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의 성도에서 말을 타고 서너 식경을 달리다 보면 석죽산에 도착하게 된다. 험준한 산세, 깊은 골짜기를 보면 기화영초라도 품고 있을 법한 분위기이지만, 거개가 다 바위투성이 산인지라 약초꾼들도 찾지 않는 쓸쓸한 곳이다.
사방 십리에 달하는 석죽산의 안에 있는 십여 호의 띄엄띄엄 있는 집들도 다들 육순이 넘은 노인들의 집으로, 하나하나를 살펴보면 사연이 없는 사람들이 없는 곳에 유관필은 장원을 세우기 시작했다.
장원이라 해봐야 서너 채의 건물에 작은 연못과 정자가 딸린 정도지만, 하루 종일을 둘러봐야 이름모를 새들 정도만 볼 수 있는 석죽산에 장원을 세우는 유관필에 대해 사천성의 관부에서도 관심을 가져 장원축조 내내 사천성 내에서는 좀 화제가 된 것이 사실이다.
호사가들이 모이는 성도의 정연거리 성충다방에서는 장원에 대해 두어가지로 소문이 돌았다. 첫째는 석죽산의 인근이 다른 것은 몰라도 물맛은 좋으니, 분명 술을 빚는 사람들의 술도가일 것이라는 것이었지만, 우연히 다방을 찾은 사천특산 검남춘의 명인이 석죽산의 물은 술과 맞지 않다는 증언을 해서 헛소문으로 돌아갔고, 사천출신의 고관대작이 은거를 결심하고 인적이 드문 석죽산에 터를 잡았다는 것이 둘째였고, 마지막엔 130년 전 정사대전에서 패퇴한 마교의 잔당이 운남에서 벗어나 사천으로 진입하기 위해 세운 비밀분타라는 것이 마지막 소문이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소문은 크게 틀리지는 않았지만, 조금 사실과는 달랐다. 북경 경사에서 내려온 관리가 세운 장원이라는 두 번째 소문은 맞았지만, 유가장의 주인 유관필은 고관대작이 아니었고, 겨우 서른 넷의 아직은 청년기를 간직한 중년의 사내였던 것이다.
사천을 떠들썩하게 하던 한가닥의 소문은 유가장 건설을 책임진 대목 두씨에 의해, 경사에서 작은 벼슬을 하던 관리가 사람에 실망해 인적이 드문 곳을 찾고 찾아 싼 값에 땅값을 치르고 내려온 것이라는 결과를 내놓아 사라져 버렸고, 막상 유가장이 모두 지어지고, 유관필과 그의 아내 오세인, 다섯살바기 아들인 유경민이 유가장으로 이사를 했을 땐 이미 사람들의 관심에서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유관필은 성실한 관리였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언제나 문자향 가득한 삶을 꿈꾸었던 그가 사람에 실망하게 된 것은 모두 다 연줄을 너무 믿은 탓이었다. 경사에서 그가 담당한 임무는 북경의 동부 시장의 유통관리책임이었던 것이다. 벼슬이든, 장사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일을 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한다고 생각했던 유관필은 성심을 다해 장사치들을 대했고, 점차 시장의 일부로서 살아가게 되었지만, 불문곡직 정직하기만 한 그의 성격이 문제가 되었다.
장사치들을 기본적으로 이익을 생각하는 사람들이었고, 황실의 공납실무책임자인 유관필에게 뇌물을 주고, 비용을 부풀려 나라를 상대로 사기를 치려했던 것이다. 유관필의 성격상 이것을 용납할 수 없었고, 단호한 거절에 장사치들은 모사를 꾸며 그를 비리를 저지른 탐관오리로 매도했던 것이다. 자세한 조사를 통해 그의 정직함이 밝혀지긴 했지만, 유관필로서는 그토록 믿어왔던 형제와도 같았던 사람들의 배신이 몸서리처지도록 힘들었고, 현명한 아내 오세인의 말을 따라 세상을 벗어나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결정에는 유관필이 제법 자산을 가진 자산가였다는 것이 한 몫한다. 사천의 정연거리에 몇 개의 상가를 가지고 있던 오세인의 부친이 돌아가시면서 하나밖에 없었던 무남독녀 외딸과 결혼한 유관필은 제법 건실한 재정상태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는 회계전문가였기 때문에 자산을 어떻게 운용해야 하는지도 누구보다 잘 아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그는 부자였다.
아직 모두 마르지 않아서 황토의 냄새가 풋풋하게 나는 방에서 유관필과 오세인은 마주 앉아 있었다.
"부인, 내가 무엇을 하는 게 좋겠습니까?"
"상공, 무엇을 하고 싶으십니까?"
"아직은 하고 싶은 것이 없다오. 그저 좀 쉬고 싶을 뿐."
"그럼, 쉬시지요. 그리고 내일쯤 충현의 가족이 이사를 온다 했습니다."
"아, 아버님 댁의? 충현의 자제가 나와 비슷한 나이였던 것으로 기억하오만."
"일문은 오가객잔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상공보다 두 살 아래인 걸로 기억합니다."
"아아, 그렇군."
한 밤의 석죽산은 고요했다. 가끔 매섭게 부는 바람이 늦가을임을 알게 해 줬지만, 해선정이랑고 이름을 붙인 정자에서 작은 소반을 마주하고 술을 한 잔 하고 있는 유관필이 느낀 감정은 심심함이었다.
그의 일생은 언제나 바쁘고, 언제나 시끌벅적했었다. 관리가 되기 위해 누구보다 깊이 공부하며 경쟁에 치열했고, 또 관리가 된 후에는 시장의 사람들과 어울려 떠뜰썩한 분위기에서 살아왔던터라 사람이 싫어 떠나 온 유가장이었지만 그는 외롭고 쓸쓸했던 것이다. 답답한 마음에 가져온 책을 읽었지만, 답답하기만 할 뿐 해소되는 심정은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잘못 생각했던 것인가?
나무가 몇그루 없는 석죽산에 해가 지고 있었다. 타는 듯한 붉은 노을은 참으로 절경이어서, 유관필은 체면에도 불구하고 아내인 세인을 찾으러 안채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긴 이젠 하인들을 제외하면 평생을 아내와 마주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 아닌가.
안채에 들어서자 어딘선가 팡팡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들녀석에게 무공연습이라도 시키는 건가? 유관필 그 자신은 무공의 무자도 모르는 책상물림이었지만, 아내 오세인은 사천의 이름높은 무가인 당가의 방계손의 제자에게 사사한 무림인이라고 할 수 있을 사람이었다. 아내의 가문인 오가가 상인가문이었기 때문에 어느정도의 무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 대단한 수준은 아니었을지라도 아내는 어쨌거나 무공을 익히고 있었고, 아들인 경민에게도 조금씩 가르치는 눈치였었다.
아내에게도 꼼짝하지 못했었는데, 아들에게도 그러면 곤란한 걸. 유관필은 슬며시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안채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제야 팡팡하는 소리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경사에서부터 아내를 따라온 시비 화영이 젖은 옷을 허공에 터는 소리였던 것이다. 아내는 아들을 무릎에 뉘이고 대청에 앉아 무슨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빨래 터는 소리가 나도, 자신이 문을 열고 안채에 들어와도 못들을 정도로 책에 집중하고 있었다. 화영이 고개를 숙여 유관필을 맞았고, 그 소리에 고개를 들은 부인 오세인의 얼굴은 달아올라 있었다.
"상공, 오셨습니까?"
"하하. 무엇에 그리 열중하십니까? 지는 노을이 아름다워, 부인과 함께 하려 왔소만, 노을보다는 그 책이 더 궁금하구료."
"아닙니다. 상공. 아니예요."
그러면서 아내 세인이 얼른 책을 등뒤로 감추는 것이었다. 평소 현숙한데다 침착하기 그지 없던 아내의 모습에 흥미가 동한 유관필이 뛸 듯 빨리 걸어 아내의 손에서 그 책을 낚아챘다. 책의 제목은 없었다. 감색비단으로 싸여진 책은 고급스러웠는데, 책을 넘기던 유관필의 얼굴이 점점 사색이 되고 말았고, 아내 세인의 얼굴은 더할 수 없이 달아올랐다. 그랬다. 책은 노골적인 야담집이었던 것이다.
"상공!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아니오. 아니오. 하하. 허허. 허, 이거야."
"이제, 상공의 얼굴을 어찌 뵈올런지요."
"허허. 아니오. 이래서 부인이 그리 뜨거웠나보오. 하하하."
고개를 숙여 하얗게 드러난 아내의 목은 시원했고, 귀는 달아올라있었다. 어쩔 줄 몰라하는 아내의 모습은 새롭고도 귀여웠다. 유관필이 야담과 기담의 세계와 조우한 첫날이었다
화산기담이라는 야담집은 노골적이고 거칠었지만, 생동감이 있었고, 무엇보다 정의로웠다. 자신의 사부를 죽인 마교의 인사를 향해 거침없이 정의의 칼을 날리는 주인공 나연중에 강한 호감을 느낀 유관필은 읽는 내내 나연중에게 대리만족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했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지만, 인간관계에서 언제나 소극적이었던 자기를 대신해서 절세의 미녀의 구애도 거절하고 오직 복수를 위해 정의의 칼을 드는 주인공을 보며 정말로 속이 시원했던 것이다.
