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판 5부상장 2009년 1월 21일
전면수정 2010년 2월 21일
혁은 여전히 개운찮은 표정으로 집에 들어서자 옷을 갈아입고 잠자리에 들었다.
미키의 집에서 샤워를 하고 온 터라 따로 씻을 필요를 못 느꼈다,
손에서 노 브래지어 상태에서 차이나 드레스에 싸여 있던 그녀의 풍만한 유방의 감촉이
아직도 떠나지 않고 있었다. 미키는 물론 옛날에는 연인人인 적도 있긴 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섹스라는 게 그렇게 가볍게 생각할 수 없는 행위이지만 가끔 하는 뜨거운
성관계는 친구 사이의 재미있는 놀이 정도라는 느낌이고- 지금은 여자이기 전에
진실하고 현명한 친구이다.
하지만 오늘 우쿄가 연주한 음악을 들으면서 살짝 눈물을 보인 거나 작정하고 혁을 꼬시기
위해 몰래 방에서 브래지어를 푼 게 생각나자 미키가 무척 사랑스럽고 귀여운 여자라는
생각이 들어 혁은 웃음이 나왔다.
여자의 아름다운 점은 귀염성과 상냥함, 여린 성품과 따뜻한 모성본능일 것이다
남자가 여자를 사랑해줘야 할 이유가 그런 것들이지 싶었다.
평소에 심지가 굳고 다소 괄괄한 데가 있어서 다소 남자 같다는 생각까지 들던 그녀지만
내심 여자로서의 그런 심성을 깊숙이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녀가 -삐뚤어진 욕구까지는 정당화해주진 않았지만-최소한 혁이 우쿄에게 느끼는
감정만은 긍정적인 태도를 취했던 것이다.
차라리 미키가 자신의 일탈된 심리를 질타하고 미친놈이라고 욕을 하고 정신차리라고
야단을 쳤다면 명쾌한 기분에 속이 개운하기라도 했을 터였다.
그런데 정사情事 전의 대화는 웃기게도 입장이 완전히 바뀌었던 것이다.
그래서 더 혼란스럽고 개운치 못했던 것이다.
심지어 그녀 자신도 여자와 가끔 동성연애를 하고 무엇보다 자기보다 한참 어린
우쿄에게 여성으로 끌릴 때가 있다니 의외였다.
실은 그 꼬마가 정작 본인이 여자한테 무관심하다시피 해서 그렇지, 의외로 전부 연상의
누나들인 같은 학교의 여대생들에게 은근히 인기가 있다는 소문이다.
아니 심지어 몇몇 남학생들조차 같은 남자인 우쿄에게 관심을 보이는 모양이었다.
하긴 혁 자신도 우쿄의 처음에 본 어려 보이고 약해 보이는 여성적인 분위기 때문에
끌려왔긴 했지만 여자들-그것도 최소한 2년은 누나들인- 에게도 그 소년이 무척
끌리는 스타일인 모양이다.
무척 어리고 귀여운 연하의 남자아이라는 점이 여성에게는 누나로서의 모성본능을
유발시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자라고 무조건 남성적인 남자에게만 매력을 느끼는
게 아닌 것인지도 모른다.
더욱이 단정하고 머리숱이 많은 칠흑 색의 생머리와 거의 완전히 하얀 색의 곱고 엷은
피부와 작고 가냘픈 몸매, 안경을 착용한 모습이 인상적인 우쿄는 확실히 보기 드문
미소년이다, 아니, 생김새 만으로는 다소 털털하고 보이쉬한 스타일의 미소녀美少女라고
해도 좋을 얼굴이지만 안 그래도 어린 나이보다 더 어려 보이는 탓에 오히려 아기자기하고
수수해서 청순하면서 귀여운 인상印象이다.
우쿄가 여자였고 미키와 같은 나이였다면 무척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전반적으로 풍기는 분위기도 좀 촌스럽다 싶을 정도로 세련미와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단정하고 검소한 옷을 제법 맵시 있게 입는 걸 좋아하고 그런 게 다소 냉정하고 고지식한
모범생의 이미지와 함깨 우쿄의 미모美貌를 은폐隱閉하는 경향을 보이지만 한편 -오히려
은근히 여성적이어서- 우아하고 기품 있어서 어울렸다.
화려함이나 과도하게 튀는 것과는 전연 무관한 그런 모습이 보는 사람들에게 신뢰감과
편안함을 주었다. 앉아 있을 때의 내성적이고 다소곳하고 말이 없어서 조용하고
무표정한 태도는 신비로움까지 느끼게 하고 있었다.
우쿄가 풍기는 전반적인 분위기가 남성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는 게 사실이다.
오히려 동성同性의 친구 같은 모습도 의외로 여자에게 끌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거기다 음악을 연주하는 모습의 우쿄는 충분히 멋있기도 했다.
남성이 여성에게 낭만적인 매력을 느끼게 할 수 있는 것 중에 하나가 멋진 음악을
멋지게 연주 할 수 있는 것인데 우쿄는 심지어 작곡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아주 어른스러운 원숙한 솜씨로……..
몽환적인 우수에 찬 아름다운 선율이 아직도 귀에 선했다.
(……….만약에 내가 케이와 같은 나이의 여자라면 그 녀석에게 끌렸을까? )
생각하는 게 지겨워진 혁은 남아있는 알코올의 기운에 졸리기도 하고 해서 잠이라도
청하려 침대 옆의 나이트 스텐드를 끄려고 손을 뻗으려다 입고 있는 남성용의 잠옷용
유카타에 눈길이 갔다.
늘 젠틀맨이라는 평가를 받는 혁이지만 잠을 잘 때 잠옷을 입는 버릇만은 고등학교 때
집에서 ?겨나다시피 해서 마산으로 내려갔던 이후에 군복무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다.
겨울에조차 남아도는 젊음의 열기 때문인지 잠옷이 거치적거려서 거의 알몸으로 자는
게 버릇이 돼버린 것이다. 사실 그게 혼자 자는 거라면 크게 흉 될 것은 아니다.
거기다 그런 수면습관이 건강에 좋다고도 하고……. 이 잠옷용 유카타는 저번에 우쿄가
어머니의 기일이라고 일본에 갔다 왔을 때 선물한 것이다. -유카타라고는 해도 한국의
생활한복 같은 감각이라 그리 입는 게 까다롭지 않고 세탁도 비교적 편했다. -
물론 애초에 한국인인 혁이 기모노 따위를 입을 이유가 없었다.
일본인인 우쿄를 좋아하지만 혁도 기본적으로 일본이라는 나라를 민족주의적인
관념으로 극히 싫어하는 전형적인 대한민국 남자이다.
근데 한번 입어보고 의외로 편하게 느껴져서 이기도 하지만 우쿄의 성의를 무시할 수
없어서, 아니 우쿄가 선물한 거라 소중하게 느껴졌고 잘 때 우쿄를 품에 안고 자는 기분이
들어서 자주 그걸 애용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예전에 미키와 뜨거운 관계였고 지금
우쿄를 만난 이래 일본이라는 나라가 최소한 사람들은 생각만큼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우쿄는 진작에 단순히 수재이고 미소년이라서 뿐이 아니라 착실하고 온순한 성격
등으로 학교에서 좋은 평판을 얻고 있었고 혁도 그를 통해 알게 된 학교 안의 일본인
유학생들 중에 그리 기분 나쁜 녀석은 보지 못한 것 같았다.
물론 우쿄가 사람을 좀 가려서 사귀는 경향이 있어서일지도 모르겠지만………
우쿄는 미나와 함께 지하철 열차에 승차해 나란히 앉았다.
퇴근시간이라서 인지 열차 안은 좀 혼잡했다.
<고마워, 케이. 누나인 내가 데려다 주려고 했었는데…. >
<아니에요, 이래 보여도 제가 남자니까 숙녀를 집까지 보호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요? >
제법 씩씩하게 말하는 우쿄가 미나는 귀엽기도 하고 왠지 듬직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잠시 미나가 휴대전화로 조용히 통화하고 났더니 우쿄가 살짝 잠이 들어 있었다.
꾸벅꾸벅 조는 모습이 귀엽다고 느낀 미나는 미소를 띄며 우쿄의 뺨에 키스를 했다.
그리고 앞에 왠 할머니가 힘들게 서 있어서 자리를 양보해 드리고 선 미나는 잠시
후에 자신의 몸을 더듬거리는 손길을 느꼈다.
(이사람, 치한? )
놀란 미나가 치한의 정체를 살폈더니 자기 할아버지 뻘 되는 머리가 벗겨진 쭈글쭈글한
노인이었다. 노인은 미나가 흘겨보는데도 천연덕스럽게 미나의 미니스커트 안으로 마른
나뭇가지 같은 손을 침범해 그녀의 늘씬한 안쪽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그 순간에 노인의 못된 손을 낚아채는 손아귀가 있었다.
미나와 노인이 놀라서 본 그 손아귀의 주인은 남도 아니고 아까까지 자리에서 졸고 있던
우쿄였다.
<이게 무슨 짓이세요? >
<… 네 이놈. 이게 뭐 하자는 짓이냐? >
처음에 놀라던 노인은 이윽고 적반하장賊反荷杖 격으로 우쿄에게 화를 냈다.
<우리 누나한테 무슨 짓을 하는 거냐고 물었거든요? >
<이놈아. 내가 뭘 어쨌다고 젖비린내 풀풀 나게 어린 놈이 늙은 할애비한테 행패야?
네놈은 애미애비도 없어? >
우쿄는 전혀 위축되지 않고 노인을 차갑게 응시했다.
<몰라서 물으세요? >
<할아버지가 저한테 치한 짓을 했잖아요? >
미나가 극히 담담하게 노인에게 말했다.
노인은 미나는 무시한 채 가장 어리고 만만해 보이는 우쿄만 노려봤다.
<어허~~~ 이놈이!! 어린 놈이 노인을 공경할 줄 모르고 어디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난리야!! 이 천하에 못 배운 녀석 같으니!! 이 손 못 놔? >
노인은 어른의 권위를 내세워서 어떻게든 위기를 모면하려 들었다.
어디든 이런 인간들이 꼭 있다. 나이 값도 못하는 주제에 어른의 권위를 내세워
아랫사람들을 핍박하고 부당한 강요를 하는 인간들. 불행한 것은 실제로 이런 어른들이
태반이라는 것이다. 우쿄가 아는 한 진정한 어른은 일본의 외가 어른들과 한국의 친부모인
석주와 우경. 그리고 선배인 혁 정도였다. 우쿄는 그 노인이 마치 전주에서 우쿄에게
한국국적을 강요하며 억지를 부리던 영감들을 연상시켰다.
새삼 전주의 노인들에 대한 적개심이 되살아난 우쿄는 -자신이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모르게- 노인을 꽉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 うるせぇ!! (시끄러워!!) 하여간에 영감님이 “우리 누나”한테 한 짓에 어울릴 곳에 같이
가시죠. 다음 역에 내려서 한국 경찰한테 가자구요!! >
미나는 우쿄의 전혀 의외의 매서운 모습에 놀랐다.
미나로서는 우쿄가 화를 내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인데 평소의 온순한 사람이 화나면
무섭다는 격언으로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화를 낸다고 해도 남들과는 달리 전혀 흥분하지
않는 한기寒氣가 도는 극도의 차가움이 더 무섭게 느껴졌다.
차갑고 매서운 모습은 여지없이 적을 칼로 베기 직전의 냉혹한 일본 사무라이를
연상시켰다.
그건 그렇고 미나는 지금껏 적당히 거리를 두면서 약간 냉정한 게 꼭 반쯤 길들여진
고양이 같았던 우쿄의 “우리 누나”라는 말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이놈이 그래도…………… >
노인은 기가 안 죽으려고 계속 성질을 부렸지만 우쿄의 얼음장 같은 차가운 태도에 왠지
잘못 건드렸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때 열차가 서고 문이 열리는 순간에 노인은 우쿄를 밀치고 차 밖으로 튀어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우쿄는 그 노인을 악착같이 물고 늘어졌다…..
이윽고 노인은 다른 승객들에게 제압되어서 다음 역의 지하철 순찰대에 넘겨졌다.
우쿄와 미나도 거기에 같이 갔다.
<대단한 학생이네. 그래 안 무서웠어? >
경찰관의 질문에 우쿄는 그제야 자신이 한 행동을 떠올리고 몸을 움츠렸다. 남자임에도
치한이 곧잘 꼬였던 자신이 저 노인한테 걸렸다면 -겁도 나고 더구나 발동하면
흥분해버려서-그냥 당했지 싶었다.
<실은 좀 그랬어요. >
그 치한 노인은 잘못은커녕 되려 자신을 취조중인 경찰관에게 호통이었다.
<내가 교회 목사요!! 근데 내가 여자한테 어쨌다고? >
<그래서. 그 시간에 목사님께서 지하철은 왜 타셨어요? >
<몰라서 물어? 전도활동 하려고 탔지? >
승객들은 속으로 “웃기고 있네!!’하는 표정이었다.
경찰관은 노인이 가증스럽다는 표정으로 야단을 쳤다.
<목사님!! 공공장소에서 전도활동 하는 것도 벌금형에 상당하는 불법이지만 성추행
상습범으로 순찰대에 요주의 인물로 찍히셨거든요!! 여자한테 추근대는 게 전도활동이에요?
예수님이 웃겠네요!! >
잠시 꿀먹은 벙어리가 된 목사는 곧바로 반격했다.
<이 작자가 어디서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욕보여!! 이 사탄이 잡아갈 작자 같으니!!
그게 다 여호와 하나님을 공경할 줄 몰라서 그래. 체포하려거든 저 노인한테 무례하게
구는 버르장머리 없는 애새끼나 체포하란 말야, 씨팔!! 그래, 저 녀석 나한테 일본말까지
하면서 윽박질렀지!! 왜놈들이 우리나라에서 쫓겨난 게 언젠데 지가 무슨 쪽발이라고!!
제 조상들이 왜놈들한테 나라를 뺏기고 되찾는다고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렀는데 정신을
못 차리고 철딱서니 없이 말야,!! 저놈은 어른들 공경하는 법도 모르고 나라 사랑하는 법도
모르는 놈이야!! 이노무 자식!! 회개하고 정신차려!! >
취조중인 경찰관은 목사의 철면피에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何するのよ. あのエロじじい (뭐 하는 거야. 저 엉큼할아범)~~~~>
우쿄는 노인의 말이 자신에게 윽박질러댔던 노인들의 말하고 똑같은 데에 냉소를 금할 수
없었다. 유유상종相從이라는 게 이런 것인가 싶었다.
우쿄와 미나 곁에 있던 경찰관은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우쿄에게 왜 일본어를 했냐고
물었다.
우쿄는 한쪽 검지손가락으로 턱을 긁적이며 반문했다.
<日本人が日本語を話せるのが何が過ちですか。
(일본인이 일본어를 하는 게 뭐가 잘못이에요? ) >
<그, 그래? 그럼 어디 신분증 좀 줘보겠나? 어차피 신원확인은 해야 하니까.…….>
우쿄는 주저 없이 외국인 등록증과 학생증을 내보였다.
나이가 많아 봐야 갓 입학한 중학생쯤으로 보였던 우쿄가 실은 고등학생 정도의 나이이고
대학생이라니 다들 놀라고 있었다.
더구나 일본인이라는 점도 신선했다.
이윽고 밖이 소란스러워지더니 관할 경찰서에서 성 추행범을 압송하려 경찰관들이 도착했다.
노인이 끌려간 뒤 경찰관은 미나와 우쿄에게 한마디 했다.
<저 노인은 법에 따라 처벌받을 겁니다. 많이 놀라셨겠지만 이제 안심하시기 바라겠습니다.
