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부-----------------------------------
우선 내가 해야 할 일을 종합 정리해 보자.
내가 명계를 거쳐서 여기까지 온 목적은 구미호 때문이다.
구미호를 완전히 척살을 하던지 아니면 데리고 돌아가는 것이다.
일단 구미호는 지금 근처에 있으므로 싸움을 해서 이기면 내가 우선적으로 해결해야하는 문제는 끝을 낸다.
문제는 구미호 때문에 벌어진 다른 문제들이다.
무림의 모든 대소사가 이미 나의 움직임에 큰 영향을 받고 있다.
게다가 벌려놓은 일들은 전부 굵직한 것들이라 해결하지 않고 내가 사라진다면 엄청난 재앙으로 다가 올지도 모른다.
정천과 운지가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구미호만 처리를 하느냐.
아니면 무림의 모든 일을 다 처리하고 가느냐.
식사 준비가 한창이던 둘은 갑자기 나를 빤히 쳐다 보았다.
“뭐야? 왜 그래?”
“주인님. 가만히 생각해 봤는데요.”
“뭘?”
“얘도 이름이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강시에게 무슨 이름이야?”
“그래도 이제 제 양자가 된 애인데... 흑흑...”
잠시 깜박했다.
무슨 강시를 자식으로 받아들여서 이렇게 교육을 하는건지...
“그래 생각하고 있는건?”
“그게요... 주인님이 지어주세요.”
살다보니 강시의 이름도 짓는 경우가 생기는구만.
난 정천을 쳐다 보았다.
아무래도 이런 분야는 이놈의 잔머리가 필요할 것 같다.
무언의 압력을 넣자 정천이 알아서 기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운천이 어떨까요?”
“운천?”
“네 운천요. 운지님의 운. 제갈천님이 천.”
순간 욕지거리가 올라왔지만 운지의 밝아지는 얼굴을 보고 차마 그 앞에서 화를 낼 순 없었다.
이자식이 하필이면 내 이름을 그딴 곳에다 붙이다니.
운지는 내 이름과 자신의 이름을 합해서 지었다고 정천을 대단히 칭찬하고 나섰다.
저놈의 강시를 그때 없앴어야 하는 건데....
이름 문제는 거기서 일단락되고 이미 익어서 맛있는 향기를 뿜고 있는 고기를 집어 들었다.
지금은 강시 따위의 이름이 중요한게 아니다.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의 범위를 결정짓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내가 무림의 신으로 군림할 것도 아니니까.
환술이 펼쳐진 요상한 곳에서의 식사도 나의 식욕을 막지는 못했다.
뭐 한술 먹고 나니 환술이 약해지기라도 한 듯이 이젠 평상시처럼 보였다.
정천이야 아직 수련이 덜되었으니 헤매고 있지만.
조금 전부터는 환상의 세계에 진입했지만 정천만이 그 환상을 체험하고 있었다.
뭐 대충 생각으로도 파도가 치고 번개도 간간히 날라오고 땅이 두어번 뒤집어지는 그런 한심한 환상이다.
진법으로 만들어도 충분히 되는 것을 피곤하게 이렇게 환술을 쓰다니.
구미호가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는 것인지 다른 꿍꿍이가 있는지 모르겠다.
자신이 영역화를 하면서 환술을 과도하게 사용하고 있는데 막상 나와의 대결을 승리로 이끌 자신이 있으니 이런 엄청난 힘을 쏟아 붓겠지?
아니면 허장성세로 이러는 것인지...
앞에 뭔가가 있다고 느껴지는 곳까지 다가가자 사람들이 하나둘 보였다.
현사의 지시로 이곳에 온 녹림의 사람들이 여기저기 널려있었다.
말 그대로 빨래가 널린 듯이 나무에 하나씩 걸려있었다.
“이게 무슨 조화람. 바닥에 있는건 하나도 없고 모조리 나무에 걸려있군. 이런 환술도 있나? 나무가 좋아서 스스로 올라가진 않았을텐데...”
