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도 잠든 흑야(黑夜).
오직 달빛만이 아스라이 어둠을 바라보고 있는 맥적산.
이제 제법 나뭇가지마다 어린아이의 손바닥만한 싹들이 새치름하게 돋아나는 계절이다 어둠속에서는 단지 꽃송이처럼 보인다. 그러나 잎이 나오기 전에 피어날 도화나무에서는 담홍색 꽃봉오리들이 흐드러지게 군락을 이룰 날들만 기다리고 있다.
스르륵! 휙! 스르륵!
그런데 깊은 흑야에 검은 그림자들이 깎아지른 절벽을 죽을힘을 다해 달려 올라가고 있었다. 그 숫자는 자그마치 일천여명에 달했다. 그런데 그 많은 숫자가 정상을 올라갈수록 힘들 텐데 오히려 정상에 가까울수록 소리도 없이 오르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었다.
삐 이~익!
돌연 날카로운 예음이 어둠을 가르고 맥적산에 울려 퍼졌다. 그 소리를 신호로 정상을 향하던 검은 그림자들이 바람처럼 일제히 달려서 하산하기 시작하였다. 가까이 보면 검은 그림자들은 온통 땀과 흙먼지로 뒤범벅이 되어 있고 여기저기 찢긴 옷 속은 상처투성이였다.
그림자들이 살아 있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은 오직 광야에 버려진 듯 날카로운 야수의 눈빛이었다. 어둠 속의 길을 밝히는 것은 오직 그들의 눈에서 폭사하는 안광이었다.
"아! 도저…도저히 못 하겠어."
하나의 그림자가 비틀거리며 숨을 헐떡거렸다.
"더 살기 싫은가? 낙오자는 한명도 있을 수 없다."
포효하는 소리에 비틀거리는 그림자가 몸을 던져 벼랑을 굴러 내렸다. 소리는 그들 무리의 뒤쪽에서 들려왔다. 무리의 뒤쪽에는 열 명의 괴인이 양떼를 몰 듯 종횡으로 날뛰며 그들을 다그치고 있었다. 숲 사이로 놀라서 튀어 오르는 짐승과 사람이 구분되지 않았다. 무리는 더 이상 사람도 아니었다. 무리가 산을 내려와 황하(黃河)로 흐르는 적류탄(赤流灘) 가까이 갔을 때 또 다시 폭갈이 들려왔다.
"입수(入水)! 입수! 물밖에 있는 자는 죽는다."
무리들은 앞뒤를 가리지 않고 물속으로 몸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 르르! 콰~쾅!
무리의 뒤쪽에서 벽력신탄(霹靂神彈)이 천지가 진동하는 굉음을 내고 터져 올랐다.
"으으으…! 살아야 한다......."
"나… 난, 안 죽는다."
무리 속에서 비명 같은 신음소리들이 흘러 나왔다. 무리들이 사라진 뒤로 열 명의 괴인들도 급류가 흐르는 적류탄으로 몸을 던졌다. 그들이 사라진 맥적산에는 적막이 흘렀다. 그들은 적류탄의 험한 급류 속 어디론가 사라진 것이다.
그런데 한 다경 후 적류탄 가까운 곳, 암굴에서 꾸역꾸역 그들이 나오고 있었다. 마치 동굴 속에 있던 박쥐 때들 모양 튕겨 나오고 있었다. 폭갈이 울려 퍼졌다.
"산으로 올라라! 뒤처지면 낙오자다."
무리는 폭갈에 따라 혼이 나간 야차처럼 움직였다. 그렇게 맥적산 정상에서 적류탄으로 적류탄에서 다시 맥적산 정상으로 오르기를 십여 차례, 희미하게 동녘이 밝아올 때쯤에 무리는 안개처럼 사라지고 있었다.
휘리리릭!
그들이 사라진 맥적산 봉우리에 한 사람이 날아 올라와 우뚝 섰다. 그는 백색 도포에 백색 무복, 온통 백의로 전신을 가린 청년이 백색 영웅건을 질끈 동여매고 있었다. 요대와 장화까지도 백색이었다. 무복이 아니었다면 학자라 해도 무관할 풍모를 갖추었다. 용의 형상을 이룬 아미, 맑고 깊은 현기의 눈동자, 오체가 늠름한 풍채, 설 무영이었다.
그는 형형한 눈빛으로 사라져 가는 무리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에게 지옥수련을 지시한 것은 설 무영이었다. 강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은 그의 철칙이었다. 그들의 목숨을 책임지고 있는 그로서는 그들을 상하게 만드는 방법뿐이 없었다.
설 무영은 맥적산에 수많은 동굴이 있다는 것을 착안하였다. 도공과 석공을 불러 동굴을 연결하여 요새화하였다. 그런 와중에 도화성과 적류탄을 연결하는 동굴과 도화성 지하의 엄청난 크기의 공간도 발견하였다.
그는 십천간룡에게 사자단의 지휘를 맡겨 피나는 수련을 시켰다. 밤에는 맥적산과 적류탄에서 그들의 땀을 뽑아냈고, 낮에는 지하 연무장에서 무공수련을 시키고 있는 것이다.
녹음반각(綠飮盤閣)
도화성의 대식구가 교대로 식사를 하는 곳이다. 설 무영이 식사를 하고 있는 한 사자단원에게 다가갔다.
"음식은 모자라지 않나?"
"네! 존명."
사자단원은 급히 수저를 놓고 좌궤(左跪)를 하였다. 설 무영이 단원들에게 단결의 뜻으로 권고하는 동영식 좌궤였다. 설 무영이 급히 단원을 붙들어 식탁 앞의 석좌(石座)에 앉혔다.
"괜찮아. 식사할 때는 누가 뭐래도 식사를 하도록........!"
설 무영은 단원의 어깨를 뚜덕이고는 다른 곳으로 옮기며 단원을 살폈다. 사자단원들은 젊지만 의외로 자상하고 섬세한 그에게 강한 신뢰감을 느끼고 있었다. 또한 그의 기괴무쌍(奇怪無雙)한 시무(試武)를 확인한 그들에게 그는 절대복종의 지존일수 밖에 없었다.
