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의 제목이 표절이라는 말도 안 되는 리플에 대한 답변을 적었다가 지웁니다.
제 글을 아껴주시는 분들의 심기가 불편할 것 같았습니다.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와 제 글의 제목이 비슷하지만, 저작권협약에 의하면 표절 성립이
안 될 뿐더러, 제 스스로도 결코 표절이 아닙니다. 비슷하기만 하면 무조건 표절이라는 색
안경쓰고 일단 상대방 상처 준 후에, 아니면 말고. 이런 무책임한 행동은 제발 자제해 주세요.
제 글에서 남의 것을 차용한 것은 김용의 무협 세계관을 따온 것. 그것 하나 뿐입니다.
표절이 얼마나 위험한 행동인지 제가 잘 알고, 또 오랜 직장생활 중에 표절로 인해 피해를
본 적이 있기에 그딴 더러운 짓은 절대 하지 않습니다. 타사의 표절 광고로 회사 법무팀과
고소를 몇 번하게 되면 한국이 정하고 있는 저작권법과 국제저작권협약은 외우게 됩니다.
제 글에서 표절은 없습니다.
현재 연말이라 회사일이 무척 바쁩니다. 그리고 연말과 신년초를 출장지인 일본에서 보내게
되어 그 준비로 집에서도 준비를 해야 합니다. 최대한 기다려 주시는 고마운 분들을 위해 틈
틈히 글을 적어 올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늦어지더라도 연재 중단은 결코 없을 겁니다.
제가 감기를 연재중이라 글의 속도가 느린 점. 늘 죄송스럽습니다.
감기 하나만 연재할 것을 그랬나 봅니다. ㅠ_ㅠ
무공이 가장 쉬웠어요. -12 : 신녀문주 설수련
"군사! 이것이.. 이것이 참 말인가? "
"죄송합니다. 맹주님. 저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
"타앙! "
무림맹주 남주혁은 지금 자신의 손에 쥐고 있는 전서를 떨리는 손으로 구기며 거세게 탁자를
내려쳤다. 그의 갸름한 턱에 소담하게 자란 턱수염이 지금 그의 감정이 어떠한지 보여주 듯
떨리고 있다.
"이것들이! 중원무림군을 보내라고 내 청을 했건만.. 광견십호를 다 모아서 보내! "
광견십호. 궁가방의 황봉, 당문의 당영월, 화산의 마연, 남궁세가의 남중세진, 제갈세가의 제
갈소, 마교의 진가림, 청산의 장소연, 무당의 이균, 팽가의 팽현진, 모용가의 모용호진 이렇
게 열 명의 무림인을 가르키는 말로써, 중원에서 내노라 하는 정파의 장로와 제자들 중에 종
잡을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행동으로 사고치는 것을 극도로 좋아하는 망종들을 부르는 말
이 지금 무림맹주의 입에서 튀어 나오고 있었다.
"그나마... 마연이 현재 무위대에 몸담는 바람에 아홉만 모이는 것으로.. "
"답답하군. 이보게, 군사. 아홉이 모이나, 열이 모이나 이 녀석들이 둘 이상 모이면 어떻게 되
는지 자네도 잘 알지 않나? 그리고 왜 아홉이야! 마교는 일부러 부르지도 않았는데 자기 딸
년을 왜 보내! 왜! "
"저도 그것을 잘 모르겠습니다. 오랑캐에 짓밟힌 중원의 일이라면 응당 자신들도 함께 해야
한다고.. 막무가내로 보낸다는데, 좋은 뜻으로 한 말에 말릴 수도 없는 노릇이라.. "
"무림군을 구성해 연경을 공략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앞두고... 미친개들 때문에 벌써부터
자중지란이나 일으키지 않을지.. 어허, 어허, 이거 참..."
"그래도 그들이 지니고 있는 무위라면 황실도 기꺼워 할 것이옵니다. "
"무위가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대충 칼 좀 쥐는 녀석들로 보내라고 했건만.. 일이 더 커졌어. "
2년전 처음 맹주에 추대된 남주혁은 정파 무림인들을 하나로 일통한 것을 자축하기 위해 대
대적으로 무림대회를 개최했었다. 그러나 무림대회에 출전한 몇몇의 후기지수들의 난동으
로 초대받은 명망있는 노고수들까지 부상을 입고, 오전에 개최한 무림대회가 그날 오후 반나
절만에 끝나버린 기억이 무림맹주 남주혁의 머릿속에서 악몽처럼 다시 떠올랐다.
"황봉, 그는 지금 어디있나? 그라도 어디 숨겨 놓아야 할 텐데..자네가 어서 가서 찾아보게. "
"그게.. 당문에서 영월이를 수장으로 보냈다는 말을 듣고, 조금전 궁가방 제자들을 이끌고 사
천으로 달려갔습니다. 저도 말렸지만 이번에는 끝장을 본다면서.. "
"이 놈이! 내 그토록 자중하라 일렀건만.. "
그때 맹주실의 밖에서 시비인 듯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맹주님. 금군 무위대 부총병이신 방시천 대인께서 오셨사옵니다. "
"어서 뫼시거라. "
맹주실의 방문이 소리없이 열리며 붉은색 주갑을 잘 차려입은 장수가 들어온다. 육중한 갑주
가 잘그락 거리는 소리를 내며 들어온 그는 익숙한 군례로 절도있게 맹주에게 인사를 한다.
"맹주. 그간 강녕하셨소이까? "
"방대인도 안색을 보아하니 원기가 충만하신 듯 하오이다. 그런데 오늘 어쩐 일이신지.. 이미
중원무림군을 소집한 상태라 곧 중경으로 보낼터인데 말이오. "
"그것 때문에 소장이 이렇게 왔소이다. 황상 폐하께오선 무림맹주의 노고를 크게 치하하시
며, 중원을 핍박하는 오랑캐를 몰아내는데 무림인들이 자발적으로 나선다는 것에 기꺼워 하
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곧 중원무림군을 마중하기 위해 대송황실 선발대를 보내기로 하명하
셨소이다. 자세한 것은 이것을 읽어보시길.. "
남주혁은 그가 건내 준 붉은 비단 배첩을 읽다가 떨리는 손으로 떨어트리고 만다.
"광견십호가.. 십호가.. "
무림맹주가 떨어트린 배첩을 읽는 군사의 손도 역시 떨리고 있었다.
"세상에 선발대에 마연이.. 십호가 다 모이는 일이 일어나다니.."
"그것이 황상께오서 그간 황실에 충성을 하느라 수고한 마 참장에게 오랜만에 사문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며 은혜를 배풀어 주신 것이지요. 모두가 황상의 하해같은 은덕이옵니
다. 허허허.. "
"황제가 중원 무림을 자멸 시키기로 단단히 결심한 모양이야"라고 나지막한 혼잣말을 하는
맹주 남주혁과, 여동생 당영월을 걱정하는 무림맹 군사 당호진, 그리고 그들 둘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는 무위대 부총병 방시천. 이들 셋이 묘한 어울림을 보이고 있는 무림맹주실
지붕위에는 알 수 없는 먹구름이 피어 오르고 있었다.
선우영은 지금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머릿속에선 꿈이라고 하지만
이 꿈에서 자신이 벗어날 수 없다는 것 또한 선우영은 알 수 있었다. 지난 시간 수십, 수백번
이나 잠을 잘 때 마다 꾸어온 꿈이기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고요함. 그러나 귀
로는 그 어떤 소리도 들을 수 없지만, 눈으로 보여지는 광경은 그의 눈을 뜨겁게 하고 가슴을
진탕시키고 있었다.
숲속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검은 연기. 그리고 밤하늘을 가득 메우며 수 많은 별똥별처럼 쏟아
지고 있는 불화살들. 지옥도처럼 아수라장이 된 전장의 한복판에서 누군가 선우영의 목덜미
를 강하게 움켜쥐고 뭐라고 말을 하고 있다. 그러나 선우영은 그의 말을 알아 들을 수 없었
다. 꿈속이기 때문인지 지금 선우영은 눈 앞에 있는 자가 하는 목소리를 그 어떤 것도 알아들
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고위 장수인 듯 화려한 금색 갑주를 걸친 그는 선우영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뭐라고 말을 계
속 한 후 자그마한 장신구를 하나를 손에 쥐어주고 전장으로 달려 갔다. 검은 연기 속으로 사
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아 바라보다가, 이내 손에 쥐어진 장신구를 바라보는 선우영.
그의 손에는 은장식이 된 나비문양의 작은 목걸이가 들려져 있었다. 바람이 불면 어디론가
훌쩍 날아가 버릴 것 같은 작은 나비 문양의 목걸이. 그것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는데 자신을
향해 칼을 내지르며 공격해 오는 적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오랜 전장 생활로 몸에 베인 절도
있는 동작으로 적의 공격을 재빨리 피한 후, 허리춤에 패검되어 있는 군검을 꺼내 들고 적을
향해 완만한 곡선을 이루며 내려쳤다.
무의식적인 반격을 성공시킨 후 다음 동작을 준비하려 할 때 한 줄기 뜨거운 핏줄기가 선우
영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고, 천천히 자신의 폼에 안겨오는 적의 희미한 미소를 볼 수 있었
다. 그 얼굴은, 선우영에게 매일 밤 골패를 가르쳐 주던 노인이었다.
"허억..."
마치 만장이 넘는 깊은 심연속에 빠져있다가 간신히 물밖으로 나온 것 처럼, 선우영은 지금
깊은 숨을 내쉬며 자신의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고 있었다. 온 몸이 물에 젖은 것 처럼 땀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그는 만져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선우영은 습관적으로 자신의 품속
으로 손을 가져가 목에 메달려 있는 목걸이를 만져 보았다. 차가우면서 따뜻한 금속의 감촉
이 식어있는 그의 손으로 전해져 온다.
본대가 전멸하던 그날, 남로정벌군 전군의 수장이었던 양호민이 그에게 주고 간 목걸이가
그의 목에 걸려 있었다. 한참을 열려진 창문을 통해 환하게 밝아진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때,
문밖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인, 기침 하셨사옵니까?"
"일어났다오, 들어오시구려."
목소리에 대답을 하며 침상에서 일어나 옷을 단정히 하는 선우영. 잠시 후 조용히 문이 열린
후 바닥에 놓여진 쟁만을 들고 분홍색 경장을 입은 여인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탁자위에 놓
여진 건포로 땀에 흠뻑 적은 목과 얼굴을 닦고 있는 선우영을 그녀가 지그시 바라보고 있다.
"지난 밤, 안 좋은 꿈이라고 꾸신 것 같사옵니다. 아직 편찮으신지요?"
