이다. 5년이나 일했지만 사장님도, 다른 알바생도 아무도 그녀의 비밀은 모른다.
가능하면 평생,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다. 저주받은 몸뚱이의 비밀.
진우는 체육관을 나와 버스에 올라탔다.
보육원은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외진 곳에 있다. 말이 조금이지, 걸어서 가자면 40분은 걸릴 거리다.
창문 밖으로 어둔 들판의 풍경이 빠르게 지나간다. 뜨겁게 달아오르던 부동산 투자 열풍이 가라앉고 남은 건 멋대로 내버려진 황량한 들판뿐이다. 금방이라도 뚝딱 지어낼 것 같던 아파트들의 공사가 멈춘 지도 여러 해다. 짓다 만 건물들의 잔해와 문 닫은 공장, 이름 모를 잡초들이 허리까지 길게 자란 들판은 스산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인적이 적은 곳이라 가로등도 드문드문 떨어져 있어 그 느낌을 더 하고 있다.
아직은 차가운 3월의 바람이 잡초들 위를 지나간다.
“띠링-”
메시지 알림음이 울린다. 핸드폰을 꺼내보니 시현이의 문자가 와있다.
‘배고파. ㅜ_ㅜ 진우야, 나..호떡..’
귀엽다. 이럴 때만 이런 이모티콘을 보낸다. 체육관 끝나는 시간을 계산해서 용의주도하게 메시지를 보냈음이 틀림없다.
‘나 집 다 와 가. 체육관 일찍 나옴.’
답장이 없다. 지 볼 일만 보면 땡이냐.
무지개 모양으로 둥그렇게 OO보육원이라고 적힌 정문 간판 아래에 서면 자갈 깔린 마당 너머로 본관 마루가 훤히 보인다. 땅 값이 비싼 시내에는 이런 시설이 없다. 지어진지 오래 된, 외진 곳이라 가능한 건물이다. 분홍색 페인트가 칠해진 야트막한 담장과 껍질이 군데군데 벗겨진 철문이 오랜 세월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야, 또 그 머리하고 있냐.”
시현이가 뾰로통한 얼굴로 홱 돌아본다.
“뭐! 이게 얼마나 편한데. 넌 쓸데없이 왜 이렇게 일찍...”
까지 말하던 시현이가 잽싸게 달려와서 진우의 봉지를 받아든다. 아직 따뜻한 호떡이다.
“진우야! 누나 완전 감동!”
“야야, 됐거든요. 오버하지 마세요.”
포옹할 것처럼 두 팔을 크게 벌린 시현이의 손을 슬쩍 비켜내며, 뾰족하게 묶은 앞머리를 살짝 잡고 흔든다. 평소 같으면 발끈하겠지만 따끈따끈한 호떡은 시현이를 온순하게 만들었다. 앞머리를 올려 형광색 머리끈으로 돌돌 말아 뿔처럼 만들어 묶었다. 마치 망나니 머리 같다고 매일 놀리는 데도 저러고 있다.
“언니, 진우가 호떡 사왔어~”
"응, 나갈게. 잠깐만." 주방에서 선미의 목소리가 들린다.
“애들은? 자?”
집이 조용하다. 아직 아홉시 밖에 안 된 이른 시간이다.
“웅, 벌써 잠들었네. 학교생활에 적응하느라 피곤한가봐. 좀 전까지도 신나서 뛰어놀다가 언니한테 혼나더니. 넌 안 먹을꺼지? 냠냠.”
금세 호떡 하나를 다 먹어 치우고, 하나를 더 꺼낸다. 저렇게 먹고도 살이 안찌는 게 마냥 신기하다.
진우는 이불을 끌어당겼다. 도로롱 도로롱 동생들의 코고는 소리가 조용히 들려온다.
불을 끄고 자리에 눕자 다시 그 모습이 떠오른다. 김본좌랑 빠삭이 집에 놀러갔다가 본 그 영상이 문제였을까. 처음 봤을 때부터 닮았다는 느낌을 받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계속 생각 날 줄은 몰랐다. 뽀얀 피부 때문일까? 아니면 얼굴? 곰곰이 생각해보면 비슷한 부분은 없는 것 같은데, 자꾸 그런 꿈을 꾼다.
