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설 무영의 품안에 갇혀 버둥거리던 소류진은 차츰 짜릿한 전율에 젖어들었다. 대범하게도 설 무영의 손길이 그녀의 얄팍한 나삼의 속으로 스며들어 젖가슴을 움켜쥔 것이었다.
"영랑…! 누가 보면 어쩌려고.......!"
야릇한 감흥에 젖어들면서도 소류진은 설 무영의 가슴을 슬며시 밀어내었다. 그때 한 여인이 검은 무복을 걸치고 부리나케 다가왔다. 그녀는 십천간룡 중 정룡(丁龍) 여은정(茹恩丁)이었다. 유끼꼬를 연모하다 자결한 길정학(吉丁鶴)을 대신하여 사자단에서 선발한 여 검객이었다.
사자단 여은정이 설 무영에게 다가와 좌궤(左跪)를 하고는 급히 말했다.
"도존! 웬 여인이 성문 밑에 다가와 소란을 피우고 있습니다."
"왠 여인이더냐?"
"모르겠습니다. 금발의 나이어린 색목여인이 황도를 치켜든 팔 척 장한과 같이 나타나 도존을 뵙자고......."
소류진의 눈치를 살핀 여은정이 말끝을 흐렸다. 설 무영도 흠칫 놀라며 소류진을 바라보았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는 양미간을 찡그린 채 묘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하얗게 질린 설 무영이 난색 하였다.
(이 크! 떠그랄! 이걸 어쩌지........!)
여은정의 말에 설 무영의 뇌리에는 유라혼빙천의 하루미(賀漏美)와 태황적도(太皇赤刀) 도인광(刀隣光)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가 소식이 없는 그를 찾아 온 것이 틀림없는 일이었다. 그녀의 막무가내의 어리광은 소란을 일으킬 것이 뻔하였다.
설 무영은 안절부절못하며 서성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유끼꼬로 인하여 마음 편치 않은 소류진의 마음을 위로하던 차에 설상가상(雪上加霜)의 엎친 데 덮치는 격이었다. 어차피 닥친 일을 외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서성거리던 멈추어 선 설 무영이 소류진을 바라보며 억지웃음을 흘렸다.
"진후(珍后)가 나가 보시려오?"
"......!?"
소류진의 의사를 물어 봤으면서도 설 무영은 대답도 듣지 않은 채 자리를 피해 전각 사이를 돌아 사라졌다. 멀거니 그의 뒷모습을 보며 그가 말한 의도를 떠 올리던 소류진은 여은정을 앞세워 성문으로 향했다.
무영헌(霧影軒).
설 무영이 기거하는 전각이다.
불편한 자리를 피해 왔건만, 그의 마음은 여전히 좌불안석(坐不安席)이다. 하루미가 들이닥치면 한때의 소란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다. 그는 앉지도 못하고 방안을 우왕좌왕하였다.
푸르륵!
그때 열려진 창문으로 하얀 전서구 한마리가 날아들었다. 그는 전서구의 발목에서 서찰을 펴 들었다.
무영도존(無影桃尊) 전배(前拜).
일말의 소식을 전합니다. 귀주성(貴州省)에서 두 개골이 파괴된 채 동안(童顔)의 소년만이 살해되는 전대미문의 살인사건은 증가되어 그 수가 늘어나 확대되고, 원흉의 흔적은 장사(長沙)에 머물러 있어 만약 이대로라면 원흉은 장강과 황하를 거슬러 삼문협(三門峽)을 통해 하남(河南)으로 향하는 듯합니다. 혹시 원흉이 수라천과 관련이 있지 않나하는 우려에서 전서구를 보냅니다.
전서는 공령하문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설 무영은 또 하나의 서찰을 탁자위에서 펼쳐 들었다. 그것은 황실로부터 보내온 초청장이었다.
도화성주 전(前).
초청설성주(招請渫城主). 송왕조건국(宋王朝建國). 전야만월축하연(前夜滿月祝賀宴).
설 성주를 송 왕조 건국의 전야 만월축하연에 초청한다는 조광윤(趙匡胤)의 초청이었다.
"......!?"
설 무영은 두 가지 서찰을 놓고 한 가지 의구심이 일어났다. 지난날의 공령하문에서 절취한 수라천의 전서구에 적힌 통문은 두 번째 그믐이 지난 후 수라천이 재림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수라천의 라마흑사천(喇麻黑邪天) 본거지로 판명되는 귀주에서 사악한 사건이 일어나고, 그 파문이 동북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수라천의 손길이 하남으로 향하고 있다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하남의 개봉에서는 돌아오는 만월이 지나면 새로운 송왕조가 탄생된다. 그렇다면 수라천은 이미 요음강시를 태동하였고, 공령하문에서 절취한 수라천의 전서구는 암계로 인한 허수(虛手)란 말인가? 새로운 왕조와 수라천의 동북향은 묘한 여운을 남겼다.
"오라버니!"
이때 날카로운 여인의 음성이 방안에 울려 퍼졌다. 서찰들의 내용에 몰두해 있던 설 무영이 입구를 향해 돌아보고는 흠칫 놀랐다. 그녀도 그와 몸을 섞어 방사를 했던 여인임에 분명했다. 아직도 동안의 모습이 남아있는 하루미가 두 봉목을 하얗게 흘기며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는 몸에 착 달라붙는 피혁(皮革)경장을 걸치고, 금발을 늘어트린 채 파르스름한 눈망울로 그를 독살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솜털이 가시지 않은 동그스름하고 귀여운 봉옥에 비해 몸에 착 달라붙는 경장으로 날렵하고 늘씬한 굴곡은 교태가 넘쳐흘렀다.
하루미의 뒤에는 소류진과 유끼꼬, 그리고 유라혈사대(琉羅血死隊)의 수장 도인광이 팔척 장신을 우뚝 버티고 서 있었다. 그들을 바라보는 설 무영은 뜨거운 물을 뒤집어 쓴 것 같은 착각에 들었다. 문득 도인광이 설 무영 앞에 두 무릎을 꿇었다.
"천주(天主)!"
설 무영은 멋쩍은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고는 말하였다.
"일어나시오! 그런데 웬일로…!?"
"소후(小后)께서 하도 성화를 하여서......."