설 무영은 일일이 단원들을 살피며 돌아 다녔다. 사자군단이 들어오기 전에 도화성은 한 동안 조용한 적막에 쌓여 있었다. 많은 인원의 식사를 준비하느라 하녀들이 분주히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무복차림의 전도련과 소류진의 모습도 보였다. 그녀들 또한 하녀들과 함께 땀방울을 흘리며 단원들과 주방과 식당 사이를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어린 시절을 손에 물도 안 담그고 살았던 그녀들에게 누가 시켜서가 아니었다. 그녀들은 설 무영의 여인이었다. 설 무영의 박애(博愛)하고 검소한 마음을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단원 사이를 오가던 소류진은 연신 흘린 땀을 소매로 닦으며 주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어 멋!"
그녀가 헛바람 새는 소리를 지르며 뒤 돌아보았다. 누군가 뒤에서 그녀의 둔부를 움켜 쥔 것이었다. 설 무영이 하얀 미소를 띠우고 서 있었다.
"누가 봐요......."
곱게 눈을 흘긴 소류진이 봉옥을 붉히며 주방으로 사라졌다. 설 무영이 멋쩍은 듯 얼굴을 붉혔다. 뒤쫓아 오던 전도련이 빤히 처다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
설 무영은 장난하다 들킨 어린아이처럼 자리를 뛰쳐나왔다. 밖으로 나오면서도 그는 전도련의 미소가 머리뒤꼭지에 머무르는 것을 의식하였다. 창문으로 보이는 청명한 하늘에 흰 구름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난 이제 내가 할 일을 또 해야겠군.......!)
사자군단의 단원들이 식사를 하는 식당을 나서는 그의 뒷모습이 전각들 사이로 사라져갔다.
사방 오장의 지하 공간.
도화성 지하의 한 석실이다.
또르륵!
종유석에서 떨어지는 종유수가 이따금 적막을 깨고 흘러내렸다. 설 무영은 웃통을 벗어 젖힌 채 단좌(端坐)를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스스로 연무한 무공을 승화시키고 보완하고 융화시킬 필요를 느꼈던 그였다. 그러하기에 폐관을 하고 연공에 들어 간 것이다.
설 무영은 천기조원(天氣朝元)의 지체에 윤회역근대승공(輪廻逆筋坮承功)의 끊임없는 운기주천으로 나날이 내공이 상승하고 있으면서 연화동의 영약으로 천년이상의 내공을 소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유라혼빙천(琉羅魂氷天)의 기연으로 천고에 없는 극양과 극음의 양극기도(兩極氣道)를 이루었고, 신폭쾌선공(神瀑快仙功)을 기초로 하여 천지현동(天地玄洞)에서 태을선인(太乙仙人)의 건곤천무신공(乾坤天武神功)을 비롯한 수많은 고금절학의 무공을 달성한바 있었다.
또한 연화동(蓮花洞)에서 선조이신 신검성황(神劍聖皇)의 천상혼원진록(天孀魂原眞錄)과 오지산의 다섯 고인의 독전무공과 빙음지기의 무공인 태음화강진록(太陰花 眞錄), 빙하섭령검결(氷河攝靈劍訣) 등의 음양을 도루 섭렵하는 무공도 십성을 달성하였다.
그는 이제 불무의 신통력으로 이룰 수 있는 삼명육통(三明六通)에 가까운 극상무공을 초월한 천상제무의 지경에 달해 있었다. 이에 더욱 순화하며 승화시키고 정립할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특히 그가 알고 있는 검에 관련한 무공을 정화하여 틈틈이 태영비풍검(太影飛風劍)을 착안하였다.
태영비풍검은 극 상승 검술로 다섯 가지 초식으로 이루었고, 각 초식마다 십천간(十天干)과 십이지지(十二地支)가 결합된 육십간지(干支)에 의한 육십 가지 변화를 주었다.
태파천(太破天). 하늘로부터 검강이 일며 수많은 검날이 온 천하를 폭사한다.
뇌정풍(雷精風). 검강이 상하로 일어나 번개와 돌풍으로 쏟아져 천지를 쪼개어 간다.
월륜탄(月輪彈). 은하수와 같은 원륜을 이룬 음양의 검형이 빛살처럼 쏟아져 극쾌의 검강으로 상대의 전신을 도륙한다.
해심폭(海心暴). 노도와 같이 성난 파도와 해일의 검강이 밀려가서 주위 지상의 모든 것을 베어가
는 패도의 검법이다.
혼혈공(魂血功). 지면으로부터 연이어 극음의 검강이 폭발하여 진공상태를 이루며 검날이 솟아올라 상대를 주살한다.
이 검법은 설 무영과 같이 고도의 내공을 소유하지 않은 자는 내력의 고갈로 달성할 수 없는 초상승의 무형신검(無形身劍) 일체의 어기어검법이었다. 설 무영은 윤회역근대승공으로 운기주천에 들어갔다.
"........!"
그의 전신에서는 음양의 양극 기혈이 각각 역회전을 시작하니 전신모공에서 빙설과 같은 흰 서기와 푸른 서기가 피어올랐다. 아울러 내부로부터 파도와 같은 해일의 강기가 흘러 나왔다. 그리고 시간을 잊은 공간속에 어둠의 적막이 흐른다.
똑!
이따금 종유석에서 흘러내리는 종유수의 낙음(落音)이 빈 공간에 울려 퍼져 갔다.
승룡각(昇龍閣).
도화성의 무공을 연마하는 각이다.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도록 백여 장이 되게 드넓은 대리석 광장이다. 드문드문 대리석의 기둥 이외에는 텅 빈 공간에 단지 한 사람만이 땀을 흘리고 있었다.
검은 무복을 걸친 은비살 유끼꼬였다. 그녀는 무공에 대한 성취욕이 대단하여 설 무영으로부터 많은 무공비급을 받아 연마하였다. 설 무영이 지하 연공실을 폐관하고 연공에 들어갔기에 그녀는 별로 소일할 일이 없기도 하여 거의 무공 연마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다고 아녀자들과 함께 어울릴 수도 없고, 폐쇄된 생활을 오래한 까닭으로 그녀는 혼자만의 생활에 만족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었다.
"타 앗!"
일갈과 함께 유끼꼬의 날렵한 몸이 전광석화처럼 허공을 가르며 날고 그녀의 우수가 검형을 이루었다. 얼음 꽃 같은 검형에서는 수많은 검기가 승룡각 전체에 쏟아져 넘쳤다. 설 무영이 유라혼빙천의 보고에서 구한 빙하섭령검결(氷河攝靈劍訣)이었다.
"대단하다! 신검지경의 어검술......."
승용각 입구 기둥 뒤에서 그녀를 보고 감탄하는 그림자가 있었다. 수려한 용모에 검게 그을린 다부진 체격의 청년이었다. 십천간룡 중에 정룡(丁龍) 길정학(吉丁鶴)이었다. 그가 숨어서 은비살의 동태를 살피는 데에는 연유가 있었다.