"아니오. 잠을 자면 악몽에 빠지는 것은 하루 이틀도 아니라.. 이젠 익숙한 일상이 된 것 같구
려. 괜한 모습에 걱정을 끼쳐 미안하오."
"목이 마르실 것이온데, 소녀 차를 준비했사옵니다. 드시옵소서. 심기가 어지러울 때 도움이
되는 차이옵니다."
"고맙구려. "
그녀가 내어주는 따뜻한 찻잔을 들고 창밖을 바라보며 차를 마시기 시작한다. 벌써 이곳에
온지 몇 주가 흐르고 있었다. 그녀에게 대적을 배우기로 하고 머물게 된지 수십 날. 약조했던
대적은 이미 다 배우고, 머릿속에 아른거리는 그 음율을 이제 선우영 자신이 부를 수 있는 실
력을 가지게 되었지만, 간밤에 꾼 꿈 탓일지. 마음 한 켠에 자리잡고 있는 어두운 그림자는
선우영의 몸에서 사라질 줄 모르고 있었다.
"소저..."
"예 대인, 말씀하소서."
입안을 멤도는 차향을 느끼며 무언가 생각을 하던 선우영의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소저께서 항시 들고 다니시는 그 옥적. 혹여 사연이 있는 물건이오?"
그의 물음에 대답을 하지 않고 자신의 허리춤에 메달려 있는 옥적을 부드러운 손길로 메만
지는 설수련. 그 손의 움직임에 따라 반쯤 감기는 그녀의 눈가는 오래전 시간의 편린을 애써
끄집어 내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 옥적은 전대 주인이셨던 고매한 분께서 미천한 소녀에게 주시고 가신 하나 뿐인 신물이
옵지요. 그런데 어찌 대인께서 물으시온지..."
그녀의 대답에도 고개를 돌리지 않고 계속 창밖만 바라보는 선우영과 그런 그를 뒤에서 지
켜보는 설수련. 말없이 방안에 있는 이 둘 사이에 이름을 알 수 없는 꽃잎 하나가 창문을 통
해 날아 들어 왔다. 바람결에 방안을 멤돌다 탁자위에 사뿐히 내려앉는 하얀 꽃잎 하나. 그것
을 부서질 듯 조심스러운 손길로 손에 들고 바라보는 설수련.
"구절초의 꽃잎이로군요. 벌써 가을이 온 듯 싶습니다. 아직 이곳의 날이 따뜻해서 볼 수가
없었는데.. 어디선가 몰래 피었던 모양이옵니다."
그제서야 몸을 돌려, 그녀의 손바닥 위에 올려진 하얀 꽃잎을 바라보는 선우영은 한동안 그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그녀에게 말을 한다.
"죽음의 길을 떠나는 자들은.. 남아있는 자에게 무언가 한가지씩을 전해주고 간다지 않소?"
"그런 말이 있기는 하지요. 그것이 유언같은 말이 되었던, 또는 나름의 증표가 되었던지요."
"그렇소. 그들이 남기고 간 그 무엇이 만질 수 있는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닐 것이오. 다만, 살아가는 이에게는 그것이 결코 지울 수 없는 무게로 다가온다는 것이
중요할 뿐이지 않을까 싶소. 소저도 그것의 무게를 느껴보신 적이 있으시오? "
그의 물음에 사뿐히 걸어 그에게 다가가는 설수련. 그의 앞에서 손을 내밀어 무언가 건내줄
듯한 모습을 보인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오른손을 답을 하는 선우영. 두 사람의 손이 겹쳐진
다 싶더니, 잠시 후 그의 손에는 조그마한 하얀 꽃잎이 내려와 앉는 것이 보였다.
"어떻사옵니까? 그 무게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한 후, 몸을 돌려 조금전 선우영이 바라보던 창가로 걸어가는 설수
련. 창밖으로 불어오는 바람내음을 맡으며 가슴속 깊이 공기를 마시고 있던 그녀가 입을 열
기 시작했다.
"대인께선 간밤에 오래전 잊고 싶었던 일을 꾸셨나 보옵니다."
"그랬던 것 같소. 잊고 싶었다고 해야 할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
"소녀는 매일 꿈을 꾸옵니다."
한줄기 바람이 방안으로 굽이쳐 들어오고, 그 바람이 그녀의 경장을 살짝 부풀렸다가 이내
사라진다. 바람결에 살짝 흐트러진 머릿결을 고운 손가락으로 추스리고 있는 설수련이 아지
랑이를 ?아가는 어린아이의 눈빛을 보이며 말을 계속 잇기 시작했다.
"그들이 남기고 간 것이 무엇이든, 그 무게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옵니다. 그저 그것을 잊
지 않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떠나간 이들이 남기고 간 삶의 무게란 그렇게 쉽게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리고 그들이 바라는 것도 아마도 그런 것일 테구요. 그저 자신이 잊혀지
지 않았다는 것을, 그것만을 그들이 바릴지도 모르옵니다."
"그런 것이오?"
"예, 그런 것이옵니다. 그리고 소녀는 그리 생각하옵니다. "
그리고 몸을 돌려 선우영을 바라보며 살짝 웃음을 흘리는 설수련에 선우영은 얼굴이 붉어지
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돌린다. 그의 그런 모습에 다시 한번 환한 미소를 얼굴에 머금게 되는
그녀.
"전대 주인께오선 소녀에게 이 옥적을 내어주시며 이런 말씀을 하셨지요. 제가 이곳을 어떻
게 운영을 하더라도 당신께선 걱정하지 않으신다구요. 다만, 이 옥적을 불게 되는 날. 그저
한번쯤 당신을 떠올려 준다면 그것으로 족한다 말씀하셨지요. 이것에는 그분과 저의 연을 이
어주는 그런 무게만 있을 뿐이옵니다. "
손바닥에 올려진 하얀 꽃잎을 바라보는 선우영. 한동안 그것을 바라보던 그는 이윽고 고개
를 들어 선수련의 눈길을 ?아간다.
"소저는 참으로 강한 여인이구려."
"훗, 강한 여인이라.. 험난한 강호를 살아가는 그저 그런 한 사람일 뿐이지요. 그 후에 여자와
남자가 나뉘는 것 아니겠사옵니까?"
"그렇구려. 내 소저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배우게 되는 것 같소. 이렇게 가르침을 주어 진심으
로 깊은 감사를 드리오."
두 손을 모아 고개를 숙이며 감사의 예를 표하는 선우영. 그의 모습을 보며 손을 저으며 말
을 하는 설수련이었다.
"이 어찌, 대인께서 미천한 소녀에게 감사를 표하시다니요. 당치도 않사옵니다. 그저 어줍잖
은 예기 한 가지와 지나간 일을 말씀드린 것 뿐이온데.. 감사라니요. 감당하기 힘드옵니다."
"아니오, 무언가 배운다는 것에 어찌 경중을 논할 수 있겠소이까? 이미 약조를 한 것이 있으
니, 소저께서는 소직에게 원하시는 것을 말씀하시구려. 내 들어 줄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
으나, 할 수 있는 것은 일신을 다 해 그 일을 꼭 완수하겠소이다."
그의 말에 그녀는 바람에 나풀거리는 경장을 하얀 손으로 잡아 가지런히 모은 후 날아갈 듯
사뿐거리는 발걸음으로 방안을 가로질러 가며 그에게 말을 했다.
"지금의 중원은 마치 폭풍전야와 같은 불안한 조용함을 느낄 수 있사옵니다. 숲속에 호랑이
가 웅크리고 있는데 어디에 숨어 있는지 몰라 산을 올라가지 못하고 있다고 할까요. "
"그렇소? 소직은 중원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 잘 모르겠구려."
"만약 난세가 도래해 이곳에 피바람이 몰아치게 된다면, 대인의 도움을 소녀가 감히 청해도
되겠사옵니까? "
그녀의 청이 사뭇 의외인지 한쪽 눈을 살짝 올리며 그녀에게 말을 하는 선우영이었다.
"이곳 다루가 뭐 그리 중요한 곳이라고, 난세의 피바람이 이곳까지 불어온단 말이오? 소저의
걱정이 과하신 듯 하구려. 설마 차값이 아까워 누군가 행패라도 부린단 말씀이오? "
"후훗, 정말 아무 것도 모르시고 이곳에 오신 모양이옵니다."
"그럼 이곳이 평범한 다루가 아니라는 말씀이오?"
그의 물음에 활짝 웃음을 머금으며 바라보는 설수련이 허리춤에 메여져 있던 옥적을 조심스
럽게 손에 들더니 그에게 보여주며 말을 했다.
"중원에는 이런 말이 있지요. 옥빛의 피리를 들고 있는 여인은 신녀문의 문주라고요. "
"그럼 소저께서..?"
"예, 자랑은 아니오나, 중원의 핍박받는 여러 여인들을 보호하고 있는 신녀문의 22대 문주,
설수련이 바로 소녀이옵니다. 혹시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한 번도 없소."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며 들은 적이 없다는 그의 말에, 혹시나 하고 기대했던 자신이 조금 멋
쩍은지 큰소리로 웃기 시작하는 설수련이었다.
"호호호호호, 신녀문 문주의 바로 앞에서 저에 대해 들은 적이 없다고 당당하게 말씀을 하시
는 분은 대인이 처음이옵니다. 호호호호. 전대 문주께서 이 모습을 보셨다면 얼마나 재미있
어 하실지.. 대인의 모습을 뵈오면 왠지 그 분이 자꾸 생각나옵니다."
"그 분과 정이 깊으셨나 보구려. 아니면 나처럼 잘 생긴 분이셨던가.. 정인이셨소? "
"호호호호호호"
하얗고 작은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큰 소리로 웃는 그녀가 한동안 간드러지는 웃음을 흘린
뒤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그의 물음에 대답을 한다.
"대인, 무슨 상상을 하신 것이옵니까. 신녀문의 문주와 문도들은 대대로 여인들 뿐이옵니다.
그런데 전대 문주께오서 대인의 용모를 닮으시고 저와 정인이라니요.. 호홋.. "
"소직이 또 실수를 했나 보구려. 중원 무림에 대해선 까막눈이라 내 잘 모른다오. 미안하오."
"아니옵니다. 그저 대인의 말씀에 잠시 상상을 해보았더니.. 대인을 닮은 여인을 상상하는 것
만으로 웃음이 멈추질 않사옵니다. 호호호호호."
웃음을 흘렸던 자신의 얼굴을 살짝 메만져 정리한 후 선우영에게 조금전 말을 계속했다.
"혹여, 저의 무례함에 마음 상하시거나 불편하신 것은 아니온지요?"
"아니오. 그런 것은 걱정하실 필요가 없소. 미인의 환한 웃음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어찌 남아
에게 무례가 될 수 있고, 화가 날 일이겠소. 괜찮소이다."