“대단하십니다. 이 상황에서도 농담이 나오시는걸 보니.”
“환락진에 걸린 모양이예요. 아마도 저 나무와 정사를 한뒤 바로 사망했을걸요.”
“어떻게 죽어도 저렇게 죽냐. 아무리 우리 애들이지만 추한 모습은 안보이는게 좋지.”
난 섭물진기로 나무에 널려있는 삽십여구의 시체를 한자리로 몰아 화장시켰다.
어짜피 땅에 묻기엔 시간도 없고 위생상 이렇게 태우는 것이 현명하다.
“뭐 그래도 죽기 전에 최고의 환락은 맛보고 죽었겠군. 자자 어서 가보자고.”
지금 저들의 죽음을 애도해봐야 알아주는 사람도 없다.
내게 주어진 일을 처리하는게 우선이다.
이번에 보이는 시체는 급살을 당했는지 모두 제자리에 선채로 죽어있었다.
이런건 듣도 보도 못한 광경이다.
이십여명이 뭔가를 보고 놀랐는지 눈이 터질듯이 커진 상태로 숨을 멈추었다.
그렇게 지옥훈련을 했는데도 놀랄게 있다는게 신기하다.
내가 시킨 훈련이 그렇게 시시했단 말인가...
“주인님이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알겠지만 저들도 주인님도 탓할 필요가 없어요. 이건 의지의 문제로 저들은 훈련과는 상관없이 저들이 평생을 짊어지고 가던 두려움에 결국 자신의 목숨을 뺏긴 것이니까요. 의지가 굳건하지 못하면 언제든 환술의 먹이가 되는거죠.”
난 그들 역시 그대로 화장을 시켰다.
모여 있으니 그대로 불만 지르면 되었다.
수하들의 죽음에도 이렇게 덤덤하게 지나쳐야 하다니...
내가 막 발을 뗄 때 얕은 파공성이 들렸다.
아주 미세하지만 공기의 흐름이 바뀌는 소리.
이미 내 귀를 속일 수 있는 소리는 없으며 내 감각을 피할만한 기척은 없다.
“누구냐.”
말과 동시에 나의 기침이 날아갔다.
원래라면 한발로 끝이 나겠지만 지금처럼 예민한 상황에서 놓치기라도 하면 얼마나 고생할까 싶어 그 공간 전체를 가두는 기침을 보냈다.
움직이면 바로 고슴도치가 되도록 말이다.
죽는다 해도 혼을 열어보면 되는 문제니 상광하지 않는다.
내가 날린 기침에는 웬 여인이 꼼짝하지 못하고 잡혀있었다.
“주인님 풍기는 기운으로 보아 구미호의 꼬리중 하나 같네요.”
“그런것 같군. 어떻할까? 꼬리를 하나씩 없애는게 우리에게 도움이 될까?”
“물론이죠. 미랑 같은 경우는 다르지만 지금부터는 하나씩 잡아두는게 좋을것 같아요.”
이미 본체의 힘이 강력해졌으니 겁내지 않고 활동을 시작했겠지?
게다가 꼬리를 이렇게 활용하면서 말야.
운지는 자신이 나온 반지에 이런 환수들을 가둘 수 있다고 했다.
뭐 봉황을 봉인하는 반지에 저런 하찮은 것들이 갇히지 않을까?
운지가 일러주는 방법대로 그녀를 반지에 봉인해 버렸다.
이참에 미랑도 같이 봉인해 버렸다.
정천의 눈빛이 약간 흔들렸지만 그도 자신은 사람이고 미랑은 환수라는 것을 인지하기에 별 거부반응은 없었다.
다만 아쉬워 한다고나 할까?
한동안은 해만 떨어지면 붙어있었느니...
아무튼 꼬리가 9개라 했는데 쉽게 2개는 잡았다.
구미호가 아니라 구미호의 꼬리 사냥을 시작한 기분이 들었다.