근데 나중에 참고인 자격으로 소환할 수도 있으니 그때 협조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학생은 아마 잘하면 표창表彰을 받을 지도 몰라. 하여간 기특하네. 저 노친네 나라
망신은 톡톡히 시켰구먼. 그런 주제에 고매한 애국자인 척은, 허허허~~~>
<우리나라에도 치한은 많은데요, 뭘….. >
<그런가? >
약간 나이가 지긋한 경찰관은 우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겨 주었다.
우쿄와 미나가 지하철역에서 나와서 우쿄는 기어이 미나가 사는 아파트 단지의 앞까지
미나를 바래다 주었다.
<그럼 케이. 이왕 온 김에 잠깐 우리 집에 들어서 뭐 좀 마시고 갈래 >
그러자 우쿄는 얼굴이 빨개져서 손사래를 치며 사양했다.
<아, 아니에요. 이 늦은 시간에 다른 사람의 집을 방문하는 건 실례거든요…… >
<그래도…… 그럼 잠깐만. >
미나는 우쿄를 가볍게 안아줬다. 우쿄는 왠지 수줍어졌다. 젊은 여성의 고혹적인 체취가
우쿄를 흥분시켰다.
미인인 연상의 여성은 어린 소년에게는 대체로 매력적이고 멋진 동경의 대상일 것이다.
미나는 우쿄의 얇고 고운 입술에 자신의 도톰하고 매력적인 입술을 맞추고 키스해 주었다.
누나들이랑 사촌누이랑 볼이나 이마에 장난스럽게 뽀뽀를 했던 것을 빼고 이런 여자와의
본격적인 키스는 처음이었다.
여자의 입술은 남자와 달리 향기도 좋고 무척 부드러워서 느낌이 좋았다.
우쿄는 입맞춤이 끝난 뒤에도 잠시 동안 여운에 빠져 있었다.
미소년과의 키스는 미나에게도 가벼운 흥분을 느끼게 했다. 더구나 자기와의 키스에
소년이 넋을 놓을 만큼 황홀해 하는 것에 내심 흡족했다. 미나는 우쿄의 뺨을
어루만져주면서 속삭였다.
<이건 아까 용감한 행동에 대한 누나로서의 상이야. >
이윽고 여운에서 벗어난 우쿄는 수줍게 웃어 보였다.
그러고 보면 미나들의 여 선배들은 각기 일본의 사촌누나들을 연상시켜서 친숙해서
좋다는 느낌이었다. 우쿄가 아까 미나를 “우리 누나”라고 한 것은 그런 기분 탓일 것이다.
<그럼 전 가볼게요. 아참, 오늘 일은 말하지 말아주세요. 창피하니까……さよなら. >
<응. 그래. 내일 보자. >
다시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우쿄를 손을 흔들면서 배웅한 미나는 약간 아쉽다는 기분이
들면서 집으로 들어섰다.
시간은 오후 9시 30분경이었다.
미나가 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자 그녀의 언니가 방에 들어섰다.
<얘. 아까 아파트 앞의 그 꼬마 애는 누구니? >
<아, 언니도 봤어? 어때. 남자애가 참 예쁘게 생겼지? 그 애가 내가 말한 바로 그 애야. >
미나의 언니는 알만하다는 표정이었다.
<아. 일본에서 왔다는 사오토메…….. >
<우쿄군. 그 애한테는 일본에서 부르는 대로 케이라고 부르지만 우리 미녀삼총사끼리는
“우경이”라고 부르는…… >
<(흥!! 미녀삼총사? ) 아, 그래 그래. 네가 반했다는 그 일본인 남자아이란 말이지?
근데 저 꼬마가 너를 집까지 에스코트 해준 거야? >
< 응. 거기다 나한테 치근덕대는 치한癡漢까지 격퇴해 줬다니까….. 언니가 일본에서
겪은 일본남자들하고는 약간 다르기도 하고…… 참 기특하지? >
미나의 언니는 작년까지 일본에서 유학했었고 일본인 남자친구를 사귀기도 했다.
그녀가 일본에서 겪은 바로는 치한은 그렇다 치고 최소한 일본인 남자친구한테는 밤에
집까지 에스코트 받는 것은 거의 기대를 말아야 한다.
<하긴, 집까지 숙녀를 바래다 준 거 하나는 일본의 내 남자친구였던 머슴애 보다는
낫긴 해. 근데 너는 그런 꼬맹이하고 뽀뽀를 하니?>
약간 비꼬듯 말하는 언니한테 질투하냐는 듯 흘겨본 미나는 창 밖으로 우쿄가 간 방향을
응시하며 말했다.
<어른이 되면 다른 의미로 제법 근사하고 멋있는 남자가 될지도 몰라.……. >
아참, 아까 우쿄랑 키스 한 것을 친구들에게 자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새치기 했다고 난리 칠 모습이 선했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나 토요일이 혁과 그의 고등학교 동창이 석주를 방문하기로 한
날이었다. 우쿄는 일찍 서둘러서 집에 갔다. 가는 길에 우연히 아는 사람 두 명이 우쿄와
같은 지하철 열차를 타게 되었다 친구를 데리러 가느라 우쿄와 동승한 영진과 그냥 방향이
같은 야마모토 페이였다.
이렇게 일본인 두 명, 한국인 1명, 합이 세 사람이 나란히 좌석이 앉아 다른 승객에게
방해가 안되도록 주의하면서 얘기하다가 다른 쪽에서 좀 시끄럽게 떠드는 지방에서 온
학생들에 신경이 쏠리기 시작했다.
< ちょっとうるせですね。 (좀 시끄럽네요.) >
참다 못한 페이가 조용히 투덜댔다.
< そうですね山本兄さん。(그렇네요 야마모토형.) >
우쿄도 약간 불만스러운 표정이었고 영진은 한심하다는 표정이었다.
<외국인도 있는데 저게 뭔 짓거리고……. >
영진이 일어나서 학생들에게 한마디 하려는 순간에 세 사람의 앞에 서있던 우쿄와 같은
또래의 고등학생이 먼저 그 학생들에게 한마디 했다.
<거 좀 조용히 좀 합시다. 전철 안이 당신네 건 아니잖아요. >
그러자 그 지방에서 온 학생들이 떠드는 걸 멈추고 그 고등학생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더니
그 중에 덩치 좋은 친구가 그 학생의 바로 눈 앞에 눈을 초 근접시키고 빽 소리를 질렀다.
< 그라모 이기 다 니끼가? 짜샤!! ( 그럼 이게 다 네 거야? 자식아!!) >
우쿄와 페이는 약간 어안이 벙벙했다. 두 일본인으로서는, 아니 누가 봐도 이해가 안될
모습이었다.
사과를 해도 시원찮을 판에…… 근데 어느 정도 한국어기 익은 두 일본인이 듣기에도 얼핏
알아듣기 힘들 정도의 상당히 심한 경상도 사투리였다.
본인도 경상도 출신인 영진은 자기가 다 민망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근데 한마디 버럭 소리를 지르고 난 덩치가 의기양양하게 돌아간 뒤
찍 소리도 못하던 고등학생이 자기 친구들에게 들릴락 말락 하게 한
소리가 가관이었다.
<씨X!! 조땠다!! 봐~~~ 일본 애들 맞잖아;;;;;;; >
페이는 실소했다. 우쿄는 발끈해서 일어서려다 영진이 말려서 앉았다.
졸지에 그 몰상식한 경상도 학생들이 우쿄. 페이와 동족同族이 되어버린 거다.
우쿄외의 2인은 어이가 없어서 서로를 쳐다보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 호호호~~~ 너무 웃겨♡>
리본으로 묶은 긴 생머리에 레이스 달린 에이프런과 세트인 꽤 귀여운 홈 드레스 차림의
마치 막 시집온 새댁 같은 분위기의 우경은 우쿄에게 전철에서의 일을 듣고 폭소를 터트렸다.
우쿄는 어쨌든 불만스러웠다.
< とにかくそんな子たちを日本人だとしたことは氣持ち惡いです. 本當の日本人ならそのように
しないが...... (하여간 그런 애들을 일본사람이라고 한 건 기분 나빠요. 진짜 일본인이라면 그러지
않는데......)>
아들의 투정기 있는 말에 우경은 간신히 웃음을 멈추었다.
< 何, グラモ イギ ダ ニキガ これが韓國の人人にはざっと日本語のように聞こえたようなの....
( 뭐, 그라모 이기 다 니까가, 요게 한국사람들한테는 얼핏 일본어처럼 들렸었나 보지....) >
< どこがそれほど聞こえるというんですか?(어디가 그렇게 들린다는 거예요? ) >
< 何より發音が日本語音節に當たるんじゃないの? イントネ-ションも似ていて….
(무엇보다 발음이 일본어 음절에 맞잖아? 억양도 비슷하고….) >
< 話にならないです! 日本語がいくら優雅で美しい言語なのにそんなお上りさんたちが使う
朝鮮のいちなまりして比べますか。
(말도 안돼요! 일본어가 얼마나 우아하고 아름다운 언어인데 그까짓 촌뜨기들이 쓰는
한국의 일개 사투리하고 비교해요? ) >
우쿄의 약간 흥분된 말에 우경은 웃음을 거두고 진지하게 그 말을 곱씹었다.
< 우아하고 아름다운 언어라…… 일본어가 말이지…… >
그건 한국으로 시집온 이래 거의 한국어만 사용하던 우경도 아들과 일본어를 다시
일상적으로 사용하게 되면서 새삼 느끼기 시작한 점이었다. 그건 어느 나라 사람이든
오래 고국을 떠난 사람들이 고국어에 느끼는 감정일 것이다.
깍지 낀 양 손등으로 턱을 괴고 아들을 사랑스럽게 응시하던 우경은 아들에게 애정이
듬X 담긴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 …………….やっぱりうちの息子はまったく日本人ね 。
(…………….역시 우리 아들은 천상 일본인이구나. ) >
우쿄는 당연하지 않느냐고 반문하려다 걸리는 게 있어서 입을 다물었다.
우경가 보기에 작년에 거의 얼떨결에 일본에서 한국에 왔을 때의 정체성에 자신이
없어하던 것과 달리 올해에 한국에 돌아왔을 때의 우쿄는 철저히 일본인이 되어 있었다.
그런 우쿄가 우경은 일견 대견하면서도 한편으로 씁쓸하게 느껴졌다.
최근에 갖기 시작한 한국에 대한 호감과는 무관하게 우쿄로서는 자신이 일본인이라는
점에 더 이상의 의구심疑懼心이 없었다.
누구든, 특히 전주의 친가가 또다시 우쿄의 친 아버지가 한국인임을 들먹이며 자신에게
한국인임을 강요한다면 우쿄는 철저히 항전할 것이다.
하지만 친 아버지인 석주가 너무나 마음에 걸렸다. 단순히 친 아버지라서 뿐이 아니었다.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애정의 정도로서 원래의 아버지인 노조무와 친 아버지인 석주는
우쿄에게는 동격이었다.
어린 나이에 이미 한번 부모를 잃는 감당하기에 너무나 고통스러운 아픔을 겪었던
우쿄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한때 우쿄가 석주에게 자신의 정체성의 문제를 분명히 다짐했던 건 양쪽에 부모가 같이
병립하는데 대한 정신적인 혼란이 이유였다.
하지만 - 무턱대고 일본의 부모를 버리라고 강요하던 친가와는 달리-석주가 부모로서 키워준 은혜가 특히 크다고 가르쳐주며 우쿄의 정신적인 짐의 무게를
덜어주었기 때문에 우쿄는 더 이상 혼란해 하지 않고 원래의 부모(노조무, 카스미)를
마음속에 품으면서 친부모(석주, 우경)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쿄로서는 친 아버지가 노조무와 같이 소중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예의 우쿄의 마음에 걸리는 -그래서 가슴 아프게 사랑하는-사람이 초인종을 눌렀다.
<나왔소. >
<다녀왔어요.>
학교에서 퇴근한 석주와 같이 하교한 수진을 두 모자는 현관에서 맞이했다.
<이따 한 6시 반쯤에 선배님이 동창 분들을 데리고 올 거랬어요. >
석주는 우쿄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그래 알았다. 근데 여보. 손님이 더 오게 생겼는데? >
<손님이요? >
<김 중령이 국방부 본청에 볼일이 있어서 왔는데 내일 원대복귀하기 전에
좀 방문하고 싶다더라구. >
<어머, 그럼 지금부터 준비를 서둘러야겠네요. >
<응. 수고 좀 해주구려. >
잠시 뒤 우경과 우쿄, 그리고 엄마와 같은 리본으로 묶은 긴 생머리에 교복대신에
노란색 초 미니스커트 감색과 흰색이 가로로 번 갈아서 쳐져 있는 펌퍼짐한 티셔츠로
갈아입은 수진은 동네 시장의 마트에서 장을 보고 있었다.
오늘 올 손님이 워낙에 많으니 좀 살게 많아졌다.
카트를 우쿄가 끌고 우경이 살 것을 고르다 시식코너에서 수진이 우쿄의 입에 시식용
만두를 넣어주는 순간에 좀 떨어진 곳의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경 언니!! 수진양孃!! >
우경와 수진은 자기들을 부르는 맵시 있게 올려 묶은 머리에 단추가 뒤에 있는 블라우스
밝은 색 스커트 차림의 미모의 30대 전후의 여성을 보고 반갑게 웃음을 지었다.
<어머!! 현숙씨!! >
<숙이 이모! >
현숙은 우경들에게 다가왔다.
<아, 안녕하세요.>
<안녕, 우경학생도 같이 나왔구나?>
현숙은 우쿄의 예의 바른 인사에 살가운 미소로 답해줬다.
현숙에게 우쿄를 한국이름에게 부르게 한 것은 바로 우경이었고 그래서 우쿄도 이를
묵인했다.
현숙은 처음에 우쿄의 이름이 우경과 같다는데 다소 거북함을 느끼며 불렀었다.
그때의 에피소드는 우쿄에게 쓴 웃음을 짓게 만들었다. 그 때는 현숙이 우경과 절에서
만나 같이 집에 들어와서 대면했을 때였다.
<아. 얘 처음 보지? 바로 내가 말한 우리 아들 사오토메 우쿄, 집에서는 케타로라고 부르기는
하는데 자기는 일본이름은 부르기 힘들 테니까 그냥”우경이”라고 불러도 돼. >
<어머, 그 일본에서 온…… 정말 귀엽게 생긴 아드님이네요, 전 처음에 여자아이인 줄
알았는데. 근데 언니랑 이름이 같다는 게 좀... >
<어머, 그게 어때서? 괜찮아.>
이어서 우경은 우쿄에게 그녀를 소개해 주었다.
<この方はママの 友達である徐賢淑-ソヒョンスク-さんなの。 ママ友達だからこれから
スッギイモ- 淑叔母ちゃん-と呼んでよ。
(이 분은 엄마의 친구인 서현숙씨야. 엄마 친구니까 앞으로 보면 숙이 이모라고 부르렴.) >
처음 보는 아줌마에게 이모姨母라고 부르라니 좀 의아했지만 우쿄는 그녀에게 수줍게
목례를 했다.
수줍기도 하고 어색했던 우쿄와는 달리 그녀는 우쿄에게 상냥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우리 아들이 낮을 좀 가리고 수줍음을 잘 타는 편이라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약간 좀
무뚝뚝해. >
<남자애들이 원래 그렇죠. 근데 수진이는 좋겠구나? 이런 예쁜 남동생이 생겨서……>
<네? >
현숙의 뜬금없는 말에 수진과 우쿄는 실소했다.
<우경이는 이제 초등학교 4학년쯤 되어 보이는데? >
우경은 이제 알겠다는 듯 피식하다 까르르 하고 웃어댔다.
