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환진은 발끈했다. 당예인은 동생이라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당한은 달랐다. 세가의 장자로서 받아온 기대를 늘 깨뜨렸던 건 다름 아닌 사촌동생뻘인 당한이었다. 대공자가 되고, 가주공을 익히고 나서야 비슷한 무위를 가질 수 있었지만, 당한이 자기에게 가지는 저 자신감이 기분이 나빴다. 큰 그릇은 오랜 시간이 걸려 만들어진다지만, 당환진 스스로가 큰 그릇이라고 믿고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을 참아내기엔 당환진의 나이가 너무 어렸다.
"아닙니다. 저도 잘 해낼 수 있습니다."
"그래, 환진이도 잘 해낼 수 있겠지. 최학사님은 무공이고 뭐고 없으니까."
"그래도 혹시라는 것이 있으니 제가 하는 게 좋겠습니다. 혈행을 다스리는 침을 다루는 분야는 제가 분명히 더 위니까요. 잘하는 사람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런데요. 유 숙부님. 뒤는 생각을 해 두신 겁니까?"
한쪽 구석에서 생각에 잠겨있던, 서문진이 깊은 생각 끝에 내 뱉은 말인듯, 조심스럽게 말했다. 큰 키에 마른 체형이라 더 길어 보이는 서문진이 작아보일 정도로 구부정한 자세였다. 유관필은 서문진이 말한 뒤라는 것이 무엇인지 가늠이 가질 않았다. 모를 땐 묻는 것이 최고다. 하지만 당예인이 한 발 빨랐다.
"서문 오라버니, 뒤가 뭐에요?"
"유 숙부님은 겪어보질 않아 모르겠다만, 공부하는 사람들의 성향이라면 잘 알고 있다. 뜻을 세우기까지가 오래 걸릴 뿐, 세워진 마음을 주저앉히는 사람을 난 보지 못했다. 숙부님께 관상명정을 부탁했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한 것이다. 죽음을 각오할 정도의 마음을 어떻게 꺾어서 살 이유를 줄 수 있을 지 몰라서."
순간, 유관필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명치에 정권이라도 맞은 듯, 하얗게 질린 얼굴에 입을 크게 벌리고 말라붙은 혀엔 침이 한 방울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꺼이꺼이 울기 시작했다. 그러다 갑자기 시대가 천재를 버렸구나라고 맨 하늘에 종주먹을 쥐기도 하다가, 다시 울기를 반복했다. 선생님이고, 숙부인 유관필의 그 같은 모습을 볼 수 없었던 일행들이 선실을 나와 뱃 머리에 모여 갑자기 변한 유관필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서문 오라버니, 어떻게 된 일이에요"
"나도 잘 모르겠다. 아마 유 숙부님은 그 최학사라는 분이 이미 돌아가셨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다."
"진아. 숙부님을 저렇게 그냥 둘 수는 없다. 저대로 두면 진원이 상할거다. 한아, 네 솜씨나 보자. 그리 자신 있다니 숙부님 앞에서도 그리 해 보란 말이다."
"오라버니는 지금이 그럴 때야. 선생님의 저런 모습은 처음 봐. 부모님이 돌아가신대도 저렇게는 못 울 거 같아."
"확실히 대단한 분이시다. 환진이가 들었다던 그 살아가면 살아진다는 말에서 내가 떠올린 것은 무위의 도였다. 저렇게 솔직할 수 있다니 대단하신 분이다. 강제로 수혈을 취하면 혹시나 지금 상태에서는 충격을 받을 수도 있다. 형아, 네게 수면환이 있지?"
"그렇지 않아도 이미 나오면서 풀어뒀다. 아마 이미 주무실거다."