신도문에서 한참을 걷고 있지만 이 길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아마 이정도 걸었으면 신도문을 벗어나서 마을에 들어갔을 정도인데 아직 같은 곳에 있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구미호가 친 환술에 걸려든 것이지만 이정도로 대단하지는 않을텐데.
“운지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공간 말야. 이 공간이 아공간이야?”
“주인님도 아공간을 아세요? 신도문에 들어왔을 때부터 우리는 계속 이 아공간에 있었던거예요. 저도 그렇지 않을 것이라도 생각했지만 지금보니 처음부터 그녀의 공간에서 이렇게 움직이고 있었네요.”
“만약에 내가 아는 상식이라면 지금 상당히 큰일이 벌어질 것도 같은데 말야.”
아공간이란 말 그대로 자신만의 공간이다.
이 공간 안에서는 자신의 의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의지만으로 만들어낼 수 있으며 환경 역시 의지로 바꾸어 버린다.
만약 그런 공간에 외부인이 들어간다면 그건 벗어날 수 없다고 봐야한다.
단 하나 예외가 있다면 더욱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
지금 나야 굳건하다고 생각하지만 운지나 정천은 알 수 없다.
특히 정천은 보통 사람이라 이런 경우를 겪어보지 못했을 테고 그렇다는건 바로 구미호의 밥이 된다는 소리지.
난 청운검을 소환하여 이 공간의 한 귀퉁이를 찢어버리기로 했다.
약간의 기가 소모되지만 계속해서 정천을 보호하며 싸우기보다 아예 이놈을 밖으로 밀어내고 홀가분하게 싸우는게 좋을 것이란 판단에서다.
“단.”
정천이 서 있던 옆의 공간이 약간 일그러지자 운지가 재빨리 정천을 발로 차서 날려보냈다.
시간이 있는 것이라면 뭐 말로 하고 밀어내겠지만 이런저런 설명을 하기도 귀찮고 이미 내가 검을 들고 벨 자세를 취하자 운지는 내 뜻을 알았는지 몸을 날리고 있었다.
“흠. 손발이 착착 맞는군.”
“호호. 주인님도 참.”
“근데 그거도 보내야 하는거 아냐?”
“주인님도 얘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강시예요. 의지 자체가 없어요. 아니 의지는 있지만 하나뿐이라 구미호도 어떻게 못하는 경우죠. 게다가 제가 약간 교육을 했기 때문에 환수에 가깝다고 생각하시면 되요. 환수는 이런 아공간에서의 전투에 능숙하기 때문에 별 영향을 받지 않거든요.”
물론 나도 아공간의 전투에선 영향을 받지 않는다.
내 육체는 나의 의지로 만들어진 덩어리다.
아공간에서 별 이상한 환경이 닥친다하더라도 아무런 피해없이 이겨낼 수 있다.
명계에서 수련한 것이 이런데서 쓰이다니...
셋은 좀 더 깊숙이 들어가기로 했다.
이제 구미호를 만나야 할 시간이 다 되어 가니까.
계속 걸어도 이젠 시체가 보이지 않았다.
신도문의 사람들은 이번 피해를 벗어난 건가?
지금쯤이면 하나둘 시체도 보이고 싸운 흔적도 있어야 할텐데.
뭐 싸움이라고 해도 상대가 안되겠지만.
한시진을 더 걸었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저 이렇게 걷다가 지치게 만들 목적인가?
그럴거면 이렇게 거창하게 차리지 않아도 충분히 그렇게 만들건데.
순간 화가나서 기를 모았다.
내가 가진 기의 양이 얼마인지는 모르지만 이따위 환술을 날려 벌릴 수도 있을 듯했다.
찾으려고 다녔는데 보이지가 않으면 뒤집어엎어서라도 찾아야지.
운지는 계속 불어나는 나의 기에 부르르 떨더니 다시 반지로 들어가 버렸다.
뭐 거기가 제일 안전하겠지.