<어머머;;; 자기도 순간적으로 우리 케타로 나이를 착각했나 보네, 호호호;;; >
<어머나, 초등학생 아니에요? >
수진도 웃어 보이며 지적해 주었다.
<우리오빠는 한국나이로 16살이에요. 거기다 지금 고등학생인데……. >
그러자 현숙은 다소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어머. 진짜? 하도 어려 보여서;;;;;; 미안해요, 우경학생;;;;;>
<だ, 大丈夫で, いや, 괜찮습니다. >
초등학생으로 오해 받는 거야 어제오늘 일이 아니니 그리 화낼 일도 아니고 거기다 처음
보는 인상이 너무 좋은 예쁜 아줌마라 호감이 갔다.
전형적인 한국미인이라는게 이런가 싶었다. 그러고보면 외할아버지와 친구분들이
한국얘기를 할 때 친구분 중에 한명이 한국여자들이 일본여자들보다 훨씬 미인이 많고
더 예쁘다고 하던 걸 들은 적이 있는데 우쿄로서는 -우경과 수진은 차치하고 외가의
누나들과 이모들 때문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지만-지금은 학교에서 보는 동급생 이상의
누나들이나 이 "숙이이모"를 보면 그런 것도 같았다.
-하지만 좀 한국적인 분위기가 섞여서 그렇지, 순수한 일본여자인 우경도 미모에서 전혀
뒤지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나이가 더 많을 우경이 오히려 더 젊어보이기도 하고
-친엄마지만- 귀엽다는 느낌이라면 , 대신 현숙은 더 원숙하고 편안한 느낌이달까.....-
<어제는 고마웠어. 우경학생.>
<아, 아니에요.>
우쿄는 어제 수진과 같이 처음으로 현숙의 딸인 수진의 문병을 했었다.
학교내의 대학병원에 있어서 진작에 찾았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었다.
자신의 친 여동생인 수진과 이름이 같은 수진이는 우쿄에게 애처러움을 느끼게 했다.
이제 11살인 수진이는 정말 조그맣고 예쁘장한 여자아이인데 치료가 어려운 중병으로
시한부 인생을 겨우 이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수진이가 너무 가엾었던 우쿄는 중간에 나가버렸었는데 수진이 나갔더니 복도
벤취에서 울고 있었다.
그 옆에 앉았을 때는 또 수진은 안고 울기 시작했고 수진은 말 없이 우쿄를 감싸안아줬다.
또 며칠 전에는 수진과 우쿄가 “반딧불의 묘”라는 애니메이션을 같이 본 적이 있었는데
다 보고 나서 오빠에게 고개를 돌렸더니 우쿄가 얼굴이 새빨개진 채 눈물범벅이 되어
있어서 수진이 놀랐었다. 왜 그러냐고 묻는 수진에게 우쿄는 “수진짱”만 연발하면서
울기만 했는데 애니에 감정이 몰입되어 있던 우쿄가 어이없게도 애니 주인공의 여동생을
보면서 수진을 연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좀 어이가 없지만 오빠의 여린 마음과 사랑을 느꼈던 수진은 그때도 너무 슬프게 우는
오빠를 안아서 등을 토닥거리며 달래줘야 했었다.
오늘 학교에서 친구들이 각자의 오빠나 남동생 흉들을 보는 데- 수진의 친구 중에 하나는
추운 날 새벽에 자기 약점을 틀어쥐고 있는 오빠 심부름으로 음료수를 사러 갔다 오느라
한동안 감기로 고생해야 했다며 자기 오빠를 평하는 말이 “난 단언할 수 있어, 그 새끼는
인간의 탈을 뒤집어쓴 악마惡魔였노라고……”-끼게 된 수진이 얄미운 사촌 남동생들 흉을
실컷 보고 나서 오빠들이 그렇게 못되먹은 사람만 있지는 않다고 부연설명하며 우쿄
얘기를 했더니 반응들이 이러했다.
그녀들 중에 몇몇은 이미 우쿄를 본 적이 있었다.
<어머머!! 진짜야? 수진이 오빠는 정말 멋있는 오빠잖아?!!! >
<아휴~~~ 우리오빠도 수진이 오빠 반만 닮았으면 좋겠다! >
<얘, 수진아. 너네 오빠 좀 소개시켜줘 봐. 사귀고 싶어. >
중간에 초를 치는 말 한마디.
<얘 그래도 좀 조심해라. 일본사람들 중에 자기 여동생한테 “여동생을 상대로 연습”
한답시고 이상한 짓 하려는 변태들이 많대 거든? 너네 오빠도 일본사람이니까 너한테
그렇게 팔불출이면 가능성이 충분해!! >
<우리 오빠는 그런 사람 아냐!! 그리고 이 기집애야!! 니(네)가 일본사람들을 한 명이라도
보기나 했어? 하여간 요상한 헨따이 만화만 잔뜩 봐서는~~~~~>
실은 정작 수진 자신이 요즘에 석진에게 좀 소홀해진 대신에 우쿄에게 왠지 오빠 이상의
느낌으로 끌리는 기분이 들고 있었다.
수진이 오빠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이유가 -수진을 반 일본인이라며- 심술궂게
구는 사촌남동생들에게 좀 질려서였는데 -수진처럼 혼혈이지만 아예 일본인인- 우쿄는
충분히 오빠로서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은숙 언니!! 이제 가요!! >
순간에 우경들이 있는 방향으로 다소 어린 아가씨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현숙이 그에
답했다.
<응, 미선아. 잠깐만 기다려. >
우경과 수진은 의아해 했다.
<은숙? 현숙씨. 그게 누구야? >
그러자 현숙은 약간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 새로 일하기 시작한 곳에서 저에게 부르는 별명이에요. 저 애는 거기서 안 동생이구요. >
<그렇구나. 그래, 그럼 다음에 만나. 절에도 좀 나오구, 전처럼 우리 집에도 좀 놀러 와!! >
<그럴게요, 그럼 다음에 보자 수진양. >
<네, 수진이한테 건강 하라고 전해주세요. >
<그럴게, 그럼 우경학생도 다음에 봐요. >
<は, はい!! >
수줍게 목례를 하는 우쿄에게 역시 상냥한 미소를 지어준 현숙은 자신의 의동생이
기다리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에 시장을 마저 보고 집으로 향했다. 우쿄가 무거운 것은 남자인 자기가 들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려 억지로 혼자 든 짐들은 좀 너무 무겁지 싶었다.
< あまり無理するなよ。(너무 무리하지 마.) >
결국 중간에 우경과 수진이 우쿄가 몽땅 들고 있던 네 개의 보따리 중에 하나씩 다시
맡아서 들었다. 그래도 속으로 약한 체력에도 자기책임감에 충실하고 어떻게든 묵묵히
자기 역할을 하려는 우쿄가 든든하게 느껴져 이래서 아들/오빠가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착하자마자 두 여자는 음식준비를 시작했고 막판에 우쿄가 식탁 위의 휴대용 버너에서
한국식 부침개를 부치는 일을 맡았다.
< お兄ちゃん, ブチムゲすごくよく燒くのね (오빠, 부침개 엄청 잘 부치네?) >
우쿄의 부침개 부치는 솜씨를 본 수진의 감탄에 우쿄는 신명이 나 있었다.
< 學校 祭り時. お好み燒のウっちゃん と言えば認めやで 。
(학교 축제 때 “오코노미야키의 웃짱”이라고 하면 알아줬걸랑♡ >
우쿄의 입에서 오사카벤大阪弁-관서 사투리-까지 나오자 두 모녀는 웃음을 터트렸다.
수진도 우쿄가 읽고 있던 일본만화로 더 깊숙이 일본어를 배우면서 간단한 오사카벤도
약간은 알고 있었다.
< ほほほ~~~~~何のマンガ主人公みたい!!!(호호호~~~~~~~무슨 만화주인공 같애!!!) >
<本眞に? (참말로?) >
두 모녀는 아주 자지러졌다.
<뭐가 그리 재미있어? >
주방에서의 웃음소리에 역시 손님 맞을 준비를 하던 석주가 주방을 들여다 봤다.
이윽고 초인종 소리가 들려서 우경과 석주가 마당으로 나가 격식을 갖춘 정장
차림의손님들을 맞았다.혁과 영진이 먼저 석주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
<안녕하셨습니까, 선상님. >
영진은 동창들을 대표해 큼직한 꽃다발을 석주에게 건넸다.
<어서들 와라. 모두들 참 10년 만에 보니 훤칠한 청년이 다됐구나? >
이어서 12명 안팎의 혁과 같은 나이의 남녀가 석주에게 반갑게 인사를 하고 악수와
포옹을 했다.
그 중에 미키도 끼어있었지만 그녀는 혁을 따라왔을 뿐이다.
애초에 남학교출신이었던 석주의 제자일행 중에 미키 이외에 여자가 3명 섞인
이유는 기혼자旣婚者도 있어서 배우자들을 데려온 때문이다.
개중에는 심지어 이미 한 아이의 아버지도 있었다. 혁도 슬슬 결혼계획이 없냐는
질문을 받는 중이었다.
영진도 주희를 데려오고 싶었는데 주희는 회사 회식이 있어 그러지는 못했다.
모두들 현관으로 들어서서 석주의 안내로 자리에 앉았다.
<아, 센빠이, 센세先生. 어서 오세요. >
우쿄의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린 혁과 미키는 수진과 함께 음식 쟁반을 들고
주방에서 나오는 우쿄의 모습을 보고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체격에 비해 무척 큰 하얀색 남방을 추리닝 밖으로 드러내서 입은 옷차림에 또 자기
몸에 큰 -하얀색에 레이스장식이 달린 에이프런을 착용한 우경과 수진과는 달리 별
다른 장식이 없는- 에이프런을 착용한 우쿄의 모습이 무척 귀엽게 느껴졌다.
두꺼운 한쪽 어깨 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혁은 웃으면서 우쿄를 자기 옆에 오게 한 뒤 일어서서 동창생들에게 소개했다.
<이 친구가 내가 늘 말했던 사오토메 우쿄군이야. >
이미 우쿄와 친한 영진을 제외하고 우쿄를 처음 보는 혁의 동창-석주의 옛 제자-들은
우쿄의 모습에 신기하다는 표정이였다.
<히야~~~~~~~~~~~ 야가 대학생 맞나? 아닌 것 같은데? >
<내가 말했다 아이가? 처음에는 야 보고 민혁이가 일찍 사고 쳐서 낳은 아들네미인 줄
알았다고 말이다~~~~~~~~~ >
영진의 너스레에 거실 안은 폭소의 도가니였다.
석주도 혁에게” 야 그거 진짜냐” 하고 웃으면서 물었다.
<근데 진짜 머스마가 너무 이뻐놔서 가시나 같데이. >
<난 쪽발이들은 광대뼈하고 덧니가 툭 튀어나온 문어대가리들만 생각했는데 저렇게
예쁜 애도 있었네? >
<자기야~~ 우리도 저렇게 예쁜 남자아이 낳자~~~♡ >
<흥!! 난 무조건 딸 낳을 거야!! >
<그러고 보니 선생님 따님도 무척 예쁘네요. >
대략 10살 위의 형과 누나들-이라기엔 나이가 많은-의 칭찬과 놀림에 우쿄와 수진은
얼굴이 빨개졌다.
석주로서는 자식들이 생김새로 칭찬받는 게 뿌듯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자신도 형제들도 제법 미남들이라는 말을 들어왔지만 둘 다 외모상 외탁이 심하고
특히나 우쿄는 아들임에도 여자같이 생긴데다 일본 색이 짙기 때문이다.
자리에 앉으면서 우쿄를 옆에 앉힌 앉은 혁은 우쿄의 한 손을 잡아 감싸 쥐었다.
잠시 뒤 현관의 초인종소리가 들렸고 석주가 잠시 마당으로 나갔다 석주보다 한
서너살 아래의 정복正服차림의 현역 육군 중령 한명과 같이 들어왔다.
혁은 석주와 같이 들어온 장교를 보고 갑자기 일어나 거수경례를 했다.
<충성!!! >
<엇!! 강민혁 중위中尉? 아니, 귀관貴官이 여기는 어떻게? 하여간 반갑네!! >
석주는 혁이 한때의 자기 부하에게 경례를 하고 그가 혁에게 반갑게 아는 체를
하자 의아해 했다.
<아니, 김중령, 자네가 우리 민혁이를 어떻게 아는가? >
<예, 강민혁 중위는 재작년에 소관의 휘하 소대장이었습니다. >
<그런가? 민혁이, 아니 강 중위는 재직했던 고등학교에서 가르쳤던 제자라네. >
<그렇습니까? 이런 기막힌 인연이 있었군요? 강민혁 중위, 귀관의 은사는 본관이 첫
임관했을 때 모셨던 본부중대장이셨네. >
다들 세 남자의 인연을 보고 놀라는 모습이었다.
즉 석주는 군대시절 김 중령의 상관이었고 전역 후 두 번째로 부임한 학교에서 혁을
가르쳤다. 혁은 대학 졸업 뒤 장교로 입대해서 김 중령의 휘하에 있었던 것이다.
실은 우쿄는 친 아버지인 석주와 좋아하는 선배인 혁이 퇴역 군 장교였다는 것도
오늘 처음 알았다. 한국남자들은 의무적으로 군복무를 해야 하고 제대 후에도
예비군으로 일년에 몇 번은 군사훈련을 받아야 한다는 것도 얼핏 이해가 안 가고
있었던 참이었다.
우쿄가 아는 세계정세 상식으로는 한국의 군대는 실전용으로 잘 훈련된 60만
대군으로 북조선과 일본열도를 위압하고 있는 일본에는 상당히 위협적인 존재이다.
-일본이야 한 해에 세계3위의 국방비를 먹어 치우는 자위대라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공무원 집단은 있지만 하여간 군대는 없으니까……-
더구나 우쿄로서는 일본과 한국 근 현대사를 스스로 배우면서 “군대란 한 사회
안에서의 최강의 폭력조직”이라는 명제를 유감없이 발휘하기라도 하려는 듯 2차
대전 때 일본군이 침략전쟁을 일으키면서 저지른 난징南京 대학살이나 종군위안부
같은 만행도 충분히 알고 있었고 한국군부도 규모만 틀렸지 거의 비등한 횡포로
군사독재를 자행하면서 베트남을 상대로 침략전쟁을 저질렀던 사실을 배운 바 있는데다
특히나 도쿄까지 쳐들어왔던 막냇삼촌이라는 인간 때문에라도 한국군에 대한 인식이
무척 나빴던 참이었다.
석주와 혁이 그런 한국군대의 장교였다니 우쿄로서는 좀 놀랐다.
-그날 이후로 한국군인을 달리 보게 되었다-
김중령은 우쿄에게 눈길이 갔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잘 구별이 안가는 얼굴모습 때문에라도 그랬다.
그제서야 석주는 아들을 소개했다.
<아, 전에 얘기했던 우리 아들 사오토메 우쿄. 우경이네.>
김 중령은 우쿄의 일은 진작에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만나기는 처음이었다.
사진은 봤지만 무척 어렸을 때 찍은 줄 모습인 줄 알았는데……
<아 그………………. 근데 지금 18살 정도여야 하지 않습니까? >
<한국나이로는 18살이 맞아, 좀 어려 보여서 그렇지. >
<허허허~~~ 이거 좀 어려 보이는 정도가 아닙니다만…. 반갑네. 들었다시피
김덕령 중령이네. 자네 얘기는 많이 들었어. >
김 중령이 쾌활하게 청하는 악수를 우쿄는 부끄러워하면서 한동안
머뭇거리다가 석주의 “인석아, 뭐해? 하는 채근에 공손히 양손으로 응해주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사오토메 우쿄입니다. >
김중령의 입에서 살짝 쓴 웃음이 흘렀다. 내심 우쿄의 입에서 사오토메
우쿄早乙女宇京라는 일본 이름 대신에 권 우경權宇京이라는 한국이름이
나오길 기대했다.
