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파심에서 주의: 아래의 내용은 어디까지나 꾸며낸 얘기로 특정성씨와는 전혀 무관無關함을 알립니다.
해당 성씨에 해당하는 분들께 양해바랍니다.
우경이야기/宇京物語 1券. 美少年 2부- 친아들 우경이
청년은 소년을 벽으로 몰아넣고 양 손을 벽에 짚어서 소년의 퇴로를 차단했다. 혁은 고개를 약간 돌린 채 곁눈질로만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소년이 착용하고 있는 안경 뒤의 눈빛에서 두려움과 흥분이 느껴졌다. 우쿄는 자신과는 전혀 비교조차 안되는 혁의 나체體인 탄탄한 근육질의 체구에다 강렬한 눈빛에 압도당해 완전히 위축당한 채 마른 침을 삼켰다. 둘의 체격차이는 20cm의 키 차이보다 더 컸다. 실제 나이와는 무관하게 외모도 혁은 완전히 성숙한 청년이지만 우쿄는 얼핏 보이는 나이보다 키만 좀 더 커 보일 뿐이고 외견상 아직 이제 겨우 11살이 되었을까말까한 어린애에 불과했다. 여자애로 본다면 그나마 좀 나이가 있게 보이겠지만 그래 봐야 15살 위로는 볼 수가 없다.
그것도 한국나이로, 소년의 고국인 일본에서의 나이로는 고작 10살 안팎이라는 얘기다.
윤기 있는 머리가 단정한 칠흑 색의 생머리, 볼의 도톰한 젖 살에 섬세하고 가녀린 턱 선, 안경을 앞에 두고 얇고 예쁘게 쌍꺼풀이 지고 맑은 호수 같은 천진난만한 약간 큰 눈에 작지만 오뚝한 콧날, 얇고 앙증맞은 빨간 입술. 마치 단백질인형 같은 크림색의 피부. 목젖 비슷한 것은 전혀 나오지 않은 무척 길고 가는 목, 체크무늬 남방에 싸여있는 야들야들하고 가냘픈 몸매와 남방의 옷깃 사이로 보이는 하얀색 피부, 청바지에 싸인 솜털조차 없을 것 같은 가늘고 예쁜 다리. 흰 양말이 신겨진 작고 예쁜 발.
연약해 보이지만 순진하고 귀여운 요정 같은 모습이 혁에게 기묘한 색욕을 일으켰다.
순간적으로 혁의 강건한 팔이 우쿄의 가녀린 허리에 휘감겼다.
우쿄는 발버둥쳤지만 혁의 굳센 체력 앞에서는 무기력하기만 했다.
우쿄의 매끈한 다리를 매만지면서 목덜미를 애무하던 혁의 입술이 우쿄의 입술에 가까이 대려는 순간에도 혁보다 훨씬 가냘픈 팔로 혁을 밀치려고 하고 있었다.
<いや!!! やめてよ!!! (싫어!!! 하지 마요!!!)>
이내 우쿄의 입은 혁의 입에 봉쇄당했다. 혁의 혀가 우쿄의 입안으로 침입해 들어가자 우쿄는 지금까지 했던 미약한 저항도 그만두고 온순해졌다.
혁은 우쿄를 으스러지게 껴안으며 입술과 혀로 우쿄의 입술과 구강口腔을탐하면서 지퍼를 내리고 아직 완전한
포경상태의 어중간하게 발기된 우쿄의 음경을 만지작거렸다.
우쿄는 같은 남자한테 강간强姦을 당한다는 창피함과 모멸감을 참는 듯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혁은 키스와 성기의 애무를 중단하고 우쿄를 바닥에 꿇어앉혔다. 우쿄는 잠시 눈을 뜨고 자신의 눈앞의 광경에 기겁을 했다. 비대한 청년의 음경이 밑에 큼직한 음낭을 매단 채로 자기 코앞에 징그러운 귀두를 들이대고 있었고 음경의 뿌리에서 군살 없이 근육질의 복근에 둘러싸인 배꼽까지 시커먼 거웃 털에 둘러싸여 있었다. 새하얗게 질린 소년의 입에다 귀두를 억지로 쑤셔 넣고 펠라티오를 강요했다.
우쿄는 목구멍까지 단단한 육봉이 박히면서 힘겨워했다.
혁은 우쿄의 머리를 양손으로 감싸 쥐고 강제로 왕복운동을 시켰다.
이윽고 혁은 사정 감을 느꼈다. 더더욱 왕복운동을 시키고 사정직전에 육봉을 뺐다. 침이 흥건하게 묻은 음경이 가느다랗게 침의 띠까지 딸려서 나오는 순간에 걸쭉한 정액을 방출했고 우쿄는 그대로 정액을 얼굴에 뒤집어쓰고 말았다. 엄청난 양의 정액이 얼굴에 끼 얹혀지는 동안 소년은 눈을 질끈 감고 입을 굳게 다문 채였다. 정액은 혁의 손바닥만한 넓이와 두께를 보이며 소년의 얼굴과 안경을 뒤덮어버렸고. 소년은 눈을 감은 채 멍한 표정을 지었다.. 혁은 그 모습에 너무나 섹시하게 느껴져 더더욱 흥분했다.
<헉!!!!!!!!!!!!!!!!!!!!!!!!!!!!!!!!!!!!!!!!!!!!!!!!!!!!!!!!!!!!!!!!!!!!!!!!!!!>
혁은 화급히 일으켰다. 원룸 안은 아직 어두컴컴했다. 시각은 토요일 새벽
4시였다.
방금 수면 중에 꾼 말도 안 되는 꿈을 상기하고는 아연실색했다.
<내가…… 미친 거 아냐? 무슨 그런……. >
문득 자는 동안 거의 알몸인 상태에서 유일하게 입고 있던 트렁크 안이 끈적하고 축축함을 느끼고 잠시 손을 그 안에 넣어보고는 더 황당했다. 몽정까지 했다니!!! 한 손으로 이마를 감싼 채 혁은 기가 막혀 했다.
이윽고 일어나서 욕실로 들어가 트렁크마저 벗어서 세탁기 안에 넣고 샤워를 하고 트레이닝 복을 입은 뒤 밖으로 나갔다. 이미 잠은 확 달아난 상태였다. 근처에 고등학교까지 미친 듯이 달음박질 한 뒤 운동장을 뛰었다. 몇 바퀴를 돌아 달렸는지 모를 만큼 뛰는 동안 아직 쌀쌀한 날씨임에도 트레이닝 복은 땀으로 젖고 숨이 목까지 차 올랐다. 간신히 달리기를 멈추고 나무토막 모양의 벤치에 앉아서 숨을 골랐다. 시간은 새벽 6시를 넘기고 있었다.
혁은 아직도 자기가 꾼 꿈이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가끔 꿈에 소년의 모습이 보이긴 했지만 이런 꿈은 처음이었다.
<여자도 아니고…… 어린 남자애한테 …… 내가 그럴 수가 있나? 미치지 않은 다음에야……>
혁은 처음 성에 눈 뜬 사춘기 이래 육군 중위로 병역을 마치고 난 지금까지 아니, 남자들끼리의 단체생활과 금욕을 강요당해야 하는 군대생활에서조차 남자한테 그런 걸 느낀 일이 전혀 없는 지극히 정상이었다. 가끔 다른 부대에서 상급자가 억눌린 성욕을 주체 못하고 하급자를 성추행 했다는 황당한 소식을 들을 때조차 미친 거 아니냐며 냉소를 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런 자신이 이제 와서 그런다니!! 하긴 남자애가 유난히 예쁘게 생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아니, 이럴 수가 없다!! 그냥 동생, 아니 조카처럼 생각해주고 돌봐주겠다고 생각한 게 2일전이었다.
“글마말이다. 이쁘장한게 진짜로 가시나였으믄 참말로 꼴리게 생기지 않았나? 요즘 밤마다 글마를 가시나로 만들어서 빠구리 뜨는 상상하문서 딸치는 재미로 지낸다 아이가~~~. 그렇게 생겨묵은 가시나 하나 있으믄 당장에 어디 끌고가서 따묵는……”
이전에 자신에게 얻어터진 3학년생이 그전에 했던 -혁에게 매를 번 직접 원인이 된- 추잡한 광언狂言이 상기되었다.
<미친 새끼!!!!! >
순간적으로 구역질이 느껴지면서 욕이 나왔다. 그 쥐새끼 같은 놈은 그날 이후에 본 일이 없다. 놈이야 나이 값을 못하는 금치산자禁治産者 같은 놈이니 차치하고 어느 정도는 완벽한 성인成人이라고 자신하는 자기 자신이 미성년자, 그것도 남자아이에게 혹해서 그런 꿈을 꾸고 몽정까지 했으니 자신도 그 놈과 다를 게 뭔가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이윽고 숨이 완전히 안정되자 혁은 몸을 일으켜 발걸음을 옮겼다.
땀에 젖은 트레이닝 복을 갈아입고 대강 토스트를 만들어서 아침을 때운 뒤 평소의 습관대로 헬스장에 들를 것이다.
혁은 취미가 운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집에도 몇 가지 운동기구들을 비치해 두고 있을 정도이다. 그러니 호리호리한 체격에 보디빌딩 모델로 나서도 될 만큼의 근육질을 자랑하는 몸매를 만들어낸 것이지만……
<그건 그렇고 그 애는 감기가 완전히 나았을까? >
문득 혁은 우쿄의 연락처를 미처 알아두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석진이에게 간간히 우쿄의 소식을 듣긴 하지만 전화번호 같은 걸 묻지 않았었다.
혁으로서는 감기는 “고작 감기”에 불과하지만 우쿄같이 연약한 사람이라면 문제가 달라질 것이다.
혁은 웬일인지 우쿄의 모습이 간절히 보고 싶어졌다.
우쿄의 감기는 완전히 회복되어 있었다. 아침식사를 1층의 주방에서 가족들과 같이 할 수 있게 되었을 정도였다.
아침식사를 끝내고 아버지와 수진은 학교로 출근, 등교를 했다.
수진은 아버지인 석주가 근무중인 남고의 바로 옆 여고로 진학했기 때문에 어차피 가는 길은 같았다.
. 두 부녀父女를 배웅하고 나서 우쿄는 미코의 설거지와 정리를 거들었다.
< 宇っちゃん. ママが終えるから居間に行って テレビや見ていて (우쿄, 엄마가 다 할 테니까 거실로 가서 TV나 보고 있어.)。 >
< ……邪魔になるんですか (방해되나요)? >
<そうではなく韓國では男がキッチンを出入りするのをよくなく思ったら (그게 아니라 한국에서는 남자가 부엌을 드나드는 걸 안 좋게 생각하거든)。>
말은 그래도 미코는 가사일을 거들어 주는 아들이 대견스러웠다. 그러고 보면 한국의 엄한 유교儒敎집안에서 자란 남편은 여자가 할 수 없는 힘쓰는 일이 아니면 가사일을 거의 거들어주는 성격은 아니었다. 하긴 일본에서도 동생들이나 친구들 얘기를 들어보면 남편들이 그리 가사를 잘 도와주는 사람들이 없는 듯 한 걸 보면 두 나라 남자들이 그 점에서 별 차이는 없는 듯 하지만……
마른 행주로 미코가 건네주는 접시의 물기를 닦고 있던 우쿄는 가볍게 한쪽 볼을 부풀렸다. 미코는 그게 아들이 뭔가 못마땅할 때의 버릇인 걸 알고 있었다.
< 大丈夫です, 私は日本人だから (괜찮아요, 난 일본인이니까). >
<ねえ, その言うことを聞けばパパがさびしがる. そして日本も同じよ. (얘, 그 말 들으면 아빠가 섭섭해 한다. 그리고 일본도 마찬가지야.)>
< ところが事實なよ (그렇지만 사실인 걸요)……>
마지막 그릇을 닦아서 식기건조대에 놓은 우쿄가 문득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 모습이 너무 쓸쓸하게 느껴져서 엄마로서 너무 안쓰럽게 느껴졌다.
고무장갑을 벗고 주방용 수건으로 손의 물기를 닦은 미코는 등 뒤에서 우쿄를 껴안았다.
미코의 풍만한 가슴이 아들의 등에 밀착했다. 미코의 얼굴이 우쿄의 풍성한 머리카락과 맞닿아 샴푸냄새가 풍겨왔고 우쿄는 엄마에게서
따뜻한 온기와 함께 원숙한 여인의 향기가 느껴졌다.
<大丈夫だから母方のようにママにも思いきり甘えてよ, 分かったの (괜찮으니까 외가에서처럼 엄마한테도 마음껏 응석을 부리렴, 알았지)? >
우쿄는 몸을 뒤로 돌려서 엄마에게 향하고는 싱긋이 웃어 보였다.
< あまえは? 子でもなくて, もう私も大學生ですよ. (응석은요? 애도 아니고, 이제 저도 대학생이라고요)>
미코는 피식 웃었다. 우쿄의 나이는 한국나이로 18살, 일본 나이로는 17살이다, 정상적이었으면 지금 고3, 원래대로라면 고2학년생일 터였다. 더구나 얼굴로 봐선 이제 고학년의 초등학생쯤의 어린 꼬마로 보여서 무척 귀여웠다.
친정에서는 응석받이로 자라던 애가 막상 한국에서는 아직도 친부모가 익숙지 않아서 눈치를 보는 건지 아니면 양 어머니인 유키코의 사망부터 이번에 대학진학 때까지 너무 않좋은 일을 많이 겪어서 그 바람에 정신적으로 갑자기 성숙해져 버려서인지 너무나 어른스럽고 점잖게 행동해서 미코로서는 약간 섭섭했다. 친 엄마인 자신에게도 어리광을 부리는 모습을 보여주면 좋으련만……
미코에게 웃는 모습을 보여준 뒤 고개를 내리는 순간에 하얀 얼굴이 빨갛게 되어 버렸다.
병아리색 스웨터와 레이스가 달린 에이프런에 쌓여 있는 엄마의 풍만한
유방이 바로 눈앞에 불쑥 디밀어져 있던 것이다. 친 엄마라고는 해도 최근에야 그걸 안 데다가 이모들 중에서도 외국에서 멀리 떨어져 살고 있어서 거의 뜸하게 보다 보니 미코는 심지어 동경憧憬의 대상이기까지 했던 다소 낮 선 존재였다. 새삼스레 미코의 색기넘치는 미모와 스웨터와 미니스커트차림의 글래머적인 몸매가 인식되자 순간적으로 정신이 멍해졌다.
우쿄는 무의식적으로 수줍어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비스듬히 고개를 아래로 돌렸다.
(とても可愛い (너무 귀여워)!!!)
미코는 그대로 아들을 껴안고 가볍게 아들이 뺨에 뽀뽀를 해줬다.
우쿄가 친부모의 존재사실을 안 것은 중학교 1학년때로 그때까지 우쿄의 양아버지인 노조미가 사망한 뒤였다. 너무 슬퍼하길래 생각 끝에 남편인 석주가 어차피 언젠가는 알려줘야 하기도 하고 친부모의 존재 사실을 알면 조금이라도 위안이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마누라가 말리는 데도 우쿄의 어머니이고 미코에게는 친언니인 유키코의 동의를 얻어서 얘기를 해줬더니 오히려 쇼크를 받고 기절을 해버렸고 애가 한동안 공황장애 증세까지 보일 정도였다. 남편은 일생일대의 경솔한 실수를 했다며 귀국하던 비행기에서 내리고 한참 뒤까지 자책해야 했다.
반면에 딸인 수진은 일본의 친척 오빠가 실은 자기 친 오빠라는 사실을 듣고 처음에는 놀랐지만 외동딸로만 자라 형제가 있는 친구들을 부러워하던 터라 바로 드디어 자기도 오빠가 생겼다며 좋아서 생 난리를 치더라는;;;;
그 후 작년에 유키코마저 사망하고 나서 한국으로 데려온 뒤까지 엄마 아빠라고 부르는 게 익숙지를 못해서 이모, 이모부로 부를 정도였다.
설겆이를 마치고 아들은 거실에서 TV을 켠 뒤 케이블 채널에서 NHK채널을 찾아 보는 동안 미코는 안방으로 들어가서 화장대에 앉았다. 아까 아들의 쓸쓸한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어린 나이에 여러 가지로 안쓰러운 일들뿐이었다. 태어났을 때 그 아이는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난 상태였다. 아버지의 권유로 선을 보러 한국으로 가서 -현재 80이 넘은 나이에도 훨씬 정정한-시부모한테는 마음에 들었지만 다른 시댁의 어른들이 “왜년”을 며느리로 들일 수 없다며 맹렬히 반대했다.