보육원에는 컴퓨터가 없기 때문에 진우가 야동을 접할 수 있는 기회는 다른 남학생들보다 적었다. 주체할 수 없이 끓어오르는 10대의 성욕은 억누를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가끔씩 친구집에 놀러가서 다 같이 야동을 감상하곤 했다. 절대고수 빠삭이의 컴퓨터에는 엄청난 수의 야동이 보관되어 있었다. 수학공식은 못 외우는 놈이 각 야동의 품번까지 외우고 있는 걸 보면 놀라울 정도다.
"야, 야동을 한 번도 안 본 남자가 있을까?"
진우의 물음에 대한 김본좌와 빠삭이의 반응은 똑같았다. "미친 새끼" 그런건 신인류도 아니고 그냥 외계인류라는게 그들의 주장이었다. 진우 역시 그 생각에 크게 동의한다.
따뜻한 이불에 눕자 몸이 풀리는 느낌이 든다. 오늘은 깨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으로 잠을 청했다.
금세 잠이 쏟아진다.
"휴."
방으로 들어와 문을 잠그고 나자 왠지 모를 한숨이 나왔다.
보육원에서 자기만의 방을 가진 사람은 원장선생님과 시현이, 단 둘 뿐이다. 제법 널찍한 원장선생님의 방과는 달리 시현이의 방은 좁고 춥다. 원래 창고였던 곳의 물건을 치우고 방으로 개조했다. 하지만 시현이는 이곳이 마음에 든다. 남 눈치보지 않고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몇 안되는 공간이다. 일부러 불을 켜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다. 한 줄기의 파르스름한 달빛이 방안으로 비쳐 들어오고 있다. 하루를 마무리 할 때면 언제나 이렇게 피곤하다. 남들보다 더 많이 신경쓰고, 더 많이 눈치보고, 더 밝은 척을 하다보니 생기는 부작용이다.
"그러지 않으면 당장에 도태 되겠지."
씁쓰레하니 자조 섞인 미소가 떠올랐다.
조금씩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버텨가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짊어진 짐의 무게가 더욱 무거워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높게 올라붙은 창문으로 옅은 푸른색의 새벽이 들어오고 있다.
3월의 새벽은 아직 싸늘하다.
인기척 하나 없는 시간, 오랜만에 거울 앞에서 자신을 비춰본다. 이런 몽환적인 어둠의 시간이 아니면 용기를 내어 자신을 바라볼 자신이 없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
티 하나 없는 하얗고 뽀얀 살결이 밝아오는 새벽빛을 받아 푸르스름하게 빛난다.
길고 촘촘한 속눈썹과 오뚝한 콧날을 따라 도톰하고 빨간 입술이 관능적으로 자리 잡고 있다. 보통 여자들보다 더 진한 색의 입술은 언제나 상대방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입술을 훔치고 목선을 따라 내려간다. 캔버스의 그려놓은 듯 완벽하니 매끈한 목선. 갓 샤워하고 나온 듯 뽀송뽀송한 목덜미는 그 자체로 뇌쇄적이다. 쇄골의 부드러운 흐름을 따라 가느다란 어깨와 가슴을 만난다. 적당한 모양과 C컵이 가득 차는 크기. 남자들의 시선은 그곳을 지나지 못 하고 머물게 된다. 누구의 눈이라도 끌어당기는 탐스러운 언덕. 그 언덕 한 가운데 위치한 두 개의 돌기는 새벽 공기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우쭐하니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봄날의 부드러운 능선을 닮은 오목한 허리라인을 지나, 탄력 있게 솟아오른 엉덩이에 이르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꼴깍-하는 군침 삼키는 소리를 내게 된다. 오리궁둥이라고 놀림받았던 어릴 때는 콤플렉스였었지만, 지금은 아무도 그렇게 놀리지 않는다. 그저 침만 삼킬 뿐이다.