먼저 들어간 꼬리도 있어 심심하지도 않을테고.
“이얍.”
아마 이정도면 이 환술의 구석구석까지 나의 기가 미쳤을 테고 구미호도 내 존재감을 알았을 것이다.
조금씩 불어나는 나의 기는 환술로 이루어진 공간을 일그러뜨리며 점점 환상이 사라지고 있었다.
“이래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단 말이지. 좋아. 누기 이기나 해보자고.”
좀 더 기를 모았다.
아예 이 공간을 하나로 축소 시켜 터트릴 생각을 했다.
생각은 곧 의지로 작용을 하고 그런 의지가 구미호 보다 강하다면 분명히 이 공간은 내가 점령하게 되고 내 의지대로 움직이게 된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르자 아름다운 미성이 들렸다.
“꺄~~~악.”
‘흠. 이 정도면 조수미 부럽지 않겠군.’
내 눈 앞에 축소된 공간이 둥실 떠 올랐다.
농구공 만한 크기로 생각을 하자 실제로 그런 정도의 크기로 아공간이 줄어들었다.
아마 그 속에 있는 구미호도 같이 작아졌겠지?
이제 잡았다는 생각에 반지에서 운지를 불러 내었다.
어짜피 반지에 봉인을 해야할테니 운지만 밖으로 나오면 바로 봉인에 들어갈 참이었다.
운지가 반지에서 나오는 순간 아공간에 약간의 균열이 가더니 그속에서 무엇인가가 8개가 튀어나왔다.
아뿔사.
이 영악한 것이 꼬리를 총동원하여 공간을 찢고 꼬리와 나누어 도망을 친 것이다.
물론 그 찰나의 시간이지만 내가 4마리를 붙잡았다.
반을 잡았지만 역시 구미호는 꼬리들 틈에 섞여 달아났고 난 잡은 꼬리 4개만 더 봉인할 뿐이었다.
한방에 끝낼 수 있었는데 역시 그런 행운은 아무에게나 오지 않나보다.
구미호 자체는 놓쳤지만 그녀의 힘은 4할이 줄었을 것이다.
아무리 본신의 힘을 중시한다고 해도 꼬리가 그 힘에 얼마의 보탬이 되는지 알고 있다면 그녀도 지금 붙잡혀 있는 꼬리가 아쉬울 것이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다 잡은걸 놓쳤네요.”
“뭐 괜찮아. 아직 때가 아닌가 보지. 그보다 이놈은 어디에 있는거야?”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은 신도문의 정문에서 정확히 50m 떨어진 곳이었다.
그러니 애초에 우리는 신도문에 다가가지도 못했고 그 앞에 펼쳐진 환상에서 이때까지 헤매고 다녔던 것이다.
신도문에 간다고 생각하고 이제 앞에 보이니까 한순간 안심한 것이 이런 봉변을 만나다니.
왠지 심리전에선 구미호에게 안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정천은 우리보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우릴 발견하고 달려왔다.
“주군. 그렇게 갑자기 움직이시면...”
“됐으니까 저기 가서 내가 왔다고 알리기나 해라.”
정천도 놀랐는지 어리벙벙하면서 신도문의 제자에게 말을 걸었다.
무림에서 날 모르면 간첩 소리를 듣는 마당에 내가 직접 도와주러 왔다고 하면 신도문주는 버선발로 뛰어 나올 것이다.
그런데 웬걸.
분명히 안으로 기별을 넣는 것을 봤는데 아직도 아무런 소식이 없다.
경비를 서던 무사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날 봤다.
아니 이것들이 장난하나?
내가 여기까지 친히 왔는데 아직 아무런 연락도 없다니.
화가 치밀어 이놈의 문짝을 부수고 볼까란 생각도 했지만 처음의 인연에서 얼굴을 붉혔던게 기억나서 참기로 했다.
그래도 이건 너무한거 아닌가?
구세주가 오셨는데 이렇게 문전박대라니...
