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
봄비는 눈물이다. 동백꽃 지는 봄에 내리는 눈물이다. 정원 흙바닥에 내려진 꽃잎을 품어가는 이, 아무도 없었다. 그 꽃을 열린 창을 통해 바라보는 11살 어린 소녀가 있었다. 희고 앳된 피부, 약간 창백한 기운마저 도는, 그런 하얀 피부였다. 칠흑처럼 검은 머리칼은 단정히 정리되어 밑으로 늘어뜨리고 있었고, 눈동자는 깊고 고요했다. 그 눈동자엔 총기보다는 지혜을, 생각보다는 사색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빼어난 미색은 그녀의 평탄치 않을 미래를 예지하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서문주영이었다.
11살 어린 소녀, 서문주영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비가 내린다. 그것은 초여름의 시원하고 상쾌한 빗방울이었다.
"아가씨 주약란 아가씨께서 오셨어요."
그녀의 방 밖에서 하녀가 손님이 왔음을 알렸다. 서문주영은 옷매무세를 가다듬고 주약란을 맞이했다. 이내 한 단정하고 정갈하게 차려입은 여인이 들어왔다. 그녀 또한 아름다운 여인이였다. 나이는 이제 막 20살 정도 되었을까.
그 여인이 물었다.
"몸은 좀 어때?"
"덕분에 많이 나아졌어요. 괜찮아요."
"오늘 비가 많이 오네... 하필 이런 날에.... 나갈 수 있겠니?"
"네"
여인이 만족한듯 고개를 끄덕였다.
"금방 끝날 거야. 혹여 몸이 안 좋아지면 주저말고 말하려무나. 모임이 끝나면 내가 궁주님께 말씀드려 연회는 빠질 수 있도록 해줄게"
그 말에 서문주영이 미소지었다.
"마음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아마 괜찮을 것이라 생각해요"
그녀는 어린 서문주영의 고요한 눈동자를 보면서 속으로 쯔쯔 혀를 찼다.
"어찌 이런 어린 아이가 이런 눈을 한단 말인가. 병이 그녀에게서 어린 아이의 천진함을 앗아갔구나."
잠시 후, 한명의 미녀와 한명의 미소녀는 방을 나섰다. 이화궁의 주인 이화궁주에겐 모두 14명의 제자가 있었다. 14명의 제자는 모두 이화궁에서 서열에 따라, 궁녀라고 불리었다. 서문주영과 함께 나선 이 처녀는 바로 주약란이었고, 그녀는 제구궁녀, 서문주영은 제십이궁녀였다. 즉, 아홉번째 제자, 열두번째 제자란 말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무슨 날인가. 바로 이화궁주가 차기 후계자를 뽑는 날이었던 것이었다.
주약란은 서문주영을 데리고 본궁의 대청에 들어섰다. 대청에는 이미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강호는 여인들에게 가혹하다. 그러나 그런 험난한 조건들을 이겨내고, 또는 이겨내기 위해 결성된 집단이 두개 있다. 바로 홍린교와 이화궁이었다. 홍린교는 음란하고 이화궁은 오만하다. 이것이 무림에 난 이 두 세력에 대한 평가를 짧게 표현한 말이었다.
이화궁주 조심련은 일찍히 여인의 몸으로 무림제일고수의 반열에 희대의 기녀였다. 그녀는 이화궁을 세우고 차례차례로 제자를 받아들였는데, 모두 아름답고 자질이 뛰어난 여자들이었다.
대청에 들어선 주약란과 서문주영은 차례차례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이미 정해진 자리로 옮겨갔다. 대청의 최상석에는 하나의 휘황찬란한 좌석이 있었는데 자리가 비어 있었다. 그곳은 바로 이화궁주의 자리이다. 그리고 한개의 단 아래, 20명의 주요 인물들 - 14명의 이화궁녀들과 6대호법 - 이 자리를 잡았고, 그들의 뒤로 수십명의 이화궁의 식객들과 식구들이 운집해 있었다.