도화사자단에는 단지 열 명의 여자단원만이 존재하였다. 그런데 지옥수련 중에 여은정(茹恩丁)이라는 여단원이 부상을 입었다. 단원의 건강을 살피는 것도 수련사의 임무라는 말을 지존이신 설 무영으로부터 종종 들어온 터였다.
어느 날 정룡 길정학은 앞에서 검은 무복을 입고 절뚝거리며 가는 단원이 안타까웠다. 그는 체구가 작은 단원이 여은정(茹恩丁)이려니 하고 무심코 불러 세웠다.
"거기 여 단원!"
".........!"
그러나 단원은 아무 묵묵부답, 뒤도 안돌아 보는 것이었다.
"안 들려? 여은정 단원."
"........!"
그가 큰 소리로 재차 불러도 역시 대답이 없었다. 길정학이 뛰어가 단원의 등을 두드렸다.
"여 봐!"
"네......?"
그때서야 뒤 돌아 본 단원은 여은정이 아니었다. 오목조목한 얼굴에 초롱초롱한 눈동자로 바라보는 것은 남장 무복을 하고 있는 은비살이었다. 그는 다른 십천간룡을 통해 설 무영의 분신 같은 동영 인자 출신의 은비살에 대해서 들은 바 있었다. 그는 황급히 사과를 하였다.
"아! 실수였습니다. 단원인줄 알고......."
"괜찮습니다!"
단아하지만 내강이 실린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를 향해 미소 짓는 은비살의 표정은 여인같이 살가운 신비감이 들었다. 정룡은 그가 사라진 후에도 홀린 듯 멍하니 넋을 잃고 서 있었다. 그 후로 그는 호기심으로 여유 시간만 있으면 은비살의 동태를 살피는 습관이 생겼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가 바라본 은비살의 무공은 지존인 설 무영 다음가는 극 상승 무공이었다. 그것은 그에 대한 정룡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하는 것이었다.
"정말…! 대단하다."
정룡은 그가 존경스럽기까지 하였다. 여인같이 매끈한 피부와 체구에 오백년 이상의 내공이 실린 절전 무공이었다. 은비살은 수련을 마친 후 운기조식을 하고는 승용각을 나섰다. 승용각의 바깥은 총총히 흐르는 별과 만월의 월광이 교교히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힐끗힐끗 주위를 살피고는 도화성 서쪽 성곽으로 향했다. 그녀는 누구인지는 모르나 자신의 동태를 살피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으나 도화성이 워낙 철저한 기문진과 기관장치가 설치되어 있는지라 주위를 살피면서도 크게 염려하지 않고 있었다.
유끼꼬가 수련을 마치면 가는 곳은 혼자 오붓하게 목욕을 즐기는 장소였다. 그녀는 도화성에 와서 설 무영의 배려로 모든 것이 편하고 자유스러움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여인이라는 것을 숨기고 지내려고 하니 모두가 편한 것만은 아니었고, 그중에서 마음 놓고 목욕을 할 만한 곳이 마땅치 않았다. 여인이 이용하는 여욕간(女浴間)을 이용할 수도 남자가 이용하는 남욕간(男浴間)을 이용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유끼꼬, 그녀만이 이용하는 곳이 있었다. 그녀는 우연히 도화성 서쪽 성곽을 거닐다가 후미진 숲속에서 수증기가 솟아오르는 것을 발견하였다. 숲을 헤치고 들어 간곳에는 온천수가 솟아오르는 작은 소담(小潭)이 있었던 것이다. 계곡의 약초에서 흐르는 물과 합쳐 그윽한 약향이 흐르며 유심히 살피지 않고는 발견할 수 없는 천애의 욕소(浴沼)였다.
손으로 파내듯 뻥 뚫린 숲 한가운데로 시리도록 하얗게 달빛이 쏟아지는 계곡이었다. 월광을 받은 암벽 밑으로는 계곡의 물이 졸졸 흘러 내려가는 곳에 증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소담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은비살의 뒤를 그림자처럼 쫓아와 암벽에 납작 엎드려 소담을 내려다보는 사람이 있었다. 다름 아닌 정룡 질정학이었다.
"하아! 여기 이런 곳이 있었네! 수중 무공을 수련하려나? 아니면 목욕을........?"
무복을 훌훌 벗어 던진 유끼꼬가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정룡은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다쳤나? 왜, 가슴을 천으로 감쌌지?)
유끼꼬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가 젖가슴을 동여맨 천을 풀어 헤쳤다. 소담을 내려다보던 정룡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허 억~!?"
길정학은 내쉬던 숨을 멈춘 채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달빛에 들어나는 뽀얀 피부의 나신이 들어난 여인의 모습이었다. 탱탱한 젖가슴과 방초, 오밀조밀하고 가녀린 체구의 굴곡이 완연히 들어난 월하의 요정이라고 할까? 하얀 달빛을 받은 여인의 나신은 뇌쇄적이었다.
길정학의 가슴은 두 방방이질 하듯이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름답다…!"
길정학의 입에서는 절로 탄성이 흘렀다. 길정학은 보지 말아야할 것을 보았고, 만나지 않아야할 운명인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 후로 길정학은 그녀에 대한 열애의 감정이 차곡차곡 싸여 갔다. 그는 차츰 사자단의 수련 시각 외에는 그녀를 몰래 바라보는 것으로 행복감을 느꼈다.
그러던 어느 날 사자단원들이 휴식에 들어가고 해가 중천에 걸린 시각에 그는 유끼꼬와 마주쳤다. 아니 마주쳤다기보다는 그가 그녀를 훔쳐보다가 한적한 도화성 후면에 있는 정원에서 만난 것이었다. 그가 주춤주춤 다가가며 입을 열자 그녀가 힐끗 뒤돌아보았다.
"저........"
"......!?"
"저는 정룡 길정학입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유끼꼬는 별 다른 생각 없이 무뚝뚝하게 말을 하였다.
"전…! 은비살 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느닷없는 말에 미간을 찌푸린 유끼꼬는 의구심으로 물었다.
"뭐를.......?"
"은비살 님이 남장을 한 여인이시라는 것을요........"
"......?!"
길정학의 말에 놀란 유끼꼬는 몸을 오싹 움츠리며 경악하였다. 그가 눈치를 살피며 다시 말했다.
"정말 미안합니다. 오래전부터 은비살님을 살펴보았습니다."