"대인의 넓으신 이해와 용서에 소녀, 고개 숙여 감사드리나이다."
가슴에 한 손을 가지런히 올린 후 고개를 숙이며 선우영에게 예를 표하는 설수련. 그리고 살
찍 얼굴에 미소를 띄운 후 말을 이었다.
"조금전에 대인께 말씀드렸 듯이 본 신녀문이 중원의 칼바람에 맞서게 될 때, 대인의 도움을
청해도 되겠사옵니까?"
"소직의 어떤 도움을 바라는 것이오?"
"한 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일을 우매한 소녀가 어찌 말할 수 있겠나이까. 다만 소녀의 어리
석은 욕심이 하나 있다면, 혼란의 시기가 되어 본 문이 어려움을 겪게 되었을 때 대인께서 외
면만 하지 않으시면 그것으로 족하나이다."
"상당히 추상적이고 곤혹스러운 청이구려."
선우영은 이미 한번 사부인 음교 교주에게 이러한 청을 들었던 터. 만나게 된 무림인 마다
자신에게 이런 청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것이 더 궁금했다. 자신이 중원에서 명망있고
내노라 하는 무공 고수가 결코 아닐 뿐더러, 몸에 지닌 것이라고는 얼마전 호남로삼부에서
사기치다 시피 얻어 온 몇 푼의 은자가 전부인데 말이다.
물론 사부와 신녀문주의 말에서 중원에 무언가 알 수 없는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음을 짐작
할 수 있었지만, 아무런 힘이 없는 그에게 이런 약조를 할 수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기만 했
다. 그 위험이 어디서 부터 시작될지도 알 수 없고, 또 자신이 과연 도움이 될지 조차 모르지
만, 이미 음교와 한 약조가 있으니 또 한번 더 공허한 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달라질 것은 없
을 거라 그는 생각을 정리했다. 그때가서 도와줄 수 있으면 한 팔 걷어서 도와주면 그만 아니
겠는가. 아마도 한 집단의 수장 자리에 오른 이들이라면, 다가오는 미래의 불안감을 느끼는
능력은 조금씩 가지고 있기 마련이라, 선우영은 신녀문주의 말이 그런 수장들의 몸에 베인
노파심이라 어림짐작했다.
"걱정마시오. 소직 금군에서 그리 높은 자리는 아니나, 만약 세찬 폭풍우 앞에 신녀문과 문주
께서 위험에 빠지게 된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그 어디에 소직이 있던간에 이곳을 향해 달려
올 것이오."
탁자위의 비워진 찻잔에 찻물을 따른 선우영은, 자신의 손에 있는 구절초 꽃잎을 그 잔에 띄
웠다. 그리고 그 잔을 설수련에게 살짝 들어 보인 후 말을 이었다.
"소저께서 전해준 이 삶의 무게. 이것을 소직이 기억하는 한, 소저와 나의 약조는 언제나 영
원할 것이오.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소저의 보는 앞에서 이 잔을 마시리다."
두 손으로 정성들여 잔을 쥔 선우영이 눈을 감고 차를 마시는 모습을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설수련이 그가 찻잔을 내려놓자 두 손을 가슴에 올린 후 정성들여 고개를 숙였다.
"감사하옵니다 대인, 정말 감사하고 또 감사 드리옵니다."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한 설수련은 자신의 품에서 갈색의 피리를 꺼내 선우영에게 두 손을
공손히 내밀었다.
"이것이 무엇이오? 내 이미 여기에 오면서 하나 구입했던 대적이 하나 있거늘... "
"그것과 이것을 어찌 비교할 수 있겠나이까. 이것이 천고의 기물은 아니오나, 대인께 드리는
소녀의 작은 정성이라 생각하시고 받아주시옵서서. 언젠가 대인께서 하실 음율에 깊이를 더
해드릴 것이옵니다."
"허어.. 그렇게 좋은 것이라면 다른 이에게 주면 되지 않겠소? 소직은 그저 이 값싼 피리로
족하는데, 너무 좋은 것을 주시는 것 같아 부담스럽구려. 내 지금 그대에게 줄 것이라곤, 손
에 쥘 수 없는 약조 뿐이거늘.. "
"아니옵니다. 이것은 제가 전대 문주님으로 부터 옥적을 받기 전까지 제가 사용했던 것. 이미
대인께 음을 가르쳐 줄 때 부터 이미 새 주인이 정해진 물건이옵니다. 이것을 가져가시옵소
서. 다음 이곳에 오실 때 이 대적을 보여주신다면 본 문의 아이들이 알아서 대인을 모실 것이
옵니다."
검은 대나무로 정성들여 다듬은 듯한 대적 하나가 설수련의 하얀 손위에 놓여져 묘한 대비
를 보여주고 있었다. 오죽의 표면에는 구름과 소나무가 불에 달군 인두로 그린 듯이 세겨져
있고, 겉표면에 은은하게 흐르는 오래된 시간의 때는 그 만큼의 고풍스러운 맛을 느끼게 해
주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흑적 하나에서 그런 것들을 하나씩 발견하며 보고 있는 선우
영을 지그시 바라보다 설수련이 그녀의 자그마한 입술을 연다.
"혹여, 미천한 소녀가 사용하던 것이라 대인께서 저어하시는 것이온지요?"
"아니 그 무슨 말씀이오. 이 대적에서 오랜 시간의 향기를 느낄 수 있어 바라보고 있었던 것
인데.. 그런 말씀을 하다니 가당치 않소. 내 이 흑적을 꼭 품에 넣고 다니리다. 고맙소."
"대인, 소녀 진심으로 감읍하나이다."
그녀가 건내 준 대적을 품에 갈무리 한 선우영은 방문을 열고 나가며 설수련에게 말을 했다.
"소저, 한가지 물어볼 것이 있는데.."
"대인 말씀하소서."
"아미산에 급히 가야할 일이 있는데, 빠른 길을 약도로 적어줄 수 있겠소? 내 이곳의 길이 어
두워 기일안에 쉽게 찾아가기 어려울 것 같구려."
"그런 것이라면 소녀에게 맡겨 주시옵서서. 소녀가 아주 예쁘게 약도를 그려 대인께 드리겠
나이다. 후훗"
"약도가 굳이 예쁠 필요가 없는데, 그저 알아 볼 수만... "
말을 하다가 급히 말꼬리를 자르는 선우영의 눈앞에는 한 쪽 눈을 흘리고 바라보는 설수련
의 차가운 눈매가 자리잡고 있었다. 한동안 심유경의 등쌀에서 벗어나 긴장을 하지 안았던
탓인지 여인들의 심기를 잃는 것에 실수를 한 선우영은 애써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역시 약도는 예쁠 수록 좋은 것이 아니겠소? 내 마음이 딱 소저의 그것과 다름이 없구려. 허
허허허. "
"호호호호, 대인께서 소녀의 마음을 알아주시니 기쁘기 하량없사옵니다. 기대하시옵소서. 이
곳에 가장 깨끗한 비단에 이마파까지 가는 모든 길목을 그려 드리겠나이다. 소녀의 어줍잖은
몇 자의 글도 함께.. 호호호"
경기로 동경의 한 심처. 가을 수국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정원에 녹색 무복을 단정하게 입
은 중년 남자가 걸어가고 있다. 그가 정원 중앙에 있는 전각을 향해 걸어갈 수록 전각안에서
는 여자의 교성어린 목소리가 세어나오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얼굴 한 가득 불쾌한 기욱이
세어나오고 있는 남자. 칼 자루를 쥐고 있는 왼손에는 핏줄이 가득 잡혔다가 사라지는 것을
반복하며 그의 지금 심정이 어떠한지 보여주고 있었다.
그 시각, 전각안에서는 모용세가의 가주 모용철이 황보세가의 가주 황보연화의 온 몸을 끈
으로 묶은 후 목각 남성으로 그녀의 심비지처를 괴롭히고 있었다. 목각 남성이 그녀의 몸안
에 들어올 때 마다 얼굴을 붉히며 거친 비명을 지르는 그녀. 손과 다리를 묶은 끈에 몸을 움
직일 수 없는지 고개를 세차게 젖는 것으로 그녀의 지금 고통이 어떠한지 표현할 수 있을 뿐
이었다. 눈물과 침으로 얼룩진 그녀의 얼굴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얼마나 아름답게 단장을
했었는지 그 흔적을 찾을 길이 없었다.
그녀의 비처에 심어져 있던 목각을 빼어나 혀로 맛을 보는 모용철.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탁
자에 놓여진 여러개의 크고 작은 목각 남성들 중에 하나를 가져오며 웃음을 띄우며 누워있는
그녀의 나신을 바라본다. 그의 손에 들린 목각은 조금전의 것과는 다르게 작고 큰 사마귀같
은 혹들이 자잘하게 달려있어 그 흉측함을 더해주고 있었다. 두려눈 눈빛으로 모용철이 가지
고 오는 목각 남성을 바라보는 그녀. 두려움 탓이었는지 그녀의 묶여진 두 다리 사이의 이불
에선 축축하게 젖어가는 그림자가 커져가고 있었다.
"더러운 계집. 이걸 보고 흥분해서 오줌을 싸는 년은 너 밖에 없을 거다. 갈보 같은 년!"
"제발.. 제발 이제 그만 해줘. "
"후훗, 과연 이게 들어가도 그런 말이 나올까? 기대해 봐"
"제발.. "
그녀의 간절한 눈빛과 애원에도 아랑곳 안고 모용철은 그의 손에 들린 목각 남성에 진뜩한
침을 바른 후 그녀의 비처에 빙글 돌리며 쑤셔 넣기 시작했다.
"아악... 안돼!.. 제발.."
"그래 그렇게 노래를 불러봐라. 모두가 들을 수 있게.. "
"아아악! "
묶여진 그녀의 저항이 계속되고, 묶여있는 그녀의 몸 중에 움직일 수 있는 모든 부분이 버둥
거리기 시작했다. 허벅지가 떨려오고, 배가 출렁거리며, 가슴이 솟구쳐 오르는 그녀의 모습
을 보며 모용철의 얼굴도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이것이 빠지기 시작하면 내 오늘 처음부터 널 다시 가르칠 것이다. 네 몸의 주인이 누구인지
다시 한번 각인시켜주마. 후후.. 즐겁지 아니하냐?"
"하아악. 꺄아아악.."
문밖에서 황보연화가 지르는 비명소리를 두손을 웅켜쥐고 듣고 있는 팽신후. 그의 웅켜쥔
손의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 들어간다. 그가 그렇게 문 밖에서 분을 삼키고 있을 무렵, 한참
후 방문이 열리고 모용철이 나온다.
