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여름은 어느 해보다도 뜨거웠다. 매년 듣는 말처럼 느껴지긴 했지만, 100년만의 기록을 갱신했다는 뉴스가 연일 방송됐다. 아스팔트에선 아지랑이 같은 김이 오르고, 방 안은 찜통같은 그런 뜨거운 계절이었다.
진우의 생일 이후로 둘의 관계는 더욱 연인다워졌다.
"아, 왜! 응? 한번만?"
"안돼."
"괜찮다니까, 진짜?!"
"안된다고 했어. 안되는 건 안되는거야."
진우는 애타게 애원했지만 , 시현이는 그야말로 눈 하나 꿈쩍 않았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왜 하필 그때 코피가 터져서.
며칠 전 아침 식사시간이었다. 평소와 같이 기도를 마치고 식사를 하려는 순간, 진우의 코에서 코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어, 진우형 코에서 피나!!" 동생의 외침과 함께 한바탕 소란스러워졌다. 누구나 잔뜩 가지고 있지만 아무에게도 친근하지 않은 액체. 아이들이 소란을 피우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진우의 코피에 묘하게 반응하는 사람들도 있다. 선미의 눈이 살짝 가늘어지고, 시현이가 얼굴이 빨개진 채 급히 고개를 숙인 것 같은 반응들 말이다.
"최대 3일에 한 번만이야. 그 이상은 안돼."
말을 꺼내는 시현이의 태도는 단호했다. TV에서 의사가 하는 말을 들었다는 말을 덧붙였다. 진우는 난데없이 이름도 모를 의사에게 분노를 갖게 되었다.
매일 아침마다 로드웍을 하고, 학교가 끝나고 나서는 체육관에 가서 몇 시간이고 운동을 한다. 그러고는 집에 돌아와서는 시현이와 은밀한 관계를 갖는 것이다. 물론, 시현이는 여전히 아래쪽의 터치를 허락하지 않았기에 입이나 손 등으로 서로를 애무해주며 즐길 뿐이었다. 하지만, 혈기 넘치는 진우에겐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자극이었다. 특히, 진우의 분신을 입에 물고 올려다보는 시현이의 얼굴은 정말 섹시했다. 시현이도 좀 더 줄여야지 하면서도 진우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어 받아주곤 했다. 코피가 터지기 전까진 말이다.
하지만 그런 부분을 제외한다면 둘의 관계는 더욱 진하고, 깊어졌다.
진우는 생일 이후로 가끔씩 시현이의 방에서 잠을 잤다. 아침 로드웍 때문에 보육원의 누구보다 일찍 일어났기에 가능한 일이다. 시현이의 보드랍고 앙증맞은 육체를 끌어안고 있노라면 세상에 부러운게 없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가끔은 시현이가 진우를 안고 자기도 했는데, 앙증맞은 육체에 걸맞지 않는 풍만한 가슴은, 엄마의 품을 모르는 진우로서는 처음 마주하는 포근함이었다. 그런 날은 어김없이 숙면을 취했다.
한창 찌는 듯 더웠던 어느 날, 시현이와 진우가 오랜만에 교회에 방문했었다. 좋은 제안을 해준 사람을 인사차 만나보기 위해서였다.
"안녕하세요...음.." 시현이가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거리자,
"오빠라고 불러야지." 라며 성우가 말을 받아준다. 175cm 정도되는 키에 하얀 얼굴, 깔끔하고 단정한 스타일이 우락부락한 남자 느낌을 주는 진우랑은 정 반대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교회오빠였다.
"네, 오...오빠." 시현이의 옆에 있던 진우의 눈꼬리가 저도 모르게 살짝 사나워진다. 티를 내지 않기 위해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는 척 한다.
초등학교 졸업 때까지 성실하게 교회를 다니던 시현이였기에, 이미 안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냥 안면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잘 아는 사람이랄까. 시현이가 주일학교를 다닐 무렵에 주일학교 교사로 시현이를 담당하던 오빠였다. 당시에는 선생님이라고 불렀었다. 상당한 재력을 가진 집안의 자제인데다 신앙심도 깊고, 공부도 잘해 유명 대학을 졸업하고 개인 사업을 하는 중이다. 외모도 준수해서 여자들에게 인기도 많다.
종교생활을 열심히 하면서도 시현이의 상태를 이해할 정도로 개방적인 사고방식도 가졌고, 곤란해하는 시현이에게 "오빠라고 부르라"고 말할 정도의 센스도 있는, 그야말로 엄친아(엄마친구아들)이다.
시설에서 독립해야 하는 시현이를 위해 원장선생님이 교회에 기도제목을 올린지 반 년정도 됐을까. 여름 중순쯤 됐을 때, 좋은 제안을 해줬다. 부모님이 원룸형 오피스텔 건물을 가지고 있는데, 그 곳에 시현이의 방을 마련해주겠다는 이야기였다. 이미 안면이 있는 사이였고, 중학교 때부터 열심히 자기 일을 해온 시현이의 사정도 알기에 보증금도 없이 공과금 부담 수준의 월세로만 받아주겠다고 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좋은 조건이였기에 시현이와 선미가 뛸 듯이 기뻐하는 것도 당연했다.
"뭘, 이 정도야. 공짜로 주는 것도 아니고, 어처피 월세는 내는 거니까 그렇게까지 고마워 할 필요 없어." 연신 허리를 숙이는 시현이를 말렸다.
진우는 그런 모습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같이 교회를 다녔지만, 시현이와는 다른 학년이었기에 성우와는 안면이 없다. 진우 본인조차도 이유를 알지 못했지만, 왠지 자꾸 눈꼴이 시린 느낌이 들었다.
교회에서 돌아온 날 밤, 시현이는 진우의 태도가 조금 이상함을 느꼈다.
"아, 잠깐만...진우야...아...아파.." 허벅지에 앉아있던 시현이가 진우의 손을 감싸쥔다. 가슴을 주무르는 진우의 손길이 너무 거칠었다.
"어? 어..미안.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나봐."
"으응, 진우야, 무슨 기분 안 좋은 일 있어?" 시현이가 몸을 돌려 진우를 마주보며 물었다. 진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도리질 했다.
"그런거 없어."