도인광이 일어서며 설 무영의 눈치를 살폈다. 소후라면 하루미를 뜻함이었다. 잔뜩 노려보던 하루미가 왈칵! 설 무영의 품안에 안기며 울음을 터트렸다.
"엉엉…! 으흐흑! 소식도 없고....... 미아는 보고 싶어 혼났단 말이야. 오라버닌 안 보고 싶었어........?"
"..........?"
그녀는 안하무인격으로 울음을 터트리며 앙탈을 부렸다. 난처한 설 무영은 입을 열지 못하였지만, 그 광경을 보고 있는 소류진과 유끼꼬는 어안이 벙벙하여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들은 설 무영을 통하여 대막의 유라혼빙천에서 극음지기의 무공비급을 취득한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광경을 목격해야하는 사연이 숨어 있으리라고는 엄두도 하지 못한 것이었다.
설 무영의 가슴을 두 손으로 두드리며 응석 같은 투정을 하던 하루미가 손바닥으로 눈물을 닦으며 방안의 사람들을 두루 살폈다. 하루미의 시선이 소류진과 유끼꼬를 향했다. 그리고는 그녀들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말했다.
"저 언니들은 뭐야?"
"......!"
설 무영인들 그녀의 물음에 답변이 궁하니 할 말이 없었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설 무영과 하루미를 번갈아 보았다. 하루미가 토라진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 내밀며 종알거렸다.
"오라버니! 그새 바람만 피고 다녔구나!"
(애구! 골칫덩이가 왔구나.……!")
당황스런 설 무영은 혼잣말을 읊조리며 난색을 지었다. 겸연쩍은 설 무영은 두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쓸어 올리며 사람들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는 소류진을 향해 도움을 청하는 눈빛을 보내며 빙긋이 웃음을 흘렸다.
"진후…!"
"........!"
허나 소류진은 비소를 머금고 재미있다는 듯 방관할 태도였다. 다시 설 무영이 유끼꼬를 향해 눈길을 보냈다. 도움을 청하는 무언의 표정이었다. 유끼꼬도 미소를 머금고 있다가 한 발짝 나서며 말했다.
"제가 안내하고 답변해 드릴 테니 소저는 우선 식사하러 가세요."
"그래도 오라버니가 어찌 된 건지 나중에 말해 줘야 돼......."
하루미와 도인광은 마지못해 유끼꼬를 쫓아 나갔다. 설 무영은 유끼꼬가 소란을 피울 하루미를 데리고 나가기에 다행으로 생각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앗…!"
돌연 설 무영이 몸을 비틀었다. 홀연히 서있던 소류진이 설 무영의 옆구리를 꼬집어 배틀었던 것이다. 그녀는 엷은 미소를 품고는 조그만 입술을 움직여 종알거렸다.
"영랑은…! 천하에 바람둥이........"
소류진은 성산 비무대회에서 설 무영이 미려궁의 삼랑 여인들을 발가벗겼던 사실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세 여인을 혼간(混奸)한 것은 핍박을 받은 그녀 자신을 대신하여 보복한 것인지라 이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 자신 외에도 전도련과 동영 여인 유끼꼬뿐만 아니라, 변황의 어린 여인 하루미까지 처로 거느리게 된 그가 밉살스럽고 황당하였다. 소류진은 설 무영을 향해 하얗게 눈을 흘기고 방을 빠져 나갔다.
"휴우.....!"
모두가 빠져나간 방에 홀로 남은 설 무영은 길게 숨을 내뿜었다.
(혈투를 벌이는 것보다 여인들이 더 두렵네........)
설 무영은 빙긋이 미소를 띠우고는 이내 표정을 고쳐 정색을 하였다. 그는 탁자로 다가가 자단목(紫檀木)의 목의(木椅)에 앉았다. 그는 뇌리를 스치던 서찰 속에 스며있는 의미들을 생각하며 정리하였다. 만약 수라천이 새로운 황실에 대하여 어떤 음모를 꾸민다면 중원은 걷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빠져들 것이다.
무림인의 정도나 황실에 대한 충성심이라기보다는 황실이 더욱 혼란에 빠진다면 가진 것 없고 헐벗은 세인들은 참담한 지경에 이를 것이다. 힘없는 세인들을 위해라도 정의롭고 힘 있는 황실을 보호하여야 하는 것이었다.
지필묵을 준비한 그는 여러 통의 서찰을 쓰기 시작하였다. 얼마 후 설 무영이 거주하는 무영헌의 창문으로 여러 마리의 전서구가 드넓은 창공을 향하여 날개를 펴고 날아올랐다.
홍풍호(紅楓湖).
귀주성(貴州省) 청진현(淸鎭縣)에 있는 호수로서 일백여 개의 섬이 있을 만큼 광대하기에 북호(北湖), 남호(南湖), 중호(中湖), 후호(后湖)로 나누어 있는 것이 홍풍호이다. 홍풍호 북호에는 거산(巨山) 범정산(梵淨山)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북호 주변과 범정산으로 이르는 사이에는 이름 모를 악취가 진동하였다.
가까이 다가가보면 몇 구의 시신에서 흘러나오는 악취임을 알 수가 있다. 시신들은 하나같이 두 개골이 깨어진 사이로 골수가 허옇게 흘러나오고 있다. 어둠이 깃들기 시작하는 시각, 시리도록 냉랭한 달빛이 만월을 앞둔 탓인지 산야를 고스란히 들어 내놓고 있다.
스르륵!
하나의 검은 인영이 나타나 북호의 잔잔한 물결에 드러났다. 그런데 검은 인영을 자세히 보면 하나가 아니고 그림자처럼 뒤를 따르는 또 하나의 인영이 있다. 그들은 지면을 흐르는 바람처럼 소리 없이 시신들 옆으로 다가가 유심히 살피는 것이었다.
달빛에 들어난 그들의 모습은 설 무영과 유끼꼬였다. 설 무영은 소년들의 피살은 요음강시가 소년들의 동정의 정혼을 섭취하여 사악한 혼강을 키우는 것이라고 추측을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모종의 조취를 취해놓고 그들의 행각을 살피러 온 것이다.