유끼꼬는 초롱초롱한 두 눈을 크게 홉뜨며 그가 어떻게 알았을까를 추측하였다.
"그렇다면.......?"
"네! 협곡까지도 갔었습니다."
유끼꼬가 봉옥을 붉게 불들이며 놀라워하는 표정에 길정학은 솔직히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길게 한 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그런데........"
유끼꼬를 더욱 놀라게 하는 것은 길정학의 더듬거리며 하는 다음 말이었다.
"그리고 흠모한다는 말을 하w 않고는 못 견디겠기에......."
"무슨 말씀을......?"
유끼꼬는 길정학의 말에 귀를 의심하고 되물었다. 길정학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힘을 주어 다시 말했다.
"나의 여인이 되 주었으면 합니다."
그 순간 은비살의 두 눈에서 독사 같은 불꽃을 일으키며 냉담한 말이 튀어나왔다.
"제 목숨은 주군의 것이에요. 내가 여인이라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우리 둘은 죽음을 면치 못하거늘........"
"그렇다면 평생 행복하게 해 줄 테니, 같이 먼 곳으로......."
길정학이 말을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철썩!
은비살의 매서운 손길이 길정학의 뺨에 작렬하였다. 매서운 손길에 얻어맞은 그는 두 눈에 불꽃이 일어났다. 유끼꼬는 날카롭게 내뱉었다.
"바보같이…! 주군의 속하가....... 다시는 그런 말 마세요!"
"......!"
그 순간 길정학은 보았다. 은비살의 흑수정 같은 두 눈에 눈물이 핑 도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는 차갑고 냉정했다.
"이 일은 주군이 출관을 하실 때까지 입을 다무세요."
한마디 내 뱉은 유끼꼬는 길정학의 곁을 떠나 사라졌다. 길정학은 온갖 상념에 잡혀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다음날부터 길정학은 식음을 전폐하고 모습을 나타내기를 꺼려하였다. 그 후도 그는 여러 번 유끼꼬에게 애원조로 애정 고백을 하였다. 하지만 유끼꼬는 더욱 냉정한 모습을 보였다. 길정학은 차츰 사람들 속에서 자취를 감추려 했다.
유끼꼬는 길정학의 심정을 알고 있었고 측은한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오직 설 무영을 향해 목숨뿐만 아니라 존경심과 함께 애정까지도 일편단심인 그녀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는 것이었다. 다만 그녀는 자신의 불찰로 인하여 길정학이 그녀가 여인이라는 존재를 알게 된 대한 처벌을 받을 생각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설 무영이 말하지 않았던가? 유끼꼬의 마음을 취할 수 있는 정인이 나타난다면 놓아줄 테니, 그때는 무복과 가면을 벗고 여인임을 밝혀라! 그러나 그녀는 어느 남자에게도 여인일 수 없었다. 길정학이 유끼꼬의 진면목을 발설하지 않았던 까닭에 주위 사람들은 길정학의 태도만을 이상하게 여기었다.
설 무영이 출관하는 날이었다.
맥적산 산등성에 낙조가 걸려 서녘은 온통 황혼으로 물들여 있었다. 황혼을 바라보고 있는 정룡의 얼굴은 창백하였다. 주군의 출관을 앞두고 유끼꼬에게 연정을 품고 있는 그는 조바심이 났다. 그렇다고 감히 넘볼 수 없는 주군의 뜻을 저버리고 한 여인에게 품은 연정을 스스로 토설 할 수는 없었다. 그녀에 대한 애정도 포기 할 수도 없는 그는 고민에 휩싸였다. 는 없었다
".......!"
적류탄(赤流灘) 강가에는 설 무영을 비롯한 십여 명이 헌 포대 주위를 둘러쌓고 있었다. 뚤뚤 말린 헌 포대에는 시신으로 보이는 발이 삐죽 나와 있었다. 정룡 길정학이 설 무영이 출관할 즈음에 기어코 절벽위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버린 것이다.
정룡의 시신을 둘러싸고 있는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 누구도 그가 목숨을 끊은 이유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강물이 급류로 휘몰아치는 소용돌이와 바람 소리만이 흐르는 정적이었다. 고아로 무림에 발을 디딘 후 변황의 혼마지옥까지 갇혔다가 설 무영에게 목숨을 의존한 그였다.
정적을 깨고 설 무영이 입을 열었다.
"누가 아는가?"
정룡의 죽음에 대한 연유를 알고 있는가를 묻는 질문이었다. 그것은 모두가 궁금해 하는 질문이었다. 문득 유끼꼬가 설 무영의 뒤에서 무릎을 꿇으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속하가........"
"무슨 일인가?"
설 무영이 뒤도 안돌아보고 물었다.
"그게…! 주군께만........"
적류탄(赤流灘)을 따라 불어온 바람이 모래먼지를 일으키며 불어와 옷깃을 나부꼈다.
"성내 묘지에 잘 안치해 주어라."
"존명!"
설 무영의 감정을 숨기고 하는 말 한마디에 모두들 정룡의 시신을 떠 매고 사라졌다. 강바람이 불어오는 산등성이에 유끼꼬만이 설 무영 앞에 좌궤(左跪)하고 있었다. 흐느낌과 아울러 유끼꼬의 입에서 정룡의 죽음에 대한 연유가 흘러나왔다.
“정룡의 죽음은 속하의 잘못입니다...........”
“..........!?”
설 무영은 요동도 하지 않고 듣고만 있었다. 유끼꼬는 그간에 정룡의 동태와 자신과 사이에 일어났던 일 들을 토설하고는 울먹였다.
"흐흑! 모두가 소저의 불찰로........"
"못난 것들........"
설 무영은 가슴 속으로 부터 두 사람에 대한 애정이 울컥! 솟아올랐다. 한편으로는 정룡의 애절한 애정을 받아주지 못한 유끼꼬와 한낱 애정 때문에 목숨을 끊은 정룡, 두 사람 모두를 질책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가슴속으로 감정을 삭였다.
(정녕 유끼꼬는 그녀의 사부 요시테루의 말 데로 전생에 요살(妖殺)이었나.....?)
설 무영은 유끼꼬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며칠 후 그는 그녀를 지하 석굴에 있는 참선옥(參禪沃)에 가두었다. 이것은 그녀의 무공 대련 중에 실수로 인해 정룡이 죽은 것처럼 주위 사람에게 알리고, 잔뜩 긴장하고 있는 그녀의 마음을 스스로 진정하라는 뜻의 설 무영의 배려였다.----------------------------------
오직 달빛만이 아스라이 어둠을 바라보고 있는 맥적산.