"오늘 좀 불편해보여." 시현이가 걱정되는 말투로 재차 물었지만, 진우는 그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진우의 생일 이후로 더 강하게 굳어진 남녀관계는 더 복잡한 감정들을 빚어냈다. 긍정적인 감정과 부정적인 감정 모두 더 폭도 넓어지고, 깊이도 깊어졌다. 시현이가 낯선 남자에게 "오빠"라고 부르며 사근사근한 미소를 지어주는 모습이 마음에 들리 없다. 특히, 그 남자가 본인과는 비교도 안되는 조건을 가진 사람인데다가, 자신이 해줄 수 없는 것을 시현이에게 베푸는 것에 대해 상당히 격한 질투심을 느꼈다.
다만, 진우는 자신의 감정을 정확히 이해할 정도로 성숙한 나이가 아니었기에 본인조차도 얼마나 질투를 하고 있는지는 알 지 못했다.
시설 아이들이 일반 가정에 아이들과 비교되게 갖는 특징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눈에 두드러지는 특징은 애정에 대한 욕구다. 부모의 사랑을 겪어보기는 커녕, "버려졌다"는 의식을 가진 시설 아이들은 어릴 적부터 많은 애정과 관심을 갈구한다. 하지만 아무리 선미나 시현이가 관심과 사랑을 준다고 해도 그런 욕구를 채우기엔 턱 없이 적을 수 밖에 없다. 일단 일반 가정과는 아이들의 숫자부터 달랐다.
또한 이런 애정의 욕구와 함께 자라는 성향이 있는데, 바로 집착이다. 무언가를 얻을 기회가 적은 시설 아이들은, 자신들이 얻게 된 것들을 소중히 여길 수 밖에 없기 마련이다. 만약 누군가가 이런 소중한 것을 훔치거나 빼앗으려고 한다면 매우 격렬하게 저항한다. 이런 저항은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격렬하게 나타나는 탓에, 영문을 모르는 사람들은 놀라거나 심지어는 무서워하기까지 한다.
9월에 접어들어 개학즈음에는 한결 바람이 선선해졌다. 아직도 낮에는 찜통더위였지만, 아침 저녁으로는 한결 숨통이 트이는 날씨였다.
진우는 한 여름에도 쉼 없이 운동을 계속했다. 고등학생 때부터 선수로 나서는 케이스도 적지 않은 격투기의 특성상 어리다며 자위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아직은 프로데뷔에 대한 마음은 없었지만, 그리 멀지않았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운동을 마치고 옷을 짜면 땀이 한바가지씩 나올 정도였다. 그날도 한창 운동중이던 시간에 시현이가 찾아왔다. 평소처럼 수수한 차림이다.
"와!!! 시현아!!" 억관이 형이 끌어안을듯이 과장되게 팔을 벌려 환영해주자, 시현이가 미소를 지으며 살짝 기댔다가 떨어진다. 벌써 횟수로 5년이나 알고 지낸 탓에 큰 어색함 없이 행동한다. "어, 누나!!!" "시현이 왔네. 왜 이렇게 오랜만에 왔어" "얼굴 좀 자주 보여줘." 여기저기서 와글와글 한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원생들을 감독하던 관장도 반가운 얼굴로 맞아준다. 음료 상자를 내밀자 막내가 얼른 나와 받아간다.
"오랜만에 진우랑 데이트 좀 하려구요." 시현이가 싱긋 웃으며 얘기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데이트는 누나-동생의 데이트로 받아들여진다. 펀치볼을 치고 있던 진우의 표정이 벌쭉 벌어진다.
"저 자식, 표정 봐라. 야, 김진우. 글러브 끼고 링 올라가." 관장이 괜히 스파링을 붙인다. "억관아, 알지?" 억관이가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아, 뭐에요 갑자기." 진우가 항변하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결국, 연습용 글러브를 끼고 링으로 올라간다.
"파이팅!!" 링 옆 벤치에 자리잡은 시현이가 손을 들어 응원 해준다.
"빠이이이티이이이이잉----!!!!!!" 다른 연습생들이 한 목소리로 체육관이 떠나갈듯 응원 한다. 그들이 누구를 응원하는지는 묻지 않아도 뻔했다.
오랜만에 시현이 앞에서 하는 스파링이라 꼭 이기고 싶었지만, 결국 서브미션 기술에 당해 패배했다.
"크캬캬캬캬캬캬" 억관이의 웃음소리가 유독 사악하게 들린다.
"아, 진짜." 체육관을 나오며 진우가 괜히 투정섞인 한탄을 내뱉는다. 시현이 앞에서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지만 엉망으로 깨져버렸다. 암바를 당하기 전에도 파운딩 펀치를 무수히 얻어맞았다.
"왜? 멋있었어. 예전보다 훨씬 늘었잖아? 저번엔 억관이 오빠한테 꼼짝도 못했었는데."
"이기는 모습 보여주고 싶었단 말야."
"나중에 보여주면 되잖아. 진짜 시합에서." 시현이가 진우를 토닥여준다.
"치...알았어. 근데 웬 일이야? 체육관엘 다 오고. 오랜만이네?"
"그냥. 너랑 같이 집에 가고 싶어서. 요새 밤 날씨 완전 좋으니까."
시내 가로수에도 드문드문 붉은 물이 드는 계절이다.
"하긴..그렇긴 하지. 나야 언제나 환영이지! 맥주 한잔 할래?" 진우가 무심코 맥주 얘기를 해버렸다. 집에서라면 절대 꺼내지 않았을 얘기지만, 운동을 마치고 나서는 가끔씩 먹다보니 별 생각없이 저도 모르게 말하고 말았다. 당장 시현이 눈이 가늘어진다.
"야, 너 맥주도 마셔?"
"어,어?? 어...가끔."
"미성년자한테 누가 술을 팔아?"
"아니, 체육관 형들이 사주지." 시현이가 고개를 홱 돌려 체육관 창문을 째려본다. "이 오빠들 안되겠네."
"많이 안 마셔. 그냥 한잔씩 마시는 정돈데, 뭐."
"그래도...미성년자잖아."
"내가 아직도 미성년자로 보여?" 진우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시현이를 쳐다봤다. 당연히 미성년자지, 라고 대답하려던 시현이는 그 미소의 의미를 알아차리고 진우의 어깨를 툭 쳤다.
"그래, 그럼 한 잔할까. 나, 사실 술 한 번도 안 먹어봤는데. 괜찮겠지?"
"진짜? 한 번도 안 먹어봤어?"
"응, 뭐 마실 일이 있나. 가끔 카페 회식에서나 마실까 하는데, 나 스무살 되고 나서는 한번도 그런 자리가 없었네."