석주에게 들어서 사정은 알고 있고 우쿄의 입장도 이해는 하지만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애국심으로 충만한 대한민국 군인인 그의 감상으로는 기왕이면 소년이
“자신의 -부계상의- 민족적인 뿌리에 눈을 떠서” 친 아버지를 따라 한민족의
원수怨讐나라인 일본을 버리고 “진정한 조국인 자유대한自由大韓”의 품으로 안기는
감동적인 해피엔딩이 연출된다면 얼마나 멋있을까, 하고 생각해서였다.
실은 우쿄는 그의 쓴 웃음의 의미가 가끔 보는 친 아버지 친구들이나 동료교사들
-재작년에 3개월 동안 우쿄의 선생들이기도 했었고 이제 석주와 우쿄의 관계를
완전히 알게 된-을 통해 이미 익숙한 것이고 모처럼 늘기 시작한- 100점 만점에
다시 돌아왔을 때의 -70점에서 이제 간신히 30점쯤까지 끌어올린- 한국에 대한
호감 정도를 한 10여 점씩 깎아먹는 것이어서 짜증이 나는 것이지만 무시했다.
처음 보는 한국군장교의 애국적인 로망 따위는 쓸데없는 참견이다.
하긴 아직도 같잖다는 표정을 지으며 윽박지르는 인간도 있으니까 이건
그나마 양호했다.
친 가족과 무관하게 이제 조금씩 정이 들기 시작하긴 했지만 한국은 엄연히
외국外國이었던 우쿄는 작년의 3개월간의 한국생활 동안 문자 그대로 “일제강점기
日帝强點期”를 경험했기 때문에 솔직히 친 가족들-석주, 우경, 수진-만 아니었으면
한국이라는 나라는 다시 오고 싶지도 않았고 정말 꼴도 보기 싫었었다.
아예 친 가족들을 -친가와 한국에 대한 보복심리로- 꺼꾸로 일본인으로 귀화시켜
일본으로 데려올 궁리까지 가끔 할 정도였다.
김중령이 미리 석주의 옆에 지정된 자리에 앉은 뒤 술잔을 기울이며 담소가 이어졌다.
< 저희 선생님께서는 군대에서 어떤 장교셨습니까? >
<사관학교출신보다도 더 유능하고 훌륭한 군인이셨네. 아 우리 강 중위도 솔직히
그대로 제대시키기가 아까운 인재였는데 말야. 권 중대장님도 강중위도 아마 그대로
말뚝 박았으면 꽤 빠른 시간에 별을 달았을 것이고 군에도 큰 도움이 되었을 걸? >
<민혁이가 말인가? >
<예. 대대단위로 각개전투 훈련을 한 적이 있는데 강중위는 자신의 소대에는 전사자
한 명 안내고 다른 소대를 궤멸시킨 적이 있었을 정도니까요. >
<호~~ 나도 그렇게는 못했는데…. >
석주는 자신의 제자에게 기특하다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래서 민혁이가 우리의 호프 아닙니까? >
한 동창의 너스레에 쾌활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우쿄는 전사자戰死者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려서 혁에게 물었다.
<진짜 군사 훈련하다가 사람이 죽나요? >
<아니. 설정이 그렇다는 거지. 진짜 그런다면 큰일나게? >
안심하는 모습의 우쿄에 혁은 약간 웃긴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권 중대장님께서는 어떤 선생이셨나? >
그 말에 다들 조금 키득댔다.
<아니, 인석들이. 왜들 웃고 난리야? >
<우리 선생님, 거의 구타교실에 나오는 변형태 선생 수준이었지 않냐? >
<말도 마라, 야. 정신단련 봉 1호 기억나지? 나 그걸로 선생님한테 한방 맞고 거의
저승 문까지 갔다 왔다는 거 아니냐? >
<이 재영이, 글마 첫날에 선생님한테 개기다 아주 개 박살 난 거 기억나나?
그때 선생님께서 글마 구두발로 밟으시며 하신 말씀이, "이 새끼는 개조가
필요한 녀석이군" 이였쟤? 그때 선생님, 지옥에서 온 수라대왕 같았었다.
아휴~~ 재영이 글마 중학교 때 선생들도 두 손 두발 다 들던 개또라이에 꼴통새끼
였그만, 지금도 그때 생각하면;;;; >
일동 폭소를 터트렸다. 우쿄는 작년에 한국의 고등학교로 편입학 했을 때 자기만 빼고
반 전원이 석주에게 무려 야구배트로 체벌 받았던 일이 떠올라 등골이 오싹했다.
일본에서는 벌 청소나 복도에 서있기, 더 가봐야 가볍게 쥐어 박히기 정도는 봐왔지만
그런 체벌은 처음 보는 것이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기절해 양호실로 업혀갔었을 만큼의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걸 이 사람들은 아주 즐거운 추억인양 말하고 있는
것이다. 가치관에 혼란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매 맞는 게 전혀 즐거운 일이 아닌데……
석주는 얼굴이 벌개져서 헛기침을 했다.
<녀석들, 내가 그렇게 심했든? >
<에이~~ 그렇지만 도 저희가 그래서 이렇게 사람 되었다 아임까? 그때 가장 구제불능에
열등생들만 모았던 반이었는데…… >
<우리 어머니께서 지금도 나한테 말씀하시잖아? 선생님 아니었으면 내가 대학은 꿈이나
꿨겠냐고 말야…. >
혁은 김중령에게 설명했다.
<좀 엄하셨던 건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다른 선생님들 보다 저희에게 책임감을
가지고 이끌어주셨지요. 속정도 깊으셨고 저희들에게 아무런 사심 없이 공명정대하셨고…… >
<하긴 그래서 군대에서도 부하장병들이 호랑이 중대장이라며 무서워하면서도
존경했다네.
그렇군, 강 중위가 군에 있을 때의 모습도 권 중대장님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
많았는데 그 스승에 그 제자였던 것이군. >
좀 민망해진 석주는 화제를 돌렸다.
<아참, 그러고 보니까 재영이, 그 녀석은 소식 좀 아는 사람 있냐? >
돌연 거실 안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나머지는 그런 녀석은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듯한 표정이었고 혁과 영진 두 사람만
말하기 좀 그렇다는 표정이어서 석주는 의아했다. 겨우 혁이 간단히 설명했다.
<실은 그 녀석 계속 재수만 하다가 몇 년 전에야 대학에 겨우 입학했는데 부정
입학이어서 퇴학당했습니다. 그 뒤로는 저도 잘…… >
물론 그 뒤에 학교주변에서 추한 행동을 하고 급기야 우쿄에게 성폭력을 저지르다가
오히려 우쿄 등에게 두들겨 맞고 경찰에 체포당했다가 도망 갔다는 얘기는 뺐다.
석주는 한숨을 쉬면서 표정이 일그러졌다.
<하여간 그 새끼…… 결국 제대로 바로 잡지 못하고 다른 학교로 전학시킨 게 늘
마음에 걸렸었는데…… >
그는 석주에게도 지금까지 겪은 제자들 중에 가장 골칫거리였고 그에게도 석주는
가장 무시무시하고 끔찍하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아니 그렇게 끈덕질 수가 없었다. 본인으로서는 차라리 석주가 퇴학이라도 시켰더라면
좋았겠지만 석주의 교육방침에 퇴학이란 게 없다 보니 -자신을 의지의 한국인이라고
자부하는-석주에게 제대로 걸려서 무려 4년이나 엄혹嚴酷한 교육에 시달리다 도망치듯
다른 학교로 전학 가서야 겨우 고등학교 입학 5년 만에 간신히 졸업장을 -전교 꼴찌의
성적으로- 손에 쥘 수 있었다. 그의 아버지라는 작자가 자기 아들 말만 듣고 석주에게
처음에는 돈-촌지-으로 회유하다가 되려 석주에게 심한 야단을 맞고 자기 지위를 이용해
협박을 하고 급기야 폭력교사라는 오명까지 뒤집어 씌워 자기 교회 신도들을 선동해
학교 앞에서 시위까지 시켰다가 나중에 석주에게 사죄했던 일까지 있었다.
그러고 그는 결국 2년 동안 재수하고 자기 아버지의 인맥과 돈으로 간신히 부정
행위로 대학에 들어가서 4년간 유급과 사고를 거듭한 뒤 결국 올해에 간신히 3학년에
진급하자마자 재학기록이 전부 삭제 당한 채 퇴학을 당한 것이다.
대학으로서는 학교의 역사상 최악의 오점을 남겼던 사건이었다.
잠시 조용해진 분위기를 다시 올리기 위해 혁이 입을 열었다.
<아, 선생님. 사오토메군이 학교의 음악동아리에 있습니다만, 최근에 자신이 직접
작곡한 음악을 동아리에서 선보여서 호평을 받았습니다. 케이, 어떻니. 한번 실력을
보여 드리는 게? >
갑자기 혁이 아버지 앞에서 음악을 연주할 것을 권하자 우쿄는 당황했다.
<너 작곡도 하냐?>
<.... 조금 요. >
석주는 할 말을 잊었다.
<그럼 한번 보여줘봐. 괜찮아.>
석주도 부끄러워하는 우쿄에게 음악을 연주해 볼 것을 종용했다.
그래서 우쿄는 거실 한 켠의 피아노에 앉으며 혁에게 말했다.
<이건 새로 만든 거예요. 실은 전의 그 곡은 한국에 오기 전에 작곡했던 것이거든요. >
우쿄는 본래의 아버지인 노조무에게서 음악을 배웠다. 노조무는 관심을 보이는 아들과
놀아주는 감각으로 음악을 가르쳐줬지만 사뭇 진지했던 우쿄는 노조무의 사후에 공부에
열중하는 틈틈이 음악을 듣고 섭렵하면서 배워왔고 음악이든 시 짓기든 노조무의
신비주의의 영향을 강렬하게 받았던 것이다.
석주도 아들이 직접 쓴 시는 읽은 적이 있고 한번 우쿄가 쓴 시를 일어원문 그대로
복사해서 보여줬던 문학작가 친구가 극찬하는 걸 보고 문학가로서의 재능은 인정하되
아들의 신비주의가 석주가 알고 있던 한국의 국문학세계와는 너무 판이해서 이해가 안
갔지만 마냥 어린애 같다고만 생각했던 아들의 실력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어서
기특하다고 느낀데다 그 속내를 엿볼 수 있어서 아버지로서 연민을 느끼게 만들었던
것이다.
살짝 그 얘기를 했던 김중령과 석주는 피아노 치는 것을 듣자니 아들이 역시 제법
한다고 느꼈다.
<녀석, 이왕이면 남자답게 명랑하고 씩씩한 곡을 쓸 것이지….. >
단 -석주의 경우 아내와 같이 클래식이나 가곡을 듣는 것 외에 - 음악을 그리 잘 아는
게 아니어서 본인들은 그 정도 이상은 생각 못했지만 그 외 사람들의 넋을 잃은 표정을
보고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당황했다.
<뭐, 뭐야, 다들? >
<허허허, 확실히 뭔가 색다릅니다만…… >
석주와 김중령 외에는 혁과 미키가 듣기에 우수에 젖은 음울한 분위기는 어느 정도
가셨지만 역시 몽환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섬세한 음률에 압도되고 있었다.
아니 석주와 김중령 등 다소 무감각한 남자 3~4명을 제외하고 대부분 우쿄의 음악에
심취되기 시작했고 이윽고 연주가 마친 뒤에도 최면에 걸린 듯 몽환의 여운에서 헤어나질
못하다가 무의식적으로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브라보!!!!!!!!!!!!!!!!!! >
<멋있네!!!!!!!!!!!!! >
무감각한 남자 3~4명도 분위기에 휩쓸려 박수를 쳤다.
여자 한 두 명은 남편은 팽개쳐두고 다가와 우쿄를 안아줬다.
<그럼 선생님, 다음에 또 찾아 뵙겠습니다. 오늘 정말 즐거웠습니다.
<그래. 다음에도 또 놀러 들 와라. 나도 간만에 옛날 제자들을 보니 반가웠다. >
<우리 가기 전에 “스승의 은혜” 노래를 합창해야 하는 거 아이가? >
<됐다 인석아, 민폐야! 마음만은 고맙게 받아주마. >
모두들 거나하게 취하고 즐거움과 석별의 아쉬움이 뒤섞인 마음으로 작별의 인사를 했다.
김중령도 석주에게 경례를 하면서 군대식으로 작별인사를 했다.
<중령 김덕령, 원대복귀를 저의 전임상관이신 권석주 대위님께 보고 드립니다, 충성!! >
<충성!! 다음에 보세!! >
<아참, 강중위와 아드님께도 작별인사를….. >
한 켠에서 -몇몇 미성년자 보호법 위반범죄자들의 부추김으로 맥주 몇 잔이 들어간-
우쿄가 혁에게 다소 어리광을 부리듯 떼를 썼다.
< 先輩, 今夜私の家で眠ればならないですか。
(선배님, 오늘밤 저희 집에서 주무시면 안돼요?) >
<그, 글쎄? 폐가 되지 않겠니? >
혁은 좀 당황했다. 술이 좀 들어가자 알코올기운으로 콧소리까지 내면서 어린애같이
응석을 부리는 모습이 평소의 우쿄와는 전혀 다른 처음 보는 모습이라 당황스러웠고
무척 귀엽기도 하고 빨갛게 상기된 표정이 왠지 요염해 또다시 흥분시켰지만 그렇다고
스승에게 폐를 끼칠 수야 있나 해서였다.
우쿄의 모습이 남자답지 못하다고 생각해서 못마땅해하는 김중령과 같이 그걸 본 석주는
혁에게 제안했다.
<그래, 오늘 자고 가라. 나하고 한잔 더하게. >
<하지만….. >
<괜찮아, 괜찮아. >
<그렇다면 오늘 폐 좀 끼치겠습니다. 미키씨 혼자 갈 수 있겠어? >
석주에게 대답한 후 자신에게 물어오는 혁에게 미키는 괜찮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우쿄와 혁이 한 집에서 같이 잔다는 게 걱정스러웠다.
<걱정 말그라, 마. 내가 같은 방향인께네. 내가 에스코트 해주면 된다 아이가? >
영진이 미키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호기를 부리며 나섰다가 미키에게 손등을
꼬집혔다.
<그래, 좀 부탁한다. 그럼 미키씨, 연락할게. >
미키는 고개를 끄떡였다.
그 뒤 혁과 김중령이 거수경례를 했다. 석주는 혁의 모습에서 비록 예비역이지만
절도 있는 군인정신으로 충만한 청년장교의 기상이 느껴졌다.
석주가 단골로 가는 독일풍 호프집 “비스마르크”에서 독일 식 소시지에 자우어크라우트
(독일 식 양배추 장아찌)를 안주 삼아 흑맥주-다른 호프집에서 나오는 것과 같은 그냥
맥주에 조그마한 병 흑맥주를 타서 나온 가짜가 아닌 진짜 흑맥주가 나와서 석주의
마음에 들었던- 를 기울이며 2차를 시작한 스승과 제자의 술자리는 점차적으로 우쿄에
대한 담소로 기울였다.
<어이구~~ 민혁이, 너에 비하면 우리 우경이는 그냥 애기야, 애기. >
<선배인 제가 보기에는 의젓하고 어른스러운 면도 있습니다. >
<그러냐? >
석주는 혁에게 우쿄의 학교생활을 들을 수 있었고 혁은 우쿄의 어린시절등을 많이
들을 수 있었다.