자정이 조금 못되어 잡은 책을 다 읽어버린 유관필은 곧 자리에 누웠지만, 두근거리는 마음에 잠을 좀 설쳤던 것이다. 왜 이런 세계를 몰랐을까라는 자책을 하면서도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아내를 채근해 좀 더 많은 책을 읽어야겠다고 다짐하는 유관필이었다.
강호의 대영웅이 되어, 중원을 질타하는 꿈을 새벽녘에 꾼 유관필은 시비 화영이 주인마님을 몇 번이나 외친 후 일어났지만, 깨자마자 허무함을 느껴야 했다. 앙상하다고 해도 좋을 팔뚝, 근육이라고는 평생 생겼던 적이 없었던 푸근한 배를 눈을 뜨지마자 봐야 했던 것이다. 자신은 강호의 영웅 나연중이 아니라, 그저 낙향한 관리 유관필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되자마자 급속히 기분이 나빠졌던 것이다.
그렇다고 아침이 준비되었다는 자신의 일을 성실히 한 시비를 꾸짖을 수도 없어서 괜히 혼자 신경질을 내면서 의관을 정제한 유관필은 아내와 다섯살배기 아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 식사를 많이 하지 않는 유관필은 아내의 밥그릇이 자신의 것보다 조금 작은 것이 의아해져서 아내 오세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부인, 그릇이 바뀌었소. 괜찮소. 넉넉히 드시오. 책상물림인 나와 부인은 다르지 않소. 경사에서야 남의 시선을 두려워하며 살았으나, 여기서야 누구 눈치를 보겠소. 더 드시오."
"아닙니다. 상공. 이 정도로 충분합니다. 경사에서야 혹여나 우리 가족을 누가 해칠 수도 있겠어서 무공을 놓지 못했지만, 이곳 유가장에서야 누가 우리 가족을 해치겠습니까. 이젠 하릴없는 무공일랑 놓고, 그저 우리 경민이만 건강하게 키울 생각입니다."
"배가 고프지 않겠소?"
"괜찮습니다. 저야 하는 일도 없는 형편인데요."
"아, 그나저나 어제 그 기담집 말이오. 다른 것은 없는거요. 거 재미가 있더이다."
"상공 놀리지 마십시오. 아녀자가 그런 책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대경할 일인데, 몇 권이나 가지고 있겠습니까. 더는 없습니다. 더 놀리시면 이틀동안 상공과 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그럴수야 있나. 내가 사과하겠습니다. 부인. 현숙한 부인이 그런 책을 더 가지고 있는 게 말이 안되지 그렇고 말고."
역시 아내는 귀여운 여인이었다. 눈에 빤히 보이는 거짓말이었지만, 유관필은 아내의 내숭과 비밀이 사랑스러웠다. 성도에 가서 기담집을 좀 사와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아내에게 아침을 먹은 후, 성도에 다녀오겠다고 말을 한 후 천천히 식사를 마쳤다.
성도는 번화했다. 번화가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서 세책방을 찾아내고서는 다짜고짜 안에 들어갔더니. 화려한 표지의 삽화까지 그려진 기담집과 야담집이 책방 안에 가득했다. 경서를 취급하는 서점에야 무시로 드나들었지만, 세책방이 처음인 관필은 우선 그 규모에 놀랐다. 한 때 경사에서 시장의 관리를 했던 만큼, 가게의 규모만 봐도 어느정도의 매출을 올리는 지 짐작이 가는 유관필이었다. 장옷을 쓰고, 시비를 앞세운 규중의 처자들로부터, 아마도 관의 포교같이 보이는 자, 거기에 선비들까지 손님의 구성도 다양했고, 무엇보다 눈에서 반짝반짝 빛을 발하는 손님들에게서 뭔가 감동을 느낀 유관필은 우선 주인을 찾았다.
장비처럼 수북한 수염이 인상적인 세책방의 주인은 보기에도 덩치가 당당했는데, 골격이 작은 유관필의 앞에 서자 그 덩치가 더 크게 보였다. 사천왕상같이 우렁우렁한 얼굴의 주인은 주인을 찾는 유관필의 앞으로 다가와서 천둥소리같은 목소리를 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기담집이나 야담집을 좀 샀으면 하오만."
"어떤 책을 찾으십니까?"
"어제 화산기담이라는 글을 처음으로 보았소만 여간 통쾌한 게 아니라서 말이오. 그와 비슷한 책이었으면 좋겠소."
"아! 그 책을 가지고 계십니까? 혹여 경사에서 오셨습니까?"
"그렇소만."
"혹시 지금도 가지고 계십니까?"
"아니오. 집에 있소. 그런데, 왜 그러시오?"
"화산기담의 작가 월영산인은 이 세계에선 거의 신필이나 다름없는데, 화산기담을 냈다는 소문을 듣기는 했습니다만, 경사에서 이곳 사천까지 책이 오려면 아무래도 시간이 꽤나 걸려서 말입니다. 어떻게든 구하려고 노력중이었는데, 귀인이 오셨습니다. 대인께서 불편하시지 않으시면, 제게 책을 좀 빌려주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깨끗하게 필사를 하고 돌려드리는 것은 물론이고, 월영산인의 다른 책들을 무료로 빌려드리겠습니다."
"책과 즐거움과 남을 돕는 일은 본시 나눌수록 가치가 커지는 것이니 내 주인장에게 빌려주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우리 집이 좀 멀어서 말이오."
"대인 집이 어디십니까?"
"석죽산 근처라오."
"아, 새로 지어졌다는 그 유가장의 주인이시로군요."
"어찌 아오?"
"호사가들이 가장 즐겨 찾는 곳들은 원경대로의 뒷골목 객잔과 홍루들이지만, 그 호사가들에게 이야기를 만들어 파는 매설가들이 상주하다 시피 하는 곳이 우리 세책방이니 소문이야 모두 우리 가게로 들어오는 편이지요. 대인, 서찰을 하나 적어주시겠습니까? 이 서찰을 가져가는 자에게 책을 내어주라 뭐 그정도면 되겠네요."
"지필묵을 좀.."
"아, 여기 있습니다. 자방아, 비천마객 장유 어르신을 모셔오너라. 자룡이 넌 필사꾼들을 모아오고, 열 다섯이면 되겠다."
서찰을 작성한 유관필은 서찰을 내어주고 주인이 내어준 월영산인의 책들을 살펴보며 떠들썩한 세책방의 소란을 지켜보고 있었다. 화산기담의 필사본을 대여하려는 사람들의 순서를 정하는 소란이었다. 유관필은 해연히 놀라고 말았다. 장옷을 쓴 조용한 여인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자신의 순서를 주장하는 장면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저렇게 얌전한 아가씨가 체신도 모르고 저렇게 나설 정도로 기담집은 그만한 매력이 있는 건가를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더욱 놀라고 말았다.
차를 한 잔 마실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한 장년은 넘은 듯한 노인이 아내가 싸준 듯한 보따리를 세책방의 주인에게 전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말을 타고서도 서너 식경이 걸리는 거리다. 도저히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시간이었지만, 해내는 사람을 처음으로 보았고, 그것은 유관필에게는 감동이었다. 유관필은 무협의 세계에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았던 것이다.
유관필은 진심으로 감탄했고, 그 경탄의 심정을 감추지 않았다. 원래가 솔직한 성격인데다, 어쩌면 눈 앞의 이 중늙은이가 정말로 나연중처럼 한 손으로 바위를 부수고, 호수를 가르는 절정의 무공을 가지고 있을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유관필은 아내가 싸준 보따리를 받아 감색의 책을 세책방 주인에게 건네며, 눈으로 비천마객 손유와 인사를 하고 싶다는 마음을 전했다.
세책방의 주인은 유관필의 간절한 눈길에도 불구하고, 책을 펼쳐 내용을 확인하고는, 세책방의 한쪽 구석에 마련된 필사가들이 모인 방에 화산기담을 가져다 준 후에야 유관필을 찾아와 감사의 인사를 청했다.
"대인, 고맙습니다. 초반만 읽어봤지만서도, 역시 월영산인 이름값을 하네요. 혹시, 보유하고 있는 다른 책들도 있으신가요? 기공흑마 님이나, 마골객 님의 소설도 가지고 있으시면 좀 대여가 가능한 지 알고 싶습니다. 아예 정식으로 계약을 맺고, 일정부분 수익을 드릴 생각도 있으니까요."
"책은 내 소유가 아니고, 아내가 가지고 있던 것이라네. 그런데, 아까 그 걸음이 날랜 어르신 말일세. 그 어른은 나연중처럼 무공이 뛰어난 사람인겐가? 진짜로 궁금해서 묻는 건네만,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실제로 존재하는가 말일세."
유관필의 말이 끝나자마자 대여순서를 제비를 뽑아 결정하고 있던 열댓의 사람들이 푸하하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그리고 한 눈에도 사람을 스물은 죽인 적이 있을 것 같이 생긴 도둑놈상의 장년인이 다가와 유관필의 손목을 낚아챘다. 그리고는 무슨 일을 한 건지 찌릿찌릿한 감각이 전신으로 퍼지는 것이었다.
