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은 카페 창문 너머로 사람들이 바쁘게 지나간다. 삼삼오오 무리 지어 가는 사람들, 다정한 미소를 띈 채 걸어가는 커플, 친구와 꺄르르 웃으며 걷는 여자들. 한 해의 마지막 날 시청 앞 번화가는 여느 때보다 북적거린다.
탁자에 팔을 괸 채 그 모습을 지켜보는 진우에게는 유독 커플들의 모습이 눈에 띈다. 세상을 다 가진 듯 만면에 웃음을 띈 커플들. 길 너머로 보이는 커다란 트리장식과 시청 광장을 둘러 싼 루미나리에(조명건축물) 장식물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저도 모르게 한숨이 쉬어진다.
"아, 이 새끼 또 궁상이네." 빠삭이가 진우의 어깨를 흔든다. "얼굴 좀 펴라, 마."
그 사건 이후로 김본좌와 빠삭이에게 속을 털어놨다. 자세한 이야긴 하지 않고, 그저 질투 때문에 손찌검을 했다, 어찌하면 좋겠느냐는 식으로만 이야기 했다. 그렇게나 순화해서 이야기 했음에도 불구하고 맹렬한 비난과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 "완전 쓰레기 새끼네!" 며칠이나 인간 취급도 못 받다가 오늘에서야 연락을 받고 나왔다. 마지막 날인데 궁상떨지 말고 시청 앞에서 하는 콘서트나 보자는 김본좌의 제안이었다.
"근데...쩝. 어째 솔로 누나들은 없다?"
"솔로들이 이런 날에 여기 나오고 싶겠냐."
"우리도 솔로잖아?"
"그러니까 병신이지." 김본좌가 낄낄거린다.
혼자 있고 싶지 않아 나오긴 했지만 자꾸 멍때리고 앉아있는 진우를 끌고 카페를 나선다. 김본좌와 빠삭이는 이미 솔로확정이라며 위로파티라는 식으로 행동하고 있다. 너무나 당연한 행동이다. 진우 또래의 누가 그런 폭력을 당하며 만남을 지속할까.
카페를 나와 광장 쪽으로 걸으니, 어느 방향에서나 보이는 커다란 트리와 광장 중앙에 위치한 무대시설물이 보인다. 구름이 잔뜩 낀 흐린 날씨에도 개미떼 같은 인파가 바글바글하다.
"앗...뜨.."
"언니!, 괜찮아요?"
알바 동생이 달려와서 시현이의 어깨를 잡는다.
"괜찮아...아우...느낌이 많이 다르네."
데인 손가락을 찬물에 담그며 애써 미소를 짓는다. 한 쪽 눈이 안대로 가려지는 바람에 거리감각이 묘하게 일그러진 탓이다.
거의 일주일을 집에서 쉰 뒤에야 카페에 출근했다. 쉬는 동안 계속 약을 바르고, 마사지를 했건만 눈 주위에 멍이 조금 남아있는 탓에, 반창고를 붙이고, 안대를 덧썼다. 걱정스럽게 묻는 카페 식구들에겐 그저 눈병이라고 했지만, 커다란 반창고 탓인지 긴가민가 하는 눈치다.
번화가에서 제법 떨어져 있는 카페임에도 손님이 바글바글하다. 커플, 커플, 커플...한 해의 마지막을 추억으로 남기기 위해 분주한 사람들이다. 매니저실에서 약상자를 뒤적거리다가 의자 위에 걸터 앉았다.
크리스마스 내내 같이 있던 진우는, 집으로 돌아간 후에도 매일 아침마다 시현이의 방을 찾았다. 아침 로드웍을 하고 그대로 올라오는 눈치다. 오지말라고 몇 번이나 차갑게 쏘아 붙였지만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 죽을 데우고, 방을 치운다. 한참을 말 없이 시현이를 바라보다가 점심때쯤 체육관으로 향한다. 일찌감치 방학을 한 탓에 종일 체육관에서 살다시피 하고 있다.
"나 내일부터 다시 카페에 나갈꺼니까, 아침에 오지 마. 집에 없을거야."
나가는 진우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말했다. 물끄러미 시현이를 바라보던 진우가 고개를 끄덕이고 방을 나선다. 벌써 엊그제 아침 일이다. 밤 9시쯤 운동을 마치면 다시 시현이의 방을 찾아온다. 일찌감치 불을 끄고 자는 척하고 있노라면 한참을 말 없이 앉아있다가 조용히 일어선다.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왠지 처량하다.
26일, 진우가 돌아간 후에 홀로 항문외과를 찾았다. 언제나 병원을 찾을 때면 한참을 먼 동네로 가는 시현이였기에, 택시를 타고 이동하는 시간이 고통스러웠다. 빌딩 앞에서 몇 번을 망설인 끝에야 겨우 병원으로 들어갔다. 자신의 외모와 지금의 꼴, 찢어진 애널....사람들이 하는 말이 귀로 들려오는 것 같아 쉽사리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는다. 검사결과 다행스럽게도 근육쪽에 손상이 가진 않았다고 했다. 애널 부위가 찢어진 것 뿐이니 연고를 잘 발라주라는 처방을 받고 병원을 나섰다. 카운터에 앉은 간호조무사의 눈이 잊혀지지 않는다. 시현이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애띤 얼굴을 한 간호조무사의 눈은 경멸과 혐오의 빛으로 가득했다.
최대한 움직임을 자제하면서 쉬며 연고를 바른 덕분에 상처는 빨리 아물었다. 물론, 화장실을 갈때마다 통증이 느껴지고, 움직이다보면 예상치 못한 찌릿함에 몸을 움찔하긴 했지만 회복은 빠른 편이었다. 바닥에 거울을 두고 요리조리 비춰가며 연고를 바르는 자신의 모습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진우는 몰랐지만, 시현이의 마음은 이미 다른 부분에서 갈등을 느끼고 있었다.
용서를 하느냐, 안하느냐는 이미 애초에 끝난 고민이었다. 자신에게 가해진 폭력은 쉬이 잊을 수 없지만, 진우에 대해서는 용서할 수 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호구같은 년이라고 스스로 자책도 해봤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미움보다 사랑이 훨씬 큰대야 당할도리가 없다. 아마 24일, 겨우 정신을 차린 자신을 아기처럼 품에 안고, 한숟갈, 한숟갈 죽을 떠먹여주던 진우의 행동에서 이미 마음이 풀어진 것이었다. 따뜻한 물에 적신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내는 진우의 손길을 느꼈을 때, 용서하고 말고의 선택지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무서웠다.
트랜스젠더와 연애를 해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한다. 그렇게 헌신적이고 착한 사람은 없다고. 아마도 일반 사람들과 달리, 마음에 맞는, 정말 사랑하는 짝을 찾기 힘든 열등자의 입장에 선 처지 때문에 더욱 그렇게 헌신적으로 사랑을 하는지도 모른다. 남녀의 성향을 모두 가진 탓에 상대방의 마음을 더 쉽고, 깊게 헤아릴 수 있다는 장점까지 있으니 그만한 사람들을 찾긴 힘들겠지.
그래서 더 무서웠다. 모든 사람들이 그런 트랜스젠더의 사랑에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트랜스젠더들을 이용해먹고, 괴롭히고, 돈을 뜯어내며, 심지어는 폭력을 휘두른다. 헤어짐을 죽음처럼 생각하는 그들의 속성을 알기에 그 점을 집요하게 파고들며 갈취하는 것이다.
물론, 진우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시현이 본인도 잘 알고 있었지만,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한 번 손이 올라가기 시작하면 버릇처럼 손이 올라간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고보니...이제 이해가 가네." 시현이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지어진다. 왼손을 들어 안대 낀 눈 위를 만져본다. 조금 따끔한 느낌이 든다.