대청 입구를 지키고 있던 한 여인이, 맑고 널리 울려퍼지는 목소리로 고했다.
"궁주께서 들어오십니다"
이에 좌중이 둘로 갈라지고, 모두 이화궁주의 등장을 기다렸다. 이내 한 검은 면사포를 쓴 여인이 하얀 무복을 입고 우아하게 걸어왔다. 면사포에 얼굴을 가린 그녀의 얼굴이 어떠한지 아직 아무도 본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그녀의 제자인 14명의 궁녀들조차도 말이다. 그러나 그녀가 강호에 등장히 이름을 날린지 어느덧 50여년. 그때도 그녀는 항상 면사포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녀의 나이를 짐작못햇지만, 이미 그녀의 나이가 불혹을 넘어섰음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이화궁주는 천천히 단좌에 올라가 자리에 앉았다. 그녀의 양옆에는 두명의 청,홍의 옷을 입은 여인들이 보좌했다. 청홍쌍녀(靑紅雙女)는 오랜 세월 동안 이화궁주의 시중을 든 시비들이었다. 그녀들도 이제 나이가 30대 후반에 다다르고 있었다.
"너희들도 알다시피,"
이화궁주는 좌중을 한번 둘러보고는 입을 열었다.
"오늘, 본 궁주는 이화궁주의 자리를 제자들 중 한 명에게 물려주기로 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적지 않을 거라 추측되는 그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모두들 그녀의 말에 얼굴에 긴장의 빛을 띄우며 침을 꿀꺽 삼키며 이화궁주를 바라보았다. 오늘 드디어 오랜 세월동안 이어져온 이화궁녀들 사이의 차기 후계자 자리를 얻기 위한 암투가 끝나고, 2대 이화궁주가 등극하는 날이리라.
대제자인 제일궁녀 화금련이 이화궁을 떠난 이후 이화궁주 조심화는 오랜 세월동안 누구를 후계자를 둘 것이지 고심했다. 모두다 자질이 뛰어난 재녀들이고 모두들 야심찬 인물들이었다. 그래서 오랜 세월동안 이 문제를 덮어두어왔는데, 궁녀들간의 권력 다툼으로 인해 폐혜가 극심해지고 말았다.
또한 이화궁주 조심련은 자신이 더이상 몸이 쇠약해져 더이상 집무를 보는데 차질이 있음을 깨닫고, 지금에서야 드디어 궁주자리를 물려주기로 결심햇던 것이다.
"14명의 제자 중 먼저 몇명을 먼저 호명할 것이다. 그 중에서 내 질문에 가장 지혜롭게 대답한 자가 바로 내일부터 2대 이화궁주가 될 것이다."
이화궁주가 청홍쌍녀중 청의를 입은 여인에게 눈짓을 했다. 청의녀가 앞으로 나오며
"제삼궁녀 송강희는 앞으로 나오시오."
낭랑히 외쳤다. 그러자 20대 후반의 한 아리따운 여인이 앞으로 나와 단아래 무릎을 끓고 단아하게 절을 했다.
"제 육궁녀 제갈경지는 앞으로 나오시오."
이번엔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또 다른 미녀가 앞으로 나왔다. 그녀는 송강희의 곁에 역시 무릎을 끓고 절을 했다.
"제 칠궁녀 곤현수는 앞으로 나오시오."
역시 이제 막 꽃필듯 싱그러운 처녀, 곤현수 또한 앞으로 나온 뒤 제갈경지의 곁에서 무릎을 끓고 절을 햇다.
사람들은 이미 이 세명중에서 2대 이화궁주가 나올 것임을 알고 있었다. 가장 자질이 뛰어났고 대제자였던 화금련이 이화궁을 떠나고, 또 두번째로 후계자로 지목되었던 제이궁녀 홍연희가 스스로 후계자 자리에서 물러남을 표시하면서, 이후 사람들은 서열과 관계없이 가장 뛰어난 여인이 이화궁주가 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세명 모두 절세의 미녀들이었지만 각기 개성이 있었다. 제삼궁녀 송강희는 가장 온화했기에 사람들이 많이 따랐고 제육궁녀 제갈경지는 가장 지혜로웠으며, 제칠궁녀 곤현수는 가장 무공이 뛰어났다.
