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신으로 시신이 되어 있는 여인들을 살펴본 설 무영은 눈살을 찌푸리며 안타까운 마음이 일어났다. 유끼꼬와 설 무영은 각기 축 늘어져 있는 여인들의 머리를 치켜들었다. 여인들은 다름 아닌 정무맹 성산비무대회에서 사라졌던 수여빈(壽汝嬪)과 모용란(慕容蘭)이었다.
"........!"
진소랑을 바라보는 설 무영은 묘한 감정이 일어났다. 그녀를 종남파의 독수괴사(毒手傀士)와 사혈요녀(射血妖女)로부터 구해주었던 당시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설 무영은 진소랑의 시신을 끌어내려 암동 밖으로 안고 나왔다. 모용란의 시신은 유끼꼬가 짊어지고 나왔다.
그는 유끼꼬의 도움으로 땅을 파고 그녀들을 각기 안장하였다. 공연히 슬픔이 엄습하여 설 무영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한창 삶에 대한 꿈의 나래를 펼칠 나이에 악귀의 마수에 죽어간 그녀에 대한 아련한 마음이 솟아난 것이다.
(이승에서 못 다한 인연일랑 저승에서 만납시다.......)
혼잣말로 뇌이며 설 무영은 걸음을 옮겼다. 산봉우리로부터 짙은 안개가 내려오고 달빛이 구름 속에 묻힌 계곡은 지옥 같은 어둠으로 변하고 있었다. 설 무영은 또 다른 철창 앞으로 다가갔다.
으…! 으…!
신음성은 바로 그 철창 안에서 울려 나오는 것이었다. 어둠속 암동 바닥에 꿈틀거리는 물체가 있었다. 철창문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살아 있다고 보기 힘들 지경의 괴인이 온몸을 비틀고 있었다. 머리털은 듬성듬성 빠져 두 개골이 들어나고. 피를 뒤집어 쓴 듯 온몸과 찢긴 의복은 선혈로 적셔 있었고, 족쇄가 채어진 발목은 허옇게 뼈가 앙상하게 들어나 있었다.
어깻죽지 안으로 고개를 파묻은 채 고통스런 신음을 흘리던 괴인이 머리를 쳐들어 그들을 바라보았다. 움푹 패여 퀭한 눈동자.
"뉘…뉘시오?"
얼굴에 온통 피가 응고되어 붙어있는 괴인은 산송장이나 다를 바 없었다. 허지만 눈빛만은 유난히 빛을 발했다. 설 무영은 결코 괴노인을 업신여길 수 없었다.
"설 무영이라 합니다. 노야께서는 어느 고인이신지…?"
"설…! 설 무영.......?"
반문을 하며 고개를 쳐든 괴인의 시선이 설 무영을 향하면서 눈빛은 더욱 빛을 발했다. 설 무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흠......!"
설 무영을 유심히 살피던 괴노인은 골똘히 생각하더니 기운이 쇄약해진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들을 막게나.…! 수라천을....... 마삼살(魔三乷)… 으 으.......컥!"
"마삼살이라면........!?"
괴인은 울컥! 무엇인가 입으로 검은 물체를 토해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괴노인이 토해낸 것은 내장의 조각이었다.
"마… 마삼살, 그들이 황실을 노리고 개봉으로 갔어....... 혼마살이 갈…갈제면......."
"네… 엑?"
설 무영이 놀라서 눈을 크게 치떴다. 갈제면이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괴노인은 말하기도 힘든지 숨을 몰아 쉬었다.
"그…! 라마사존(喇麻邪尊)! 그가 수라천......."
"음…!"
설 무영이 신음성을 발했다. 그렇다면 마삼살의 혼마살이 고재령이고, 그가 곧 수라천이란 말이었다. 괴노인의 더듬거리는 말이 이어졌다.
"도… 도마살(刀魔乷)이 적혈치마(赤血齒魔) 북두마존(北斗魔尊)......., 혈마살(血魔乷)이 천마귀존(天魔鬼尊) 궁조민(宮朝敏)........ 그들은 후당(後唐)황제 주연상(周煙常)의 대가에........ 허 헉…! 만족치 못하고, 처....... 천하 중원과 황실의 제왕을 노렸어"
"어찌…!? 허 헉.......!"
설 무영은 철퇴로 머리를 얻어맞는 듯 하는 충격에 털썩 주저앉았다. 도마살이 설 무영이 찾아다니던 불망객 도성담 사부의 원수이고, 혈마살이 매화반점의 전주였던 궁조민이라는 말이었다.
노괴인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그 누구도 생각 못했던 청천벽력과 같은 것이었다. 그들은 모두 두세 개의 가면을 쓴 채 중원과 황실에 잠입해 있었다는 말이다. 설 무영은 목숨이 끊어지려는 듯 헐떡이는 괴인을 끌어안으며 다급하게 물었다.
"노야께서는 어느 고인이신지…?"
"헉…! 헉…!"
숨을 몰아쉬며 눈을 감았던 괴인이 눈을 치뜨면서 간신히 말을 이었다.
"노… 노부는 하수인이 되서라도 초가연(草嘉蓮)과 고마루(高痲陋)를 지키고, 그들의 헛된 야망의 꿈을 잠재우려 했건만, 고....... 으 으윽! 고마루는......."
"......?"
괴인은 가슴을 들썩이며 한 동안 숨을 몰아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사… 사술을 연마하다 주화입마하여 죽고, 노부의 의중을 안 혼마살이 노부에게 독수를 써서 죽지도 못하고 고통으로 살게....... 으 헉…!"
"......?"
"제… 제발 노부를 고통 없게 죽여줘.......! 진, 진아가 살아 있는걸 알아, 잘… 잘 부탁해."
"........!"