"신후, 자네가 왔군. 방에 들어가 즐기시게. 연화가 기다리고 있을거네. 좋은 시간보내시게
나. 후후.. 고년 참.. 갈수록 반응이 좋아져. 전하께서 좋아하실 거야."
돌아가는 모용철의 뒷모습을 이를 물고 바라보던 팽신후는 한차례 긴 한숨을 내 쉰 후, 반쯤
열려진 문을 통해 방으로 들어갔다. 방안에 들어가 보니 그야말로 참상을 불허케 하고 있었
다. 잔뜩 어질러진 이불과 옷이 찢어져 몸의 모든 것이 다 보이는 데도 가릴 생각도 않고 쓰
러져 숨만 내쉬고 있는 황보연화. 그의 몸 구석 구석에는 누군가에게 맞기라도 했는지 손바
닥 자국이 가득하고, 땀과 소변 냄새가 몸에 가득휘감고 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팔과 다리
가 묶인 채 눈물을 흘리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팽신후 그의 가슴에 한자락 알 수 없는 감정이
피어나게 만들고 있었다.
그녀에게 다가가서, 묶여진 끈을 풀어준 후, 소매안에서 깨끗한 비단 수건을 꺼내 그녀의 몸
을 닦아주기 시작하는 팽신후. 몇 군데 혈도를 눌러 억눌러진 몸을 보호해 주며 그녀에게 말
을 했다.
"연화.. 당신의 이런 모습을 보니 내 마음이 아프오. 그대만 허락한다면 내 당신을 위해 무엇
이든 해줄 수가 있소. 연화. 더이상 고통스러워 하지 말고 우리 둘 어디론가 떠나 조용히 사
는게 어떠시오? 먼저 가신 조사님들도 우리를 이해해 주실 것이오."
누워서 자신의 몸을 닦아주는 팽신후의 손길을 느끼고 있던 황보연화는 그런 팽신후의 말에
차갑고 조소어린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말을 했다.
"오호호호호, 방금 소녀에게 도망가서 살자고 말씀하셨습니까? 요국에 ?겨 겨우 자리를 잡
은 시골 세가의 가주인 당신께서요? 주인에게 버림받아 몰락한 세가의 가주인 제가 한낱 먼
저 간 선대조사들을 위해 이러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리석군요. 당신은 정말 어리석어
요. 오호호호호. "
"그럼 그대가 이토록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이유가 그 무엇이란 말이오? 연화. 당신이 이렇
게 아파하는 모습을 보니 내 .."
"신후 오라버니, 오라버니가 사내라면 말을 정확히 하세요. 제가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있는
것이 오라버니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것이 아닌지요? 저와 결혼이라도 하고 싶으신가요? 그
럼 중원의 주인이 되어 보이세요. 그럼 전 오라버니 앞에 실오라기 하나도 거리지 않고 춤을
춰 보이겠어요. 오호호호호호"
"연화... "
하북을 내침하고 점령하고 있는 요에 의해 세가의 세력이 약해지다 못해 하북 이남으로 억
지로 내려와야만 했던 하북팽가와 황보세가. 그들이 새로운 거처로 잡은 곳에서 기를 펼치기
위해 그 얼마나 각고의 노력을 다해왔던가. 하지만 그 시간이 지난 지금, 팽신후 자신의 눈앞
에 있는 황보연화는 어릴적 순진하고 순수하기만 했던 모습은 간 곳이 없고, 세가의 발전과
자신의 사욕을 위해 몸을 던지는 뜨거운 요부만이 있을 따름이었다. 변해져 간다고만 생각했
지만 이렇게나 변해버릴 줄 몰랐던 팽신후는 그녀의 붉게 부어있는 손목을 잡고 눈물을 흘렸
다.
"추하군요. 여인을 위해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니라, 제 눈에는 암컷을 빼앗긴 숫캐의 통한으
로 보입니다. 가세요. 더이상 오라버니를 보고 싶지 않아요. 어서요! "
그녀의 말에 고개를 숙이고 돌아서는 팽신후. 문밖을 나서기 직전, 나지막한 말로 스스로에
게 다짐을 하는 그였다.
"지금은 널 두고 이 자리를 벗어나지만.. 네가 가장 위험할 때 널 지켜주겠다. 그것이 내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것이라도.. 이 말 밖에 할 수 없는 날 욕하고 저주해도 좋다. 망가지다 못해
스스로 부서져 가는 모래성같은 널 이대로 지켜 볼 수는 없구나. 연화. 언젠가 네 곁으로 대
사 돌아오마. "
"그래서요? 그래서 오라버니가 얻고자 하는 것이 정녕 무엇이란 말입니까? 숱한 남정네가
올라타고 버린 이 썩어빠진 몸뚱아리가 그리 탐나신 것이옵니까! "
그리고 문을 걸어 나가는 팽신후를 보는 황보연화의 떨리는 눈에는 그제서야 지금껏 숨기고
참아왔던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몰락한 세가를 일으키기 위해 힘들고 고통스
러운 순간마다 매번 그를 생각하고 이겨냈던 순간이 떠오르고 있었다.
철없던 어릴 시절. 자신보다 못한 검술로 그녀를 지켜주겠다고 큰소리로 말하던 숫기없던 모
습이 그가 떠나고 난 공간에 겹쳐보이기 시작하자, 가슴 한 켠이 칼로 찌르듯 아파오는 황보
연화였다.
"더이상 더럽혀질 곳도 없는 이 몸을 왜 그리 아껴주실려고만 하십니까. 오라버니의 그 따뜻
한 가슴에 소녀가 기댄다면.. 전 바람결의 촛불처럼 사그라들지도 모르옵니다. 제발 절 이대
로 두세요. 제발.. "
"더럽다고 말하지 말거라. 그리고 사라질거라고도 말하지 말거라. 내가 네 마음을 알고, 네가
내 마음을 아는 이상, 지나간 일 따위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다. 다만 네 스스로 학대하는 모
습이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 뿐이니라. 세가를 위해, 그리고 네의 야망을 위해 노력하는
것 자체를 나무라는 것이 아니지만... "
"힘도 없는 오라버니께서 절 어떻게 지켜주시겠다는 말씀이옵니까. 어서 제 눈앞에서 사리지
세요. 이 순간 이후 이런 너저분한 말도, 오라버니의 그 나약한 모습도 제 마음속 깊은 곳에
서 부터 지워버리겠어요. 그러니 오라버니도 어릴적 제 모습부터 모두 지워버리세요. 오라버
니가 기억하는 어릴적 연화라는 계집은 이제 중원 그 어디에도 없단 말이예요! "
울부짓듯이 말을 하며 울고 있는 황보연화. 그리고 그를 보며 다가서지도 못하고 함게 눈물
을 흘리는 팽신후.
"오늘은 이만 가마. 그리고 네 앞에 나타나서 이렇게 널 힘들게 하는 일도 당분간 없을 것이
다. 다만.. 내가 네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을 때는 내 모든 걸 걸고 널 지키러 왔다는 것 하
나 만은 꼭 기억해 주길 바란다. 보중하거라. 너 하나 바라보고 고향땅 하북을 떠나 낮선 이
곳에 내려와 사는 어리석은 놈을 위해서라도.. "
통곡에 가까운 황보연화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걸어가는 팽신후의 발걸음은 무겁기 그지 없
었다.
말을 타고 길을 걷기를 며칠 째. 설수련이 건내 준 약도를 보고 잘 따라오고 있다고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못내 자신 스스로가 의심스러운 선우영이었다. 그러나 오늘 드디어 수려한 산
맥이 모습을 드러내고, 그 중에 우뚝 선 산꼭대기가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하자 안도의 한숨
을 내쉬는 선우영이었다. 기주로의 성산, 아미산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 낸 것이다. 품에서 약
도를 꺼내 다시 한번 바라보는 선우영의 눈에 약도 한 구석에 아담하게 써내려 간 여인의 글
씨가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 글씨를 보자 눈쌀을 찌푸리며 약도를 거칠게 품에 갈무리하는
선우영이었다.
"후우.. 언제나 소녀의 마음속에 있사옵니다. 라니.. 무슨 생각으로 이런 글을 쓴 것인지.. 아
미에 도착하면 태워버려야겠군.."
투덜 거리며 길을 따라 가는 선우영. 그가 고삐를 흔드는 방향으로 느릿한 걸음으로 걸어가
는 검은 말은 선우영의 마음처럼 느긋하기만 했다. 오후가 되기 전에 아미산의 모습이 나타
났지만, 아미 본산에 올라 산문에 오른 시간은 몇 시진이 훌쩍 지난 저녁 무렵이었다. 해거름
이 진하게 내려가고 있는 산중 산문에 두 명의 여승이 경계를 서고 있는 것이 선우영의 눈에
보였다. 말에서 내려 고삐를 잡고 천천히 그들을 향해 걸어갔다.
"시주, 이곳은 아미파의 산문이오이다. 용무가 없으신 남시주의 입산을 정중히 거절하는 본
문의 입장을 헤어려 주시길 바라오이다."
두 명의 여승중에 한 명의 제지에 합장을 한 후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후, 한쪽 소매를 걷으
며 선우영이 말을 했다.
"소직은 귀파의 장문인과 약조가 되어 있소이다. 산문에서 이것을 보이면 입산이 가능하다
하다던데.. 맞는지 모르겠구려."
"그것은 대사매의 .. 혹시 선대협이시옵니까?"
"아, 그때 소저들께 말씀을 들으셨나 보구려. 소직은 선우영이라 하오이다. 들어가도 되겠소
이까?"
"예, 장문인께서도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있었나이다. 드소서. 제가 대협을 안내해 드리겠사
옵니다."
"말씀만으로 감사드리오이다. 그럼 부탁드리오. 예쁜 소저."
예쁜 소저라는 그의 말에 얼굴을 살짝 붉힌 여승은 말고삐를 잡고 걸어가는 선우영의 앞에
서 길안내를 하며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광남서로 융수에서 심유경과 헤어진지 거의 반년만
에 드디어 아미산에 올라오고 있는 선우영이었다. 남들은 보름이 걸리는 거리를 그는 무려
반년이라는 시간이 걸려서야 도착한 것이다.
13 편은 최대한 다음주 주중에 올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 소설은 MMORPG와 조금 비슷합니다. 주인공이 중원을 돌아 다니며 아이템을 모이는 것
이 줄거리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모은 아이템은 전투에는 도움이 안 됩니다. 팔찌
던지고 피리로 공격할 것은 아니니까요. 참고로 전편에서는 생략되었지만 음교 교주 서소영
에게는 음교의 신물인 향낭을 받았습니다.
옥환/ 향낭/ 흑적/ 목걸이/ 용호검 / 군패. 아이템 현재 6개째. -_-;;
주인공은 슬슬 가방을 들고 다녀야 할 듯합니다.