모두들 이 세명의 여인들을 반 기대, 반 초조가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바로 그들의 새로운 주인이 될 자가 누구일까.
하지만 거기서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또 한명의 호명이 있었다.
"제십이궁녀 서문주영은 앞으로 나오시오"
모두다 웅성거리는 가운데, 아직 11살의 어린 서문주영이 천천히 앞으로 나와 곤현수의 옆에서 무릎을 끓고 절을 했다.
사람들은 속으로 놀라우면서도 의문을 강하게 표시했다. 서문주영은 아직 11살의 어린 나이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녀는 몸에 커다란 불치병을 가지고 있어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모르는 이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기껏해야 앞으로 1,2년일거라 보고 잇었다. 사람들은 자질은 뛰어나지만 불행히도 몸에 큰병을 지닌 서문주영을 이화궁주가 들인 것은 단지 그녀를 가련히 여겼기 때문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화궁주는 지금 그녀를 차기 이화궁주의 후보에 올린 것이 아닌가?
서문주영의 행동거지에는 자신이 불린 것에 전혀 놀라지도 않고 오히려 차분해였다. 오만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마치 자신이 불려나오는게 놀라운 일은 아니라는 태도였다. 사람들은 그녀의 그런 모습에 알게 모르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아무도 그녀가 실제로 임명될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녀가 호명된것에 깊은 당혹감을 느끼면서도 그녀가 지목될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는 곧 죽을 목숨인데, 어떻게 그녀가 이화궁주가 된단 말인가.
이화궁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세가지 질문을 한다. 결코 거짓됨이 없이 솔직히 대답하거라"
네명의 여인이 일제히 고개를 깊이 숙이고 대답했다.
"네"
"먼저 묻겠다. 너희들 중 누가 가장 다음 이화궁주에 적격하다고 생각하느냐?"
겸손함을 묻기엔 너무 뻔한 질문이다. 하지만 만약 그녀가 제자들의 포부를 듣기 위한 것이었다면 이런 식으로 묻지 않았을 것이다.
서열에 따라 삼궁녀 송강희가 먼저 대답했다.
"만약 제갈 사매가 선택되어진다면 지혜로이 이끌 것이라 생각합니다. "
송강희는 물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기는 했다. 자신이 되고 싶은 것이랑은 별개로 , 누가 가장 적격한가라는 생각은 그녀 자신도 이미 스스로에게 수없이 던졌던 질문이었다. 그녀는 그저 솔직한 의견을 말했을 뿐이었다.
그다음 제육궁녀 제갈경지가 대답했다.
"저는 송사저가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됩니다.그녀는 마음이 부드럽고 포용력이 있어 사람들이 따르게 만듭니다."
그리고 다음은 곤현수 차례였다. 그녀는 속으로 조금 난감했다. 제갈경지와 송강희 사저를 들자니 이미 그녀들은 한표씩 받아서 자신이 준다면 두표씩이나 주는 것이 되는데, 사부의 심경을 알 수 없는 가운데 그런 상황은 피하고 싶었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바로 서문주영과 자신인데, 자신을 뽑자니 너무 낯이 간지러웠다. 그러나 서문주영을 뽑자니, 마땅한 이유가 생각나지 않았던 것이다. 만약 이화궁주가 그 이유를 묻는다면 사실 자신도 할말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한참 고민하다가, 결국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저는 서문 사매를 추천합니다."
라고 말했다. 이화궁주가 역시 물었다.
"그 이유는 무엇이냐?"