괴인은 괴로움에 찌든 눈빛으로 설 무영에게 애원을 하고 있었다. 고통과 회한으로 얼룩진 괴인의 모습을 바라보는 설 무영과 유끼꼬의 눈가에는 습기가 베어났다.
모든 것이 적나라하게 들어난 것이다. 괴인은 다름 아닌 소류진의 가친이자, 오두마(五頭魔) 중 일인인 혼마(魂魔) 음혼귀(陰魂鬼)의 또 다른 이름으로 초가연의 애절한 정인이기도 했던 모란장원의 장주인 목단살웅(牧丹乷熊) 소상확이었던 것이다.
설 무영은 소장주를 눕히고 부스스 일어났다. 어둠속에서 소장주의 고통에 찌든 눈빛은 간절히 애원하는 처연함이 흘러 넘쳤다. 간신히 생명만 유지해야하는 소상확의 고통이었다.
스 슥!
설 무영은 소상확 장주의 다섯 개의 사혈을 순식간에 짚었다. 소장주의 전신이 잠시 경련을 하더니 잠잠해졌다. 고요한 어둠의 시간이 적막을 안고 흘렀다. 죽어간 사람들의 넋을 대변하는 듯 안개가 짙은 숲속 어디선가에서 두견이 슬피 울어댔다.
암동을 벗어난 설 무영은 소장주의 시신도 안장하고 커다란 평석을 무덤 앞에 세워 표식을 하였다. 달빛을 감추었던 구름이 흘러가고 안개에 갇혀있던 어둠 속의 수림이 뿌옇게 들어났다. 계곡을 거슬러 오르는 바람 속에 옷깃이 나부꼈다.
설 무영은 홀연히 서서 수라천의 마두들의 행방에 대해서 몰두를 하였다. 그들은 분명 송의 건국을 일순간에 무너트리고 중원천하를 손아귀에 쥐려고 황실로 향하고 있을 것이다.
황제의 제위식은 만월의 다음날, 이 밤이 지나면 일주야(晝夜)뿐이 남지 않았다. 한 번의 태양과 한 번의 달이 지기 전에 그들을 중간에서 차단하고 멸살을 하여야한다. 설 무영은 수라천의 사악한 암계를 예시하고 모종의 전서구를 정무맹을 비롯한 해남성, 공령하문, 유라혼빙천에 보내 놓았다. 그러나 전서구를 받은 그들은 개봉 주변으로 모여 있을 것이다.
설 무영은 축잠낭을 열고 묵지(墨紙)와 석필(石筆)을 꺼내들어 몇 자 적어 넣었다. 그리고 그가 꺼내 불은 날카로운 호각소리가 밤하늘을 뚫고 퍼져갔다.
삐~이 이익!
안개와 어둠을 뚫고 잿빛 전서구가 허공을 배회하더니 설 무영의 어깨에 날아들었다. 그는 준비한 묵지를 전서구의 다리에 묶어 날렸다. 전서구는 다시 허공으로 솟구쳐 설 무영의 머
리 위를 한차례 배회하더니 동쪽 하늘의 어둠속으로 사라져 갔다.
"......!"
유끼꼬가 그에게 다가와 팔을 붙잡고 섰다. 서로의 눈을 마주보던 그들은 한 몸이 되어 허공으로 높이 치솟더니 전서구가 날아간 방향으로 신형을 날려 사라졌다.
보봉호(寶峰湖).
호남성(湖南省) 서북부에서 낮에도 안개가 짙은 기암괴석 사이의 백장협(百丈峽)을 빠져나와 장사(長沙)를 지나면, 보봉산(寶峰山) 아래에 있는 호수이다. 보봉호 주변에는 기봉들이 솟아있고, 고곡평호(古谷平湖)와 깎아지를 듯 가파른 절벽과 폭포 등이 있어 절경을 이루는 곳이다.
보봉산 밑의 호수 주변의 드넓은 분지에는 수많은 갈대가 바람에 일렁이고 있어 망망대해의 물결을 연상케 한다. 갈대밭의 분지를 지나는 곳, 보봉산 턱밑에는 일대의 무리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각기 녹, 흑, 백, 청, 황색등 오색의 의복을 걸친 그들의 숫자는 일만이 넘는듯하여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일만이 넘는 수의 무리이건만, 무리의 움직임은 질서정연하게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일만이 넘는 수의 그들이건만, 무리의 움직임은 신속하고도 질서정연하였다. 허지만 그들은 한 결 같이 혼령이 빠져나가 육체만 움직이는 듯 사악하고도 감정이 없는 눈빛이었다.
스 슥! 슥! 저벅~! 저벅~!
그런데 장사 방면에서 갈대밭 입구로 두 개의 인영이 질풍같이 들어서고 있었다. 검은 무복을 걸친 두 인영은 떠오르는 붉은 태양을 마주한 탓인지 검은 무복이 짙은 혈색을 이루고 있었다. 문득 경공을 멈춘 두 인영은 호수를 바라보고 섰다.
태양을 마주본 두 인영의 눈빛이 붉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범정산으로부터 달려온 설 무영과 유끼꼬였다. 그들은 갈대 분지 건너의 무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놈들의 꼬리를 잡았다!"
굳게 다물었던 입을 열며 설 무영은 어금니를 지그시 물었다. 내공을 끌어올린 그는 호각을
꺼내들었다. 추혼비파채의 신표 추혼용각(追魂龍角)이었다.
삐~ 이이이익!
그는 끌어올린 내공을 추혼용각에 불어 넣었다. 귀막이 터질듯 하는 각음이 보봉산에 부딪쳐 되돌아오고, 보봉호의 수면위로 퍼져나갔다. 갈대분지 건너의 무리들이 걸움을 멈추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아울러 그들은 가슴이 찢기고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 충격에 귀를 틀어 막았다.