TV를 보면서 절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이 있었다. 이를테면, 상습적인 폭행을 당하고나서도 남자 곁을 떠나지 못하는 여자들. 어떤 사람들은 무서워서 떠나지 못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스스로의 의지로 떠나지 않는다. 마이크를 갖다대면 하나 같이 같은 말을 한다. "저 사람이 폭력을 휘두를 때 말고는 정말 잘해준다" "마음은 착한 사람이다" 라고.
그게 두려웠다. 만약 진우가 계속해서 이런 식으로 폭력을 휘두르게 된다면 어떨까. 가정을 꾸리고 싶다는 생각은 많이 해봤지만, 매 맞는 여자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시현이는 그 부분에서 갈등을 느끼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런 취급을 받는다면 버텨낼 자신이 없다. 진우의 행동을 용서했음에도 말 한마디 걸지 못 하는 이유였다.
루미나리에로 장식된 아치형 입구를 지나 광장으로 들어선다. 광장 테두리를 빙 둘러싼 루미나리에는 아직 대낮인 탓에 점등되지 않았지만, 입구부터 사람들이 바글바글해서 뚫고 들어가기도 힘들다. 저마다 한껏 멋을 부린 차림들로 데이트 나온 사람들의 모습은 짝짓기에 접어든 동물들을 연상시켰다.
진우는 고개를 꺽어 하늘을 봤다. 회색빛으로 꼬물꼬물거리는 하늘이 자신의 마음을 닮은 것 같다. 매일 매일 얼굴에 철판을 깔고 시현이를 찾아가지만 달라진 점은 거의 없다. 무서울 정도로 대화가 없다. 어릴 적부터 화난 시현이는 무서웠다. 누구보다 진우를 사랑하고, 진우를 위해주는 시현이답게 언제나 다정다감했지만, 그만큼 진우의 잘못에 대해서는 무섭도록 냉정했다. 선미누나나 원장선생님처럼 회초리를 들진 않았지만-겨우 2살 차이였으니까- 진우를 대하는 냉정한 태도는 그 자체로 큰 벌이었다. 손을 잡아주지도 않았고, 씻겨주지도 않고, 예쁘게 불러주지도 않는다. 결국 참다못한 진우가 선미누나에게 달려가 울며 안기면, 선미누나가 시현이를 설득해주곤 했다. 그러면 한참 뒤에 혼자 있는 진우에게 슬며시 다가와서는, "다시는 그러면 안돼, 알았지?" 하며 손을 잡아주는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이 저지른 터무니없는 행동이 무겁게 느껴졌다. 사랑하는 남자로서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했다는 죄책감. 시현이 눈가에 든 푸른 멍이 가슴을 아리게 했다. 절대로 꿈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니가 저지른 짓을 봐!" 라고 외치는 것처럼 무겁게 느껴지는 멍자국.
"야,야. 저거 뭐냐?"
누군가 하늘을 보며 멍 때리던 진우를 툭툭 친다. 김본좌가 가리키는 쪽은 루미나리에 기둥 옆이었다. 횡단보도를 마주하고 있는 기둥 아래엔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다. 바로 옆에 아직도 철거되지 않은 크리스마스 트리가 높이 솟아있기 때문이다.
"뭐가?"
"봐봐, 저 뒤에 사람."
재차 김본좌가 지적한 후에야 그 사람을 눈여겨 봤다. 행복한 얼굴로 트리를 바라보며 선 커플 뒤에 있는 남자는, 작업복 느낌을 주는 곤색 점퍼에 후줄근한 갈색바지를 입고 모자를 깊게 눌러쓴 모습이다. 트리 구경에 하염없는 여자의 핸드밴 뒤로 다가간 손이 구름낀 하늘 아래서도 반짝이는 빛을 발하는 것 같다. 순간이었지만, 예리한 빛이 슬쩍 스치고 지나갔다. 이윽고, 남자의 빛나는 손이 여자 핸드백의 아랫부분을 그을때 쯤, 김본좌가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소매치기다!!!!"
김본좌의 외침과 함께 많은 인파의 눈이 쏠리자, 남자의 몸이 순간적으로 굳는다. 하마터면 소매치기를 당할 뻔한 여자의 남자친구가 멱살을 쥘듯이 다가섰다.
"으아악!!" "꺄아아아아아악!"
계획했던 행동인지 아니면 당황한 탓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남자의 빛나는 손이 공중에 휘둘러지자 다가서던 남자친구가 눈을 부여잡고 주저앉는다. 여자의 찢어지는 비명과 함께 기둥 근처의 사람들이 썰물처럼 물러났고, 동시에 남자도 반대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때마침-아마도 계산했던 타이밍이겠지만- 바뀐 횡단보도를 잽싸게 건너간다.
"야! 어디가, 인마!"
외침을 무시하고 진우가 소매치기를 쫓아 뛴다. 어쩔 수 없다는 듯 김본좌와 빠삭이가 진우의 뒤를 따라 뛴다.
칼 든 상대를 쉽게 제압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건 아니었다. 인파가 이렇게 몰린 시청 앞이라면 경찰이 배치되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저 잠시 잡아두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새해맞이 카운트다운을 위해 방송국 차량까지 몰려있던 광장은 일순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매일같이 로드웍으로 단련된 진우의 몸은 나는듯이 빨랐다. 결국 한 블럭을 채 지나지 못하고 따라잡힌 소매치기가 돌아서서 칼을 휘두른다. 거창할 것도 없는 칼이였다. 흔히 문방구에서 볼 수 있는 검정색 자루 달린 면도칼이다.
"정말 뒈지고 싶나 이게!"
소매치기가 사납게 면도칼을 휘두르자 번쩍번쩍하는 섬광이 몸 주위를 감싼다. 칼의 무서움은 날카로움에 있다. 설령 작은 면도칼이라 할지라도, 찔리고 베이는 순간 움직임이 멈추기 마련이다. 진우는 냉정하게 거리를 잴 뿐 덤벼들지 않았다. 맨손으로 칼을 휘두르는 상대에게 덤벼들 정도로 무모하진 않다. 곧이어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에이, 씨발!" 쫓는 사람이 혼자인걸 보고 겁을 줘 쫓으려던 소매치기가 주춤 주춤 물러서다 돌아서는 순간, 진우의 몸이 허공을 갈랐다. 영화처럼 멋진 발차기는 아니었지만, 뛰어나가려던 자세에서 갑자기 뒤통수에 충격을 받은 소매치기가 앞으로 쓰러지며 구른다. 상대가 쓰러졌지만, 진우는 여전히 거리를 유지하며 떨어져 섰다. 그저 앞으로 밀린 수준에 불과했기에 금세 벌떡 일어난 소매치기가 면도칼을 버리고 주머니를 뒤진다. "넌 내가 죽인다, 이새끼야." 사납게 욕설을 내뱉는 소매치기의 손에 중지 손가락보다 조금 긴 길이에 접이식 칼자루가 들려 올라오자, 진우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일어나 앉았지만 나른한 기분이었다. 최근에 겪은 스트레스 탓일까. 평소답지 않게 잠이 쏟아져, 퇴근하자마자 옷만 갈아입고 바로 잠들었었다. 꾸물꾸물한 날씨 때문인지 창문으로 들어오는 오후의 햇빛은 무거운 회색빛이다. 보일러가 쌩쌩 돌아가고 있음에도 저절로 추위를 느끼게 하는 차가운 회색빛은, 손바닥만한 원룸의 풍경을 그림자로 가득 메운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쥐듯 탁탁- 쳤다. 몽롱한 정신이 쉬이 가시질 않는 기분이다. 아직 반쯤 감긴 눈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자, 배꼽 위까지 길게 자란 머리가 사르륵 흘러 내린다. 주말엔 머리나 자르러 갈까, 하며 시간
을 보기 위해 핸드폰을 쥐었다. 가족 외엔 연락 올 곳도 없는 핸드폰에는 몇 통의 부재중 전화가 찍혀 있다.