제 글을 아껴주시는 분들의 심기가 불편할 것 같았습니다.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와 제 글의 제목이 비슷하지만, 저작권협약에 의하면 표절 성립이
안 될 뿐더러, 제 스스로도 결코 표절이 아닙니다. 비슷하기만 하면 무조건 표절이라는 색
안경쓰고 일단 상대방 상처 준 후에, 아니면 말고. 이런 무책임한 행동은 제발 자제해 주세요.
제 글에서 남의 것을 차용한 것은 김용의 무협 세계관을 따온 것. 그것 하나 뿐입니다.
표절이 얼마나 위험한 행동인지 제가 잘 알고, 또 오랜 직장생활 중에 표절로 인해 피해를
본 적이 있기에 그딴 더러운 짓은 절대 하지 않습니다. 타사의 표절 광고로 회사 법무팀과
고소를 몇 번하게 되면 한국이 정하고 있는 저작권법과 국제저작권협약은 외우게 됩니다.
제 글에서 표절은 없습니다.
현재 연말이라 회사일이 무척 바쁩니다. 그리고 연말과 신년초를 출장지인 일본에서 보내게
되어 그 준비로 집에서도 준비를 해야 합니다. 최대한 기다려 주시는 고마운 분들을 위해 틈
틈히 글을 적어 올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늦어지더라도 연재 중단은 결코 없을 겁니다.
제가 감기를 연재중이라 글의 속도가 느린 점. 늘 죄송스럽습니다.
감기 하나만 연재할 것을 그랬나 봅니다. ㅠ_ㅠ
무공이 가장 쉬웠어요. -12 : 신녀문주 설수련
"군사! 이것이.. 이것이 참 말인가? "
"죄송합니다. 맹주님. 저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
"타앙! "
무림맹주 남주혁은 지금 자신의 손에 쥐고 있는 전서를 떨리는 손으로 구기며 거세게 탁자를
내려쳤다. 그의 갸름한 턱에 소담하게 자란 턱수염이 지금 그의 감정이 어떠한지 보여주 듯
떨리고 있다.
"이것들이! 중원무림군을 보내라고 내 청을 했건만.. 광견십호를 다 모아서 보내! "
광견십호. 궁가방의 황봉, 당문의 당영월, 화산의 마연, 남궁세가의 남중세진, 제갈세가의 제
갈소, 마교의 진가림, 청산의 장소연, 무당의 이균, 팽가의 팽현진, 모용가의 모용호진 이렇
게 열 명의 무림인을 가르키는 말로써, 중원에서 내노라 하는 정파의 장로와 제자들 중에 종
잡을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행동으로 사고치는 것을 극도로 좋아하는 망종들을 부르는 말
이 지금 무림맹주의 입에서 튀어 나오고 있었다.
"그나마... 마연이 현재 무위대에 몸담는 바람에 아홉만 모이는 것으로.. "
"답답하군. 이보게, 군사. 아홉이 모이나, 열이 모이나 이 녀석들이 둘 이상 모이면 어떻게 되
는지 자네도 잘 알지 않나? 그리고 왜 아홉이야! 마교는 일부러 부르지도 않았는데 자기 딸
년을 왜 보내! 왜! "
"저도 그것을 잘 모르겠습니다. 오랑캐에 짓밟힌 중원의 일이라면 응당 자신들도 함께 해야
한다고.. 막무가내로 보낸다는데, 좋은 뜻으로 한 말에 말릴 수도 없는 노릇이라.. "
"무림군을 구성해 연경을 공략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앞두고... 미친개들 때문에 벌써부터
자중지란이나 일으키지 않을지.. 어허, 어허, 이거 참..."
"그래도 그들이 지니고 있는 무위라면 황실도 기꺼워 할 것이옵니다. "
"무위가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대충 칼 좀 쥐는 녀석들로 보내라고 했건만.. 일이 더 커졌어. "
2년전 처음 맹주에 추대된 남주혁은 정파 무림인들을 하나로 일통한 것을 자축하기 위해 대
대적으로 무림대회를 개최했었다. 그러나 무림대회에 출전한 몇몇의 후기지수들의 난동으
로 초대받은 명망있는 노고수들까지 부상을 입고, 오전에 개최한 무림대회가 그날 오후 반나
절만에 끝나버린 기억이 무림맹주 남주혁의 머릿속에서 악몽처럼 다시 떠올랐다.
"황봉, 그는 지금 어디있나? 그라도 어디 숨겨 놓아야 할 텐데..자네가 어서 가서 찾아보게. "
"그게.. 당문에서 영월이를 수장으로 보냈다는 말을 듣고, 조금전 궁가방 제자들을 이끌고 사
천으로 달려갔습니다. 저도 말렸지만 이번에는 끝장을 본다면서.. "
"이 놈이! 내 그토록 자중하라 일렀건만.. "
그때 맹주실의 밖에서 시비인 듯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맹주님. 금군 무위대 부총병이신 방시천 대인께서 오셨사옵니다. "
"어서 뫼시거라. "
맹주실의 방문이 소리없이 열리며 붉은색 주갑을 잘 차려입은 장수가 들어온다. 육중한 갑주
가 잘그락 거리는 소리를 내며 들어온 그는 익숙한 군례로 절도있게 맹주에게 인사를 한다.
"맹주. 그간 강녕하셨소이까? "
"방대인도 안색을 보아하니 원기가 충만하신 듯 하오이다. 그런데 오늘 어쩐 일이신지.. 이미
중원무림군을 소집한 상태라 곧 중경으로 보낼터인데 말이오. "
"그것 때문에 소장이 이렇게 왔소이다. 황상 폐하께오선 무림맹주의 노고를 크게 치하하시
며, 중원을 핍박하는 오랑캐를 몰아내는데 무림인들이 자발적으로 나선다는 것에 기꺼워 하
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곧 중원무림군을 마중하기 위해 대송황실 선발대를 보내기로 하명하
셨소이다. 자세한 것은 이것을 읽어보시길.. "
남주혁은 그가 건내 준 붉은 비단 배첩을 읽다가 떨리는 손으로 떨어트리고 만다.
"광견십호가.. 십호가.. "
무림맹주가 떨어트린 배첩을 읽는 군사의 손도 역시 떨리고 있었다.
"세상에 선발대에 마연이.. 십호가 다 모이는 일이 일어나다니.."
"그것이 황상께오서 그간 황실에 충성을 하느라 수고한 마 참장에게 오랜만에 사문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며 은혜를 배풀어 주신 것이지요. 모두가 황상의 하해같은 은덕이옵니
다. 허허허.. "
"황제가 중원 무림을 자멸 시키기로 단단히 결심한 모양이야"라고 나지막한 혼잣말을 하는
맹주 남주혁과, 여동생 당영월을 걱정하는 무림맹 군사 당호진, 그리고 그들 둘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는 무위대 부총병 방시천. 이들 셋이 묘한 어울림을 보이고 있는 무림맹주실
지붕위에는 알 수 없는 먹구름이 피어 오르고 있었다.
선우영은 지금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머릿속에선 꿈이라고 하지만
이 꿈에서 자신이 벗어날 수 없다는 것 또한 선우영은 알 수 있었다. 지난 시간 수십, 수백번
이나 잠을 잘 때 마다 꾸어온 꿈이기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고요함. 그러나 귀
로는 그 어떤 소리도 들을 수 없지만, 눈으로 보여지는 광경은 그의 눈을 뜨겁게 하고 가슴을
진탕시키고 있었다.
숲속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검은 연기. 그리고 밤하늘을 가득 메우며 수 많은 별똥별처럼 쏟아
지고 있는 불화살들. 지옥도처럼 아수라장이 된 전장의 한복판에서 누군가 선우영의 목덜미
를 강하게 움켜쥐고 뭐라고 말을 하고 있다. 그러나 선우영은 그의 말을 알아 들을 수 없었
다. 꿈속이기 때문인지 지금 선우영은 눈 앞에 있는 자가 하는 목소리를 그 어떤 것도 알아들
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고위 장수인 듯 화려한 금색 갑주를 걸친 그는 선우영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뭐라고 말을 계
속 한 후 자그마한 장신구를 하나를 손에 쥐어주고 전장으로 달려 갔다. 검은 연기 속으로 사
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아 바라보다가, 이내 손에 쥐어진 장신구를 바라보는 선우영.
그의 손에는 은장식이 된 나비문양의 작은 목걸이가 들려져 있었다. 바람이 불면 어디론가
훌쩍 날아가 버릴 것 같은 작은 나비 문양의 목걸이. 그것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는데 자신을
향해 칼을 내지르며 공격해 오는 적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오랜 전장 생활로 몸에 베인 절도
있는 동작으로 적의 공격을 재빨리 피한 후, 허리춤에 패검되어 있는 군검을 꺼내 들고 적을
향해 완만한 곡선을 이루며 내려쳤다.
무의식적인 반격을 성공시킨 후 다음 동작을 준비하려 할 때 한 줄기 뜨거운 핏줄기가 선우
영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고, 천천히 자신의 폼에 안겨오는 적의 희미한 미소를 볼 수 있었
다. 그 얼굴은, 선우영에게 매일 밤 골패를 가르쳐 주던 노인이었다.
"허억..."
마치 만장이 넘는 깊은 심연속에 빠져있다가 간신히 물밖으로 나온 것 처럼, 선우영은 지금
깊은 숨을 내쉬며 자신의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고 있었다. 온 몸이 물에 젖은 것 처럼 땀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그는 만져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선우영은 습관적으로 자신의 품속
으로 손을 가져가 목에 메달려 있는 목걸이를 만져 보았다. 차가우면서 따뜻한 금속의 감촉
이 식어있는 그의 손으로 전해져 온다.
본대가 전멸하던 그날, 남로정벌군 전군의 수장이었던 양호민이 그에게 주고 간 목걸이가
그의 목에 걸려 있었다. 한참을 열려진 창문을 통해 환하게 밝아진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때,
문밖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인, 기침 하셨사옵니까?"
"일어났다오, 들어오시구려."
목소리에 대답을 하며 침상에서 일어나 옷을 단정히 하는 선우영. 잠시 후 조용히 문이 열린
후 바닥에 놓여진 쟁만을 들고 분홍색 경장을 입은 여인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탁자위에 놓
여진 건포로 땀에 흠뻑 적은 목과 얼굴을 닦고 있는 선우영을 그녀가 지그시 바라보고 있다.
"지난 밤, 안 좋은 꿈이라고 꾸신 것 같사옵니다. 아직 편찮으신지요?"
"아니오. 잠을 자면 악몽에 빠지는 것은 하루 이틀도 아니라.. 이젠 익숙한 일상이 된 것 같구
려. 괜한 모습에 걱정을 끼쳐 미안하오."