요음강시가 존재하는 본거지라고 추측한 곳은 범정산의 귀곡장(鬼哭莊)이라 불리는 한 장원이었다. 그곳은 범정산 절곡인 아추곡(鵝楸谷)의 수림 속에 있는 고대장원으로서 귀신의 곡(哭)소리가 난다고 하여 세인들의 발자취가 끊긴 외진 곳에 있었다. 또한 혼마살(魂魔乷) 고재령(高宰零)이 후당(後唐)을 세운 주연상(周煙常)을 돕고 대가로 받았다는 고성으로 추측되는 곳이기도 하였다.
설 무영과 유끼꼬는 처참한 시신들을 살피며 몸서리를 치고는 귀곡장으로 이르는 아추곡으로 향해 신형을 날렸다. 절곡 안으로 들어갈수록 빽빽한 수림(樹林)속은 동굴과도 같았다. 얼마를 나아갔을 때인가 수림 앞에 현판 문이 우뚝 솟아 있었다. 그런데 현판에는 귀곡장이 아닌 수라지(修羅之) 라마흑사천(喇麻黑邪天)이라는 글씨가 깊게 패어 있었다.
수라천의 본거지가 들어난 것이다. 현판이 걸린 문 앞에는 피부가 검은 괴인이 거대한 체구를 버티고 서 있었다. 죽은 듯이 부동의 자세로 서있는 모습의 괴인은 검은 석상과도 같았다.
"........?"
꼼짝도 않고 서 있던 괴인이 힐긋 고개를 돌렸다. 검은 운무가 바람처럼 스쳐 지났기 때문이었다. 검은 운무는 바람에 날리는 고엽(古葉)처럼 장원의 누각 안으로 사라졌다. 설 무영과 유끼꼬는 한 누각의 추녀 밑에 달라붙어 주변을 살폈다.
휘 이이잉!
때 아닌 냉랭한 바람이 불어 낙엽과 먼지를 날리게 하여 장원 안을 음사하게 만들었다. 의외로 경계가 소홀한 장원 안은 폐허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삐이익! 덜컹!
불어 온 바람에 어느 전각의 문이 열렸다가 닫히기를 반복하고 있다. 의외로 인척이 없는 것을 느끼고는 설 무영은 추녀 밑으로 소리 없이 내려섰다. 뒤따라 유끼꼬도 그의 옆으로 사뿐히 내려섰다. 그때였다.
끄~아아악! 깨액!
돌연 기괴한 소리와 함께 전각 모퉁이에서 괴상한 물체가 불쑥 튀어 나왔다.
"앗!"
놀란 유끼꼬가 기겁을 하여 설 무영에게 매달렸다. 괴물은 눈에서 붉은빛을 발하며 온몸에 금빛의 긴 털이 수북하게 덮인 금빛 털 원숭이인 금모미후(金毛獼猴)였다.
끄~! 꽤 꽥!
또 한 마리의 금모미후가 모퉁이에서 튀어나왔다. 그들은 알 수 없는 고함을 치며 설 무영과 유끼꼬를 덮치려고 달려 나왔다. 금모미후의 동작은 사람의 무공을 익힌 듯 번개같이 빠르고 강력한 살기를 띠고 있었다. 허지만 놀람에 앙갚음이라도 하듯이 유끼꼬의 설련검(雪蓮劍)에서 무수한 조각의 빙각(氷刻)이 검강을 일으키며 금모미후를 향해 폭사해 나갔다.
스~ 스슥!
그러나 금모미후는 검강에 단련된 듯 묘한 자세를 이루며 뒹굴기도 하고 튀어 오르기도 하며 검강을 피했다. 웬만한 무인이상의 신법을 펼치는 것이었다. 괴물들을 무시하였다가 약이 오른 유끼꼬가 허공으로 부상(浮上)하며 쏜살같이 괴물들에게 다가갔다.
꽤 꽥! 꽥!
금모미후는 검강에 대응하여 이리저리 날뛰더니 결국 핏덩이가 되어 나뒹굴고 말았다.
"감히 미후나찰(獼猴羅刹)의 애후(愛猴)를 죽이다니........"
언제 다가 온지도 모르는 흉물스러운 괴인이 살기를 품고 버티고 서 있었다. 허리가 굽은 괴인은 작은 키에 장발을 늘어트리고 있었다. 괴인은 남만(南彎)의 삼마나찰이라는 괴인들 중 하나로서 금모미후를 자유자재로 부리는 괴인이었다.
"남만의 괴인들까지......."
설 무영의 검미가 치켜 올라갔다.
"탄(彈)!"
어느새 뽑아든 설 무영의 용상검에서 그가 창안한 태영비풍검(太影飛風劍)의 월륜탄(月輪彈), 초식이 전개되었다. 은하수 같은 원륜에서 음과 양의 검형이 빛살처럼 쏟아져 나가 괴인의 전신을 감쌌다.
"헛! 뭐…뭐야?"
전신을 검날에 휩싸인 괴인은 혼비백산하여 검막을 헤쳐 나오려고 발버둥쳤다. 그러나 이미 그의 몸은 헤어날 수 없는 검강 속에서 피투성이가 되어있었다.
"으…학!"
괴인의 시신은 갈래갈래 찢긴 채 바닥에 피를 흘리며 흩어져 있었다. 실로 전대 무비한 검법이었다. 그가 창안하고도 처음 실용하여 본 검법이기에 그 자신도 참혹성에 놀랐다. 장원을 지키는 괴인들은 보이지 않을 뿐이며 곳곳에 은둔하고 있었던 것이다.
설 무영과 유끼꼬는 다시 몸을 날려 추녀 끝에 매달렸다. 그들은 처마 끝에서 처마 끝으로 전각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전각을 돌아 본 그들은 장원은 다섯 개의 전각으로 되어 있었고, 전각마다에는 각각 적귀장, 황귀장, 백귀장, 청귀장과 흑곡장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허나 어느 곳에도 이상한 징후는 발견할 수 없었다. 수라천이 중원에 마각을 들어내려는 흔적은 어느 곳에도 없었다. 그들은 마지막으로 흑곡장 안으로 들어갔다.
흑곡장은 다른 전각에 비해 검은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바닥과 수정(水晶), 영랑(盈琅)등으로 어우러진 자단목의 가구들이 호화로움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흑곡장 안에도 고요하기만 할뿐 그들의 기척을 발견할 수 없었다.