"운동부족이로구만. 내 말해주지. 그런 사람들은 있네. 내가 작년에 하남성 인근에서 본 일을 말해주지. 이건 직접 본 일이지. 그날 난 하남성 택정의 처갓집을 가고 있었지. 마누라쟁이랑 애들을 데리고 쭉 걷고 있었어. 혼자라면 경공이라도 써서 사나흘에 다녀올 수 있는 거리지만, 마누라랑 애들이랑 같이 가니 그럴 수가 있어야지. 한달 여정을 잡고 걷고 있었는데 말이야. 택정이라는 곳이 워낙 궁벽한 곳에 있어서 객잔을 만나지 못한 채로 이틀이 지나 있었어. 나야 체력이 있으니 상관이 없었지만, 여자랑 아이들이라 그날은 무슨 일이 있어도 안되면 인가에라도 부탁해서 지붕있는 곳에서 잘 생각이었어."
장광설을 늘어놓으려던 실팍한 인상의 장년인의 말을 끊은 건, 세책방의 주인이었다.
"자네의 그 장강어로 이야기는 더는 듣고 싶지 않네. 자네는 말이 너무 많아. 대인, 화산기담에서 어떤 경지가 나왔는지는 저로서도 보지 않았으니 잘 알지 못하지만, 월영산인 님의 전작을 미루어 짐작하면, 그런 경지를 가진 무인들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아까 책을 가져온 비천마객은 저희 가게에서 한달에 은자 다섯 냥을 주고 고용하고 있는 자이온데, 경공이 빨라, 사천성에서 스무 손가락 안짝에는 드는 자이지요. 경공이외에는 재주가 없는 자라, 무공이 강하지는 못합니다. 이런 정도로 생각하시면 좋을 듯 합니다. 내공을 쓸 수 있어서, 일반 사람들이 들 수 없는 거대한 돌을 들 수 있으면 이류의 무인이고, 그 돌을 칼이나 주먹으로 부술 수 있으면 일류의 경지가 되는데, 한 성에 한 천명 정도는 될 겝니다. 더 경지가 높아져서 한 주먹에 그 돌을 모래알로 만들 수 있으면 절정의 경지가 되어 한 성에 한 스무 명에서 열 정도가 됩니다. 그 돌을 손을 대지 않고 들어 날릴 수 있으면 초절정이라고 해서 한 성에 셋도 많지요. 그런 정도입니다."
"그렇군. 고맙네. 기공흑마와 마골객이라고 했나. 내 아내에게 물어봄세. 혹시나 있으면, 내 이 책들을 돌려주러 올 때 가져오지. 즐거운 시간이었네. 그리고, 책보따리는 내가 사랑하는 아내의 물건이니, 좀 조심스럽게 소중히 다뤄주시게. 이 책들은 고맙네. 유가장이 좀 멀어서 난 그만 돌아가야겠네. 한 일 주일쯤이 지나서 다시 오겠네."
"네, 저 역시 감사합니다. 대인. 다음에 뵙지요."
세책방을 나섰지만, 오랜만의 번화가를 나온 것이라 그냥 들어가고 싶지 않았던 유관필이 찾은 곳은 떡과 과일, 음료를 먹을 수 있는 다과점이었다. 단 것을 좋아하는 아내를 위해 전병이나 유과를 사 갈 요량이었다. 말을 타고 꽤 오래 달려왔기 때문에 몸이 좀 지친 탓도 있었다. 유관필은 마필을 그대로 세책방에 둔 채로 성도의 번화가를 걸었다. 사천은 대륙의 쌀밭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물산이 풍부한 곳이었다. 오랜 시간 북경에서 시장의 관리를 담당한 유관필이 보기에도 사천성의 수도 성도의 시가는 화려했다.
다과점을 찾은 유관필이 들어가자마자 예쁘장하게 생긴 시비 아이가 쪼르르 다가와 스스럼없이 무엇을 찾으시는 지 묻는 것도 신선했다. 예의와 격식을 따지는 경사에서는 일단은 손님이 무엇을 고르던 그것을 결정할 때까지는 방해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경사의 손님응대에 익숙한 유관필은 과하다고 생각되면서도 친절한 대응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저 아내의 선물만 사가지고 돌아가려던 유관필은 입맛을 돋게 진열된 여러가지 주전부리들을 바라보면서 출출함을 느꼈다. 하긴, 아침도 부실했고, 또 오랜만에 말을 달려왔으니 배가 고프지 않은 게 더 이상했다.
"저기, 속이 좀 허출해서 그런데, 내가 먹을만큼 여러가지를 좀 챙겨다주지 않겠니? 좀 부탁해도 될까?"
"예. 대인. 그런데, 경사에서 오셨어요?"
"어, 그런데, 어떻게 알았어?"
"사천 말을 쓰지 않으시니까요? 그런데, 진짜로 경사는 그렇게 좋아요?"
"응?"
"저기 앞 만두가게 왕씨 아저씨가 경사에서 오셨거든요. 천자님이 사시는 곳은 전각에 모두 금칠을 했다고 해서요. 번쩍번쩍 할 것 같기도 하고, 그러면 누가 도둑질을 하러 들어가면 어떻게 할까 싶기도 하고 해서요."
"하하. 아니야. 경사나 여기나 모두 사람사는 곳인데, 뭐가 다르겠니. 경사만큼 성도도 화려한 곳이야. 내 경사에서 이 곳까지 두달을 걸어서 오면서 보니, 성도만큼 좋은 곳도 없더라. 경사는 사람들이 모두 젠 체해서 별로였는데, 이 곳 사람들은 모두 화통해서 좋았거든."
"그렇지요. 대인. 거짓말일 줄 알았어요. 경사는 무슨. 만두도 그렇게 맛있지도 않으면서. 치. 잠깐만 기다리세요. 맛있는 거 많이 챙겨올게요."
"내가 먹을 것은 가져다 주고, 맛있는 것만 싸서 혼자 먹을 것을 하나 싸주고, 서넛이 먹을 것도 좀 싸주렴. 혼자 먹을 건 좀 단 것들로, 서넛이 먹을 건 양이 넉넉한 것들로."
"누굴 가져다 주실 거예요?"
"응, 혼자 먹을 건 아내를 가져다 주고, 서넛이 먹을 건, 장원의 하인들에게 주려고."
"어머나, 하인들을요?"
"함께 사는 사람들이니까. 같이 먹을 것을 먹는 게 식구니까."
"예. 잠깐만 기다리세요. 그런데, 대인 이름을 알 수 있을까요?"
"응? 왜?"
"그냥요. 좋아서요. 그런 말을 처음 들었거든요."
"난 유관필이야. 그냥 유 아저씨라고 불러라."
"네, 아저씨."
쪼르르 뛰어가는 열 서넛을 먹은 아이를 흐뭇한 표정을 보던 유관필이 책 보따리를 끌러, 독공자 당민이라는 월영산인의 책을 꺼내들었다. 독을 쓰는 공자라는 건가? 아니면, 독심을 가진 공자라는 뜻일까? 독이란 아마 비상이나 부자같은 것이겠지라고 상상하면서 책을 읽으려는데, 다과점의 문이 열리면서 눈에 익은 자태의 여인이 들어왔다. 아까 세책방에서 봤던, 장옷의 처녀였다. 시비와 함께 온 처녀가 눈인사를 건낸 후, 익숙하게 시비를 시켜 주문을 했다.
독공자 당민은 사천의 성도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무림에 무지했지만, 사천성에 당문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던 유관필은 자신이 살고 있는 장소에서 펼쳐지는 협의를 기대하면서 책을 읽어내려갔다. 잠시 책에 마음을 빼앗긴 유관필이 정신을 차린 건, 다과점의 시비가 대나무 접시에 예쁘게 장식한 떡과 당과들을 가져왔기 때문이었다.
"아저씨, 가져가실 건, 지금 언니들이 싸고 있어요."
"그래. 고맙다. 여기 이건, 용돈이나 하렴."
쭈뼛거리면서 가지 않고 유관필의 앞에 오줌마려운 표정으로 서있는 시비 아이를 보며 뭔가 깨달은 유관필이 전대에서 동전을 하나 꺼내 시비의 손에 쥐어주자, 그런 게 아니라면서 극구 사양하면서 억지로 돈을 유관필의 손에 다시 건낸 후 도망치면서 말했다.
"그게 아니고, 아저씨, 제 이름은 앵앵이에요. 앵앵이요."
떡은 맛있었다. 당과 중 달걀을 입힌 매실청이 들어간 게 유난히 맛있어서 이름을 물어보려고 시비 앵앵을 찾았지만, 부끄러운 얼굴로 주방으로 뛰쳐간 앵앵이 보이지 않아서 일부러 먹지 않고 하나를 남겨 둔 유관필이 다시 책으로 고개를 숙이는데, 얼굴이 홍시처럼 빨개진 시비 앵앵이 세책방 처녀의 접시를 가져다 주러 나오는 것이 보였다.
관필의 접시에 비해 소박한 접시를 보면서 관필은 역시 처자라서 적게 먹는구나라고 생각했는데, 처녀의 반응은 달랐다.
"앵앵아, 저기 저 접시랑 내 접시랑 왜 달라?"
"아가씨, 아저씨의 접시는 제가 선물한 겁니다. 저건 돈을 내시고 드시는 게 아니에요."
"뭐? 왜 그러건데?"
"유 아저씨는 다른 분이랑 다르니까요. 아가씨는 오 년을 봐도 아가씨지만, 아저씨는 오늘 처음 뵀지만, 아저씨니까요."
"그게 무슨 소리야?"
"아저씨는 자기 집 하인들을 위해, 떡을 사가시지만, 아가씨는 저기 앞에 서 있는 언니에게 당과쪼가리 하나를 오년 동안 한 번도 사주는 걸 보지 못했으니까요."