미코가 볼 때 가문 내력이 그럴 만도 했다.
무슨 20대조상인가 하는 모 장군은 文綠의 役-임진왜란 때 3000명도 안 되는 조선군으로 그 열 배나 넘는 일본군을 싹쓸이 했다는 전설적인 장군이래지. 남편의 한2대조인가는 독립군이 5명이나 나왔대 지, 심지어 시아버지조차 독립운동을 하셨다는, 거의 일본인이라면 잡아서 갈아 마실 것 같은 분위기의 집안이었던 것이다. 그런 가문의 시아버지가 일본인 며느리를 맞을 생각을 했던 이유는 일본경찰한테 쫓기던 시아버지가 한국에서 대학 교수로 일하던 친정 할아버지한테 이래저래 신세를 지면서 당시 중학생이었던 친정 아버지의 공부를 가르치며 우정을 쌓아나가던 중에 해방이 돼서 친정 집이 일본으로 돌아갈 때 나중에 각자 아들, 딸을 낳게 되면 사돈 맺자고 약속하는 걸로 석별의 정을 나눴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고 보면 시댁에는 권權(힘, 세력)이라는 성씨가 잘 어울리게 거의 남자형제들만 4명인데 친정에는 사오토메早乙女(어린아가씨)라는 성씨가 무색하지 않게 1남4녀의 딸 부잣집이 되어버렸다. 미코는 자매들 중에 3녀였다.
어쨌든 미코는 결국에 일본으로 돌아와야 했는데 이미 임신을 한 상태였다. 미코는 아들을 낳았을 때의 일이 잊혀지지 않았다.
신생아가 출생순간에 우는 건 당연하다지만 우쿄는 엄마 뱃속에서 나오는게 너무나 싫었던지 특히 그게 정도가 지나쳐서 나중에는 탈진해서 인큐베이터에 집어넣어야 했을 정도였다.
다행히 그 후에는 무척이나 양순해서 한동안 첫 출산이었던 미코가 키우는데 어려움이 없었었다.
그리고 워낙에 상황이 불투명한 차에 딸만 2명 낳고 아들이 간절했던 큰 언니가 아들을 자기한테 입적시키고 싶어했고 그래서 남편의 동의를 얻어서 큰 언니와 형부인 사촌오빠의의 아들로 입양시켰다. 말이 입양이지, 미코와 석주의 아들이라는 증거는 최근에 시댁의 어른들에게 보이기 위해 한 유전자 감식을 통한 친족확인증명검사서류뿐으로 법적으로는 명백히 친정에서 친정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언니인 유키코가 낳은 유키코 부부의 친자식으로 되어 있다. 즉, 우쿄에게 친부모는 법적으로 엄연히 외국의 이모,이모부 부부인 것이다.
나중에 남편과 시부모들이 다른 시댁 어른들을 간신히 설득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려 한국으로 갔을 때 두 부부는 앞으로 자신들의 자식이 아닌 온전히 언니 부부의 자식으로- 그리고 남편인 석주로서는 한국인이 아닌 일본인으로- 자랄 아들 때문에 우울해 했다. 그 뒤로 두 부부는 일단 우쿄에 대한 친권은 완전히 포기한 상태로 우쿄가 친정에서 귀여움 받으며 양육되고 있는 걸 위안으로 삼아야 했지만 시아버지는 나중에 당신 장손長孫의 존재를 알고 종친회에 영향력을 행사해 억지로 족보에 당신의 다른 손자 이름 앞에 “권 우경”이라는 한국식 이름을 등재시켰다. 먼저 돌아가신 친정 어머니의 이름을 그대로 따서 유키코가 宇京라고 지은 건데 마침 “宇”자가 항렬자로 맞아 떨어져 그대로 올린 것이다. 물론 이름이 한국이름이래도 거의 여자이름인데다 외가쪽의 여자이름중에 워낙에 흔한 이름이라 시아버지가 멋대로 "우남" 이라고 이름을 고치려 했다가 그러지는 못했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 것이다.
어쨌든 일본의 아들은 유키코 부부가 워낙에 귀여워해서 차마 돌려달라고는 못해서 포기하고 따로 아들을 낳으려고는 했다. 남편이 집안의 장자長子이고 종손宗孫이라는 책무 때문에라도 아들을 낳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둘 사이에 아들은 현재 국적조차(시댁의 다른 어른들이 그렇게 싫어하는) 일본인인 우쿄 하나뿐이었다. 늦둥이를 생각하고는 있지만……
남편인 석주, 더 나가서 친가 쪽 어른들이 결혼 전에 이상적으로 바랬던 아들상이라면 어렸을 때는 사고뭉치개구쟁이이고 좀 청년 티가 난다 싶을 때부터는 역시 아버지를 뛰어넘는 체격과 투철한 극일剋日 정신과 민족의식을 지닌 늠름하고 호쾌豪快한 대한남아大韓男兒였다. 물론 석주의 경우는 애초에 아내가 일본인이니 대놓고 극일 정신을 바라긴 어렵겠지만……
그는 자신의 친구들의 아들과 조카들이 자기 아버지들을 훨씬 뛰어넘게 키가 커져서 훌륭한 사나이대장부로서 성장하는 것을 자랑하는 것을 보면서 내심 부러워했었다
석주가 수진의 남자친구이자 자신의 제자인 석진을 아들처럼 생각하고 신임했던 것도, 딸인 수진이가 선 머슴애 말괄량이 왈가닥에다 만능 스포츠 소녀로 자란 것도 은연중에 그를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처가에서 거의 남처럼 자라고 있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던 친아들 우쿄-우경이는 이 모든 점에서 아비의 바램과는 철저히 엇나가고 있었다.
얼굴은 그냥 예쁜 여자아이 같았고 이제 대학생-실제로는 이제 고2쯤 올라가야 할 나이지만-인 현재도 키도 이제 177Cm인 자기 친아버지보다 15cm나 작고 외모상 너무 어려 보였다. 몸집도 인형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나도 가냘펐고 성격과 행동거지도 거의 여자아이라는 편이 어울릴 지경이고 더구나 누나와 이모들한테 둘러싸여서 너무 오냐오냐 하면서 응석받이로 키워져서 남자아이라면 좀 활달한 맛이 나야 하는데 너무나도 성격이 얌전하고 소극적이고 나약했다.
특히나 -민족의식은 커녕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모른 채- 일본땅에서 국적은 말할 것도 없고 외모나 사고방식까지 완전히 “일본인”으로 자란 모습은 -민족정기로 충만한-아버지가 보기에 은연중에 안타깝고 한심스럽게 여겨졌다.
미코는 반대로 아들의 그 모습이 너무나 예쁘게 보였다. 너무나도 귀여운 모습의 아들을 보고 언니에게 아들을 맡기길 잘했다는 생각과 이렇게 귀여운 아이를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자기가 키웠으면 좋았을 걸 하는 후회가 동시에 들 정도였다.
가끔 시댁에서 보는 시커먼 사내아이로 자라는 친척조카들이 처음에는 남편의 생각처럼 부럽게 생각되었지만 이제는 오히려 징그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수진이조차 자기 친 오빠라는 사실을 알기 전부터 이 너무나 예쁜 외모와 부드러운 심성을 가진 일본인 친척오빠를 너무나 좋아하고 있었었다.
하지만 남편으로서는 그래도 아들인데 일본땅에 거의 버려두고 자기 아들이라고는 밝히지도 못한 채 가끔 보러 가서 용돈을 주거나 놀아주고 아들임을 밝힌 뒤에 선물로 한국어나 역사에 관한 책을 보내주는 것 빼고는 챙기질 못한 게 미안하고 그런 주제에 욕심을 부리는 게 몰염치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아버지로서 아들에게 바라는 게 있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현재 법적으로야 비록 남과 다를바가 없는 관계지만 친 아버지인 자신이 한국인이니 그 아들도 한국인인 게 당연하지 않은가?
왜 내 아들 우경이는 다른 아들처럼 늠름하게 자라지 못하고 유순한 여자아이처럼만 자라는 것인지……
그나마 한가지 만족스러운 것은 유순하고 순진한 성격과는 달리 지능지수가 높고 반에서 1~2등. 전 학년에서 5등 밖으로 성적이 밀려난 적이 없을 정도로 우등생이었다는 점이었다.
그것도 허약체질이라 체육실기가 전교꼴찌여서 전교에서 5등 안팎이었던 것이었고 심지어 한국으로 왔을 때는 일본에서 배운 교과의 연속성도 감안해서 처음에 일본인 고등학교로 보내려고 했는데 이미 스스로 고등 학교교과 내용을 전부 알고 있어서 그냥 그대로 졸업시켜도 좋겠다 싶었을 정도이고 친가 쪽의 압력도 있고 해서 한국인 친구들을 사귀어서 빨리 한국생활에 적응하게 하려고 남편이 근무하는 학교로 편입학 시키는 걸로 생각을 바꿨었다.
대신에 한국으로 데려왔을 때 바람과는 어긋나지만 지금 모습도 나름대로 마음에 안드는게 아니었던 데다 아내인 미코와 여동생인 수진은 우쿄의 모습을 너무나 좋아해서 석주는 자기욕심은 굳이 앞세우지 않기로 했다.
더구나 안그래도 그럴 게재도 아니었고 비록 친부모는 아니지만 객관적으로 부모를 모두 잃은 가엾은 아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럴 수도 없었고 처가에서 우쿄를 계속 양육하고 싶어하는 걸 고집을 부려서 한국에 데려왔을 때 말없이 따라와 주는 걸 보고 어떤 모습이든 자기아들이니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해주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나중에 귀화시키고 해도 그건 나중에 천천히 한국이라는 나라에 애착을 갖게 한 뒤에 생각할 일이다. 하지만 시댁의 친척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게 문제의 시작이었다.
화장을 고치며 옛날생각을 하던 미코는 아까 아들이 私は日本人だから(난 일본인이니까)이라고 했던 게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그만큼 자신의 한국 쪽 친가에 심한 앙금과 미움이 남아 있는 듯 해서 한편으로는 안타까웠다. 오죽했으면 올해 2월에 한국의 대학에 편입학시험을 보기 위해 한국으로 왔을 때가 설날 전날이어서 시댁인 전주로 가야 했는데 같이 가자고 했더니 우쿄는 차라리 시험을 포기하고 일본으로 돌아가고 말지, 전주에는 절대 안 가겠다고 완강히 버티는 바람에 빈 집에 우쿄만 차마 남겨둘 수 없었던 가족이 서울에서 따로 설날을 쇠었을 정도로 친가에 대한 반감이 심했던 것이다. 하긴 미코도 결혼 뒤에 시댁의 몇몇 친척들의 눈총 때문에 남편이 시댁인 전주에서 웬만해선 왕래가 힘들고 일본에서도 가까운 대구, 마산으로의 전출을 자청해서 신접살림을 차렸을 정도였다.
덕분에 미코가 처음 배운 한국어는 어이없게도 표준어가 아니라 대구와 마산 쪽이 적당히 섞인 경상도방언이었다. 마침 일본어와 경상도 사투리가 억양이 비슷해 쉽게 배울 수 있었다. 남편은 아내의 경상도 사투리가 무척
사랑스럽고 귀엽다고 하더라 만 전라도의 시댁에서는 무척 떨떠름해 했다.
물론 지금은 표준어로 완전히 바꿨지만 억양이 약간 남아 있는 건 사실이다.
집안의 장손이고 종손인 우쿄-우경을 한국으로 데려와서 한국인으로 귀화시켜 입적시켜야 한다는 어른들의 성화때문에라도 작년에 한국으로 데려와서 처음 시댁으로 데려가 인사를 시키고 서울로 돌아왔을 때 우쿄가 한 말이 “마치 거인국巨人國에 포획돼서 구경거리로 끌려온 난장이가 된 기분”이었다는 것이다. 일본에서 우쿄는 응석받이 막내로 귀여움 받으며 자랐는데 졸지에 우쿄 밑으로 남자애만 6명이나 되는 사촌동생-우쿄=우경과 3달 밑으로 동갑인 우석 밑에 우혁, 우진, 우성. 우현,우람-들이 생긴 것이다. 문제는 마지막에서 두 번째인 우현이만 빼고 중학생이라는 우성이조차 덩치가 우쿄보다 훨씬 크고 남자같이 생긴 애들이어서 우쿄의 기를 완전히 죽여놓아 버렸던 것이다. 대학생이 된 현재도 우쿄와 외양적으로 비교될 아이는 이제 초등학교 고학년이라는 우현이 정도였다. 애초에 친가 쪽이 다소 무골이라서 인지 남자들은 몸집이 유난히 큰 편이기도 했고 반대로 우쿄가 외모나 체격상으로 여자들은 미인이 많고 남자들은 중성적인게 특징인 외가쪽을 많이 닮아 있고 특히 이모들을 닮아서 여성적인 정도가 심해졌던 게 원인이기도 했다. 우쿄는 그 즈음부터 사촌동생들에서 더 나가 자기 이외의 남자들에게 심각한 열등감을 느끼기 시작하고 있었다. 한국의 사촌동생들과의 대면이 안 그래도 소극적인 성격의 우쿄를 너무 정신적으로 위축시키고 주눅들게 만든 것이었다.
일본에서도 우쿄는 다른 남자아이들보다 여성적이고 연약했지만
공부와 독서로 지식과 교양을 쌓는 것으로 상쇄해 왔고 오히려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가족들과 친구들이 -적당히 놀려먹기도 하고 심지어 여장裝까지 시켜보면서- 그의 외모와 여성적인 분위기를 귀여워해주고 사랑해줘서 별 문제가 없었지만 한국에서는 그게 아니기 때문이다. 다들 판에 박힌 남성관을 우쿄에게 강요했던 것이다.
처음 우쿄를 본 지금 육군 소령이라는 막내 작은 아버지라는 사람이 우쿄를 품평해서 웃음거리로 만들고 우쿄를 울린 말이 이랬다.
<저놈, 고추는 제대로 달린 거야? 사내자식이 계집애같이 예쁘게만 생겼지 비실비실해 갖고 군대 보내면 소총도 제대로 못 들게 생겼구먼, 장가보내면 밤에 힘이나 제대로 쓰겄나? >
그 말을 나중에 들은 남편은 화를 내면서 자기 동생을 처음으로 두들겨 팼을 정도고……
어른들은 대부분 우쿄에게 친절하게 대해주긴 했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애초에 손자로 인정하고 귀여워해줬지만 어른들 중 한 두 명은 우쿄가 일본인이라는 점 때문에 미운 오리새끼 취급하는 경우도 있었다.
친절하게 대해도 일본인으로서의 우쿄의 모습을 노골적으로 못마땅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우쿄로서는 상대하기가 어려웠다.
술에 취해서 임진왜란이나 일제36년을 거론하면서 그래서 일본은 나쁜 나라라고 얘기하는 데는 일본인으로 자란 우쿄는 질려버렸다.
심지어 어느 철부지 사촌동생이 우쿄에게
“일본 놈은 너네 나라로 꺼져!!”
라는 소리를 하는 데는 그 자리에서 말없이 구석진 데로 피해서 서럽게 울었을 정도였다.더구나 “천천히 시간을 두고”라는 석주와는 달리 석주의 아버지를 비롯한 집안 어른들은 자기 눈앞에서 완전히 한국사람으로 바뀌어서 가문의 대를 잇는 종손을 보고 싶다는 조급증에 찬 과욕過慾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어른들이 자라온 환경이나 받아온 교육 등으로 볼 때 분명한 일본인인 우쿄에게 호통을 치며 친 아버지가 한국인이고 이 집안의 장손이고 종손이니 우쿄도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이라며 한국사람이 될 것을 강요하고 난생 처음 보는 사람들이 어른으로서의 권위를 내세우면서 그런 억지를 부리는데 처음에는 어이가 없었고 심지어는 화까지 났던 것이다. 그들이 볼 때 일본인으로 자랐던 우쿄의 과거는 무시해도 상관 없는 것이고 일본인으로서의 정체성은 "근절해야 할 병균체"이자 철없는 어린애의 "뜯어고쳐야 할 못된 버릇"정도에 불과하고"자랑스런 한국인"으로서의 모습이 올바른 모습이었던 것이다.