진우는 왠지 모를 뿌듯함을 느꼈다. 아무 것도 아닌 일이지만 괜히 시현이의 순수함이 느껴져서 좋았다. 시현이의 몸이 어쨌든간에, 진우에겐 그저 "내 여자"일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래, 그럼 오늘 한번 마셔보자! 따라와. 여기 뚫리는 편의점 있으니까."
당연히 진우는 건물을 돌아 커터가 일하고 있는 편의점을 찾았다. 미성년자인 진우가 술을 살 수 있는 곳은 여기 뿐이었다. 딱히 술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이곳저곳 다니며 뚫리는 가게를 찾을 이유가 없었다.
한창 심심하던 차에 진우가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오자 함박웃음을 짓던 미소는, 뒤따라 들어오는 시현이를 보자 똥 씹은 표정이 된다.
"나 이 여자 본 적 있는데." 조금 떨떠름한 미소의 말투에 시현이가 괜히 당황한다. 미소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진우는 전혀 개의치 않고 대용량 맥주 3캔을 가져왔다. "니가 얘를 어디서 봐?" 자연스럽게 "얘"라고 지칭하는 말에 흠칫하는건 시현이 뿐이었다. 왠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존재를 드러내는게 불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우와 미소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
"선배, 핸드폰에 사진있던데?" 미소가 입술 한쪽을 조금 찡그린 채 말했다.
"그래? 언제 봤다냐. 예쁘지? 우리 여친님이시다." 진우가 시현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저도 모르게 손을 움츠리려던 시현이는, 그대로 진우에 손에 잡혔다.
"쩝..뭐 그러시네." 미소가 입맛을 다시며 손을 내민다. "신분증 주세요."
"야, 무슨 신분증. 그냥 계산해줘."
"아, 미성년자한테는 술 안팔아요. 신분증 주세요."
"와...진짜 개 꼬장이네. 평소엔 잘 팔았잖아."
"원래 법적으로 못 파는거.거.든.요. 신분증 없으면 안 팝니다." 언젠가 진우가 했던 말투를 그대로 따라한다. 계산하기 위해 지갑을 꺼냈던 시현이가 안절부절못하는 태도로 신분증을 슬쩍 내민다. 시현이가 왜 그런 태도를 취하는지 잘 알고 있는 진우가 신분증을 받아 카운터에 내밀었다. 주민등록번호 뒷자리를 교묘하게 가렸다. 미소의 표정이 조금 일그러졌다. 그냥 아니꼬와서 꼬투리를 잡았을 뿐이다. 포토샵도 안한 신분증 사진이 참 예쁘다.
"2살 많네....언니 예쁜데, 왜 이런 애랑 사귀어요?" 진우와 시현이의 관계를 모르는 미소가 물었지만, 시현이는 그저 난감한 미소만 지을 뿐이다. 돌려준 신분증을 얼른 받아 지갑에 넣었다.
"야, 알바 수고해라. 손님이랑 싸우지 말고." 진우가 혀를 내밀며 나가고 나자 다시금 편의점이 조용해진다.
"...씨발..나쁜 새끼.." 여름방학에도 가끔씩 카톡을 보냈지만, 돌아오는 건 늘 시크무심한 답장 뿐이더니 갑자기 엄청 예쁜 여자를 데리고 나타나서 여자친구란다. "고자나 돼라, 이 새끼야!!" 악에 받쳐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들어오던 손님이 깜짝 놀라 쳐다본다.
"..........어서 오세요."
체육관 사람들이 볼까봐 두리번 거리는 시현이를 덥썩 잡고 공원으로 간다. 커터를 처음 봤던 그 공원이다. 공원이라기엔 조금 작아서 아기자기한 놀이터 느낌을 준다.
"아, 꼬시다. 그거."
"아는 애였어?"
"어? 응. 우리학교 후밴데. 완전 날라리야."
"친해보이더라."
"친하긴. 자꾸 귀찮게 해서 짜증나는데."
진우는 무심결에 대답하다가 시현이를 슬쩍 쳐다봤다. 왠지 표정이 조금 뾰로통하다.
"질투해?"
"질투는 무슨...그런거 아니거든."
뾰로통한 얼굴로 대답하는 시현이가 정말 사랑스럽다. 진우는 잽싸게 고갤 숙여 시현이의 볼에 입을 맞췄다.
"야, 누가 보면 어떡하려고 그래."
"보긴 누가 봐. 또 보면 좀 어떠냐?"
"체육관 근처잖아."
시현이가 연신 두리번 거린다. 어처피 시현이의 몸에 대해 아는 사람은 가족들뿐이지만 괜히 조심스럽다. 몸이 아니더라도, 누나로 알고 있는 사람들의 눈도 신경쓰인다. 시현이는 진우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과자를 뜯느라 정신이 팔린 진우의 옆 얼굴. 시현이는 진우가 아는 여자들에 대해선 전혀 모른다. 학교에서 어떤 여자를 만나는지, 누구랑 연락을 하는지, 누구랑 친한지. 미소는 시현이가 처음 본 여자"친구"였다. 저도 모르게 말투가 조금 뾰로통해졌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자, 마셔." 진우가 맥주 캔을 따서 건네준다.
"이거 좀 많은거 아니야? 작은거 사지."
"걱정마, 걱정마. 남으면 내가 다 먹을꺼니까."
입을 슬쩍 대 마셔본다.
"으...뭐야 이게. 써." 시현이가 혀를 내밀고 인상을 찌푸린다. 가족들이랑 있을 때 보여주는 꾸밈없는 표정이다.
"너 그 표정엔 망나니 머리가 어울려." 진우가 타박하며 시현이 이마에 쪽- 하고 뽀뽀한다. "너 자꾸 뽀뽀해." 시현이가 예쁘게 눈을 흘기며 과자를 집어먹는다. 진우도 한모금 들이켠다. 촤아아-하는 시원한 청량감이 목을 훑고 내려간다. "캬! 이 맛이지!" 저도 모르게 감탄사가 나온다. 억관이와 마실 때는 당연히 이런 감탄사는 하지 않는다. 시현이와 함께 마신다는 것이 진우의 기분을 업시켰다.
"근데, 우리 이러는 거 처음인 것 같다. 그치." 시현이가 한모금을 홀짝거리며 말했다.
"응? 뭐? 술 마시는거? 처음 마신다며?"
"아니, 우리 둘이...음..데이트 하는거?"
시현이가 조금 말을 끌었다.