장옷을 입은 처녀는 얼굴이 붉어지더니, 유관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심 처녀의 처사를 좀 심하다고 생각했던 유관필은 화가 난 표정으로 자기 쪽으로 다가오는 처녀를 보며 좀 당황했는데, 처녀는 유관필에게 다가와 손바닥으로 유관필이 앉아있는 탁자를 탕하고 쳤는데, 고급스러워보이는 단단한 탁자가 처녀의 손바닥 모양으로 쑥하고 들어가는 게 보였다. 저것이 내공인건가라고 감탄하는 마음이 들었는데, 처녀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당예인이에요. 당신 이름이 뭐죠?"
"유관필이요."
"하인에게 떡을 사다 주신다고요. 왜 그런거죠?"
"예? 그러고 싶어 그런 거요. 난 경사에서 관리 생활을 하다 낙향한 사람이오. 지금 내 장원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경사에서부터 나를 따라온 사람들이오. 아내와 아들은 가족이니 가장인 나를 따른 것이지만, 경사에서 날 따라 온 사람들은 그들의 인간관계를 모두 정리하고 나를 따라 온 거란 말이오. 내가 주인이라 그런 거겠지만, 자신이 좋아하던 사람들을 모두 두고 날 따라 온 사람들에게 내가 마음을 쓰는 편이 더 자연스럽지 않소. 난 편한 게 좋소. 떡을 먹고 싶어 눈을 반짝이는 시비 아이에게 떡을 건네는 것이 난 더 마음이 편하단 말이오. 그냥 세워두는 것보다는 말이오."
유관필을 향해 일장을 날릴 것 같던 당예인은 유관필의 말에 고개를 떨궜다. 이성적으로 유관필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왜 유관필이 생각하고 실천하고 있는 일을 당문의 꽃이라고 불리는 자신이 하지 못하고 있는지가 혼란스러워서 머리가 어질어질했던 것이다. 유관필은 무공을 익힌 것이 분명한 당문 처녀의 손속을 두려워하다가 곧 실의에 빠진 처녀를 향해 한마디를 던졌다.
"처녀의 잘못이 아니오."
당예인은 자신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유관필의 말에 놀라 고개를 들어 유관필을 바라봤다.
"실패를 해 보지 않은 인생이란, 원래 어려운 사람의 처지를 쉬이 이해하지 못하는 법이오. 나역시 지금과 같은 생각을 경사에서 관리를 할 때는 하지 못했소.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고. 명문에서 태어나, 일직선으로 성공만 하며 살아온 처자같은 사람은 누구나가 조금씩은 오만한 거요. 그게 당연한 거란 말이오. 자책할 일이 아니오. 몰라서 하지 않은 일은 죄가 되지 않는 법이오. 누구도 선행을 하지 않았다고 비난하지는 않는 법이라오. 선행은 지금부터라도 하면 되니 좋은 거라오. 처자, 당예인이라고 했소? 앞으로 말이오. 날 때부터 처지가 좋은 사람은 왜 그런 말들을 하지 않소. 전생에 잘 살아 그런 거라고. 한 인생만 살 게 아니지 않소. 다음 삶에서 또 대우를 받으려면 일단 지금은 잘하고 보는 게 최고 아니겠소. 조금만 여유를 나눠 주시오."
유관필의 말은 당예인의 마음에 스며들었다. 유관필은 스스로를 자랑하지도, 자신을 비난하지도 않았다. 그저 부탁을 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난처한 이 상황을 어떻게 벗어나야 하는 지도 가르쳐 주었다. 당예인은 소매 안쪽에서 전낭을 꺼내 은자를 세 개나 꺼냈다. 앵앵을 불러 돈을 건내며 당부를 잊지 않았다.
"앵앵, 이건, 부서진 탁자와 떡값이야. 그리고 앞으로 이 아이가 오면 언제든 먹을 걸 내 주겠니. 돈이 모자라면 내가 다시 올 때쯤 말하면 셈을 치를테니."
"예, 아가씨."
"대인, 앞으로 선생님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뜬금없는 당예인의 요청에 당황했지만, 얼굴이 예쁜 아가씨가 자신을 계기로 개심한 것도 마음에 들고 해서 유관필은 선선히 그래도 좋다는 말을 했다.
"허허, 뭐, 그러시오."
"오늘 좋은 말씀 감사드려요. 언젠가 장원을 찾아봬도 될까요?"
"그러시오. 대접이야 변변치 않을 지 모르나, 인정만은 넘치는 집이니 언제 찾아오시더라도 환영이오."
"예. 꼭 그럴게요."
당예인이 나온 당과들과 떡을 거의 먹지도 않고 자신의 시비를 데리고 돌아가버리자마자 앵앵이 다가와 종알거렸다.
"아저씨.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세요. 당가 사람들이 다 예인 아가씨 같지는 않거든요. 저도 아까 괜히 울컥해서, 참지 못했는데, 무림인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는 그저 져주는 게 이기는 거예요."
"그건 또 무슨 소리냐?"
"대화가 통하는 사람들이 아니거든요. 그저 불문곡직하고 그냥 힘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들이니까요."
"그러면, 내가 아주 운이 좋은 거로구나."
"그래도 시원했어요. 아 아까 말한 것처럼 이건 공짜로 드릴게요."
"안 될 말이다. 아주 맛있었으니 내가 셈을 더 치르는 게 옳은 일이다. 그리고 이 달걀부침만 좀 더 싸 주겠니. 아주 맛있어서 말이다."
"그럴게요."
앵앵이 싸준 떡보따리를 들고, 가게를 나서면서 유관필이 느낀 것은 짜릿함과 성취감이었다. 경사를 떠나면서 인간관계를 거의 포기했던 유관필이었지만, 아내의 야담소설을 본 것만으로 벌써 인간같지 않게 빠른 손유라던지, 장비와 같은 세책방 주인에, 어여쁜 처녀 당예인과 떡집 시비 앵앵을 알게 됐고, 모두 고루하기 짝이 없는 경사의 인간과는 다른 활동적인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적이 만족스러운 만남들이었던 것이다.
어서 아내에겔 돌아가서 오늘 하루 겪었던 일들을 말해주고 싶은 마음이 든 유관필이 세책방에 들러 말을 찾아 유가장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뉘엿뉘엿 해가 져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아직 밤이 되거나 한 것은 아니어서, 말을 마굿간에 넣고, 아내를 찾아 내원으로 들었을 때, 유관필이 마주친 건 아내와 마주하여 차를 마시고 있는 당예인이었다.
남녀관계에 어지간히 둔감한 유관필이었지만, 겉으로 미소를 띄고 있는 아내 오세인의 눈에서 뚝뚝 떨어지는 분노와 의심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어서, 유관필은 체신도 잊고 무릎걸음으로 아내에게 다가가 큰 소리로 당예인과의 관계를 큰 소리로 해명하려 했다.
"부, 부인. 이 처자는 말이오. 사실은, 오늘 세책방을 찾았는데 말이오. 거기서 알게 된 처자인데 말이오. 그 사천당문의 자제라 하오. 나와는 오늘 처음 봤는데, 아, 부인을 주려고 내 여기 떡을 사왔는데, 이 매작과라는 계란 부침이 맛있어서..."
땀을 흘리며 변명을 늘어놓는 유관필을 이상하다는 듯, 바라본 당예인이 순진한 얼굴로 유관필과 오세인을 바라봤다. 오세인이 유관필이 싸온 떡보자기를 펼치더니 몇 개의 다과를 다탁의 가운데 놓인 접시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그러지 말고, 여기 않으세요. 상공. 당여협에게 다 들었어요. 여기 이게 추헌들에게 주려는 것인가 보죠. 화영아. 잠시 들어와."
시비 화영이 들어와서 오세인과 잠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또 아무렇지 않게 당과를 집어먹으면서 입안의 당과를 우물거리며 하인들에게 줄 당과를 챙겨가는 광경을 본 당예인은 몹시 놀라워했다.
"그런데, 언니, 언니라고 불러도 될까요?"
"그래요. 나도 예인이라고 불러도 될까? 올해 나이가..열 일곱?"
"아뇨. 열 아홉이에요."
"좋을 때네. 나도 이럴 때가 있었는데. 예쁘죠? 상공. 그렇지 않나요?"
"아니. 예쁜 걸로 따지면, 스물 두살 때의 당신 이상이 있을 수 있나. 그땐 정말이지 서원이고 과거고 다 때려치우고, 당신만 보고 싶었다니까."
"와..아! 그런데, 정말 언니네는 왜 이렇게 다르죠? 아랫사람들에게 이렇게 대하면 버릇이 없어지는 거 아닌가요?"
"사람에겐 아래 위가 없는 법이라오. 처녀. 개미를 본 적이 있소?"
"네."
"개미를 보면서, 큰 개미, 작은 개미를 구분하고, 좋은 개미, 나쁜 개미를 구분해서 생각한 적은 있소?"
"아뇨. 그런데, 개미랑 사람은 다르잖아요."
"다르지 않소. 높은 산에서 산 아래를 바라보면 사람도 개미만하게 보이지 않소. 그런 거라오. 같이 살아가는 인생들인게지. 그리고 조금 더 즐겁게 살려면 일단 좋은 얼굴을 보여주는 게 첫번째로 할 일이라오."