그리고...
“드르륵-”
커터날이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새벽의 정적을 깬다. 푸른빛의 예기가 번쩍인다.
미세하게 떨리는 오른손이 칼을 쥐고 어둡고 깊은 곳을 향한다.
새벽이 만들어 낸 검은 장막보다도 더 어두운, 보통의 남자들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그것”이 성을 내고야 마는 바로 그 곳.
하지만, 탄력 넘치는 양쪽 허벅지 사이에 위치해 있어야 할, 어둡고 억센 덩굴로 가려져 있어야 하는 비밀스러운 동굴은 그곳에 없었다.
비밀의 동굴 대신 그곳에 있는 건 신이 만들어낸 최악의 실수뿐.
도톰한 가랑이 사이에는 어른 새끼손가락 두 마디나 될까 말까한 어떤 “돌기”가 튀어나와 있었다. 원래 있어야 할 위치보다도 더 아래, 원래 갖추어야 할 모양도 갖지 못한 체, 엉뚱한 곳에 솟아 있는 그것을 보며 단번에 남성의 성기를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기괴하게 비틀어져, 오직 용변의 기능만을 담당하게 된 말라붙은 그것.
푸른 새벽의 거울 속에서 자신의 그곳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있어야 할 것이 없고, 없어야 할 것이 있는 그곳.
떨림을 감추고 슬그머니 칼을 가져다 대어본다.
‘잘라내고 싶어.’
몇 번이나, 아니 몇 십번이나 떠올렸던 생각.
생각만으로도 어떤 날카로움이 가랑이 사이를 헤집는 기분이 든다. 마치 가랑이가 베어진 듯한 끔찍한 날카로움. 커터칼이 그녀의 손을 떠나 내동댕이쳐졌다.
“..흐흑..” 검지손가락을 입에 물고 흐느낌을 삼킨다.
“...야.야! 야, 뭐하냐고?”
“응?”
진우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요 며칠 계속 되는 꿈 탓에 멍 때리는 일이 잦아졌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넋 놓고 하냐? 표정은 어리바리해갖고.”
시현이가 막내에 입에 붙은 밥풀을 떼어내며 말했다. 떼어낸 밥풀을 과장되게 오물오물 씹어 먹자 막내가 까르르- 웃는다.
“언제. 내가 무슨 넋을 놨다고 그러냐? 왜 아침부터 시비야.”
“아~ 그러셔. 넋 안 놨구나. 언니, 난 진우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젓가락질 땐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봐. 다 내가 잘못 가르친 탓이네. 에휴.”
시현이가 한껏 과장된 동작으로 한숨을 쉰다. 그제야보니 식탁 앞에 밥풀이 수두룩하다. 얼굴이 빨개진다.
“진우야? 요새 무슨 일 있어?”
선미누나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야, 김진우! 야야!”
“어?! 어?”
저도 모르게 또 멍을 때렸나보다. 앞에서는 빠삭이가 이상스럽다는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다.
“내 얘기 들었냐?”
“아, 미안. 잠깐 딴 생각 좀 했다. 쏘리, 쏘리. 뭐라고 했냐?”
“하아~ 이 새끼. 이 형님이 지난 밤 체험한 판타스틱 드림월드에 대해 썰을 푸는데 한 눈을 팔아?”
“지랄하네. 빠삭이 이 새끼, 야동보고 자다가 몽정했단다.” 김본좌가 코웃음을 친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잠깐 진지해졌던 자신이 한심스럽다. 한껏 비웃는 표정으로 빠삭이한테 면박을 준다.
“뭐야, 븅신아. 그게 판타스틱한 드림월드냐. 조루새끼야.”
“야, 진짜 존나 생생했다니까. 그년이 내 위에 올라타서 자리를 딱 잡는데, 와 씨발 엉덩이가 그냥...”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고등학교의 아침시간 풍경이다.