실제로 거의 상처뿐이었던 재작년과 달리 이번의 한국적응은 비교적
전면수정 2010년 2월 21일
혁은 여전히 개운찮은 표정으로 집에 들어서자 옷을 갈아입고 잠자리에 들었다.
미키의 집에서 샤워를 하고 온 터라 따로 씻을 필요를 못 느꼈다,
손에서 노 브래지어 상태에서 차이나 드레스에 싸여 있던 그녀의 풍만한 유방의 감촉이
아직도 떠나지 않고 있었다. 미키는 물론 옛날에는 연인人인 적도 있긴 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섹스라는 게 그렇게 가볍게 생각할 수 없는 행위이지만 가끔 하는 뜨거운
성관계는 친구 사이의 재미있는 놀이 정도라는 느낌이고- 지금은 여자이기 전에
진실하고 현명한 친구이다.
하지만 오늘 우쿄가 연주한 음악을 들으면서 살짝 눈물을 보인 거나 작정하고 혁을 꼬시기
위해 몰래 방에서 브래지어를 푼 게 생각나자 미키가 무척 사랑스럽고 귀여운 여자라는
생각이 들어 혁은 웃음이 나왔다.
여자의 아름다운 점은 귀염성과 상냥함, 여린 성품과 따뜻한 모성본능일 것이다
남자가 여자를 사랑해줘야 할 이유가 그런 것들이지 싶었다.
평소에 심지가 굳고 다소 괄괄한 데가 있어서 다소 남자 같다는 생각까지 들던 그녀지만
내심 여자로서의 그런 심성을 깊숙이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녀가 -삐뚤어진 욕구까지는 정당화해주진 않았지만-최소한 혁이 우쿄에게 느끼는
감정만은 긍정적인 태도를 취했던 것이다.
차라리 미키가 자신의 일탈된 심리를 질타하고 미친놈이라고 욕을 하고 정신차리라고
야단을 쳤다면 명쾌한 기분에 속이 개운하기라도 했을 터였다.
그런데 정사情事 전의 대화는 웃기게도 입장이 완전히 바뀌었던 것이다.
그래서 더 혼란스럽고 개운치 못했던 것이다.
심지어 그녀 자신도 여자와 가끔 동성연애를 하고 무엇보다 자기보다 한참 어린
우쿄에게 여성으로 끌릴 때가 있다니 의외였다.
실은 그 꼬마가 정작 본인이 여자한테 무관심하다시피 해서 그렇지, 의외로 전부 연상의
누나들인 같은 학교의 여대생들에게 은근히 인기가 있다는 소문이다.
아니 심지어 몇몇 남학생들조차 같은 남자인 우쿄에게 관심을 보이는 모양이었다.
하긴 혁 자신도 우쿄의 처음에 본 어려 보이고 약해 보이는 여성적인 분위기 때문에
끌려왔긴 했지만 여자들-그것도 최소한 2년은 누나들인- 에게도 그 소년이 무척
끌리는 스타일인 모양이다.
무척 어리고 귀여운 연하의 남자아이라는 점이 여성에게는 누나로서의 모성본능을
유발시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자라고 무조건 남성적인 남자에게만 매력을 느끼는
게 아닌 것인지도 모른다.
더욱이 단정하고 머리숱이 많은 칠흑 색의 생머리와 거의 완전히 하얀 색의 곱고 엷은
피부와 작고 가냘픈 몸매, 안경을 착용한 모습이 인상적인 우쿄는 확실히 보기 드문
미소년이다, 아니, 생김새 만으로는 다소 털털하고 보이쉬한 스타일의 미소녀美少女라고
해도 좋을 얼굴이지만 안 그래도 어린 나이보다 더 어려 보이는 탓에 오히려 아기자기하고
수수해서 청순하면서 귀여운 인상印象이다.
우쿄가 여자였고 미키와 같은 나이였다면 무척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전반적으로 풍기는 분위기도 좀 촌스럽다 싶을 정도로 세련미와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단정하고 검소한 옷을 제법 맵시 있게 입는 걸 좋아하고 그런 게 다소 냉정하고 고지식한
모범생의 이미지와 함깨 우쿄의 미모美貌를 은폐隱閉하는 경향을 보이지만 한편 -오히려
은근히 여성적이어서- 우아하고 기품 있어서 어울렸다.
화려함이나 과도하게 튀는 것과는 전연 무관한 그런 모습이 보는 사람들에게 신뢰감과
편안함을 주었다. 앉아 있을 때의 내성적이고 다소곳하고 말이 없어서 조용하고
무표정한 태도는 신비로움까지 느끼게 하고 있었다.
우쿄가 풍기는 전반적인 분위기가 남성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는 게 사실이다.
오히려 동성同性의 친구 같은 모습도 의외로 여자에게 끌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거기다 음악을 연주하는 모습의 우쿄는 충분히 멋있기도 했다.
남성이 여성에게 낭만적인 매력을 느끼게 할 수 있는 것 중에 하나가 멋진 음악을
멋지게 연주 할 수 있는 것인데 우쿄는 심지어 작곡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아주 어른스러운 원숙한 솜씨로……..
몽환적인 우수에 찬 아름다운 선율이 아직도 귀에 선했다.
(……….만약에 내가 케이와 같은 나이의 여자라면 그 녀석에게 끌렸을까? )
생각하는 게 지겨워진 혁은 남아있는 알코올의 기운에 졸리기도 하고 해서 잠이라도
청하려 침대 옆의 나이트 스텐드를 끄려고 손을 뻗으려다 입고 있는 남성용의 잠옷용
유카타에 눈길이 갔다.
늘 젠틀맨이라는 평가를 받는 혁이지만 잠을 잘 때 잠옷을 입는 버릇만은 고등학교 때
집에서 ?겨나다시피 해서 마산으로 내려갔던 이후에 군복무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다.
겨울에조차 남아도는 젊음의 열기 때문인지 잠옷이 거치적거려서 거의 알몸으로 자는
게 버릇이 돼버린 것이다. 사실 그게 혼자 자는 거라면 크게 흉 될 것은 아니다.
거기다 그런 수면습관이 건강에 좋다고도 하고……. 이 잠옷용 유카타는 저번에 우쿄가
어머니의 기일이라고 일본에 갔다 왔을 때 선물한 것이다. -유카타라고는 해도 한국의
생활한복 같은 감각이라 그리 입는 게 까다롭지 않고 세탁도 비교적 편했다. -
물론 애초에 한국인인 혁이 기모노 따위를 입을 이유가 없었다.
일본인인 우쿄를 좋아하지만 혁도 기본적으로 일본이라는 나라를 민족주의적인
관념으로 극히 싫어하는 전형적인 대한민국 남자이다.
근데 한번 입어보고 의외로 편하게 느껴져서 이기도 하지만 우쿄의 성의를 무시할 수
없어서, 아니 우쿄가 선물한 거라 소중하게 느껴졌고 잘 때 우쿄를 품에 안고 자는 기분이
들어서 자주 그걸 애용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예전에 미키와 뜨거운 관계였고 지금
우쿄를 만난 이래 일본이라는 나라가 최소한 사람들은 생각만큼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우쿄는 진작에 단순히 수재이고 미소년이라서 뿐이 아니라 착실하고 온순한 성격
등으로 학교에서 좋은 평판을 얻고 있었고 혁도 그를 통해 알게 된 학교 안의 일본인
유학생들 중에 그리 기분 나쁜 녀석은 보지 못한 것 같았다.
물론 우쿄가 사람을 좀 가려서 사귀는 경향이 있어서일지도 모르겠지만………
우쿄는 미나와 함께 지하철 열차에 승차해 나란히 앉았다.
퇴근시간이라서 인지 열차 안은 좀 혼잡했다.
<고마워, 케이. 누나인 내가 데려다 주려고 했었는데…. >
<아니에요, 이래 보여도 제가 남자니까 숙녀를 집까지 보호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요? >
제법 씩씩하게 말하는 우쿄가 미나는 귀엽기도 하고 왠지 듬직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잠시 미나가 휴대전화로 조용히 통화하고 났더니 우쿄가 살짝 잠이 들어 있었다.
꾸벅꾸벅 조는 모습이 귀엽다고 느낀 미나는 미소를 띄며 우쿄의 뺨에 키스를 했다.
그리고 앞에 왠 할머니가 힘들게 서 있어서 자리를 양보해 드리고 선 미나는 잠시
후에 자신의 몸을 더듬거리는 손길을 느꼈다.
(이사람, 치한? )
놀란 미나가 치한의 정체를 살폈더니 자기 할아버지 뻘 되는 머리가 벗겨진 쭈글쭈글한
노인이었다. 노인은 미나가 흘겨보는데도 천연덕스럽게 미나의 미니스커트 안으로 마른
나뭇가지 같은 손을 침범해 그녀의 늘씬한 안쪽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그 순간에 노인의 못된 손을 낚아채는 손아귀가 있었다.
미나와 노인이 놀라서 본 그 손아귀의 주인은 남도 아니고 아까까지 자리에서 졸고 있던
우쿄였다.
<이게 무슨 짓이세요? >
<… 네 이놈. 이게 뭐 하자는 짓이냐? >
처음에 놀라던 노인은 이윽고 적반하장賊反荷杖 격으로 우쿄에게 화를 냈다.
<우리 누나한테 무슨 짓을 하는 거냐고 물었거든요? >
<이놈아. 내가 뭘 어쨌다고 젖비린내 풀풀 나게 어린 놈이 늙은 할애비한테 행패야?
네놈은 애미애비도 없어? >
우쿄는 전혀 위축되지 않고 노인을 차갑게 응시했다.
<몰라서 물으세요? >
<할아버지가 저한테 치한 짓을 했잖아요? >
미나가 극히 담담하게 노인에게 말했다.
노인은 미나는 무시한 채 가장 어리고 만만해 보이는 우쿄만 노려봤다.
<어허~~~ 이놈이!! 어린 놈이 노인을 공경할 줄 모르고 어디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난리야!! 이 천하에 못 배운 녀석 같으니!! 이 손 못 놔? >
노인은 어른의 권위를 내세워서 어떻게든 위기를 모면하려 들었다.
어디든 이런 인간들이 꼭 있다. 나이 값도 못하는 주제에 어른의 권위를 내세워
아랫사람들을 핍박하고 부당한 강요를 하는 인간들. 불행한 것은 실제로 이런 어른들이
태반이라는 것이다. 우쿄가 아는 한 진정한 어른은 일본의 외가 어른들과 한국의 친부모인
석주와 우경. 그리고 선배인 혁 정도였다. 우쿄는 그 노인이 마치 전주에서 우쿄에게
한국국적을 강요하며 억지를 부리던 영감들을 연상시켰다.
새삼 전주의 노인들에 대한 적개심이 되살아난 우쿄는 -자신이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모르게- 노인을 꽉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 うるせぇ!! (시끄러워!!) 하여간에 영감님이 “우리 누나”한테 한 짓에 어울릴 곳에 같이
가시죠. 다음 역에 내려서 한국 경찰한테 가자구요!! >
미나는 우쿄의 전혀 의외의 매서운 모습에 놀랐다.
미나로서는 우쿄가 화를 내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인데 평소의 온순한 사람이 화나면
무섭다는 격언으로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화를 낸다고 해도 남들과는 달리 전혀 흥분하지
않는 한기寒氣가 도는 극도의 차가움이 더 무섭게 느껴졌다.
차갑고 매서운 모습은 여지없이 적을 칼로 베기 직전의 냉혹한 일본 사무라이를
연상시켰다.
그건 그렇고 미나는 지금껏 적당히 거리를 두면서 약간 냉정한 게 꼭 반쯤 길들여진
고양이 같았던 우쿄의 “우리 누나”라는 말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이놈이 그래도…………… >
노인은 기가 안 죽으려고 계속 성질을 부렸지만 우쿄의 얼음장 같은 차가운 태도에 왠지
잘못 건드렸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때 열차가 서고 문이 열리는 순간에 노인은 우쿄를 밀치고 차 밖으로 튀어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우쿄는 그 노인을 악착같이 물고 늘어졌다…..
이윽고 노인은 다른 승객들에게 제압되어서 다음 역의 지하철 순찰대에 넘겨졌다.
우쿄와 미나도 거기에 같이 갔다.
<대단한 학생이네. 그래 안 무서웠어? >
경찰관의 질문에 우쿄는 그제야 자신이 한 행동을 떠올리고 몸을 움츠렸다. 남자임에도
치한이 곧잘 꼬였던 자신이 저 노인한테 걸렸다면 -겁도 나고 더구나 발동하면
흥분해버려서-그냥 당했지 싶었다.
<실은 좀 그랬어요. >
그 치한 노인은 잘못은커녕 되려 자신을 취조중인 경찰관에게 호통이었다.
<내가 교회 목사요!! 근데 내가 여자한테 어쨌다고? >
<그래서. 그 시간에 목사님께서 지하철은 왜 타셨어요? >
<몰라서 물어? 전도활동 하려고 탔지? >
승객들은 속으로 “웃기고 있네!!’하는 표정이었다.
경찰관은 노인이 가증스럽다는 표정으로 야단을 쳤다.
<목사님!! 공공장소에서 전도활동 하는 것도 벌금형에 상당하는 불법이지만 성추행
상습범으로 순찰대에 요주의 인물로 찍히셨거든요!! 여자한테 추근대는 게 전도활동이에요?
예수님이 웃겠네요!! >
잠시 꿀먹은 벙어리가 된 목사는 곧바로 반격했다.
<이 작자가 어디서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욕보여!! 이 사탄이 잡아갈 작자 같으니!!
그게 다 여호와 하나님을 공경할 줄 몰라서 그래. 체포하려거든 저 노인한테 무례하게
구는 버르장머리 없는 애새끼나 체포하란 말야, 씨팔!! 그래, 저 녀석 나한테 일본말까지
하면서 윽박질렀지!! 왜놈들이 우리나라에서 쫓겨난 게 언젠데 지가 무슨 쪽발이라고!!
제 조상들이 왜놈들한테 나라를 뺏기고 되찾는다고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렀는데 정신을
못 차리고 철딱서니 없이 말야,!! 저놈은 어른들 공경하는 법도 모르고 나라 사랑하는 법도
모르는 놈이야!! 이노무 자식!! 회개하고 정신차려!! >
취조중인 경찰관은 목사의 철면피에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何するのよ. あのエロじじい (뭐 하는 거야. 저 엉큼할아범)~~~~>
우쿄는 노인의 말이 자신에게 윽박질러댔던 노인들의 말하고 똑같은 데에 냉소를 금할 수
없었다. 유유상종相從이라는 게 이런 것인가 싶었다.
우쿄와 미나 곁에 있던 경찰관은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우쿄에게 왜 일본어를 했냐고
물었다.
우쿄는 한쪽 검지손가락으로 턱을 긁적이며 반문했다.
<日本人が日本語を話せるのが何が過ちですか。
(일본인이 일본어를 하는 게 뭐가 잘못이에요? ) >
<그, 그래? 그럼 어디 신분증 좀 줘보겠나? 어차피 신원확인은 해야 하니까.…….>
우쿄는 주저 없이 외국인 등록증과 학생증을 내보였다.
나이가 많아 봐야 갓 입학한 중학생쯤으로 보였던 우쿄가 실은 고등학생 정도의 나이이고
대학생이라니 다들 놀라고 있었다.
더구나 일본인이라는 점도 신선했다.
이윽고 밖이 소란스러워지더니 관할 경찰서에서 성 추행범을 압송하려 경찰관들이 도착했다.
노인이 끌려간 뒤 경찰관은 미나와 우쿄에게 한마디 했다.
<저 노인은 법에 따라 처벌받을 겁니다. 많이 놀라셨겠지만 이제 안심하시기 바라겠습니다.