"역시, 선생님이세요. 아, 언니, 전 유 선생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여태까지 선생님같은 분을 본 적이 없거든요."
"좋아. 그래도 반하면 안 돼."
"네."
사방 십리에 달하는 석죽산의 안에 있는 십여 호의 띄엄띄엄 있는 집들도 다들 육순이 넘은 노인들의 집으로, 하나하나를 살펴보면 사연이 없는 사람들이 없는 곳에 유관필은 장원을 세우기 시작했다.
장원이라 해봐야 서너 채의 건물에 작은 연못과 정자가 딸린 정도지만, 하루 종일을 둘러봐야 이름모를 새들 정도만 볼 수 있는 석죽산에 장원을 세우는 유관필에 대해 사천성의 관부에서도 관심을 가져 장원축조 내내 사천성 내에서는 좀 화제가 된 것이 사실이다.
호사가들이 모이는 성도의 정연거리 성충다방에서는 장원에 대해 두어가지로 소문이 돌았다. 첫째는 석죽산의 인근이 다른 것은 몰라도 물맛은 좋으니, 분명 술을 빚는 사람들의 술도가일 것이라는 것이었지만, 우연히 다방을 찾은 사천특산 검남춘의 명인이 석죽산의 물은 술과 맞지 않다는 증언을 해서 헛소문으로 돌아갔고, 사천출신의 고관대작이 은거를 결심하고 인적이 드문 석죽산에 터를 잡았다는 것이 둘째였고, 마지막엔 130년 전 정사대전에서 패퇴한 마교의 잔당이 운남에서 벗어나 사천으로 진입하기 위해 세운 비밀분타라는 것이 마지막 소문이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소문은 크게 틀리지는 않았지만, 조금 사실과는 달랐다. 북경 경사에서 내려온 관리가 세운 장원이라는 두 번째 소문은 맞았지만, 유가장의 주인 유관필은 고관대작이 아니었고, 겨우 서른 넷의 아직은 청년기를 간직한 중년의 사내였던 것이다.
사천을 떠들썩하게 하던 한가닥의 소문은 유가장 건설을 책임진 대목 두씨에 의해, 경사에서 작은 벼슬을 하던 관리가 사람에 실망해 인적이 드문 곳을 찾고 찾아 싼 값에 땅값을 치르고 내려온 것이라는 결과를 내놓아 사라져 버렸고, 막상 유가장이 모두 지어지고, 유관필과 그의 아내 오세인, 다섯살바기 아들인 유경민이 유가장으로 이사를 했을 땐 이미 사람들의 관심에서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유관필은 성실한 관리였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언제나 문자향 가득한 삶을 꿈꾸었던 그가 사람에 실망하게 된 것은 모두 다 연줄을 너무 믿은 탓이었다. 경사에서 그가 담당한 임무는 북경의 동부 시장의 유통관리책임이었던 것이다. 벼슬이든, 장사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일을 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한다고 생각했던 유관필은 성심을 다해 장사치들을 대했고, 점차 시장의 일부로서 살아가게 되었지만, 불문곡직 정직하기만 한 그의 성격이 문제가 되었다.
장사치들을 기본적으로 이익을 생각하는 사람들이었고, 황실의 공납실무책임자인 유관필에게 뇌물을 주고, 비용을 부풀려 나라를 상대로 사기를 치려했던 것이다. 유관필의 성격상 이것을 용납할 수 없었고, 단호한 거절에 장사치들은 모사를 꾸며 그를 비리를 저지른 탐관오리로 매도했던 것이다. 자세한 조사를 통해 그의 정직함이 밝혀지긴 했지만, 유관필로서는 그토록 믿어왔던 형제와도 같았던 사람들의 배신이 몸서리처지도록 힘들었고, 현명한 아내 오세인의 말을 따라 세상을 벗어나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결정에는 유관필이 제법 자산을 가진 자산가였다는 것이 한 몫한다. 사천의 정연거리에 몇 개의 상가를 가지고 있던 오세인의 부친이 돌아가시면서 하나밖에 없었던 무남독녀 외딸과 결혼한 유관필은 제법 건실한 재정상태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는 회계전문가였기 때문에 자산을 어떻게 운용해야 하는지도 누구보다 잘 아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그는 부자였다.
아직 모두 마르지 않아서 황토의 냄새가 풋풋하게 나는 방에서 유관필과 오세인은 마주 앉아 있었다.
"부인, 내가 무엇을 하는 게 좋겠습니까?"
"상공, 무엇을 하고 싶으십니까?"
"아직은 하고 싶은 것이 없다오. 그저 좀 쉬고 싶을 뿐."
"그럼, 쉬시지요. 그리고 내일쯤 충현의 가족이 이사를 온다 했습니다."
"아, 아버님 댁의? 충현의 자제가 나와 비슷한 나이였던 것으로 기억하오만."
"일문은 오가객잔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상공보다 두 살 아래인 걸로 기억합니다."
"아아, 그렇군."
한 밤의 석죽산은 고요했다. 가끔 매섭게 부는 바람이 늦가을임을 알게 해 줬지만, 해선정이랑고 이름을 붙인 정자에서 작은 소반을 마주하고 술을 한 잔 하고 있는 유관필이 느낀 감정은 심심함이었다.
그의 일생은 언제나 바쁘고, 언제나 시끌벅적했었다. 관리가 되기 위해 누구보다 깊이 공부하며 경쟁에 치열했고, 또 관리가 된 후에는 시장의 사람들과 어울려 떠뜰썩한 분위기에서 살아왔던터라 사람이 싫어 떠나 온 유가장이었지만 그는 외롭고 쓸쓸했던 것이다. 답답한 마음에 가져온 책을 읽었지만, 답답하기만 할 뿐 해소되는 심정은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잘못 생각했던 것인가?
나무가 몇그루 없는 석죽산에 해가 지고 있었다. 타는 듯한 붉은 노을은 참으로 절경이어서, 유관필은 체면에도 불구하고 아내인 세인을 찾으러 안채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긴 이젠 하인들을 제외하면 평생을 아내와 마주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 아닌가.
안채에 들어서자 어딘선가 팡팡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들녀석에게 무공연습이라도 시키는 건가? 유관필 그 자신은 무공의 무자도 모르는 책상물림이었지만, 아내 오세인은 사천의 이름높은 무가인 당가의 방계손의 제자에게 사사한 무림인이라고 할 수 있을 사람이었다. 아내의 가문인 오가가 상인가문이었기 때문에 어느정도의 무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 대단한 수준은 아니었을지라도 아내는 어쨌거나 무공을 익히고 있었고, 아들인 경민에게도 조금씩 가르치는 눈치였었다.
아내에게도 꼼짝하지 못했었는데, 아들에게도 그러면 곤란한 걸. 유관필은 슬며시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안채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제야 팡팡하는 소리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경사에서부터 아내를 따라온 시비 화영이 젖은 옷을 허공에 터는 소리였던 것이다. 아내는 아들을 무릎에 뉘이고 대청에 앉아 무슨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빨래 터는 소리가 나도, 자신이 문을 열고 안채에 들어와도 못들을 정도로 책에 집중하고 있었다. 화영이 고개를 숙여 유관필을 맞았고, 그 소리에 고개를 들은 부인 오세인의 얼굴은 달아올라 있었다.
"상공, 오셨습니까?"
"하하. 무엇에 그리 열중하십니까? 지는 노을이 아름다워, 부인과 함께 하려 왔소만, 노을보다는 그 책이 더 궁금하구료."
"아닙니다. 상공. 아니예요."
그러면서 아내 세인이 얼른 책을 등뒤로 감추는 것이었다. 평소 현숙한데다 침착하기 그지 없던 아내의 모습에 흥미가 동한 유관필이 뛸 듯 빨리 걸어 아내의 손에서 그 책을 낚아챘다. 책의 제목은 없었다. 감색비단으로 싸여진 책은 고급스러웠는데, 책을 넘기던 유관필의 얼굴이 점점 사색이 되고 말았고, 아내 세인의 얼굴은 더할 수 없이 달아올랐다. 그랬다. 책은 노골적인 야담집이었던 것이다.
"상공!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아니오. 아니오. 하하. 허허. 허, 이거야."
"이제, 상공의 얼굴을 어찌 뵈올런지요."
"허허. 아니오. 이래서 부인이 그리 뜨거웠나보오. 하하하."
고개를 숙여 하얗게 드러난 아내의 목은 시원했고, 귀는 달아올라있었다. 어쩔 줄 몰라하는 아내의 모습은 새롭고도 귀여웠다. 유관필이 야담과 기담의 세계와 조우한 첫날이었다
화산기담이라는 야담집은 노골적이고 거칠었지만, 생동감이 있었고, 무엇보다 정의로웠다. 자신의 사부를 죽인 마교의 인사를 향해 거침없이 정의의 칼을 날리는 주인공 나연중에 강한 호감을 느낀 유관필은 읽는 내내 나연중에게 대리만족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했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지만, 인간관계에서 언제나 소극적이었던 자기를 대신해서 절세의 미녀의 구애도 거절하고 오직 복수를 위해 정의의 칼을 드는 주인공을 보며 정말로 속이 시원했던 것이다.
자정이 조금 못되어 잡은 책을 다 읽어버린 유관필은 곧 자리에 누웠지만, 두근거리는 마음에 잠을 좀 설쳤던 것이다. 왜 이런 세계를 몰랐을까라는 자책을 하면서도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아내를 채근해 좀 더 많은 책을 읽어야겠다고 다짐하는 유관필이었다.