진우-진우-선미 언니-진우.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끌어 물었다. 평소라면 망설임없이 통화버튼을 눌렀겠지만 쉽게 손이 가질않는다. 커버를 덮고 가만히 지켜본다. 작은 액정에 "오후 5:32"이라는 시간이 떠올랐다.
"두 시간이 좀 안되게 잤네.."
그때 핸드폰이 부르르 몸을 떤다. "진우" 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떠오른다. 심호흡 하듯 가벼운 한숨을 내쉬고 전화를 받았다.
"..왜?"
"어,받았다. 안녕하세요, 누나. 저 진우 친구 빠삭인데요. 저번에 학교에서 인사 드렸었는데."
예상치 못한 상대에 시현이의 말투가 흐트러진다.
"어, 어? 어...."
"다름이 아니라 진우가 지금 병원에 있거든요. 보호자가 필요하다고..." "왜?!!" 시현이가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냈다.
"어...말하면 길어지는데...칼에 찔렸거든요." 옆에서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린다. 진우는 아닌 것 같다. "야, 베었다고 해야지." "그거나 그거나지..아무튼 그렇게 됐거든요. 막 심하게 다친건 아니구요.."
조금 더 대화를 나누고 전화를 끊었지만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시청에서 칼에 찔리다니? 낮잠 탓인지 멍한 머릿 속으로 어떤 말도 들어오지 않는 것 같다. 잠시 전화를 끊고 그대로 앉아있었다.
"이럴 때가 아니지..."
머리를 흔들며 최대한의 침착함으로 지갑을 챙겨 방을 나섰다. 잘은 모르겠지만 칼에 찔렸다는 말 이후로 귀가 윙윙거려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기에 문자로 병원 주소를 찍어달라고 했다. 택시를 타며 핸드폰을 보니 첫 전화가 온게 거의 2시간 전이다. 잠든 직후에 걸려온 것 같다. 멀미를 하는지 자꾸 머리가 어질거려 창 밖을 내다봤다.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을 보고 있자니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날씨가 흐리더니 비가 오는건가. 우산도 없는데."
회색의 하늘은 비 한 방울 없이 조용하다. 점심을 너무 적게 먹었는지 손에 힘이 하나도 없어 자꾸 핸드폰이 떨어질 것 같다.
"인석아, 그래도 조심했었어야지."
원장선생님의 책망하는 듯한 말에 진우가 겸연쩍게 웃는다.
"죄송해요. 정말 그러려고 따라간건 아니었어요."
선미, 원장선생님, 빠삭이와 김본좌 그리고 기자들이 침대를 둘러싸고 서있다. 기자들이 짐을 챙겨 일어난다. "그럼 저희는 이만..." "벌써 가시게요?" 원장선생님이 얼른 일어나 병원 앞까지 배웅해 나간다. 조금 전까지 진행되던 인터뷰가 끝나고, 사람들이 나가자 병실이 조용해진다. 4인실의 병실이지만, 다른 3곳에 침대는 모두 비어있다.
"무슨 생각으로 그랬어."
선미가 부드럽게 진우의 머리를 쓸어주며 묻는다. 선미와 원장선생님도 조금 전에야 병원에 도착했다. 도착할때 즈음엔 이미 경찰은 돌아가고, 인터뷰도 막바지에 다다랐다.
"그냥...맨날 시위때문에 시청 주위에 경찰 많잖아. 금방 따라올꺼라고 생각했지."
"으이그. 그러다가 안 따라갔으면 어쩌려고."
"그럼 뒤돌려차기로 그냥 팍!!!...아야야"
장난스럽게 다리를 들어올리던 진우의 표정이 잔뜩 찌푸려지자, 선미가 진우의 팔을 찰싹 때린다.
"장난치지마! 깊진 않아도 칼에 베였는데 덧나면 어쩌려고."
환자복으로 가려진 진우의 복부엔 붕대가 돌돌 말려있다. 소매치기를 제압하며 옆구리를 베인 덕분이다. 때마침 도착한 경찰들과 합세해 제압해내긴 했지만, 하마터면 큰일날 뻔한 아찔한 순간이었다. 조금만 운동신경이 떨어졌어도 가볍게 베이는 선으로 끝나지 않았을꺼라는 생각을 하면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다.
간단한 소매치기 사건으로 끝날 수도 있었던 사건이 생각보다 커졌다. 범인이 당황해서 휘두른 칼에 눈 위를 베인 피해자가 나오는 바람에 "12월 31일, 시청 광장 칼부림 사건"이 되버린 탓이었다. 게다가 범인을 제압한 사람이 격투기선수를 지망하는 고등학생이었고, 그 학생도 제압 중에 흉기에 찔려 부상을 입었으니 쓰기에 따라선 상당히 흥미로운 사건이 될만한 소재였다. 결과적으로 두 명이나 흉기에 찔린 광장 칼부림 사건이었으니까. 감사 인사를 하겠다며 경찰에서도 방문했고, 시청 광장에 운집해있던 방송국 기자들도 몰려들었다. 치료 자체는 금세 끝냈기에, 거의 한 시간을 넘게 인터뷰에 시달린 참이다.
덜컥-
병실 문이 세차게 열리며 시현이가 뛰어 들어왔다. "하아, 하아.." 거친 숨을 몰아쉬는 시현이를 보며 빠삭이와 김본좌가 인사를 건네자 알듯말듯 고개를 끄덕인다. 한 쪽 손으로 손잡이를 잡은 채 숨을 몰아쉬는 시현이의 모습은, 한 눈에 봐도 급히 달려온 모습이다.
"시현아..." 선미가 시현이를 불렀다.
시현이의 눈이 병실을 훑는다. 선미언니, 진우 친구들, 그리고 침대에 누운 진우. 조금 놀란 표정이긴 하지만 평온한 얼굴로 시현이를 바라보고 있다.
"..뭐야. 멀쩡하..네." 시현이가 웃으려는 표정을 짓자, 입술 끝이 이상하게 뒤틀어져 찌그러진다.
"난 또...괜히..달려왔네. 별 것도 아니면서...나 잠깐...화장실 좀..다녀올게.."
시현이가 웅얼웅얼 알아 듣기 힘든 몇 마디를 내뱉고 나가자, 선미가 진우를 쳐다본다. 진우는 그저 굳은 표정으로 병실 문만 쳐다보고 있느라 선미의 시선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누나 되게 놀라셨나본데." 김본좌가 똥그래진 눈으로 진우를 쳐다본다.
"누나가 데려올게."
선미가 진우의 팔을 다독거리며 일어섰다.
문을 열고 나오자 문 옆에 기대앉은 시현이가 보였다. 고개 숙인채 웅크리고 앉은 모습이다. 조용히 문을 닫고 시현이 앞에 쪼그려 앉아 머리를 쓸어준다.
"시현아, 많이 놀랐어?"
"아..냐..안 놀랐어...별 것도 아닌데 뭐..." 시현이가 고개를 가볍게 흔든다. 그 바람에 투명한 물방울이 후두둑 떨어진다.
"아이구, 우리 시현이 왜 이렇게 마음이 약해졌지? 완전 애기네, 애기." 선미가 시현이를 가볍게 안아 등을 톡톡 두드렸다.
아마 진우의 첫 고백을 거절한 직후였던 것 같다. 속으론 너무나 기뻐하면서도 진우의 마음을 받아줄 수 없었던 시현이는 크게 마음이 상해있었다.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곁에서 지켜보는 선미 눈에는 여실히 드러나보일 정도로 마음의 동요가 심하던 시기였다. 그때, 진우가 교통사고를 당했었다. 부모가 한 눈을 판 사이 골목길로 뛰쳐나간 꼬마아이를 구하려다 난 작은 사고. 아이는 아무런 부상이 없었고, 진우도 가벼운 뇌진탕 증상 외에는 그다지 특별한 부상이 없었던 아주 작은 사고였다.