근데 나중에 참고인 자격으로 소환할 수도 있으니 그때 협조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학생은 아마 잘하면 표창表彰을 받을 지도 몰라. 하여간 기특하네. 저 노친네 나라
망신은 톡톡히 시켰구먼. 그런 주제에 고매한 애국자인 척은, 허허허~~~>
<우리나라에도 치한은 많은데요, 뭘….. >
<그런가? >
약간 나이가 지긋한 경찰관은 우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겨 주었다.
우쿄와 미나가 지하철역에서 나와서 우쿄는 기어이 미나가 사는 아파트 단지의 앞까지
미나를 바래다 주었다.
<그럼 케이. 이왕 온 김에 잠깐 우리 집에 들어서 뭐 좀 마시고 갈래 >
그러자 우쿄는 얼굴이 빨개져서 손사래를 치며 사양했다.
<아, 아니에요. 이 늦은 시간에 다른 사람의 집을 방문하는 건 실례거든요…… >
<그래도…… 그럼 잠깐만. >
미나는 우쿄를 가볍게 안아줬다. 우쿄는 왠지 수줍어졌다. 젊은 여성의 고혹적인 체취가
우쿄를 흥분시켰다.
미인인 연상의 여성은 어린 소년에게는 대체로 매력적이고 멋진 동경의 대상일 것이다.
미나는 우쿄의 얇고 고운 입술에 자신의 도톰하고 매력적인 입술을 맞추고 키스해 주었다.
누나들이랑 사촌누이랑 볼이나 이마에 장난스럽게 뽀뽀를 했던 것을 빼고 이런 여자와의
본격적인 키스는 처음이었다.
여자의 입술은 남자와 달리 향기도 좋고 무척 부드러워서 느낌이 좋았다.
우쿄는 입맞춤이 끝난 뒤에도 잠시 동안 여운에 빠져 있었다.
미소년과의 키스는 미나에게도 가벼운 흥분을 느끼게 했다. 더구나 자기와의 키스에
소년이 넋을 놓을 만큼 황홀해 하는 것에 내심 흡족했다. 미나는 우쿄의 뺨을
어루만져주면서 속삭였다.
<이건 아까 용감한 행동에 대한 누나로서의 상이야. >
이윽고 여운에서 벗어난 우쿄는 수줍게 웃어 보였다.
그러고 보면 미나들의 여 선배들은 각기 일본의 사촌누나들을 연상시켜서 친숙해서
좋다는 느낌이었다. 우쿄가 아까 미나를 “우리 누나”라고 한 것은 그런 기분 탓일 것이다.
<그럼 전 가볼게요. 아참, 오늘 일은 말하지 말아주세요. 창피하니까……さよなら. >
<응. 그래. 내일 보자. >
다시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우쿄를 손을 흔들면서 배웅한 미나는 약간 아쉽다는 기분이
들면서 집으로 들어섰다.
시간은 오후 9시 30분경이었다.
미나가 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자 그녀의 언니가 방에 들어섰다.
<얘. 아까 아파트 앞의 그 꼬마 애는 누구니? >
<아, 언니도 봤어? 어때. 남자애가 참 예쁘게 생겼지? 그 애가 내가 말한 바로 그 애야. >
미나의 언니는 알만하다는 표정이었다.
<아. 일본에서 왔다는 사오토메…….. >
<우쿄군. 그 애한테는 일본에서 부르는 대로 케이라고 부르지만 우리 미녀삼총사끼리는
“우경이”라고 부르는…… >
<(흥!! 미녀삼총사? ) 아, 그래 그래. 네가 반했다는 그 일본인 남자아이란 말이지?
근데 저 꼬마가 너를 집까지 에스코트 해준 거야? >
< 응. 거기다 나한테 치근덕대는 치한癡漢까지 격퇴해 줬다니까….. 언니가 일본에서
겪은 일본남자들하고는 약간 다르기도 하고…… 참 기특하지? >
미나의 언니는 작년까지 일본에서 유학했었고 일본인 남자친구를 사귀기도 했다.
그녀가 일본에서 겪은 바로는 치한은 그렇다 치고 최소한 일본인 남자친구한테는 밤에
집까지 에스코트 받는 것은 거의 기대를 말아야 한다.
<하긴, 집까지 숙녀를 바래다 준 거 하나는 일본의 내 남자친구였던 머슴애 보다는
낫긴 해. 근데 너는 그런 꼬맹이하고 뽀뽀를 하니?>
약간 비꼬듯 말하는 언니한테 질투하냐는 듯 흘겨본 미나는 창 밖으로 우쿄가 간 방향을
응시하며 말했다.
<어른이 되면 다른 의미로 제법 근사하고 멋있는 남자가 될지도 몰라.……. >
아참, 아까 우쿄랑 키스 한 것을 친구들에게 자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새치기 했다고 난리 칠 모습이 선했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나 토요일이 혁과 그의 고등학교 동창이 석주를 방문하기로 한
날이었다. 우쿄는 일찍 서둘러서 집에 갔다. 가는 길에 우연히 아는 사람 두 명이 우쿄와
같은 지하철 열차를 타게 되었다 친구를 데리러 가느라 우쿄와 동승한 영진과 그냥 방향이
같은 야마모토 페이였다.
이렇게 일본인 두 명, 한국인 1명, 합이 세 사람이 나란히 좌석이 앉아 다른 승객에게
방해가 안되도록 주의하면서 얘기하다가 다른 쪽에서 좀 시끄럽게 떠드는 지방에서 온
학생들에 신경이 쏠리기 시작했다.
< ちょっとうるせですね。 (좀 시끄럽네요.) >
참다 못한 페이가 조용히 투덜댔다.
< そうですね山本兄さん。(그렇네요 야마모토형.) >
우쿄도 약간 불만스러운 표정이었고 영진은 한심하다는 표정이었다.
<외국인도 있는데 저게 뭔 짓거리고……. >
영진이 일어나서 학생들에게 한마디 하려는 순간에 세 사람의 앞에 서있던 우쿄와 같은
또래의 고등학생이 먼저 그 학생들에게 한마디 했다.
<거 좀 조용히 좀 합시다. 전철 안이 당신네 건 아니잖아요. >
그러자 그 지방에서 온 학생들이 떠드는 걸 멈추고 그 고등학생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더니
그 중에 덩치 좋은 친구가 그 학생의 바로 눈 앞에 눈을 초 근접시키고 빽 소리를 질렀다.
< 그라모 이기 다 니끼가? 짜샤!! ( 그럼 이게 다 네 거야? 자식아!!) >
우쿄와 페이는 약간 어안이 벙벙했다. 두 일본인으로서는, 아니 누가 봐도 이해가 안될
모습이었다.
사과를 해도 시원찮을 판에…… 근데 어느 정도 한국어기 익은 두 일본인이 듣기에도 얼핏
알아듣기 힘들 정도의 상당히 심한 경상도 사투리였다.
본인도 경상도 출신인 영진은 자기가 다 민망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근데 한마디 버럭 소리를 지르고 난 덩치가 의기양양하게 돌아간 뒤
찍 소리도 못하던 고등학생이 자기 친구들에게 들릴락 말락 하게 한
소리가 가관이었다.
<씨X!! 조땠다!! 봐~~~ 일본 애들 맞잖아;;;;;;; >
페이는 실소했다. 우쿄는 발끈해서 일어서려다 영진이 말려서 앉았다.
졸지에 그 몰상식한 경상도 학생들이 우쿄. 페이와 동족同族이 되어버린 거다.
우쿄외의 2인은 어이가 없어서 서로를 쳐다보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 호호호~~~ 너무 웃겨♡>
리본으로 묶은 긴 생머리에 레이스 달린 에이프런과 세트인 꽤 귀여운 홈 드레스 차림의
마치 막 시집온 새댁 같은 분위기의 우경은 우쿄에게 전철에서의 일을 듣고 폭소를 터트렸다.
우쿄는 어쨌든 불만스러웠다.
< とにかくそんな子たちを日本人だとしたことは氣持ち惡いです. 本當の日本人ならそのように
しないが...... (하여간 그런 애들을 일본사람이라고 한 건 기분 나빠요. 진짜 일본인이라면 그러지
않는데......)>
아들의 투정기 있는 말에 우경은 간신히 웃음을 멈추었다.
< 何, グラモ イギ ダ ニキガ これが韓國の人人にはざっと日本語のように聞こえたようなの....
( 뭐, 그라모 이기 다 니까가, 요게 한국사람들한테는 얼핏 일본어처럼 들렸었나 보지....) >
< どこがそれほど聞こえるというんですか?(어디가 그렇게 들린다는 거예요? ) >
< 何より發音が日本語音節に當たるんじゃないの? イントネ-ションも似ていて….
(무엇보다 발음이 일본어 음절에 맞잖아? 억양도 비슷하고….) >
< 話にならないです! 日本語がいくら優雅で美しい言語なのにそんなお上りさんたちが使う
朝鮮のいちなまりして比べますか。
(말도 안돼요! 일본어가 얼마나 우아하고 아름다운 언어인데 그까짓 촌뜨기들이 쓰는
한국의 일개 사투리하고 비교해요? ) >
우쿄의 약간 흥분된 말에 우경은 웃음을 거두고 진지하게 그 말을 곱씹었다.
< 우아하고 아름다운 언어라…… 일본어가 말이지…… >
그건 한국으로 시집온 이래 거의 한국어만 사용하던 우경도 아들과 일본어를 다시
일상적으로 사용하게 되면서 새삼 느끼기 시작한 점이었다. 그건 어느 나라 사람이든
오래 고국을 떠난 사람들이 고국어에 느끼는 감정일 것이다.
깍지 낀 양 손등으로 턱을 괴고 아들을 사랑스럽게 응시하던 우경은 아들에게 애정이
듬X 담긴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 …………….やっぱりうちの息子はまったく日本人ね 。
(…………….역시 우리 아들은 천상 일본인이구나. ) >
우쿄는 당연하지 않느냐고 반문하려다 걸리는 게 있어서 입을 다물었다.
우경가 보기에 작년에 거의 얼떨결에 일본에서 한국에 왔을 때의 정체성에 자신이
없어하던 것과 달리 올해에 한국에 돌아왔을 때의 우쿄는 철저히 일본인이 되어 있었다.
그런 우쿄가 우경은 일견 대견하면서도 한편으로 씁쓸하게 느껴졌다.
최근에 갖기 시작한 한국에 대한 호감과는 무관하게 우쿄로서는 자신이 일본인이라는
점에 더 이상의 의구심疑懼心이 없었다.
누구든, 특히 전주의 친가가 또다시 우쿄의 친 아버지가 한국인임을 들먹이며 자신에게
한국인임을 강요한다면 우쿄는 철저히 항전할 것이다.
하지만 친 아버지인 석주가 너무나 마음에 걸렸다. 단순히 친 아버지라서 뿐이 아니었다.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애정의 정도로서 원래의 아버지인 노조무와 친 아버지인 석주는
우쿄에게는 동격이었다.
어린 나이에 이미 한번 부모를 잃는 감당하기에 너무나 고통스러운 아픔을 겪었던
우쿄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한때 우쿄가 석주에게 자신의 정체성의 문제를 분명히 다짐했던 건 양쪽에 부모가 같이
병립하는데 대한 정신적인 혼란이 이유였다.
하지만 - 무턱대고 일본의 부모를 버리라고 강요하던 친가와는 달리-석주가 부모로서 키워준 은혜가 특히 크다고 가르쳐주며 우쿄의 정신적인 짐의 무게를
덜어주었기 때문에 우쿄는 더 이상 혼란해 하지 않고 원래의 부모(노조무, 카스미)를
마음속에 품으면서 친부모(석주, 우경)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쿄로서는 친 아버지가 노조무와 같이 소중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예의 우쿄의 마음에 걸리는 -그래서 가슴 아프게 사랑하는-사람이 초인종을 눌렀다.
<나왔소. >
<다녀왔어요.>
학교에서 퇴근한 석주와 같이 하교한 수진을 두 모자는 현관에서 맞이했다.
<이따 한 6시 반쯤에 선배님이 동창 분들을 데리고 올 거랬어요. >
석주는 우쿄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그래 알았다. 근데 여보. 손님이 더 오게 생겼는데? >
<손님이요? >
<김 중령이 국방부 본청에 볼일이 있어서 왔는데 내일 원대복귀하기 전에
좀 방문하고 싶다더라구. >
<어머, 그럼 지금부터 준비를 서둘러야겠네요. >
<응. 수고 좀 해주구려. >
잠시 뒤 우경과 우쿄, 그리고 엄마와 같은 리본으로 묶은 긴 생머리에 교복대신에
노란색 초 미니스커트 감색과 흰색이 가로로 번 갈아서 쳐져 있는 펌퍼짐한 티셔츠로
갈아입은 수진은 동네 시장의 마트에서 장을 보고 있었다.
오늘 올 손님이 워낙에 많으니 좀 살게 많아졌다.
카트를 우쿄가 끌고 우경이 살 것을 고르다 시식코너에서 수진이 우쿄의 입에 시식용
만두를 넣어주는 순간에 좀 떨어진 곳의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경 언니!! 수진양孃!! >
우경와 수진은 자기들을 부르는 맵시 있게 올려 묶은 머리에 단추가 뒤에 있는 블라우스
밝은 색 스커트 차림의 미모의 30대 전후의 여성을 보고 반갑게 웃음을 지었다.
<어머!! 현숙씨!! >
<숙이 이모! >
현숙은 우경들에게 다가왔다.
<아, 안녕하세요.>
<안녕, 우경학생도 같이 나왔구나?>
현숙은 우쿄의 예의 바른 인사에 살가운 미소로 답해줬다.
현숙에게 우쿄를 한국이름에게 부르게 한 것은 바로 우경이었고 그래서 우쿄도 이를
묵인했다.
현숙은 처음에 우쿄의 이름이 우경과 같다는데 다소 거북함을 느끼며 불렀었다.
그때의 에피소드는 우쿄에게 쓴 웃음을 짓게 만들었다. 그 때는 현숙이 우경과 절에서
만나 같이 집에 들어와서 대면했을 때였다.
<아. 얘 처음 보지? 바로 내가 말한 우리 아들 사오토메 우쿄, 집에서는 케타로라고 부르기는
하는데 자기는 일본이름은 부르기 힘들 테니까 그냥”우경이”라고 불러도 돼. >
<어머, 그 일본에서 온…… 정말 귀엽게 생긴 아드님이네요, 전 처음에 여자아이인 줄
알았는데. 근데 언니랑 이름이 같다는 게 좀... >
<어머, 그게 어때서? 괜찮아.>
이어서 우경은 우쿄에게 그녀를 소개해 주었다.
<この方はママの 友達である徐賢淑-ソヒョンスク-さんなの。 ママ友達だからこれから
スッギイモ- 淑叔母ちゃん-と呼んでよ。
(이 분은 엄마의 친구인 서현숙씨야. 엄마 친구니까 앞으로 보면 숙이 이모라고 부르렴.) >
처음 보는 아줌마에게 이모姨母라고 부르라니 좀 의아했지만 우쿄는 그녀에게 수줍게
목례를 했다.
수줍기도 하고 어색했던 우쿄와는 달리 그녀는 우쿄에게 상냥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우리 아들이 낮을 좀 가리고 수줍음을 잘 타는 편이라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약간 좀
무뚝뚝해. >
<남자애들이 원래 그렇죠. 근데 수진이는 좋겠구나? 이런 예쁜 남동생이 생겨서……>
<네? >
현숙의 뜬금없는 말에 수진과 우쿄는 실소했다.
<우경이는 이제 초등학교 4학년쯤 되어 보이는데? >
우경은 이제 알겠다는 듯 피식하다 까르르 하고 웃어댔다.