그러나 그들 무리의 선두에 있던 몇 명의 괴인들은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태연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괴수인 혈마(血魔), 검마(劍魔), 풍마(豊魔), 환마(幻魔), 혼마(魂魔)등 오두마(五頭魔)였다.
심후한 내공이 실린 각음이었건만, 이미 내공이 상승지경에 도달한 그들에게는 충격이 될 수가 없었다. 말의 형상을 닮은 긴 얼굴에 붉은 혈색의 혈마가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멀리 갈대밭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뭐지......!?"
그때였다.
두~두 두둑!
한 무리의 군마가 요란한 말발굽 소리를 울리며 그들이 나아가던 방향 반대쪽에서 마주쳐 왔다. 그뿐이랴!
스 슥! 우르르…! 스 슥!
보봉산 숲속, 여기저기에서 검은 무복차림의 무인들이 유성처럼 솟아나서 그들에게 다가왔다. 앞으로 내닫던 무리가 움찔하였다.
"그들이 어찌 알았을까.......?"
오두마의 뒤에서 음사스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두마의 뒤에는 녹색과 백색의 괴인이 서있었다. 녹색의 괴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었다. 두 괴인의 용모는 녹색과 백색의 붕대를 칭칭 동여매고 있어 알 수가 없었고, 각각 녹색과 백색의 포의를 걸치고 있었다.
"정무맹이다! 수라마혈진(修羅魔血陣)을 펼쳐라!"
백포를 걸친 괴인의 입에서 사자후가 터져 나왔다. 무리는 수라천의 수하인 마도종파와 수라군이었다. 백포괴인의 한마디에 일만이 넘는 수라군들이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더니 순식간에 무리 주위에는 혈무로 이루어진 안개가 흘렀다.
"수라군을 사살하라!"
반대편에서 군마를 타고 온 무리들의 선두에서 일갈이 터졌다. 그는 정무맹의 수호단장(守護團長) 남궁종(南宮宗)이었다. 그의 좌우에는 수호부장(守護副長) 능서문(凌瑞雯)과 전위대령(前衛隊領) 범호진성(梵虎眞星)이 검미를 휘날리며 갈기를 휘날리는 마상에 있었다.
남궁종의 일갈에 일천의 수호군은 혈무 속으로 지쳐 들어가며 수라군과 충돌하였다. 이어서 보봉산 숲속에서 뛰쳐나온 흑빛 무복 차림의 무리들 앞에서 대소성이 터져 나왔다.
"마수들을 포살하라!"
한쪽 눈을 검은 피혁으로 질끈 가린 외눈박이가 검을 하늘 높이 쳐들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팔이 없는 외팔이와 오른발만으로 몸을 지탱하는 외발이 야수처럼 서 있었다. 그들은 삼흑호(三黑虎)의 우막과 낙일조, 곽용수였다. 그들 뒤로는 일천의 도화사자단이 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우막의 한마디에 푸르륵! 사자단의 무리 속에서 검은 유성이 솟아 나왔다. 십천간룡이었다. 그들은 모두 설 무영의 긴박한 전서구의 지시를 받고, 황하와 장강을 거슬러 밤새 달려온 것이었다. 갑자기 보봉호 주변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병기의 마찰음이 난무하고, 피와 살점이 튀겨 올라 지옥을 방불케 하였다. 수호군과 사자단은 죽음을 각오하고 수라군을 격살하러 몸을 던졌다. 하지만, 워낙 사악한 마공으로 결집된 수라마혈진의 위력과 최상승의 마강(魔剛)을 익힌 오두마의 공력에 수호군과 사자단의 적지 않은 목숨이 사라지고 있었다.
수라군의 후미에서는 설 무영의 용상검과 유끼꼬의 설련검이 피 보라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들은 벌써 피와 땀으로 얼룩진 무복에 상흔이 들어나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단 두 사람으로 일만여의 수라군 후미를 척살해 가고 있는 것이었다.
으~악! 크…억! 크…큭!
용상검에서 하늘을 뒤덮는 검강이 일어나 수많은 검기가 쏟아져 내려 살육을 하고, 설련검에서 은빛 빙강이 일어 수라군의 진영으로 쏟아져 선혈이 솟아났다. 그러나 아무리 상승 무공을 이루었다 해도 수라마혈진으로 무장한 수라군의 인해전술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인 듯하였다.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며 사투하는 사자단과 수호군의 협살에 혈전장은 당연하게 설 무영과 유끼꼬, 단 둘뿐인 후미의 갈대밭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중앙을 돌파하던 설 무영과 유끼꼬는 언뜻 눈빛을 마주치고 좌우로 갈라 수라군을 주살하며 검강을 일으켰다.
수라군의 진중에 있던 백포의 괴인이 돌연 숨을 들이키며 하나의 인영 앞에 무릎을 꿇었다.
"수라천(修羅天)!"
백포의 괴인이 무릎을 꿇은 전면의 지하로부터 홀연히 혈무가 피어올랐다. 아울러 솟아나는 혈무 속에 혈색 도포를 걸친 인영이 나타났다. 차츰 윤곽이 뚜렷해지는 인영의 모습은 아수라의 형상을 한 가면을 쓴 괴인이었다.
괴인은 전신이 선혈을 뒤집어 쓴 듯 붉은 혈색이었다. 의복뿐만 아니라 노출되는 부분은 붉은 붕대로 칭칭 감겨 있었다.
"수라천이시여!"
녹포괴인도 무릎을 꿇으며 부복하였다. 혈무 속에서 피어나온 혈포의 괴인에게서 괴이한 묵음이 흘러나왔다.
"마존(魔尊)…!"
"천명(天命)!"
수라천이라 불리는 혈괴는 백괴에게 마존이라 하였다. 그들은 중원을 사악한 마수로 손아귀에 쥐려는 수라천과 마삼살의 본색이었다.