"아 으.......!"
어디선가 희미한 신음성이 들렸다. 그들은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자단목으로 된 가구 뒤편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다가간 설 무영이 가구를 잡아당겼다.
드르륵!
가구가 우측으로 밀려난 곳에는 시커먼 입구가 들어났다. 입구로 들어간 설 무영은 다시 가구를 잡아당겨 막았다. 다른 방으로 통하는 비밀 통로였던 것이다. 허지만 막상 살펴보았으나 그곳에도 신음성을 발한 원인은 발견할 수 없었다. 단지 삼면의 벽면은 검은 휘장이 늘어져 있는 빈 공간이었다.
그들이 검은 휘장들을 잡아 당겨 뜯어내니 그곳에는 각각 또 다른 입구가 보였다. 우선 좌측 통로로 들어간 곳에는 커다란 경대가 한쪽 벽면에 서 있었다. 설 무영에게 익히 눈에 낯설지 않은 산마신경의 모습이 들어난 것이다. 문득 그의 뇌리에 자허선사의 말이 떠올랐다.
"수라천이 산마혼경을 이탈하였을 때 사라마혈공(邪羅魔血功)의 호신강기를 뚫을 수 있는 극강 극음의 양강지기가 담긴 무공으로 그의 심장을 뽑아 멸사선공으로 없애야 한다!"
그들의 본거지로 추측되는 이곳에는 수라천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수라천은 산마혼경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탈한 것으로 알 수가 있었다.
"흠…! 이것을 파괴하면 수라천이 고통스러울 것이다."
산마혼경이 쉽사리 파괴되지 않음을 알고 있는 설 무영은 강기를 십성 끌어올려 산마혼경을 후려쳤다. 강기에 부딪친 산마혼경에서 붉은 안개가 피어올랐다.
쩌~저정! 위이잉! 쩔그렁! 와르르......!
산마혼경은 여지없이 깨어져 내리더니 풀썩! 적무의 먼지를 일으키며 흔적마저도 없어졌다. 붉은 먼지를 피해 방을 나온 그들은 통로를 뒤돌아서 빠져 나왔다. 맞은편 동로로 들어가니 똑같은 산마혼경이 있는 방이었다. 수라천은 백마궁을 스스로 파괴하면서 그곳에 있던 산마혼경을 이곳에 가져다 놓은 것이다.
스 스슥!
설 무영은 나머지 산마혼경마저 용상검으로 힘껏 내리쳤다. 또 하나의 산마혼경도 풍비박산
이 되어 흩어져 내리더니 사라져 없어지고 사마혼경이 있던 방은 텅 빈 공간이 되어 음사한 기운이 돌았다. 그들은 방을 나와 다른 통로가 보이는 나머지 입구로 다가섰다.
"으으.......!"
종전의 신음성보다 더 큰 소리가 들렸다. 신음성은 그곳 입구 안에서 들려 나오는 것이었다. 그들은 급히 걸음을 옮겨 통로 끝으로 사라졌다.
백장협(百丈峽).
호남성(湖南省) 서북부에서 중부에 위치하는 장사(長沙)로 가려면 꼭 지나야할 협곡이 있다. 백장이 넘는 석벽이 하늘을 찌르고 있어 고개 들어 보기가 두려운 곳. 이곳이 백장협이다. 백장협 안에는 무애석궁(無崖石宮)이라는 고대의 폐궁이 있다.
그런데 인척이 드물던 이곳에 많은 인영들이 움직이고 있다. 그들은 어둠속을 침묵으로 일관하며 괴이한 눈빛으로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석궁을 둘러싸고 있는 봉우리가 날카로운 기산들이 어둠과 자욱한 안개로 가려져 보이지 않는 암흑의 바다에 석궁이 떠 있는 듯하였다.
석궁들이 포진한 석전들 중앙에 위치한 거대한 석전 안에는 대리석 석단위에 태사의가 놓여 있다. 태사의 위에는 한사람, 일신에는 금빛 곤포를 걸쳤다. 머리에는 번쩍이는 금룡관(錦龍冠)을 쓰고, 태사의에 도도히 앉아있는 위인의 좌우에는 두 명의 여인이 좌립하고 있었다.
석단위에 앉은 그가 두른 금의 곤포는 태사의를 가릴듯하여 그 몸은 도저히 상하를 구분할 수 없었다. 그의 용모는 유학자를 닮은 듯 희지만, 눈빛에서는 사악한 혈광이 뿜어져 나왔다.
석단에 앉은 그는 지금 단 아래에 있는 열 개의 목관을 바라보고 있었다. 열 개의 목관에는 한 결 같이 여인들이 죽은 듯이 누워있다.
"으…아~악!"
목관을 내려다보던 위인이 갑자기 가슴을 쥐어뜯으며 몸부림쳤다.
"어떤 자가 또, 사…! 산마혼경을........!?"
우당탕!
태사의가 쓰러지고 위인은 대리석 바닥을 뒹굴었다. 그가 뒹굴 때마다 혈무가 풀썩! 풀썩! 피어올랐다. 그러나 좌립하고 있는 두 여인은 쥐죽은 듯 바라보고만 있었다. 산마혼경을 외치며 뒹구는 위인은 오직 한사람일 수밖에 없었다. 아수라를 숭배하는 자들의 하늘, 수라천이었다.
산마혼경의 파괴로 수라천 심마의 내공을 이루고 있던 그의 혼강에 충격을 입은 것이다. 수라천의 고통스런 몸부림은 심마가 뒤틀리는 발작이었다.
범정산의 라마흑사천의 비밀통로.
".......!?"
비밀 통로를 나온 설 무영과 유끼꼬는 의외의 장소에 다다른 것에 의아하였다. 그곳은 범정산의 다른 계곡의 분지였다. 초지로 되어있는 넓은 분지는 삼면이 암벽으로 막혀 있었고 삼면의 암벽에는 각기 다른 암동이 있어 암동 앞은 철창이 막혀 있었다. 신음성은 철창 안에서 들려 온 것이다.
그들은 가까운 철창 앞으로 다가갔다. 어두운 암동의 벽면에 두 구의 시신이 사슬에 묶인 채 축 늘어져 매달려 있었다. 설 무영이 철창을 부수고 들어갔다. 시신들은 상의가 찢긴 채 젖가슴이 들어나고, 하의는 벗겨져 나신이 그대로 들어나 있는 여인들이었다.------------------------------------------------------
"영랑…! 누가 보면 어쩌려고.......!"