남녀공학이지만, 남자반과 여자반이 나뉘어져 있는 진우네 반은 그냥 남고와 다름없다. 음담패설과 게임 이야기, 여자 이야기. 당연히 그 중에 90%는 여자이야기와 음담패설이 합쳐진 이야기다. 별 것도 없는 이야기를 어찌나 그렇게 맨날 할 수 있는지 신기하기도 한데, 듣고 또 들어도 재미있는 이야기는 그 것만 한 게 없다.
“아, 씨발 졸라 시끄럽네. 여자 한번 못 따먹어 본 동정 새끼들이 소설 쓰고 자빠졌냐.”
오른쪽 분단에 엎드려 있던 교복마이가 일어난다. 스물스물. 머리까지 덮고 있던 교복마이를 벗어내고 나온 면상엔 여드름이 가득하다. 속칭 우리 반 "짱"인 찌질이다. 중고등학교때 일진이라는 놈들이 다 그렇듯이 성격이 난폭해서 다른 학생들이 그냥 피하는 그런 종류의 인간이다.
“야야, 빠삭이 십새야. 여자 젖통은 빨아봤냐? 느그 엄마꺼 말고.”
찌질이 덕구 주변에 있던 말라깽이들이 킥킥거린다. 덕구 뒤에 졸졸 붙어 따라다니는 병풍들. 듣기로는 1학년 때부터 따라다니던 애들이라고 했다. 한심하다.
“아, 다..당연히 못 빨아봤지. 어..흠.”
“젖비린내 나는 새끼. 그러니 아침부터 야동 얘기나 하고 자빠졌지. 조용히 해라. 한번만 더 깨우면 진짜 확 죽여버린다.”
덕구는 전혀 무섭지 않은 엄포를 놓으며 다시 엎드렸다.
하지만 그 무섭지 않은 엄포가 빠삭이에게는 먹혀들었는지 조용해졌다. 아침부터 교실 분위기가 가라앉는다. 산통이 깨져 재미가 없어지자,진우도 책상에 엎드렸다.
곧바로 며칠 째 밤마다 진우를 괴롭히고 있는 문제가 떠오른다.
막내의 낮잠을 재우고 나자 이제야 집안이 조용하다.
시현이는 선미언니 곁으로 쪼르르 가서 앉았다. 산더미처럼 쌓인 빨래를 하나하나 갠다.
“시현아, 진우 무슨 일 있는 거 아니니? 요새 자꾸 그러더라.”
“몰라. 자꾸 멍 때리더라고. 학교에서 무슨 일 있나?”
선미언니가 고개를 젓는다. 빨래를 접는 솜씨가 능숙하다. 접은 빨래가 금세 수북하다.
“설마. 2학년 된 지 한 달도 안 됐는데? 아, 맞다. 시현아, 너 금요일 날 아르바이트 쉴 수 있어?”
“응? 아마..사장님한테 미리 말하면 괜찮을거야. 왜?”
시현이가 잔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물었다. 하늘하늘한 머리카락들이 자꾸 신경을 건드린다.
“아니, 학년 바뀌었잖아. 학부모 상담? 진우네 담임선생님께서 그런 거 한다고 하시더라. 우리 애들이야 늘 일등이잖아. 그런 건. 근데 그 날 언니랑 원장 선생님 서울 세미나 참석해야 될 것 같거든.”
“흠, 그래? 근데 그런 거 내가 가도 되나?”
“당연히 가도 되지. 진우누나잖아. 너도 이제 스무 살이고. 아르바이트 뺄 수 있으면 갖다 와줄래?”
“우웅...학..교라..조금 불편한데..”
시현이가 말끝을 흐리며 세탁물을 뒤적거린다. 학교...
“응, 그래서 물어 보는 거야. 많이 불편하면 나중에 뵙자고 말씀드리면 되니까 부담 갖지 말고.”
선미언니는 푸근한 목소리로 시현이를 다독인다. 15살이나 차이가 나는 언니는 늘 엄마같다.
“아니야. 내가 갈게. 부담 가질 게 뭐 있나. 진우 이눔시키, 뻘 짓 한다는 얘기만 나와 봐. 1년 놀림감이다.”