우선 내가 해야 할 일을 종합 정리해 보자.
내가 명계를 거쳐서 여기까지 온 목적은 구미호 때문이다.
구미호를 완전히 척살을 하던지 아니면 데리고 돌아가는 것이다.
일단 구미호는 지금 근처에 있으므로 싸움을 해서 이기면 내가 우선적으로 해결해야하는 문제는 끝을 낸다.
문제는 구미호 때문에 벌어진 다른 문제들이다.
무림의 모든 대소사가 이미 나의 움직임에 큰 영향을 받고 있다.
게다가 벌려놓은 일들은 전부 굵직한 것들이라 해결하지 않고 내가 사라진다면 엄청난 재앙으로 다가 올지도 모른다.
정천과 운지가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구미호만 처리를 하느냐.
아니면 무림의 모든 일을 다 처리하고 가느냐.
식사 준비가 한창이던 둘은 갑자기 나를 빤히 쳐다 보았다.
“뭐야? 왜 그래?”
“주인님. 가만히 생각해 봤는데요.”
“뭘?”
“얘도 이름이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강시에게 무슨 이름이야?”
“그래도 이제 제 양자가 된 애인데... 흑흑...”
잠시 깜박했다.
무슨 강시를 자식으로 받아들여서 이렇게 교육을 하는건지...
“그래 생각하고 있는건?”
“그게요... 주인님이 지어주세요.”
살다보니 강시의 이름도 짓는 경우가 생기는구만.
난 정천을 쳐다 보았다.
아무래도 이런 분야는 이놈의 잔머리가 필요할 것 같다.
무언의 압력을 넣자 정천이 알아서 기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운천이 어떨까요?”
“운천?”
“네 운천요. 운지님의 운. 제갈천님이 천.”
순간 욕지거리가 올라왔지만 운지의 밝아지는 얼굴을 보고 차마 그 앞에서 화를 낼 순 없었다.
이자식이 하필이면 내 이름을 그딴 곳에다 붙이다니.
운지는 내 이름과 자신의 이름을 합해서 지었다고 정천을 대단히 칭찬하고 나섰다.
저놈의 강시를 그때 없앴어야 하는 건데....
이름 문제는 거기서 일단락되고 이미 익어서 맛있는 향기를 뿜고 있는 고기를 집어 들었다.
지금은 강시 따위의 이름이 중요한게 아니다.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의 범위를 결정짓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내가 무림의 신으로 군림할 것도 아니니까.
환술이 펼쳐진 요상한 곳에서의 식사도 나의 식욕을 막지는 못했다.
뭐 한술 먹고 나니 환술이 약해지기라도 한 듯이 이젠 평상시처럼 보였다.
정천이야 아직 수련이 덜되었으니 헤매고 있지만.
조금 전부터는 환상의 세계에 진입했지만 정천만이 그 환상을 체험하고 있었다.
뭐 대충 생각으로도 파도가 치고 번개도 간간히 날라오고 땅이 두어번 뒤집어지는 그런 한심한 환상이다.
진법으로 만들어도 충분히 되는 것을 피곤하게 이렇게 환술을 쓰다니.
구미호가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는 것인지 다른 꿍꿍이가 있는지 모르겠다.
자신이 영역화를 하면서 환술을 과도하게 사용하고 있는데 막상 나와의 대결을 승리로 이끌 자신이 있으니 이런 엄청난 힘을 쏟아 붓겠지?
아니면 허장성세로 이러는 것인지...
앞에 뭔가가 있다고 느껴지는 곳까지 다가가자 사람들이 하나둘 보였다.
현사의 지시로 이곳에 온 녹림의 사람들이 여기저기 널려있었다.
말 그대로 빨래가 널린 듯이 나무에 하나씩 걸려있었다.
“이게 무슨 조화람. 바닥에 있는건 하나도 없고 모조리 나무에 걸려있군. 이런 환술도 있나? 나무가 좋아서 스스로 올라가진 않았을텐데...”