<어머머;;; 자기도 순간적으로 우리 케타로 나이를 착각했나 보네, 호호호;;; >
<어머나, 초등학생 아니에요? >
수진도 웃어 보이며 지적해 주었다.
<우리오빠는 한국나이로 16살이에요. 거기다 지금 고등학생인데……. >
그러자 현숙은 다소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어머. 진짜? 하도 어려 보여서;;;;;; 미안해요, 우경학생;;;;;>
<だ, 大丈夫で, いや, 괜찮습니다. >
초등학생으로 오해 받는 거야 어제오늘 일이 아니니 그리 화낼 일도 아니고 거기다 처음
보는 인상이 너무 좋은 예쁜 아줌마라 호감이 갔다.
전형적인 한국미인이라는게 이런가 싶었다. 그러고보면 외할아버지와 친구분들이
한국얘기를 할 때 친구분 중에 한명이 한국여자들이 일본여자들보다 훨씬 미인이 많고
더 예쁘다고 하던 걸 들은 적이 있는데 우쿄로서는 -우경과 수진은 차치하고 외가의
누나들과 이모들 때문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지만-지금은 학교에서 보는 동급생 이상의
누나들이나 이 "숙이이모"를 보면 그런 것도 같았다.
-하지만 좀 한국적인 분위기가 섞여서 그렇지, 순수한 일본여자인 우경도 미모에서 전혀
뒤지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나이가 더 많을 우경이 오히려 더 젊어보이기도 하고
-친엄마지만- 귀엽다는 느낌이라면 , 대신 현숙은 더 원숙하고 편안한 느낌이달까.....-
<어제는 고마웠어. 우경학생.>
<아, 아니에요.>
우쿄는 어제 수진과 같이 처음으로 현숙의 딸인 수진의 문병을 했었다.
학교내의 대학병원에 있어서 진작에 찾았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었다.
자신의 친 여동생인 수진과 이름이 같은 수진이는 우쿄에게 애처러움을 느끼게 했다.
이제 11살인 수진이는 정말 조그맣고 예쁘장한 여자아이인데 치료가 어려운 중병으로
시한부 인생을 겨우 이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수진이가 너무 가엾었던 우쿄는 중간에 나가버렸었는데 수진이 나갔더니 복도
벤취에서 울고 있었다.
그 옆에 앉았을 때는 또 수진은 안고 울기 시작했고 수진은 말 없이 우쿄를 감싸안아줬다.
또 며칠 전에는 수진과 우쿄가 “반딧불의 묘”라는 애니메이션을 같이 본 적이 있었는데
다 보고 나서 오빠에게 고개를 돌렸더니 우쿄가 얼굴이 새빨개진 채 눈물범벅이 되어
있어서 수진이 놀랐었다. 왜 그러냐고 묻는 수진에게 우쿄는 “수진짱”만 연발하면서
울기만 했는데 애니에 감정이 몰입되어 있던 우쿄가 어이없게도 애니 주인공의 여동생을
보면서 수진을 연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좀 어이가 없지만 오빠의 여린 마음과 사랑을 느꼈던 수진은 그때도 너무 슬프게 우는
오빠를 안아서 등을 토닥거리며 달래줘야 했었다.
오늘 학교에서 친구들이 각자의 오빠나 남동생 흉들을 보는 데- 수진의 친구 중에 하나는
추운 날 새벽에 자기 약점을 틀어쥐고 있는 오빠 심부름으로 음료수를 사러 갔다 오느라
한동안 감기로 고생해야 했다며 자기 오빠를 평하는 말이 “난 단언할 수 있어, 그 새끼는
인간의 탈을 뒤집어쓴 악마惡魔였노라고……”-끼게 된 수진이 얄미운 사촌 남동생들 흉을
실컷 보고 나서 오빠들이 그렇게 못되먹은 사람만 있지는 않다고 부연설명하며 우쿄
얘기를 했더니 반응들이 이러했다.
그녀들 중에 몇몇은 이미 우쿄를 본 적이 있었다.
<어머머!! 진짜야? 수진이 오빠는 정말 멋있는 오빠잖아?!!! >
<아휴~~~ 우리오빠도 수진이 오빠 반만 닮았으면 좋겠다! >
<얘, 수진아. 너네 오빠 좀 소개시켜줘 봐. 사귀고 싶어. >
중간에 초를 치는 말 한마디.
<얘 그래도 좀 조심해라. 일본사람들 중에 자기 여동생한테 “여동생을 상대로 연습”
한답시고 이상한 짓 하려는 변태들이 많대 거든? 너네 오빠도 일본사람이니까 너한테
그렇게 팔불출이면 가능성이 충분해!! >
<우리 오빠는 그런 사람 아냐!! 그리고 이 기집애야!! 니(네)가 일본사람들을 한 명이라도
보기나 했어? 하여간 요상한 헨따이 만화만 잔뜩 봐서는~~~~~>
실은 정작 수진 자신이 요즘에 석진에게 좀 소홀해진 대신에 우쿄에게 왠지 오빠 이상의
느낌으로 끌리는 기분이 들고 있었다.
수진이 오빠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이유가 -수진을 반 일본인이라며- 심술궂게
구는 사촌남동생들에게 좀 질려서였는데 -수진처럼 혼혈이지만 아예 일본인인- 우쿄는
충분히 오빠로서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은숙 언니!! 이제 가요!! >
순간에 우경들이 있는 방향으로 다소 어린 아가씨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현숙이 그에
답했다.
<응, 미선아. 잠깐만 기다려. >
우경과 수진은 의아해 했다.
<은숙? 현숙씨. 그게 누구야? >
그러자 현숙은 약간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 새로 일하기 시작한 곳에서 저에게 부르는 별명이에요. 저 애는 거기서 안 동생이구요. >
<그렇구나. 그래, 그럼 다음에 만나. 절에도 좀 나오구, 전처럼 우리 집에도 좀 놀러 와!! >
<그럴게요, 그럼 다음에 보자 수진양. >
<네, 수진이한테 건강 하라고 전해주세요. >
<그럴게, 그럼 우경학생도 다음에 봐요. >
<は, はい!! >
수줍게 목례를 하는 우쿄에게 역시 상냥한 미소를 지어준 현숙은 자신의 의동생이
기다리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에 시장을 마저 보고 집으로 향했다. 우쿄가 무거운 것은 남자인 자기가 들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려 억지로 혼자 든 짐들은 좀 너무 무겁지 싶었다.
< あまり無理するなよ。(너무 무리하지 마.) >
결국 중간에 우경과 수진이 우쿄가 몽땅 들고 있던 네 개의 보따리 중에 하나씩 다시
맡아서 들었다. 그래도 속으로 약한 체력에도 자기책임감에 충실하고 어떻게든 묵묵히
자기 역할을 하려는 우쿄가 든든하게 느껴져 이래서 아들/오빠가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착하자마자 두 여자는 음식준비를 시작했고 막판에 우쿄가 식탁 위의 휴대용 버너에서
한국식 부침개를 부치는 일을 맡았다.
< お兄ちゃん, ブチムゲすごくよく燒くのね (오빠, 부침개 엄청 잘 부치네?) >
우쿄의 부침개 부치는 솜씨를 본 수진의 감탄에 우쿄는 신명이 나 있었다.
< 學校 祭り時. お好み燒のウっちゃん と言えば認めやで 。
(학교 축제 때 “오코노미야키의 웃짱”이라고 하면 알아줬걸랑♡ >
우쿄의 입에서 오사카벤大阪弁-관서 사투리-까지 나오자 두 모녀는 웃음을 터트렸다.
수진도 우쿄가 읽고 있던 일본만화로 더 깊숙이 일본어를 배우면서 간단한 오사카벤도
약간은 알고 있었다.
< ほほほ~~~~~何のマンガ主人公みたい!!!(호호호~~~~~~~무슨 만화주인공 같애!!!) >
<本眞に? (참말로?) >
두 모녀는 아주 자지러졌다.
<뭐가 그리 재미있어? >
주방에서의 웃음소리에 역시 손님 맞을 준비를 하던 석주가 주방을 들여다 봤다.
이윽고 초인종 소리가 들려서 우경과 석주가 마당으로 나가 격식을 갖춘 정장
차림의손님들을 맞았다.혁과 영진이 먼저 석주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
<안녕하셨습니까, 선상님. >
영진은 동창들을 대표해 큼직한 꽃다발을 석주에게 건넸다.
<어서들 와라. 모두들 참 10년 만에 보니 훤칠한 청년이 다됐구나? >
이어서 12명 안팎의 혁과 같은 나이의 남녀가 석주에게 반갑게 인사를 하고 악수와
포옹을 했다.
그 중에 미키도 끼어있었지만 그녀는 혁을 따라왔을 뿐이다.
애초에 남학교출신이었던 석주의 제자일행 중에 미키 이외에 여자가 3명 섞인
이유는 기혼자旣婚者도 있어서 배우자들을 데려온 때문이다.
개중에는 심지어 이미 한 아이의 아버지도 있었다. 혁도 슬슬 결혼계획이 없냐는
질문을 받는 중이었다.
영진도 주희를 데려오고 싶었는데 주희는 회사 회식이 있어 그러지는 못했다.
모두들 현관으로 들어서서 석주의 안내로 자리에 앉았다.
<아, 센빠이, 센세先生. 어서 오세요. >
우쿄의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린 혁과 미키는 수진과 함께 음식 쟁반을 들고
주방에서 나오는 우쿄의 모습을 보고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체격에 비해 무척 큰 하얀색 남방을 추리닝 밖으로 드러내서 입은 옷차림에 또 자기
몸에 큰 -하얀색에 레이스장식이 달린 에이프런을 착용한 우경과 수진과는 달리 별
다른 장식이 없는- 에이프런을 착용한 우쿄의 모습이 무척 귀엽게 느껴졌다.
두꺼운 한쪽 어깨 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혁은 웃으면서 우쿄를 자기 옆에 오게 한 뒤 일어서서 동창생들에게 소개했다.
<이 친구가 내가 늘 말했던 사오토메 우쿄군이야. >
이미 우쿄와 친한 영진을 제외하고 우쿄를 처음 보는 혁의 동창-석주의 옛 제자-들은
우쿄의 모습에 신기하다는 표정이였다.
<히야~~~~~~~~~~~ 야가 대학생 맞나? 아닌 것 같은데? >
<내가 말했다 아이가? 처음에는 야 보고 민혁이가 일찍 사고 쳐서 낳은 아들네미인 줄
알았다고 말이다~~~~~~~~~ >
영진의 너스레에 거실 안은 폭소의 도가니였다.
석주도 혁에게” 야 그거 진짜냐” 하고 웃으면서 물었다.
<근데 진짜 머스마가 너무 이뻐놔서 가시나 같데이. >
<난 쪽발이들은 광대뼈하고 덧니가 툭 튀어나온 문어대가리들만 생각했는데 저렇게
예쁜 애도 있었네? >
<자기야~~ 우리도 저렇게 예쁜 남자아이 낳자~~~♡ >
<흥!! 난 무조건 딸 낳을 거야!! >
<그러고 보니 선생님 따님도 무척 예쁘네요. >
대략 10살 위의 형과 누나들-이라기엔 나이가 많은-의 칭찬과 놀림에 우쿄와 수진은
얼굴이 빨개졌다.
석주로서는 자식들이 생김새로 칭찬받는 게 뿌듯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자신도 형제들도 제법 미남들이라는 말을 들어왔지만 둘 다 외모상 외탁이 심하고
특히나 우쿄는 아들임에도 여자같이 생긴데다 일본 색이 짙기 때문이다.
자리에 앉으면서 우쿄를 옆에 앉힌 앉은 혁은 우쿄의 한 손을 잡아 감싸 쥐었다.
잠시 뒤 현관의 초인종소리가 들렸고 석주가 잠시 마당으로 나갔다 석주보다 한
서너살 아래의 정복正服차림의 현역 육군 중령 한명과 같이 들어왔다.
혁은 석주와 같이 들어온 장교를 보고 갑자기 일어나 거수경례를 했다.
<충성!!! >
<엇!! 강민혁 중위中尉? 아니, 귀관貴官이 여기는 어떻게? 하여간 반갑네!! >
석주는 혁이 한때의 자기 부하에게 경례를 하고 그가 혁에게 반갑게 아는 체를
하자 의아해 했다.
<아니, 김중령, 자네가 우리 민혁이를 어떻게 아는가? >
<예, 강민혁 중위는 재작년에 소관의 휘하 소대장이었습니다. >
<그런가? 민혁이, 아니 강 중위는 재직했던 고등학교에서 가르쳤던 제자라네. >
<그렇습니까? 이런 기막힌 인연이 있었군요? 강민혁 중위, 귀관의 은사는 본관이 첫
임관했을 때 모셨던 본부중대장이셨네. >
다들 세 남자의 인연을 보고 놀라는 모습이었다.
즉 석주는 군대시절 김 중령의 상관이었고 전역 후 두 번째로 부임한 학교에서 혁을
가르쳤다. 혁은 대학 졸업 뒤 장교로 입대해서 김 중령의 휘하에 있었던 것이다.
실은 우쿄는 친 아버지인 석주와 좋아하는 선배인 혁이 퇴역 군 장교였다는 것도
오늘 처음 알았다. 한국남자들은 의무적으로 군복무를 해야 하고 제대 후에도
예비군으로 일년에 몇 번은 군사훈련을 받아야 한다는 것도 얼핏 이해가 안 가고
있었던 참이었다.
우쿄가 아는 세계정세 상식으로는 한국의 군대는 실전용으로 잘 훈련된 60만
대군으로 북조선과 일본열도를 위압하고 있는 일본에는 상당히 위협적인 존재이다.
-일본이야 한 해에 세계3위의 국방비를 먹어 치우는 자위대라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공무원 집단은 있지만 하여간 군대는 없으니까……-
더구나 우쿄로서는 일본과 한국 근 현대사를 스스로 배우면서 “군대란 한 사회
안에서의 최강의 폭력조직”이라는 명제를 유감없이 발휘하기라도 하려는 듯 2차
대전 때 일본군이 침략전쟁을 일으키면서 저지른 난징南京 대학살이나 종군위안부
같은 만행도 충분히 알고 있었고 한국군부도 규모만 틀렸지 거의 비등한 횡포로
군사독재를 자행하면서 베트남을 상대로 침략전쟁을 저질렀던 사실을 배운 바 있는데다
특히나 도쿄까지 쳐들어왔던 막냇삼촌이라는 인간 때문에라도 한국군에 대한 인식이
무척 나빴던 참이었다.
석주와 혁이 그런 한국군대의 장교였다니 우쿄로서는 좀 놀랐다.
-그날 이후로 한국군인을 달리 보게 되었다-
김중령은 우쿄에게 눈길이 갔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잘 구별이 안가는 얼굴모습 때문에라도 그랬다.
그제서야 석주는 아들을 소개했다.
<아, 전에 얘기했던 우리 아들 사오토메 우쿄. 우경이네.>
김 중령은 우쿄의 일은 진작에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만나기는 처음이었다.
사진은 봤지만 무척 어렸을 때 찍은 줄 모습인 줄 알았는데……
<아 그………………. 근데 지금 18살 정도여야 하지 않습니까? >
<한국나이로는 18살이 맞아, 좀 어려 보여서 그렇지. >
<허허허~~~ 이거 좀 어려 보이는 정도가 아닙니다만…. 반갑네. 들었다시피
김덕령 중령이네. 자네 얘기는 많이 들었어. >
김 중령이 쾌활하게 청하는 악수를 우쿄는 부끄러워하면서 한동안
머뭇거리다가 석주의 “인석아, 뭐해? 하는 채근에 공손히 양손으로 응해주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사오토메 우쿄입니다. >
김중령의 입에서 살짝 쓴 웃음이 흘렀다. 내심 우쿄의 입에서 사오토메
우쿄早乙女宇京라는 일본 이름 대신에 권 우경權宇京이라는 한국이름이
나오길 기대했다.