"여기서 지체하면 안 된다! 강시를 풀어라. 그리고 귀존(鬼尊)!"
"천명…!"
녹포의 천마귀존이 부복하였다. 강시라고 하였다. 그들의 강시라 함은 요음강시가 아닌가.
"적을 혼란하게 하는 차도살계(借刀殺計)를 써라!"
"어떤 명이신지.......?"
"천마비랑(天魔飛郞)은 어디 있느냐?"
천마비랑, 그는 천마성의 소성주로서 천마귀존의 양자이고, 매화반점의 궁철상(宮哲象)을 이르는 말이었다. 수라군의 진중에서 흑색 의복을 걸친 젊은 청년이 날아와 수라천의 앞에 부복을 하였다.
"천명!"
"......!"
수라천은 무엇인가 궁철상과 은밀한 전음을 주고받았다.
"복명(復命)!"
전음으로 수라천의 지시를 받은 궁철상은 부리나케 수라군의 후미로 날아갔다. 사라지는 궁철상을 바라보는 수라천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오늘밤, 만월이 지기 전에 개봉에 닿아야 하거늘........"
혈전장 들판 중앙을 꿰뚫고 있는 사자군과 수호군은 수적으로도 역부족인 상태에서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크…악! 억!
그러나 그칠 줄 모르고 휘두르는 병기에서 일어나는 강기의 충돌 음과 비명소리, 선혈은 난무하고 있었다. 사자군과 수호군, 그리고 수라군도 조금씩 지처가고 있었다. 그런데 사자군과 수호군의 선두가 엄청난 괴력에 의해 무너지고 있었다.
끄 으으~윽! 으아악!
돌연 두 눈에서 혈광을 뿜어내는 여인들이 나타나 핏빛 혈무를 뿜어내고 있었다. 얼음장 같은 차가운 혈색으로 나타나 여인들은 붉은 나삼을 걸치고 있어 요기스러웠다. 허벅지가 완연히 들어나도록 짧은 나삼자락을 펄럭이는 여인들의 혈장에 수호군과 수호군은 잠시 갈팡질팡하였다.
.
그러나 다시 정무맹의 검과 도, 그리고 창이 여인들의 모습으로 나타난 요괴들을 도살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변괴가 일어났다. 요괴들은 정무맹의 검강과 도강에 쓸어졌다가도 다시 일어나 사악하기 그지없고 독랄한 형공을 펼치는 것이 아닌가.
"활…! 활강시(活糠豉)다!"
수호군의 눈빛이 공포로 물들며 누군가 외마디를 질렀다. 수라천의 활강시(活 屍)란 요음강시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중과부족을 느끼는 정무맹으로서는 더 할 나위없는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으~ 아악! 케액! 으 윽!
점점 정무맹의 수호군과 사자단은 무너지며 점차 물러 설수 밖에 없었다. 갈대밭 주변은 혈천(血川)을 이루며 보봉호로 흘러갔다. 도마살 북천마존의 적혈치마도와 천마귀존의 혈마장의 혈강을 마주하여 남궁종의 천풍검(天風劍)과 능서문의 비천류검(飛天流劍)이 맞서 치열한 격투가 벌어졌다.
능서문이 요괴들까지 가세한 천마귀존의 혈마장을 맞고 비틀거렸다. 이때 황선옥이 쇄비장(鎖飛掌)으로 능서문을 가로막고 천마귀존을 주살하려 맹렬하게 쌍장을 휘둘렀다.
"하하 핫! 그런 애송이 무공으로 수라천을 막으려 했더냐?"
도마살이 일갈하며 황선옥에게 도강을 펼쳤다.
“어딜…!”
순간 수라군의 졸개를 장력으로 쓰러트린 진이화가 휘두르며 도마살에게 나한장을 퍼부었다. 그들의 좌측에서는 도천패혼과 범호진성의 묵도에서 맹룡한 도형을 일으켜 수라백마군을 폭사하여 주살하고 있었다.
한편에서는 오두마에 맞서서 불구의 삼흑호(三黑虎)가 악전고투하고 있었다. 우막의 추혼도, 낙일조의 자혼쇄검, 곽용수의 연환탈명검이 연환진을 펼치며 오두마의 마공에 마주쳐 갔다.
커…윽!
우막이 가슴을 붙잡고 오장을 물러섰다. 검마의 마살강검의 강기에 검상을 입은 그의 어깨에서 피가 솟구치고 있었다.
"악마의 잔당들…!"
일갈과 함께 십천간룡의 병룡(丙龍), 무룡(戊龍), 경룡(庚龍)이 천간태원검결(天干太原劍訣)의 검강을 일으키며 합세하였다. 순간 검강이 하늘을 뒤덮고 오두마의 머리 위로 검날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헉~!"
“헐.......”
풍마와 한마가 위맹한 강기에 놀라 오장을 물러났다. 그들이 놀랄 만도 하였다. 십천감룡의 천간태원공은 설 무영이 태천혼원승공(太天魂原承功)을 천간의 이치에 맞추어 창안한 무공이었다. 수라군과 정무맹은 밀고 밀리며 혼전을 거듭하였다.
그때였다.
두 두둥둥!
대고(大고)를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천지를 진동하는 군마의 함성이 일어났다. 보봉산과 수라군의 정면에서 수많은 무리들이 들이 닥치고 있었다. 정면의 그들은 흑백쌍사(黑白雙蛇)가 이끄는 추혼비파채의 백팔비파대(百八琵琶隊)와 측면은 야투일왕(夜偸一王)이 이끄는 공령하문의 공령하대(空靈蝦隊)였다.