“대단하십니다. 이 상황에서도 농담이 나오시는걸 보니.”
“환락진에 걸린 모양이예요. 아마도 저 나무와 정사를 한뒤 바로 사망했을걸요.”
“어떻게 죽어도 저렇게 죽냐. 아무리 우리 애들이지만 추한 모습은 안보이는게 좋지.”
난 섭물진기로 나무에 널려있는 삽십여구의 시체를 한자리로 몰아 화장시켰다.
어짜피 땅에 묻기엔 시간도 없고 위생상 이렇게 태우는 것이 현명하다.
“뭐 그래도 죽기 전에 최고의 환락은 맛보고 죽었겠군. 자자 어서 가보자고.”
지금 저들의 죽음을 애도해봐야 알아주는 사람도 없다.
내게 주어진 일을 처리하는게 우선이다.
이번에 보이는 시체는 급살을 당했는지 모두 제자리에 선채로 죽어있었다.
이런건 듣도 보도 못한 광경이다.
이십여명이 뭔가를 보고 놀랐는지 눈이 터질듯이 커진 상태로 숨을 멈추었다.
그렇게 지옥훈련을 했는데도 놀랄게 있다는게 신기하다.
내가 시킨 훈련이 그렇게 시시했단 말인가...
“주인님이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알겠지만 저들도 주인님도 탓할 필요가 없어요. 이건 의지의 문제로 저들은 훈련과는 상관없이 저들이 평생을 짊어지고 가던 두려움에 결국 자신의 목숨을 뺏긴 것이니까요. 의지가 굳건하지 못하면 언제든 환술의 먹이가 되는거죠.”
난 그들 역시 그대로 화장을 시켰다.
모여 있으니 그대로 불만 지르면 되었다.
수하들의 죽음에도 이렇게 덤덤하게 지나쳐야 하다니...
내가 막 발을 뗄 때 얕은 파공성이 들렸다.
아주 미세하지만 공기의 흐름이 바뀌는 소리.
이미 내 귀를 속일 수 있는 소리는 없으며 내 감각을 피할만한 기척은 없다.
“누구냐.”
말과 동시에 나의 기침이 날아갔다.
원래라면 한발로 끝이 나겠지만 지금처럼 예민한 상황에서 놓치기라도 하면 얼마나 고생할까 싶어 그 공간 전체를 가두는 기침을 보냈다.
움직이면 바로 고슴도치가 되도록 말이다.
죽는다 해도 혼을 열어보면 되는 문제니 상광하지 않는다.
내가 날린 기침에는 웬 여인이 꼼짝하지 못하고 잡혀있었다.
“주인님 풍기는 기운으로 보아 구미호의 꼬리중 하나 같네요.”
“그런것 같군. 어떻할까? 꼬리를 하나씩 없애는게 우리에게 도움이 될까?”
“물론이죠. 미랑 같은 경우는 다르지만 지금부터는 하나씩 잡아두는게 좋을것 같아요.”
이미 본체의 힘이 강력해졌으니 겁내지 않고 활동을 시작했겠지?
게다가 꼬리를 이렇게 활용하면서 말야.
운지는 자신이 나온 반지에 이런 환수들을 가둘 수 있다고 했다.
뭐 봉황을 봉인하는 반지에 저런 하찮은 것들이 갇히지 않을까?
운지가 일러주는 방법대로 그녀를 반지에 봉인해 버렸다.
이참에 미랑도 같이 봉인해 버렸다.
정천의 눈빛이 약간 흔들렸지만 그도 자신은 사람이고 미랑은 환수라는 것을 인지하기에 별 거부반응은 없었다.
다만 아쉬워 한다고나 할까?
한동안은 해만 떨어지면 붙어있었느니...
아무튼 꼬리가 9개라 했는데 쉽게 2개는 잡았다.
구미호가 아니라 구미호의 꼬리 사냥을 시작한 기분이 들었다.