안 그래도 한국의 친부모는 여전히 낫설기만 했고 지금껏 어머니였던 유키코까지 잃어서 고아孤兒가 된 기분이었던 우쿄로서는 친가에서 부모 잃은 설움을 톡톡히 겪고 있었고 당연히 자기를 구박하고 압박하는 싫은 곳으로 느껴지고 있었다.
아니 우쿄가 느끼기에는 한국이라는 나라가 일본에 비해 여러모로 상당히 거친 편이어서 여린 성격의 우쿄로서는 적응하기 버거운 나라였다.
심지어 한국에서 본 동급생들도 상당히 거친 애들이 많아서 우쿄는 이때만큼 인간관계에 곤란을 느끼며 고립감에 시달린 적이 없었다.
특히 충격적이었던 것은 친아버지를 담임으로 해서 편입학 한 학교에서 교사들이 학생들을 몽둥이 같은 걸로 체벌하고 군대식으로 기합까지 주는 것이었다. 심지어 자기 아버지가 야구배트로 학생들을 몇 십대씩 체벌하는 걸 보고 설령 우쿄는 외국인이라 열외로 봐준다고 해도 마치 구 일본군대를 연상시키는 끔찍한 체벌 광경과 교실을 압도하는 공포분위기에 그 자리에서 기절해서 양호실로 실려갈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나중에 외국인인줄 모르고 우쿄의 두발상태를 문제 삼은 한 선생에게 우쿄가 일본어로 뭐라고 하는데도 학생부로 끌려가 체벌(이라고 쓰고 폭행이라고 읽는)을 당하는 봉변을 당하고 나서 일주일씩이나 충격에 휩싸여서 등교거부를 했을 정도였다.
점차 일본과는 전혀 다르고 열악한 학교생활이 싫어지고 있었다.
석주도 아들이 한국의 학교생활에 제대로 적응을 못하는 것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차라리 처음부터 일본인 학교로 편입학 시킬 걸 하고 후회할 정도였다.
아니, 한국에 온지 겨우 한 달 만에 우쿄는 한국생활 전반에 염증을 내기 시작했다.
거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집에서조차 우쿄는 안주할 곳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시댁에서 친척할아버지가 서울로 통원치료를 받아야 해서 우쿄가 한국에 체류한 마지막 2달 동안 집에 머물게 되었었다.
근데 하필이면 전주에서의 끔찍한 기억 탓에 친가 쪽이라면 경기를 일으키는 우쿄에게 가장 강경파인 할아버지가 곁에 붙게 되었던 것이다.
서울에 올라와서 첫날에 아직도 일본어를 쓰면서 일본인의 행동거지를 보이는 우쿄를 보고 석주에게 불같이 야단을 쳤다. 석주가 좋게 설명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애가 정신력이 부족하고 유약해서 그런 탓이고 적응되면 괜찮아질 거라고 호통을 치면서 그날로 아직 한국어도 서투른 애한테 일본어로 말하는 것을 금지시키고 식사시간에 한국식으로 국을 숟가락으로 퍼먹지 않고 일본식으로 국 그릇을 손으로 들어서 후루룩 마시거나 밥공기를 들고 젓가락으로 퍼먹으면 그런 건 상놈들이나 하는 짓이라며 호통을 치는 건 다반사였다. 어떤 때는 집에서 편하게 입는 키모노-양어머니 유키코가 우쿄를 위해 애정을 담아 만들어주어서 우쿄로서는 무엇보다 소중했던-를 입은 채로 ?겨야 했다. 우쿄가 읽는 책이 일본 책이라고 본인 허락도 없이 버려져 있기 일쑤고 일본어로 쓴 노트 때문에 한글을 쓸 것을 강요당하며 맞은 적까지 있었다.
말로만 증손이네 뭐 네이고 석주의 숙부는 우쿄를 순전히 일본인으로 보고 우리가 옛날에 (왜놈들한테) 그렇게 당했으니 너도 한번 당해보라는 식으로 보였을 정도였다.
일본어 사용을 금지 당하고 아무도 없는 사이에 노트에 일본어와 한문으로 필기했다며 한글사용을 강요하는 미치광이 같은 노인한테 허리띠로 폭행을 당해서 반 실신상태로 울고 있던 아들을 석주가 보고는 일제시대의 조선어 말살정책의 패러디 같다고 느꼈다면 비약飛躍일까?
진정으로 집안의 증손으로 봐줄 요량이었으면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 그 친척 할아버지가 외모나 성격상 여성적인 성격의 우쿄에게 “사나이 대장부 운운”하면서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며 남자다워지고 씩씩해지라고 강요하는 데는 더 이상 견디기 힘들어하고 있었던 것이다.
책상에서 글을 쓰거나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리는 걸 좋아하는 몸도 약한 애를 억지로 밖에 나가 운동을 하라고 해서 반 시체를 만들기까지 하는데 석주와 미코, 수진으로서는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점차 정신적으로 황폐해져 가고 있던 우쿄는 심지어 양부모들의 죽음으로 생겼던 우울증까지 악화돼서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서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할 만큼 정신적인 상처를 심하게 받고 있었다. 원래 잘 우는 성격인데 이때 툭하면 방에 틀어박혀 우는 일이 많았었다.
우쿄는 한동안 자폐증적으로 마음의 문을 닫은 채로 공부에만 몰두하는 것으로 어떻게든 버티려고 했다. 어른들에게 깍듯해서 무조건 우쿄의 역성만 들어줄 수 없었던 아버지는 그렇다 치고 엄마와 여동생인 수진이 유일하게 소통하는 상대가 되었지만 그것도 얼마 안 가 한계가 돼가고 있었다.
결국 얼마 안가 우쿄는 참지 못하고 폭발했다.
할아버지가 술에 취해 우쿄를 앞에 강제로 앉혀놓고 우쿄의 온순하고 얌전하기만 한 성격을 지적하며 석진이나 사촌동생들, 그 외 같은 또래의 남자애들을 거론하며 좀 당당한 사내대장부가 되야 하지 않겠냐고 잔소리를 -제3자가 듣기에 심하게 모욕적일 정도로- 했고 결국에 노인과 친척 손자 사이에 격한 언쟁이 발생했다.
노인은 연신 "왜놈" 쪽발이""라며 우쿄를 몰아세웠고 이 상황을 보다 수세에 몰려서 이성을 잃은 채 항의하던 아들 입에서 나온” 죠센징”이라는 단어에 앞뒤 안가리고 충격을 받은 석주가 결국 그날 처음으로 지금껏 체벌은 하지 않았던 아들의 뺨을 때렸고 맞은 곳을 손으로 감싼 채 처음에는 심한 충격을 받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다가 점차 -자신한테 이러려고 한국으로 데려왔던가 하는- 심한 배신감으로 아버지의 심한 야단을 한기가 돌 정도로 차가운 태도로 묵묵히 듣기만 하던 우쿄는 그 다음날 새벽에 집을 나가버렸다.
한국에 데려오고 불과 석 달 만에 아들이 가출해 버리자 온 집안이 발칵 뒤집혀 있었다. 울고 있던 아내한테 여기가 일본이 아닌 다음에야 갈 곳도 없는데 어딜 가겠냐며 하루 이틀 지나면 배가 고파서라도 기어들어올 테니 놔두라고 질타했지만 한 달이 넘도록 애가 들어올 생각을 안 하자 점차 불안해졌다. 수소문 끝에 설마 하고 일본의 처가에 연락했더니 정말로 일본의 외가에 가 있었던 것이다.
실은 이미 아내와 수진이는 알고 있었지만 우쿄를 대하는 시댁의 태도에 불만을 품었던 두 모녀가 아버지에게조차 일부러 함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다지 싸지 않은 비행기 요금이긴 하지만 그 정도는 본인이 부담할 수 있다는 걸 간과한 게 잘못이었다.
양어머니인 유키코가 사망했을 때 우쿄에게도 적잖은 예금을 유산으로 남겨줬고 그 관리를 위임 받은 석주가 우쿄의 앞날을 위해 아들 앞으로 신탁예금을 만든 뒤 거기서 나오는 이자 중에서 대부분을 다시 적금통장으로 만들어주면서 일부는 용돈으로 쓸 수 있게 일반통장으로 들어가도록 조치를 취해줬었는데 일본은행에서 엔화로 찾아서 원화로 환전해야 하는 번거로움 때문에 필요에 따라 용돈까지 직접 주고 있었던 것이다.
응석받이로 자라긴 해도 원래 검소한 걸 좋아하는 성격이라 돈 쓰는 걸 별로 안 좋아하는 우쿄이니 설령 적은 돈이라도 일반 통장에 상당한 돈이 모여 있을 게 분명했다.
그걸 무시한 채 제가 어딜 가겠냐 하고 놔두었던 것이다.
우쿄가 처음 일본의 외갓집으로 돌아갔을 때 외가친척들은 따듯하게 맞아줬지만 자신들의 시선을 피하는 걸 보고 당황했다.
친부모와 같이 살게 되서 양부모를 잃은 슬픔을 잊고 행복해 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너무 표정이 어둡고 우울해 했던 것이다.
일본을 떠나기 전에 기거하던 방에서 한동안 히키코모리 상태로 틀어박혀 있은 뒤 이유를 얘기하라고 어르고 달래는 이모들과 누나들 품에 안겨서 한참을 울다가 한국에서 있었던 일들을 얘기하자 다들 아연실색하는 표정이었다.
우쿄는 외갓집에서는 귀여움 받았던 아이였는데 정작 친가 쪽 친척들이라는 인간들이 자신들의 선민사상選民思想적 독선 때문에 정신적으로 폭행을 가하고 학대를 했다는 것이 충격이었다.
우쿄는 정직하고 순진한 아이이니 거짓말을 할 리도 없었고 친아버지조차 이실직고하면서 사실을 확인해 줬기 때문에 외가의 충격은 컸다.
친 아버지인 석주로서는 유구무언有口無言었다. 치료를 다 받고 나서도 계속 서울에 눌러앉아 있으면서 가족들을 불편하게 만든 노인의 “지가 할아버지인 자기 가르침에 그냥 따르면 되지 그걸로 정신적 상처를 입고 할게 뭐가 있냐” 하는 적반하장 격의 반응에 냉정하게 당장 시골로 내려가시라고 일갈一喝하고는 압송 당하는 죄인이 된 심정으로 아들을 데려오기 위해 인천공항에서 나리타행 비행기에 몸을 실어야 했다.
당연히 일본의 처가로 들어서는 순간 일제히 탄핵의 십자포격이 날아들었다. 친가 쪽 사람들이 그렇게 정신적으로 학대를 하고 일본인이라며 멸시할 거면 왜 데려갔느냐는 거였다. 거기에 석주는 달리 항변할 말이 없었다.
한편 유키코의 사후에 우쿄를 한국으로 데려오면서 유키코의 두 딸도 비록 시집은 갔지만 석주와 부녀간의 연을 섟?되었는데 두 딸한테도 혼나야 했다.
같은 고등학교 교사로 자기 막내동생의 담임을 맡았던 원래 온화한 성격의 카스미가 이례적으로 화를 내면서 양 아버지인 석주의 교육태도와 우쿄에게 전해들은 한국학교의 무지막지하고 야만적인(?)체벌제도를 신랄하게 비판했을 때는 쥐구멍에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실은 우쿄가 첫날에 등교를 거부한 뒤 교무회의에서 석주의 주도로 특별한 경우를 빼고는 앞으로 교내에서 적정선에서 두발을 자유화하고 일체의 체벌은 금지하기로 결의했었지만 여기서 그런 말을 할 게재가 아니었다. 아니한 말로 우쿄를 학생부실로 끌고가 체벌했던 선생이 만약에 일본 교사였으면 폭력혐의로 사법처리 감이었을 거라니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그렇게 말하면 속으로는 체벌행위 자체에 회의감을 느끼면서도 지금껏 “구타毆打”라는 표현이 무색치 않은 체벌을 해왔던 석주는 어떻겠는가?
금지옥엽같던 자기 외손자가 학대를 당했다는데 분노해 혈연적으로는 어쨌든 법적으로도 말할 것도 없고 우쿄가 당한 것만으로도 이제는 석주는 우쿄에게 어떤 권리도 없으니 진짜 아버지인 양 착각하지 마라는 장인어른의 호통에는 쇼크를 받아야 했다.
그리고 그 점잖고 온순하던 장인이 우쿄에게 학대를 가한 친척할아버지-석주의 숙부에게 법적인 책임을 묻겠다며 길길이 날뛰는 것을 어찌 진정시켜야 하나 하고 고심해야 했다.
석주로서는 일생일대에 이렇게 혼나보기는 처음이었다. 어렸을 때 자기 아버지한테 무지막지하게 두들겨 맞고 뒤지게 혼났던 건 유도 아니었다.
이런 곤욕을 치르고 다음날 간신히 한국에서 온다는 아버지를 피해 자기 누나 부부의 집에 은둔하고 있던 아들을 만나러 갈 수 있었지만 우쿄가 도무지 아버지를 안 만나줘서 또 이틀을 피를 말려야 했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대화를 청하는 아버지한테 울화통을 터트리며 꼴도 보기 싫다고 당장 한국으로 돌아가라는 말만 할 뿐이었다.
3일 뒤에야 일본에서의 습관대로 앞치마를 두르고 집 앞을 빗자루로 쓸다가 아버지를 보고 기겁을 하며 집으로 도망치듯 들어가려는 아이를 팔을 잡아서야 겨우 대화를 할 수 있었다.
누가 뭐래도 네가 우리집안의 종손이고 그래서 친가에서 너에게 그대를 걸어서 그런 거니까 이해하고 한국으로 돌아가자는 아버지의 설득에 우쿄의 대답은 단호했다.
“싫어요!! 절대 안가요!!, 이제 한국이라는 나라는 넌더리가 나고 역겨워요!! 저는 일본인이고 사오토메씨라구요!!!!”
이 한마디로 친가 쪽에 극심한 적대감을 드러내는 아들에게 내심 실망해서 그럼 마음대로 하라며 야단을 치고 한국으로 그냥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화는 났지만 석주는 아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처음 - 어머니의 사망으로 충격을 받은 상태에서 아무런 마음의 준비가 없는 상태였고 아직은 자신의 국적이나 정체성에 자신이 없었던 상태에서이긴 했지만 -한국에 데려왔던 당시에는 친가의 어른들이 우쿄를 한국인으로 귀화시키고 하자는 데는 석주도 원칙적으로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단 어느 정도 한국생활에 적응하고 한국이라는 나라에 애착을 갖게 한 뒤에 천천히 할 일이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가능성이 있었다. 석주와 미코가 친부모라는 사실을 알고 받은 충격과 막연한 두려움이 가라앉자 우연인지 재일교포 친구를 사귀고 석주에게 한국역사에 관한 책도 부탁하면서 한국이라는 나라에 -약간은 의혹疑惑과 의심에 찬-호기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금 이제 한국어를 좀 한다 하는 재일교포 4세 수준의 어설픈 수준이지만 제법 한국어도 할 수 있게 되었을 정도고 한국역사도 정확히 알게 되었었다. 고등학교 입학후에 아들을 보러 일본에 갔더니 우쿄가 학교 안에 “종군위안부”에 관한 동아리가 있어서 가입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면서 정말 옛날에 일본이 그랬는 줄 몰랐다고 했다. “친아버지의 나라”인 한국에 대해 관심과 애정을 보였던 것이다. 그걸 짓밟은 것은 자기 눈앞에서 완전히 한국사람으로 바뀌어서 가문의 대를 잇는 종손을 보고 싶다는 친할아버지의 조급증과 석주의 작은 아버지와 막내 동생의 “어른이 말하면 애는 듣고 따르면 그만”이라는 식의 강압주의와 -우쿄가 일본인이라는 사실을 무시한 귀화 강요와 일본인이라며 학대했던-이중적인 태도였고 그 결과 아들이 느낀 건 정신적인 상처와 환멸감이었다.
현재 석주로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돌아오자마자 대낮에 홧술에 취해서 전주로 전화해서는 이런 꼴 보자고 일본여자와 결혼하라고 했고 아들을 한국으로 데려오라고 했냐며 아버지를 원망할 뿐이었다.