배가 닿은 곳은 광주와의 경계인 휘녕이라는 작은 마을이었는데, 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오가상단의 사람들이었다. 선실에서 잠든 유관필을 당환진이 업고 배에서 내렸고, 일행을 기다리는 것은 전 한림학사 최항의 부고였다. 유관필의 예상이 맞았다. 상단의 지부에 도착해서 각자 행장을 풀었지만, 다들 제대로 쉴 수는 없었다. 저녁이 다 되어 일어난 유관필은 죽을 상을 하고 있었지만, 비교적 침착하게 최항의 비보를 받아들였다. 주위를 물린 유관필이 아주 천천히 먹을 갈기 시작했다. 구도자의 모습이었다. 우는 것도 무심한 것도 웃는 것도 아닌 얼굴, 모든 힘을 손가락 끝에 주고 있었지만, 벼루와 먹이 닿는 소리가 나지 않는 진중함, 오직 유관필 한 사람만이 그 순간 세상과 유리되어 혼자만이 오롯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먹을 가는 시간은 오래지 않았다. 행랑에서 붉게 나염된 긴 사각모양의 비단을 꺼낸 유관필이 품 속에 손을 넣어 비단보자기에 싼 붓을 꺼냈다.
"최 선배, 그리울 거요. 이 못난 사람의 글씨를 껴안고 영면하겠다니. 농이 지나치십니다."
유관필답지 않은 혼잣말이었다. 유관필의 눈이 매섭게 빛나고 있었다. 먹을 갈 때 힘을 주어 잡던 그 손이 아니었다. 가볍게 잡은 붓으로 유관필이 쓴 것은 열글자였다.
고금제일학사 최공지묘
한순간에 써내려간 힘이 없는 듯한 여인의 필체같은 유관필의 서체는 그저 아득할만큼 아름다웠다. 유관필이 비단천이 마르길 기다리지 못하고 허물어졌다. 가장 빠르게 다가선 사람은 역시 발빠른 당예인이었다. 유관필은 웃고 있었다.
다시 쓰러진 유관필을 자리에 뉘이고, 일행은 늦은 저녁식사를 시작했다. 서문진은 밥도 먹지 못한 채 그저 유관필이 쓴 글씨를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서문 오라버니. 역시 굉장했지요?"
"난 말이다. 저 사람을 평생 따르겠다. 붓대신 빗자루를 잡으라 해도 그렇게 할 것이다."
"오라버니. 그럼 앞으로의 일정이 어떻게 될까요?"
"바뀔 것이 있겠느냐? 관상명정을 표국을 통해 보내고, 우리는 천천히 경사를 향해 나아가면 될테니 조금은 더 여유가 있겠지만, 고인에게 참배는 해야 하니 우리가 가야 할 길은 같을 것이다. 난 그 최 학사라는 분을 보지 못한 것이 아쉽구나. 고금제일학사라니. 우리로 말하면 고금제일의 무인이나 마찬가지가 아니냐."
"예인아, 그런데, 넌 숙부님의 저런 모습을 보고 숙부님을 따르겠다 결심한 거냐?"
"아니요. 저도 저런 모습은 처음 보는 걸요. 하아, 그런데 선생님은 어떻게 최학사님이 돌아가신 것을 알았을까요? 어떻게 그렇게 슬퍼하시다가 바로 정신을 차리시고 저런 글씨를 쓰실 수 있으셨을까요?"
압도당한 다섯 명의 일행은 식사를 대충 마치고 각자에게 배정된 숙소에 들어갔다. 당환진이 남아 잠든 유관필을 지켰는데, 유관필이 일어난 것은 만 하루가 더 지나서여서, 그 사이 서문진과 당한이 교대로 잠든 유관필을 바라보며 유관필의 공간에서 각기 서너 시진에서 여섯 시진까지 시간을 보냈다.
유관필이 일어나 처음 본 얼굴은 자신의 글씨를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는 서문진의 옆얼굴이었다. 유관필이 일어나서 침상에서 몸을 일으킬 때까지도 이 키가 큰 청년은 자신이 쓴 글씨에 빠져 주위를 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유관필은 최항의 글을 처음 봤을 때의 자신을 서문진에게서 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세상은 이렇게 이어진다는 것을. 미숙한 자가 원숙해지고, 노련한 자가 지쳐서 쓰러지고, 또 다른 누군가가 그의 뜻을 이어가게 된다는 간단한 이치를 깨달았던 것이다. 최항의 뜻을 이어받은 것은 자신이다. 자신의 뜻을 이어갈 누군가는 언젠가 또 나타날 것이다.
걱정을 덜자 배가 고팠다. 서문진의 등을 툭하고 친 유관필이 자신의 약간 나온 배를 문지르며 말했다.
"배가 고프지는 않나?"
"선생님. 일어나셨습니까?"