신도문에서 한참을 걷고 있지만 이 길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아마 이정도 걸었으면 신도문을 벗어나서 마을에 들어갔을 정도인데 아직 같은 곳에 있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구미호가 친 환술에 걸려든 것이지만 이정도로 대단하지는 않을텐데.
“운지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공간 말야. 이 공간이 아공간이야?”
“주인님도 아공간을 아세요? 신도문에 들어왔을 때부터 우리는 계속 이 아공간에 있었던거예요. 저도 그렇지 않을 것이라도 생각했지만 지금보니 처음부터 그녀의 공간에서 이렇게 움직이고 있었네요.”
“만약에 내가 아는 상식이라면 지금 상당히 큰일이 벌어질 것도 같은데 말야.”
아공간이란 말 그대로 자신만의 공간이다.
이 공간 안에서는 자신의 의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의지만으로 만들어낼 수 있으며 환경 역시 의지로 바꾸어 버린다.
만약 그런 공간에 외부인이 들어간다면 그건 벗어날 수 없다고 봐야한다.
단 하나 예외가 있다면 더욱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
지금 나야 굳건하다고 생각하지만 운지나 정천은 알 수 없다.
특히 정천은 보통 사람이라 이런 경우를 겪어보지 못했을 테고 그렇다는건 바로 구미호의 밥이 된다는 소리지.
난 청운검을 소환하여 이 공간의 한 귀퉁이를 찢어버리기로 했다.
약간의 기가 소모되지만 계속해서 정천을 보호하며 싸우기보다 아예 이놈을 밖으로 밀어내고 홀가분하게 싸우는게 좋을 것이란 판단에서다.
“단.”
정천이 서 있던 옆의 공간이 약간 일그러지자 운지가 재빨리 정천을 발로 차서 날려보냈다.
시간이 있는 것이라면 뭐 말로 하고 밀어내겠지만 이런저런 설명을 하기도 귀찮고 이미 내가 검을 들고 벨 자세를 취하자 운지는 내 뜻을 알았는지 몸을 날리고 있었다.
“흠. 손발이 착착 맞는군.”
“호호. 주인님도 참.”
“근데 그거도 보내야 하는거 아냐?”
“주인님도 얘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강시예요. 의지 자체가 없어요. 아니 의지는 있지만 하나뿐이라 구미호도 어떻게 못하는 경우죠. 게다가 제가 약간 교육을 했기 때문에 환수에 가깝다고 생각하시면 되요. 환수는 이런 아공간에서의 전투에 능숙하기 때문에 별 영향을 받지 않거든요.”
물론 나도 아공간의 전투에선 영향을 받지 않는다.
내 육체는 나의 의지로 만들어진 덩어리다.
아공간에서 별 이상한 환경이 닥친다하더라도 아무런 피해없이 이겨낼 수 있다.
명계에서 수련한 것이 이런데서 쓰이다니...
셋은 좀 더 깊숙이 들어가기로 했다.
이제 구미호를 만나야 할 시간이 다 되어 가니까.
계속 걸어도 이젠 시체가 보이지 않았다.
신도문의 사람들은 이번 피해를 벗어난 건가?
지금쯤이면 하나둘 시체도 보이고 싸운 흔적도 있어야 할텐데.
뭐 싸움이라고 해도 상대가 안되겠지만.
한시진을 더 걸었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저 이렇게 걷다가 지치게 만들 목적인가?
그럴거면 이렇게 거창하게 차리지 않아도 충분히 그렇게 만들건데.
순간 화가나서 기를 모았다.
내가 가진 기의 양이 얼마인지는 모르지만 이따위 환술을 날려 벌릴 수도 있을 듯했다.
찾으려고 다녔는데 보이지가 않으면 뒤집어엎어서라도 찾아야지.
운지는 계속 불어나는 나의 기에 부르르 떨더니 다시 반지로 들어가 버렸다.
뭐 거기가 제일 안전하겠지.