"목이 마르실 것이온데, 소녀 차를 준비했사옵니다. 드시옵소서. 심기가 어지러울 때 도움이
되는 차이옵니다."
"고맙구려. "
그녀가 내어주는 따뜻한 찻잔을 들고 창밖을 바라보며 차를 마시기 시작한다. 벌써 이곳에
온지 몇 주가 흐르고 있었다. 그녀에게 대적을 배우기로 하고 머물게 된지 수십 날. 약조했던
대적은 이미 다 배우고, 머릿속에 아른거리는 그 음율을 이제 선우영 자신이 부를 수 있는 실
력을 가지게 되었지만, 간밤에 꾼 꿈 탓일지. 마음 한 켠에 자리잡고 있는 어두운 그림자는
선우영의 몸에서 사라질 줄 모르고 있었다.
"소저..."
"예 대인, 말씀하소서."
입안을 멤도는 차향을 느끼며 무언가 생각을 하던 선우영의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소저께서 항시 들고 다니시는 그 옥적. 혹여 사연이 있는 물건이오?"
그의 물음에 대답을 하지 않고 자신의 허리춤에 메달려 있는 옥적을 부드러운 손길로 메만
지는 설수련. 그 손의 움직임에 따라 반쯤 감기는 그녀의 눈가는 오래전 시간의 편린을 애써
끄집어 내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 옥적은 전대 주인이셨던 고매한 분께서 미천한 소녀에게 주시고 가신 하나 뿐인 신물이
옵지요. 그런데 어찌 대인께서 물으시온지..."
그녀의 대답에도 고개를 돌리지 않고 계속 창밖만 바라보는 선우영과 그런 그를 뒤에서 지
켜보는 설수련. 말없이 방안에 있는 이 둘 사이에 이름을 알 수 없는 꽃잎 하나가 창문을 통
해 날아 들어 왔다. 바람결에 방안을 멤돌다 탁자위에 사뿐히 내려앉는 하얀 꽃잎 하나. 그것
을 부서질 듯 조심스러운 손길로 손에 들고 바라보는 설수련.
"구절초의 꽃잎이로군요. 벌써 가을이 온 듯 싶습니다. 아직 이곳의 날이 따뜻해서 볼 수가
없었는데.. 어디선가 몰래 피었던 모양이옵니다."
그제서야 몸을 돌려, 그녀의 손바닥 위에 올려진 하얀 꽃잎을 바라보는 선우영은 한동안 그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그녀에게 말을 한다.
"죽음의 길을 떠나는 자들은.. 남아있는 자에게 무언가 한가지씩을 전해주고 간다지 않소?"
"그런 말이 있기는 하지요. 그것이 유언같은 말이 되었던, 또는 나름의 증표가 되었던지요."
"그렇소. 그들이 남기고 간 그 무엇이 만질 수 있는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닐 것이오. 다만, 살아가는 이에게는 그것이 결코 지울 수 없는 무게로 다가온다는 것이
중요할 뿐이지 않을까 싶소. 소저도 그것의 무게를 느껴보신 적이 있으시오? "
그의 물음에 사뿐히 걸어 그에게 다가가는 설수련. 그의 앞에서 손을 내밀어 무언가 건내줄
듯한 모습을 보인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오른손을 답을 하는 선우영. 두 사람의 손이 겹쳐진
다 싶더니, 잠시 후 그의 손에는 조그마한 하얀 꽃잎이 내려와 앉는 것이 보였다.
"어떻사옵니까? 그 무게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한 후, 몸을 돌려 조금전 선우영이 바라보던 창가로 걸어가는 설수
련. 창밖으로 불어오는 바람내음을 맡으며 가슴속 깊이 공기를 마시고 있던 그녀가 입을 열
기 시작했다.
"대인께선 간밤에 오래전 잊고 싶었던 일을 꾸셨나 보옵니다."
"그랬던 것 같소. 잊고 싶었다고 해야 할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
"소녀는 매일 꿈을 꾸옵니다."
한줄기 바람이 방안으로 굽이쳐 들어오고, 그 바람이 그녀의 경장을 살짝 부풀렸다가 이내
사라진다. 바람결에 살짝 흐트러진 머릿결을 고운 손가락으로 추스리고 있는 설수련이 아지
랑이를 ?아가는 어린아이의 눈빛을 보이며 말을 계속 잇기 시작했다.
"그들이 남기고 간 것이 무엇이든, 그 무게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옵니다. 그저 그것을 잊
지 않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떠나간 이들이 남기고 간 삶의 무게란 그렇게 쉽게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리고 그들이 바라는 것도 아마도 그런 것일 테구요. 그저 자신이 잊혀지
지 않았다는 것을, 그것만을 그들이 바릴지도 모르옵니다."
"그런 것이오?"
"예, 그런 것이옵니다. 그리고 소녀는 그리 생각하옵니다. "
그리고 몸을 돌려 선우영을 바라보며 살짝 웃음을 흘리는 설수련에 선우영은 얼굴이 붉어지
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돌린다. 그의 그런 모습에 다시 한번 환한 미소를 얼굴에 머금게 되는
그녀.
"전대 주인께오선 소녀에게 이 옥적을 내어주시며 이런 말씀을 하셨지요. 제가 이곳을 어떻
게 운영을 하더라도 당신께선 걱정하지 않으신다구요. 다만, 이 옥적을 불게 되는 날. 그저
한번쯤 당신을 떠올려 준다면 그것으로 족한다 말씀하셨지요. 이것에는 그분과 저의 연을 이
어주는 그런 무게만 있을 뿐이옵니다. "
손바닥에 올려진 하얀 꽃잎을 바라보는 선우영. 한동안 그것을 바라보던 그는 이윽고 고개
를 들어 선수련의 눈길을 ?아간다.
"소저는 참으로 강한 여인이구려."
"훗, 강한 여인이라.. 험난한 강호를 살아가는 그저 그런 한 사람일 뿐이지요. 그 후에 여자와
남자가 나뉘는 것 아니겠사옵니까?"
"그렇구려. 내 소저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배우게 되는 것 같소. 이렇게 가르침을 주어 진심으
로 깊은 감사를 드리오."
두 손을 모아 고개를 숙이며 감사의 예를 표하는 선우영. 그의 모습을 보며 손을 저으며 말
을 하는 설수련이었다.
"이 어찌, 대인께서 미천한 소녀에게 감사를 표하시다니요. 당치도 않사옵니다. 그저 어줍잖
은 예기 한 가지와 지나간 일을 말씀드린 것 뿐이온데.. 감사라니요. 감당하기 힘드옵니다."
"아니오, 무언가 배운다는 것에 어찌 경중을 논할 수 있겠소이까? 이미 약조를 한 것이 있으
니, 소저께서는 소직에게 원하시는 것을 말씀하시구려. 내 들어 줄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
으나, 할 수 있는 것은 일신을 다 해 그 일을 꼭 완수하겠소이다."
그의 말에 그녀는 바람에 나풀거리는 경장을 하얀 손으로 잡아 가지런히 모은 후 날아갈 듯
사뿐거리는 발걸음으로 방안을 가로질러 가며 그에게 말을 했다.
"지금의 중원은 마치 폭풍전야와 같은 불안한 조용함을 느낄 수 있사옵니다. 숲속에 호랑이
가 웅크리고 있는데 어디에 숨어 있는지 몰라 산을 올라가지 못하고 있다고 할까요. "
"그렇소? 소직은 중원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 잘 모르겠구려."
"만약 난세가 도래해 이곳에 피바람이 몰아치게 된다면, 대인의 도움을 소녀가 감히 청해도
되겠사옵니까? "
그녀의 청이 사뭇 의외인지 한쪽 눈을 살짝 올리며 그녀에게 말을 하는 선우영이었다.
"이곳 다루가 뭐 그리 중요한 곳이라고, 난세의 피바람이 이곳까지 불어온단 말이오? 소저의
걱정이 과하신 듯 하구려. 설마 차값이 아까워 누군가 행패라도 부린단 말씀이오? "
"후훗, 정말 아무 것도 모르시고 이곳에 오신 모양이옵니다."
"그럼 이곳이 평범한 다루가 아니라는 말씀이오?"
그의 물음에 활짝 웃음을 머금으며 바라보는 설수련이 허리춤에 메여져 있던 옥적을 조심스
럽게 손에 들더니 그에게 보여주며 말을 했다.
"중원에는 이런 말이 있지요. 옥빛의 피리를 들고 있는 여인은 신녀문의 문주라고요. "
"그럼 소저께서..?"
"예, 자랑은 아니오나, 중원의 핍박받는 여러 여인들을 보호하고 있는 신녀문의 22대 문주,
설수련이 바로 소녀이옵니다. 혹시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한 번도 없소."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며 들은 적이 없다는 그의 말에, 혹시나 하고 기대했던 자신이 조금 멋
쩍은지 큰소리로 웃기 시작하는 설수련이었다.
"호호호호호, 신녀문 문주의 바로 앞에서 저에 대해 들은 적이 없다고 당당하게 말씀을 하시
는 분은 대인이 처음이옵니다. 호호호호. 전대 문주께서 이 모습을 보셨다면 얼마나 재미있
어 하실지.. 대인의 모습을 뵈오면 왠지 그 분이 자꾸 생각나옵니다."
"그 분과 정이 깊으셨나 보구려. 아니면 나처럼 잘 생긴 분이셨던가.. 정인이셨소? "
"호호호호호호"
하얗고 작은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큰 소리로 웃는 그녀가 한동안 간드러지는 웃음을 흘린
뒤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그의 물음에 대답을 한다.
"대인, 무슨 상상을 하신 것이옵니까. 신녀문의 문주와 문도들은 대대로 여인들 뿐이옵니다.
그런데 전대 문주께오서 대인의 용모를 닮으시고 저와 정인이라니요.. 호홋.. "
"소직이 또 실수를 했나 보구려. 중원 무림에 대해선 까막눈이라 내 잘 모른다오. 미안하오."
"아니옵니다. 그저 대인의 말씀에 잠시 상상을 해보았더니.. 대인을 닮은 여인을 상상하는 것
만으로 웃음이 멈추질 않사옵니다. 호호호호호."
웃음을 흘렸던 자신의 얼굴을 살짝 메만져 정리한 후 선우영에게 조금전 말을 계속했다.
"혹여, 저의 무례함에 마음 상하시거나 불편하신 것은 아니온지요?"
"아니오. 그런 것은 걱정하실 필요가 없소. 미인의 환한 웃음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어찌 남아
에게 무례가 될 수 있고, 화가 날 일이겠소. 괜찮소이다."
"대인의 넓으신 이해와 용서에 소녀, 고개 숙여 감사드리나이다."