야릇한 감흥에 젖어들면서도 소류진은 설 무영의 가슴을 슬며시 밀어내었다. 그때 한 여인이 검은 무복을 걸치고 부리나케 다가왔다. 그녀는 십천간룡 중 정룡(丁龍) 여은정(茹恩丁)이었다. 유끼꼬를 연모하다 자결한 길정학(吉丁鶴)을 대신하여 사자단에서 선발한 여 검객이었다.
사자단 여은정이 설 무영에게 다가와 좌궤(左跪)를 하고는 급히 말했다.
"도존! 웬 여인이 성문 밑에 다가와 소란을 피우고 있습니다."
"왠 여인이더냐?"
"모르겠습니다. 금발의 나이어린 색목여인이 황도를 치켜든 팔 척 장한과 같이 나타나 도존을 뵙자고......."
소류진의 눈치를 살핀 여은정이 말끝을 흐렸다. 설 무영도 흠칫 놀라며 소류진을 바라보았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는 양미간을 찡그린 채 묘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하얗게 질린 설 무영이 난색 하였다.
(이 크! 떠그랄! 이걸 어쩌지........!)
여은정의 말에 설 무영의 뇌리에는 유라혼빙천의 하루미(賀漏美)와 태황적도(太皇赤刀) 도인광(刀隣光)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가 소식이 없는 그를 찾아 온 것이 틀림없는 일이었다. 그녀의 막무가내의 어리광은 소란을 일으킬 것이 뻔하였다.
설 무영은 안절부절못하며 서성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유끼꼬로 인하여 마음 편치 않은 소류진의 마음을 위로하던 차에 설상가상(雪上加霜)의 엎친 데 덮치는 격이었다. 어차피 닥친 일을 외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서성거리던 멈추어 선 설 무영이 소류진을 바라보며 억지웃음을 흘렸다.
"진후(珍后)가 나가 보시려오?"
"......!?"
소류진의 의사를 물어 봤으면서도 설 무영은 대답도 듣지 않은 채 자리를 피해 전각 사이를 돌아 사라졌다. 멀거니 그의 뒷모습을 보며 그가 말한 의도를 떠 올리던 소류진은 여은정을 앞세워 성문으로 향했다.
무영헌(霧影軒).
설 무영이 기거하는 전각이다.
불편한 자리를 피해 왔건만, 그의 마음은 여전히 좌불안석(坐不安席)이다. 하루미가 들이닥치면 한때의 소란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다. 그는 앉지도 못하고 방안을 우왕좌왕하였다.
푸르륵!
그때 열려진 창문으로 하얀 전서구 한마리가 날아들었다. 그는 전서구의 발목에서 서찰을 펴 들었다.
무영도존(無影桃尊) 전배(前拜).
일말의 소식을 전합니다. 귀주성(貴州省)에서 두 개골이 파괴된 채 동안(童顔)의 소년만이 살해되는 전대미문의 살인사건은 증가되어 그 수가 늘어나 확대되고, 원흉의 흔적은 장사(長沙)에 머물러 있어 만약 이대로라면 원흉은 장강과 황하를 거슬러 삼문협(三門峽)을 통해 하남(河南)으로 향하는 듯합니다. 혹시 원흉이 수라천과 관련이 있지 않나하는 우려에서 전서구를 보냅니다.
전서는 공령하문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설 무영은 또 하나의 서찰을 탁자위에서 펼쳐 들었다. 그것은 황실로부터 보내온 초청장이었다.
도화성주 전(前).
초청설성주(招請渫城主). 송왕조건국(宋王朝建國). 전야만월축하연(前夜滿月祝賀宴).
설 성주를 송 왕조 건국의 전야 만월축하연에 초청한다는 조광윤(趙匡胤)의 초청이었다.
"......!?"
설 무영은 두 가지 서찰을 놓고 한 가지 의구심이 일어났다. 지난날의 공령하문에서 절취한 수라천의 전서구에 적힌 통문은 두 번째 그믐이 지난 후 수라천이 재림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수라천의 라마흑사천(喇麻黑邪天) 본거지로 판명되는 귀주에서 사악한 사건이 일어나고, 그 파문이 동북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수라천의 손길이 하남으로 향하고 있다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하남의 개봉에서는 돌아오는 만월이 지나면 새로운 송왕조가 탄생된다. 그렇다면 수라천은 이미 요음강시를 태동하였고, 공령하문에서 절취한 수라천의 전서구는 암계로 인한 허수(虛手)란 말인가? 새로운 왕조와 수라천의 동북향은 묘한 여운을 남겼다.
"오라버니!"
이때 날카로운 여인의 음성이 방안에 울려 퍼졌다. 서찰들의 내용에 몰두해 있던 설 무영이 입구를 향해 돌아보고는 흠칫 놀랐다. 그녀도 그와 몸을 섞어 방사를 했던 여인임에 분명했다. 아직도 동안의 모습이 남아있는 하루미가 두 봉목을 하얗게 흘기며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는 몸에 착 달라붙는 피혁(皮革)경장을 걸치고, 금발을 늘어트린 채 파르스름한 눈망울로 그를 독살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솜털이 가시지 않은 동그스름하고 귀여운 봉옥에 비해 몸에 착 달라붙는 경장으로 날렵하고 늘씬한 굴곡은 교태가 넘쳐흘렀다.
하루미의 뒤에는 소류진과 유끼꼬, 그리고 유라혈사대(琉羅血死隊)의 수장 도인광이 팔척 장신을 우뚝 버티고 서 있었다. 그들을 바라보는 설 무영은 뜨거운 물을 뒤집어 쓴 것 같은 착각에 들었다. 문득 도인광이 설 무영 앞에 두 무릎을 꿇었다.
"천주(天主)!"
설 무영은 멋쩍은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고는 말하였다.
"일어나시오! 그런데 웬일로…!?"
"소후(小后)께서 하도 성화를 하여서......."
도인광이 일어서며 설 무영의 눈치를 살폈다. 소후라면 하루미를 뜻함이었다. 잔뜩 노려보던 하루미가 왈칵! 설 무영의 품안에 안기며 울음을 터트렸다.