강호의 대영웅이 되어, 중원을 질타하는 꿈을 새벽녘에 꾼 유관필은 시비 화영이 주인마님을 몇 번이나 외친 후 일어났지만, 깨자마자 허무함을 느껴야 했다. 앙상하다고 해도 좋을 팔뚝, 근육이라고는 평생 생겼던 적이 없었던 푸근한 배를 눈을 뜨지마자 봐야 했던 것이다. 자신은 강호의 영웅 나연중이 아니라, 그저 낙향한 관리 유관필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되자마자 급속히 기분이 나빠졌던 것이다.
그렇다고 아침이 준비되었다는 자신의 일을 성실히 한 시비를 꾸짖을 수도 없어서 괜히 혼자 신경질을 내면서 의관을 정제한 유관필은 아내와 다섯살배기 아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 식사를 많이 하지 않는 유관필은 아내의 밥그릇이 자신의 것보다 조금 작은 것이 의아해져서 아내 오세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부인, 그릇이 바뀌었소. 괜찮소. 넉넉히 드시오. 책상물림인 나와 부인은 다르지 않소. 경사에서야 남의 시선을 두려워하며 살았으나, 여기서야 누구 눈치를 보겠소. 더 드시오."
"아닙니다. 상공. 이 정도로 충분합니다. 경사에서야 혹여나 우리 가족을 누가 해칠 수도 있겠어서 무공을 놓지 못했지만, 이곳 유가장에서야 누가 우리 가족을 해치겠습니까. 이젠 하릴없는 무공일랑 놓고, 그저 우리 경민이만 건강하게 키울 생각입니다."
"배가 고프지 않겠소?"
"괜찮습니다. 저야 하는 일도 없는 형편인데요."
"아, 그나저나 어제 그 기담집 말이오. 다른 것은 없는거요. 거 재미가 있더이다."
"상공 놀리지 마십시오. 아녀자가 그런 책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대경할 일인데, 몇 권이나 가지고 있겠습니까. 더는 없습니다. 더 놀리시면 이틀동안 상공과 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그럴수야 있나. 내가 사과하겠습니다. 부인. 현숙한 부인이 그런 책을 더 가지고 있는 게 말이 안되지 그렇고 말고."
역시 아내는 귀여운 여인이었다. 눈에 빤히 보이는 거짓말이었지만, 유관필은 아내의 내숭과 비밀이 사랑스러웠다. 성도에 가서 기담집을 좀 사와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아내에게 아침을 먹은 후, 성도에 다녀오겠다고 말을 한 후 천천히 식사를 마쳤다.
성도는 번화했다. 번화가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서 세책방을 찾아내고서는 다짜고짜 안에 들어갔더니. 화려한 표지의 삽화까지 그려진 기담집과 야담집이 책방 안에 가득했다. 경서를 취급하는 서점에야 무시로 드나들었지만, 세책방이 처음인 관필은 우선 그 규모에 놀랐다. 한 때 경사에서 시장의 관리를 했던 만큼, 가게의 규모만 봐도 어느정도의 매출을 올리는 지 짐작이 가는 유관필이었다. 장옷을 쓰고, 시비를 앞세운 규중의 처자들로부터, 아마도 관의 포교같이 보이는 자, 거기에 선비들까지 손님의 구성도 다양했고, 무엇보다 눈에서 반짝반짝 빛을 발하는 손님들에게서 뭔가 감동을 느낀 유관필은 우선 주인을 찾았다.
장비처럼 수북한 수염이 인상적인 세책방의 주인은 보기에도 덩치가 당당했는데, 골격이 작은 유관필의 앞에 서자 그 덩치가 더 크게 보였다. 사천왕상같이 우렁우렁한 얼굴의 주인은 주인을 찾는 유관필의 앞으로 다가와서 천둥소리같은 목소리를 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기담집이나 야담집을 좀 샀으면 하오만."
"어떤 책을 찾으십니까?"
"어제 화산기담이라는 글을 처음으로 보았소만 여간 통쾌한 게 아니라서 말이오. 그와 비슷한 책이었으면 좋겠소."
"아! 그 책을 가지고 계십니까? 혹여 경사에서 오셨습니까?"
"그렇소만."
"혹시 지금도 가지고 계십니까?"
"아니오. 집에 있소. 그런데, 왜 그러시오?"
"화산기담의 작가 월영산인은 이 세계에선 거의 신필이나 다름없는데, 화산기담을 냈다는 소문을 듣기는 했습니다만, 경사에서 이곳 사천까지 책이 오려면 아무래도 시간이 꽤나 걸려서 말입니다. 어떻게든 구하려고 노력중이었는데, 귀인이 오셨습니다. 대인께서 불편하시지 않으시면, 제게 책을 좀 빌려주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깨끗하게 필사를 하고 돌려드리는 것은 물론이고, 월영산인의 다른 책들을 무료로 빌려드리겠습니다."
"책과 즐거움과 남을 돕는 일은 본시 나눌수록 가치가 커지는 것이니 내 주인장에게 빌려주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우리 집이 좀 멀어서 말이오."
"대인 집이 어디십니까?"
"석죽산 근처라오."
"아, 새로 지어졌다는 그 유가장의 주인이시로군요."
"어찌 아오?"
"호사가들이 가장 즐겨 찾는 곳들은 원경대로의 뒷골목 객잔과 홍루들이지만, 그 호사가들에게 이야기를 만들어 파는 매설가들이 상주하다 시피 하는 곳이 우리 세책방이니 소문이야 모두 우리 가게로 들어오는 편이지요. 대인, 서찰을 하나 적어주시겠습니까? 이 서찰을 가져가는 자에게 책을 내어주라 뭐 그정도면 되겠네요."
"지필묵을 좀.."
"아, 여기 있습니다. 자방아, 비천마객 장유 어르신을 모셔오너라. 자룡이 넌 필사꾼들을 모아오고, 열 다섯이면 되겠다."
서찰을 작성한 유관필은 서찰을 내어주고 주인이 내어준 월영산인의 책들을 살펴보며 떠들썩한 세책방의 소란을 지켜보고 있었다. 화산기담의 필사본을 대여하려는 사람들의 순서를 정하는 소란이었다. 유관필은 해연히 놀라고 말았다. 장옷을 쓴 조용한 여인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자신의 순서를 주장하는 장면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저렇게 얌전한 아가씨가 체신도 모르고 저렇게 나설 정도로 기담집은 그만한 매력이 있는 건가를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더욱 놀라고 말았다.
차를 한 잔 마실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한 장년은 넘은 듯한 노인이 아내가 싸준 듯한 보따리를 세책방의 주인에게 전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말을 타고서도 서너 식경이 걸리는 거리다. 도저히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시간이었지만, 해내는 사람을 처음으로 보았고, 그것은 유관필에게는 감동이었다. 유관필은 무협의 세계에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았던 것이다.
유관필은 진심으로 감탄했고, 그 경탄의 심정을 감추지 않았다. 원래가 솔직한 성격인데다, 어쩌면 눈 앞의 이 중늙은이가 정말로 나연중처럼 한 손으로 바위를 부수고, 호수를 가르는 절정의 무공을 가지고 있을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유관필은 아내가 싸준 보따리를 받아 감색의 책을 세책방 주인에게 건네며, 눈으로 비천마객 손유와 인사를 하고 싶다는 마음을 전했다.
세책방의 주인은 유관필의 간절한 눈길에도 불구하고, 책을 펼쳐 내용을 확인하고는, 세책방의 한쪽 구석에 마련된 필사가들이 모인 방에 화산기담을 가져다 준 후에야 유관필을 찾아와 감사의 인사를 청했다.
"대인, 고맙습니다. 초반만 읽어봤지만서도, 역시 월영산인 이름값을 하네요. 혹시, 보유하고 있는 다른 책들도 있으신가요? 기공흑마 님이나, 마골객 님의 소설도 가지고 있으시면 좀 대여가 가능한 지 알고 싶습니다. 아예 정식으로 계약을 맺고, 일정부분 수익을 드릴 생각도 있으니까요."
"책은 내 소유가 아니고, 아내가 가지고 있던 것이라네. 그런데, 아까 그 걸음이 날랜 어르신 말일세. 그 어른은 나연중처럼 무공이 뛰어난 사람인겐가? 진짜로 궁금해서 묻는 건네만,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실제로 존재하는가 말일세."
유관필의 말이 끝나자마자 대여순서를 제비를 뽑아 결정하고 있던 열댓의 사람들이 푸하하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그리고 한 눈에도 사람을 스물은 죽인 적이 있을 것 같이 생긴 도둑놈상의 장년인이 다가와 유관필의 손목을 낚아챘다. 그리고는 무슨 일을 한 건지 찌릿찌릿한 감각이 전신으로 퍼지는 것이었다.
"운동부족이로구만. 내 말해주지. 그런 사람들은 있네. 내가 작년에 하남성 인근에서 본 일을 말해주지. 이건 직접 본 일이지. 그날 난 하남성 택정의 처갓집을 가고 있었지. 마누라쟁이랑 애들을 데리고 쭉 걷고 있었어. 혼자라면 경공이라도 써서 사나흘에 다녀올 수 있는 거리지만, 마누라랑 애들이랑 같이 가니 그럴 수가 있어야지. 한달 여정을 잡고 걷고 있었는데 말이야. 택정이라는 곳이 워낙 궁벽한 곳에 있어서 객잔을 만나지 못한 채로 이틀이 지나 있었어. 나야 체력이 있으니 상관이 없었지만, 여자랑 아이들이라 그날은 무슨 일이 있어도 안되면 인가에라도 부탁해서 지붕있는 곳에서 잘 생각이었어."