물론 사저들에게 표를 주기 싫어서, 라고는 말못했다. 곤현수는 머뭇거리다가,
"그녀는...그녀는..가장 아름답습니다. "
물론 서문주영은 귀여운 아이이고, 미래 성장하면 굉장한 미녀가 될 소질이 다분했다. 그러나 아름다움을 꼽자면 이화궁주의 14명의 제자 모두 굉장히 아름다운 재녀들이었다. 이화궁주의 제자가 되기에는 아름답지 않으면 안되었다.
사람들은 곤현수의 말에 모두 의문을 가졌다. 이화궁주 또한 예외는 아닌지,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너와 너의 사저또한 뛰어난 미색을 가진 아이들이다."
의아한 목소리로 그렇게 재차 되물었다. 곤현수가 이번엔 망설임없이 대답했다.
"그것은 그저 제 개인적인 느낌일 뿐입니다."
"좋다. 그렇다면 너는 어찌하여 아름답다는 것이 이화궁주의 자격으로 보탬이 되리라고 생각하느냐?"
"제자는 잘 모릅니다. 다만 사부님의 제자가 되는 데에도 아름다움이 보탬이 되었으니, 사부님의 뒤를 잇는 데에도 아름다움이 필요한 자질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지금 말하는 부분에는 사실 평소에도 곤현수가 생각한 부분이니, 거짓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곧바로 차분히 대답할 수 잇었다
. 그녀는 사실 서문주영을 볼때마다 같은 여자로서 왠지 알수 없는 부러움을 느끼곤 했던 것이었다.
이화궁주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맞다."
그다음이 서문주영에게 물었다.
"네 차례다. 너는 누가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느냐?"
서문주영이 똑바로 망설임없이 대답했다.
"저도 제자가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에 앞서 대답했던 그녀의 사저들은 물론이고, 그 말을 듣고 있던 사람들도 황당해했다.가장 어린 그녀가 설마하니 겸손을 떨지 않고 스스로를 추천할줄 몰랐던 것이다. 그 말은 듣고 난 후, 어떤 이들은 어린 아이가 너무 오만하고 세상을 모른다 했다. 하지만 몇몇 생각 깊은 사람들은 생각했다. 그녀가 자기 자신을 추천했으니, 그녀는 어찌되었든 4명중 2명의 추천을 받게 되었다고.
"너는 왜 너 자신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느냐?"
"그것은 제가 오래 살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사람들은 그녀의 말이 너무나도 이해가 불가능했지만, 이화궁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더이상 묻지 않았다. 한편 송강희와 제갈경지는 그녀의 말에 마음에 짚이는 부분이 있었다.
그리고 이화궁주의 다음 질문이 이어졌다.
"두번째로 묻겠다. 만약 이화궁에 힘으로 도저히 이길 수 없는 대적이 닫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송강희는 팔대문파와 개방 등 정파와 연합하겠다고 했다.
제갈 경지는 지혜로서 타파하겠다고 했다.
곤현수는 힘을 합쳐 대항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서문주영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기지 못할 적에게는 항복하겠습니다"
그러나 이화궁주는 이유는 묻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빤히 서문주영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눈빛에는 분노인지, 의혹인지, 아니면 또다른 감정인지, 면사포에 가려져 있었기에 사람들은 볼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묻는다. 너희들은 누가 이화궁주가 되었으면 좋겠느냐? "
이것은 첫번째 질문과 비슷한 것 같지만 미묘히 틀렸다. 첫번째 질문은 누가 가장 적격이냐고 했고, 이번 질문은 누가 되었으면 좋겠느냐는 질문이었다.
이화궁주는 덧붙였다.
"가장 많이 이름이 불린 아이가 바로 이화궁주다. "
이 말이 끝나자 마자 좌중이 일순 술렁거렸다. 그녀가 설마하니 이런 식으로 후계자를 정할 줄은 몰랐던 것이었다. 그녀의 의도는 과연 무엇일까? 첫번째 질문과 두번째 질문의 의미는 무엇일까. 첫번째 질문에서는 서문주영의 이름이 가장 많이 불렸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고, 이번 질문에서 그녀들이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 나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이렇게 누가 이화궁주가 될 것이냐에 일희일비하는데에는 사실 커다란 이유가 있었다. 14명의 궁녀들이, 사실은 그다지 사이가 안좋았기 때문이었다. 파벌이 갈리어, 누군가가 권력을 지게 되면 나머지 한쪽이 불이익이 당할 것이 뻔했다.