물론 시댁은 당연히 아연실색했다. 자신들에게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게 실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무엇보다 그냥 자기동생한테 거의 완전히 왜곡된 얘기(어른 말 안 듣고 대들다가 가출해버렸다는)만 전해 듣고 자기 장손을 괘씸하게 생각했던 할아버지로서는 아들이 하는 얘기를 낱낱이 듣고 충격이 자심했던 모양이다.
여전히 동생은 자기 형한테 심하게 혼나고도 오히려 “지놈이 애비, 조상이 한국사람이고 어떤 사람들인 걸 알았으면 조상의 얼을 받들어서 한국사람이 될 생각을 해야지,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왜놈 짓이냐”며 그런 정신이 썩어빠진 녀석이 아니어도 손자는 차고 넘치니 차라리 족보에서 빼버리자고 큰소리를 쳤지만 그런 동생을 더 심하게 꾸짖으며 내친 할아버지로서는 다른 손자들보다 무척 총명하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귀여웠던 장손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친 할아버지는 우쿄에게 완전히 매료되어 있었던 것이다.
전주에 왔을 때 애가 한자와 한문을 잘 안다고 아들이 자랑하길래 제사용 축문을 지어보게 하고 “조선시대에 태어나서 과거시험을 봤으면 장원급제 감”이라고 칭찬한 것이 엊그저께 일 같았다. 일단 직접 일본으로 전화해서 아직도 노여움이 덜 풀린 손자를 달래려고 했지만 결과는 비참했다. 아직도 사태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고 어떻게든 당장에 한국으로 다시 오게 해서 한국인으로 귀화시키고 집안의 장손이자 종손으로 대를 잇게 하려는 생각을 은연중에 내세운 탓이었다. 마지막에 노인네가 자기 욕심이 앞서서 우쿄로서는 부당한 억지였던 “자랑스런 한국인으로서의 혈통을 내세우면서 집안의 제사를 받들고 -그 괴물 거인족 같은- 사촌 동생들을 거느려야 하는 장손이자 종손으로서의 책무를 강조했던 게 최악의 실수”였다.
이제 자신은 일본인이라는 생각을 완전히 굳혀버린 데다 귀여움 받으며 자랐던 사오토메 가의 막내라는 자신의 존재가 무엇보다 더 소중해진 우쿄로서는 “일본 놈”이라며 구박과 멸시를 받은 것 밖에 생각나는 게 없는 다른나라의 집안에서의 장손이자 종손이라는 것 따위는 반발심만 부추겼을 뿐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자신이 태어났을 때의 일들을 알게 되면서 친가에 대한 반감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적인-증오심과 적개심으로 변해버렸다.
일본인의 피가 섞였다며 버렸을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한국으로 끌고 가서 집안의 대를 이으라는 몰염치한 강요도 용서할 수 없었고 특히 자신의 친부모들이 친척들의 아집 때문에 불행을 겪은 일에 앙심을 품게 된 것이다.
급기야 석주의 숙부가 아동학대 죄로 고소당해서 체포된 뒤 일본으로 압송 당하기 직전상태까지 가자
보다 못한 막내 삼촌이 버르장머리를 고쳐서 잡아 끌고 오겠다고 휴가를 내서 일본으로 가서 시건방지게 손자가 할애비를 고소했다며 애를 윽박지르고 외가쪽 친척들한테 우리집 장손을 우리식대로 가르치겠다는 건데 댁들이 뭔 상관이냐며 우쿄를 한국으로 데려가겠다고 행패를 부렸던 것은 근처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서 어안이 벙벙했던 이웃이 신고한 일본경찰에 체포 당해서 한국의 헌병대에 인계된 뒤에 사적으로 외국으로 가 민간인에게 행패를 부려 한국육군 장교로서의 명예에 먹칠을 했다고 군법회의에 회부돼 불명예제대는 간신히 면했지만 소령에서 대위로 일계급 강등당한 뒤 논산의 계룡대에서 휴전선 전방으로 전출 당하는 희생만 치르고 사태만 악화시켰다. 막냇삼촌의 난동사건으로 우쿄는 친가에 대해 더 심한 적개심만 키우고 말았고 양가의 할아버지들도 평생을 쌓은 우정에 완전히 금이 가고 말았다.
나중에 미코가 아는 재한 일본인을 통해 일본대사관에서 담당자가 한국 국방부에 “한국군의 일본침략이냐”고 비아냥거리며 격하게 항의했다더라는 얘기까지 전해 들었을 정도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서울을 사이에 두고 전주全州와 도쿄東京가 적대적인 분위기가 흐르는 가운데 우쿄는 여름 방학 직전에 일본에서 다니던 고등학교로 돌아가는 대신에 검정고시를 쳐서 고등학교과정을 마쳐버린 뒤 곧바로 입시학원을 다니면서 그렇게 좋아하는 독서와 컴퓨터와 피아노, 기타연주와 만화책도 끊고 악착같이 공부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외갓집에서도 나와서 좁은 욕실 겸 화장실과 단칸방으로 이뤄진 학원에서 가까운 독신자용 연립주택으로 거처를 옮겨버리고 철저히 타인과는, 심지어 일본의 가족들과도 자폐증적으로 단절된 고립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누나들이 집에 들어와 있을 걸 종용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런 식으로 한국에서 받은 마음의 상처를 빨리 떨쳐내려고 몸부림 치고 있었다.
10월 즈음에 우쿄를 좀 설득해달라는 누나들의 간청에 두 번째로 일본의 아들을 보러 간 석주와 미코 부부는 편의점에서 사온 라면, 주먹밥 등으로 연명延命하거나 심지어 굶주림에 시달리면서 베게 및 이불 2장과 얼마 안 되는 옷가지. 라디오, 휴대전화 와 필기구, 교재와 참고서만 위에 놓인 탁자난로 외에는 TV 하나 없이 순전히 잠깐 눈을 붙이고 간단히 샤워하는 것과 공부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청결하지만 살풍경한 환경에서 점차 시력이 나빠져 두꺼워져 가는 안경 렌즈의 두께와 비례해 정신적으로 피폐해져 가는 아들의 모습에 충격을 받아야 했다. 석주가 직접 지도하고 있던 한국의 고3학생들의 모습은 그나마 나은 상태였다.
공부방에는 정말 순전히 공부를 위한 책들뿐이었다. 그 외에는 포켓용 불경佛經 1권뿐으로 독실한 불교집안에서 자란 우쿄에게 기댈 것은 부처님뿐이었던 것이다.
외가에서는 이전의 어리광쟁이이고 응석받이였던 사오토메 家의 귀염둥이가 저렇게 철저히 변해버린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었고 석주는 처제들과 우쿄의 누나들의 원망을 한꺼번에 받아야 했다.
한현 우쿄는 전에 없는 적대감의 장벽을 쌓아놓은 상태였다.. 아버지한테조차 언제 자기가 한국말을 배웠냐는 듯이 일본어로만 남 대하듯 차갑게 대하고 있었다.
더구나 외가의 우쿄의 방에 남아있던 서가에는 간간히 보이던 한글로 된 책이 몽땅 치워져 있었다. 일본으로 오자마자 일본에 남아있던 자기 책 중에 석주가 보내줬던 것도 포함된 한글 책을 샅샅이 찾아내 몽땅 불살라 버렸다는 얘기를 내심 속상해했다.
책이 문제가 아니라 이것으로 우쿄는 친아버지의 나라인 한국을 철저히 거부했던 것이다.
결국 두 부자가 완전히 의가 상해 한동안 서로 연락조차 끊은 채 우쿄가 힘들고 외로운 싸움을 벌이는 동안에 몇 달의 시간이 흘러버렸다. 그래도 친부모이니 자기 학업 성적 정도는 알려준다는 식으로 여벌로 더 받은 입시학원 성적표를 항공우편으로 보내오고 있었다. 성적표에 명시된 우쿄가 지망한 대학은 다른데도 아니고 무려 도쿄 대 문과와 역사학과였고 나날이 합격률을 향상시키고 있었다.
처음 보내온 성적표의 합격률이 75%를 넘기고 있는 상태였다. 한국의 수능시험에 해당하는 센터시험을 앞둔 마지막 도쿄 대 모의고사 시험에서 합격률 100%라는 성적표를 석주가 전주에 가져가서 집안어른들한테 보이자 심지어 전방에서 잠시 휴가로 집에 다니러 온 막냇삼촌을 포함한 어른들은 경악했다. 삼촌들로선 일본의 도쿄 대라면 한국의 서울대에 해당한다는-, 아니 말이 그렇지 도쿄 대라면 아시아 제일의 대학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고 할아버지 세대로선 바로 식민지시대의 한국에서도 익히 알려진 최고의 학부인 “동경제국대학”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기실其實 당신의 장손의 총명함을 진작에 알아본 친할아버지를 제외하고 다들 우쿄의 어려 보이는 외모와 왜소한 체격 때문에 하찮게들 보고 있었고 우쿄에게 강압적이었던 것도 그런 이유였는데 우쿄의 진가眞價를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우쿄로서는 의도한 바가 아니었지만 이 성적표 한 장으로 전주의 집안어른들과 도쿄의 일본인 종손의 기 싸움은 전주의 참패와 우쿄의 우위로 끝났다. 일본인인데다 조그맣고 자기들보다도 어려 보인다고 장손 형을 만만히 보고 깔보고 있던 사촌동생들도 내심 콧대가 꺾여 고개를 못 들게 되고 말았다.
덧붙인다면 해병대 사관학교를 지망하겠다는 -같은 나이의 우쿄에게 처음 보자마자 형 대접을 해주며 비교적 호의적이었던- 우석은 지금 아직 고2이고 상위권에서 약간 처지는 수준이었고 라이벌의식을 느끼기 시작한 듯 했다.
석주는 한없이 작기만 하던 자기 아들이 처음으로 장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결국에 전 과목 만점으로 기록된 센터시험 성적표가 한국에 도착한 다음날 돌연 우쿄가 한국의 아버지가 근무하는 학교에 전화를 걸어왔다. 석주도 아직 부자지간이라는 것은 밝히지 안은 채 그를 통해 우쿄의 소식을 전해 듣던 동료교사들도 너무나 놀란 가운데 아버지한테 하는 얘기가 한국에서 지원할 수 있는 대학을 알아봐달라는 것이다.
입학수속까지 부탁한 이유는 밝히지 않은 채였다.
그리고 2차 본고사 준비로 분주한 와중에도 한국에 와서 아버지가 알아봐 준 학교에 편입학 시험을 치뤘다. 그게 올해 설날 직전이었다.
가족들은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알고 너무나 기뻐했다.
실은 우쿄는 망설이고 있었다. 그냥 일본에 눌러 앉아서 도쿄 대에 진학하느냐, 한국의 대학에 진학해 가족들과 같이 사느냐 하는 문제였다.
아버지와는 연락은 안하고 있었지만 간간히 엄마와 수진과는 이메일 등으로 연락을 하고 있었다.
친가에 대한 적개심은 여전히 극단을 치닫고 있지만 서울의 친부모와 여동생에 대해 싹튼 애정은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가끔 서울의 집을 나올 때 들고 온 세 사람의 가족사진을 보면서 혼자 울 때가 많았다고 한다.
특히 가끔 씩 술에 취한 아버지가 도쿄로 전화해서 안 하던 일본어까지 하면서 “너밖에 없다! 무조건 애비 잘못이고 그 어떤 것도 강요 안 하겠다! 이 애비 소원이니 서울로 와라” 하고 눈물로 호소하는 데는 여린 성격의 아들로서는 도저히 무시할 수 없었다. 일부러 차가운 체 하며 듣고만 있다가 막상 통화가 끝나면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울기가 일쑤였던 것이다.
결국 도쿄 대 입시까지 다 마치고 기거하고 있던 공부방도 정리해버리고 난 다음날 우쿄는 만류하면서 섭섭해 하는 이모들과 누나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서울로 와버렸다. 물론 순전히 가족들과 같이 살고 싶은 심정만 있었지,
친가 쪽의 몰염치한 요구대로 귀화하겠다거나 집안의 대를 잇겠다는 생각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였다.
우쿄는 자신의 국적과 성씨에 대해 입장을 명확히 했고 석주로서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나중에 미코가 혹시나 해서 카스미한테 입시결과를 살짝 알아봐달라고 했더니 도쿄 대는 10위권 안으로 합격해 있었다더라고 한다.
뭐, 도쿄 대는 솔직히 좀 아깝긴 하지만 지금 대학도 한국 유수의 명문대이고 자신을 희생해가면서 가족들을 선택한 아들이 가족들로서는 너무나 고마웠다. 물론 문제는 남아 있었다.
지금도 친가와 우쿄의 사이는 극히 냉랭했다. 간간히 전주의 어른들이 그래도 지은 죄도 있고 기도 꺾인 터라 본인한테는 못하고 석주에게 전화로 한국에 왔으면 와서 인사해야 하지 않느냐는 식이다.
우쿄는 내색은 않지만 누나들한테 한 말을 들은 바로 “저 사람들”때문에 자기 친부모들이 아들까지 잃는 불행을 겪어야 했고 그것도 모자라 자기까지 못살게 군다며 “철저히 남” 취급인 실정이다.
우쿄로서는 친가는 엄연히 일본의 사오토메家이지, 전주는 절대 아니었다.
석주도 아버지가-아직도 반성의 기색은 안보이고 아들을 철저히 보호하겠다는 조카한테 “친일배親日輩”라는 얼토당토않은 욕을 한- 자기 동생과는 완전히 등을 돌린 상태로 아무리 그래도 전주의 친가와 명색이 증손이라는 아들이 감정의 골을 사이에 두고 있는 게 좋은 일은 아니었고, 앞으로 우쿄가 자신의 국적문제를 어떻게 할 거냐는 것이다. 현재 아들의 신분은 유학을 목적으로 체류중인 재한 일본인 신분으로 가족들과 국적까지 다른 상태이다. 친부모와는 상관 없이 이제는 자기 자신에 대해 누가 뭐래도 일본인이라는 생각을 굳혀버린 지금으로서는 귀화의 귀자도 못 꺼낼 상황이었고 석주는 이제 “다 젊었을 때 처자식 건사를 제대로 못한 죄이거니” 하고 아들의 국적이나 성씨에 대해 굳이 구애拘碍받지 않기로 했다.
아니, 애초에 친가든 누구든 버려놓고 거들떠도 안보다가 이제 와서 종손이네 뭐네 하면서 욕심을 앞세울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었다.
아마 친가에 격렬한 원한을 품고도 다시 한국으로 오기로 한 것만도 우쿄로서는 엄청난 고민 끝에 나온 결단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석주로서는 그 결단에 부응해줄 필요가 있었다.
또다시 친가에서 -우쿄로서는 가당치도 않은 -종손으로서의 의무와 반일감정을 앞세워 우쿄에게 귀화를 강요한다면 아마 우쿄는 격렬히 거부할 것이 틀림없었다.
지금껏 마냥 착한 아이였던 우쿄는 아마 순종만이 능사가 아님을 배운 모양이었다.
덧붙이자면 우쿄를 학대했던 석주의 숙부는 아동학대죄로 일본으로 압송돼 법정까지 섰다가 원고인 우쿄의 소 취하로 겨우 풀려나 귀국해 있는 상태이다. 소만 취하했을 뿐 우쿄는 그 노인을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머리를 다시 빗어서 리본으로 예쁘게 묶는 걸로 몸단장을 마친 미코는 안방 문 사이로 아들을 흘깃 보면서 흐뭇해 했다. 이제 특별한 계기가 없는 한 아들이 일본으로 돌아가 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우쿄에 대한 시댁의 간섭은 남편이 책임지고 막아주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고 남편은 한번 한 약속은 절대로 지키는 남자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쿄가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날 석주는 전주로 내려가 친척들에게 이렇게 못을 박았다.
<한국인이든, 일본인이든, 안동 권씨든 사오토메씨든 호적에 누구 아들로 되어 있든 “우리 우경이”가 누가 뭐래도 내 아들이라는 사실은 절대 안 변합니다. 그러니 그 아이의 일은 무조건 그 아이의 자유의사에 맡길 테니까, 앞으로 절대 간섭 마시기 바랍니다. 네, 저는 이제 그딴 일로 내 아들이 불행해지는 걸 안 바랍니다. >
물론 아직도 이의를 제기하는 어른들이 있긴 하지만 어느정도는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해당 성씨에 해당하는 분들께 양해바랍니다.