"어, 그런가?" 진우가 눈을 굴린다. "그러네, 진짜. 맨날 집이나 카페에서만 봤구나."
"응, 맨날 보는데서만 보니까."
"미안, 전혀 신경을 못 쓰고 있었네."
"뭐가 미안해. 나도 신경 못 쓰고 있었어."
진우가 시현이를 향해 맥주캔을 내밀어 건배를 한다. 툭- 가득 찬 맥주캔 부딪히는 소리가 뭉툭하게 났다.
"자주 갖자. 이런 시간." 시현이가 다시 한모금 마시며 씨익 웃는다.
"응, 나 좋다. 이런거." 가로등 불빛에 비친 얼굴이 귀엽다.
"끙차, 너랑은 ..에구..술 마시면 안되겠다.."
진우는 축 쳐진 시현이를 들쳐업고 걷고 있다. 정류장부터 시설까지의 거리도 꽤 된다.
"우우웅...미안해, 미안해." 시현이가 진우의 뒷목에 얼굴을 부빈다. 평소완 다른 맥주 냄새가 풍긴다.
"뭐 이렇게 술이 약해. 으잇차. 나 없을 때 다른 사람들이랑 술 마시지 마라." 재차 시현이를 끌어올린다. "알았지?"
"웅웅웅, 알았어, 알았어어..."
시현이는 500ml 맥주 한캔을 다 마시자 취해버렸다. 처음 마시는 술이라 본인 주량도 모르는 상태로 먹었기 때문이었다. 술 경험에 있어서는 시현이보다 딱히 낫다고 말하기도 뭣한 진우는 이렇게 술이 약한 사람이 있을꺼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다지 많이 나가는 몸무게는 아니였지만, 힘이 빠져서 축 쳐진 상태였기 때문에 애를 먹는다.
"어이구, 우리 여보야 왜 이렇게 무겁나."
가로등만 드문드문한 밝은 달밤이었다. 가득 찬 보름달이 길게 자란 잡초들 위로 별가루처럼 뿌려졌다. 어둔 밤이면 기괴하게 보이던 나무들조차 또렷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대낮같은 보름밤이었다. 달 밝은 거리를 둘만 걷게 되자 저절로 사랑스러운 애칭이 나온다. 사실 애칭을 쓰는건 진우뿐이었다. 생일 이후로 애칭을 사용하자고 했지만, 시현이는 한 번도 애칭을 부르지 않았다.
"히히힛, 여보야래..부끄러, 부끄러."
"너, 취하면 말 두 번씩 하는구나... 영차." 다시 한번 시현이를 끌어올렸다.
집에 도착하니 선미만 마루에 남아 있다.
"왜 이렇게 늦었어?" 낮게 묻는 선미의 말투에는 채근하는 느낌은 없다.
"으응, 얘랑 맥주 한 잔 먹었어." 진우가 빙글 돌려 시현이를 보여줬다. "언니, 헤헤, 나 왔어요오.." 시현이가 반갑게 팔을 흔들었다. 선미도 처음 보는 모습이었으리라.
"웬 술....빨리 씻고 자."
"응, 알았어. 내가 알아서 할게. 들어가서 자."
예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면 당연히 선미가 시현이를 챙겼겠지만, 이제는 별 말 없이 진우에게 맡긴다. 둘의 관계를 알게된 지 벌써 4개월이 넘었다. 진우가 얼마나 시현이를 끔찍하게 여기는 지 알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는다.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으로 들어간다.
시현이를 방에 눕히고 옷을 갈아입힌다. 생일 이후로 알게 알게 된 사실 중 하나는, 시현이의 속옷에 관한 것이었다. 시현이의 팬티는 모두 비키니타입의 팬티였다. 비키니타입에 팬티는 일반 팬티와는 달리 안쪽으로 두꺼운 패드가 덧대어져 있다. 물에 젖어 생기는, 일명 도끼자국을 방지하기 위한 아이디어겠지만, 시현이의 경우에는 용도가 조금 달랐다. 시현이의 작은 "그것"은 비키니패드에 가려지면 전혀 티가 나지 않았다.
생일 이벤트 때는 그런 팬티를 두개나 겹쳐 입었었다. 안쪽에 있는 건 얇은 이너비키니였지만 얼마나 신경쓰였으면 그랬을까. 그렇게 걱정하면서도 그런 모습을 보여줬다는게 더욱 사랑스럽다.
옷을 다 갈아입히고도, 가글을 시키느라 또 한참 씨름을 했다. 시현이는 입을 앙 다물고 도리도리를 했다. 언제나 미소 지으면서도 항상 어른스럽고 이지적인 느낌을 주던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의식적인 노력을 많이 하는 편이다보니, 의식이 흐려져버리자 완전히 색다른 모습이 드러난다. 자꾸 투정을 부리는 시현이에게 애먹으면서도 그 모습이 마냥 귀엽기만 하다.
"술 자리를 자주 만들어야겠어" 라는 생각이 자꾸 든다.
겨우 다 끝내고 시현이를 이불에 눕혔다. 시현이를 업고 오느라 살짝 땀이 뱄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 일어나려고 하자 시현이가 옷을 끌어 잡는다.
"어디가아...?"
"응, 나 옷 좀 갈아입구 올게."
말을 알아들었는지 시현이가 조용하다. 쌔근쌔근 숨소리만 들린다. 다시 몸을 일으키려고 했을 때였다.
"서바아앙...가지마아.."
움찔한 진우가 저도 모르게 몸을 돌려 시현이한테 몸을 숙인다.
"방금 뭐라고 했어?"
"아이잉, 부끄러어어..." 시현이가 이불로 얼굴을 가린다.
"한 번만 더 말해봐. 나 못 들었어." 진우가 손을 넣어 살짝 간질이자 귀엽게 킥킥 거린다.
"알아써..그만 간질여어.." 시현이의 눈동자가 평소보다 더 촉촉해보인다 ".....잉....서어방..... 사랑해요오..."
진우는 고갤 숙여 시현이에 입술에 키스했다.
조금 느린 박자로, 조금 더 길게.
성적 자극과는 다른 느낌의 사랑이 부드럽게 몸을 채우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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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날 돌아오니 마니 그런 얘기는 이제 안하는 걸로....(삐질)
조금씩 써서라도 올리게 되는군요.
읽어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추천,댓글,쪽지 주시는 적극적인 독자분들께는 더욱 큰 감사를 드립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자동차는 휘발유로 움직이지만, 작가는 추댓쪽(추천,댓글,쪽지)로 움직인달까요? 아주 별 생각을 다 합니다.