석주에게 들어서 사정은 알고 있고 우쿄의 입장도 이해는 하지만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애국심으로 충만한 대한민국 군인인 그의 감상으로는 기왕이면 소년이
“자신의 -부계상의- 민족적인 뿌리에 눈을 떠서” 친 아버지를 따라 한민족의
원수怨讐나라인 일본을 버리고 “진정한 조국인 자유대한自由大韓”의 품으로 안기는
감동적인 해피엔딩이 연출된다면 얼마나 멋있을까, 하고 생각해서였다.
실은 우쿄는 그의 쓴 웃음의 의미가 가끔 보는 친 아버지 친구들이나 동료교사들
-재작년에 3개월 동안 우쿄의 선생들이기도 했었고 이제 석주와 우쿄의 관계를
완전히 알게 된-을 통해 이미 익숙한 것이고 모처럼 늘기 시작한- 100점 만점에
다시 돌아왔을 때의 -70점에서 이제 간신히 30점쯤까지 끌어올린- 한국에 대한
호감 정도를 한 10여 점씩 깎아먹는 것이어서 짜증이 나는 것이지만 무시했다.
처음 보는 한국군장교의 애국적인 로망 따위는 쓸데없는 참견이다.
하긴 아직도 같잖다는 표정을 지으며 윽박지르는 인간도 있으니까 이건
그나마 양호했다.
친 가족과 무관하게 이제 조금씩 정이 들기 시작하긴 했지만 한국은 엄연히
외국外國이었던 우쿄는 작년의 3개월간의 한국생활 동안 문자 그대로 “일제강점기
日帝强點期”를 경험했기 때문에 솔직히 친 가족들-석주, 우경, 수진-만 아니었으면
한국이라는 나라는 다시 오고 싶지도 않았고 정말 꼴도 보기 싫었었다.
아예 친 가족들을 -친가와 한국에 대한 보복심리로- 꺼꾸로 일본인으로 귀화시켜
일본으로 데려올 궁리까지 가끔 할 정도였다.
김중령이 미리 석주의 옆에 지정된 자리에 앉은 뒤 술잔을 기울이며 담소가 이어졌다.
< 저희 선생님께서는 군대에서 어떤 장교셨습니까? >
<사관학교출신보다도 더 유능하고 훌륭한 군인이셨네. 아 우리 강 중위도 솔직히
그대로 제대시키기가 아까운 인재였는데 말야. 권 중대장님도 강중위도 아마 그대로
말뚝 박았으면 꽤 빠른 시간에 별을 달았을 것이고 군에도 큰 도움이 되었을 걸? >
<민혁이가 말인가? >
<예. 대대단위로 각개전투 훈련을 한 적이 있는데 강중위는 자신의 소대에는 전사자
한 명 안내고 다른 소대를 궤멸시킨 적이 있었을 정도니까요. >
<호~~ 나도 그렇게는 못했는데…. >
석주는 자신의 제자에게 기특하다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래서 민혁이가 우리의 호프 아닙니까? >
한 동창의 너스레에 쾌활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우쿄는 전사자戰死者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려서 혁에게 물었다.
<진짜 군사 훈련하다가 사람이 죽나요? >
<아니. 설정이 그렇다는 거지. 진짜 그런다면 큰일나게? >
안심하는 모습의 우쿄에 혁은 약간 웃긴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권 중대장님께서는 어떤 선생이셨나? >
그 말에 다들 조금 키득댔다.
<아니, 인석들이. 왜들 웃고 난리야? >
<우리 선생님, 거의 구타교실에 나오는 변형태 선생 수준이었지 않냐? >
<말도 마라, 야. 정신단련 봉 1호 기억나지? 나 그걸로 선생님한테 한방 맞고 거의
저승 문까지 갔다 왔다는 거 아니냐? >
<이 재영이, 글마 첫날에 선생님한테 개기다 아주 개 박살 난 거 기억나나?
그때 선생님께서 글마 구두발로 밟으시며 하신 말씀이, "이 새끼는 개조가
필요한 녀석이군" 이였쟤? 그때 선생님, 지옥에서 온 수라대왕 같았었다.
아휴~~ 재영이 글마 중학교 때 선생들도 두 손 두발 다 들던 개또라이에 꼴통새끼
였그만, 지금도 그때 생각하면;;;; >
일동 폭소를 터트렸다. 우쿄는 작년에 한국의 고등학교로 편입학 했을 때 자기만 빼고
반 전원이 석주에게 무려 야구배트로 체벌 받았던 일이 떠올라 등골이 오싹했다.
일본에서는 벌 청소나 복도에 서있기, 더 가봐야 가볍게 쥐어 박히기 정도는 봐왔지만
그런 체벌은 처음 보는 것이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기절해 양호실로 업혀갔었을 만큼의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걸 이 사람들은 아주 즐거운 추억인양 말하고 있는
것이다. 가치관에 혼란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매 맞는 게 전혀 즐거운 일이 아닌데……
석주는 얼굴이 벌개져서 헛기침을 했다.
<녀석들, 내가 그렇게 심했든? >
<에이~~ 그렇지만 도 저희가 그래서 이렇게 사람 되었다 아임까? 그때 가장 구제불능에
열등생들만 모았던 반이었는데…… >
<우리 어머니께서 지금도 나한테 말씀하시잖아? 선생님 아니었으면 내가 대학은 꿈이나
꿨겠냐고 말야…. >
혁은 김중령에게 설명했다.
<좀 엄하셨던 건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다른 선생님들 보다 저희에게 책임감을
가지고 이끌어주셨지요. 속정도 깊으셨고 저희들에게 아무런 사심 없이 공명정대하셨고…… >
<하긴 그래서 군대에서도 부하장병들이 호랑이 중대장이라며 무서워하면서도
존경했다네.
그렇군, 강 중위가 군에 있을 때의 모습도 권 중대장님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
많았는데 그 스승에 그 제자였던 것이군. >
좀 민망해진 석주는 화제를 돌렸다.
<아참, 그러고 보니까 재영이, 그 녀석은 소식 좀 아는 사람 있냐? >
돌연 거실 안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나머지는 그런 녀석은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듯한 표정이었고 혁과 영진 두 사람만
말하기 좀 그렇다는 표정이어서 석주는 의아했다. 겨우 혁이 간단히 설명했다.
<실은 그 녀석 계속 재수만 하다가 몇 년 전에야 대학에 겨우 입학했는데 부정
입학이어서 퇴학당했습니다. 그 뒤로는 저도 잘…… >
물론 그 뒤에 학교주변에서 추한 행동을 하고 급기야 우쿄에게 성폭력을 저지르다가
오히려 우쿄 등에게 두들겨 맞고 경찰에 체포당했다가 도망 갔다는 얘기는 뺐다.
석주는 한숨을 쉬면서 표정이 일그러졌다.
<하여간 그 새끼…… 결국 제대로 바로 잡지 못하고 다른 학교로 전학시킨 게 늘
마음에 걸렸었는데…… >
그는 석주에게도 지금까지 겪은 제자들 중에 가장 골칫거리였고 그에게도 석주는
가장 무시무시하고 끔찍하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아니 그렇게 끈덕질 수가 없었다. 본인으로서는 차라리 석주가 퇴학이라도 시켰더라면
좋았겠지만 석주의 교육방침에 퇴학이란 게 없다 보니 -자신을 의지의 한국인이라고
자부하는-석주에게 제대로 걸려서 무려 4년이나 엄혹嚴酷한 교육에 시달리다 도망치듯
다른 학교로 전학 가서야 겨우 고등학교 입학 5년 만에 간신히 졸업장을 -전교 꼴찌의
성적으로- 손에 쥘 수 있었다. 그의 아버지라는 작자가 자기 아들 말만 듣고 석주에게
처음에는 돈-촌지-으로 회유하다가 되려 석주에게 심한 야단을 맞고 자기 지위를 이용해
협박을 하고 급기야 폭력교사라는 오명까지 뒤집어 씌워 자기 교회 신도들을 선동해
학교 앞에서 시위까지 시켰다가 나중에 석주에게 사죄했던 일까지 있었다.
그러고 그는 결국 2년 동안 재수하고 자기 아버지의 인맥과 돈으로 간신히 부정
행위로 대학에 들어가서 4년간 유급과 사고를 거듭한 뒤 결국 올해에 간신히 3학년에
진급하자마자 재학기록이 전부 삭제 당한 채 퇴학을 당한 것이다.
대학으로서는 학교의 역사상 최악의 오점을 남겼던 사건이었다.
잠시 조용해진 분위기를 다시 올리기 위해 혁이 입을 열었다.
<아, 선생님. 사오토메군이 학교의 음악동아리에 있습니다만, 최근에 자신이 직접
작곡한 음악을 동아리에서 선보여서 호평을 받았습니다. 케이, 어떻니. 한번 실력을
보여 드리는 게? >
갑자기 혁이 아버지 앞에서 음악을 연주할 것을 권하자 우쿄는 당황했다.
<너 작곡도 하냐?>
<.... 조금 요. >
석주는 할 말을 잊었다.
<그럼 한번 보여줘봐. 괜찮아.>
석주도 부끄러워하는 우쿄에게 음악을 연주해 볼 것을 종용했다.
그래서 우쿄는 거실 한 켠의 피아노에 앉으며 혁에게 말했다.
<이건 새로 만든 거예요. 실은 전의 그 곡은 한국에 오기 전에 작곡했던 것이거든요. >
우쿄는 본래의 아버지인 노조무에게서 음악을 배웠다. 노조무는 관심을 보이는 아들과
놀아주는 감각으로 음악을 가르쳐줬지만 사뭇 진지했던 우쿄는 노조무의 사후에 공부에
열중하는 틈틈이 음악을 듣고 섭렵하면서 배워왔고 음악이든 시 짓기든 노조무의
신비주의의 영향을 강렬하게 받았던 것이다.
석주도 아들이 직접 쓴 시는 읽은 적이 있고 한번 우쿄가 쓴 시를 일어원문 그대로
복사해서 보여줬던 문학작가 친구가 극찬하는 걸 보고 문학가로서의 재능은 인정하되
아들의 신비주의가 석주가 알고 있던 한국의 국문학세계와는 너무 판이해서 이해가 안
갔지만 마냥 어린애 같다고만 생각했던 아들의 실력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어서
기특하다고 느낀데다 그 속내를 엿볼 수 있어서 아버지로서 연민을 느끼게 만들었던
것이다.
살짝 그 얘기를 했던 김중령과 석주는 피아노 치는 것을 듣자니 아들이 역시 제법
한다고 느꼈다.
<녀석, 이왕이면 남자답게 명랑하고 씩씩한 곡을 쓸 것이지….. >
단 -석주의 경우 아내와 같이 클래식이나 가곡을 듣는 것 외에 - 음악을 그리 잘 아는
게 아니어서 본인들은 그 정도 이상은 생각 못했지만 그 외 사람들의 넋을 잃은 표정을
보고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당황했다.
<뭐, 뭐야, 다들? >
<허허허, 확실히 뭔가 색다릅니다만…… >
석주와 김중령 외에는 혁과 미키가 듣기에 우수에 젖은 음울한 분위기는 어느 정도
가셨지만 역시 몽환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섬세한 음률에 압도되고 있었다.
아니 석주와 김중령 등 다소 무감각한 남자 3~4명을 제외하고 대부분 우쿄의 음악에
심취되기 시작했고 이윽고 연주가 마친 뒤에도 최면에 걸린 듯 몽환의 여운에서 헤어나질
못하다가 무의식적으로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브라보!!!!!!!!!!!!!!!!!! >
<멋있네!!!!!!!!!!!!! >
무감각한 남자 3~4명도 분위기에 휩쓸려 박수를 쳤다.
여자 한 두 명은 남편은 팽개쳐두고 다가와 우쿄를 안아줬다.
<그럼 선생님, 다음에 또 찾아 뵙겠습니다. 오늘 정말 즐거웠습니다.
<그래. 다음에도 또 놀러 들 와라. 나도 간만에 옛날 제자들을 보니 반가웠다. >
<우리 가기 전에 “스승의 은혜” 노래를 합창해야 하는 거 아이가? >
<됐다 인석아, 민폐야! 마음만은 고맙게 받아주마. >
모두들 거나하게 취하고 즐거움과 석별의 아쉬움이 뒤섞인 마음으로 작별의 인사를 했다.
김중령도 석주에게 경례를 하면서 군대식으로 작별인사를 했다.
<중령 김덕령, 원대복귀를 저의 전임상관이신 권석주 대위님께 보고 드립니다, 충성!! >
<충성!! 다음에 보세!! >
<아참, 강중위와 아드님께도 작별인사를….. >
한 켠에서 -몇몇 미성년자 보호법 위반범죄자들의 부추김으로 맥주 몇 잔이 들어간-
우쿄가 혁에게 다소 어리광을 부리듯 떼를 썼다.
< 先輩, 今夜私の家で眠ればならないですか。
(선배님, 오늘밤 저희 집에서 주무시면 안돼요?) >
<그, 글쎄? 폐가 되지 않겠니? >
혁은 좀 당황했다. 술이 좀 들어가자 알코올기운으로 콧소리까지 내면서 어린애같이
응석을 부리는 모습이 평소의 우쿄와는 전혀 다른 처음 보는 모습이라 당황스러웠고
무척 귀엽기도 하고 빨갛게 상기된 표정이 왠지 요염해 또다시 흥분시켰지만 그렇다고
스승에게 폐를 끼칠 수야 있나 해서였다.
우쿄의 모습이 남자답지 못하다고 생각해서 못마땅해하는 김중령과 같이 그걸 본 석주는
혁에게 제안했다.
<그래, 오늘 자고 가라. 나하고 한잔 더하게. >
<하지만….. >
<괜찮아, 괜찮아. >
<그렇다면 오늘 폐 좀 끼치겠습니다. 미키씨 혼자 갈 수 있겠어? >
석주에게 대답한 후 자신에게 물어오는 혁에게 미키는 괜찮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우쿄와 혁이 한 집에서 같이 잔다는 게 걱정스러웠다.
<걱정 말그라, 마. 내가 같은 방향인께네. 내가 에스코트 해주면 된다 아이가? >
영진이 미키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호기를 부리며 나섰다가 미키에게 손등을
꼬집혔다.
<그래, 좀 부탁한다. 그럼 미키씨, 연락할게. >
미키는 고개를 끄떡였다.
그 뒤 혁과 김중령이 거수경례를 했다. 석주는 혁의 모습에서 비록 예비역이지만
절도 있는 군인정신으로 충만한 청년장교의 기상이 느껴졌다.
석주가 단골로 가는 독일풍 호프집 “비스마르크”에서 독일 식 소시지에 자우어크라우트
(독일 식 양배추 장아찌)를 안주 삼아 흑맥주-다른 호프집에서 나오는 것과 같은 그냥
맥주에 조그마한 병 흑맥주를 타서 나온 가짜가 아닌 진짜 흑맥주가 나와서 석주의
마음에 들었던- 를 기울이며 2차를 시작한 스승과 제자의 술자리는 점차적으로 우쿄에
대한 담소로 기울였다.
<어이구~~ 민혁이, 너에 비하면 우리 우경이는 그냥 애기야, 애기. >
<선배인 제가 보기에는 의젓하고 어른스러운 면도 있습니다. >
<그러냐? >
석주는 혁에게 우쿄의 학교생활을 들을 수 있었고 혁은 우쿄의 어린시절등을 많이
들을 수 있었다.
실제로 거의 상처뿐이었던 재작년과 달리 이번의 한국적응은 비교적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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