우경이야기/宇京物語 1券. 美少年 2부- 친아들 우경이
청년은 소년을 벽으로 몰아넣고 양 손을 벽에 짚어서 소년의 퇴로를 차단했다. 혁은 고개를 약간 돌린 채 곁눈질로만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소년이 착용하고 있는 안경 뒤의 눈빛에서 두려움과 흥분이 느껴졌다. 우쿄는 자신과는 전혀 비교조차 안되는 혁의 나체體인 탄탄한 근육질의 체구에다 강렬한 눈빛에 압도당해 완전히 위축당한 채 마른 침을 삼켰다. 둘의 체격차이는 20cm의 키 차이보다 더 컸다. 실제 나이와는 무관하게 외모도 혁은 완전히 성숙한 청년이지만 우쿄는 얼핏 보이는 나이보다 키만 좀 더 커 보일 뿐이고 외견상 아직 이제 겨우 11살이 되었을까말까한 어린애에 불과했다. 여자애로 본다면 그나마 좀 나이가 있게 보이겠지만 그래 봐야 15살 위로는 볼 수가 없다.
그것도 한국나이로, 소년의 고국인 일본에서의 나이로는 고작 10살 안팎이라는 얘기다.
윤기 있는 머리가 단정한 칠흑 색의 생머리, 볼의 도톰한 젖 살에 섬세하고 가녀린 턱 선, 안경을 앞에 두고 얇고 예쁘게 쌍꺼풀이 지고 맑은 호수 같은 천진난만한 약간 큰 눈에 작지만 오뚝한 콧날, 얇고 앙증맞은 빨간 입술. 마치 단백질인형 같은 크림색의 피부. 목젖 비슷한 것은 전혀 나오지 않은 무척 길고 가는 목, 체크무늬 남방에 싸여있는 야들야들하고 가냘픈 몸매와 남방의 옷깃 사이로 보이는 하얀색 피부, 청바지에 싸인 솜털조차 없을 것 같은 가늘고 예쁜 다리. 흰 양말이 신겨진 작고 예쁜 발.
연약해 보이지만 순진하고 귀여운 요정 같은 모습이 혁에게 기묘한 색욕을 일으켰다.
순간적으로 혁의 강건한 팔이 우쿄의 가녀린 허리에 휘감겼다.
우쿄는 발버둥쳤지만 혁의 굳센 체력 앞에서는 무기력하기만 했다.
우쿄의 매끈한 다리를 매만지면서 목덜미를 애무하던 혁의 입술이 우쿄의 입술에 가까이 대려는 순간에도 혁보다 훨씬 가냘픈 팔로 혁을 밀치려고 하고 있었다.
<いや!!! やめてよ!!! (싫어!!! 하지 마요!!!)>
이내 우쿄의 입은 혁의 입에 봉쇄당했다. 혁의 혀가 우쿄의 입안으로 침입해 들어가자 우쿄는 지금까지 했던 미약한 저항도 그만두고 온순해졌다.
혁은 우쿄를 으스러지게 껴안으며 입술과 혀로 우쿄의 입술과 구강口腔을탐하면서 지퍼를 내리고 아직 완전한
포경상태의 어중간하게 발기된 우쿄의 음경을 만지작거렸다.
우쿄는 같은 남자한테 강간强姦을 당한다는 창피함과 모멸감을 참는 듯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혁은 키스와 성기의 애무를 중단하고 우쿄를 바닥에 꿇어앉혔다. 우쿄는 잠시 눈을 뜨고 자신의 눈앞의 광경에 기겁을 했다. 비대한 청년의 음경이 밑에 큼직한 음낭을 매단 채로 자기 코앞에 징그러운 귀두를 들이대고 있었고 음경의 뿌리에서 군살 없이 근육질의 복근에 둘러싸인 배꼽까지 시커먼 거웃 털에 둘러싸여 있었다. 새하얗게 질린 소년의 입에다 귀두를 억지로 쑤셔 넣고 펠라티오를 강요했다.
우쿄는 목구멍까지 단단한 육봉이 박히면서 힘겨워했다.
혁은 우쿄의 머리를 양손으로 감싸 쥐고 강제로 왕복운동을 시켰다.
이윽고 혁은 사정 감을 느꼈다. 더더욱 왕복운동을 시키고 사정직전에 육봉을 뺐다. 침이 흥건하게 묻은 음경이 가느다랗게 침의 띠까지 딸려서 나오는 순간에 걸쭉한 정액을 방출했고 우쿄는 그대로 정액을 얼굴에 뒤집어쓰고 말았다. 엄청난 양의 정액이 얼굴에 끼 얹혀지는 동안 소년은 눈을 질끈 감고 입을 굳게 다문 채였다. 정액은 혁의 손바닥만한 넓이와 두께를 보이며 소년의 얼굴과 안경을 뒤덮어버렸고. 소년은 눈을 감은 채 멍한 표정을 지었다.. 혁은 그 모습에 너무나 섹시하게 느껴져 더더욱 흥분했다.
<헉!!!!!!!!!!!!!!!!!!!!!!!!!!!!!!!!!!!!!!!!!!!!!!!!!!!!!!!!!!!!!!!!!!!!!!!!!!!>
혁은 화급히 일으켰다. 원룸 안은 아직 어두컴컴했다. 시각은 토요일 새벽
4시였다.
방금 수면 중에 꾼 말도 안 되는 꿈을 상기하고는 아연실색했다.
<내가…… 미친 거 아냐? 무슨 그런……. >
문득 자는 동안 거의 알몸인 상태에서 유일하게 입고 있던 트렁크 안이 끈적하고 축축함을 느끼고 잠시 손을 그 안에 넣어보고는 더 황당했다. 몽정까지 했다니!!! 한 손으로 이마를 감싼 채 혁은 기가 막혀 했다.
이윽고 일어나서 욕실로 들어가 트렁크마저 벗어서 세탁기 안에 넣고 샤워를 하고 트레이닝 복을 입은 뒤 밖으로 나갔다. 이미 잠은 확 달아난 상태였다. 근처에 고등학교까지 미친 듯이 달음박질 한 뒤 운동장을 뛰었다. 몇 바퀴를 돌아 달렸는지 모를 만큼 뛰는 동안 아직 쌀쌀한 날씨임에도 트레이닝 복은 땀으로 젖고 숨이 목까지 차 올랐다. 간신히 달리기를 멈추고 나무토막 모양의 벤치에 앉아서 숨을 골랐다. 시간은 새벽 6시를 넘기고 있었다.
혁은 아직도 자기가 꾼 꿈이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가끔 꿈에 소년의 모습이 보이긴 했지만 이런 꿈은 처음이었다.
<여자도 아니고…… 어린 남자애한테 …… 내가 그럴 수가 있나? 미치지 않은 다음에야……>
혁은 처음 성에 눈 뜬 사춘기 이래 육군 중위로 병역을 마치고 난 지금까지 아니, 남자들끼리의 단체생활과 금욕을 강요당해야 하는 군대생활에서조차 남자한테 그런 걸 느낀 일이 전혀 없는 지극히 정상이었다. 가끔 다른 부대에서 상급자가 억눌린 성욕을 주체 못하고 하급자를 성추행 했다는 황당한 소식을 들을 때조차 미친 거 아니냐며 냉소를 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런 자신이 이제 와서 그런다니!! 하긴 남자애가 유난히 예쁘게 생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아니, 이럴 수가 없다!! 그냥 동생, 아니 조카처럼 생각해주고 돌봐주겠다고 생각한 게 2일전이었다.
“글마말이다. 이쁘장한게 진짜로 가시나였으믄 참말로 꼴리게 생기지 않았나? 요즘 밤마다 글마를 가시나로 만들어서 빠구리 뜨는 상상하문서 딸치는 재미로 지낸다 아이가~~~. 그렇게 생겨묵은 가시나 하나 있으믄 당장에 어디 끌고가서 따묵는……”
이전에 자신에게 얻어터진 3학년생이 그전에 했던 -혁에게 매를 번 직접 원인이 된- 추잡한 광언狂言이 상기되었다.
<미친 새끼!!!!! >
순간적으로 구역질이 느껴지면서 욕이 나왔다. 그 쥐새끼 같은 놈은 그날 이후에 본 일이 없다. 놈이야 나이 값을 못하는 금치산자禁治産者 같은 놈이니 차치하고 어느 정도는 완벽한 성인成人이라고 자신하는 자기 자신이 미성년자, 그것도 남자아이에게 혹해서 그런 꿈을 꾸고 몽정까지 했으니 자신도 그 놈과 다를 게 뭔가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이윽고 숨이 완전히 안정되자 혁은 몸을 일으켜 발걸음을 옮겼다.
땀에 젖은 트레이닝 복을 갈아입고 대강 토스트를 만들어서 아침을 때운 뒤 평소의 습관대로 헬스장에 들를 것이다.
혁은 취미가 운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집에도 몇 가지 운동기구들을 비치해 두고 있을 정도이다. 그러니 호리호리한 체격에 보디빌딩 모델로 나서도 될 만큼의 근육질을 자랑하는 몸매를 만들어낸 것이지만……
<그건 그렇고 그 애는 감기가 완전히 나았을까? >
문득 혁은 우쿄의 연락처를 미처 알아두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석진이에게 간간히 우쿄의 소식을 듣긴 하지만 전화번호 같은 걸 묻지 않았었다.
혁으로서는 감기는 “고작 감기”에 불과하지만 우쿄같이 연약한 사람이라면 문제가 달라질 것이다.
혁은 웬일인지 우쿄의 모습이 간절히 보고 싶어졌다.
우쿄의 감기는 완전히 회복되어 있었다. 아침식사를 1층의 주방에서 가족들과 같이 할 수 있게 되었을 정도였다.
아침식사를 끝내고 아버지와 수진은 학교로 출근, 등교를 했다.
수진은 아버지인 석주가 근무중인 남고의 바로 옆 여고로 진학했기 때문에 어차피 가는 길은 같았다.
. 두 부녀父女를 배웅하고 나서 우쿄는 미코의 설거지와 정리를 거들었다.
< 宇っちゃん. ママが終えるから居間に行って テレビや見ていて (우쿄, 엄마가 다 할 테니까 거실로 가서 TV나 보고 있어.)。 >
< ……邪魔になるんですか (방해되나요)? >
<そうではなく韓國では男がキッチンを出入りするのをよくなく思ったら (그게 아니라 한국에서는 남자가 부엌을 드나드는 걸 안 좋게 생각하거든)。>
말은 그래도 미코는 가사일을 거들어 주는 아들이 대견스러웠다. 그러고 보면 한국의 엄한 유교儒敎집안에서 자란 남편은 여자가 할 수 없는 힘쓰는 일이 아니면 가사일을 거의 거들어주는 성격은 아니었다. 하긴 일본에서도 동생들이나 친구들 얘기를 들어보면 남편들이 그리 가사를 잘 도와주는 사람들이 없는 듯 한 걸 보면 두 나라 남자들이 그 점에서 별 차이는 없는 듯 하지만……
마른 행주로 미코가 건네주는 접시의 물기를 닦고 있던 우쿄는 가볍게 한쪽 볼을 부풀렸다. 미코는 그게 아들이 뭔가 못마땅할 때의 버릇인 걸 알고 있었다.
< 大丈夫です, 私は日本人だから (괜찮아요, 난 일본인이니까). >
<ねえ, その言うことを聞けばパパがさびしがる. そして日本も同じよ. (얘, 그 말 들으면 아빠가 섭섭해 한다. 그리고 일본도 마찬가지야.)>
< ところが事實なよ (그렇지만 사실인 걸요)……>
마지막 그릇을 닦아서 식기건조대에 놓은 우쿄가 문득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 모습이 너무 쓸쓸하게 느껴져서 엄마로서 너무 안쓰럽게 느껴졌다.
고무장갑을 벗고 주방용 수건으로 손의 물기를 닦은 미코는 등 뒤에서 우쿄를 껴안았다.
미코의 풍만한 가슴이 아들의 등에 밀착했다. 미코의 얼굴이 우쿄의 풍성한 머리카락과 맞닿아 샴푸냄새가 풍겨왔고 우쿄는 엄마에게서
따뜻한 온기와 함께 원숙한 여인의 향기가 느껴졌다.
<大丈夫だから母方のようにママにも思いきり甘えてよ, 分かったの (괜찮으니까 외가에서처럼 엄마한테도 마음껏 응석을 부리렴, 알았지)? >
우쿄는 몸을 뒤로 돌려서 엄마에게 향하고는 싱긋이 웃어 보였다.
< あまえは? 子でもなくて, もう私も大學生ですよ. (응석은요? 애도 아니고, 이제 저도 대학생이라고요)>
미코는 피식 웃었다. 우쿄의 나이는 한국나이로 18살, 일본 나이로는 17살이다, 정상적이었으면 지금 고3, 원래대로라면 고2학년생일 터였다. 더구나 얼굴로 봐선 이제 고학년의 초등학생쯤의 어린 꼬마로 보여서 무척 귀여웠다.
친정에서는 응석받이로 자라던 애가 막상 한국에서는 아직도 친부모가 익숙지 않아서 눈치를 보는 건지 아니면 양 어머니인 유키코의 사망부터 이번에 대학진학 때까지 너무 않좋은 일을 많이 겪어서 그 바람에 정신적으로 갑자기 성숙해져 버려서인지 너무나 어른스럽고 점잖게 행동해서 미코로서는 약간 섭섭했다. 친 엄마인 자신에게도 어리광을 부리는 모습을 보여주면 좋으련만……
미코에게 웃는 모습을 보여준 뒤 고개를 내리는 순간에 하얀 얼굴이 빨갛게 되어 버렸다.
병아리색 스웨터와 레이스가 달린 에이프런에 쌓여 있는 엄마의 풍만한
유방이 바로 눈앞에 불쑥 디밀어져 있던 것이다. 친 엄마라고는 해도 최근에야 그걸 안 데다가 이모들 중에서도 외국에서 멀리 떨어져 살고 있어서 거의 뜸하게 보다 보니 미코는 심지어 동경憧憬의 대상이기까지 했던 다소 낮 선 존재였다. 새삼스레 미코의 색기넘치는 미모와 스웨터와 미니스커트차림의 글래머적인 몸매가 인식되자 순간적으로 정신이 멍해졌다.
우쿄는 무의식적으로 수줍어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비스듬히 고개를 아래로 돌렸다.
(とても可愛い (너무 귀여워)!!!)
미코는 그대로 아들을 껴안고 가볍게 아들이 뺨에 뽀뽀를 해줬다.
우쿄가 친부모의 존재사실을 안 것은 중학교 1학년때로 그때까지 우쿄의 양아버지인 노조미가 사망한 뒤였다. 너무 슬퍼하길래 생각 끝에 남편인 석주가 어차피 언젠가는 알려줘야 하기도 하고 친부모의 존재 사실을 알면 조금이라도 위안이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마누라가 말리는 데도 우쿄의 어머니이고 미코에게는 친언니인 유키코의 동의를 얻어서 얘기를 해줬더니 오히려 쇼크를 받고 기절을 해버렸고 애가 한동안 공황장애 증세까지 보일 정도였다. 남편은 일생일대의 경솔한 실수를 했다며 귀국하던 비행기에서 내리고 한참 뒤까지 자책해야 했다.
반면에 딸인 수진은 일본의 친척 오빠가 실은 자기 친 오빠라는 사실을 듣고 처음에는 놀랐지만 외동딸로만 자라 형제가 있는 친구들을 부러워하던 터라 바로 드디어 자기도 오빠가 생겼다며 좋아서 생 난리를 치더라는;;;;
그 후 작년에 유키코마저 사망하고 나서 한국으로 데려온 뒤까지 엄마 아빠라고 부르는 게 익숙지를 못해서 이모, 이모부로 부를 정도였다.
설겆이를 마치고 아들은 거실에서 TV을 켠 뒤 케이블 채널에서 NHK채널을 찾아 보는 동안 미코는 안방으로 들어가서 화장대에 앉았다. 아까 아들의 쓸쓸한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어린 나이에 여러 가지로 안쓰러운 일들뿐이었다. 태어났을 때 그 아이는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난 상태였다. 아버지의 권유로 선을 보러 한국으로 가서 -현재 80이 넘은 나이에도 훨씬 정정한-시부모한테는 마음에 들었지만 다른 시댁의 어른들이 “왜년”을 며느리로 들일 수 없다며 맹렬히 반대했다.