고맙습니다.
진우의 생일 이후로 둘의 관계는 더욱 연인다워졌다.
"아, 왜! 응? 한번만?"
"안돼."
"괜찮다니까, 진짜?!"
"안된다고 했어. 안되는 건 안되는거야."
진우는 애타게 애원했지만 , 시현이는 그야말로 눈 하나 꿈쩍 않았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왜 하필 그때 코피가 터져서.
며칠 전 아침 식사시간이었다. 평소와 같이 기도를 마치고 식사를 하려는 순간, 진우의 코에서 코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어, 진우형 코에서 피나!!" 동생의 외침과 함께 한바탕 소란스러워졌다. 누구나 잔뜩 가지고 있지만 아무에게도 친근하지 않은 액체. 아이들이 소란을 피우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진우의 코피에 묘하게 반응하는 사람들도 있다. 선미의 눈이 살짝 가늘어지고, 시현이가 얼굴이 빨개진 채 급히 고개를 숙인 것 같은 반응들 말이다.
"최대 3일에 한 번만이야. 그 이상은 안돼."
말을 꺼내는 시현이의 태도는 단호했다. TV에서 의사가 하는 말을 들었다는 말을 덧붙였다. 진우는 난데없이 이름도 모를 의사에게 분노를 갖게 되었다.
매일 아침마다 로드웍을 하고, 학교가 끝나고 나서는 체육관에 가서 몇 시간이고 운동을 한다. 그러고는 집에 돌아와서는 시현이와 은밀한 관계를 갖는 것이다. 물론, 시현이는 여전히 아래쪽의 터치를 허락하지 않았기에 입이나 손 등으로 서로를 애무해주며 즐길 뿐이었다. 하지만, 혈기 넘치는 진우에겐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자극이었다. 특히, 진우의 분신을 입에 물고 올려다보는 시현이의 얼굴은 정말 섹시했다. 시현이도 좀 더 줄여야지 하면서도 진우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어 받아주곤 했다. 코피가 터지기 전까진 말이다.
하지만 그런 부분을 제외한다면 둘의 관계는 더욱 진하고, 깊어졌다.
진우는 생일 이후로 가끔씩 시현이의 방에서 잠을 잤다. 아침 로드웍 때문에 보육원의 누구보다 일찍 일어났기에 가능한 일이다. 시현이의 보드랍고 앙증맞은 육체를 끌어안고 있노라면 세상에 부러운게 없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가끔은 시현이가 진우를 안고 자기도 했는데, 앙증맞은 육체에 걸맞지 않는 풍만한 가슴은, 엄마의 품을 모르는 진우로서는 처음 마주하는 포근함이었다. 그런 날은 어김없이 숙면을 취했다.
한창 찌는 듯 더웠던 어느 날, 시현이와 진우가 오랜만에 교회에 방문했었다. 좋은 제안을 해준 사람을 인사차 만나보기 위해서였다.
"안녕하세요...음.." 시현이가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거리자,
"오빠라고 불러야지." 라며 성우가 말을 받아준다. 175cm 정도되는 키에 하얀 얼굴, 깔끔하고 단정한 스타일이 우락부락한 남자 느낌을 주는 진우랑은 정 반대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교회오빠였다.
"네, 오...오빠." 시현이의 옆에 있던 진우의 눈꼬리가 저도 모르게 살짝 사나워진다. 티를 내지 않기 위해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는 척 한다.
초등학교 졸업 때까지 성실하게 교회를 다니던 시현이였기에, 이미 안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냥 안면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잘 아는 사람이랄까. 시현이가 주일학교를 다닐 무렵에 주일학교 교사로 시현이를 담당하던 오빠였다. 당시에는 선생님이라고 불렀었다. 상당한 재력을 가진 집안의 자제인데다 신앙심도 깊고, 공부도 잘해 유명 대학을 졸업하고 개인 사업을 하는 중이다. 외모도 준수해서 여자들에게 인기도 많다.
종교생활을 열심히 하면서도 시현이의 상태를 이해할 정도로 개방적인 사고방식도 가졌고, 곤란해하는 시현이에게 "오빠라고 부르라"고 말할 정도의 센스도 있는, 그야말로 엄친아(엄마친구아들)이다.
시설에서 독립해야 하는 시현이를 위해 원장선생님이 교회에 기도제목을 올린지 반 년정도 됐을까. 여름 중순쯤 됐을 때, 좋은 제안을 해줬다. 부모님이 원룸형 오피스텔 건물을 가지고 있는데, 그 곳에 시현이의 방을 마련해주겠다는 이야기였다. 이미 안면이 있는 사이였고, 중학교 때부터 열심히 자기 일을 해온 시현이의 사정도 알기에 보증금도 없이 공과금 부담 수준의 월세로만 받아주겠다고 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좋은 조건이였기에 시현이와 선미가 뛸 듯이 기뻐하는 것도 당연했다.
"뭘, 이 정도야. 공짜로 주는 것도 아니고, 어처피 월세는 내는 거니까 그렇게까지 고마워 할 필요 없어." 연신 허리를 숙이는 시현이를 말렸다.
진우는 그런 모습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같이 교회를 다녔지만, 시현이와는 다른 학년이었기에 성우와는 안면이 없다. 진우 본인조차도 이유를 알지 못했지만, 왠지 자꾸 눈꼴이 시린 느낌이 들었다.
교회에서 돌아온 날 밤, 시현이는 진우의 태도가 조금 이상함을 느꼈다.
"아, 잠깐만...진우야...아...아파.." 허벅지에 앉아있던 시현이가 진우의 손을 감싸쥔다. 가슴을 주무르는 진우의 손길이 너무 거칠었다.
"어? 어..미안.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나봐."
"으응, 진우야, 무슨 기분 안 좋은 일 있어?" 시현이가 몸을 돌려 진우를 마주보며 물었다. 진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도리질 했다.
"그런거 없어."
"오늘 좀 불편해보여." 시현이가 걱정되는 말투로 재차 물었지만, 진우는 그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진우의 생일 이후로 더 강하게 굳어진 남녀관계는 더 복잡한 감정들을 빚어냈다. 긍정적인 감정과 부정적인 감정 모두 더 폭도 넓어지고, 깊이도 깊어졌다. 시현이가 낯선 남자에게 "오빠"라고 부르며 사근사근한 미소를 지어주는 모습이 마음에 들리 없다. 특히, 그 남자가 본인과는 비교도 안되는 조건을 가진 사람인데다가, 자신이 해줄 수 없는 것을 시현이에게 베푸는 것에 대해 상당히 격한 질투심을 느꼈다.