그랬기에, 시현이가 보여준 모습은 아주 특별하게 보였다. 진정제를 맞고 잠이 든 진우의 곁에서 끅끅 거리던 시현이를 봤던 그 날, 선미도 어렴풋이 시현이의 마음을 알게 됐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이 진우를 사랑하는구나, 라고. 어릴 적부터 시현이와 진우를 키워온 선미였기에 가늘게나마 시현이의 마음을 눈치채고 있던 터였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모습을 사랑해주는 사람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자각을 주는 일은 언제나 시현이의 마음을 크게 헤집어놓았다.
시현이는 그저 상처투성이 마음을 가진 20살 여자아이일 뿐이었다. 아무리 어른스럽게 생각하고, 행동해도, 그저 20살이었다.
"이러고 온거야?"
한참을 토닥이며 놀란 시현이를 진정시키고나자, 그제야 시현이의 차림새가 눈에 들어온다. 12월 한겨울인데도 외투도 없이, 목이 조금 늘어난 헐렁한 흰색 티셔츠에 허벅지 중간까지 내려오는 굵은 실로 짜인 회색 카디건을 입고 있다. 신축성 있는 재질에 흰색 진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짝짝이 신발이 시현이의 마음을 여실히 드러내주는 듯이 혼란스럽다.
텅 빈 4인실은 조용했다. 낮은 TV소리, 닫힌 문 밖으로 들리는 저녁의 작은 소음들. 일찌감치 빠삭이와 김본좌가 돌아가고,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선미도 돌아갔다. "시현이 있으니까 걱정 안할게."
약간 고개 숙인 채 침대를 내려다보고 있는 시현이의 옆 얼굴이 보인다. 진우를 향한 오른쪽 얼굴은 머리를 귀 뒤로 넘긴 덕분에 가리는 것 없이 노출되어 있다. 얇디 얇은 턱선과 보드라운 볼. 앙다문 붉은 입술.
"정말..미안해."
진우가 어렵사리 입을 뗀다. 넓은 병실로 퍼져나간 작은 소리가 흔적 없이 사라지는 동안에도, 시현이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그저 침대만 바라보고 있다. 교통사고 때도, 오늘도, 진우는 시현이가 병원에서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시현이의 눈물은 진우가 없는 곳에서만 흘렀다. 감정을 추스른 얼굴엔 그저 냉정한 침착함만이 담겨 있다.
"김진우."
엷게 가라앉은 침묵의 안개를 뚫고, 자그마한 단어가 돛을 올린다.
"응?"
"........."
시현이가 다시 침묵 속으로 빠져든다. 말을 고르기 위해 신중을 기하는 모습이다. 영문을 알리 없는 진우는 그저 마른 침만 삼킨다. 어떤 말이라도 해줬으면.
"나, 너 사랑해." 조금 숨을 들이켰다. "너 없이는 살기 힘들 정도로..."
또렷하고 차가운 목소리. "널 죽이겠다" 고 말하는 것과 같은 어투로 던져지는 사랑 고백.
"나도 사..."
"끝까지 들어!" 비집고 나오는 진우의 말을 단박에 잘라낸다.
"하지만, 니가 이런 식으로 날 다루는 건 절대 받아들일 수 없어." 시현이가 고개를 돌려 진우의 눈을 쳐다본다. 날카로운 눈매 속에서 차가운 눈동자가 구른다.
"만약 다시 이런 식으로 날 다루면.....정말, 정말로."
조용하던 눈동자 속으로 격한 섬광이 스쳤다.
"니 앞에서 그대로 죽어버릴거야."
조근조근한 말투였지만, 그 말투에 실린 힘과 떨리는 목소리가 그대로 진우의 마음을 파고 들었다. 한 겨울의 강철처럼 차갑게 굳은 눈매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다. 오열하는 진우를 안아주던 가슴도 12월의 아스팔트처럼 차갑게 식은 것 같다. 평생을 시현이와 지내왔지만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푸른 빛 분노였다. 어떤 말을 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너무나 격렬하고, 너무나 아픈 말에, 그만 말문이 막혀버려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끈하게 데워진다.
잠깐의 침묵 뒤로 다시 시현이가 입을 열었다.
"....나 사랑해?"
조금 전까지는 전혀 다른, 꽉 막힌 듯 목 멘 소리가 새어나왔다. 벌개진 눈을 훔치며 고개를 들자, 냉정하게 얼어붙은 눈초리 위로 그득하게 괴인 눈물이 보인다.
"..내가 좋아?...이런 괴물이..?"
"그런 말 하지마!! 니가 왜 괴물이야!?"
진우가 격하게 몸을 일으켰다. 옆구리로 찌르르한 통증이 느껴지지만 개의치 않았다.
"사랑해. 정말로 사랑해. 나...정말 병신같은, 용서받을 수 없는 짓 해버렸지만....진짜로 진짜로...."
진우의 볼을 따라 눈물이 흘러내린다. 말을 이어감에 따라 벅차오르는 감정을 추스르기 힘들어, 고개를 숙였다. 바보같을 정도로 순수한, 질풍노도 10대의 사랑이었다. 커브도, 슬라이더도 없는 오직 직구 승부의 감정. 엉뚱한 방향으로 틀어지기도 했지만, 그 순수함만은 비할 데 없이 명백했다.
시현이는 자신의 팔을 감싸안은 손을 어루만졌다.
크고 단단한 손. 시현이의 하얗고 여린 손과는 대비되는 까무잡잡하고 억센 손.
진우는 시현이를 뒤에서 끌어안은 채 누워있다. 한참을 끓어오르던 격한 감정도 어느새 가라앉아,
숨소리도 한층 정갈해졌다.
"진우야..."
"응?"
진우가 대답하며 시현이의 뒷 목으로 얼굴을 묻는다. 달콤하고 싱그러운 시현이의 채취. 언제나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향기. 너무나 그리웠다. 혹시나 잃게 되는건 아닐까 얼마나 겁났는지 모른다.
"나....니 여자지?"
시현이는 조금 망설이듯 "여자"를 발음했다. 진우는 한층 더 깊게 고개를 묻었다. 새하얀 어깨와 목이 만들어내는 부드러운 곡선에 입을 맞췄다.
"응, 내꺼야. 내 여자야." 진우의 대답으로 치기어린 소유욕이 묻어난다.
"그럼....나 안아줄래?"
"응, 응. 얼마든지, 얼마든지 안아줄게."
진우가 시현이를 안은 팔에 한층 더 힘을 준다. 가뜩이나 작은 시현이를 그대로 가슴에 새길 것처럼 꼬옥 끌어안는다.
하지만 진우의 품에 깊게 안긴 시현이는 몸을 비틀었다. 자신을 붙잡은 손을 떼어내며 몸을 돌려 진우를 마주본다. 두 사람의 키 차이 탓에 시현이의 이마가 진우의 턱 부근에 와닿는다. 진우는 품 속에서 꼬물꼬물 올라오는 시현이의 움직임을 느꼈다. 이윽고, 시현이의 얼굴이 진우의 입 부근으로 올라오자, 고개를 살짝 뒤로 제쳐 진우의 입술을 물었다. 도톰한 붉은 입술이 진우의 아랫입술을 가볍게 물고, 애무하듯 빤다. 소프트콘이라도 먹는 것처럼 부드럽게 입술을 쓰다듬고는 떨어져 나갔다.
진우는 갑자기 진한 키스를 퍼붓고 떨어져나간 시현이를 사랑스러움과 의아함이 섞인 눈으로 바라봤다. 병실 창문으로 비쳐들어오는 네온사인 빛이 시현이의 오른쪽 눈동자를 초롱초롱 빛낸다.