장광설을 늘어놓으려던 실팍한 인상의 장년인의 말을 끊은 건, 세책방의 주인이었다.
"자네의 그 장강어로 이야기는 더는 듣고 싶지 않네. 자네는 말이 너무 많아. 대인, 화산기담에서 어떤 경지가 나왔는지는 저로서도 보지 않았으니 잘 알지 못하지만, 월영산인 님의 전작을 미루어 짐작하면, 그런 경지를 가진 무인들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아까 책을 가져온 비천마객은 저희 가게에서 한달에 은자 다섯 냥을 주고 고용하고 있는 자이온데, 경공이 빨라, 사천성에서 스무 손가락 안짝에는 드는 자이지요. 경공이외에는 재주가 없는 자라, 무공이 강하지는 못합니다. 이런 정도로 생각하시면 좋을 듯 합니다. 내공을 쓸 수 있어서, 일반 사람들이 들 수 없는 거대한 돌을 들 수 있으면 이류의 무인이고, 그 돌을 칼이나 주먹으로 부술 수 있으면 일류의 경지가 되는데, 한 성에 한 천명 정도는 될 겝니다. 더 경지가 높아져서 한 주먹에 그 돌을 모래알로 만들 수 있으면 절정의 경지가 되어 한 성에 한 스무 명에서 열 정도가 됩니다. 그 돌을 손을 대지 않고 들어 날릴 수 있으면 초절정이라고 해서 한 성에 셋도 많지요. 그런 정도입니다."
"그렇군. 고맙네. 기공흑마와 마골객이라고 했나. 내 아내에게 물어봄세. 혹시나 있으면, 내 이 책들을 돌려주러 올 때 가져오지. 즐거운 시간이었네. 그리고, 책보따리는 내가 사랑하는 아내의 물건이니, 좀 조심스럽게 소중히 다뤄주시게. 이 책들은 고맙네. 유가장이 좀 멀어서 난 그만 돌아가야겠네. 한 일 주일쯤이 지나서 다시 오겠네."
"네, 저 역시 감사합니다. 대인. 다음에 뵙지요."
세책방을 나섰지만, 오랜만의 번화가를 나온 것이라 그냥 들어가고 싶지 않았던 유관필이 찾은 곳은 떡과 과일, 음료를 먹을 수 있는 다과점이었다. 단 것을 좋아하는 아내를 위해 전병이나 유과를 사 갈 요량이었다. 말을 타고 꽤 오래 달려왔기 때문에 몸이 좀 지친 탓도 있었다. 유관필은 마필을 그대로 세책방에 둔 채로 성도의 번화가를 걸었다. 사천은 대륙의 쌀밭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물산이 풍부한 곳이었다. 오랜 시간 북경에서 시장의 관리를 담당한 유관필이 보기에도 사천성의 수도 성도의 시가는 화려했다.
다과점을 찾은 유관필이 들어가자마자 예쁘장하게 생긴 시비 아이가 쪼르르 다가와 스스럼없이 무엇을 찾으시는 지 묻는 것도 신선했다. 예의와 격식을 따지는 경사에서는 일단은 손님이 무엇을 고르던 그것을 결정할 때까지는 방해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경사의 손님응대에 익숙한 유관필은 과하다고 생각되면서도 친절한 대응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저 아내의 선물만 사가지고 돌아가려던 유관필은 입맛을 돋게 진열된 여러가지 주전부리들을 바라보면서 출출함을 느꼈다. 하긴, 아침도 부실했고, 또 오랜만에 말을 달려왔으니 배가 고프지 않은 게 더 이상했다.
"저기, 속이 좀 허출해서 그런데, 내가 먹을만큼 여러가지를 좀 챙겨다주지 않겠니? 좀 부탁해도 될까?"
"예. 대인. 그런데, 경사에서 오셨어요?"
"어, 그런데, 어떻게 알았어?"
"사천 말을 쓰지 않으시니까요? 그런데, 진짜로 경사는 그렇게 좋아요?"
"응?"
"저기 앞 만두가게 왕씨 아저씨가 경사에서 오셨거든요. 천자님이 사시는 곳은 전각에 모두 금칠을 했다고 해서요. 번쩍번쩍 할 것 같기도 하고, 그러면 누가 도둑질을 하러 들어가면 어떻게 할까 싶기도 하고 해서요."
"하하. 아니야. 경사나 여기나 모두 사람사는 곳인데, 뭐가 다르겠니. 경사만큼 성도도 화려한 곳이야. 내 경사에서 이 곳까지 두달을 걸어서 오면서 보니, 성도만큼 좋은 곳도 없더라. 경사는 사람들이 모두 젠 체해서 별로였는데, 이 곳 사람들은 모두 화통해서 좋았거든."
"그렇지요. 대인. 거짓말일 줄 알았어요. 경사는 무슨. 만두도 그렇게 맛있지도 않으면서. 치. 잠깐만 기다리세요. 맛있는 거 많이 챙겨올게요."
"내가 먹을 것은 가져다 주고, 맛있는 것만 싸서 혼자 먹을 것을 하나 싸주고, 서넛이 먹을 것도 좀 싸주렴. 혼자 먹을 건 좀 단 것들로, 서넛이 먹을 건 양이 넉넉한 것들로."
"누굴 가져다 주실 거예요?"
"응, 혼자 먹을 건 아내를 가져다 주고, 서넛이 먹을 건, 장원의 하인들에게 주려고."
"어머나, 하인들을요?"
"함께 사는 사람들이니까. 같이 먹을 것을 먹는 게 식구니까."
"예. 잠깐만 기다리세요. 그런데, 대인 이름을 알 수 있을까요?"
"응? 왜?"
"그냥요. 좋아서요. 그런 말을 처음 들었거든요."
"난 유관필이야. 그냥 유 아저씨라고 불러라."
"네, 아저씨."
쪼르르 뛰어가는 열 서넛을 먹은 아이를 흐뭇한 표정을 보던 유관필이 책 보따리를 끌러, 독공자 당민이라는 월영산인의 책을 꺼내들었다. 독을 쓰는 공자라는 건가? 아니면, 독심을 가진 공자라는 뜻일까? 독이란 아마 비상이나 부자같은 것이겠지라고 상상하면서 책을 읽으려는데, 다과점의 문이 열리면서 눈에 익은 자태의 여인이 들어왔다. 아까 세책방에서 봤던, 장옷의 처녀였다. 시비와 함께 온 처녀가 눈인사를 건낸 후, 익숙하게 시비를 시켜 주문을 했다.
독공자 당민은 사천의 성도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무림에 무지했지만, 사천성에 당문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던 유관필은 자신이 살고 있는 장소에서 펼쳐지는 협의를 기대하면서 책을 읽어내려갔다. 잠시 책에 마음을 빼앗긴 유관필이 정신을 차린 건, 다과점의 시비가 대나무 접시에 예쁘게 장식한 떡과 당과들을 가져왔기 때문이었다.
"아저씨, 가져가실 건, 지금 언니들이 싸고 있어요."
"그래. 고맙다. 여기 이건, 용돈이나 하렴."
쭈뼛거리면서 가지 않고 유관필의 앞에 오줌마려운 표정으로 서있는 시비 아이를 보며 뭔가 깨달은 유관필이 전대에서 동전을 하나 꺼내 시비의 손에 쥐어주자, 그런 게 아니라면서 극구 사양하면서 억지로 돈을 유관필의 손에 다시 건낸 후 도망치면서 말했다.
"그게 아니고, 아저씨, 제 이름은 앵앵이에요. 앵앵이요."
떡은 맛있었다. 당과 중 달걀을 입힌 매실청이 들어간 게 유난히 맛있어서 이름을 물어보려고 시비 앵앵을 찾았지만, 부끄러운 얼굴로 주방으로 뛰쳐간 앵앵이 보이지 않아서 일부러 먹지 않고 하나를 남겨 둔 유관필이 다시 책으로 고개를 숙이는데, 얼굴이 홍시처럼 빨개진 시비 앵앵이 세책방 처녀의 접시를 가져다 주러 나오는 것이 보였다.
관필의 접시에 비해 소박한 접시를 보면서 관필은 역시 처자라서 적게 먹는구나라고 생각했는데, 처녀의 반응은 달랐다.
"앵앵아, 저기 저 접시랑 내 접시랑 왜 달라?"
"아가씨, 아저씨의 접시는 제가 선물한 겁니다. 저건 돈을 내시고 드시는 게 아니에요."
"뭐? 왜 그러건데?"
"유 아저씨는 다른 분이랑 다르니까요. 아가씨는 오 년을 봐도 아가씨지만, 아저씨는 오늘 처음 뵀지만, 아저씨니까요."
"그게 무슨 소리야?"
"아저씨는 자기 집 하인들을 위해, 떡을 사가시지만, 아가씨는 저기 앞에 서 있는 언니에게 당과쪼가리 하나를 오년 동안 한 번도 사주는 걸 보지 못했으니까요."