"엉엉…! 으흐흑! 소식도 없고....... 미아는 보고 싶어 혼났단 말이야. 오라버닌 안 보고 싶었어........?"
"..........?"
그녀는 안하무인격으로 울음을 터트리며 앙탈을 부렸다. 난처한 설 무영은 입을 열지 못하였지만, 그 광경을 보고 있는 소류진과 유끼꼬는 어안이 벙벙하여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들은 설 무영을 통하여 대막의 유라혼빙천에서 극음지기의 무공비급을 취득한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광경을 목격해야하는 사연이 숨어 있으리라고는 엄두도 하지 못한 것이었다.
설 무영의 가슴을 두 손으로 두드리며 응석 같은 투정을 하던 하루미가 손바닥으로 눈물을 닦으며 방안의 사람들을 두루 살폈다. 하루미의 시선이 소류진과 유끼꼬를 향했다. 그리고는 그녀들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말했다.
"저 언니들은 뭐야?"
"......!"
설 무영인들 그녀의 물음에 답변이 궁하니 할 말이 없었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설 무영과 하루미를 번갈아 보았다. 하루미가 토라진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 내밀며 종알거렸다.
"오라버니! 그새 바람만 피고 다녔구나!"
(애구! 골칫덩이가 왔구나.……!")
당황스런 설 무영은 혼잣말을 읊조리며 난색을 지었다. 겸연쩍은 설 무영은 두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쓸어 올리며 사람들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는 소류진을 향해 도움을 청하는 눈빛을 보내며 빙긋이 웃음을 흘렸다.
"진후…!"
"........!"
허나 소류진은 비소를 머금고 재미있다는 듯 방관할 태도였다. 다시 설 무영이 유끼꼬를 향해 눈길을 보냈다. 도움을 청하는 무언의 표정이었다. 유끼꼬도 미소를 머금고 있다가 한 발짝 나서며 말했다.
"제가 안내하고 답변해 드릴 테니 소저는 우선 식사하러 가세요."
"그래도 오라버니가 어찌 된 건지 나중에 말해 줘야 돼......."
하루미와 도인광은 마지못해 유끼꼬를 쫓아 나갔다. 설 무영은 유끼꼬가 소란을 피울 하루미를 데리고 나가기에 다행으로 생각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앗…!"
돌연 설 무영이 몸을 비틀었다. 홀연히 서있던 소류진이 설 무영의 옆구리를 꼬집어 배틀었던 것이다. 그녀는 엷은 미소를 품고는 조그만 입술을 움직여 종알거렸다.
"영랑은…! 천하에 바람둥이........"
소류진은 성산 비무대회에서 설 무영이 미려궁의 삼랑 여인들을 발가벗겼던 사실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세 여인을 혼간(混奸)한 것은 핍박을 받은 그녀 자신을 대신하여 보복한 것인지라 이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 자신 외에도 전도련과 동영 여인 유끼꼬뿐만 아니라, 변황의 어린 여인 하루미까지 처로 거느리게 된 그가 밉살스럽고 황당하였다. 소류진은 설 무영을 향해 하얗게 눈을 흘기고 방을 빠져 나갔다.
"휴우.....!"
모두가 빠져나간 방에 홀로 남은 설 무영은 길게 숨을 내뿜었다.
(혈투를 벌이는 것보다 여인들이 더 두렵네........)
설 무영은 빙긋이 미소를 띠우고는 이내 표정을 고쳐 정색을 하였다. 그는 탁자로 다가가 자단목(紫檀木)의 목의(木椅)에 앉았다. 그는 뇌리를 스치던 서찰 속에 스며있는 의미들을 생각하며 정리하였다. 만약 수라천이 새로운 황실에 대하여 어떤 음모를 꾸민다면 중원은 걷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빠져들 것이다.
무림인의 정도나 황실에 대한 충성심이라기보다는 황실이 더욱 혼란에 빠진다면 가진 것 없고 헐벗은 세인들은 참담한 지경에 이를 것이다. 힘없는 세인들을 위해라도 정의롭고 힘 있는 황실을 보호하여야 하는 것이었다.
지필묵을 준비한 그는 여러 통의 서찰을 쓰기 시작하였다. 얼마 후 설 무영이 거주하는 무영헌의 창문으로 여러 마리의 전서구가 드넓은 창공을 향하여 날개를 펴고 날아올랐다.
홍풍호(紅楓湖).
귀주성(貴州省) 청진현(淸鎭縣)에 있는 호수로서 일백여 개의 섬이 있을 만큼 광대하기에 북호(北湖), 남호(南湖), 중호(中湖), 후호(后湖)로 나누어 있는 것이 홍풍호이다. 홍풍호 북호에는 거산(巨山) 범정산(梵淨山)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북호 주변과 범정산으로 이르는 사이에는 이름 모를 악취가 진동하였다.
가까이 다가가보면 몇 구의 시신에서 흘러나오는 악취임을 알 수가 있다. 시신들은 하나같이 두 개골이 깨어진 사이로 골수가 허옇게 흘러나오고 있다. 어둠이 깃들기 시작하는 시각, 시리도록 냉랭한 달빛이 만월을 앞둔 탓인지 산야를 고스란히 들어 내놓고 있다.
스르륵!
하나의 검은 인영이 나타나 북호의 잔잔한 물결에 드러났다. 그런데 검은 인영을 자세히 보면 하나가 아니고 그림자처럼 뒤를 따르는 또 하나의 인영이 있다. 그들은 지면을 흐르는 바람처럼 소리 없이 시신들 옆으로 다가가 유심히 살피는 것이었다.
달빛에 들어난 그들의 모습은 설 무영과 유끼꼬였다. 설 무영은 소년들의 피살은 요음강시가 소년들의 동정의 정혼을 섭취하여 사악한 혼강을 키우는 것이라고 추측을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모종의 조취를 취해놓고 그들의 행각을 살피러 온 것이다.