차례대로 송강희부터 대답했다.
"서문주영사매입니다."
"서문 사매입니다."
곤현수는 이번에도 어리둥절 했다.
"그녀들은 어찌도 이렇게 쉽게 포기하고 양보하는가?"
그녀는 생각하기에 , 이미 송강희와 제갈경지가 서문주영의 이름을 댄 이상 결국 결정난게 아닌가 생각했다. 그래서 그냥 솔직하게 마음에 있는 말을 하기로 했다.
"저는 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어 서문주영이 대답했다.
"저도 곤현수 사저가 되었으면 좋겠군요."
세가지 질문이 끝나자, 이화궁주가 조용히 입을 뗐다.
"그렇다면 서문주영과 곤현수 둘중 한명에서 골라야겠구나"
이화궁주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단에서 천천히 걸어내려왔다. 그리고 곤현수와 서문 주영 앞에 서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러나 곤현수, 너는 앞서 질문에서 이미 서문주영이 가장 적합할 것이라 말한 적이 있다. 그렇지 않느냐?"
그 말에 곤현수는 고개를 깊이 숙이며 대답했다.
"사부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러나 이어 말했다.
"그러나 사부님... 사부님께서는 정말 그녀에게 자리를 물려주실 생각이십니까? 그것은...이상합니다."
사람들은 이 곤현수의 말이 너무 노골적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의 그런 의혹과 심정은 그들 자신들과도 같았기 때문에 귀를 기울이고이화궁주가 어떻게 말을 하는지 귀를 기울였다. 곤현수는 자신의 질문이 너무 무례하다고 스스로 생각했는지 급히 자기 입을 막고 고개를 숙였다.
"현수야. 너는 왜 그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느냐?"
곤현수가 잠시 망설이다가 이렇게 말했다.
"서문 사매는 너무 어리고....몸이 안 좋습니다"
이화궁주는 곤현수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아무도 면사포에 가려진 그녀의 눈빛을 관찰 할수 없었지만, 그녀는 눈빛에는 그윽한 따뜻함이 머물러 있었다. 그녀는 이런 곤현수의 솔직함과 직선적인 성격을 높이 샀었다. 그녀의 그런 천진함이야말로 그녀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무공을 그토록 높은 경지에까지 수련하게 만들 수 있었던 원동력이기도 했다.
"나는 그녀에게 화성구룡단을 내릴 것이다."
화성구룡단은 이화궁에 오랜세월 식객으로 머무르고 있는 해정 노파가 만든 희대의 영약으로, 아직 아무도 이 화단을 먹을 수 있는 행운을 누리지 못했다. 그러나 이 환단마저도 서문주영의 병을 고칠수 없고, 단지 몇 년동안만의 생명을 연장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곤현수는 감히 더이상 질문을 할 생각을 못했다.
이화궁주가 다시 올라가 단좌에 앉았다. 그러자 청홍쌍녀중 이번엔 홍의를 입은 여인이 낭랑하게 외쳤다.
"이화궁 제십이궁녀 서문주영은 일어나 단 위로 올라오시오!"
이에 11살의 어린 소녀, 서문주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심련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문주영은 천천히 단 위로 올라가 조심련의 바로 앞에 섰다. 그러나 무릎은 끓지 않았다. 어느새 청의녀가 서문주영의 곁으로 와, 면사포가 달린 하나의 의관을 내밀었다. 그것은 바로 조심련이 쓰고 있는 그 관과 똑같은 것이었다. 서문주영은 그 관을 들고 자신의 머리에 씌웠다. 조심련이 그것을 본 뒤, 단 아래로 내려가 그녀를 바라보며 무릎을 끓었다. 이제 서문주영과 조심련의 위치가 완전히 바뀌었던 것이었다. 홍의녀가 다시 한번 낭랑하게 크게 외쳤다.