사기가 오른 정무맹의 수호단과 사자단은 일기 당천하여 수라군을 협살하기 시작했다. 수라군의 후미를 척살하고 있는 설 무영과 유끼꼬는 피로 얼룩진 모습으로 고군분투를 하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은 마치 피에 굶주린 야수와도 같이 종횡무진으로 수라군 후미의 좌우를 휘저었다.---------------------------------------------------
"........!"
진소랑을 바라보는 설 무영은 묘한 감정이 일어났다. 그녀를 종남파의 독수괴사(毒手傀士)와 사혈요녀(射血妖女)로부터 구해주었던 당시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설 무영은 진소랑의 시신을 끌어내려 암동 밖으로 안고 나왔다. 모용란의 시신은 유끼꼬가 짊어지고 나왔다.
그는 유끼꼬의 도움으로 땅을 파고 그녀들을 각기 안장하였다. 공연히 슬픔이 엄습하여 설 무영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한창 삶에 대한 꿈의 나래를 펼칠 나이에 악귀의 마수에 죽어간 그녀에 대한 아련한 마음이 솟아난 것이다.
(이승에서 못 다한 인연일랑 저승에서 만납시다.......)
혼잣말로 뇌이며 설 무영은 걸음을 옮겼다. 산봉우리로부터 짙은 안개가 내려오고 달빛이 구름 속에 묻힌 계곡은 지옥 같은 어둠으로 변하고 있었다. 설 무영은 또 다른 철창 앞으로 다가갔다.
으…! 으…!
신음성은 바로 그 철창 안에서 울려 나오는 것이었다. 어둠속 암동 바닥에 꿈틀거리는 물체가 있었다. 철창문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살아 있다고 보기 힘들 지경의 괴인이 온몸을 비틀고 있었다. 머리털은 듬성듬성 빠져 두 개골이 들어나고. 피를 뒤집어 쓴 듯 온몸과 찢긴 의복은 선혈로 적셔 있었고, 족쇄가 채어진 발목은 허옇게 뼈가 앙상하게 들어나 있었다.
어깻죽지 안으로 고개를 파묻은 채 고통스런 신음을 흘리던 괴인이 머리를 쳐들어 그들을 바라보았다. 움푹 패여 퀭한 눈동자.
"뉘…뉘시오?"
얼굴에 온통 피가 응고되어 붙어있는 괴인은 산송장이나 다를 바 없었다. 허지만 눈빛만은 유난히 빛을 발했다. 설 무영은 결코 괴노인을 업신여길 수 없었다.
"설 무영이라 합니다. 노야께서는 어느 고인이신지…?"
"설…! 설 무영.......?"
반문을 하며 고개를 쳐든 괴인의 시선이 설 무영을 향하면서 눈빛은 더욱 빛을 발했다. 설 무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흠......!"
설 무영을 유심히 살피던 괴노인은 골똘히 생각하더니 기운이 쇄약해진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들을 막게나.…! 수라천을....... 마삼살(魔三乷)… 으 으.......컥!"
"마삼살이라면........!?"
괴인은 울컥! 무엇인가 입으로 검은 물체를 토해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괴노인이 토해낸 것은 내장의 조각이었다.
"마… 마삼살, 그들이 황실을 노리고 개봉으로 갔어....... 혼마살이 갈…갈제면......."
"네… 엑?"
설 무영이 놀라서 눈을 크게 치떴다. 갈제면이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괴노인은 말하기도 힘든지 숨을 몰아 쉬었다.
"그…! 라마사존(喇麻邪尊)! 그가 수라천......."
"음…!"
설 무영이 신음성을 발했다. 그렇다면 마삼살의 혼마살이 고재령이고, 그가 곧 수라천이란 말이었다. 괴노인의 더듬거리는 말이 이어졌다.
"도… 도마살(刀魔乷)이 적혈치마(赤血齒魔) 북두마존(北斗魔尊)......., 혈마살(血魔乷)이 천마귀존(天魔鬼尊) 궁조민(宮朝敏)........ 그들은 후당(後唐)황제 주연상(周煙常)의 대가에........ 허 헉…! 만족치 못하고, 처....... 천하 중원과 황실의 제왕을 노렸어"
"어찌…!? 허 헉.......!"
설 무영은 철퇴로 머리를 얻어맞는 듯 하는 충격에 털썩 주저앉았다. 도마살이 설 무영이 찾아다니던 불망객 도성담 사부의 원수이고, 혈마살이 매화반점의 전주였던 궁조민이라는 말이었다.
노괴인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그 누구도 생각 못했던 청천벽력과 같은 것이었다. 그들은 모두 두세 개의 가면을 쓴 채 중원과 황실에 잠입해 있었다는 말이다. 설 무영은 목숨이 끊어지려는 듯 헐떡이는 괴인을 끌어안으며 다급하게 물었다.
"노야께서는 어느 고인이신지…?"
"헉…! 헉…!"
숨을 몰아쉬며 눈을 감았던 괴인이 눈을 치뜨면서 간신히 말을 이었다.
"노… 노부는 하수인이 되서라도 초가연(草嘉蓮)과 고마루(高痲陋)를 지키고, 그들의 헛된 야망의 꿈을 잠재우려 했건만, 고....... 으 으윽! 고마루는......."
"......?"
괴인은 가슴을 들썩이며 한 동안 숨을 몰아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사… 사술을 연마하다 주화입마하여 죽고, 노부의 의중을 안 혼마살이 노부에게 독수를 써서 죽지도 못하고 고통으로 살게....... 으 헉…!"
"......?"
"제… 제발 노부를 고통 없게 죽여줘.......! 진, 진아가 살아 있는걸 알아, 잘… 잘 부탁해."
"........!"
괴인은 괴로움에 찌든 눈빛으로 설 무영에게 애원을 하고 있었다. 고통과 회한으로 얼룩진 괴인의 모습을 바라보는 설 무영과 유끼꼬의 눈가에는 습기가 베어났다.