먼저 들어간 꼬리도 있어 심심하지도 않을테고.
“이얍.”
아마 이정도면 이 환술의 구석구석까지 나의 기가 미쳤을 테고 구미호도 내 존재감을 알았을 것이다.
조금씩 불어나는 나의 기는 환술로 이루어진 공간을 일그러뜨리며 점점 환상이 사라지고 있었다.
“이래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단 말이지. 좋아. 누기 이기나 해보자고.”
좀 더 기를 모았다.
아예 이 공간을 하나로 축소 시켜 터트릴 생각을 했다.
생각은 곧 의지로 작용을 하고 그런 의지가 구미호 보다 강하다면 분명히 이 공간은 내가 점령하게 되고 내 의지대로 움직이게 된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르자 아름다운 미성이 들렸다.
“꺄~~~악.”
‘흠. 이 정도면 조수미 부럽지 않겠군.’
내 눈 앞에 축소된 공간이 둥실 떠 올랐다.
농구공 만한 크기로 생각을 하자 실제로 그런 정도의 크기로 아공간이 줄어들었다.
아마 그 속에 있는 구미호도 같이 작아졌겠지?
이제 잡았다는 생각에 반지에서 운지를 불러 내었다.
어짜피 반지에 봉인을 해야할테니 운지만 밖으로 나오면 바로 봉인에 들어갈 참이었다.
운지가 반지에서 나오는 순간 아공간에 약간의 균열이 가더니 그속에서 무엇인가가 8개가 튀어나왔다.
아뿔사.
이 영악한 것이 꼬리를 총동원하여 공간을 찢고 꼬리와 나누어 도망을 친 것이다.
물론 그 찰나의 시간이지만 내가 4마리를 붙잡았다.
반을 잡았지만 역시 구미호는 꼬리들 틈에 섞여 달아났고 난 잡은 꼬리 4개만 더 봉인할 뿐이었다.
한방에 끝낼 수 있었는데 역시 그런 행운은 아무에게나 오지 않나보다.
구미호 자체는 놓쳤지만 그녀의 힘은 4할이 줄었을 것이다.
아무리 본신의 힘을 중시한다고 해도 꼬리가 그 힘에 얼마의 보탬이 되는지 알고 있다면 그녀도 지금 붙잡혀 있는 꼬리가 아쉬울 것이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다 잡은걸 놓쳤네요.”
“뭐 괜찮아. 아직 때가 아닌가 보지. 그보다 이놈은 어디에 있는거야?”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은 신도문의 정문에서 정확히 50m 떨어진 곳이었다.
그러니 애초에 우리는 신도문에 다가가지도 못했고 그 앞에 펼쳐진 환상에서 이때까지 헤매고 다녔던 것이다.
신도문에 간다고 생각하고 이제 앞에 보이니까 한순간 안심한 것이 이런 봉변을 만나다니.
왠지 심리전에선 구미호에게 안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정천은 우리보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우릴 발견하고 달려왔다.
“주군. 그렇게 갑자기 움직이시면...”
“됐으니까 저기 가서 내가 왔다고 알리기나 해라.”
정천도 놀랐는지 어리벙벙하면서 신도문의 제자에게 말을 걸었다.
무림에서 날 모르면 간첩 소리를 듣는 마당에 내가 직접 도와주러 왔다고 하면 신도문주는 버선발로 뛰어 나올 것이다.
그런데 웬걸.
분명히 안으로 기별을 넣는 것을 봤는데 아직도 아무런 소식이 없다.
경비를 서던 무사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날 봤다.
아니 이것들이 장난하나?
내가 여기까지 친히 왔는데 아직 아무런 연락도 없다니.
화가 치밀어 이놈의 문짝을 부수고 볼까란 생각도 했지만 처음의 인연에서 얼굴을 붉혔던게 기억나서 참기로 했다.
그래도 이건 너무한거 아닌가?
구세주가 오셨는데 이렇게 문전박대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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