다만, 진우는 자신의 감정을 정확히 이해할 정도로 성숙한 나이가 아니었기에 본인조차도 얼마나 질투를 하고 있는지는 알 지 못했다.
시설 아이들이 일반 가정에 아이들과 비교되게 갖는 특징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눈에 두드러지는 특징은 애정에 대한 욕구다. 부모의 사랑을 겪어보기는 커녕, "버려졌다"는 의식을 가진 시설 아이들은 어릴 적부터 많은 애정과 관심을 갈구한다. 하지만 아무리 선미나 시현이가 관심과 사랑을 준다고 해도 그런 욕구를 채우기엔 턱 없이 적을 수 밖에 없다. 일단 일반 가정과는 아이들의 숫자부터 달랐다.
또한 이런 애정의 욕구와 함께 자라는 성향이 있는데, 바로 집착이다. 무언가를 얻을 기회가 적은 시설 아이들은, 자신들이 얻게 된 것들을 소중히 여길 수 밖에 없기 마련이다. 만약 누군가가 이런 소중한 것을 훔치거나 빼앗으려고 한다면 매우 격렬하게 저항한다. 이런 저항은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격렬하게 나타나는 탓에, 영문을 모르는 사람들은 놀라거나 심지어는 무서워하기까지 한다.
9월에 접어들어 개학즈음에는 한결 바람이 선선해졌다. 아직도 낮에는 찜통더위였지만, 아침 저녁으로는 한결 숨통이 트이는 날씨였다.
진우는 한 여름에도 쉼 없이 운동을 계속했다. 고등학생 때부터 선수로 나서는 케이스도 적지 않은 격투기의 특성상 어리다며 자위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아직은 프로데뷔에 대한 마음은 없었지만, 그리 멀지않았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운동을 마치고 옷을 짜면 땀이 한바가지씩 나올 정도였다. 그날도 한창 운동중이던 시간에 시현이가 찾아왔다. 평소처럼 수수한 차림이다.
"와!!! 시현아!!" 억관이 형이 끌어안을듯이 과장되게 팔을 벌려 환영해주자, 시현이가 미소를 지으며 살짝 기댔다가 떨어진다. 벌써 횟수로 5년이나 알고 지낸 탓에 큰 어색함 없이 행동한다. "어, 누나!!!" "시현이 왔네. 왜 이렇게 오랜만에 왔어" "얼굴 좀 자주 보여줘." 여기저기서 와글와글 한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원생들을 감독하던 관장도 반가운 얼굴로 맞아준다. 음료 상자를 내밀자 막내가 얼른 나와 받아간다.
"오랜만에 진우랑 데이트 좀 하려구요." 시현이가 싱긋 웃으며 얘기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데이트는 누나-동생의 데이트로 받아들여진다. 펀치볼을 치고 있던 진우의 표정이 벌쭉 벌어진다.
"저 자식, 표정 봐라. 야, 김진우. 글러브 끼고 링 올라가." 관장이 괜히 스파링을 붙인다. "억관아, 알지?" 억관이가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아, 뭐에요 갑자기." 진우가 항변하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결국, 연습용 글러브를 끼고 링으로 올라간다.
"파이팅!!" 링 옆 벤치에 자리잡은 시현이가 손을 들어 응원 해준다.
"빠이이이티이이이이잉----!!!!!!" 다른 연습생들이 한 목소리로 체육관이 떠나갈듯 응원 한다. 그들이 누구를 응원하는지는 묻지 않아도 뻔했다.
오랜만에 시현이 앞에서 하는 스파링이라 꼭 이기고 싶었지만, 결국 서브미션 기술에 당해 패배했다.
"크캬캬캬캬캬캬" 억관이의 웃음소리가 유독 사악하게 들린다.
"아, 진짜." 체육관을 나오며 진우가 괜히 투정섞인 한탄을 내뱉는다. 시현이 앞에서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지만 엉망으로 깨져버렸다. 암바를 당하기 전에도 파운딩 펀치를 무수히 얻어맞았다.
"왜? 멋있었어. 예전보다 훨씬 늘었잖아? 저번엔 억관이 오빠한테 꼼짝도 못했었는데."
"이기는 모습 보여주고 싶었단 말야."
"나중에 보여주면 되잖아. 진짜 시합에서." 시현이가 진우를 토닥여준다.
"치...알았어. 근데 웬 일이야? 체육관엘 다 오고. 오랜만이네?"
"그냥. 너랑 같이 집에 가고 싶어서. 요새 밤 날씨 완전 좋으니까."
시내 가로수에도 드문드문 붉은 물이 드는 계절이다.
"하긴..그렇긴 하지. 나야 언제나 환영이지! 맥주 한잔 할래?" 진우가 무심코 맥주 얘기를 해버렸다. 집에서라면 절대 꺼내지 않았을 얘기지만, 운동을 마치고 나서는 가끔씩 먹다보니 별 생각없이 저도 모르게 말하고 말았다. 당장 시현이 눈이 가늘어진다.
"야, 너 맥주도 마셔?"
"어,어?? 어...가끔."
"미성년자한테 누가 술을 팔아?"
"아니, 체육관 형들이 사주지." 시현이가 고개를 홱 돌려 체육관 창문을 째려본다. "이 오빠들 안되겠네."
"많이 안 마셔. 그냥 한잔씩 마시는 정돈데, 뭐."
"그래도...미성년자잖아."
"내가 아직도 미성년자로 보여?" 진우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시현이를 쳐다봤다. 당연히 미성년자지, 라고 대답하려던 시현이는 그 미소의 의미를 알아차리고 진우의 어깨를 툭 쳤다.
"그래, 그럼 한 잔할까. 나, 사실 술 한 번도 안 먹어봤는데. 괜찮겠지?"
"진짜? 한 번도 안 먹어봤어?"
"응, 뭐 마실 일이 있나. 가끔 카페 회식에서나 마실까 하는데, 나 스무살 되고 나서는 한번도 그런 자리가 없었네."
진우는 왠지 모를 뿌듯함을 느꼈다. 아무 것도 아닌 일이지만 괜히 시현이의 순수함이 느껴져서 좋았다. 시현이의 몸이 어쨌든간에, 진우에겐 그저 "내 여자"일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래, 그럼 오늘 한번 마셔보자! 따라와. 여기 뚫리는 편의점 있으니까."