이제 제법 나뭇가지마다 어린아이의 손바닥만한 싹들이 새치름하게 돋아나는 계절이다 어둠속에서는 단지 꽃송이처럼 보인다. 그러나 잎이 나오기 전에 피어날 도화나무에서는 담홍색 꽃봉오리들이 흐드러지게 군락을 이룰 날들만 기다리고 있다.
스르륵! 휙! 스르륵!
그런데 깊은 흑야에 검은 그림자들이 깎아지른 절벽을 죽을힘을 다해 달려 올라가고 있었다. 그 숫자는 자그마치 일천여명에 달했다. 그런데 그 많은 숫자가 정상을 올라갈수록 힘들 텐데 오히려 정상에 가까울수록 소리도 없이 오르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었다.
삐 이~익!
돌연 날카로운 예음이 어둠을 가르고 맥적산에 울려 퍼졌다. 그 소리를 신호로 정상을 향하던 검은 그림자들이 바람처럼 일제히 달려서 하산하기 시작하였다. 가까이 보면 검은 그림자들은 온통 땀과 흙먼지로 뒤범벅이 되어 있고 여기저기 찢긴 옷 속은 상처투성이였다.
그림자들이 살아 있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은 오직 광야에 버려진 듯 날카로운 야수의 눈빛이었다. 어둠 속의 길을 밝히는 것은 오직 그들의 눈에서 폭사하는 안광이었다.
"아! 도저…도저히 못 하겠어."
하나의 그림자가 비틀거리며 숨을 헐떡거렸다.
"더 살기 싫은가? 낙오자는 한명도 있을 수 없다."
포효하는 소리에 비틀거리는 그림자가 몸을 던져 벼랑을 굴러 내렸다. 소리는 그들 무리의 뒤쪽에서 들려왔다. 무리의 뒤쪽에는 열 명의 괴인이 양떼를 몰 듯 종횡으로 날뛰며 그들을 다그치고 있었다. 숲 사이로 놀라서 튀어 오르는 짐승과 사람이 구분되지 않았다. 무리는 더 이상 사람도 아니었다. 무리가 산을 내려와 황하(黃河)로 흐르는 적류탄(赤流灘) 가까이 갔을 때 또 다시 폭갈이 들려왔다.
"입수(入水)! 입수! 물밖에 있는 자는 죽는다."
무리들은 앞뒤를 가리지 않고 물속으로 몸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 르르! 콰~쾅!
무리의 뒤쪽에서 벽력신탄(霹靂神彈)이 천지가 진동하는 굉음을 내고 터져 올랐다.
"으으으…! 살아야 한다......."
"나… 난, 안 죽는다."
무리 속에서 비명 같은 신음소리들이 흘러 나왔다. 무리들이 사라진 뒤로 열 명의 괴인들도 급류가 흐르는 적류탄으로 몸을 던졌다. 그들이 사라진 맥적산에는 적막이 흘렀다. 그들은 적류탄의 험한 급류 속 어디론가 사라진 것이다.
그런데 한 다경 후 적류탄 가까운 곳, 암굴에서 꾸역꾸역 그들이 나오고 있었다. 마치 동굴 속에 있던 박쥐 때들 모양 튕겨 나오고 있었다. 폭갈이 울려 퍼졌다.
"산으로 올라라! 뒤처지면 낙오자다."
무리는 폭갈에 따라 혼이 나간 야차처럼 움직였다. 그렇게 맥적산 정상에서 적류탄으로 적류탄에서 다시 맥적산 정상으로 오르기를 십여 차례, 희미하게 동녘이 밝아올 때쯤에 무리는 안개처럼 사라지고 있었다.
휘리리릭!
그들이 사라진 맥적산 봉우리에 한 사람이 날아 올라와 우뚝 섰다. 그는 백색 도포에 백색 무복, 온통 백의로 전신을 가린 청년이 백색 영웅건을 질끈 동여매고 있었다. 요대와 장화까지도 백색이었다. 무복이 아니었다면 학자라 해도 무관할 풍모를 갖추었다. 용의 형상을 이룬 아미, 맑고 깊은 현기의 눈동자, 오체가 늠름한 풍채, 설 무영이었다.
그는 형형한 눈빛으로 사라져 가는 무리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에게 지옥수련을 지시한 것은 설 무영이었다. 강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은 그의 철칙이었다. 그들의 목숨을 책임지고 있는 그로서는 그들을 상하게 만드는 방법뿐이 없었다.
설 무영은 맥적산에 수많은 동굴이 있다는 것을 착안하였다. 도공과 석공을 불러 동굴을 연결하여 요새화하였다. 그런 와중에 도화성과 적류탄을 연결하는 동굴과 도화성 지하의 엄청난 크기의 공간도 발견하였다.
그는 십천간룡에게 사자단의 지휘를 맡겨 피나는 수련을 시켰다. 밤에는 맥적산과 적류탄에서 그들의 땀을 뽑아냈고, 낮에는 지하 연무장에서 무공수련을 시키고 있는 것이다.
녹음반각(綠飮盤閣)
도화성의 대식구가 교대로 식사를 하는 곳이다. 설 무영이 식사를 하고 있는 한 사자단원에게 다가갔다.
"음식은 모자라지 않나?"
"네! 존명."
사자단원은 급히 수저를 놓고 좌궤(左跪)를 하였다. 설 무영이 단원들에게 단결의 뜻으로 권고하는 동영식 좌궤였다. 설 무영이 급히 단원을 붙들어 식탁 앞의 석좌(石座)에 앉혔다.
"괜찮아. 식사할 때는 누가 뭐래도 식사를 하도록........!"
설 무영은 단원의 어깨를 뚜덕이고는 다른 곳으로 옮기며 단원을 살폈다. 사자단원들은 젊지만 의외로 자상하고 섬세한 그에게 강한 신뢰감을 느끼고 있었다. 또한 그의 기괴무쌍(奇怪無雙)한 시무(試武)를 확인한 그들에게 그는 절대복종의 지존일수 밖에 없었다.