여느 때처럼 부드러워진 눈매가 깊은 사랑을 품고 있다.
"...안아줘....여자로...."
탁자에 팔을 괸 채 그 모습을 지켜보는 진우에게는 유독 커플들의 모습이 눈에 띈다. 세상을 다 가진 듯 만면에 웃음을 띈 커플들. 길 너머로 보이는 커다란 트리장식과 시청 광장을 둘러 싼 루미나리에(조명건축물) 장식물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저도 모르게 한숨이 쉬어진다.
"아, 이 새끼 또 궁상이네." 빠삭이가 진우의 어깨를 흔든다. "얼굴 좀 펴라, 마."
그 사건 이후로 김본좌와 빠삭이에게 속을 털어놨다. 자세한 이야긴 하지 않고, 그저 질투 때문에 손찌검을 했다, 어찌하면 좋겠느냐는 식으로만 이야기 했다. 그렇게나 순화해서 이야기 했음에도 불구하고 맹렬한 비난과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 "완전 쓰레기 새끼네!" 며칠이나 인간 취급도 못 받다가 오늘에서야 연락을 받고 나왔다. 마지막 날인데 궁상떨지 말고 시청 앞에서 하는 콘서트나 보자는 김본좌의 제안이었다.
"근데...쩝. 어째 솔로 누나들은 없다?"
"솔로들이 이런 날에 여기 나오고 싶겠냐."
"우리도 솔로잖아?"
"그러니까 병신이지." 김본좌가 낄낄거린다.
혼자 있고 싶지 않아 나오긴 했지만 자꾸 멍때리고 앉아있는 진우를 끌고 카페를 나선다. 김본좌와 빠삭이는 이미 솔로확정이라며 위로파티라는 식으로 행동하고 있다. 너무나 당연한 행동이다. 진우 또래의 누가 그런 폭력을 당하며 만남을 지속할까.
카페를 나와 광장 쪽으로 걸으니, 어느 방향에서나 보이는 커다란 트리와 광장 중앙에 위치한 무대시설물이 보인다. 구름이 잔뜩 낀 흐린 날씨에도 개미떼 같은 인파가 바글바글하다.
"앗...뜨.."
"언니!, 괜찮아요?"
알바 동생이 달려와서 시현이의 어깨를 잡는다.
"괜찮아...아우...느낌이 많이 다르네."
데인 손가락을 찬물에 담그며 애써 미소를 짓는다. 한 쪽 눈이 안대로 가려지는 바람에 거리감각이 묘하게 일그러진 탓이다.
거의 일주일을 집에서 쉰 뒤에야 카페에 출근했다. 쉬는 동안 계속 약을 바르고, 마사지를 했건만 눈 주위에 멍이 조금 남아있는 탓에, 반창고를 붙이고, 안대를 덧썼다. 걱정스럽게 묻는 카페 식구들에겐 그저 눈병이라고 했지만, 커다란 반창고 탓인지 긴가민가 하는 눈치다.
번화가에서 제법 떨어져 있는 카페임에도 손님이 바글바글하다. 커플, 커플, 커플...한 해의 마지막을 추억으로 남기기 위해 분주한 사람들이다. 매니저실에서 약상자를 뒤적거리다가 의자 위에 걸터 앉았다.
크리스마스 내내 같이 있던 진우는, 집으로 돌아간 후에도 매일 아침마다 시현이의 방을 찾았다. 아침 로드웍을 하고 그대로 올라오는 눈치다. 오지말라고 몇 번이나 차갑게 쏘아 붙였지만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 죽을 데우고, 방을 치운다. 한참을 말 없이 시현이를 바라보다가 점심때쯤 체육관으로 향한다. 일찌감치 방학을 한 탓에 종일 체육관에서 살다시피 하고 있다.
"나 내일부터 다시 카페에 나갈꺼니까, 아침에 오지 마. 집에 없을거야."
나가는 진우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말했다. 물끄러미 시현이를 바라보던 진우가 고개를 끄덕이고 방을 나선다. 벌써 엊그제 아침 일이다. 밤 9시쯤 운동을 마치면 다시 시현이의 방을 찾아온다. 일찌감치 불을 끄고 자는 척하고 있노라면 한참을 말 없이 앉아있다가 조용히 일어선다.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왠지 처량하다.
26일, 진우가 돌아간 후에 홀로 항문외과를 찾았다. 언제나 병원을 찾을 때면 한참을 먼 동네로 가는 시현이였기에, 택시를 타고 이동하는 시간이 고통스러웠다. 빌딩 앞에서 몇 번을 망설인 끝에야 겨우 병원으로 들어갔다. 자신의 외모와 지금의 꼴, 찢어진 애널....사람들이 하는 말이 귀로 들려오는 것 같아 쉽사리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는다. 검사결과 다행스럽게도 근육쪽에 손상이 가진 않았다고 했다. 애널 부위가 찢어진 것 뿐이니 연고를 잘 발라주라는 처방을 받고 병원을 나섰다. 카운터에 앉은 간호조무사의 눈이 잊혀지지 않는다. 시현이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애띤 얼굴을 한 간호조무사의 눈은 경멸과 혐오의 빛으로 가득했다.
최대한 움직임을 자제하면서 쉬며 연고를 바른 덕분에 상처는 빨리 아물었다. 물론, 화장실을 갈때마다 통증이 느껴지고, 움직이다보면 예상치 못한 찌릿함에 몸을 움찔하긴 했지만 회복은 빠른 편이었다. 바닥에 거울을 두고 요리조리 비춰가며 연고를 바르는 자신의 모습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진우는 몰랐지만, 시현이의 마음은 이미 다른 부분에서 갈등을 느끼고 있었다.
용서를 하느냐, 안하느냐는 이미 애초에 끝난 고민이었다. 자신에게 가해진 폭력은 쉬이 잊을 수 없지만, 진우에 대해서는 용서할 수 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호구같은 년이라고 스스로 자책도 해봤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미움보다 사랑이 훨씬 큰대야 당할도리가 없다. 아마 24일, 겨우 정신을 차린 자신을 아기처럼 품에 안고, 한숟갈, 한숟갈 죽을 떠먹여주던 진우의 행동에서 이미 마음이 풀어진 것이었다. 따뜻한 물에 적신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내는 진우의 손길을 느꼈을 때, 용서하고 말고의 선택지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무서웠다.
트랜스젠더와 연애를 해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한다. 그렇게 헌신적이고 착한 사람은 없다고. 아마도 일반 사람들과 달리, 마음에 맞는, 정말 사랑하는 짝을 찾기 힘든 열등자의 입장에 선 처지 때문에 더욱 그렇게 헌신적으로 사랑을 하는지도 모른다. 남녀의 성향을 모두 가진 탓에 상대방의 마음을 더 쉽고, 깊게 헤아릴 수 있다는 장점까지 있으니 그만한 사람들을 찾긴 힘들겠지.
그래서 더 무서웠다. 모든 사람들이 그런 트랜스젠더의 사랑에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트랜스젠더들을 이용해먹고, 괴롭히고, 돈을 뜯어내며, 심지어는 폭력을 휘두른다. 헤어짐을 죽음처럼 생각하는 그들의 속성을 알기에 그 점을 집요하게 파고들며 갈취하는 것이다.
물론, 진우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시현이 본인도 잘 알고 있었지만,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한 번 손이 올라가기 시작하면 버릇처럼 손이 올라간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고보니...이제 이해가 가네." 시현이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지어진다. 왼손을 들어 안대 낀 눈 위를 만져본다. 조금 따끔한 느낌이 든다.