미코가 볼 때 가문 내력이 그럴 만도 했다.
무슨 20대조상인가 하는 모 장군은 文綠의 役-임진왜란 때 3000명도 안 되는 조선군으로 그 열 배나 넘는 일본군을 싹쓸이 했다는 전설적인 장군이래지. 남편의 한2대조인가는 독립군이 5명이나 나왔대 지, 심지어 시아버지조차 독립운동을 하셨다는, 거의 일본인이라면 잡아서 갈아 마실 것 같은 분위기의 집안이었던 것이다. 그런 가문의 시아버지가 일본인 며느리를 맞을 생각을 했던 이유는 일본경찰한테 쫓기던 시아버지가 한국에서 대학 교수로 일하던 친정 할아버지한테 이래저래 신세를 지면서 당시 중학생이었던 친정 아버지의 공부를 가르치며 우정을 쌓아나가던 중에 해방이 돼서 친정 집이 일본으로 돌아갈 때 나중에 각자 아들, 딸을 낳게 되면 사돈 맺자고 약속하는 걸로 석별의 정을 나눴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고 보면 시댁에는 권權(힘, 세력)이라는 성씨가 잘 어울리게 거의 남자형제들만 4명인데 친정에는 사오토메早乙女(어린아가씨)라는 성씨가 무색하지 않게 1남4녀의 딸 부잣집이 되어버렸다. 미코는 자매들 중에 3녀였다.
어쨌든 미코는 결국에 일본으로 돌아와야 했는데 이미 임신을 한 상태였다. 미코는 아들을 낳았을 때의 일이 잊혀지지 않았다.
신생아가 출생순간에 우는 건 당연하다지만 우쿄는 엄마 뱃속에서 나오는게 너무나 싫었던지 특히 그게 정도가 지나쳐서 나중에는 탈진해서 인큐베이터에 집어넣어야 했을 정도였다.
다행히 그 후에는 무척이나 양순해서 한동안 첫 출산이었던 미코가 키우는데 어려움이 없었었다.
그리고 워낙에 상황이 불투명한 차에 딸만 2명 낳고 아들이 간절했던 큰 언니가 아들을 자기한테 입적시키고 싶어했고 그래서 남편의 동의를 얻어서 큰 언니와 형부인 사촌오빠의의 아들로 입양시켰다. 말이 입양이지, 미코와 석주의 아들이라는 증거는 최근에 시댁의 어른들에게 보이기 위해 한 유전자 감식을 통한 친족확인증명검사서류뿐으로 법적으로는 명백히 친정에서 친정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언니인 유키코가 낳은 유키코 부부의 친자식으로 되어 있다. 즉, 우쿄에게 친부모는 법적으로 엄연히 외국의 이모,이모부 부부인 것이다.
나중에 남편과 시부모들이 다른 시댁 어른들을 간신히 설득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려 한국으로 갔을 때 두 부부는 앞으로 자신들의 자식이 아닌 온전히 언니 부부의 자식으로- 그리고 남편인 석주로서는 한국인이 아닌 일본인으로- 자랄 아들 때문에 우울해 했다. 그 뒤로 두 부부는 일단 우쿄에 대한 친권은 완전히 포기한 상태로 우쿄가 친정에서 귀여움 받으며 양육되고 있는 걸 위안으로 삼아야 했지만 시아버지는 나중에 당신 장손長孫의 존재를 알고 종친회에 영향력을 행사해 억지로 족보에 당신의 다른 손자 이름 앞에 “권 우경”이라는 한국식 이름을 등재시켰다. 먼저 돌아가신 친정 어머니의 이름을 그대로 따서 유키코가 宇京라고 지은 건데 마침 “宇”자가 항렬자로 맞아 떨어져 그대로 올린 것이다. 물론 이름이 한국이름이래도 거의 여자이름인데다 외가쪽의 여자이름중에 워낙에 흔한 이름이라 시아버지가 멋대로 "우남" 이라고 이름을 고치려 했다가 그러지는 못했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 것이다.
어쨌든 일본의 아들은 유키코 부부가 워낙에 귀여워해서 차마 돌려달라고는 못해서 포기하고 따로 아들을 낳으려고는 했다. 남편이 집안의 장자長子이고 종손宗孫이라는 책무 때문에라도 아들을 낳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둘 사이에 아들은 현재 국적조차(시댁의 다른 어른들이 그렇게 싫어하는) 일본인인 우쿄 하나뿐이었다. 늦둥이를 생각하고는 있지만……
남편인 석주, 더 나가서 친가 쪽 어른들이 결혼 전에 이상적으로 바랬던 아들상이라면 어렸을 때는 사고뭉치개구쟁이이고 좀 청년 티가 난다 싶을 때부터는 역시 아버지를 뛰어넘는 체격과 투철한 극일剋日 정신과 민족의식을 지닌 늠름하고 호쾌豪快한 대한남아大韓男兒였다. 물론 석주의 경우는 애초에 아내가 일본인이니 대놓고 극일 정신을 바라긴 어렵겠지만……
그는 자신의 친구들의 아들과 조카들이 자기 아버지들을 훨씬 뛰어넘게 키가 커져서 훌륭한 사나이대장부로서 성장하는 것을 자랑하는 것을 보면서 내심 부러워했었다
석주가 수진의 남자친구이자 자신의 제자인 석진을 아들처럼 생각하고 신임했던 것도, 딸인 수진이가 선 머슴애 말괄량이 왈가닥에다 만능 스포츠 소녀로 자란 것도 은연중에 그를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처가에서 거의 남처럼 자라고 있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던 친아들 우쿄-우경이는 이 모든 점에서 아비의 바램과는 철저히 엇나가고 있었다.
얼굴은 그냥 예쁜 여자아이 같았고 이제 대학생-실제로는 이제 고2쯤 올라가야 할 나이지만-인 현재도 키도 이제 177Cm인 자기 친아버지보다 15cm나 작고 외모상 너무 어려 보였다. 몸집도 인형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나도 가냘펐고 성격과 행동거지도 거의 여자아이라는 편이 어울릴 지경이고 더구나 누나와 이모들한테 둘러싸여서 너무 오냐오냐 하면서 응석받이로 키워져서 남자아이라면 좀 활달한 맛이 나야 하는데 너무나도 성격이 얌전하고 소극적이고 나약했다.
특히나 -민족의식은 커녕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모른 채- 일본땅에서 국적은 말할 것도 없고 외모나 사고방식까지 완전히 “일본인”으로 자란 모습은 -민족정기로 충만한-아버지가 보기에 은연중에 안타깝고 한심스럽게 여겨졌다.
미코는 반대로 아들의 그 모습이 너무나 예쁘게 보였다. 너무나도 귀여운 모습의 아들을 보고 언니에게 아들을 맡기길 잘했다는 생각과 이렇게 귀여운 아이를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자기가 키웠으면 좋았을 걸 하는 후회가 동시에 들 정도였다.
가끔 시댁에서 보는 시커먼 사내아이로 자라는 친척조카들이 처음에는 남편의 생각처럼 부럽게 생각되었지만 이제는 오히려 징그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수진이조차 자기 친 오빠라는 사실을 알기 전부터 이 너무나 예쁜 외모와 부드러운 심성을 가진 일본인 친척오빠를 너무나 좋아하고 있었었다.
하지만 남편으로서는 그래도 아들인데 일본땅에 거의 버려두고 자기 아들이라고는 밝히지도 못한 채 가끔 보러 가서 용돈을 주거나 놀아주고 아들임을 밝힌 뒤에 선물로 한국어나 역사에 관한 책을 보내주는 것 빼고는 챙기질 못한 게 미안하고 그런 주제에 욕심을 부리는 게 몰염치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아버지로서 아들에게 바라는 게 있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현재 법적으로야 비록 남과 다를바가 없는 관계지만 친 아버지인 자신이 한국인이니 그 아들도 한국인인 게 당연하지 않은가?
왜 내 아들 우경이는 다른 아들처럼 늠름하게 자라지 못하고 유순한 여자아이처럼만 자라는 것인지……
그나마 한가지 만족스러운 것은 유순하고 순진한 성격과는 달리 지능지수가 높고 반에서 1~2등. 전 학년에서 5등 밖으로 성적이 밀려난 적이 없을 정도로 우등생이었다는 점이었다.
그것도 허약체질이라 체육실기가 전교꼴찌여서 전교에서 5등 안팎이었던 것이었고 심지어 한국으로 왔을 때는 일본에서 배운 교과의 연속성도 감안해서 처음에 일본인 고등학교로 보내려고 했는데 이미 스스로 고등 학교교과 내용을 전부 알고 있어서 그냥 그대로 졸업시켜도 좋겠다 싶었을 정도이고 친가 쪽의 압력도 있고 해서 한국인 친구들을 사귀어서 빨리 한국생활에 적응하게 하려고 남편이 근무하는 학교로 편입학 시키는 걸로 생각을 바꿨었다.
대신에 한국으로 데려왔을 때 바람과는 어긋나지만 지금 모습도 나름대로 마음에 안드는게 아니었던 데다 아내인 미코와 여동생인 수진은 우쿄의 모습을 너무나 좋아해서 석주는 자기욕심은 굳이 앞세우지 않기로 했다.
더구나 안그래도 그럴 게재도 아니었고 비록 친부모는 아니지만 객관적으로 부모를 모두 잃은 가엾은 아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럴 수도 없었고 처가에서 우쿄를 계속 양육하고 싶어하는 걸 고집을 부려서 한국에 데려왔을 때 말없이 따라와 주는 걸 보고 어떤 모습이든 자기아들이니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해주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나중에 귀화시키고 해도 그건 나중에 천천히 한국이라는 나라에 애착을 갖게 한 뒤에 생각할 일이다. 하지만 시댁의 친척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게 문제의 시작이었다.
화장을 고치며 옛날생각을 하던 미코는 아까 아들이 私は日本人だから(난 일본인이니까)이라고 했던 게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그만큼 자신의 한국 쪽 친가에 심한 앙금과 미움이 남아 있는 듯 해서 한편으로는 안타까웠다. 오죽했으면 올해 2월에 한국의 대학에 편입학시험을 보기 위해 한국으로 왔을 때가 설날 전날이어서 시댁인 전주로 가야 했는데 같이 가자고 했더니 우쿄는 차라리 시험을 포기하고 일본으로 돌아가고 말지, 전주에는 절대 안 가겠다고 완강히 버티는 바람에 빈 집에 우쿄만 차마 남겨둘 수 없었던 가족이 서울에서 따로 설날을 쇠었을 정도로 친가에 대한 반감이 심했던 것이다. 하긴 미코도 결혼 뒤에 시댁의 몇몇 친척들의 눈총 때문에 남편이 시댁인 전주에서 웬만해선 왕래가 힘들고 일본에서도 가까운 대구, 마산으로의 전출을 자청해서 신접살림을 차렸을 정도였다.
덕분에 미코가 처음 배운 한국어는 어이없게도 표준어가 아니라 대구와 마산 쪽이 적당히 섞인 경상도방언이었다. 마침 일본어와 경상도 사투리가 억양이 비슷해 쉽게 배울 수 있었다. 남편은 아내의 경상도 사투리가 무척
사랑스럽고 귀엽다고 하더라 만 전라도의 시댁에서는 무척 떨떠름해 했다.
물론 지금은 표준어로 완전히 바꿨지만 억양이 약간 남아 있는 건 사실이다.
집안의 장손이고 종손인 우쿄-우경을 한국으로 데려와서 한국인으로 귀화시켜 입적시켜야 한다는 어른들의 성화때문에라도 작년에 한국으로 데려와서 처음 시댁으로 데려가 인사를 시키고 서울로 돌아왔을 때 우쿄가 한 말이 “마치 거인국巨人國에 포획돼서 구경거리로 끌려온 난장이가 된 기분”이었다는 것이다. 일본에서 우쿄는 응석받이 막내로 귀여움 받으며 자랐는데 졸지에 우쿄 밑으로 남자애만 6명이나 되는 사촌동생-우쿄=우경과 3달 밑으로 동갑인 우석 밑에 우혁, 우진, 우성. 우현,우람-들이 생긴 것이다. 문제는 마지막에서 두 번째인 우현이만 빼고 중학생이라는 우성이조차 덩치가 우쿄보다 훨씬 크고 남자같이 생긴 애들이어서 우쿄의 기를 완전히 죽여놓아 버렸던 것이다. 대학생이 된 현재도 우쿄와 외양적으로 비교될 아이는 이제 초등학교 고학년이라는 우현이 정도였다. 애초에 친가 쪽이 다소 무골이라서 인지 남자들은 몸집이 유난히 큰 편이기도 했고 반대로 우쿄가 외모나 체격상으로 여자들은 미인이 많고 남자들은 중성적인게 특징인 외가쪽을 많이 닮아 있고 특히 이모들을 닮아서 여성적인 정도가 심해졌던 게 원인이기도 했다. 우쿄는 그 즈음부터 사촌동생들에서 더 나가 자기 이외의 남자들에게 심각한 열등감을 느끼기 시작하고 있었다. 한국의 사촌동생들과의 대면이 안 그래도 소극적인 성격의 우쿄를 너무 정신적으로 위축시키고 주눅들게 만든 것이었다.
일본에서도 우쿄는 다른 남자아이들보다 여성적이고 연약했지만
공부와 독서로 지식과 교양을 쌓는 것으로 상쇄해 왔고 오히려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가족들과 친구들이 -적당히 놀려먹기도 하고 심지어 여장裝까지 시켜보면서- 그의 외모와 여성적인 분위기를 귀여워해주고 사랑해줘서 별 문제가 없었지만 한국에서는 그게 아니기 때문이다. 다들 판에 박힌 남성관을 우쿄에게 강요했던 것이다.
처음 우쿄를 본 지금 육군 소령이라는 막내 작은 아버지라는 사람이 우쿄를 품평해서 웃음거리로 만들고 우쿄를 울린 말이 이랬다.
<저놈, 고추는 제대로 달린 거야? 사내자식이 계집애같이 예쁘게만 생겼지 비실비실해 갖고 군대 보내면 소총도 제대로 못 들게 생겼구먼, 장가보내면 밤에 힘이나 제대로 쓰겄나? >
그 말을 나중에 들은 남편은 화를 내면서 자기 동생을 처음으로 두들겨 팼을 정도고……
어른들은 대부분 우쿄에게 친절하게 대해주긴 했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애초에 손자로 인정하고 귀여워해줬지만 어른들 중 한 두 명은 우쿄가 일본인이라는 점 때문에 미운 오리새끼 취급하는 경우도 있었다.
친절하게 대해도 일본인으로서의 우쿄의 모습을 노골적으로 못마땅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우쿄로서는 상대하기가 어려웠다.
술에 취해서 임진왜란이나 일제36년을 거론하면서 그래서 일본은 나쁜 나라라고 얘기하는 데는 일본인으로 자란 우쿄는 질려버렸다.
심지어 어느 철부지 사촌동생이 우쿄에게
“일본 놈은 너네 나라로 꺼져!!”
라는 소리를 하는 데는 그 자리에서 말없이 구석진 데로 피해서 서럽게 울었을 정도였다.더구나 “천천히 시간을 두고”라는 석주와는 달리 석주의 아버지를 비롯한 집안 어른들은 자기 눈앞에서 완전히 한국사람으로 바뀌어서 가문의 대를 잇는 종손을 보고 싶다는 조급증에 찬 과욕過慾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어른들이 자라온 환경이나 받아온 교육 등으로 볼 때 분명한 일본인인 우쿄에게 호통을 치며 친 아버지가 한국인이고 이 집안의 장손이고 종손이니 우쿄도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이라며 한국사람이 될 것을 강요하고 난생 처음 보는 사람들이 어른으로서의 권위를 내세우면서 그런 억지를 부리는데 처음에는 어이가 없었고 심지어는 화까지 났던 것이다. 그들이 볼 때 일본인으로 자랐던 우쿄의 과거는 무시해도 상관 없는 것이고 일본인으로서의 정체성은 "근절해야 할 병균체"이자 철없는 어린애의 "뜯어고쳐야 할 못된 버릇"정도에 불과하고"자랑스런 한국인"으로서의 모습이 올바른 모습이었던 것이다.