설 무영은 일일이 단원들을 살피며 돌아 다녔다. 사자군단이 들어오기 전에 도화성은 한 동안 조용한 적막에 쌓여 있었다. 많은 인원의 식사를 준비하느라 하녀들이 분주히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무복차림의 전도련과 소류진의 모습도 보였다. 그녀들 또한 하녀들과 함께 땀방울을 흘리며 단원들과 주방과 식당 사이를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어린 시절을 손에 물도 안 담그고 살았던 그녀들에게 누가 시켜서가 아니었다. 그녀들은 설 무영의 여인이었다. 설 무영의 박애(博愛)하고 검소한 마음을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단원 사이를 오가던 소류진은 연신 흘린 땀을 소매로 닦으며 주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어 멋!"
그녀가 헛바람 새는 소리를 지르며 뒤 돌아보았다. 누군가 뒤에서 그녀의 둔부를 움켜 쥔 것이었다. 설 무영이 하얀 미소를 띠우고 서 있었다.
"누가 봐요......."
곱게 눈을 흘긴 소류진이 봉옥을 붉히며 주방으로 사라졌다. 설 무영이 멋쩍은 듯 얼굴을 붉혔다. 뒤쫓아 오던 전도련이 빤히 처다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
설 무영은 장난하다 들킨 어린아이처럼 자리를 뛰쳐나왔다. 밖으로 나오면서도 그는 전도련의 미소가 머리뒤꼭지에 머무르는 것을 의식하였다. 창문으로 보이는 청명한 하늘에 흰 구름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난 이제 내가 할 일을 또 해야겠군.......!)
사자군단의 단원들이 식사를 하는 식당을 나서는 그의 뒷모습이 전각들 사이로 사라져갔다.
사방 오장의 지하 공간.
도화성 지하의 한 석실이다.
또르륵!
종유석에서 떨어지는 종유수가 이따금 적막을 깨고 흘러내렸다. 설 무영은 웃통을 벗어 젖힌 채 단좌(端坐)를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스스로 연무한 무공을 승화시키고 보완하고 융화시킬 필요를 느꼈던 그였다. 그러하기에 폐관을 하고 연공에 들어 간 것이다.
설 무영은 천기조원(天氣朝元)의 지체에 윤회역근대승공(輪廻逆筋坮承功)의 끊임없는 운기주천으로 나날이 내공이 상승하고 있으면서 연화동의 영약으로 천년이상의 내공을 소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유라혼빙천(琉羅魂氷天)의 기연으로 천고에 없는 극양과 극음의 양극기도(兩極氣道)를 이루었고, 신폭쾌선공(神瀑快仙功)을 기초로 하여 천지현동(天地玄洞)에서 태을선인(太乙仙人)의 건곤천무신공(乾坤天武神功)을 비롯한 수많은 고금절학의 무공을 달성한바 있었다.
또한 연화동(蓮花洞)에서 선조이신 신검성황(神劍聖皇)의 천상혼원진록(天孀魂原眞錄)과 오지산의 다섯 고인의 독전무공과 빙음지기의 무공인 태음화강진록(太陰花 眞錄), 빙하섭령검결(氷河攝靈劍訣) 등의 음양을 도루 섭렵하는 무공도 십성을 달성하였다.
그는 이제 불무의 신통력으로 이룰 수 있는 삼명육통(三明六通)에 가까운 극상무공을 초월한 천상제무의 지경에 달해 있었다. 이에 더욱 순화하며 승화시키고 정립할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특히 그가 알고 있는 검에 관련한 무공을 정화하여 틈틈이 태영비풍검(太影飛風劍)을 착안하였다.
태영비풍검은 극 상승 검술로 다섯 가지 초식으로 이루었고, 각 초식마다 십천간(十天干)과 십이지지(十二地支)가 결합된 육십간지(干支)에 의한 육십 가지 변화를 주었다.
태파천(太破天). 하늘로부터 검강이 일며 수많은 검날이 온 천하를 폭사한다.
뇌정풍(雷精風). 검강이 상하로 일어나 번개와 돌풍으로 쏟아져 천지를 쪼개어 간다.
월륜탄(月輪彈). 은하수와 같은 원륜을 이룬 음양의 검형이 빛살처럼 쏟아져 극쾌의 검강으로 상대의 전신을 도륙한다.
해심폭(海心暴). 노도와 같이 성난 파도와 해일의 검강이 밀려가서 주위 지상의 모든 것을 베어가
는 패도의 검법이다.
혼혈공(魂血功). 지면으로부터 연이어 극음의 검강이 폭발하여 진공상태를 이루며 검날이 솟아올라 상대를 주살한다.
이 검법은 설 무영과 같이 고도의 내공을 소유하지 않은 자는 내력의 고갈로 달성할 수 없는 초상승의 무형신검(無形身劍) 일체의 어기어검법이었다. 설 무영은 윤회역근대승공으로 운기주천에 들어갔다.
"........!"
그의 전신에서는 음양의 양극 기혈이 각각 역회전을 시작하니 전신모공에서 빙설과 같은 흰 서기와 푸른 서기가 피어올랐다. 아울러 내부로부터 파도와 같은 해일의 강기가 흘러 나왔다. 그리고 시간을 잊은 공간속에 어둠의 적막이 흐른다.
똑!
이따금 종유석에서 흘러내리는 종유수의 낙음(落音)이 빈 공간에 울려 퍼져 갔다.
승룡각(昇龍閣).
도화성의 무공을 연마하는 각이다.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도록 백여 장이 되게 드넓은 대리석 광장이다. 드문드문 대리석의 기둥 이외에는 텅 빈 공간에 단지 한 사람만이 땀을 흘리고 있었다.
검은 무복을 걸친 은비살 유끼꼬였다. 그녀는 무공에 대한 성취욕이 대단하여 설 무영으로부터 많은 무공비급을 받아 연마하였다. 설 무영이 지하 연공실을 폐관하고 연공에 들어갔기에 그녀는 별로 소일할 일이 없기도 하여 거의 무공 연마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다고 아녀자들과 함께 어울릴 수도 없고, 폐쇄된 생활을 오래한 까닭으로 그녀는 혼자만의 생활에 만족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었다.
"타 앗!"
일갈과 함께 유끼꼬의 날렵한 몸이 전광석화처럼 허공을 가르며 날고 그녀의 우수가 검형을 이루었다. 얼음 꽃 같은 검형에서는 수많은 검기가 승룡각 전체에 쏟아져 넘쳤다. 설 무영이 유라혼빙천의 보고에서 구한 빙하섭령검결(氷河攝靈劍訣)이었다.
"대단하다! 신검지경의 어검술......."
승용각 입구 기둥 뒤에서 그녀를 보고 감탄하는 그림자가 있었다. 수려한 용모에 검게 그을린 다부진 체격의 청년이었다. 십천간룡 중에 정룡(丁龍) 길정학(吉丁鶴)이었다. 그가 숨어서 은비살의 동태를 살피는 데에는 연유가 있었다.