모든 것이 적나라하게 들어난 것이다. 괴인은 다름 아닌 소류진의 가친이자, 오두마(五頭魔) 중 일인인 혼마(魂魔) 음혼귀(陰魂鬼)의 또 다른 이름으로 초가연의 애절한 정인이기도 했던 모란장원의 장주인 목단살웅(牧丹乷熊) 소상확이었던 것이다.
설 무영은 소장주를 눕히고 부스스 일어났다. 어둠속에서 소장주의 고통에 찌든 눈빛은 간절히 애원하는 처연함이 흘러 넘쳤다. 간신히 생명만 유지해야하는 소상확의 고통이었다.
스 슥!
설 무영은 소상확 장주의 다섯 개의 사혈을 순식간에 짚었다. 소장주의 전신이 잠시 경련을 하더니 잠잠해졌다. 고요한 어둠의 시간이 적막을 안고 흘렀다. 죽어간 사람들의 넋을 대변하는 듯 안개가 짙은 숲속 어디선가에서 두견이 슬피 울어댔다.
암동을 벗어난 설 무영은 소장주의 시신도 안장하고 커다란 평석을 무덤 앞에 세워 표식을 하였다. 달빛을 감추었던 구름이 흘러가고 안개에 갇혀있던 어둠 속의 수림이 뿌옇게 들어났다. 계곡을 거슬러 오르는 바람 속에 옷깃이 나부꼈다.
설 무영은 홀연히 서서 수라천의 마두들의 행방에 대해서 몰두를 하였다. 그들은 분명 송의 건국을 일순간에 무너트리고 중원천하를 손아귀에 쥐려고 황실로 향하고 있을 것이다.
황제의 제위식은 만월의 다음날, 이 밤이 지나면 일주야(晝夜)뿐이 남지 않았다. 한 번의 태양과 한 번의 달이 지기 전에 그들을 중간에서 차단하고 멸살을 하여야한다. 설 무영은 수라천의 사악한 암계를 예시하고 모종의 전서구를 정무맹을 비롯한 해남성, 공령하문, 유라혼빙천에 보내 놓았다. 그러나 전서구를 받은 그들은 개봉 주변으로 모여 있을 것이다.
설 무영은 축잠낭을 열고 묵지(墨紙)와 석필(石筆)을 꺼내들어 몇 자 적어 넣었다. 그리고 그가 꺼내 불은 날카로운 호각소리가 밤하늘을 뚫고 퍼져갔다.
삐~이 이익!
안개와 어둠을 뚫고 잿빛 전서구가 허공을 배회하더니 설 무영의 어깨에 날아들었다. 그는 준비한 묵지를 전서구의 다리에 묶어 날렸다. 전서구는 다시 허공으로 솟구쳐 설 무영의 머
리 위를 한차례 배회하더니 동쪽 하늘의 어둠속으로 사라져 갔다.
"......!"
유끼꼬가 그에게 다가와 팔을 붙잡고 섰다. 서로의 눈을 마주보던 그들은 한 몸이 되어 허공으로 높이 치솟더니 전서구가 날아간 방향으로 신형을 날려 사라졌다.
보봉호(寶峰湖).
호남성(湖南省) 서북부에서 낮에도 안개가 짙은 기암괴석 사이의 백장협(百丈峽)을 빠져나와 장사(長沙)를 지나면, 보봉산(寶峰山) 아래에 있는 호수이다. 보봉호 주변에는 기봉들이 솟아있고, 고곡평호(古谷平湖)와 깎아지를 듯 가파른 절벽과 폭포 등이 있어 절경을 이루는 곳이다.
보봉산 밑의 호수 주변의 드넓은 분지에는 수많은 갈대가 바람에 일렁이고 있어 망망대해의 물결을 연상케 한다. 갈대밭의 분지를 지나는 곳, 보봉산 턱밑에는 일대의 무리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각기 녹, 흑, 백, 청, 황색등 오색의 의복을 걸친 그들의 숫자는 일만이 넘는듯하여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일만이 넘는 수의 무리이건만, 무리의 움직임은 질서정연하게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일만이 넘는 수의 그들이건만, 무리의 움직임은 신속하고도 질서정연하였다. 허지만 그들은 한 결 같이 혼령이 빠져나가 육체만 움직이는 듯 사악하고도 감정이 없는 눈빛이었다.
스 슥! 슥! 저벅~! 저벅~!
그런데 장사 방면에서 갈대밭 입구로 두 개의 인영이 질풍같이 들어서고 있었다. 검은 무복을 걸친 두 인영은 떠오르는 붉은 태양을 마주한 탓인지 검은 무복이 짙은 혈색을 이루고 있었다. 문득 경공을 멈춘 두 인영은 호수를 바라보고 섰다.
태양을 마주본 두 인영의 눈빛이 붉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범정산으로부터 달려온 설 무영과 유끼꼬였다. 그들은 갈대 분지 건너의 무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놈들의 꼬리를 잡았다!"
굳게 다물었던 입을 열며 설 무영은 어금니를 지그시 물었다. 내공을 끌어올린 그는 호각을
꺼내들었다. 추혼비파채의 신표 추혼용각(追魂龍角)이었다.
삐~ 이이이익!
그는 끌어올린 내공을 추혼용각에 불어 넣었다. 귀막이 터질듯 하는 각음이 보봉산에 부딪쳐 되돌아오고, 보봉호의 수면위로 퍼져나갔다. 갈대분지 건너의 무리들이 걸움을 멈추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아울러 그들은 가슴이 찢기고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 충격에 귀를 틀어 막았다.
그러나 그들 무리의 선두에 있던 몇 명의 괴인들은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태연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괴수인 혈마(血魔), 검마(劍魔), 풍마(豊魔), 환마(幻魔), 혼마(魂魔)등 오두마(五頭魔)였다.