안 그래도 한국의 친부모는 여전히 낫설기만 했고 지금껏 어머니였던 유키코까지 잃어서 고아孤兒가 된 기분이었던 우쿄로서는 친가에서 부모 잃은 설움을 톡톡히 겪고 있었고 당연히 자기를 구박하고 압박하는 싫은 곳으로 느껴지고 있었다.
아니 우쿄가 느끼기에는 한국이라는 나라가 일본에 비해 여러모로 상당히 거친 편이어서 여린 성격의 우쿄로서는 적응하기 버거운 나라였다.
심지어 한국에서 본 동급생들도 상당히 거친 애들이 많아서 우쿄는 이때만큼 인간관계에 곤란을 느끼며 고립감에 시달린 적이 없었다.
특히 충격적이었던 것은 친아버지를 담임으로 해서 편입학 한 학교에서 교사들이 학생들을 몽둥이 같은 걸로 체벌하고 군대식으로 기합까지 주는 것이었다. 심지어 자기 아버지가 야구배트로 학생들을 몇 십대씩 체벌하는 걸 보고 설령 우쿄는 외국인이라 열외로 봐준다고 해도 마치 구 일본군대를 연상시키는 끔찍한 체벌 광경과 교실을 압도하는 공포분위기에 그 자리에서 기절해서 양호실로 실려갈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나중에 외국인인줄 모르고 우쿄의 두발상태를 문제 삼은 한 선생에게 우쿄가 일본어로 뭐라고 하는데도 학생부로 끌려가 체벌(이라고 쓰고 폭행이라고 읽는)을 당하는 봉변을 당하고 나서 일주일씩이나 충격에 휩싸여서 등교거부를 했을 정도였다.
점차 일본과는 전혀 다르고 열악한 학교생활이 싫어지고 있었다.
석주도 아들이 한국의 학교생활에 제대로 적응을 못하는 것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차라리 처음부터 일본인 학교로 편입학 시킬 걸 하고 후회할 정도였다.
아니, 한국에 온지 겨우 한 달 만에 우쿄는 한국생활 전반에 염증을 내기 시작했다.
거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집에서조차 우쿄는 안주할 곳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시댁에서 친척할아버지가 서울로 통원치료를 받아야 해서 우쿄가 한국에 체류한 마지막 2달 동안 집에 머물게 되었었다.
근데 하필이면 전주에서의 끔찍한 기억 탓에 친가 쪽이라면 경기를 일으키는 우쿄에게 가장 강경파인 할아버지가 곁에 붙게 되었던 것이다.
서울에 올라와서 첫날에 아직도 일본어를 쓰면서 일본인의 행동거지를 보이는 우쿄를 보고 석주에게 불같이 야단을 쳤다. 석주가 좋게 설명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애가 정신력이 부족하고 유약해서 그런 탓이고 적응되면 괜찮아질 거라고 호통을 치면서 그날로 아직 한국어도 서투른 애한테 일본어로 말하는 것을 금지시키고 식사시간에 한국식으로 국을 숟가락으로 퍼먹지 않고 일본식으로 국 그릇을 손으로 들어서 후루룩 마시거나 밥공기를 들고 젓가락으로 퍼먹으면 그런 건 상놈들이나 하는 짓이라며 호통을 치는 건 다반사였다. 어떤 때는 집에서 편하게 입는 키모노-양어머니 유키코가 우쿄를 위해 애정을 담아 만들어주어서 우쿄로서는 무엇보다 소중했던-를 입은 채로 ?겨야 했다. 우쿄가 읽는 책이 일본 책이라고 본인 허락도 없이 버려져 있기 일쑤고 일본어로 쓴 노트 때문에 한글을 쓸 것을 강요당하며 맞은 적까지 있었다.
말로만 증손이네 뭐 네이고 석주의 숙부는 우쿄를 순전히 일본인으로 보고 우리가 옛날에 (왜놈들한테) 그렇게 당했으니 너도 한번 당해보라는 식으로 보였을 정도였다.
일본어 사용을 금지 당하고 아무도 없는 사이에 노트에 일본어와 한문으로 필기했다며 한글사용을 강요하는 미치광이 같은 노인한테 허리띠로 폭행을 당해서 반 실신상태로 울고 있던 아들을 석주가 보고는 일제시대의 조선어 말살정책의 패러디 같다고 느꼈다면 비약飛躍일까?
진정으로 집안의 증손으로 봐줄 요량이었으면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 그 친척 할아버지가 외모나 성격상 여성적인 성격의 우쿄에게 “사나이 대장부 운운”하면서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며 남자다워지고 씩씩해지라고 강요하는 데는 더 이상 견디기 힘들어하고 있었던 것이다.
책상에서 글을 쓰거나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리는 걸 좋아하는 몸도 약한 애를 억지로 밖에 나가 운동을 하라고 해서 반 시체를 만들기까지 하는데 석주와 미코, 수진으로서는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점차 정신적으로 황폐해져 가고 있던 우쿄는 심지어 양부모들의 죽음으로 생겼던 우울증까지 악화돼서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서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할 만큼 정신적인 상처를 심하게 받고 있었다. 원래 잘 우는 성격인데 이때 툭하면 방에 틀어박혀 우는 일이 많았었다.
우쿄는 한동안 자폐증적으로 마음의 문을 닫은 채로 공부에만 몰두하는 것으로 어떻게든 버티려고 했다. 어른들에게 깍듯해서 무조건 우쿄의 역성만 들어줄 수 없었던 아버지는 그렇다 치고 엄마와 여동생인 수진이 유일하게 소통하는 상대가 되었지만 그것도 얼마 안 가 한계가 돼가고 있었다.
결국 얼마 안가 우쿄는 참지 못하고 폭발했다.
할아버지가 술에 취해 우쿄를 앞에 강제로 앉혀놓고 우쿄의 온순하고 얌전하기만 한 성격을 지적하며 석진이나 사촌동생들, 그 외 같은 또래의 남자애들을 거론하며 좀 당당한 사내대장부가 되야 하지 않겠냐고 잔소리를 -제3자가 듣기에 심하게 모욕적일 정도로- 했고 결국에 노인과 친척 손자 사이에 격한 언쟁이 발생했다.
노인은 연신 "왜놈" 쪽발이""라며 우쿄를 몰아세웠고 이 상황을 보다 수세에 몰려서 이성을 잃은 채 항의하던 아들 입에서 나온” 죠센징”이라는 단어에 앞뒤 안가리고 충격을 받은 석주가 결국 그날 처음으로 지금껏 체벌은 하지 않았던 아들의 뺨을 때렸고 맞은 곳을 손으로 감싼 채 처음에는 심한 충격을 받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다가 점차 -자신한테 이러려고 한국으로 데려왔던가 하는- 심한 배신감으로 아버지의 심한 야단을 한기가 돌 정도로 차가운 태도로 묵묵히 듣기만 하던 우쿄는 그 다음날 새벽에 집을 나가버렸다.
한국에 데려오고 불과 석 달 만에 아들이 가출해 버리자 온 집안이 발칵 뒤집혀 있었다. 울고 있던 아내한테 여기가 일본이 아닌 다음에야 갈 곳도 없는데 어딜 가겠냐며 하루 이틀 지나면 배가 고파서라도 기어들어올 테니 놔두라고 질타했지만 한 달이 넘도록 애가 들어올 생각을 안 하자 점차 불안해졌다. 수소문 끝에 설마 하고 일본의 처가에 연락했더니 정말로 일본의 외가에 가 있었던 것이다.
실은 이미 아내와 수진이는 알고 있었지만 우쿄를 대하는 시댁의 태도에 불만을 품었던 두 모녀가 아버지에게조차 일부러 함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다지 싸지 않은 비행기 요금이긴 하지만 그 정도는 본인이 부담할 수 있다는 걸 간과한 게 잘못이었다.
양어머니인 유키코가 사망했을 때 우쿄에게도 적잖은 예금을 유산으로 남겨줬고 그 관리를 위임 받은 석주가 우쿄의 앞날을 위해 아들 앞으로 신탁예금을 만든 뒤 거기서 나오는 이자 중에서 대부분을 다시 적금통장으로 만들어주면서 일부는 용돈으로 쓸 수 있게 일반통장으로 들어가도록 조치를 취해줬었는데 일본은행에서 엔화로 찾아서 원화로 환전해야 하는 번거로움 때문에 필요에 따라 용돈까지 직접 주고 있었던 것이다.
응석받이로 자라긴 해도 원래 검소한 걸 좋아하는 성격이라 돈 쓰는 걸 별로 안 좋아하는 우쿄이니 설령 적은 돈이라도 일반 통장에 상당한 돈이 모여 있을 게 분명했다.
그걸 무시한 채 제가 어딜 가겠냐 하고 놔두었던 것이다.
우쿄가 처음 일본의 외갓집으로 돌아갔을 때 외가친척들은 따듯하게 맞아줬지만 자신들의 시선을 피하는 걸 보고 당황했다.
친부모와 같이 살게 되서 양부모를 잃은 슬픔을 잊고 행복해 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너무 표정이 어둡고 우울해 했던 것이다.
일본을 떠나기 전에 기거하던 방에서 한동안 히키코모리 상태로 틀어박혀 있은 뒤 이유를 얘기하라고 어르고 달래는 이모들과 누나들 품에 안겨서 한참을 울다가 한국에서 있었던 일들을 얘기하자 다들 아연실색하는 표정이었다.
우쿄는 외갓집에서는 귀여움 받았던 아이였는데 정작 친가 쪽 친척들이라는 인간들이 자신들의 선민사상選民思想적 독선 때문에 정신적으로 폭행을 가하고 학대를 했다는 것이 충격이었다.
우쿄는 정직하고 순진한 아이이니 거짓말을 할 리도 없었고 친아버지조차 이실직고하면서 사실을 확인해 줬기 때문에 외가의 충격은 컸다.
친 아버지인 석주로서는 유구무언有口無言었다. 치료를 다 받고 나서도 계속 서울에 눌러앉아 있으면서 가족들을 불편하게 만든 노인의 “지가 할아버지인 자기 가르침에 그냥 따르면 되지 그걸로 정신적 상처를 입고 할게 뭐가 있냐” 하는 적반하장 격의 반응에 냉정하게 당장 시골로 내려가시라고 일갈一喝하고는 압송 당하는 죄인이 된 심정으로 아들을 데려오기 위해 인천공항에서 나리타행 비행기에 몸을 실어야 했다.
당연히 일본의 처가로 들어서는 순간 일제히 탄핵의 십자포격이 날아들었다. 친가 쪽 사람들이 그렇게 정신적으로 학대를 하고 일본인이라며 멸시할 거면 왜 데려갔느냐는 거였다. 거기에 석주는 달리 항변할 말이 없었다.
한편 유키코의 사후에 우쿄를 한국으로 데려오면서 유키코의 두 딸도 비록 시집은 갔지만 석주와 부녀간의 연을 섟?되었는데 두 딸한테도 혼나야 했다.
같은 고등학교 교사로 자기 막내동생의 담임을 맡았던 원래 온화한 성격의 카스미가 이례적으로 화를 내면서 양 아버지인 석주의 교육태도와 우쿄에게 전해들은 한국학교의 무지막지하고 야만적인(?)체벌제도를 신랄하게 비판했을 때는 쥐구멍에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실은 우쿄가 첫날에 등교를 거부한 뒤 교무회의에서 석주의 주도로 특별한 경우를 빼고는 앞으로 교내에서 적정선에서 두발을 자유화하고 일체의 체벌은 금지하기로 결의했었지만 여기서 그런 말을 할 게재가 아니었다. 아니한 말로 우쿄를 학생부실로 끌고가 체벌했던 선생이 만약에 일본 교사였으면 폭력혐의로 사법처리 감이었을 거라니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그렇게 말하면 속으로는 체벌행위 자체에 회의감을 느끼면서도 지금껏 “구타毆打”라는 표현이 무색치 않은 체벌을 해왔던 석주는 어떻겠는가?
금지옥엽같던 자기 외손자가 학대를 당했다는데 분노해 혈연적으로는 어쨌든 법적으로도 말할 것도 없고 우쿄가 당한 것만으로도 이제는 석주는 우쿄에게 어떤 권리도 없으니 진짜 아버지인 양 착각하지 마라는 장인어른의 호통에는 쇼크를 받아야 했다.
그리고 그 점잖고 온순하던 장인이 우쿄에게 학대를 가한 친척할아버지-석주의 숙부에게 법적인 책임을 묻겠다며 길길이 날뛰는 것을 어찌 진정시켜야 하나 하고 고심해야 했다.
석주로서는 일생일대에 이렇게 혼나보기는 처음이었다. 어렸을 때 자기 아버지한테 무지막지하게 두들겨 맞고 뒤지게 혼났던 건 유도 아니었다.
이런 곤욕을 치르고 다음날 간신히 한국에서 온다는 아버지를 피해 자기 누나 부부의 집에 은둔하고 있던 아들을 만나러 갈 수 있었지만 우쿄가 도무지 아버지를 안 만나줘서 또 이틀을 피를 말려야 했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대화를 청하는 아버지한테 울화통을 터트리며 꼴도 보기 싫다고 당장 한국으로 돌아가라는 말만 할 뿐이었다.
3일 뒤에야 일본에서의 습관대로 앞치마를 두르고 집 앞을 빗자루로 쓸다가 아버지를 보고 기겁을 하며 집으로 도망치듯 들어가려는 아이를 팔을 잡아서야 겨우 대화를 할 수 있었다.
누가 뭐래도 네가 우리집안의 종손이고 그래서 친가에서 너에게 그대를 걸어서 그런 거니까 이해하고 한국으로 돌아가자는 아버지의 설득에 우쿄의 대답은 단호했다.
“싫어요!! 절대 안가요!!, 이제 한국이라는 나라는 넌더리가 나고 역겨워요!! 저는 일본인이고 사오토메씨라구요!!!!”
이 한마디로 친가 쪽에 극심한 적대감을 드러내는 아들에게 내심 실망해서 그럼 마음대로 하라며 야단을 치고 한국으로 그냥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화는 났지만 석주는 아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처음 - 어머니의 사망으로 충격을 받은 상태에서 아무런 마음의 준비가 없는 상태였고 아직은 자신의 국적이나 정체성에 자신이 없었던 상태에서이긴 했지만 -한국에 데려왔던 당시에는 친가의 어른들이 우쿄를 한국인으로 귀화시키고 하자는 데는 석주도 원칙적으로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단 어느 정도 한국생활에 적응하고 한국이라는 나라에 애착을 갖게 한 뒤에 천천히 할 일이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가능성이 있었다. 석주와 미코가 친부모라는 사실을 알고 받은 충격과 막연한 두려움이 가라앉자 우연인지 재일교포 친구를 사귀고 석주에게 한국역사에 관한 책도 부탁하면서 한국이라는 나라에 -약간은 의혹疑惑과 의심에 찬-호기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금 이제 한국어를 좀 한다 하는 재일교포 4세 수준의 어설픈 수준이지만 제법 한국어도 할 수 있게 되었을 정도고 한국역사도 정확히 알게 되었었다. 고등학교 입학후에 아들을 보러 일본에 갔더니 우쿄가 학교 안에 “종군위안부”에 관한 동아리가 있어서 가입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면서 정말 옛날에 일본이 그랬는 줄 몰랐다고 했다. “친아버지의 나라”인 한국에 대해 관심과 애정을 보였던 것이다. 그걸 짓밟은 것은 자기 눈앞에서 완전히 한국사람으로 바뀌어서 가문의 대를 잇는 종손을 보고 싶다는 친할아버지의 조급증과 석주의 작은 아버지와 막내 동생의 “어른이 말하면 애는 듣고 따르면 그만”이라는 식의 강압주의와 -우쿄가 일본인이라는 사실을 무시한 귀화 강요와 일본인이라며 학대했던-이중적인 태도였고 그 결과 아들이 느낀 건 정신적인 상처와 환멸감이었다.
현재 석주로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돌아오자마자 대낮에 홧술에 취해서 전주로 전화해서는 이런 꼴 보자고 일본여자와 결혼하라고 했고 아들을 한국으로 데려오라고 했냐며 아버지를 원망할 뿐이었다.