당연히 진우는 건물을 돌아 커터가 일하고 있는 편의점을 찾았다. 미성년자인 진우가 술을 살 수 있는 곳은 여기 뿐이었다. 딱히 술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이곳저곳 다니며 뚫리는 가게를 찾을 이유가 없었다.
한창 심심하던 차에 진우가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오자 함박웃음을 짓던 미소는, 뒤따라 들어오는 시현이를 보자 똥 씹은 표정이 된다.
"나 이 여자 본 적 있는데." 조금 떨떠름한 미소의 말투에 시현이가 괜히 당황한다. 미소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진우는 전혀 개의치 않고 대용량 맥주 3캔을 가져왔다. "니가 얘를 어디서 봐?" 자연스럽게 "얘"라고 지칭하는 말에 흠칫하는건 시현이 뿐이었다. 왠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존재를 드러내는게 불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우와 미소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
"선배, 핸드폰에 사진있던데?" 미소가 입술 한쪽을 조금 찡그린 채 말했다.
"그래? 언제 봤다냐. 예쁘지? 우리 여친님이시다." 진우가 시현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저도 모르게 손을 움츠리려던 시현이는, 그대로 진우에 손에 잡혔다.
"쩝..뭐 그러시네." 미소가 입맛을 다시며 손을 내민다. "신분증 주세요."
"야, 무슨 신분증. 그냥 계산해줘."
"아, 미성년자한테는 술 안팔아요. 신분증 주세요."
"와...진짜 개 꼬장이네. 평소엔 잘 팔았잖아."
"원래 법적으로 못 파는거.거.든.요. 신분증 없으면 안 팝니다." 언젠가 진우가 했던 말투를 그대로 따라한다. 계산하기 위해 지갑을 꺼냈던 시현이가 안절부절못하는 태도로 신분증을 슬쩍 내민다. 시현이가 왜 그런 태도를 취하는지 잘 알고 있는 진우가 신분증을 받아 카운터에 내밀었다. 주민등록번호 뒷자리를 교묘하게 가렸다. 미소의 표정이 조금 일그러졌다. 그냥 아니꼬와서 꼬투리를 잡았을 뿐이다. 포토샵도 안한 신분증 사진이 참 예쁘다.
"2살 많네....언니 예쁜데, 왜 이런 애랑 사귀어요?" 진우와 시현이의 관계를 모르는 미소가 물었지만, 시현이는 그저 난감한 미소만 지을 뿐이다. 돌려준 신분증을 얼른 받아 지갑에 넣었다.
"야, 알바 수고해라. 손님이랑 싸우지 말고." 진우가 혀를 내밀며 나가고 나자 다시금 편의점이 조용해진다.
"...씨발..나쁜 새끼.." 여름방학에도 가끔씩 카톡을 보냈지만, 돌아오는 건 늘 시크무심한 답장 뿐이더니 갑자기 엄청 예쁜 여자를 데리고 나타나서 여자친구란다. "고자나 돼라, 이 새끼야!!" 악에 받쳐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들어오던 손님이 깜짝 놀라 쳐다본다.
"..........어서 오세요."
체육관 사람들이 볼까봐 두리번 거리는 시현이를 덥썩 잡고 공원으로 간다. 커터를 처음 봤던 그 공원이다. 공원이라기엔 조금 작아서 아기자기한 놀이터 느낌을 준다.
"아, 꼬시다. 그거."
"아는 애였어?"
"어? 응. 우리학교 후밴데. 완전 날라리야."
"친해보이더라."
"친하긴. 자꾸 귀찮게 해서 짜증나는데."
진우는 무심결에 대답하다가 시현이를 슬쩍 쳐다봤다. 왠지 표정이 조금 뾰로통하다.
"질투해?"
"질투는 무슨...그런거 아니거든."
뾰로통한 얼굴로 대답하는 시현이가 정말 사랑스럽다. 진우는 잽싸게 고갤 숙여 시현이의 볼에 입을 맞췄다.
"야, 누가 보면 어떡하려고 그래."
"보긴 누가 봐. 또 보면 좀 어떠냐?"
"체육관 근처잖아."
시현이가 연신 두리번 거린다. 어처피 시현이의 몸에 대해 아는 사람은 가족들뿐이지만 괜히 조심스럽다. 몸이 아니더라도, 누나로 알고 있는 사람들의 눈도 신경쓰인다. 시현이는 진우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과자를 뜯느라 정신이 팔린 진우의 옆 얼굴. 시현이는 진우가 아는 여자들에 대해선 전혀 모른다. 학교에서 어떤 여자를 만나는지, 누구랑 연락을 하는지, 누구랑 친한지. 미소는 시현이가 처음 본 여자"친구"였다. 저도 모르게 말투가 조금 뾰로통해졌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자, 마셔." 진우가 맥주 캔을 따서 건네준다.
"이거 좀 많은거 아니야? 작은거 사지."
"걱정마, 걱정마. 남으면 내가 다 먹을꺼니까."
입을 슬쩍 대 마셔본다.
"으...뭐야 이게. 써." 시현이가 혀를 내밀고 인상을 찌푸린다. 가족들이랑 있을 때 보여주는 꾸밈없는 표정이다.
"너 그 표정엔 망나니 머리가 어울려." 진우가 타박하며 시현이 이마에 쪽- 하고 뽀뽀한다. "너 자꾸 뽀뽀해." 시현이가 예쁘게 눈을 흘기며 과자를 집어먹는다. 진우도 한모금 들이켠다. 촤아아-하는 시원한 청량감이 목을 훑고 내려간다. "캬! 이 맛이지!" 저도 모르게 감탄사가 나온다. 억관이와 마실 때는 당연히 이런 감탄사는 하지 않는다. 시현이와 함께 마신다는 것이 진우의 기분을 업시켰다.
"근데, 우리 이러는 거 처음인 것 같다. 그치." 시현이가 한모금을 홀짝거리며 말했다.
"응? 뭐? 술 마시는거? 처음 마신다며?"
"아니, 우리 둘이...음..데이트 하는거?"
시현이가 조금 말을 끌었다.
"어, 그런가?" 진우가 눈을 굴린다. "그러네, 진짜. 맨날 집이나 카페에서만 봤구나."
"응, 맨날 보는데서만 보니까."