"궁인은 명을 받들라!"
이에 모든 사람들이 무릎을 끓고 부복했다.
"존명!"
"오늘 부로 이화궁 제1대 이화궁주 조심련은 이화궁주의 자리에서 물러난다!"
사람들은 이제 어느정도 감이 잡혔다. 조심련은 처음부터 서문주영에게 물려줄 작정이었음을. 그러나 그 이유는 전혀 알수가 없었다.
" 궁인은 명을 받들라."
"존명!"
" 제 십이궁녀 서문주영은 이화궁의 2대 궁대 궁주가 되었다. 궁인은 명을 받들라"
"존명!"
"그녀는 이제 십이궁녀가 아니다. 그녀는 이화궁의 주인이요, 이화궁의 상징이니라."
"존명!"
"궁인은 복창하라!"
"존명!"
"이화궁의 주인이 곧 이화궁이니라!"
"이화궁의 주인이 곧 이화궁이니라!"
"천세! 천세! 천천세!"
"천세! 천세! 천천세!"
서문 주영은 단좌에 앉고 앳되었지만 강단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조심련은 일어나라"
조심련이 천천히 일어났다.
"그대의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한다. 본 궁주는 이제 그대에게 그 보답으로 하나의 별궁을 지어서 내릴 것이다. 그 궁은 정화(情華)라 이름짓고, 조심련은 이후 정화궁녀가 될 것이니라."
"궁주님의 하늘 같은 은혜에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이리하여, 사람들은 이제 조심련이 자리에서 물러나, 정화궁녀라는 새로운 직위로 서문주영을 보좌할 것임을 알았다. 그러나 많은 의문들이 남아있었다. 무엇하러 그런 번거로운 짓을 한단 말인가?
그러나 며칠 후 이화궁의 모든 식구들은 그 이유를 어느정도 어렴풋이나마 짐작할수가 있게 되었다.
제삼궁녀 송강희가 반역의 주모자로써 목이 잘리고, 제십일궁녀 주약란이 같이 공모한 죄로 무공의 폐쇄와 파면이라는 끔찍한 벌을 받게 되었던 것이었다.
서문주영은 궁주에 취임하고 난 뒤 며칠 뒤 사람을 보아 집회를 열었다. 그 가운데 차례차례 송강희가 궁주가 되지 못했던 것에 앙심을 품고 일을 꾀하려 했다는 증거를 하나하나 제시하고는, 그녀에게 죄를 물었다. 그런데 송강희는 얼굴이 파랗게 질린채 아무런 말도 못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주약란이 이 모든 것을 옆에서 자백하며 증언했다.
"그녀의 목을 베거라."
단좌에 앉아 면사포로 표정을 가린채,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는 서문주영의 명을 따라, 6대 호법과 청홍쌍녀가 그녀를 직접 데려가 처형하였고, 주약란은 자백했던 것을 참작하여 그저 무공을 폐쇄하고 궁 밖으로 내 쫓기로 결정했다.
이 모든 것은 너무 일사천리로 진행되어서, 사람들은 그저 공포와 경이로움으로 어린 이화궁주를 바라볼 뿐이었다. 이것은 분명 조심련의 뜻이다. 그러나 그녀가 그저 조심련의 꼭두가시가 아닐수도 있다는 것을 이때 처음 느끼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서문주영은 짧은 시한부의 이화궁의 궁주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녀의 숨이 멎으려는 촛불같은 목숨은 화성구룡단에 의해 몇년더 연장되었지만, 언제 그 숨이 멎어질지 알수가 없었다.