서문진의 목소리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당예인이 제일 먼저 뛰어와 유관필에게 매달렸고, 오가 상단의 휘녕지단주 초용겸이 뛰어와서, 오세인이 다음 배로 도착한다는 말을 전했다. 유관필이 힘을 찾은 목소리로 크게 말했다.
"밥을 먹자. 배가 고프구나."
"아닙니다. 저도 잘 해낼 수 있습니다."
"그래, 환진이도 잘 해낼 수 있겠지. 최학사님은 무공이고 뭐고 없으니까."
"그래도 혹시라는 것이 있으니 제가 하는 게 좋겠습니다. 혈행을 다스리는 침을 다루는 분야는 제가 분명히 더 위니까요. 잘하는 사람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런데요. 유 숙부님. 뒤는 생각을 해 두신 겁니까?"
한쪽 구석에서 생각에 잠겨있던, 서문진이 깊은 생각 끝에 내 뱉은 말인듯, 조심스럽게 말했다. 큰 키에 마른 체형이라 더 길어 보이는 서문진이 작아보일 정도로 구부정한 자세였다. 유관필은 서문진이 말한 뒤라는 것이 무엇인지 가늠이 가질 않았다. 모를 땐 묻는 것이 최고다. 하지만 당예인이 한 발 빨랐다.
"서문 오라버니, 뒤가 뭐에요?"
"유 숙부님은 겪어보질 않아 모르겠다만, 공부하는 사람들의 성향이라면 잘 알고 있다. 뜻을 세우기까지가 오래 걸릴 뿐, 세워진 마음을 주저앉히는 사람을 난 보지 못했다. 숙부님께 관상명정을 부탁했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한 것이다. 죽음을 각오할 정도의 마음을 어떻게 꺾어서 살 이유를 줄 수 있을 지 몰라서."
순간, 유관필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명치에 정권이라도 맞은 듯, 하얗게 질린 얼굴에 입을 크게 벌리고 말라붙은 혀엔 침이 한 방울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꺼이꺼이 울기 시작했다. 그러다 갑자기 시대가 천재를 버렸구나라고 맨 하늘에 종주먹을 쥐기도 하다가, 다시 울기를 반복했다. 선생님이고, 숙부인 유관필의 그 같은 모습을 볼 수 없었던 일행들이 선실을 나와 뱃 머리에 모여 갑자기 변한 유관필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서문 오라버니, 어떻게 된 일이에요"
"나도 잘 모르겠다. 아마 유 숙부님은 그 최학사라는 분이 이미 돌아가셨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다."
"진아. 숙부님을 저렇게 그냥 둘 수는 없다. 저대로 두면 진원이 상할거다. 한아, 네 솜씨나 보자. 그리 자신 있다니 숙부님 앞에서도 그리 해 보란 말이다."
"오라버니는 지금이 그럴 때야. 선생님의 저런 모습은 처음 봐. 부모님이 돌아가신대도 저렇게는 못 울 거 같아."
"확실히 대단한 분이시다. 환진이가 들었다던 그 살아가면 살아진다는 말에서 내가 떠올린 것은 무위의 도였다. 저렇게 솔직할 수 있다니 대단하신 분이다. 강제로 수혈을 취하면 혹시나 지금 상태에서는 충격을 받을 수도 있다. 형아, 네게 수면환이 있지?"
"그렇지 않아도 이미 나오면서 풀어뒀다. 아마 이미 주무실거다."
배가 닿은 곳은 광주와의 경계인 휘녕이라는 작은 마을이었는데, 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오가상단의 사람들이었다. 선실에서 잠든 유관필을 당환진이 업고 배에서 내렸고, 일행을 기다리는 것은 전 한림학사 최항의 부고였다. 유관필의 예상이 맞았다. 상단의 지부에 도착해서 각자 행장을 풀었지만, 다들 제대로 쉴 수는 없었다. 저녁이 다 되어 일어난 유관필은 죽을 상을 하고 있었지만, 비교적 침착하게 최항의 비보를 받아들였다. 주위를 물린 유관필이 아주 천천히 먹을 갈기 시작했다. 구도자의 모습이었다. 우는 것도 무심한 것도 웃는 것도 아닌 얼굴, 모든 힘을 손가락 끝에 주고 있었지만, 벼루와 먹이 닿는 소리가 나지 않는 진중함, 오직 유관필 한 사람만이 그 순간 세상과 유리되어 혼자만이 오롯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먹을 가는 시간은 오래지 않았다. 행랑에서 붉게 나염된 긴 사각모양의 비단을 꺼낸 유관필이 품 속에 손을 넣어 비단보자기에 싼 붓을 꺼냈다.