시현이가 오른 주먹을 불끈 내세우며 장난스럽게 이야기했다. 조심스럽게 얘기 꺼낸 선미언니를 안심시키려는 제스처다.
“그래, 우리 시현이도 이제 든든한 둘째 누나구나.” 선미가 등을 토닥여줬다.
보육원 아이들은 학부모 상담에서 언제나 1순위다. 물론, 학부모 상담에 학부모가 가지는 않는다. 애초에 부모가 없거나,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들뿐 이니까.
학생 생지부(생활지도기록부)를 볼 때 가장 눈에 띌 수밖에 없는 아이들이기에 언제나 학기 초반에 담임선생님을 면담하게 된다. 워낙 초반이라 어떤 아이인지, 뭐가 잘못됐는지 그런 이야기는 들을 수 없다. 그저, 사고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가장 먼저 부르게 되는 것이다.
그런 조금은 아니꼬운 생각이 들자 시현이의 표정이 찌푸려진다.
화장실 거울 앞에서 인상쓰고 있는 자신이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푸른 새벽빛에 비치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당연히 속옷도 입고 있다. 서둘러 세수를 마치고 나와 옷을 챙겨 입었다.
늘 입던대로, 검정색 스키니 진에 짙은 색의 청남방을 입는다. 안에는 하얀색 면티.
얼굴에 대충 로션을 펴 바르고, 선크림 기능이 있는 BB크림을 바른다. 마지막으로 립 틴트를 가볍게 발라주면 화장 끝.
절대로 눈에 띄는 화장을 하지도 않고, 치마를 입지도 않는다. 언제나 중성적인 느낌의 옷들만 입고 다닌다.
하지만 누구도 시현이를 중성적으로 보지 않는다. 본인조차도 한 번도 보지 못 한 친부모지만, 보는 사람마다 누구나 출신성분을 궁금해 하게 만드는 외모를 가지고 있다.
너무 튀는 것 같아 일부러 검정색으로 짙게 염색했지만, 시현이의 머리카락은 적갈색이다. 한 낮의 태양 아래에서는 타오르듯 붉다. 워낙에 하얀 피부는 보통 여성들의 그것과는 많이 다른 느낌이다. 뭐랄까. 더 많은 빛을 머금은 모습이랄까. 더 뽀얗게 빛난다. 날씨가 흐린 날에도 매끈한 우윳빛으로 보일 정도로 하얗다.
‘어쩌면 부모 중 누군가가 외국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들게 하는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다. 이질적인 느낌은 없지만, 깍아 놓은 듯 균형잡힌 아름다움이 그런 생각을 불러 일으킨다.
C컵이 가득 차는 가슴은 워낙 발육이 좋은 요즘 아이들 사이에서는 그리 튀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조막만한 얼굴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비율 좋은 몸매는, 한참 떨어진 곳에서도 쉽게 눈에 띈다. 164cm 그리 튀지 않는 키지만, 혹 모델이나 연예인이냐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 이유는 그런 탓이다.
그런 물음을 받을 때면 ‘남이사.’ 라는 생각과는 반대로 ‘아니에요. 고맙습니다.’ 하며 웃으며 대답해준다.
어쩐지 나쁜 애가 돼가는 것 같다. 선미언니가 알면 슬퍼하지 않을까.
머리를 살며시 흔들어 잡생각을 털어내자, 가슴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가 부드럽게 퍼져 나간다.
“어서 오세요.”
밝은 표정으로 첫 손님을 맞는다. 고참 알바생답게 자연스럽게 미소가 지어진다.
“어, 아..아메리카노. 더블샷으로.”
30대 초반 쯤에 안경뚱보는 늘 시키는 아메리카노를 시킨다. 아마도 시현이가 출근하기 전부터 골목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지 않을까 생각되는 이 뚱보. 카페 단골 중에 한 명이다.
금세 샷을 내리고 커피를 건네준다. 뚱보는 조용히 커피를 받아들고 카운터가 잘 보이는 구석자리로 가서 앉는다. 힐끔 힐끔. 알아차리기 쉬운 눈길을 보낸다.