장옷을 입은 처녀는 얼굴이 붉어지더니, 유관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심 처녀의 처사를 좀 심하다고 생각했던 유관필은 화가 난 표정으로 자기 쪽으로 다가오는 처녀를 보며 좀 당황했는데, 처녀는 유관필에게 다가와 손바닥으로 유관필이 앉아있는 탁자를 탕하고 쳤는데, 고급스러워보이는 단단한 탁자가 처녀의 손바닥 모양으로 쑥하고 들어가는 게 보였다. 저것이 내공인건가라고 감탄하는 마음이 들었는데, 처녀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당예인이에요. 당신 이름이 뭐죠?"
"유관필이요."
"하인에게 떡을 사다 주신다고요. 왜 그런거죠?"
"예? 그러고 싶어 그런 거요. 난 경사에서 관리 생활을 하다 낙향한 사람이오. 지금 내 장원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경사에서부터 나를 따라온 사람들이오. 아내와 아들은 가족이니 가장인 나를 따른 것이지만, 경사에서 날 따라 온 사람들은 그들의 인간관계를 모두 정리하고 나를 따라 온 거란 말이오. 내가 주인이라 그런 거겠지만, 자신이 좋아하던 사람들을 모두 두고 날 따라 온 사람들에게 내가 마음을 쓰는 편이 더 자연스럽지 않소. 난 편한 게 좋소. 떡을 먹고 싶어 눈을 반짝이는 시비 아이에게 떡을 건네는 것이 난 더 마음이 편하단 말이오. 그냥 세워두는 것보다는 말이오."
유관필을 향해 일장을 날릴 것 같던 당예인은 유관필의 말에 고개를 떨궜다. 이성적으로 유관필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왜 유관필이 생각하고 실천하고 있는 일을 당문의 꽃이라고 불리는 자신이 하지 못하고 있는지가 혼란스러워서 머리가 어질어질했던 것이다. 유관필은 무공을 익힌 것이 분명한 당문 처녀의 손속을 두려워하다가 곧 실의에 빠진 처녀를 향해 한마디를 던졌다.
"처녀의 잘못이 아니오."
당예인은 자신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유관필의 말에 놀라 고개를 들어 유관필을 바라봤다.
"실패를 해 보지 않은 인생이란, 원래 어려운 사람의 처지를 쉬이 이해하지 못하는 법이오. 나역시 지금과 같은 생각을 경사에서 관리를 할 때는 하지 못했소.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고. 명문에서 태어나, 일직선으로 성공만 하며 살아온 처자같은 사람은 누구나가 조금씩은 오만한 거요. 그게 당연한 거란 말이오. 자책할 일이 아니오. 몰라서 하지 않은 일은 죄가 되지 않는 법이오. 누구도 선행을 하지 않았다고 비난하지는 않는 법이라오. 선행은 지금부터라도 하면 되니 좋은 거라오. 처자, 당예인이라고 했소? 앞으로 말이오. 날 때부터 처지가 좋은 사람은 왜 그런 말들을 하지 않소. 전생에 잘 살아 그런 거라고. 한 인생만 살 게 아니지 않소. 다음 삶에서 또 대우를 받으려면 일단 지금은 잘하고 보는 게 최고 아니겠소. 조금만 여유를 나눠 주시오."
유관필의 말은 당예인의 마음에 스며들었다. 유관필은 스스로를 자랑하지도, 자신을 비난하지도 않았다. 그저 부탁을 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난처한 이 상황을 어떻게 벗어나야 하는 지도 가르쳐 주었다. 당예인은 소매 안쪽에서 전낭을 꺼내 은자를 세 개나 꺼냈다. 앵앵을 불러 돈을 건내며 당부를 잊지 않았다.
"앵앵, 이건, 부서진 탁자와 떡값이야. 그리고 앞으로 이 아이가 오면 언제든 먹을 걸 내 주겠니. 돈이 모자라면 내가 다시 올 때쯤 말하면 셈을 치를테니."
"예, 아가씨."
"대인, 앞으로 선생님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뜬금없는 당예인의 요청에 당황했지만, 얼굴이 예쁜 아가씨가 자신을 계기로 개심한 것도 마음에 들고 해서 유관필은 선선히 그래도 좋다는 말을 했다.
"허허, 뭐, 그러시오."
"오늘 좋은 말씀 감사드려요. 언젠가 장원을 찾아봬도 될까요?"
"그러시오. 대접이야 변변치 않을 지 모르나, 인정만은 넘치는 집이니 언제 찾아오시더라도 환영이오."
"예. 꼭 그럴게요."
당예인이 나온 당과들과 떡을 거의 먹지도 않고 자신의 시비를 데리고 돌아가버리자마자 앵앵이 다가와 종알거렸다.
"아저씨.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세요. 당가 사람들이 다 예인 아가씨 같지는 않거든요. 저도 아까 괜히 울컥해서, 참지 못했는데, 무림인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는 그저 져주는 게 이기는 거예요."
"그건 또 무슨 소리냐?"
"대화가 통하는 사람들이 아니거든요. 그저 불문곡직하고 그냥 힘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들이니까요."
"그러면, 내가 아주 운이 좋은 거로구나."
"그래도 시원했어요. 아 아까 말한 것처럼 이건 공짜로 드릴게요."
"안 될 말이다. 아주 맛있었으니 내가 셈을 더 치르는 게 옳은 일이다. 그리고 이 달걀부침만 좀 더 싸 주겠니. 아주 맛있어서 말이다."
"그럴게요."
앵앵이 싸준 떡보따리를 들고, 가게를 나서면서 유관필이 느낀 것은 짜릿함과 성취감이었다. 경사를 떠나면서 인간관계를 거의 포기했던 유관필이었지만, 아내의 야담소설을 본 것만으로 벌써 인간같지 않게 빠른 손유라던지, 장비와 같은 세책방 주인에, 어여쁜 처녀 당예인과 떡집 시비 앵앵을 알게 됐고, 모두 고루하기 짝이 없는 경사의 인간과는 다른 활동적인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적이 만족스러운 만남들이었던 것이다.
어서 아내에겔 돌아가서 오늘 하루 겪었던 일들을 말해주고 싶은 마음이 든 유관필이 세책방에 들러 말을 찾아 유가장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뉘엿뉘엿 해가 져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아직 밤이 되거나 한 것은 아니어서, 말을 마굿간에 넣고, 아내를 찾아 내원으로 들었을 때, 유관필이 마주친 건 아내와 마주하여 차를 마시고 있는 당예인이었다.
남녀관계에 어지간히 둔감한 유관필이었지만, 겉으로 미소를 띄고 있는 아내 오세인의 눈에서 뚝뚝 떨어지는 분노와 의심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어서, 유관필은 체신도 잊고 무릎걸음으로 아내에게 다가가 큰 소리로 당예인과의 관계를 큰 소리로 해명하려 했다.
"부, 부인. 이 처자는 말이오. 사실은, 오늘 세책방을 찾았는데 말이오. 거기서 알게 된 처자인데 말이오. 그 사천당문의 자제라 하오. 나와는 오늘 처음 봤는데, 아, 부인을 주려고 내 여기 떡을 사왔는데, 이 매작과라는 계란 부침이 맛있어서..."
땀을 흘리며 변명을 늘어놓는 유관필을 이상하다는 듯, 바라본 당예인이 순진한 얼굴로 유관필과 오세인을 바라봤다. 오세인이 유관필이 싸온 떡보자기를 펼치더니 몇 개의 다과를 다탁의 가운데 놓인 접시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그러지 말고, 여기 않으세요. 상공. 당여협에게 다 들었어요. 여기 이게 추헌들에게 주려는 것인가 보죠. 화영아. 잠시 들어와."
시비 화영이 들어와서 오세인과 잠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또 아무렇지 않게 당과를 집어먹으면서 입안의 당과를 우물거리며 하인들에게 줄 당과를 챙겨가는 광경을 본 당예인은 몹시 놀라워했다.
"그런데, 언니, 언니라고 불러도 될까요?"
"그래요. 나도 예인이라고 불러도 될까? 올해 나이가..열 일곱?"
"아뇨. 열 아홉이에요."
"좋을 때네. 나도 이럴 때가 있었는데. 예쁘죠? 상공. 그렇지 않나요?"
"아니. 예쁜 걸로 따지면, 스물 두살 때의 당신 이상이 있을 수 있나. 그땐 정말이지 서원이고 과거고 다 때려치우고, 당신만 보고 싶었다니까."
"와..아! 그런데, 정말 언니네는 왜 이렇게 다르죠? 아랫사람들에게 이렇게 대하면 버릇이 없어지는 거 아닌가요?"
"사람에겐 아래 위가 없는 법이라오. 처녀. 개미를 본 적이 있소?"
"네."
"개미를 보면서, 큰 개미, 작은 개미를 구분하고, 좋은 개미, 나쁜 개미를 구분해서 생각한 적은 있소?"
"아뇨. 그런데, 개미랑 사람은 다르잖아요."
"다르지 않소. 높은 산에서 산 아래를 바라보면 사람도 개미만하게 보이지 않소. 그런 거라오. 같이 살아가는 인생들인게지. 그리고 조금 더 즐겁게 살려면 일단 좋은 얼굴을 보여주는 게 첫번째로 할 일이라오."
"역시, 선생님이세요. 아, 언니, 전 유 선생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여태까지 선생님같은 분을 본 적이 없거든요."
"좋아. 그래도 반하면 안 돼."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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