TV를 보면서 절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이 있었다. 이를테면, 상습적인 폭행을 당하고나서도 남자 곁을 떠나지 못하는 여자들. 어떤 사람들은 무서워서 떠나지 못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스스로의 의지로 떠나지 않는다. 마이크를 갖다대면 하나 같이 같은 말을 한다. "저 사람이 폭력을 휘두를 때 말고는 정말 잘해준다" "마음은 착한 사람이다" 라고.
그게 두려웠다. 만약 진우가 계속해서 이런 식으로 폭력을 휘두르게 된다면 어떨까. 가정을 꾸리고 싶다는 생각은 많이 해봤지만, 매 맞는 여자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시현이는 그 부분에서 갈등을 느끼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런 취급을 받는다면 버텨낼 자신이 없다. 진우의 행동을 용서했음에도 말 한마디 걸지 못 하는 이유였다.
루미나리에로 장식된 아치형 입구를 지나 광장으로 들어선다. 광장 테두리를 빙 둘러싼 루미나리에는 아직 대낮인 탓에 점등되지 않았지만, 입구부터 사람들이 바글바글해서 뚫고 들어가기도 힘들다. 저마다 한껏 멋을 부린 차림들로 데이트 나온 사람들의 모습은 짝짓기에 접어든 동물들을 연상시켰다.
진우는 고개를 꺽어 하늘을 봤다. 회색빛으로 꼬물꼬물거리는 하늘이 자신의 마음을 닮은 것 같다. 매일 매일 얼굴에 철판을 깔고 시현이를 찾아가지만 달라진 점은 거의 없다. 무서울 정도로 대화가 없다. 어릴 적부터 화난 시현이는 무서웠다. 누구보다 진우를 사랑하고, 진우를 위해주는 시현이답게 언제나 다정다감했지만, 그만큼 진우의 잘못에 대해서는 무섭도록 냉정했다. 선미누나나 원장선생님처럼 회초리를 들진 않았지만-겨우 2살 차이였으니까- 진우를 대하는 냉정한 태도는 그 자체로 큰 벌이었다. 손을 잡아주지도 않았고, 씻겨주지도 않고, 예쁘게 불러주지도 않는다. 결국 참다못한 진우가 선미누나에게 달려가 울며 안기면, 선미누나가 시현이를 설득해주곤 했다. 그러면 한참 뒤에 혼자 있는 진우에게 슬며시 다가와서는, "다시는 그러면 안돼, 알았지?" 하며 손을 잡아주는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이 저지른 터무니없는 행동이 무겁게 느껴졌다. 사랑하는 남자로서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했다는 죄책감. 시현이 눈가에 든 푸른 멍이 가슴을 아리게 했다. 절대로 꿈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니가 저지른 짓을 봐!" 라고 외치는 것처럼 무겁게 느껴지는 멍자국.
"야,야. 저거 뭐냐?"
누군가 하늘을 보며 멍 때리던 진우를 툭툭 친다. 김본좌가 가리키는 쪽은 루미나리에 기둥 옆이었다. 횡단보도를 마주하고 있는 기둥 아래엔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다. 바로 옆에 아직도 철거되지 않은 크리스마스 트리가 높이 솟아있기 때문이다.
"뭐가?"
"봐봐, 저 뒤에 사람."
재차 김본좌가 지적한 후에야 그 사람을 눈여겨 봤다. 행복한 얼굴로 트리를 바라보며 선 커플 뒤에 있는 남자는, 작업복 느낌을 주는 곤색 점퍼에 후줄근한 갈색바지를 입고 모자를 깊게 눌러쓴 모습이다. 트리 구경에 하염없는 여자의 핸드밴 뒤로 다가간 손이 구름낀 하늘 아래서도 반짝이는 빛을 발하는 것 같다. 순간이었지만, 예리한 빛이 슬쩍 스치고 지나갔다. 이윽고, 남자의 빛나는 손이 여자 핸드백의 아랫부분을 그을때 쯤, 김본좌가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소매치기다!!!!"
김본좌의 외침과 함께 많은 인파의 눈이 쏠리자, 남자의 몸이 순간적으로 굳는다. 하마터면 소매치기를 당할 뻔한 여자의 남자친구가 멱살을 쥘듯이 다가섰다.
"으아악!!" "꺄아아아아아악!"
계획했던 행동인지 아니면 당황한 탓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남자의 빛나는 손이 공중에 휘둘러지자 다가서던 남자친구가 눈을 부여잡고 주저앉는다. 여자의 찢어지는 비명과 함께 기둥 근처의 사람들이 썰물처럼 물러났고, 동시에 남자도 반대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때마침-아마도 계산했던 타이밍이겠지만- 바뀐 횡단보도를 잽싸게 건너간다.
"야! 어디가, 인마!"
외침을 무시하고 진우가 소매치기를 쫓아 뛴다. 어쩔 수 없다는 듯 김본좌와 빠삭이가 진우의 뒤를 따라 뛴다.
칼 든 상대를 쉽게 제압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건 아니었다. 인파가 이렇게 몰린 시청 앞이라면 경찰이 배치되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저 잠시 잡아두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새해맞이 카운트다운을 위해 방송국 차량까지 몰려있던 광장은 일순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매일같이 로드웍으로 단련된 진우의 몸은 나는듯이 빨랐다. 결국 한 블럭을 채 지나지 못하고 따라잡힌 소매치기가 돌아서서 칼을 휘두른다. 거창할 것도 없는 칼이였다. 흔히 문방구에서 볼 수 있는 검정색 자루 달린 면도칼이다.
"정말 뒈지고 싶나 이게!"
소매치기가 사납게 면도칼을 휘두르자 번쩍번쩍하는 섬광이 몸 주위를 감싼다. 칼의 무서움은 날카로움에 있다. 설령 작은 면도칼이라 할지라도, 찔리고 베이는 순간 움직임이 멈추기 마련이다. 진우는 냉정하게 거리를 잴 뿐 덤벼들지 않았다. 맨손으로 칼을 휘두르는 상대에게 덤벼들 정도로 무모하진 않다. 곧이어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에이, 씨발!" 쫓는 사람이 혼자인걸 보고 겁을 줘 쫓으려던 소매치기가 주춤 주춤 물러서다 돌아서는 순간, 진우의 몸이 허공을 갈랐다. 영화처럼 멋진 발차기는 아니었지만, 뛰어나가려던 자세에서 갑자기 뒤통수에 충격을 받은 소매치기가 앞으로 쓰러지며 구른다. 상대가 쓰러졌지만, 진우는 여전히 거리를 유지하며 떨어져 섰다. 그저 앞으로 밀린 수준에 불과했기에 금세 벌떡 일어난 소매치기가 면도칼을 버리고 주머니를 뒤진다. "넌 내가 죽인다, 이새끼야." 사납게 욕설을 내뱉는 소매치기의 손에 중지 손가락보다 조금 긴 길이에 접이식 칼자루가 들려 올라오자, 진우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일어나 앉았지만 나른한 기분이었다. 최근에 겪은 스트레스 탓일까. 평소답지 않게 잠이 쏟아져, 퇴근하자마자 옷만 갈아입고 바로 잠들었었다. 꾸물꾸물한 날씨 때문인지 창문으로 들어오는 오후의 햇빛은 무거운 회색빛이다. 보일러가 쌩쌩 돌아가고 있음에도 저절로 추위를 느끼게 하는 차가운 회색빛은, 손바닥만한 원룸의 풍경을 그림자로 가득 메운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쥐듯 탁탁- 쳤다. 몽롱한 정신이 쉬이 가시질 않는 기분이다. 아직 반쯤 감긴 눈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자, 배꼽 위까지 길게 자란 머리가 사르륵 흘러 내린다. 주말엔 머리나 자르러 갈까, 하며 시간
을 보기 위해 핸드폰을 쥐었다. 가족 외엔 연락 올 곳도 없는 핸드폰에는 몇 통의 부재중 전화가 찍혀 있다.