올해로 5년째 이 카페에서 일하고 있는 시현이는 사장님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다. 워낙 부지런히 요령 피우지 않고 일도 열심히 하고, 싹싹하게 서비스도 잘한다. 한 번도 그녀 때문에 고객항의를 받은 적은 없었다.
게다가 시현이가 일하는 시간에는 언제나 가게가 가득 찬다. 3천원을 가지고 몇 시간이고 눌러앉아 있을 수 있는 이런 휴식처를 찾기도 힘들뿐더러, 알바생까지 미인이라면 더할 나위 없는 것이다.
“어이구..해 바뀌니까 더 예뻐진 것 같네그려.”
“고맙습니다.”
시현이가 배시시 웃으며 대답한다. 오랜만에 오신 할아버지뻘 손님에 인사는 그저 기분 좋은 칭찬으로 받아 넘기면 그만이다. 종일 진을 치고 앉아있는 오타쿠 같은 손님들은 골칫거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피는 잘 팔려 나간다. 대부분이 오피스에서 내려오는 남자 손님들인 탓에 회전률이 좋다.
일부러 등본을 내지 않아도 되는 개인 커피점을 찾아 알바를 시작한 게 벌써 5년째다. 16살의 중학교 중퇴 학력으로 용케도 자리를 얻었다. 시설 출신이라 등본을 내기 부끄럽다며, 대신 보증을 세우겠노라며 선미언니와 원장 선생님까지 동원 했던 게 엊그제 같다.
18살에 처음 주민등록증을 만들러 갔을 때 자신을 위 아래로 훑어보던 동사무소 직원에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선명하게 박혀있는 주민등록번호 뒷자리 1번과 그녀의 외모는 도저히 매치가 되지 않는 것이다. 5년이나 일했지만 사장님도, 다른 알바생도 아무도 그녀의 비밀은 모른다.
가능하면 평생,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다. 저주받은 몸뚱이의 비밀.
진우는 체육관을 나와 버스에 올라탔다.
보육원은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외진 곳에 있다. 말이 조금이지, 걸어서 가자면 40분은 걸릴 거리다.
창문 밖으로 어둔 들판의 풍경이 빠르게 지나간다. 뜨겁게 달아오르던 부동산 투자 열풍이 가라앉고 남은 건 멋대로 내버려진 황량한 들판뿐이다. 금방이라도 뚝딱 지어낼 것 같던 아파트들의 공사가 멈춘 지도 여러 해다. 짓다 만 건물들의 잔해와 문 닫은 공장, 이름 모를 잡초들이 허리까지 길게 자란 들판은 스산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인적이 적은 곳이라 가로등도 드문드문 떨어져 있어 그 느낌을 더 하고 있다.
아직은 차가운 3월의 바람이 잡초들 위를 지나간다.
“띠링-”
메시지 알림음이 울린다. 핸드폰을 꺼내보니 시현이의 문자가 와있다.
‘배고파. ㅜ_ㅜ 진우야, 나..호떡..’
귀엽다. 이럴 때만 이런 이모티콘을 보낸다. 체육관 끝나는 시간을 계산해서 용의주도하게 메시지를 보냈음이 틀림없다.
‘나 집 다 와 가. 체육관 일찍 나옴.’
답장이 없다. 지 볼 일만 보면 땡이냐.
무지개 모양으로 둥그렇게 OO보육원이라고 적힌 정문 간판 아래에 서면 자갈 깔린 마당 너머로 본관 마루가 훤히 보인다. 땅 값이 비싼 시내에는 이런 시설이 없다. 지어진지 오래 된, 외진 곳이라 가능한 건물이다. 분홍색 페인트가 칠해진 야트막한 담장과 껍질이 군데군데 벗겨진 철문이 오랜 세월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야, 또 그 머리하고 있냐.”
시현이가 뾰로통한 얼굴로 홱 돌아본다.
“뭐! 이게 얼마나 편한데. 넌 쓸데없이 왜 이렇게 일찍...”