가슴에 한 손을 가지런히 올린 후 고개를 숙이며 선우영에게 예를 표하는 설수련. 그리고 살
찍 얼굴에 미소를 띄운 후 말을 이었다.
"조금전에 대인께 말씀드렸 듯이 본 신녀문이 중원의 칼바람에 맞서게 될 때, 대인의 도움을
청해도 되겠사옵니까?"
"소직의 어떤 도움을 바라는 것이오?"
"한 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일을 우매한 소녀가 어찌 말할 수 있겠나이까. 다만 소녀의 어리
석은 욕심이 하나 있다면, 혼란의 시기가 되어 본 문이 어려움을 겪게 되었을 때 대인께서 외
면만 하지 않으시면 그것으로 족하나이다."
"상당히 추상적이고 곤혹스러운 청이구려."
선우영은 이미 한번 사부인 음교 교주에게 이러한 청을 들었던 터. 만나게 된 무림인 마다
자신에게 이런 청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것이 더 궁금했다. 자신이 중원에서 명망있고
내노라 하는 무공 고수가 결코 아닐 뿐더러, 몸에 지닌 것이라고는 얼마전 호남로삼부에서
사기치다 시피 얻어 온 몇 푼의 은자가 전부인데 말이다.
물론 사부와 신녀문주의 말에서 중원에 무언가 알 수 없는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음을 짐작
할 수 있었지만, 아무런 힘이 없는 그에게 이런 약조를 할 수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기만 했
다. 그 위험이 어디서 부터 시작될지도 알 수 없고, 또 자신이 과연 도움이 될지 조차 모르지
만, 이미 음교와 한 약조가 있으니 또 한번 더 공허한 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달라질 것은 없
을 거라 그는 생각을 정리했다. 그때가서 도와줄 수 있으면 한 팔 걷어서 도와주면 그만 아니
겠는가. 아마도 한 집단의 수장 자리에 오른 이들이라면, 다가오는 미래의 불안감을 느끼는
능력은 조금씩 가지고 있기 마련이라, 선우영은 신녀문주의 말이 그런 수장들의 몸에 베인
노파심이라 어림짐작했다.
"걱정마시오. 소직 금군에서 그리 높은 자리는 아니나, 만약 세찬 폭풍우 앞에 신녀문과 문주
께서 위험에 빠지게 된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그 어디에 소직이 있던간에 이곳을 향해 달려
올 것이오."
탁자위의 비워진 찻잔에 찻물을 따른 선우영은, 자신의 손에 있는 구절초 꽃잎을 그 잔에 띄
웠다. 그리고 그 잔을 설수련에게 살짝 들어 보인 후 말을 이었다.
"소저께서 전해준 이 삶의 무게. 이것을 소직이 기억하는 한, 소저와 나의 약조는 언제나 영
원할 것이오.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소저의 보는 앞에서 이 잔을 마시리다."
두 손으로 정성들여 잔을 쥔 선우영이 눈을 감고 차를 마시는 모습을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설수련이 그가 찻잔을 내려놓자 두 손을 가슴에 올린 후 정성들여 고개를 숙였다.
"감사하옵니다 대인, 정말 감사하고 또 감사 드리옵니다."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한 설수련은 자신의 품에서 갈색의 피리를 꺼내 선우영에게 두 손을
공손히 내밀었다.
"이것이 무엇이오? 내 이미 여기에 오면서 하나 구입했던 대적이 하나 있거늘... "
"그것과 이것을 어찌 비교할 수 있겠나이까. 이것이 천고의 기물은 아니오나, 대인께 드리는
소녀의 작은 정성이라 생각하시고 받아주시옵서서. 언젠가 대인께서 하실 음율에 깊이를 더
해드릴 것이옵니다."
"허어.. 그렇게 좋은 것이라면 다른 이에게 주면 되지 않겠소? 소직은 그저 이 값싼 피리로
족하는데, 너무 좋은 것을 주시는 것 같아 부담스럽구려. 내 지금 그대에게 줄 것이라곤, 손
에 쥘 수 없는 약조 뿐이거늘.. "
"아니옵니다. 이것은 제가 전대 문주님으로 부터 옥적을 받기 전까지 제가 사용했던 것. 이미
대인께 음을 가르쳐 줄 때 부터 이미 새 주인이 정해진 물건이옵니다. 이것을 가져가시옵소
서. 다음 이곳에 오실 때 이 대적을 보여주신다면 본 문의 아이들이 알아서 대인을 모실 것이
옵니다."
검은 대나무로 정성들여 다듬은 듯한 대적 하나가 설수련의 하얀 손위에 놓여져 묘한 대비
를 보여주고 있었다. 오죽의 표면에는 구름과 소나무가 불에 달군 인두로 그린 듯이 세겨져
있고, 겉표면에 은은하게 흐르는 오래된 시간의 때는 그 만큼의 고풍스러운 맛을 느끼게 해
주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흑적 하나에서 그런 것들을 하나씩 발견하며 보고 있는 선우
영을 지그시 바라보다 설수련이 그녀의 자그마한 입술을 연다.
"혹여, 미천한 소녀가 사용하던 것이라 대인께서 저어하시는 것이온지요?"
"아니 그 무슨 말씀이오. 이 대적에서 오랜 시간의 향기를 느낄 수 있어 바라보고 있었던 것
인데.. 그런 말씀을 하다니 가당치 않소. 내 이 흑적을 꼭 품에 넣고 다니리다. 고맙소."
"대인, 소녀 진심으로 감읍하나이다."
그녀가 건내 준 대적을 품에 갈무리 한 선우영은 방문을 열고 나가며 설수련에게 말을 했다.
"소저, 한가지 물어볼 것이 있는데.."
"대인 말씀하소서."
"아미산에 급히 가야할 일이 있는데, 빠른 길을 약도로 적어줄 수 있겠소? 내 이곳의 길이 어
두워 기일안에 쉽게 찾아가기 어려울 것 같구려."
"그런 것이라면 소녀에게 맡겨 주시옵서서. 소녀가 아주 예쁘게 약도를 그려 대인께 드리겠
나이다. 후훗"
"약도가 굳이 예쁠 필요가 없는데, 그저 알아 볼 수만... "
말을 하다가 급히 말꼬리를 자르는 선우영의 눈앞에는 한 쪽 눈을 흘리고 바라보는 설수련
의 차가운 눈매가 자리잡고 있었다. 한동안 심유경의 등쌀에서 벗어나 긴장을 하지 안았던
탓인지 여인들의 심기를 잃는 것에 실수를 한 선우영은 애써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역시 약도는 예쁠 수록 좋은 것이 아니겠소? 내 마음이 딱 소저의 그것과 다름이 없구려. 허
허허허. "
"호호호호, 대인께서 소녀의 마음을 알아주시니 기쁘기 하량없사옵니다. 기대하시옵소서. 이
곳에 가장 깨끗한 비단에 이마파까지 가는 모든 길목을 그려 드리겠나이다. 소녀의 어줍잖은
몇 자의 글도 함께.. 호호호"
경기로 동경의 한 심처. 가을 수국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정원에 녹색 무복을 단정하게 입
은 중년 남자가 걸어가고 있다. 그가 정원 중앙에 있는 전각을 향해 걸어갈 수록 전각안에서
는 여자의 교성어린 목소리가 세어나오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얼굴 한 가득 불쾌한 기욱이
세어나오고 있는 남자. 칼 자루를 쥐고 있는 왼손에는 핏줄이 가득 잡혔다가 사라지는 것을
반복하며 그의 지금 심정이 어떠한지 보여주고 있었다.
그 시각, 전각안에서는 모용세가의 가주 모용철이 황보세가의 가주 황보연화의 온 몸을 끈
으로 묶은 후 목각 남성으로 그녀의 심비지처를 괴롭히고 있었다. 목각 남성이 그녀의 몸안
에 들어올 때 마다 얼굴을 붉히며 거친 비명을 지르는 그녀. 손과 다리를 묶은 끈에 몸을 움
직일 수 없는지 고개를 세차게 젖는 것으로 그녀의 지금 고통이 어떠한지 표현할 수 있을 뿐
이었다. 눈물과 침으로 얼룩진 그녀의 얼굴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얼마나 아름답게 단장을
했었는지 그 흔적을 찾을 길이 없었다.
그녀의 비처에 심어져 있던 목각을 빼어나 혀로 맛을 보는 모용철.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탁
자에 놓여진 여러개의 크고 작은 목각 남성들 중에 하나를 가져오며 웃음을 띄우며 누워있는
그녀의 나신을 바라본다. 그의 손에 들린 목각은 조금전의 것과는 다르게 작고 큰 사마귀같
은 혹들이 자잘하게 달려있어 그 흉측함을 더해주고 있었다. 두려눈 눈빛으로 모용철이 가지
고 오는 목각 남성을 바라보는 그녀. 두려움 탓이었는지 그녀의 묶여진 두 다리 사이의 이불
에선 축축하게 젖어가는 그림자가 커져가고 있었다.
"더러운 계집. 이걸 보고 흥분해서 오줌을 싸는 년은 너 밖에 없을 거다. 갈보 같은 년!"
"제발.. 제발 이제 그만 해줘. "
"후훗, 과연 이게 들어가도 그런 말이 나올까? 기대해 봐"
"제발.. "
그녀의 간절한 눈빛과 애원에도 아랑곳 안고 모용철은 그의 손에 들린 목각 남성에 진뜩한
침을 바른 후 그녀의 비처에 빙글 돌리며 쑤셔 넣기 시작했다.
"아악... 안돼!.. 제발.."
"그래 그렇게 노래를 불러봐라. 모두가 들을 수 있게.. "
"아아악! "
묶여진 그녀의 저항이 계속되고, 묶여있는 그녀의 몸 중에 움직일 수 있는 모든 부분이 버둥
거리기 시작했다. 허벅지가 떨려오고, 배가 출렁거리며, 가슴이 솟구쳐 오르는 그녀의 모습
을 보며 모용철의 얼굴도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이것이 빠지기 시작하면 내 오늘 처음부터 널 다시 가르칠 것이다. 네 몸의 주인이 누구인지
다시 한번 각인시켜주마. 후후.. 즐겁지 아니하냐?"
"하아악. 꺄아아악.."
문밖에서 황보연화가 지르는 비명소리를 두손을 웅켜쥐고 듣고 있는 팽신후. 그의 웅켜쥔
손의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 들어간다. 그가 그렇게 문 밖에서 분을 삼키고 있을 무렵, 한참
후 방문이 열리고 모용철이 나온다.
"신후, 자네가 왔군. 방에 들어가 즐기시게. 연화가 기다리고 있을거네. 좋은 시간보내시게
나. 후후.. 고년 참.. 갈수록 반응이 좋아져. 전하께서 좋아하실 거야."