진우-진우-선미 언니-진우.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끌어 물었다. 평소라면 망설임없이 통화버튼을 눌렀겠지만 쉽게 손이 가질않는다. 커버를 덮고 가만히 지켜본다. 작은 액정에 "오후 5:32"이라는 시간이 떠올랐다.
"두 시간이 좀 안되게 잤네.."
그때 핸드폰이 부르르 몸을 떤다. "진우" 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떠오른다. 심호흡 하듯 가벼운 한숨을 내쉬고 전화를 받았다.
"..왜?"
"어,받았다. 안녕하세요, 누나. 저 진우 친구 빠삭인데요. 저번에 학교에서 인사 드렸었는데."
예상치 못한 상대에 시현이의 말투가 흐트러진다.
"어, 어? 어...."
"다름이 아니라 진우가 지금 병원에 있거든요. 보호자가 필요하다고..." "왜?!!" 시현이가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냈다.
"어...말하면 길어지는데...칼에 찔렸거든요." 옆에서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린다. 진우는 아닌 것 같다. "야, 베었다고 해야지." "그거나 그거나지..아무튼 그렇게 됐거든요. 막 심하게 다친건 아니구요.."
조금 더 대화를 나누고 전화를 끊었지만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시청에서 칼에 찔리다니? 낮잠 탓인지 멍한 머릿 속으로 어떤 말도 들어오지 않는 것 같다. 잠시 전화를 끊고 그대로 앉아있었다.
"이럴 때가 아니지..."
머리를 흔들며 최대한의 침착함으로 지갑을 챙겨 방을 나섰다. 잘은 모르겠지만 칼에 찔렸다는 말 이후로 귀가 윙윙거려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기에 문자로 병원 주소를 찍어달라고 했다. 택시를 타며 핸드폰을 보니 첫 전화가 온게 거의 2시간 전이다. 잠든 직후에 걸려온 것 같다. 멀미를 하는지 자꾸 머리가 어질거려 창 밖을 내다봤다.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을 보고 있자니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날씨가 흐리더니 비가 오는건가. 우산도 없는데."
회색의 하늘은 비 한 방울 없이 조용하다. 점심을 너무 적게 먹었는지 손에 힘이 하나도 없어 자꾸 핸드폰이 떨어질 것 같다.
"인석아, 그래도 조심했었어야지."
원장선생님의 책망하는 듯한 말에 진우가 겸연쩍게 웃는다.
"죄송해요. 정말 그러려고 따라간건 아니었어요."
선미, 원장선생님, 빠삭이와 김본좌 그리고 기자들이 침대를 둘러싸고 서있다. 기자들이 짐을 챙겨 일어난다. "그럼 저희는 이만..." "벌써 가시게요?" 원장선생님이 얼른 일어나 병원 앞까지 배웅해 나간다. 조금 전까지 진행되던 인터뷰가 끝나고, 사람들이 나가자 병실이 조용해진다. 4인실의 병실이지만, 다른 3곳에 침대는 모두 비어있다.
"무슨 생각으로 그랬어."
선미가 부드럽게 진우의 머리를 쓸어주며 묻는다. 선미와 원장선생님도 조금 전에야 병원에 도착했다. 도착할때 즈음엔 이미 경찰은 돌아가고, 인터뷰도 막바지에 다다랐다.
"그냥...맨날 시위때문에 시청 주위에 경찰 많잖아. 금방 따라올꺼라고 생각했지."
"으이그. 그러다가 안 따라갔으면 어쩌려고."
"그럼 뒤돌려차기로 그냥 팍!!!...아야야"
장난스럽게 다리를 들어올리던 진우의 표정이 잔뜩 찌푸려지자, 선미가 진우의 팔을 찰싹 때린다.
"장난치지마! 깊진 않아도 칼에 베였는데 덧나면 어쩌려고."
환자복으로 가려진 진우의 복부엔 붕대가 돌돌 말려있다. 소매치기를 제압하며 옆구리를 베인 덕분이다. 때마침 도착한 경찰들과 합세해 제압해내긴 했지만, 하마터면 큰일날 뻔한 아찔한 순간이었다. 조금만 운동신경이 떨어졌어도 가볍게 베이는 선으로 끝나지 않았을꺼라는 생각을 하면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다.
간단한 소매치기 사건으로 끝날 수도 있었던 사건이 생각보다 커졌다. 범인이 당황해서 휘두른 칼에 눈 위를 베인 피해자가 나오는 바람에 "12월 31일, 시청 광장 칼부림 사건"이 되버린 탓이었다. 게다가 범인을 제압한 사람이 격투기선수를 지망하는 고등학생이었고, 그 학생도 제압 중에 흉기에 찔려 부상을 입었으니 쓰기에 따라선 상당히 흥미로운 사건이 될만한 소재였다. 결과적으로 두 명이나 흉기에 찔린 광장 칼부림 사건이었으니까. 감사 인사를 하겠다며 경찰에서도 방문했고, 시청 광장에 운집해있던 방송국 기자들도 몰려들었다. 치료 자체는 금세 끝냈기에, 거의 한 시간을 넘게 인터뷰에 시달린 참이다.
덜컥-
병실 문이 세차게 열리며 시현이가 뛰어 들어왔다. "하아, 하아.." 거친 숨을 몰아쉬는 시현이를 보며 빠삭이와 김본좌가 인사를 건네자 알듯말듯 고개를 끄덕인다. 한 쪽 손으로 손잡이를 잡은 채 숨을 몰아쉬는 시현이의 모습은, 한 눈에 봐도 급히 달려온 모습이다.
"시현아..." 선미가 시현이를 불렀다.
시현이의 눈이 병실을 훑는다. 선미언니, 진우 친구들, 그리고 침대에 누운 진우. 조금 놀란 표정이긴 하지만 평온한 얼굴로 시현이를 바라보고 있다.
"..뭐야. 멀쩡하..네." 시현이가 웃으려는 표정을 짓자, 입술 끝이 이상하게 뒤틀어져 찌그러진다.
"난 또...괜히..달려왔네. 별 것도 아니면서...나 잠깐...화장실 좀..다녀올게.."
시현이가 웅얼웅얼 알아 듣기 힘든 몇 마디를 내뱉고 나가자, 선미가 진우를 쳐다본다. 진우는 그저 굳은 표정으로 병실 문만 쳐다보고 있느라 선미의 시선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누나 되게 놀라셨나본데." 김본좌가 똥그래진 눈으로 진우를 쳐다본다.
"누나가 데려올게."
선미가 진우의 팔을 다독거리며 일어섰다.
문을 열고 나오자 문 옆에 기대앉은 시현이가 보였다. 고개 숙인채 웅크리고 앉은 모습이다. 조용히 문을 닫고 시현이 앞에 쪼그려 앉아 머리를 쓸어준다.
"시현아, 많이 놀랐어?"
"아..냐..안 놀랐어...별 것도 아닌데 뭐..." 시현이가 고개를 가볍게 흔든다. 그 바람에 투명한 물방울이 후두둑 떨어진다.
"아이구, 우리 시현이 왜 이렇게 마음이 약해졌지? 완전 애기네, 애기." 선미가 시현이를 가볍게 안아 등을 톡톡 두드렸다.
아마 진우의 첫 고백을 거절한 직후였던 것 같다. 속으론 너무나 기뻐하면서도 진우의 마음을 받아줄 수 없었던 시현이는 크게 마음이 상해있었다.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곁에서 지켜보는 선미 눈에는 여실히 드러나보일 정도로 마음의 동요가 심하던 시기였다. 그때, 진우가 교통사고를 당했었다. 부모가 한 눈을 판 사이 골목길로 뛰쳐나간 꼬마아이를 구하려다 난 작은 사고. 아이는 아무런 부상이 없었고, 진우도 가벼운 뇌진탕 증상 외에는 그다지 특별한 부상이 없었던 아주 작은 사고였다.