까지 말하던 시현이가 잽싸게 달려와서 진우의 봉지를 받아든다. 아직 따뜻한 호떡이다.
“진우야! 누나 완전 감동!”
“야야, 됐거든요. 오버하지 마세요.”
포옹할 것처럼 두 팔을 크게 벌린 시현이의 손을 슬쩍 비켜내며, 뾰족하게 묶은 앞머리를 살짝 잡고 흔든다. 평소 같으면 발끈하겠지만 따끈따끈한 호떡은 시현이를 온순하게 만들었다. 앞머리를 올려 형광색 머리끈으로 돌돌 말아 뿔처럼 만들어 묶었다. 마치 망나니 머리 같다고 매일 놀리는 데도 저러고 있다.
“언니, 진우가 호떡 사왔어~”
"응, 나갈게. 잠깐만." 주방에서 선미의 목소리가 들린다.
“애들은? 자?”
집이 조용하다. 아직 아홉시 밖에 안 된 이른 시간이다.
“웅, 벌써 잠들었네. 학교생활에 적응하느라 피곤한가봐. 좀 전까지도 신나서 뛰어놀다가 언니한테 혼나더니. 넌 안 먹을꺼지? 냠냠.”
금세 호떡 하나를 다 먹어 치우고, 하나를 더 꺼낸다. 저렇게 먹고도 살이 안찌는 게 마냥 신기하다.
진우는 이불을 끌어당겼다. 도로롱 도로롱 동생들의 코고는 소리가 조용히 들려온다.
불을 끄고 자리에 눕자 다시 그 모습이 떠오른다. 김본좌랑 빠삭이 집에 놀러갔다가 본 그 영상이 문제였을까. 처음 봤을 때부터 닮았다는 느낌을 받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계속 생각 날 줄은 몰랐다. 뽀얀 피부 때문일까? 아니면 얼굴? 곰곰이 생각해보면 비슷한 부분은 없는 것 같은데, 자꾸 그런 꿈을 꾼다.
보육원에는 컴퓨터가 없기 때문에 진우가 야동을 접할 수 있는 기회는 다른 남학생들보다 적었다. 주체할 수 없이 끓어오르는 10대의 성욕은 억누를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가끔씩 친구집에 놀러가서 다 같이 야동을 감상하곤 했다. 절대고수 빠삭이의 컴퓨터에는 엄청난 수의 야동이 보관되어 있었다. 수학공식은 못 외우는 놈이 각 야동의 품번까지 외우고 있는 걸 보면 놀라울 정도다.
"야, 야동을 한 번도 안 본 남자가 있을까?"
진우의 물음에 대한 김본좌와 빠삭이의 반응은 똑같았다. "미친 새끼" 그런건 신인류도 아니고 그냥 외계인류라는게 그들의 주장이었다. 진우 역시 그 생각에 크게 동의한다.
따뜻한 이불에 눕자 몸이 풀리는 느낌이 든다. 오늘은 깨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으로 잠을 청했다.
금세 잠이 쏟아진다.
"휴."
방으로 들어와 문을 잠그고 나자 왠지 모를 한숨이 나왔다.
보육원에서 자기만의 방을 가진 사람은 원장선생님과 시현이, 단 둘 뿐이다. 제법 널찍한 원장선생님의 방과는 달리 시현이의 방은 좁고 춥다. 원래 창고였던 곳의 물건을 치우고 방으로 개조했다. 하지만 시현이는 이곳이 마음에 든다. 남 눈치보지 않고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몇 안되는 공간이다. 일부러 불을 켜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다. 한 줄기의 파르스름한 달빛이 방안으로 비쳐 들어오고 있다. 하루를 마무리 할 때면 언제나 이렇게 피곤하다. 남들보다 더 많이 신경쓰고, 더 많이 눈치보고, 더 밝은 척을 하다보니 생기는 부작용이다.
"그러지 않으면 당장에 도태 되겠지."
씁쓰레하니 자조 섞인 미소가 떠올랐다.
조금씩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버텨가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짊어진 짐의 무게가 더욱 무거워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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