도화사자단에는 단지 열 명의 여자단원만이 존재하였다. 그런데 지옥수련 중에 여은정(茹恩丁)이라는 여단원이 부상을 입었다. 단원의 건강을 살피는 것도 수련사의 임무라는 말을 지존이신 설 무영으로부터 종종 들어온 터였다.
어느 날 정룡 길정학은 앞에서 검은 무복을 입고 절뚝거리며 가는 단원이 안타까웠다. 그는 체구가 작은 단원이 여은정(茹恩丁)이려니 하고 무심코 불러 세웠다.
"거기 여 단원!"
".........!"
그러나 단원은 아무 묵묵부답, 뒤도 안돌아 보는 것이었다.
"안 들려? 여은정 단원."
"........!"
그가 큰 소리로 재차 불러도 역시 대답이 없었다. 길정학이 뛰어가 단원의 등을 두드렸다.
"여 봐!"
"네......?"
그때서야 뒤 돌아 본 단원은 여은정이 아니었다. 오목조목한 얼굴에 초롱초롱한 눈동자로 바라보는 것은 남장 무복을 하고 있는 은비살이었다. 그는 다른 십천간룡을 통해 설 무영의 분신 같은 동영 인자 출신의 은비살에 대해서 들은 바 있었다. 그는 황급히 사과를 하였다.
"아! 실수였습니다. 단원인줄 알고......."
"괜찮습니다!"
단아하지만 내강이 실린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를 향해 미소 짓는 은비살의 표정은 여인같이 살가운 신비감이 들었다. 정룡은 그가 사라진 후에도 홀린 듯 멍하니 넋을 잃고 서 있었다. 그 후로 그는 호기심으로 여유 시간만 있으면 은비살의 동태를 살피는 습관이 생겼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가 바라본 은비살의 무공은 지존인 설 무영 다음가는 극 상승 무공이었다. 그것은 그에 대한 정룡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하는 것이었다.
"정말…! 대단하다."
정룡은 그가 존경스럽기까지 하였다. 여인같이 매끈한 피부와 체구에 오백년 이상의 내공이 실린 절전 무공이었다. 은비살은 수련을 마친 후 운기조식을 하고는 승용각을 나섰다. 승용각의 바깥은 총총히 흐르는 별과 만월의 월광이 교교히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힐끗힐끗 주위를 살피고는 도화성 서쪽 성곽으로 향했다. 그녀는 누구인지는 모르나 자신의 동태를 살피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으나 도화성이 워낙 철저한 기문진과 기관장치가 설치되어 있는지라 주위를 살피면서도 크게 염려하지 않고 있었다.
유끼꼬가 수련을 마치면 가는 곳은 혼자 오붓하게 목욕을 즐기는 장소였다. 그녀는 도화성에 와서 설 무영의 배려로 모든 것이 편하고 자유스러움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여인이라는 것을 숨기고 지내려고 하니 모두가 편한 것만은 아니었고, 그중에서 마음 놓고 목욕을 할 만한 곳이 마땅치 않았다. 여인이 이용하는 여욕간(女浴間)을 이용할 수도 남자가 이용하는 남욕간(男浴間)을 이용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유끼꼬, 그녀만이 이용하는 곳이 있었다. 그녀는 우연히 도화성 서쪽 성곽을 거닐다가 후미진 숲속에서 수증기가 솟아오르는 것을 발견하였다. 숲을 헤치고 들어 간곳에는 온천수가 솟아오르는 작은 소담(小潭)이 있었던 것이다. 계곡의 약초에서 흐르는 물과 합쳐 그윽한 약향이 흐르며 유심히 살피지 않고는 발견할 수 없는 천애의 욕소(浴沼)였다.
손으로 파내듯 뻥 뚫린 숲 한가운데로 시리도록 하얗게 달빛이 쏟아지는 계곡이었다. 월광을 받은 암벽 밑으로는 계곡의 물이 졸졸 흘러 내려가는 곳에 증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소담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은비살의 뒤를 그림자처럼 쫓아와 암벽에 납작 엎드려 소담을 내려다보는 사람이 있었다. 다름 아닌 정룡 질정학이었다.
"하아! 여기 이런 곳이 있었네! 수중 무공을 수련하려나? 아니면 목욕을........?"
무복을 훌훌 벗어 던진 유끼꼬가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정룡은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다쳤나? 왜, 가슴을 천으로 감쌌지?)
유끼꼬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가 젖가슴을 동여맨 천을 풀어 헤쳤다. 소담을 내려다보던 정룡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허 억~!?"
길정학은 내쉬던 숨을 멈춘 채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달빛에 들어나는 뽀얀 피부의 나신이 들어난 여인의 모습이었다. 탱탱한 젖가슴과 방초, 오밀조밀하고 가녀린 체구의 굴곡이 완연히 들어난 월하의 요정이라고 할까? 하얀 달빛을 받은 여인의 나신은 뇌쇄적이었다.
길정학의 가슴은 두 방방이질 하듯이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름답다…!"
길정학의 입에서는 절로 탄성이 흘렀다. 길정학은 보지 말아야할 것을 보았고, 만나지 않아야할 운명인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 후로 길정학은 그녀에 대한 열애의 감정이 차곡차곡 싸여 갔다. 그는 차츰 사자단의 수련 시각 외에는 그녀를 몰래 바라보는 것으로 행복감을 느꼈다.
그러던 어느 날 사자단원들이 휴식에 들어가고 해가 중천에 걸린 시각에 그는 유끼꼬와 마주쳤다. 아니 마주쳤다기보다는 그가 그녀를 훔쳐보다가 한적한 도화성 후면에 있는 정원에서 만난 것이었다. 그가 주춤주춤 다가가며 입을 열자 그녀가 힐끗 뒤돌아보았다.
"저........"
"......!?"
"저는 정룡 길정학입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유끼꼬는 별 다른 생각 없이 무뚝뚝하게 말을 하였다.
"전…! 은비살 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느닷없는 말에 미간을 찌푸린 유끼꼬는 의구심으로 물었다.
"뭐를.......?"
"은비살 님이 남장을 한 여인이시라는 것을요........"
"......?!"
길정학의 말에 놀란 유끼꼬는 몸을 오싹 움츠리며 경악하였다. 그가 눈치를 살피며 다시 말했다.
"정말 미안합니다. 오래전부터 은비살님을 살펴보았습니다."