심후한 내공이 실린 각음이었건만, 이미 내공이 상승지경에 도달한 그들에게는 충격이 될 수가 없었다. 말의 형상을 닮은 긴 얼굴에 붉은 혈색의 혈마가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멀리 갈대밭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뭐지......!?"
그때였다.
두~두 두둑!
한 무리의 군마가 요란한 말발굽 소리를 울리며 그들이 나아가던 방향 반대쪽에서 마주쳐 왔다. 그뿐이랴!
스 슥! 우르르…! 스 슥!
보봉산 숲속, 여기저기에서 검은 무복차림의 무인들이 유성처럼 솟아나서 그들에게 다가왔다. 앞으로 내닫던 무리가 움찔하였다.
"그들이 어찌 알았을까.......?"
오두마의 뒤에서 음사스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두마의 뒤에는 녹색과 백색의 괴인이 서있었다. 녹색의 괴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었다. 두 괴인의 용모는 녹색과 백색의 붕대를 칭칭 동여매고 있어 알 수가 없었고, 각각 녹색과 백색의 포의를 걸치고 있었다.
"정무맹이다! 수라마혈진(修羅魔血陣)을 펼쳐라!"
백포를 걸친 괴인의 입에서 사자후가 터져 나왔다. 무리는 수라천의 수하인 마도종파와 수라군이었다. 백포괴인의 한마디에 일만이 넘는 수라군들이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더니 순식간에 무리 주위에는 혈무로 이루어진 안개가 흘렀다.
"수라군을 사살하라!"
반대편에서 군마를 타고 온 무리들의 선두에서 일갈이 터졌다. 그는 정무맹의 수호단장(守護團長) 남궁종(南宮宗)이었다. 그의 좌우에는 수호부장(守護副長) 능서문(凌瑞雯)과 전위대령(前衛隊領) 범호진성(梵虎眞星)이 검미를 휘날리며 갈기를 휘날리는 마상에 있었다.
남궁종의 일갈에 일천의 수호군은 혈무 속으로 지쳐 들어가며 수라군과 충돌하였다. 이어서 보봉산 숲속에서 뛰쳐나온 흑빛 무복 차림의 무리들 앞에서 대소성이 터져 나왔다.
"마수들을 포살하라!"
한쪽 눈을 검은 피혁으로 질끈 가린 외눈박이가 검을 하늘 높이 쳐들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팔이 없는 외팔이와 오른발만으로 몸을 지탱하는 외발이 야수처럼 서 있었다. 그들은 삼흑호(三黑虎)의 우막과 낙일조, 곽용수였다. 그들 뒤로는 일천의 도화사자단이 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우막의 한마디에 푸르륵! 사자단의 무리 속에서 검은 유성이 솟아 나왔다. 십천간룡이었다. 그들은 모두 설 무영의 긴박한 전서구의 지시를 받고, 황하와 장강을 거슬러 밤새 달려온 것이었다. 갑자기 보봉호 주변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병기의 마찰음이 난무하고, 피와 살점이 튀겨 올라 지옥을 방불케 하였다. 수호군과 사자단은 죽음을 각오하고 수라군을 격살하러 몸을 던졌다. 하지만, 워낙 사악한 마공으로 결집된 수라마혈진의 위력과 최상승의 마강(魔剛)을 익힌 오두마의 공력에 수호군과 사자단의 적지 않은 목숨이 사라지고 있었다.
수라군의 후미에서는 설 무영의 용상검과 유끼꼬의 설련검이 피 보라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들은 벌써 피와 땀으로 얼룩진 무복에 상흔이 들어나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단 두 사람으로 일만여의 수라군 후미를 척살해 가고 있는 것이었다.
으~악! 크…억! 크…큭!
용상검에서 하늘을 뒤덮는 검강이 일어나 수많은 검기가 쏟아져 내려 살육을 하고, 설련검에서 은빛 빙강이 일어 수라군의 진영으로 쏟아져 선혈이 솟아났다. 그러나 아무리 상승 무공을 이루었다 해도 수라마혈진으로 무장한 수라군의 인해전술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인 듯하였다.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며 사투하는 사자단과 수호군의 협살에 혈전장은 당연하게 설 무영과 유끼꼬, 단 둘뿐인 후미의 갈대밭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중앙을 돌파하던 설 무영과 유끼꼬는 언뜻 눈빛을 마주치고 좌우로 갈라 수라군을 주살하며 검강을 일으켰다.
수라군의 진중에 있던 백포의 괴인이 돌연 숨을 들이키며 하나의 인영 앞에 무릎을 꿇었다.
"수라천(修羅天)!"
백포의 괴인이 무릎을 꿇은 전면의 지하로부터 홀연히 혈무가 피어올랐다. 아울러 솟아나는 혈무 속에 혈색 도포를 걸친 인영이 나타났다. 차츰 윤곽이 뚜렷해지는 인영의 모습은 아수라의 형상을 한 가면을 쓴 괴인이었다.
괴인은 전신이 선혈을 뒤집어 쓴 듯 붉은 혈색이었다. 의복뿐만 아니라 노출되는 부분은 붉은 붕대로 칭칭 감겨 있었다.
"수라천이시여!"
녹포괴인도 무릎을 꿇으며 부복하였다. 혈무 속에서 피어나온 혈포의 괴인에게서 괴이한 묵음이 흘러나왔다.
"마존(魔尊)…!"
"천명(天命)!"
수라천이라 불리는 혈괴는 백괴에게 마존이라 하였다. 그들은 중원을 사악한 마수로 손아귀에 쥐려는 수라천과 마삼살의 본색이었다.
"여기서 지체하면 안 된다! 강시를 풀어라. 그리고 귀존(鬼尊)!"
"천명…!"