한편 제 삼궁녀 제갈경지와 같이 서문주영과 이화궁주 자리를 다투었던 곤현수는 모든 것을 지켜본후, 자기의 처소로 돌아와 있었다. 그녀의 곁에는 또다른 30대 초반의 한 여인이 같이 하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홍연희. 바로 이화궁주의 두번째 제자이인 제이궁녀였으며, 과거 스스로 후계자의 자리를 사임한 여인이었다.
홍연희가 곤현수의 바라보고 말했다.
"사부님이 서문주영을 이화궁주로 내세운 것은 그녀로 하여금 뒷청소를 시키기 위함이었구나."
곤현수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는 사부님이 실제 누구를 세우려 했다고 생각하세요?"
"아마도 제갈 사매이겠지. 아마 몇년 뒤 서문사매가 죽고 난 뒤에는 그녀를 지목할 것이다. "
"저도 그렇게 생각되는 군요. 그래서 그녀와 심하게 반목했던 송강희 사저를....."
거기까지 말하고는 현수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조심련은 제 이궁녀 제갈경지가 바로 이화궁주가 된다면 송강희가 마음속으로는 수긍하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면 제갈경지는 그녀를 다스리기 위해서 한바탕 숙청을 일으킬 것이 뻔한데, 그렇게 된다면 그녀의 권위또한 많이 흔들리고, 명예도 많이 흔들리게 될것이다. 그래서 서문주영을 이용한 것이었다. 아마도 송강희는 어린 서문주영이 자신을 이토록 빨리 숙청하리라 생각 못했으리라. 제갈경지는 몇년 뒤 지금의 깨끗하고 공정한 인상을 가진채 이화궁주의 자리에 올라설 것이다. 그리고 그동안 어린 서문주영은 조심련의 꼭두각시가 되어 이화궁의 모든 더러운 일을 처리하게 될것이다. 죽기 전까지 말이다.
홍연희는 곤현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는 걱정할 필요없다. 사부님은 네가 설사 이화궁주가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결코 문제를 일으킬만한 인물이 아님을 잘 알고 계시다."
곤현수는 아직 앳된 기운이 가시지 않은 19살 처녀의 고개를 좌우로 천천히 흔들며 말했다.
"저는 그걸 생각하고 있던게 아니랍니다."
"그럼 무엇을?"
"주영이...그 어린 아이가, 편히 죽지도 못하고 여생을 이런 일에 이용당하고 끝내....그 작은 손에 피냄세를 묻히게 되다니...그것만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요.."
".......서문주영은 아마 스스로 이 일을 하겠다고 승낙했을것이다. 그러니 사부님이 그녀에게 화성구룡단을 내렸겟지."
곤현수가 크게 탄식하며 말을 이었다.
"그렇겟지요, 그렇겠지요...살아야 할테니...저는 그 아이가 어린 나이에 죽음을 안타까워 했지요. 하지만 지금 몇년 더 생명을 연장하게 되었는데 그 댓가로 얻는 건 결국 피비릿내 나는 죄업이잖아요? 그것도 본의 아닌..아 사부님은 본궁을 위해서라지만, 너무 잔인하세요."
홍연희는 마음이 여린고 아직 어린 곤현수가 이 일에 너무 감상적으로 받아들인다고 생각했지만, 조심련이 이번에 너무 잔인하게 일을 이끈다고 생각함에는 동의했다.
그리고 일주일 후, 이화궁을 문을 떠나는 한 여인이 있엇다. 그녀의 이름은 주약란. 그녀는 서문주영의 의해 무공이 폐쇄되어 쫓겨난 여인이었다. 그녀는 이화궁에서 초라하고 힘없는 모습으로 걸어가다가, 이내 천천히 발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무도 보지 않는 들판에 이르러서는 몸을 날리기 시작하면서 신묘한 신법을 펼치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무공을 폐쇄되어 있어야 할 그녀가 말이다.
주약란은 바람을 가르며 달려나가면서 지난 며칠 전의 일을 회상했다. 그녀가 옥에 갇힌채 무공이 폐쇄되기를 기다리던 어느 밤, 아무도 몰래 그녀의 옥을 찾아온 이가 있었다.