물론 시댁은 당연히 아연실색했다. 자신들에게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게 실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무엇보다 그냥 자기동생한테 거의 완전히 왜곡된 얘기(어른 말 안 듣고 대들다가 가출해버렸다는)만 전해 듣고 자기 장손을 괘씸하게 생각했던 할아버지로서는 아들이 하는 얘기를 낱낱이 듣고 충격이 자심했던 모양이다.
여전히 동생은 자기 형한테 심하게 혼나고도 오히려 “지놈이 애비, 조상이 한국사람이고 어떤 사람들인 걸 알았으면 조상의 얼을 받들어서 한국사람이 될 생각을 해야지,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왜놈 짓이냐”며 그런 정신이 썩어빠진 녀석이 아니어도 손자는 차고 넘치니 차라리 족보에서 빼버리자고 큰소리를 쳤지만 그런 동생을 더 심하게 꾸짖으며 내친 할아버지로서는 다른 손자들보다 무척 총명하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귀여웠던 장손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친 할아버지는 우쿄에게 완전히 매료되어 있었던 것이다.
전주에 왔을 때 애가 한자와 한문을 잘 안다고 아들이 자랑하길래 제사용 축문을 지어보게 하고 “조선시대에 태어나서 과거시험을 봤으면 장원급제 감”이라고 칭찬한 것이 엊그저께 일 같았다. 일단 직접 일본으로 전화해서 아직도 노여움이 덜 풀린 손자를 달래려고 했지만 결과는 비참했다. 아직도 사태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고 어떻게든 당장에 한국으로 다시 오게 해서 한국인으로 귀화시키고 집안의 장손이자 종손으로 대를 잇게 하려는 생각을 은연중에 내세운 탓이었다. 마지막에 노인네가 자기 욕심이 앞서서 우쿄로서는 부당한 억지였던 “자랑스런 한국인으로서의 혈통을 내세우면서 집안의 제사를 받들고 -그 괴물 거인족 같은- 사촌 동생들을 거느려야 하는 장손이자 종손으로서의 책무를 강조했던 게 최악의 실수”였다.
이제 자신은 일본인이라는 생각을 완전히 굳혀버린 데다 귀여움 받으며 자랐던 사오토메 가의 막내라는 자신의 존재가 무엇보다 더 소중해진 우쿄로서는 “일본 놈”이라며 구박과 멸시를 받은 것 밖에 생각나는 게 없는 다른나라의 집안에서의 장손이자 종손이라는 것 따위는 반발심만 부추겼을 뿐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자신이 태어났을 때의 일들을 알게 되면서 친가에 대한 반감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적인-증오심과 적개심으로 변해버렸다.
일본인의 피가 섞였다며 버렸을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한국으로 끌고 가서 집안의 대를 이으라는 몰염치한 강요도 용서할 수 없었고 특히 자신의 친부모들이 친척들의 아집 때문에 불행을 겪은 일에 앙심을 품게 된 것이다.
급기야 석주의 숙부가 아동학대 죄로 고소당해서 체포된 뒤 일본으로 압송 당하기 직전상태까지 가자
보다 못한 막내 삼촌이 버르장머리를 고쳐서 잡아 끌고 오겠다고 휴가를 내서 일본으로 가서 시건방지게 손자가 할애비를 고소했다며 애를 윽박지르고 외가쪽 친척들한테 우리집 장손을 우리식대로 가르치겠다는 건데 댁들이 뭔 상관이냐며 우쿄를 한국으로 데려가겠다고 행패를 부렸던 것은 근처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서 어안이 벙벙했던 이웃이 신고한 일본경찰에 체포 당해서 한국의 헌병대에 인계된 뒤에 사적으로 외국으로 가 민간인에게 행패를 부려 한국육군 장교로서의 명예에 먹칠을 했다고 군법회의에 회부돼 불명예제대는 간신히 면했지만 소령에서 대위로 일계급 강등당한 뒤 논산의 계룡대에서 휴전선 전방으로 전출 당하는 희생만 치르고 사태만 악화시켰다. 막냇삼촌의 난동사건으로 우쿄는 친가에 대해 더 심한 적개심만 키우고 말았고 양가의 할아버지들도 평생을 쌓은 우정에 완전히 금이 가고 말았다.
나중에 미코가 아는 재한 일본인을 통해 일본대사관에서 담당자가 한국 국방부에 “한국군의 일본침략이냐”고 비아냥거리며 격하게 항의했다더라는 얘기까지 전해 들었을 정도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서울을 사이에 두고 전주全州와 도쿄東京가 적대적인 분위기가 흐르는 가운데 우쿄는 여름 방학 직전에 일본에서 다니던 고등학교로 돌아가는 대신에 검정고시를 쳐서 고등학교과정을 마쳐버린 뒤 곧바로 입시학원을 다니면서 그렇게 좋아하는 독서와 컴퓨터와 피아노, 기타연주와 만화책도 끊고 악착같이 공부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외갓집에서도 나와서 좁은 욕실 겸 화장실과 단칸방으로 이뤄진 학원에서 가까운 독신자용 연립주택으로 거처를 옮겨버리고 철저히 타인과는, 심지어 일본의 가족들과도 자폐증적으로 단절된 고립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누나들이 집에 들어와 있을 걸 종용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런 식으로 한국에서 받은 마음의 상처를 빨리 떨쳐내려고 몸부림 치고 있었다.
10월 즈음에 우쿄를 좀 설득해달라는 누나들의 간청에 두 번째로 일본의 아들을 보러 간 석주와 미코 부부는 편의점에서 사온 라면, 주먹밥 등으로 연명延命하거나 심지어 굶주림에 시달리면서 베게 및 이불 2장과 얼마 안 되는 옷가지. 라디오, 휴대전화 와 필기구, 교재와 참고서만 위에 놓인 탁자난로 외에는 TV 하나 없이 순전히 잠깐 눈을 붙이고 간단히 샤워하는 것과 공부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청결하지만 살풍경한 환경에서 점차 시력이 나빠져 두꺼워져 가는 안경 렌즈의 두께와 비례해 정신적으로 피폐해져 가는 아들의 모습에 충격을 받아야 했다. 석주가 직접 지도하고 있던 한국의 고3학생들의 모습은 그나마 나은 상태였다.
공부방에는 정말 순전히 공부를 위한 책들뿐이었다. 그 외에는 포켓용 불경佛經 1권뿐으로 독실한 불교집안에서 자란 우쿄에게 기댈 것은 부처님뿐이었던 것이다.
외가에서는 이전의 어리광쟁이이고 응석받이였던 사오토메 家의 귀염둥이가 저렇게 철저히 변해버린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었고 석주는 처제들과 우쿄의 누나들의 원망을 한꺼번에 받아야 했다.
한현 우쿄는 전에 없는 적대감의 장벽을 쌓아놓은 상태였다.. 아버지한테조차 언제 자기가 한국말을 배웠냐는 듯이 일본어로만 남 대하듯 차갑게 대하고 있었다.
더구나 외가의 우쿄의 방에 남아있던 서가에는 간간히 보이던 한글로 된 책이 몽땅 치워져 있었다. 일본으로 오자마자 일본에 남아있던 자기 책 중에 석주가 보내줬던 것도 포함된 한글 책을 샅샅이 찾아내 몽땅 불살라 버렸다는 얘기를 내심 속상해했다.
책이 문제가 아니라 이것으로 우쿄는 친아버지의 나라인 한국을 철저히 거부했던 것이다.
결국 두 부자가 완전히 의가 상해 한동안 서로 연락조차 끊은 채 우쿄가 힘들고 외로운 싸움을 벌이는 동안에 몇 달의 시간이 흘러버렸다. 그래도 친부모이니 자기 학업 성적 정도는 알려준다는 식으로 여벌로 더 받은 입시학원 성적표를 항공우편으로 보내오고 있었다. 성적표에 명시된 우쿄가 지망한 대학은 다른데도 아니고 무려 도쿄 대 문과와 역사학과였고 나날이 합격률을 향상시키고 있었다.
처음 보내온 성적표의 합격률이 75%를 넘기고 있는 상태였다. 한국의 수능시험에 해당하는 센터시험을 앞둔 마지막 도쿄 대 모의고사 시험에서 합격률 100%라는 성적표를 석주가 전주에 가져가서 집안어른들한테 보이자 심지어 전방에서 잠시 휴가로 집에 다니러 온 막냇삼촌을 포함한 어른들은 경악했다. 삼촌들로선 일본의 도쿄 대라면 한국의 서울대에 해당한다는-, 아니 말이 그렇지 도쿄 대라면 아시아 제일의 대학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고 할아버지 세대로선 바로 식민지시대의 한국에서도 익히 알려진 최고의 학부인 “동경제국대학”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기실其實 당신의 장손의 총명함을 진작에 알아본 친할아버지를 제외하고 다들 우쿄의 어려 보이는 외모와 왜소한 체격 때문에 하찮게들 보고 있었고 우쿄에게 강압적이었던 것도 그런 이유였는데 우쿄의 진가眞價를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우쿄로서는 의도한 바가 아니었지만 이 성적표 한 장으로 전주의 집안어른들과 도쿄의 일본인 종손의 기 싸움은 전주의 참패와 우쿄의 우위로 끝났다. 일본인인데다 조그맣고 자기들보다도 어려 보인다고 장손 형을 만만히 보고 깔보고 있던 사촌동생들도 내심 콧대가 꺾여 고개를 못 들게 되고 말았다.
덧붙인다면 해병대 사관학교를 지망하겠다는 -같은 나이의 우쿄에게 처음 보자마자 형 대접을 해주며 비교적 호의적이었던- 우석은 지금 아직 고2이고 상위권에서 약간 처지는 수준이었고 라이벌의식을 느끼기 시작한 듯 했다.
석주는 한없이 작기만 하던 자기 아들이 처음으로 장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결국에 전 과목 만점으로 기록된 센터시험 성적표가 한국에 도착한 다음날 돌연 우쿄가 한국의 아버지가 근무하는 학교에 전화를 걸어왔다. 석주도 아직 부자지간이라는 것은 밝히지 안은 채 그를 통해 우쿄의 소식을 전해 듣던 동료교사들도 너무나 놀란 가운데 아버지한테 하는 얘기가 한국에서 지원할 수 있는 대학을 알아봐달라는 것이다.
입학수속까지 부탁한 이유는 밝히지 않은 채였다.
그리고 2차 본고사 준비로 분주한 와중에도 한국에 와서 아버지가 알아봐 준 학교에 편입학 시험을 치뤘다. 그게 올해 설날 직전이었다.
가족들은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알고 너무나 기뻐했다.
실은 우쿄는 망설이고 있었다. 그냥 일본에 눌러 앉아서 도쿄 대에 진학하느냐, 한국의 대학에 진학해 가족들과 같이 사느냐 하는 문제였다.
아버지와는 연락은 안하고 있었지만 간간히 엄마와 수진과는 이메일 등으로 연락을 하고 있었다.
친가에 대한 적개심은 여전히 극단을 치닫고 있지만 서울의 친부모와 여동생에 대해 싹튼 애정은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가끔 서울의 집을 나올 때 들고 온 세 사람의 가족사진을 보면서 혼자 울 때가 많았다고 한다.
특히 가끔 씩 술에 취한 아버지가 도쿄로 전화해서 안 하던 일본어까지 하면서 “너밖에 없다! 무조건 애비 잘못이고 그 어떤 것도 강요 안 하겠다! 이 애비 소원이니 서울로 와라” 하고 눈물로 호소하는 데는 여린 성격의 아들로서는 도저히 무시할 수 없었다. 일부러 차가운 체 하며 듣고만 있다가 막상 통화가 끝나면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울기가 일쑤였던 것이다.
결국 도쿄 대 입시까지 다 마치고 기거하고 있던 공부방도 정리해버리고 난 다음날 우쿄는 만류하면서 섭섭해 하는 이모들과 누나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서울로 와버렸다. 물론 순전히 가족들과 같이 살고 싶은 심정만 있었지,
친가 쪽의 몰염치한 요구대로 귀화하겠다거나 집안의 대를 잇겠다는 생각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였다.
우쿄는 자신의 국적과 성씨에 대해 입장을 명확히 했고 석주로서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나중에 미코가 혹시나 해서 카스미한테 입시결과를 살짝 알아봐달라고 했더니 도쿄 대는 10위권 안으로 합격해 있었다더라고 한다.
뭐, 도쿄 대는 솔직히 좀 아깝긴 하지만 지금 대학도 한국 유수의 명문대이고 자신을 희생해가면서 가족들을 선택한 아들이 가족들로서는 너무나 고마웠다. 물론 문제는 남아 있었다.
지금도 친가와 우쿄의 사이는 극히 냉랭했다. 간간히 전주의 어른들이 그래도 지은 죄도 있고 기도 꺾인 터라 본인한테는 못하고 석주에게 전화로 한국에 왔으면 와서 인사해야 하지 않느냐는 식이다.
우쿄는 내색은 않지만 누나들한테 한 말을 들은 바로 “저 사람들”때문에 자기 친부모들이 아들까지 잃는 불행을 겪어야 했고 그것도 모자라 자기까지 못살게 군다며 “철저히 남” 취급인 실정이다.
우쿄로서는 친가는 엄연히 일본의 사오토메家이지, 전주는 절대 아니었다.
석주도 아버지가-아직도 반성의 기색은 안보이고 아들을 철저히 보호하겠다는 조카한테 “친일배親日輩”라는 얼토당토않은 욕을 한- 자기 동생과는 완전히 등을 돌린 상태로 아무리 그래도 전주의 친가와 명색이 증손이라는 아들이 감정의 골을 사이에 두고 있는 게 좋은 일은 아니었고, 앞으로 우쿄가 자신의 국적문제를 어떻게 할 거냐는 것이다. 현재 아들의 신분은 유학을 목적으로 체류중인 재한 일본인 신분으로 가족들과 국적까지 다른 상태이다. 친부모와는 상관 없이 이제는 자기 자신에 대해 누가 뭐래도 일본인이라는 생각을 굳혀버린 지금으로서는 귀화의 귀자도 못 꺼낼 상황이었고 석주는 이제 “다 젊었을 때 처자식 건사를 제대로 못한 죄이거니” 하고 아들의 국적이나 성씨에 대해 굳이 구애拘碍받지 않기로 했다.
아니, 애초에 친가든 누구든 버려놓고 거들떠도 안보다가 이제 와서 종손이네 뭐네 하면서 욕심을 앞세울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었다.
아마 친가에 격렬한 원한을 품고도 다시 한국으로 오기로 한 것만도 우쿄로서는 엄청난 고민 끝에 나온 결단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석주로서는 그 결단에 부응해줄 필요가 있었다.
또다시 친가에서 -우쿄로서는 가당치도 않은 -종손으로서의 의무와 반일감정을 앞세워 우쿄에게 귀화를 강요한다면 아마 우쿄는 격렬히 거부할 것이 틀림없었다.
지금껏 마냥 착한 아이였던 우쿄는 아마 순종만이 능사가 아님을 배운 모양이었다.
덧붙이자면 우쿄를 학대했던 석주의 숙부는 아동학대죄로 일본으로 압송돼 법정까지 섰다가 원고인 우쿄의 소 취하로 겨우 풀려나 귀국해 있는 상태이다. 소만 취하했을 뿐 우쿄는 그 노인을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머리를 다시 빗어서 리본으로 예쁘게 묶는 걸로 몸단장을 마친 미코는 안방 문 사이로 아들을 흘깃 보면서 흐뭇해 했다. 이제 특별한 계기가 없는 한 아들이 일본으로 돌아가 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우쿄에 대한 시댁의 간섭은 남편이 책임지고 막아주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고 남편은 한번 한 약속은 절대로 지키는 남자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쿄가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날 석주는 전주로 내려가 친척들에게 이렇게 못을 박았다.
<한국인이든, 일본인이든, 안동 권씨든 사오토메씨든 호적에 누구 아들로 되어 있든 “우리 우경이”가 누가 뭐래도 내 아들이라는 사실은 절대 안 변합니다. 그러니 그 아이의 일은 무조건 그 아이의 자유의사에 맡길 테니까, 앞으로 절대 간섭 마시기 바랍니다. 네, 저는 이제 그딴 일로 내 아들이 불행해지는 걸 안 바랍니다. >
물론 아직도 이의를 제기하는 어른들이 있긴 하지만 어느정도는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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