그랬기에, 시현이가 보여준 모습은 아주 특별하게 보였다. 진정제를 맞고 잠이 든 진우의 곁에서 끅끅 거리던 시현이를 봤던 그 날, 선미도 어렴풋이 시현이의 마음을 알게 됐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이 진우를 사랑하는구나, 라고. 어릴 적부터 시현이와 진우를 키워온 선미였기에 가늘게나마 시현이의 마음을 눈치채고 있던 터였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모습을 사랑해주는 사람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자각을 주는 일은 언제나 시현이의 마음을 크게 헤집어놓았다.
시현이는 그저 상처투성이 마음을 가진 20살 여자아이일 뿐이었다. 아무리 어른스럽게 생각하고, 행동해도, 그저 20살이었다.
"이러고 온거야?"
한참을 토닥이며 놀란 시현이를 진정시키고나자, 그제야 시현이의 차림새가 눈에 들어온다. 12월 한겨울인데도 외투도 없이, 목이 조금 늘어난 헐렁한 흰색 티셔츠에 허벅지 중간까지 내려오는 굵은 실로 짜인 회색 카디건을 입고 있다. 신축성 있는 재질에 흰색 진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짝짝이 신발이 시현이의 마음을 여실히 드러내주는 듯이 혼란스럽다.
텅 빈 4인실은 조용했다. 낮은 TV소리, 닫힌 문 밖으로 들리는 저녁의 작은 소음들. 일찌감치 빠삭이와 김본좌가 돌아가고,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선미도 돌아갔다. "시현이 있으니까 걱정 안할게."
약간 고개 숙인 채 침대를 내려다보고 있는 시현이의 옆 얼굴이 보인다. 진우를 향한 오른쪽 얼굴은 머리를 귀 뒤로 넘긴 덕분에 가리는 것 없이 노출되어 있다. 얇디 얇은 턱선과 보드라운 볼. 앙다문 붉은 입술.
"정말..미안해."
진우가 어렵사리 입을 뗀다. 넓은 병실로 퍼져나간 작은 소리가 흔적 없이 사라지는 동안에도, 시현이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그저 침대만 바라보고 있다. 교통사고 때도, 오늘도, 진우는 시현이가 병원에서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시현이의 눈물은 진우가 없는 곳에서만 흘렀다. 감정을 추스른 얼굴엔 그저 냉정한 침착함만이 담겨 있다.
"김진우."
엷게 가라앉은 침묵의 안개를 뚫고, 자그마한 단어가 돛을 올린다.
"응?"
"........."
시현이가 다시 침묵 속으로 빠져든다. 말을 고르기 위해 신중을 기하는 모습이다. 영문을 알리 없는 진우는 그저 마른 침만 삼킨다. 어떤 말이라도 해줬으면.
"나, 너 사랑해." 조금 숨을 들이켰다. "너 없이는 살기 힘들 정도로..."
또렷하고 차가운 목소리. "널 죽이겠다" 고 말하는 것과 같은 어투로 던져지는 사랑 고백.
"나도 사..."
"끝까지 들어!" 비집고 나오는 진우의 말을 단박에 잘라낸다.
"하지만, 니가 이런 식으로 날 다루는 건 절대 받아들일 수 없어." 시현이가 고개를 돌려 진우의 눈을 쳐다본다. 날카로운 눈매 속에서 차가운 눈동자가 구른다.
"만약 다시 이런 식으로 날 다루면.....정말, 정말로."
조용하던 눈동자 속으로 격한 섬광이 스쳤다.
"니 앞에서 그대로 죽어버릴거야."
조근조근한 말투였지만, 그 말투에 실린 힘과 떨리는 목소리가 그대로 진우의 마음을 파고 들었다. 한 겨울의 강철처럼 차갑게 굳은 눈매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다. 오열하는 진우를 안아주던 가슴도 12월의 아스팔트처럼 차갑게 식은 것 같다. 평생을 시현이와 지내왔지만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푸른 빛 분노였다. 어떤 말을 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너무나 격렬하고, 너무나 아픈 말에, 그만 말문이 막혀버려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끈하게 데워진다.
잠깐의 침묵 뒤로 다시 시현이가 입을 열었다.
"....나 사랑해?"
조금 전까지는 전혀 다른, 꽉 막힌 듯 목 멘 소리가 새어나왔다. 벌개진 눈을 훔치며 고개를 들자, 냉정하게 얼어붙은 눈초리 위로 그득하게 괴인 눈물이 보인다.
"..내가 좋아?...이런 괴물이..?"
"그런 말 하지마!! 니가 왜 괴물이야!?"
진우가 격하게 몸을 일으켰다. 옆구리로 찌르르한 통증이 느껴지지만 개의치 않았다.
"사랑해. 정말로 사랑해. 나...정말 병신같은, 용서받을 수 없는 짓 해버렸지만....진짜로 진짜로...."
진우의 볼을 따라 눈물이 흘러내린다. 말을 이어감에 따라 벅차오르는 감정을 추스르기 힘들어, 고개를 숙였다. 바보같을 정도로 순수한, 질풍노도 10대의 사랑이었다. 커브도, 슬라이더도 없는 오직 직구 승부의 감정. 엉뚱한 방향으로 틀어지기도 했지만, 그 순수함만은 비할 데 없이 명백했다.
시현이는 자신의 팔을 감싸안은 손을 어루만졌다.
크고 단단한 손. 시현이의 하얗고 여린 손과는 대비되는 까무잡잡하고 억센 손.
진우는 시현이를 뒤에서 끌어안은 채 누워있다. 한참을 끓어오르던 격한 감정도 어느새 가라앉아,
숨소리도 한층 정갈해졌다.
"진우야..."
"응?"
진우가 대답하며 시현이의 뒷 목으로 얼굴을 묻는다. 달콤하고 싱그러운 시현이의 채취. 언제나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향기. 너무나 그리웠다. 혹시나 잃게 되는건 아닐까 얼마나 겁났는지 모른다.
"나....니 여자지?"
시현이는 조금 망설이듯 "여자"를 발음했다. 진우는 한층 더 깊게 고개를 묻었다. 새하얀 어깨와 목이 만들어내는 부드러운 곡선에 입을 맞췄다.
"응, 내꺼야. 내 여자야." 진우의 대답으로 치기어린 소유욕이 묻어난다.
"그럼....나 안아줄래?"
"응, 응. 얼마든지, 얼마든지 안아줄게."
진우가 시현이를 안은 팔에 한층 더 힘을 준다. 가뜩이나 작은 시현이를 그대로 가슴에 새길 것처럼 꼬옥 끌어안는다.
하지만 진우의 품에 깊게 안긴 시현이는 몸을 비틀었다. 자신을 붙잡은 손을 떼어내며 몸을 돌려 진우를 마주본다. 두 사람의 키 차이 탓에 시현이의 이마가 진우의 턱 부근에 와닿는다. 진우는 품 속에서 꼬물꼬물 올라오는 시현이의 움직임을 느꼈다. 이윽고, 시현이의 얼굴이 진우의 입 부근으로 올라오자, 고개를 살짝 뒤로 제쳐 진우의 입술을 물었다. 도톰한 붉은 입술이 진우의 아랫입술을 가볍게 물고, 애무하듯 빤다. 소프트콘이라도 먹는 것처럼 부드럽게 입술을 쓰다듬고는 떨어져 나갔다.
진우는 갑자기 진한 키스를 퍼붓고 떨어져나간 시현이를 사랑스러움과 의아함이 섞인 눈으로 바라봤다. 병실 창문으로 비쳐들어오는 네온사인 빛이 시현이의 오른쪽 눈동자를 초롱초롱 빛낸다.
여느 때처럼 부드러워진 눈매가 깊은 사랑을 품고 있다.
"...안아줘....여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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