돌아가는 모용철의 뒷모습을 이를 물고 바라보던 팽신후는 한차례 긴 한숨을 내 쉰 후, 반쯤
열려진 문을 통해 방으로 들어갔다. 방안에 들어가 보니 그야말로 참상을 불허케 하고 있었
다. 잔뜩 어질러진 이불과 옷이 찢어져 몸의 모든 것이 다 보이는 데도 가릴 생각도 않고 쓰
러져 숨만 내쉬고 있는 황보연화. 그의 몸 구석 구석에는 누군가에게 맞기라도 했는지 손바
닥 자국이 가득하고, 땀과 소변 냄새가 몸에 가득휘감고 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팔과 다리
가 묶인 채 눈물을 흘리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팽신후 그의 가슴에 한자락 알 수 없는 감정이
피어나게 만들고 있었다.
그녀에게 다가가서, 묶여진 끈을 풀어준 후, 소매안에서 깨끗한 비단 수건을 꺼내 그녀의 몸
을 닦아주기 시작하는 팽신후. 몇 군데 혈도를 눌러 억눌러진 몸을 보호해 주며 그녀에게 말
을 했다.
"연화.. 당신의 이런 모습을 보니 내 마음이 아프오. 그대만 허락한다면 내 당신을 위해 무엇
이든 해줄 수가 있소. 연화. 더이상 고통스러워 하지 말고 우리 둘 어디론가 떠나 조용히 사
는게 어떠시오? 먼저 가신 조사님들도 우리를 이해해 주실 것이오."
누워서 자신의 몸을 닦아주는 팽신후의 손길을 느끼고 있던 황보연화는 그런 팽신후의 말에
차갑고 조소어린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말을 했다.
"오호호호호, 방금 소녀에게 도망가서 살자고 말씀하셨습니까? 요국에 ?겨 겨우 자리를 잡
은 시골 세가의 가주인 당신께서요? 주인에게 버림받아 몰락한 세가의 가주인 제가 한낱 먼
저 간 선대조사들을 위해 이러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리석군요. 당신은 정말 어리석어
요. 오호호호호. "
"그럼 그대가 이토록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이유가 그 무엇이란 말이오? 연화. 당신이 이렇
게 아파하는 모습을 보니 내 .."
"신후 오라버니, 오라버니가 사내라면 말을 정확히 하세요. 제가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있는
것이 오라버니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것이 아닌지요? 저와 결혼이라도 하고 싶으신가요? 그
럼 중원의 주인이 되어 보이세요. 그럼 전 오라버니 앞에 실오라기 하나도 거리지 않고 춤을
춰 보이겠어요. 오호호호호호"
"연화... "
하북을 내침하고 점령하고 있는 요에 의해 세가의 세력이 약해지다 못해 하북 이남으로 억
지로 내려와야만 했던 하북팽가와 황보세가. 그들이 새로운 거처로 잡은 곳에서 기를 펼치기
위해 그 얼마나 각고의 노력을 다해왔던가. 하지만 그 시간이 지난 지금, 팽신후 자신의 눈앞
에 있는 황보연화는 어릴적 순진하고 순수하기만 했던 모습은 간 곳이 없고, 세가의 발전과
자신의 사욕을 위해 몸을 던지는 뜨거운 요부만이 있을 따름이었다. 변해져 간다고만 생각했
지만 이렇게나 변해버릴 줄 몰랐던 팽신후는 그녀의 붉게 부어있는 손목을 잡고 눈물을 흘렸
다.
"추하군요. 여인을 위해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니라, 제 눈에는 암컷을 빼앗긴 숫캐의 통한으
로 보입니다. 가세요. 더이상 오라버니를 보고 싶지 않아요. 어서요! "
그녀의 말에 고개를 숙이고 돌아서는 팽신후. 문밖을 나서기 직전, 나지막한 말로 스스로에
게 다짐을 하는 그였다.
"지금은 널 두고 이 자리를 벗어나지만.. 네가 가장 위험할 때 널 지켜주겠다. 그것이 내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것이라도.. 이 말 밖에 할 수 없는 날 욕하고 저주해도 좋다. 망가지다 못해
스스로 부서져 가는 모래성같은 널 이대로 지켜 볼 수는 없구나. 연화. 언젠가 네 곁으로 대
사 돌아오마. "
"그래서요? 그래서 오라버니가 얻고자 하는 것이 정녕 무엇이란 말입니까? 숱한 남정네가
올라타고 버린 이 썩어빠진 몸뚱아리가 그리 탐나신 것이옵니까! "
그리고 문을 걸어 나가는 팽신후를 보는 황보연화의 떨리는 눈에는 그제서야 지금껏 숨기고
참아왔던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몰락한 세가를 일으키기 위해 힘들고 고통스
러운 순간마다 매번 그를 생각하고 이겨냈던 순간이 떠오르고 있었다.
철없던 어릴 시절. 자신보다 못한 검술로 그녀를 지켜주겠다고 큰소리로 말하던 숫기없던 모
습이 그가 떠나고 난 공간에 겹쳐보이기 시작하자, 가슴 한 켠이 칼로 찌르듯 아파오는 황보
연화였다.
"더이상 더럽혀질 곳도 없는 이 몸을 왜 그리 아껴주실려고만 하십니까. 오라버니의 그 따뜻
한 가슴에 소녀가 기댄다면.. 전 바람결의 촛불처럼 사그라들지도 모르옵니다. 제발 절 이대
로 두세요. 제발.. "
"더럽다고 말하지 말거라. 그리고 사라질거라고도 말하지 말거라. 내가 네 마음을 알고, 네가
내 마음을 아는 이상, 지나간 일 따위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다. 다만 네 스스로 학대하는 모
습이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 뿐이니라. 세가를 위해, 그리고 네의 야망을 위해 노력하는
것 자체를 나무라는 것이 아니지만... "
"힘도 없는 오라버니께서 절 어떻게 지켜주시겠다는 말씀이옵니까. 어서 제 눈앞에서 사리지
세요. 이 순간 이후 이런 너저분한 말도, 오라버니의 그 나약한 모습도 제 마음속 깊은 곳에
서 부터 지워버리겠어요. 그러니 오라버니도 어릴적 제 모습부터 모두 지워버리세요. 오라버
니가 기억하는 어릴적 연화라는 계집은 이제 중원 그 어디에도 없단 말이예요! "
울부짓듯이 말을 하며 울고 있는 황보연화. 그리고 그를 보며 다가서지도 못하고 함게 눈물
을 흘리는 팽신후.
"오늘은 이만 가마. 그리고 네 앞에 나타나서 이렇게 널 힘들게 하는 일도 당분간 없을 것이
다. 다만.. 내가 네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을 때는 내 모든 걸 걸고 널 지키러 왔다는 것 하
나 만은 꼭 기억해 주길 바란다. 보중하거라. 너 하나 바라보고 고향땅 하북을 떠나 낮선 이
곳에 내려와 사는 어리석은 놈을 위해서라도.. "
통곡에 가까운 황보연화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걸어가는 팽신후의 발걸음은 무겁기 그지 없
었다.
말을 타고 길을 걷기를 며칠 째. 설수련이 건내 준 약도를 보고 잘 따라오고 있다고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못내 자신 스스로가 의심스러운 선우영이었다. 그러나 오늘 드디어 수려한 산
맥이 모습을 드러내고, 그 중에 우뚝 선 산꼭대기가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하자 안도의 한숨
을 내쉬는 선우영이었다. 기주로의 성산, 아미산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 낸 것이다. 품에서 약
도를 꺼내 다시 한번 바라보는 선우영의 눈에 약도 한 구석에 아담하게 써내려 간 여인의 글
씨가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 글씨를 보자 눈쌀을 찌푸리며 약도를 거칠게 품에 갈무리하는
선우영이었다.
"후우.. 언제나 소녀의 마음속에 있사옵니다. 라니.. 무슨 생각으로 이런 글을 쓴 것인지.. 아
미에 도착하면 태워버려야겠군.."
투덜 거리며 길을 따라 가는 선우영. 그가 고삐를 흔드는 방향으로 느릿한 걸음으로 걸어가
는 검은 말은 선우영의 마음처럼 느긋하기만 했다. 오후가 되기 전에 아미산의 모습이 나타
났지만, 아미 본산에 올라 산문에 오른 시간은 몇 시진이 훌쩍 지난 저녁 무렵이었다. 해거름
이 진하게 내려가고 있는 산중 산문에 두 명의 여승이 경계를 서고 있는 것이 선우영의 눈에
보였다. 말에서 내려 고삐를 잡고 천천히 그들을 향해 걸어갔다.
"시주, 이곳은 아미파의 산문이오이다. 용무가 없으신 남시주의 입산을 정중히 거절하는 본
문의 입장을 헤어려 주시길 바라오이다."
두 명의 여승중에 한 명의 제지에 합장을 한 후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후, 한쪽 소매를 걷으
며 선우영이 말을 했다.
"소직은 귀파의 장문인과 약조가 되어 있소이다. 산문에서 이것을 보이면 입산이 가능하다
하다던데.. 맞는지 모르겠구려."
"그것은 대사매의 .. 혹시 선대협이시옵니까?"
"아, 그때 소저들께 말씀을 들으셨나 보구려. 소직은 선우영이라 하오이다. 들어가도 되겠소
이까?"
"예, 장문인께서도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있었나이다. 드소서. 제가 대협을 안내해 드리겠사
옵니다."
"말씀만으로 감사드리오이다. 그럼 부탁드리오. 예쁜 소저."
예쁜 소저라는 그의 말에 얼굴을 살짝 붉힌 여승은 말고삐를 잡고 걸어가는 선우영의 앞에
서 길안내를 하며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광남서로 융수에서 심유경과 헤어진지 거의 반년만
에 드디어 아미산에 올라오고 있는 선우영이었다. 남들은 보름이 걸리는 거리를 그는 무려
반년이라는 시간이 걸려서야 도착한 것이다.
13 편은 최대한 다음주 주중에 올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 소설은 MMORPG와 조금 비슷합니다. 주인공이 중원을 돌아 다니며 아이템을 모이는 것
이 줄거리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모은 아이템은 전투에는 도움이 안 됩니다. 팔찌
던지고 피리로 공격할 것은 아니니까요. 참고로 전편에서는 생략되었지만 음교 교주 서소영
에게는 음교의 신물인 향낭을 받았습니다.
옥환/ 향낭/ 흑적/ 목걸이/ 용호검 / 군패. 아이템 현재 6개째. -_-;;
주인공은 슬슬 가방을 들고 다녀야 할 듯합니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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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 황진이-19금 성인놀이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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