유끼꼬는 초롱초롱한 두 눈을 크게 홉뜨며 그가 어떻게 알았을까를 추측하였다.
"그렇다면.......?"
"네! 협곡까지도 갔었습니다."
유끼꼬가 봉옥을 붉게 불들이며 놀라워하는 표정에 길정학은 솔직히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길게 한 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그런데........"
유끼꼬를 더욱 놀라게 하는 것은 길정학의 더듬거리며 하는 다음 말이었다.
"그리고 흠모한다는 말을 하w 않고는 못 견디겠기에......."
"무슨 말씀을......?"
유끼꼬는 길정학의 말에 귀를 의심하고 되물었다. 길정학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힘을 주어 다시 말했다.
"나의 여인이 되 주었으면 합니다."
그 순간 은비살의 두 눈에서 독사 같은 불꽃을 일으키며 냉담한 말이 튀어나왔다.
"제 목숨은 주군의 것이에요. 내가 여인이라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우리 둘은 죽음을 면치 못하거늘........"
"그렇다면 평생 행복하게 해 줄 테니, 같이 먼 곳으로......."
길정학이 말을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철썩!
은비살의 매서운 손길이 길정학의 뺨에 작렬하였다. 매서운 손길에 얻어맞은 그는 두 눈에 불꽃이 일어났다. 유끼꼬는 날카롭게 내뱉었다.
"바보같이…! 주군의 속하가....... 다시는 그런 말 마세요!"
"......!"
그 순간 길정학은 보았다. 은비살의 흑수정 같은 두 눈에 눈물이 핑 도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는 차갑고 냉정했다.
"이 일은 주군이 출관을 하실 때까지 입을 다무세요."
한마디 내 뱉은 유끼꼬는 길정학의 곁을 떠나 사라졌다. 길정학은 온갖 상념에 잡혀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다음날부터 길정학은 식음을 전폐하고 모습을 나타내기를 꺼려하였다. 그 후도 그는 여러 번 유끼꼬에게 애원조로 애정 고백을 하였다. 하지만 유끼꼬는 더욱 냉정한 모습을 보였다. 길정학은 차츰 사람들 속에서 자취를 감추려 했다.
유끼꼬는 길정학의 심정을 알고 있었고 측은한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오직 설 무영을 향해 목숨뿐만 아니라 존경심과 함께 애정까지도 일편단심인 그녀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는 것이었다. 다만 그녀는 자신의 불찰로 인하여 길정학이 그녀가 여인이라는 존재를 알게 된 대한 처벌을 받을 생각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설 무영이 말하지 않았던가? 유끼꼬의 마음을 취할 수 있는 정인이 나타난다면 놓아줄 테니, 그때는 무복과 가면을 벗고 여인임을 밝혀라! 그러나 그녀는 어느 남자에게도 여인일 수 없었다. 길정학이 유끼꼬의 진면목을 발설하지 않았던 까닭에 주위 사람들은 길정학의 태도만을 이상하게 여기었다.
설 무영이 출관하는 날이었다.
맥적산 산등성에 낙조가 걸려 서녘은 온통 황혼으로 물들여 있었다. 황혼을 바라보고 있는 정룡의 얼굴은 창백하였다. 주군의 출관을 앞두고 유끼꼬에게 연정을 품고 있는 그는 조바심이 났다. 그렇다고 감히 넘볼 수 없는 주군의 뜻을 저버리고 한 여인에게 품은 연정을 스스로 토설 할 수는 없었다. 그녀에 대한 애정도 포기 할 수도 없는 그는 고민에 휩싸였다. 는 없었다
".......!"
적류탄(赤流灘) 강가에는 설 무영을 비롯한 십여 명이 헌 포대 주위를 둘러쌓고 있었다. 뚤뚤 말린 헌 포대에는 시신으로 보이는 발이 삐죽 나와 있었다. 정룡 길정학이 설 무영이 출관할 즈음에 기어코 절벽위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버린 것이다.
정룡의 시신을 둘러싸고 있는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 누구도 그가 목숨을 끊은 이유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강물이 급류로 휘몰아치는 소용돌이와 바람 소리만이 흐르는 정적이었다. 고아로 무림에 발을 디딘 후 변황의 혼마지옥까지 갇혔다가 설 무영에게 목숨을 의존한 그였다.
정적을 깨고 설 무영이 입을 열었다.
"누가 아는가?"
정룡의 죽음에 대한 연유를 알고 있는가를 묻는 질문이었다. 그것은 모두가 궁금해 하는 질문이었다. 문득 유끼꼬가 설 무영의 뒤에서 무릎을 꿇으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속하가........"
"무슨 일인가?"
설 무영이 뒤도 안돌아보고 물었다.
"그게…! 주군께만........"
적류탄(赤流灘)을 따라 불어온 바람이 모래먼지를 일으키며 불어와 옷깃을 나부꼈다.
"성내 묘지에 잘 안치해 주어라."
"존명!"
설 무영의 감정을 숨기고 하는 말 한마디에 모두들 정룡의 시신을 떠 매고 사라졌다. 강바람이 불어오는 산등성이에 유끼꼬만이 설 무영 앞에 좌궤(左跪)하고 있었다. 흐느낌과 아울러 유끼꼬의 입에서 정룡의 죽음에 대한 연유가 흘러나왔다.
“정룡의 죽음은 속하의 잘못입니다...........”
“..........!?”
설 무영은 요동도 하지 않고 듣고만 있었다. 유끼꼬는 그간에 정룡의 동태와 자신과 사이에 일어났던 일 들을 토설하고는 울먹였다.
"흐흑! 모두가 소저의 불찰로........"
"못난 것들........"
설 무영은 가슴 속으로 부터 두 사람에 대한 애정이 울컥! 솟아올랐다. 한편으로는 정룡의 애절한 애정을 받아주지 못한 유끼꼬와 한낱 애정 때문에 목숨을 끊은 정룡, 두 사람 모두를 질책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가슴속으로 감정을 삭였다.
(정녕 유끼꼬는 그녀의 사부 요시테루의 말 데로 전생에 요살(妖殺)이었나.....?)
설 무영은 유끼꼬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며칠 후 그는 그녀를 지하 석굴에 있는 참선옥(參禪沃)에 가두었다. 이것은 그녀의 무공 대련 중에 실수로 인해 정룡이 죽은 것처럼 주위 사람에게 알리고, 잔뜩 긴장하고 있는 그녀의 마음을 스스로 진정하라는 뜻의 설 무영의 배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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