"미안, 전혀 신경을 못 쓰고 있었네."
"뭐가 미안해. 나도 신경 못 쓰고 있었어."
진우가 시현이를 향해 맥주캔을 내밀어 건배를 한다. 툭- 가득 찬 맥주캔 부딪히는 소리가 뭉툭하게 났다.
"자주 갖자. 이런 시간." 시현이가 다시 한모금 마시며 씨익 웃는다.
"응, 나 좋다. 이런거." 가로등 불빛에 비친 얼굴이 귀엽다.
"끙차, 너랑은 ..에구..술 마시면 안되겠다.."
진우는 축 쳐진 시현이를 들쳐업고 걷고 있다. 정류장부터 시설까지의 거리도 꽤 된다.
"우우웅...미안해, 미안해." 시현이가 진우의 뒷목에 얼굴을 부빈다. 평소완 다른 맥주 냄새가 풍긴다.
"뭐 이렇게 술이 약해. 으잇차. 나 없을 때 다른 사람들이랑 술 마시지 마라." 재차 시현이를 끌어올린다. "알았지?"
"웅웅웅, 알았어, 알았어어..."
시현이는 500ml 맥주 한캔을 다 마시자 취해버렸다. 처음 마시는 술이라 본인 주량도 모르는 상태로 먹었기 때문이었다. 술 경험에 있어서는 시현이보다 딱히 낫다고 말하기도 뭣한 진우는 이렇게 술이 약한 사람이 있을꺼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다지 많이 나가는 몸무게는 아니였지만, 힘이 빠져서 축 쳐진 상태였기 때문에 애를 먹는다.
"어이구, 우리 여보야 왜 이렇게 무겁나."
가로등만 드문드문한 밝은 달밤이었다. 가득 찬 보름달이 길게 자란 잡초들 위로 별가루처럼 뿌려졌다. 어둔 밤이면 기괴하게 보이던 나무들조차 또렷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대낮같은 보름밤이었다. 달 밝은 거리를 둘만 걷게 되자 저절로 사랑스러운 애칭이 나온다. 사실 애칭을 쓰는건 진우뿐이었다. 생일 이후로 애칭을 사용하자고 했지만, 시현이는 한 번도 애칭을 부르지 않았다.
"히히힛, 여보야래..부끄러, 부끄러."
"너, 취하면 말 두 번씩 하는구나... 영차." 다시 한번 시현이를 끌어올렸다.
집에 도착하니 선미만 마루에 남아 있다.
"왜 이렇게 늦었어?" 낮게 묻는 선미의 말투에는 채근하는 느낌은 없다.
"으응, 얘랑 맥주 한 잔 먹었어." 진우가 빙글 돌려 시현이를 보여줬다. "언니, 헤헤, 나 왔어요오.." 시현이가 반갑게 팔을 흔들었다. 선미도 처음 보는 모습이었으리라.
"웬 술....빨리 씻고 자."
"응, 알았어. 내가 알아서 할게. 들어가서 자."
예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면 당연히 선미가 시현이를 챙겼겠지만, 이제는 별 말 없이 진우에게 맡긴다. 둘의 관계를 알게된 지 벌써 4개월이 넘었다. 진우가 얼마나 시현이를 끔찍하게 여기는 지 알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는다.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으로 들어간다.
시현이를 방에 눕히고 옷을 갈아입힌다. 생일 이후로 알게 알게 된 사실 중 하나는, 시현이의 속옷에 관한 것이었다. 시현이의 팬티는 모두 비키니타입의 팬티였다. 비키니타입에 팬티는 일반 팬티와는 달리 안쪽으로 두꺼운 패드가 덧대어져 있다. 물에 젖어 생기는, 일명 도끼자국을 방지하기 위한 아이디어겠지만, 시현이의 경우에는 용도가 조금 달랐다. 시현이의 작은 "그것"은 비키니패드에 가려지면 전혀 티가 나지 않았다.
생일 이벤트 때는 그런 팬티를 두개나 겹쳐 입었었다. 안쪽에 있는 건 얇은 이너비키니였지만 얼마나 신경쓰였으면 그랬을까. 그렇게 걱정하면서도 그런 모습을 보여줬다는게 더욱 사랑스럽다.
옷을 다 갈아입히고도, 가글을 시키느라 또 한참 씨름을 했다. 시현이는 입을 앙 다물고 도리도리를 했다. 언제나 미소 지으면서도 항상 어른스럽고 이지적인 느낌을 주던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의식적인 노력을 많이 하는 편이다보니, 의식이 흐려져버리자 완전히 색다른 모습이 드러난다. 자꾸 투정을 부리는 시현이에게 애먹으면서도 그 모습이 마냥 귀엽기만 하다.
"술 자리를 자주 만들어야겠어" 라는 생각이 자꾸 든다.
겨우 다 끝내고 시현이를 이불에 눕혔다. 시현이를 업고 오느라 살짝 땀이 뱄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 일어나려고 하자 시현이가 옷을 끌어 잡는다.
"어디가아...?"
"응, 나 옷 좀 갈아입구 올게."
말을 알아들었는지 시현이가 조용하다. 쌔근쌔근 숨소리만 들린다. 다시 몸을 일으키려고 했을 때였다.
"서바아앙...가지마아.."
움찔한 진우가 저도 모르게 몸을 돌려 시현이한테 몸을 숙인다.
"방금 뭐라고 했어?"
"아이잉, 부끄러어어..." 시현이가 이불로 얼굴을 가린다.
"한 번만 더 말해봐. 나 못 들었어." 진우가 손을 넣어 살짝 간질이자 귀엽게 킥킥 거린다.
"알아써..그만 간질여어.." 시현이의 눈동자가 평소보다 더 촉촉해보인다 ".....잉....서어방..... 사랑해요오..."
진우는 고갤 숙여 시현이에 입술에 키스했다.
조금 느린 박자로, 조금 더 길게.
성적 자극과는 다른 느낌의 사랑이 부드럽게 몸을 채우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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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날 돌아오니 마니 그런 얘기는 이제 안하는 걸로....(삐질)
조금씩 써서라도 올리게 되는군요.
읽어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추천,댓글,쪽지 주시는 적극적인 독자분들께는 더욱 큰 감사를 드립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자동차는 휘발유로 움직이지만, 작가는 추댓쪽(추천,댓글,쪽지)로 움직인달까요? 아주 별 생각을 다 합니다.
고맙습니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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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 황진이-19금 성인놀이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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