요음강시가 존재하는 본거지라고 추측한 곳은 범정산의 귀곡장(鬼哭莊)이라 불리는 한 장원이었다. 그곳은 범정산 절곡인 아추곡(鵝楸谷)의 수림 속에 있는 고대장원으로서 귀신의 곡(哭)소리가 난다고 하여 세인들의 발자취가 끊긴 외진 곳에 있었다. 또한 혼마살(魂魔乷) 고재령(高宰零)이 후당(後唐)을 세운 주연상(周煙常)을 돕고 대가로 받았다는 고성으로 추측되는 곳이기도 하였다.
설 무영과 유끼꼬는 처참한 시신들을 살피며 몸서리를 치고는 귀곡장으로 이르는 아추곡으로 향해 신형을 날렸다. 절곡 안으로 들어갈수록 빽빽한 수림(樹林)속은 동굴과도 같았다. 얼마를 나아갔을 때인가 수림 앞에 현판 문이 우뚝 솟아 있었다. 그런데 현판에는 귀곡장이 아닌 수라지(修羅之) 라마흑사천(喇麻黑邪天)이라는 글씨가 깊게 패어 있었다.
수라천의 본거지가 들어난 것이다. 현판이 걸린 문 앞에는 피부가 검은 괴인이 거대한 체구를 버티고 서 있었다. 죽은 듯이 부동의 자세로 서있는 모습의 괴인은 검은 석상과도 같았다.
"........?"
꼼짝도 않고 서 있던 괴인이 힐긋 고개를 돌렸다. 검은 운무가 바람처럼 스쳐 지났기 때문이었다. 검은 운무는 바람에 날리는 고엽(古葉)처럼 장원의 누각 안으로 사라졌다. 설 무영과 유끼꼬는 한 누각의 추녀 밑에 달라붙어 주변을 살폈다.
휘 이이잉!
때 아닌 냉랭한 바람이 불어 낙엽과 먼지를 날리게 하여 장원 안을 음사하게 만들었다. 의외로 경계가 소홀한 장원 안은 폐허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삐이익! 덜컹!
불어 온 바람에 어느 전각의 문이 열렸다가 닫히기를 반복하고 있다. 의외로 인척이 없는 것을 느끼고는 설 무영은 추녀 밑으로 소리 없이 내려섰다. 뒤따라 유끼꼬도 그의 옆으로 사뿐히 내려섰다. 그때였다.
끄~아아악! 깨액!
돌연 기괴한 소리와 함께 전각 모퉁이에서 괴상한 물체가 불쑥 튀어 나왔다.
"앗!"
놀란 유끼꼬가 기겁을 하여 설 무영에게 매달렸다. 괴물은 눈에서 붉은빛을 발하며 온몸에 금빛의 긴 털이 수북하게 덮인 금빛 털 원숭이인 금모미후(金毛獼猴)였다.
끄~! 꽤 꽥!
또 한 마리의 금모미후가 모퉁이에서 튀어나왔다. 그들은 알 수 없는 고함을 치며 설 무영과 유끼꼬를 덮치려고 달려 나왔다. 금모미후의 동작은 사람의 무공을 익힌 듯 번개같이 빠르고 강력한 살기를 띠고 있었다. 허지만 놀람에 앙갚음이라도 하듯이 유끼꼬의 설련검(雪蓮劍)에서 무수한 조각의 빙각(氷刻)이 검강을 일으키며 금모미후를 향해 폭사해 나갔다.
스~ 스슥!
그러나 금모미후는 검강에 단련된 듯 묘한 자세를 이루며 뒹굴기도 하고 튀어 오르기도 하며 검강을 피했다. 웬만한 무인이상의 신법을 펼치는 것이었다. 괴물들을 무시하였다가 약이 오른 유끼꼬가 허공으로 부상(浮上)하며 쏜살같이 괴물들에게 다가갔다.
꽤 꽥! 꽥!
금모미후는 검강에 대응하여 이리저리 날뛰더니 결국 핏덩이가 되어 나뒹굴고 말았다.
"감히 미후나찰(獼猴羅刹)의 애후(愛猴)를 죽이다니........"
언제 다가 온지도 모르는 흉물스러운 괴인이 살기를 품고 버티고 서 있었다. 허리가 굽은 괴인은 작은 키에 장발을 늘어트리고 있었다. 괴인은 남만(南彎)의 삼마나찰이라는 괴인들 중 하나로서 금모미후를 자유자재로 부리는 괴인이었다.
"남만의 괴인들까지......."
설 무영의 검미가 치켜 올라갔다.
"탄(彈)!"
어느새 뽑아든 설 무영의 용상검에서 그가 창안한 태영비풍검(太影飛風劍)의 월륜탄(月輪彈), 초식이 전개되었다. 은하수 같은 원륜에서 음과 양의 검형이 빛살처럼 쏟아져 나가 괴인의 전신을 감쌌다.
"헛! 뭐…뭐야?"
전신을 검날에 휩싸인 괴인은 혼비백산하여 검막을 헤쳐 나오려고 발버둥쳤다. 그러나 이미 그의 몸은 헤어날 수 없는 검강 속에서 피투성이가 되어있었다.
"으…학!"
괴인의 시신은 갈래갈래 찢긴 채 바닥에 피를 흘리며 흩어져 있었다. 실로 전대 무비한 검법이었다. 그가 창안하고도 처음 실용하여 본 검법이기에 그 자신도 참혹성에 놀랐다. 장원을 지키는 괴인들은 보이지 않을 뿐이며 곳곳에 은둔하고 있었던 것이다.
설 무영과 유끼꼬는 다시 몸을 날려 추녀 끝에 매달렸다. 그들은 처마 끝에서 처마 끝으로 전각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전각을 돌아 본 그들은 장원은 다섯 개의 전각으로 되어 있었고, 전각마다에는 각각 적귀장, 황귀장, 백귀장, 청귀장과 흑곡장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허나 어느 곳에도 이상한 징후는 발견할 수 없었다. 수라천이 중원에 마각을 들어내려는 흔적은 어느 곳에도 없었다. 그들은 마지막으로 흑곡장 안으로 들어갔다.
흑곡장은 다른 전각에 비해 검은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바닥과 수정(水晶), 영랑(盈琅)등으로 어우러진 자단목의 가구들이 호화로움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흑곡장 안에도 고요하기만 할뿐 그들의 기척을 발견할 수 없었다.
"아 으.......!"
어디선가 희미한 신음성이 들렸다. 그들은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자단목으로 된 가구 뒤편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다가간 설 무영이 가구를 잡아당겼다.