"주 사저"
주약란은 그 목소리를 듣고 급히 고개를 숙이고 대답햇다.
"궁주님"
그녀는 서문주영이었다. 그녀는 면사포를 쓴채 똑바로 서서 그녀 앞에 깊게 엎더린 주약란을 내려다 보았다.
"주사저. 그대의 무공은 폐쇄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한가지 해 주어야 할 일이 있어요."
주약란이 깜짝 놀란 얼굴을 들며 서문주영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면사포 뒤에 가려진 그녀의 표정을 전혀 읽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궁주님의 뜻입니까?"
"당신이 말하는 궁주는 누구인가요?"
".....물론 제 앞에 계신 바로 당신입니다."
"맞아요 제 뜻이에요. 정화궁녀는 이 일을 모르고 있지요. 그래도 당신은 제 부탁을 들어줄 건가요?"
정화궁녀란 바로 조심련을 말한다. 그녀는 이화궁주 자리에서 물러나고 정화궁에 기거하면서 정화궁녀란 칭호를 받았다. 주약란은 생각했다.
"이화궁의 실질적인 힘은 아직도 사부님에게 있다..."
서문주영이 조심련 몰래 주약란에게 일을 맡기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발상이다. 만약 알려진다면 서문주영 자신도 물론이고 자기 또한 무공이 폐쇄되는 정도에서 끝나지 않을 것이리라. 그러나 주약란은 이내 마음속에 결심을 다졌다.
"궁주님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서문주영은 주약란이 긍정의 의사를 표시하였는데도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의 나이는 이제 막 11살. 이 어린 아이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잇을까? 마침내 그녀가 꺼낸 말은 엉뚱한 것이었다.
"주사저. 저는 당신이 제게 줄곧 잘해 준 것을 잊지 않고 있어요. 언제가 내세에서라도 기회가 닿는다면 당신의 은혜를 잊지 않겠어요."
그리고는 그냥 떠나버렸다. 주약란은 한참동안 그녀가 사라진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고는 눈물을 조용히 흘렸다. 그녀와 처음 만난 날을 기억했던 것이었다. 그녀가 풍신개 서문기의 손을 잡고 이화궁을 찾아왔을 때, 그녀의 나이 아직 7살이고, 자신의 나이는 16살이었다. 두명다 아직 이화궁이 얼마나 살벌하고 피비린내 나는 곳임을 몰랐던 순진한 아이들이었다. 자신은 귀여운 동생이 생긴 것처럼 그녀에게 잘 대해주었다. 그녀 또한 자신을 잘 따라 주었다. 하지만 불과 몇년 사이 둘의 처지는 이토록 큰 변화가 생겼고, 또 지금이 마지막으로 그녀를 보게 되는 순간임을 직감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이화궁을 떠나는 날, 한 얼굴을 모르는 여인이 다가와 그녀의 손에 쪽지를 건네주었다. 주약란은 그 쪽지가 바로 서문주영이 보낸 것임을 직감하고는 재빨리 속에 갈무리하고는 이화궁을 떠났다.
주약란은 한창동안을 신법을 펼쳐서 이화궁으로 부터 완전히 멀어진 후, 아무도 없는 한 숲속 나무 그늘 아래에서 쪽지를 품에서 꺼내어 내용을 읽어보았다. 거기에는 단지 한줄만의 내용만이 적혀 있었다.
[사라진 아버지의 행방을 찾아주세요]
주약란은 내용을 읽고 난 후 종이를 접어 몇갈래로 천천히 찢어서 흩날린 뒤 다시 어디론가 몸을 날려 사라졌다.
이 날은 명나라 영락 5년(1406년)의, 이제 막 봄새가 찾아들어 지저귀기 시작하는 어떤 따뜻한 봄날이었다.
월진이 꽃가루를 가지고 고향을 떠난 해로부터 정확히 5년 전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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