"최 선배, 그리울 거요. 이 못난 사람의 글씨를 껴안고 영면하겠다니. 농이 지나치십니다."
유관필답지 않은 혼잣말이었다. 유관필의 눈이 매섭게 빛나고 있었다. 먹을 갈 때 힘을 주어 잡던 그 손이 아니었다. 가볍게 잡은 붓으로 유관필이 쓴 것은 열글자였다.
고금제일학사 최공지묘
한순간에 써내려간 힘이 없는 듯한 여인의 필체같은 유관필의 서체는 그저 아득할만큼 아름다웠다. 유관필이 비단천이 마르길 기다리지 못하고 허물어졌다. 가장 빠르게 다가선 사람은 역시 발빠른 당예인이었다. 유관필은 웃고 있었다.
다시 쓰러진 유관필을 자리에 뉘이고, 일행은 늦은 저녁식사를 시작했다. 서문진은 밥도 먹지 못한 채 그저 유관필이 쓴 글씨를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서문 오라버니. 역시 굉장했지요?"
"난 말이다. 저 사람을 평생 따르겠다. 붓대신 빗자루를 잡으라 해도 그렇게 할 것이다."
"오라버니. 그럼 앞으로의 일정이 어떻게 될까요?"
"바뀔 것이 있겠느냐? 관상명정을 표국을 통해 보내고, 우리는 천천히 경사를 향해 나아가면 될테니 조금은 더 여유가 있겠지만, 고인에게 참배는 해야 하니 우리가 가야 할 길은 같을 것이다. 난 그 최 학사라는 분을 보지 못한 것이 아쉽구나. 고금제일학사라니. 우리로 말하면 고금제일의 무인이나 마찬가지가 아니냐."
"예인아, 그런데, 넌 숙부님의 저런 모습을 보고 숙부님을 따르겠다 결심한 거냐?"
"아니요. 저도 저런 모습은 처음 보는 걸요. 하아, 그런데 선생님은 어떻게 최학사님이 돌아가신 것을 알았을까요? 어떻게 그렇게 슬퍼하시다가 바로 정신을 차리시고 저런 글씨를 쓰실 수 있으셨을까요?"
압도당한 다섯 명의 일행은 식사를 대충 마치고 각자에게 배정된 숙소에 들어갔다. 당환진이 남아 잠든 유관필을 지켰는데, 유관필이 일어난 것은 만 하루가 더 지나서여서, 그 사이 서문진과 당한이 교대로 잠든 유관필을 바라보며 유관필의 공간에서 각기 서너 시진에서 여섯 시진까지 시간을 보냈다.
유관필이 일어나 처음 본 얼굴은 자신의 글씨를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는 서문진의 옆얼굴이었다. 유관필이 일어나서 침상에서 몸을 일으킬 때까지도 이 키가 큰 청년은 자신이 쓴 글씨에 빠져 주위를 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유관필은 최항의 글을 처음 봤을 때의 자신을 서문진에게서 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세상은 이렇게 이어진다는 것을. 미숙한 자가 원숙해지고, 노련한 자가 지쳐서 쓰러지고, 또 다른 누군가가 그의 뜻을 이어가게 된다는 간단한 이치를 깨달았던 것이다. 최항의 뜻을 이어받은 것은 자신이다. 자신의 뜻을 이어갈 누군가는 언젠가 또 나타날 것이다.
걱정을 덜자 배가 고팠다. 서문진의 등을 툭하고 친 유관필이 자신의 약간 나온 배를 문지르며 말했다.
"배가 고프지는 않나?"
"선생님. 일어나셨습니까?"
서문진의 목소리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당예인이 제일 먼저 뛰어와 유관필에게 매달렸고, 오가 상단의 휘녕지단주 초용겸이 뛰어와서, 오세인이 다음 배로 도착한다는 말을 전했다. 유관필이 힘을 찾은 목소리로 크게 말했다.
"밥을 먹자. 배가 고프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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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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