녹포의 천마귀존이 부복하였다. 강시라고 하였다. 그들의 강시라 함은 요음강시가 아닌가.
"적을 혼란하게 하는 차도살계(借刀殺計)를 써라!"
"어떤 명이신지.......?"
"천마비랑(天魔飛郞)은 어디 있느냐?"
천마비랑, 그는 천마성의 소성주로서 천마귀존의 양자이고, 매화반점의 궁철상(宮哲象)을 이르는 말이었다. 수라군의 진중에서 흑색 의복을 걸친 젊은 청년이 날아와 수라천의 앞에 부복을 하였다.
"천명!"
"......!"
수라천은 무엇인가 궁철상과 은밀한 전음을 주고받았다.
"복명(復命)!"
전음으로 수라천의 지시를 받은 궁철상은 부리나케 수라군의 후미로 날아갔다. 사라지는 궁철상을 바라보는 수라천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오늘밤, 만월이 지기 전에 개봉에 닿아야 하거늘........"
혈전장 들판 중앙을 꿰뚫고 있는 사자군과 수호군은 수적으로도 역부족인 상태에서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크…악! 억!
그러나 그칠 줄 모르고 휘두르는 병기에서 일어나는 강기의 충돌 음과 비명소리, 선혈은 난무하고 있었다. 사자군과 수호군, 그리고 수라군도 조금씩 지처가고 있었다. 그런데 사자군과 수호군의 선두가 엄청난 괴력에 의해 무너지고 있었다.
끄 으으~윽! 으아악!
돌연 두 눈에서 혈광을 뿜어내는 여인들이 나타나 핏빛 혈무를 뿜어내고 있었다. 얼음장 같은 차가운 혈색으로 나타나 여인들은 붉은 나삼을 걸치고 있어 요기스러웠다. 허벅지가 완연히 들어나도록 짧은 나삼자락을 펄럭이는 여인들의 혈장에 수호군과 수호군은 잠시 갈팡질팡하였다.
.
그러나 다시 정무맹의 검과 도, 그리고 창이 여인들의 모습으로 나타난 요괴들을 도살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변괴가 일어났다. 요괴들은 정무맹의 검강과 도강에 쓸어졌다가도 다시 일어나 사악하기 그지없고 독랄한 형공을 펼치는 것이 아닌가.
"활…! 활강시(活糠豉)다!"
수호군의 눈빛이 공포로 물들며 누군가 외마디를 질렀다. 수라천의 활강시(活 屍)란 요음강시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중과부족을 느끼는 정무맹으로서는 더 할 나위없는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으~ 아악! 케액! 으 윽!
점점 정무맹의 수호군과 사자단은 무너지며 점차 물러 설수 밖에 없었다. 갈대밭 주변은 혈천(血川)을 이루며 보봉호로 흘러갔다. 도마살 북천마존의 적혈치마도와 천마귀존의 혈마장의 혈강을 마주하여 남궁종의 천풍검(天風劍)과 능서문의 비천류검(飛天流劍)이 맞서 치열한 격투가 벌어졌다.
능서문이 요괴들까지 가세한 천마귀존의 혈마장을 맞고 비틀거렸다. 이때 황선옥이 쇄비장(鎖飛掌)으로 능서문을 가로막고 천마귀존을 주살하려 맹렬하게 쌍장을 휘둘렀다.
"하하 핫! 그런 애송이 무공으로 수라천을 막으려 했더냐?"
도마살이 일갈하며 황선옥에게 도강을 펼쳤다.
“어딜…!”
순간 수라군의 졸개를 장력으로 쓰러트린 진이화가 휘두르며 도마살에게 나한장을 퍼부었다. 그들의 좌측에서는 도천패혼과 범호진성의 묵도에서 맹룡한 도형을 일으켜 수라백마군을 폭사하여 주살하고 있었다.
한편에서는 오두마에 맞서서 불구의 삼흑호(三黑虎)가 악전고투하고 있었다. 우막의 추혼도, 낙일조의 자혼쇄검, 곽용수의 연환탈명검이 연환진을 펼치며 오두마의 마공에 마주쳐 갔다.
커…윽!
우막이 가슴을 붙잡고 오장을 물러섰다. 검마의 마살강검의 강기에 검상을 입은 그의 어깨에서 피가 솟구치고 있었다.
"악마의 잔당들…!"
일갈과 함께 십천간룡의 병룡(丙龍), 무룡(戊龍), 경룡(庚龍)이 천간태원검결(天干太原劍訣)의 검강을 일으키며 합세하였다. 순간 검강이 하늘을 뒤덮고 오두마의 머리 위로 검날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헉~!"
“헐.......”
풍마와 한마가 위맹한 강기에 놀라 오장을 물러났다. 그들이 놀랄 만도 하였다. 십천감룡의 천간태원공은 설 무영이 태천혼원승공(太天魂原承功)을 천간의 이치에 맞추어 창안한 무공이었다. 수라군과 정무맹은 밀고 밀리며 혼전을 거듭하였다.
그때였다.
두 두둥둥!
대고(大고)를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천지를 진동하는 군마의 함성이 일어났다. 보봉산과 수라군의 정면에서 수많은 무리들이 들이 닥치고 있었다. 정면의 그들은 흑백쌍사(黑白雙蛇)가 이끄는 추혼비파채의 백팔비파대(百八琵琶隊)와 측면은 야투일왕(夜偸一王)이 이끄는 공령하문의 공령하대(空靈蝦隊)였다.
사기가 오른 정무맹의 수호단과 사자단은 일기 당천하여 수라군을 협살하기 시작했다. 수라군의 후미를 척살하고 있는 설 무영과 유끼꼬는 피로 얼룩진 모습으로 고군분투를 하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은 마치 피에 굶주린 야수와도 같이 종횡무진으로 수라군 후미의 좌우를 휘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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