드르륵!
가구가 우측으로 밀려난 곳에는 시커먼 입구가 들어났다. 입구로 들어간 설 무영은 다시 가구를 잡아당겨 막았다. 다른 방으로 통하는 비밀 통로였던 것이다. 허지만 막상 살펴보았으나 그곳에도 신음성을 발한 원인은 발견할 수 없었다. 단지 삼면의 벽면은 검은 휘장이 늘어져 있는 빈 공간이었다.
그들이 검은 휘장들을 잡아 당겨 뜯어내니 그곳에는 각각 또 다른 입구가 보였다. 우선 좌측 통로로 들어간 곳에는 커다란 경대가 한쪽 벽면에 서 있었다. 설 무영에게 익히 눈에 낯설지 않은 산마신경의 모습이 들어난 것이다. 문득 그의 뇌리에 자허선사의 말이 떠올랐다.
"수라천이 산마혼경을 이탈하였을 때 사라마혈공(邪羅魔血功)의 호신강기를 뚫을 수 있는 극강 극음의 양강지기가 담긴 무공으로 그의 심장을 뽑아 멸사선공으로 없애야 한다!"
그들의 본거지로 추측되는 이곳에는 수라천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수라천은 산마혼경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탈한 것으로 알 수가 있었다.
"흠…! 이것을 파괴하면 수라천이 고통스러울 것이다."
산마혼경이 쉽사리 파괴되지 않음을 알고 있는 설 무영은 강기를 십성 끌어올려 산마혼경을 후려쳤다. 강기에 부딪친 산마혼경에서 붉은 안개가 피어올랐다.
쩌~저정! 위이잉! 쩔그렁! 와르르......!
산마혼경은 여지없이 깨어져 내리더니 풀썩! 적무의 먼지를 일으키며 흔적마저도 없어졌다. 붉은 먼지를 피해 방을 나온 그들은 통로를 뒤돌아서 빠져 나왔다. 맞은편 동로로 들어가니 똑같은 산마혼경이 있는 방이었다. 수라천은 백마궁을 스스로 파괴하면서 그곳에 있던 산마혼경을 이곳에 가져다 놓은 것이다.
스 스슥!
설 무영은 나머지 산마혼경마저 용상검으로 힘껏 내리쳤다. 또 하나의 산마혼경도 풍비박산
이 되어 흩어져 내리더니 사라져 없어지고 사마혼경이 있던 방은 텅 빈 공간이 되어 음사한 기운이 돌았다. 그들은 방을 나와 다른 통로가 보이는 나머지 입구로 다가섰다.
"으으.......!"
종전의 신음성보다 더 큰 소리가 들렸다. 신음성은 그곳 입구 안에서 들려 나오는 것이었다. 그들은 급히 걸음을 옮겨 통로 끝으로 사라졌다.
백장협(百丈峽).
호남성(湖南省) 서북부에서 중부에 위치하는 장사(長沙)로 가려면 꼭 지나야할 협곡이 있다. 백장이 넘는 석벽이 하늘을 찌르고 있어 고개 들어 보기가 두려운 곳. 이곳이 백장협이다. 백장협 안에는 무애석궁(無崖石宮)이라는 고대의 폐궁이 있다.
그런데 인척이 드물던 이곳에 많은 인영들이 움직이고 있다. 그들은 어둠속을 침묵으로 일관하며 괴이한 눈빛으로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석궁을 둘러싸고 있는 봉우리가 날카로운 기산들이 어둠과 자욱한 안개로 가려져 보이지 않는 암흑의 바다에 석궁이 떠 있는 듯하였다.
석궁들이 포진한 석전들 중앙에 위치한 거대한 석전 안에는 대리석 석단위에 태사의가 놓여 있다. 태사의 위에는 한사람, 일신에는 금빛 곤포를 걸쳤다. 머리에는 번쩍이는 금룡관(錦龍冠)을 쓰고, 태사의에 도도히 앉아있는 위인의 좌우에는 두 명의 여인이 좌립하고 있었다.
석단위에 앉은 그가 두른 금의 곤포는 태사의를 가릴듯하여 그 몸은 도저히 상하를 구분할 수 없었다. 그의 용모는 유학자를 닮은 듯 희지만, 눈빛에서는 사악한 혈광이 뿜어져 나왔다.
석단에 앉은 그는 지금 단 아래에 있는 열 개의 목관을 바라보고 있었다. 열 개의 목관에는 한 결 같이 여인들이 죽은 듯이 누워있다.
"으…아~악!"
목관을 내려다보던 위인이 갑자기 가슴을 쥐어뜯으며 몸부림쳤다.
"어떤 자가 또, 사…! 산마혼경을........!?"
우당탕!
태사의가 쓰러지고 위인은 대리석 바닥을 뒹굴었다. 그가 뒹굴 때마다 혈무가 풀썩! 풀썩! 피어올랐다. 그러나 좌립하고 있는 두 여인은 쥐죽은 듯 바라보고만 있었다. 산마혼경을 외치며 뒹구는 위인은 오직 한사람일 수밖에 없었다. 아수라를 숭배하는 자들의 하늘, 수라천이었다.
산마혼경의 파괴로 수라천 심마의 내공을 이루고 있던 그의 혼강에 충격을 입은 것이다. 수라천의 고통스런 몸부림은 심마가 뒤틀리는 발작이었다.
범정산의 라마흑사천의 비밀통로.
".......!?"
비밀 통로를 나온 설 무영과 유끼꼬는 의외의 장소에 다다른 것에 의아하였다. 그곳은 범정산의 다른 계곡의 분지였다. 초지로 되어있는 넓은 분지는 삼면이 암벽으로 막혀 있었고 삼면의 암벽에는 각기 다른 암동이 있어 암동 앞은 철창이 막혀 있었다. 신음성은 철창 안에서 들려 온 것이다.
그들은 가까운 철창 앞으로 다가갔다. 어두운 암동의 벽면에 두 구의 시신이 사슬에 묶인 채 축 늘어져 매달려 있었다. 설 무영이 철창을 부수고 들어갔다. 시신들은 상의가 찢긴 채 젖가슴이 들어나고, 하의는 벗겨져 나신이 그대로 들어나 있는 여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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